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한편 몇 주간, 황궁의 정원에는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생겨났었다.
황궁의 정원을 지나다니는 사람마다 ‘미친 거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로, 리네는 몇 주간 그 자리에 동상처럼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젠킨스가 리네의 옆에 조용히 다가갔다.
“리네 양, 여기서 또 이러고 있습니까?”
그녀는 지난 몇 주간, 간간이 휘몰아치는 자괴감을 이기기 힘들었다.
화국의 마법 폭발 사고 이후로 그녀가 모든 걸 통제하고 방어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젠 할배….”
“청승맞게 뭐 하세요?”
젠킨스의 말에 리네는 콧방귀만 꼈다.
욕심과 기대가 과했던 만큼, 충족되지 못하자 밀려오는 이 허무함을 어찌 알꼬.
“대마법사는 포기해야 하나 봐요.”
그녀의 말에 이번에는 젠킨스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200년 동안 마왕을 소환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자부심 느껴도 돼요.”
“그것도 마법 증폭 도구 다 끌어모아서 한 거잖아요.”
“그거 압니까? 인간의 그릇은 언제든 커질 수 있는 거.”
젠킨스가 리네의 옆에 앉았다.
“의지에 따라 제일 많이 변하는 게 인간이에요. 꼭 그렇게 전략적으로 칭호를 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그 그릇이 되면 자연스레 얻게 될 겁니다.”
그러면서 젠킨스는 리네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사실 그 나이에 황태자를 호위하는 마법사가 되기도 쉽진 않잖아요?”
“…그건 운이었어요. 리오 자식이 키엘이랑 친해서.”
“설령 그렇다 해도, 능력이 없었으면 안 되었겠죠.”
“…….”
“제가 여태 본 사람 중에서 도련님 다음으로 제일 노력하는 사람이 리네 양일 거예요.”
“…어쨌든 두 번째네요.”
젠킨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도련님은 아무도 못 이겨요. 거긴 노력이 아니라 집착이예요, 집착.”
리네도 거기에는 할 말이 없었다. 비록 그의 목표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루기 위해 수도 없이 스스로 깎아온 건 알고 있었으니.
“…고마워요.”
젠킨스는 리네의 뒤통수에 손을 올려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은 충분히 가능성 있으니까.”
실패해 본 적 없는 리네는, 이 위로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조금 의아하게 젠킨스를 바라봤다.
“젠 할배, 설마 저 좋아해요?”
“미쳤습니까, 인간?”
젠킨스가 바로 인상을 찡그렸을 때였다.
때마침 대련하려고 옷을 갈아입고 기사단으로 가던 벨라가 우연히 리네의 말을 들었다.
“젠이 리네를 좋아했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아가씨.”
그 말을 들은 벨라가 퉁명스럽게 젠킨스의 눈치를 보며 리네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니, 아니면 아닌 거지. 뭔 말을 그렇게 하니.”
“반쪽이라도 엄연히 마족입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인간을 좋아하겠어요?”
벨라는 멋쩍은 듯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너 지금 나 까는 거니?’
이들 앞에서 키엘이 좋다고 말하려니 괜히 혼자 민망해질 것 같아 말을 말았다.
“잠시만. 너 반은 인간이잖아. 그렇게 차별받아놓고서는, 너도 차별하는 거야?”
“아니, 이게 어떻게 차별이에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수명이 다른 데, 좋아하는 마음이 들겠어요?”
벨라가 젠킨스의 뒤통수를 거세게 후려쳤다.
“인간보다 더 빨리 죽고 싶어 환장했냐.”
“와, 진짜 세게 때렸어.”
“말이라도 예쁘게 하던가, 그렇게 말하면 리네가 얼마나 민망해?”
리네는 서럽다는 듯 벨라에게 살짝 안겼다.
“벨라 님. 힝힝.”
“넌 나이도 300살이나 먹었으면서 애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냐.”
“젠할배가 얼마나 저를 구박하는지….”
그 말에 젠킨스가 억울하다며 가슴을 쿵쿵 쳤다.
“조금 전까지 좋은 말 해준 건 저잖아요, 리네 양!”
리네는 벨라의 품에서 젠킨스를 향해 혀를 내밀었다.
“지금 리네 양이 메롱 한 거 안 보여요?”
“흑흑. 대마법사도 못 된 리네는 서러워서 술이나 마시러 가렵니다.”
그때 벨라가 리네의 등을 두 번 두드렸다.
“리네, 나 지금 키엘이랑 내기하러 가는데 이기면 메르켄 공녀가 준 포도주가 내 거야. 같이 마실래?”
“…사랑합니다, 마왕님. 제가 메르켄 공작가 와인 제일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아시고.”
“무슨 내기 하는데요?”
젠킨스의 물음에 벨라는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렸다.
“오랜만에 대련하려고.”
그러자 젠킨스와 리네는 동시에 같은 말로 대꾸했다.
“아가씨, 도련님이랑 대련을 한다고요?”
“키엘이랑 대련하신다고요?”
둘 다 눈썹 끝을 내리며 벨라를 만류했다.
“명색이 황태잔데…. 황궁에서 꼭 도련님 쪽을 주셔야겠어요?”
“우리 전하가 그래도 검술 실력은 좋은 편인데…. 와인 가져올 수 있어요?”
걱정은 하나이지만, 각자 다른 원인이었다.
“리네 양.”
“젠 할배.”
“도련님을 업어 키운 게 우리 아가씨라고요.”
“실전 경험은 별로 없으시잖아요. 키엘은 진짜 실력이 좋아요.”
“우리 아가씨가 저래 보여도 마계의 수장이거든요?”
저래 보여도는 뭐야.
벨라는 그들이 옥신각신하는 동안 게걸음으로 지나쳤다.
“내기하시죠.”
“좋아요!”
그리고 그녀를 뒤따라오는 둘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그 무렵, 로잔느는 다음 날 벨라가 입을 옷을 위해, 황궁의 바로 앞에 있는 의상실에서는 로잔느가 다음 날 벨라가 입을 옷을 가지러 왔다.
활동성 많은 벨라는 조금 불편한 드레스를 입을 때마다 금세 짜증을 냈었다.
로잔느는 다년간 여행하며 벨라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기에 드레스를 수선하곤 했었다.
보통은 마이유를 시켜 가지고 오라고 하지만.
“자! 앞장서! 솜사탕!”
대장 놀이를 하고 싶은 푸르 때문에 오랜만에 황궁 밖을 나왔다.
이미 미리 얘기해놓은 드레스를 받아 오기만 하면 되는데.
“아가씨는 빨간 거 입어야 한다고!”
푸르는 자신이 대장이라며 꼭 한 마디씩 딴죽을 걸었다.
“…이미 빨간 드레스가 너무 많은데, 다른 색도 좋아하시지 않을까?”
“그래!”
다행인 건 푸르는 그냥 딴죽 거는 게 재밌을 뿐,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마이유가 파란색 드레스를 곱게 포장 천에 싸서 들고, 그들은 황궁으로 들어갔다.
“다 비켜! 우리 아가씨 옷 지나간다!”
사람들은 시끄러운 그들 일행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귀여운 곰 인형과 천사 같이 선하게 생긴 로잔느.
둘이 함께 있는 그림은 썩 잘 어울렸다.
벨라의 얼굴을 모르는 이들은 당연히 저들이 ‘동물왕국의 공주님과 마스코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로잔느가 푸르를 볼 때는 애정이 듬뿍 담긴 눈빛이었다.
“푸르는 정말 귀여운 것 같아.”
“그때 그 말하는 곰 인형이죠?”
“응.”
그때는 그저 깜짝 놀라 무섭기만 했는데, 이렇게 귀여울 줄이야.
‘그러고 보니 이 곰 인형 덕분이지.푸르 덕분이네.’
로잔느는 ‘말하는 곰 인형이 있다는 걸 안다’는 이유만으로 키엘의 여행에 무사히 참여할 수 있었다.
늘 좁은-사실 좁진 않다.-저택에 갇혀 더 넓은 세상을 자유롭게 보고 싶었는데.
덕분에 제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닐 수 있었다.
“있잖아, 푸르. 난 네 덕에 여행할 수 있었어. 고마워.”
로잔느의 말에 푸르의 동그란 두 눈이 점점 커졌다.
“푸르는 고맙다는 소리 처음 들어.”
아니다. 벨라도, 키엘도 여러 번 얘기했다. 물론 둘 다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솜사탕은 좋은 친구구나?”
“친구라니, 고마워.”
“…또!”
푸르의 눈이 점점 반짝였다.
마계에서도 친구라고는 이웨르밖에 없었다.
벨라 옆에 있기에 여태 살아 있을 수 있었지, 대부분 마족들은 200년 전 멸문한 곰족을 멸시하고 무시했었다.
“그럼 솜사탕을 이제 세 번째로 좋아할게!”
“어머, 고마워. 영광이야!”
푸르의 입은 한 번 벌어져서 다물 줄을 몰랐다.
“영광이라니!”
푸르는 팔과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며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을 표현했다.
“저건 무슨 춤이래요?”
