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프롤로그
<‘호모 비벤스(Homo bibens#)’, 즉 ‘마시는 사람.’
우주를 넘어 태초의 지구에 온 외계의 존재,
우리의 근원과 함께 진화해온 형제 같은 존재,
우리는 그들을
‘루아스(Luax)’라고 부른다.
- 마리에테 블란두스, 「이종의 기원과 역사」, p.32 발췌>
소녀는 유리창 너머에 앉아 있었다.
교복을 입고, 허벅지 위에 두 손을 다소곳이 모은 채였다. 단정하게 빗은 긴 생머리는 가슴 밑까지 내려왔다.
발목에 하얀 양말은 깔끔했고, 치맛자락 아래 드러난 두 무릎에 아기의 볼 같은 윤기가 돌았다.
그는 유리창 앞에 앉아, 이제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구식 수화기를 들었다.
벨소리가 나는지 인형처럼 무표정하게 앉아 있던 소녀도 유리 너머에서 수화기를 들었다.
“안녕.”
그는 다정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소녀는 수화기를 들고 있음에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런 소녀가 귀여워서 그는 입가에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분명 미성년자가 있을 리 없는 곳이건만 진짜 고등학생 같았다.
아니더라도 진짜 제 교복을 벗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소녀는 예쁘장한 편이지만, 군중 속에서 두드러지는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군중 속에서는 눈에 띄지 않지만 옆을 지나가면 저도 모르게 돌아보게 되는, 으레 옆집에 살 것 같은 아이였다.
웃는 얼굴이 예쁠 것 같았다.
“혹시 일한 지 얼마 안 됐어?”
사방에 음탕한 붉은 빛이 가득했다. 맛이나 풍미라고는 없는, 오로지 취하기 위한 싸구려 와인을 묽게 풀어놓은 것 같았다.
[어…… 네.]
소녀는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전 손님이었던 중년 남자가 이 앞에 유난히 오래 앉아 있다 싶었는데,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혹시 티가 많이 나나요? 아까 손님도 물어보시던데…….]
“아무래도 너 같은 아이가 앉아 있으니까.”
소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너 같은 아이’라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런 곳에서 일할 것 같진 않은데.”
소녀는 유리창을 보았다. 자신이 보이진 않겠지만, 왠지 소녀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 것 같아 그는 선수를 쳤다.
“손님으로 온 내가 이런 곳이라고 하니까 좀 이상한가? 집 앞이라 가끔 와. 대화 상대가 필요할 때.”
[그렇군요.]
다른 남자들처럼 어떤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온 게 아닌, 그저 외로운 영혼이라고 생각했는지, 아이는 조금 긴장을 푸는 것 같았다.
적어도 그가 전 손님 같지 않다는 데 안심한 모양이었다. 전 손님은, 뭐랄까, 바라는 게 분명해 보였으니까.
“혹시 뭘 좋아해?”
그도 아이가 경계하길 바라지 않았으므로 더 다정한 투로 말을 건넸다. 정말 삼촌과 조카같이 대화하다 보니 아이는 작게 웃어주기까지 했다.
역시 웃는 얼굴이 아주 예뻤다. 조금 어색한 미소였지만, 경계심을 누그러뜨린 것 같아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왜 너 같은 친구가 이런 일을 하는지 물어봐도 될까?”
아이는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그는 대답이 궁금했기 때문에 기다렸다.
[그게…….]
소녀는 볼을 살짝 붉혔다.
[아이를…… 가진 것 같아요.]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지만, 어쩐지 납득됐다.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이유로 돈이 필요하지 않고서야 이런 곳에서 일할 생각은 하지 못했을 테니까.
대화만 하는 곳이라 해도, 여길 찾는 남자들이 유리창 너머 각종 콘셉트 복장을 한 여자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이런 아이라도 잘 알 것이다.
“아이라면…… 남자친구의?”
그가 특별한 내색을 하지 않자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친구는 알아?”
이번에는 고개를 저었다.
[말 못 했어요.]
“왜? 남자친구도 알아야…….”
[지우지 못하게 할 것 같아서요.]
소녀는 이쪽을 쳐다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부끄러워하는 건지, 슬퍼하는 건지, 검은 눈동자에 연한 빛이 돌았다.
‘이 아이로 해야겠다.’
그는 결심했다.
‘우물쭈물하면 뺏길 게 분명하니까.’
이 인근을 돌아다니는 뱀파이어가 그 말고도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눈이 밝은 녀석이라면 이런 아이를 놓칠 리 없었다.
단순히 마시고 버릴 게 아니라 사육하고 싶은 상대는 정말 간만이었다.
