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몽마라니! 그런 저급한 거에 나를 비교할 수 있어?”
화가 난 그녀는 예의고 뭐고 밥 말아 먹고 협회장에게 잔뜩 짜증을 쏟아냈다.
“차라리 마왕이라고 하던가. 어디 격 떨어지게 몽마에 갖다 비벼?”
벨라의 뒤에서 이웨르는 괜히 찔리는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힝. 몽마가 어때서.”
몽마를 욕해서 마음 상한 이웨르와 달리.
대다수가 ‘몽마’나 ‘마왕’이라는 단어보다, 이 진지한 국정 회의에서 황태자비가 막말하는 게 더 놀라웠다.
“물론 내가 그 정도로 매혹적인 건 인정하는데.”
거기다 뻔뻔하기까지.
“전에도 말했듯이 내가 마음이 예뻐서, 전하께서 나의 그런 점을 좋아하는 거라고요.”
벨라는 의기양양하게 말하다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마음만 먹으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죽일 수도 있는데, 안 그러잖아. 얼마나 마음이 고와?”
벨라는 진심이었다.
제국 따위 멸망해도 상관없는데, 키엘이 황태자니까 어쩔 수 없이 참는 거지.
작년에도 몇몇이 키엘을 비웃었다는 데, 마음 같아서는 모조리 찾아내서 마계로 던져버리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 진심을 협회장이 알 리가 없었다.
마력이 없는 황제에게 마력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는, 황제 몰래 마법을 쓰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그게 바로 볼드가 협회장을 오래 할 수 있는 이유였고.
제국의 실정도 모르는 하룻강아지 같은 황태자비가 하는 말이 너무 아니꼬웠던 협회장은 콧방귀를 뀌었다.
“허세는.”
작게 말한 소리였는데.
협회장은 벨라를 비웃다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저 멀리 서 있던 벨라가 바로 자신의 코앞에 다가왔기에.
“아, 아니….”
벨라의 손톱이 어느새 길어졌고, 그녀는 손톱으로 협회장의 목을 쓱쓱 만졌다.
협회장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 사람은 정말 마족이라는 걸.
그는 벨라의 손을 잡고, 제 목숨이 낭떠러지에 있는지도 모른 채 마음대로 지껄였다.
“버러지 같은 짐승이 황궁에 들어왔구나. 주제도 모르면서.”
볼드가 그의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본 건, 화를 내던 벨라가 차가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는 거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그 순간.
벨라는 그의 목을 단숨에 댕강 잘라버렸다.
옆에 있던 마법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도망갔고, 그 비명을 들은 벨라는 차분하게 생각했다.
‘그냥 다 죽여버리고 키엘이랑 여행이나 갈까.’
황제 라리에트는 옅은 숨을 겨우 쉬며 안도했다.
그의 약점을 쥐고 있는 협회장의 목숨이 종잇조각처럼 단숨에 찢어졌다.
마력이 없기에 늘 조마조마했던 황제 라리에트와 달리, 키엘이 황제가 된다면 단순히 이름뿐만이 아닌 힘으로 흔들리는 황권도 휘어잡을 수 있겠지.
일전에도 말한 바. 날 서고 좋은 검이 무섭다고 없애랴.
사이가 좋아 보이니 황태자가 그 검을 잘 쓰면 될 터였다.
황제가 옆에 있던 긴 홀로 바닥을 치자, 소란스러웠던 회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는 다 쉰 목소리로 입을 뗐다.
“황태자비는 황태자가 결정한 일일세. 그러니… 쿨럭.”
하지만 그는 말을 다 하지 못하고 기침을 심하게 했다.
로한이 황제를 부축하는 동안, 키엘은 눈치껏 상황을 정리했다.
“태자비. 제 옆으로 오시죠.”
벨라는 볼드 경의 잘린 머리를 들고 또각또각 키엘에게로 걸어갔다.
“황태자비에 대한 신원은 먼저 크루엘 공작가가 했고, 그다음이 나야. 이세계에서 온 증거는 이미 다 보았네. 안 그런가, 슈리아 공작?”
이제껏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만 보던 슈리아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제껏 그들을 절대적으로 반대하던 로한이 황제를 부축하다 말을 덧붙였다.
“저도 봤습니다.”
로한은 벨라가 마족일 거라는 짐작을 하고 있었다. 수도에서 소문이 돌기 전부터.
위험한 사람일 거라 짐작하고 그리 내치려고 했건만, 벨라는 마치 운명처럼 황궁에 붙어 있었다.
‘수도의 소문을 믿는 사람도 없긴 하지.’
협회장도 아마 진짜 믿진 않았을 거로 생각했다. 그저 마법사들의 자부심 때문에 딴죽을 건 거겠지.
로한의 실권이 점점 약해지지만, 그렇다고 제국이나 황족에 대한 충성심이 줄어든 건 아니었기에.
“저도 봤습니다. 본체가 날개 달린 그리핀이시더군요.”
로한은 황제의 오랜 염원이었던 황권 강화를 위해 키엘의 말에 힘을 실었다.
그리핀은 전설 속에 나오는 날개가 달린 사자.
그러니 제국을 위한 환상으로는 이보다 더한 게 없겠지.
키엘과 벨라는 로한이 그들의 편을 드는 게 의아했지만 당장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키엘이 상황을 정리하며 다시 한번 귀족들에게 권고했다.
“황태자비는 제국에게 선물 같은 사람이야. 제국을 위해 자신의 마력까지 쓰겠다는데.”
어느새 벨라가 키엘의 옆으로 다가왔고, 그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하마터면 볼드 경의 머리를 잡고 있는 손을 잡을 뻔했지만, 자연스럽게 다른 손을 잡았다.
“이 이상 의심하고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은 삼가길 바라네.”
그때였다.
협회장은 머리가 거의 다 빠진 대머리였기에, 벨라가 잡고 있던 머리카락만으로는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는지 그녀의 손에서 떨어졌다.
툭.
데굴데굴.
모든 이들이 ‘거스르는 행동’을 하면 어떻게 될지, 눈으로 보고 있었다.
“…협회장은 새로 뽑아야겠네.”
키엘이 싸늘한 볼드 경의 머리만 보며 중얼거리자, 리네는 벨라에게 엄지를 내밀며 눈을 반짝였다.
