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THE MAN (2)
사실 사랑의 매를 드는 심정으로 말하자면, 싸울 때를 제외하면 연하는 쓸데라고는 없는 존재였다.
관상용이나 될까. 멍하고 느릿하고, 살의를 가진 공격이 아니라면 거북이가 스승님 삼겠다고 할 만한 반사 신경을 보여주었다.
“내가 몸 보존해 가면서 싸우라고 했어, 안 했어! 예산이 무슨 감자야? 땅 파면 나오게? 제발 좀 그랬으면 좋겠다만!”
리웨이는 오늘도 연하의 귀에 잔소리 팔만대장경을 새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군말 없이 듣는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 의무대의 실질적인 ‘통’인 리웨이 파웰 대위를 건드려서 이로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지.’
도영은 생각했다.
아무리 작은 지부 소속이라지만 연하 같은 특수한 대원에 대한 예산은 부르는 게 값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리웨이가 틈만 나면 예산 운운하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이유는, 연하가 제 몸의 안위에 관해서만은 사소한 것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상남자가 따로 없는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약품이 좆같이 비싸기 때문인 것도 있겠지만.’
그런데 옆에서 연하는 여전히 팩 주스 마시기에 여념이 없었다.
도영이 기가 차서 보자, 연하는 그에게 팩 주스를 내밀었다.
“줄까?”
어린아이와 동물에게 있어-물론 연하는 둘 다 아니었지만 어쩌면 둘 다 맞는 게 아닐까 싶었다.- 자신의 음식을 주는 것만큼 확실한 애정 표시도 없지만, 도영은 거절했다.
“그거 나한텐 좀 역해.”
“역해?”
“생각 좀 해라. 인간이 그걸 먹을 수 있을 리…….”
“아니, 소령님도 그래요!”
갑자기 화살이 도영에게로 날아왔다.
“명색이 팀 리더라는 사람이! 말렸어야죠!”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더라?’
도영은 생각하다가 도로 기억해 냈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선생님, 하고 부르는 학생처럼.
“혼자 나대다가 얻어맞은 걸 제가 어떡합니까. 피를 철철 쏟아내면서 반 죽어가고 있는데 ‘아까워! 아껴 써!’ 이러면서 주지 않을 수도 없잖아요. 게다가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하물며 이건…….”
연하가 끼어들었다.
“내가 개야?”
도영은 대답했다. 매우 단호히.
“미친개지.”
연하는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리웨이의 눈에 살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런.’
좋지 않은 징조였다. 도영이 슬그머니 침대 프레임을 짚고 돌아서 가려는 찰나, 다시 한 번 사방을 뒤흔드는 고함이 울렸다.
“됐으니까 둘 다 꺼져요!”
* * *
하여간 저 여자는 수틀리면 계급이고 뭐고 없었다.
“아, 젠장.”
도영은 짙은 고동색을 띠는 풍성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진짜 고막 터지는 줄 알았네.”
그는 혼혈이지만 동양 느낌이 좀 더 나는 단정한 이목구비를 가진 미남으로, 햇볕에 조금 그을린 연한 올리브색 피부가 건강미를 뿜었다.
키는 180cm 초반쯤, 직업을 보여주듯 티셔츠 위로 드러나는 몸이 날씬하면서도 다부졌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 도영은 돌아보았다.
옆에서 걸어가는 연하는 허공의 불분명한 곳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꼭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뭔가를 응시하고 있는 고양이처럼.
물론 그러면서도 빨대로 주스를 빨아들이는 입은 쉬지 않았다.
색색의 실로 엮은 팔찌를 찬 팔이 그녀가 걸을 때마다 힘없이 흔들렸다. 하얀 도화지에 가는 만년필촉으로 그린 것 같은 팔목에 차고 있는, 보풀이 일어난 낡은 팔찌는 왠지 가시관을 연상시켰다.
<루챠챠>
도영은 연하가 들고 있는 웃긴 이름의 보충제 주스를 물끄러미 보았다.
“맛있냐?”
연하는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아주 맛있다는 의미였다.
“요즘 진짜 별게 다 나오네. 난 처음에 무슨 새로 나온 프로틴 주스인가 싶어서 먹을 뻔했잖아.”
“인간을 위한 게 아니라고 쓰여 있잖아?”
연하는 주스의 하단에 적혀 있는, 친절한 안내 문구를 가리켰다.
그 옆에는 자그마하게 사람 모양이 마시는 것을 금지하는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보험 약관이냐? 그렇게 조그만 글씨를 어떻게 읽어?”
도영은 정색했다.
“난 보이는데.”
“너야 그렇…… 앞에 봐.”
도영은 벽에서 튀어나온 기둥에 부딪힐 뻔했던 연하를 끌어당겼다.
