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벨라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게 무서웠다.
하지만 그녀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터벅터벅 발을 끌며 문을 열었다.
“오셨다!”
“빨리 말해주세용!”
“진짜 도련님이랑 키스하셨어요?”
“어떻게 먹는 거랑….”
벌떼처럼 날아오르는 마족들을 보고 다시 문을 닫았다.
‘하…. 끈질긴 놈들.’
이럴 줄 알았지.
옆에 있던 경비들도 어젯밤 황태자가 다녀간 걸 눈빛으로 얘기했다.
‘맞는 거 같지?’
‘내가 들었다니까.’
그러다 벨라가 경비들을 서로 한 번씩 보자, 고개를 홱 돌렸다.
‘어차피 비틀어진 거…. 굳이 내가 얌전하게 지낼 필요 없잖아.’
벨라는 다시 문을 열었다.
“아가…!”
“전부 입 닥쳐.”
옆에 경비들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목을 한 바퀴 돌렸다.
“지금부터 너희 중에 제일 먼저 말하는 애를 사 등분할 거야.”
눈치 빠른 젠킨스와 이웨르는 억지로라도 입술에 손을 갖다 댔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푸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응. 잔바르 당첨.”
벨라는 오랜만에 잔바르를 사 등분으로 잘랐다.
경비들이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동공이 커졌지만 잔바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기어갔다.
“내가 그냥 붙게 해줄 거 같아?”
벨라는 사 등분 난 잔바르의 몸 하나를 집고 경비에게 던졌다.
“잘 지키세요. 내가 나올 때까지.”
그녀는 오랜만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보였다.
그녀는 대충 머리를 묶고 황궁의 티파티에 참여하기 위해 복도를 걸었다.
“저, 아가씨….”
“쉿. 입을 여물게.”
젠킨스가 자꾸 중간에 그녀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벨라는 원천부터 봉쇄했다.
‘거 더럽게 끈질기네. 대충 좀 넘어가지.’
티파티가 열린다는 정원에 도착하기 바로 전에, 누군가 벨라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아가씨. 오랜만입니다.”
은갈치, 후안 크루엘이었다.
“네. 오랜만이네요.”
보통은 예의상이라도 반갑다고 하는데, 벨라는 빈말은 하지 않았다.
“별로 안 놀라시네요?”
“네, 뭐 딱히….”
알고 있었다.
후안 크루엘이 로잔느 옆에서 호위처럼 있으면서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는걸.
벨라가 인기척을 모를 리가 없었다.
가끔 벨라의 뒤를 밟는다는 것도 알았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았었다.
뭐가 되었든 소설에 끼고 싶지 않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후안보다는 그녀를 따라다니는 영애들이 더 귀찮았던 게 두 번째 이유였으니까.
“왜요?”
그때 후안은 마치 안기라도 할 듯 가까이 다가와 그의 팔을 벨라의 머리 뒤로 올렸다.
‘이 새끼가 뭐 하는 거야.’
순식간에 벨라가 묶었던 머리핀을 슥 빼자, 곱게 올렸던 긴 머리가 스르르 풀어졌다.
“드레스 등 쪽이 많이 찢어진 거 같더군요.”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날개를 펼쳤던 게 떠올랐다.
“안 나타나려고 했는데, 아무도 얘기를 해주지 않는 것 같길래.”
젠킨스가 시선을 돌렸다. 얘기하려고 했는데 벨라가 자꾸 ‘닥치라’고 해서 말 못 한 것뿐이었다.
후안은 지긋이 벨라를 내려다봤다.
“전 무척 반가운데. 아가씨도 그런가요?”
“딱히….”
“1차 경합 때 백지 내셨더군요.”
“네?”
“혹시 도망가시고 싶으신 거라면….”
그는 벨라의 긴 머리카락을 살짝 잡고 매혹적으로 벨라를 쳐다보며 그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언제든 도와드리죠.”
기왕 모습을 드러낸 김에, 벨라를 흔들 수 있는 유혹을 내뱉고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벨라는 유혹보다는 다른 생각이 더 먼저 들었다.
‘머리 안 감았는데….’
벨라가 살짝 고개를 올려 후안을 쳐다봤다.
‘그나저나 재밌네.’
만약 이 말을 어제 이전에 들었으면, 솔깃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도망치려면 키엘에게서 심장을 꺼내야 하고, 이미 실패한 전적이 있어서 솔깃하기만 했겠지만.
“후안 크루엘 경.”
벨라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은 후안의 손 위로 딱밤을 ‘딱’하고 때렸다.
후안은 순간 ‘아’고 소리를 낼 뻔했다. 가냘파 보이는 영애의 힘이 장난이 아니라서.
“다음번에 볼 때는 황태자비 전하라고 부르세요.”
“…….”
“아가씨라고 부르지 말고.”
벨라는 후안을 살짝 노려보고 앞으로 걸어갔다.
후안의 제안을 듣고 나니 더 확신이 섰다.
이미 이 소설은 다시 되돌아갈 수 없었다.
비단 어제의 일 때문이 아니라.
원래의 것과 같지 않다는 걸, 어제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아주 권력의 정점을 찍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먼 미래의 일은, 그냥 그때 생각하기로 했다.
‘남은 시간을 버틸 수 있는 추억을 만들면 돼.’
저택에서 키엘과 지낼 때처럼, 지금은 함께 있는 시간을 만끽하는 게 더 현명한 판단이니까.
그리고.
‘이제 참는 건 그만해야지.’
이제 되는 대로 살기로 했다.
지긋지긋한 영애들의 모임에 다시는 참여하지 않을 것이며.
‘로한 그 자식도 손 봐줘야지. 그놈 때문에 소설에서 필요했던 스킨십이 다 없었던 모양이니까.’
소설을 비틀어버린 사람을 모조리 찾아서 복수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녀 본인은 당연히 제외하고.
그래야 남은 생에 후회란 없을 테니까.
‘마족들이야 평생 괴롭히면 되니까, 인간들 먼저 찾아서 아주 지옥을 선사해 줄 거야.’
굳은 결심을 하고, 벨라가 젠킨스에게 물었다.
“참, 젠킨스. 근데 왜 드레스 등 찢어진 거 말 안 했어?”
“아가씨…. 몇 번이나 말하려고 했는데 그때마다 입 다물라면서요.”
“그럴 땐 죽을 각오로 얘기해야지.”
“그래서 아까 푸르 씨가 계속 등을 가리켰잖아요.”
사실 혼내려고 물어본 거였는데.
벨라가 조금 놀란 얼굴로 젠킨스를 쳐다봤다.
“아…. 그거 춤추는 거 아니었어?”
“어느 바보가 춤을 그렇게 춥니까.”
“푸르…?”
너무 맞는 말이라 젠킨스도 더 반박하지 않았다.
“예. 앞으론 종이에 써서 드릴게요.”
* * *
황궁에서 여는 티파티는, 벨라가 크루엘가에서 준비한 파티와는 차원이 달랐다.
‘와….’
굳이 꽃으로 장식할 필요 없이 황궁의 정원에 열린 데다가 십여 개의 테이블 위로 값비싼 디저트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세상에… 저거 초콜릿 분수 아냐?’
벨라가 침을 꿀꺽 삼키자, 젠킨스가 그녀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아가씨, 이 정도는 조금 평범한 수준이에요. 입 좀 다물어주세요.”
“흠흠.”
2차 경합에서는 다섯 명 정도로 걸러져서인지, 눈에 익은 영애들은 몇 없었고 대다수 사람이 관료들처럼 보였다.
“저거 리네야?”
“네. 마법사 제복입니다.”
“저렇게 입으니까 진짜 마법사 같네.”
“저도 평소엔 가짜 마법사 같단 생각 많이 해요.”
“난 쟤가 마법 쓴 걸 거의 본 적 없단 말이야. 진짜 대마법사가 될 만하긴 해?”
젠킨스가 벨라를 살짝 내려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여기서 누가 공격하면 보호막 칠 수 있는 사람은 리네 양밖에 없을걸요?”
“나도 할 수 있는데?”
“아가씨는 스스로나 보호하겠죠. 리네 같은 경우에는 도련님 호위니까 멀리서도 정확하게 방어막 칠 수 있어요.”
그 말에 벨라가 갸우뚱했다.
“그럼 얼마 전에 폭발 사고 있었을 때는 왜 키엘에게 보호막 안 쳤대?”
“뭐, 다른 거 하고 있었겠죠. 아가씨도 자신 없으니까 몸을 그냥 던진 거 아닙니까?”
“자신 없어서 아닌데.”
정말 키엘이 위험할까 봐 달려간 거지.
“어쨌든 아가씨도 여기 계속 지낼 거면 조절하는 법 좀 배우세요.”
“어휴, 넌 잔소리 안 하면 인생에 낙이 없니?”
벨라와 젠킨스가 승강이를 벌이는 동안, 두 사람의 사이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뭐 해요?”
“도련님, 마침 잘 왔어요. 얘기 좀 해줘요, 아가씨도 마법을 배우긴 해야 한다고.”
“벨라 마음이지.”
벨라가 살짝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자, 키엘의 입술이 제일 먼저 보였다.
‘미, 미쳤나 봐.’
그러고 보니 어제 그렇게 도망가고 난 이후로 처음 마주치는 건데.
벨라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벨라, 어제 했던 말 나중에 발표할 건데.”
벨라는 애써 키엘의 뒤편을 쳐다봤다.
“…어.”
“그때 내 옆으로 와줄래요?”
“으… 응.”
벨라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남은 시간을 버틸 수 있는 추억을 만들자니.
같이 있는 동안에는 행복하게 지내면 될 거라니.
말은 쉽지만, 새빨개진 얼굴이 입과 몸을 막아선다.
‘왜 이렇게 얼굴을 못 보겠지?’
벨라는 뻣뻣하게 대답했다.
“아. 초.콜.릿.먹.어.야.지.”
팔과 다리가 동시에 나가는 것도 모르고, 그녀는 눈여겨봤던 초콜릿 분수로 향했다.
벨라의 뒷모습을 보며 키엘은 그저 미소만 지었고, 젠킨스는 잔뜩 인상을 찡그렸다.
“아가씨 왜 저래요?”
“글쎄….”
“진짜 어제 둘이 키….”
젠킨스가 키엘과 벨라를 번갈아 가며 보다 손으로 입을 가렸다.
“설마 우리 아가씨가 지금…. 부끄러워하는 건 아니겠죠?”
“귀여워….”
“혹시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어요?”
* * *
티파티에 사람들이 어느 정도 모이자, 키엘은 티파티를 열게 된 큰 이유부터 나열했다.