협회장은 자리를 빼앗기기 싫어서 대마법사에 대한 논의를 미루고, 리네가 하는 일마다 별거 아니라면서 후려치고 축소화시켰다.
“안 그래도 저놈은 오늘 밤 내 손에 죽었을 거예요. 제 배만 채우고 딱히 하는 일도 없는 게.”
그리고 리네와 친한 마법사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협회장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어디 이상한 소문을 듣고 와서 이런 자리에서 불순한 입을 놀리는 건지, 원.”
“안 그래도 마법 협회에서도 협회장의 비리와 독재에 불만을 품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맞아. 리네 프로하 경이 대마법사 반열에 안 오르는 것도 이상하고.”
어째 목을 자른 건 벨라였는데, 나쁜 놈은 협회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벨라는 그들의 근본 없는 옹호에 점점 화가 가라앉으며 자신이 한 행동을 돌아봤다.
- “버러지 같은 짐승이 황궁에 들어왔구나. 주제도 모르면서.”
그 도발에 넘어가 앞뒤를 생각도 하지 않고 죽여버렸으니….
벨라는 키엘의 눈치를 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작게 물었다.
“키엘. …화낼 거야?”
“내가 벨라에게 화를 왜 내요?”
“내가 다른 건 다 참아도 너 욕하는 건 못 참아.”
그리고 뒤에서 얌전히 지켜보던 젠킨스가 혀를 끌끌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련님이 아니라 아가씨를 욕한 거 같은데요?”
“부부는 일심동체니까. 나를 욕한 건 곧 키엘을 욕한 거로 간주한다.”
“… 뭡니까, 그게.”
키엘은 그저 입에 미소만 짓고, 손수건을 꺼내 벨라의 손에 묻은 피를 천천히 닦아주었다.
‘앞으로도 당하는 척해야겠다.’
지금처럼 그를 대신해 화를 내는 모습이 황홀했다.
훗날 제국의 역사서에는 이날을 그렇게 기록했다.
제국의 비약적인 발전을 안겨준 무전통신 마법의 시초가 된 날.
오랜 기간 재임했던 협회장이 황실을 모욕했다가 죽고, 마법사 협회의 개혁이 일어났던 날.
* * *
국정 회의 이후, 로한은 완전히 벨라의 편에 섰다.
벨라에게 딴죽을 걸지 않아서 좋긴 한데, 다른 의미로 벨라는 그가 오히려 그녀의 적이었으면 싶었다.
“… 황태자비면 모범이 되어야 하니 가능하면 긴 드레스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황후가 되실 거니 최소 이주에 한번은 사교 모임을 여십시오.”
“전하의 주변에는 뜨내기 같은 영애들밖에 없군요. 공작가의 자제분들과도 친해지셔야죠.”
지난 몇 달 동안 사사건건 따지고 드는 게 시어머니의 잔소리보다 더 심했다.
거기다가.
“황제 폐하께서 맡으셨던 일입니다. 곧 선위하실 생각이니 태자비 전하께서 반 정도는 이어 가주셔야겠습니다.”
“와…. 로한 씨, 미친 거 아니에요?”
“씨,라니요. 경이라고 붙이십시오.”
벨라는 로한이 들고 오는 막대한 업무를 보고 몸서리쳤다.
그래도 투덜거리면서 그녀에게 닥친 일들을 하고 있었는데.
“선대 황후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손을 전혀 안 댄 거라, 정리하기 좀 힘드실 겁니다. 5년 치 되는….”
“아아아악!”
로한은 악마보다 더 악마 같은 자식이었다.
쉴 틈도 안 주고 일거리를 갖다주는 게, 그들의 편에 선다기보다는 창의적으로 괴롭히려고 작정한 사람 같았다.
벨라는 결국 방을 뛰쳐나갔다.
“어, 어디 가세요!”
“따라오지 마! 오늘은 쉴 거야!”
“어딜 쉽니까!”
로한이 벨라의 뒤를 쫓았지만, 인간이 마왕의 발걸음을 따라가기엔 역부족이었다.
한참을 도망치던 벨라는 결국 키엘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딜 가든 보는 눈이 있으니 숨을 곳이라곤 여기밖에 없지.
“키엘!”
키엘은 책상에 앉아 여유롭게 업무를 보던 중이었다.
“젠킨스보다 더 독한 새끼는 진짜 처음이야.”
“…로한 말하는 거예요?”
“어. 걔 미쳤나 봐, 진짜. 나 여기서 좀 숨어야겠어.”
벨라는 고양이로 변해 키엘에게로 달려갔다.
로한은 그녀가 고양이로 변할 수 있다는 걸 몰랐기에 잘만 숨으면 오늘은 좀 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키엘은 그의 무릎 위에 올라온 벨라를 쓰다듬으며 피식 웃었다.
그도 처음에 황궁에 들어왔을 때 많이 힘들었었다.
아랫사람이 할 일까지 할 줄 알아야 한다며, 로한이 자기의 일까지도 키엘에게 시켰었다.
‘진짜 벨라 편에 설 모양이네.’
혹독하긴 하지만 로한은 나름 황실의 교육을 자처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 키엘의 방문 밖으로 말소리가 들렸다.
“아…. 저,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로한 님.”
“비키게. 이 안에 황태자비 전하가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으니.”
“그… 그게 안 됩니다.”
키엘은 빙긋 웃으며, 귀를 쫑긋 세우고 상황을 지켜보는 벨라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렸다.
“벨라. 로한 경 쫓아내는 법 있는데. 알려줄까요?”
“뭔데?”
“사람으로 변해봐요.”
“그러면 숨기 힘들 텐데….”
하지만 벨라는 키엘이 시키는 대로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람으로 변하는 바람에 책상에 앉은 꼴이 되었지만.
“아, 미안. 내려가서 변할걸.”
“아냐. 거기 딱 좋아요.”
“응?”
키엘이 책상 위에 있던 서류들을 한 손으로 치우며 서서히 벨라를 밀었고, 그녀의 등이 책상에 닿았다.
“어… 저기?”
