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벨라는 황태자비로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적어도 키엘이 푹 쉴 수 있게, 그가 해야 할 일도 미리 손 보기로.
그러나 그녀의 책상 위에 쌓여있는 서류를 보면 한숨만 나왔다.
‘이건 너무 하잖아.’
역사 속에서 왕들이 왜 그리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때로는 정신병에 걸렸는지 공감했다.
업무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키엘이 사는 동안 즐거운 추억만 쌓아도 모자랄 텐데.
이대로 가면 남은 삶 동안 이 서류들에 쌓여 살 것 같았다.
물론 제국이 넓고 크기에 할 일이 많은 건 맞았다.
“뭐 이런 것까지 전부 확인해야 하는 거야?”
하지만 아랫선에서 정리해도 될 일들까지 전부 황제의 결재를 받아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벨라의 불평을 들은 젠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거죠.”
벨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여태 황제의 절대적인 마력으로 제국의 권력이 유지되었다.
지금은 정말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상황이었다.
황태자의 능력은 인정하나, 그에게 기본적인 마력이 없으니.
귀족들이 제국 중심으로 흘러가기보다, 각자의 영지를 관리하는 데 더 열을 쏟을 수밖에.
“공무원 같은 존재가 더 필요해.”
가문에 구애받지 않고 제국을 위해 힘쓸 사람들.
벨라는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웨르의 요리 교실이 오늘이었지?”
“음. 좋은 생각이네요.”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경합 때 벨라를 쫓아다니던 영애들의 고민의 8할이 가문에서 정해준 삶을 살기 싫다는 거였다.
그러니 제국을 위해 봉급을 주고 고용한다면 좋아할 영애들이 분명 많을 테지.
벨라는 팔짱을 끼며 업신여기듯 젠킨스를 쳐다봤다.
‘이런 나의 깊은 생각을 네놈이 어떻게 알겠어?’
“그 할 일 없는 영애들에게 일 시키려는 거 아니었어요?”
“…맞아.”
아는구나.
“기왕이면 잔바르 님이나 푸르 님에게도 적당한 일거리 좀 주시죠. 둘이 맨날 놀기만 하고 방해만 해요.”
그 말에, 벨라는 멀뚱멀뚱 젠킨스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둘은 어디 갔어?”
“사냥대회에 내기한다고 나간 이후로 아직 안 돌아왔어요.”
“사냥대회가 거의 일주일 전 아니었어?”
엄밀히 따지자면, 사실 둘은 키엘이 실종되었을 때 함께 실종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뭘 하든 걱정 따위 하지 않는 마족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황궁의 그 누구도 그들이 실종된 것도 몰랐다.
“너흰 동료애도 없니. 관심도 없고.”
“…그러는 아가씨도 사흘 만에 아신 거 아니에요?”
벨라는 잠시 입을 다물고 곰곰이 생각했다.
지난번에 길을 잃은 잔바르와 마계에서 힘을 전혀 키우지 못한 곰 인형.
아주 조금 걱정되는 마음으로, 벨라는 오랜만에 발을 바닥에 딛고 소환진을 펼쳤다.
이윽고 잔바르와 푸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
벨라는 몇 달 전의 모습이 떠올랐다.
“너 뭐 하냐.”
잔바르가 사슴의 머리를 먹고 있는 채로 소환되었다.
벨라는 쓸데없이 걱정했다는 생각에 짜증이 났다.
‘그래. 니들이 그러면 그렇지, 뭐.’
그때 푸르가 벨라와 잔바르를 번갈아 가며 보더니 벌떡 일어섰다.
“잔바르 님! 제가 먹으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넌 입이나 닦고 말해.”
“저, 전 사슴 머리랑 뽀뽀한 거예요!”
푸르가 입 주변에 피가 묻은 털을 쓱쓱 닦았다.
“사람 먹는 거도 아니고 사슴 먹는 거로 내가 뭐라고 하겠어?”
“그럼 이건 계속 먹어도 됩니까?”
벨라는 마계로 가는 소환진을 펼치고, 잔바르에게서 사슴 머리를 빼앗아 그대로 던졌다.
“흉측한 거 내 방에 두지 마.”
“…공주님 방에 이런 거 많지 않습니까.”
벨라는 잠시 멈칫했다.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뭐… 어쨌든 너희 일주일 동안 뭐 하고 다닌 거야?”
“잔바르 님이 늑대 잡다가 쾅쾅쾅 했어요!”
“그건 푸르, 네 녀석이 한 거다.”
쾅쾅쾅은 뭔가.
벨라가 푸르의 표현력에 인상을 찡그리고 팔짱을 끼자, 잔바르가 설명했다.
“푸르가 사냥감을 쫓다가 산사태가 일어났습니다.”
그 말에 키엘이 실종된 당시 상황을 설명하던 이들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 “갑자기 큰소리가 들리긴 했습니다.”
- “전하의 말만 혼자 있었습니다.”
그리고 키엘도 갑자기 난 소리에 말이 놀라 그만 낙마했다고 했었다.
‘네놈들이었구나.’
벨라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여튼 너희는 도움이 안 돼.”
적당한 일거리를 줘봐야 어차피 다 망칠 게 뻔하지.
이웨르는 사교계에서 영애들을 모으는 데 꽤 소질이 있는 것 같은데, 이 녀석들은 도대체 어디에 쓸꼬.
* * *
이웨르의 요리 교실은, 벨라가 없는 동안에도 모임을 하며 점점 더 돈독해졌다고 들었다.
- “거기 결속력이 대단하네요. 아가씨가 없는데도 모임을 하고.”
젠킨스는 이웨르가 이상하다며 의심했지만, 벨라는 오히려 이웨르가 자랑스러웠다.
뭐가 되었든 사람을 지속해서 모으는 것도 대단한 거 아닌가.
푸르와 잔바르와 달리 말이지.
잔소리만 하는 젠킨스와도 다르고.
그러나 막상 그 모임이 열린다는 회의실에 도착했을 때는 조금 망설여졌다.
‘음…. 그냥 들어가자니 민망하네.’
황태자비 책봉식이 있고, 이 영애들을 무도회에 초대도 했는데.
벨라는 그 무도회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었다.
그녀는 창문으로 그들을 지켜보며 요리할 때까지 기다렸다.
자리를 비운 것에 대해 사죄를 하면서, 그들이 만든 요리를 칭찬하며 본론을 꺼내면 좋겠지.
하지만 어째 시간이 지나도 요리는커녕 다들 하하 호호 웃는 소리만 들렸다.
벨라는 창문을 살짝 열어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아무래도 크면 클수록 좋죠.”
“전 사실 손가락이 더 좋더라고요.”
어째 이상하게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
“그러고 보니 이웨르 씨는 본 적 있어요? 저… 전하랑 벨라 님이랑?”
“아유, 아직 못 봤어용. 곧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벨라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지금 저 방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가는 것인가.
“전하께서 깨어나셨다면서요?”
“그럼용. 어찌나 후끈하던징. 둘이 키스하다 딱 걸렸잖아요.”
“어머, 그럼 혹시….”
“어유, 아쉽게도 아직 우리 아가씨는 도련님의 가지를 못 본 거 같아용.”
“하긴.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셨으니까 힘들겠네요.”
영애들은 진지한 얼굴로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 미친 거 아냐?‘
당장 들어가서 모임을 와해시키고 싶은데.
들으면 들을수록 이야기의 수위는 올라가고, 벨라의 얼굴은 점점 빨개졌다.
‘이… 이건 너무 29금 아니야?‘
거기다 의외의 인물인 마리안느 메르켄 공녀까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게 보였다.
분명 로잔느 보고 염탐하라고 했을 때는 요리를 했다고 들었는데!
언제부터 야한 얘기로 대동단결한 거야?
* * *
저녁이 조금 되기 전.
벨라는 어느새 키엘의 방에 와서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조잘대며 일러바쳤다.
키엘은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침대에 앉아 있었고, 벨라는 그 옆에서 마음을 다스리려고 차를 마셨다.
“하여튼 걔들은 도움이 안 돼, 도움이!”
키엘은 화를 내는 벨라를 보며 귀엽다는 듯 웃었다.
“그래도 다들 재밌잖아요.”
“재밌긴. 옆에 있으면 속 터져, 정말.”
“귀엽잖아요.”
“귀엽긴! 태어난 김에 사는 건지, 원. 도대체 왜 사는 거야?”
키엘의 변호에도 벨라는 마족들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받았다.
사고 쳐서 키엘을 낙마시킨 푸르나.
“푸르 그 자식은 네 냄새도 잘 맡으면서, 수색에 진작에 도움이 되었으면 좀 좋아?”
하는 것도 없이 탱자탱자 놀기만 하는 잔바르도 마음에 안 들고.
“잔바르 그놈도 틈만 나면 뭘 자꾸 산 채로 잡아 와. 그럴 거면 마계로 돌아가지, 왜 아직도 여기 있대?”
거기다 이웨르는 불순한 모임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감히 내 이름 걸고, 그딴 모임을 만들어?”
“그 요리 교실요?”
“그거 요리 교실 아니야…!”
물론 요리 교실이 끝날 때쯤 맞춰 들어가 그들이 했던 대화를 모르는 척하며, 벨라를 도와줄 영애들을 모집하긴 했다.
결과적으로 좋긴 하지만.
이웨르만큼은 믿었는데!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히자 벨라는 점점 화가 나서 들고 있던 찻잔을 맨손으로 깨부쉈다.
그녀는 쨍그랑 소리와 함께 조각난 찻잔을 물끄러미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 이거 비싼 거 아니지?”
“다쳤어요?”
물론 피가 살짝 나긴 하지만, 이 정도야 뭐.
그때 키엘은 벨라의 손을 잡고 시선을 살짝 아래로 두며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계속 벨라가 피를 나눠줬다면서요.”
“응.”
그는 군말 없이 그녀의 손가락을 천천히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입술에 닿는 순간, 그는 살짝 미소 지었다.
방금 차를 쏟아서 그런지 차의 향이 벨라의 손에 가득 묻어 있었다.
그는 작은 입술을 벌려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조심스레 입 안에 넣었다.
“아….”
부드럽고 따뜻한 혀가 손가락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의 손가락에서 타고 올라가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반쯤 눈을 뜨며 짓궂은 듯 아닌 듯 입꼬리가 올라갔다.
- “전 사실 손가락이 더 좋더라고요.”
벨라는 아까 엿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이런 의미는 아니었지만-
괜히 그런 얘기를 들어서인지. 그의 눈빛이 더 농후해 보였다.
그가 손가락에서 손바닥, 손목으로 입술을 옮기는 동안.
그 짙은 눈빛은 벨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그렇게 보면….’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도, 몸의 한 부분은 팽팽하게 긴장감이 돌았다.
