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외전
열 살 남짓의 붉은 머리 소년은 저물어 가는 해를 보며 귀가했다.
새벽에는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고, 오후쯤에는 책방에 가서 책을 필사하는 일을 도왔다.
그래 봐야 신분도 학력도 없는지라 벌어들이는 돈은 하루 먹고살 돈과 아버지의 약값 정도밖에 되질 않았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어느 순간 병상에 누웠고, 어머니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그의 옆에 쭉 있었다.
병간호한다지만, 소년이 보기에는 그저 죽는 순간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겨우 약값을 충당하지만, 아버지가 쾌차하시면 다시 예전처럼 화목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년은 똑똑히 그날을 기억했다.
어김없이 똑같은 하루의 끝에서, 석양을 등진 채 아버지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를 나이에, 그는 눈으로 직접 죽음을 마주했다.
아아. 아버지는 돌아가신 거구나.
미동도 없이 굳은 그 모습은 어제의 모습과 같지만, 달라 보였다.
소년은 천천히 다가가 어머니를 깨웠다.
“…어머니?”
“아아. 젠킨스.”
초점 없는 어미의 눈이 소년을 향했다.
제 아비와 똑 닮은 붉은 머리.
어머니는 차가운 주검이 된 남자를 끌어안으며 허망하게 웃었다.
“이래서 인간은 싫었는데. 너무 빨리 죽잖아.”
소년은 침을 꿀꺽 삼킨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반마족도 빨리 죽나…?”
“어머니. 아버지가….”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죽은 자를 멍하게 쳐다봤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치고, 그녀는 아비의 팔을 가차 없이 뜯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그 팔은 몇 초 지나지 않아 어머니의 입 속에 들어 있었다.
“네 아버지랑 하나가 되는 중이란다.”
어머니가 먹던 팔을 소년에게 건네며 물었다.
“너도 먹을래?”
그때 열 살 소년은 태어나 처음으로 소름이 돋는다는 게 무엇인지 느꼈다.
“아니면 너도 그냥 여기서 죽을래?”
소년은 뒷걸음질을 치며 도망치듯 그곳을 벗어났다.
* * *
키엘이 황제가 되고, 벨라가 황후가 된 후.
그들의 일은 그전보다 늘어나면 늘어났지, 절대 줄지 않았다.
젠킨스는 해도 해도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업무에 짜증을 부렸다.
“아가씨. 맨날 그렇게 빈둥거리니까 내일 봐야 할 업무가 더 늘잖아요.”
집무실도 다른데 벨라는 심심하면 키엘의 집무실로 오곤 했다.
그래 봐야 어차피 옆 방이긴 했지만.
“나 지금 일하고 있잖아.”
“그게 일하는 겁니까?”
“응.”
젠킨스는 키엘의 무릎 위에 머리를 옆으로 뉘어 서류를 보고 있는 벨라에게 말했다.
일이 늘어난 만큼.
이들이 붙어 다니며 노닥거리는 시간도 늘어나면 늘어났지, 이 또한 줄지 않았다.
“도련님까지 방해하고 있잖아요.”
벨라는 실눈을 뜨고 젠킨스를 노려보다, 고개를 돌려 키엘을 올려봤다.
언제부터 보고 있던 건지, 벨라는 키엘과 눈이 마주쳤다.
“키엘, 젠킨스가 일어나래.”
“싫어.”
“젠, 키엘이 싫대. 어쩌겠어. 황제의 명령인데.”
젠킨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쩔 수 없어. 오늘 내가 내기에서 졌거든.”
그놈의 내기.
두 사람은 대련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그러다 가끔 대련으로 내기하곤 하는데,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이 온종일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였다.
사실 내기 대련 자체가 두 사람의 화해 방식이었다.
누구든 사과하고 싶은 사람이 먼저 져주는 것.
참고로 이 내기에서 벨라가 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여태 사고치고 말실수하고, 키엘이 겨우 화를 참는 걸 보면서 벨라가 먼저 꼬리를 내렸으니까.
젠킨스는 한숨을 내쉬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왜 어제 그런 소리를 해서….”
벨라는 젠킨스를 노려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질책했다.
“야. 넌 입 떼지 마. 다 너 때문이야.”
“그게 왜 저 때문입니까?”
“네가 애초에 300년 동안 돈이라도 좀 모아놨으면 내가 이렇게 조마조마하진 않았을 거 아냐.”
“와. 진짜 이제 꼬투리도 아주 창의적으로 잡으시네요.”
“100년 전에 아무거나 사서 잘 모셔놨으면 지금쯤 벌써 골동품이 되어서 값이 여러 배는 뛰었겠다.”
벨라의 공격에 젠킨스는 멍하게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무슨….”
누군들 멍청해서 돈을 모으지 못했나.
젠킨스는 그저 입을 다물고 오래전을 회상했다.
* * *
약 300년 전.
어린아이가 혼자 살아가는 건 힘든 일이었다.
어머니, 루시트가 그를 죽이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향을 떠나 여기저기를 유랑했다.
다행히 고향의 서점에서 책을 필사한 경험이 있어 그걸로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렇게 열 살짜리 아이는 스무 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되었다.
어머니의 일은 충격이었지만, 그에게는 좋은 친구들과 동료가 생겨났고 그럭저럭 평범한 생을 사는 줄 알았다.
그러나 마흔이 되고, 쉰이 되었을 때 그는 오래전 어머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 “반마족도 빨리 죽나…?”
점점 머리가 새하얘지는 친구들과 달리, 그는 스무 살의 모습에서 변한 게 단 하나도 없었다.
“젠킨스…. 넌 참 늙지 않는구나?”
“하하….”
“내 아들이랑 같은 나이라고 해도 믿겠어.”
“그래?”
“…사람들이 네 정체를 궁금해하더라.”
마족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지만, 괴물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젠. 나는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젠킨스는 처음 사귄 친구들의 곁을 떠나야 했다.
새로운 마을에 적응하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힘이 들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의심의 싹이 텄고.
그를 보고 ‘이상하다.’며 수군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 후로는 의심을 살만할 때면 거처를 옮겨 다녔다.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정처 없이 돌아다니며, 정이 들만하면 헤어지길 반복하던 그는.
외로움에 못 이겨 다시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갔었다.
하지만 그곳에 그를 반겨주는 이들은 모두 차가운 땅 밑에 묻혀 있었다.
“… 반마족.”
그때부터였다. 젠킨스가 마계에 가서 살기로 마음먹은 게.
마족에 대해 잘 몰랐지만 적어도 인간들처럼 빨리 죽지는 않을 테니.
반은 인간이나 반은 마족이기에 그래도 될 거로 생각했다.
그 후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곳곳에서 자료를 모았다.
그는 평생토록 책을 필사하는 일을 해왔기에, 마계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도 몇 년이 걸렸다.
평생 모았던 돈을 지불하고, 마계로 가는 문을 열 수 있는 마법사도 찾았을 때.
젠킨스는 드디어 어머니의 세계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녀와의 마지막은 좋지 않았지만, 그가 마계에서 살 수 있게 해줄 거로 생각했다.
어차피 인간계에서도 사는 게 지쳤으니. 마지막 발악인 셈이었다.
젠킨스가 백 살 남짓 되었을 때.
그는 드디어 마계로 갈 수 있었다.
마계는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어두웠다. 푸른 달이 하늘의 반을 가렸지만, 달빛이 그리 환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살만하겠네.’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인간이다!”
왜냐하면 마족들은 인간을 잡아먹으니까.
호기심으로 따라왔던 마법사는 마계를 둘러보던 중, 눈 깜짝할 새에 마족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젠킨스는 촉을 세워 숨었고, 동물처럼 생긴 마족들이 코를 킁킁거리며 그를 찾았다.
“여기 근처에 인간 냄새가 또 나는 거 같은데!”
그는 몸을 숙여 기다시피 그곳을 도망쳤다.
가는 곳곳마다 마족들이 ‘어디선가 인간 냄새가 난다.’며 하던 일도 멈추고 인간을 찾는 바람에, 잠시라도 숨을 돌릴 수가 없었다.
‘나는 반마족인데도 인간 냄새가 나나?’
혹시나 자신을 인간이라 착각하고 공격할까 봐 그는 숨어다니다 죽은 마족의 시체의 피를 온몸에 둘렀다.
“… 웁.”
역겨운 행위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며칠을 숨어다니며 눈치 빠른 그는 실제 마계에 대해 하나씩 알아갔다.
대부분이 외형에 따라 종족으로 불렸다.
인간 냄새는 가려졌지만, 인간 모습의 마족이 거의 없어서 계속 숨을 수밖에 없었다.
젠킨스가 가지고 있는 단서는 그가 ‘반마족’이라는 것.
‘…그나저나 나는 무슨 종족인 거지.’
인간 모습의 마족은 몽마밖에 없었는데.
‘…그럼 내가 인큐버슨가?’
하지만 그는 그가 알고 있는 몽마와 거리가 꽤 멀었다.
나이에 비해 어린 외모 덕에 꽤 많은 여자가 다가왔지만, 흔히 말하는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그때였다.
“…하아.”
어디선가 신음이 들렸던 게.
마왕성 외곽에 잠깐 숨어 숨을 겨우 골라 쉬던 젠킨스는, 수풀 속에서 한 고양이과 동물이 피를 흘리는 게 눈에 보였다.
젠킨스는 그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분명 저자가 마족이라는 걸 알고, 피해야 하는데.
‘…마족은 금방 회복된다고 들었는데.’
어딘가 모르게 다가가서 상처를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혹시 자신과 같은 반마족인 걸까.
그리고 그때.
“넌 뭐지?”
검은 털 사이로 푸른 눈동자의 동공과 눈이 마주쳤다.
젠킨스는 속으로 당황했지만, 애써 티 내지 않으려고 했다.
“다쳤어?”
“…날 먹으려고?”
큰 고양이는 절뚝거리며 뒷걸음치다 멈췄다.
젠킨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그의 어깨에 검 하나가 꽂혀 있었다.
“다친 거야?”
“네놈은 뭔데 내게… 하아. 난 대장군이다. 너 따위에게 먹힐 거 같으냐.”
대장군.
젠킨스는 그 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여태 그의 냄새를 맡고 킁킁거리던 마족들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자.
동족을 먹는 마족이라면, 지금 상처 입고 피 흘리는 대장군을 먹으면 단숨에 그도 대장군이 되겠지.
젠킨스는 천천히 그에게 걸어갔다.
“뭐냐.”
어깨에 꽂힌 검을 단숨에 뺐고, 검을 만진 손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뜬 젠킨스는, 맞은 편에 벽에 걸린 사슴 머리를 보고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깜짝아….’
화들짝 놀라서 일어서니, 옆에 조용히 네 발로 서 있던 마족이 그에게 물었다.
“넌 왜 인간형이지?”
사슴 머리 다음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마족들은 단순하다.
생각이 그리 깊지 않으니 도발에도 잘 걸려들고. 괴물 같은 힘을 가지고도, 머리 쓰는 천족이나 인간들에게 당하기 일쑤였다.
“… 이, 인큐버스니까.”
그러니 이 변명이 먹히길 바랐다.
“그렇군.”
다행히 똑똑한 마족은 아닌 듯싶었다.
이렇게 잘 넘어가나 싶었는데.
표범은 앞발을 들고 뛰더니, 나체의 건장한 남자의 모습으로 변했다.
젠킨스는 위기가 코앞에 다가오는 게 보였다. 이대로 전력을 다해 도망쳐도 모자랄 텐데, 어째서 발이 떨어지지 않는 건지는 모르겠다.
100년을 살았지만, 남성의 나체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애초에 볼일이 없지. 그것도 저렇게 적나라하게. 다.
“그럼 너에게 날 도와준 상을 주지.”
“…네?”
“너희가 제일 좋아하는 거.”
인큐버스라고 하지 말 걸 그랬다.
다행히 구원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잔바르 님! 루시트 님이 선물 보내셨어요!”
구원의 목소리이긴 하였으나, 동시에 젠킨스의 온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는 말이었다.
‘루시트…? 분명 어머니의 이름인데.’
며칠이 지났는지 몰라도 숨어서 찾기란 어렵다.
잔바르는 다시 표범으로 돌아가 문 앞에서 그의 부대가 주는 선물을 받았다.
“역시 루시트는 화끈하군.”
“살아있는 놈으로 보내드렸어요! 이거 몰래 가지고 오느라고 힘들었어요!”
젠킨스는 100년을 살면서 볼꼴 못 볼꼴을 다 봤지만, 저리 처참하게 숨이 붙은 사람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우웁….’
역겨움에 구토가 나올 것 같았다.
“저놈은 뭡니까? 저놈도 인간이에요?”
“인큐버스라는데.”
“처음 보는 놈인데요?”
표범과 곰이 그를 쳐다보자, 젠킨스는 야생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곰이 나가고 잔바르는 다시 뒤를 돌았다.
“인큐버스 맞냐? 어디서 인간 냄새가 나는데.”
“…들고 계신 것도 인간인데요.”
“아! 그렇지.”
잔바르는 들고 있는 인간을 젠킨스에게 집어 던졌다.
“먹을래?”
위기를 넘기면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오는 듯싶었다.
“…아니요.”
젠킨스는 아직도 어머니가 아버지를 먹었던 때를 선명하게 기억했다. 아무리 그에게 마족의 피가 반은 흐른다고 하더라도, 이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잔바르가 눈썹을 씰룩였다. 나름 자기에게 들어온 선물을 나눠주는 건데.
잔바르는 다시 사람으로 변해 나체의 몸으로 젠킨스에게 다가갔다.
“그럼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걸로 상을 주지.”
또 다른 위기를 넘기면 아까의 위기가 찾아오네.
젠킨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넉살 좋은 웃음으로 잔바르를 달랬다.
“그, 그러지 말고 상으로 절 좀 숨겨주실 수 있습니까?”
“오! 좋아! 나도 너 따위에게 내 정기를 주고 싶진 않았다.”
“…….”