때마침 로한이 문밖에서 승강이를 벌이다 강압적으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키엘은 얼굴에 짜증을 가득 품은 채 문에 서 있는 로한을 쳐다봤다.
“…황태자비가 와 있을 땐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는데.”
로한은 난감하게 그들을 보며 말을 더듬었다.
“화, 황태자비 전하께서 하실 일이 있…어서….”
“후계를 만드는 것도 일이니 이제 그만 나가지?”
로한은 군말 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잠시 후 로한이 사라졌는지, 경비들끼리 로한의 뒷담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게 황태자비 전하께서 계실 땐 들어가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거늘….”
“로한 경도 진짜 일 중독자야.”
벨라도 조금 민망했는지, 목을 가다듬었다.
“고마워. 확실히 안 오겠네….”
그리고 책상에서 등을 떼고 일어서려는데.
“일해야죠, 벨라.”
“어?”
벨라는 다가오는 키엘을 보며 긴장한 채 침을 꿀꺽 삼켰다.
“종일 보고 싶었어.”
왜 이렇게 사자가 아니라 여우 같은지.
‘여… 여기서?‘
이럴 생각으로 키엘의 방에 온 건 아니었는데. 벨라는 그의 혀에 사르르 녹아내리는 디저트가 된다.
벨라는 그녀의 허벅지를 쓸며 올라오는 차가운 손가락에 깜짝 놀라 그의 가슴을 손으로 밀었지만, 언제부터 이렇게 힘이 세진 건지 그는 밀리지 않았다.
다른 여자를 품은 적도 없을 텐데, 왜 이렇게 능숙한 거야.
* * *
국정 회의 이후.
슈리아는 수도에서 떠돈다는 그 허황한 소문이 자신의 핏줄과 관련된 걸 직감했다.
‘하아….’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처음에는 후안을 그저 바람둥이로만 생각했었다.
심심하면 여자를 갈아 치우면서 그게 상대에게 상처가 될 거라고 생각도 못 하는 그런 나쁜 사람.
그놈의 첫사랑이 뭐라고 닮은 사람만 보면 마음이 간다고 했던가.
그때까지만 해도 사랑에 빠져 있는, 나빠도 좀 불쌍한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가 아끼던 하녀, 엘렌이 떠났을 때.
후안이 그동안 자신이 크루엘가의 공자라는 걸 이용해서 거절할 수 없게 여인들을 꼬았던 것뿐이라는 걸 알았다.
슈리아는 의자를 뱅글뱅글 돌리고 다리를 꼬았다.
“오라버니는 도대체 왜 그럽니까?”
메리가 몇 달 동안 공들인 결과.
후안이 밧줄로 묶여 있는 채 메리의 옆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수도와 인근에 벨라 님이 마족이라고 떠들어대는 거 잘 들었습니다.”
슈리아는 기가 찬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누가 믿기는 합니까?”
수도에 그런 소문이 돌긴 하지만, 그 소문에는 꼭 꼬리표가 붙었다.
- “어떤 미친놈이 황태자비가 마족이래.”
후안은 진짜 미치기라도 한 건지, 자신의 말을 믿어달라며 호소했다.
“사, 사실이야. 그 아가씨는 마족이라고. 내가 분명 들었고, 그 아가씨도 맞는다고 했어.”
“그 아가씨, 그 아가씨!”
메리는 슈리아가 저렇게 짜증을 내는 걸 처음 봤다. 늘 차갑고 근엄한 줄 알았는데.
“황태자비입니다. 그렇게 하대하듯이 부르지 마세요!”
“…….”
“그리고, 설령 오라버니의 말이 맞다 한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이미 크루엘가의 사람인데.”
후안은 슈리아의 시선을 회피하며 읊조렸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이제 보니 오라버니는 참 찌질하시네요.”
시선을 돌렸던 후안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오늘이 그의 마지막 날이라는 걸 예감했기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듣자 하니 오라버니는 딱 한 번 축제에서 만났다면서요?”
“그걸 네가 어떻게….”
“어떻게는 뭐가 어떻게입니까. 벨라 님이 다 얘기해줬죠. 전 무슨 세기의 사랑인 줄 알았습니다?”
후안은 이를 깨물었다.
그의 죄라면 그저 첫눈에 반한 것뿐.
그 환상에 사로잡힌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벨라 님이 그렇게 집착하는 사람 진짜 찌질하답니다.”
“그건 전하도 마찬가지야!”
“전하께서는 오라버니와 같지 않아요.”
상대를 생각지도 않고 제 감정을 내민 후안과 상대를 너무 생각하다 제 감정을 표현 못 한 것의 차이.
벨라를 크루엘가의 양녀로 받아주는 대신, 크루엘 가에서 황태자비가 나오게 하겠다고 키엘이 슈리아와 약조를 했던 날.
- “그렇게까지 했는데 그분이 전하를 안 좋아하시면 어떡합니까?”
벨라가 끝내 경합에 나가지 않는다면, 슈리아가 대신 제국 안주인의 권력을 갖기로 했었다.
그때 키엘은, 하녀 엘렌과 똑같은 얼굴로 말했었다.
- “그때는… 그냥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슈리아는 손에 들고 있던 서신들을 후안의 얼굴에 집어 던졌다.
“벨라 님이 서신마다 전하의 이야기를 하시는데요.”
슈리아는 아직 뿌리지 않은 서신 하나를 들고 읽어내려갔다.
“친애하는 슈리아 공….”
‘공녀’에서 ‘녀’를 두 줄로 긋고 옆에 ‘작’이라고 적은 걸 보자, 슈리아는 순간 귀여워서 웃을 뻔했다.
안부를 묻는 이야기는 생략하고, 키엘에 대한 이야기만 읊었다.
“곧 있으면 황제 즉위식인데 뭘 선물로 줘야 할지 모르겠네요.”
슈리아는 거기까지만 읽었다. 그 뒤의 내용은 ‘용돈 좀 보내라’는 완곡한 표현이었으니.
“전하의 생일에 벨라 님이 무슨 선물을 주셨다는 지 압니까? ‘벨라’님을 선물로 드렸답니다.”
메리는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들리자 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두 분이 얼마나 금실이 좋은지 아세요? 수도에 오라버니가 퍼트린 소문보다 그 소문이 더 많이 들릴 텐데.”