점점 그는 벨라의 허리를 잡고, 그에게로 당겼다.
그녀의 몸이 그의 위로 올라탄 순간, 그는 그녀의 목을 잠깐 맛보고 그 맛을 벨라의 혀로 되돌려줬다.
스르르.
벨라의 드레스가 허벅지를 타고 올라갔다. 살갗을 드러낸 그녀의 무릎이 그의 단단한 공간에 닿았다.
“아.”
벨라가 조금 놀라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입술을 뗐다.
누군가 그녀의 몸을 탐하는 건, 소설에 빙의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키엘은 오히려 웃으면서 벨라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벨라가 싫으면 안 할 거야.”
싫긴 누가 싫댔나.
“그게 아니라….”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이라 설레기도 했지만, 그만큼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마왕의 반려가 된 적은 없어서….”
벨라가 말하는 동안에도 그의 손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를, 볼을 어루만졌다.
“너한테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
“…….”
“네 몸이 앞으로 바뀔지도 모르고…. 그러니 곰곰이 생각해야….”
“벨라.”
그는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녀를 감싸 안아 순식간에 그의 옆으로 눕혔다.
벨라는 푹신한 침대 위에 등이 닿자 침을 꿀꺽 삼켰다.
“아직도 모르겠어요?”
벨라의 얼굴로 어느새 그녀의 위에 올라간 그의 그림자가 졌다.
우리 귀여운 키엘은 온데간데없고. 살짝 벌어진 그의 옷 사이로 보이는 단단한 가슴골에 색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내 세상엔 너만 있으면 돼.”
그의 두 팔은 벨라의 몸을 가두고, 천천히 내려왔다.
저 눈빛이 낯설다.
“사랑해.”
몇 번을 말해도 모자란 그의 마음이 따뜻한 숨결이 되어 그녀의 온몸을 덮었다.
그의 손가락은 그녀의 쇄골을 지나 서서히 그 아래를 여행했다.
드레스의 어깨 부분은 점점 내려가고, 그의 혀는 산을 넘어 골짜기를 탐험했다.
그의 손길은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것 같았다. 보물을 발견하면 그 땅을 파헤쳐보듯, 그녀의 숨소리가 바뀌는 곳을 찾아냈다.
“하아….”
벨라는 자신의 신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녀와 그의 심장 소리가 어찌나 크고 빠른지.
“사랑해.”
그리고 그 소리를 뚫는 그의 목소리가 어찌나 끈적한지.
그의 손이 멈추자 벨라는 눈을 천천히 뜨고 그와 마주했다.
이 모든 게 낯설고 부끄러웠다.
가슴 밑으로 내려간 드레스를 살짝 올리려고 하자,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예뻐요.”
허벅지를 타고 올라오는 드레스의 감촉보다, 그의 손이 더 부드러웠다.
“자, 잠깐….”
아직 저녁노을이 지고 있는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문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리,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 누가 올지도 모르고….”
“아무도 안 올 거예요.”
이미 경비들에게 벨라와 단둘이 있을 때는 노크도 하지 말고 돌려보내라 명령했었다.
그의 가는 손가락이 어느새 숲의 입구에 도착했다.
“아!”
깜짝 놀란 벨라에게, 그가 유혹하듯 속삭였다.
“…싫어요?”
“그, 그게….”
숲 위를 드러눕듯 건드리는 그의 손길.
“좋아하는데?”
그의 말에 벨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으…응.”
어느새 그는 벨라를 일으켜 그의 위에 앉히고 조금 더 깊숙이 그녀를 알아가며 안았다.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등을 타고 내려가며, 다른 손으로는 처음 보는 미지의 숲을 여행했다.
그의 입술 앞에는 딱 맞게도 하얀 산의 정상이 있었고, 그는 그 모든 걸 음미하며 벨라를 야하게 올려다봤다.
“여기… 좋아요?”
벨라는 대답보다 신음이 먼저 흘러나왔다.
어리고 착하고 순수한 줄 알았던 그는 남자의 눈빛을 하고 그녀의 온몸을 지배했다.
그녀도 알 거 다 아는 어엿한 성인이었다.
전생에서도 경험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고.
그러나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정말 사랑하는 손길로 그녀의 몸을 탐하는 게 아니라, 탐험하는 게.
잡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머릿속이 온통 새하얬다. 오로지 그의 손이 어디를 따라가는지만 느껴졌다.
그리고 키엘은 벨라의 작은 반응 하나하나를 눈에 새겼다.
‘귀여워.’
부끄러워서 목석처럼 굳어 있는 모습도, 그러다 초점이 흔들리며 그의 손에 몸을 맡기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여기랑… 여기.’
점점 흐트러지며 그에게 기대는 벨라를 애절하게 바라보고 있던 그때였다.
“으아아아아앙!”
문밖에서 격하게 우는 소리가 들리자 키엘의 손이 멈췄다.
“…….”
“…….”
그것도 익숙한 목소리.
“드, 들어가시면 안 된다니까요!”
“으아아아앙!”
푸르의 목소리였다.
그럼 그렇지. 왜 방해 안 하나 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쑥스러운 듯 서로 웃었다.
“일단 푸르부터 내보낼게요.”
키엘은 벨라의 이마에 입 맞추고 천천히 일어섰다.
벨라는 내려간 옷을 올리며 키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상대하기 힘들 텐데….’
아니나 다를까. 키엘이 문을 열자마자 푸르는 키엘의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비켜! 아가씨랑 도련님이랑 잘 거야!”
경비들은 난감해하며 고개를 숙이며 푸르를 잡으러 들어왔다.
“죄, 죄송합니다.”
여태 황태자의 방을 지키며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거의 10여 분째 들어가야 한다고 떼를 쓰질 않나.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고집을 피우질 않나. 큰소리로 우는 것도 모자라, 방에 무단으로 침입까지.
키엘은 부드럽게 푸르를 설득했다.
“푸르, 다음에 같이 자면 안 될까?”
하지만 푸르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주머니에서 달력을 꺼냈다.
“일곱 번 같이 자야 해요!”
“음…. 내일 같이 자면 어때?”
“내일도 잘 거예요!”
“아….”
황태자가 난감해하는 걸 보자, 경비들은 마음을 한시름 놓았다.
그조차 어떻게 하기 힘든 걸 그들이 어찌 할 수 있었으랴.
하지만 그 안도도 잠시. 흐트러진 드레스를 입은 황태자비가 침대에서 일어섰을 때는 얼굴을 붉히며 서로의 눈치만 봤다.
“아… 정, 정말 죄송합니다.”
벨라는 그들을 힐끔 보다가, 푸르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푸르. 꺼져.”
“힝….”
“xx, 뒤지기 싫으면 좋은 말 할 때 나가.”
벨라의 입에서는 이미 좋은 말보다 험한 말이 먼저 나오긴 했다.
“싫어요!”
푸르에게도 절실한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언젠가 알아서 같이 자자며 불러주겠지, 하고 기다린 게 벌써 몇 달짼가.
푸르는 계속 미루고 미루다가 벨라가 두 달간 없어졌을 때,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있을 때 해야 한다고!
“오늘 깨끗이 씻었어요!”
푸르는 두 팔과 다리를 쫙쫙 벌리며 뽀송뽀송한 털을 자랑했다.
“아가씨가 씻으라면서요! 푸르랑 같이 자려고 그런 건 줄 알았는데….”
“그거야 일주일째 산에서 뒹굴었으니 씻고 다니라고 한 거지.”
푸르는 점점 눈을 일렁이며 울먹거렸다.
“으…으…으엉엉엉…. 아가씨는 약속도 안 지키고!”
“…조용히 안 해?”
푸르는 딱 3초 정도 입을 다물고 있다가 눈치를 보더니, 철퍼덕 누웠다.
그리고 마트에서 장난감 안 사준다고 떼쓰는 아이처럼 양팔과 다리를 흔들었다.
“으아아아앙!”
“…야.”
벨라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 자꾸 내려가는 드레스를 끌어 올렸다.
“하아…. 알겠으니까 입 다물어.”
벨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푸르는 키엘의 침대 위로 달려갔더니 베개를 집어 던지고 떡하니 자리를 잡았다.
“오늘은 푸르가 곰 베개예요!”
그리고 자신의 배를 손으로 팡팡 두드렸다.
반쯤 포기한 벨라와 키엘은 푸르의 배에 머리를 뉘었다.
푸르 때문에 이른 시간에 강제로 침실에 눕게 된 두 사람은 잠이 오지 않았다.
서로 마주 보고만 있기 민망해서, 어릴 적 추억을 소환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키엘, 그거 기억나?”
“저도 기억나요!”
“푸르 너 말고. 그리고 아직 말 안 했거든?”
푸르도 끼어들어 추억 상영회를 함께 감상하다, 벨라는 저택의 근황에 관해 이야기했다.
“진짜 귀신의 집이 됐어. 10골드에 팔아도 안 사겠더라. 화국 상인이 화망장을 10골드에 팔던데.”
“그래요?”
어느새 푸르가 색색거리며 자는 소리가 들리고, 벨라는 조금 더 키엘에게 바짝 붙어 이야기를 마저 했다.
“…그래서 브웬이 웨딩케이크로 당근케이크 선물하고 싶대.”
그 말에 키엘이 소리 없이 웃었다.
“벨라, 우리 공식적으로 부부인 거 알죠?”
“어…. 그렇지.”
“황족들의 결혼식이 벨라가 생각한 거랑 매우 달라서 미안해요.”
많이 다르긴 했다.
보통의 귀족들은 약혼식 후에 결혼식을 성대하게 하던데.
“황제 즉위식은 성대하게 열 거예요.”
키엘은 손으로 벨라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문질렀다.
“그러니 그때를 결혼식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어.”
벨라는 그의 손가락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즉위식은 널 위한 날이잖아.”
“하지만….”
“괜찮아. 난 책봉식이 결혼식 같았어. 만족해.”
너무 간소하게 해서 미안해하는 걸까.
벨라가 그의 볼을 쓰다듬자, 그는 조금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날을 기념하고 싶진 않아서.”
그는 천천히 벨라를 끌어안았다.
“벨라가 날 버리, 아니, 우리 그날 싸웠잖아요.”
벨라는 조용히 그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래…. 내가 그날 밤에는 널 버리고 떠났었지.’
그녀가 헤집어놓은 상처는 여전히 마계의 마력이 고여 있었다.
벨라는 누운 채로 몸을 조금 내려 그의 상처에 입을 맞췄다.
“그래. 그럼 즉위식을 결혼식이라 생각하고 기념하자.”
그리고 천천히 벌어진 가슴 위로 쪽쪽 입을 맞추며 몸을 다시 올렸다.
