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지진처럼 온 땅이 흔들렸다. 삽시간에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고, 벨라는 곧바로 무슨 일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이건 마력이 폭주하는 건데.’
벨라가 마계에 있을 때 많이 느꼈던 마법의 기운이었다.
그리고 그 근원지는 황제가 앉은 곳 바로 밑.
“꺄아악!”
불꽃이 이는 커다란 운석이 황궁 전체를 향해 돌진하고, 갑자기 들이닥친 재앙에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닥에서부터 들끓는 불기둥이 황제와 그 주위를 중심으로 솟아올랐다.
“…키엘.”
옆에 있던 로한이 황제를 몸으로 보호하지만, 키엘은 혈혈단신이었다.
벨라는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그 먼 거리를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가 앉은 단상이 점점 무너질 때.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확 당겨 안았다.
“키엘!”
그리고 벨라의 발이 땅에 닿자 그녀를 중심으로 바닥이 전부 얼음으로 변하고, 동그란 결계가 쳐졌다.
결계 위로 기둥이 무너져서 부딪혀 떨어졌다.
벨라는 다 떨어지는 걸 확인하고 키엘에게 눈을 돌렸다.
“키엘, 괜찮아?”
“응.”
손을 놓고, 조금 그을린 옷을 이리저리 만지며 다시 물었다.
“어디 다친 데 없어? 괜찮은 거 맞아?”
“…괜찮아요.”
그 말에 안도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나 네가… 큰일 나는 줄 알았어….”
키엘은 조용히 벨라의 뺨에 손을 올렸다.
“…고마워.”
어떻게 이렇게 한결같이 그를 구하러 올 수 있는 건지.
늘 이 사랑을 쟁취하려면, 이렇게 목숨을 걸어야 했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리네는 이 방법이 위험하다고 했지만, 어차피 이 사랑을 얻지 못하면 그는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의 목숨을 미끼로 한 이 덫에 들어온 고양이는 아직 덫인 줄 모르고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보며 울먹였다.
“키엘, 떨어질 때 어디 부딪혔나 봐. 여기 피 나.”
“괜찮아.”
“괜찮긴. 맨날 괜찮대.”
벨라는 코를 훌쩍이며 옆을 돌아봤다.
로한은 황제를 제 몸으로 보호하며, 마법 결계를 두르고 있었다.
‘…우리 키엘은 안중에도 없어?’
물론 황태자보다 황제가 더 중요하다 생각했겠지만, 이 상황이 서러웠다.
로한도 미웠지만, 그 뒤에 보호받고 있는 황제가 더 미웠다.
“아니, 자기 아들은 보호해야 할 거 아냐….”
키엘도 조용히 옆을 바라봤다.
황궁에 들어온 후로 쭉 느꼈던 건, 결국 황제도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거였다.
마력이 없는 황제를 대신해 마법사인 로한이 황제 대신 마법을 쓰곤 했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날 구하진 않네.’
로한의 손에 잡히지 않은 황태자이니, 그럴 만도.
그리고 생각보다 리네가 일을 크게 벌였다.
자기가 활약할 정도로만 더 키워도 되느냐고 해서 그러라고 했더니.
황궁 전체에 운석이 떨어질 정도로 판을 크게 벌일 줄은 몰랐다.
“벨라 님! 저 좀! 도와줘요!”
리네는 결국 제 힘이 딸리는지, 벨라를 불렀다.
“뭐래… 내가 어떻게 도와줘?”
벨라가 난감하게 하늘을 보는 동안, 젠킨스가 어느새 다가와 잔소리를 시작했다.
“그러게 제가 공부 좀 하라고 했잖아요.”
“넌 이 와중에도 한결같이 참 재수 없네.”
“아이스방 만들던 거, 하늘에 만든다고 생각하고 써보세요.”
벨라는 툴툴거리며 손을 다시 뻗었다.
리네가 친 결계 주위로 차가운 얼음이 서리다가, 뚫고 들어올 기세로 달려오던 운석들을 감싸 안았다.
* * *
2차 경합은 아주 난장판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벨라의 하루는 젠킨스의 잔소리로 시작하고 끝을 맺었다.
“그러게, 마법 연습은 소홀히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만 말해.”