“…….”
“전하께서 매일 벨라 님의 침소로 드신다네요.”
“…거짓말이야.”
“맞아요, 거짓말입니다.”
후안이 내내 시선을 바닥에 두다가 고개를 올렸다.
“벨라 님이 전하의 침소로 간답니다.”
“풉. 흠흠.”
메리는 슈리아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후안이 바보 같아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가 다시 헛기침했다.
슈리아는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일어서서 허리춤에 있는 검집을 만지작거렸다.
“오라버니.”
후안은 죽음의 문턱 앞에서 침을 꿀꺽 삼켰다.
“너무 찌질해서 제 손에 피 묻히기도 싫습니다. 그냥 꺼져서 남은 하류 인생을 알아서 사세요.”
“… 슈리아.”
“하지만 벨라 님이 오라버니를 보면 꼭 하라고 한 일이 있어서요.”
“그 아가씨가….”
“메리.”
슈리아의 명령에 메리는 후안의 얼굴을 잡고 입을 벌렸다.
“으어어어!”
후안이 아픔을 호소하며 잘린 혀를 주우려고 했지만, 이제 메리는 후안의 두 손을 꽉 잡았다.
“으아아!”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고통이었다.
슈리아는 피가 흐르는 검을 닦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말 못 하게 혀랑 손가락은 뽑으라고 하셔서요.”
메리는 잔혹한 현장을 보며 후안을 조금 가엾게 여겼지만, 슈리아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소설 속의 흑막 악역은 악역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가문에서 쫓겨났다.
* * *
국정 회의는 1월이었는데, 로한이 주는 업무에 쫓기다 보니 어느덧 여름이었다.
리네의 무전통신 마법은 시행착오를 거쳐, 새로운 업무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몇 달 되지도 않았지만, 이전의 삶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며 대부분의 귀족이 좋아했다.
특히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본가를 둔 귀족일수록 더더욱.
로한은 황제에게 근황을 보고하며 예상도 못 했었다는 듯 웃었다.
“…그래서 칭찬이 자자합니다.”
사람들은 처음에 새로 책봉된 황태자비가 무섭고 성격이 꽤 드세다고 수군거렸었다.
마족이 아니라고 못 박아두긴 했지만, 차라리 마족인 게 더 이해가 될 정도로, 황태자비가 쳐다볼 때면 때때로 소름이 돋았다.
평판이 좋지 않을까 봐, 로한이 그리 완벽한 황태자비와 황후의 모습을 가르치려 했는데.
사람들은 공포는 잊고, 날이 갈수록 오히려 황태자비가 마력을 제공하니 제국에 도움이 된다며 칭찬으로 결론지었다.
“다행이군.”
그리고 그건 황제 라리에트가 늘 바라던 군주의 모습이었다.
제국을 위해 헌신하지만, 호구가 되지는 않는 모습.
황제는 그 모습을 황태자에게서 제일 먼저 발견했지만, 아쉽게도 마력이 없기에 결국 크게 부딪히기만 할 줄 알았는데.
그 결함도 황태자비를 통해 채워지고 있으니, 라리에트는 두 사람이 제국을 위해 다음 단계로 갈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즉위식은 잘 준비하고 있나?”
“예. 책봉식도 소소하게 했으니 이 예산, 저 예산 다 끌어 써서 화려하게 할 거랍니다.”
“…태자가?”
“아니요. 황태자비 전하께서요.”
“하하.”
로한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폐하, 전 솔직히 걱정됩니다.”
“무엇이.”
“전하께서 너무 황태자비에게 빠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태자가 책임을 소홀히 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젠가.”
로한은 조심스럽게 황제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결국 마음이 그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날이 올 겁니다.”
마치 황제 라리에트처럼. 그런 날이 올 거라는 듯이. 황제는 그저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글쎄. 오히려 바른 판단을 하게 할 수도 있지. 마음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니겠는가.”
고인이 된 황후의 시녀는,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었다.
선을 넘어서는 안 되었는데 넘어버렸고.
그녀가 아이를 가져서는 안 되었는데 가졌고.
황비로 책봉하고 지켰어야 했는데 지키지 못했었다.
그러니 황태자와 사이가 소원한 것도, 결국 그의 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예산이 모자란다면, 내 사비를 써도 괜찮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게.”
“…폐하.”
“제국에 다시 마력을 가져다준 사람이잖는가.”
* * *
벨라는 키엘과 함께 황제 즉위식을 준비했다.
보통 이런 일은 황위를 물려줄 황제와 황후가 준비하지만.
황제는 병상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때가 많았고, 황후는 없으니 그들이 할 수밖에 없었다.
젠킨스는 벨라와 함께 업무를 보다가 물었다.
“아가씨는, 인간계 생활이 좋으세요?”
“응. 왜?”
“…아뇨. 가끔씩 보면 마계는 별로 신경 안 쓰시는 거 같길래요.”
벨라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마족들은 반마족을 싫어할 텐데, 반마족이 마계를 걱정하는 게 웃기기도 했다.
“신경 쓸 게 뭐 있어?”
“뭐… 갑자기 주군이 사라져서 혼란스러울 수 있잖아요?”
그 말에 벨라가 피식하고 웃었다.
“너 마계 와봤다며. 그럼 알 거 아니냐.”
“뭐가요?”
“거긴 내가 있으나 없으나 그냥 혼돈의 카오스야.”
“아니, 그래도….”
“다시 돌아가면 마왕성 부서진 거 그대로고, 자기들끼리 먹고 놀고 있을걸?”
그러다 벨라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아니지…. 내가 없으니 더 엉망진창이겠네.’
인간계로 온 이후로 마계 따위 안중에도 없었지만, 그때는 소설이 원작대로 흘러간다고 생각했을 때고.
원작이 비틀려 버렸으니 언젠가 벨라도 다시 마계로 돌아가야 할 텐데.
“잔바르보고 마계로 돌아가라고 해야겠다.”
어차피 마족은 통제 안 되는 놈들이니 많은 걸 바라지는 않았다.
가서 마왕성이나 고쳐놓으라고 해야지.
그 말에 젠킨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여태껏 벨라의 독단적인 행동 때문에 잔바르와 멀어진 게 한두 번이어야지.