“아.”
연하는 멍한 소리를 내며 끌려왔다. 이럴 때 보면 루아스의 육체 능력이란 것에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아무튼.
“좀 큰 지부에는 자판기도 있다더라. 근데 자판기는 좀 위험하지 않나? 누가 멋모르고 뽑아 마시면 어떡해? 뭐, 마셔도 죽진 않겠지만……. 아, 대신 철분과다섭취로 속이 엄청 메스꺼우려나.”
한참 말하는데, 연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팩 주스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자판기…….”
중얼거리는 본새가 아무래도 부러운 모양.
도영은 피식 웃었다.
“하긴, 그런 게 있으면 편하긴 하겠다. 넌 받으려면 항상 의무대에 가야 하니까. 잔소리도 덤으로 얻고.”
도영은 뻐근한 팔을 뒤로 돌려 스트레칭하며 덧붙였다.
“세상 진짜 좋아졌지. 옛날에는 피를 마시지 못해 아사하는 뱀파이어도 있었다는데.”
어쨌든 플라스틱에 이어 세기의 혁신물질로 불리는 하이마가 개발된 이후로는 피를 마신다는 것 자체가 자동차를 두고 굳이 마차를 타는 것 같은, 가성비가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일이 되었다.
초르르르르륵.
그때 텅 빈 팩에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빨아내며 빨대가 허공에서 떨리는 소리가 났다. 도영은 엄마 젖을 빨듯 빨대를 빠는 연하에게서 주스 팩을 빼앗았다.
“야, 야, 그만해. 다 마셨잖아.”
팩을 우겨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자, 연하는 못내 미련이 남는 시선으로 좇았다. 도영은 쯧 혀를 찼다.
“하여간 넌…….”
못 먹고 큰 것도 아닌데 유난히 음식에 집착하는 자식이 한심한 부모처럼 한 마디 하려는데, 그를 돌아보는 얼굴이 파리했다.
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창백한 것 같은데.’
원래부터 백지장 같은 얼굴이긴 하지만, 먹색에 농도가 있듯이 창백한 색에도 농도가 있는 법이었다.
평소에는 투명한 대리석 같다면, 지금은 푸른 냉기 같은 기운이 돌아서 오히려 송장 같은 느낌이었다.
역시 간밤에 지나치게 피를 흘려서일 것이다.
‘어쩐지 평소보다 더 심하게 멍을 때리더라.’
“너…….”
그때였다. 도영은 나머지 손을 원위치로 돌리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치고 말았다.
“아, 죄송…….”
사과하며 돌아본 도영은 표정이 경직되었다.
경멸 어린 시선으로 보는 세 명의 남자.
정복을 입고 있었다.
그가 보이는 경멸은 단순히 상대가 싫다거나, 본인과 맞지 않다거나, 한심하다는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종적인 거부감이 뿌리 깊게 느껴졌다.
“이거, 이거.”
도영은 표정이 굳었던 게 언제였나는 듯 씩 웃었다.
“우리가 무슨 전염병 보균자도 아니고 너무 과민반응인 거 아닙니까?”
그들은 지휘관급 장교인 도영을 의식해서인지 대놓고 뭐라고 하진 않았지만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전염병 보균자가 하나 있지 않습니까?”
도영은 빙긋이 웃었다.
“에이즈 환자를 만지기만 해도 전염된다고 할 몰지각한 분이시군요. 무슨 문둥병인 줄 아십니까?”
세 남자는 아주 미묘하게 웃었다.
“흡혈귀 주제에 말이죠.”
그러고는 갈 길을 갔다.
뒤에 남은 둘은 시선을 교환했다. 연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신과 무관한 일인 것 같은 어조로.
“사실이니까.”
도영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중앙루아스권위원회에서도 학명인 ‘호모 비벤스’나 ‘루아스’ 외에 모든 명칭을 차별적 언어로 규정하고 금지하고 있는 거 몰라?”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문제라고 할까. 장애자를 장애인으로, 애완동물을 반려동물로 바꿔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정치적 올바름 같은 문제에 무심한 민간에서는 여전히 뱀파이어나 드라큘라 같은 옛 이름으로 부르지만.
그래서 위원회도 인식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바뀌기 힘들다는 점을 인정하고 공익광고를 찍거나 올바른 명칭을 위한 운동을 펼치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 중이었다.
하지만 뱀파이어를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지부 내에서도 이 정도여서야…….
“아직도 차별 없는 아름다운 세상은 요원해 보인다.”
도영은 고개를 저었다.
“하루 이틀 보고 산 것도 아니고 질리지도 않아요, 저것들은. 힘이 남아돌아서 저러는 거지. 졸라 뺑뺑이를 돌려줘야 돼. 헛소리할 힘도 없게. 그리고 너도 말이야.”