그의 목에 뽀뽀하고 난 뒤, 벨라는 그를 꽉 안아주었다.
“이제 나한테 숨기지 마.”
“…응.”
“난 네 옆을 안 떠날 테니까.”
“벨라도 나한테 숨기지 마요.”
“그래.”
키엘은 푸르의 배에서 벨라의 머리를 살짝 떼고 그의 팔로 팔베개를 했다.
“그럼 그 소설에 관해 물어봐도 돼요?”
“아니.”
“…방금 숨기는 거 없기로 했잖아.”
키엘이 기가 찬다는 듯 웃으며 벨라의 입에 엄지를 넣고 볼과 함께 꼬집었다.
“아웅에. (나중에)”
“…치사해.”
벨라는 그가 무엇을 궁금해할지 짐작했다.
왜 그 소설대로 되지 않으면 안 되는지 물어보겠지.
하지만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겨우 일백 년도 안 되는 스쳐 갈 사랑 때문에 겪어야 할 그 후의 고통을 키엘이 안다면, 분명 미안해하고 죄책감 느끼겠지.
‘넌 너무 착하니까….’
그러니 언젠가 마왕으로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때쯤. 그때 얘기해주는 걸로.
* * *
그날 뒤로 하루하루는 알차게 흘러갔다.
벨라는 가장 가깝게 먼저 해야 할 일들부터 차근차근 시작했다.
로한이 폭탄으로 던져준 일도, 화국 마력 폭발 사건도. 정리해야 할 건 많지만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 건!
11월 10일. 키엘의 생일이었다.
“생일 선물로 뭘 줘야 하지….”
예전처럼 소원 들어주기로 때울 수도 없고.
벨라가 고민하던 찰나에, 드레스를 정리하던 로잔느가 눈을 반짝였다.
“전하의 생일은 3월 아니에요?”
그랬다. 소설에서는 11월이지만, 실제 그가 황궁에 들어간 건 3월. 봄이었으니까.
“아… 아니 그냥 선물 주고 싶어서.”
벨라는 괜히 로잔느 앞에서 얘기했다 싶어 대충 얼버무렸다.
“제게 굉장히 좋은 생각이 있어요!”
“응?”
“전하의 생신에 종일 수도에서 데이트하시는 거 어때요?”
벨라는 로잔느의 입에서 ‘데이트’라는 말이 나오자 어색하게 쳐다봤다.
“키… 키엘은 벨라 님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하지 않을까요?”
“어?”
벨라가 황당하게 로잔느를 쳐다보자, 그녀는 두 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주, 주제넘었다면 죄송해요.”
“아… 아냐. 슈리아 공녀, 아니 공작께 서신을 보내야겠어.”
벨라는 그 자리에서 편지를 써서 로잔느에게 건넸다. 로잔느는 밝은 얼굴로 뒤를 돌아서 나갔다.
소설 속의 수동적인 로잔느와 달리 제 길을 개척해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벨라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다행이다. 키엘은 잊은 거 같네.’
어찌 되었든, 바쁘지만 소소하고 평범한 삶은 순탄하게 흘러갔다.
딱 하나만 빼고.
황궁에서는 요즘 이 두 사람의 사이에 대해 입 떼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처음 두 달 동안 황태자비가 궁에 없을 때는 제국이 망한다는 말까지 나왔지만.
매일 밤 서로의 침소로 향하는 두 사람을 보며 금실이 좋다고 떠들썩했다.
벨라가 바삐 업무를 끝내고 하루를 마무리할 때쯤.
똑똑. 하고 그녀의 방으로 키엘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언제 자요? 일 다 했어요?”
“키엘!”
벨라가 달려가 안자, 그는 등 뒤로 감추었던 손을 앞으로 꺼냈다. 벨라의 쇄골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어…. 이게 뭐야?”
“그냥 목걸이예요.”
‘그냥’ 목걸이라고 하기엔 크고 작은 붉은 루비가 꽤 많이 박혀 있었다.
키엘은 매일 이렇게 값비싼 장신구를 가지고 와 벨라의 목에, 귀에, 팔에, 손가락에 끼워줬다.
그는 그녀의 목 뒤로 목걸이를 채우고, 그의 손가락이 체인을 따라 움직이며 장신구를 정리했다.
손이 쇄골에 닿았을 때. 그는 그가 선물한 루비 목걸이와 벨라의 눈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예뻐요.”
그 말은 마치 마법처럼 벨라를 무장해제시키고, 환하게 웃게 했다.
벨라가 입술을 벌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때였다.
“도련님. 자꾸 그렇게 비싼 거 선물하지 마세요. 아가씨 버릇 나빠져요.”
입을 맞추기 직전에 벨라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녀의 황궁 생활은 모든 게 순탄했다. 딱 이거만 빼고.
“…네 버릇부터 고쳐줄까?”
두 사람의 몸이 조금 가까워지려고 하면, 주변에 있던 마족들이 딴죽을 걸었다.
젠킨스는 마치 그동안 잔바르와 자신의 사이를 막아섰던 걸 복수라도 하듯 끼어들었다.
그건 잔바르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
벨라와 키엘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뜨거운 밤을 기대하고 있으면.
당당하게 벨라의 침대 위에 푸르가 누워서 자신의 배를 팡팡 두드렸다.
“오늘이 네 번째예요!”
“아….”
푸르는 집요했다.
마치 자기가 받아야 할 월급을 벨라가 떼먹은 것이라도 되는 듯 굴었다.
좋은 말로 다음에 같이 자자고 했지만, 황궁의 사람들을 다 깨울 정도로 큰 소리로 울어대는 통에 푸르와의 약속을 꼬박 이행해야 했다.
“푸르는 곰 베개니까 아무것도 못 본 척할게요!”
저 변태 곰은 자기가 베개를 할 때 뭔가 보고 싶은 눈치였다.
이놈의 마족들은 틈만 나면 돌아가면서 방해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방해하는 건 역시 이웨르였다.
밤이면 밤마다 이웨르는 벨라의 방구석에 일부러 숨어서 나가지 않고 그들을 음탕한 눈빛으로 감시하고 있었다.
“너 안 나가?”
“어머, 들켰당.”
애정 장면을 꼭 봐야 적성에 풀리는 몽마, 이웨르의 집착은 푸르보다 훨씬 심했다.
한두 번 적발된 게 아니었다.
쫓아내면 창문에 붙어서 구경하질 않나.
짜증 나서 커튼을 치면, 그 틈으로 파란색 눈이 반짝이며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아예 마음먹고 벨라 혼자 키엘의 방으로 찾아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푸르와의 약속도 끝났고, 드디어 둘만의 시간을 가질 때였다.
“벨라, 오늘….”
“응.”
서로 조금 얼굴을 붉히고 그의 손이 벨라의 허리에 둘린 순간.
“꺄아악!”
창밖으로 온몸을 까맣게 두건으로 두르고 눈 부위만 뚫어놓은 이웨르가 그들을 보고 있었다.
“미친! 너 뭐 해!”
“차, 창문 닦고 있었어용.”
창문 닦기는 무슨. 벨라는 한숨을 내쉬고, 그녀의 허리에 올라간 키엘의 손을 내렸다.
“그냥 저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하세용.”
“너 때문에 흥이 깨져버렸으니까 책임져.”
“흐응~.”
* * *
이런 기구한 사연으로, 벨라는 그날 이후 제대로 된 첫날밤을 보내지 못했다.
“에휴.”
벨라는 한숨만 내쉬며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바라봤다.
낮 동안에는 업무를 계속해야 했다.
할 일은 많았지만, 다행히 이웨르의 요리 교실 출신 영애들이 벨라의 손이 되어줬다.
지난날.
요리 교실이 끝날 때쯤 방문해, 그녀의 일손을 도울 영애를 구했는데. 보기보다 많은 영애가 벨라를 찾아왔다.
“동부 지역은 제 영지 쪽이니 제가 확인할게요. 각 가문의 규모와 서류가 맞는지 확인해보면 되죠?”
“이렇게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당연한 일인 걸요.”
벨라는 웃으면서도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영애가 야한 얘긴 제일 많이 하던데….’
취향도 굉장히 남다른 영애였다. 들으면 당장 저 손목에 수갑을 차야 할 정도로, 짙고 농후한 취향.
게다가 은연중에 벨라를 보며 얼굴을 붉히는 걸 보면, 저 머릿속에 무슨 상상이 들어 있을지 겁이 났다.
- “황족들은 보통 크다는데. 그저 소문일까요, 사실일까요?”
벨라는 저 영애의 입에서 나왔던 말이 떠오르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직 모르는데….’
그러다 벨라의 눈에 그녀의 가슴이 한눈에 들어왔다.
- “…예뻐요.”
자꾸만 그날이 떠올랐다.
키엘이 얼마나 벨라를 사랑하는지, 그의 손가락으로 말하던 날.
얼굴이 새빨개진 그녀는 펜의 끝을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그때 나가려던 영애 중 하나가 넌지시 벨라에게 물었다.
“벨라 님, 무슨 고민 있으세요?”
“아. 아니요….”
차마 이걸 고민이라고 하기에 민망해서 벨라는 서둘러 변명했다.
“아…. 전하께 뭔가 선물을 하고 싶어서요.”
“어머.”
나가던 영애는 부채를 펴서 자신의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베… 벨라 님이 선물이시지 않을까요? 호호….”
“…네?”
“요즘 금실이 조, 좋다고 하셔…서.”
“…네?”
벨라가 당황해 하자, 영애도 민망했는지 서둘러 밖을 나섰다.
황제와 황후가 서로 좋아하는 걸 본 적이 별로 없어서인지.
황궁을 들락날락하는 관료 대부분은 벨라와 키엘의 사이를 예사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매일 서로의 방을 찾아가는 게, 신기한 일이긴 하겠지.
하지만 벨라는 심기가 뒤틀렸다.
‘열받네, 진짜?’
누구 때문에 뭘 해본 적도 없는데!
그때 그 누구가 손을 들고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그럼 조금 예쁜 속옷을 입고….”
벨라는 이웨르를 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혀를 잘랐다.
“넌 어차피 잘릴 건데 왜 자꾸 그런 말을 하나.”
“앙아응임오 으어앙아오. (잔바르 님도 그러잖아요).”
벨라는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생각하고 벌떡 일어섰다.
‘금실이 좋긴 뭐가 좋아! 아직 못 했거든?‘
비장한 각오로 벨라는 방을 나섰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곳.
방해받지 않는 곳을 찾겠다!
그녀는 본궁에 있는 모든 방의 문을 하나씩 열며 마땅한 방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곳곳마다 사람들이 있었다.
“황태자비 전하, 혹시 찾으시는 거 있습니까?”
“아…. 그냥 좀 아무도 안 올 만한 방 같은 거 찾는…데….”
