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공식적인 첫날밤이니, 키엘은 벨라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여전히 누가 왔는지도 모르고 음담패설을 하는 마족들과 그의 호위를 보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로잔느까지 저럴 줄이야….’
저들이 기대하는 만큼, 그도 기대하고 있긴 하지만.
왜인지 몰라도 벨라는 ‘지켜주겠다’는 명목하에 아슬아슬한 그 선을 넘지 않았었다.
여러 번 그의 마음을 은연중에 표시했지만, 어릴 때처럼 대충 듣고 흘렸고.
공식적인 첫날밤인 오늘도, 어차피 마족들이 방해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는 여름 축제의 마지막 날 밤 불꽃 축제를 하는 그 시간에, 진심을 담아 벨라에게 오래 준비한 반지와 함께 마음을 전하려고 했다.
다들 노는 데 정신 팔려 있을 그때는 누구도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어쨌든 오늘은 이곳으로 오진 않겠네.’
그럼 갈 만한 곳은 한군데뿐이지.
그는 살짝 미소 지으며 그의 방으로 돌아갔다.
키엘의 방을 지키고 있던 경비들이, 그를 보자마자 바짝 긴장한 채 서 있던 자세를 고쳤다.
“왜들 그래?”
키엘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얼굴이 새빨개진 경비가 넌지시 말했다.
“저… 안에 황태자비 전하께서 계십니다.”
“그래?”
“그… 그런데 버, 벗고 계실 거라고 하셔서….”
키엘은 그 말을 듣고 폭소를 자아냈다.
‘그랬으면 좋겠다만.’
그럴 리가 없지.
“잘 지키게.”
그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문을 열었다.
경비들은 행여나 황태자비의 나체를 보게 될까 봐 성급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벨라는 그의 예상대로 책상 앞에서 뒤를 돌아 서 있었다.
혹시 그가 숨겨둔 반지를 찾기라도 한 걸까.
“벨라. 여기 있었네요?”
그리고 벨라가 뒤를 돌아볼 때, 그녀는 소름이 끼치도록 아름다웠다.
* * *
벨라는 들고 있던 포도주를 땅에 떨어뜨리고, 손을 떨며 그 안의 문서를 조심스레 들었다.
낯익은 그녀의 글씨가 보였다.
[키엘 15살 생일선물 ♥]
저택에 있어야 할 노트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그것도 표지와.
[마왕성은 빛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벨라가 필사했던 소설 일부분만.
[“당신을 찾았어.” / “가소롭구나, 애송아.”]
마왕의 딸과 싸우며 로잔느를 떠올리는 부분은, 모두 까맣게 칠해져 있었다.
- “도련님이 나침반 보는 걸 잘못 알려주신 거 같은데요.”
불길한 예감이 그녀를 스쳐 지나간다. 벨라는 그 밑에 있는 하나의 문서를 손에 들었다.
벨라가 조사했던 마력 폭발 사고의 보고서.
조작된 것 같다는 부분만 찢어져 보관되어 있었다.
‘왜 이게 여기에 있지…?‘
로한은 벨라가 조작한 거 아니냐고 의심했었다. 조사는 벨라가 하고 있었는데도, 따로 뒷조사하고 있다면서.
‘그래…. 이 사건으로 가장 수혜를 본 건 나였지.’
하지만 벨라가 사고를 유발한 게 아니라면.
- “신호를 주면 그때 보호막을 치라고 했어요.”
생각하고 싶지 않은 범인의 얼굴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래. 그러니 리네가 키엘에게 보호 마법을 걸지 않았던 거야.
- “내 비가 되어줘요.”
점점 선명하게 그녀가 걸린 덫의 한 줄기, 한 줄기를 보여준다. 이제껏 했던 모든 대화는, 다시 한번 쓰인다.
- “저 대신 황태자비 경합에 나가주세요.”
아니길 바라며, 벨라는 다시 그녀의 필사본에 눈을 돌렸다.
‘만약…. 키엘이 정말로 이걸 본 거라면….’
초침 소리만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절망과 분노가 소리에 맞춰 쌓였다.
- “크루엘 공작가의 양녀로 들어갈래요?”
“이 모든 걸 알고 크루엘 공작가에 나를 보낸 거구나….”
- ‘그 잘난 머리를 제 사람 얻는 데 쓰겠지.’
그녀의 손이 벌벌 떨려왔다.
“나를 이 자리에 앉히려고….”
그리고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벨라. 여기 있었네요?”
벨라는 천천히 뒤를 돌아서서 그를 마주 보았다.
“뭐 하고 있었어요?”
그의 목소리가 역겹게 들린다.
그리도 원작대로 가길 바라며 발버둥 쳤건만.
“너였어…?”
“…벨라?”
“경합을 조작한 게?”
“무슨 소리예요.”
거짓말하는 그의 입술이 가증스럽게만 보였다.
“거짓말하지 마.”
벨라는 그녀의 필사본과 찢어진 보고서를 키엘의 앞에 던졌다.
공중에서 천천히 떨어지는 종이 뒤로, 키엘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다 알고 있었어, 넌.”
어디서부터 틀어진 걸까.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마계에 오기 전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지?”
키엘이 입술을 깨물고, 벨라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래…. 그래서 나도, 잔바르도 저택에 가지 못하게 한 거야….”
이 노트를 들킬까 봐.
“왜 다시 만났을 때 얘기 안 했어?”
“벨라, 나는….”
“지금 거짓말하면, 다시는 널 안 볼 거야.”
벨라의 눈이 점점 더 붉어졌다. 키엘은 목소리를 떨며 벨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사실대로 말하면, 이해해줄 수 있을까.
“그때 당신은 너무 위태로웠어. 사실을 말하면…. 무너질 거 같았어.”
“내가 왜 무너져?”
“그 소설 대로 되길 원하는 것 같아서….”
벨라는 뚫어지라 그를 응시했다.
이게 소설이라는 것도, 그리고 그녀가 원작대로 되길 바라는 것도 알고 있었네.
그의 말대로 마계에서 이 이야기를 들었으면, 지금쯤 짐승처럼 이성을 다 놓아버렸겠지.
하지만 이미 절망의 시간을 보내야 할 벨라는 그의 변명이 와 닿지 않았다.
“알면서도 왜 그랬어?”
“이미 소설의 흐름대로 되지 않았으니까….”
“어째서?”
차갑게 물어보는 벨라의 목소리.
키엘은 몇 달 전, 바로 이 자리에서 후안 크루엘에게 있었던 일이 그에게 업보처럼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진 않았는데.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그 소설대로 갈 수가 없었어.”
키엘이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정적이 그들을 감싸 안았다.
진심이 닿기를 바라는 그의 눈물은 뺨을 타고 흘러내려 갔다.
하지만 그의 애타는 진심은, 벨라가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을 드러낸다.
‘네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왜 그녀는 키엘이 로잔느를 사랑한다고 계속 믿고 있었던 걸까.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늘 안심시키던 수많은 그의 말이 스쳐 지나간다.
- “우연히 같이 여행하게 되었는데, 그 애도 소개해줄게요. 로잔느란 애도 있어요.”
- “난 한 번도 로잔느를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한 적 없는데.”
그 모든 걸 알고 한, 착각을 심어주는 말들.
단 한 번도 명료하게 말한 적 없었던 말과.
- “얘한테는 따로 운명의 상대가 있는걸.”
그간 모르는 척했던 그의 침묵이 떠오른다.
“…사랑?”
그리고 침묵을 깬 벨라의 비웃는 목소리가 검이 되어 그의 심장을 찔렀다.
“사랑? 사랑한다는 사람이 그래?”
키엘은 소설대로 가고 있다고 안심하게 하고, 조금씩 바꾸면서 제 입맛대로 꾸며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 모든 게 내 탓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어…?”
“…미안해.”
저가 미움받을까 봐.
그 잘난 머리로, 얼마나 교묘하게 꾸며 왔는지.
도저히 그를 이해 할 수 없는 벨라는, 그의 뺨을 내리쳤다. 그의 뺨 한쪽이 붉게 물들었다.
“그거 사랑 아니야. 그냥 집착이야.”
어느 누가 사랑하는 사람을 가지기 위해 이런 함정을 파헤치는가.
나는 너를 사랑해서, 이 욕심이 커지지 않기만을 바라며 그리도 죽여왔는데.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그녀가 원했던 단 한 가지.
이 소설이 원작대로 완결 나는 것.
설령 원작대로 되지 않는다면.
적어도 소설에서 벗어나게 해줬어야지.
“정말 사랑한다면, 그때 넌 날 죽였어야 했어.”
그때가 이 소설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때였는데.
“너는 나를 기만했어.”
“미안해요….”
그를 사랑했던 만큼 배신감이 해일처럼 덮쳐온다. 모든 걸 쓸어버려야 잠잠해질 듯, 독한 말을 내뱉었다.
“네가 싫어. 미친 듯이 미워.”
아무것도 모르는 로한이, 그의 존재만으로 이 소설을 비틀었다고 생각했을 때도, 그리 벌을 주고 싶었는데.
