10화. THE CALL (1)
“그러니까 네 말은, 전부 소문에 불과하다는 거네.”
[빙고.]
전화 너머로 녀석은 껄껄 웃었다.
[결국은 나도 잘 몰라.]
도영은 눈알을 굴렸다.
‘이딴 걸 정보국 소속이라고.’
[그리고 네가 거기 박혀 있느라 잘 모르는 모양인데, 요즘은 루아스 국장, 지구촌 뉴스라고 할 만큼 쇼킹한 이야기는 아니야. 주요 보직으로 진출하는 루아스들이 늘고 있거든. 사실 그럴 때도 됐지.]
“박애주의자 나셨군.”
어조에서 느껴지는 비아냥거림을 다른 식으로 해석한 모양인지 물었다.
[너 그 여자 루아스 상사랑 잘 지내는 거 아니었어? 루아스에 대한 편견을 정면으로 타파한다더니.]
“그쪽이 아니라, 국장. 묘하게 수상해.”
[그러니까 뭐가?]
“느낌, 이랄까.”
상대는 허허 웃었다.
[미친 소령님아. 고작 느낌 때문에 죽을 시간도 없는 나한테 심부름 시킨 거? 죽어, 새끼야. 너 육사까지 같이 나온 불알친구라고 내가 봐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
삑.
과로로 머리가 살짝 맛이 간 것 같은 친구의 전화를, 도영은 가볍게 끊었다.
돌아보자, 바람이 불어왔다.
도영은 이반 이바노프를 떠올렸다.
폭풍, 난파선, 잃어버린 도시, 수많은 해골들을 삼키고도 평온한 바다 같은 붉은 눈동자…….
엘리트 장교나 금융업자처럼 정장이 정확하게 맞는 남자와 은둔자는 확실히 어울리는 이미지가 아니었지만, 그 눈은 달랐다.
천년까진 모르겠지만 확실히 아주 오래된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
“분명히 뭔가 있는데…….”
도영은 난간에 양팔을 걸치고 핸드폰을 흔들며 중얼거렸다.
이쪽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저절로 발달하는 육감이 있다고 할까, 경험상 이런 종류의 감은 그냥 무시할 만한 게 아니었다.
도영과 연하는 서로 특수한 상황 때문에 동질감을 느끼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둘은 장교와 부사관, 인간과 뱀파이어라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출오자마자 금세 친해졌다.
어쨌든 그의 팀원이고, 여동생 같은 녀석이니까.
이래봬도 적잖이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여동생이라기에는 연하가 그보다 연상이지만, 맹해서 제 앞가림이나 제대로 할까 싶은 녀석이니까.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알 수 없는 개뼈다귀가 직접대게 둘 수는 없었다.
도영이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데, 저쪽에 있는 어떤 여자가 난간에 기대서서 그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여자는 웃었다. 그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 않는 미소였다.
이십대 중반쯤, 꽤 미인이었다.
‘일단 지금은…….’
도영은 몸을 일으키며 마주 웃었다.
* * *
연하는 체육관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역시 보급품인 군용 티셔츠에 트레이닝팬츠 차림이었다. 특히 오늘은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여서…….
‘더 사내애 같군.’
머리는 귀여운 포니테일이었지만.
가운데 씨름판처럼 펼쳐진 매트 위에서는 대원들이 삼삼오오 얽혀 훈련을 하고 있었다. 유리 너머로도 땀 냄새가 물씬했다.
연하는 대원들이 대화하는 옆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는데, 그 모습이 꼭 체육시간에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외톨이 학생 같았다.
하지만 지켜보고 있으려니 대원들이 간간이 말을 걸었다.
연하도 대답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룹에 섞였다가 또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와 혼자 앉아 있었다. 그게 어색하기보다 편한 것 같았다.
‘초반에는 적응하는데 약간 문제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하지만 이제는 대원들도 특별히 그녀를 대하는 데 어색한 점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인간처럼 생각하는 대원도 있는 것 같았다.
‘도영 드페흐.’
이반은 도영이 연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하는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연하도 거기 손이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편해 보였다.
삐익.
그때 조교가 호각을 울렸다. 그러자 매트 위에 있는 그룹이 내려가고, 연하를 포함한 다음 그룹이 올라갔다.
연하는 바지를 한 번 추켜올리더니 매트 가운데로 나갔다.
조교는 연하를 세워놓고 둥그렇게 둘러선 대원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조교가 손을 날리자 연하는 바로 몸을 젖혀 피했다.
