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6화 (6/104)

6화. THE MAN (5)

연하는 안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모두가 그 입을 주시했다.

* * *

“물론 내가 널 낳진 않았다만.”

“네, 임신하실 수 있을 것 같진 않아요.”

머릿속에 떠오른 그대로 말이 나왔다.

‘소령님이 생각 좀 하고 말하라고 했는데.’

남자는 큭 웃었다.

그게 다인 줄 알았으나, 생각해 보니 웃겼던지 손에 얼굴을 묻고 좀 더 웃었다. 그리고 즐거움이 다 가시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아, 이건 좀 웃기군.”

“즐거움을 드릴 수 있었다니 영광이에요.”

또 아무 말 대잔치였다.

“대체 여기서 뭘 배우는 거냐?”

“글쎄요, 딱히……. 근데 제 아버지라고요?”

한순간 12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환생이라도 한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이가 맞지 않잖아.’

남자는 얼추 보아도 삼십대 초중반이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라 밝힌 태도가 하도 당당하여, 연하는 이산가족이 상봉하게 된 현장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그를 포옹이라도 해야 할지 헷갈렸다.

남자를 보니 웬만하면 그러고 싶지 않았다. 도저히 아버지라고 생각할 비주얼이 아니었다.

남자는 피식 웃고 일어났다.

“표정에 생각이 다 드러나는구나.”

연하는 의아했다.

‘소령님은 늘 반대로 이야기했는데…….’

도대체 흐리멍덩한 얼굴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남자는 거실에서 이어지는 복도를 지나갔다. 연하는 기다렸다.

‘안 돌아오나?’

돌아오는 기색이 아니어서 따라갔다. 복도 오른쪽의 전면 유리창 밖에는 네모난 정원이 가꿔져 있었다. 그리고 복도 너머에는 거실이 하나 더 있었다.

‘어디 갔지? 기척이 없어서 모르겠네.’

당연하겠지만 남자에겐 인간 같은 기척이 없었다. 그래서 거실에 서서 잠깐 헤매고 있는데, 낮은 계단을 올라가서 이어지는 공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뭐 마실래?”

부엌인 모양이었다.

이 지부에서 거의 반평생을 살고도 국장의 관사에 들어오는 일은 처음이었다.

연하는 그쪽으로 가면서 대답했다.

“아뇨. 괜찮아요.”

부엌은 검은 대리석 느낌이 나는 모던하고 단순한 공간이었다. 남자는 마치 아파트 광고에나 나올 것 같은 모습으로 냉장고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물을 잔에 따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흰색 마블링이 들어가 밤하늘처럼 보이는 검은 대리암 아일랜드 탁자의 매끄러운 표면에 그가 거꾸로 비쳤다.

투명한 잔의 표면에 매달린 물방울이 흘러내려 탁자와 컵 사이에 고였다.

“아버지라고 했던 건 농담이었군요.”

연하는 깨닫고 말했다.

‘사실 당연한 건데 말이야.’

그녀에게 이러나저러나 아버지란 존재는 없으니까.

“너에 대한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 열아홉 살 때 테러리스트들이 일으킨 열차테러에 휘말려 중태에 빠졌지.”

남자는 그녀 앞에 와 섰다.

“모두 죽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흘간 감염을 버틴 끝에 변이를 이겨낸, 서울 지부 ERU(Emergency Response Unit) 3팀의 루아스, 강연하 상사.”

남자는 손을 내밀었다. 연하는 이건 무슨 의미인가 싶어 손을 쳐다보았다.

“건장한 성인 남자도 대개 이기지 못하는 감염을 이겨낸 용감한 아가씨를 만나서 영광이구나.”

연하는 그 손을 맞잡았다.

“확실히 제 아버지는 아니신 것 같네요.”

“어디서 그런 결론이 나왔어?”

남자는 정말로 궁금한 것 같았다.

“나이가 상당히 많으신 것 같아서요. 요즘 사람들은 용감한 아가씨 같은 말은 쓰지 않거든요.”

“아, 그런가.”

남자는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냐. 이제부터 내가 네 아버지니까.”

연하는 남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아무리 봐도…….

“아버지처럼 보이시진 않는데요.”

“동족이니까. 아버지처럼 생각하란 의미야.”

