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THE MAN (4)
그만.
갑자기 남자가 연하를 떼어냈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그만두고 싶지 않아서 몸을 비틀었다.
온 힘을 다해 벗어나려고 했지만, 남자는 힘이 무서울 정도로 강했다.
‘아니, 오히려 전혀 힘을 쓰는 것 같지 않아.’
그저 가볍게 그녀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붙잡히지 않은 팔다리를 내저을 수 있을 뿐 그에게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가만히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달팽이관 안쪽에 진동을 퍼뜨렸다. 뱃속에도 기분 좋은 진동을 울리는 목소리였다.
낮고, 깊었다.
‘듣기 좋아…….’
틈 하나 없이 밀착해 있는 몸이 인식되었다. 남자는 크고 단단했다. 남자의 가슴에 맞닿은 가슴이 묵직했다.
몸을 뒤채자, 남자는 연하가 아직도 벗어나려 한다고 생각했는지 진정시키듯 등을 쓰다듬었다.
연하는 소파에 손을 짚고 몸을 일으켰지만, 등을 짚은 손이 막아서 몸을 조금 뗄 수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오히려 입술이 스칠 듯 가까운 거리였다.
남자의 눈은 얼핏 자색까지 띈다고 생각될 정도로 물기가 짙은 선명한 핏빛이었다. 이렇게까지 붉은 눈은 본 적 없었다.
상대를 홀리는 황홀한 빛깔이었다. 연하는 그에게 가까이 갔다.
강연하.
남자는 붉은 입술로 그녀를 불렀다. 거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속삭이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오히려 ‘이리와.’ 하고 주문을 거는 것 같았다. 연하는 눈을 내리깔았다. 입술이 거의 맞닿았다.
“강연하.”
멀리서 맴돌던 목소리가 성큼 가까워진 순간이었다.
따악.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연하는 갑자기 눈앞이 맑아졌다. 이마가 횃불로 얻어맞은 것처럼 홧홧하고 얼얼했다.
‘내가 지금 뭐 하려고 했더라?’
그리고 세상은 왜 뒤집혀 있는지 궁금했다.
‘아, 목이 뒤로 꺾여 있어서구나.’
깨달은 연하는 아크로바틱을 하듯 완벽한 활자 모양으로 휘어 있는 몸을 원위치 시켰다. 쓰라린 이마를 문지르면서.
남자는 총 대신 쓸 수도 있을 것 같은 딱밤을 날린 손을 내렸다.
삐딱하게 웃는 얼굴이었고, 와이셔츠가 풀어헤쳐져 있어서 누군가가 일부러 조각해 놓지 않고서야 이렇게 생길 수 없을 것 같은 몸이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목덜미에 두 개의 구멍이 있었다.
남자는 연하의 한쪽 볼을 꼬집었다.
“이런 짓은 누가 가르쳤을까?”
살짝 꼬집은 정도였지만 귀싸대기라도 맞은 것 같은 볼을 쓰다듬는 동안, 남자는 테이블에 놓인 휴지를 뽑아 목덜미를 닦고 일어나서 와이셔츠를 추슬렀다.
손끝이 단정한 손으로 단추를 잠그고 셔츠를 허리춤에 넣어 정리했다. 그리고 오른쪽 목덜미가 뻐근한 듯 주물렀다.
테이블 위에 구겨져 있는 휴지에 묻은 핏자국이 신경 쓰였다.
‘어, 아픈 거겠지. 역시.’
“미안해요.”
말하자, 남자는 돌아보았다.
“뭐가?”
연하는 그의 목덜미를 가리켰다.
“제가 그런 거잖아요.”
남자는 옆에 앉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하게 자랐구나.”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는데, 이 시점에서는 그냥 덮어둬선 안 될 문제 같았다.
연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누구세요?”
남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눈의 자색이 좀 더 짙어졌다.
“섭섭하네. 날 잊다니.”
연하는 미간을 좁혔다. 맹세코 이런 남자는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맹세할 것도 없이…….
‘이런 남자를 봤다면 잊을 리가 없잖아.’
눈이 불순물 하나 없이 붉다던가, 미적 감각이라고는 없는 제 눈으로 봐도 좀 지나치게 잘생겼다던가, 대면하는 것조차 황송하게 만드는 제왕적인 분위기라던가 하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렇게 사람이 좋아 보이는데도 우리에나 둬야 할 것 같은 맹수 느낌이…….
위험했다.
밖에서 만났다면 이미 십 리 밖으로 도망갔을 테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일단 궁금증은 해결하고 봐야 할 것 같았다.
“어렸을 때 생이별한 오빠라던가……?”
“흠.”
남자는 소리를 내었다. 소파 등받이에 팔을 대고 얼굴을 괸 모습마저 화보 같았다.
“동안 소리를 듣긴 하지만 그렇게 어려 보인다니 영광이랄지.”
