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황제 즉위식이 있는 날 아침.
“오늘 정말 정신없네요. 망토 끝부분이 살짝 찢어진 거 있죠?”
로잔느가 양팔에 망토를 안고 벨라의 방에 들어오며 한숨을 내쉬었다.
“새벽에 한 번 더 확인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그러더니 로잔느는 들고 있던 망토를 밟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꺄악!”
오늘따라 유난히 로잔느는 정신이 없어 보였다.
황제 즉위식에 황후로 책봉될 벨라보다 더.
“…로잔느, 무슨 일 있어?”
잠시 정적이 흐르고,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로잔느?”
“벨라 님….”
그때, 벨라의 귀로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가 들렸다.
“아버지께서 혼처를 알아보셨대요.”
“뭐?”
로잔느는 엎어진 상태에서 몸만 일으켜 바닥에 앉았다.
“갑자기?”
그녀는 손등으로 뚝뚝 흐르는 눈물이 망토에 닿지 않게 닦았다.
“벨라 님이 황후가 되시면, 저 같은 백작가의 영애가 시녀를 하기엔 많이 부족하다고….”
처음에야 그랬긴 한데, 지금은 다른 시녀들보다 훨씬 더 벨라의 마음을 헤아리는데.
“혼처를 알아봤으니 시집이나 가래요. 엉뚱한 짓 해서 망신당하지 말고.”
벨라는 잔뜩 긴장한 채 로잔느를 쳐다봤다.
이제껏 영애들이 고민을 상담할 때마다 대충 대답했는데,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그쪽에서 저와 혼인하고 싶다고 했대요.”
“도대체 누가 너를?”
벨라의 어투가 마치 ‘너를 좋아하는 게 이상하다.’라는 느낌이었지만, 로잔느는 눈치채지 못했다.
“황태자비 경합 때, 무도회에서 절 보고 반했대요….”
로잔느는 자신도 믿기지 않는지 말하면서 허탈하게 웃으며 일어섰다.
“아버지께서는 저 좋다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빨리 혼사를 치르고 싶대요.”
로잔느는 사교계에 데뷔해야 할 나이에 가출한지라, 평판이 좋지는 않았다.
그러니 백작가에서는 이런 혼담이 들어왔을 때 성사시키고 싶겠지.
“…전 싫어요. 그런데 아버지를 설득할 방법이 없어요.”
그때 벨라는 얼마 전 키엘에게 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를 떠올렸다.
로잔느의 해피엔딩이 필요하다는 말에, 키엘은 이렇게 말했다.
- “로잔느는 그냥 내버려 둬요. 벨라가 괜히 나섰다가 더 엉망이 되면 어떡해.”
예쁜 얼굴로 뼈를 때렸지.
키엘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로잔느가 적어도 확실히 행복하다 느끼기 전에는 벨라 옆에 둬야 하니까.
“그럼 차라리 아버지께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게 어때?”
“만나는 사람이요?”
“리오에게 부탁해보자. 너랑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이렇게 된 거, 팍팍 밀어본다. 안 되면 말고.
그때 로잔느는 당황해서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네?”
“당분간만 그런 척하는 거지. 어때?”
“리오와 전 친군데….”
로잔느의 심장이 어찌나 빠르게 뛰는지, 인간계에서 잘 들리지도 않던 심장 소리가 벨라의 귀에 들렸다.
‘로잔느. 너 정말 다 티가 나는구나.’
둘 사이에 분명 묘한 기운이 도는 모양이었다.
“친구니까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 수 있는 거잖아. 내가 리오 보고 그렇게 하라고 할게. 널 내 시녀로 계속 데리고 있어야 하니까 말이야.”
벨라는 새롭게 시작되는 두 사람의 인연을 열렬히 응원했다.
참 신기했다.
젠킨스와 잔바르의 집착이, 결국 벨라와 키엘을 만나게 했다면.
벨라와 키엘의 집착이, 죽었어야 할 운명인 리오를 살렸고. 어쩌면 두 사람의 시작을 알리는 걸지도 모른다.
* * *
즉위식이 열리는 장소는 벨라가 황태자비 책봉식을 거행했던 곳과 동일했다. 하지만 규모는 달랐다.
수많은 인파가 구경하며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장식품들로 꾸몄고, 황궁 내부에는 귀족들을 위한 세기의 만찬이 준비되었다.
“워…. 머리 너무 무거워.”
벨라가 목을 만지작거리며 떨어질 것 같은 왕관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젠킨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잔소리를 장전하고 쏘아댔다.
“이럴 줄 알았습니다. 무슨 왕관에 보석을 이렇게 답니까?”
“어차피 한 번 쓰고 말 건데 뭐.”
“보통 그런 건 검소하게 하지 않습니까?”