젠킨스는 가능하면 이자, 잔바르에게 붙어 루시트에 대해 알아보고, 루시트를 찾아가는 게 우선이라 생각했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 젠킨스는 잔바르의 곁에 머물면서 지냈다.
다행인 건 그의 몸에 꽂혀 있던 성검을 빼주어서인지, 젠킨스를 신뢰하는 것 같았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인지.
게다가 잔바르는 생각보다 단순해서, 젠킨스가 왜 그를 숨겨달라고 했는지 궁금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냥 거기에 있으니 ‘있는가 보다’ 생각하고 시간 대부분을 표범인 모습으로 잠을 자는 데 썼다.
그러다 배고프면 파리가 날리는 시체를 마저 먹고. 또 자고.
그동안 젠킨스는 마왕의 성을 몰래 탐색했다.
‘참…. 인간계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구나.’
방금 청소했지만, 진물이 나오는 종족은 자신이 지나간 거리를 또 청소하고 또 청소했다.
‘대단하다….’
아무리 봐도 지능이 한참 모자란 생물들 같았다.
‘그러니 도서관 같은 것도 없지.’
정보를 빼내 올 만한 곳은 결국 잔바르밖에 없다고 생각한 젠킨스는, 온종일 자는 잔바르의 마음을 사기로 했다.
“고양이과 동물은 다들 여기를 좋아할 거예요.”
젠킨스는 민망하긴 하지만, 표범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오오. 좋다.”
“잔바르 님은 대장군이신데, 바쁘진 않으세요?”
“지금 매우 바쁘지 않나.”
“…지금요?”
“힘을 비축하고 있으니까.”
엉덩이를 두드리던 젠킨스의 손이 잠시 멈췄다.
아무리 봐도 그냥 먹고 자는 거밖에 안 하는 거 같은데.
“계속 두드려라.”
“…네.”
젠킨스는 마저 엉덩이를 두드리며 그르렁 고양이 소리를 들었다.
이때라고 생각했다. 정보를 캐내려고 해도, 정보를 모아두는 데가 있어야 알아보지.
“저, 잔바르 님.”
“왜.”
“루시트 님이랑은 친하세요?”
“그럼. 오랜 친우다.”
그 후로 젠킨스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틈만 나면 잔바르의 엉덩이를 만져주며 루시트와 마계에 관해 물었다.
잔바르는 단순해서, 조금 비위를 맞춰주면 젠킨스가 원하는 정보는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잔바르도 모르는 게 많긴 했지만, 친구라는 루시트의 정보는 확실히 얻을 수 있었다.
루시트는 대장군 중 하나였고, 몽마가 아니라 곰족이었다.
‘…그럼 내 핏줄은 곰이란 말인가.’
젠킨스는 이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마왕의 반려였다는 것.
물론 이곳에는 반려가 인간계에서처럼 ‘사랑’을 바탕으로 한 결혼이란 개념은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다른 사람과 혼인을 한 상태라는 걸 알자, 기분이 묘했다.
아버지를 사랑했을까.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어머니가 아버지를 먹는 모습은 뇌리에 박혀 없어지지 않았다.
“그럼 루시트 님은….”
그때 단순하던 잔바르가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며 젠킨스에게 반문했다.
“…왜 자꾸 루시트 얘기만 물어보는 거냐.”
“예?”
“그 녀석은 너 같은 인간형을 다 싫어해.”
“…왜요?”
“몰라, 나도. 예전에는 인간계에 자주 놀러 가는 거 같더니. 한 100년 전부터인가, 인간은 꼴도 보기 싫어하더라.”
“… 그렇습니까.”
그 말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날 반기지는 않겠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진실에 가까워지자 젠킨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이 밀려왔다.
만약 어머니조차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이곳 마계에서 어떻게 살까?
그때, 잔바르는 젠킨스의 분위기가 이상하다 느꼈다.
엉덩이를 토닥거리는 손도 멈추고. 혼자 생각에 빠진 젠킨스를 빤히 쳐다봤다.
“이봐. 젠킨스.”
잔바르는 왜인지 몰라도, 쓸쓸한 저 눈빛이 보기 싫었다. 자신의 엉덩이나 만져 주는 게 더 좋았다.
젠킨스와 눈이 마주치자, 잔바르는 호기 있게 말했다.
“너. 내 부하가 돼라.”
“…뭡니까.”
“루시트 부하가 되고 싶은 모양인데, 내 부하 해.”
젠킨스는 그 말에 피식하고 웃었다.
마족이고 대장군이면 당연히 무서울 만한데.
언제부턴가 단순한 이자의 행동이 퍽 귀여워 보였다. 그냥 엄청나게 큰 고양이처럼만 느껴진다고 말하면 실례일까.
“제가 잔바르 님 부하를 하면, 뭘 해주실 건데요.”
젠킨스가 가볍게 물었을 때, 잔바르는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일어섰다.
“그럼.”
그리고 잔바르는 순식간에 사람으로 변했다.
“내 정기를 나눠주마.”
젠킨스는 그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어떻게 하는 거냐.”
“아….”
왜일까.
젠킨스는 눈앞의 이자가 마족이라는 걸 아는데도. 적당히 거절하면 될 걸 아는데도, 그 말이 젠킨스의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랜 시간 혼자여서, 그간 쫓기는 기분이어서, 어딘가 소속되지 못한 느낌이어서 그런 걸까.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을 느껴서 그랬던 걸까.
그의 피가 인큐버스가 아닌데도, 마치 잔바르를 유혹이라도 하듯 요염하게 그의 막대에 손을 올렸다.
“정기… 나눠주실 건가요?”
살면서 여자를 안아본 적은 있지만, 남자와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사람의 모습으로 잠깐 변한 표범인데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잔바르는 이상했다.
우연히 지나가다가 날아오는 성검이 어깨를 관통했을 때만 해도, 그는 이렇게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약육강식의 마계.
누구든 그가 피 흘리는 모습을 보면 먹으려고 하겠지.
그리고 그 피를 연상시키는 빨간 머리의 젠킨스가 다가왔을 때, 직감했다.
‘내 몸은 이 이름도 모를 하급 몽마에게 잡혀 먹히는구나’라고.
하지만 그가 기절하면서까지 성검을 뽑아줬을 때.
잔바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마계에서도 물론 친구라는 존재는 있다.
그래서 잔바르도 그의 부대와 오랜 친우 루시트만큼은 잡아먹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 본 자를 위해 이렇게 하는 마족은 처음이었다.
신기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젠킨스의 존재가 그에게 더 궁금증을 안겨줬다.
이자가 그의 곁에 머무르며 그의 엉덩이를 두드릴 때면, 이자가 없던 마계의 시간이 허망할 정도로 지루했다고 생각했다.
여태 한 번도 길다 느껴본 적 없었는데.
이제껏 그에게 먹을 수 있는 것과 못 먹는 것, 두 가지만 존재했는데.
눈앞의 이 인큐버스가 그 둘에 어디에든 속하는 게 신기했다.
잔바르에게도 낯선 몸의 한 부분을 젠킨스가 만졌을 때.
처음 느껴보는 욕정이 낯설었다.
몽마들이나 느낀다는 감정이 이런 걸까.
하지만 자존심이 상한 것도 처음이었을 뿐.
“몽마들이 하는 걸 본 적 있긴 한데.”
잔바르는 젠킨스의 유일한 옷을 두 손으로 찢으며, 벌어지는 가슴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너도 핥으면 기분이 좋냐?”
잔바르의 큰 손이 어느새 젠킨스의 아래를 향했다.
지나가며 질리도록 들었던 몽마의 신음이 이상하게 잔바르를 자극한다.
한 번 맛본 막대 사탕은 너무 달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인큐버스라고 하길, 다행이었다.
사랑에 빠지는 건 필연이었다.
* * *
젠킨스가 도착한 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잔바르의 거처에 인큐버스가 지내고 있다.’라는 발 없는 소문은 소리 없이 퍼졌다.
특히나 사랑 이야기라면 환장하는 몽마들에게 제일 먼저.
상급 몽마 이웨르는 소문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누가 뭘 처소에 들였다공?”
이웨르는 인간계의 19금 연애 소설을 보다가 책을 덮었다.
누가 뭔 소리를 해도 거기에만 빠져 살았는데, 이웨르의 직감이 이건 ‘대특종’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친구들! 다 일어나. 지금부터 마계에서 희대의 스캔들이 나올 예정이니까.”
그 말에 주변의 상급 몽마들도 모두 벌떡 일어섰다.
“일단 내기부터 하자공. 인큐버스가 그냥 홀리진 않겠지. 아마도 (삐-).”
이웨르는 조금 전 보던 소설의 내용이라도 말하는지, 침을 흘리며 고수위의 단어들을 내뱉었고 주변의 하급 몽마들이 그녀를 칭송했다.
“역시 상급 몽마라 표현력이 남달라요.”
“흐흐흐.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엉!”
“나도!”
몽마들은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잔바르의 거처 부근을 잠복했다.
사실 잠복이라기에는, 지나가는 마족들이 다 알아챌 정도였다.
“… 몽마들이 왜 저러지?”
보통 몽마들은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의 힘의 원천은 ‘사랑’이었으니, 마계에서 딱히 힘을 비축할 일이 없었고. 대부분 엉겨 붙어 그들끼리 사랑을 나누거나, 무작위로 인간의 꿈에 들어가 정기를 모았다.
그래서인지 이 몽마들의 단체 행동은, 멍청하고 단순한 마족들도 의아할 정도였다.
“이상한데! 마왕님께 얘기해야겠다!”
상급 몽마답게 따라온 몽마들을 인솔하며 이웨르가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내밀었다.
“다들 여기 있엉. 나, 이웨르가 직접 보고 올 테니까.”
“왜! 나도 보러 갈래.”
“내가 저번에 내기에서 이겼으니까 내가 갈 거양!”
“우리가 언제 내기했어?”
“10년 전에 했잖앙! 바보!”
몽마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웨르와 같은 상급 몽마들은 절대 지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이웨르가 박박 우겨 자신이 잔바르의 거처를 염탐하기로 했다.
“다들 기다려!”
좋은 건 나눠 가진다지만, 마족들에게는 아니었다. 좋은 건 독차지해야지!
이웨르는 살금살금 걸어가 잔바르의 창문으로 머리를 슬슬 올렸다.
‘진짜 인큐버스랑 같이 있을까?’
상급부터 하급까지 이웨르가 모르는 인큐버스는 없었다.
과연 어느 간이 부은 녀석이, 대장군의 침실에 들이닥칠 생각을 했을까.
모두들 몽마들이 좋아하는 그 감정을 경멸시하고, 대장군이라면 더욱 그러할 텐데.
‘잔바르 님이 넘어갈 리는 없을 텐데.’
그때 이웨르는 처음 보는 빨간 머리의 남자와 그 남자의 무릎에 누워 있는 인간형의 잔바르를 보았다.
‘…누구지? 왜 잔바르 님이 인간형으로 있는 거징?’
코를 킁킁거리자, 인간 냄새가 어디선가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확실히 인간 같지는 않았는데.
이웨르가 조금 더 창에 가까이 가 냄새를 맡으려는 순간.
“아…. 망할.”
잔바르의 섬뜩한 눈과 마주쳤다.
순식간에 잔바르는 창문으로 달려와 이웨르에게 이빨을 드러내었다.
“뭐냐.”
다른 몽마라면 모를까, 상급 몽마인 이웨르는 대장군 앞에서도 당당했다.
“여기 인큐버스가 있다고 해서 와 봤는데용.”
속내는 몽마에게 넘어간 잔바르를 보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했다가는 잘릴 수도 있으니 마족들 중 가장 똑똑한 몽마답게 대답했다.
“네가 인큐버스는 왜?”
“몽마니까 찾죠.”
전투 능력이라곤 하나도 없기에 몽마들은 연대해서 뭉쳐 다닌다.
“그, 그렇겠지. 이봐. 젠킨스.”
잔바르가 뒤를 돌았지만, 젠킨스는 어딘가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없다. 돌아가.”
이웨르가 고개를 갸우뚱였다.
“…젠킨스?”
그런 이름은 들어본 적 없었다. 근래에 새로운 몽마가 태어난 적도 없는데.
이웨르가 더 물어보려고 했지만, 잔바르는 쉴 틈도 주지 않고 창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
“어휴, 손가락 끼일 뻔했넹.”
이웨르는 곧장 몽마들 사이에 둘러싸여 ‘젠킨스’라는 몽마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몽마들 중 그 누구도 그를 안다고 하는 자는 없었다.
“인큐버스가 아닌 거 아니야?”
“마족 중에 인간형으로 변할 수 있는 건 대장군들이나 그 수하들 몇몇 정돈데. 우리가 그걸 모를 리가 없잖앙?”
“그럼 이웨르는 뭐 같은데?”
아까의 그 냄새. 분명 인간의 냄새였다. 하지만 인간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애매한 냄새가 있었다.
* * *
무자비한 마계는 어떻게 굴러가는가.
그 모든 해답은 마왕이 쥐고 있었다.
먼 훗날 벨라가 승계를 받으며 알게 되는 것 중 하나가, 이 마계에서 제대로 된 사고를 하는 유일한 이가 사실은 이 악독한 무리의 수장이라는 것이었다.
천족 못지않게 머리를 쓸 줄 아는 유일한 이.
- 물론 몽마들도 똑똑했지만, 일상생활이 불가할 정도로 음란해서 탈락. -
천족은 질서를 바탕으로 서열이 정해지고 힘을 분배받지만.
마족은 힘을 바탕으로 서열이 정해지고 그 위의 정점에 선 자가 곧 질서이자 법이었다.
그런 마족들 사이에서 ‘그나마’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존재.
마왕은 날 때부터 마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마왕에게는 다른 마족들에게 없는 하나가 있었다.
바로 양심이라는 것.
본디 양심이란 태어날 때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사회적 약속으로 학습되는 것이었지.
제국이 건국될 때만 해도, 인간계에서는 노예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국이 들어서면서 노예시장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각 사람의 목숨은 같다는 도덕적 기준을 세우니 그제야 노예를 짐승처럼 다루는 것이 양심에 찔리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마계에서 마왕의 양심은 인간계와는 사뭇 달랐다.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하고, 자신을 저울에 매달고,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역대 마왕들은 성격이 더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 어두운 곳에서 오롯이 혼자만 반성할 줄 아는 고등생물이었기에.