어떻게 그토록 아끼던 사람이, 알면서도 그녀를 속였던 걸까.
“증오해.”
하지만 아무리 상처를 줘도, 감정을 쏟아부어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찾지 마. 분명히 말했어.”
벨라의 등 뒤로 커다란 날개가 펼쳐졌다. 그는 급하게 벨라의 팔을 잡았다.
“어디 가요. … 가지 마요.”
“이거 놔.”
“사실대로 말했잖아….”
거짓말하면 다시는 안 볼 거라면서.
하지만 벨라는 두 발을 땅에 딛고 천천히 공중으로 날갯짓했다.
그는 울면서 높이 올라가는 벨라를 다시 붙잡으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목소리를 떨었다.
“미안해…. 내가 너무 주제넘었어요.”
그는 그에게 들이닥친 재앙을 받아들였다.
“미워해도 좋으니까…. 옆에만 있어줘요.”
벨라는 오롯이 화만 내고 싶었다. 지금만큼은 저 우는 얼굴에 넘어가고 싶지 않아.
“지금은… 네 꼴도 보기 싫어.”
“그럼 벨라 눈에 안 띌 테니까….”
“…….”
“내가 볼 수 있는 곳에 있어줘.”
“싫어.”
“벨라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 로… 로잔느를 황태자비에 앉힐게.”
벨라는 기가 찬 듯 그를 내려다봤다.
“그러니까 내 옆에 있어줘….
“그럼 네가 로잔느를 사랑할 수 있어?”
키엘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 나락까지 와서 다른 건 다 포기해도,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것.
벨라가 고개를 저으며, 그가 잡고 있던 드레스 부분을 손으로 찢었다.
“그렇게 울어서 날 나쁘게 만들지 마.”
키엘은 이 자리, 이곳에서 그가 들었던 저주가 이제 와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 “언젠가…. 너도 똑같이 돌려받길 바라.”
그는 늘 바보 같다고 생각했던 로잔느보다 자신이 더 바보처럼 느껴졌다.
거절당한 로잔느는 새 인생을 살기 위해 열심이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어서.
“제발 가지 마….”
이대로 정말 멀리 떠나버릴까 봐, 불안한 그는 자신의 가슴을 찢어진 옷으로 감싸며 말했다.
“심장, 내가 가지고 있잖아요.”
마지막으로 목숨을 걸고 협박해 본다.
“지금 떠나면 나 죽을 거야.”
그 말에.
그녀는 싸늘하게 아래를 내려다봤다.
“내가 원하지 않으면, 못 꺼내는 거잖아.”
“그래…. 이것도 결국 네 계략이었구나.”
벨라는 어이없는 웃음만 나왔다.
그 심장을 넣은 사람만 꺼낼 수 있다고 했지.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너는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여태 묶어 왔었구나.
“…역겨워.”
그녀의 손이 그의 가슴을 뚫었다.
이웨르가 넣을 때와 달리, 조금씩 상처를 벌릴 때와 달리.
“흡….”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는 그녀의 손은 그에게 뜯어질 것 같은 고통을 선사한다.
‘가지 마….’
그가 속으로 애타게 부르는 소리는 단 한 마디도 닿지 못한 채, 벨라는 그대로 뒤를 돌아서 하늘을 향해 날았다.
너무 사랑해서 다 가지고 싶었던 그와.
사랑하기에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그녀의 방식은 너무나 달라서.
그날 밤의 달빛은 그들의 엇갈림을 시리도록 비웃었다.
큰소리가 들리고 경비들이 키엘의 방에 들어갔을 때, 창문은 전부 깨진 채 파편으로 남아 있었고 벨라는 그곳에 없었다.
“저… 전하!”
키엘은 벨라에게 이상한 누명이라도 씌워질까 봐 손으로 눈물을 닦고 별거 아니라는 듯 일어섰다.
“괜찮아. 태자비가 잠시 동물왕국에 갔다 와야 한다고 해서.”
“저… 정말로 괜찮으십니까? 피가 나시는데요….”
“괜찮아. 마법 때문에 일어난 상처라. 벨라의 심복인 젠킨스를 불러와.”
“혹시 모르니 리오 프로하 경을 불러오겠습니다.”
잠시 후 리오와 젠킨스는 흡사 전쟁터 같은 황태자의 방을 보고 놀란 기색을 감추기 힘들었다.
“키엘…. 이게 무슨 일이야?”
“세상에. 도련님, 무슨 일이에요?”
모두 나가고 셋만 남자, 키엘은 침대에 앉아 숨을 몰아 내쉬었다.
“벨라가… 심장을 가져갔어.”
“예? 그거 이웨르 씨가 꺼낼 수 있는 거 아니….”
키엘이 가슴을 열어 상처를 보이자, 젠킨스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도련님, 살아계시죠…?”
“…응급 처치 좀 부탁할게.”
리오도 말문을 잃었다.
어느 황태자비가 황태자를 이렇게 상처 입힐 수 있을까.
리오가 치료에 집중하는 동안, 젠킨스는 주위를 둘러보며 계속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아가씬 어디 가셨는데요?”
“…동물왕국에.”
“도련님, 농담할 때가 아닌데요.”
젠킨스는 심각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얼굴은 왜 그렇게 한쪽만 빨개요? 설마 아가씨가 도련님 때린 거예요?”
키엘은 아무 말 없이 침대에 누워 얕은 숨을 헐떡였다.
- “찾지 마. 분명히 말했어.”
마구 헤집고 간 가슴의 상처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아팠다.
“젠 할아버지, 이거 마계의 마력이 들어가서인지 제 치유력이랑 자꾸 상쇄하는데요.”
“그럼 약초를 쓰면요?”
리오는 겨우 정신을 붙잡고 있는 키엘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좋은 약초가 있긴 한데….”
“뭡니까. 황궁에 없으면 제가 구해올게요.”
“… 있어요.”
기억을 희석시키는 약의 주재료였다.
키엘이 과거의 사람을 찾으려고 할 때마다, 로한이 억지로 먹여왔다는 그 약.
그때마다 악몽을 꿨던 걸로 알고 있어, 될 수 있으면 쓰고 싶지 않았는데.
리오는 속으로 그에게 사과하며 주군을 살리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여름 축제 기간 동안, 키엘은 그 방에서 나갈 수 없었다.
약 기운에 취한 채 잠이 들었고.
늘 그의 인생이 그러하듯, 시간은 키엘의 편이 아니었기에.
눈을 뜨면 아파할 시간도 주지 않고 벨라가 해야 할 일까지 떠맡았다.
“벨라 님은 정말 마계로 가신 거야?”
갑자기 할 일이 늘어난 리오가 걱정되어 묻지만, 키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여름 축제의 끝을 알리는 불꽃놀이가 보였다. 그는 전해주지 못한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또 하루를 기다렸다.
벨라가 동물왕국으로 잠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황궁에 퍼졌다.
다들 키엘을 걱정하는 듯 물었지만, 그때마다 그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결혼했는데 친정에 갔다 오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는가.”
하지만 다들 이상하게 생각했다. 무도회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고, 첫날밤을 치른 후 갑자기 사라지는 황태자비라니.
특히 슈리아는 서운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저희 집도 친정입니다만….”
일주일이 지나고.
황궁에 낙동강 오리알처럼 벨라가 없는 그녀의 방을 지키던 마족들이 입을 떼기 시작했다.
“첫날밤 치르기 싫어서 도망간 거 아니예용?”
“그날을 위해 여태 도련님 키운 거 아닌가. 그럴 리가.”
키엘의 가슴에 난 상처를 모르는 이들은, 어딘가 숨어서 안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아직 심장이 그에게 있는 줄 알고.
진실을 아는 젠킨스는 입을 굳게 다문 채 혼자 생각했다.
“…반려로 만들기 싫어서 그런 걸까요?”
“맞아! 아가씨 반려는 내가 할 거야!”
“푸르, 네가 될 바에야 내가 되는 게 낫다.”
또 한 번의 일주일이 지난다.
벨라가 없는 자리를 메꾸기 위해 리오와 리네가 다시 그녀의 업무를 도맡았다.
그녀가 황태자비가 되고 몇 달간은 정말 편했는데. 과로사할 것 같은 순간이 다시 찾아오자, 리네가 한숨을 내쉬며 되물었다.
“벨라 님, 오시긴 오시는 거지?”
“…….”
“말 좀 해봐. 벨라 님이 마계로 돌아간 거 아니라면서.”
“잠시 어딜 갔다 오는 것뿐이야.”
“그래서 언제 오시는데?”
키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만 꿀꺽 삼킬 뿐이었다.
리오는 키엘이 아슬아슬하게 숨을 쉬는 걸 보고, 리네를 말렸다.
“알아서 오시겠지. 키엘이 치료한다고 그 약을 써서, 기억을 잘 못 할 거야. 그만 물어.”
“물어볼 수도 있지, 뭘 그렇게 핀잔하고 난리야.”
그는 책상에 앉아 늘 벨라가 고양이로 앉아있던 자리를 쳐다봤다.
- “찾지 마.”