“한 번만 버티면 된다는 의미지. 즉위식 끝나면 이건 내 껀데.”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잔바르마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인간계 물건이 뭐가 좋다고….”
“너희 둘이 요즘 합심해서 나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지?”
벨라는 젠킨스와 잔바르의 사이를 계속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아주 둘이 호흡이 좋은 게 그냥 결혼할 기세다?”
계속 놀리려고.
“무, 무슨 소리예요!”
“그런 망측한 말을!”
저렇게 핏대를 세우고 부정하는 게 아주 재밌었다.
그때 이웨르가 벨라의 쇄골 밑을 꾹 눌렀다.
“어휴, 아가씨. 이건 또 뭐예용?”
“왜?”
“우리 도련님은 왜 이렇게 생각 없이 키스한 걸 여기다 남길깡.”
벨라는 이웨르의 손을 뿌리치며 드레스의 가슴 부분을 조금 더 끌어올렸다.
“그… 그렇게 세진 않았는데.”
당연히 회복될 거로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키엘이 남긴 자국은 인간이었을 때와 비슷한 속도로 멍이 옅어졌다.
“아주 오늘 밤은 난리 나겠네. 궁금하당.”
“나도!”
음흉하게 웃는 이웨르와 옆에서 잠자코 있다가 끼어드는 푸르.
벨라는 그들의 이마에 딱밤을 하나씩 선물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따라올 생각 하면 둘 다 눈 뽑아서 마계에 던져 버릴 거야.”
* * *
모든 준비가 끝나고, 드디어 화려한 즉위식이 시작되었다.
황제가 서거하고 치르는 게 아니었기에, 오랜 기간 꼼꼼히 준비했다는 게 작은 장식 하나에도 표가 났다.
먼저는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악기를 다 모아놓은 악단이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고, 그 음악에 맞춰 기사단이 우아한 군무를 선보였다.
군무 중에 황제가 먼저 등장하고.
군무가 끝난 후에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양 끝에서 모습을 보이고 가운데로 걸어왔다.
그 순간 모든 사람이 숨조차 쉬지 않는 것처럼 조용했다.
그들의 모습을 처음 본 평민들은 그들이 생각한 이미지와 많이 다른 모습에 놀랐다.
황태자는 들었던 ‘새끼 사자’는 소문처럼 예쁘고 잘생긴 청년이었지만, 어딘가 강인해 보였고.
황태자비는 ‘동물 왕국의 공주님’란 귀여운 소문과는 달리 훨씬 고혹적이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설명하기 힘든 권위가 느껴져, 차마 ‘예쁘다.’라거나 ‘잘생겼다.’라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한 쌍이라는 걸 증명하듯 고급스러운 붉은 정장과 드레스를 입은 두 사람은, 어느새 가운데에서 만나 서로 인사했다.
“…예뻐요.”
벨라는 키엘을 보며 미소 지었다.
‘너도.’
두 사람은 곧 황제에게로 몸을 돌렸다.
“키엘 헤리언 엘리시아.”
황제는 한 칸 높은 단상 위에 올라갔다.
기력이 많이 쇠했는지 손이 떨리는 게 보였다.
“그대는 앞으로 엘리시아 제국을 이끌 황제가 되어 제국의 무궁한 발전과 영광을 위하여….”
긴 연설이 끝나고 황제는 키엘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고 홀을 건네주었다.
키엘이 뒤를 돌았다.
“와아아!”
공식적으로 황제가 되는 순간.
군중의 소리가 어찌나 큰지. 악단의 음악 소리가 묻힐 정도였다.
그는 곧바로 옆에 있던 벨라의 손을 잡고 그 손등에 입을 맞추고, 벨라와 어울리는 붉은 루비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황제 폐하 만세! 황후 폐하 만세!”
키엘이 팔을 올리고, 벨라는 그 팔 위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긴 망토가 천천히 그들을 따라 큰 계단을 내려오고, 커다란 마차 행렬 앞에 도착했을 때 로잔느가 벨라의 망토와 키엘의 망토를 벗겨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로한의 안내에 따라 사방이 뚫린 큰 마차에 올라섰다.
이 마차는 악단과 함께 황궁에서 출발해 수도의 끝까지 갈 예정이었다.
“젠킨스 말 들을걸. 머리가 너무 무거워.”
“그럼 왕관은 뺄까요?”
“그래도 돼?”
키엘은 웃으면서 벨라의 머리에 씌워진 왕관과 자신의 왕관을 들었다.
“우리 마음이죠.”
그가 두 개의 왕관을 로한에게 건네자, 로한은 어이가 없다는 듯 키엘을 쳐다봤다.
“…전하, 아니 폐하. 이게 무슨….”
“황제로서 제일 처음 명하는 일이 이거네.”
그리고 그는 한 손으로 마차의 봉을, 한 손으로는 벨라의 허리를 잡았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며, 사람들이 환호를 지른다.