이 일은 화국의 마법 폭발사건과 유사했다.
황제의 밑에 생겨난 마법진은 일종의 보호마법이었다.
마법사들은 그 마법이 폭발해서 운석을 부르고, 불기둥을 부른 것으로 예상했다.
다만 누가 왜 황제의 밑에 마법진을 썼는지는 조사 중에 있었다.
황태자비 경합은 해당 사건의 조사가 끝날 때까지 잠시 미뤄졌다.
다친 사람도 많았고.
“지금 아가씨 때문에 피해자가 속출한다고요.”
다만 다친 원인이 마법 폭발에 의한 피해보다는, 벨라가 얼린 땅에 미끄러진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운석 떨어져서 다 같이 죽는 거보단 덜 하잖아.”
“아무리 그래도….”
“아! 조용히 해!”
벨라가 한번 성을 내자, 주변의 영애들이며 황궁의 하인들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
여태 소설이 제대로 흘러가길 바라며, 얌전히 있었는데 이제 다른 사람들이 있어도 참지 않았다.
이미 소설은 아주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으니까.
‘그렇다고 키엘을 죽게 할 순 없잖아.’
그저 남자주인공이라서가 아니라,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 행동에는 후회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받아들여야 하는 결과는 조금 잔인했다.
첫째가.
“벨라 님, 시녀로 마음에 두고 계신 영애가 있나요?”
“벨라 님은 정말 전하의 마력을 채워주기 위해 내려오신 천사님 같아요.”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벨라를 황태자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전이 ‘만약에’라는 가설을 붙였다면, 이제는 기정사실화되었다.
‘하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사태가 조금 진정되고 받았던 여론에서 벨라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으니까.
‘미치겠네….’
그리고 두 번째가.
“시녀는 로잔느 프실리아 백작가 영애로 하겠어요.”
로잔느가 2차 경합에서 확실히 떨어졌다는 거였다.
2차 경합에서 떨어진 사람들은 다 집에 가야니까, 이렇게라도 황궁에 붙들어 놓아야 했다.
‘이거 너무 질투에 사로잡혀 괴롭히는 위친데.’
키엘의 어머니도 황제의 아이를 가진 후, 몰래 궁을 빠져나왔던 황후의 시녀였었다.
‘시녀라니. 키엘이 날 미워할 거야.’
아니라고 해도 속은 미워하겠지.
벨라는 한숨만 내쉬면서 키엘의 방으로 걸어갔다.
“어머, 벨라 님. 어디 가세요?”
“키엘 전하의 방에요.”
“아….”
경합에 참여하는 영애들은 황태자를 만날 수 없는 게 규정인데.
다들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자 벨라는 싸늘한 눈으로 그들을 쏘아붙였다.
“아니꼬우면 자르라고 하세요.”
벨라에게는 탈락이 되려는 발버둥이었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합에서의 일은 일파만파 전파되었고, 이제 다른 영애가 황태자비가 되려면 훨씬 더 뛰어넘는 업적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누가 뛰어넘을 수 있을까.
마력이 없는 황태자를 위해서 동물왕국이라는 이세계에서 넘어온 벨라트리체라는 위인을.
* * *
한편, 크루엘가의 사용인들은 들뜨는 마음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몇 세대 동안 큰 업적이 없던 공작가 가문이었는데, 줄 한번 잘 서서 부와 명예를 전부 거머쥐게 되었으니.
슈리아는 병상에 누운 헤롯 크루엘의 수건을 갈아 주며 미소를 머금었다.
“아버지.”
“…슈리아.”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이제 크루엘가에서 황후가 나올 때도 되었다고.”
헤롯은 기침을 거칠게 내뱉었다.
“그게 저라고는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오라버니는 저로 알고 있더군요.”
“그….”
“이건 전하와 한 약조이니, 함구하라 하였는데.”
헤롯은 대꾸할 힘도 없었다. 한 달 전부터 병세가 심각해져 말을 하는 것도, 기침하는 것도 버거웠으니까.
“아버지께서는 끝까지 오라버니를 편애하시는군요. 하긴, 그 천성이 닮았으니 오죽 마음에 드셨겠어요.”