“다들 와줘서 감사하네.”
제일 큰 게 화국과의 교류였다. 이곳에는 화국의 사절단도 함께 있었다.
겉보기에는 서로 안면을 트는 자리 같지만, 실제로는 교류를 도맡아 갈 가문을 정할 셈이었다.
그리고 예정에는 없었지만 어젯밤에 그가 얻게 된 좋은 소식도 함께 전했다.
“…참. 그리고 사고 때문에 경합이 미뤄졌다만.”
모두 경합에 관한 이야기가 지금 나올 거라고 생각은 못 했는지 키엘을 올려다봤다.
“굳이 3차 경합을 할 필요가 있나? 어차피 내가 선택할 건데.”
다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선택이야 황태자가 하겠지만, 신중한 선택을 위해 시간을 두는 거 아닌가.
“벨라트리체 크루엘 공녀로 정했어.”
사람들이 더 시끄럽게 수군댔다.
벨라가 유명세를 치른지라 대부분 이들이 쉽게 수긍하긴 했다.
하지만 메르켄 공작가와 그 무리에게는 다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저, 전하. 그래도 그런 사안은 조금 더 생각하시고….”
“충분히 생각했어.”
“크루엘 공녀는 이세계 사람입니다. 언제든 떠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공작은 일리 있게 그의 논리를 펼쳤다.
“여태 역사를 보면 이세계에서 온 사람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돌아가는 경우도 많잖습니까.”
“메르켄 공작님의 말이 맞습니다. 꼭 크루엘 공녀를 황태자비로 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그 말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키엘을 바라봤다.
‘내가 사랑하니까….’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들이 원하는 대답은 그런 게 아니겠지.
그때 벨라의 목소리가 정적 가운데서 크게 들렸다.
“…내가 예뻐서?”
벨라의 뒤에서 젠킨스가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의 주군을 부끄러워했다.
키엘이 중대발표를 하기 조금 전.
벨라의 주변에 어느새 영애들이 모여 자기들끼리 인사를 나눴다.
“헤일리 양은 언제 내려가세요?”
“전 모레쯤 가려고요. 본가가 가까운 곳이 아니다 보니 황궁에 온 김에 며칠만 더 묵으려고요.”
이런 영애들이 많긴 했다.
황궁에서도 이런 마음을 헤아려 며칠 정도 떠날 채비를 할 수 있는 여유를 줬었다.
‘로잔느는 언제 내려가려나?’
그녀가 소설에 대해 알 리 없지만, 어찌 보면 그녀의 운명을 빼앗아 간 거니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게 묘약 쓰는 걸 실패하면 나한테 즉각 알려줬어야 할 거 아냐.’
그래서 벨라는 미안한 마음을 합리화해본다.
‘따지면 자기 복을 자기가 발로 찬 거지.’
그러다 벨라는 천천히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잠깐만, 생각해보니 너무 뜬금없는데?’
묘약이라고 착각하지 않았다면, 입 맞추는 일도 없었던 거 아닌가?
벨라야 스스로 질투심에 그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여태 억눌러왔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매일 그런 꿈을 꿨으니까-
키엘에게 벨라는 어릴 때부터 봐온 거라 남매 같고, 엄마 같을 텐데 도대체 무엇이 시발점이 되어 입을 맞춘 걸까.
벨라는 손톱을 살짝 물면서 생각했다.
분명 키스하기 전에 키엘이 했던 말은….
- “…예뻐요.”
그럼, 키엘이 그녀에게 입을 맞춘 계기가.
“내가 예뻐서?”
벨라는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진 걸 느끼고 고개를 서서히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소리들로 가득 찼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차분하지?’
모인 이들의 대다수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크루엘 공녀가 자기 입으로 정말 ‘예뻐서’ 황태자비에 어울린다는 건지.
벨라가 뒤로 몸을 살짝 빼서 젠킨스에게 조용히 물었다.
“분위기 왜 이래?”
“…아가씨가 답하셨잖아요.”
“뭘?”
메르켄 공작은 딸의 손을 꼭 잡고 벨라를 노려봤다.
“황태자비를 단순히 미색으로 뽑는다면 애초부터 미인대회를 하셨어야죠.”
그제야 벨라는 눈을 굴리며 상황을 파악했다.
‘아. 내 얘기 중이었구나.’
젠킨스가 벨라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어휴, 아가씨가 대답을 그따위로 하니까 도련님 이미지만 실추되겠어요.”
“넌 내 편이야, 키엘 편이야?”
벨라는 기침을 몇 번 하고 손을 들었다.
“잠깐만요.”
뭔지 몰라도 수습에 나섰다.
“오해하시는 거 같은데.”
그 순간 키엘과 젠킨스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고민했다.
말리는 게 나을지, 내버려 두는 게 나을지.
“물론 내 미모가 홀릴 만큼 아름다운 것도 맞지만.”
벨라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며 매혹적으로 웃었다.
“내 마음씨가 예쁘다는 말이었어요.”
“아가씨, 그건 좀….”
젠킨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벨라를 따라다니던 영애들이 그녀의 말을 지지하며 나섰다.
“그럼요. 벨라 님이 얼마나 타인의 마음을 잘 헤아려주시는데요.”
사실은 아니다. 여태 그냥 듣는 척만 했다.
“수많은 영애를 상담해주시고, 넓은 마음을 가지신 분이라고요. 물론 외모도 출중하시고!”
연애 상담은 이웨르가 다 했고 벨라는 그저 ‘헤어지세요.’만 남발했었다.
인생 상담도 벨라는 한결같이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라고만 했다.
“맞아요, 경합에 참여했던 영애들은 벨라 님이 황태자비가 된다고 하면 다들 수긍할 겁니다.”
사실이야 뭐가 됐든, 아군들이 옆에서 쫑알거리자 벨라는 손으로 코 밑을 쓱쓱 문질렀다.
‘생각보다 든든하네.’
그러나 메르켄 공작은 멈추지 않고 벨라를 비난했다.
“아무리 그래도 제국의 실정을 모르는 사람을 황후로 받아들일 사람이 어딨겠습니까.”
그리고 그때, 키엘이 조용히 하라는 듯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모두 입을 다물었을 때, 그는 나지막이 일침을 놓았다.
“1차 경합 때 내놓았던 답들을 그대들도 듣지 않았나? 여기 크루엘 공녀보다 더 객관적으로 보던 사람이 어디 있지?”
“그….”
“제국 내의 보육원 문제도 그래. 그대들은 전혀 자각도 못 하고 있지 않았나.”
“하지만 그때 폐하께….”
“그리고 내 목숨까지 구해줬는데, 뭘 더 얘기해?”
목숨 얘기가 나오자 메르켄 공작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대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키엘은 웃고 있지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내 비는 내가 정해.”
모두 숙연해졌다. 애초에 2차 경합까지 검증된 사람 중에 황태자가 고르는 거니.
벨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결혼할 사람이 정해야지, 자기들이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팔짱을 끼고 메르켄 공작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벨라트리체 크루엘 공녀.”
키엘이 벨라를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이쪽으로 오세요, 이제 그대가 있어야 할 자리는 내 옆이니.”
젠킨스가 뒤에서 벨라를 밀자, 그녀는 엉거주춤 키엘에게로 걸어갔다.
‘아…. 그 황태자비가… 나였지?’
가까이 다가가자 키엘은 늘 똑같은 미소를 그녀에게 보냈다.
벨라는 또 그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해서 괜히 다른 데를 쳐다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하… 내가 로잔느도 아닌데.’
늘 로잔느가 소극적인 게 참 답답했는데, 막상 비슷한 상황에 놓이니 미칠 것 같았다.
“벨라.”
“응?”
“아까부터 왜 피해요?”
스스로 손을 꽉 잡고 애써 태연한 척 목을 가다듬었다.
“내… 내가?”
“나 좀 봐요.”
벨라가 고개를 키엘에게로 돌렸지만, 시선은 자꾸 그 옆으로 돌아간다.
“나 보라니까.”
“아니, 저기 나무가 많이 초록색이라서.”
“…….”
“신기하네. 나무가 초록색이야….”
“더 신기한 거 있는데.”
“뭐, 뭔데?”
“어젯밤에….”
벨라는 잽싸게 손을 올려 키엘의 입을 막았다.
“안 궁금해.”
그러나 그는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벨라의 손바닥에 ‘후’하고 입김을 불어 넣었다.
벨라의 온몸에 소름이 쫙하고 돋았다.
‘미치겠네….’
누군가 이 어색함에서 제발 구해줬으면.
그리고 벨라의 바람을 듣기라도 한 듯 화국의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이 인사를 건넸다.
“키엘 전하. 안녕하십니까.”
“다과는 마음에 드는가?”
키엘이 응대하는 동안 벨라는 잽싸게 손을 내려 드레스에 손바닥을 닦았다.
“황태자비 전하도 안녕하셨습니까.”
“…벨라, 인사….”
“아, 네. 반가워요.”
이름으로 안 부르고 어색하게 황태자비라고 부르니 그녀를 얘기하는 줄 몰랐다.
“화국에서 지내신 적이 있으시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화국 사람은 이것저것 칭찬을 몇 번 하더니 본론을 조심스레 꺼냈다.
“혹시 황태자비의 자격으로 화국의 마법 폭발 사건의 원인을 같이 조사해주실 수 있을까요?”
조사하는 거야 어렵지 않긴 하지.
“음…. 저라도 괜찮다면, 도움 드릴게요.”
벨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로한이 끼어들었다.
“그럼 황태자비의 자격으로 황궁의 재정도 정리 좀 해주시죠. 황후 폐하께서 돌아가신 후로 키엘 전하께서 여태 도맡았거든요.”
거기다 주변의 사람들이 한마디씩 덧붙이기 시작했다.
“로… 로한 님, 황궁의 시종들도 인사이동이 필요할 거 같은데요.”
“그럼 연간 행사 계획도 황태자비 전하께서 이제 맡으시는 건가요?”
“다행입니다. 폐하께서 얼마 전 폭발사고에 휘말린 이후로 자주 피로해하시던데.”
벨라는 조금 멍하게 그들을 바라봤다.
이게 뭔 소리야.
“아니…. 결혼을 해야 황태자비 아냐? 안 했는데 아직? 일부터 하라고?”
벨라가 조금 화를 내자, 어떤 여성이 용기 있게 손을 들었다.
하녀장 제이미였다.
“사실 키엘 전하께서 전부 하시던 일이라, 안 그래도 일손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일부터 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 말에 벨라는 피해왔던 키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키엘도 저런 건의가 나올 거라고 생각 못 했던지, 당황해 하고 있었는데.