지금 당장 황궁을 나가 찾고 싶지만. 찾으면 다시는 그를 안 볼 것만 같았다.
- “지금은… 네 꼴도 보기 싫어.”
‘지금은’이라고 했으니, 돌아올지도 몰라.
그러니 그 단 세 글자에 희망을 걸었다.
‘보고 싶어….’
그는 허공에 고양이가 있던 자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보이지 않는 고양이에게 깃털 펜을 살랑살랑 흔들어도 보고.
‘돌아올 거죠…?’
그 마음으로 또 하루를 버텼다.
늘 그렇듯 버틸 수 있는 만큼만.
딱 하루만 더. 어쩌면 내일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 * *
벨라가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난 적은 많았지만, 인간계에서는 처음이었다.
밤을 장식하는 무수히 아름다운 불빛을 스쳐 지나가며, 벨라는 황궁에서, 수도에서 점점 멀어졌다.
지칠 때까지 하늘을 날고.
땅에 발이 닿으면 쓰러질 때까지 걸었다.
그녀의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른 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뭐라도 하나 박살을 낼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키엘의 목소리가 들리면.
- “그 소설 대로 되길 원하는 것 같아서….”
벨라는 자신의 귀를 뜯기라도 할 기세로 잡아당겼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그 소설대로 갈 수가 없었어.”
하지만 자꾸 생각은 밀려오고, 제 화를 견디지 못하는 벨라는 숲속으로 가 짐승들을 산 채로 잡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얼굴이 후끈해지는데도.
- “미워해도 좋으니까…. 옆에만 있어줘요.”
미워하고 싶고, 또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아아악!”
누군가 그랬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꽃을 꺾고, 사랑하는 사람은 꽃에 물을 준다고.
그 노트를 보고 소설대로 가길 원하고, 원작대로 가길 원한다는 걸 알았더라면.
그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라면.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았을 텐데.
‘사랑한다’는 말로 억압하고, 구속하고, 집착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몇 번의 달이 뜨고, 해가 뜨는 동안.
벨라는 그녀의 마음이 하나로 정해지길 바랐다.
차라리 그 모든 걸 감싸 안을 만큼 사랑만 남거나.
그를 죽여야 마음이 풀릴 것 같은 증오가 남기를.
* * *
여름이 끝나갈 때 떠났던 사람은, 가을이 오고 추수제가 될 때까지 끝내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황태자비의 부재를 보고 ‘제국에 망조가 들었다.’며 걱정했다.
악재가 겹쳐 황제 라리에트까지 몸져누웠고.
벨라가 헤집어 놓고 간 키엘의 상처는 아무리 약초를 발라도 낫지 않았다.
“도련님. 아가씨가 돌아오신다고 한 거 맞아요?”
젠킨스는 사주에도 없는 일복에 밀려 쏟아지는 코피를 막으며 키엘에게 물었다.
그간 무전도 여러 번 시도했지만, 벨라는 무전기를 들고 가지 않았는지 받지 않았다.
“어디 사고 치고 도망간 거 아니에요?”
젠킨스는 계속 침묵으로 일관하는 키엘이 가여워 보였다.
“도련님, 옛날얘기 해드릴까요?”
“…….”
“아주 먼 옛날. 화국 근처에 열 살짜리 꼬마가 살고 있었어요.”
키엘이 듣겠다고 하지 않았지만, 젠킨스는 말을 이어나갔다.
“꼬마는 그리 가난하지도, 부유하지도 않은 집에 태어나서 평범하게 살았답니다.”
젠킨스가 몸을 고쳐 앉더니 본격적으로 얘기했다.
“그런데 어느 날. 꼬마의 아버지가 병을 얻는 바람에 시름시름 앓고 있었어요.”
“그래서 꼬마가 약을 구해 다 줬어?”
“꼬마는 낮 동안 신문을 배달하며 아버지의 약값을 구했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간호했어요.”
“약값이 모자랐구나.”
“중간에 끊지 마세요, 도련님….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상하더라고요.”
젠킨스는 키엘의 눈치를 보며, 그의 침대에 가서 살포시 누웠다.
“항상 아버지의 방에 가면 아버지가 이렇게 누워있고, 어머니는 이렇게 그를 안고 있었어요.”
“…….”
“처음에는 몰랐는데, 며칠이 지나 썩은 내가 나기 시작하더군요.”
키엘이 조용히 눈을 올려 젠킨스를 쳐다봤다.
“아버지는 죽은 지 오래였고, 어머니는 그 후로 미쳐 있었어요.”
“안 됐네.”
“정말 안 된 건 그다음입니다. 꼬마는 이상하다 생각해서, 넋이 나간 어머니를 깨웠어요.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야 하니까. 그때 꼬마가 뭘 봤는지 맞혀 보실래요?”
“아버지가 되살아났어?”
“그런 거면 좋았을 텐데. 꼬마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먹는 걸 봤어요.”
키엘은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벨라가 들려주던 옛날이야기는 어처구니없어도 행복하게 끝나던데.
젠킨스는 그런 키엘을 보며 덤덤하게 덧붙였다.
“그게 마족이에요, 도련님.”
“…….”
“그러니까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열 살짜리 꼬마가 젠킨스구나. 분명 어머니가 마족이라고 했었지.
키엘은 가슴팍의 옷깃을 잡으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벨라가…. 날 해칠 리 없잖아.”
젠킨스는 쭉 고민했다.
벨라가 인간계를 침략할 때, 그는 어느 편에 서야 할지.
그의 반은 마족이지만, 그의 반은 인간이기에.
그를 인정해주는 마왕도 좋지만.
역시 짧은 인생이라도 살기 위해 발버둥 치며 희망을 좇아가는 인간도 좋았다.
“아가씨는 도련님을 이용하려고 여기 있는 거예요.”
“이용?”
“인간계를 침략하려고요. 아가씨가 그렇게 말했어요.”
키엘에게 상처가 될지라도, 이 진실을 받아들이면.
적어도 저렇게 벨라가 언제 올지 몰라 조마조마하지는 않겠지.
적당히 마음을 주고, 적당히 사랑하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키엘은 젠킨스의 말을 듣자마자 씁쓸하게 웃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
그렇다면 이리도 밀어내지 않을 테니까.
그날 밤은 비가 왔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고양이의 발소리와도 같았고.
키엘이 살며시 눈을 떴을 때, 그는 계속 꿈에 그리던 벨라의 얼굴을 보았다.
“…벨라?”
벨라는 웃으면서 침대에 팔을 괸 채 그를 보고 웃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어딘가 또 떠날 것만 같아서, 일어서서 손을 뻗었다.
“아….”
하지만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르는 새에, 벨라의 발걸음이 도착한 곳은 저택이 있는 시골. 알로하였다.
[알로하에서 제일 큰 여관! 샤워실 구비!]
귀소본능이라도 있는 걸까. 어떻게 이곳에 온 건지.
“…잔바르 그 자식은 진짜 바본가.”
발 닿는 데로 왔더니 이곳이건만.
벨라는 본능처럼 터벅터벅 저택으로 걸어갔다.
거미줄이 쳐지고 먼지가 가득한 그곳은, 처음 그 집을 살 때보다 더 을씨년스러웠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곳에서 벨라는 가볍게 씻고 서재로 향했다.
혹시나 해서 금고를 봤지만. 역시나 금고는 열려 있었고, 그 안에 있어야 할 벨라의 노트는 없었다.
“…….”
얼마나 오랜 시간을 떠돌아다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 오랜만에 침대 위에서 자려고 했는데.
“아…. 이거도 다 치웠었지.”
벨라의 방도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뒤를 돌아섰다. 바로 맞은 편에 있는 저 방은, 키엘의 방인데.
저 문을 열면 먼지가 쌓여 있더라도 푹신한 침대가 있다는 걸 알지만.
차마 열 수가 없었다.
키엘이 떠났던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쭉.
점점 목이 메어왔다.
이 문 너머에는, 이런 미래는 아무것도 모르던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벨라가 작은 인형들로 공주님과 왕자님을 만들어 이야기를 만들어가면.
키엘은 손가락으로 벨라의 손을 꾹 누르곤 했다.
동화를 읽어주다 함께 잠이 들면, 가끔 젠킨스가 와서 혀를 차고 이불을 덮어주었고.
아침에 일어나면 자는 키엘의 볼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그를 깨웠다.
푸르는 늘 문을 쾅 열며 청소하겠다고 눈에 불을 켰고.
이웨르는 아직 어려서 아쉽다며 상상의 나래를 미루었고.
잔바르는 불평만 하다 키엘이 칭찬 한 번 해주면 좋아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아무것도 모르던 때로. 너무 그립고 그리웠던 그때로.
그러니 이 문을 열 수 없었다. 그 추억만큼은 아름답게 남아 있어야 하니까.
한번 깨진 유리는, 아무리 도로 붙여도 금이 남아 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다.
그저 이 모든 게 그녀의 욕심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고, 로한 때문에 틀어진 거로 생각할 때가 나았다.
네 마음을 받아들이고, 네 생을 함께하다, 네 이야기의 막이 내리면.