벨라는 한참 웃으며 손을 흔들다 힐끔 키엘을 바라봤다.
햇살이 가득 그에게 살포시 내려앉아 반짝이고. 살랑이는 바람에 금빛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독이 될 거로 생각했던 이 마음은 수많은 사람의 축복을 받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영원히 이 시간을 기억할 수 있게.
새로 도입한 통신 마법으로 이 성대한 즉위식의 열띤 현장을 지방 곳곳까지 알렸고, 역사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즉위식이 되었다.
* * *
사실 역사상 신혼여행을 멀리 간 황제는 몇 없었다.
하지만 황태자비 책봉식도 간소화했고, 벨라의 공이 큰 덕에.
꽤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수도에서는 조금 먼 프로하의 영지를 여행지로 삼았다.
다행인 건 그들의 행선지를 아무도 몰랐기에, 방해받는 요소는 없었다.
쌍둥이들은 오랜만에 프로하의 본가에 가서 가족들과 함께 휴식을 보냈고.
벨라와 키엘은 마차를 여러 번 바꿔가며 몰래 프로하에서 준비한 별장에 도착했다.
프로하가에서 신경을 꽤나 많이 썼는지 복도마다 꽃내음이 가득했다.
그들이 머물 손님 방에도 신혼의 분위기를 축하하듯 꽃잎이 바닥에 뿌려져 있었다.
“키엘! 저기 봐! 바다야.”
창밖으로 밤바다가 보이자 벨라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바닷가로 오네. 전부터 꼭 같이 오고 싶었는데.”
“…나도 그랬어요.”
“이런 데서 살고 싶다.”
키엘은 조심히 벨라를 뒤에서 안고 함께 창밖을 바라봤다.
아래로는 바다가, 위로는 수많은 별이 박힌 하늘이 있었다.
“벨라, 그거 기억나요?”
“뭐?”
“내가 황제가 되면 소원 들어주기로 한 거.”
그날도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있었는데.
벨라는 그의 품에 벗어나 뒤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기억나.”
무슨 소원을 빌까.
뭐가 되었든, 마주하고 있는 이 아름다운 사람에게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선물할 생각에 기뻤다.
유산으로 생각했는데.
직접 들어줄 수 있어서 더 좋았다.
“계속 생각했었어.”
“뭘?”
“벨라가 왜 그 소설대로 되길 원했던 건지.”
그때 벨라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고, 사뭇 진지하게 키엘을 바라봤다.
분명 소설에 관한 이야기는 지난 새벽에 한 게 끝일 거로 생각했는데, 왜 소설 얘기를 하는 걸까.
“벨라트리체. 내 소원을 들어줘.”
소원의 조건이 이루어지자, 처음 약속했던 날처럼 그들의 주위에 바람이 불고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서로 보는 두 눈동자에는 그때 새겼던 마법진이 비치고 키엘이 입술을 떼었다.
“당신을 대신해서 내가 마왕이 되겠어.”
벨라는 황급히 그의 입과 눈을 양손으로 가렸다.
“안 돼.”
벨라가 고개를 젓지만, 키엘은 그녀의 반응도 예상했다는 듯 그저 웃고만 있었다.
그는 벨라의 두 손을 잡고 천천히 내렸다.
벨라가 힘을 줬지만, 예상치도 못한 그의 완력에 가렸던 두 눈과 마주했다.
“벨라.”
아마 그녀는 모르겠지.
어린 시절로 돌아가 다시 마법사의 제물이 되었을 때.
그는 펜던트를 버려둘까, 오랜 시간 고민했었다.
똑같이 반복되든 그렇지 않든. 웃어볼 일이라고는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잡고 있던 벨라의 손을 꽉 쥐었다.
그녀는 그의 목숨만 살린 게 아니라,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했다.
그러니 그의 인생에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구원받았을 때부터.
그녀만이 그의 심장이 뛰어야 할 이유였다.
* * *
벨라가 소설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키엘에게 했던 그 새벽.
키엘은 벨라가 잠들고 나자, 그녀가 습관처럼 베개 밑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냈었다.
핸드폰을 켜기까지 한참을 망설였다.
- “너랑 로잔느랑 행복하게 살면 된대.”
슬프게도 그는 그 하나만으로 만족하기 힘들었다.
만약 로잔느가 행복하지 않다면, 결국 무용지물일 거고.
그도 그의 인생이 행복할 거라고 단언할 수 없었다. 벨라가 지금은 옆에 있지만, 후에 또 그를 미워하진 않을까.
-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그러니 왜 벨라는 소설대로 가길 원하는 건지.
알아야만 했었다.
그리고 그는 벨라가 했던 문의를 보고 깨달았다.