“안 됩니다!”
“왜, 왜?”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벨라는 깜짝 놀라 젠킨스를 쳐다봤다.
“왜? 걔 딱히 하는 거 없잖아. 푸르는 춤이라도 추지.”
젠킨스는 되도록 그들의 관계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 모든 걸 설명하려면 덮어놓고 싶은 200년 전의 과거를 구태여 끄집어내야 하니까.
언젠가 알아야 한다면, 키엘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 벨라가 키엘이 하는 말에는 당연히 화를 안 낼 테니.
“그, 그냥 잔바르 님은 인간계에 남고 싶대요.”
벨라는 젠킨스를 보며 이상하다 생각했다.
그러고 며칠 뒤.
벨라가 영애들과 함께 즉위식 때 받을 예물을 고르던 중이었다.
구태여 여자들만 있는 곳에 젠킨스가 끼어서는 이것저것 따지고 들었다.
“…이렇게 사치 부려도 됩니까? 무슨 예물이 이렇게 많아요?”
“뭐 어때.”
“제국의 국고를 거덜 낼 일 있어요?”
벨라는 그녀가 하는 업무에 비하면 이 정도 보상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좋은 환경, 맛있는 음식, 사치라고 생각할지라도 값비싼 보석.
매번 마력을 채워주는 것도 모자라 제국의 문제점을 하나씩 고쳐가고 있는데 이게 뭐 어때서.
그리고 옆에 있던 로잔느와 다른 시녀들이 벨라의 편을 들었다.
“제국은 그 정도로 국고가 거덜 나진 않는답니다.”
“맞아요. 그리고 이 정도는 해야 전하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는 거 아니겠어요?”
벨라는 시녀들의 말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키엘이 시녀를 두라는지 알겠네.
아니나 다를까. 젠킨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구태여 그런 걸 티를 내야 합니까?”
“당연하죠! 보여주지 않는 사랑이 어떻게 사랑이에요?”
“그건 믿음이 없는 거겠죠.”
젠킨스는 촌철살인이라도 날린 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방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남아 있던 영애들은 어안이 벙벙한 채 화를 내었다.
“어우, 저분은 왜 말을 저렇게 한대요?”
“그러니까요. 자기도 맨날 잔바르 씨에게 ‘자기 좋아하는 거 맞냐’고 확인하지 않나요?”
벨라는 의아하게 여기며 영애들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잔바르가 여기서 왜 나오지?’
영애들은 그동안 많이 참았던 건지, 한번 뒷담화가 시작되자 끝도 없이 젠킨스를 욕했다.
“잔바르 씨가 젠킨스 씨 호위 안 할 거라니까 삐쳐서 괜히 성질부리는 거 아니에요?”
“전에는 저보고 연애할 생각하지 말고 벨라 님 도울 생각이나 하라는 거 있죠? 자기가 잔바르 씨랑 붙어 다니는 건 생각도 안 하나 봐.”
“그런 걸 내로남불이라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릴까.
키엘 말고 딱히 남에게 관심 없던 벨라의 동공이 흔들렸다.
‘아….’
젠킨스와 잔바르라니.
가끔씩 ‘쟤네 뭐 있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일말의 의심조차 하지 않았었다.
‘세상에….’
그때 잔바르를 아주 잠깐 짝사랑했던 영애가 이해되지 않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잔바르 씨는 과묵하고 든든해 보여서 제 스타일이었는데.”
“그러니까요. 몸도 좋은데 왜 저런 멸치 같은 좀생이를 좋아하나 몰라.”
“구건 믿움이 없눈고겠죠.”
젠킨스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며 영애들이 웃어댔다.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는지, 시녀 중에 가장 윗선인 로잔느가 그들을 말렸다.
“저… 화나시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벨라 님이 계실 때는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언제 이렇게 컸는지, 똑 부러지게 말하는 로잔느의 말 한마디에 다른 영애들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죄, 죄송합니다.”
로잔느는 벨라의 눈치를 보며 다른 시녀들을 물렸다.
“벨라 님, 젠킨스 씨 때문에 화나신 거예요?”
“어? 아니….”
사실 이들이 누굴 좋아하든 벨라가 간섭할 일은 아니지만, 충격적이었다.
천족은 질서를 바탕으로 힘이 나누어지지만, 마족은 힘을 바탕으로 질서가 나누어진다.
마족들에게 질서라는 건, 그저 힘의 순위를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긴 하지만.
천족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구분되어 있고.
마족은 힘을 취하는 게 우선적인 종족이었다.
그러니 마족들 사이에서 ‘사랑’이란 몽마들이나 좋아하는 저급한 행위에 속했다.
사랑에는 타인을 배려하는 게 있어야 하는데, 이들은 지독하게도 자기만 생각하니까.
그리고 그 열애설보다 더 충격인 건.
“로잔느, 너도 알고 있었어? 젠킨스랑 잔바르….”
“어머? 벨라 님은 모르셨어요?”
어째 벨라 빼고는 모두가 그 사실을 안다는 거였다. 심지어 제일 순진해서 아무것도 모르던 로잔느까지!
충격에 휩싸인 벨라는 터벅터벅 키엘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면 이상한 일이 한두 번은 아니었지.
매우 오래전이지만, 데이저의 여름축제에 갔을 때도 젠킨스가 다칠 뻔한 걸 잔바르가 구해줬었고.
얼마 전에 잔바르를 마계로 보낸다니 안된다고 말리기도 했고.
‘그런데 그렇게 싫어했잖아. 뽀뽀 한 번 했다고 싫어하던 게 좋아질 수 있나?‘
벨라는 자신을 대입해봤다.
만약, 그녀가 어떤 사고로 후안과 키스를 했다고 치면?
‘어우. Xx.’
욕부터 나왔다.
벨라는 키엘의 방문을 열었다.
로잔느까지 알고 있다면, 키엘이 당연히 모를 리가 없지.
“키엘….”
그는 혼자 소파에 앉아 지도를 보다, 벨라가 오자마자 벌떡 일어섰다.
“벨라, 마침 잘 왔어요.”
그는 벨라에게 달려가더니 바로 그녀를 껴안았다.
“즉위식 끝나고….”