“음…. 나도 모르겠어.”
순한 로잔느마저 푸르의 춤에 당황했지만, 푸르는 개의치 않고 한 바퀴를 돌며 마구 춤을 췄다.
그들이 황궁의 정문을 지날 때쯤이었다.
“로잔느. 황궁 밖에 나갔다가 온 거야?”
리오가 정문 근처에서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불쑥 튀어나왔다.
“응. 웬일이야? 전하 옆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보통은 그렇지만, 벨라가 고양이로 키엘의 방에 갈 때는 리오도 휴식시간이었다.
애초에 벨라가 있는 것만으로 호위는 필요 없는 거였으니.
“다른 호위랑 교대했어. 로잔느, 밖에 나갈 때는 너도 호위를 데리고 다녀야 해.”
“음. 벨라 님이 푸르면 괜찮다고 하시던데?”
리오가 혼자 춤추고 있는 푸르를 힐끔 쳐다봤다.
‘참…. 믿음직하네.’
황태자비의 시녀가 되었으니, 어쩌면 로한의 무리가 약점을 파헤치려고 로잔느에게 접근할 수도 있었다.
“요즘 벨라 님이 업무를 많이 분담해주셔서, 나도 시간이 많으니까…. 필요하면 불러.”
“그래, 고마워.”
“그럼 지금은 벨라 님께 돌아가는 길이야?”
“응. 그냥 방에 옷만 갖다 놓고 오면 돼.”
“일은 할 만해?”
로잔느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응. 어렵지도 않고, 오히려 다른 시녀들이 나를 우대해주기도 해.”
“잘됐네. 사실 처음에는 좀 걱정했었어.”
로잔느가 연모하는 사람의 비의 시녀라니.
그녀에게 어떤 운명이 있는지는 몰라도, 너무 가혹하게만 들렸다.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찾아가는 과정인 것 같아.”
“…그게 시녀를 한다고 찾아져?”
“벨라 님 주변에는 힘이 넘치는 사람들이 많잖아?”
진짜 힘이 넘쳐나서 탈이지.
“나 말이야, 선인장에 빈 소원이 이루어지려면 내가 먼저 변해야 하는구나 싶어.”
로잔느의 소원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는 리오는 그저 안타깝게 로잔느를 바라봤었다.
한편, 키엘도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오랜만에 벨라와 대련할 생각에 들떠 있었다.
“앗! 도련님이다!”
그러다 키엘을 부르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키엘이 돌아보자마자 저 멀리서 네 발로 키엘에게 달려오는 푸르.
키엘은 달려오는 푸르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푸르, 잘 지냈어?”
“나도 이제 부하 있지롱! 도련님만 부하 있는 거 아니지롱.”
“부하?”
키엘은 ‘얼마나 덜떨어진 사람이 푸르의 부하를 할까.’ 속으로만 생각했다.
“내 부하 보여줄게요! 솜사탕! 이리와!”
그가 살짝 고개를 들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로잔느가 천천히 다가왔다.
“아….”
“리오. 넌 내 호위야, 로잔느 호위야?”
키엘은 제일 먼저 로잔느 옆에 있는 리오를 꾸짖었다.
황궁이라 다행이지만, 항상 호위를 데리고 다니던 키엘이 혼자 걷는 게 조금 어색했던 찰나였다.
그리고 어색하게 로잔느를 바라봤다.
“오랜만이네.”
“아….”
난감한 건 로잔느도 마찬가지였다.
- “언젠가…. 너도 똑같이 돌려받길 바라.”
저주를 퍼붓는 듯한 말을 마지막으로, 지난 몇 주간 키엘과 마주칠 일은 없었다.
“안 그래도 리오에게 들었어요. 벨라 님이 업무를 많이 분담하셨다면서요?”
편하게 말하던 로잔느가 키엘에게 존댓말을 쓰며 말했다.
“산책 나오실 시간이 생겨서 다행입니다.”
리오는 둘의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걸 알고 그저 눈치만 보고 있었다.
키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딘가 분위기가 달라진 로잔느.
“그리고 저, 전에 했던 말은 매우 무례했습니다.”
“그렇게 딱딱하게 말할 필요 없어.”
키엘은 안고 있던 푸르를 내려놓았다.
“그래도….”
“그리고 그땐 나도 말이 심했어. 미안해.”
로잔느는 키엘의 입에서 나오는 뜻밖의 사과에 조금 놀랐다.
“도련님! 나한테도 사과해!”
“…넌 왜.”
푸르는 주머니에서 조그만 달력을 꺼내 키엘에게 들이 내밀었다.
“이거 봐! 석 달이 밀렸어요!”
푸르는 한 달에 한 번은 푸르랑 벨라랑 같이 자기로 하긴 했던 약속을 달력에 표시해두고 있었다.
“…푸르, 달력 볼 줄 알아?”
“내가 바보인 줄 알아요?”
푸르가 씩씩거리며 키엘의 발을 꾹 눌렀다.
“내 부하 솜사탕이 알려줬어!”
키엘은 푸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키엘, 그런데 어디 가는 길이야? 옷도 아침이랑 달라 보이는데.”
“아…. 벨라랑 대련을 하기로 했어.”
그 말에 리오가 인상을 잔뜩 썼다.
“…저기, 키엘. 너무한 거 아니야?”
“응? 뭐가?”
“아무리 벨라 님이… 그거라고 해도. 황태자비를 상대로 대련하는 황태자가 세상에 어딨어?”
“왜 안돼?”
“연약한 여자를 상대로….”
그 말에 오히려 키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너 벨라가 검 쓰는 거 한 번도 본 적 없어?”
“…없는데.”
크루엘 가에서 슈리아 공녀와 대련을 하는 건 알았지만 실제로 관심 있게 본 적이 없었다.
그때 리오는 키엘과 함께 서류에 빠져 있었으니까.
키엘은 그제야 리오가 벨라를 믿지 않고 호위로 그의 주변을 고집하는지 이해했다.
“…따라와.”
그러자 로잔느가 얼굴을 붉히며 키엘의 옷자락을 급히 잡았다.
“저, 저기. 나도 가도 돼?”
* * *
벨라와 키엘은 서로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서 마주치자마자 황당하게 쳐다봤다.
“…벨라.”
“네가 더 많아. 난 둘이고. 넌 셋이야.”
분명 아무에게도 들키지 말고 몰래 만나기로 한 거였는데. 둘 다 꼬리가 길어도 너무 길었다.
“벨라는 네 명이거든요.”
그 말에 벨라가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재밌는 냄새를 맡고 달려온 잔바르와 이웨르까지 껴 있었다.
“난 의도한 거 아니야. 쟤들이 내기한다고 따라온 거라고.”
“난 거절하기 힘들어서….”
벨라는 멀리 로잔느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래. 저기는 누구든 거절하기 힘들겠지.’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무시하고 벨라와 키엘은 서로의 검을 잡았다.
그동안 이웨르는 야구장에 음식 파는 사람처럼 모인 사람들을 선동했다.
“자, 자! 얼마 걸 거예용?”
“난 공주님에 1 실버!”
“잔바르 님, 그걸로 무슨 내기를 해용!”
왁자지껄하는 가운데, 절대 이런 판에 낄 거 같지 않던 로잔느도 슬그머니 다가와 1골드를 내밀었다.
“저, 저도 벨라 님이 이긴다에 1골드… 아니, 3골드요.”
어느 정도 관중석이 진정되자, 마족들은 격앙된 채 벨라와 키엘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두 분 대련하는 거 오랜만에 보네요.”
“그러게용. 저택에 있을 때는 지겨웠는뎅.”
“그런데 이웨르 씨는 왜 도련님한테 걸었어요?”
“몽마의… 직감?”
바람이 살랑살랑 불며, 머리카락이 흩날리자 벨라는 머리를 질끈 묶었다.
오랜만에 검집에서 검을 빼 든 벨라는 검을 여러 바퀴 돌리며 키엘을 도발했다.
“실력이 얼마나 늘었나 볼까?”
“방심 안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서로 좋은 공격을 기다리다, 벨라가 먼저 그에게 달려들었다. 기세 좋게 찌르지만 키엘은 금세 옆으로 비켜 벨라의 뒤편에서 검을 내리꽂았다.
리오와 로잔느는 동공이 커진 채,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들의 염려와 다르게 벨라는 찌르던 검의 반동을 이용해 그녀의 뒤편을 방어했다.
시간이 갈수록 마족들은 지루해하고 리오와 로잔느는 긴장과 안도가 번갈아 찾아왔다.
관중과 달리, 벨라는 오랜만에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벗고 땀을 흘리는 게 좋았다.
크루엘가에서 슈리아와 대련할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그녀와만 대련하던 아이가, 세상에 나가서 숱한 경험을 쌓고 돌아왔을 테니.
‘진짜 많이 늘었네.’
마계에 있을 때 했던 검투와도 많이 달랐다.
검을 부딪칠 때마다, 마음을 내려놓으며 영원한 이별의 인사를 했던 그때와 달리.
그 어린 시절처럼 오늘의 대련이 훗날 떠올리고 싶은 또 하나의 추억이 되겠지.