“이게 목적이었구나.”
“아, 아니….”
“날 부려 먹으려고….”
키엘이 변명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로한이 나섰다.
“하기 싫으시거나 능력이 안 되시면 조용히 지금 관둔다고 하셔도, 말리지 않겠습니다.”
키엘은 입술을 깨물고 로한을 노려봤다.
안 그래도 벨라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티를 팍팍 내더니.
혹시나 벨라가 하기 싫다고 도망갈까 봐 그녀의 드레스 끝을 살짝 잡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벨라는 이런 도발에 잘 넘어갔다.
“누가 못 한대요?”
벨라는 집게손가락을 까딱였다.
“다 들어와.”
로한은 마치 ‘버텨볼 수 있으면 버텨보라’며 벨라에게 겁이라도 주듯, 황태자비가 해야 할 일들을 나열했다.
“…도 하셔야 합니다.”
“끝났어요?”
“더 있지만, 현재 시급한 건 이 정도입니다.”
“뭐, 별거 아니네. 나중에 내 방으로 다 가지고 와요.”
벨라는 업신여기듯 로한을 힐끔 보고는, 초콜릿 분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미친놈.’
당이 필요했다.
중간에 키엘이 계속 로한에게 그만하라고 했지만, 그럴수록 로한은 ‘겨우 이 정도인데요?’라며 벨라를 비웃었다.
‘아주 벼르고 있었네, 저 자식.’
하지만 괜찮았다. 벨라에겐 300년산 노예 젠킨스가 있었으니.
‘혼자라면 무리지만, 젠을 부려 먹으면 되겠지.’
벨라는 마지막 남은 마시멜로를 막대에 찍어 초콜릿 분수에 갖다 댔다.
“벨라 님.”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벨라는 화들짝 놀라 마시멜로를 떨어뜨렸다.
‘…망할.’
조금 짜증이 난 채 뒤를 돌아섰지만.
“결국 벨라 님이 황태자비가 되셨네요.”
로잔느의 얼굴을 보자마자 벨라는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러네요.”
퉁퉁 부은 눈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그런데 벨라 님.”
로잔느는 시선을 약간 아래로 내리며 뜸을 들였다.
“어제 제게 왜 그런 말들을 하신 거예요?”
“…그런 말?”
“전하가 이웨르 씨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제가 그의 운명이라고 하셨잖아요.”
잠깐이나마 미안했던 마음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벨라는 싸늘하게 로잔느를 바라봤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네게 묘약을 건넸는데….’
이 소설이 원작대로 가길 누구보다 바란 사람이 벨라였다.
로잔느는 그걸 쓰지도 않았고, 벨라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그러니 네 운명을 빼앗아서 미안하지만, 결국 내게 화를 낼 자격은 없다고 생각했다.
“벨라 님…. 혹시 전하를 좋아하세요?”
로잔느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벨라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봤다.
“화… 황태자비는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하는 자리라고 배웠어요.”
벨라는 키엘이 했던 말을 그대로 로잔느에게 전했다.
“그럼 좋아하지 마세요.”
그 순하디순한 양 같은 로잔느가 독을 품은 눈빛을 내보낸다.
설마 흑화하고 이럴 건 아니지?
독을 품은 로잔느의 눈이 가리키는 건, 벨라가 아니었다.
“나쁜 남자예요.”
“…….”
“일부러 상처 주는 말만 골라서 하고.”
“그런가요.”
“이기적이고 재수 없고.”
“그, 그래요.”
“제가 사심이 있었던 걸 떠나서, 친구 하기에도 별로예요. “
그녀는 그간 서운했던 걸 쏟아내듯 말했다.
“효율과 실리만 따지고.”
독은 독인데, 본인에게 해가 되는 독인 모양이었다.
많이도 쌓였는지, 말하면서 로잔느는 점점 눈물을 글썽였다.
“면전에 두고 무시하고. 차라리 마음에 안 들면 말을 하지, 한숨만 내쉬고.”
“…….”
“갇혀 살았다더니 성격도 이상해요!”
키엘을 가둬놓고 살진 않았는데. 로잔느는 점점 눈물을 뚝뚝 흘렸다.
“황궁에서 교육받고 자랐다면서, 무슨 사람이 그렇게 못 돼 먹은 거예요?”
벨라는 조금 찔렸지만, 애써 시선을 돌렸다.
가정환경이 좀 그렇긴 했지.
맨날 기죽이는 말 하는 잔바르에, 꼼꼼하다 못해 숨 막힐 것 같은 젠킨스에.
틈만 나면 야한 농담 하는 이웨르에, 생각 없고 멍청한 푸르까지.
물론 그런 녀석들을 제어한다고 죽이겠다고 협박한 건 벨라였지만, 벨라는 자신의 잘못은 딱히 기억하지 않았다.
“진짜 나쁜 사람이에요….”
보통 누군가 키엘을 욕하면 화부터 났는데.
로잔느에게는 측은한 마음만 들었다.
벨라의 욕심 때문에 그녀의 운명을 빼앗아버렸으니.
줄곧 상담해 달라며 구구절절 자기의 대소사를 조잘거리던 영애들에게 한 말을 떠올렸다.
“세상에 좋은 사람 많아요.”
그때는 그저 거울을 보고 얘기하듯이 했는데.
“너무 한 사람에게만 집착하지 마요.”
로잔느에게는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처음 키엘을 만났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로잔느는 줄곧 그가 그녀의 ‘운명’같다는 생각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머리로는 그 사랑이 안 될 거라는 걸 알고 포기하고 싶은데, 석연치 않은 그 감정의 찌꺼기가 마음 한편에 남아 괴로웠었다.
그리고 벨라 마저 키엘과 로잔느를 ‘운명’이라고 했을 때는.
기분이 좋기보다는 오히려 불편했었다.
절대 곁을 내주지 않는 사람을 평생토록 좋아하는 게 로잔느의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라는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벨라가 ‘세상에 좋은 사람 많다.’고 한 말은, 이제 키엘을 포기해도 괜찮다는 말로 들렸다.
“고마워요, 벨라 님….”
로잔느는 그 말이 큰 위로가 되어 글썽이던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리고 로잔느의 눈물에 벨라는 당혹감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아…. 여기서 울면 내가 좀 나쁜 사람처럼 보이잖아.’
벨라가 어쩔 줄 몰라 하자, 로잔느는 그런 마음을 눈치라도 챘는지 서둘러 눈물을 닦았다.
“저, 벨라 님.”
“…네?”
“벨라 님이 주신 선인장에 꽃이 폈으니까, 소원이 이루어질 거로 생각해요.”
그 말에 벨라는 조금 의아하게 물었다.
“…무슨 소원을 빌었는데요?”
키엘이랑 잘 되는 게 네 소원 아니었니?
그러자 로잔느는 훌쩍이는 걸 멈추고 환하게 웃었다.
벨라는 질투심을 벗고 비로소 로잔느의 진정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다.
왜 그녀가 이 소설의 여자주인공인지 알 수 있을 만큼, 눈물이 맺힌 웃음은 밝고 아름다웠다.
하얀 날개가 숨겨진 듯 온몸에서 빛이 나는 사람이었다.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빌었어요.”
순간 벨라는 그녀 주변이 삽시간에 조용해지고 그녀만 홀로 서 있는 느낌을 받았다.
* * *
티파티가 끝난 후, 황궁은 오랜만에 활기가 넘쳤다.
물론 벨라가 황태자비가 될 거라는 예견이야 당연히 있었지만, 공표하는 것과는 달랐다.
제국은 그 규모만큼 일이 많았다.
키엘이 황궁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후가 죽고, 황후가 할 일을 황제와 황태자인 키엘이 나눠서 맡아야 했다.
키엘이 성물을 찾기 위해 여행을 하는 동안, 그 모든 일을 황제 라리에트가 혼자 도맡았고.
새로 황후를 뽑아야 한다는 의견도 분분했지만, 누구 하나 여식을 내놓는 가문은 없었다.
이미 늙은 황제의 아내로 보내고 싶진 않았으니.
황제는 점점 과로로 쓰러지는 일이 많았고, 그의 일을 결국 키엘이 물려받아야 했다.
제국은 과로사로 망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 똑똑하고 민심을 얻은 황태자비가 있으니, 모두 미래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 황태자의 보좌관 로한은 황제 라리에트의 옆에서 그의 일을 거들고 있었다.
“…쿨럭.”
라리에트의 기침 소리에 로한이 고개를 들었다.
마법 폭발 사고 때 로한이 그의 주변에 보호막을 치긴 했지만, 이미 내상을 입은 후였었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그래서 태자비는 크루엘가의 공녀로 정했단 건가?”
“…네. 미리 알았으면 손을 써뒀을 텐데, 화국과의 친선 다과회를 열고 그 말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라리에트는 기침을 몇 번 하고 종이를 한 장씩 넘겼다.
“어차피 그렇게 될 순서였어. 마리안느 메르켄 공녀는 덤비지도 못하겠던데.”
“그…건.”
“그래서, 예식은 언제 치를 생각이던가?”
로한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굴렸다.
“최대한 늦게 할 생각입니다. 그 사람은 절대 황후의 자리에 올라선 안 되니까요.”
라리에트는 문서를 보다 시선만 로한으로 향했다.
“올라서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그 사람은, 잔인한 사람입니다. 제국에 멸망을 불러올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는 반박하기가 힘들었다.
- “목 치는 게 무슨 공포정치예요, 16등분 정도는 해줘야 공포정치지.”
2차 경합 시에 했던 답을 들은 사람은 모두 그녀가 꽤 무서운 사람일 거라 예상했을 테니까.
하지만 국민이 원하는 황후는 단순히 자애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무섭더라도 능력 있는 사람.
마력이 없는 황태자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
그건 라리에트가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그저 날 서고 좋은 검일 뿐이야.”
“…….”
“태자가 어떻게 쓰냐에 따라 달려있겠지.”
라리에트는 그 말을 끝내고 다시 기침을 시작했다.
“폐하.”
“가능하면 빨리 식을 올리고, 선위하고 싶네.”
로한은 자신의 실세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직감했다.
* * *
벨라는 방에서 시원한 차를 마시며, 제일 처음 키엘을 데리고 왔던 날을 떠올렸다.
시종으로 써먹으려던 다섯 살처럼 보이던 여덟 살의 꼬마가 남자주인공이라는 걸 알았을 때.
밤새 소설을 읽고 고객센터를 뒤적였을 때.