연하는 다시 남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역시 두 번 봐도…….

“아버지처럼 안 보이는데.”

연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남자는 피식 웃었다. 묘한 데서 고집이 센 성격을 눈치챈 듯 설득하길 포기한 것 같았다.

“아무튼 잘 부탁한다.”

* * *

“잘 부탁한다고.”

“뭐?”

도영은 되물었다.

“잘 부탁한다고 했는데.”

연하는 무심히 말했다.

“그게 다야?”

다른 말들을 나누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거 하나인 것 같았다. 그래서 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발 루아스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들어가십시오.”

연하는 거수경례하고 돌아섰다. 어쨌든 그녀보다 상급자인 것 같으니까.

“정말 그게 다였어?”

같이 복도를 걸어가며 도영이 다시 물었다.

“응. 아버지처럼 생각하라고…….”

도영은 미간을 좁혔다.

“국장이 왜 네 아버지야? 하여간 그런 말 하는 것들은 절대 믿으면 안 돼.”

리웨이는 아직 시야에 들어오는 루아스들을 돌아보고 ‘쉿’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녀도 슬그머니 속삭였다.

“그러게. 세상의 아버지가 다 얼어 죽었나 보다.”

붉은 눈동자들은 멀어지는 그들을 끝까지 응시하고 있었다. 세 사람이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자, 한 루아스가 고정된 그림 속에서 살아난 것처럼 갑자기 말했다.

“말씀하지 않으신 것 같군요.”

“생각하시는 바가 있겠지.”

금발 루아스가 무심히 대답하며 나머지 여섯을 돌아보았다.

“아무튼 이만 돌아가도록. 먼 길이니.”

여섯 루아스들은 일제히 자세를 갖추고 거수경례했다.

“곧 뵙겠습니다.”

“몸조심하십시오.”

금발 루아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 너머로 사라졌다. 여섯 루아스는 몸을 돌려 복도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희 중 한 사람이 남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한 루아스가 말하자, 개중 리더로 보이는 루아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우리로선 역부족이야.”

시선이 구름다리 너머로 향했다.

“저분을 막기엔.”

* * *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창가에 서 있는 이반은 돌아보았다.

“렉스.”

렉스는 여태 들고 있던 장갑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허리를 피면서 물었다.

“말씀하지 않으신 것 같더군요.”

“첫날부터 경계하게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맹한 것 같으면서도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드라마틱한 표정들을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타입 같군.’

혼자 웃는 게 이해되지 않는지 렉스가 쳐다보았다. 이반은 웃음을 거두고 중얼거렸다.

“두고 봐야지. 12년만이니까.”

* * *

“뭐? 국장의 피를 마셨다고?”

리웨이는 인상을 썼다. 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뱀파이어의 피는 마실 수 없는 거 아니었어?”

아마 짐작했겠지만 연하는 정치적 올바름 같은 문제엔 관심이 없었다. 그냥 나오는 대로 말할 뿐이었다. 뱀파이어든 루아스든 심지어 흡혈귀든.

리웨이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게 가능했다면 아마 둘이 같은 혈액형일 거야. 안 그래도 거기에 대한 논문이 최근에 나왔거든.”

연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한테 혈액형이 있어?”

리웨이는 얘는 어느 별에서 왔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여태 그걸 몰랐단 말이야? 동물도 혈액형이 있는걸. 어쨌든 인간도 같은 혈액형끼리 수혈할 수 있는 것처럼 뱀파이어도 그런 모양이야.”

리웨이는 책상으로 가면서 말했다.

“다만 뱀파이어의 혈액형은 인간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많아. 거의 개별 혈액형을 가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래서 맞는 혈액형을 찾기가 힘들 뿐이지.”

“그랬구나.”

연하는 납득했다.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같은 뱀파이어의 피는 마실 수 없다는 것도 잊고 있었어.”

리웨이는 다시 인상을 썼다.

“조심하라고 했잖아? 잘못 마셨다가는…….”

“알아. 다른 감염원의 공격을 받을 수 있어서 위험하다고.”

하지만 국장의 피는 그녀를 공격하기는커녕 나쁜 자세 탓에 만성적인 목 결림까지 치료해 준 것 같았다.

여담이지만, 뱀파이어의 강한 육체도 생활습관에 따른 일상적인 불편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무튼 그래서 푹 자고 나서야 의아해졌던 것이다.

