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기사단
붉은 눈이 처음으로 낮게 가라앉았다. 리웨이는 흠칫했다.
“그래서 허가를 받으라고 하지 않습니까?”
리웨이는 휙 연하를 돌아보았다.
“강 상사. 뭐라고 좀 해봐!”
뭐라고 하라니,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나 여태 불법적으로 수집당한 거야?”
“뭐? 이게……!”
리웨이는 명문대를 졸업한 똑똑한 머리로 연하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았다. 버릴 패는 주저 않고 버리고, 다시 이반을 보았다.
“강 상사는 나라가 인정하는 훌륭한 성인입니다. 이렇게 칠푼이 같은 성인이라고 해도 말이죠.”
“내가 왜 칠푼이…….”
그 대목에서 연하는 반박했지만, 깨끗하게 무시당했다.
“본인의 의지와 허락이 있는 경우에는 아무리 국장님이라 하셔도 강제할 권한이 없죠.”
“그건 유효한 지적이군요.”
국장은 순순히 인정했다. 리웨이는 이겼다 싶어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었다.
“그래서.”
이반은 연하를 보았다.
“강 상사는 공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잘못된 관습을 묵인합니까?”
“뭐예요? 말을 왜 그렇게…….”
리웨이가 황당해하는데, 연하가 계몽된 중세시대 농부인 양 손을 들고는 말했다.
“묵인하지 않습니다.”
이반은 여봐란 듯이 리웨이를 보았다.
“그런다는군요.”
리웨이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겨우 분노를 참는 중인 것 같았다.
“언제는 다른 의사는 싫다며?”
하지만 연하는 당당했다.
“다른 의사는 싫지만, 잘못된 관습은 묵인하면 안 되는 거야.”
리웨이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네가 언제부터 남의 말을 이렇게 잘 따랐다고?"
목적을 달성한 이반은 의무대를 나서려다가 돌아보았다.
“참, 파웰 대위.”
리웨이는 결코 곱지 않은 눈으로 돌아보았다. 역시 국장은 간지럽지도 않은 얼굴이었지만.
“MCTC라는 공식적인 호칭을 쓰시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기사단이라니, 그런 호사가들이 쓰는 멸칭을.”
리웨이는 이건 지지 않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섰다.
“이제 거의 별칭화 되지 않았던가요? 그리고 왜, 틀린 말도 아니잖아요. 못된 악당으로부터 인류를 보호해 주는 영웅 루아스들께서 활약하는 곳인 걸요.”
리웨이는 한껏 비꼬았다.
“뭐, 대개 기사라는 칭호가 낯설지 않은 시대에서 오셨을 텐데. 다국 대테러부대 연합 같은 멋없는 이름보다는 훨씬 낭만적이지 않나요?”
다국 대테러부대 연합(Multilateral Counter-Terror Coalition). 통칭 MCTC. 별칭 ‘기사단.’
인류와 손잡은 루아스들이 일하는 곳으로, 연하의 직장이기도 했다.
학생 때 받은 적성검사가 무색할 정도로 선택할 자유가 없었던 직장이긴 하지만, 이래봬도 국제법에 의거한 정부기관이었다.
즉, 연하는 공무원이었다. 따지고 보면.
‘선생님이 되고 싶었으니 반은 꿈을 이룬 게 맞나.’
뜬금없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국장이 훗 웃었다.
“차라리 십자군이 낭만적이겠군요.”
‘졌네, 졌어.’
연하가 흘긋 보니, 리웨이는 거의 게거품을 물기 직전이었다. 그런 상황에 손쉬운 희생양은 바로…….
리웨이는 서슬 퍼렇게 연하를 노려보았다. 연하는 움찔했다.
“너 이런 배신자!”
“아니, 잘못된 관습은…….”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랬어!”
“리웨이가 날 언제 거두…….”
연하는 늘 그렇듯 팩트를 이야기하려 했을 뿐이지만, 이 상황에선 별로 슬기로운 대처가 아니라는 점을 몰랐다.
둘을 남겨놓고, 이반은 만족한 듯 의무대를 나섰다. 문밖에서 기다리는 렉스가 뒤따르며 말했다.
“괜찮겠습니까?”
“인간한테 당할 리 없잖아.”