나는 커튼 뒤에서 무대 위의 영광을 곱씹으며, 존재하지 않는 너를 한없이 그리워하다 원망하겠지.
이제 너를 볼 때마다 네가 한 일이 떠오를 테고.
내가 겪어야 할 시간이 겁이 나겠지.
* * *
어느덧 추수제를 앞두고, 황궁에서는 사냥대회가 열렸다.
“우리 아가씨가 이런 거 좋아할 텐데!”
잔바르는 말로만 아쉬워하며 한껏 들뜬 채 푸르와 함께 주먹다짐했다.
“잔바르 님! 저랑 내기해요!”
“누가 더 많이 잡나!”
젠킨스가 신이 나서 온 산의 생명체를 다 죽일 것 같은 두 마족을 중재했다.
“사냥감은 한 마리로 제한해뒀어요. 누가 더 큰 걸 잡나, 내기하시죠.”
“와아!”
신이 난 그들과 달리, 키엘은 말에 올라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도련님, 왜 그래요?”
“아…. 아냐.”
벨라의 환영이 또 보였다.
크루엘가로 향할 때 함께 말을 탔을 때처럼 그의 앞에 앉아 있었다.
이렇게 뜬금없이 나타나서 잠깐 좋았다가.
- “… 역겨워.”
착각하지 마라며 심장을 후벼 팠다.
“전하. 괜찮으시겠습니까?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
안색이 좋지 않은 건 로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황태자비가 동물왕국에 가지 않았을 거라 단언했다.
그게 아니라면 두 달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을 리가 없잖나.
키엘이 인정하고 빨리 새로 황태자비를 들이기만을 기다렸다만, 그는 벨라가 곧 돌아올 거라는 말만 미친 것처럼 중얼거렸다.
무슨 황족들은 병자만 있는 건지. 황제는 몸져누웠고. 황태자는 때때로 넋이 나간 듯 지쳐 보였다.
이럴 거면 그냥 벨라가 황태자비가 되어도 좋으니, 빨리 돌아와 제국이 제대로 굴러가는 게 나을 듯싶었다.
그렇게 시작된 사냥대회에서, 키엘은 쌍둥이들의 호위를 받으며 정처 없이 말을 타고 걸었다.
“… 아무래도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데나 가는 거 같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가 뭐 하나라도 잡아와야 하나.”
이대로 가다가는 황태자가 사냥감 하나 얻은 것 없이 사냥대회가 끝날 게 뻔했다.
“리오. 내가 잡아 올 테니까 키엘 잘 보고 있어.”
“응.”
리오가 한참 동안 키엘의 뒤를 따라가다가, 산기슭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는 낯익은 분홍색 머리가 수풀에서 움직이는 걸 보았다.
“… 로잔느?”
“리오!”
“여기서 뭐 해?”
“염색을 좀 해보려고…. 꽃을 구해보려다가….”
벨라가 떠나고, 로잔느는 꽤 많은 여유시간을 옷 만드는 데 쏟았다.
처음에는 드레스를 조금 더 편하게 만들겠다고 했지만, 편하면서 화려한 드레스는 좀처럼 만들기 힘들었다.
최근 들어서 원단을 염색하면서 단점을 보완할 수 있을 거 같다더니.
이런 곳에서 직접 재료를 공수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 꽃이야 사면 되지.”
“하하…. 꽃도 비싸서….”
따지고 보면 로잔느의 개인적인 용무라 황궁의 예산을 쓸 수도 없어, 개인 경비로 여태 충당했었다.
“오늘 여기서 사냥대회가 열리는데. 몰랐어?”
“그게 오늘이야?”
리오는 한숨을 내쉬며 말에서 내려 로잔느의 손을 잡았다.
“일단 사냥대회가 끝날 때까지….”
그러다 리오는 불안한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리오는 가끔 키엘이 여자에 빠져 제대로 일을 못 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런 걱정을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키… 키엘?”
키엘의 호위는 그렇게 주군을 놓쳤다.
그때 키엘은 주변을 생각할 기운이 없었다. 잠깐씩 벨라의 환영과 환청이 반복되어 그를 지배하는 바람에.
‘…미치겠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하지만, 자꾸 속이 쓰려 왔다.
그때였다.
쾅!
멀리서 크게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타고 있던 말은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랐는지, 히힝 하며 앞발을 치켜들었다.
평소라면 고삐를 잡아 진정시켰겠지만, 그럴 힘도 없는 키엘은 그대로 말에서 떨어졌다.
“…아.”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하필 떨어져도 비탈로 굴러 내려갔다.
꽤 큰 바위에 부딪히고 그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벨라는 결국 저택을 나와 마을로 다시 돌아갔다.
‘여관으로 가던가 해야겠다.’
그러다 불현듯, 처음 보는 집을 보고 멍하게 쳐다보았다.
[브웬의 당근 왕국]
브웬 이 자식, 어릴 때도 당근만 한 바구니씩 주더니 결국 당근에 미쳤나 봐.
벨라가 문을 열자, 꽤 건장한 청년으로 자란 브웬이 뒤를 돌아봤다.
“저희 오늘 영업 끝….”
브웬은 토끼 눈을 하고 눈을 깜빡였다.
“베… 벨라?”
그러자 옆에서 바느질하고 있던 어여쁜 부인이 고개를 들어 벨라를 쳐다봤다.
“…어머?”
“배고프니까 먹을 거 좀 줄래? 돈은….”
벨라는 끼고 있던 팔찌를 벗어 식탁 위에 올렸다.
“이걸로 대신할게.”
“어, 어….”
어안이 벙벙한 브웬은 뭘 준비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당근 케이크를 가지고 왔다.
‘…밥 달랬지, 당근 달랬니.’
벨라는 그동안 잘 지냈는지, 안부를 물었다.
브웬은 벨라가 마을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옆의 사람과 운명처럼 만나 결혼을 했다고 한다.
소소하지만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어 보였다.
“저기, 사람들이 널 많이 찾았어. 알아?”
“왜?”
“그… 그건 모르겠는데. 저기, 혹시 키엘은 만났어?”
벨라는 따뜻한 차를 손에 들었다가 입에 대지 않고 가만히 멈추었다.
“…키엘도 널 찾았어.”
그때 옆에 있던 부인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탁 치며 말했다.
“그 잘생긴 청년?”
“응.”
“난 그 청년 딱 한 번 봤는데도 잊히지 않더라니까요.”
“잘생겨서?”
브웬은 자존심이라도 상하는 듯 자신의 부인을 노려봤다.
“아니. 그때 너무 힘들어 보여서. 그렇지, 여보?”
벨라는 시선을 내려 차의 표면이 흔들리는 걸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 * *
키엘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차가운 밤이었다.
어깨가 탈골되었는지, 움직여지지 않았고. 다리가 부어올라 걸을 때마다 통증이 그를 감쌌다.
눈앞에 작은 동굴이 보여 그리로 일단 몸을 피했다.
지친 채 차가운 바닥 위에서 잠을 청한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떴다 감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낮과 밤이 바뀐 것 같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죽음의 냄새였다.
온몸을 뜨겁게 달구는 열이 내리자, 그는 천천히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시간이 돌아가기 전에는 이런 고비마다 신성력이 발휘되어 그를 살리곤 했는데.
이제 그 힘이 없으니, 이대로 가면 영원히 눈을 감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또 벨라의 환영이 말을 하며 그에게 걸어왔다.
마치 그의 마지막을 지켜주기라도 하는 듯 나타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옷을 입고, 기억에도 없는 말을 한다.
“왜 이러고 있어.”
이건 환영일까, 실제일까.
그는 여태 환영에게 말을 걸지 않았지만,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는 마지막으로 말을 걸었다.
“… 벨라예요?”
“…응.”
그는 잠깐 동굴 밖의 달빛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벨라에게로 눈을 향했다.
환영은 어느새 딱 손이 닿을만한 거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환영에게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숨소리가 그에게 들리는 것 같았다.
“어떻게….”
“네 피 냄새로 찾아왔어.”
그 말에 키엘은 신음하며 얕게 미소 지었다.
‘내가 아파서 온 거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빨리 목숨을 궁지로 몰 걸 그랬다.
그는 더 말할 힘이 없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일부러 이런 거야?”
마지막 숨을 내쉬기 전에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 네가 이러는 거 싫어.”
그러나 그녀의 말에, 그의 손은 벨라의 바로 앞에서 멈췄다.
그제야 키엘은 왜 그녀가 그토록 그녀의 마음을 회피했는지 이해했다.
그저 알고 싶지 않았던 거였다.
이게 환영이라면,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는 그를 찾아오지 않은 거고.
이게 실제라면, 마지막 순간까지 너무 가혹하니까.
‘이젠 지쳤어….’
어떤 걸 선택해도 절망일 것만 같아 그저 손을 내렸다.
그러니 이대로 진실을 다 덮어둔 채,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냥 이제 편해지고 싶어….’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다시 눈을 뜨지 않길 바라며 그는 고개를 떨궜다.