이미 황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부끄러운 웃음을 겨우 감추고 있었다.
‘짜증 나네.’
벨라는 일부러 업신여기듯 웃으며 대답했다.
“누구 하나 고문 좀 하려고요.”
하지만 그들은 다른 의미로 생각했는지 눈썹을 치켜떴다.
“아. 그러면 예전에 전하께서 사용하시던 곳은 어떻습니까?”
“그게 어딘데요?”
“어… 어디지?”
키엘이 처음 황궁에 들어오고 4년을 지냈다는 곳.
하지만 황궁에서 일하는 이들 중 누구도 그곳이 어딘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온종일 단서를 찾다가, 리오에게서 알아낼 수 있었다.
“본궁이 아니라 별궁이에요. 좀 많이 외진 곳인데….”
“확실히 아무도 안 와?”
리오는 벨라의 전투적인 눈빛이 무서웠다.
“…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세요?”
왜긴! 벨라는 대답하지 않고 눈빛으로 안내하라고 협박했다.
벨라는 별궁에 도착하자마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곳은 벨라가 생각한 것과 많이 다른 곳이었다.
아무도 안 오는 게 아니라, 모르면 올 수 없는 곳이었다.
입구라는 곳은 문이라고 하기에는 벽처럼 보였다. 손으로 밀자 숨겨진 공간이 나오고 계단밖에 보이지 않았다.
“…키엘이 계단에서 살았어?”
“그게 아니라 위로 쭉 올라가셔야 해요.”
벨라가 고개를 내밀어서 위를 쳐다봐도, 계단밖에 보이지 않았다.
“창문으로 들어가도 되나? 날아서 올라가게.”
“아…. 창문은 잠겨 있을 거예요.”
“그래?”
벨라가 시계를 보자, 마침 자정 근처였다.
‘이제 키엘 생일이네.’
벨라는 조금 목을 몇 번 가다듬고 리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리오. 그럼 키엘에게 가서 이리로 오라고 해줘.”
“지금요?”
“아무에게도 들키지 말고. 그리고 기왕 네가 간 김에 키엘인 척, 방에서 자고 있어.”
평소 눈치 없고 어리숙하지만, 리오는 단번에 벨라의 의도를 알아챘다.
“이… 웨르씨는 금방 아실 텐데요.”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지 않겠어?”
아주 숨겨진 공간인 것이 딱 맞지.
벨라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중간마다 문이 몇 개나 있는 건지. 숨이 조금 차오를 때쯤, 성의 꼭대기에 다다를 수 있었다.
‘아…. 잠겨있네.’
벨라는 가볍게 자물쇠를 손으로 부쉈다.
그러나 문을 열자, 또 다른 문을 보고 의아해하며 또 한 번 자물쇠를 부쉈다.
‘뭔데 이중으로 잠근 거지?‘
그날 밤.
키엘은 벨라를 기다렸다가, 오지 않자 그녀의 방으로 가려고 문을 나섰다.
그때 리오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왜?”
“벨라 님이 예전에 네가 지냈던 방으로 오래.”
“…거긴 왜?”
리오가 얼굴을 붉히며 키엘의 재킷을 천천히 열었다.
“…뭐 해.”
“옷은 가볍게 입고 가는 게 좋을 거 같아.”
어느새 키엘은 그가 지냈던 옛 감옥에 도착했다.
‘오랜만이네.’
이곳에서 갇혀 지냈던 지난 세월이 떠올랐다.
밖과 안에서 열쇠로 두 번을 열어야 하는 문. 그 문의 자물쇠는 모두 뜯겨 있었다.
‘여긴 별로 오기 싫었는데.’
벨라가 저택에서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며, 떠난 게 아닐 거라며 애써 참았던 곳.
성검을 부여잡으며 흐릿해져 가는 그녀의 얼굴을 잊지 않으려고 수없이 그림을 그리며 그리워했던 공간.
그곳에 아이러니하게도 벨라가 뒤를 돌아선 채 서 있었다.
“왔어?”
벨라는 달빛을 등지고 서서 그를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 하나만으로, 오기 싫었던 공간은 새로 쓰인다.
키엘은 슬펐던 기억도 전부 벨라가 여기서 웃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 덮어지는 게 신기했다.
“여긴 왜 온 거예요?”
“생일 선물 주려고.”
키엘은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녀는 알까.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그녀만이 그를 웃게 하는걸.
“무슨 선물이길래.”
그러나 그의 입가에 미소가 점점 지워졌다.
벨라가 걸쳐 입었던 긴 망토의 끈을 한 번에 풀었기에.
“나.”
그녀를 감쌌던 망토가 스르르 바닥으로 떨어지고, 창살 사이로 달빛이 그녀의 실루엣을 비추었다.
얇은 잠옷 안에 그림자 진 벨라의 모습은, 그가 마계에서 봤던 몽마들보다 더 매혹적으로 그의 심장에 들어왔다.
“생일 축하해.”
“…벨라.”
서서히 키엘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정말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던지라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두근거렸다.
“내가 선물이야.”
벨라의 눈은 유혹한다기보다는, 조금 전투적이었다.
하지만 그마저 키엘에게는 고혹적이었다.
늘 조심스럽게 벨라에게 다가갔던 그의 손은, 이번만큼은 조심스럽지 않았다.
그녀의 팔을 잡고 그에게로 세게 끌어당겼다.
“진심이에요?”
“응. 오늘은 네 생일이니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벨라가 ‘내가 다 해줄게.’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그의 입술은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다.
꽤 거친 그의 혀에 조금 놀랐지만, 이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벨라.”
조금 거센 그의 숨소리와 빠르게 뛰는 심장이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먹게 했다.
“그 말. 후회 안 해요?”
벨라는 촉촉하게 젖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 네 생일이니까….’
조금 더 적극적으로 구애를 해본다. 벨라는 손을 그의 옷 속으로 넣었다.
천천히 그녀의 손이 가슴을 따라 어깨로 갈수록, 키엘의 옷이 스르르 내려갔다.
하얀 달빛이 그의 단단한 가슴을 비추자 벨라는 오래전 키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잡아먹어도 돼요. 맛있게 클게요.”
이렇게 잡아먹으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벨라가 살짝 미소를 지었을 때였다.
그의 입술은 마치 벨라의 생각을 비웃듯, 그녀가 움직일 수 없게 그녀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단 한 번이었는데도, 키엘은 지난날의 손길을 모두 기억하는 듯 그녀를 어루만졌다.
마치 악보를 외운 듯.
어떤 곳은 데크레셴도(점점 여리게)로. 어떤 곳은 크레셴도(점점 세게)로.
벨라는 분명 자신이 더 경험이 많을 거로 생각했는데, 오히려 천천히 잡혀먹히는 기분이었다.
“…벨라.”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연주의 시작을 알리고.
키엘은 벨라라는 악기를 다루며 산을 지나 숲으로 향한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건반악기가 되어 어떤 소리가 나는지 하나씩 눌렀다. 좋고 아름다운 협화음을 낼 때까지.
그러다 가장 부끄러운 소리를 내는 화음을 듣고, 사랑에 흠뻑 젖은 곳을 관악기로 연주했다.
벨라의 온몸에 힘이 빠지고, 머리는 새하얗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로지 두 사람의 숨소리와.
“벨라, 사랑해.”
이 말 한마디만 깊이 새겨졌다.
벨라는 살짝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자, 잠깐만….”
“싫으면 얘기해요.”
“싫은 건 아닌데….”
그는 몸을 숙여 벨라의 아랫입술을 살짝 핥았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간주처럼 부드럽게 귓가에 새겨졌다.
“그럼…. 안을게.”
그의 지휘에 온몸을 맡긴 채 두 번째 악장이 시작되었다.
어느새 그는 현악기의 활이 되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음악의 절정에 다가갔다.
이제 적막 가운에 격렬한 숨소리만이 에워쌌다.
황홀한 마무리 음과 함께 그들의 연주가 피네(fine: 악보의 끝마디)에 도달할 때까지.
* * *
벨라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온몸이 쑤셨다.
‘와…. 이런 건 왜 회복이 빨리 안 돼?’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서서 햇빛이 들어오는 그 방을 고개를 돌려 천천히 둘러봤다.
들어오는 빛에 먼지가 춤을 추듯 흩날리고 아련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이런 데서 지냈었구나.’
밤에 왔을 때는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낮에 보니 많이 답답한 공간이었다.
거기다 창살로 막아놓은 창문이 더 갑갑하게 느껴졌다.
벨라는 예전에 로잔느가 키엘을 욕했던 게 떠올랐다.
- “갇혀 살았다더니 성격도 이상해요!”
벨라는 침대 위에서 자는 키엘을 지긋이 바라봤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침대는 벨라가 저택에서 쓰던 침대와 비슷했다.
‘잠깐만.’
다시 주위를 둘러보다 벨라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벨라의 방과, 벨라의 서재에 있던 것과 비슷한 가구들.
그녀는 책상 위로 가 서랍을 조심스레 열었다.
수많은 종이에 ‘보고 싶다’고 쓴 키엘의 글씨와, 까만 머리에 붉은 눈을 한 사람을 그려놓은 게 있었다.-그리 잘 그린 건 아니었다.-
“아….”
벨라는 모든 걸 내려놓고 천천히 자는 키엘의 옆에 천천히 앉았다.
그의 예쁜 속눈썹 위로 아침 해가 살포시 내려앉아 부서졌다. 아픈 게 뭔지도 잊을 정도로 조각 같은 사람.
‘몰랐어.’
이 아이는 늘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목구멍에 삼킨 채 혼자 삭히는 걸 알고 있었다.
- “싫으면 말도 안 할게요.”
작은 말실수라도 하면 큰일이라도 날까 봐.
그녀가 그의 단단한 가슴에 손을 올리자, 키엘은 살며시 눈을 뜨고 깜빡이며 벨라를 응시했다.
“응….”
키엘은 벨라의 팔을 잡고 그의 품에 안았다.
벨라는 그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울다 말했다.
“미안해.”
키엘은 벨라가 갑자기 눈물을 쏟자 당황해서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떼어냈다.
“…왜요?”
“네가… 엉엉.”
한 번 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벨라는 펑펑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원작대로 가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이 아이가 얼마나 그녀를 그리워했는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너무 이기적이었던 자신이 미웠다.
“너무 힘들었을 거 같아서….”
키엘은 벨라의 눈에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괜찮아요.”
“맨날 괜찮대.”
그는 손으로 벨라의 뺨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닦았다.
그대는 알까. 손을 처음 내밀어 줬던 때부터 지금까지.
존재만으로 그를 얼마나 따뜻하게 하는지.
마왕이면서.
키엘은 따뜻하고 찬란한 미소로 벨라를 위로했다.