“저쪽은 인간이라고 해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군요.”
그건 인정하는 바여서, 이반은 조금 웃었다. 그때 복도 맞은편에서 온 대원 하나가 인사하고 지나갔다.
대원은 의무대 안을 들여다보고 말했다.
“상사님.”
이반은 멀리서 그를 돌아보았다.
“네!”
의무대 안에서 연하가 반갑게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원은 말했다.
“소령님께서 전해 드리래요. ‘일 안 하냐? 농땡이 피울래?’”
그러자 리웨이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 가, 인마!”
“일하러 가야지!”
그러고는 연하가 의무대 안에서 도망치듯 뛰어나왔다.
연하는 아직 복도에 있는 이반을 보고 멈추더니 방금 전에 헤어져 놓고 버릇처럼 거수경례했다. 그리고 같이 복도를 걸어갔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이반은 군용 티셔츠에 회색 트레이닝팬츠 차림을 한 연하를 보았다. 아까는 거의 잠결이었는지 그녀는 조금 어색해하는 것 같았다.
“아, 어디로 가세요?”
그러다 겨우 대화 주제를 생각해 냈는지 물었다. 이반은 웃었다.
“강 상사와 같은 곳이겠죠.”
* * *
“마지막으로 ERU 3팀입니다. 중대장이자 팀 리더인 도영 드페흐 소령.”
남색 군용 티셔츠에 전투복 바지를 입은 도영은 가볍게 거수경례했다.
“팀 부지휘관에 강연하 상사입니다.”
그 옆에 서 있는 연하도 거수경례했다.
“중대원들로는 왼쪽부터 한규연 중사, 다니엘 임 하사…….”
대원들도 차례대로 거수경례했다.
서울 지부 소속 ERU 3팀은 리더까지 포함해 총 12명. 실제 규모는 소대지만 행하는 임무의 특성상 중대 취급을 받아 지휘관은 중대장인 소령이었다.
모든 팀원을 소개한 대대장 김 중령은 앞에 서 있는 국장을 보고 덧붙였다.
“그리고 이미 아시겠지만, 여기 강 상사는 현재 저희 지부에 있는 몇 안 되는 루아스 중 하나입니다.”
국장의 시선이 연하에게 멈추었다.
아닌 체하지만 다른 대원들은 둘을 힐끔거렸다. 소개를 받는 국장 역시 루아스라는 이례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여도 나이는 제법 많습니다.”
“여성에게 나이로 뭐라고 하는 건 실례입니다.”
김 중령이 말하자, 도영이 바로 말대꾸했다. 정작 연하는 별생각이 없는 얼굴이었지만.
김 중령은 눈알을 한 번 굴리고 국장에게 말했다.
“이 건방진 소령나부랭이는 2년 전에 파리 지부에서 전출 온 낙하산입니다.”
“제가 왜 낙하산입니까?”
도영은 뚱하게 말했다. 김 중령은 기가 찬다는 얼굴이었다.
“너 같은 녀석이 생시르(프랑스의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야. 누가 뒤를 봐준 게 아니고서야.”
김 중령은 다시 국장을 보고 파일로 대원들을 훑었다.
“어쨌든 이게 저희 서울 지부의 면면입니다. 어리바리한 녀석들이라 앞으로 고생하실 것 같군요.”
말은 그렇게 해도 대원들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국장은 웃었다.
“이반 이바노프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대원들은 한마음으로 생각했다. 여직원들이 술렁이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고.
“그런데 이쪽은…….”
김 중령은 국장 뒤쪽을 보았다. 국장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제 개인 경호원입니다.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해도…….
국장 뒤에 있는 무표정한 얼굴을 마주한 사람들은 모두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일단 정부기관 청사에 있다고는 보기 힘든 사복 차림에-그것도 상당히 묘한- 아름답지만 미동도 없는 서늘한 얼굴, 국장의 개인 경호원이라는 기묘한 신분.
뭔가 이상한 점투성이지만, 상부에서 허가한 일이라는 것 같았다.
“그럼 일단…….”
김 중령은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밀린 결재부터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죠.”
국장과 그의 전속부관 이 대위, 경호원이라는 정체불명의 금발 루아스, 김 중령은 국장실 쪽으로 사라졌다.
대원들은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한 사람씩 말했다.