착한 딸일 것만 같은 순진한 얼굴로 남자친구와 보호하지 않은 성관계를 하는 발칙한 면이 더 자극적이었다.
[저기……?]
그가 말이 없자 소녀는 의아해하며 불렀다. 그래도 돌아오는 소리가 없자 수화기를 툭툭 쳤다. 고장 났는지 확인해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손님은 들어올 수 없는 방 반대쪽 문 앞에 서 있었다.
문고리를 돌려 열었다.
철컥.
소녀는 자신이 비치는 깜깜한 유리창을 보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유리창을 보았다가, 그곳에 비치는 그를 보고 깜짝 놀라 엉거주춤 일어났다.
소녀는 한눈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당황해서 물러났다.
“너 이 자식, 안쪽에 어떻게……!”
뒤에서 인기척이 들이닥쳤다. 업소를 관리하는 매니저 같았다.
“꺼져.”
그는 돌아보고 이를 드러냈다. 짐승, 그것도 맹수류에 가까운 이가 드러났다.
매니저는 흠칫 물러났다.
“흡혈…….”
매니저를 보느라 그는 소녀의 눈빛이 변하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놀란 듯 크게 뜬 눈에 힘이 들어가면서 예리한 빛이 도는 것을.
얌전히 있던 소녀는 순식간에 벽을 박차고 뛰어올라 다리로 그의 목을 휘감았다.
컥 소리를 낼 새도 없었다. 소녀는 그대로 다리 힘으로만 그를 돌려 바닥에 처박았다.
쿠웅.
굉음이 나고, 방 전체가 흔들렸다.
그는 자신이 몇 바퀴를 돌아 바닥에 떨어졌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바닥에 파고들 것처럼 파묻혀 있어 모조리 흩어져 있는 물건들을 겨우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온 힘을 다해 일어나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벗어나려 할수록 목을 누른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숨이 막히고, 온몸의 혈관이 불끈거렸다.
이건 절대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너 설마…….”
소녀는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그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밀어붙였다. 정말로 총구에 관자놀이가 뚫릴 것 같았다.
“사회보장번호 LKESE-M-0043981. 현 시각으로 귀하를 1건의 살해용의와 6건의 불법 흡혈용의로 체포합니다.”
아까와 같은 음성이지만 톤이 너무 달라 같은 목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눈 옆으로 얼핏 보이는, 빛을 등져 음영이 진 얼굴이 무겁고 심각했다.
검은 눈동자는 날카로웠다.
“당신은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으며 변명의 기회가 있고 체포구속적부심을 법원에 청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녀는 익숙하게 미란다원칙을 읊고 나서 말했다.
“승냥이 여덟, 상황 종료.”
탁탁탁.
방 밖에서 무거운 발걸음들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리고 문가에 검은 군홧발들이 나타났다.
잠깐 안쪽의 상황을 가늠하더니 자세를 풀고 어설트 라이플의 총구를 내렸다.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해서 놀랐는데 싱겁게 끝났군.”
군화들 사이로 낡은 구두 하나가 들어왔다.
“괜찮으십니까?”
바닥에 파묻혀 있는 그는 설마 싶었다.
힘겹게 눈을 더 들자, 중무장한 대원들 사이로 소녀의 전 손님이었던 중년 남자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중무장한 남자들 중 하나가 중년 남자에게 척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와, 중사님, 메소드 연기. 장난 아니던데요? 이런데 좀 다녀보셨나 오해할 뻔했잖아요.”
중년 남자는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막 그에게 수갑을 채우고 있는 소녀에게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상사님.”
‘상사?’
그는 놀랐다.
그렇다면 이 소녀가 중년 남자보다 상급자라는 의미였다.
“괜찮아요.”
소녀는 무심하게 대답하는가 싶더니, 덧붙였다.
“다른 데 가서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않으시면.”
“진짜, 저희가 아청법 위반으로 신고하고 싶을 정도였다니까요.”
한 대원이 장난처럼 말하자, 다른 대원이 덧붙였다.
“상사님이 진짜 미성년자가 아니라서 다행이죠.”
그때 두 대원이 그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는 그제야 소녀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소녀는 총을 다시 교복 허리춤에 집어넣고 있었다.
“그럼 임신했다는 것도…….”
그가 말하자, 소녀 옆에 서 있는 대원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돌아보았다.
“했겠냐.”
소녀는 그 대원을 보았다.
“근데 변명을 해도 왜 하필 임신을 했다고 하라 해? 깜짝 놀랐잖아.”
대원이 파리 눈 같은 야간투시경을 밀어 올리자, 잿빛이 섞인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눈만 봐도 동서양 혼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너처럼 생긴 녀석이 유흥비 벌려 한다는 게 더 이상하잖아.”