“당신이 없을 때만 힘들었으니까. 이제 괜찮아.”
“흑… 넌 왜 그렇게 예쁘게 말해.”
“그러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복 받았네.”
그 말에 벨라는 흐르던 눈물을 그치고 따라 웃었다.
원작이 모두 망가졌을 때만 해도 지옥을 살아간다 생각했는데.
지금 웃고 있는 그를 보면 소설이 비틀어져서 다행이었다.
울음도 웃음도 그치자 키엘은 장난스럽게 벨라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벨라. 울다가 웃으면 뿔난다면서요.”
“내가 그런 말도 했었어?”
“확인해봐야겠다.”
그날 오후. 황궁 전체가 야단법석이었다.
간밤에 사라진 황태자와 황태자비를 걱정할 줄 알았건만.
황태자의 방에서 리오가 ‘아무 일도 없을 거야.’라고 한마디만 했는데도, 그들은 머릿속으로 야설을 떠올리며 입을 다물었다.
벨라는 지나가는 사람마다 그녀를 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아니, 다들 왜 저래?”
엉거주춤 걷는 그녀를 키엘이 붙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이런 일이 전혀 없어서 그래요.”
물론 황궁 내에서도 여러 스캔들은 있었다.
하지만 황제 라리에트는 황후가 죽고 난 이후 몸이 급격히 나빠졌고, 황태자인 키엘은 다른 여자를 단 한 순간도 눈에 들인 적이 없었다.
오랜만에 황궁에 ‘청춘과 사랑’ 이야기가 하인들과 관료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게다가.
어느 황태자가 황태자비와 저리 사랑을 나누던가.
역사상 그런 일은 드물었기에, 불길은 쉽사리 꺼지기 힘들었다.
그리고 이 소문은 벨라 코인으로 주가가 떡상한 크루엘가의 귀에 당연히 들어갔다.
“하하.”
슈리아 크루엘은 수도의 별채에서 창밖을 보다가 손에 들려 있는 서신을 다시 펼쳤다.
벨라에게서 온 서신.
별거 없지만, 슈리아는 이 서신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글씨가 참 정갈하시네.’
슈리아는 벨라의 글씨부터 항간에 떠도는 소문까지 전부 마음에 들었다.
마치 구원 서사처럼, 벨라가 키엘을 위해 이세계에서 넘어왔다는 신화 같은 소문도.
그리고 황실에서 요즘 뜨겁게 화두 되는 소문도.
“벨라 님과 전하의 금실이 좋은 것 같아 다행이야.”
하지만 즐거워하는 슈리아와 달리.
벨라의 소개로 크루엘가의 용병으로 일하게 된 메리는 마음이 무거웠다.
‘큰일이네…. 키엘이 벨라 님을 찾는다고 했는데….’
이 쓸데없는 걱정 때문에 속이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그저 모르는 척 살자니, 키엘이 어렸을 때 얼마나 벨라를 바라봤는지가 떠올라 양심에 찔렸고.
그렇다고 얘기를 하자니, 지금 새 직분을 받아 잘살고 있는 벨라에게 무거운 죄책감을 씌우는 건 아닌가 걱정이었다.
“참. 메리. 오라버니는 찾았어?”
“…….”
“메리.”
“아, 아니요. 은발이라 눈에 띌만한데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아마 수도를 벗어난 게 아닐까요?”
슈리아는 고개를 기울여서 메리를 빤히 쳐다봤다.
“무슨 고민이 있나 보지?”
메리는 한참을 망설이다 차분히 슈리아에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벨라 님을 애타게 찾는 사람이 있었다?”
“…네. 그저 저택에서 같이 지냈던 평민 아이입니다.”
“이름이 뭔가.”
“키엘입니다.”
슈리아는 어안이 벙벙한 채 메리를 바라봤다.
웃기게도 제국민들 중 황제와 황태자의 존함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몇 없었다.
신문에서도 그저 ‘황제’ 혹은 ‘사자’라고만 지칭하는 데다가, 평민인 그들의 일상에서 높으신 분들의 이름을 쓸 일이 없었으니.
* * *
키엘의 생일이 지나고 몇 주간, 벨라는 화국의 폭발사건에 더 집중했다.
꽤 오랜 연구 끝에-물론 젠킨스와 리네가 했지만- 확실한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지난 두 달간. 벨라가 이성을 끊어버리면서 썼던 마력 덕분에 폭발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벨라 님이 마력을 쓰면 완화된다는 거죠?”
“주기적으로 내가 마법을 쓸 테니, 화국에는 최대한 마계의 마력을 끌어 쓰는 마법은 주의하라고 해.”
“아가씨가 마법을 쓸 거라고요? 무전 마법 같은 간단한 거면 좋겠는데요. 또 여기저기 사고 치시는 거보단….”
벨라는 젠킨스의 허벅지를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아야!”
“사고 친다니. 사고사당하고 싶냐?”
이제 이런 일이 허다해서인지 리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벨라 님. 사실 무전 마법으로 서류를 전달하는 데는 성공했었거든요?”
“그래?”
“이걸 제국 전역에 마법 도구를 둬서 연락 통으로 쓰려고 해요.”
젠킨스는 허벅지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괜찮네요. 아무래도 제국의 영토가 크니까 전서구에만 의지할 순 없거든요.”
이런 걸 보면 리네가 왜 천재라고 하는지 알 거 같았다.
현대사회로 치면 우편으로만 편지를 보내다가, 메일이라는 걸 활용하는 거였다.
“괜찮네.”
“그런데 마력이 너무 많이 필요하더라고요.”
“흠. 그래서?”
“벨라 님이 매일 마력을 흘려보내는 건 어때요? 일거양득으로.”
벨라는 리네를 쳐다보며 콧방귀를 꼈다.
‘어쭈. 나를 와이파이로 쓰시겠다?’
벨라는 키엘의 방의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리네가 보고하는 걸 듣고 있었다.
마치 그녀를 전기 발전소처럼 쓰려는 마음은 괘씸했지만.
제국에 도움이 되고 키엘에게 도움이 된다면 하려고 할 참이었다.
그러나 키엘은 리네의 말을 듣고는 있는 건지. 벨라가 차를 마시고 내려놓으면 계속 딸기를 집어 벨라의 입으로 넣었다.
“…전하. 듣고 계세요?”
“응.”
“도련님, 우리가 무슨 얘기 했게요?”
젠킨스의 질문에 키엘은 딸기를 집던 손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환하게 웃었다.
“절대 안 되는 이야기.”
“…에? 왜?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이게 얼마나 획기적인….”
“벨라가 무슨 도구라도 돼?”
리네는 키엘의 단호한 거절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제국 전체에 무전 마법으로 통신하는 건 찬성했으면서.
“생각해봐. 황태자비 경합 때만 해도 모든 가문에 서신을 돌리는 데만 보름이 걸렸잖아.”
당황해서 설득하려는 리네와 달리, 벨라는 흐뭇하게 입 안의 딸기를 음미했다.
‘역시 잘 키운 키엘 하나, 열 마족 안 부럽네.’
거절하는 이유도 어쩜 이리 사랑스러운지.
이 사랑이 과분하게 느껴질 정도로 뿌듯했다.
그래도 벨라가 생각하기에 리네의 아이디어가 나쁘진 않았기에, 리네의 설득에 조금 더 힘을 보탰다.
“난 괜찮아. 어차피 마력을 주기적으로 써야 하고.”
“안 돼요.”
“오히려 도움이 되면 더 좋지.”
“이런 건 후대에서도 쓸 수 있을지, 없을지 생각해야 해요. 벨라가 없어도 가능해야 하니까.”
“음….”
“마법사 협회의 도움을 받아 숨기고 있는 척하고 있지만, 현 황제도 마력이 없어요.”
리오와 리네는 금시초문이라며 서로 바라봤다.
“나도 마력이 없어서, 내 후계자도 없을 확률이 높고.”
모두 할 말을 잃었다.
무조건 찬성할 줄 알았는데, 자기의 후대까지 깊게 고민할 줄이야.
‘선견지명이네.’
그리고 그 정적을 깬 건, 창문 밖의 목소리였다.
“후계자를 만들긴 할 거예용? 도대체 언제 할 거예용?”
“으아악! 이웨르 씨! 왜 거기 있으세요?”
소스라치는 젠킨스와 마찬가지로 리네도 황당하게 창밖을 바라봤다.
“지… 집요하다, 정말.”
하지만 벨라와 키엘은 대수롭지도 않게 말을 이어갔다.
“그럼 내가 있는 동안에라도 리네의 방법대로 해보자.”
“하지만….”
“생각해봐. 다들 본가로 왔다 갔다 하는 거 싫어하던데, 아니었어?”
대다수 귀족은 지방의 본가와 수도를 번갈아 가며 오고 갔다.
간혹 중요한 서류를 우편으로 보냈다가 중간에 빠지거나 바꿔치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때문에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일도 있었기에 직접 수도로 와서 볼일을 보곤 했다.
“이 방법이 제대로 통하면, 귀족들이 쓸데없는 데 시간 낭비도 안 할 테니 더 좋아할 거 같은데.”
“…그렇긴 하죠.”
늘 제국은 절대적인 황권 중심이거나 혹은 귀족 중심으로 반복됐다.
특히나 지금의 황제는 마력이 충분한 편이 아니라고 알려졌었고-실제로는 없지만- 황태자 역시 마력이 없기에 절대적으로 그들 위에 군림하기란 어려웠었다.
그러니 키엘이 황태자로서 ‘인정’ 받는 것조차 힘들었던 거고.
리네가 생각해 낸 제안대로라면, 수도에 몰려 있는 귀족들이 본가에서도 업무를 할 수 있기에 조금 더 황권 중심으로 만들 수 있다.
거기다 그들의 환심을 사는 건 물론이고.
키엘을 찾아오는 사람도 반절로 줄어들겠지.
“황족에 대한 충성심이 늘어나면, 업무도 많이 줄지 않을까? 지금 하는 일들 대부분이 신뢰가 안 돼서 몇 번씩이나 확인하는 거잖아.”
“…그렇죠.”
벨라는 접시 위에 남은 딸기를 손으로 집어 키엘의 입속에 쏙 하고 넣었다.
“우리 쉴 시간이 너무 없잖아?”
키엘은 새콤달콤한 딸기의 맛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어쩜 이렇게 그의 천사는 더 행복할 일이 있다고 알려주는 건지.
“여유가 생기면 놀러 갈 수도 있고.”
“…그래요. 한 번 진행해봐요.”
서로 가고 싶은 곳을 상상하며 달콤한 딸기의 여운을 느끼고 있을 때, 젠킨스는 아니꼽다는 듯 잔소리했다.
“아가씨. 놀려고 제안한 거였어요?”
