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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짐승-9화 (9/104)

9화. 변하지 않던 일상이 변하는 순간

‘예전엔 치마도 자주 입었던 것 같은데.’

진짜 열아홉 살일 때 말이다.

무성 혹은 제3성에 가까운 군인으로 살면서 불가피한 변화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료들은 연애만 잘해서 결혼도 하고 애도 낳는데, 듣기로 연하는 이 나이 먹도록 이렇다 할 만한 연애 경험도 없는 것 같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뱀파이어라고 연애하고 결혼하지 말란 법은 없으니.’

그때 연하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런데 반말하지 않으셨어요?”

“아아…….”

이반은 말끝을 조금 끌었다.

“초면부터 말을 낮춘 것 같아서 오히려 미안하군요.”

“괜찮습니다. 한참 연장자이실 텐데.”

말하고 보니 아닌 것 같았는지 연하가 슬그머니 덧붙였다.

“한참은…… 아닌가?”

이반은 언뜻 웃었다. 묘한 귀염성이 있는 것 같았다.

“힘든 점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연하는 군인다운 태도로 바로 대답했다.

“편하게 말해도 괜찮습니다.”

“아뇨. 편하지 않아서요.”

이반은 눈을 깜빡였다. 자못 씩씩한 얼굴을 보니 자기가 한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 의식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고, 탁자를 짚었다. 그러자 벽에 화면이 떴다.

손을 움직여 파일을 열자, 태극기와 MCTC 깃발을 배경으로 정복을 입은 연하의 사진이 떴다.

아래로 업무 평가서가 이어졌다.

“업무 평가가 좋군요.”

연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면담이었나요?”

“아닙니다. 동족으로서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하는 거라고 해두죠, 여러모로.”

해두죠? 여러모로?

묘한 말이었다.

국장은 무릎에 양 팔꿈치를 댄 채 손을 모으고 화면을 보았다. 연하는 그를 지켜보면서 기다렸다.

‘그러고 보니 눈이 붉을 정도로 나이가 많은 뱀파이어를 만난 건 처음이네.’

아니, 나이가 많은 걸로 짐작되는─이라고 해야 할까?

다른 팀에 뱀파이어들이 있긴 하지만 다들 인간 나이 기준을 심하게 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붉은 눈이 그렇게 보기 흔한 건 아니었다.

여담이지만, 생물보다 유물 분류로 넣어야 할 것 같은 뱀파이어들은 생각보다 쉽게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뱀파이어는 모두 기백 년은 우습게 살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때 국장이 돌아보았다.

“루아스가 되기 전엔 직업으로 군인은 생각해 보지 않았을 텐데 잘 적응한 것 같더군요.”

연하는 처음 훈련소에 들어가던 날이 생각났다.

“맙소사, 누가 농담이라고 좀 해줘.”

“뱀파이어니까 힘은 있겠지. 하지만 저런 어린 여자애랑 같이 임무에 나가라고?”

“미친, 차라리 이 짓을 관두고 말지.”

침입자를 보는 것 같은 적대감 아니면 호기심 어린 시선들……. 그도 그럴 것이, 그때까지만 해도 대테러부대란 금녀의 구역이었으니까.

물론 뛰어난 육체 능력 덕에 대테러부대의 전투원이 된 여성 루아스가 그녀가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둘러멘 군장의 반이나 될까 한 어린 여자아이를 보고서는 동기들도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루아스로 적응 기간을 거치고 입소한 거여서 연하는 그때 이미 성인이었지만 말이다.

“걱정 마세요. 육체적으로 당신을 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인간은 없으니까요.”

훈련소에 들어가기 전 들은 그 말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눈앞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고양이를 봤을 때 제 상대가 안 된다고 아는 것과 비슷했다.

‘들으면 기분 나빠하겠지만.’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성 생활관에 혼자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첫날 밤 기분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연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무슨 이상한 말이라도 했는지 국장은 그녀를 빤히 보았다.

“만약 다른 수가 있었다면요?”

연하는 의아해졌다.

“다른 수라면…… 군인 말고 다른 게 될 수 있었다면 어땠을 것 같으냐는 의미인가요?”

“네.”

국장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런 걸 묻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요즘 세상에서 뱀파이어가 갈 길은 두 가지뿐이었으니까.

군인 아니면 범죄자.

