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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짐승-4화 (4/104)

4화. THE MAN (3)

그때였다. 계단 아래 차 한대가 들어와 멈추었다.

‘뭐지?’

도영은 시선을 돌렸다. 마치 대통령 행렬 같은 차들이 계속 미끄러져 들어왔다.

차들은 어쩐지 산 자보다 죽은 자를 위한 것 같았다.

광을 낸 차 표면에 윤기가 미끄러졌다.

그때 차 문들이 벌컥벌컥 열리고, 검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검은 안개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들은 한 몸처럼 순식간에 계단 앞에 도열했다. 여자가 반, 남자가 반 정도였지만 뒷짐을 지고 선 각도까지 비슷했다.

뭉근한 바람 탓인지, 수런거리는 전등 빛 때문인지, 모든 게 비현실적이었다.

마지막으로 계단 바로 앞에 선 차의 문이 열리고, 역시 검은 제복을 입은 사람이 내려섰다.

검은 제복을 입은 그는 계단 위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눈부신 금발이 흩날렸다. 마치 망자의 안면 같은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붉은 눈.’

도영은 얼어붙어 움직일 수 없었다.

“대개 뱀파…… 아니, 에라이, 이놈의 단어는 어째 입에 붙질 않냐. 아무튼 루아스들은 인간이었을 때 눈동자 색을 유지해요.”

도영은 언젠가 리웨이가 한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건 강 상사를 포함해서 얼마 살지 않은 경우고, 수명이 어느 임계점을 넘으면 눈동자 색이 붉게 변해요.”

리웨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하지만 ‘대개’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임계점을 넘은 루아스가 흔하지 않다는 의미죠.”

그런데 검은 제복을 입은 자들은 모두 붉은 눈이었다.

차문이 열려 있는 뒷좌석의 어둠에서 구둣발이 내려왔다. 짙은 남색 양복을 입은 다리가 이어지고, 검은 코트가 흩어져 내렸다.

마치 어둠에서 태어나듯 일어난 남자는 똑바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뭐지.’

도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난생처음 보는 남자가, 그것도 단순히 ‘남자’라는 성의 없는 명칭으로 불러서는 안 될 것 같은 존재가 자신을 보고 웃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초신성 같은 붉은 눈동자가 다정하게 변하는지.

‘날 향한 게 아냐.’

다음 순간에 깨달았다.

‘보는 건…….’

돌아보자, 연하도 파랗게 얼어서 남자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를 알아봐서가 아니라, 꼭 맹수를 마주친 얼굴 같았다.

‘이 녀석은 왜 이래?’

졸아붙은 눈동자에 수많은 것이 지나갔다.

죽음의 목전에 선 자의 공포, 위기감……. 아까 얼굴에 푸르스름하게 보이던 기운은 이제 거의 푸른 염을 들여놓은 듯했다.

누가 목이라도 조르고 있는 것 같았다.

“너 왜 그러…….”

갑자기 뒤에서 사람들이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개중에는 현재 공석인 국장 대행을 맡고 있는 부국장도 있었다.

“오셨습니까!”

부국장은 남자 앞에 넙죽 허리를 숙였다. 천성적으로 코웃음을 장착한 그치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오신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방문하실 줄은…….”

연락을 주셨더라면 환영인사를 준비했을 터인데……. 오시는 길은 편안하셨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변명 같이 늘어놓는데, 부국장은 루아스라면 일단 한 번 멸시하지 않고서는 베기지 못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그런데 남자는 아무리 봐도 루아스였다.

그리고 연하에게서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는 루아스였다. 주변에서 누가 뭐라고 하든지 간에.

남자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눈치챈 부국장이 연하를 가리켰다.

“아, 저쪽은…….”

그때였다. 도영은 연하의 눈이 까뒤집힌다고 느꼈고, 이어서 몸이 무너졌다.

“강연하!”

도영은 놀라 연하의 팔을 잡았다.

‘무겁─’

연하의 안에 코끼리라도 한 마리 들어앉아 있는 것 같았다. 이건 단련된 몸으로도 어쩔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찰나에 끌려간다고 생각했고, 분명히 볼썽사납게 굴러 떨어지는 모습을 예상했다. 그런데 무언가에 걸려서 낙하가 멈추었다.

“괜찮으십니까?”

그게 한 여성 루아스가 빛처럼 나타나 연하를 붙잡았기 때문이라는 걸, 도영은 조금 뒤에 알았다.

“아…….”

그때 계단 아래 있는 ‘남자’의 준미한 미간에 심각한 빛이 스몄다.