“뭐 하고 놀까용, 흐흐흐.”
훗날 제국에서 높이 평가되는 통신 마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 *
한편.
메리가 벨라의 소개로 크루엘가에서 일한 지도 벌써 몇 달째.
그녀의 임무는 황궁에서 홀연히 사라졌다는 후안 크루엘의 행방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며칠 전, 메리의 황당한 고민을 들은 슈리아는 한참의 침묵 끝에 메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 “벨라 님께 내 답신을 직접 갖다주고 와.”
메리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편을 들자면, 당연히 어린 시절 벨라를 좋아하던 키엘의 편이었다.
‘내가 괜히 거센 바람을 몰고 오는 건 아닌가.’
처음 가보는 황궁의 본궁은, 메리가 로잔느를 호위하며 본 별채와는 차원이 달랐다.
‘와…. 내 평생에 황궁에 들어오는 날도 있구나.’
메리는 목에 건 출입증을 만지작거리며 벨라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벨라가 없었다.
“혹시 언제 돌아오시나요?”
경비가 난감하게 서로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아… 아마 황태자 전하께 가셨을 거 같은데….”
금실이 좋다던 황태자 부부.
그 사이를 가로막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메리는 오랜 친우의 소원을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벨라의 방에서 기다리겠다고 하려는데, 때마침 메리는 반가운 얼굴을 보았다.
“메리, 오랜만이네요! 크루엘가에 용병으로 갔단 얘긴 들었어요.”
“로잔느 프실리아 님…?”
“벨라 님 만나러 온 거예요?”
메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잔느는 해맑게 메리의 손을 잡았다.
“그럼 같이 가요. 전하 방에 계실 거예요.”
“…네?”
그 시각, 모두가 예상하는 대로 벨라는 키엘의 방에 있었다.
그날 해야 할 일을 미리 끝낸 키엘이 벨라의 업무를 같이 돕다가 막 끝난 참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법 도구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요?”
리네는 젠킨스와 함께 마법 도구를 따로 개발하고 실험했다.
벨라도 틈틈이 가서 마력을 흘려보내는 연습을 하며 희대의 발명품에 협조했다.
“계속 실험 중이야. 최대 몇 군데까지 가능한지와 무전하면서 동시에 서류도 보낼 수 있는지 실험하고 있어.”
벨라는 그간 마력을 내보내면서 적절한 양을 조절하는 법을 몸으로 익혀갔다.
“저기, 나 이제 어느 정도 조절이 되더라고.”
“다행이네요.”
“그, 그래서 말인데….”
그녀는 키엘의 눈치를 슬쩍 보다가 얼굴을 붉히고 찻잔을 내려다봤다.
“네 방 근처에 결계를 쳐볼까 하는데…. 어때?”
“결계요?”
“응. 이웨르만 못 들어오게.”
그 말에 여전히 창밖에서 염탐하던 이웨르가 씩씩거리며 창문을 열었다.
“너무 한 거 아니에용?”
“너야말로 이제 지칠 때 되지 않았니.”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뎅!”
그때 밖에서 경비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늦은 시간에 찾아오는 이는 별로 없을 텐데.
“전하, 로잔느 프실리아 님입니다. 황태자비 전하를 만나 뵈러 왔다고 합니다.”
벨라가 차를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로잔느, 이 시간엔 어쩐… 어라?”
“아, 안녕하세요.”
“들어와.”
벨라는 메리를 보자마자 반가워서 환하게 웃으며 들어오라 손짓했다.
“여기 도련님 방인데, 어째 아가씨가 주인 같네용.”
“내 건 다 벨라 거니까 괜찮아.”
“도련님도 참….”
키엘이 이웨르와 대화하는 동안, 메리는 손을 떨며 조심스레 황태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내, 내가 이런 곳에 오다니….’
로잔느가 끌고 올 때만 해도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방을 보자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것 같았다.
크루엘가도 화려하다 생각했는데, 그곳은 이곳에 비하면 새 발의 피로 보였다.
벽지와 바닥은 금으로 문양이 새겨져 있고, 모든 가구가 제국에서 값비싼 가구들로 보였다.
그리고 힐끔 바라본 황태자는….
“…키엘?”
키엘과 너무 닮았다.
키엘도 조금 놀란 얼굴로 메리를 보고 있었다.
“메리?”
메리는 키엘의 옷차림에서, 그리고 그 얼굴에서 황족의 별칭인 ‘사자’를 떠올렸다.
백금발의 머리와 호박색 눈.
“서, 설마 키엘이 황태자예요?”
“어…. 몰랐어?”
메리는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키엘을 보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았다.
“아…. 다행이다.”
벨라는 놀란 메리를 보자 뒷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참. 내가 말 안 했구나.’
키엘에게 메리를 만났다고도 말 안 했고, 메리에게 키엘을 만났다고도 안 했다.
메리는 키엘이 황태자라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녀가 알았던 사람이 황태자라는 게 다행은 아니었다.
평범한 시골뜨기가 황궁에 오는 것만으로도 겁이 나는데, 어떻게 제국의 황태자를 눈앞에 두고 편하게 있을 수 있겠는가.
메리가 계속 눈치를 보자, 키엘은 오히려 벨라의 눈치를 보더니 말했다.
“메리, 괜찮아. 편하게 대해.”
“하… 하지만 제가 어찌….”
“우린 친구니까 괜찮아.”
그리고 메리는 키엘이 참 예전과 다를 것 없다 생각했다.
벨라가 흐뭇하게 키엘을 바라보며 한 말 때문에.
“아유, 우리 키엘은 진짜 성군이 되겠다.”
여우처럼 벨라 앞에서 착한 척하는 건 여전하네.
조금 어색했던 것도 잠시. 메리는 한시름 놓고 오손도손 오랜 친우와 그간의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도 호시탐탐 벨라와 키엘의 스킨십을 구경하려던 이웨르는 ‘에이. 오늘은 공쳤네.’라며 로잔느와 함께 돌아갔다.
늦은 시간까지 키엘과 벨라는 메리가 전해주는 고향에서 떠도는 소문과 고향 사람들의 근황에 관해 들었다.
밤이 깊어지고 키엘은 가벼운 마음으로 벨라와 함께 잠자리에 누웠다.
“오랜만에 메리를 봐서 그런지 좋네요.”
“그래?”
“어릴 때처럼 대할 수 있어서, 그때로 돌아간 거 같아요.”
벨라는 웃으면서 키엘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진작 얘기해줄걸.’
그녀도 그녀의 일상이 바빠서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그나저나 참 희한해. 제국의 평민들은 황제나 황태자 이름을 몰라?”
“…아마 모를걸요?”
“왜?”
“다들 먹고사는 데 바쁜데다가, 신문에는 그저 황제나 황후라고만 표기하니까. 벨라는 황제 이름 뭔지 알아요?”
벨라는 그의 말에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라디에이터.”
“아닌데.”
그녀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돌아누웠다.
“벨라. 황태자비가 황제의 이름을 모르면 어떻게 해요?”
모를 수도 있지. 황제는 소설에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았다.
뭐, 그게 변명이 되지는 않는다.
“뭐였지? 라… 라… 라… 라비앙로즈?”
“맞출 때까지 괴롭힐 거야.”
그의 손이 벨라의 옷 안으로 들어왔다.
“라, 라디오 가가?”
키엘은 웃으며 벨라의 목에 입을 맞췄다.
“아무거나 말하는 거 봐.”
그의 입술에 벨라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 어떻게 괴롭힐 건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목에 작은 도장을 찍었다.
* * *
이웨르는 벨라의 침대 위에서 흥얼거리다, 메리가 돌아오자 눈에 불을 켜고 밖으로 나갔다.
“내가 놓칠 줄 알고!”
잔바르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몽마 녀석, 저러다 죽어야 정신을 차리지.”
“… 그래도 이웨르 씨가 아가씨한테 신경 써서 다행인 거예요.”
잔바르는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댄 채 아직 일하고 있는 젠킨스를 바라봤다.
“왜?”
“그런 게 있습니다.”
벨라가 돌아왔을 때부터.
젠킨스는 벨라가 인간계를 침략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걸 느꼈었다.
망설이지도 않고 자신의 피를 먹이는 거며.
신혼 좀 즐기자고 마족들을 어떻게든 떼어내려는 걸 보면.
‘그냥 도련님이 좋은 거겠지.’
다행인 건, 이웨르의 관심이 오로지 거기에만 쏠려 있어서 두 사람의 내기 결과를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젠킨스는 이웨르가 내기에서 이기면 보고 싶다고 했던 장면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그때 벽에 기대었던 잔바르가 젠킨스에게 다가와 커다란 손으로 그의 턱을 들었다.
“… 그럼 지금 여기엔 아무도 없는 거군.”
서로의 입술이 가까워지려던 찰나.
“푸르가 여기 있는데?”
“저, 저도 여기 있어요.”
벨라의 침대 위에 누워 있던 푸르가 손을 들었다. 더불어 방에 들어왔는데도 투명인간 취급당한 메리도 같이.
“… 공주님이 우리를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알겠다.”
“안다니 다행이네요.”
그리고 몇 분 뒤, 젠킨스는 잔바르와 어떤 것도 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겼다.
이웨르가 얼굴이 붉어진 채 씩씩대며 들어왔기 때문에.
“메리! 너 도련님 방에서 바로 나온 거 아니양?”
“아…. 온 김에 본궁을 좀 둘러보고 왔어요.”
메리는 침을 꿀꺽 삼키며 변명했다. 쓸데없이 정원을 계속 누비며 밤 산책을 했었다.
벨라가 꼭 그러고 한참 후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라고 했을 때는 이유를 몰랐지만, 이웨르를 보니 공감이 되었다.
“으아아악! 가니까 벌써 끝나고 자고 있엉!”
젠킨스는 정말 저 관심이 잔바르와 그에게로 돌아오지 않기만을 빌었다.
* * *
리네의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벨라 님. 여기에 마력을 담아보실래요?”
벨라가 손을 뻗고 리네가 만든 도구에 마력을 집어넣자, 도구가 반짝였다.
“이야. 아가씨, 이제야 좀 하시네요.”
젠킨스의 ‘이제야 좀‘이라는 말이 거슬렸지만, 벨라도 뿌듯했다.
마계에서는 그저 마력을 있는 힘껏 내보내면 뭐든 알아서 되었는데, 인간계에서는 확실히 조절이 필요했으니까.
“밤새운 보람이 있어요. 마력이 잘 담기네요.”
그리고 리네의 말에 젠킨스가 놀란 눈으로 마법도구를 쳐다봤다.
“지금 도구에 마력을 담은 겁니까?”
“네. 벨라 님이 매일 매시간 마력을 내보낼 순 없으니까 한꺼번에 많이 담아뒀다가 주기적으로 내보내는 걸 생각해봤어요.”