선택지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딱히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변화를 받아들이고 나서는.

“그건…….”

그런데 마침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기억이 났다.

만약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면…….

연하는 국장을 보았다.

“그래도 달라질 건 없었을 것 같네요.”

“어째서죠?”

국장은 의외로워 하는 것 같았다.

“이 몸이 가장 필요한 곳은 여기였을 테니까요.”

국장은 숨을 내쉬고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대학도 가지 않았군요. 시간은 충분하니까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그녀가 하고 싶은 건 군대를 지휘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하가 뒷말을 잇지 않자 국장이 되물었다.

“그리고?”

연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루라도 빨리 준비된 상태가 되고 싶었거든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이런 이야기가 스스럼없이 나온 이유는 그가 동족이기 때문이라기보다,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여 주는 것 같아서일 것이다.

그때 유리 너머로 지나가던 김 중령이 황당해하는 얼굴로 그녀에게 무어라 말했다. 국장이 그 모습을 보고 들어오라는 듯 손짓했다.

자동문이 열리고 들어온 김 중령은 황당해하며 말했다.

“강 상사 너 뭐 해?”

지나가다가 그녀가 국장실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연하는 찻잔을 들어보였다.

“차 마셔요.”

“내가 지금 그걸 묻는…… 됐다.”

김 중령은 손짓했다.

“얼른 나와. 실례했습니다, 국장님.”

”괜찮습니다. 제가 청했습니다.”

국장이 말하자, 김 중령은 잠깐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외모가 이래서인지 다들 쉽게 방심하는데,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고문관스럽기가 이를 데 없는 녀석이거든요.”

“제가요?”

연하는 생전 처음 듣는 소리라는 반응이었다. 김 중령은 국장을 보고 ‘아시겠죠?’ 묻듯이 눈썹을 추켜들고는 국장실을 나갔다.

정적이 감돌았다. 연하는 찻잔을 감싼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차는 이미 다 마셨고, 할 말은 없었다.

사실 어제 막 알게 된 사람, 그것도 까마득한 상급자와 대화할 만한 주제가 특별히 있을 리 없었다.

의무대에서는 거의 잠결이었고.

눈이 마주치자, 국장은 조금 웃었다.

“가봐도 좋습니다.”

연하는 고개를 꾸벅이고 일어났다.

“차 감사했습니다.”

찻잔을 치우려고 하자 국장이 만류했다.

“놔두세요.”

“그럼…….”

연하가 손을 떼자, 국장이 찻잔을 들고 일어났다.

키는 큰 편이지만, 팔뚝이 그녀 허리만 한 대원들에 비하자면 그는 오히려 슬림해 보이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나게 되는 위압감이 있었다.

국장은 그런 그녀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꼭 전부 알고 있는 것처럼.

“또 마시러 오세요, 언제든지.”

연하는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국장실을 나왔다. 잠깐 서 있다가,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모퉁이를 돌 때쯤 반대편에서 오는 대원과 마주쳤다.

“퇴근하세요?”

“네.”

“푹 쉬세요. 수고 많으셨어요.”

연하는 그에게 인사하고 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리고 멈칫했다.

출근하고, 출동하고, 훈련하고, 가끔 보고서를 쓰고 퇴근하는, 십여 년 간 변하지 않은 일상이었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했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뭔가 들썩이는 기분.

‘하긴.’

연하는 생각했다.

‘뱀파이어인 국장은 처음이니까. 얼마나 있을진 모르겠지만…….’

크게 경력에 도움이 되거나 오래 붙어 있을 만큼 메리트가 있는 지부가 아니어서 말이다.

연하는 어깨를 으쓱이고 복도를 걸어갔다.

* * *

“알아봤어?”

[응. 꽤 오래 산 것 같아.]

암호화된 전화 너머 상대는 말했다.

“그건 알아. 러시아 제국 제15…….”

도영이 말하려는데, 상대가 말을 끊었다.

[아니, 더.]

“더?”

도영은 한쪽 눈썹을 추켜들었다.

[별명이 ‘은둔자 이반’이라나 봐. 그런데 음,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상대는 조금 주저했다.

[저기 위쪽 불곰국에 노브고로드 공화국이 성립될 때 이미 그 지방에 ‘은둔자 이반’이란 존재가 있었다는 소문이 있더라고.]