그러다 그는 어째 힘이 없어 보이는 그녀를 보고, 두 손으로 어깨를 잡고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너도 알고 있었지?”
“뭘요?”
“젠장 둘 사이 말이야.”
“어….”
키엘은 벨라가 한 말을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당황했다.
“그럼 그렇지. 네가 모를 리가 없지.”
벨라는 젠잔의 사이가 급속도로 친해진 건 알았지만, 그게 사랑의 감정이라고 생각 못 했다.
“진짜 이해 안 간단 말이야…. 둘은 서로 어디가 좋은 거지?”
“글쎄요….”
“게다가 잔바르는 마족이잖아. 젠킨스는 왜 마족을 좋아하는 거지?”
“마족이 왜요?”
“알잖아. 걔들 다 이상해. 잔바르 봐. 걔 나한테 잘리는 거 좋아하잖아. 마왕의 후계자답다면서.”
키엘은 반박하기 힘들었다.
잔바르가 벨라의 악랄한 행동을 더 흡족해하는 건 사실이니까.
“이웨르도 봐. 허구한 날 때려 달라고 하잖아.”
“그거야 이웨르는 몽마니까….”
“마족에 기역을 빼봐. 그게 걔들 정체야.”
키엘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음…. 그런데 벨라도 마족이잖아요.”
“어.”
“그럼 벨라도….”
그럼 당신도 그런 게 좋은 거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벨라는 그녀의 어깨 위에 올려진 키엘의 손을 뿌리쳤다.
“나는 아니야!”
그녀는 고양이로 변해서 우다다 키엘의 침대 위로 올라갔다.
“…벨라?”
키엘이 벨라의 옆에 천천히 다가와서 고양이로 된 그녀를 쓰다듬었다.
“벨라가 그… 런게 좋다고 하면 나도 노력해볼게요.”
“그거 아니라니까.”
“그리고 난 벨라가 마족이라도 좋아.”
“난 싫어.”
그리고 벨라는 작게 웅얼거렸다.
“마왕이 되고 싶어서 된 거도 아닌데….”
이 말을 할 때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고양이로 변했다.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싫다고 한 마족들처럼 자신도 한없이 이기적이라는 거.
벨라는 퉁명스럽게 키엘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그래서 넌 언제부터 안 거야?”
“음….”
“오래됐구나. 최근에 알았다면 네가 어떻게든 나한테 알려주려고 은근슬쩍 얘기했을 거야.”
벨라가 평소에 무관심해서 그렇지, 한 번 촉을 세우면 눈치가 빠른 편이라 속일 수가 없었다.
“…네.”
“얼마나 오랜데?”
“…젠킨스가 오고 얼마 안 돼서?”
“뭐? 그때부터 좋아했다고?”
“아니예요. 200년 전부터라던데.”
둘 사이를 알게 되고, 그걸 벨라만 몰랐던 것도 충격인데.
200년 전부터 그런 사이였고, 벨라가 몰랐던 기간이 15년이라는 게 충격과 공포다, 젠장 깽깽이야!
“그 시간 동안 나한테만 숨긴 거야?”
“…벨라가 반대할 것 같았나 봐요.”
“내가 왜 반대를 해? 내가 걔네 엄마도 아닌데.”
물론 선대 마왕이라면 싫어했겠지.
하지만 여태 젠킨스를 반마족이라도 인정해줬는데,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벨라는 키엘의 허벅지에 얼굴만 올리고 빤히 올려다봤다.
“그럼 은연중에 티라도 내던가.”
키엘은 벨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사실 티 많이 났어요.”
“그래. 내가 좀 무관심하긴 했지.”
벨라가 유의 있게 살피지 않은 단서들이 떠오르면서 섭섭한 마음이 미안한 마음으로 바뀌었다.
“내가 너무 너만 생각했나?”
“…….”
“내 눈에는 너만 보여서.”
“…벨라.”
키엘은 벨라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그윽한 미소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 얘기는 사람으로 변하고 얘기해주면 안 될까?”
벨라는 아무 생각 없이 사람으로 다시 변하며 물었다.
“왜?”
키엘은 벨라를 밀어 침대에 눕히고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그는 가볍게 그녀의 머리부터 아래까지를 훑어보다 드레스를 어깨부터 서서히 벗겨나갔다.
“사랑해주고 싶잖아.”
로잔느가 벨라의 의류를 담당하고 난 이후로, 벗기기 쉬운 옷을 만들어줘서 좋았다.
달빛에 새하얗게 드러난 그녀의 속살을 보며, 그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곳을 쓰다듬고 입을 맞췄다.
“내 눈에도 너만 보여서.”
* * *
그날 새벽.
벨라는 달빛에 눈을 뜨고, 곤히 잠든 키엘의 속눈썹 위로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잠옷을 손으로 더듬더듬 찾아서 입고,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잠이 쉬이 오지 않고. 올빼미 소리에 오히려 정신이 점점 또렷해졌다.
창밖의 하늘에 떠 있는 달이, 제국의 수도를 감싸 안고 있었다.
200년 전의 마계.
아직 온전히 승계받지 못한 게 있었다. 마계의 역사의 한 부분. 마치 책의 그 부분만 찢어내기라도 한 듯 지워져 있었다.
모종의 사건이 있었다는 건 아는데.
선대가 걸어놓은 복종 서약 때문에 그 누구도 말하지 못했다.
그래서 벨라는 그게 어쩌면 선대 마왕이 그녀에게 남겨놓은 유언이 아닐까 생각했다.
‘선대는 뭔지 모를 그 일을 후회하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단서는 많이 있었다.
200년 전 그때, 젠킨스가 마계에 들어오고.
대장군이자 반려였던 루시트와 푸르의 종족이 모두 죽었고.
가끔 몽마들이 ‘희대의 젠장’이라고 하는 말도 들었던 거.
때 되면 정확한 상황을 알게 되겠지만.
‘그때부터였다라….’
벨라는 이 모든 것의 시작을 회상했다.
처음으로 그녀가 인간계에 넘어왔을 때.
그때 그 마법사에게 소환진을 가르쳐 준 건 젠킨스였지.
반쪽이라도 마족의 피가 흐른다고, 집착하는 게 하나는 있었네.