“이야….”
세기의 발명이 이렇게 또 나타나다니. 젠킨스가 감탄하며 손뼉을 쳤다.
벨라도 겉으로 감탄하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찝찝했다.
와이파이인 줄 알았는데. 전기 발전소야, 뭐야.
리네는 밤을 새워서 피곤한지 기지개를 켜고, 한 손으로 반대편 어깨를 주물렀다.
“리네, 피곤하면 오늘 저녁에는 안 와도 돼.”
알찬 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덧 한 해가 바뀌는 날이었다.
이따가 저녁에 벨라의 방에서 다 같이 맛있는 걸 먹고 마시기로 했는데, 리네는 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무슨 소리예요! 오늘은 키엘 눈치 안 보고 술 마셔도 되는 날인데!”
리네가 눈을 반짝이며 두 손을 모아 벨라에게 공손하게 물었다.
“메르켄 공작가의 포도주는 오늘 따는 건가요?”
벨라는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며 눈을 깜빡였다.
“그것만 있는 줄 알아?”
“벨라 님, 사랑합니다.”
연말 파티 겸 신년 파티.
키엘의 호위들인 쌍둥이들과 마족들, 거기다 로잔느와 마이유까지 초대했다.
“자자! 오늘은 송년회야!”
“와아!”
즐거워하는 쌍둥이와 달리, 잔바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송년회는 뭡니까? 새로운 욕입니까?”
“한 해를 보내면서 괴로웠던 일은 다 잊어버리자는 의미에서 모이는 거야.”
키엘은 벨라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딱 작년의 이날은 벨라가 인간계로 오지 않겠다고 했던 날이었는데.
1167년. 그 한 해 동안 정말 숱한 일이 있었고, 벨라는 이제 그의 옆에 있었다.
벨라의 말대로 아팠던 건 술잔에 비워내고, 이제 마음이 통한 것만 기억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족들은 그 의미가 와 닿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살기도 했고, 앞으로 살아갈 생도 많으니까.
“참 인간들은 쓸데없는 걸 많이 한다니까.”
“그래도 푸르는 먹을 게 있어서 좋아요!”
간만에 이웨르가 힘을 내서 푸짐한 한 상을 차렸다.
그간 황궁에서 나오는 요리도 물론 맛있었지만, 익숙한 이웨르 손맛이 그립기도 했었다.
“이거 진짜 오랜만에 먹어본다.”
맛과 향이 지난날을 떠올리게 해서 벨라는 행복하게 한 입씩 먹었다.
이웨르는 파란 머리를 흩날리며 콧대를 세우고 자랑했다.
“오늘을 위해 오랜만에 부대찌개를 했지용!”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음식이에요?”
쌍둥이들은 이색적인 음식을 보며 손뼉을 치고 한 그릇씩 가져갔다.
그리고 특별히 놀러 온 로잔느도 기대에 차서 큰 숟갈로 한입에 맛을 봤다.
“로잔느, 그렇게 한 번에 마시면….”
벨라가 매울 거라고 경고하려는데.
“켁….”
“…매울 텐데.”
로잔느는 처음 맛본 부대찌개의 맛을 강렬하게 느끼며 콜록거리다 눈물까지 보였다.
“처음 먹어보는 건데 너무 용감하게 먹는 거 아냐?”
자연스럽게 리오는 물컵에 물을 따라 로잔느에게 주고, 로잔느는 손으로 얼굴에 부채질하며 흐르는 눈물을 찔끔 닦았다.
“다들 맛있다고만 해서 빨리 먹어보고 싶었어요.”
“솜사탕은~ 바보래요~.”
푸르가 로잔느를 놀리자, 벨라가 푸르의 머리를 콩 하고 쥐어박았다.
“네 부하니까 더 잘 챙겨줘야지. 그렇게 괴롭히면 못 써.”
“힝.”
푸르가 이마를 문지르자, 옆에 있던 잔바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나저나 공주님도 저희 맨날 괴롭히지 않습니까?”
“너 정말 많이 똑똑해졌네.”
모두 술이 조금 취한 채로 시끌벅적 떠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화두에 오른 주제는 마법이었다.
리네의 무전 마법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그럼 마력 폭발 사고는 다 정리된 거예요?”
화국의 사건까지 이야기했다.
“응. 일단 이세계에서 나타나는 균열이 원인이라고 했고, 당분간은 계속 내가 마력을 쓰면서 완화할 거야.”
처음에는 마력을 내보내는 것 자체를 못마땅했던 젠킨스도, 벨라의 발전에 혀를 내둘렀다.
“참, 아가씨. 도련님 방에도 결계를 치셨다면서요?”
벨라는 며칠 공들여 황태자의 방 인근에 결계를 쳤었다.
“이제 암살 걱정은 없겠네요.”
리네가 엄지를 척 하고 올리며 벨라를 칭송했지만, 이웨르는 엄지를 내리며 야유하고 항의했다.
“애초에 암살 걱정해서 결계 친 거 아니잖아용! 내가 못 보게 하려고 한 거면서!”
그 말은 사실이었다.
결계에 들어오지 못하는 이는 이웨르와 푸르뿐이었다.
잔바르야 요즘 잠잠하고. 젠킨스는 구태여 애정 행각을 보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벨라는 알딸딸하게 취해 키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이웨르에게 삿대질했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변태같이 계속 염탐하려고 해? 상당히 불쾌하거든?”
“전 몽마라고용!”
상급 몽마는 육체적인 쾌락보다 복잡한 사랑의 감정을 더 좋아한다는데, 얘는 왜 이러는 건지.
벨라는 평소 따지고 싶었던 걸 이웨르에게 따져 들었다.
“이웨르. 솔직하게 말해. 너 키엘 꿈속에 나타나서 야한 짓 한 적 있지?”
“어머, 왜 그렇게 생각하세용?”
“그게 아니면 키엘이….”
벨라는 말을 하려다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냐, 됐어.”
그러나 이웨르의 입이 귀에 걸리도록 찢어졌다.
직접 두 눈으로 보지 못해도, 벨라의 한 마디에 이웨르의 상상의 날개가 펼쳐졌다.
“아항… 아가씨…. 도련님이 꽤 만족스러웠구낭?”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벨라가 얼굴을 붉힌 채 다급하게 변명하자, 키엘은 장난스럽게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벨라에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작게 물었다.
“그럼 별로였어요?”
벨라는 그가 장난치는 걸 알지만 당황해서 큰소리로 얼버무렸다.
“아, 아니! 좋았으니까 물어본 거지!”
그리고 벨라의 말에, 술을 마시던 모두가 전부 동작을 멈췄다.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젠킨스와 잔바르는 인상을 찡그리고.
나머지는 초롱초롱하게 벨라를 보고 있었다.
순진한 로잔느와 그 옆의 마이유까지도.
그들의 시선에 벨라는 옆에 있던 베개를 아무에게나 집어 던졌다.
“뭐, 뭘 봐! 죽고 싶어?”
“꺄아! 음식 다 쏟겠어용!”
“네가 제일 나빠. 이웨르, 네가 제일!”
베개 싸움을 빙자한 마족들의 엉망진창 싸움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벨라가 이웨르에게 베개를 휘두르는 동안 잔바르가 벨라를 말렸고, 젠킨스는 혹여나 음식을 떨어뜨릴까 봐 철저히 막았다.
푸르는 양손에 손수건을 들고 멀리서 응원했다.
“아가씨! 이겨라!”
힘이 달리는 이웨르는 울상을 지으며 제안했다.
“아가씨, 이거 너무 해용! 술로 대결하죵!”
술 대결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리네가 눈에 불을 켜고 손을 들었다.
“그럼 저도 끼워주세요!”
키엘은 그 모습을 쭉 지켜보면서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한쪽은 그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온 마족들과 한쪽은 성물 여행을 하며 그의 현재를 보좌하는 사람들.
그의 일생을 한눈에 다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언제부터 저렇게 친했는지. 어색하지 않게 자연스레 동화된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특히 로잔느와 푸르는 단짝 친구 같았다.
“푸르, 마계는 어떤 곳이야?”
관심을 받자 기분이 좋아진 푸르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좋은 피 냄새도 많이 나고, 여기랑 다르게 우리끼리 잡아먹을 수도 있어!”
“잡아먹어?”
“응. 잡아먹으면 힘이 세져! 그런데 난 못 먹어. 공주님이 먹지 말라 했거든.”
그리고 푸르는 벨라에게 고개를 돌리고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팡팡 쳤다.
“그러니까 공주님이 제일 좋아하는 건 푸르야!”
“그래. 우리 푸르가 최고야.”
벨라는 마치 복사하고 붙여놓은 답변처럼 자동으로 대답하며 푸르의 머리를 슥슥 문질렀다.
어느새 이웨르를 응징하고 온 벨라가 키엘의 옆에 앉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키엘은 벨라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면서 벨라에게만 들릴 만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푸르도 마족인데 힘을 얻고 싶어 하진 않아요?”
“그건 그런데. 푸르마저 그러면 난 진짜 못 버틸 거 같아.”
그냥 별 뜻 없이 물어본 건데, 벨라의 답은 키엘이 듣기에 의아했다.
“…버텨요?”
“내 주변엔 괴물들만 있잖아. 착한 곰 정도는 있어줘야지 않겠어?”
그는 벨라의 말이 조금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깨를 살살 두드리며 그녀를 위로했다.
알딸딸해서인지, 아니면 그 손길이 따뜻하고 포근해서인지. 벨라는 하품을 하고 눈을 스르르 감았다.
“나도 인간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다행히 벨라의 말을 들은 사람은 키엘뿐인 듯했다.
그는 벨라의 말에 위로하던 손을 멈추고 천천히 벨라를 내려다봤다.
창밖으로 새해를 알리는 화려한 불꽃이 터졌다.
* * *
연말 파티까지 같이 있자고 했지만, 메리는 그러지 않았다.
묵은 체증이 내려가니 마음 편하게 후안 크루엘을 찾는 일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새해에는 많은 사람이 수도에서 열리는 화려한 불꽃을 보기 위해 찾아온다.
분명 이 인파 속에서 후안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은발이라 눈에 띌 텐데.”
벌써 몇 달째 허탕만 치던 메리는 그녀의 용병단들과 함께 주점으로 향했다.
어차피 찾기 힘들 거라는 걸 아는데, 그럴 바에야 그동안 수고한 단원들과 회포를 풀고 싶었다.
메리가 주점에서 주문하던 도중이었다.
뒤에서 어딘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두 달 동안 이세계로 돌아갔다가 왔다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역사상 이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두 달 만에 다시 온 적이 있나?”
“하지만 결과적으로 황태자비 전하는 돌아오셨잖아.”