그는 가죽 장갑을 벗어 옆에 있는 금발의 루아스에게 건넸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치 부동의 항성이 천체의 궤도를 벗어나 다가오는 것 같은 압력이었다. 그저 가볍게 바람을 맞으며 걸어오고 있을 뿐인데.

그가 코트를 흩날리며 옆을 지나가자, 그제야 도영은 자신이 숨도 쉬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목구멍에 붙잡혀 있던 숨이 터져 나왔다. 옆얼굴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리.”

남자는 여자 루아스에게서 쓰러진 연하를 건네받았다. 장갑을 벗은 손으로 의식을 잃은 연하의 볼을 쓸어내리고는 혀를 찼다.

“안색이 나쁘군.”

“강 상사! 무슨 일이야?”

그때 계단 위에서 리웨이가 연하를 부르며 뛰어 내려왔다. 소란을 듣고 왔다가 쓰러진 연하를 목격한 모양이었다.

“리웨이 파웰 대위.”

리웨이는 쓰러진 연하를 보고 놀라서 미처 보지 못했던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한 이래 제 본분을 잊은 순간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훗날 반추했다.

정말로 이런 건, 처음 보았다.

리웨이는 흠칫 깨어났다.

“절 어떻게…….”

남자는 가운의 가슴 주머니에 박힌 이름을 눈짓했다.

“당신이 주치의입니까?”

“그렇습니다만…….”

붉은 눈에 경멸이 떠올랐다.

“엉망이군요.”

“네?”

드물게도 리웨이는 당황해 반문했다.

“이 정도로 피가 부족한 채로 두다니. 주치의 자격이 없군요.”

남자는 그대로 연하를 안은 채 계단을 올라갔다.

한 몸 같은 나머지 루아스들, 그리고 부국장을 위시한 사람들이 뒤를 따라갔다.

이내 그 자리에 남은 사람은 리웨이와 아직도 계단에 누워 있는 도영뿐이었다. 도영 옆에 구둣발이 다가왔다.

“소령님, 뭐하십니까?”

도영은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시선만 돌려 이 대위를 보았다.

“뭡니까, 저 사람은……?”

이 대위는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새로 부임하신 국장님입니다.”

* * *

“제가 모시겠습니다.”

여성 루아스가 손을 내밀었다.

“됐어.”

국장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여자는 두 번 말하지 않고 뒤를 따랐다.

안내하는 사람은 명색이 부국장과 그 일행이었지만, 어쩐지 그들이 더 앞서가는 모양새였다.

다리 길이의 차이로 인해 뱁새가 황새를 쫓는 꼴로 분분히 따라가다가, 목적지에 다다라서야 재빨리 앞서 가서 안쪽으로 손짓했다.

“이곳입니다.”

국장은 본 체도 하지 않고 문을 넘어갔다. 뒤를 따르려는데, 갑자기 루아스들이 돌아서서 그들을 막았다.

“엇!”

부국장은 펄쩍 뒤로 물러났다. 전형적인 오십대 중년 남성의 몸을 가진 부국장이 그렇게 날랬던 순간은 정말로 오랜만이었을 것이다.

“아, 안까지 안내를…….”

루아스들은 살아 있는 벽을 형성한 채로 미동도 없었다. 아무래도 비인간적인 모습에 부국장 일행은 기가 죽어 슬그머니 몸을 물렸다.

아무리 요즘 뱀파이어들이 흡혈하지 않는다지만, 권력에 아첨하는 탐관오리의 마음가짐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부국장님, 저 너무 무섭습니다.”

한 직원이 속삭였다.

“조용히 해. 나도 무서우니까.”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희는 인간보다 청력이 좋습니다.”

부국장 일행은 얼어붙었다. 차마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죄, 죄송…….”

부국장 일행은 결국 사과도 하는 둥 마는 둥 부리나케 자리를 벗어났다.

그 모습을, 붉은 눈들은 아무 감정 없이 응시했다.

* * *

국장, 이반은 침대처럼 넓은 가죽 소파에 연하를 내려놓았다. 그러다가 오른쪽 어깨의 흉터를 보았다.

어깨가 거의 두 동강 났을 법한 큼지막한 흉터는 티셔츠의 어두운 안쪽까지 이어졌다. 손끝으로 흉터의 오돌토돌한 표면을 쓸어보았다.

그의 미간에 금이 갔다.

‘이렇게 거칠게 다루다니.’

연하는 거의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푸릇하게 뜬 얼굴이 안쓰러웠다.

‘얼마나 피를 잃었으면…….’