“좀 더 달려들어 봐.”
“벨라야말로.”
꽤 오랜 시간 두 검이 부딪히는 소리만 챙 챙 하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일부러 져주려고 했는데, 이제 끝내야겠다.”
키엘은 벨라의 말에 피식 웃었다.
“지금 도발하는 거예요?”
“그렇지. 이기려면 상대를 도발해서 교란하는 것도 전략 아니겠어?”
“그런데 도발이 하나도 안 돼.”
벨라도 미소를 가득 안고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달려들었다.
세게 부딪히고 벨라의 검이 검날을 타고 쭉 내려가려던 찰나였다.
먼저 목에 칼을 겨누는 사람이 이기는 거긴 한데.
검 대신 키엘의 얼굴이 더 가까이 왔다.
“…….”
갑자기 찾아온 입술은 꽤 촉촉하게 벨라의 입술을 적셨다.
그리고 벨라의 목으로 차가운 검날이 닿았다.
“내가 이겼네.”
“…이거 좀 치사한데.”
“상대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도 전략이라면서.”
벨라는 입을 굳게 다물고 뚱한 표정으로 키엘을 바라봤다.
이 귀여운 얼굴을 어떻게 내버려 둘 수 있을까.
그는 벨라의 턱을 살짝 잡고 한 번 더 그녀의 아랫입술을 입술로 쓰다듬었다.
그리고 조금 거친 숨을 내쉬며 미소 지었다.
땀에 젖은 이 검은색 머리, 목표를 집중해서 보는 선명한 붉은 눈.
그는 조금 아련하게 벨라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이네요.”
그 말에 벨라가 얼굴을 붉히며 키엘의 입술을 바라봤다.
먼저 좋아한다고 꾀어놓은 건 벨라이건만.
소설을 바꿀 만큼 좋아하는 마음과.
이 정도의 스킨십은 괜찮다고 생각하는 머리와.
받아들이는 몸은 전부 제각각 따로 놀았다.
“아, 아직…. 어색해서….”
“…네?”
벨라는 용기를 내서 키엘의 옷자락을 잡고 까치발을 살짝 올렸다.
“하루에 한 번은 해볼게.”
그리고 세 박자를 맞추기 위한 한 번의 ‘쪽’소리가 거친 숨소리를 덮었다.
키엘은 조금 의아하게 벨라를 내려다봤다.
갑자기 뽀뽀해주면서 대련을 약속하는 게 좋긴 한데.
“…하루에 한 번 한다고요?”
“최, 최소? 나도….”
“응?”
“적응을 조금 해야 할 거 같아서….”
키엘이 벨라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하루에 한 번은 힘들 거 같은데.”
이제 몸도 회복되니 몸이 간질간질한 모양이지만, 그들에게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벨라의 손에 잡히지 않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았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해볼게요. 일정도 조율해보고.”
벨라는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키엘이 이상했다.
뭔 스킨십을 달력에 표시하듯이 한단 말인가.
“너무… 계획적인 거 아니야?”
“그럼 오늘처럼 여유가 날 때 해요.”
벨라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상상력을 더해도, 이상했고.
심심한데 뽀뽀나 한번 할까, 이런 것도 아니고.
오늘은 여유가 있으니 키스하러 오세요, 이런 것도 아닐 텐데.
벨라가 계속 갸우뚱하자 키엘이 그녀의 코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아직은 일이 많아서 매일 대련하긴 힘들어요.”
벨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혼자 나는 무슨 생각을 했는가.
“그, 그렇지.”
그리고 그녀의 변화를 키엘이 놓칠 리 없었다.
“벨라, 혹시 다른 거 생각한 거예요?”
“아, 아니?”
그 모습을 본 키엘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뭐 생각한 거예요?”
“대련. 나도 대련 생각했어!”
저렇게 얼굴이 빨간 데다, 키엘이 가지고 있는 벨라의 심장이 쿵쿵 뛰자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귀여워.’
귀여우니 더 장난치고 싶은 마음만 가득한 채, 키엘이.
“내가 이겼으니까 말해봐요. 뭐 생각했어?”
벨라는 키엘의 발로 그의 발등 위를 꾹 눌렀다.
한편 관중석에는 환호와 원성이 자자했다.
“예에! 내가 이겼엉!”
이웨르와 쌍둥이들이 셋이서 서로 껴안으며 방방 뛰었다.
반면 다른 이들은 초상을 치르는 분위기였다.
어느새 벨라와 키엘은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물병을 받았다.
“아가씨. 이런 게 어딨어요?”
“이게 뭐예요! 우리 공주님이 왜 도련님한테 져요!”
“마계의 미래가….”
마족들은 벨라가 져서 충격이라도 받았는지 허탈하게 벨라를 노려봤다.
“내가 져준 거야, 져준 거.”
누가 입 맞추면서 사람을 방심하게 할 줄 알았나.
그것도 예쁘장하게 생겨서, 미인계를 쓰는데 당해낼 재간이 있어야지.
그때 로잔느가 둘을 보며 겨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너무해요….”
그제야 키엘은 로잔느가 이곳에 있다는 걸 다시 인식했다.
늘 존재감이 없어서, 있는지 없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던 터라….
‘내가 진짜 너한테는 나쁜 사람이겠다.’
그녀의 마음은 알고 있지만, 일부러 상처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늘 완곡하게 거절해왔으니.
당황한 건 벨라도 마찬가지였다.
소설 속 여자주인공이 가져야 할 권리를 빼앗은 채 이곳에 서 있는데.
악몽이라도 보여주듯 로잔느 앞에서 입을 맞추는 걸 보였으니.
로잔느가 대련을 보러 이곳에 따라올 때, 리오가 ‘불편하지 않겠냐’고 물었었다.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두 사람을 보자마자 로잔느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걸 처음 본 셈이었으니.
로잔느는 키엘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었다.
여태 검을 휘두르는 걸 여러 번 봤지만, 저렇게 행복한 표정으로 벨라를 바라보는 건 처음이었다.
‘정말 벨라 님을 좋아하는구나.’
그리고 그가 장난스럽게 벨라의 입에 맞출 때.
로잔느는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가 힘들었다.
“너무해요…. 벨라 님….”
로잔느가 눈물을 흘리자, 리오가 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저… 로잔느.”
“저 3골드나 걸었단 말이에요….”
3골드면 전생에서 300만 원 정도는 되는 돈이었다.
“왜… 왜 그렇게 많이 걸었어?”
벨라도 당황한 채 로잔느를 달랬다.
“벨라 님의 시녀니까 벨라 님께 건 건데….”
이유는 사실 조금 달랐다.
자기를 찬 남자가 이기는 거에 걸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기왕 거는 거, 키엘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준다는 데 있는 전 재산을 다 걸었던 거고.
설마 그 남자의 입술에 벨라가 홀라당 넘어가 3골드까지 잃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벨라가 팔꿈치로 키엘의 옆구리를 조용히 툭툭 쳤다.
“네가 치사하게 이겨서 그래.”
“처음에 도발한 게 누군데.”
벨라는 키엘이 말은 삐딱하게 해도 지갑을 열어 3골드를 꺼낼 줄 알았다.
하지만 키엘은.
“제국법에 따르면 10실버 이상의 도박은 전부 불법 도박이야. 다 감옥 갈 거 아니면 돌려줘, 이웨르.”
황태자답게 말했다.
리오가 멍하게 키엘을 보다가 손뼉을 쳤다.
“… 전하. 이럴 때만 법 찾으세요?”
3골드는 그들의 것이니 뺏기기 싫었다.
이웨르도 주춤거리자, 벨라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 이웨르. 로잔느 돈을 돌려주던가. 아니면 네 목이 돌아가던가. 선택해.”
사태는 깔끔하게 정리되는 듯 보였지만.
돈보다는 믿었던 마왕이 진 게 자존심 상한 잔바르가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꼬마. 어릴 때부터 요망하더니! 감히 우리 공주님을 이기려 드나!”
“왜 저래.”
“하여튼 키워줬더니 은혜도 모르고. 마족들도 은혜는 안다!”
잔바르는 마계에서 키엘이 벨라의 심장을 가져간 걸 떠올리며 키엘에게 점점 다가갔다.
“공주님께 검부터 들이댈 때부터 알아봤다!”
그때 벨라가 키엘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용사가 나타났다고 죽여야 한다고 난리 법석 피운 건 너희잖아.”
“도련님인 줄 알았으면 제가 먼저 말렸을 겁니다.”
벨라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잔바르의 무릎을 발로 찼다.
“그럼 마왕 성에 초인종이라도 달아놓던가. 우르르 떼거리로 구경부터 간 건 기억 안 나?”
잔바르가 ‘악’소리를 내며 조용해지려고 하던 찰나에, 젠킨스는 평소 궁금하던 걸 물었다.
“그런데 아가씨는 도련님이 저만큼이나 컸는데 한눈에 알아봤어요?”
“…응?”
어차피 그때 마계에 들어오는 게 키엘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마계는 좀 어둡잖아요. 도련님 어릴 때는 키도 작았는데, 지금은 저만큼이나 컸고.”