도영은 삐딱하게 서서 연하를 가리켰다.
“차라리 짬으로 눌러 버리라고. 아무리 우리 팀 군기가 개판 오 분 전이라지만 다른 팀 녀석들까지 상사 보기를 길가의 짱돌 보듯 둬도 되겠어?”
“그래봤자 소령님만 곤란해지는걸.”
도영은 열일곱에 이례적으로 육사를 조기 졸업한 이래 임관해 정확히 최소 복무기간 11년 만인 스물여덟에 소령으로 진급했다.
이쪽 바닥은 진급이 빠르니까 없을 법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드문 일이어서 디비전 내 여섯 개 팀을 지휘하는 중대장들 중 가장 어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밀릴 성격이 아니라서 더 문제였다.
열 받은 그가 계급장 떼고 지랄하기 시작하는 순간 동네 꼬마들 싸움이 부모 싸움으로 번지듯이 일이 커지기 때문이었다.
이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였다.
반면 도영은 할 말을 잃은 얼굴이었다.
“네가 남 걱정할 때냐?”
말은 그렇게 해도 한 꺼풀 꺾인 어투였다.
‘짓는 개를 상대하는 게 더 바보 같은 일이지.’
연하는 그걸 더 오래 전에 깨달은 거겠지만.
“그리고 소령님도 나한테 흡혈귀라고 하잖아.”
“그거야 애정을 바탕으로 한 거지.”
그리고 노력은 하지만 루아스라는 단어가 입에 잘 붙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언어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닌가? 어느 날부터 누군가가 강요한다고 해서 한순간에 바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애정 필요 없는데.”
“뭐, 인마?”
도영은 연하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강도는 세지 않았지만 연하의 고개가 옆으로 젖혀졌다.
“아.”
“그런데.”
도영은 갑자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런 늦은 시간에 정복을 입은 대원들이 돌아다니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분위기가 좀 다르지 않아? 왠지 소란스러운데.”
연하가 대답하기도 전에 도영은 깨달은 얼굴이 되었다.
“아, 국장이 새로 온다고 했지.”
얼마 전 대대적인 인사 발령이 있었다.
그들처럼 현장에서 뛰는 말단 대원들이야 어제와 오늘이 다를 바 있겠느냐마는, 상부는 상당히 그림이 변했다는 것 같았다.
특별히 능력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딱히 나쁜 점도 없었던 그들의 전 국장도 그 파도에 쓸려나갔으니까.
도영은 중얼거렸다.
“이런 타이밍에 말이지.”
“무슨 타이밍?”
그제야 도영은 자신이 아직도 연하의 머리채를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하는 별말도 없이 기다리고 있었고.
“야, 넌 진짜…….”
도영은 이게 바위인지 곰인지 사람인지 헷갈려 한 마디 하려다가, 그냥 손을 놓았다.
“됐다, 됐어.”
갑자기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도영과 연하는 동시에 돌아보았다.
“가끔 두 분이 그러고 계신 거 보면 기분이 묘해진다니까요.”
둘과 안면이 익은 총무과 직원이 지나가고 있었다.
“누가 두 분을 또래로 보겠어요?”
도영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했다.
“제가 더 어리거든요.”
계급이 상사라는 데서 어느 정도 짐작했겠지만, 이런 얼굴을 하고 있어도 연하는 서른한 살이었다.
“그러니까 느낌이 더 이상한 거죠.”
도영은 연하를 보았다. 연하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조금 고개를 젖혔다.
“그러게요.”
확실히 이 얼굴을 보면 괴리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는 건 인정했다. 그야 이제 익숙해져서 거의 별 생각을 안 하지만.
“안 가?”
연하가 물었고, 도영은 가라는 듯이 엄지손가락으로 정문 쪽을 가리켰다.
“어디 가세요?”
직원이 물었다.
“팀원들끼리 앞에서 한잔하려고요.”
어쨌든 임무를 무사히 끝낸 기념으로 말이다. 다른 팀원들은 이미 술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잘 드시고 오세요.”
두 사람은 손을 들어 보이고 그리스 식 석주가 받치고 있는 정문을 나섰다.
바람이 불어왔다.
계단을 따라 양쪽으로 늘어선 주두식 전등들이 내뿜는 주황빛이 어스름했다. 낮은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주황빛 물감을 묽게 풀어놓은 것 같은 공기가 묘하게 비현실적이었다.
몇 걸음 앞서 계단을 내려가는 연하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져있었다. 도영은 아까 제게 잡혔다가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깨달았다.
‘하여간 강연하, 칠칠맞기는.’
도영은 다시 제대로 해주기 위해 연하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계단 아래 차 한대가 들어와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