따뜻한 차를 마셔도, 속은 따뜻해지지 않았다.
“우리 집 당근 케이크는 일품이에요. 드셔 봐요.”
브웬의 부인, 헤라가 벨라에게 케이크를 내밀었다.
오랜만에 먹는 익숙한 맛이-질렸던 맛이지만-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키엘은 만났어?”
“…만났어.”
“그래? 다행이다. 난 결혼해서 행복한 삶을 사는데, 키엘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좀 안쓰러웠거든.”
“…….”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진짜 너무 위태로워 보여서 걱정이 많이 됐었어.”
헤라는 브웬을 넌지시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내 남편은 오지랖도 넓어. 첫사랑 라이벌을 그렇게 신경 쓰는 건 처음 봤네.”
첫사랑?
그 말에 벨라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가 헤라와 눈이 마주쳤다.
“어머, 몰랐어요? 이이의 첫사랑이 아가씨래요.”
“…뭐?”
벨라가 너무 황당해하자, 헤라도 브웬의 눈치를 봤다.
“이… 이 아가씨 아니었어? 그 잘생긴 청년이 좋아한다는 아가씨가, 당신 첫사랑이라며?”
“어… 맞긴 하는데….”
“그럼 잘생긴 청년이 좋아하는 사람을 찾는 게 아니었어?”
“저기, 벨라. 혹시 잘 데 없으면 빈방 있으니까 거기서 자고 가도 돼. 우, 우린 늦었으니까 먼저 올라갈게.”
브웬이 헤라의 옆구리를 찌르더니 헤라의 팔을 끌어당겼다.
벨라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생긴 청년이 좋아한다는 아가씨….’
키엘 이야기하는 게 맞을까.
“아이참, 내가 못 할 말 한 것도 아니고.”
“여보가 못 할 말 했어….”
두 사람이 서로 투덕거리며 올라가는 걸 보고 벨라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부럽네.’
한때는 그녀도 저런 걸 꿈꿨었다.
키엘을 황궁에 보내지 않고, 그녀 옆에 두고 싶었던 적이.
그래서 그가 성물 여행을 하기 전에 황궁 앞을 서성이며 혹 소설이 바뀌진 않을까 기대도 해봤었다.
하지만 소설은 원작대로 흘러가는 듯 보였고.
실망감을 가득 안고 다시 돌아간 마계는, 오히려 소설이 원작대로 가길 다행이라는 생각을 안겨주었다.
그곳은 그녀가 남은 일생을 감당할 만한 곳이 아니었기에.
눈을 감으면 마계에서 늘 듣던 비명과 역겨운 냄새가 코 밑에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브웬이 다시 내려왔다.
“저… 저기.”
벨라는 애써 부정적인 마음을 억누르려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내가 네 첫사랑이었어?”
“하하…. 몰랐구나. 하긴….”
“하긴?”
“그때 너 좋아하는 애들 많았어. 네가… 워낙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서 그렇지.”
벨라는 눈썹을 살짝 올렸다.
“꼬맹이들이 예쁜 건 알았나 보네.”
“그런 거도 있긴 한데…. 키엘이 워낙 막아서서.”
“…키엘이 뭘 막아?”
브웬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너한테 말 한마디 걸고 싶으면 자기랑 대련해서 이기라고 했거든.”
“…하하.”
“너랑 조금 친하다 싶으면 가서 무섭게 노려보기도 하고.”
…키엘이?
“예전에 내가 너한테 잘 보이려고 이것저것 갖다줬잖아.”
그랬었나.
“내가 나중에 레스토랑 만들 거라고 주는 거라며, 키엘이 몰래 소문을 퍼트렸다니까.”
벨라는 조금 어이가 없어 건성으로 웃었다.
어릴 때부터 영악한 건 눈치챘었는데. 브웬이 말하는 키엘은, 그녀가 모르는 키엘의 모습이었다.
그는 민망한 듯 뒤통수를 만지작거렸다.
“키엘은 잘 지내? 만났다면서.”
벨라는 마지막으로 본 키엘을 떠올렸다.
- “제발 가지 마….”
그녀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어졌다. 억지로 웃는 것도 힘이 들었다.
“잘 지냈어.”
그런데 이제 잘 지내지 않을 것 같아.
- “역겨워.”
내가 너무 모질게 대했거든.
브웬은 벨라의 달라진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채 괜히 오지랖을 부렸다.
“그럼 이제 두 사람의 결혼 소식만 기다리면 되나?”
불난데 부채질을 하는 거야 뭐야.
“웨딩 케이크는 내가 만들어줄게. 몇 번 납품한 적도 있어.”
뭐가 그렇게 신이 날까. 벨라가 빤히 쳐다보자, 브웬이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정말 다행이야. 키엘이 널 찾는 걸 비밀로 해달라길래,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거든.”
“그게 언젠데?”
“음. 그게 4년 전이지, 아마?”
그가 성물을 모으기 위해 여행을 떠날 때였다.
“그때부터 찾아다녔구나.”
다들 덤덤하게 말하길래, 우연히 키엘이 이웨르의 묘약을 발견한 건 줄 알았는데.
“도대체 언제부터 일을 꾸민 거야….”
벨라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리고, 브웬은 그제야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구나 직감했다. 그는 오랜 친우를 위해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
“저기. 난 사실 키엘이 날 방해해서 마음에 안 들었는데.”
벨라는 브웬을 빤히 쳐다봤다.
이 상황에서도 키엘 욕은 듣기가 싫었다.
‘키엘도 너 별로 안 좋아했거든.’
“마지막에 봤을 때는 많이 가여웠어.”
‘우리 키엘이 너한테 동정받을 만큼 불쌍한 건 아닌데….’
“나도 나이가 들어보니 알겠더라고.”
전생의 경험치까지 따지면 벨라가 나이가 많아도 훨씬 많았다.
“혹시나 네가 나를 좋아할까 봐 거짓말까지 하길래.”
“…….”
“어릴 때는 애가 음침하고 우울해서 왜 저러나 싶었는데.”
벨라는 속으로만 생각하던 걸 내뱉었다.
“키엘이 뭐가 음침하고 우울해? 음침한 건 잔바르지.”
“뭐…. 어쨌든.”
브웬은 그를 노려보는 벨라의 시선을 살짝 회피하며 말을 끝맺었다.
“네가 없으면 인생이 끝날 거로 생각한 거 같아.”
“내가 키엘 인생 전부가 아니잖아. 그저 여자란 나밖에 없어서 착각…“
“그래…. 그렇게 말하더라, 키엘도.”
“…….”
“너라면 그렇게 자기를 거절할 거라고.”
벨라는 입술을 깨물고 브웬의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널 만나게 되면, 키엘이 잃어버린 누이를 찾고 있다고 하랬어.”
그녀의 선택이 올바르지 않았다고 꾸지람 듣고 싶지 않았다. 특히 이미 행복을 꾸린 사람에게서는 더더욱.
한참 말이 없다 일어섰다.
“나 갈게.”
“이 밤에 나가게? 요새 많이 흉흉해. 그냥 자고 가도 돼.”
“괜찮아.”
하지만 브웬은 문 앞으로 달려가, 나가려던 벨라의 앞을 막아섰다.
“요새 산짐승들이 대거 죽기도 하고. 제국이 망할 길이라고 다들 몸 사리고 있어.”
그 산짐승들이 죽는다는 건, 아무래도 벨라 때문인 거 같은데.
“괜찮대도.”
“정말이라니까. 제국이 저주받았다잖아.”
“제국이 왜 저주를 받아?”
브웬은 아무것도 모르는 벨라를 보고 오히려 의아한 듯 물었다.
“너 신문 안 봐? 황제는 드러누웠고, 황태자는 실종됐다잖아.”
“…뭐?”
“전부 황태자비가 이세계로 간 사이에 일어난 일이래.”
브웬이 턱으로 식탁을 가리키자, 벨라는 뒤를 돌아 신문을 펼쳤다.
[제국에 망조가 든 것일까? 사냥대회에 나갔던 황태자 실종]
‘…이게 무슨 일이야. 실종이라니.’
혹시 그녀를 찾으러 황궁에서 빠져나온 걸까.
“그래서 제국이 망하는 길 아니냐는 소리가….”
“잠깐만. 오늘이 며칠이야?”
“너 달력도 안 보는구나. 10월 28일.”
벨라는 손으로 신문의 끝을 구겼다.
그렇다면 키엘이 실종된 건 3일 전이라는 건데.
분명 황궁에서 나올 때는 8월 말이었고. 그녀가 여기까지 오는 데 겨우 2주 정도 시간이 지났다 생각했다.
마족들간의 약속이 깨지면 그에 걸맞은 불이익이 찾아온다.
이웨르와 한 서약, 키엘의 동의 없이 심장을 꺼내지 않겠다는 걸 벨라가 깨버려서.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형벌로 돌아온 게 아닐까.
이성을 놓아버리는 것으로.
“나… 지금 가야 돼.”
* * *
벨라가 황궁으로 돌아가는 데는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예전에 고양이로 뛰어가던 때보다 훨씬 빠를 수밖에 없었다.