“하긴. 못 알아볼 뻔도 했겠다. 몇 년 만에 보는 거였지? 4년?”
벨라가 고개를 돌려 키엘을 바라봤다.
“…2859일이에요.”
“너 그냥 아무 숫자나 부른 거지?”
그는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벨라의 볼을 꼬집었다.
“7년 9개월….”
“그렇게나 됐어?”
“25일….”
벨라는 키엘의 말을 다 듣지 않고 그의 머리 위에 손을 뻗었다.
“분명 마지막에 볼 때는 이만했는데.”
그러면서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가슴 쪽을 가리켰다.
그때 리네가 리오의 등을 밀었다.
“키엘이 몇 년 새에 키가 불쑥불쑥 컸었어요. 리오가 1㎝도 안 자랄 때.”
“난 왜 들먹거려.”
쌍둥이들이 옥신각신 싸우는 동안, 3골드를 돌려받은 로잔느는 어딘가 마음이 불편했다.
로잔느가 조심히 손을 들었다.
그것도 굉장히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고.
“저…. 혹시 벨라 님이… 마족이에요?”
그리고 로잔느는 그 뒤의 상황이 더 무서웠다.
마치 어릴 때 들었던 무서운 이야기의 한 장면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시간이 정지한 듯 전부 그녀를 보고 눈 하나도 깜빡이지 않았다.
“…몰랐어?”
키엘은 리오에게, 리오는 벨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넌 맨날 붙어 있으면서 왜 그걸 얘기 안 해줬어?”
“…마왕 님이 로잔느 고용주시잖아요.”
벨라는 뒷목을 만지작거리며 변명했다.
“아니, 이웨르가 마족이라고 했으니…. 알 거라 생각했지. 후안 크루엘도 눈치챘길래, 같은 방을 쓰니까 당연히….”
로잔느는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저, 저도 눈치는 채고 있었어요. 확신이 없었는데 지금 물어본 거예요.”
“그래? 다행이네. 난 또 내가 실수한 줄 알았네.”
벨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덧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갈 시간이 되자, 리오가 로잔느에게 물었다.
“로잔느는 숙소로 돌아가지?”
“응? 응.”
“같이 가자. 나도 볼 일이 있어서.”
리오는 로잔느를 배웅하겠다고 자처했다.
일행들과 조금 떨어지자, 그제야 그는 조금 전의 일에 대해 물었다.
“벨라 님이 마왕인 거, 오늘 처음 안 거지?”
“…마왕이셨어?”
로잔느는 눈치챘다고 하지만, 사실 한 톨의 의심도 하지 않았었다. 애초에 동물왕국이라고 했으니까, 그런 줄로만 알았지.
“기밀 사항이니까 지켜줬으면 좋겠어.”
“그런데 키엘은…. 벨라 님이 마왕이라도 괜찮은 거야?”
리오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벨라 님이 지렁이라고 해도 좋아할걸.”
“하하. 그래?”
리오는 순간 자신의 입을 막았지만, 로잔느는 오히려 재밌다는 듯 웃었다.
“넌 괜찮아? 너 키엘….”
‘좋아하잖아.’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리오가 로잔느의 눈치를 봤다.
로잔느는 묘약을 가지고 간 날을 떠올렸다.
키엘이 로잔느에게 나쁜 사람이어서, 정말로 나쁜 사람이길 바랐는데.
- “키엘,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마족이래.”
- “… 그래서?”
- “마족이랑은 안 되는 거잖아.”
- “누가 그래?”
- “벨라 님이.”
오히려 그에게 로잔느가 나쁜 사람이었구나.
- “내 운명은 내가 정해. 넌 아니야.”
그저 상처받은 사자가 살려고 발버둥을 치는 거였다.
아무도 제대로 못 들은 것 같지만, 확연하게 들린 키엘의 말이 로잔느의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 “…2859일이예요.”
- “7년 9개월… 25일.”
키엘이 얼마나 애타게 찾았는지, 조금이라도 알아달라고 한 말은 벨라에게 닿지 않고 로잔느에게 닿았다.
거절당하는 게 두려워 고백을 못 했던 로잔느처럼. 그도 그게 무서워 그리도 숨겨왔던 거겠지.
불어오는 바람에 어느덧 더운 여름의 냄새가 났다.
성물 여행의 마지막 날 밤처럼.
“리오. 나는 그날이 운명처럼 느껴졌었어.”
늘 백작가에서 나와 여행을 하고 싶었던 로잔느에게 찾아온 운명이라고 생각했었다.
“처음 키엘을 만났을 때 말이야.”
푸르를 만났던 것도, 그 오래된 저택에 가게 된 것도. 모든 게 로잔느를 위한 운명인 것처럼 느꼈는데.
“하지만 키엘은 처음부터 벨라 님을 쭉 찾았던 거였네.”
로잔느는 멀리 하늘에 붉고 노란빛을 물들이는 석양을 바라봤다.
“있잖아, 키엘은 정말 날 좋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찬란한 오후는 석양을 바라보며 끝을 생각하고, 석양은 늘 밤을 쫓아갔다.
“그런데 나는 왜 좋아한 걸까?”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보고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키엘은 로잔느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었다.
백작가에서 벗어나 여행을 이끌어 주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키엘이 벨라에게 입을 맞추던 걸 보던 순간에도, 잃어버린 3골드가 먼저 떠올랐고.
그가 벨라를 향한 눈빛이 애절하게 느껴지자,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두 사람이 잘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었다.
“처음 얻는 자유로움이라, 키엘이 그 여행의 중심이라서. 그게 내 운명처럼 느껴졌나 봐.”
로잔느는 입 밖으로 내뱉으며 자신의 의구심을 하나씩 스스로 밝혀냈다.
“나는 키엘을 좋아한 게 아니야.”
“…로잔느.”
로잔느의 두 눈에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운명 같은 느낌을 좋아한 거였어.”
엉킨 실타래가 풀리자, 모든 게 풀리듯 로잔느는 그제야 모든 게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내 멋대로 키엘이 나를 구원해줄 사람이라고 환상을 씌워놓았어.”
리오가 천천히 로잔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처음부터 키엘이 내게 마음을 주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그 환상이 좋아서….”
“…….”
“그래서 억지로 마음을 이어온 거야.”
“로잔느.”
“이게 내 운명이라고 고집 피워서 얻는 거라면, 그건 내 운명이 아닌 것 같아.”
리오는 천천히 로잔느에게 그의 어깨를 빌려주었다.
“내가 바보 같아.”
사람들은 로잔느를 보고 답답하고, 늘 어리숙하고, 사고에 휘말린다고 하지만.
리오가 봤던 로잔느는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이해심이 많고, 마음이 넓었을 뿐이었다.
“넌 좋은 사람이니까, 네게 좋은 일들이 앞으로 가득할 거야.”
그리고 처음으로 그녀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고,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 * *
리오가 로잔느를 배웅한다고 간 사이, 리네는 홀로 키엘의 호위를 자처했다.
벨라는 마족들을 떼어내고 그들에게 얼른 다가가 물었다.
“그나저나 리오랑 로잔느랑 많이 친해?”
그러자 리네가 저 멀리 가는 동생의 뒤꽁무니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일방적으로 쫓아다닌다고 보이는데요.”
“괜히 추측하지 마.”
리네가 키엘과 눈이 마주치고, 어깨를 으쓱였다.
“추측 아닌데. 합리적 의심인데.”
“근거 있어?”
리네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목을 가다듬었다.
“벨라 님, 들어봐요. 키엘이 로잔느에게 무슨 임무를 맡겼었대요.”
“…리네.”
키엘이 리네를 노려보며 그만두라고 했지만, 리네는 벨라 옆으로 쏙 피해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
“황태자가 경합에 관여하면 안 되니까, 밤에 나오라는 사인으로 손수건 같은 걸 걸어뒀거든요?”
그건 벨라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키엘이 따로 부른 적이 없는데도, 매일 손수건을 걸었다니까요.”
이건 키엘도 모르는 얘기였던 지라, 리네의 입을 막으려다 키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리오가?”
“그렇다니까. 어때요, 일방적으로 쫓아다니는 거 같죠, 벨라 님?”
리오는 애초에 이 소설에서 죽었어야 할 운명.
“그러네….”
어쩌면 로잔느를 해피엔딩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긍정적인 미래가 보이자, 벨라는 자신을 스스로 감싸며 자화자찬했다.
“이야, 내가 이런 데 감이 좋아.”
“…….”
“영애들이 나보고 괜히 연애의 고수라고 하겠어? 딱 봐도 리오가 로잔느를 좋아하는 티가 나네!”
키엘은 씁쓸한 듯 벨라를 쳐다봤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티를 냈을 때는 몰랐으면서.
어느새 본궁에 다다르자, 키엘이 벨라의 손목을 잡았다.
“…벨라.”
앞으로 걷던 그녀가 멈추고, 리네는 슬쩍 돌아보더니 제 갈 길을 걸었다.
“내기에서 내가 이겼으니까….”
키엘은 벨라에게 더 가까이 몸을 낮추고, 간지럽게 유혹했다.