[컴플) 인간에 빙의를 시켜야지, 마왕으로 빙의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어렵. 원작대로 완결 내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다 안 됨. 남주 죽고 저 좀 데리고 가줘 5000년은 못살아]
* * *
안 된다며 만류하는 벨라와 달리, 키엘은 조금 장난스럽게 말했다.
“미안해요, 늦게 눈치채서.”
“안 돼.”
“사실 벨라가 마왕이랑 잘 어울렸어.”
그래서 생각지도 못했다.
벨라는 그 역할에 많이 동화되어 있었고.
키엘은 그녀가 마왕인 게 아무 상관이 없었기에.
다행히도 그제야 모든 퍼즐이 제자리를 찾아가며 하나의 결론이 나왔다.
- “나도 인간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 “마왕이 되고 싶어서 된 거도 아닌데….”
왜 그토록 수하인 마족들을 싫어했는지.
단순하고 멍청해도 자기들이 제일 잘난 마족들과 다르게, 반마족인 젠킨스처럼 냉정하게 마족을 대하는지.
“벨라, 이 소설에서 마왕이 되고 싶지 않았던 거죠.”
벨라는 그의 말을 들으며 목이 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제 소원을 들어줘.”
다시 한번 키엘의 두 눈에 마법진이 나타났다.
“내가 마왕이….”
벨라는 그 찬란한 입술에 입을 맞추며 그의 목소리를 차단했다.
이 마음이 어찌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하지만, 이 소원은 들어줄 수가 없었다.
벨라는 키엘이 잡았던 손을 놓고, 그의 두 뺨을 어루만지며 입술을 떼었다.
“그러지 마.”
“벨라….”
그녀의 두 뺨 위로 떨어지는 눈물에 달빛이 반사되었다.
“네가 있을 때, 사람답게 살 수 있었어.”
어두운 마왕성에 네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곳이 얼마나 밝아지던지.
“너는 늘 나의 구원이자 나의 빛이야.”
매번 이렇게 찬란하게 다가와서.
그림자를 쫓아낼 만큼 밝게 빛난다.
“그러니 넌 늘 이대로 있어줘.”
밤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고, 바다의 물 위로 하늘의 별빛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파도가 출렁이며 해안가로 왔다가 부서지는 소리가 창밖에서 들린다.
웃고 있던 키엘은 어느새 눈망울을 글썽이며, 쓸쓸하게 벨라를 응시했다.
“벨라가 나 때문에 이곳에 갇히게 될까 봐 무서워.”
“행복하게 지내면 된다니까.”
“하지만… 나나 로잔느가 행복하지 않으면?”
“왜 그런 걸 생각해.”
“최악의 경우는 생각해야 하니까….”
벨라는 그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면 5000년은 마왕으로 사는 거지, 뭐.”
“…….”
“아까는 잘 어울린다며.”
벨라는 울적한 분위기를 바꾸려 했지만, 키엘은 따라오지 않았다.
“벨라는… 내가 밉지 않아요?”
“왜?”
“내가 모든 걸 바꿔서….”
“키엘, 정말 괜찮다니까. 나는 네가 이대로 있어 주면 좋겠어. 네가 마왕이 되는 건 상상도 하기 싫어.”
키엘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면….”
그가 봤던 문의의 답변을 떠올렸다.
모든 게 최악의 상황이 되었을 때, 그녀를 이곳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벨라트리체. 내 소원은….”
“잠깐.”
“내가 당신을 죽일 수 있게 해줘.”
벨라가 또 막아서려고 했지만 키엘이 벨라의 두 손을 꽉 잡았다.
‘무슨 힘이 이렇게 세진 거야.’
약속했던 그날처럼.
바람이 그들을 에워싸고, 그녀의 등 뒤로 검은 날개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조금 전의 계약을 막아내느라 힘이 모자란 탓에 그녀의 의지와는 다르게 계약이 진행됐다.
벨라의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자라 바닥까지 닿았고, 두 눈은 세상의 모든 붉은색보다 더 붉게 빛났다.
어느새 길어진 손톱으로 벨라는 천천히 키엘의 손을 잡고 그녀의 목으로 가져갔다.
그의 손이 가까이 가자, 목으로 붉은 목줄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언제든 그가 원할 때 그녀를 죽일 수 있게.
벨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 왜 이런 소원을 비는 거야?”
키엘은 그녀가 그의 심장을 빼간 날, 벨라가 했던 말을 기억했다.
- “정말 사랑한다면, 그때 넌 날 죽였어야 했어.”
그리고 모든 진실을 알았던 날, 그제야 그 말이 와닿았었다.
당신이 큰 것을 포기한 걸 아는데.
그저 덮어 놓고 모른 척 행복하게 웃기에는, 그의 안에 있는 우울한 어둠이 그를 삼킬 듯이 늘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벨라가 걱정 없이 지내야 하니까….”