“슈리… 쿨럭….”
“저는 제 사람만 여기에 둘 겁니다.”
“…….”
“이게 마지막 대화가 되겠군요.”
슈리아는 그 말을 끝으로 웃으며 일어섰다.
헤롯은 최근 악화한 병세의 원인을 알았지만, 그 살벌한 미소를 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역시 그 일이 화근이었나.’
어느 순간부터 첫사랑을 잊지 못해 검은 머리에 집착하는 후안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만 들었었다.
그래서 후안이 한 하녀를 희롱한 걸 알면서도 그의 편에 서서 슈리아를 나무랐었다.
- “겨우 하녀 따위에 마음을 쓰냐.”
- “누구를 건드리든 눈감아줬습니다. 허나 내 사람은 건드리지 말았어야죠.”
- “남자의 순정이란 거야. 네가 이해해라.”
그때 슈리아의 눈빛이 그리도 잠자리를 서늘하게 했었는데.
‘인과응보인가.’
* * *
벨라는 키엘을 보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하… 얜 또 오늘은 왜 저렇게 잘생겼대.’
평소에는 제복을 곱게 갖춰 입었는데, 오늘은 그저 바지 하나에 셔츠만 입었을 뿐이었는데 그마저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소설이 이렇게 바뀐 건 벨라만 아는 사실이기에, 화를 낼 수도 없는지라 그녀는 끓는 속을 달래며 천천히 말했다.
“키엘…. 사람들이 자꾸 나를 황태자비로 몰아가는 거 같은데.”
키엘은 천천히 차를 따르다 잠시 멈칫했다.
‘이제 안심하라고 먹이 줄 땐가.’
이 큰 덫이 그녀를 옭아매는 게 아니라, 안전한 곳으로 보내려는 걸 알았으면.
“음…. 벨라, 생각해봤는데.”
“응.”
“황태자비는 내가 벨라에게 줄 수 있는 제일 큰 선물인 거 같아요.”
하지만 벨라가 원하는 답이랑은 정말 거리가 멀었다.
“…뭐?”
“처음에는 크루엘가의 양녀로 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키엘은 차를 벨라 앞에 쓱 내밀고, 자신의 찻잔을 가볍게 잡았다.
“생각해보니까 황후가 되면,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권력을 주는 거 아니겠어요?”
벨라는 눈만 깜빡였다.
“내, 내가…. 굳이 그 선물을 받아야 할까…?”
“벨라가 아니었으면, 난 이미 이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난 내가 줄 수 있는 최고를 주고 싶은데.”
“그, 그거야….”
“벨라는 싫어요? 내가 싫어?”
그런 말을 저렇게 셔츠의 단추 몇 개 풀고 조금 섹시한 듯 말하지는 말지.
“그건 아닌데….”
“그럼 뭐가 문제예요?”
벨라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이 이상했다.
‘얜 진짜 황후는 그저 도구라고 생각하나?’
슈리아와 약조를 한 것도 그렇고.
‘그럼 로잔느는 어쩌란 말이야?’
정말 제 아비처럼 정치는 따로, 사랑도 따로 생각하는 걸까.
벨라는 굳이 입 밖에 내뱉고 싶지 않은 이름을 망설이다 말했다.
“로, 로잔느는 떨어졌던데….”
키엘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저 이름을 부르고, 얘기할 때가 되었구나. 하고.
“응. 걔 떨어질 줄 알았어요.”
벨라는 고개만 갸우뚱했다.
“너… 걔 좋아하는 거 아니야?”
“좋아하긴 한데, 능력 없으면 떨어지는 거죠.”
어째 말하는 뉘앙스가 객관적이다 못해 아주 차갑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어요, 국정운영을 사심으로 할 건 아니니까. 그래서 리오도 보좌로 못 두고 있잖아요.”
리오랑 로잔느가 같은 선상은 아니지 않니.
“하지만 로잔느는… 사랑하잖아.”
키엘은 일부러 놀란 듯이 벨라를 쳐다보았다.
“벨라. 내가 여태 로잔느를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벨라는 그저 동상처럼 온몸이 굳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리고 동시에 숨어 있던 욕심이 그녀를 간지럽힌다.