“마왕님!”
마왕은 자신의 보좌에 앉아 손가락을 까딱거리다 신이 나서 그에게 달려오는 마족들을 바라봤다.
‘하여튼 한심한 놈들.’
달려오면서 몇몇은 넘어지고, 미끄러지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마왕님! 몽마들이 단체로 잔바르 님 처소에 가는 걸 봤어요!”
“왜?”
“어…. 그건 모르겠는데요?”
마왕은 미동도 하지 않고 그에게 보고하러 온 마족들을 쳐다봤다.
“뭐 어쩌라고.”
“그러게요?”
마족들은 코 밑을 손가락으로 쓱쓱 만지며 자기들이 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한참을 고민했다.
“잔바르 방에 맛있는 거라도 있나 보지.”
“맞다! 잔바르 님이 인큐버스를 데리고 있대요!”
마왕은 ‘인큐버스’라는 말에 눈썹을 한쪽 올리고 인상을 찡그렸다.
“…잔바르가?”
“네!”
마족들은 대장군인 잔바르가 몽마들이나 하는 사랑놀이에 빠진 것 같다며 놀릴 생각이었지만, 마왕은 그 사태를 조금 더 진지하게 바라봤다.
몽마들은 마계에서 왕따나 다름없는 존재들이었다. 자기들만이 느끼는 그 감정을 누가 이해해줄 수 있으랴.
그런데 대장군씩이나 되는 놈이 인큐버스를 데리고 있다니.
“모두 모이라 그래.”
* * *
마왕은 즉각 마계의 모든 인원을 소집했다.
마족들은 마왕의 보좌 앞에 길게 나 있는 카펫 위에, 가운데를 비우고 마주 보며 일렬로 서 있었다.
꽤 보기 좋은 마군의 모습이지만, 겉모습만 질서정연해 보일 뿐.
오랜만의 소집에 신이 나서 서로 떠들어 대는 바람에 마왕을 알현하는 자리가 아니라 시장통 같았다.
“다들 조용히 해!”
마왕은 짜증을 내며 큰소리로 마력을 내뿜었다.
소집의 원인을 모르는 마족들은 늘 그렇듯 마왕이 신경질을 부린다고만 생각하고 조용히 수군댔다.
“…하아.”
하지만 마왕의 한숨 소리와 함께 그가 호명한 이의 이름을 들었을 때는, 삽시간에 마왕성이 고요해졌다.
“대장군 잔바르.”
“네.”
표범의 잔바르가 한 발자국 앞으로 가서 마왕에게 허리를 숙였다.
“인큐버스를 데리고 있다지?”
“네.”
무엇이 문제인지 몰랐던 잔바르는 있는 사실을 그대로 얘기했다.
마왕은 혀를 차며 다리를 꼬았다.
몽마 녀석들이라면 이게 위기라는 것 정도는 알았을 텐데.
“내가 분명 몽마들의 하찮은 짓거리는 몽마들끼리 하라고 했을 텐데.”
“그딴 거 품은 적 없습니다.”
잔바르는 당당했다.
“그런데 왜 그 몽마를 데리고 있지?”
“제 부하로 들어오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저 정기를 나눠준 것뿐입니다.”
“…정기를 나눠?”
“그냥 꼬리만 흔들어줬습니다.”
그리고 그 말에 많은 마족들이 표범 잔바르가 흔드는 꼬리를 상상하며 피식하고 웃었지만.
마왕은 그 꼬리가 뭔지 알았기에, 점점 분노가 차올랐다.
* * *
마왕의 소집이 있기 조금 전.
젠킨스가 몽마들을 피해 숨어있다 그들이 사라지자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냈을 때.
잔바르는 젠킨스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넌 그나저나 몽마들의 처소로 안 돌아가도 되냐?”
“잔바르 님 부하인데, 여기 있으면 안 됩니까?”
몽마들은, 특히 하급 몽마들은 서로서로 몸을 탐하며 마치 발정이 난 것처럼 구는 것만 봤는데.
이 인큐버스는 희한하게도 다른 몽마들과는 달라 보였다.
그렇다고 상급 몽마는 확실히 아닌데.
하지만 단순한 잔바르가 의구심을 갖자, 젠킨스는 커다란 고양이의 복슬복슬한 털을 만지며 침을 삼켰다.
“여, 여기가 더 좋아서요.”
젠킨스는 스스로 말을 내뱉고 보니 알 것 같았다.
사실 단순하지만, 지식이 짧은 잔바르보다는 몽마들이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곳이 더 좋았다.
인간계에서 지냈던 100년의 세월보다, 짧은 며칠의 이곳에서의 시간이 더.
그건 마계에서의 시간이 아니라 이 큰 고양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거기다 몽마들을 마주치면 젠킨스가 인큐버스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겠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인큐버스도 아닌데 정기를 달라는 마족이 어딨겠는가.
잔바르는 젠킨스를 표범의 눈으로 뚫어지라 쳐다봤다.
조마조마한 게 아무래도 하찮은 몽마들 사이에서도 하찮은 취급을 받는 모양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이라도 들었는지 저장해둔 인간 시체를 젠킨스에게 던졌다.
“이거라도 먹어라.”
“아…. 괜찮아요.”
잔바르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갑자기 인간형으로 변했다.
젠킨스는 이제 저 매력적으로 자리 잡힌 배 근육이 익숙해질 찰나였다.
“그럼 정기나 또 나눠줄까?”
이 마족은 그 행위가 무얼 말하는 건지 알고 저러는 걸까.
젠킨스는 한참을 망설이다 잔바르에게 말했다.
“…잔바르 님. 이제 정기 안 주셔도 됩니다.”
“왜?”
젠킨스는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 그가 젊을 때 잠깐 느꼈던 감정.
잔바르에게는 그저 부하를 위한 행위겠지만, 받는 젠킨스에게는 연정이라는 것을.
누군가는 저 몸을 탐하기 위해 거짓 사랑도 고하겠지만, 사랑 없는 욕정이 얼마나 비참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이쯤에서 정리해야지.’
더 정이 가기 전에 내치는 것.
그게 그간 몇십 년간 젠킨스가 해오던 일이었으니, 쉬울 줄 알았다.
습관처럼 끊어내는 말이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데.
“정기가 안 들어오는 거 같네요. 그래도 부하는 할 수 있잖아요?”
목소리는 떨리고 밀어낸 손에 땀이 차올랐다.
잔바르가 처음에도 정기를 주고 싶지 않다고 했으니, 당연히 ‘좋다’며 하겠지.
그러나 그의 대답은, 젠킨스가 생각한 것과는 많이 달랐다.
“아니.”
그는 불쑥 다가와 젠킨스의 다리 사이로 손을 넣었다.
“난 이 꼬리가 마음에 든다.”
젠킨스는 잔바르의 손을 슬쩍 밀어내면서 얼굴을 붉혔다.
“그, 그럼 다른 인큐버스와 하세요. 전 괜찮습니다.”
잔바르는 젠킨스의 말에 평소 쓰지 않는 머리를 굴리며 상상해봤다.
다른 인큐버스.
그가 알고 있는 인큐버스를 떠올리며, 잔바르는 담담하게 말했다.
“몽마답게 잘도 홀리는구나.”
“…네?”
잔바르는 밀쳐졌던 손으로 젠킨스의 턱을 살짝 올렸다.
“그래. 이게 너희가 말하는 그거구나.”
젠킨스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잔바르의 푸른 눈을 응시했다. 잔바르의 손길이 어제와 다르게 느껴졌다.
“너여야겠다.”
젠킨스는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대단한 사랑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작은 호감이라도 기쁠 것이었다.
“잔바르 님은….”
젠킨스가 신음하다가 입을 떼었을 때였다.
“잔바르 님! 마왕님이 모이래요!”
마왕은 분노의 화살을 몽마들에게 먼저 돌렸다.
“내가 욕정은 너희끼리 하라고 그랬지.”
몽마들은 상황을 지켜보며 침을 꿀꺽 삼키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분명 그들 중 하나는 오늘 심장이 쥐어 짜이리라.
마왕이 고개를 들어 이웨르를 손으로 가리켰다.
“네가 책임져라, 이웨르.”
“네엥? 제가 왜용?”
“네가 지난 100년간 애들 인솔했잖아.”
인솔이라기보다는, 인간계의 19금 서적을 발 빠르게 날랐을 뿐인데.
하지만 인정 없는 몽마들은 떨어지는 이웨르의 주식에 바로 손절했다.
“이웨르가 대표 맞아요!”
“…야.”
당연히 그들은 이웨르보다 마왕이 더 무서웠다.
이웨르도 눈치를 보다 손을 번쩍 들었다.
“마왕님! 그런데 그자는 인큐버스가 아닌 거 같은데용!”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한 말이었건만, 오히려 마왕의 짜증을 더 돋웠다.
“뭐? 인큐버스라며?”
“분명 자기가 인큐버스라고 했습니다.”
“아니에용! 최근 태어난 몽마가 없는 데다가, 저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고용!”
그 말에 마왕은 그의 옆에 서 있는 반려, 루시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루시트는 팔짱을 끼고 별 흥미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대로 고하면 이웨르만 죽이고 잔바르를 대장군에서 내리려고 했는데.
마왕은 곧바로 손을 뻗어 소환진을 펼쳤다.
“만약 그놈이 인큐버스면, 오늘부터 마계에 몽마는 없을 줄 알아라.”
그의 목소리가 어찌나 소름 끼치는지. 수군대던 소리마저 모두 잠잠해질 정도였다.
젠킨스는 갑자기 소환된 탓에 깜짝 놀란 채로, 처음으로 마왕의 얼굴을 직면했다.
누군지 의문이 갔던 건 단 몇 초.
살벌한 얼굴과 느껴지는 분위기에 그가 마왕이라는 걸 안 젠킨스의 동공이 커졌다.
“넌 뭐냐.”
마왕은 젠킨스의 머리를 잡고 내동댕이치듯 던졌다.
다른 마족들과 달리, 회복력이 없는 그는 차가운 맨바닥에 부딪히자마자 어깨가 부서질 것 같았다.
“…설마.”
마왕은 일어서서 바닥에 널브러진 젠킨스의 몸을 발로 뒤집었다.
이 인간과 마족의 냄새가 교묘하게 섞인 냄새.
마왕은 이 역한 냄새를 기억하고 있었다.
“반마족….”
순식간에 마왕성이 시끄러워졌다.
“반마족이라고?”
“진짜 인간 냄새가 옅게 나네.”
“어느 미친 마족 새끼가 새끼를 쳐?”
그들에게 인간은 하등 생물이나 다름없기에 -물론 인간도 마족을 그렇게 생각하지만- 반마족이라는 존재 자체가 역겹게만 보였다.
마족들의 종족 번식은, 그 종족이 가지고 있는 힘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니 어느 마족이든 인간과 결합해 반마족을 낳는다면, 그건 마계의 마력을 빼돌려 만든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여태 반마족의 존재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 부모와 반마족을 죽이는 걸로 마무리를 지었다.
점점 들끓던 마왕의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이 역겨운 반마족 새끼가….”
마왕의 붉은 눈이 점점 붉어지고 송곳니가 길어지고, 얼굴이 짐승과 같이 변했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젠킨스의 목을 잡고 공중에 높이 쳐들었다.
그냥 죽이기는 싫었고. 어떻게 고문을 할지 상상했다.
젠킨스는 황당했다. 갑자기 이곳으로 와서 내동댕이쳐지고 목을 졸리는 게.
그러나 그는 곧 깨달았다.
잔바르의 목소리를 듣고.
“…반마족이라고?”
마지막으로 그에게 연정이란 감정을 일깨워준 자가, 젠킨스에게 이를 드러내며 격정의 감정을 보이고 있었다.
“덜떨어진 반마족 새끼가…. 감히 나를….”
젠킨스는 죽음의 문턱 앞에서 사무치게 ‘외롭다’ 생각했다.
‘아. 이들도 반마족은 싫어하는구나.’
그때 마왕은 젠킨스를 다시 바닥으로 내려놓고 발로 밟은 후, 고개만 뒤로 돌려 잔바르에게 말했다.
“너도 곧 죽을 줄 알아라.”
젠킨스는 죽음 앞에서 무서울 게 없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그는 이대로 먼저 떠난 벗들의 곁으로 돌아가는 게 괜찮았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누군가 죽는 건 싫었다.
“제가 저자를…. 유혹하고 덮친 겁니다. 그러니 잔바르 님은 죽이지 마세요.”
역겨운 감정의 냄새가 마왕의 심기를 거스른다.
“너도 그냥 죽여서는 안 되겠구나.”
그때였다.
“…젠킨스?”
누구도 몰랐던 반마족의 이름을 부른 건, 루시트였다.
젠킨스는 고개를 겨우 돌려 마왕의 오른편에 서 있는, 지난날과 단 한 톨도 변하지 않은 자의 얼굴을 보았다.
“…어머니?”
폭풍전야였다.
모두가 숨죽이고 고요한 정적을 깬 건 마왕의 살벌한 목소리였다.
“…루시트.”
이제 보니 루시트가 인간형일 때와 젠킨스는 똑 닮아 있었다.
100여 년 전 인간계에서 수십 년간 살았을 때 낳은 새끼가 분명했다.
“어떻게 네가 감히….”
어떻게 그가 가장 신뢰하던 반려가 배신할 수 있는가.
마왕이 숨을 내쉬는 순간, 붉은 공기가 입 안에서부터 밖으로 흘러나왔다.
마왕은 루시트와 잔바르를 보좌의 등받이 쪽에 검으로 꽂아 넣어 고정하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봤다.
“똑똑히 봐라. 반마족을 허락한 죄가 어떠한지. 저 녀석이 죽는 순간까지 다 지켜보고, 네놈들도 똑같이 그리될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젠킨스의 발아래로 어둠이 그를 둘러싸기 시작했고, 중력에 이기지 못해 어둠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계가 전부 뒤틀릴 정도의 살기를 내뿜으면서 마왕의 눈은 루시트를 향했다.