“오늘 밤엔 나랑 같이 자요.”
“그게 내기에서 이긴 소원이야?”
“…응.”
“좋아.”
키엘의 심장이 쿵쿵 뛰고, 벨라의 손목을 잡은 곳은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럼….”
“내가 밤에 찾아갈게. 그럼 됐지?”
“…벨라가요?”
“응. 내 방은 애들 때문에 시끄러우니까.”
심장이 뛰다 못해 터질 것 같아, 키엘은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대련했으니까 씻고…. 한 … 11시쯤 갈게.”
키엘은 그의 귀를 계속 의심했다. 지금 벨라의 입에서 나오는 저 말이 정말 저 말이 맞는 건지.
방으로 돌아온 키엘은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깨끗하게 씻는 동안에도, 잠옷을 고르는 동안에도.
언제 또 방해꾼이 나타날지 몰라 조마조마하면서, 벨라를 기다렸다.
‘이러다 또 안 오는 건 아니겠지.’
전에도 찾아와 복수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오지 않았던 것처럼.
‘그냥 내가 벨라 방으로 찾아간다고 할 걸 그랬나.’
하지만 그랬다가는 푸르가 분명 ‘저도 같이 잘 거예요!’ 하면서 달력을 들이 내밀게 뻔했다.
‘오늘 오면 언제 예식할지 물어봐야겠어.’
얼굴을 붉힌 채, 키엘은 소파에 앉아 문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똑똑.
창문에서 들리는 소리에 조금 당황해 하며 고개를 돌렸다.
“…벨라?”
문은 거기가 아닌데.
창문을 열자 검은 고양이가 폴짝 뛰어내렸다.
“왜 이렇게 방이 어두워?”
초만 켜둔 차라, 어두운 방에서는 검은 고양이가 어디로 가는지 키엘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아. 하긴, 잘 시간이니까 어둡긴 하겠다.”
어느새 하얀색 침대 위에 올라간 벨라는 꼬리로 이불을 팡팡 쳤다.
“이거 설마 나보고 놀라고 올려둔 거야?”
“…….”
벨라는 두 발로 침대 위에 꽃잎을 툭툭 치며 가지고 놀았다.
“…벨라.”
“아, 아니. 이 꽃잎이 날 유혹하고 있어서….”
유혹이 맞기는 한데, 그런 유혹이 아닌데.
“어휴. 내가 이래서 고양이로 있기 싫다니까.”
“그럼, 사람으로 변해요….”
하지만 벨라는 기지개를 켜고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괜찮아. 안 그래도 최근에 너무 피곤했는데 이 모습으로 회복 좀 하지, 뭐.”
그는 최대한 이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했다.
키엘은 와인잔에 와인을 능숙하게 따르고, 침대로 천천히 걸어갔다.
“저… 벨라, 와인 한잔 마실래요?”
“그럴까?”
벨라는 하품을 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웬 떡인지.
얼른 사람으로 변해서, 와인 잔을 손에 받았다.
“혹시 그 메르켄 공녀가 가져다준 거야?”
“아니. 그건 양이 많아서….”
괜히 술 마시고 전처럼 뻗으면 안 되니, 일부러 용량이 적고 비싼 포도주를 꺼냈다.
“이건 두 잔 정도만 나오긴 하는데, 그만큼 값어치가 높아요.”
벨라는 한 모금 마시더니, 키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해 최고의 포도만 모아서 만든 거라 맛있을 거예요.”
“그러네. 아주 맛있는데?”
“좋아해서 다행이다.”
키엘은 해맑게 웃으며 한 모금을 더 마시는 벨라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벨라는 키엘의 눈치를 보더니, 와인 잔을 작은 협탁 위에 올려두었다.
“별로예요?”
“아니. 쏟으면 안 되니까.”
키엘은 입술을 살짝 적시고 벨라를 응시했다. 이대로 천천히 벨라에게 몸을 가까이하려고 하는데.
“…벨라, 지금 뭐 해요.”
벨라는 갑자기 고양이로 변해 협탁 위로 올라갔다.
“이렇게 마시면 아껴 마실 수 있지 않을까?”
와인 잔에 얼굴을 넣는 고양이를 보고, 그는 조용히 자신의 연애사를 돌아본다.
역시 방해꾼은 벨라 본인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이 정도면 대놓고 유혹한 거 아냐?’
그는 포기하고 와인을 마저 마셨다.
빈 와인잔을 협탁 위에 조금 소리가 크게 나도록 세게 올려두고, 침대 위에 천천히 누웠다.
“다 마시고 와요.”
“고양이로 마시니까 좀 힘들어.”
“…당연하지.”
벨라가 다시 사람으로 변했지만, 키엘은 이제 기대하지 않았다.
“참, 키엘.”
“네.”
“여기 오기 전에 경합 때 있었던 폭발사고를 다시 한번 봤는데.”
“응.”
“이거 아무래도 조작된 사건 같아.”
키엘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핑크빛 분위기는 물 건너갔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게다가 그 사건은 증거도 없을 텐데 또 뭘 파헤치려고 하는지.
“아무래도 마력 폭발 사고가 나 때문에 일어나는 거 같거든?”
키엘이 고개를 조금 올려 벨라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벨라는 다 마셨는지, 키엘이 올려둔 와인 잔 옆에 빈 와인 잔을 올리고 뒤를 돌았다.
“내가 인간계로 올 때를 기점으로 사고가 빈번해진 거 같단 말이야.”
“…….”
“그리고 마력이 폭발했을 때 썼던 마법진들도 인간들은 모르겠지만, 마계에서 쓰는 마법진을 기반으로 만든 거더라고.”
“…그래요?”
“그런데, 그때 폭발 사고 때 썼다는 마법진은 전혀 달라. 오히려 천족들이 쓰는 거에 가까워.”
벨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그 보호마법을 썼다던 마법사를 찾았는데, 거기도 좀 이상해.”
“…찾았다고요?”
“응. 직접 발로 다 뛰어서 확인해봤지.”
“…수사 잘하네요.”
“당연하지. 이래 봬도 경찰이었는데.”
키엘은 벨라의 말을 의아하게 여기며 그녀를 올려다봤다.
‘…경찰?’
하지만 벨라는 자신의 말실수를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하나하나 다 만나서 물어봤어. 유독 그 마법사만 알리바이가 없길래 캐봤더니, 자기가 그 마법을 쓴 거 맞대.”
“그래서요?”
“자기는 부탁을 받은 거래.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보호마법을 황제에게 둘러달라고.”
“…….”
“문제는 부탁을 한 사람이 경합에서 죽은 사람이라,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몰라.”
키엘은 놀란 마음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여태 그의 방에 와서 물어본 대부분이 황궁의 관리에 대한 거라, 화국의 마력 폭발 사건이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는지도 몰랐는데.
이렇게까지 알아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래서…. 벨라는 배후가 누구인 거 같은데요?”
벨라는 키엘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음….”
키엘이 침을 꿀꺽 삼켰다. 어디까지 눈치챈 걸까.
“로한일 거 같아.”
다행히 그는 용의 선상에서 벗어난 듯 보였다.
“심증은 그러한데, 물증이 없으니 사실 확신은 못 하겠어.”
“…그래요?”
“어쨌든 그 일로 로한이 이득을 본 건 없어. 그게 좀 마음에 걸리고.”
“…….”
“사실 로한의 사람 중에서는 내가 경합을 조작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더라고.”
이득을 본 사람은 단 하나. 키엘뿐이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황태자비가 된 거니까.”
그의 마음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어쩌면 벨라가 주동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키엘은 벨라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뻗어 올렸다.
“…벨라는 황태자비 되는 거 후회 안 해요?”
벨라는 간지럽게 포개진 그의 손을 천천히 내려봤다.
“후회….”
아마 하겠지.
- “수명이 다른 데, 좋아하는 마음이 들겠어요?”
그가 그녀의 손을 깍지 끼듯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벨라.”
벨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달빛을 등에 지고 있는 그를 눈에 담았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서더니 고양이로 변해 푹신한 이불 위에 솜방망이로 착지했다.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벨라는 키엘의 팔에 자신의 머리를 부비댔다.
“후회는 안 해야지.”
그리고 그 팔에 가볍게 입을 맞추더니, 발라당 옆으로 누웠다.
“우리 키엘은 내가 많이 사랑하니까 지켜줄게.”
키엘은 고양이를 멍하게 내려봤다.
‘연애의 고수는 무슨.’
* * *
벨라는 고양이로 키엘의 품에 잠들었다가, 일어나 햇빛이 비춰주는 예쁜 얼굴을 감상하고 있었다.
전날 밤에는, 벨라가 자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아 고양이로 있긴 했는데.
막상 조각처럼 완벽한 얼굴을 보니 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그나저나 얘는 날 얼마나 좋아하는 거지?’
키엘이 자신의 감정을 얘기한 적이 없어서, 짐작이 가질 않았다.
-사실 그동안 여러 번 넌지시 얘기했다. 그때마다 다른 생각을 했을 뿐.-
‘아무렴 어때. 어차피 이 남주는 내 건데.’