[Q. 원작대로 완결한다는 기준이 뭔가요?]
[A. 독자들이 기억하는 엔딩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해피 엔딩의 경우, 주인공들의 해피 엔딩을 말합니다.]
이건 로맨스 소설이었다. 로잔느가 여자주인공인 소설.
‘그래…. 중간에 남주가 바뀔 수도 있는 거잖아.’
설령 남자주인공이 바뀌지 않는다고 해도.
꼭 두 사람이 이어지지 않아도, 서로 행복한 길을 갈 수 있으면 된 거 아닐까.
핸드폰이 꺼져서 확인할 수 없지만, 벨라는 아주 작은 희망의 불씨를 발견한 것 같았다.
‘그래. 난 로잔느가 행복해질 수 있게 도와줄 책임이 있어.’
설령 벨라가 생각한 대로가 아니라 하더라도, 지금은 조그만 가능성을 믿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로잔느가 벨라의 시녀를 계속하겠다고 했으니,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다.
‘그나저나 후안 크루엘은 이제 로잔느를 좋아할까?’
로잔느 주위의 남자라곤 후안과 키엘밖에 없을 텐데.
‘아… 후안은 싫은데.’
슈리아가 크루엘가의 가주가 될 텐데.
밥만 축내고 쓰레기만 배출할 후안에게 로잔느를 맡기자니, 그다지 행복한 결론일 거 같진 않았다.
* * *
로잔느는 마음이 홀가분했다.
온종일 울어도 보고, 그녀를 찬 키엘을 욕도 해봤다.
하지만 기분이 좋은 로잔느와 다르게 마이유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속도 좋아라. 제가 아가씨면 시녀는 절대 안 할 거예요.”
“왜?”
“전 그분 어딘가 무서워요.”
사실 로잔느도 마이유의 말에는 공감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벨라는 마치 로잔느를 싫어하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선인장도 선물로 주고, 우는 동안 별말 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기도 했었다.
“아냐. 얼마나 상냥하셨는데.”
“아가씨가 너무 순진한 거예요. 전 그분이 아가씨 끌고 가실 때, 고문이라도 하러 가는 줄 알았다니까요!”
로잔느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벨라가 원했던 건 그게 아니었지만, 로잔느에게 고문이긴 했다.
“전 솔직히 뻔히 아가씨가 전하를 좋아하는 거 알고 일부러 엿 먹이는 거라고 생각해요.”
“마이유, 여기 황궁이니까 말을 조심해야 해.”
로잔느는 혹시나 누가 들었을까 봐 주위를 둘러보며 마이유를 달랬다.
그리고 잠자코 듣고 있던 후안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재차 물었다.
“그래서 정말로 벨라트리체 공녀님이 황태자비로 확실하게 된 겁니까?”
“…네.”
마이유는 주먹을 쥐고 가슴을 쿵쿵 치며 말했다.
“보세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가씨를 전하에게 들이 내민 사람이 다음 날 황태자비가 되다니.”
모시는 아가씨가 너무 착해서 속이 문드러지는 모양이었다.
“내가 이러다 제 명에 못 살겠어요, 아가씨. 누가 봐도 속셈이 뻔하잖아요.”
“마이유, 벨라 님은 정말 그런 분 아니야.”
“뭐가 그런 분이 아니에요! 아주 얄미운 여우 같은데.”
“아니라니까. 벨라 님은 황태자비가 된다고 해도….”
로잔느가 뜸을 들이다 얼굴을 숙였다.
“날 응원해준다고 했단 말이야.”
그 말에 마이유는 입을 다물었다.
변방에 있는 프실리아 백작가야 비슷한 백작가 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겠지만.
공작가나 후작가의 경우, 개인의 의사보다는 가문의 이익을 위해 정략결혼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마이유가 조용해지며 정적이 찾아올까 싶었는데, 이제는 후안이 로잔느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소린지 자세히 말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게…. 벨라 님은 그저 황태자비를 공적인 자리로만 생각하신댔어요.”
후안이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여태 지켜본 바, 벨라가 황궁에 오고 난 이후로 키엘을 만나러 가는 일은 없었다.
비록 오늘 아침 ‘다음부터는 황태자비 전하라고 부르세요.’라고 할 때는 모든 게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역시 황태자비는 억지로 된 거였어.’
그는 한쪽 눈썹을 옮기며 그가 가지고 있는 카드를 사용하기로 했다.
“아가씨. 제가 조금 도와드릴까요?”
“…뭘요?”
“벨라 님이 황태자비를 사퇴하면, 로잔느 양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올 수 있겠죠.”
벨라의 생각대로, 후안은 로잔느에게 백해무익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벨라가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으니.
“아니요.”
여자주인공의 성장이었다.
후안도, 마이유도 조금 놀랐다.
해야 할 말도 잘 못 하는 영애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잘랐으니.
로잔느는 여태 거절당할까 무서워서 알면서도 고백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확실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나니.
로잔느는 2년간 제국을 다 여행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걸 깨달았다.
- “너무 한 사람에게만 집착하지 마요.”
그리고 작은 깨달음은 짧은 시간이지만 로잔느가 도약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졌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하지만, 전 정말 괜찮아요.”
하지만 후안은 로잔느를 업신여기듯 내려다봤다.
“사랑은 쟁취하는 자의 것입니다.”
“저…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그럼요? 늘 뺏기기만 하실 텐데요.”
“하지만… 마음은 가지고 안 가지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요. 말 잘하셨네요.”
후안은 답답하다는 듯 일어섰다.
“그게 지금 전하가 벨라 님에게 강요하는 거니까요.”
조금 전까지 당당하던 로잔느는 조심스레 후안을 올려다봤다. 알에서 깨고 나온 어린 새가, 독수리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 아가씨의 마음은 상관도 않고, 황태자비로 올렸으니까.”
마이유가 얌전히 듣고 있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설마… 황태자 전하가 벨라 님을 연모하기라도….”
그러면서 떠도는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날아다녔다.
황궁에 올라올 때, 황태자의 대열 뒤에서 따라왔다던데.
대부분은 이세계에서 와서 수모를 겪어 편의를 봐줬다고 생각했었다.
“세상에….”
“아가씨의 하녀는 아가씨보다 더 현명한 것 같군요.”
로잔느도 마이유의 얘기를 듣고 충격에 휩싸였다.
모두 말을 잃은 가운데, 후안은 뒤를 돌아섰다.
“전하를 만나러 가야겠네요.”
“…네? 이안 님요?”
후안 크루엘로 알현을 요청하는 수밖에.
위험부담이 크지만, 손 놓고 그가 10년이 넘도록 찾았던 물고기를 놓칠 수는 없었다.
* * *
크루엘가에 도착한 메리는 슈리아 크루엘을 눈앞에 두고 잔뜩 긴장해 있었다.
유명한 그 은발의 크루엘. 벨라와 정 반대의 용모이건만, 풍기는 분위기는 비슷했다.
“흐음. 벨라 님이 자네 용병단을 산하에 두고 싶다고 하는데.”
“네? 네, 네.”
넋이 나간 듯 슈리아를 보던 메리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용병단은 어딘가 묶이는 걸 더 싫어하지 않아?”
“일거리가 많이 없습니다. 요즘에는 마물이 말썽을 피우는 일도 적고요.”
슈리아는 의아한 듯 메리를 바라봤다.
보통은 부끄럽게 실태를 말하는데, ‘일거리가 없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돈만 주면 된다는 건가?”
“제 용병단은 대부분 부모의 반대로 집을 나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렇고요. 자유도 돈이 있어야 누릴 수 있더라고요.”
“하하. 그렇지.”
슈리아는 메리가 마음에 들었다. 벨라가 보낸 서신에 적혀 있듯이.
[슈리아 공녀와 성향이 비슷하니, 마음에 들어 하실 거예요.]
마음에 들지 않아도 벨라의 부탁이니 들어줄 생각이었지만.
“그럼 첫 의뢰를 맡아주겠나.”
“네, 뭔가요.”
“데이저 인근에 버려진 산적들의 본거지가 있는데, 거기에 나와 똑같은 은발의 남자가 있을 거야.”
메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아직 살아 있다면,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을에 신고해주게.”
“네.”
메리는 군말 않고 허리를 숙이고 나가려 했다.
그러다 불현듯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한 인물이 떠올랐다.
“… 저, 슈리아 공녀님.”
“뭐지?”
“혹시 그 은발의 남자가 후안 크루엘 님입니까?”
슈리아는 그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
“경력이 많은 용병인 줄 알았는데, 혀를 잘 못 놀리는구나.”
메리는 당황해서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아, 아닙니다. 제가 황궁에서 후안 크루엘님을 봐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슈리아의 표정은 더 험악해졌다.
“…뭐?”
“로잔느 프실리아 백작가 영애 옆에서 호위로 ‘이안’이란 이름을 쓰고 있었습니다. 로잔느 님이 후안 님을 데이저에서 구해줬다고만 들었습니다.”
슈리아가 콧방귀를 끼며 비웃었다.
프실리아 백작가. 인근에 있긴 하지만, 별 볼 일 없는 가문이건만.
“…확실한가?”
“제가 처음으로 활동한 곳이 데이저입니다. 공녀님은 모르시겠지만, 저는 후안 크루엘님과 공녀님을 몇 번 본 적 있습니다.”
탁. 탁. 슈리아가 손톱을 세워 의자의 팔걸이에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다.
“황궁에 숨어들었다?”
* * *
벨라는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로잔느에 대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음… 마이유도 한번 캐봐야겠어.’
한 모금씩 마실 때마다 로잔느 주변 인물을 떠올릴 때였다.
“아가씨, 지금 또 다른 생각 하시죠?”
“…어?”
벨라는 차를 마시다 고개를 들어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젠킨스를 쳐다봤다.
“지금 아가씨가 곧이곧대로 다 하겠다고 가지고 온 일거리가 이만큼 쌓여있는데. 다른 생각을 하고 계세요?”
젠킨스는 벨라의 바로 앞 테이블에 놓여있는 문서들을 가리켰다.
“아냐. 듣고 있었어.”
“제가 뭐라고 했는데요?”
벨라는 힐끔 제일 위에 있는 문서를 보고 다시 젠킨스의 눈치를 봤다.
“화…국 그거.”
“아니거든요. 황궁 재정 보고서는 저희가 찾을 수 없다고 했는데요.”
“그래! 내가 황궁 그거라고 했잖아.”
벨라는 시치미를 떼며 한쪽 눈썹을 올렸다.
“아니요. 아가씨가 경합 때 말한 보육원 실태조사 얘기하고 있었는데요.”