마음만 같아서는 항상 눈에 보이는 곳에 가두고 싶고, 영원히 그만 사랑하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소원으로 그 마음을 갈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그 마음이 계속 지속할 수 있는 소원.
“이 소설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게.”
그녀를 대신해서 마왕이 될 수 없다면.
“내가 당신의 심장을 가져갈게.”
언제든지 그녀의 탈출구가 되어주는 수밖에.
“그러니까 너무 미워하지 마요.”
그 말에 벨라는 천천히 그녀의 목에서 그의 손을 떼어냈다.
붉은 목줄이 사라지며 길었던 손톱이 원래의 길이로 돌아왔다.
바쁘고, 행복한 일이 많아서 잊고 있었다.
이 아이가 상처가 많았던 사람이라는 걸.
- “네가 싫어. 미친 듯이 미워. 증오해.”
그리고 그 상처를 그녀가 줬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금이 간 유리를 아무리 정교하게 붙여도, 금이 보였고.
아무리 수십 번을 ‘사랑한다’라고 말해도, 이 아이는 쉬이 믿질 못했다.
“키엘….”
그렇다면 그녀가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다시는 떨어지지 않게 붙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금조차 아름다운 문양으로 만드는 것.
“예전의 일인데, 나랑 비밀 하나 있던 거 기억나?”
벨라는 빙긋 웃으며 늘 가지고 다니던 핸드폰을 꺼냈다.
‘하긴. 이 잘난 머리가 이걸 까먹겠어?’
당연히 기억하겠지.
“비밀 거울 말이야.”
벨라가 몇 번 손가락을 쓱쓱 움직이자 화면에 어린 시절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이 보였다.
“이거….”
키엘이 그녀의 핸드폰에서 사진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맞아. 그때 그 거울로 찍은 거야. 순식간에 그림으로 만들어주거든.”
“아….”
찍은 사진은 하나이나.
갤러리에는 수백 장의 똑같은 사진이 있었다.
“마계에서 심심하면 이거 가지고 놀았어.”
똑같은 사진이나.
어떤 사진은 키엘의 볼에 해님 모양을 그려 넣기도 하고.
어떤 사진은 벨라의 머리에 고양이 귀를, 키엘의 머리에 강아지 귀를 그려 넣었다.
수백 장의 미묘하게 다른 사진들은 웃고 있지만, 보고 있는 키엘은 웃을 수가 없었다.
마계에서 파비온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공주님이 잠드시기 전에 이름을 많이 부르셔서…. 항상 들고 다니시는 까만 거울을 안고….”
여태 그녀를 애타게 찾고, 함께 있고 싶다 생각하는 건.
그만의 바람이었던 줄 알았는데.
“네가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
“벨라….”
벨라는 사진을 보고 있는 키엘의 손에서 핸드폰을 내려놓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그녀는 까치발을 들어 조금 더 그에게 가까이 간다.
훌쩍 큰 키. 단단해진 가슴에 손을 올렸다.
“나는 너를 사랑해.”
창밖에서 파도 소리가 들린다.
항상 좋을 수는 없겠지.
크고 작은 시련들은 저 파도처럼 다가올 테고, 그때마다 차가워 놀라겠지.
하지만 파도는 결국 바다로 돌아간다.
서로가 서로만 아는 깊은 바다로.
서로만이 유일한 호흡이 되어 길고 긴 항해를 시작한다.
그는 그녀의 악한 모습도 사랑했고, 그녀는 그의 약한 모습도 사랑했다.
* * *
1168년 즉위한 엘리시아 제국의 황제 키엘 헤리언 엘리시아.
그가 통치하는 시대는 가히 혁명의 시대였다.
대마법사 리네 프로하의 기발한 발명이 1년에 한 번씩 쏟아졌고, 마법과학이 발전하며 제국에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서류를 전달하는 걸로 그쳤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하며 팔뚝만 한 크기의 선물을 보내는 것도 가능했다.
재력이 튼튼한 귀족 가문들은 개인 마법사를 고용하여 수도와 도시 간의 무전이 아닌, 개인과 개인의 무전을 하기도 했다.
새로운 황제의 업적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랜 기간 교류가 없던 화국과도 교류를 시작하며 무역이 발달했고, 제국 산하의 보육원과 학교가 신설되며 교육도 함께 성장했다.
이제껏 귀족이 만족하면 평민이, 평민이 만족하면 귀족이 불만을 품기 마련이었는데.
모두가 부유하고 안정적인 시대였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약간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일화가 있다면.
황후가 그리도 능력이 좋은데, 악독하다는 정도.
오랜 시간이 지나고, 그렇게 황제 키엘에 대한 평가를 후대들이 할 때였다.
키엘은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구름이 빠르게 지나가고,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폐하. 괜찮으세요?”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한 아이를 데리고 땀을 뻘뻘 흘리는 로잔느가 걸어오고 있었다.