“루시트!”
반려이기에 마왕의 힘을 쓸 수 있었던 루시트는, 검에 찔린 채로 사력을 다해 마계에서 인간계로 가는 통로를 만들었다.
하급 마물들은 통과할 수 있으니. 반마족인 젠킨스도 당연히 가능하겠지.
마왕은 먹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젠킨스를 잡으려 했지만, 마왕의 손은 가까이도 가지도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미안하다.”
젠킨스는 루시트의 마지막 말을 들었을까.
하지만 마왕은 그 말을 똑똑히 들었고, 그의 분노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극에 달았다.
“…네놈이 감히!”
마왕의 등 뒤로 커다란 날개가 펼쳐지며, 눈의 흰자까지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왜 반마족 따위를 만들었지.”
변명을 듣고 싶었지만, 루시트는 마왕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로 대답했다.
“…그 사람을 사랑했어요.”
하늘의 붉은 구름이 빠르게 움직이며 마왕은 눈에 보이는 대로 분노를 쏟아냈다.
이웨르는 얼른 그 자리를 도망가 남은 몽마들을 데리고 도망쳤다.
“이웨르, 마왕님이 왜 저러시는 거야?”
“나중에!”
등 뒤에서 들리는 비명에 돌아보지 못하고 앞으로만 달렸다.
왜냐하면 방금 질문을 던진 몽마의 비명이 이어졌기에.
겨우 빠져나온 이웨르는 한발 물러서서 그 모든 것을 눈에 새겼다.
‘와…. 파국이다.’
200년 전 마계의 그날은 마족들에게 똑똑히 각인된 날이었다.
마왕은 곰족의 가장 어린 마족 하나를 남겨놓고 모두 몰살시켰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푸르는 변방으로 쫓겨나, 반마족을 만들어 낸 종족의 최후가 무엇인지 모두에게 똑똑히 알렸다.
마왕은 이 모든 걸 루시트가 보게 하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심장을 꺼냈다.
“…….”
그가 루시트에게 한 말은 그 어느 누구도 몰랐다.
다만 루시트는 자신의 심장이 마왕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며, 드디어 그녀가 사랑했던 이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반려였던 루시트가 죽고, 그의 힘이 다시 그의 안으로 들어오자 이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마왕이 입가로 흐르는 피를 팔로 닦으며 잔바르를 쳐다봤다.
“…넌 100년간 감금하겠다.”
대장군을 한 번에 둘씩이나 죽일 수는 없었다.
새로운 대장군으로 지네족의 록산이 루시트의 자리를 대신했다.
그리고 마왕은 이 수치스러운 일에 대해 그 어느 누구도 발설하지 못하도록 마족 전체에게 복종 서약을 걸었다.
- 물론 이미 본 바를 다 말해버린 이웨르 탓에, 몽마들과 마족들은 눈치 보며 자기들끼리 ‘희대의 젠장’이라는 키워드로 떠들며 흉보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
덧붙여 마왕은 인간계로 갈 수 있는 모든 통로를 막았고, 그가 동면하기까지 그 어느 마족도 인간을 납치해 올 수 없었다.
반면 인간계로 다시 쫓겨난 젠킨스는 부서진 어깨를 부여잡으며 한 가지 생각에만 사로잡혔다.
‘잔바르 님이 죽었을까.’
당시에는 몰랐다.
그저 그걸 확인해보고 싶었던 게 200년이나 걸릴 줄은.
세월이 흐르고 제국의 황제가 몇 번이나 바뀌는 동안 돈이 모이는 대로 홀로 유랑하며 잔바르를 소환해 줄 마법사를 찾았었다.
마왕이 통로를 아예 막아버린 걸 몰랐던 그는 거듭된 실패 후에 하나의 집착만이 남았다.
‘잔바르님이 살아 있으면 좋겠다.’
* * *
젠킨스는 지난날을 잠깐 회상하다 다시 벨라와 키엘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선대 마왕과 달리 벨라는 반마족인 그에게 너그러운 편이었다.
덕분에 다시 만난 잔바르의 옆에 계속 있을 수도 있었다.
- “겨우 몇 년 전의 욕정이 아직 남아 있을 거로 생각하나?”
잔바르는 젠킨스가 찾아다녔던 그 200년을 ‘겨우 몇 년’이라고 했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그때의 ‘너여야겠다.’는 말의 의미를 확인했다.
젠킨스는 그저 벨라를 보며 미소 지었다.
‘어떤 마왕은 내게 비극이고, 어떤 마왕은 내게 희극이었네.’
젠킨스는 키엘의 무릎 위에 누워 그의 비위를 맞추는 벨라를 보며 전날을 떠올렸다.
바로 어제. 생각보다 벨라가 패물을 많이 갖고 있자, 젠킨스가 한 소리 한 게 시작이었다.
- “뭘 이렇게 챙겨놔요? 먹고 입을 거 다 주는데 욕심 좀 그만 부리시죠. 그러다 탈 납니다.”
- “언젠가 키엘도 죽고 나도 황궁에서 나갈 텐데 그때를 대비해서 지금 돈을 좀 모아놔야지.”
- “… 대충 사는 줄 알았더니. 그런 것도 생각하세요?”
- “너 이 새끼 방금 뭐라고….”
젠킨스는 빠르게 말을 돌렸다.
- “황궁에서 나가면 어디 가실 건데요?”
다행히 벨라는 그 질문이 마음에 들었는지 곰곰이 생각하다 손가락을 튕겼다.
- “화국으로 갈까?”
- “또 거기요? 이웨르 씨는 좋아하겠네.”
거기서 대화를 멈췄어야 했는데.
‘끼이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하긴. 화국 남자들이 아주 잘생기긴 했지. 일단 몸도 우람하고 말이야.”
하필이면 벨라의 방에 막 들어온 키엘이 그 말을 들었다.
- “… 벨라. 지금 뭐라고 했어요?”
그 후로 벨라는 찰거머리처럼 키엘의 옆에 붙어서 그를 달래더니.
오늘 내기 대련을 하고 일부러 져준 뒤, 키엘이 화가 풀릴 때까지 저러고 있었다.
젠킨스는 혀를 차며 다시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이미 화는 다 풀린 거 같은데.’
온종일 서류는 안 보고 키엘이 벨라만 보고 있는 걸 보면 딱 봐도 다 풀렸지.
저러다 오늘 밤도 방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게 뻔했다.
젠킨스는 씁쓸한 웃음으로 서류 너머 두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지 2년이 조금 넘어가는 거 같은데.
언제부턴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저렇게 지내는 게, 조금 부러웠다.
그에게는 200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는데.
그때 벨라는 키엘의 무릎 위에서 젠킨스의 시선을 느꼈다가 조용히 말했다.
“뭘 봐? 눈깔아.”
젠킨스는 속으로 웃으며 서류를 책상 위에 툭툭 치며 평소처럼 잔소리를 시전했다.
“아무리 그래도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아닙니까? 누워서 뭐 하는 거예요. 인제 그만 일어나세요.”
로잔느가 만들어주는 드레스는 정말 실용적이었다.
속 드레스를 입고 그 위에 덧붙이는 드레스였는데, 탈부착이 가능하다 보니 벨라는 편하게 있을 수 있을 때마다 드레스 껍데기를 벗곤 했다.
젠킨스는 벨라의 언행을 꼬집어 말했다.
“아무리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옷도 좀 제대로 입으시고요.”
“뭐 어때. 우리끼리 있는데.”
그때 리네가 옆에 있던 쌍둥이 리오의 손을 잡고 번쩍 들었다.
“저, 죄송한데 저희도 있거든요?”
벨라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깜빡이며 키엘을 쳐다봤다.
“키엘. 나는 계속 이러고 싶은데, 애들이 너~무 뭐라고 한다. 그치?”
이걸 핑계로 이제 좀 일어나고 싶었다.
“어휴, 목도 아프고 일어나야겠네.”
“나갈 생각 하지 마요.”
하지만 벨라가 키엘의 눈치를 보며 슬쩍 일어나자, 키엘은 눈으로 그녀의 몸을 쫓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일어난 김에 화국까지 가면 되겠네요, 황후.”
“…….”
“잘생기고 우람한 남자들 무릎은 편안하겠네.”
키엘은 화가 나기보다는 솔직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벨라의 변명대로, ‘이웨르가 화국 남자를 좋아해서 그 얘기를 한 거.’라는 건 믿었다.
다만 조금이라도 벨라의 입에서 다른 남자의 이야기가 나오면 불안하고 질투심이 나오는 걸 어떡해.
불과 2년 전 수교한 화국과 당장에라도 단교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벨라는 키엘의 눈치를 보다 속으로 ‘젠장’을 외치며 발랄하게 키엘의 무릎에 다시 누웠다.
“어휴, 무슨. 오늘은 여기가 내 침대다.”
이놈의 고집이 어찌나 센지,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키엘의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쓱쓱 문지르며 그의 눈치를 봤다.
“화났어?”
키엘은 눈을 내려 벨라를 보다가 아랫입술을 가볍게 입 안으로 삼켰다.
‘왜 또 건드려도 그런 데를 건드려….’
단단히 삐쳤던 질투심만큼 그의 아래가 단단해지려는데.
“아직 삐쳤어?”
존재만으로도 교태를 부리는 건 아는지 모르는지.
그때 벨라의 모습을 본 젠킨스가 한숨을 내쉬며 혀를 찼다.
“애정 행각은 제발 두 분이서만 계실 때 하면 안 됩니까?”
쌍둥이들도 젠킨스의 말에 동조하며 두 사람의 자제를 요구했다.
“옳소!”
“맞습니다!”
벨라가 말해도 되지 않으면, 그 미만은 어차피 되지 않을 일이라는 것을 잘 알 텐데.
키엘은 한심하게 그들을 보며 말했다.
“그럼 다 나가. 여기 내 집무실이야.”
젠킨스는 혀를 차며 쌍둥이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차피 오늘 일은 그들이 마무리해야 할 게 뻔했다.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닌지라, 자연스레 그들의 일거리를 들고 집무실을 나가 벨라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래 봐야 옆방이지만.
* * *
둘만 남은 집무실에서.
벨라는 여전히 키엘에게 붙들려 그의 화를 풀어주고 있었다.
“화났어? 아직? 그냥 오해라니까.”
그의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8을 그리며 문질렀다.
그러다 벨라의 손가락이 허벅지 위의 단단한 바위를 건드리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 얼굴을 붉혔다.
“아, 미안.”
숱한 밤을 보내도, 이런 순간은 부끄럽고 긴장이 늦춰지지 않았다.
마치 늘 새로운 스무 살의 첫날을 보내는 것처럼. 마족의 정신연령이 그곳에 묶여 있는 것 같았다.
키엘은 벨라의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농후한 목소리로 말했다.
“벨라가 건드린 거야.”
그리고 그의 손가락은 점점 그녀의 턱으로, 목으로, 가슴으로 내려갔다.
몇 번의 손짓 끝에 부끄러운 살을 드러내자 벨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옷은 왜 이렇게 쉽게….’
로잔느가 속 드레스를 벗기기 쉽게 만들었다는 걸 벨라는 몰랐다.
잔뜩 긴장한 채로 키엘을 올려다봤는데.
키엘의 손은 거기서 멈추고 다시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응?”
“왜요?”
벨라가 민망해서 다시 벗겨진 드레스를 집어 들자, 키엘은 그녀의 손을 잡더니 아예 옷을 빼버리고 그가 앉은 소파 뒤로 던져버렸다.
“…….”
그러고는 또 서류만 보는데.
벨라는 온몸이 붉게 물들 정도로 당황해서 손으로 몸을 가렸다.
“… 뭐, 뭐 하는 거야?”
“뭐가요?”
“…오, 옷만 벗기는 게 어딨어.”
“건드린 벌이예요. 그 뒤는 잘생긴 화국 남자들한테 부탁하던가.”
“키엘….”
벨라는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질투하는 거야?”
키엘이 여우처럼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그녀를 노려볼 때.
그녀는 천천히 그의 어깨를 잡고 그의 허리 양쪽에 그녀의 양 무릎으로 두고 올라섰다.
“이래도 가만히 있을 거야?”
그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향하자, 벨라는 그의 턱을 잡고 시선을 그녀의 눈에 고정했다.
‘오늘은 내가 유혹해준다.’
벨라는 웃으며 다가가 분홍빛의 입술에 그녀의 붉은 입술을 맞닿았다.
늘 가벼운 농담을 일삼지만, 그들의 키스는 항상 가볍지 않았다.
벨라는 키엘의 첫 번째, 두 번째 단추를 풀다가 그냥 양옆으로 옷을 찢듯이 벌렸다. 그리고 키엘은 자신의 벨트를 푸는 그녀의 손을 느꼈다.
분명 야릇한 손길인데도 귀엽게 느껴지는 건 왜인지.
벨트가 풀리고, 벨라는 살짝 눈을 떠 키엘을 바라봤다.
“이제 화 풀렸어?”
“…아니.”
키엘은 벨라의 손이 그의 가슴을 손으로 툭툭 건드리다 천천히 아래로 향하는 걸 느꼈다.
늘 이웨르가 거의 벗고 다니다시피 해서, 여자의 나체를 봐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난 네가 제일 좋아.”
그를 유혹하는 듯 미소 짓는 아름다운 이 사람은, 몽마보다 더 그를 욕망에 빠지게 한다.
볼수록 옆에 두고 싶고. 옆에 있을수록 가지고 싶고. 안고 싶고, 만지고 싶고.
“…사랑해.”
그리고 저 말 한마디를 들을 때면. 그는 모든 이성을 놓아버리고 거칠게 그녀를 탐할 수밖에 없었다.
신음하는 소리도, 붉어진 몸도 모두 사랑스러웠다.
늘 불안이 그를 삼킬 듯 다가올 때마다, 모든 걸 이해한다며 벨라는 자신의 몸을 그에게 맡긴다.