날개를 펼치고 하루를 꼬박 날았으니.
낮에 그녀를 본 사람들이 ‘마족이다.’라며 난리가 났지만, 그런 건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도 키엘이 여태 벨라를 속였다고 생각하면 화가 난다.
너무 화가 나서 그가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제발….’
걱정이 그 모든 걸 덮는다. 실종인 걸까. 가출인 걸까.
- “미워해도 좋으니까…. 옆에만 있어 줘요.”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고 눈물을 삼켰다.
- “지금은… 네 꼴도 보기 싫어.”
지금 당장 보고 싶어.
그리고 벨라가 황궁에 도착했을 때.
황궁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녀의 검은 날개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로… 로한 님, 저거 마족….”
“무슨 소린가. 동물왕국에서 왔으니 날개 정돈 있으시겠지.”
황태자의 실종으로 제국이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그녀를 제일 반긴 건 로한이었다.
벨라는 로한을 보고 조금 의아했지만, 먼저 키엘에 대해 물었다.
“키엘은 어딨어?”
“사냥대회에 나갔다가 실종됐습니다. 수도 인근에 있는 숲인데, 샅샅이 수색하고 있지만, 아직 찾지 못했어요.”
“…황태자 호위를 어떻게 하는 거야.”
“그러는 당신은 왜 이제 왔습니까.”
벨라는 당장 문책하고 싶었지만, 급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숲이 어디라고?”
벨라는 로한이 해준 말을 토대로 숲 위를 날았다.
분명 키엘의 말이 혼자 숲에 있었다고 했지.
‘어딘가 떠날 생각이었다면, 말을 타고 갔을 거야.’
이 첩첩산중에 말도 없이 빠져나가기란 힘들 테니까.
그렇다면 낙마하고 어딘가에 떨어진 거라는 건데.
‘사람들이 수색할 만한 데는 결국 사람이 다니는 길일 테니.’
아직 발길이 닿지 않은 곳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전생이었다면, 산 밑에서부터 수색대를 꾸려 좁혀가며 찾아봤겠지만.
벨라는 조용히 눈을 감고 피 냄새를 따라갔다.
따라간 곳에는 산짐승이 있기도 했고.
토끼 같은 작은 생물이 화살에 맞은 채 쓰러져 있기도 했다.
그렇게 코끝에서 나는 감각이 그녀를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다가.
입구가 작은 동굴 안에서 진하게 느껴지는 그의 향기를 느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금색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벨라는 처음 키엘을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이 거대한 해일을 일으킨 나비의 날개는 짓이겨진 채 쓰러져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이 먼저여야 하는데.
“…일부러 이런 거야?”
천천히 다가가 얼마나 다쳤는지 보는 것도, 마음이 쓰라렸다.
- “네가 없으면 인생이 끝날 거로 생각한 거 같아.”
벨라는 차분히 그의 온몸을 눈으로 살폈다.
어디든 만지면 너무 아플 것 같아, 건드릴 수도 없었다.
말라붙은 핏자국이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지치게 한다.
“나 네가 이러는 거 싫어.”
그녀를 붙잡기 위해 이런 짓까지 해야 했던 걸까.
그럼에도 미워할 수가 없다.
너는 왜 나를 이렇게 망가뜨려 놓고….
왜 자꾸 내 삶의 이유가 되게 하는 거야.
그의 맑고 빛나던 눈은 어느새 빛을 잃고 눈을 감았다.
툭.
그의 손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지고, 벨라는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키엘?”
덜컥 겁이 난다.
“…눈떠봐.”
이대로 잠들지 마.
- “나 네가 이러는 거 싫어.”
그 말을 기억하고 잠들지 마.
축 늘어진 그를 조심스럽게 안고, 벨라는 참았던 눈물을 내쉬는 숨과 함께 펑펑 쏟아냈다.
그의 약하고 얕은 숨이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빨리 치료해야 해….’
천천히 그를 들어 황궁으로 향했다.
그때 모두 각자의 수색 범위 내에서 황태자를 찾던 사람들은, 그 숲에서 달빛을 등에 진 검은 날개를 일제히 봤다.
그녀는 그들이 잃어버린 황태자를 품에 안고 하늘을 가로지르고 나타났다.
“…전하!”
“빨리 치료사부터 불러.”
벨라는 그를 침대에 눕히고 치료사들이 와서 치료하는 동안 그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출혈이 심하진 않아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전하의 회복력이 좋은 편이에요.”
벨라는 그의 손을 놓지 않고 리오의 설명을 들었다.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면 될 거 같은데, 당분간은 무리하지 말고 푹 쉬어야 할 거예요.”
“그럼 이제 괜찮은 거야?”
“일단…. 기다려봐야 합니다.”
벨라가 입술을 깨물고 다시 키엘의 얼굴을 바라봤다. 눈물 자국이 선명하게 있는 뺨을 닦아주며 초조한 마음을 달랬다.
“…난 여기 있을게. 다 나가 봐.”
모두 나가고, 호위인 리네와 리오만 남아 있었다.
둘은 서로 눈치를 보며 네가 얘기하라며 옆구리를 찔렀다.
“벨라 님…. 따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뭔데.”
이 일에 조금 더 책임이 많은 리오가 천천히 키엘에게 다가가, 그의 가슴의 옷자락을 열어 보였다.
“벨라 님이 심장을 가져가신 후부터…. 여기는 낫지 않아요.”
억지로 가져간 심장의 상처에서 마계의 마력이 그 안에 가득 차 있는 게 느껴졌다.
그때 리네가 조심스럽게 벨라에게 물었다.
“젠 할배가 마왕님 피를 먹이면 괜찮을 거 같다고 하던데….”
그 말을 듣자마자, 벨라는 손톱을 길게 세우고 손바닥에 깊은 상처를 낸다.
그녀의 피가 한 방울씩 그의 목을 지나갈 때마다, 벨라는 상처 부근의 마력이 점점 그의 안으로 들어가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숨소리가 미세하지만, 차츰 힘을 얻어간다.
“효과가 있나 봐요.”
“그런데 반 이상은 다 흘리네.”
쌍둥이들은 키엘의 입가를 닦아주며 벨라의 눈치를 봤다.
이웨르의 묘약에 쓸 피를 뽑듯 뽑아주기를 은근히 바라면서.
벨라는 그들의 요구를 눈치채고 키엘의 입에서 손바닥을 떼어냈다.
쌍둥이들은 뒷걸음치며 또 ‘네가 말해’하며 서로의 옆구리를 찌르다가.
벨라가 자신의 입술을 찢어 키엘에게 피를 먹이는 걸 보고 빠르게 방을 나갔다.
“…흘리는 거에 의의를 두셨네.”
“그러게. 많이 필요하다고 한 거였는데….”
벨라는 그의 작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따뜻한 숨결에 한없이 눈물이 나왔다.
- “네가 없으면 인생이 끝날 거로 생각한 거 같아.”
그건 나도 똑같았더라고.
단지 이 소설의 남자주인공이라서, 그가 행복하길 바란 게 아니라는 걸.
이 작은 한숨이 얼마나 소중하고 따뜻한지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 * *
벨라가 그에게 꼬박 밤을 새우면서 그녀의 피를 전해 주던 그날 밤.
황궁과 수도에는 하늘을 나는 벨라를 본 사람들의 증언이 쏟아져 나왔다.
수도의 한 술집에서는 목격담을 안주 삼아 결론도 나오지 않을 추측이 오고 갔다.
“동물왕국에서 왔다니까, 원래 까마귀 같은 거 아닐까?”
“까마귀치고는 큰데…. 독수리인가?”
그렇다면 크루엘가에 양녀로 들어간 것도 얼추 이해가 된다. 크루엘가 문장의 상징이 독수리니까.
그때 옆 테이블에서 홀로 술을 마시고 있던 후드를 뒤집어쓴 청년이 폭소를 자아냈다.
“푸하하. 딱 봐도 마족이지 않은가.”
그 말에 술집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싸해졌다.
대부분이, 분명 검은 날개를 보고 ‘마족’을 떠올렸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달밤에 황태자를 안고 달려가는 모습은 그런 흉측한 종족이 할 행동처럼 보이지 않아서.
“정말 마족이라면 황태자 전하를 그렇게 보호할 리가 없잖아.”
“맞아. 말이 심하네. 네놈 메르켄 공작가의 놈이냐?”
아쉽게도 그 말을 한 건, 은빛의 독수리였다.
* * *
키엘이 눈을 떴을 때는, 익숙한 그의 방이 보였다.
여기저기 몸이 쑤시고 아픈데, 이상하게 견딜만했다.
계속 통증이 심하던 가슴도 괜찮은 것 같았다.
‘혹시 내가 죽은 걸까?’
멍하게 침대에서 일어섰는데. 소파에 리네와 리오가 일하다가 잠들어 있는 게 보였다.
설마 죽었는데도 황태자의 업무를 해야 하는 건 아닐 테고.
눈을 감기 전, 벨라를 본 것 같았는데.
그게 꿈인지 생시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손에 만져졌는지 아닌지….