“… 그 애들은 왜 데리고 왔대.”
“벨라 님께서 이름을 지어주신 아이잖아요.”
금발의 어린 소년이 키엘에게 허리를 숙였다.
‘시윤’이란 이름을 가진 소년.
벨라가 소설에 오기 전에 아끼던 이름이었다고 했다.
키엘은 그에게서 벨라의 흔적을 발견하고 옅게 미소 지었다.
그때 로잔느가 키엘에게 하얀 꽃을 건넸다.
성물 여행을 함께 떠날 때만 해도 고왔던 로잔느의 손에 아름답게 주름이 잡혀 있었다.
“벨라 님의 기일이니 데리고 삭제 와야죠.”
“…그래.”
그때 시윤이란 소년은 자신이 들고 있던 꽃을 키엘의 앞에 있는 무덤 위에 올려두었다.
혁명의 시대에 가장 든든한 배경이었던, 황후 벨라트리체 크루엘의 무덤.
키엘은 로잔느가 건넨 하얀 꽃을 만지작거리며 그리운 이의 이름을 속으로만 불렀다.
“…보고 싶어.”
키엘은 벨라의 무덤 앞에 놓인 비석을 문질렀다.
“…보고 싶어.”
그때, 옆에서 누워 자고 있던 젠킨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도련님. 아가씨 못 본 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요?”
“벨라 무덤을 보니까 기분이 별로야.”
“외롭지 않게 옆에 도련님 무덤도 있잖아요.”
세월이 흘러갔지만, 키엘은 그 세월과 전혀 친하지 않았다.
황제가 되었던 그 나이의 외형을 계속 유지할 때만 해도, 다들 그저 동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힘이 세지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부터 키엘의 체내에 마력이 쌓였다.
그제야 모두 알았다.
마왕의 반려답게 벨라의 힘과 수명을 나눠 갖게 되었다는 걸.
그래서 그들은 선위한 후 몇 달 뒤 공식적으로 서거했다고 발표했다.
“…지금 보고 싶어.”
키엘의 옆에 있던 푸르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도요! 배고파. 아가씨는 언제 와요?”
젠킨스가 혀를 차며 미간을 찌푸렸다.
“곧 올 겁니다. 이럴 거면 왜 따라왔어요? 그냥 이웨르 씨랑 같이 크루엘 별채에나 있지.”
“아가씨가 죽은 거도 보고 싶어서!“
“…….”
“도련님, 우리 이 무덤 파보면 어때요? 배고픈데.”
로잔느는 가만히 듣다가 어린 시윤을 데리고 뒤를 돌아섰다.
마족들과 지낸 지 꽤 오래되었는데도 로잔느는 가끔 그들의 언행이 불편했다.
“교육에 해가 될 거 같으니, 전 그냥 가보겠습니다. 벨라 님께 수도에 온 김에 제 의상실에 한 번 오시라고 전해주세요.”
“… 그러지.”
* * *
그 시각 벨라는 황제의 방에 고양이로 숨어들었다.
‘오랜만에 오네….’
늘 벨라의 취향대로 가구를 넣어놨는데,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흠….’
벨라는 마음에 들지 않아 침대 위에 올라가서 황제가 올 때까지 뒹굴뒹굴했다.
“…어머니. 지금 털 날리시는 거예요?”
“어,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벨라의 흑발과 키엘의 호박색 눈을 닮은 루이스가 팔짱을 낀 채 벨라를 내려다봤다.
‘골탕 좀 먹이려고 했더니.’
벨라는 사람으로 변해 어색한 인사를 했다.
“아들. 잘 지냈어?”
“오늘 기일이라고 오신 거예요?”
벨라는 고개만 끄덕이고, 황제의 방을 둘러보더니 작은 탁자 위에 올려진 팔찌를 가리켰다.
“저거 비싸 보인다?”
“맨날 와서 금품 갈취나 하고….”
“그러면 내가 와서 뜯어가기 전에 네가 먼저 보내는 건 어떠니, 아들?”
루이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조상님께 제사를 올려야 한다는 이상한 소리를 하더니.
그 후로 기일마다 찾아와서 돈 될만한 걸 가져가는 게, 아주 날강도나 다름없으면서.
이제는 알아서 공물을 바치라니.
“도대체 언제 철드실 거예요.”
“철은 네가 들어야지. 언제쯤 놀러 올 거야?”
“아시잖아요. 황궁에서 나가기 힘든 거.”
“키엘도 아들이 많이 보고 싶대.”
“과연.”
“진짠데.”
루이스는 벨라가 눈여겨본 팔찌와 미리 준비해 둔 상자를 건넸다.
“오. 묵직한데?”
“빨리 가세요. 축제 때문에 바쁩니다.”
“어휴. 넌 왜 이렇게 젠을 닮아서….”