그가 벨라의 귀에 속삭이듯 넌지시 짙은 농담을 하고, 어느새 숨겨둔 바위와 숲이 닿으며 야한 소리를 내고 하나가 되었다.
“아…. 여기서?”
키엘은 벨라가 이 와중에 소파가 더러워질까 봐 걱정하는 것도 귀여웠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꽉 잡고 일어섰다.
“하… 아?”
신음하던 벨라가 팔과 다리로 키엘을 꽉 잡고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왜 이렇게 얘는 갈수록 힘이 세지는 건지.
“내, 내려놓으면 안 될까.”
“오늘 온종일 내 옆에 붙어 있는 거 잊었어요?”
“아니, 이건 붙어 있는 걸 넘어서….”
엉켜 있잖아.
그러나 그가 그녀를 안고 침대로 옮기는 걸음마다 흔들거리며 그녀를 자극했고.
벨라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신음만 낼 수밖에 없었다.
그 소리에 맞춰 키엘은 붉어진 얼굴로 그의 사랑하는 고양이를 황홀하게 응시했다.
키엘은 어느새 곤히 자는 벨라에게 벗겨두었던 드레스를 조심스레 입혔다.
“으음….”
벨라가 살짝 눈을 떴다가 다시 감는 걸 보며, 그는 웃으며 그녀의 가슴에 입술을 맞추고 옷을 여미었다.
그는 조용히 종을 눌러, 하인들에게 여러 가지 먹을 걸 가지고 오라 명했다.
벨라는 쾌락의 끝자락을 맛보면 늘 30분에서 한 시간씩 잠이 들었고, 밤이면 그를 찾아 그녀의 품에 안고 마저 자고, 낮이면 후에 깨어나 먹을 걸 찾았다.
키엘은 그저 옆에 누워 그녀가 깰 때까지 자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만 봤다.
“귀여워.”
그리고 흐뭇하게 웃으며 벨라의 입술에 사용료를 냈다.
* * *
한편 벨라의 집무실로 온 젠킨스와 쌍둥이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참 사이가 좋아. 어쩌면 저렇게 1년 내내 붙어 다닐 수 있지?”
리네가 신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자, 젠킨스가 피식 웃으며 그녀를 도발했다.
“리네 어린이는 사랑을 안 해봐서 모르겠죠.”
“리네는 죽을 때까지 모를 수도.”
리네는 배신감에 가득 차서 리오를 노려봤다.
1년 전 황제 즉위식 이후.
로잔느를 위해 잠시 입을 맞춰야겠다던 리오는, 몇 달 뒤 로잔느와 진짜 입을 맞추었다.
“여기서 솔로는 나밖에 없는 거야?”
“푸르 씨가 있잖아요.”
리네는 고개를 돌려 벨라의 집무실 한쪽 끝에서 혼자 인형 놀이를 하는 푸르를 보았다.
인간계에 와서 점점 똑똑해지더니 상황극도 할 줄 아는 푸르.
“랄랄라랄랄라~ 푸슉. 으악. 사지를 잘라버리겠다! 살려주세요!”
인형 놀이의 내용도 마족 어린이다웠다.
“…곰 인형이랑 나랑 동급이야?”
리네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는 동안, 리오는 벽 너머의 키엘의 집무실을 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응?”
“요즘 좀 안 좋은 소문이 돌던데.”
“아… 그거?”
소문이라. 젠킨스는 별 시답잖을 거로 생각하고 의미 없이 물었다.
“무슨 소문이요?”
“음…. 나는 솔로니 말하기 힘드니까. 리오, 네가 말해.”
“내, 내가 말하면 더 그렇지.”
뭔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젠킨스가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봤고, 서로 얼굴을 붉힌 채 미루다 결국 리오가 말했다.
“사람들이 황제나 황후 둘 중 하나에게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고….”
“둘 다 문제죠. 둘 다.”
젠킨스는 대수롭지도 않게 다시 서류로 고개를 돌리며 물 한잔을 마셨다.
“그게 아니라 금실은 좋은 거 같은데 아이가 안 생긴다고….”
풉.
하고 젠킨스는 물을 내뿜고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아니, 무슨 황궁에서 그런 소문이 다 나요? 여기 사람들은 고상한 줄 알았더니?”
하지만 리네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후계 문제는 누구나 다 관심 있어 하는 걸요.”
“후계가 마력을 쓸 수 있을지 없을지도 다들 궁금한 사항이고요.”
“젠 할배는 뭐 아는 거 있어요? 원래 마왕님은 아이를 못 만든다거나.”
젠킨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을 바라봤다.
“…글쎄요. 마족들은 그렇게 번식을 안 해서.”
“상당히 짐승처럼 말하네요.”
리네가 뒷덜미를 긁적이자, 리오는 코 밑을 쓱쓱 문지르며 받아쳤다.
“사실 키엘도 좀 짐승 같아….”
그 말을 끝으로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애정 표현을 틈만 나면 해대는지. 가끔 벨라가 무념무상으로 안겨 있는 것도 몇 번 봤다.
“할배. 그럼 마왕님은 임신을 못 해요?”
“음…. 글쎄요.”
“황비를 들여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 떠돌던데….”
그들은 실로 걱정이었다.
친한 사람들과 있을 때나 서로가 귀엽다고 하는 편이지, 그들이 옷을 갖춰 입고 타인을 대할 때는 영락없는 황제와 황후의 모습이었다.
특히 어색할 줄 알았던 벨라는 태생이 마왕답게 아랫사람들을 꽤 권위적으로 다루었고.
정말 황비를 들여야 할까 봐 걱정이 아니라, 그런 소문이 떠도는 걸 알면 벨라와 키엘이 어떻게 나올지가 걱정이었다.
“아가씨가 알면….”
“키엘이 알면….”
전자는 목숨줄을 걱정해야 할 거고, 후자는 멸문을 걱정해야 할 터였다.
“최대한 우리 선에서 소문을 잠재우든가 해야겠네요.”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제국은 한 달에 한 번꼴로 공작과 후작가, 그리고 백작가 중 유망 있는 가문을 모아 제국의 실정에 대해 보고 받고 검토하곤 했다.
“시작하지.”
키엘이 근엄하게 회의의 시작을 알렸고, 각 가문이 돌아가며 정세를 보고했다.
“…아무래도 제국과 헬라왕국의 경계다 보니 이런 일이 잦은 거 같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추진하시던 보육원 예산 문제는 다음 달 안으로 정리가 될 겁니다.”
그날도 평범하게 흘러갈 거라 생각하고, 벨라는 그녀 앞에 놓인 다과를 먹으며 회의를 얌전히 듣고 있었다.
회의는 정말 길었다. 그러다 간혹 언쟁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그건 제가 맡은 일 아닙니까?”
“바로 옆의 지역인데 비단 슈리아 공작에게만 맡길 순 없지 않습니까.”
언제는 네 일을 왜 내가 해야 하느냐 하더니, 이제는 내 일을 왜 네가 하느냐며 싸워댔다.
이게 사실 벨라를 배후로 둔 크루엘 공작가 때문이었다.
슈리아도 꽤 야망이 큰 사람이었기에, 잡은 실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고. 그 때문에 다른 귀족들의 반발을 사기 쉬웠다.
“그렇게 중요한 일을 슈리아 공작께만 맡긴다는 게 애초부터 말이 안 되죠.”
“제가 능력이 좋아서 하는 일인데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럼 능력을 키우시던가요.”
그들끼리 언쟁을 벌이자, 벨라는 혀를 차며 다리를 꼬고 긴 드레스로 가렸다.
“또 시작이네.”
키엘도 질리는지 한숨을 내쉬고 그들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가문 간의 자존심 싸움이기에 구태여 끼고 싶지 않았다.
몇 마디 하다 보면 끝나기도 했고.
벨라는 눈앞의 다과를 빤히 쳐다보며 손가락으로 의자를 탁탁 두드렸다.
‘흠…. 그런데 왜 이렇게 짜증이 나지.’
이들이 언쟁을 높이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는데, 새삼 이 분위기가 짜증이 났다.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그럴까.
‘다과도 영 마음에 안 들고.’
벨라는 물을 따르는 시녀에게 손짓했다.
“이거 말고. 좀 레몬같이 신 다과를 가져와.”
“네, 폐하.”
어느덧 언쟁이 끝났는지 서로 얼굴을 붉히고 대화를 끝냈고, 키엘이 마무리했다.
“그 건은 그대들이 나눠서 하기로 했으니 서로 협의해서 하도록 해. 될 수 있으면 이런 회의 때는 언급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드디어 긴 회의가 끝나는 참이었다.
“폐하. 따로 건의가 있습니다.”
“…뭔가.”
몇몇이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이제 벨라의 눈치를 보며 말하기를 꺼렸다.
“저, 그게….”
“빨리 말하게. 황후와 난 할 일이 많아.”
그리고 슈리아 공작을 제일 아니꼽게 보던 메르켄 공작이 말했다.
“이제 황후께서도 국정에 익숙하신 거 같으니….”
“……?”
“황비를 따로 들이시지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키엘과 벨라는 둘 다 말똥말똥 눈을 뜨며 그들을 보고 있었다.
둘 다 같은 생각이었다.
“저 새끼가 돌았네.”
다만 생각을 말로 한 건 벨라뿐이었다.
* * *
황후의 평가는 황궁 밖에서 대체로 좋았다.
벨라가 제국을 위해 계속 힘 써주는 데다가, 그녀를 따르는 영애들은 항상 황후를 칭찬했고.
황제와 함께 있을 때는 꽤 부드러운 미소를 자주 보이기도 해서인지.
피를 부르고 끝난 지난 국정 회의 때의 벨라의 이미지는 많이 희석되었었다.
메르켄 공작을 포함해 크루엘 공작가를 견제하는 세력들은 황비가 필요하다 생각했다.
금실이 좋은데도 아직 후사를 보지 못하고 있으니 괜찮은 변명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단조로운 평화에 빠져,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저 새끼가 돌았네.”
이 황후가 국정 회의 때 단숨에 마법협회장의 목을 딴 사실을 말이다.
보통이라면 ‘황후 폐하께서 말씀이 지나치시는군요.’라며 조롱하듯 얘기했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살짝 올라간 눈매와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눈,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
자존심이 상해 아무도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 솔직히 벨라가 그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섬뜩했다.
키엘은 벨라가 더 역정을 내기 전에 책상 밑으로 그녀의 손을 꽉 잡고 근엄하게 메르켄 공작을 향해 말했다.
“갑자기 왜 황비를 들이라는 거지?”
총대를 멘 메르켄 공작이 지난날의 악몽을 떠올리며 겨우 말했다.
“매일 밤 처소에 드신다 들었습니다.”
“…….”
“그런데도 아직 후… 후계를 아직 못 보셨잖습니까.”
둘 중 하나가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는 뉘앙스였다.
키엘은 조용히 메르켄 공작을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했다.
공작가라 덫을 크게 놓아야 할 텐데. 반역죄로 넣을지, 아니면 횡령 건으로 넣을지.
그리고 벨라는 입에 필터도 걸치지 않고 속마음을 말했다.
“지금 xx 나한테 문제가 있다는 거야?”
“아, 아닙니다. 황후 폐하께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라….”
“그럼 우리 황제 폐하께 문제가 있다?”
“아, 아니요….”
키엘은 날뛰려는 벨라의 손을 손가락으로 살살 어루만지며 진정시켰다.
“황후와 나는 이제 1년밖에 안 되었는데. 너무 성급한 거 아닌가?”
메르켄 공작은 어차피 죽은 목숨이라 생각했는지, 크루엘 공작가에 대항하기 위해 설명했다.
“어찌 되었든 후계 문제는 제국에 중요한 일입니다. 계속 생기지 않는다면, 후에라도 황비를 들여서 만드셔야죠. 제국을 위해서라도요.”
벨라가 제국을 위해 제 마력을 주고 있으니, 이게 통할 거라 생각했다.
키엘과 벨라는 둘 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키엘은 메르켄 공작의 말을 전혀 공감하지 않았다.
매일 밤 함께 잠들긴 하지만, 이들이 상상하는 것만큼 매일 뜨거운 밤을 보내는 건 아니었다.
업무도 많았고 벨라가 매번 마력을 무전 통신 마법 도구에 넣는 바람에 피곤하다며 고양이로 잔 적도 많았고.
게다가 몇 달 전에는 ‘황후가 상당히 밝힌다.’는 소문까지 돌아, 벨라가 키엘의 방으로 찾아오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키엘이 벨라의 방으로 찾아갔지만, 그곳에는 늘 마족들이 있었으니 그 이상은 생략한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안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눈을 뜰 때 벨라가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으니.
키엘은 속으로 억울하다 생각했지만, 구구절절 변명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 한들, 역대 황제들이 황후와 가지는 잠자리 수보다는 훨씬 많을 테니까.
하지만 벨라는 의외로 메르켄 공작의 말에 공감했다.
‘하긴. 마왕이 후계를 만드는 거랑은 다르니까….’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다 키엘을 쳐다보고 물었다.
“폐하, 황비를 들이실까요?”
공작의 말에 전혀 공감하지 않았던 키엘은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뭐?”
그는 벨라의 입에서 다른 남자의 이야기만 나와도 질투가 나는데.
황비라니. 이 사람은 질투도 없나.
‘…벨라는 내가 다른 사람이랑 몸을 섞어도 좋아?’
그는 소름이 끼치도록 싫었다. 벨라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를 만지는 것도 싫고.
그의 손이 벨라가 아닌 다른 여자를 향하는 건 끔찍했다.
키엘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벨라를 원망스럽게 노려봤다.
“황비는 황후가 관리하는 일이니, 황후의 뜻대로 하지.”
벨라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메르켄 공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공작. 얼굴에 꽃이 핀 걸 보니 이미 황비 후보로 점찍어 둔 사람이 있나 보네.”
“아…! 예! 제 여식이라도 괜찮으시다면….”
“풉.”
메르켄 공작의 말에 벨라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모두 어느 부분에서 웃는지 몰랐다.
“공작은 자기 딸을 애지중지하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보네.”
