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7화 (7/104)

7화. THE MAN (6)

갑자기 어제 장면이 떠올랐다. 풀어헤쳐진 와이셔츠, 몸을 타고 전해지는 가벼운 진동, 웃는 남자의 얼굴─

어쩐지 말문이 막혔다.

딱히 뭘 한 것도 아닌데.

“피 마시고, 아버지 아니라 하고.”

결국, 에둘러 말하고 말았다.

“그건 무슨 암호야?”

“몰라.”

연하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천장을 보다가, 몸을 돌려 베개 아래 양손을 넣었다.

“다른 의사는 싫어.”

리웨이는 찡그리고 웃었다.

“어디서 애교야? 나보다 언니면서.”

연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한 살밖에 차이 안 나잖아.”

“그래, 좋겠다. 누구는 하루하루 늘어가는 눈가의 주름을 걱정하고 있는데, 누구는 십대의 탱탱한 몸을 유지하고 있으니.”

리웨이는 중국인과 미국인 혼혈이었는데, 도영처럼 동양 쪽 피가 좀 더 발현돼서 동안인 편이었다.

하지만 뮬란 같은 긴 생머리와 붉은 립스틱을 포기하지 않는 진한 화장 때문에 나이를 잘 알 수 없는 묘한 느낌을 풍겼다.

‘화장만 저렇게 안 해도 좀 더 어려 보일 텐데.’

그래도 세월은 속일 수는 없어서, 자세히 보면 슬슬 눈가의 주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리웨이가 이 지부로 전출 온 것도 벌써 4년 전이니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바로 그렇다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리웨이는 화낼 게 분명하니까.’

연하는 말을 삼키고 대신 말했다.

“리웨이도 뱀파이어 할래?”

“제안은 고맙지만 변이를 이길 자신이 없거든. 마취 없이 심장 수술을 받는 것 같다던데. 실제로 쇼크사 하는 경우가 많고. 정말 그렇게 고통스러워?”

연하는 돌아누워 천장을 보았다.

그녀는 뱀파이어로 눈을 뜨는 순간부터 많은 질문을 받았다. 사람들은 인간이 뱀파이어로 변이되는 과정의 사소한 디테일까지도 연인의 과거처럼 알고 싶어 했다.

‘그 열망 어린 눈동자들을 보면 머릿속을 긁어서 기억의 부스러기들이라도 꺼내주고 싶지만.’

연하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늘 정해져 있었다.

“잘 기억 안 나. 정신이 드니까 끝나 있어서.”

눈을 뜨니, 병실이었다. 그래서 악몽을 꿨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렴풋이 병실이 너무 크고 좋아 보인다고 느꼈다.

‘엄마, 아빠한테 어디서 이런 돈이 있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낯선 사람이 병실로 들어왔다.

“깨어나셨군요.”

어리둥절해하는 연하에게 그 사람은 부드러운 어조로 그간의 일을 설명해 주었다.

그녀가 감염된 것, 그래서 한 번 심장이 멈췄던 것, 나흘간 온몸이 재조직되는 변이를 겪은 것, 하지만 마침내 감염을 이겨내고 삶으로 돌아온 것…….

그 사람의 차분한 어조에 연하는 오히려 현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사실 지금도 인간일 때와 차이를 잘 모르겠는걸. 변이 과정을 기억하지 못해서 그런지.’

어느 날 갑자기 더는 인간이 아니라고 해봤자, 그냥 좀 더 빨리 달리고 높이 뛰고 금방 상처가 아물게 되었다고 느껴질 뿐이었다.

흡혈해야 했다면 좀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아니고.

그런데 갑자기 ‘용감한 아가씨’라는 말이 생각났다. 들을 때는 비웃었는데, 갑자기…….

어, 좀 수줍어지는 이유는 뭔지.

“그 처음 보는 표정은 뭐야? 무슨 생각 하니?”

연하는 옆으로 돌아누워 눈을 감았다.

“몰라.”

어제 그렇게 푹 잤는데도 졸렸다. 피곤하고 힘들어서 졸린 게 아니라 뭔가 포만감이 들어서─

“채혈하고 자.”

“응.”

물건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리웨이가 다가왔다. 연하는 천장을 보았다.

뱀파이어의 피부는 어지간하면 총알로도 뚫리지 않았지만 ‘결’이 있어서 방향을 잘 찾으면 일반 도구들도 들어갔다.