젠킨스는 유도신문에 넘어간 벨라를 보고 비아냥거렸다.
“아휴, 일이 너무 많아서 헷갈렸네.”
“그러게 왜 이렇게 많이 가지고 오신 거예요. 아가씨 도와드릴 사람도 저밖에 없으면서!”
벨라는 괜히 멋쩍어서 헛기침만 했다.
“도련님이 옆에서 그렇게 말렸다는 데도 ‘일단 고!’라고 했다면서요.”
로한이 자꾸 벨라를 힘만 센 무식한 영애로 생각하는 거 같아서, 일부러 더 그랬다.
“아, 알겠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일 하세요.”
이런 거보다는 로잔느가 더 중요한데.
영원 같은 지옥을 피할 수 있는 희망의 불씨를 찾았건만.
“그리고 아가씨가 이제 사교계도 담당해야 해요.”
“야, 이걸 나 혼자 어떻게 다 해.”
“도련님은 여태 이거 세 배 정도를 매일 하던데요. 그러게 왜 쓸데없는 데 허세를 부리세요?”
젠킨스의 말에 짜증은 나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하긴. 키엘은 산책도 못 하는 거 같긴 했어.’
그가 일에 파묻혀 거의 제 방에서 나오지 않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사교계는 이웨르 씨가 당분간 도와주면 되겠네요.”
“이웨르가?”
“아가씨가 영애들 모임은 이웨르 씨에게 맡겼잖아요.”
“내가?”
벨라는 바닥에 엎드린 채 턱을 괴고 있는 이웨르를 쳐다봤다.
“무슨 요리 모임 하지 않아요?”
젠킨스도 조금 놀랐는지 이웨르를 쳐다봤다.
“하…하하…. 제 요리 비법이 궁금하다고 해서 소소한 모임을 만들었죵!”
벨라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 귀족가 영애들이 요리를 물어본다고?”
그때 푸르가 번쩍하고 손을 들었다.
“저 뭔지 알아요! 저번에 크고 단단한 가지를 잘 고르는 방법을 알려줬어요!”
“…뭘 골라?”
“1차 경합 때 탈락해서 내려간 영애가 알려준 거예용! 자기 지역의 가지 요리가 그렇게 맛있대성! 호호홍.”
벨라는 잔뜩 인상을 쓴 채 이웨르를 노려봤다.
“수상한데….”
“다음에 해서 드릴게용.”
그리고 벨라는 두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키고 이웨르에게 향했다.
“내가 지켜볼 거야, 너.”
“어쨌든 친목은 이웨르 씨에게 맡기고, 아가씨는 이거부터 하나씩 보세요.”
그리고 벨라는 하나씩 그녀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쭉 훑어봤다.
‘뭐, 기왕 이렇게 된 거. 키엘도 숨통 트이게 해줘야지.’
* * *
티파티가 끝나고 며칠 동안, 키엘은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그 많은 일을 어떻게 벨라가 갑자기 다 할 수 있단 말이야?’
누가 봐도 로한이 벨라에게 텃세를 부리는 거였다.
황태자비로 벨라를 채택한다고 말한 지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일을 폭탄처럼 쏟는 사람이 어딨겠는가.
‘에휴.’
대외적인 이유는 그게 맞으니.
황궁은 독한 곳이었다.
그건 키엘이 10년 전으로 돌아가기 전에도 마찬가지였고.
황궁에 다시 들어오고 벨라를 애타게 찾을 때는 뼛속 깊이 새겨졌다.
이름뿐인 황태자 자리에서, 벨라를 그리워할 때마다 기억을 희석하는 약을 먹었고.
희미해져 가는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잊은 척해야 했으니까.
그의 약점이 벨라라는 걸 알면, 사람들이 얼마나 그녀를 질리게 할지.
또 그걸로 얼마나 키엘을 협박할지.
키엘은 여전히 불안했다.
- “내가 널 너무 사랑하나 봐….”
겨우 단 한 마디, 단 한 번의 키스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벨라가 수없이 도망치려고 한 걸 알았으니까.
다시 한번 한숨만 길게 내쉬던 때, 마음을 추스를 시간도 주지 않고 그의 방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전하. 후안 크루엘입니다.”
키엘은 조금 놀란 눈으로 문을 바라봤다.
분명 슈리아 크루엘이 그를 처리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 들어오게.”
후안은 꽤 말끔한 복장으로 서 있었다.
“오랜만이군. 마차가 전복되고 실종되었다더니, 잘 살아 있었나 보네.”
“그러게 말입니다. 운명의 여신은 제 편인듯하네요.”
키엘은 시선만 아래로 내려 책상 위에 크루엘가에서 온 최근 서신들을 훑어보았다.
가장 최근의 서신이 헤롯 크루엘 경이 곧 세상을 뜰 것 같다는 소식이었는데.
“놀라셨습니까?”
“슈리아 공녀가 그대를 찾았단 얘기는 안 했던 것 같아서.”
“아하. 전하도 아시다시피 쫓기고 있는 몸이라서 말이죠.”
키엘은 서신을 찾던 손을 멈췄다.
“쫓기고 있었나? 그렇다면 더더욱 여기엔 올 일이 없을 거 같은데.”
“목숨 걸고 찾아온 거죠.”
“무슨 일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아가씨 놓아주세요.”
키엘은 그 말에 냉소를 보였다.
그럼 얌전히 숨어서 구차한 목숨이나 연명하지.
“그 아가씨는 아십니까? 전하께서 이렇게 뒤가 구리다는 걸.”
이렇게 나타나서 키엘의 약점을 가지고 협박한다.
“참, 사람이 무섭네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그랬다는 게.”
“…….”
“대단한 집념이십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후안 경. 혀가 길군.”
“전하의 집착만큼 길죠. 어찌합니까. 그 아가씨는 집착하는 남자 싫다던데.”
“자네가 하는 것도 집착이야.”
“그 아가씨를 놓아주세요.”
그리고 그때였다.
검은 고양이가 창문을 두드린 게.
왜 평소에는 잘 오지도 않으면서, 벨라는 이럴 때에만 오는 걸까.
키엘은 애써 창가 쪽을 보지 않으면서 후안을 내보내려고 했다.
“그만 가게. 크루엘가에 연통을 넣진 않을 테니.”
“역시 불안하시죠?”
키엘은 후안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온통 고양이가 어딨는지에만 신경을 쏟았다.
자연스럽게 창가를 봤는데, 벨라는 그곳에 없었다.
‘어디 갔지?’
벨라는 진짜 고양이가 아니었다. 사람이니, 창문 정도는 혼자 열 수 있었다.
창문 밖에서 볼 때 그저 키엘이 뒤를 돌아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드르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후안 크루엘이 보였다.
‘아, 다시 나가야 하나.’
하지만 키엘의 방 안은 밖과 달리 이 세계에 에어컨이라도 있는 듯, 시원했다.
‘여기서 기다려야지.’
예의 바르게 창문까지 닫아주고 그림자 속에 숨었다.
찾아온 목적은 하나였다.
일전에 키엘이 마법 폭발 사고에 대해 정리해 놓은 보고서를 참고하려고.
‘얘기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어디 좀 숨어 있어야겠는데.’
고양이가 책상 위에서 문서를 보면 웃길 거 같아서, 책상에서 멀리 떨어진 침대 쪽으로 네 발로 걸어갔다.
“전 정말 이해가 안 갑니다. 분명 남매처럼 크셨다는데, 어떻게 연정이 오고 갈 수 있는지.”
벨라는 본의 아니게 들리는 둘의 대화에 가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뭐지? 저 자식.’
무슨 얘긴지는 몰라도 벨라와 키엘에 대한 이야기인 건 확실했다.
“피가 안 섞여도 어렸을 때부터 동생 같은 황태자님을 남자로 보겠습니까? 얼마나 더러운 사상입니까.”
벨라에게는 길을 걷다 물세례를 맞은 기분이었다.
- “내가 널 너무 사랑하나 봐….”
더러운 사상이라니.
‘뭐래, 남매처럼 가깝게 지냈다는 거지. 우리가 남매도 아닌데.’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 발톱을 세울까 고민이었는데.
“은발을 유지하려는 크루엘가의 그 사상 말하는 건가? 그대는 잘도 자네 가문의 특징을 쉽게 욕하는군.”
키엘의 아주 뼈를 때리다 못해 살을 바르는 말을 듣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로잔느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닌가 보네….’
그리고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저 자식은 왜 방해하는 거야? 자기 가문에서 황태자비가 나오면 더 좋은 거 아닌가?’
벨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불 안에서 둘의 대화를 라디오 듣듯이 흥미롭게 들었다.
키엘은 벨라가 후안이 있는 걸 알고 나중에 올 거로 생각했다.
“후안 경. 포기해. 적당히 크루엘가의 일원으로서 잘 지내.”
“싫습니다.”
“벨라는 그대를 남자로 보지 않아.”
“그건 모르는 일이죠.”
“이미 벨라를 황태자비로 채택했어.”
“그 아가씨가 원하지 않았잖아요.”
키엘은 진심으로 후안을 죽이고 싶었다.
슈리아가 했던 그 ‘공과 사를 구별해달라.’는 말만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서 검을 빼 들었으리라.
“제가 집착이 만만찮다 하셨죠.”
“후안 크루엘….”
“정말 아신다면, 전하께서는 제게 죄책감이라도 들어야 하실 텐데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틀린 말이라 어디서부터 꼬집어야 할지 난감했다.
“그대가 벨라를 찾아다닌 건 알지만, 그동안 수없이 많은 여자를 품에 안지 않았나?”
“네. 전부 검은 머리였죠.”
키엘은 그를 보며 비웃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그렇게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대가 뭘 할 건데. 벨라도 이미 황태자비를 수락했어.”
착각에 빠진 믿음은 위험했다.
후안은 마치 자신의 패가 대단하다 생각하는 듯 키엘을 협박했다.
“폭로할 겁니다. 전하께서 평민인 아가씨에게 억지로 작위를 주고, 동물왕국이라는 이세계도 없다고요.”
“그대는 푸르를 보고도….”
“저는 그 아가씨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벨라는 이불 안에서 하품도 하고 기지개를 켜며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저 새끼가 날 좋아하나 보네.’
이제 후안이 로잔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리 충격이 크지 않았다.
그래서 내버려 두려고 했는데.
듣다 보니 점점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걸 느꼈다.
폭로니. 정체니. 벨라는 털을 곤두세우고 귀를 쫑긋했다.
“마족이죠. 아가씨 옆에 있던 이들은, 전부 마족이더군요.”