남 깎아내리는 거에 집착하는 줄 알았더니.
- “딱 대장군인 잔바르 님까지 소환이 가능하거든요.”
잔바르를 소환할 마법사를 찾으려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던 거구나.
묘한 인연들이 서로 연결고리를 만든다.
이 모든 게 단순히 우연일까. 아니면 이렇게 얽혔던 인연이었을까. 단순히 이 일만이 아니라 그녀가 모르는 배경에도 있겠지.
‘재밌네.’
그간 벨라는 소설이 원작대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이곳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애들한테 잘해주든가 해야지.’
나름 아끼는 마족들이긴 한데, 이제껏 무관심했다는 사실을 새삼 반성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꺼져있던 벨라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벨라의 시녀 중 일등 공신인 로잔느는 많이 바빴다.
벨라에게 오는 선물들을 정리하자 벌써 밖이 어두워졌었다.
“로잔느, 데려다줄게.”
계속 황궁의 별채에 머무르고 있던 로잔느는 리오의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고마워. 넌 요즘 안 바빠?”
“아…. 바쁘지. 즉위식이 코 앞이니. 넌… 괜찮아?”
리오는 로잔느의 눈치를 보며 입술만 만지작거렸다. 사실 그는 불안했다.
선인장의 소원은 이루어질 거라며 순진하게 믿는 로잔느가 안타까웠고, 혹 그녀가 나쁜 짓이라도 하게 될까 봐 걱정이었다.
“선인장의 소원은… 잘되는 거 같아?”
“음.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어.”
리오는 계속 가슴이 답답했다. 곧 즉위식인데도 아직 마음을 접지 않은 로잔느가.
그는 홧김에 퉁명스럽게 말했다.
“안 될 거 같으면 포기해도 되지 않아?”
그리고 로잔느는 그 말에 기분이 퍽 상했다. 여태 누구에게 성을 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리오에게 화를 내며 되받아쳤다.
“될지 안 될지 네가 어떻게 알아?”
“다들 아는 데 너만 모르는 거 같은데.”
“베, 벨라 님도 괜찮다고 하셨거든?”
“벨라 님이 괜찮다고 하실 리가 없잖아.”
리오는 말을 내뱉고도 자신이 너무하다 생각했다. 이미 상처를 받을 대로 받은 사람에게 구태여 모질게 말할 필요는 없는데.
“무슨 소리야. 벨라 님이 먼저 해보라고 한 건데.”
“…뭐?”
“벨라 님이 후원해주신다고 했어. 내 이름으로 의상실부터 만들어보라고.”
로잔느는 줄곧 생각했었다.
그녀의 행복이 무엇일지. 그녀가 하고픈 게 무엇일지.
로잔느는 벨라의 시녀를 하며 옷을 조금씩 수선하던 게 재밌었다.
게다가 그녀가 고친 옷을, 많은 영애가 관심을 보였었고.
- 물론 황태자비가 입고 다니는 옷이니 입에 발린 칭찬일 수는 있겠지만. -
어쩌면 이 일이 그녀의 천직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로잔느의 말에 리오는 한참 말이 없었다.
“…선인장에 빈 소원이, 의상실을 만드는 거였어?”
로잔느는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뾰로통하게 리오를 노려봤다.
“그냥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빈 거거든.”
“아…. 미안.”
리오는 혼자 착각했던 게 부끄러웠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오해해서 로잔느를 감시하고 있었으니.
“난 네가 계속 키엘과 잘되길 바라는 줄 알았어. 미안해.”
그 말에 로잔느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손을 저었다.
“절대, 절대 아니야! 아무렇지도 않아. 오히려 두 분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걸?”
리오는 로잔느가 격하게 부정하자, 안도하는 마음과 함께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행이다. 난 계속 네가 마음 아픈데 억지로 참는 줄 알았네.”
로잔느가 리오를 슬쩍 바라봤다.
그러고 보면 항상 힘들 때마다 늘 옆에 있어 준 사람이었다.
“나 걱정해 준 거야?”
그때, 로잔느는 리오의 눈빛이 조금 달라 보였다.
* * *
그 시각 벨라는 진동이 울린 핸드폰을 열었다.
“아….”
1 : 1 문의에 대한 답변이었다.
[A. 먼저 소설 속에 빙의 된 역할이 인간이 아닌 점에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그래. 나 있는 곳으로 삼백 번은 절해라.”
벨라는 기대를 안고 집게손가락으로 스크롤을 내렸다.
[현재의 문제점을 충분히 인지하였고 김홍연 님께서 돌아오실 때 정신적 피해보상을 포함하여, 이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게 환생 대기 시스템은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다만 저희가 개입할 수 있는 한계가 있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는 시스템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저희는 환생 및 빙의를 통해 인생들이 내뿜는 에너지를 바탕으로 움직입니다.
또한 모든 인생은 하나의 회고록으로 기록되며, 회고록의 판매 부수에 따라 별도의 에너지를 창출하고 있습니다.]
“판매 부수라니.”
이건 조금 충격이었다. 즉 벨라의 이야기가 새로운 이야기가 되어 독자들에게 판매된다는 이야기일까.
벨라는 긴 전문을 마저 읽어 내려갔다.
[그렇기에 원작을 비트는 경우. 원작보다 더 많은 판매 부수가 나는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기에 저희의 개입을 보장해 드릴 수 없었습니다.
‘빛을 보지 못한 좋은 소설’들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문체도 스토리도 다 좋았는데, 죽은 사람들한테만 인기가 있는 건지 댓글도 뜸하던 소설이 많이 있었다.
좋은 작품인데도 관심을 받지 못해 연중 하던 소설도 많았고.
[그러나 저희는 김홍연 님이 새로 바꾼 회고록을 작성하여 원작대로 완결되지 않아도 개입할 수 있을 만큼의 에너지를 모으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래는 염치없지만, 이 에너지를 모으기 위해서 김홍연 님께서도 해주셔야 할 일입니다. …(중략)]
벨라는 밑의 모든 문단까지 다 읽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미 소설이 비틀렸고, 이 배경은 인기작 <알고 보니 황태자님>이 아닌 새로운 이야기로 쓰였다.
“내가 새로 만들어 간 이야기가 잘 팔려야 한다는 거네.”