이 소설은 빙의자인 그녀의 의지대로 바뀌었다.
‘내가 예쁘기도 하고 말이야.’
게다가 벨라가 고백한 이후로, 이전에 없던 스킨십도 늘었으니.
‘점점 나를 좋아하는 거 같기도 한데. 이건 이웨르에게 물어봐야지.’
벨라는 자는 키엘의 얼굴에 살며시 발을 올렸다.
그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잠투정을 하자, 벨라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나중에 내가 이 소설을 어떻게 바꿨는지 알면, 환생 대기조 친구들이 진짜 놀라겠다.’
제목도 새로 붙여야지. <알고 보니 황태자님>이 아니라.
키엘의 입장에서 제목을 붙여서, <어릴 때 키워준 누나를 황태자비로 들였다.>
뭐 이런 제목?
그 친구들을 만나는 게 5000년 후라는 걸 알지만.
이미 작은 행동들로 모든 게 바뀐 지금은, 그냥 뒷일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후회 안 해야지.’
* * *
벨라를 사교계에서 ‘연애 고수’라는 별명을 얻게 하는 데 일조한 일등 공신.
이웨르는 젠킨스가 처음에 했던 제안대로 영애들을 불러 모아 소소한 모임을 만들었다.
일명 벨라 없는 ‘벨라의 요리 교실’.
벨라는 모임이 열린다는 황궁의 조촐한 회의실로 향했다.
‘그나저나 영애들이 요리에 그렇게 관심이 많을 줄은 몰랐네.’
귀족가의 하녀들을 모아서 모임을 하는 것도 아닌데, 요리 교실은 꽤 인기가 많았다.
의아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좋았다.
벨라가 직접 사교 파티에 참석해서 쌓아야 할 친분이 이웨르를 통해 자연스레 생겨나니까.
게다가 곧 있으면 제국에서 큰 축제 중 하나인 여름 축제였다.
황궁의 안주인인 황후가 담당해야겠지만, 황후가 없으니 여태 황태자인 키엘이 코피 흘려가며 계획해왔고.
아직 예식은 치르지 않았지만, 그 일이 이제 벨라의 손에 들어왔다.
그 여름 축제에 벨라는 황태자비 책봉식을 할 예정이었다.
‘일단 요리교실의 영애들은 당연히 다 오겠지?’
이들이 얼마나 바람을 잡아주느냐에 따라 벨라가 처음으로 맡을 국책의 평가가 달려있다.
벨라가 문을 열었을 때는, 그녀가 생각한 거보다 꽤 많은 영애가 앉아있었다.
‘이 정도면 걱정 안 해도 되겠는데?’
그리고 영애들을 둘러싸고 이웨르는 가운데에 앉아 얼굴에 홍조를 띠고 얘기했다.
“따지고 보면 우리 아가씨가 제국에서 제일 비싼 가지를 가진 거 아니겠어용?”
“…내가?”
“아아악! 아가씨!”
벨라의 등장에 다들 놀랐는지, 영애들은 얼굴을 붉히고 이웨르는 우당탕 일어섰다.
“베, 벨라 님.”
“황태자비 전하.”
모두 너무 당황해서 벨라가 민망할 정도였다.
부르는 호칭도, 인사도 다 가지각색.
거기다.
“요리교실이라더니, 요리는 안 해?”
요리 도구는커녕 재료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놈의 가지 요리를 하는 거 같은데, 주재료인 가지도 보이지 않았고.
“아유, 비밀 레시피를 공유하고 조금 있다 하려고 했죵.”
이웨르는 과장되게 손을 움직이며 땀을 뻘뻘 흘렸다.
“그, 그렇죠, 아가씨들?”
“네! 그, 그럼요.”
영애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준비라도 한 듯 대답했다.
아무리 봐도 이상한데.
벨라는 목을 가다듬고 드레스를 양손으로 잡은 후 인사했다.
“다들 이 모임에 많이 참여해주셔서 늘 감사하게 생각한답니다.”
그런데 어째 영애들이 전부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들지 않았다.
“음…. 제가 갑자기 들어와 많이들 놀라셨나 보네요.”
“아, 아닙니다.”
벨라는 곧 열리게 될 축제에 대해 간략하게 얘기하고, 영애들의 의견을 함께 물었다.
“벨라 님의 책봉식도 함께 하니, 책봉식에 입으실 드레스의 색을 미리 알려주시는 것도 좋은 거 같아요.”
과연 사교계에 오래 몸담은 영애일수록, 좋은 의견이 나왔다.
“고마워요.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과찬이십니다.”
“이 요리교실은 영애들에게 도움이 많이 되나요?”
“그, 그럼요.”
하지만 벨라가 보기에는 그저 요리 교실은 핑계고 다 같이 모여 담소나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엄청 수상한데.’
그렇다고 다들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 더 추궁할 수도 없고.
‘뭐, 성과가 좋으니까 큰 문제는 없겠지.’
당분간 로잔느를 이곳에 투입시켜 감시하라고 하는 수밖에.
키엘이 그녀 자신을 좋아하는 거 같으냐 물어보러 왔지만, 이 수상쩍은 모임 때문에 까맣게 잊은 채 뒤를 돌아섰다.
* * *
하루가 갈수록 일사천리로 진행하며 많은 이들의 신임을 얻고 있는 벨라와 달리.
한때 실세였던 로한은 점점 자리를 지키기가 어려웠다.
“…쿨럭.”
특히 황제 라리에트의 몸이 점점 악화되면서.
“폐하. 괜찮으십니까?”
라리에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태자비의 책봉식은 여름 축제에 맞춰서 한다고?”
“…네.”
로한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사악하고 무서운 여자를 막을 수 있는 기한은 얼마 남지 않았다.
최대한 미룬다고 했지만, 제국의 큰 행사인 여름 축제에 맞춰서 하겠다는 여론에는 반박할 게 없었다.
로한은 책봉식이 그의 생각보다 빨라서 근심이었다.
하지만 라리에트의 생각은 많이 달랐다.
‘너무 늦어.’
그들에게 가장 좋은 건, 벨라가 황태자비로 책봉되고 1여 년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선위하면 좋겠지.
하지만 라리에트는 그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내가 버틸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리고 로한은 그런 황제를 예리하게 흘겨봤다.
이제껏 그가 실권을 잡을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마력이 없는 황제의 비밀을 그가 알고 있고, 황제를 대신하여 그가 마법을 쓰는 것처럼 교묘하게 꾸며왔었다.
황태자인 키엘도 그렇게 이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 “아무래도 황태자비 전하께서 키엘 전하에게 없는 걸 채워주시는 운명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 “제국민은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필이면 경합에서 벨라가 마법을 쓰는 바람에, 모든 것이 다 허사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손을 쓰긴 해야 하는데….’
딱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황태자를 차지하면서 벨라만 내칠 방법이.
‘역시 정치적으로 고립시키는 수밖에 없나.’
하지만 그의 계획은 시작도 하기 전에 문턱에서 막혔다.
바쁜 하루가 반복되던 더운 여름날.
벨라에게는 좋은 소식이었지만, 로한에게는 또 하나의 긴장을 선사하는 이가 등장했으니.
“벨라 님.”
“슈리아 공녀!”
바로 슈리아 크루엘이었다.
벨라는 그녀의 방을 저택에서처럼 아이스방으로 만들어놓고 더위를 피하고 있었는데.
예상도 하지 못했던 반가운 인물의 등장에 누워있던 벨라가 벌떡 일어났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어쩐 일이에요?”
슈리아를 보자마자 입이 귀에 걸려 내려올 생각을 못 했다.
후안 크루엘과 같은 은발임에도 어쩜 이리 고귀한지.
머리를 한데 묶어 높이 올린 슈리아는, 한 가문의 영애라기보다는 기대고 싶은 기사처럼 멋있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제 수도의 별채에서 쭉 지낼 생각입니다.”
벨라는 두 손을 기도하듯이 모으고 두 눈을 반짝였다.
“정말요?”
“네. 이제 제가 크루엘 공작가의 주인이니까요.”
“아하….”
벨라는 시선을 살짝 돌리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부친께서 돌아가셨을 때, 장례에 참석 못 해서 마음이 불편했답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오시기도 힘드셨을 테니까요.”
두 사람 모두 속마음은 숨기고 있었다.
벨라는 헤롯 크루엘이 어찌 되든 알 바가 아니었고.
슈리아는 가능하면 조용히 거사를 치르고 싶었다. 벨라가 본가에 온다는 것만으로 세간의 이목을 받고 싶지 않았기에.
그래서 장례가 다 끝난 후 그저 통보의 서신만을 보냈었다.
“이제 공작님이신가요?”
“…네. 그렇게 되었네요.”
슈리아는 한번 웃어 보이고, 뒤에 따라온 시종에게 손짓했다.
시종은 어깨너비만 한 상자를 가슴에 안고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이건 작은 선물입니다.”
“작아 보이지는 않는데.”
시종이 상자를 풀자, 나무로 만든 수납장이 들어 있었다.
“비슷한 걸 전하께도 선물해 드렸었답니다.”