“아버지가 나 모르게 정한 정혼자 같은 건가, 그럼.”
연하는 얼마 전에 지나가면서 봤던 드라마가 떠올라서 혼잣말했다.
“그런 거 없잖아.”
남자는 바로 말했다. 연하는 그를 의아하게 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남자는 손을 내리고 빙긋이 웃었다.
“내가 네 아버지니까.”
연하는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리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
남자의 웃는 얼굴 위로 다스베이더의 가면이 겹쳐지는 건 착각이었을까.
* * *
도영은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뱀파이어가 국장이라고요? 그런 참신한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했는데요.”
인간에게는 인간의 영역이, 루아스에게는 루아스의 영역이 있는 법이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성경의 유명한 구절도 있잖은가. 이 상황과 정확히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옆에 있는 리웨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총사령부 소속, 계급 공용 부호코드 OF-6. 여기 기준으로 준장이니, 자격 요건에서 떨어지진 않죠.”
“그건 그렇지만…….”
도영은 인상을 쓰고 있다가 오른쪽으로 고갯짓했다.
“저 제복.”
멀리 국장의 관사로 연결된 구름다리로 통하는 문이 있고, 그 앞은 지옥의 개 같은 파수꾼들이 지키고 있었다. 정확히 일곱 명이었다.
기둥 뒤에 숨어서 지켜본 지 꽤 되었는데 단 하나도 코를 긁거나 기침을 하거나 머리카락을 넘기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았다.
정말 일곱 개의 조각을 꿔다놓은 것 같았다.
“중앙근위사단이죠?”
리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근위사단이죠.”
“설마 다 여기로 배속된 건 아니겠죠?”
“이런 작은 지부에요? 미쳤다고 그런 인력 낭비를 하겠어요? 그냥 국장을 여기까지 경호하는 임무를 맡은 거겠죠.”
“국장이 뭐라고요?”
리웨이는 바로 뭐 씹은 표정이 되었다. 국장이 한 말을 떠올리는 얼굴이었다.
“제가 그걸 알면 지금 이러고 있겠어요?”
계급 때문에 존댓말을 하긴 하지만 가끔 이럴 때면 차라리 반말을 하는 게 낫지 않나 싶었다.
도영은 뒷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는 불량학생처럼 앉아 무릎 위에 양 팔을 걸치고 있는 자세로 생각했다.
“강 상사 그냥 흙수저 루아스 아니었습니까?”
리웨이는 아무 반응 없는 문을 살피면서 대답했다.
“제가 알기로도 그런데 말이죠.”
“열차 사고였죠?”
“네. 거의 죽기 직전에 병원으로 이송됐죠. 도착했을 때는 이미 감염이 진행되는 상태였고.”
뱀파이어는 감염을 통해 태어나지만, 모두가 감염을 이기는 것은 아니었다. 감염된 사람 대다수는 단순히 주검으로 끝났다.
오로지 선택받은 자들만이 밤의 전사로서 다시 일어나는 것─
……이라지만, 죽어가는 연하에게 과연 죽음 대신 이런 삶을 선택하겠냐고 물어본 사람이 있었을까.
‘근데 뭐 하는데 아직까지 나오지도 않고 있어?’
누구에게 힘으로 밀릴 녀석이 아닌데 말이다.
H빔으로 얻어맞아도 꿈쩍 않는 무시무시한 용가리 통뼈의 소유자 강연하가 아니던가.
물론 정신을 잃긴 했지만, 탑 위에 갇힌 공주인 양 파랗게 질려서 쓰러지던 모습이 더 충격적이라 오랫동안 잊힐 것 같지 않았다.
“쳐들어가면 살아서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도영이 루아스들 쪽을 보면서 중얼거리자, 리웨이는 휘휘 손을 저었다.
“아서요. 경호받아서 왔다니까 샌님 같아 보여요? 눈 붉은 거 못 보셨어요? 저기 쟤들 다 합친 것보다 국장이 더 강할 수도 있어요.”
도영은 인상을 쓰고 리웨이를 보았다.
“오버하지 말아요, 좀. 다 저렇게 눈이 붉은데.”
‘이 어린놈이 아직 세상의 맛을 덜 봤구먼.’
리웨이는 바로 이런 글자가 부조된 표정이 되었다. 조금 면구해질 정도였다.
“뭐, 어쨌든 잊지 마세요, 드페흐 소령님. 상대는 오늘부로 우리 지부의 임금님이라는 걸. 그래요, 권력의 향기를 맡으셨습니까?”
도영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공양미 삼백 석에 강연하를 팔라 하면 당장 보쌈해서 인당수에 던져 버릴 여자 같으니.’
괜히 속물의 가운데 토막인 부국장마저도 한 수 접어준다는 리웨이 파웰이 아니었다.