후안의 말을 듣자마자, 이건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벨라는 침대의 이불 안에서 가볍게 뛰어 사람으로 변했다.
“저기요.”
이불을 거두고 나타나자, 후안의 눈이 빠질 듯이 커졌다.
당황스러운 건 키엘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왜 거기서 나와요?’
벨라는 긴 머리를 손으로 넘기며 두 사람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얌전히 있으려고 했는데, 후안이 하는 말은 선을 넘어도 너무 넘어섰다.
“자, 우리 하나씩 좀 따져봅시다.”
벨라는 오랜만에 수사하듯이 걸쭉하게 후안에게 따졌다.
“일단 난 그쪽이 왜 나를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 되네.”
벨라는 후안의 앞에 서서 팔짱을 꼈다.
“우리 뭐…. 딱히 그런 추억거리가 있어요? 옛날에 데이저에서 한번 본 거 말고는.”
후안은 이 상황이 정말 난감했다.
“전… 첫눈에 반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고백할 줄은 몰랐고.
“그 말도 이해가 안 가는데요.”
이런 식으로 거절당할 줄은 몰랐다.
자랑스럽게 유혹하듯 해야 할 말인데, 좋아하는 마음이 죄악이라도 되는 듯 부끄럽게 치부를 드러낸다.
“그리고 검은 머리만 만났는데도 나를 잊지 못했다니. 내가 살다 살다 이런 헛소리는 처음 들어봐.”
“잊어보려고 한 거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더 노력하면 되겠네.”
제국의 어느 누가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을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후안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전… 당신을 오랫동안 찾았습니다.”
“왜? 내가 찾아달라고 했어요?”
“…….”
“왜 제멋대로 굴어 놓고, 마치 보상받아야 한다는 듯이 말해?”
“그건….”
후안은 ‘전하도 마찬가지’라고 하려고 했지만, 벨라는 그의 말을 싹둑 잘라버렸다.
“어쨌든 후안 씨의 마음이니까 간섭하지는 않을 건데.”
그러면서 벨라는 키엘에게 다가가 그의 허리를 팔로 안고, 후안을 노려봤다.
“네놈이 감히 우리 키엘을 협박해?”
그 모습을 보자마자, 후안은 그저 입꼬리만 올렸다.
로잔느가 틀렸고, 마이유가 맞았다.
키엘을 보호하려고 그를 노려보는 벨라의 눈은 오래전 크루엘가의 하녀를 변호하던 슈리아의 눈과 닮아있었다.
‘당신도 전하를 좋아하는군요.’
그리고 그런 벨라를 아련하게 내려다보는 키엘.
“그것도 감히 나를 가지고?”
후안은 저 둘 사이에 끼어들 틈이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내가 족같이 대할지 가족같이 대할지 네가 하기 나름이랬지? 이 XXX아.”
벨라는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는지, 말할수록 분노를 쌓아갔다.
“아주 이 #$%^&%!”
그녀가 붉은 눈에 불이라도 날듯이 이글거리며 후안에게 욕을 해댔다.
황궁에서 갑갑하게 지내왔던지라, 한 번 고삐가 풀린 벨라는 멈출 수가 없었다.
후안은 그저 침만 삼키며 벨라를 바라봤다.
눈앞의 벨라는 그가 상상하던 벨라와는 많이 달랐다.
여름 축제 때 한 번 스치듯 봤을 때. 마을 사람들과 춤을 추면서 틀려도 해맑게 웃던 그 모습은 없었다.
그저 귀엽게 앙칼지다고만 생각했지만, 혼자 한 착각과 망상의 결과는 매우 비참했다.
“벨라, 이제 그만 해도 괜찮을 거 같아요.”
키엘이 벨라의 입을 손바닥으로 가리자 그제야 숨을 쌕쌕 내쉬었다.
“내 정체를 알았으니, 목숨을 끊어야겠네.”
“음… 벨라. 죽이면 안 돼요.”
“그럼 마계로 보내버릴까?”
“나한테 누명을 씌울 셈이에요?”
황태자의 방에 왔다가 주검이 되거나 실종이 되는 게 말일까.
게다가 키엘은 후안의 표정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그가 스스로 물러설 거라는 걸.
후안은 사방이 낭떠러지인 곳이란 걸 확인하자마자 꼬리를 내렸다.
“비밀은… 지킬 겁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어.”
벨라는 키엘의 품에서 떨어지고 후안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손톱이 점점 길어진다.
“혀라도 잘라야지.”
그리고 키엘이 조심스레 벨라의 손목을 잡았다.
“내 방에서는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그 말에 벨라는 손목을 뿌리치고 그 손으로 후안을 가리켰다. 후안과 벨라 사이로 붉은 마법진이 빛났다.
“내가 저주를 걸었으니 네 입에서 발설하는 순간 넌 마계로 가게 될거야.”
거짓말이다. 그런 마법은 없었다. 하지만 후안이 알 리가 없지.
* * *
후안을 내보내고, 리오가 들어오려고 하자 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오랜만에 벨라와 단둘이 있을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하여튼 멍청해. 내가 마족인 게 협박이 되겠어?”
키엘은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벨라의 왼편에 앉았다.
“나라면 자기가 안다는 걸 절대 비밀로 했을 거야. 폭로하기 전까지.”
그는 조심스레 한쪽 팔을 그녀의 오른쪽 어깨 뒤로 슬그머니 보냈다.
“너도 너무 착해. 저런 건 보내주지 말고 혀부터 자르든가 해야지.”
이제껏 후안이 참 싫었지만, 지금만큼은 그가 고마웠다.
조금 불안한 마음을 불 지피듯 후안은 그를 협박했지만.
“그리고 협박할 거면 나한테 해야지, 왜 너한테 그래?”
벨라는 늘 그렇듯, 항상 그의 편에 선다.
그는 벨라의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내가 저놈이 나 미행하는 것도 모르는 척해줬더니.”
그리고 차분히 잡은 손을 그에게로 끌어당겼다.
천천히 벨라가 그의 품으로 들어왔다.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어.”
“나도 그런데.”
“응? 네가?”
벨라는 고개를 살짝 돌려 키엘을 바라봤다.
‘어… 언제 이렇게 가까이 온 거지?’
언제부터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었던 건지.
그리고 이제 그는 조금 몸을 틀어 다른 한 손마저 그녀의 오른쪽 허벅지 옆의 소파를 짚었다.
벨라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 그래…. 배 밖으로 나왔구나.’
눈을 반쯤 감은 그가 점점 가까이 왔다.
다가오는 동안에는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어느새 그의 입술이 벨라의 윗입술을 살짝 맛보듯 입 맞추자 벨라는 눈을 감았다.
아랫입술을 그사이에 넣고 부드럽게 음미했다.
그녀의 허락을 받은 그는 이제 그녀의 아랫입술을 자신의 입술 사이에 넣고 부드럽게 음미했다.
꿈과 같은 시간.
언제 올지 하염없이 기다리던 시간이, 앞으로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며.
두 입술이 살짝 떨어졌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벨라의 바로 앞에 있었다.
“…이제 안 피하네요?”
벨라는 눈 대신 그의 입술에만 시선을 둔 채 대답했다.
“응.”
그리고 키엘은 마치 노래하는 것처럼 감미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벨라, 오늘 자고 가면 안 돼요?”
그 말에 벨라는 정신이 바짝 들었다.
얘 좀 봐. 간이 배 밖에 나왔다더니.
물론 벨라는 원작을 비틀 만큼의 그녀의 욕심이 이 자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거의 매일같이 키엘과 입 맞추는 꿈을 꿨으니 할 말 없긴 한데.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닌가.
‘그래도 청소년 구독 불가의 색욕을 탐하진 않은 거 같은데….’
오히려 슈리아의 말이 떠올랐었다.
- “제일 이용하기 쉬운 게 연정입니다.”
벨라는 키엘의 양 볼을 한 손으로 잡고 그의 입술을 붕어처럼 만들었다.
‘내가 사랑한다니까, 날 조련하려는 셈이니?’
가늘게 눈을 떠 노려보며 새침하게 대답했다.
“안 돼.”
키엘은 조금 실망한 눈빛이었다.
“…고양이로 자고 가면 되잖아요.”
벨라는 입가에 미소를 크게 지었다.
“귀여운 척해도 안 통해.”
그리고 벨라는 귀엽게 모은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귀엽다고 말했으니 꼬박꼬박 사용료는 내야지.
그리고 벨라는 그를 슬며시 밀어냈다.
“그럼 난 이만….”
“조금만 더 있다가 가요. 나 보고 싶어서 온 거 아냐?”
“아 맞다!”
하마터면 여기 온 목적을 잊을 뻔했다.
“그때 그 화국 보고서 어딨어?”
“…….”
“왠지 원인을 금방 찾을 수 있을 거 같아서.”
“그거 확인해 보러 온 거예요?”
“응.”
키엘은 그녀를 살짝 흘겨보며 일어섰다.
빈말이라도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면 어디 덧날까.
화국과는 교류 중에 있었기에 늘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여기.”
벨라는 자연스레 보고서를 받아 차분히 넘겼다.
화국은 처음부터 설정으로만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황태자비 경합에까지 영향을 줄 정도라면, 이 역시 벨라가 소설에 개입하며 생긴 변화라고 생각했다.
‘음…. 우연이라기에는 역시….’
처음 이 사고가 발생한 건 200년 전.
그 후로는 1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사고에 불과했다.
하지만 1153년, 즉 14년 전부터 사고는 몇 달에 한 번꼴로 빈번하게 일어났었다.
‘내가 인간계로 처음 나왔을 때였지.’
그리고 이 사건은 최근 몇 달 이내, 즉 벨라가 다시 인간계로 나온 이후로 빈도수가 점점 높아졌다.
‘내 마력이 이 세계에 영향이라도 주는 걸까.’
게다가 확실한 건, 그때 그 폭발 사건 때 느꼈던 마력의 기운은 벨라가 가끔 힘 조절을 못 할 때와 비슷했다.
벨라가 골똘히 서류를 넘기는 동안, 키엘은 그녀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고마워요, 난 사실 벨라가 이렇게 바로 일할 거라고 생각 못 했는데.”
벨라는 서류를 넘기면서 피식하고 웃었다.
“왜 웃어요?”
이렇게 급하게 황태자비로 그녀를 뽑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너 나 부려 먹으려고 여기 앉힌 거 아냐?”
그 말에 키엘은 입꼬리를 씰룩이며 벨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무슨 소리예요.”
그리고 뒤에서 그녀를 살짝 안았다.