그래서 채혈할 수 있었는데, 요즘에는 그냥 뱀파이어의 피부를 뚫는 강도를 지닌 바늘이나 도구도 개발 중이라고 들은 것 같았다.

작업을 끝낸 리웨이는 혈액이 관을 타고 나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연하를 보았다.

너무 익숙한 과정이라 그런지, 연하는 그새 잠든 것 같았다.

하얗고 말간 것이 꼭 갓 젖을 뗀 새끼고양이 같은 얼굴이었다. 약간 벌린 입술 사이로 고른 숨결이 느껴졌다.

따듯했다.

리웨이는 어느새 연하에게 지나칠 만큼 가까이 다가간 상태였다.

입술이 지척이었다. 거의 맞닿을 것처럼…….

리웨이는 갑자기 고개를 들고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이게 어딜 봐서 서른한 살이냐.”

* * *

몸에서 빠져나가는 잠기운이 발끝을 간질였다. 간만에 깊이 잔 것 같았다. 연하는 기분 좋은 숨을 내쉬며 가물가물한 눈을 떴다.

정장 상의 없이 와이셔츠 차림인 국장이 무언가를 보면서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연하는 나른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상한 일이지만, 국장이 있는 풍경에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무언가에 열중하는 옆모습이, 남자가 멋있어 보이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연하는 눈을 깜빡였다.

‘잠깐. 진짜인가?’

“국장님?”

“일어났어?”

국장은 연하를 보았다.

반가워하는 얼굴에 멍해지길 잠시, 연하는 물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국장은 그가 당연히 올 곳을 왔다는 듯 당당하게 서서 차트 패드를 들고 있었다. 리웨이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제 팔에 꽂았던 바늘은 제거되어 있었다.

“왔는데 자고 있어서.”

국장은 패드를 내려놓고 다가왔다. 고작 열 걸음이나 될까 싶은 거리인데 순간 조명이 쏟아지는 런웨이인 줄 알았다.

연하는 갓 일어나 부스스한 상태로 이불을 휘감고 멍하니 보았다.

“몸은 괜찮아?”

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 좀 보자.”

너무 당당한 손길이라 얼결에 어깨를 내주고 말았다. 서늘한 손이 티를 젖히고 거의 흐릿한 어깨 흉터를 훑고 지나갔다. 순간 등줄기가 쭈뼛 섰다.

“거의 다 나았구나.”

그러고는 국장이 침대 옆 스툴에 앉아서 시선의 높이가 같아졌다.

“국장님도 괜찮으세요?”

“뭐가?”

연하는 그의 목덜미를 가리켰다.

“괜찮아. 볼래?”

국장은 와이셔츠의 칼라를 젖혀서 목덜미를 보여주었다.

하얀 대리석 같은 목덜미에는 아무 자국도 없었다.

본의 아니게 낸 자국이었지만 덜 미안해해도 될까 싶은 찰나, 그제야 연하는 자신이 그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먹잇감을 보듯.

말없는 응시에 보통 사람이라면 당황해할 테지만, 그는 아니었다.

역시 그녀를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마주 보고 있었다.

‘신기한 사람.’

연하는 갑자기, 자신이 그의 이름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평범한 질문인데, 그는 기분 좋은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웃었다.

‘잘 웃는 사람이네. 흡혈귀답지 않게.’

“이반 이바노프.”

이바노프라면…… 러시아인?

하지만 국장은 러시아인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아무리 러시아가 넓어서 온갖 얼굴이 다 있다고는 하지만, 전형적인 코카서스 러시아인 같진 않았다.

오히려 현대적인 느낌이 나는 그리스 조각상 같았다.

“러시아 사람처럼 안 보여요.”

“그럼 어디 사람 같은데?”

“그건…….”

정답을 찾아 그를 뜯어보았다.

그래도 그가 어디 사람일지 잘 구별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잘생긴 얼굴이란 이런 얼굴을 이야기하는 거겠지.’

뱀파이어들 중에는 소위 외모가 좀 된다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었다.

리웨이가 말하기로는 재능이나 성품, 타인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외모 같은 것도 생존하는 데 유리한 조건이라서 병원체가 선택 어쩌고 했던 것 같았다.

그런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국장이 개중에서도 두드러지는 편이라는 건 알았다.

어지간한 남자들도 한 걸음 비켜나 줄 것처럼 남자다운데, 어떤 각도로 보면 청년 같은 느낌을 풍기기도 했다.