“뭐, 잘 됐네.”

리웨이가 말했다. 연하는 의아해하는 시선을 던졌다.

“잘 돼?”

“자가혈 치료는 한계가 있으니까. 아직 그만한 기술이 개발되지 않아서 뱀파이어의 피는 오래 보존이 안 되잖아. 지부에 같은 혈액형을 가진 뱀파이어가 있으면 좋지.”

“하지만 하이마 오메가가 있잖아?”

하이마 오메가는 그 약품 이름이었다. 일시적으로 상처 회복 능력을 상승시켜 주는, 좆같이 비싼.

이름에서 짐작했겠지만, 하이마를 개발한 제노아틱스가 자랑스럽게 내놓은 후속작이었다.

리웨이는 찡그린 웃음을 지었다.

“인위적으로 상처 회복 능력을 극대화한다는 거, 몸에 좋을 리가 없잖아.”

‘그런가.’

연하는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런데 뱀파이어끼리도 흡혈은 불법 아냐?”

요즘 흡혈이 허용되는 유일한 경우는, 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 당국의 허가를 받은 ‘의료 행위’일 때뿐이었다.

그래봤자 감염을 이기는 경우가 손에 꼽기 때문에 그다지 효과 있는 의료 행위는 아니었지만.

“걸리면 불법이지.”

“돌팔이.”

“뭐, 인마?”

리웨이는 돌아보았다.

“뭐, 말이 그렇다는 거고, 같은 혈액형을 가진 루아스들끼리 피를 공유하는 건 흡혈보다 수혈의 개념으로 보니까. 그리고 동일한 혈액형은 대개 공여자인 파트로네스와 수여자인 클리엔테스 사이에 나타나니까, 둘의 공생관계를 생각하면 수혈 정도는…….”

거기까지 말한 리웨이는 말을 멈추었다. 숫자와 그래프로 어지러운 모니터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리웨이?”

뭐 하나 싶어 부르자, 리웨이는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돌아보았다.

“아, 말하다 말았나? 아무튼 흥미로운 생물이야. 원시의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 바이러스가 인간을 숙주 삼아 진화한 거라는 가설부터 말이야. 하긴, 인간을 기반으로 하지만 전혀 다른 특질을 띤다는 게…….”

리웨이는 종종 신나서 늘어놓고는 하지만, 그런 이야기에는 영 관심이 없는 연하는 스툴에 앉아 빙그르르 돌았다.

“정신 사나워. 가만히 있어.”

곧 리웨이가 라텍스 장갑을 끼면서 다가왔다.

“한 번 보자.”

의학용 손전등의 빛이 눈동자를 비췄다.

“왜 그렇게 어지러운데 말하지 않았어?”

이번에는 입안을 보면서 물었다. 뾰족한 송곳니는 서랍 속에 넣어둔 흉기처럼 이 사이에 잠들어 있었다.

“금방 지나갈 줄 알았어.”

입을 벌리고 있느라 발음은 ‘으바 지아가주 아았어.’에 가까웠다. 그래도 리웨이는 용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괜히 너 때문에 나만 혼났잖아.”

“리웨이가 자꾸 소리치니까.”

“그래. 내 탓이다, 내 탓이야.”

리웨이는 손전등을 내려놓았다.

“많이도 마셨나 보다. 어제 그렇게 쓰러진 애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멀쩡하네. 너한테 피 뽑아주고 국장 안 쓰러졌니?”

‘멀쩡해 보였는데.’

그보다 ‘마셨다.’라고만 했더니 피를 뽑아준 거라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오해를 정정하기 전에, 리웨이가 슬그머니 물었다.

“근데 정말 주치의 자격이 없다고 하디? 그냥 한 말이라지?”

“몰라?”

연하는 멀뚱히 대답했다. 리웨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거기 그렇게 오래 있어놓고 이야기해 보지 않았단 말이야?”

“그럴 정신이 없었어.”

“뭐 했는데?”

안 그래도 흡혈 이야기를 하려는데, 갑자기 어제 장면이 떠올랐다. 풀어헤쳐진 와이셔츠, 몸을 타고 전해지는 가벼운 진동, 웃는 남자의 얼굴─

어쩐지 말문이 막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