벨라는 말끝을 흐리고 루이스를 노려봤다.
“저도 반쪽이라 그런가 보죠.”
* * *
키엘과 벨라의 이름이 적힌 무덤을 보면, 다들 기분이 묘했다.
젠킨스는 그와 같은 아픔을 함께 지고 갈 동료가 생긴 기분이었고.
마족들은 여전히 ‘인간들은 쓸데없는 걸 많이 한다.’는 생각이었다.
키엘은 복잡한 심경이었다.
로잔느도, 그도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기는 한데.
언젠가 그들의 인생이 행복하게 끝이 난다면, 벨라를 더 볼 수 없는 걸까.
그때였다.
“키엘!”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벨라는 키엘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아가씨. 왜 이렇게 늦게 오세요?”
젠킨스가 투덜거리자, 벨라는 키엘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불평했다.
“내가 고생하고 돌아왔는데 제일 먼저 듣는 목소리가 네 목소리여야 하니?”
키엘은 오자마자 젠킨스를 말로 두드려 패는 벨라가 반가웠다.
겨우 반나절 못 봤을 뿐이었는데.
그녀가 없는 시간은 하루가 천 년 같았다.
“루이스는 잘 지낸대요?”
“걔는 어째 커갈수록 젠킨스를 닮아가는지 몰라. 나보고 빨리 가라는 거 있지? 오랜만에 보는 건데.”
키엘은 벨라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게, 그때 소환하지 말자고 했잖아요. 프로하에서 수도까지 얼마나 먼데, 애를 소환해서 화나게 해요?”
“푸르가 루이스 보고 싶다고 난리를 피웠잖아.”
그 말에 푸르가 귀를 쫑긋 세우고 벨라와 키엘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저, 아기 도련님 보고 싶어요!“
푸르는 루이스를 정말 좋아했다. 벨라와 키엘의 냄새가 같이 나는 인간이라며 보모 역할을 톡톡히 해냈었다.
마치 자기가 루이스의 엄마라도 된 것처럼 끼고 살아서 그런지, 루이스에 대한 애정은 벨라를 향한 집착보다 더 심했다.
“루이스는 이제 아기 아니야. 완전 어른이야.”
“또 만들어주세요.”
벨라는 그들의 사이에 낀 푸르를 발로 밀어냈다.
“진짜 미친 거 아냐?”
기일마다 그들은 수도에 올라왔다.
처음에는 그들을 기리는 이들을 몰래 지켜볼 생각으로 온 거였다.
하지만 점점 그 목적은 희미해졌고 요즘에는 황궁에 가서 용돈이나 좀 받을 겸, 또 수도의 큰 여름 축제를 보려고 올라왔다.
“참, 로잔느가 의상실 오라던데.”
“언제 만났어?”
“아까 벨라 묘비에서.”
로잔느 프로하는 제국에서 제일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었다.
영애들의 드레스를 간편하면서도 아름답게 만드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주목받았고, 남성 정장까지 사업을 크게 확장했다.
그녀의 의상실은 작은 가게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화려하고 큰 가방 모양의 건물로 새로 지었고, 수도의 상징이 되었다. 이 또한 벨라의 아이디어였다.
“로잔느. 오랜만이야.”
“벨라 님은 여전하시네요.”
나이가 들어 기품이 느껴지는 로잔느와 여전히 20대 초반처럼 보이는 벨라가 거울에 함께 비쳤다.
묘한 기분이 살짝 들려고 할 때.
로잔느의 늦둥이 아들인 시윤이 달려와 벨라에게 안겼다.
“벨라 님!”
“우리 루이스도 어릴 땐 이렇게 달려왔는데.”
“폐하의 어깨는 아주 무거우시니까요.”
로잔느는 올해도 미리 준비한 옷을 선보였다.
벨라의 것은 진한 남색의 홀터넥 드레스로 금박으로 장식해뒀고.
키엘의 것은 벨라보다 조금 연한 남색으로 똑같이 금박의 장식이 돋보이는 정장이었다.
“이것 말고도 여러 벌을 준비했는데, 이건 프로하로 보내놓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고마워.”
벨라가 드레스를 갈아입는 동안, 먼저 입은 키엘이 로잔느를 보며 물었다.
“로잔느. 행복해 보이네.”
로잔느는 그의 말에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천사 같은 미소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그럼요….”
로잔느의 인생은 성공과 사랑을 모두 거머쥔 행복한 인생이었다. 말년에 얻은 늦둥이 아들 때문에 고생은 좀 하는 것 같았지만.
“그나저나 선위하신 후에 매번 여행 다니시던데, 안 지겨우신가요?”
여행과 축제는 아무리 즐겨도 질리지 않았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 성숙미를 더해가지만, 마족들은 늘 어린아이처럼 그 시간 속에 살았다.