“그런 거 아닌데….”
키엘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어릴 때부터 쭉 했던 진심을 담아,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이듯 고백했다.
“난 벨라가 좋아요.”
“응. 나도. 이거 말고 다른 서류는 더 없어?”
“…….”
그의 작은 고백은 아쉽게도 그녀의 마음에 크게 와 닿지 않았다.
애초에 키엘이 황태자비는 공적인 자리라고 하도 많이 말한 데다가, 황태자비가 된다고 하자마자 해야 할 일이 소나기처럼 쏟아져서.
‘뭐래. 자기가 너무 힘드니까 업무 분담하려고 뽑았겠지.’
당연히 키엘이 그녀를 좋아하는 거야 안다.
그렇다고 그의 마음이 그녀가 결심한 것과 같은 크기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키엘이 바로 그녀의 뒤에서 황당한 듯 그녀를 보지만, 벨라는 전혀 알지 못했다.
* * *
후안은 터벅터벅 황궁의 복도를 걸었다.
여러 번 왔던 길이지만, 오늘만큼 이 길이 길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한 사람을 찾았는데.
-“내가 찾아 달라고 했어요?”
그 말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난 이제 뭘 위해 살아가야 하지.’
크루엘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슈리아가 자신을 어떻게든 죽일 게 뻔했으니까.
그렇다고 빈털터리인 채로 거리를 쏘다닐 수도 없고.
그가 결국 향한 곳은 로잔느의 방이었다.
그곳에는 그를 ‘이안’으로 알고 있는 착한 사람이 걱정 어린 눈으로 그를 반겼다.
“이안 님. 정말 전하께 갔다 온 거예요?”
로잔느가 발을 동동 굴리며 두 손을 포갰다.
“…예.”
“가서 뭐라고 하신 거예요?”
로잔느는 철렁거리는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혹여나 이상한 말이라도 해서 키엘이나 벨라가 오해하게 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었다.
“아가씨가 틀렸어요.”
“…네?”
“당신은 그저 놀아났다고. 벨라 님도 전하에게 마음이 있었어.”
로잔느는 갑작스러운 후안의 말에 혼란스럽기만 했다.
“당신에게 질투의 화살을 전부 돌리고,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이미 내정된 저곳에 앉은 거야.”
후안이 허탈하게 웃었다.
“모두 한통속이지.”
“…….”
“아가씨가 더 속지 말라고 알려주는 거야.”
마이유가 그의 말을 듣자마자 분개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아가씨, 정말 벨라 님의 시녀를 하실 거예요?”
“하지만 벨라 님은….”
로잔느가 망설이자, 후안은 콧방귀를 꼈다.
순진한 아가씨.
후안은 그에게 생명의 은인인 로잔느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미처 몰랐다.
여기서 제일 불쌍한 건, 바로 그 자신이라는 걸.
로잔느는 후안이 나간 후 쭉 생각했었다.
여태 그녀가 봤던 키엘에 대해서.
그리고 키엘이 그녀에게 시켰던 일에 대해서.
키엘이 오랜 시간 누군가를 찾아 헤맸다는 것도 알았다.
여태 그게 이웨르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벨라의 물건을 가지고 오라고 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게 결국 벨라 님을 연모해서 그랬던 거구나.’
오래전 마이유가 그녀에게 묘약을 뒤집어씌웠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키엘은 악몽이라도 꾸는 듯, 땀을 흘리며 어떤 이름을 불렀었다.
‘그래… 벨라 님이었구나.’
그런 것도 모르고.
- “벨라 님은 너랑 내가 운명이래.”
그렇게 말했더랬지.
- “언젠가 너도 똑같이 돌려받길 바라.”
그때 키엘의 싸늘한 얼굴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다는 건 착각이 아니었었다.
‘어쩌지….’
로잔느는 여러 가지로 고민이었다. 후안이 키엘에게 뭘 어떻게 얘기할지 불안했다. 더는 미움 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후안이 돌아와서 한다는 소리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벨라 님은….”
“불쌍한 아가씨는 그렇게 속아 놓고도 사람을 믿나 보군요.”
정말 속은 걸까. 로잔느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전 속은 적 없어요.”
후안이 같잖게 보는 로잔느는 자신의 입술로 말하면서 감정을 정리해간다.
“처음부터 전 키엘 전하를 돕기 위해 온 거예요.”
“…….”
“단 한 번도 황태자비에 욕심낸 적 없고요.”
대가를 바란 적 없었다. 그저 그녀의 마음이 그리로 갔을 뿐인 거지.
후안은 진지하게 로잔느의 눈을 바라봤다.
“그냥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힘을 보태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연분홍색 머리에 어울리는 보라색 눈이 반짝거렸다.
“그리고 두 분이 서로 연정을 품는다고 해서, 제게 알려줘야 할 의무는 없잖아요.”
로잔느도 그랬다.
주변에서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거지, 나서서 키엘을 좋아한다고 얘기한 적은 없었다.
얘기해 줘야 할 의무도 없었고.
마이유는 로잔느를 보며 숙연해졌다.
철부지인 줄로만 알았던 아가씨가, 눈 깜짝할 새에 어느새 깊은 사고를 하며 타인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러니 이간질하지 마세요, 이안 님.”
로잔느는 거울을 보며 자신을 돌아보았기에, 내일로 달려갈 수 있었다.
“전 계속 벨라 님의 시녀를 할 거예요.”
후안은 콧방귀를 끼며 일어섰다.
“…그러죠.”
그리고 그는 조용히 그 방을 나갔다.
그저 생명의 은인인 이 아가씨가 더는 속지 않았으면 해서 걱정되어 한 말인데.
‘평생 그렇게 바보처럼 살아가길.’
잘못 놀린 세 치 혀로, 그는 짧은 시간 내 모든 걸 잃고 황궁을 나갔다.
하지만 그는 거울을 보지 않았기에. 날개를 잃은 독수리는 내일을 날지 못하고 바닥을 긴다.
* * *
벨라가 온갖 일을 도맡게 되자, 젠킨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 이거 혼자서는 절대 못 해요. 로한이란 사람이 준 자료도 정확한지 확인해봐야 하고.”
“…그럼 어떻게 해? 너를 복제하는 마법을 생각해볼까?”
“말이 됩니까.”
“아니면 너를 반으로 갈라서 동시에 일하는 거지. 이건 어때?”
“진지하게 말하지 마세요. 무서우니까.”
젠킨스를 복제하는 것도 안 되고.
“가능한 빨리 도울 사람을 곁에 두세요.”
“그래야겠네.”
“그리고 정말 로잔느 양을 시녀로 두실 거예요?”
“본인이 계속 황궁에 있고 싶대.”
“그래요?”
로잔느의 해피엔딩.
벨라도 사실 이 이론에 큰 기대를 걸고 있진 않았다. 사실이 아니면, 실망만 커질 테니까.
-“벨라 님 밑에서 일하면서, 제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찾아보고 싶어요.”
그러니 이건 벨라의 욕심이 아니라, 로잔느를 위해 그녀가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에 대한 속죄처럼.
그렇게 로잔느를 포함해서 여러 명의 시녀를 두게 되었지만.
하루아침에 성격이 바뀌진 않기에, 로잔느가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벨라는 다른 시녀들이 각 가문과 벨라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동안, 로잔느에게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맡겼다.
그것은 바로 벨라의 의복을 담당하는 것.
황태자비로서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드레스를 준비하고 입히는 일이었다.
사실 시녀들이 제일 하고 싶어 하는 일이기도 했다.
황태자비를 인형 옷 입히기 놀이하듯 제 입맛대로 꾸밀 수 있으니.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로잔느가 이 임무를 맡는 걸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다.
“안 돼요! 그건 푸르 일이에요!”
아니, 사람이 아니고 곰.
요즘 따라 벨라의 옷 고르는 재미에 집착하는지 푸르의 눈이 점점 살벌하게 변했다.
“…너 어차피 아무 생각 없이 아무거나 집잖아.”
“아니에요! 푸르가 얼마나 생각을 많이 하는데!”
“거짓말 하지 마. 너 속으로 ‘어느 것을 고를까요’ 노래 부르잖아!”
“어떻게 알았어요?”
그놈의 손수건에서 이제 좀 벗어나나 싶었더니.
“싫어요! 그건 푸르가 할 거예요!”
벨라 옷 입히기의 재미를 알아버린 푸르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라, 푸르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저 솜사탕을 죽여버릴 거야!”
말만 그러겠지 싶었는데, 진짜로 로잔느의 팔을 물어버리려고 푸르가 달려들었다.
벨라는 로잔느 앞으로 달려가 곰탱이의 턱을 쳐서 막아냈다.
“뒤지고 싶어?”
“저, 벨라 님… 그럼 같이하면 어떨까요?”
로잔느가 꽤 괜찮은 제안을 했지만, 푸르는 막무가내였다.
“아가씨의 알몸이 내게 아니라면, 입는 옷은 내 거야!”
“뭔 곰 소리야, 진짜!”
푸르가 이렇게 골칫덩어리로 전락하기 직전. 벨라는 곰곰이 생각하다 어려운 결심을 내렸다.
“그럼 이건 어때. 솜사탕을 푸르의 부하로 두자.”
“…내 부하요?”
“응. 그러니까 로잔느가 일하는 것도 같이 도와줘야겠지?”
어느 상사가 부하의 일을 돕겠느냐마는, 푸르는 그냥 ‘부하’라는 말에 꽂혀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로부터 몇 주의 시간이 지났다.
로한은 그녀가 무너지길 원했지만 의외로 벨라는 잘 버티고 있었다. 그것도 꽤 완벽하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처음에는 로한의 사람들이 합심해서 황태자비의 일에 협조하지 않았었다.
어떤 일이든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힘든 게 사실이니, 제풀에 지칠 거로 생각했었다.
- “그, 그래도 자료는 드려야죠.”
하지만 몇십 년간 로한의 편에 섰던 귀족들이, 벨라를 만나고 나면 갖은 핑계를 대며 그녀를 두둔했다.
‘저 무서운 여자가 협박이라도 한 게 분명하다.’
신기하게도, 로한의 생각과 달리 벨라는 아무 말도 안 했다.
- “공주님, 왜 이들에게는 말 안 들으면 죽이겠다고 안 합니까?”
- “다 죽이면 일은 누가 해요?”
- “그럼 눈만 뽑으면 되지 않아용?”
협박은 옆에 있던 마족들이 다 했지.
벨라는 그저 협조적이지 않은 귀족이 협조할 때까지 쳐다만 봤다.