“난 한 번도 로잔느를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한 적 없는데.”
벨라는 멍하게 호박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 그렇긴 하지.’
여태 저 눈이 로잔느에게 향하는 게 보기 싫어, 저 입이 로잔느를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게 듣기 싫어 회피한 건 벨라 본인이었으니까.
“매일 바… 밤마다 로잔느 만난 거 아냐? 1차 경합 있기 전에….”
키엘은 살짝 눈을 내리고 물었다.
“벨라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벨라의 입에서 소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무려 14년을 속여왔던 건데.
* * *
처음 로잔느가 황궁에 왔을 때.
그녀/는 이제껏 듣도 보도 못한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키엘이 로잔느로 선택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로잔느가 조금 답답하긴 하지만, 심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도 서툴고.
함께 여행도 했으니, 중책을 맡길만했다.
물론 로잔느가 그를 마음에 품는 건 은연중에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마음 때문에 배신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계속 벨라의 그 검은 물체를 확인하고 싶었다.
분명 그 안에 있는 내용을 보고, 벨라가 노트를 적었고 그걸 정리했으니까.
그래서 시간이 되는 틈을 타, 로잔느를 불렀다.
자고 있는 벨라의 손으로 그걸 열어, 가지고 오라고.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았고, 조작하는 법을 몰랐기에 어려웠지만.
‘이건 소설이구나.’
그 진실을 깨닫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물론 벨라의 노트를 보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의 삶이 그저 문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기에는 이 감정이, 아픔이, 너무 현실적으로 다가오니까.
그리고 소설 속에서 이것저것 눌러보다가 하나를 발견했었다.
‘고객센터?’
거기엔 수십 가지의 질문과 답변들이 차례로 나열되어 있었다.
그는 그 모든 걸 하나부터 끝까지 다 읽어내려갔다.
하지만 모든 내용을 다 읽어도, 여전히 벨라가 왜 그 소설대로 흘러가길 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굳이 그 소설의 내용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되는 것 같은데.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진실을 깨닫는 것과 그것을 감당하는 건 다르다는 걸.
그건 벨라에게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다.
이 소설이 제 생각과 다르다는 걸 받아들이려면, 그처럼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라는 걸.
* * *
벨라는 마른 입술을 차로 적시며 다시 물었다.
“그냥 가끔 새벽에 깨면 로잔느가 없었어….”
“왜 날 봤다고 생각해요?”
“그, 그거야….”
“간혹 로잔느를 보긴 했는데, 매일 본 건 아니에요.”
“…응?”
“로잔느는 내가 심어놓은 사람이에요. 물론 보고받는 건 있지만, 보고랑 실제랑 다를지도 모르니까.”
벨라는 차분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닐 거야….’
계속 들고 있다간 떨어뜨릴 것 같이, 손이 떨려왔다.
자꾸 마음 한쪽에서는 이게 바라던 바라고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키엘은 벨라의 떠는 손을 보고 차분히 화제를 돌렸다.
“벨라, 경합 때 얘기했던 보육원 얘기요.”
“응? 무슨 보육원?”
“나도 어릴 때는 조금…. 힘들었잖아요. 그래서 좀 흥미가 많이 갔어요.”
“아….”
“오늘 아침에 그래서 조사를 해봤는데, 지역마다 보육원이 없는 건 아니더라고요.”
“어….”
“그런데 보통 보육원에 가는 아이들이 평민이다 보니, 굳이 신경을 안 쓰는 거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지금 그런 거 생각할 때가 아니긴 했는데.
벨라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그에 관한 생각은 꽤 오래전부터 하던 거라, 술술 대답이 나왔다.
“예산이 조금 들겠지만, 제국에서 보육원을 따로 관리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음. 그래요?”
“단기적으로 보면 성과가 없어 보이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오히려 득이라고 생각해.”
“으흠.”
“평민이라고 재능이 없는 건 아니잖아. 조금 더 제국에 필요한 인재를 일찍부터 키울 수 있다고도 보고.”
벨라는 말을 마치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고민했다.
‘내가 그냥 여기서 사퇴한다고 할까. 심장도 빨리 돌려받아야 하는데….’
마치 가져가라며 키엘의 셔츠가 살짝 벌어져 있는데도 벨라는 시선을 돌렸다.