“분명 황태자비가 되고 싶지 않았던 거야.”
갈색 머리의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마족이었어. 마족이라고.”
“어휴. 자네 메르켄 공작가에서 일하나? 크루엘가의 황태자비가 마음에 안 들어서 헛소리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마족이라니.”
메리는 불편하게 갈색 머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두 사람의 앞길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꼭 저런 피라미 같은 것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지.
“이 사람 너무 취했네. 어이, 그만 마시게.”
“어딜 만져! 나는 안 취했다!”
술잔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메리는 그 갈색 머리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어…. 후, 후안 크루엘과 닮았는데?‘
머리카락 색은 분명 달랐지만, 저 잘생긴 얼굴은 잊기 힘들었다.
“이… 이안 님?”
갈색으로 염색한 후안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더니 뒤를 돌아 도망쳤다.
* * *
새해가 시작되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난 한 해를 정리하고 앞으로의 한 해를 계획하는 일이었다.
바로 국정회의.
모든 귀족이 지방에서 다 올라와 제국의 발전을 위해 회의하고 토론하는 자리였다.
중요한 자리이기에 회의에는 병상에 누워 있던 황제까지 참석한다.
리네는 오늘 그녀가 개발해 낸 무전 마법에 대해 알리고, 새로운 업무 방식을 제안할 예정이었다.
“잘될 거예요. 벨라가 낸 제안이니까.”
“응.”
마법사 제복을 깔끔하게 입은 리네는 입을 삐죽 내밀며 불평했다.
“키엘. 내가 생각해낸 건데….”
리오가 회의 때 나눠줄 보고서를 가슴에 안고 키엘을 뒤따랐다.
“1년 만에 연 건데 왜 이렇게 오래전 일 같지? 한 10년 전 일 같아.”
“그때는 벨라 님이 없었으니까. 어우, 그러고 보니 작년에는 분위기 진짜 침울했었는데.”
리네의 말에 리오는 지난날을 회상하며 벨라를 슬쩍 쳐다봤다.
“뭘 봐?”
“이제 마왕님이 계시니까 괜찮겠네요.”
“뭐가?”
“전에 회의할 때는 키엘이 마력이 없으니까 은연중에 무시하는 귀족들이 여전히 있었거든요.”
벨라의 보좌인 젠킨스가 리오의 말에 동의했다.
“하긴, 우리 아가씨 성격이 더러워서 그런 말 하는 놈은 바로 죽여버릴지도 모르겠네요.”
“젠. 넌 아군이냐 적군이냐.”
“아가씨야말로 황태자비가 되었으면 몸 좀 사리시지 그래요?”
젠킨스는 혀를 끌끌 차며 턱으로 벨라의 어깨를 가리켰다.
“저택도 아니고, 얼마나 험하게 다니면 그런 데에 멍이 듭니까?”
“…멍?”
“아직도 회복이 안 되세요?”
벨라는 자신의 왼쪽 어깨에 눈을 돌렸다가, 살짝 내려간 드레스를 위로 올렸다.
“잠깐만. 이건 어디 부딪혀서 든 멍이 아닌데용?”
그때 이웨르가 눈에 불을 켜고 벨라의 드레스를 잡으려고 하자, 키엘은 그도 모르게 벨라를 끌어당겨 이웨르에게서 떨어지게 했다.
“어머, 어머! 도련님은 알고 있다는거넹?”
“조용히 해, 이 변태야!”
중대하고 근엄한 회의를 가는 길인데도, 그들의 발걸음은 즐거웠다.
* * *
국정회의는 벨라가 생각했던 것보다 컸다.
반원으로 구성된 회의실의 벽에는 황제와 주요 인사들이 앉는 곳이 있었다.
바로 그 앞에는 발화자가 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그 너머로 수많은 귀족이 앉아있었다.
‘꼭 국회 같네.’
황제 라리에트가 가장 중앙에 앉았다.
그의 오른쪽은 황후의 자리로 비어 있고, 그의 왼쪽으로 황태자인 키엘이 앉았다.
벨라는 키엘의 옆에 조금 더 작은 의자에 앉았다.
“아가씨, 하품하지 마세요.”
“아. 미안.”
앉는 순간부터 벌써 지루했다.
허례허식의 인사들이 끝나고 리네가 무전 마법에 대해 설명하며 연락 통으로 어떻게 쓸 건지에 대해 설명했다.
벨라가 부채로 입을 가리고 한 번 더 하품하자, 키엘이 쿡쿡 웃으며 물었다.
“많이 졸려요?”
“조금?”
“이거 끝나면 오랜만에 대련할까요?”
“대련 중에 뽀뽀하기 없기.”
“…치사하네.”
“그게 더 치사하거든.”
젠킨스는 두 사람이 서로 웃음을 참으면서 농담을 주고받는 걸 보며 자리를 피했다.
‘나랑 잔바르 님 방해할 땐 언제고….’
깨가 쏟아지는 게 젠킨스는 영 보기 불편했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황제 라리에트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금실이 좋다는 말은 듣긴 했지만, 함께 있는 걸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때마침 리네가 모든 설명을 다 마치고 관료들은 자기들끼리 의논을 하느라 시끌벅적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황제가 목을 가다듬더니 키엘을 불렀다.
“태자.”
“네.”
“태자비랑은 사이가 좋아 보이는구나.”
“…네.”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벨라가 둘의 눈치를 보다 키엘에게 조용히 귓속말했다.
“너 아버지랑 사이가 안 좋아 보이는데?”
“…네.”
그러고 보니 평소에도 키엘이 황제에 대해 말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왜?”
키엘은 눈을 흘기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마계에 있을 때 다 얘기해줬는데.’
벨라가 궁금하다며 물어보더니, 실컷 얘기하고 있을 때 그의 무릎 위에 머리를 베고 듣다가 자 버렸지.
황제와 황태자의 사이는 좋은 게 이상했다.
황후의 시녀가 임신하고 아이까지 낳았는데, 책임은커녕 도망가서 낙후된 환경에 살게 했다.
게다가 그를 다시 찾은 이유도 단 하나. 황제에게 후사가 없기 때문 아니었는가.
버릴 때는 언제고 필요하니 찾는 데다가. 그렇게 찾아놓고서는 황궁에 들어오자마자 감옥 같은 곳에서 몇 년을 지냈다.
‘어떻게 가족이라고 생각하겠어?‘
대면한 적도 몇 번 없었는데.
키엘에게 권력을 준 건 그의 생물학적 아버지지만.
키엘에게 가족은 그에게 웃음을 주는 엉뚱하지만 재밌는 마족들이었다.
물론 사고만 치고, 키엘과 벨라의 둘 사이를 방해 할 때는 리네와 리오 사이처럼 짜증이 나긴 하지만.
‘이것도 다 벨라 덕분이야.’
키엘은 옆에 앉은 벨라의 손등 위에 조심스레 그의 손을 포갰다.
그리고 그때.
장내는 더더욱 시끄러워졌다.
대부분의 귀족은 리네의 제안이 꽤 마음에 들었다.
사교계 때문에 수도에 남고 싶어 하는 자들은 빠르게 자신의 본가와 소통할 수 있는 점이 좋았고.
본가에서 조금 더 영지를 관리하고 싶은 이들은 수도에 구태여 올라오지 않더라도 제국의 업무에 참여할 수 있는 게 되니까.
모두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새로운 체제를 받아들이려고 하는데.
마법사 협회의 생각은 달랐다.
“도대체 그런 번거로운 일을 누가 한단 말인가.”
“당장은 마력이 많이 필요하니 황태자비 전하의 마력을 사용할 생각입니다. 다들 보셨으니 충분하다는 건 아실 테고요.”
리네는 꽤 설득력 있게 말했다. 그러나 마법사 협회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 중요한 일을 한 사람에게만 맡기겠다고?”
순간 모두 벨라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황태자비 전하가 없으면 결국 그 일은 마법사 협회가 도맡게 될 것. 저희의 의견이 가장 중요한 거 아닙니까.”
“마력을 충분히 보관해서 쓸 거고, 모자란다면 마법사들의 마력도 조금 보태면 되죠.”
“마법사가 노예도 아니고, 어떤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겠나?”
리네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일단 꼬투리부터 잡는 게 짜증이 났다.
“리네 프로하 경은 황족이 아닌 자의 손을 빌려서 하는 게 수치스럽지도 않나?”
협회장 볼드의 말에 리네는 마치 버튼이라도 눌러진 듯 그동안 쌓아왔던 화를 분출했다.
“수치라니요! 수치는 볼드 경의 대머리가 수치죠!”
“뭣이?”
키엘은 리네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돌이켜보면 그의 주변에 사고 치는 건 마족뿐만이 아니었다.
매번 누군가에게 당하는 로잔느나, 멍하게 있다가 임무를 놓치는 리오나, 참다가 뚜껑 열리는 리네나.
그래서 키엘이 협회장 볼드의 의견에 답변했다.
“계속 그 일을 담당하겠다고 약속은 받았으니 걱정 안 해도 될 거 같네.”
“그 약속을 어떻게 믿습니까?”
키엘은 눈을 살짝 내리고 화를 참으며 말했다.
“지금 황태자비의 약속을 믿지 못한다고 하는 건가?”
“솔직히 수상합니다. 신분이 확실히 보증된 것도 아니고. 수도에서는 황태자비가 마족이 아니냐는 말도 있습니다.”
그 말에 깜짝 놀라 젠킨스를 쳐다보는 벨라와 달리, 키엘의 표정은 미동 하나 변한 게 없었다.
“만에 하나 황태자비 전하가 없으면, 모든 업무는 마비될 겁니다. 전하께서 오히려 미색에 빠져 그릇된 판단을 하시는 걸까 봐 걱정입니다.”
걱정을 빙자한 조롱이겠지.
키엘은 그저 속으로 협회장을 어떻게 처리할지 계산하고 있었다. 이제껏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많았지만, 리네를 밀어주는 것 같아 나서지 않았건만.
뒤에서 젠킨스와 벨라가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키엘의 귀에 들렸다.
“아가씨가 경국지색이라 할 정도는 아닌데….”
“뒤질래?”
다행히 두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듯싶었다.
그리고 협회장의 다음 말은 키엘의 신경에 매우 거슬렸다.
“항간에서는 금실이 좋은 게 몽마처럼 전하를 매혹한 건 아닌가 의문을 품는 자도 있습니다.”
“몽마라니!”
하지만 화를 낸 건 키엘이 아니었다.
키엘은 살짝 고개를 돌려 옆에 그를 매료시킨 사람을 응시했다.
“그렇게 말할 거면 차라리 마왕이라고 해!”
그러고 보니 그의 주변에서 가장 사고 많이 치는 건 역시 검은 고양이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