“괜히 인실좆이 아니니까 세상의 맛을 온몸으로 체득하고 싶지 않으면 짜…… 짜짜로니.”
도영은 물끄러미 리웨이를 보았다.
“지금 분명히 짜지라고 하려고 한 것 같은데요.”
리웨이는 손사래를 쳤다.
“어휴, 설마요.”
계급 들고 깃발처럼 흔들 것도 아니고 아무래도 좋아진 도영은 루아스들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다고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냥 둬요?”
“설마 잡아먹기야 하겠어요. 동족인데. 신고식을 엄하게 치르는 거 아닐까요?”
“그런 줄 알면 왜 이러고 있는 겁니까?”
리웨이는 잠깐 생각하는 눈치였다.
“호기심?”
이 여자가 정말.
그때였다. 부동자세를 풀지 않는 루아스들 중 하나가 사라졌다. 말 그대로 지워지듯이.
다음 순간,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리웨이와 도영은 흠칫했다. 덤불에서 튀어나온 표범을 마주친 토끼처럼.
“Ah fan…….”
심지어 리웨이는 너무 소스라치게 놀라 어디 말인지도 모를 욕설을 내뱉다 겨우 입을 막았다.
“젠장, 너무 놀라서 방언 터졌네.”
아까 차에서 마지막으로 내린 금발 루아스가 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짝이는 긴 금발을 늘어뜨리고, 미동도 하지 않는 붉은 눈동자로.
다른 곳에서 봤다면 넋을 놓고 쳐다봤을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악어라는 비교대상이 바로 떠오를 만큼, 그는 변온 동물 같은 차가운 아름다움을 뿜었다.
“저희는 인간보다 청력이 좋습니다.”
그 루아스가 굵은 목소리로 말했을 때, 리웨이와 도영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남자예요?”
도영이 놀라 물었고, 리웨이는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저 얼굴로……. 세상 말세네요.”
그가 특별히 여성스럽게 생겼다기보다, 너무 아름다운 얼굴이 성별이란 게 의미가 없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들었으면서도 금발 루아스는 무표정했다.
‘익숙한 오해인지, 원래 그런 표정인지.’
생긴 것도 그렇고, 살아 있는 석상이라는 묘사가 이렇게 부합할 수 없었다.
리웨이는 그를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네. 좋으시겠어요.”
도영은 미쳤냐는 듯이 리웨이를 보았다. 하지만 금발 루아스는 역시 변하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두 분의 대화가 잘 들린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거였습니다.”
“아아…….”
리웨이는 말을 끌었다.
“그럼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좀 알아봐 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에게 국장님의 일에 관여할 권한은 없습니다.”
“강 상사한테 관여할 권한은 있잖아요? 중앙근위사단의, 그것도 장교로 보이시는 분께 그 정도 권한은 있겠죠.”
그는 한동안 리웨이를 보았다. 도영은 그녀의 되우 큰 간땡이에 제 간이 다 벌렁거리려고 했다.
그때였다. 구름다리와 이어지는 문이 열리고, 연하가 걸어 나왔다. 혼자였다.
도영은 얼른 일어났다.
“강연하.”
연하는 아까 시체 같은 낯빛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다시 태어난 것처럼 생기가 돌아서, 백지장 같은 얼굴에 홍조가 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괜찮아?”
도영은 연하에게 다가가 물었다.
오히려 들어갈 때보다 멀쩡해서 묻는 게 민망할 지경이긴 했다. 다만 이마 정 가운데에 불그스름한 자국이 있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꼭 딱밤이라도 맞은 것처럼.
“새로 온 국장이 너한테 무슨 볼일이래?”
“그건…….”
연하는 주저했다.
머리와 입 사이에 필터가 없는 걸로 악명 높은 강연하가 별일이었다. 그래서 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왜?”
그런데 뭔가 뒤통수를 뚫어버릴 것 같은 시선이 느껴져서 돌아보니, 루아스들이 모두 살아난 석상처럼 연하를 보고 있었다.
그제야 도영은 자신이 루아스들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많은 붉은 눈들이 주목하는 대상이 된다는 건, 절대로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도영은 슬그머니 연하의 뒤로 숨었다. 어디까지나 평범한 인간인 그보다야 연하가 가망 있지 싶어서.
“너…….”
오랜 팀 생활로 도영의 생각을 읽었는지 연하는 눈썹을 추켜들고 그를 보았다.
“뭐, 왜?”
도영은 찔려서 괜히 시비조로 내뱉었다.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금발의 루아스가 어느새 뒤에 서 있었다. 도영은 흠칫했으나, 연하는 놀라지 않고 돌아보았다.
“네.”
국장이 무슨 말을 했는지 묻는 게 분명했음에도 연하는 그냥 그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뭐라디?”
리웨이가 호기심을 감추지 않고 다가오며 묻자, 연하는 안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모두가 그 입을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