묘한 사람이었다.

“그건 잘 모르겠지만…… 러시아 사람한테도 이렇게 검은 머리가 있어요?”

연하는 충동적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만져 보았다.

부드러웠다.

이반은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기듯이 긴 다리를 꼬고 앉아, 턱을 괴고는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있어. 넓은 나라니까.”

“러시아 하면 춥다는 것밖에 생각나지 않는데.”

그를 보느라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고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춥지.”

“가본 적이 없어서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어요.”

“아주 추워.”

“얼마나요?”

이렇게 실없는 대화를 하고 있으니 불과 어제 아침만 해도 모르던 사람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름도 방금 전에야 알게 된 사람인데.

이반은 제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을 잡아 내렸다.

“글쎄, 이 손가락이 얼어버릴 정도?”

그의 손에 잡힌 제 손이 아이의 것 같았다.

제 손을 빤히 보고 있었는지, 그도 손을 보았다.

“손이 작구나.”

“안 작아요. 국장님이 큰 거지.”

“그래?”

그래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유심히 보았다. 그러다가 손목으로 내려가는 부분에 주름 바로 아래 옅은 흉터를 짚었다.

“흉터가 있네.”

“그러네요. 언제 생겼지?”

제 손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는 일이 별로 없으니까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몸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구나.”

“어차피 잘 부서지지 않는 게 장점인 몸이잖아요.”

연하는 흉터가 언제 생겼을까 생각하느라 이반이 제 정수리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대충 대답했다.

그가 갑자기 잡은 손을 뒤로 뺐다. 당연히 팔이 끌려가며 쭉 당겨졌다.

‘어…….’

얼떨결에 앞으로 끌려간 연하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복부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성큼 다가온 남자를 흠칫 올려다보았다.

“그러라고 준 게 아니잖아.”

빛을 등져 음영이 진 얼굴이 진지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천천히 소용돌이쳤다.

“네?”

잠깐 멍해져 그를 보느라 연하는 뒤늦게 말을 이해했다.

“누가요?”

그는 웃었다.

“부모님?”

지잉.

그때 자동 미닫이문이 열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연하는 돌아보았다. 열린 문 너머에 금발 루아스가 혼자 서 있고, 리웨이가 그를 경계하는 표정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오늘 그는 제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농장 일꾼들이 입을 법한 체크무늬 남방에 무난한 일자 청바지, 운동화 차림이었다.

‘제복을 입고 있을 때랑 너무 달라서 못 알아볼 뻔했네.’

장발의 금발에 붉은 눈이라는 엄청난 특징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리웨이는 그에게 눈을 흘기면서 돌아보고, 멈칫했다. 그리고 앞에 펼쳐진 풍경이 해독되지 않는 듯 불가해한 눈으로 보았다.

“국장님.”

그러다 겨우 가장 명백한 암호 하나를 해독해 낸 것처럼 말했다.

얼떨떨한 시선이 맞잡은 두 사람의 손에 멈추었다. 연하는 리웨이의 표정이 그렇게 일그러지는 건 처음 보았다.

“뭐 하세요?”

이반은 태연히 연하의 손을 놓고 일어났다.

연하는 아쉬웠지만 다시 손을 잡아달라고 할 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강 상사의 차트를 봤는데.”

이반은 아까 책상에 내려놓았던 패드를 들었다.

“불필요한 검사와 채혈이 많더군요.”

리웨이는 그걸 걸고넘어질 거라고 생각 못했는지 황당한 얼굴이었다.

“그건 모두 충분히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앞으로 모든 검사와 채혈 보고서를 작성해서 제출하세요. 제 허가를 받지 않은 검사와 채혈은 전부 금지합니다.”

리웨이는 그제야 상황파악이 됐는지 화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전 오랫동안 강 상사의 건강을 책임져 온 담당의입니다. 국장님께서 무슨 권한으로…….”

“지금 파웰 대위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서울 지부 총책임자의 권한으로 강연하 상사에 대한 모든 불법적인 수집을 금지합니다.”

그 말에 리웨이는 말문이 막힌 듯 노려보았지만, 이반은 간지럽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바로 어제 소령에게 인실좆이라 하였더니, 이렇게 당할 줄은.

“루아스들은 기사단에 정보를 제공하는 데 동의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걸 잊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붉은 눈이 처음으로 낮게 가라앉았다. 리웨이는 흠칫했다.

“그래서 허가를 받으라고 하지 않습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