“리오.”
그가 부르는 소리에 리오가 눈을 뜨더니 서둘러 입가의 침을 닦았다.
“리네, 키엘 깨어났어.”
리네도 고개를 들고 손을 흔들었다.
“너 나흘 동안 실종된 거 알아? 너 찾고도 이틀 만에 깨어난 거야.”
“…그래.”
그 많은 업무에 대한 불평이겠거니 싶었다.
족쇄 같은 이 직무를 얼마나 벗어버리고 싶은지.
- “나 네가 이러는 거 싫어.”
하지만 지금은 뭐라도 집중해야, 하루를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천천히 일어서서 책상 앞으로 향했다.
“키엘, 너 쉬어야 해. 조금 더 자둬.”
“…괜찮아.”
“아니야. 너 안 괜찮아.”
그리고 키엘은 의자에서 동그랗게 몸을 말아 자고 있는 검은 고양이를 발견했다.
“……?”
그가 사경을 헤매는 동안, 벨라가 대신 업무를 보느라 계속 그 의자에 앉았었는데.
너무 피곤하면 고양이의 모습으로 단잠에 빠졌었다.
키엘은 많이 당황스러웠다.
여태 고양이 환상은 본 적이 없는데.
그때 벨라가 말소리를 듣고 하품을 크게 하며 책상 밑으로 내려갔다.
키엘은 애써 고양이를 무시하며 책상 위의 서류를 한 장 집었다.
“어차피 일도 밀렸을 거잖….”
그리고 그의 눈앞에서 고양이가 사람으로 변했다.
키엘은 정말 놀랐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두 눈만 크게 뜨고 보고 있었다.
그녀는 키엘이 깨어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사랑해.”
“…….”
키엘은 조용히 서류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리오를 쳐다봤다.
이제껏 벨라의 환상이 그의 일상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고양이의 모습에, 마법까지 쓰고, 갑자기 사랑한다니.
‘내가 드디어 미쳤나 보다.’
그때 리오는 코 밑을 손가락으로 쓱쓱 문지르며 말했다.
“진짜 벨라 님 맞아.”
키엘은 벨라와 리오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 “역겨워.”
벨라는 분명 떠났고.
죽음의 문턱에서 만난 그녀는 그가 싫다고 했다.
아직 머리도 조금 멍한 걸 보니, 아무래도 꿈인 듯싶었다.
“저기. 나는 네가 깨어났다고 알릴게.”
그리고 리오는 벨라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벨라 님, 그리고 다짜고짜 그렇게 말하면 이상하지 않을까요?”
“왜?”
“지금 꿈꾼다 생각할걸요.”
그 말에 벨라는 살며시 키엘의 손을 잡고, 얼떨떨하게 그녀를 보는 키엘의 등을 가볍게 당겨 안았다.
“꿈 아니야.”
쌍둥이들이 나가는 소리가 크게 들릴 때까지, 키엘은 계속 멍하게 서 있었다.
요 이틀간, 그를 간호하면서 그녀는 마음의 정리를 했지만.
키엘에게는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겠지.
마지막에 그녀가 너무 모질게 말했으니까.
“그때 나쁘게 말해서 미안해.”
“…….”
“너무 늦게 돌아와서 미안해.”
그는 그가 제대로 미쳤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너무 현실적인 감각의 꿈이거나.
둘 중 뭐가 되었든, 그는 이 달콤한 안식을 누리고 싶어 벨라를 조심스레 안아봤다.
눈을 감으면 사라질까 봐, 눈물이 점차 앞을 가리는데도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벨라는 그가 떨고 있는 걸 느끼며 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있잖아. 나 아직도 네가 한 행동이 이해는 안 되거든.”
벨라는 그의 가슴을 살짝 밀어내고 키엘을 올려다봤다.
“화도 정말 많이 났는데.”
“…….”
“사랑해.”
그녀는 까치발을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니까 봐준다.”
키엘은 멍하게 벨라를 마주했다.
꿈은 현실을 반영한다는데. 그가 이렇게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었던가.
늘 그가 봤던 벨라의 환영은 그의 기억 속에서 봤던 모습들이었다.
꿈에서조차 늘 멀어지기만 했는데.
“…이거 꿈 아니에요?”
“아니라니까. 바보야.”
벨라가 한 손을 뻗어 키엘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내가… 싫다고 그랬는데.”
이제 다른 한 손으로도 그의 볼을 잡고 양 볼을 쭉 늘렸다. 그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벨라의 손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내가 언제 네가 싫다고 그랬어. 네가… 자학하는 거 싫다고 한 거야.”
“일부러 낙마한 거 아니야….”
벨라는 꼬집었던 손을 풀고, 그의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미안. 내가 오해했네.”
“…진짜 벨라예요?”
“아니. 귀신이야.”
그녀의 입맞춤에, 작은 미소에, 그녀의 장난에 키엘은 점점 그의 앞에 놓인 등대가 허상이 아님을 받아들였다.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면,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을 해야겠지.
“그동안 속여서 미안해요.”
“…….”
“마계에 갔을 때는 벨라가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았어….”
벨라는 조금 더 가까이 그에게 다가갔다.
“이제 쭉 네 옆에 있을 거야.”
그저 이 소설에서 좋아하는 캐릭터일 뿐이었는데.
“사랑해.”
이 마음이 바다처럼 너무 커져 버렸다.
때로는 해일처럼 그녀를 덮치고. 때로는 깊이 빠져 숨을 쉴 수 없지만.
광활한 이 바다는 볼수록 벅차오르고, 사소한 문제는 파도 소리와 함께 쓸려나간다.
그의 숨결이, 그에게서 나는 향기가, 그의 뒤에서 비치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사랑스럽다.
그래서 이 모든 걸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한 번 더 다짐했다.
설령 지옥 같은 생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걸 늘 잊게 하는 네 생과 함께하기로.
영겁 같은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짧지만 너의 생이 너무나도 찬란하고 아름답기에.
벨라의 고백은 키엘에게 방향을 잃은 배를 인도하는 등대처럼 빛을 비췄다.
그의 오랜 염원이 이루어진 거라는 걸.
그는 가까이 다가오는 그녀의 뺨에 살짝 손을 올렸다.
눈물은 짜고, 입술은 달았다.
벨라의 동화처럼, 단 한 번의 입맞춤에 그의 우울했던 저주가 풀린다.
“…나도 사랑해.”
그토록 하고 싶었던 말이라.
“사랑해.”
그는 입술과 입술이 잠깐 떨어지는 순간, 순간마다 대답했다.
그럼에도 벅찬 마음을 더 표현할 길이 없는 그는, 조심스레 그녀의 목에 입을 맞추고. 벨라는 그의 두 번째 단추를 풀었다.
서로 얼굴이 상기된 채 서로의 손길과 숨결을 느끼던 그녀는 키엘을 살짝 올려다봤다.
“키엘….”
벨라가 마왕의 반려가 어떤 건지 속삭여주려고 하는데.
쾅.
노크 소리도 없이 그의 방문이 열리며 이웨르와 젠킨스의 목소리가 키엘을 불렀다.
“도련님!”
어찌나 세게 문을 열었는지.
이게 꿈이라면, 저 소리에 깨어났을 거로 생각할 정도였다.
키엘은 황급히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고, 벨라도 그의 앞에서 뒤돌아 손으로 부채질했다.
“어… 도련님, 괜찮으신가 보네요.”
깨어났다고 해서 안부를 물으러 왔는데. 젠킨스는 눈앞에서 애정행각을 보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 깨어나자마자 하시는 거예용?”
벨라는 이웨르의 말에 손부채질을 멈췄다.
“미, 미친 거 아냐?”
하긴 뭘 해!
벨라가 책상 위에 있는 책을 이웨르에게 집어던졌지만, 이웨르는 날아오는 책을 가볍게 피했고, 뒤에 있던 리네가 대신 맞았다.
“아악!”
이웨르의 눈이 반짝이며, 입가에는 음흉한 미소만 남았다.
“어머! 나는 일하냐고 물어본 건뎅. 왜 이렇게 성을 내실까?”
“그, 그러니까 내 말이! 나도 오랜만에 왔는데 무슨 일이야!”
“도련님 단추는 근데 왜 풀려 있어용?”
“내가 안 했어!”
벨라가 다시 뒤를 돌아, 그의 단추를 잠갔다.
“아가씨보고 물어본 거 아닌뎅….”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벨라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역정을 냈다.
“뭐! 어쩌라고!”
“아뇨, 뭐 건강한 성인 남녀인데 그럴 수도 있는 거죵.”
“아니라니까!”
이웨르는 순식간에 잘린 혀를 주우면서도, 그마저도 좋은지 실실 웃어댔다.
“이웨르 씨, 그만 좀 해요. 그러다 진짜 나중에 죽겠어요.”
키엘은 벨라가 잠근 셔츠의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미소 지었다.
꿈만 같이 그의 바람을 이루어준 벨라는 사실 낯설었다.
‘정말 꿈이 아니야….’
하지만 마족들에게 화를 내는 벨라는 그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정말로 그녀가 그의 마음을 받아준 거다.