“어떻습니까?”
이반은 돌아보았다. 부국장이 서 있었고, 뒤로는 그의 비서진과 김 중령 등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훈련 프로그램이 잘 짜여 있군요.”
부국장은 흐뭇하게 웃었다.
“저희 지부가 그리 크진 않아도 대루아스 CQC(Close Quarters Combat, 근접전투) 트레이닝프로그램을 초반에 도입한 지부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여러 무술을 접목한 초기 CQC를 개량해서 저희 지부만의 특징을 살렸죠.”
부국장은 혼자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지금은 여러 지부에서 연수를 오고 있습니다. 이게 전부 제가 재직 중에…….”
사람들은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또 시작이라는 얼굴이었다.
부국장이 뭐라고 떠들거나 말거나, 이반은 유리 너머를 보았다.
그곳에는 조교가 여전히 연하를 잡고 설명 중이었다. 연하를 한 번 밀고는 밀리지 않자 제 어깨를 두드리고는 연하를 어깨로 강하게 밀었다. 대원들에게 어깨를 쓰라고 말하듯.
연하는 반쯤 일부러 뒤로 나자빠졌다. 루아스 범인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그러고 보면 상사님 파트로네스가 상당히 강했나 봐요.”
이반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뱀파이어는 철저한 혈통주의라서 강한 파트로네스에게서 강한 클리엔테스가 태어난다던데.”
“그러게. 힘 하나는 장사로 유명하니까.”
매트 밖에 있는 대원 둘이 대화하고 있었다.
처음 말을 한 대원은 조금 마른 한국인이었고, 그보다 상급자인 것 같은 다른 대원은 전형적인 근육질에 동남아 혼혈이었다.
체육관 반대편 벽 쪽에 있는 그들은 쳐다보는 시선을 꿈에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때 그들 옆에 앉아 있는, 신입으로 보이는 앳된 대원이 고개를 돌렸다.
“파트로네스? 그게 뭐예요?”
두 대원은 황당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간첩이냐? 요즘 세상에 누가 그걸 몰라?”
신입은 머쓱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자기 나름대로 할 말은 있는 것 같았다.
“일반인들은 생각보다 뱀파이어를 볼 일이 별로 없거든요. 뱀파이어와 같은 팀이 된다는 것도 여기 와서 알았는걸요. 그전에는 뱀파이어로만 이뤄진 팀 같은 게 따로 있는 줄 알았죠.”
“거야 뭐…….”
대원 둘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동남아 혼혈 대원이 어깨를 으쓱이고 말하기 시작했다.
“루아스에게는 가족이 없으니까. 대신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라는 관계가 있지. 감염원의 공여자, 수혜자랄까. 하지만 단순한 기브앤테이크 관계라기보다는, 스승과 사제, 아니면 대부모와 대자녀 같은 건가봐. 이름도 ‘후원자와 피후원자’를 의미하는 고대 로마 제도에서 따왔다니까.”
마른 동료 대원이 덧붙였다.
“어쨌든 그쪽에선 가족처럼 가장 기본이 되는 단위라고 하더라고. 예전에는 인간의 눈에 띄지 않도록 크게 무리를 짓지 않았으니까.”
대원들은 매트 위에 있는 연하를 보았다.
이제 다른 대원과 대련 중인 연하는 상대 대원을 깔아뭉개고 있었다. 연하의 다리에 얼굴이 짓눌려 있는 대원은 간절하게 외쳤다.
“윽! 무, 무겁……!”
“너무해요. 숙녀한테 무겁다뇨.”
연하는 자세를 풀지 않고 말했다.
“이게 어디가 숙, 숙녀의 무게……! 배 터질 것 같아요!”
“안 터져요.”
멀리서 혼혈 대원이 동료 대원을 돌아보았다.
“근데 상사님 경우엔 파트로네스가 아니라 기증자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동료 대원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왜요? 아, 상사님은 ‘기증’받은 거여서요?”
“네?”
신입이 의문을 표했다. 그러자 두 대원은 덩치에 비해 의외로 다정한 편인지 별 내색하지 않고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요즘엔 흡혈이 금지돼 있잖아.”
“그렇죠.”
신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유일하게 흡혈이 허용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아, 이 환자는 정말 가망이 없구나, 할 때 마지막 치료 차원에서 감염시키는 거거든.”
“아, 이야기는 들어봤어요. 근데 거의 성공하는 경우가 없다면서요?”
