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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짐승-2화 (2/104)

2화. THE MAN (1)

날아간 두 대원이 벽에 처박혔다. 얼핏 보기에 콜사인 아홉과 열이었다.

“큭!”

“윽!”

갑자기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뱀파이어의 파워에 떠밀린 것이었다. 두 대원은 바닥으로 굴러 떨어져 제대로 숨을 내쉬지 못했다.

그들은 인간의 몸으로 뱀파이어를 상대하면서 방심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방심했을 리는 없었다.

용의자가 추정치보다 강하거나 그쪽도 필사적이 된 것 같았다.

“열하나!”

누군가가 외쳤다.

아직 서 있는 열하나가 당하기 직전이었다. 용의자의 손이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열하나는 자신이 당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차마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대원들도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쫓기듯 눈을 깜빡이는 찰나, 열하나 뒤에 소녀가 나타나 있었다.

소녀는 그의 조끼를 잡았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잡아당기는 동시에 몸을 돌렸다.

섬뜩한 파열음이 울렸다.

반대편 복도 끝에 서 있는 소령이 외쳤다.

“강ㅇ…… 여덟!”

하얀 교복에 붉은 물이 번지기 시작했다.

용의자는 미간이 꿈틀거렸다.

소녀는 어깨가 그의 손에 거의 반 토막 난 채였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녀는 낯빛이 서늘했다. 천천히 시선을 들어, 새파란 빛이 흐르는 검은 눈동자가 그를 보았다.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하얀 피부, 검은 눈, 붉은 입술.

계모의 시기심을 샀던 백설 공주가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겐 어디에도 공주 같은 면모가 없었다.

눈에는 무시무시한 야수가 살고 있었고, 입에는 웃음을 잃은 소녀가 죽어 존재했다.

턱, 하고 소녀가 그의 팔을 잡았다.

“좀 아플 거야.”

“무슨 수작…….”

당연히 팔을 빼려고 했지만, 빠지지 않았다. 아까도 느꼈지만 그의 팔을 붙잡은 손의 악력이 무시무시했다.

‘무슨 힘이─’

이건 뱀파이어라 해도 과한 힘이었다. 섬뜩해진 순간이었다.

가까운 거리여서, 그녀의 귓속에 꽂혀 있는 작은 골전도 수신기가 보였다. 인간은 비교할 수도 없는 뛰어난 오감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치직.

수신기에서 기계음이 울렸다. 힘껏 집중하자 그 안에서 울리는 희미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승냥이 열둘.]

[승냥이 열둘, 준비 완료.]

상황을 가늠하는 것 같은 침묵이 짧게 감돌았다.

[그린 라이트 커맨드.]

그는 홱 고개를 돌렸다. 창문 너머, 줌을 당기는 카메라처럼 훅 가까워지는 멀리 건너편 건물에서 빛이 반짝였다. 하지만 겨우 그렇다고 눈치챌 시간밖에 없었다.

팍.

그는 눈을 부릅떴다.

그의 이마 정 가운데에 자국이 나 있었다. 저격수의 솜씨는 완벽했다. 안구의 실핏줄이 터져 눈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일부러 붙잡혔구나!”

그는 울부짖었다. 그리고 소녀에게 다른 손을 뻗었다. 그를 붙잡고 있다는 건 저쪽도 붙잡혀 있다는 의미였다.

피할 길은 없었다. 하나라도 데려갈 것이다.

“Basse la tete(머리 숙여)!”

사방을 뒤흔드는 외침이 울린 순간이었다. 소녀는 온 힘을 다해 몸을 숙였다.

우렁찬 기합소리가 났다. 그리고─

침묵이 감돌았다.

소녀 뒤에 서 있는 소령은 유난히 흉기처럼 생긴 군용 쿠크리를 양손으로 쥐고 있었다. 홈런을 날린 것 같은 자세에서 아직도 칼을 휘두를 때의 힘과 긴장이 느껴졌다.

스륵.

목이 미끄러져 내렸다.

간헐천처럼 피가 솟구쳤다.

“다들 물러서!”

외침이 들렸다. 하지만 붙잡혀 있는 그녀는 피할 수 없었고, 마치 장막을 휘두른 것처럼 솟아오르는 검붉은 액체를 쳐다보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촤아악.

결국 뜨거운 액체를 머리부터 뒤집어쓰고 말았다.

“으윽…….”

보기만 해도 끔찍한지 누군가가 진저리를 쳤다.

쿵.

목이 사라진 남자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겨우 풀려난 소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젖은 빨래처럼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상사님! 괜찮으세요?”

대원들이 뛰어오려고 하자, 소녀가 손을 들었다. 대원들은 멈칫했다.