그는 화를 내는 벨라의 팔을 잡고, 그에게로 천천히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때였다.
“전하. 실례하겠습니다.”
몰려든 인원의 뒤에서 로한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전하께선 괜찮…아 보이시는군요.”
로한은 서류 뭉치를 옆구리에 끼고 나타났다.
“당분간은 안정을 취해야 한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책상 앞으로 서류를 올렸다.
“이건 황태자비 전하와 제가 업무를 나눠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쉬시죠.”
벨라는 그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웨르에 이어서, 이제는 이놈까지 그녀의 신경을 거스른다.
“누구 마음대로 일을 나눠? 나는 동의한 적 없는데.”
“공식적으로 황태자비가 되자마자 두 달 동안 자리를 비울 때는 의논하고 비우신 겁니까?”
말이라도 못 하면 몰라. 인간이니 이놈은 혀를 자를 수도 없고.
벨라는 젠킨스를 보며 눈짓했다.
이 재수 없는 놈에게 한마디 쏘아붙여 주길 원했는데.
젠킨스가 두 손을 들고 말했다.
“인정. 반박 불가.”
“당신이 없는 동안 제국엔 망조가 들었단 소문까지 떠돌았습니다.”
억울한 데 변명할 길이 없는 벨라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아니, 나는 두 달이나 지났는지 몰랐는데….”
키엘은 시무룩한 고양이의 어깨를 잡고 뒤에서 그녀를 안았다.
오랜 인고의 끝에.
이제야 비로소 벨라가 곁에 있겠다 했다.
때로는 황태자인 그도 버거운 직무를 벗어던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혹여나 벨라가 일 때문에 지치거나 힘들어서 떠날까 봐, 그는 로한을 무섭게 노려봤다.
“인간계에 와서 결혼까지 했는데, 친정집에 두 달 정도 있는 게 뭐가 그렇게 아니꼬워?”
사랑한다는 고백과 황홀한 입맞춤에 취한 그는 조금 막 나가기 시작한다.
“벨라가 없다고 제국이 망한다면, 망해도 괜찮겠네.”
그리고 그는 벨라의 어깨와 가슴 밑을 팔뚝으로 꽉 감싸 안았다.
“벨라만 있으면 다 필요 없어….”
벨라는 로한의 시선을 회피하며 멋쩍은 듯 웃었다.
‘이 정도로 변호해주진 않아도 되는데.’
여태 수많은 마족이 벨라의 애정을 갈구해왔지만, 키엘의 집착은 어째 달콤하게 느껴졌다.
로한은 말문을 잃고 뒤를 돌아섰다.
제국의 황태자가 할 소린가, 저게.
분명 저 마음이 황태자의 약점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억 희석 약’을 그토록 먹였건만.
‘… 패배를 인정할 때인가.’
아무리 봐도, 운명의 여신은 그들의 편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는 이상한 맹신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로한이 벨라를 견제하려고 할 때마다, 이상하게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방해를 받았다.
정치적으로 고립시키려고 했으나 슈리아 크루엘이 벨라를 변호하질 않나.
벨라의 부재로 제국이 망한다는 얘기가 돌지 않나.
게다가 그녀가 다시 나타났을 때, 분명 검은 날개였음에도 제국민은 오히려 그녀를 초대 건국 때의 황후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로한은 권력에 욕심을 부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제국에 대한 애국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렇게 된 거, 차라리 확실하게 벨라를 제대로 된 황후로 만드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 * *
로한이 나가고.
벨라는 키엘의 팔에서 벗어나려고 앞으로 갔지만, 그는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저… 저기.”
달콤한 집착도 좋긴 한데. 모두 빤히 그녀를 보는 게 민망했다.
특히 그 모두 중에 로잔느가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난감해하는 벨라를 보며, 젠킨스가 혀를 찼다.
“그러게, 도련님께 언제 올 거라고 얘기를 확실히 했어야죠. 하여튼 마족들은 자기들만 여유롭다니까.”
“아니, 나는 진짜 2주 정도 지난 줄 알았어….”
“도련님이 얼마나 마음고생 했으면 저렇게 피골이 상접했겠어요?”
벨라는 젠킨스를 있는 힘껏 노려봤다.
“야. 나도 그동안 고생했거든?”
“아가씨야 뭐 별일 없었겠죠.”
“내가 뭐 하다 왔는지 궁금하지도 않냐?”
“예. 별로.”
저 약아빠진 입을 로한을 향해 놀릴 것이지. 벨라가 씩씩대며 젠킨스를 뚫어지라 쳐다봤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때 키엘은 벨라를 꽉 안으며 조용히 읊조렸다.
“…벨라는 잘못 없어. 내가 다 잘못한 거야.”
키엘의 변호에도, 젠킨스는 혀를 차며 오히려 눈대중으로 키엘의 몸을 살폈다.
“아주 여기저기 몸이 안 성한 데가 없네. 다 아가씨가 늦게 와서 그런 거예요.”
“이건 너희가 키엘 호위를 똑바로 안 해서 그런 거잖아.”
벨라는 쌍둥이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야! 쌍둥이들!”
리오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리네는 당당했다.
“전 잘못 없어요. 키엘이 사냥대회에서 사냥할 생각을 전혀 안 해서, 제가 사냥감을 찾으러 나섰다고요.”
그리고 손가락으로 리오를 가리키며 빠져나갔다.
“다 쟤 책임이에요.”
참고로 소설 속에서는 리오가 죽고 리네는 실의에 빠져 키엘을 떠난다.
리오는 리네가 얄미웠지만, 틀린 말도 아닌지라 담담하게 키엘과 벨라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때였다.
“제, 제가 대신 받을게요. 벨라 님.”
여태 말없이 그들을 멀뚱히 보고 있던 로잔느가 뛰어와 리오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로잔느는 상황을 설명하며 리오를 두둔했다.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에요. 제가 그 숲에 가지만 않았더라도…. 리오는 그냥 제가 걱정돼서 이야기하던 도중에, 키엘을 놓친 거예요.”
“…로잔느. 괜찮아. 이건 내 책임이야.”
“아니야. 분명 사냥대회가 있다는 건 알았는데, 그 날인지 정말 몰랐어.”
벨라는 멍한 눈으로 로잔느를 바라봤다.
두 달. 그녀가 없던 두 달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로잔느의 눈빛은 전에 알던 눈이 아니었다.
솜사탕처럼 보들보들하고 연약해서, 말도 제대로 못 꺼냈었는데.
말 더듬지 않고 자신 있게 말하는 걸 보자, 벨라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로잔느에게는 함부로 대할 수가 없다.
“저기, 키엘 어떻게….”
“벨라 마음대로 해요. 난 벨라만 있으면 돼.”
키엘은 벨라를 더 세게 끌어안고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아니, 이러면 어떡해.’
결국 그들의 책임을 물을 수가 없었다.
* * *
한바탕 큰 소동이라도 일어날 줄 알았는데, 조용히 넘어간 리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잔느.”
“응?”
“아까는 고마웠어.”
로잔느는 손을 리오의 어깨에 올렸다.
“고맙긴. 당연한 말이었는 걸.”
리오는 밝게 웃는 로잔느를 보며, 이제 안도가 아닌 걱정의 한숨을 속으로 내쉬었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지.’
오랜 시간 키엘을 짝사랑해왔으면서. 조금 전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걸 보고도 이렇게 태연할 수 있다니.
한 번도 사랑이란 걸 해본 적은 없지만. 머리로도 로잔느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걱정과 달리 로잔느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보고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사실 그녀는 키엘과 벨라의 사이를, 후안이 얘기해 준 대로 짐작만 할 뿐이지 눈으로 본 적은 없었다.
황태자비 책봉식이 있기 전까지 벨라는 항상 어딘가 나가서 밤늦게 돌아왔고. 책봉식 후에는 사라져 두 달 만에 돌아왔으니.
그리고 벨라가 없던 그 두 달 동안.
로잔느는 키엘을 가끔 마주치는 게 불편했었다.
성물 여행을 할 때도 가끔 우울함에 빠진 그의 얼굴을 본 적 있었는데, 그 두 달간 로잔느가 본 그는 여태 본 것 중 가장 위태로워 보였었다.
당장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정도로.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정말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저주라도 받은 건 아닐까.
- “언젠가…. 너도 똑같이 돌려받길 바라.”
거기다 키엘이 실종까지 되자, 앞서 리오를 변호했던 것처럼 모든 게 로잔느 자신의 탓으로만 느껴졌었다.
하지만 벨라가 키엘을 찾아오고, 그가 깨어나고,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다행이다.’
질투나 아픈 마음보다는, 진심으로 좋아 보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로잔느가 키엘에게 눈길이 자꾸 갔던 건, 어딘가 위로가 필요하고 쓸쓸해 보여서가 아니었을까.
로잔느는 걱정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리오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괜찮아. 아직 선인장은 안 시들었거든.”
그녀가 좋아했던 사람이 이제는 웃고 행복해질 수 있길. 그래야 로잔느도 비로소 행복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