“…네?”
“황비가 아이를 낳으면 내 밑으로 입양할 거야.”
“…….”
“한마디로 아이를 내가 뺏을 거라는 거지.”
벨라는 시녀가 새로 가져다준 디저트를 입에 넣으며, 내일 뭘 입을지 고민하는 것처럼 가볍게 말했다.
“아! 괜히 생모를 찾으면 짜증 날 테니 황비와 그 가문은 어쩔 수 없이 죽여야겠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난데없는 소리에 모두 황당하다는 듯 벨라를 바라봤다.
농담하는 건지, 진짜인지.
벨라는 그들의 시선을 눈치채고 어깨를 으쓱였다.
“후계만 만들면 되는 거 아니야? 폐하께서 내게 관리하라 했으니 내가 어떻게 관리할지는 내 마음이지.”
“그래도 죽인다니요.”
“내 눈에 알짱거려서 내가 매일같이 손톱을 뽑는 거보단 낫잖아?”
벨라는 스스로 너그럽다 생각하며 대답했다.
정말 황비가 있다면 손톱과 발톱을 매일 번갈아 가며 뽑고 싶을 테니까.
여주인공인 로잔느도 미웠는데, 이도 저도 아닌 놈이 감히 우리 키엘을 공유하겠다?
머리로는 ‘후계가 필요하니 황비도 필요하겠다.’ 생각하지만, 상상만 해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메르켄 공작이 일을 많이 하고 싶어 하는 거 같으니 황비 후보는 공작이 추리면 되겠네.”
“…….”
“잘 골라와요. 아이만 낳고 뒤지실 분들을.”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모두 한 번 더 유념했다.
황후는 건드리는 게 아니라고.
황제의 말을 잘 듣는 편이라 다행이지, 악녀가 따로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공포심과는 달리 키엘은 벨라의 손을 더욱 꽉 잡으며 얼굴을 붉혔다.
‘아…. 사랑해.’
* * *
그 이후로 후계는 물론이고, 황비에 관한 이야기도 쏙 들어갔다.
다행이긴 했지만 벨라는 한 번 시작된 걱정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내가 아이를 못 가지나…?’
창밖의 큰 달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정화수라도 떠다놔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였다.
“아가씨! 목욕물 받았어요!”
“푸르, 이웨르보고 레몬이나 자몽 디저트 좀 만들어 오라고 해. 왜 이렇게 신 게 당기지?”
“네!”
벨라는 황후의 방에서 푸르가 준비해 준 따뜻한 욕조에 들어가 긴장을 풀면서, 마음을 다스렸다.
요즘 따라 후계에 대한 걱정이 불쑥 나타나고, 원인 모를 짜증도 점점 늘었다.
그녀가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가끔은 푸르가 추는 춤이 귀여워 보이다가도, 어떨 때는 사지를 찢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아무래도 그놈의 ‘황비’이야기 이후로 신경이 예민해진 게 분명했다.
그리고 비단 벨라만 변한 건 아니었다.
그날 이후 키엘도 잔뜩 예민해졌다.
‘감히 벨라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다니.’
벨라가 ‘성군’이라면서, ‘착하다’고 예뻐해 주는 게 좋아 여태 얌전히 있었더니.
이 황궁 놈들은 조금만 얕보이면 기어오르기나 하고.
‘메르켄 공작을 처리해야겠어.’
뒤끝 있다고 생각할까 봐 내색하진 않았지만, 황태자비 경합 때 벨라의 옷을 가져간 걸로 추정되는 세리나 도이치도 함께 묻어둘 생각이었다.
메르켄 공작령 밑에 있는 백작가였으니.
‘도이치 가를 죽이고 메르켄에게 책임을 물을까.’
그런 생각을 뒤로하고, 키엘은 서랍장을 열어 달밤에 푸르게 빛나는 목걸이를 꺼냈다.
지난달 정기적으로 화국의 교류단이 그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일단 벨라의 기분부터 풀어줘야지.’
키엘은 황제의 방에서 나서 황후의 방으로 향했다.
발걸음은 늘 가볍고. 마음은 늘 설렌다.
키엘이 황후의 방으로 갔을 때.
문 앞에서 푸르는 손에 한가득 디저트를 들고 춤을 추며 걸어오고 있었다.
“도련님!”
황제 즉위식을 한 지 일 년이 넘었는데도, 푸르는 존칭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벨라가 쉴 새 없이 잔소리했지만, 이제는 그냥 포기했다.
“푸르, 무슨 춤 춰?”
푸르는 뭐가 신이 나는지, 손으로 팔을 쓱쓱 밀어내는 춤을 췄다.
“쓱싹쓱싹 춤! 도련님한테 가르쳐줄까요?”
“… 아니.”
크루엘 공작가에서 지낼 때부터였나.
말하는 곰 인형이 귀엽다는 사용인들 앞에서 애교 부리며 예쁨 받기 시작하더니, 그 버릇은 황궁에서도 여전했다.
키엘이 푸르를 무시하고 벨라의 방 앞으로 가자, 푸르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엇! 우리 아가씨 지금 목욕하는데!”
그렇다면 지금 저 방에 혼자 들어가고 싶은데.
키엘은 푸르의 머리를 쓰다듬고 들고 있는 쟁반을 살짝 바라봤다.
“그건 뭐야?”
“레몬 디저트!”
키엘은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푸르에게 건넸다.
“앗!”
“푸르. 이거 먹고 밖에서 놀다가 들어올래?”
키엘은 푸르가 들고 있던 쟁반을 가져가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건 내가 갖다줄게.”
“이런 사탕 하나에 아가씨 목욕시키는 걸 포기하긴 싫은데요!”
이미 사탕을 집은 손과 사탕을 보는 눈과 입술에 침을 묻힌 푸르는 인간계로 오고 나서 똑똑해지기라도 한 지, 그녀답지 않게 거절했다.
“그럼 오늘 밤에 곰 베개 어때?”
“… 좋아요!”
* * *
키엘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창밖으로 달빛이 비치고, 욕조 안에 들어가 뒤를 돌아보고 있는 벨라가 보였다.
“푸르. 디저트 가지고 왔어?”
키엘은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벨라에게 다가갔다.
검은 머리카락은 길게 늘어져 물 위를 항해하고.
머리카락 사이 사이로 드러난 하얀 피부에 촉촉하게 묻은 물 위로 달빛이 반사되어 혼자 빛을 내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가지고 왔던 목걸이를 잡아 벨라의 뒤에서, 그녀의 눈앞에 보여주었다.
“…음?”
벨라가 영문을 몰라 목걸이만 빤히 보는 동안, 키엘은 목걸이를 천천히 내렸다.
가느다란 그의 손가락이 뒷덜미에서 목걸이를 잠그자 푸른 보석이 하얀 살갗 위에 닿았다.
쇄골 위로 자리한 목걸이도 차가웠지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키엘의 손가락도, 목 뒤에 맞추는 입술도 차가웠다.
“키엘이야?”
“응.”
“저, 저기. 나 지금….”
목욕 중인데.
벨라가 황당한 듯 눈을 깜빡였지만, 키엘은 몸을 움직여 자연스럽게 욕조 옆에 걸터앉았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벨라를 정면에서 뚫어져라 쳐다봤다.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새하얀 몸에 혼자 푸르게 빛나는 보석이 꽤 어울렸다.
“지난달 화국에서 선물 받은 거예요.”
“…고마워.”
벨라는 그의 시선이 민망해서 몸을 조금 더 숙여 물 안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나 지금….”
선물해 준 건 고마운데, 목욕 중이니 나가라고 하려고 했다.
그러나 벨라가 민망해하든 말든, 키엘은 레몬 타르트를 집어 벨라의 입 앞에 가져갔다.
작은 입으로 타르트가 들어오자 벨라는 더 말하지 못했다.
키엘은 장갑을 벗고 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찰랑찰랑, 물 위에서 장난치던 그의 손이 어느새 벨라의 손을 잡았다.
“‘여신의 눈물’이래요.”
키엘은 다른 손으로 물 위의 거품을 손으로 덜어 그녀의 손등 위로 올렸다.
“이 보석을 캐려다 죽었던 사람이 많아서 그런 이름을 붙였대요.”
그의 손은 벨라의 손등을 쓰다듬다 손목, 팔꿈치, 그녀의 어깨까지 부드럽게 거품을 타고 올라갔다.
“여신의 눈물을 얻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의 다섯 손가락은 벨라의 쇄골을 쓸며 가슴 위 자리한 푸른 보석을 집어 들었다.
“역시 벨라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았어.”
그는 또 거품을 덜어 그녀의 목에 올리고 문질렀다.
“씻겨줄게요.”
벨라는 입안의 타르트를 꿀꺽 삼키고 고개를 저었다.
“아냐, 씻는 건 내가 혼자….”
하지만 키엘은 물러설 생각이 없는 지 웃으며 또 다른 타르트를 벨라의 앞에 내밀었다.
벨라의 입안으로 레몬의 상큼함이 맴돌고, 키엘의 손은 그녀의 몸을 천천히 맴돌았다.
간지러운 거품이 어깨와 목을 지나갈 때. 키엘이 넌지시 웃으며 말했다.
“나도 황비는 들이고 싶지 않아요.”
“…….”
벨라는 남은 타르트를 손으로 집어 먹으며 우물거렸다.
“으애오 우에응 앙응어야 아앙아 (그래도 후계는 만들어야 하잖아)?”
옹알이 같은 말을 키엘은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미소만 지었다.
“난 벨라가 아니면 싫어.”
키엘은 어느새 그녀의 가슴 위로 거품을 올려,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마사지하듯 문질렀다.
홀로 헐벗은 게 민망했던 벨라는 그의 손을 잡고 밀어냈다.
“옷 젖겠어.”
키엘은 이제 물러서서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미소 지었다.
“내가 마왕이라 아이가 안 생기면 어떡하지?”
“난 없어도 괜찮아.”
“하지만 뒤를 이을 후사는 필요한 거잖아.”
“정 안 생기면 그때 입양하면 되죠.”
제국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후사가 있어야 할 텐데.
이토록 그녀만 원하는 마음이 고맙고 감동받았다고 한다면 이기적인 걸까.
따뜻한 목욕물 때문인지, 온몸이 달아오른 그녀는 손가락을 꼼지락 이며 말했다.
“나가줘. 이제 나갈 거야.”
그 말에 키엘의 손이 물살을 가르며 욕조 속으로 향했다.
“너 옷 다 젖잖아.”
그는 벨라의 허리 뒤편을 잡고 그녀를 끌어 올렸다. 그녀의 검은 머리에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며, 그의 마음을 적신다.
“상관없어.”
그는 옆에 있던 가운을 펼쳐 벨라를 덮었다.
가운의 부드러운 촉감이 벨라를 감싸고, 키엘의 다음 말도 그녀의 고민을 감쌌다.
“내 인생에 다른 여자를 안아야 하는 일이 온다면, 차라리 다른 아이를 내 아이라고 하는 게 나아.”
“… 키엘.”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요.”
그리고 키엘은 창가에 벨라가 그릇 위에 떠다 놓은 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런 거도 하지 말고.”
“저렇게 두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면 아이가 생긴대.”
키엘은 벨라를 보고 웃었다.
“아이는 그렇게 생기는 게 아니잖아요.”
그는 눈을 감고 그가 선물한 보석 옆에 입술을 맞췄다.
“이렇게 생기는 거지.”
* * *
벨라가 목욕을 끝낸 시간, 푸르는 목욕재계까지 했다.
오랜만에 곰 베개를 하는 날!
이웨르는 푸르의 털을 짜주면서 혀를 끌끌 찼다.
“베개 해봤자 어차피 좋은 꼴도 안 보여주는 데 하고 싶엉?”
황궁의 모든 사람이 키엘과 벨라의 애정행각을 눈으로 본 적은 많지만, 그들은 절대 타인 앞에서 선을 넘지 않았었다.
처음에 집요했던 이웨르도, 숨어서 보다가 눈이 여러 번 뽑힌 이후로는 포기했다.
그런데도 푸르는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고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같이 자려는 걸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난 그냥 아가씨랑 도련님이랑 같이 자는 게 좋아!”
이웨르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문지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과연 아가씨도 좋아할깡?”
“좋아해! 나는 아가씨가 제일 좋아하는 마족이야!”
푸르는 깨끗하게 씻고 털까지 뽀송뽀송하게 말린 후, 벨라의 침실로 들어갔다.
이미 두 사람은 서로 안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푸르는 후다닥 달려가 키엘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벨라를 흔들었다.
“일어나세요! 곰 베개가 왔어요!”
어찌나 절실하게 흔드는지, 벨라는 반쯤 눈을 떴다가 푸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 진짜. 그냥 대충 머리 위에 올라오면 되잖아.”
그러면서 벨라가 키엘의 팔에 머리를 비비고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안 돼요, 아가씨! 절 베고 자야죠!”
푸르는 벨라와 키엘 사이를 손으로 벌려 그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야.”
“안 벨 거면 가운데 껴서 잘래요.”
“아니 왜 오늘 갑자기….”
벨라가 짜증을 부리려던 때, 키엘은 살짝 눈을 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냥 오늘 같이 자고 끝내는 건 어때요?”
“…그래.”
그냥 그렇게 평범하게 곰 베개를 하는 날인 줄 알고, 벨라도 키엘도 다시 잠들려고 했을 때였다.
“…그런데 이 심장 소리는 뭐예요?”
“뭔 곰 소리야, 또.”
“아가씨 배에서 심장 소리가 나는데요?”
푸르의 말 한마디에 잠이 모두 달아났다.
* * *
“임신이네요.”
주치의의 한 마디에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다.
벨라는 자신의 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세상에….”
사실 못 가지는 줄 알았다.
마왕은 마계의 균형을 위해 필요한 존재이기에, 오로지 마왕 혼자만의 힘으로 후계를 만들어냈었는데.
“키엘, 들었어? 내가….”
“응. 들었어요.”
놀란 그녀와 달리 키엘은 환하게 웃으며 벨라의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기쁜 마음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정말 아이가 없어도 괜찮았는데.