소녀는 몸을 숙이더니…….

속을 게워내는 엄청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허?”

소령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소리를 내었다.

“인마, 네가 그러면 어떡해?”

“하지만 나 피는 좀…….”

소녀는 다시 토기가 치밀어 오르는지 허리를 꺾었다. 심리적인 거라서 나오는 건 없었지만.

소령은 쿠크리를 어깨에 올리고는, 다른 손으로 삐딱하게 허리를 짚고 섰다.

“나 참, 피를 뒤집어쓰고 토하는 흡혈귀라니.”

“흡혈귀라고 하지…….”

소녀는 말하다가 다시 토기가 올라오는지 허리를 숙였다. 다른 대원들은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상사님께서는 피를 마셔보신 적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연하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대원들은 흠칫 돌아보았다.

“강연하!”

소령도 놀라 달려갔다. 피범벅이어서 몰랐는데, 오른쪽 어깨의 상처가 심각해 보였다.

“너 이 정도면 말을 했어야……!”

연하는 대답할 힘도 없는 것 같았다. 소령은 당장 상의의 포켓에서 반투명한 네모난 케이스를 꺼냈다.

<제노아틱스(Xenoatix)>

브랜드 명이 적힌 케이스의 밀봉을 뜯자, 가느다란 주사기가 나타났다.

소령은 이로 주사기의 뚜껑을 빼내 뱉어냈다.

“힘 빼.”

소령은 엄지손가락으로 팔꿈치 안쪽 부근을 더듬더니, 전문성이 느껴지는 손길로 바늘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저항감도 잠시, 기묘할 만큼 탄성 어린 피부 속으로 이내 쑥 미끄러져 들어가는 바늘과 하얀 팔의 대비가 날카로웠다.

주사기 내용물의 수위가 천천히 낮아졌다.

소령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연하를 흘긋 보았다.

“무식하게 단단한 몸뚱이만 믿고 설치니까 또 그 꼴이 나는 거야. 내가 적당히 설치라고 했지?”

피는 금세 멈추었다. 하지만 이물질이 몸을 도는 느낌에 난폭한 마음이 일었다. 그래서 평소라면 하지 않을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닥쳐.”

하지만 아차, 할 시간도 없었다.

퍽.

소리가 나도록 뒤통수를 얻어맞은 연하는 홱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말 참 예쁘게 한다.”

잠시 침묵.

“Merde(빌어먹을)!”

소령은 바로 손을 털며 욕설을 터뜨렸다. 장갑을 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이 부러진 게 아닐까 싶었다.

“아, 자식, 대체 머리를 뭐로 만든 거야?”

대원들이 낄낄거렸다.

“소령님만 손해라니까요.”

한 대 시원하게 얻어맞고 나니 정신이 드는지, 연하는 멍한 눈을 들었다.

아까 전투의 여신 같은 모습은 거짓말이었던 듯 마냥 순한 어린아이 같은 눈빛이었다.

* * *

“오시는 길은 편안하셨습니까?”

차의 건너편 좌석에 앉은 대위가 물었다.

“아주 편안했습니다.”

낮고 부드러운, 근사하다고 할 만한 목소리에 웃음기가 있었다. 이 대위는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다행히 이 새로 온 상사는 대하기 까다로운 타입이 아닌 것 같았다. 소식을 듣고 밤잠까지 설쳐 가며 고민한 일이 머쓱해지고 말았다.

“관사로 바로 가시겠습니까?”

묻자, 상사는 아래쪽을 보던 눈을 들었다. 단순히 그것뿐이었는데, 이 대위는 움찔하고 말았다.

인간에게서는 볼 수 없는 선명한 붉은 눈동자가 비수처럼 가슴을 찔러들었다. 바깥에서 네온 빛이 쏟아져, 붉은 눈동자에 비늘 같은 무지갯빛 윤기가 지나갔다.

마치 공룡의 것처럼─

그 옆에는 계급장이 달리지 않은 검은 제복을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군인답지 않은 화려한 긴 금발 머리를 묶지도 않고 그대로 늘어뜨려 두었다. 비행기에서 상사를 따라 내린 이래 그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고, 거의 미동도 없었다.

밖에서 빛이 지나갈 때마다 투명해지는 선글라스 너머 붉은 눈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이 대위는 가슴께가 섬뜩했다.

“청사로 먼저 부탁하죠.”

상사가 웃음기를 잃지 않고 말했다. 그가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아, 네.”

이 대위는 제 임무를 상기하고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때 상사가 서류를 넘기자 두툼한 서류 사이에서 얇은 페이퍼백 책이 떨어졌다. 상사 옆에 앉은 금발 남자가 책을 주워 건넸다.