도영은 헛웃음을 토해냈다. 차가운 공기에 하얀 입김이 퍼져 나갔다.

“노브고로드라면 천 살은 됐다는 말이잖아?”

기가 막혔다.

“지금 농담해? 진짜 무슨 외계인도 아니고……. 뱀파이어들 사이에서도 열한 번째 환갑을 맞으려면 하늘이 보살펴야 한다는 소리가 있는 거 몰라?”

[소문에는 기원전에 태어난 뱀파이어도 있다던데?]

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그냥 유니콘이고.”

[하긴, 그래봤자 원래 인간인데 기원전은 좀 오버야.]

“백보 양보해서 천 살이나 먹었다고 해도 그런 뱀파이어가 위에서 까라면 까는 군인 따위를 하겠어?”

[아, 거, 자식, 그냥 그런 소문이 있다고. 이반이란 이름은 워낙 흔하니까 동명이인이거나 대물림 된 별명이겠지. 오죽하면 러시아군이 쳐들어올 때 ‘이반 놈들이 쳐들어온다’고 하겠어?]

도영은 멀리 펼쳐진 서울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깨질듯이 맑은 겨울의 푸른 하늘 아래 서울은 항상 그렇듯 분주하고, 하나의 생물처럼 살아 있었다.

처음 전출 올 때만 해도 지나치게 거대한 도시가 마치 다리를 내뻗은 문어괴물 크라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멋지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OF-6 계급을 부여받은 근거는 뭐래? 여기로 치면 준장인데.”

[기밀. 접근할 수 없었어.]

도영은 인상을 썼다.

“기밀? 루아스에게 계급을 부여하는 일은 논란이 많기 때문에 더 투명하게 처리하는 게 규칙…….”

이번에는 전화 상대가 헛웃음을 토해냈다.

[교과서 읽냐? 너희 팀 부지휘관이 너 무시 안 하디?]

“완전 반대거든? 그 녀석 곰이 저리가라 할 정도로 둔해서…….”

[곰은 원래 엄청 기민한 동물 아냐?]

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보면 알아.”

그 순간 머리 위로 전투기가 굉음을 내며 날아갔다. 도영은 순식간에 하늘을 가르고 사라지는 전투기를 시선으로 쫓다가 말했다.

“아무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기밀이라는 거야?”

[전부. 그런데 MCTC의 창설에 관여했을지도 몰라. 아마도.]

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도는 뭐야?”

[들어봐. 사실 뱀파이어 군인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개념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아서 MCTC가 창설되기까지 좀 난항을 겪었잖아.]

“그랬지.”

[명예훈장까지 받은 우리 설립자 입장이 말도 아니었지. 뱀파이어를 군인으로 만든다, 확실히 그건 발칙한 발상이었으니까.]

어쩌면 미친 발상이기도 했다.

아니, 분명 그랬겠지만, 생각해 보면 무력을 지녔으면서도 통제가 가능한 존재란 확실히 군인이었다.

물론 뱀파이어들은 그들이 껍질을 벗고 나온 하등생물 정도로 인식하는 인류의 군대에 입대한다는 생각에, 인류는 흡혈귀에게 공권력을 부여한다는 생각에 알레르기를 일으켰다.

따라서 처음 아이디어를 입안한 자의 영웅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MCTC의 첫 벽돌조차 놓기 쉽지 않았다.

[그때 우리 설립자 편에서 도와줬다는 막후의 인물에 대한 소문이 원래 있었거든. 그 사람이 이반이라고 불렸다는 이야기가 있어. 동일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아마도, 라는 거야.]

“도와줬다니, 어떻게?”

[제노아틱스.]

이 맥락에서 등장할 줄 몰랐던 이름에 도영은 눈썹을 추켜들었다.

[예수가 회사를 세웠으면 그 이름이 제노아틱스일 거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 제노아틱스가 하이마를 개발하지 않았으면 종전은 없었을 테니까.]

그 공로로 영리단체인 제노아틱스가 몇 년 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건 제노아틱스가 평화에 기여한 바를 생각하면 과한 일이 아니었다.

[은둔자 이반이 거기 주주라는 이야기가 있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제노아틱스 주주가 왜 군인 같은 걸 하겠어? 떼돈을 벌 텐데.”

[그러게 말이야.]

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전부 소문에 불과하다는 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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