자신의 배를 쓰다듬는 벨라의 손 위로, 키엘은 그의 손을 올려 함께 놀라움을 만끽했다.
“좋아요?”
“당연하지.”
“이리 좋아하니 다행이네. 먹고 싶은 건 없어요?”
그리고 남들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귓속말했다.
“내 생각엔 고양이로 안 변해서 그런 거 같아.”
“그런가….”
벨라도 그간 그녀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눈치챘다.
“이상하게 변하기 싫더라고.”
좀 많이 피곤했지만 지난 몇 주간 고양이로 휴식을 취하고 싶지 않았었다.
본능적으로 아이를 가진 걸 몸이 알았던 걸까.
“어쩐지 자꾸 신게 먹고 싶더라니.”
키엘은 시선을 벨라에게 고정한 채 뒤에 있을 하녀에게 말했다.
“가서 레몬이나 자몽 같은 디저트류를 더 만들어 오게.”
이미 협탁 위에는 레몬 타르트가 수북이 쌓여 있지만, 하녀는 몇 초 망설이다 ‘네’ 하고 뒤를 돌아섰다.
“파인애플도 가져와.”
뒤돌아 가던 하녀가 다시 뒤를 돌아 알겠다며 고개를 숙이자, 벨라가 덧붙였다.
“셔벗처럼 해서 가지고 오고. 기왕 가지고 오는 김에 아이스크림이랑 초콜릿이랑 마시멜로도.”
“… 네.”
“아. 그리고 부대찌개도 만들어와, 이웨르.”
모두 벨라의 임신 소식에 놀라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매일 밤마다 함께 잠드는 데 오히려 늦었다고 생각했지.
생각해보면 단서는 많이 있었다.
젠킨스는 최근 들어 벨라가 혼자 예민하게 짜증을 버럭 낼 때가 있었던 걸 떠올렸다.
갑자기 패물을 정리하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졌었고.
그는 쌍둥이에게 작게 귓속말로 일전에 했던 말을 다시 꺼냈다.
“제가 어쩐지 아가씨 성격이 요즘 예민해진 것 같다고 그랬죠?”
“그런데 원래도 그러지 않았어요?”
그때 벨라는 키엘의 사랑스러운 눈빛을 듬뿍 받다가, 시선을 로한에게 옮겨 웃으며 말했다.
“로한 경. 메르켄 공작 새끼 데리고 와. 그 새끼가 나한테 문제 있다고 했잖아.”
황후의 임신 소식은 제국에 가장 큰 화젯거리였다.
제국민들은 즐거운 소식에 좋아했지만, 황궁에서 일하는 관료나 시중을 드는 하인들에게는 다른 의미로 화제였다.
호르몬의 노예라도 된 듯이, 벨라의 기분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극과 극을 달렸다.
“어머, 나도 빨간 꽃이 좋아.”
“누가 이런 시뻘건 걸 여기다 놓으래?”
젠킨스는 벨라의 패악질이 심하다고 지적했지만, 잔바르는 마계보다 덜하다며 오히려 정이 많다고 툴툴거렸다.
“마계에선 그냥 다 죽이셨는데, 인간 놈들은 엄살이 심해.”
“마족들은 그냥 잘라서 안 죽으니 이게 안 심해 보이는 거겠죠.”
그러나 사람들은 아이를 가지고 예민해진 황후보다도 황제가 더 무서웠다.
유산할 수도 있으니 당분간 관계를 맺으면 안 된다고 주치의가 딱 잘라 말했을 때는, 조금 살벌하게 느껴졌지만 괜찮았다.
하지만 황궁의 법도 중 ‘한 달간 임신한 사람을 황제가 찾아가서는 안 된다’는 법도를 내밀었을 때는, 키엘이 황태자비 경합 전의 황태자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도 더 직설적으로 불편함을 내색했다.
“자네들은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내게 검토하라고 하는 건가.”
적어도 새끼 사자일 때는 돌려 까기라도 했지, 지금은 보이는 대로 이빨을 드러내고 덤비는 밀림의 사자 같았다.
“황후는 지금 뭘 하고 있지?”
“황후 폐하께서는 지금 축복의 기도 중이십니다.”
“…….”
키엘이 잔뜩 예민해져 있는 동안, 벨라는 건강한 아이를 낳아야 한다며 신전의 사제들과 함께 기도까지 하고 있었다.
‘무슨 마왕이 신전 사제들이랑….’
소원 같은 거 빌어봐야 다 미신이라고 하던 벨라였는데.
재수 없는 일은 하나도 하기 싫다며 팔랑귀가 되어서 황궁에서 흔히 내려오는 출산 전 지침을 모조리 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키엘은 그 지침들이 모두 말도 안 되는 거로 생각했다.
특히 ‘한 달간 황제가 찾아가서는 안된다.’는 말도 안 되는 그 법도.
황제가 임신한 상대를 찾아가면, 악운을 함께 가지고 가는 거라는 이유로 포장했지만.
사실 황후든 황비든 아이를 가졌다고 애정이 한쪽으로 치우치게 될까 봐 만들어 놓은 악습에 불과했다.
“황후를 만나러 가야겠어.”
“안됩니다. 예법상….”
이럴 때면 로한은 법도를 들먹이며 키엘의 앞길을 막아섰다.
“뭐든 잘못되면 폐하의 탓으로 돌리기 쉽습니다. 그러니 아직은 안됩니다.”
“그럼 황후를 불러와.”
“…폐하. 이제 겨우 일주일 됐는데 이러시면….”
로한은 말리려다 한숨을 내쉬고 벨라를 찾아 나섰다.
그가 예전에 했던 ‘벨라의 존재만으로 약점이 될 거’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벨라를 약점으로 삼고 누군가 황태자를 흔들까 봐 걱정이었지만.
없으면 약점이 될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 * *
누군들 목표가 생기면 강해지기 마련이었다.
벨라도 그러했다.
마왕이 아이를 가지는 건 처음이었다.
다른 반마족들도 어떻게 태어났는지 아는 바에 대해 없고.
젠킨스는 다행히 인간형의 모습이긴 하지만, 새로 태어날 아이가 인간의 모습이 아닐 수도 있고.
걱정에 사로잡히면 해결될 때까지 다른 건 안중에도 없는 벨라는, 별거 아닌 작은 미신에도 예민하게 굴 수밖에 없었다.
배 속의 아이가 제대로 태어나길, 크기를 바랐다.
거부반응이 일어나지만, 신전 사제들의 기도를 함께했고.
키엘은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달 밑에 매일 정화수를 떠다 놓았다. - 이미 임신했으니 필요 없는데도 안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마치 건널목의 하얀 면만 밟으면 행운이 올 것 같은 암시를 걸어 놓고 ‘이걸 했으니 잘될 거야.’라며.
오래전 키엘이 사두었다는 선인장도 꽃이 필 때까지 정성스레 돌보았다.
-사실 로잔느가 돌봤다. 걔가 잘 키우는 거 같아서.-
그런데 로한이 근심 어린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을 때는, 벨라의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폐하께서 지금 당장 오시랍니다.”
“왜요?”
“직접 가서 보시죠.”
뭔 이상한 법도가 있어서 임신 중 한 달은 마주치지 말라고 하던데.
로한이 너무 진지한 표정을 지어서 벨라는 한걸음에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폐하! 무슨 일이야?”
벨라가 문을 열자마자 그녀는 그의 얼굴은 보지 못한 채 가슴에 안겨 향기를 맡았다.
“…키엘?”
“벨라가 필요해.”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벨라는 그를 밀어내고 물었다.
“왜? 무슨 일 생겼어?”
“…안아줘.”
벨라는 로한의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그를 다시 끌어안았다.
혹 그녀의 업무 때문에 그가 힘든 걸까. 그런 걱정을 하던 찰나였는데.
“벨라가 부족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그 말을 듣고 벨라는 실눈을 떠 큰 어리광쟁이를 노려봤다.
“한 달 동안 보면 안 된다던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거 거짓말이야. 다 황제가 다른 여자랑 자려고 지어낸 말.”
벨라는 손을 들어 그의 부드러운 황금빛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혹시나 모르잖아. 진짜 저주가 걸려있고 그러면….”
“저주도 마계 마법인 거 알죠?”
“…그렇지.”
벨라는 그의 말에 피식 웃으며 조금 더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간 별별 민간요법과 미신들을 다 해도 마음의 평안이 오지 않았는데.
어쩜 너는 이리도 햇빛의 냄새를 가지고 안는 것만으로 불안을 가시게 하는지.
“알겠어. 그건 안 믿을게.”
“신전 사제들이랑 기도하는 거도 영 기분이 안 좋은데.”
“100일 기도 중에 80일은 했으니까 그건 마저 할래.”
키엘은 벨라의 등을 토닥이면서 밀려오는 걱정의 파도를 밀어낸다.
“그리고 일도 좀 그만하고 쉬어요. 요즘 뭘 그렇게 열심히 찾아봐요?”
“사실 내가 평소에 좀 확인해 보고 싶던 게 있었거든? 내년에 예산 삭감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그 말에 키엘은 안고 있던 벨라에게서 떨어져 그녀의 두 눈과 마주쳤다.
“예산요?”
“아무래도 재무장관이 꼼수 쓰고 빼돌리는 거 같아서 찾아보려고 했지.”
재무장관이면 메르켄 공작의 일이었다.
“…어디 찾아봤어요?”
“응? 왜?”
“나도 틈틈이 알아보고 있었어요.”
벨라는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미소 지었다.
“아버지가 손도 못 대던 부분이라 분명 횡령할 거로 생각했어.”
“나도!”
“축제 인력을 책정한 게 과하게 높고 특정 지역에서만 뽑았더라고요. 이것만으로는 부족해서 다른 것도 보려고 하고 있었어. 벨라는?”
“난 그놈의 보수공사 한다고 한 거. 그거 쓸데없이 보도블록 뺐다 꼈다 하는 거 같아서.”
로한은 그들의 대화를 쭉 지켜보다 팔짱을 끼며 생각했다.
그들의 황후는 단순히 황제의 마음만 편하게 해주는 안식처가 아니라, 제국에 필요한 사람이라고.
키엘은 벨라와 생각이 통했다는 걸 느끼고 기분이 꽤 좋은지 금세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횡령한 거 알면 어떻게 할 셈이었어요?”
벨라는 멋쩍은 듯 뒷덜미를 만지며 말했다.
“아…. 내 뒷돈으로 챙기려고 했다고 하면 화낼 거야?”
로한은 몇 초 전 했던 생각을 곧바로 철회했다. 역시 제국에 필요한 사람은 아닐지도.
키엘은 로한이 계속 서 있는 걸 보고 벨라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로한이 없었다면 괜찮다고 했을 텐데.
“당연히 안 되지. 황후궁의 예산이 부족해요?”
“사실 돈 모아서 하고 싶은 게 있어서….”
“뭔데요?”
“국립공원 같은 거 하나 만들면 어떨까 해서…. 잔바르랑 푸르도 좀 뛰어다니고 싶어 하는 거 같고….”
그도 그렇지만, 벨라가 낳은 아이가 인간형이 아닐 경우를 대비한 거였다.
“황궁 뒤편을 크게 국립공원으로 만들어요. 어차피 다 산이니까.”
“내 마음대로 그래도 돼?”
키엘은 벨라를 빤히 보다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로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 로한.”
“네.”
“수도에 있는 주요 기관들을 전부 황궁 뒤편으로 들이지. 각종 협회.”
“…예?”
“마법사 협회나, 연금술사 협회. 대사관들도 전부 황궁 뒤에 거처를 두면 일도 수월하게 할 수 있잖아. 황권에 힘을 실을 수도 있고.”
로한은 다시 또 몇 초 전 철회했던 생각을 다시 되돌려 놓았다.
어쨌든 황후는 제국에 필요한 사람인 걸로.
* * *
그로부터 몇 달 후.
아이를 낳는 고통은 벨라가 여태 겪었던 것에 비해 견주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이러다 죽겠다.’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에 신생아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벨라가 땀에 젖은 채로 옆을 돌아보자, 키엘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눈망울을 글썽이며 계속 그녀만 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응.”
“…미안해.”
벨라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맛보았지만, 회복력이 빨라서 그런지 살 것 같았다.
“괜찮아.”
이 와중에 그녀를 걱정하는 듯 눈가가 빨간 모습이 잘생기고 예쁘다고만 생각했다.
그때 벨라에게 주치의가 신생아를 닦고 보자기에 싸서 보였다.
“황자이십니다.”
벨라가 손을 뻗어 아이를 받았고, 키엘은 침대 위로 올라가 벨라의 등을 받치고 안았다.
“벨라. 남자아이예요.”
“키엘. 우리 아이가 인간이야.”
“…….”
“팔다리 붙어 있는 거 맞지?”
“벨라.”
“손가락 열 개인 거 맞지?”
“…도대체 무슨 걱정을 했던 거예요?”
입 밖으로 꺼내면 말이 씨가 될까 봐 하지 않았다.
혹시나 그들의 아이가 고양이면 어쩌나.
다행히 팔다리 다 붙어 있고 눈코입이 제자리에 있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이게 다 내가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려서….”
키엘은 힘없이 그에게 기댄 벨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농담할 기운이 있는 걸 보니 몸은 괜찮은 거 같았다.
어느새 푸르가 옆으로 쪼르르 달려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기를 신기하게 보고 있었다.
“아가씨! 이거 신기해요!”
잠시 후, 쌍둥이들과 로잔느, 젠킨스와 잔바르까지 신생아의 울음소리를 듣고 황후의 방문을 열었다.
“어떻게 됐어요?”
벨라가 말하지 않고 했던 걱정을 그들도 했는지 인간 모습의 아이를 보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다행이네요. 인간이라서.”
키엘은 그들의 걱정이 불편했다.
“…그럼 다들 벨라가 동물이라도 낳을 거로 생각한 거야?”
키엘은 땀에 젖은 벨라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그들을 향해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황후가 고생한 건 눈에 안 보여?”
“예…. 죄송합니다, 폐하.”