색이 바란 걸 보니 꽤 오래된 책이었다.

“괴테군요.”

이 대위는 의외다 싶으면서도 생각지 않게 친근감이 들어 웃었다.

“요즘 저 말고도 괴테 같은 걸 읽는 분이 있었군요.”

책을 건네받은 상사는 조금 웃었다.

“제게는 아직 젊은 시인처럼 느껴지는데 말이죠.”

“아.”

자기도 모르게 머쓱한 표정을 지었던가 보다. 상사는 피식 웃고 책을 서류가방에 넣으려다 시선이 멈춘 것처럼 바깥 풍경을 보았다.

깨끗한 유리창 너머 도시의 전경이 지나갔다. 우뚝 솟은 마천루들과 쭉 내뻗은 도로, 반짝이는 전광판들.

서울은 예전에 방문했을 때보다 미래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가지런한 치열처럼 고르고 깨끗한 건물들의 향연은 얼핏 봐서는 이곳이 뉴욕인지 서울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현대적인 건물에 기와지붕이나 단청 기둥이 섞여 있는 등 전통적인 느낌도 더 짙어진 것 같았다.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여전한 것은, 밤이 아름다운 도시라는 점이었다.

[다국적 제약회사 제노아틱스가 개발한 ‘하이마(Haima)’는 인간 혈액의 완벽한 대체재로서, 호모 비벤스들의 식량 문제를 해결한 혁신적인 발명품입니다.]

각종 광고와 방송이 흘러나오는 전광판 중 하나가 시선을 끌었다. 인터뷰 기자 앞에 앉은 한 노학자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이마’라는 단어 자체가 그리스어로 ‘피’라는 뜻이죠?]

인터뷰 기자가 물었다. 노학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모 비벤스들이 마시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모르겠지만, 하이마가 혁신적인 점은 피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겁니다.]

인터뷰 기자는 경청하는 자세로 노학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쿨리시다이닌’이라는 성분을 기반으로 하는, 완전히 새로운 물질이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쿨리시다이닌이 발견된 과정은…….]

한참 이야기하던 노학자는 카메라를 보았다.

[하이마의 탄생은 우리 두 종이 공존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든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노학자의 붉은 눈이 부드럽게 빛났다.

[칫솔이 인류의 수명을 두 배로 늘리고, 세탁기가 여성을 집안일에서 해방시켰듯이 말이죠.]

* * *

“이 약품은 말이야.”

막 운을 떼는 그녀의 어조는 완고했다.

<리웨이 파웰>

그녀가 입고 있는 하얀 의사 가운의 가슴에 이름이 수놓아져 있었다.

번뜩이는 은테 안경은 칼보다도 날이 서 있었고, 백의 천사 나이팅게일이 아니라 나이팅게일을 잡아먹었음직한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은 단호한 한 일(一) 자였다.

보라색 매니큐어를 바른 손은 가느다란, 속이 빈 주사기를 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뱀파이어의 상처 치료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편리한 물건이지만.”

안경알 너머 검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좆같이 비싸.”

쪼옥.

그러거나 말거나, 연하는 아동적인 색감을 가진 팩 주스를 빨대로 빨면서 멀뚱히 그녀를 보았다.

차림은 검은 티셔츠에 검은 트레이닝팬츠, 해초 같은 머리카락은 빗지도 않은 채 길게 늘어뜨려 두었다.

의무대 침대에 구부정하게 앉아 팩 주스를 마시는 모습은 어쩐지 다섯 살짜리 아이를 연상시켰다.

“그러니까 이건 비상용이라고, 작전기획실에서 당부하지 않았어?”

쪼오오옥.

리웨이가 말했지만, 연하는 양 볼이 푹 패도록 팩 주스를 빨았다. 리웨이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강 상사.”

침대 옆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도영이 발로 연하의 발을 툭 쳤다.

“응?”

하지만 연하는 무슨 일이라도 났냐는 듯이 멀뚱히 돌아볼 따름이었다.

리웨이는 숨을 크게 삼켰다. 뒤에 일어날 일을 깨달은 도영은 양손으로 제 귀를 막았다.

“강 상사!”

단전에서 끌어올린 우렁찬 외침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귀를 막은 도영마저 고막이 울려왔다. 하지만 정작 연하는 무슨 일이라도 났냐는 듯 멀뚱히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리웨이는 다리에 힘이 빠져 비틀거리며 책상 모서리를 짚었다.

“오, 주여. 누가 이 아이에게 뱀파이어의 초인적인 육체 능력을 주셨나이까.”

도영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연하를 보았다.

‘도대체가…… 맹해도 이렇게 맹할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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