“나처럼 생긴 게 뭔데?”
나이차가 있어 보였음에도 꼭 친구를 대하는 것 같은 투였다.
“소령님.”
그때 다른 대원이 부르자, 소령은 돌아보느라 대충 대답하고 그쪽으로 갔다.
“얼빠진 얼굴이다. 됐냐?”
소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설마 ‘그런가?’ 하고 생각해 보는 건가 싶었다. 쳐다보고 있자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을 보았다.
검은 눈동자는 무심했다. 겉모습은 처음 봤을 때와 다르지 않았지만, 그 눈 속에 사는 것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모든 상황에 압도되어 겁을 먹은 소녀가 아니라, 좀 더…….
갑자기 거칠게 당겨졌다.
“뭘 보고 있어? 나와, 인마.”
한 대원이 그를 밖으로 끌어냈다. 그는 복도로 밀려 나갔다.
소녀는 새삼 방을 둘러보았다.
교실을 모방한 공간이어서 한쪽에 칠판이 걸려 있었고,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 앞에 책상이 있었다.
따르릉.
그런데 갑자기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가 울렸다.
전화는 유리 너머에 있는 소위 ‘손님’들과 이야기하기 위한 내선 전용이었다. 이 난리 통에 누가 건너에 앉았을 리는 없지만, 소녀는 의아해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말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녀는 까맣게 칠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유리를 응시했다.
‘누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쾅.
갑자기 문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소녀는 흠칫 고개를 돌렸다.
“잡아!”
밖에서 대원들이 외치는 소리,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
소녀는 당장 방을 박차고 나갔다.
* * *
“그래.”
뼈대가 굵은 손이 옛날식 수화기를 잡고 있었다.
“연락해.”
통화를 끝내고 손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손은 그대로 수화기 위에 잠깐 머물러 있다가, 턱으로 향했다.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 턱을 괸 채 창밖을 보는 남자는 하얀 와이셔츠에 무늬가 촘촘한 넥타이를 맨 모습이었다. 어깨가 넓었고, 깨끗한 와이셔츠 칼라 위로 울대가 두드러졌다.
옆으로 단정한 치마 유니폼을 입은 전용기 승무원이 가볍게 목례하고 지나갔다.
뒤쪽으로 간 승무원이 승무원용 좌석에 벨트를 매고 앉자, 조종실에서 캡틴이 돌아보고 말했다.
“착륙합니다.”
남자는 불이 들어온 안전벨트 사인을 보며 등받이에 편하게 등을 기대었다.
비행기 창 너머로 구름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저녁 속으로 다이빙하듯이, 저녁 기운에 감싸인 대지가 성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곧 동체가 활주로에 내려서는 진동이 전해져 왔다. 창밖을 보자, 내뻗은 활주로 너머 검은 물속으로 붉은 태양이 가라앉아가고 있었다.
택싱(지상에서 바퀴로 이동하는 일)이 끝나고 안전벨트 사인이 꺼졌다. 그는 안전벨트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있습니다.”
승무원이 코트를 가져다주었다.
“감사합니다.”
남자가 돌아보고 말하자, 승무원은 단정함을 잃지 않았지만 수줍어하는 얼굴이 되었다.
캡틴이 조종실에서 나와 경례하고 말했다.
“건투를 빕니다.”
문 앞에 선 그는 캡틴을 돌아보았다.
“전쟁터에 나가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캡틴은 웃었다.
“그보다 더 행운이 필요하실 테니까요.”
그는 조금 웃었다.
“감사합니다. 기지까지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캡틴은 제 걱정은 하지 말라 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문이 밀려나고, 바람이 불어왔다. 습도가 높은 바람이었다.
탑승 계단 아래 검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양옆으로 도열해 있었다. 그 끝에는 검은 차량이 대기하고 있었고, 짙은 카키색 제복을 입은 젊은 한국인 사내 하나가 앞에 서 있었다.
다이아몬드 세 개가 수놓아진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비행기 탑승구 밖으로 구둣발이 나왔다. 그리고 탑승 계단을 내려와, 간격마저 맞춰 서 있는 검은 다리들 사이로 걸어왔다. 남자는 이내 사내 앞에 섰다.
사내는 힘차게 경례했다.
“이경헌 대위입니다. 오늘부로 전속부관으로 발령받았습니다.”
꽤나 긴장한 상태인 것 같아, 그는 손을 뻗었다.
“반갑습니다.”
“네? 아, 네.”
그가 악수를 청하는 일이 뜻밖인 것 같았지만, 이 대위는 임기응변을 발휘해 바로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차량 쪽으로 손짓했다.
“모시겠습니다.”
# 라틴어 원형동사 Bibere의 의미는 ‘마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