벨라는 아직 눈을 뜨지 않은 신생아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시윤이 태어났을 때도 신기했는데.’
처음 소설에 빙의 되었을 때만 해도, 벨라는 그녀의 역할이 생명보다는 죽음에 가깝다 생각했었다.
이곳에서 지낼수록 마계의 공주답게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이런 일은 그녀에게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어느새.
이 이야기는 그들만의 이야기로 쓰이고, 늘 죽음과 가까이 있던 두 사람이 만나 하나의 생명을 만들어내는 게 기이했다.
벨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의 주변에서 축하해주는 이들 사이에 둘러봤다.
그리고 그녀를 안고 있는 키엘에게 몸을 기대고 작게 미소 지으며 이 축복을 만끽했다.
제국의 황자는 그 부모를 쏙 빼닮았었다.
금을 박아넣은 듯한 보석 같은 눈과 어두운 흑발이 마치 어두운 밤에 떠 있는 태양 같았다.
제국민들은 황족을 두고 여러 가지 별칭을 부르기도 하는데, 황자 루이스는 ‘흑표범’이라고 일컬었다.
모든 사람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황자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제일 사랑한 건 푸르였다.
“아기 도련님!”
푸르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루이스에게 달려가려는 걸 로잔느가 막아섰다.
“푸르, 오늘은 그럼 받아쓰기 검사를 할게.”
“좋아! 솜사탕! 준비됐어!”
푸르는 인간계에 와서 처음으로 꼭 해보고 싶은 게 생겼다.
바로 루이스의 보모!
하지만 보모를 하려면 똑똑해야 하고, 똑똑함을 증명하려면 시험을 쳐야 했다.
- “보모면 루이스의 일상이 어땠는지 보고하고 적어야 하니까 적어도 글은 쓸 줄 알아야지.”
아무도 푸르를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지만, 착한 로잔느는 푸르를 위해 펜을 들었다.
푸르는 많이 멍청했지만, 루이스가 세 살이 되던 때 겨우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
“푸르가 쓴 일기도 봐도 돼?”
“응! 봐도 돼!”
어느새 벨라의 수족이 된 로잔느는 조용히 푸르의 일기를 꺼내 들었다. 보고서를 쓸 수 있을 만큼 일기를 세세하게 쓰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푸르의 일기예요!]
로잔느는 푸르에게 받아쓰기 문제를 내면서 일기를 보고 미소 지었다.
어쩜 이리 귀여운지.
[아기 도룡님 냄새가 맛있어! 도룡님은 넘어졌어! 푸르가 구해줬어!]
로잔느가 봐도 받아쓰기나 보고서가 문제가 아니었다.
성숙한 대화를 하지 못하는 게 문제였지.
“푸르,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일기를 써보면 어때?”
“옛날이야기?”
“응. 벨라 님이 해주신 옛날얘기라던가….”
“좋아!”
푸르에게 어려울 텐데도 푸르는 밝게 대답했다.
그렇게 보모가 하고 싶을까.
로잔느가 넌지시 물었다.
“푸르는 왜 루이스 님 보모가 되고 싶어?”
“아기 도련님한테서 아가씨랑 도련님 냄새가 나!”
그러더니 푸르는 책상 위에 있는 손수건을 가리켰다.
“저 손수건처럼!”
어쩐지 루이스가 태어난 이후로는 손수건을 거들떠보지도 않던데.
한 달에 한 번씩 벨라와 키엘과 함께 자야 한다는 것도, 가끔 루이스와 자는 걸로 만족해했다.
로잔느는 푸르를 보며 입가에 미소만 짓다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푸르는 벨라 님이랑 폐하를 아주 많이 좋아하는구나.”
사실 키엘을 좋아하는 건 이해가 되었다.
키엘은 지능이 어린아이인 푸르에게 맞춰서 항상 다정하게 말하는 편이었다. 어르고 달래는 일에 도가 텄는지 항상 주머니에 푸르에게 줄 간식을 넣고 다니고.
“푸르는 벨라 님을 왜 좋아하는 거야?”
그러나 벨라는 푸르를 많이 귀찮아하는데. 왜 좋아하는 걸까.
“공주님 덕에 말할 수 있었거든!”
로잔느는 벨라가 푸르에게 말하는 능력이라도 심어준 줄 알았다.
* * *
약 200년 전. 마왕은 곰족 중 갓 태어난 푸르만을 남겨두고 모두 멸족시켰다.
당시 푸르는 변방의 어딘가에 버려졌는데, 그곳은 그저 어둠밖에 없고 벌레 한 마리 기어 다니지 않은 척박한 곳이었다.
배가 고프면 흙을 먹고.
가끔 푸르보다 하급 마족이 지나가면 서툰 사냥 솜씨로 마족들을 잡았다.
사실 잡아 먹힐 뻔한 게 더 많았다. 그럼에도 마족들은 푸르를 잡아먹지는 않았다.
마지막 남은 곰족이라는 걸 알았기에 괜히 먹었다가 저주라도 걸릴까 봐.
결국 슬라임처럼 영양가도 없는 마물로 배를 채우던 푸르는, 한 가지 소망이 있었다.
“나도 말할 줄 아는데!”
왜 다들 푸르만 보면 도망을 가는 건지.
특히 푸르는 항상 붙어 다니는 몽마들이 부러웠다.
멀리서 마왕성 근처까지 와서 몽마들이 노는 걸 구경하다가,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리면 후다닥 다시 변방으로 도망가기를 반복한 지도 200년이었다.
딱히 슬프거나 외롭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그게 뭔지 몰랐기에.
그렇게 변방에서 혼잣말하던 푸르가 벨라를 만난 건 단순한 푸르의 뇌리에 박힐만한 사건이었다.
처음에는 새로운 마족인 줄 알았다.
아직 머리털도 다 나지 않고 겨우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아기.
덩치 큰 푸르의 발바닥만 한 크기길래 ‘잡아먹을까.’ 고민할 때였다.
“네가 마지막 곰족이야?”
푸르가 봐도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덩치인데, 똑 부러지게 말하며 푸르를 올려다보는 게 무서웠다.
“넌 말하는 슬라임이야?”
“…난 마계의 공준데.”
“나 공주 들어봤는데! 근데 공주가 뭐야?”
“…따라와.”
공주가 뭔지 몰라도 작은 아기에게서 느껴지는 아우라 때문에 잡아먹기는커녕, 벨라가 하라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 슬라임이 말할 줄 아니까 나랑 떠들자고 할까!‘
푸르는 처음으로 그녀를 보고 도망치지 않는 마족이라, 벨라가 좋았다.
그리고 벨라의 뒤를 따라가면서 점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도 여기 들어가도 돼?”
늘 멀리서 보던 마왕성의 입구에서 벨라는 푸르를 뒤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주인이니까, 들어와도 돼.”
그때 모든 마족이 푸르를 보고 놀랐지만, 바닥에 기어 다닐 정도로 작은 벨라는 마왕의 후계자답게 딱 한마디만 했다.
“선대가 하녀로 쓰래.”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선대 마왕이 후계자를 만들 때 푸르를 하녀로 두라고 했었다.
어떤 교육도 받지 못해, 인간계의 곰이나 다를 바 없는 푸르를.
“야. 교육해.”
벨라는 고쳐 쓴다며 몽마들에게 교육을 맡겼다.
그 이후로 푸르의 삶은 180도 달라졌다.
늘 혼자였던 그녀는 항상 벨라 옆에 있을 수 있었고.
다들 마계의 공주에 대해 궁금했기에 그걸 빌미로 몽마들이나 다른 마족들에게 으스대며 떠들 수 있었다.
“오늘 공주님이 뭐 했는지 알아?”
“뭐 했는데? 뭐 했는데?”
“손가락으로 바위를 부쉈어!”
“와아! 나도 보고 싶다.”
“부럽지?”
말을 하고 싶었던 곰은 쉴새 없이 말 할 수 있었다.
그러니 푸르에게 벨라는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푸르의 공주님이었다.
* * *
황궁의 정원.
매일 점심을 먹고 나른한 오후가 되면 정원의 입구를 굳게 닫고 오로지 황제와 황후만의 시간을 가졌다.
오후의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이제 막 세살이 된 루이스와 함께 정원을 산책하다 키엘이 벨라를 위해 만들어 놓은 정자에 앉아 가벼운 티타임을 즐겼다.
벨라는 푸르의 받아쓰기 시험과 일기를 번갈아 가며 보다 조용히 웃었다.
“세상에. 우리 푸르가 글도 쓸 줄 알고.”
키엘은 루이스를 무릎에 앉히고 조용히 찻잔을 들었다.
루이스가 찻잔에 손을 뻗자, 키엘은 웃으며 ‘안 돼‘라고 말하며 벨라에게 대답했다.
“잔바르도 이제 글 읽을 줄 안다면서요?”
“한 15년 얘기하니까 마족도 갱생이 되나 봐.”
“정말 푸르를 보모로 쓸 거예요?”
그 말에 벨라는 푸르의 일기를 내려놓고 키엘과 루이스를 바라봤다.
크고 작은 호박색 시선이 그녀에게 동시에 향하자 옅은 미소가 흘러나온다.
“모르겠어. 로잔느도 임신했는데, 언제까지 로잔느를 보모로 쓸 수는 없잖아.”
“흠….”
“적어도 이 애가 반마족이라는 비밀을 지켜줄 만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사실 벨라는 슈리아 공작가로 보낸 메리를 떠올렸지만, 용병에게 보모 일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푸르도 좋아할 만한 사람이어야 하고.”
“푸르가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요?”
벨라는 펼쳐진 푸르의 일기를 쓱 내밀어 키엘에게 보였다.
[아기 도룡님은 내 거야! 루이스는 내거야! 아무도 보모 못해! 내가 루이스 보모야!]
얼마나 독기 서려서 썼는지 뒷장까지 연필 자국이 선명하게 날 정도였다.
“푸르가 자기 말고 다른 보모를 별로 반가워할 거 같지 않아서.”
키엘은 이걸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
“고향에 있는 브웬 어때? 걔네는 애들도 이미 다 컸고….”
“벨라, 황위 물려주고 나면 저택으로 가고 싶었다면서요. 브웬이 우리 신분을 알면 괜히 골치 아플 거 같은데.”
“브웬 죽고 가지, 뭐.”
“음….”
“은퇴하면 전에 신혼여행 갔던 프로하 별장 가자. 바닷가도 있잖아.”
“…프로하에서 허락해줄까요?”
“그냥 내놓으라고 하면 되지.”
“협박이 먼저예요?”
하지만 그 협박도 키엘의 눈에는 귀여워만 보여 그저 웃었다.
“브웬에게 연락이라도 해볼까?”
키엘은 푸르의 일기를 한 장씩 넘기면서 벨라의 말에 동의했다.
어째 최근 일기로 갈수록, 루이스에 대한 푸르의 집착은 커지는 것 같았다.
‘확실히 푸르가 아예 모르는 사람이면 싫어할 만하겠네.’
그러다 마지막 페이지쯤.
“…벨라, 이거 읽어봤어요?”
“응? 다 안 읽었는데.”
키엘은 앞의 일기와 전혀 다른 내용을 벨라에게 보였다.
[옛날에 마왕님이 공주님에게 하라고 했다.]
“이게 뭐지?”
[마지막 곰족. 공주가 마왕이 되면 알려라.]
벨라가 푸르의 일기를 미동도 없이 보는 동안, 키엘이 물었다.
“루시트가 누구예요?”
그녀는 일기를 덮으며 그저 웃었다.
“선대 마왕의 반려.”
벨라는 여전히 200년 전의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
그녀가 아직 승계받지 못한 건 그저 그 일이지만, 그 이후 200년 동안 선대 마왕의 역사는 승계받았기에 무슨 의미인지 짐작이 갔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 그때의 일을 후회하던 날들. 뭔가 참지 못해 결국 후계자인 벨라를 만들었으니까.
“왜 웃어요?”
그때 루이스는 키엘의 무릎에서 내려가 벨라에게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엄마.”
벨라가 루이스를 번쩍 안아 들자, 루이스는 입술을 금붕어처럼 모아 뻐금거렸다.
“뽀뽀.”
“얜 왜 이렇게 널 닮아서 뽀뽀를 해달래.”
말은 투덜대지만, 벨라는 번지는 미소를 숨기지 않고 루이스의 입술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고 키엘은 그새 일어나 벨라 앞에 서서 똑같이 입술을 내밀었다.
“닮았으면 나한테도 해줘.”
“너 이렇게 귀엽게 말하면 반칙이야.”
“사용료 내. 빨리.”
그녀는 하얀 이가 드러날 만큼 환하게 웃으며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췄다.
“무슨 황제 폐하가 이래.”
“누가 할 소리.”
한 번의 입맞춤으로는 부족했는지. 키엘은 또 한 번 가까이 다가왔다.
그때 루이스는 벨라의 품에서 빠져나가 정원의 끝을 향해 달렸다.
“루이스. 그쪽으로 가면 안 돼.”
뛰어가다 혹 넘어질까 봐 그 뒤를 키엘이 따라갔고, 벨라는 조금 떨어져 두 사람을 바라봤다.
어느새 루이스의 손을 꼭 잡은 키엘이 따끔하게 그를 혼냈다.
“여긴 호수라 빠질 수도 있으니, 여기서는 뛰면 안 돼.”
혼이 나서 시무룩해진 루이스가 손을 뻗어 벨라에게 말했다.
“엄마.”
“엄마한테도 손잡아 달라고 할까?”
“네.”
키엘은 옆을 돌아보며 벨라와 마주 보았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지는 행복이었다.
어둠 속에서 눈을 떴던 그녀의 주변은 어느새 아름다운 것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마왕이 벨라를 만들기 직전, 그가 푸르에게 찾아가 했던 유언.
[루시트. 나도 너를 사랑했다.]
하찮은 감정을 부정하다 비극을 맞이 했으니.
벨라트리체. 혹 그런 일이 있더라면 너는 피하지 말라고.
두 사람은 천천히 서로에게 다가갔다.
찬란하고 눈부신 서로의 구원자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