슈리아는 장식처럼 보이는 곳에 핀셋을 꽂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뜬금없는 곳에서 비밀공간이 ‘탁’ 소리를 내며 열렸다.
“…와.”
“숨은 공간이 여러 군데니, 기밀문서는 이런 곳에 보관하시면 됩니다.”
딱히 기밀문서 같은 건 없긴 한데.
“신기하네요.”
“제국에 하나밖에 없는 거랍니다. 결혼 선물로는 제격이죠?”
벨라는 고개를 들어 슈리아와 눈을 마주쳤다.
결혼 선물이라니.
업무부터 시작한지라, 키엘과 부부의 연을 맺고 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황태자비가 되신 거, 이제야 축하하네요.”
“하하….”
“꼭 안 되셔도 괜찮았는데. 덕분에 크루엘가의 위신이 섭니다.”
벨라는 민망해서 수납장의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러자 또 새로운 비밀 공간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그리고 숨은 서랍 안에는 작은 루비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벌써 찾으셨네요. 설마 결혼 선물로 수납장 하나만 드리겠습니까?”
“…대박.”
“곳곳에 보석을 뒀으니, 찾아보세요.”
“슈리아 공녀….”
벨라는 감동하여 눈을 반짝였다.
“힘드시면 언제든지 친정집으로 오세요.”
“세상에…. 사랑해요.”
“하하….”
슈리아가 벨라에게 그저 ‘기댈 만한 곳’이라며 친정집의 가치를 축소했지만 실제로 정치계에서는 외척 세력으로서 화려하게 재등장했다.
몸이 좋지 않아 헤롯 크루엘을 대신하여 후계자로서 이미 자리가 잡혀있었던 데다가.
대중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황태자비를 등에 업으니.
로한이 벨라를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기란 불가능했다.
* * *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는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여름 축제가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제국 전체에 활기가 맴돌았다.
수도에서는 예년보다 더 화려하고 규모를 넓혀 도시의 거리마다 축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아가씨! 맛있는 거 천지예요!”
아침부터 푸르는 입에 설탕을 가득 묻히고 나타났고.
“축제의 꽃은 역시 미남 대회죵! 내일 정오에 열린대용!”
이웨르는 수도에서 나눠 준 축제 팸플릿을 가지고 와서 눈에 불을 켰다.
“너희는 놀 생각밖에 안 하니? 난 바쁜데.”
축제가 시작되는 오늘. 벨라는 할 일이 가득하였다.
벨라는 감기는 눈을 겨우 뜨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로잔느가 마이유와 함께 꽤 많은 짐을 들고 들어왔다.
“벨라 님, 좋은 아침이에요.”
시녀로 일한 지 벌써 두 달이 지난 지금. 로잔느는 능숙하게 해냈다.
벨라가 하품을 하고 일어서는 동안 로잔느는 옷장에서 미리 골라둔 드레스를 꺼내고, 가방에서 장신구를 꺼냈다.
벨라는 오늘 있을 책봉식에 입을 드레스를 언짢은 얼굴로 바라봤다.
‘물론 예쁘긴 한데….’
드레스가 쓸데없이 길었다.
다른 영애들은 드레스를 밟으면 본인이 미끄러지기 마련인데, 벨라는 드레스가 찢겨나갔다.
‘책봉식 때까지 꼼짝없이 앉아만 있어야겠네.’
그때 로잔느가 벨라의 허리 뒷부분을 몇 번 만지더니 말했다.
“다 됐어요.”
“…응? 이게 다 입은 거라고?”
벨라는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두리번거렸다.
무릎까지 오는 짧은 원피스였다. 이 옷이 책봉식 때 입을 옷이라고?
물론 어울리지 않게 흰색에 금박 장식이 과하게 달리긴 했지만.
“…원래 긴 드레스 아니야?”
“책봉식이 있기 전에 단추로 달기만 하면 돼요.”
로잔느는 없어진 드레스 원단을 손에 들고 말했다.
“벨라 님이 불편해하시는 거 같아서 탈부착이 가능한 드레스로 만들어봤어요.”
벨라는 조금 놀란 눈으로 과하게 팔을 흔들어봤다. 불편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옷이 편했다.
흔한 코르셋도 없는데 디자인만으로도 허리가 잘록해 보이기도 하고.
“세상에…. 원래 이런 드레스 아니지 않아?”
“제가 직접 수선했어요.”
“와아, 너 소질 있구나.”
실력이 늘 수밖에 없지. 여태 찢어먹은 드레스가 몇 벌인데.
“아, 아니에요. 드레스가 간소한 편이라 가능했던 거예요.”
“무슨 소리. 드레스 하단을 붙인다는 생각부터가 대단한 거야.”
벨라의 칭찬에 로잔느의 얼굴이 붉어졌다.
“저, 저는 그럼 무도회 때 갈아입을 옷도 점검할게요.”
드디어 오늘.
벨라가 공식적으로 황태자비가 되는 날이지만, 영 실감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
사실 드레스만 간소화된 게 아니었다.
책봉식도 화려하게 준비 중이었는데, 로한이 어찌나 딴죽을 많이 걸던지.
예산을 거들먹거리며.
황제의 건강을 염려하는 척하면서.
마치 곧 선위해야 할 것 같이 말하며, 큰 행사를 연이어 하는 건 좋지 않다고.
로한은 여우처럼 꽤 많은 사람을 선동했다.
조금이라도 원하는 바를 얘기하면 벨라가 사치에 찌들어 있는 악녀인 것처럼 포장했다.
그래서 책봉식은 그저 대중들 앞에서 왕관을 씌우는 걸로 끝낸다.
해보고 싶었던 퍼레이드도 안 하게 되었고.
그나마 기대할 만한 건….
“그럼 드디어 오늘이 첫날밤인가용?”
“그런데 진짜 첫날밤 맞아용? 이미 두 분….”
벨라는 이웨르의 혀부터 잘랐다.
그나마 기대할 만한 건, 축제가 끝나고 키엘과 짧은 일정으로 바닷가에 가기로 한 거였다.
벨라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보좌관인 젠킨스와 함께 책봉식이 거행될 장소로 걸었다.
“아가씨는 긴장도 안 되시나 봐요.”
“긴장할 게 뭐 있어.”
소설 속에서는 3차 경합이 끝나고 키엘의 생일에 맞춰 화려하게 약혼식을 올린다.
하지만 벨라의 사정은 달라도 많이 달랐다.
‘그러고 보니 로잔느는 소설 속에서 일 안 하던데….’
하필이면 로한을 적수로 두는 바람에 일부터 시작했고.
월급은 아직 신입인데, 직급은 과장이라고 말만 하며 폭탄 업무를 주다가.
인제 와서 새로 판 명함과 함께 밀린 월급에서 그것도 주휴수당은 제하고.
이게 다 로한 그놈 때문이지.
“이제 정식으로 황태자비니, 로한 개자식에게 어떤 혐의든 찾아내서 죽여버릴 거야.”
벨라는 로한을 생각할수록, 그가 이 소설을 비틀 게 된 핵심 인물 같았다.
키엘과 작별 인사를 제대로 할 시간을 주지 않았고.
가끔 만나러 갈 길도 끊었고.
키엘의 심복인 페터를 암살자로 보 죽게 하고, 로한이 성물여행에 대신 따라나섰지.
그러니 키엘이 로잔느와 행복한 연애를 하지 못한 게 아닐까.
게다가 결정적으로 벨라를 황태자비에 앉히게 한 것도 로한이었지.
“잠깐. 로한 그 녀석이 죽으면 키엘이랑 내가 해야 할 일이 더 늘어나니까 오히려 손해려나?”
“마계에 던지시지 그러세요?”
“흠….”
그것도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로한이 평생토록 고통에 신음하는 걸 눈으로 지켜봐야 속이 시원할 거 같았다.
그래 봐야 그녀가 후에 겪을 고통의 시간에 비하면 2%밖에 되지 않는데.
마계 이야기가 나와서인지, 벨라는 그간 생각했던 걸 젠킨스에게 물었다.
“참, 안 그래도 제국에서 사형에 준하는 범죄자들은 마계로 다 던져버릴까 생각 중인데. 어때?”
“그거 좋네요.”
“그렇지? 교도소에 굳이 쓸데없는 예산을 안 써도 되고. 마족들은 맛있는 거 먹으니 좋고.”
젠킨스가 피식하고 웃었다. 교도소에 들어갈 예산을 걱정하는 마왕이라니.
“가끔 보면 아가씨는 마계보다 인간계가 더 좋으신 거 같아요.”
벨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마계보다는 그래도 인간계가 살만하지 않아? 마족들은 도통 말귀를 못 알아듣잖아. 제멋대로고.”
“음….”
“잔바르도 봐. 저택 가서 물건만 가지고 오라는데 그게 뭐가 어렵다고 번번이 실패하는지. 대장군만 아니었으면 그냥 죽였을 거야.”
퉁명스럽게 벨라가 팔짱을 끼고 욕하자, 젠킨스는 목을 가다듬더니 그를 위해 변명했다.