전에도 느꼈듯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거라는 직감이 그녀를 에워쌌기에.
감정의 바다에 표류하는 그 배가 부서질지도 몰라.
“벨라는 다른 영애들보다 제국을 더 객관적으로 보는 것 같아.”
“그래?”
“응. 벨라가 황태자비가 되면 좋을 거 같네요.”
벨라는 두 눈을 크게 뜨고 키엘을 쳐다봤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나 그럼 이만 가볼게.”
욕심의 결과를 맞닥뜨리기 전에, 그녀는 벌떡 일어서서 고양이로 변했다.
“…벨라?”
늘 그렇듯 창문으로 돌진하려고 하자, 키엘이 그녀를 잽싸게 붙잡았다.
“벨라, 나갈 때도 저 문으로 나가야죠.”
* * *
그녀가 향한 곳은 황궁에 있는 정원이었다.
‘이 동네는 혼자 조용히 있을 곳도 없어. 진짜.’
항상 어디를 가든 마족이든 사람들이 붙어 다녔다.
인적이 드물긴 하지만, 그마저도 싫었던 벨라는 정원에 있는 나무 위로 올라가 앉았다.
밑에서 올려다보면 금방이라도 들킬 위치지만, 누구도 하늘을 보지 않는 건지 아무도 몰랐다.
그녀는 조용히 핸드폰을 열었다.
여러 번 쓰고 싶었지만, 쓰지 못했던 문의를 쓸 차례였다.
[1:1 문의는 답변을 받은 후에 핸드폰이 꺼지니 긴급상황일 때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최악의 상황에서만 쓰고 싶었는데.
“원작대로 완결을 내고 싶은데 그렇게 안 돼요. 처음부터 남주 설정을 잘못 건드려서 제가 업어 키웠는데, 이것도 제가 안 키우면 남주가 죽을 거 같아서 그런 거고요. 저는 정말 원작대로….”
그러다 벨라는 눈을 조금 크게 뜨고 핸드폰을 멍하게 바라봤다.
[100/100자]
벨라는 그저 허탈하게 웃었다.
“아니, 뭐 이딴 게 다 있어.”
이 소설에 빙의 된 후로 얼마나 할 말이 많았는데, 겨우 100자 내로 쓰라니.
배달 어플 리뷰도, 소설 소개글도 100자보다는 더 쓸 수 있건만.
벨라는 쓰고 지우고를 여러 차례 반복하다 드디어 간결한 100문자를 만들어냈다.
[(컴플) 인간에 빙의를 시켜야지, 마왕으로 빙의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어렵. 원작대로 완결 내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다 안 됨. 남주 죽고 저 좀 데리고 가줘 5000년은 못살아]
이 구구절절한 사연을 다 쓰고 싶지만, 한계가 있기에 벨라는 별수 없이 이대로 전송 버튼을 눌렀다.
“하아…. 정말 쓸 거라고 생각은 못 했는데.”
잠시 후 화면에는 반가운 팝업창이 떴다.
[접수되었습니다.]
정말 이 문의가 받아들여져서, 키엘이 죽을 때 그냥 함께 끝낼 수 있다면.
조금 욕심부려서 살아도 괜찮겠지.
그런데.
“…뭐야. 왜 꺼져.”
접수만 되고 왜 답변은 없이 핸드폰이 까만 화면으로 바뀌는 건지.
“야. 야. 야!”
답변받을 때까지는 켜져 있어야 할 거 아니야!
* * *
벨라는 달이 뜨고 질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
눈물이 멈추면 내려가려고 했는데, 도저히 멈춰지지 않았다.
“흑흑….”
형부는 가끔 군대 2년을 다시 갔다 오는 꿈을 꾸면 아찔하다고 했는데, 벨라는 겪었던 지옥 4년을 다시 가야 하고, 꿈도 아니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뭘 그렇게 잘못한 걸까.
두렵고 무서운 현실이 코앞에 왔을 때, 그녀는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만 떠올렸다.
“그래…. 어쩌면 아직 키엘이 로잔느를 좋아하는 단계가 아닐 수도 있어.”