그들은 마족들의 협박보다도, 벨라의 그 소름 끼치는 눈이 더 무서웠다.
붉은 피를 연상시키는 눈과 사나운 눈매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무더운 여름을 납량특집으로 만들었다.
로한은 어떻게든 벨라가 포기하길 원했다.
하지만 황궁의 인사 이동도, 재정 관리도 꼬투리 잡을 문제가 없었다.
가장 예상치 못했던 건 말썽만 피울 것 같은 수족들이었다.
이웨르와 젠킨스는, 벨라가 마계에 있는 동안 키엘의 옆에서 하녀와 호위로 일한 바가 있었다.
로한도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어 잘 알고 있었다.
일은 하나도 안 하는 하녀와 호위라서. 게다가 그 하녀는 매력적인 외모로 꽤 많은 입방아에 올랐었는데.
지금의 이웨르는 오히려 영애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 같았고.
특히 젠킨스는 로한의 새로운 적수로 떠오르고 있었다.
“우리 공주님은 겨우 요정도 자료 가지고 이만큼 해냈는데, 로한 님은 이만한 자료를 가지고도 여전히 요만큼밖에 못 하시네요.”
“…….”
“괜찮습니다. 인간들이 다 그렇죠. 공주님이 매일매일 놀라워하신답니다. 이렇게 무능한데도 제국이 잘 돌아가는구나, 하고요.”
아주 재수 없게 말하는 데는 도가 튼 젠킨스와 늘 그의 옆에 붙어 있는 덩치 좋은 잔바르 때문에 로한은 더 꼬투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단시간 내에 다 할 수 있는 거지.’
벨라는 성과를 낼 때마다 당황해 하는 로한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넌 죽었다 깨어나도 이 꼼수는 모를 거다.’
벨라가 완벽하게 일을 할 수 있던 비법은 간단했다.
‘그래. 원래 이 일을 하던 사람에게 물어보면 되지.’
그녀는 뭔가 막힐 때마다 고양이로 변해 키엘에게 찾아가 창문을 두드렸다.
처음에는 모르는 것만 물어보고 갔었다.
- “…벨라, 그냥 계속 여기 있는 게 낫지 않을까? 한 시간에 세 번씩 올 거면.”
하루에도 몇 번씩 그의 방에 찾아가게 되자 이제는 책상 위에 고양이 털을 날리며 죽치고 앉아 있었다.
“벨라, 고양이인데도 문서 잘 보네요.”
“이젠 이 모습이 더 편할 지경이야.”
처음에는 벨라도 사람의 모습으로 키엘의 옆에 있었다.
하지만 키엘의 방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한둘이어야지.
로한을 엿 먹이려고 일부러 몰래 찾아온 거라, 하루에도 몇 번씩 고양이와 사람을 번갈아 가며 변하니 금방 지쳤었다.
게다가.
- “벨라 뭐 해요?”
사람의 모습으로 그녀도 모르게 손을 혀로 핥았을 때. 그냥 고양이인 채로 있겠다 결심했었다.
“키엘, 그럼 이때는 왜 예산이 800골드고 이때는 200골드야?”
“아, 그때는 황궁의 행사가 취소됐었어요.”
벨라는 문서 위에서 양발을 바꿔가며 꾹꾹이를 하면서 들었다.
“취소됐는데도 200골드나 비용이 들어?”
“행사는 취소되어도 일한 삯은 줘야 하니까요.”
“오호라.”
까만 고양이는 붉은 눈을 깜빡거리며 꼬리를 흔들었다.
“미안해. 너도 일 많을 텐데.”
키엘은 그런 고양이를 보면서 흐뭇하게 웃으며 벨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벨라가 도와줘서 일이 줄었는걸.”
사실이었다. 그가 하던 일을 벨라가 분담하게 되었으니, 키엘에게 드디어 ‘자유시간’이란 게 생겼었다.
- “리오, 정말 오늘 할 일은 다 끝난 거야?”
- “그…그러게. 이걸 이 시간에 끝낼 수도 있구나.”
황궁에 와서 처음으로 맞는 여유.
그 시간도 전부 벨라와 함께하는 데 쓰고 싶었는데.
벨라가 그의 방에 와서 온종일 있다가 가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었다.
“벨라, 간식 먹고 싶은 거 있어요?”
“간식? 그럼 나 참치.”
“…진짜?”
벨라는 고개를 내려 자신의 발을 응시했다. 언제부터 꾹꾹이를 하고 있었던 건지. 진짜 고양이도 아닌데.
“나 원래 참치 좋아해. 사람 모습일 때도.”
“아하.”
저택에 있을 때는 한 번도 안 찾던데.
키엘은 웃으면서 깃털 달린 펜을 벨라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뭐 해?”
“그냥 고양이인 벨라랑 놀아보고 싶어서.”
벨라가 기가 찬 듯 비웃었다.
“야, 누가 진짜 고양인….”
하지만 벨라의 솜방망이는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깃털을 잡았다.
“…….”
“…….”
키엘이 펜을 쓱 빼자, 벨라가 깃털을 사수하기 위해 이젠 입으로 물었다.
벨라는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키엘을 노려보지만, 입에 물고 있는 깃털을 놓기가 싫었다.
“재밌죠?”
이래서 고양이로 오래 있는 거 싫었는데.
“흥. 나 갈래.”
“그건 왜 가지고 가요.”
벨라가 입을 벌려 펜을 놓자, 키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깃털을 흔들었다.
“나랑 놀아요.”
벨라는 키엘을 노려보다 책상 위에 있는 작은 물건들을 솜방망이로 툭툭 쳐 떨어뜨렸다.
“…….”
널브러진 펜, 각인을 찍는 도장, 키엘이 잠깐 내려놓은 브로치 등등.
“이 정도는 되어야 노는 거지.”
“복수하는 거 아냐?”
이번에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잉크병에 발을 톡 갖다 댔다.
“복수는 이 정도가 복수지.”
“진짜 쏟을 거예요?”
“너 하는 거 보고?”
“…잔인해. 다시 쓰려면 몇 시간씩 걸릴 텐데.”
키엘이 슬픈 표정으로 벨라를 내려다보자, 벨라는 슬그머니 병에서 발을 떼었다.
예나 지금이나 저 눈망울이 흔들릴 때마다 마음이 약해진다.
“아, 아니. 농담이었어.”
“뚜껑 닫혀 있었어.”
“…….”
벨라는 뚜껑 닫힌 잉크병을 발로 차버리고 홱 돌아섰다.
“나 갈 거야.”
“어디 가요, 삐쳤어요?”
키엘은 벨라를 번쩍 들어 공중에서 살랑살랑 벨라의 몸을 흔들었다.
벨라가 잔뜩 화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고양이는 화를 내도 귀여웠다.
키엘이 고양이의 입에 입을 맞추려고 하자, 벨라는 솜방망이를 쭉 뻗어 키엘의 입술을 꾹 눌렀다.
“…….”
고양이로 변해도 힘만 세 가지고.
“이거 놔. 나갈 거야!”
그때였다.
“전하. 마리안느 메르켄 공녀입니다.”
벨라는 나간다더니, 습관처럼 책상 밑에 숨어 키엘을 올려다봤다.
키엘은 그녀가 숨은 걸 확인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들어오게.”
키엘이 메르켄 공녀를 본 건 티파티 이후로 처음이었다. 마리안느는 손에 기다란 상자를 들고 있었다.
“전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오랜만이네, 공녀. 무슨 일인가?”
마리안느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일전에 일 때문에 왔습니다. 아버지께서 조금 무례하셨죠.”
그 후로 메르켄 공작이 먼저 와서 사과하는 일은 없었다.
로한의 사람이다 보니, 황태자비 자리가 비기만을 바라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마리안느는 입장이 달랐다.
그녀의 또래 영애들은 대다수가 벨라를 지지했고, 이대로는 사교계에서 고립될 것 같았다.
그리고 벨라와 두 번이나 직접 부딪혀보고 느꼈었다.
빠르게 참패를 인정하는 게 살길이라고.
“하나밖에 없는 딸인지라, 너무 애지중지하셔서 속이 많이 상하셨나 봅니다.”
“그건 공작의 생각인가, 공녀의 생각인가?”
“호호…. 아버지와 전 같은 생각이랍니다.”
마리안느는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조심스레 키엘에게 전했다.
“뭔가?”
“올해 특별히 새로운 방법으로 만든 겁니다. 내년부터는 이걸로 황궁에 납품할 생각이고요.”
상자를 열어보자 고운 빛깔의 와인이었다.
“공작 저에서도 하나 남은 거라, 사죄의 뜻으로 좋을 것 같아 급히 본가로 내려갔다 올라오는 길이랍니다.”
“…….”
“맛은 보장해 드리니, 기회가 되면 황태자비 전하와 함께 드세요.”
키엘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혹 앙심을 품고 독이라도 탔을까 봐.
“제, 제가 그동안 황태자비 전하에 대해 너무 오해하였나 봅니다. 벨라 님께서 따로 시녀를 통해 요리 교실도 열고, 많이 베푸시는데 미처 몰랐답니다.”
그 얘기는 키엘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요리 교실이면 이웨른가?’
“영애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답니다. 처음에는 저도….”
마리안느가 구구절절 설명하려고 하자 키엘은 그녀의 말을 잘랐다.
“이건 고맙네. 태자비와 함께 마시도록 하지. 자네가 전해준 것도 알려주지.”
마리안느가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키엘이 책상에 돌아와 앉았다.
벨라는 폴짝 뛰어 그의 두 허벅지 위로 올라갔다.
“나랑 먹으라고?”
그리고 그를 올려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마리안느 공녀가 뭘 주고 간 거야?”
동공이 눈의 8할만큼 커져서 눈도 깜빡이지 않고 호기심 어리게 쳐다보자, 키엘은 슬며시 웃었다.
“벨라, 나갈 거라면서요.”
“어머. 마리안느 공녀가 포도주를 주고 갔구나?”
키엘이 벨라를 잡으려 했지만, 이미 그녀는 잽싸게 뛰어간 후 사람으로 변한 뒤였다.
벨라는 포도주를 손에 들고 두리번거렸다.
“병따개 어딨어?”
“난 마실 생각 없는데.”
“왜? 주는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마셔야지.”
키엘은 손을 내밀며 벨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아직 점심도 안 됐잖아요.”
벨라가 뺏기지 않으려고 포도주를 껴안자, 그는 실소를 머금었다.
“벨라, 오랜만에 대련할래요? 벨라가 이기면 포도주 가져가요.”
“좋아! 네가 이기면 뭘 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