그건 벨라의 힘을 계속 받는 키엘도 마찬가지였다.
“응. 벨라랑 같이 있으니까.”
“아… 예.”
속은 어른이었으나 시간이 되돌아갔을 때, 어리광부리던 것처럼.
이제는 떠나보내는 것도 익숙할 만큼의 나이가 들었는데도, 여전히 그의 사랑은 아직 어린 스무 살 즈음에 머물러 있었다.
* * *
크루엘 공작가 관할의 도시 데이저의 여름 축제도 재밌었는데.
수도의 여름 축제는 그보다 훨씬 규모도 컸고 놀고먹기 좋았다.
“역시 수도라 그런지 잘생긴 청년들이 많네용.”
사람뿐만 아니라 물건도 많이 있었다.
젠킨스는 지나가다, 책들을 쌓아놓은 곳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세상에. 이런 책도 있다니.”
혁명의 시대를 살았던 황제와 황후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었다.
젠킨스가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책을 한 장씩 넘기는 동안, 잔바르는 뒤에서 그가 읽을 줄 아는 단어만 읽었다.
“…키스. … xx.”
“자, 잔바르 님. 그런 단어는 소리 내지 마세요.”
“그러지.”
민망했던 젠킨스가 책을 탁 덮자, 벨라가 그 책을 도로 뺏어가서 키엘과 함께 펼쳐봤다.
그들이 눈으로 읽는 동안, 책 장수가 신이 나서 설명했다.
“요즘 제일 잘 나가는 책입니다. 아주 적나라한 표현과 현실고증이 제일 잘되어 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벨라와 키엘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이거 그냥 야한 소설이잖아.”
“벨라가 제일 좋아하는 곳은 여기가 아닌데….”
수위도 너무 높은데다가. 채찍을 들고 황제를 조련하는 황후라니.
벨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책을 구겼다.
“현실고증조차 하나도 안 되어 있잖아….”
그러자 책 장수가 억울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 그렇게 다루시면 사셔야 합니다. 귀한 책이라고요.”
“…….”
“그 작가의 시리즈 중에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에요. 작가의 이상을 다 넣었다던데.”
키엘이 벨라가 구긴 책을 펼쳐 앞에 작가의 이름을 확인했다.
“벨라. 작가 이름이 ‘이웰’인데요.”
이웰이라. 벨라와 키엘은 동시에 이웨르를 쳐다봤다.
“어머, 그렇구낭. 앗! 저기 엄청나게 잘생겼넹! 전 오늘 밤 찾지 마세용!“
문책하기도 전에 이웨르는 빠른 속도로 뒷걸음치다가 도망갔다.
“진짜 쟤가 하다 하다 망상까지 하네.”
평소였다면 지금 당장 잡아들였겠지만, 벨라는 수도에 있는 시간 중 1할이라도 이 녀석들에게 쓰고 싶지 않았다.
데이저와 다르게 수도 축제의 꽃은 화려한 불꽃놀이였다.
키엘이 황제가 된 이후로, 황궁에서도 잘 보일 수 있게 예산을 쏟아부었더니 다른 도시에서도 이 불꽃놀이를 보러 오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올해는 사람이 너무 많네요.”
“별채에 들어갈까?”
지금은 비어 있는 크루엘 공작가의 별채로 향했다.
다행히 마족들은 밖에서 노느라 이곳으로 오지 않았고, 오랜만에 단둘만 있을 수 있었다.
“슈리아 공작은 본가에 갔나 보네요.”
두 사람의 정체를 아는 사용인들만 남아서인지 별채는 한산했지만, 둘의 발소리만으로도 가득 찬 기분이 들었다.
“다들 잘 지내서 다행이야. 로잔느도, 쌍둥이들도, 슈리아도.”
“벨라가 바라는 대로 모두 행복한 결말을 맞았네요.”
어느새 침실에 다다르자, 키엘은 주머니에서 언제 준비했는지 붉은 실을 꺼냈다.
“너 그거 여기도 들고 온 거야?”
“…당연하지.”
새끼손가락에 묶고 난 후, 키엘은 조금 쓸쓸하게 웃었다.
“혹시나 오늘이 소설의 끝일지도 모르잖아요.”
키엘은 붉은 실을 묶은 손을 맞잡고, 다른 한 손으로 벨라를 안아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로잔느가 행복하지 못하게 할걸.”
벨라는 그의 턱을 잡고 싱긋 웃었다.
창밖으로 불꽃이 터지며 어두웠던 침실을 밝히 비춰준다.
“사랑해.”
그들은 매일 밤 붉은 실을 묶었고.
매일 아침 햇빛보다 더 밝게 빛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들은 충분히 행복했다.
하지만, 하루만 더.
딱 하루만 더.
행복한 날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계속 이어져가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아직도 그들은 그 문장 안에서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