“드디어 뱀파이어다운 뱀파이어를 보는 느낌이네.”
“그러게요. 우리가 늘 보는 뱀파이어라고는…….”
대원들은 동시에 연하를 돌아보았다. 책상에 앉은 연하는 서랍에 숨겨둔 루챠챠를 꺼내 마시고 있었다.
연하는 자신에게 모이는 시선을 느끼고는 물었다.
“왜요?”
대원들은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다시 앞을 보았다.
“러시아 제국의 장교였다지?”
“제15용기병 연대장으로 대령 제대했다던데. OF-6 코드를 받은 근거도 그거였고.”
MCTC에 입대한 루아스들은 예전 군 복무 여부, 업적, 군공 등을 계산해서 준하는 계급을 부여받는 것이 상례였다.
물론 군 경험이 없다면, 연하가 그랬듯이 아예 밑바닥부터 시작해야했다.
“모르죠. 어디서 뭘 하다 러시아 제국까지 흘러들어갔는지.”
모두가 쳐다보자, 책상에 걸터앉아 있는 도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잖아요? 누가 확인해 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러시아 제국 정도면 단편적인 자료라도 남아 있긴 할 텐데…… 뭐, 상사 좋아하는 경우는 없다지만 우리 소령님, 국장한테 벌써 안 좋은 감정이 생긴 겁니까?”
“안 좋은 감정은요.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거죠. 그리고 어쨌든 옛날에는 흡혈을 했다는 의미잖아요.”
도영은 고갯짓으로 연하를 가리켰다.
“이 녀석처럼 하이마가 개발되고 나서 루아스가 된 게 아니라면.”
대원들은 다시 연하를 보았다. 연하는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뭐, 그건…….”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사실 그건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두드러지는 범죄 기록이나 정황만 없다면 덮어두고 가는 분위기였다.
특히 뱀파이어가 된 지 오래됐을수록 확인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뱀파이어들이 고위급으로 진입하는 일이 어려웠던 건데, 시기가 무르익었는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도영은 한숨을 쉬고 일어났다.
“일합시다.”
사람들은 흩어졌다. 사무실은 금세 일상적인 공기를 되찾았다.
연하는 제 손을 보았다. 왜인지 거기 있는 줄도 몰랐던 흉터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 * *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연하는 퇴근하지 않고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한 평생 지나다닐 일이 없는 국장실 근처에서.
지나가는 척 슬쩍 불투명한 국장실 유리 안을 들여다보았다.
음각 팻말이 걸린 문 너머는 조용했다. 사무실에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좀 오래 들여다보고 있었는지,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강 상사?”
“아.”
연하는 돌아보았다. 국장은 혼자였다.
“퇴근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하려고…….”
그는 다가오더니 웃으며 물었다.
“커피 한 잔 하겠습니까?”
커피는 마시지 않지만, 연하는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네.”
국장이 문 옆에 붙은 패널에 손을 대자 국장실 문이 열렸다. 하지만 그가 들어가지 않고 연하를 내려다보기에, 그녀는 덩달아 잠깐 쳐다보다가야 정신을 차렸다.
“네?”
“안 들어갑니까?”
“아, 네.”
상급자가 하급자 뒤에 들어가는 일은 들어본 적 없지만, 어쨌든 연하는 국장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자동으로 불투명한 벽이 투명한 유리로 변하면서 건너 풍경을 비추었다.
국장이 부임한 첫날이지만 이미 책상에 이런저런 자료와 파일들이 쌓여 있었다.
“앉으세요.”
연하는 얌전히 소파 한쪽에 앉았다. 이반은 커피를 내리려다 멈칫하고 연하를 돌아보았다.
“커피가 다 떨어졌군요. 녹차 괜찮습니까?”
이반은 뒤늦게 그녀가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연하는 오히려 잘됐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잠깐 기다리고 있으니 그가 찻잔을 건네주고 앞에 앉았다.
“감사합니다.”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네.”
연하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조심히 차를 홀짝였다.
이반은 그녀를 보았다. 규정 복장이 아니긴 하지만, 이 지부는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한 가벼운 차림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는 분위기 같았다.
‘그런데 어제도 생각했지만…….’
머리만 길었다 뿐이지, 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이게 여자애인지 사내애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