그건 그녀가 노력한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닌 듯싶었다.
벨라는 곤히 자는 키엘을 슬쩍 보고 입맛을 다셨다.
‘아주 그냥 화끈한 성인들만 보는 이야기로 꾸미면….’
그러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봐도 그들의 밤의 주도권을 그녀가 가진 거 같지는 않았다.
‘그래. 내가 여기서 뭘 하든 그 결과를 확인하긴 힘들 거야.’
벨라는 쭉 읽어내려갔다.
이게 꺼졌을 때만 해도 앞이 깜깜하고 서러웠는데.
다행히 핸드폰은 완결이 되기 전까지 켜질 수 있게 설정했다고도 한다. -그게 어느 정도의 시간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게 잘 안 되었을 때를 대비한 마지막 비상탈출구도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는 없게 설정되어있습니다. 하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타인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끊는 걸 자의로 인식하지 않게 설정을 바꿔 드렸습니다.]
아주 조금의 문제가 있긴 했는데.
[그러나 쉽지 않을 겁니다. 죽음의 순간에는 누구나 살려는 욕구가 나오기에, 김홍연 님이 빙의된 역할이 무의식적으로 방어할 수는 있습니다.]
씁쓸하기만 했다.
이 세계에 벨라를 죽일 만한 용사가 있는가.
‘…신성력을 가진 키엘뿐이었지.’
벨라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키엘의 옆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의 옆에 다시 누워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 예쁘고 곱던 아이가 가끔 어른스럽게만 느껴진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멋있고 잘생긴 그가 자는 모습이 어리게만 보였다.
벨라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키엘이 조심스레 눈을 떴다.
“…벨라?”
“미안. 깼어?”
“응….”
그는 어리광이라도 부리듯, 벨라를 끌어안았다.
아직 밤인데도, 그에게서 뜨거운 태양의 냄새가 났다.
따뜻하고 눈부신 향기.
“잠이 안 와요?”
“조금?”
그러자 키엘은 손가락을 세워 천천히 벨라의 등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왜. 벨라는 이러고 나면 잘 자잖아.”
벨라는 키엘의 내려가는 손을 딱 잡고 그를 흘겨봤다.
“너 진짜 왜 이렇게 여우가 되어가지곤….”
“여우라뇨?”
그가 잡힌 손을 뿌리치고 벨라의 볼을 꼬집었다.
“여우 하니까, 벨라가 해준 동화 생각나네요.”
“무슨 이야기?”
“어린 왕자 이야기.”
키엘은 감상에 젖어 웃으며 볼을 어루만졌다.
“벨라가 나를 길들인 거네.”
“길들여? 무슨 말이야?”
“바오밥나무가 있는 행성에서 살던 어린 왕자 이야기…. 벨라가 해준 얘기잖아요.”
벨라는 눈을 깜빡거리며 키엘을 쳐다봤다.
“…어. 그렇긴 한데….”
호랑이가 호떡이 되었다는 전래동화를 얘기해준 이후로는 확실히 아는 동화만 말했었다.
어린왕자의 이야기는 얼핏 알지만, 벨라가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나 그 얘기 잘 모르는데….”
키엘은 벨라를 빤히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가 찾은 단서들이 있었는데.
이걸 벨라에게 이야기를 할 차례인 거 같았다.
“내가 착각했나 봐요. 황실 서고에서 읽었는데.”
벨라가 좋아하는 부대찌개는 마계에 없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황족에게만 열람 가능한 제국의 건국 이야기에서 확인한 적 있었다.
부대찌개와 벨라가 알던 몇몇 요리를.
그리고 벨라가 어렸을 때 들려줬던 동화들 몇 개도 건국 시 초대 황제가 이세계에서 있었던 동화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예전에 양 그려 보라니까 상자 그려주고 이 안에 양 있다고 했었잖아. 그래서 벨라가 얘기해준 건 줄 알았어.”
“황실 서고에 어린 왕자가 있다고?”
“말했잖아요. 초대 황제는 이세계 사람이었다고.”
키엘은 당황한 벨라를 꼭 껴안고 등을 토닥였다.
“초대 황제가 있던 곳이, 벨라가 있었던 곳인가 봐요.”
“내가 있던 곳이라니….”
“벨라가 소설에 들어오기 전에 있던 곳이겠죠?”
벨라는 잠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소설에 관한 이야기는, 당연히 불편한 주제였다.
시간이 지나 가물가물해질 때쯤, 벨라가 받았던 ‘운명’이었다고 설명하려고 했었다.
키엘 자신이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이라는 걸 알면, 혼란스러워할 것 같아서.
그런데.
“넌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이미 혼자서 이 진실을 감당하고 있었을 줄이야.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그를 조금 더 세게 안았다.
“그러니 얘기해줄래요? 소설대로 안 되면 어떻게 되는지?”
다행이었다. 오늘 고객센터의 답변을 받아서.
“이제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돼.”
“또 숨길 거예요?”
“아니, 이건 진짠데….”
벨라는 그의 가슴 품에서 고개를 들어 그를 슬쩍 올려다봤다.
혹여나 받아들이기 힘들까 봐, 하지 못했던 말을 시작했다.
벨라는 이미 그가 알고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차분하게 설명했다.
이곳이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세계라는 것부터 벨라가 받은 답변까지 하나씩. 전부.
고객센터에서 안내한 벨라가 해야 할 일은 단순했다.
[원작가의 의도는 두 주인공이 부족한 점을 서로에게서 찾아 신분의 벽을 넘는 사랑 이야기였습니다.
비록 두 주인공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에 상응하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면 저희가 개입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김홍연 님께서는 두 주인공이 각자 행복한 결말을 끌어낼 수 있게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벨라가 지레짐작했던 대로였다.
두 사람의 해피엔딩.
“너랑 로잔느랑 행복하게 살면 된대.”
“…….”
“그러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마. 내가 로잔느도 행복할 수 있게 도울 거니까.”
“나는?”
“네 해피엔딩은 나 아니야?”
키엘은 그 말에 미소를 지으며 벨라의 코를 꾹 눌렀다.
“… 얄미워.”
시간은 지나고 지나, 드디어 황제 즉위식을 하는 날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