벨라는 이 극적인 상황을, 극단적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발밑으로 소환진이 열리고 잠옷이라기에는 많이 야한 옷을 입은 이웨르가 소환되었다.
“아가씨, 눈이 왜 이렇게 통통 부었어용? 울었어용?”
“입 다물어. 네 피 좀 빼자.”
“어머, 그 화국 상인이랑 연락 됐어용? 빠르네.”
이웨르는 군말 없이 자신의 팔을 벨라에게 내밀었다.
“이거 좀 더 효과 좋게 하는 방법 없어?”
“희석을 덜 하면 되지 않을까요?”
“희석 안 하고 그보다 더 효과 좋게 하려면?”
이웨르가 벨라를 멀뚱히 바라봤다.
“글쎄요, 아가씨 피도 섞으면 되지 않을까용?”
생각보다 방법은 쉬운 듯했다. 희석하는 게 더 어려우니까.
“그런데 인간들은 그렇게 쓰면 아예 정신을 못 차릴 텐데용?”
“어떻게?”
“보통은 하룻밤이지만, 그러면 평생 매혹에 시달릴 거예용.”
벨라는 씁쓸하게 웃었다.
* * *
로잔느는 꽃이 핀 선인장을 보며 빙긋 웃었다.
“다행이다. 황궁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있겠어.”
그런 로잔느를 보며 마이유는 한숨만 내쉬었다.
“어휴, 아가씨. 시녀 하는 게 좋은 일이에요? 아무리 공작가의 영애라고 해도….”
태평한 로잔느와 달리 마이유는 걱정만 앞섰다.
물론 벨라가 차기 황태자비가 될 거라는 거는 확신했다.
누가 들어도 홀릴만한 매력적인 이야기니까.
마력이 없는 황태자를 위해 이세계에서 온 태자비라니.
마치 초대 황제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물론 조금 다르긴 했지만. 황제는 검에 능한 이세계의 사람이었고, 황후였던 오르디는 대마법사였으니까.
“사람이 좀 악랄하신 거 같던데….”
마이유는 속에 있는 말을 시원하게 내뱉었다.
초대 황후였던 오르디도 아주 성질이 더럽기로 유명했는데. 그래서인지, 지금의 벨라가 더 겹쳐 보였다.
“악랄하다니. 그렇지 않아.”
하지만 로잔느는 사람의 나쁜 면을 절대 봐주지 않았다.
아침 해가 뜰 무렵.
마이유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그 방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걸 보고 놀라서 문을 열었다.
“누구….”
그리고 문 너머에 서 있는 악랄한 분을 보자마자 등골이 서늘했다.
“아, 아가씨. 여기, 베, 베, 베….”
“나가줄래. 로잔느 양과 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
“예!”
문이 쾅 닫히고, 로잔느는 기다렸다는 듯이 선인장을 벨라에게 보여줬다.
“벨라 님, 이거 보세요. 선인장에 꽃이 폈어요.”
“…그래요. 잘됐네요.”
벨라는 진심으로 웃음이 나왔다.
이 소설이 길어봐야 몇 년을 하겠는가.
그 몇 년 아픈 게, 이 소설이 비틀리고, 이들이 죽고, 남은 생을 살아야 하는 것보다 나으리라 생각했다.
“로잔느 양의 소원이 이루어질 때가 되었네요.”
벨라는 이웨르가 준 묘약을 건넸다.
“이게 뭔가요?”
뭔지 얘기하면, 로잔느의 성향상 쓰려고 하지 않겠지. 워낙 정직한 아이니까.
그래서 대충 거짓말로 둘러대려고 했는데.
“이거… 사랑의 묘약이네요?”
“…….”
알고 있었니. 묘약이 유명세를 탔다는 건 알지만, 변방의 프실리아 백작가의 영애까지 알 정도인 줄은 몰랐다.
벨라는 병이라도 다른 걸로 바꿔놓을 걸 생각했다.
‘하…. 난 뭘 해도 이렇게 엉성하니.’
결국 그냥 조금의 거짓말을 보태는 수밖에 없었다.
“로잔느 양, 키엘 전하 좋아하죠?”
“…예?”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름만 들어도 저렇게 빨개질 수 있을까.
“아… 아셨어요?”