입에서 희미하게 피 냄새가 나기는 했다. 하지만 싸구려 합성즙에 과다 첨가된 설탕 냄새가 섞여 있었다.

‘대체 뭘 마신 건지.’

이반은 코트와 양복 상의를 벗어 대충 소파에 던지고 넥타이를 풀었다. 그리고 와이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 푸르고 연하에게 다가갔다.

차가운 볼을 한 번 쓸어내렸다.

“강연하.”

연하는 반응하지 않았다. 조금 더 몸을 숙여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강연하.”

몇 번 더 끈질기게 불렀다. 그러자 철문처럼 감긴 눈꺼풀이 들렸다. 그리고 반타블랙처럼 흑색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눈동자가 그를 보았다.

이반이 몸을 일으키자, 연하는 그들 사이에 자기장이 작용하는 것처럼 그를 따라왔다. 나른하고 현실감이 없는 움직임이었다.

‘의식이 없군.’

이반은 긴 소파의 반대편 팔걸이에 등을 기댔다. 이번에는 연하가 그의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위험하도록 가까이 얼굴을 가져왔다.

지금 그녀가 이성을 가지고 하는 행동이 아닌 건 알지만, 이반은 자못 즐거워하는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볼에 난 솜털이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는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무언가를 찾는 것 같았다.

공기의 저항을 받듯이 느리게 올라온 손이 이반의 가슴을 짚었다. 단추가 열려 있어 손이 반쯤 맨 살에 닿았다. 짚단 속 개다래나무를 찾는 고양이처럼 손이 와이셔츠 안으로 들어왔다.

“간지러워.”

이반은 낮게 웃고 말았다.

그 웃음소리가 뇌의 어떤 부분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연하가 움찔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검은 눈에 얼핏 윤기가 돌아왔다.

연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얼굴에 커다란 물음표가 떠올랐다.

‘어쩌다가 난 반 벗은 남자 위에 올라타고 있게 된 걸까?’

그것도 처음 보는 남자…….

‘아, 아니네.’

기억났다.

‘아까 계단 아래서 본 남자잖아.’

그가 차에서 내리고, 사람들이 뛰어간 것까지는 기억났다. 그 뒤로는 암전이었다.

아마 의식을 잃었으리라.

도영이 화낼까 봐 말하진 않았지만 그전까지 굉장히 어지럽고 멍했으니까.

‘그러니까 처음 보는 사이는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잘못 편집된 비디오처럼 중간 과정이 통째로 날아가고 이런 부적절한 자세로 직행할 만한 사이는 분명히 아니었다.

도영이 들으면 놀라겠지만, 그녀에게도 낯선 남녀 사이에 이런 자세가 부적절하다는 상식 정도는 있었다.

그런데 남자가 이마를 짚고 웃었다. 웃음을 참을 수 없지만 참고 있다는 듯이.

“왜…… 웃어요?”

남자는 웃음기가 일렁이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네 표정이 너무 걸작이라.”

어쩐지 놀리는 것 같아 연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숨이 가빠서 숨을 들이마셨다가, 좋은 냄새를 맡았다.

‘아주…….’

좋은 냄새였다. 머리를 몽롱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연하는 그 냄새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렇다고 인식하지도 못하고 오로지 그 냄새를 쫓아 그에게 다가갔다.

좋은 냄새가 나.

왠지 입 밖으로 말한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남자가 웃자 맞닿은 몸에서 진동이 전해졌다.

왠지 달뜨는 기분이었다.

‘이가 간질거려.’

평소에는 숨겨져 있는 송곳니가 자라나는 것이 느껴졌다. 벼른 낫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이 끝을 혀로 핥았다.

본능에 따라, 단단한 저항성을 뚫고 들어갔다.

물씬 솟아오른 액체가 그녀의 입안을 채웠다.

‘달아.’

마치 설탕을 처음 맛본 중세시대 사람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까지 알던 단맛은 진짜 단맛이 아니었다.

동방의 온갖 신비한 향신료들을 모두 섞는다 해도 이런 향기로운 감미는 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시절 향신료가 약재였듯,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활력이 솟았다.

연하는 거의 정신을 놓고 그 근원을 쫓았다.

‘이상해. 어제 피는 정말 역하게 느껴졌는데.’

목구멍에서 낮고 거친 으르렁거림이 올라왔다.

자신이 동물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이건 본능보다도 더 근본적인 감각이었다.

마치, 몸 안에서 꽃이 피는 것 같은─

그만.

갑자기 남자가 연하를 떼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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