“그렇지. 오죽하면 기증받아서 살아난 루아스를 만나면 행운이 온다는 도시전설까지 있겠어?”
동료 대원이 말했다.
“근데 그게 구분이 그렇게 엄격한가요? 특수한 치료라고 해도 결국 기증자, 그러니까 익명의 루아스에게 감염되는 거라던데…….”
“파트로네스가 직접 선택했기 때문에 클리엔테스가 가지는 의미는 자식을 뛰어넘는다나 봐. 오히려 그래서 의료 수혜자는 클리엔테스로 인정하지 않는다더라고. 수혜자를 스스로 선택한 게 아니라서. 사실 그쪽 입장에서는 의뢰를 받아 감염시킨 것뿐일 테니…… 왜 그렇게 봐?”
혼혈 대원이 한참 말하는데 신입이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자 물었다.
“보기와 다르게 잘 아시는 구나 싶어서요.”
“이쪽 일을 하다 보면 루아스를 자주 만나게 되니까. 너도 좀 공부해두는 게 좋을 거…… 근데 잠깐, 보기와 다르게? 너 그거 무슨 의미야, 이 자식?”
“아니, 그게…….”
신입이 우물거렸다. 동료 대원이 피식 웃으며 보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중얼거렸다.
“그런데 원래 기증받은 루아스는 일반 루아스에 비해 힘이 떨어진다고 하지 않았나?”
혼혈 대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기증자라는 것 자체가 강한 루아스는 굳이 할 이유가 없는 일이니까. 뭐가 아쉬워서 생면부지 인간에게 제 힘을 나눠주는 일을 하겠어? 돈 몇 푼이 아쉬운 떨거지들이나 하는…….”
“국장님?”
이반은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그를 의아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들의 청력으로는 이 유리 너머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김 중령이 옆을 보고 파리를 내쫓듯이 패드를 흔들었다.
“저리가, 인마.”
돌아보자, 유리 너머에 연하가 서 있었다. 이반은 조금 놀랐다.
연하는 손을 모아 유리에 입김을 불었다.
“어허, 이 녀석이?”
김 중령이 유리를 툭툭 쳤지만, 연하는 개의치 않고 입김이 서린 유리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안녀>
거기까지 썼는데 입김이 흐려져서 글씨가 사라졌다. 그러자 연하는 손으로 슥슥 문질러 지우고는 다시 입김을 불었다.
지워지지 않게 하려는지 하아아아아 꽤나 길게.
<안녕하>
하지만 이번에는 거기서 글씨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안녕하세요.’를 쓰려는 것 같았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자 연하는 코허리를 찡그렸다.
터프하기로 손꼽히는 일을 하지만 오히려 반쯤 세상과 격리된 특수한 공간에서 지내서인지 그녀는 직업이나 나이가 무색하게 천진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외모가 이렇다고 주변 사람들이 특별히 응석을 받아줬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팀에 어리광을 부리는 구성원이 있다면 제 목숨이 위험해지는 곳이니까.
‘원래 이런 성격이겠지.’
사실 그녀를 만나러 오기 전에는 걱정한 부분도 있었지만 기우였던 것 같아서, 이반은 조금 웃었다.
“안녕.”
글자를 쓰던 연하는 멈칫했다. 꼭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왜 그런 반응인지 궁금해지는데, 그때 뒤에서 도영이 부르는 소리에 연하는 거수경례하고는 뛰어갔다.
아이가 가버리는 게 왠지 모르게 아쉬웠다.
어쨌든 일하는 중이니, 이반도 몸을 돌렸다. 그런데 사람들이 연하와 똑같은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이반은 의아해졌다.
“가죠?”
“아, 네.”
사람들은 얼떨결에 대답했고, 이반은 무심히 앞서 갔다.
* * *
깜짝 놀랐다. 국장이 너무…… 그러니까 너무…… 따듯하게 웃어서? 근사하게 웃어서? 정말 그녀를 그렇게 보는 사람은 아버지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뭐 하냐, 너?”
자리로 돌아오자, 도영은 황당해하는 투로 물었다. 연하는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
“인사했어.”
“국장이 네 친구지, 아주.”
“아니, 동족인데.”
“동족은 무슨. 인간이 육상동물이고 루아스가 수중동물이라면 넌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개구리야. 개구리는 폐 호흡하는 거 몰라?”
연하는 어리둥절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게 무슨 소리냐고?”
도영은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냐는 표정이었다.
연하는 대답해 달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도영은 손짓했다. 이리 오라는 듯.
궁금해진 연하는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