아무래도 키엘이 벨라를 찾기 위해 허송세월을 보낸 시간만큼, 감정선이 로잔느에게 향하지 않는 거겠지.
“이걸 쓰면 진심을 알 수 있어요.”
“전하의 진심요?”
로잔느는 얼떨결에 벨라가 내미는 묘약을 받았다.
“저… 그런데 이미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고?”
벨라는 묘약을 보던 시선을 위로 살짝 올렸다.
“전하는 절 좋아하지 않아요.”
이 단순한 로잔느도 아는 걸, 벨라가 몰랐다는 사실이 조금 당황스럽긴 했다.
속은 쓰리지만, 벨라는 사실에 기반을 둬서 말했다.
“두 사람은 운명이에요. 그런데…. 운명이 조금 뒤틀려서 자꾸 어긋나는 것뿐이에요.”
“벨라 님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나는 이세계에서… 두 사람을 이어주려고 온 거였어요.”
“하지만 다들 벨라 님이 황태자비가 되실 거라고….”
벨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설령 내가 된다고 해도, 두 사람을 이어줄게요.”
이 마음을 접는 대신 원작대로 갈 수만 있다면.
이 소설이 비틀린 죗값을 받는다 생각하고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벨라의 단호한 말에 로잔느는 더 망설이며 천천히 말했다.
“그, 그런데… 전하는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는데요….”
“뭐?”
벨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게 누군데?”
로잔느가 천천히 뜸을 들여 이름을 말했다. 키엘을 그렇게 웃게 한 사람.
“…이웨르 씨요.”
“뭔 개소리야.”
갑작스러운 욕에 로잔느가 깜짝 놀라 벨라의 눈치를 봤다.
“걔 아냐.”
“하지만, 이웨르 씨가 키엘에게 사랑을 가르쳐 줬다고….”
“네가 키엘의 운명이야. 신경 쓰지 말고 내 말대로 이거 뿌리고 가.”
“그럴 순 없어요.”
“무슨 상관이야. 넌 키엘을 사랑하잖아?”
“하지만 전하는 절 사랑하지 않잖아요.”
벨라는 이 도돌이표가 짜증이 났다.
“이웨르 걘 마족이라고! 어디 감히 마족 따위가 우리 키엘에게 눈독을 들여!”
“네…?”
“이웨르 그거는 내가 처리할 테니까, 그 약을 써.”
벨라는 로잔느의 뺨에 손이라도 올리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저, 전…. 사람의 마음을 강요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누가 여자주인공 아니랄까 봐, 참 곧고 올바르게 말하는 것 봐.
한 때는 벨라도 자신이 올곧다 생각했었다.
이 소설에 빙의 되기 전까지만 해도. 아니, 마계로 다시 돌아가기 전까지만 해도.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벨라는 로잔느의 팔을 잡고 그대로 그녀를 끌고 키엘의 방으로 향했다.
“베… 벨라님?”
마지막 발악이었다.
* * *
화국에서만 있었다는 마법 폭발 사건이, 제국에서, 그것도 황태자비 2차 경합에서 일어난 일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리네가 판을 매우 크게 벌여 운석까지 떨어뜨리자, 항간에는 ‘조작된 사건’이 아니냐는 소리가 들렸다.
키엘은 한숨을 내쉬며 올라오는 보고서를 한 장씩 넘겼다.
평소 예의를 크게 차리지 않는 리네가 웬일로 마법사 제복까지 갖춰 입고 열중쉬어 자세로 서 있었다.
“이런 소리까지 들리는데, 결국 네가 원하는 건 얻지도 못했네.”
“내가 욕심이 과했습니다.”
결국 운석을 막은 건 벨라였지, 리네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대마법사에 대한 논의는 화두에 오르지 않았고.
“됐어, 생각한 거보다 성과가 크니까.”
대신 벨라의 마력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벨라 님 인기가 아주 하늘을 찌르던데.”
“…….”
“대마법사 오르디의 환생이 아니냐는 소리까지 있었어.”
키엘은 보고서를 탁자 위에 탁 하고 올렸다.
만족스러웠다.
‘잘 따라와 줬으면 좋겠는데.’