“그거 도련님이 나침반 보는 걸 잘못 알려주신 거 같은데요.”
“그놈이 잘못 들었겠지. 우리 키엘이 그런 걸 모를 리가 없잖아?”
“…도련님이 따뜻하니까 빨간색이라고 했대요.”
벨라는 군말 않고 젠킨스의 귀를 잡아당겼다.
“너희 불리하면 키엘을 방패로 세우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아야야…. 진짜인 거 같던데요.”
“생각해 봐. 성물 모은다고 2년 동안 곳곳을 다녔는데, 나침반 볼 줄도 모르겠어?”
젠킨스는 억울한 눈으로 벨라를 노려봤다.
“…잔바르 님도 그런 거로 거짓말은 안 하거든요.”
“그럼 우리 키엘이 거짓말했다는 거야?”
젠킨스가 그 말을 듣자마자 씁쓸하게 웃었다. 하여튼 예나 지금이나 무조건 키엘 편이지.
“아가씨, 인간에게 너무 정 주지 마세요. 적어도 마족들은 아가씨를 배신하진 않잖아요.”
“키엘은 배신 안 해. 같이한 시간이 얼만데.”
“모두 아가씨보다 빨리 죽잖아요. 그게 배신이에요.”
“…….”
“그래서 전 인간은 친구로 안 둡니다.”
“마족들도 너 안 좋아하잖아.”
“…맞아요. 아주 뼈를 때리시네요.”
벨라는 뼈 때리는 김에 비관론자에게 일침을 놓았다.
“그렇게 뒷일만 걱정하다가, 오늘의 즐거움을 놓치면 안 되지.”
그러자 젠킨스는 입만 움직여 웃어 보였다.
“아가씨는 보기보다 긍정적이시네요.”
“…내가?”
“전 그렇게 안 되더라고요. 혼자만 늙지 않고, 친우들은 늙어 죽어가는 게 보기 힘들었거든요.”
벨라가 고개를 돌려 젠킨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많이 힘들었나 보네.”
갑작스러운 위로에 젠킨스는 당황했지만 따뜻한 감동을….
“네가 성격이 더러운 게 다 그래서였구나.”
느끼진 못했다.
* * *
책봉식은 정말 간단하게 진행되었다.
벨라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대중들 앞에 처음으로 얼굴을 보였다.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몇 번 대화 나눈 적 없는 황제가 그녀에게 물었다.
“벨라트리체 크루엘 공녀, 앞으로 제국을 위해….”
주례 같은 연설이 끝나고 황제가 키엘에게 왕관을 건넸다.
키엘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고귀한 황태자의 모습으로, 벨라의 앞에 섰다.
그는 안타까운 웃음을 한번 짓고 벨라의 머리에 보석으로 장식된 왕관을 천천히 씌워줬다.
“미안해요, 벨라. 조금 더 낭만적으로 하고 싶었는데.”
“괜찮아.”
정말 괜찮았다.
눈앞의 이 남자주인공은 예쁘고 귀여운데, 가끔은 이렇게 잘생기고 멋있기까지 했으니. 괜찮았다.
“입… 맞춰도 돼요?”
벨라는 환하게 미소로 답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숨결이 가까워질수록, 수많은 관중의 환호가 천둥소리처럼 하늘을 가를 듯 커졌다.
젠킨스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언젠가는 쌍둥이들도, 로잔느도, 슈리아도.
그리고 부드럽게 입 맞추는 키엘도.
- “모두 아가씨보다 빨리 죽잖아요.”
소설에서 나갈 수 있었던, 유일한 시점은 지나버렸고.
이제 원작대로 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 어쩌겠어. 받아들여야지.’
욕심이 불러일으킨 업보가 무서우나.
인생은 짧고, 젊음은 그저 찰나에 불과하기에.
그의 입술이 짧게 닿고 떨어질 때, 그녀는 한 번 더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춘다.
* * *
책봉식을 중심으로 여름 축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이 그 정오에 있었던 두 사람의 키스를 두고 갖가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아이들은 두 사람을 흉내 내며 소꿉놀이를 한다.
그리고 벨라의 방에서는 그녀의 수족들이 한데 모여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내 생각엔 아가씨가 도련님을 거의 잡아먹을 듯이 할 거 같앙.”
아무도 이웨르의 말에 대꾸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가씨가 나이가 더 많으니까 굉장히 잘 리드하지 않을깡?”
자꾸 들으면 들을수록.
“도련님은 수줍은 척만 할 거 같앙.”
반발하고 싶게끔 했다.
“저기, 내 생각에는 마왕님이 오히려 더 부끄러워하실 거 같은데.”
리오는 가끔 키엘의 방에서 급하게 고양이로 변하는 벨라를 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키엘이 가까이 가거나, 손을 올리거나 할 때.
그렇게 시작된 이들의 토론은 어느새 열기를 띠었다.
어찌나 집중하는지 벨라가 들어온 지도 모르고 그들끼리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성검으로 도망 못 가게 묶어 놓는 거야.”
“괜찮은뎅…? 구속 플레이 이런 거!”
게다가 수줍은 로잔느까지 껴서는 얼굴을 붉히고 말했다.
“전 오히려 벨라 님이…. 적극적인 게 좋지 않을까요.”
“난 키엘이 어디 묶이는 게 상상이 안 되는데.”
“난 상상 되용. 어릴 때 같이 납치된 적이 있었어용!”
벨라는 말문을 잃었다.
“마족 중의 하나가 죽을 각오로 훔쳐보고 생생하게 전달해주는 거 어때용?”
“푸르가 할게! 푸르는 마계에 있을 때도 잘 훔쳐 봤어!”
“어… 어디서 기다리면 되나요?”
벨라는 조용히 뒷걸음을 치고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았다.
‘미친놈들….’
그녀가 방에 들어가지 않자, 문 앞을 지키던 경비가 의아하게 물었다.
“…안 들어가세요?”
“다른 데 볼 일이 있어서.”
“황태자 전하를… 안 기다리시고요?”
오늘이 공식적으로 첫날밤이니. 당연히 황태자가 비의 처소에 올 거로 생각한 경비는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 그럼 더더욱 여기 있으면 안 되겠네.”
딱히 갈 곳도 없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 벨라는 키엘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방을 지키고 있던 경비들도 벨라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아…. 황태자비 전하. 아직 키엘 전하께서는 안 오셨습니다.”
“알고 있어. 안에서 기다릴 거야.”
“아, 안 됩니다. 벨라 님의 처소에서 기다려주십시오.”
“볼 일이 있어서 온 거니 문 열어.”
“안에 아무도 없으니 들일 수 없습니다.”
벨라는 고양이로 몰래 들어올 걸 싶었다.
“내가 오늘부터 공식적으로 황태자비 아닌가? 비키게.”
그러자 경비들은 얼굴을 붉히고 벨라를 만류했다.
“첫날밤이니 전하께서…. 벨라 님께 가실 겁니다.”
“그런 용무가 아니라서. 안에서 기다릴게.”
“그렇다면 여, 여기서 기다리셔야 합니다.”
벨라는 곰곰이 생각하다 경비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특별한 첫날밤을 보내야겠으니 들여보내 줘.”
“...네?”
벨라는 입고 있던 드레스의 팔을 살짝 내렸다.
“내가 여기서 벗고 기다릴 순 없잖아?”
두 경비의 얼굴이 새빨개져서 후다닥 문을 열었다.
‘순진하긴.’
벨라는 조소 섞인 웃음을 숨기고, 키엘의 방으로 들어갔다. 키엘이 없는 그의 방에 있어 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의 소파 위에 드러누워 하품했다.
“하여튼 다들 단체로 돌았나 봐.”
물론 궁금하고 기대할 만하겠지만, 벨라는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
‘어쨌든 한 번 몸을 섞으면 반려가 되는 걸 텐데.’
마계의 역사상 단 한 번도, 반마족이나 인간이 반려가 된 예는 없었다.
어떻게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을, 섣불리 하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어쩌면 키엘의 남은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될지도 모르는 일을, 벨라가 원한다고 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어쨌든 키엘이 선택해야지.’
아직 그럴 일은 없었지만, 혹 그가 원한다면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주고 신중하게 선택하라고 하고 싶었다.
벨라는 하품을 하다 키엘의 찬장에서 메르켄 공작령의 포도주가 눈에 들어왔다.
‘흠…. 술이 땡기네.’
비록 내기에서 졌지만, 오늘 같은 날 몰래 마셨다고 삐치진 않겠지.
‘오프너를 어디다 숨겼지…?’
일하다 마시지 마라며 숨겨둔 것 같았는데.
벨라는 포도주를 손에 들고 키엘의 책상 위를 샅샅이 살폈다.
“풉.”
그러다 슈리아 공녀가 얼마 전에 벨라에게 선물했던 것과 비슷한 모양의 수납장이 보였다.
눈에 보이는 아무 펜으로 수납장의 뒷부분을 누르자, 딱 소리를 내며 숨겨진 공간이 그 옆으로 튀어나왔다.
와인을 따는 오프너는 없었다. 그저 문서밖에 없었는데.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