이 거대한 이야기가 덫이 되어 그녀를 사로잡을 것이다. 책임을 버리고 갈 수 없게. 키엘이 그녀를 황태자비로 삼아도, 이상하지 않게.
“화국 사절단 대표랑은 네가 얘기해 봐.”
“맡겨주십쇼, 전하.”
리네는 손으로 장난스럽게 경례하고는 그의 방을 나섰다. 리네가 문을 열자마자, 경비가 깜짝 놀랐는지 ‘헙’ 소리를 내었다.
“…무슨 일이야?”
키엘이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뻣뻣하게 서 있는 로잔느가 보였다.
“저,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로잔느는 꽃이 핀 선인장을 들고 서 있었다.
키엘은 조금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경합에 참가하는 영애는 알현이….”
그러고 보니 떨어졌었다. 키엘이 말꼬리를 흘리고 고개를 끄덕이자, 경비는 로잔느를 안으로 보내고 문을 닫았다.
“이거 벨라 님이 주셨던 선인장인데 꽃이 폈어.”
키엘은 앉은 채로 로잔느를 올려다봤다.
“…그거 얘기하러 온 거야?”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할 일도 많고, 시간도 없는데. 이런 허튼소리를 들어줘야 하나.
“있잖아….”
로잔느가 꼼지락거리는 동안 키엘은 슬쩍 봐야 하는 보고서를 손에 들고 차분히 내려다봤다.
“키엘,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마족이래.”
로잔느가 어떻게 그것까지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설마 그걸로 협박이라도 하려는 건가 싶었다.
“…그래서?”
“마족이랑은 안 되는 거잖아.”
“누가 그래?”
“벨라 님이.”
키엘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벨라가 저렇게 말한 걸까.
“벨라 님은 너랑 내가 운명이래.”
“…….”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자꾸 네가 내 운명 같다는 생각.”
그는 손에 있던 보고서를 그대로 구겨버렸다.
“내 운명은 내가 정해. 넌 아니야.”
그러자 로잔느는 선인장 화분 위에 올려져 있는 묘약으로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 * *
벨라는 다시 마족들이 들끓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마음의 안정을 찾고 있었다.
이웨르를 벌주면서.
처음에 채찍을 가지고 와서 때리니까 오히려 좋아하길래 천장에 거꾸로 매달아 놓으니 그제야 벌이라고 인식했다.
“전 그냥 장난 좀 쳤을 뿐이라고용, 그것도 딱 한 번!”
벨라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 소설에서 절대 껴서는 안 되는 이 마족들이 모두 깽판을 친 거구나.
“난… 이 이야기를 틀어 놓은 사람을 모조리 다 찾아서 잡아 죽여버릴 생각이야.”
“무슨 이야기용?”
“입 다물어.”
“아항. 그렇게 노려보는 거 좋아용.”
벨라는 혀를 차고 시선을 돌렸다.
‘내가 쟤는 진짜 못 이기겠다.’
창밖으로 노을이 하늘을 수놓을 때였다.
이웨르를 벌주던 벨라는 예상 못 한 방문자의 모습을 보고 씁쓸하게 웃었다.
“…키엘.”
키엘은 머리가 살짝 헝클어지고, 붉은 얼굴로 서 있었다.
‘뭘 하다 왔길래….’
라고 생각하다가 벨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벨라가 직접 로잔느를 끌고 키엘의 방 앞까지 데리고 갔으니. 로잔느와 무슨 일이 있긴 했겠지.
“어쩐 일이야?”
키엘의 손에는 긴 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일단 이거 입어볼래요?”
그 말에 이웨르와 푸르가 눈에 불을 켜고 드레스에 달려들었다.
“둘 다 나가.”
키엘이 작게 말하자, 이웨르는 단번에 감을 잡았지만 푸르는 고개를 저었다.
“싫은데! 공주님 옷은 내가 갈아….”
이럴 줄 알았는지, 키엘은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푸르에게 건네줬다.
둘 다 나가자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벨라에게 다가갔다.
“크루엘가에서 벨라에게 전해주라고 서신이랑 왔었는데, 잠깐 잊고 있었어요.”
그런 걸 황태자가 직접 가져다주는 건 좀 이상한데.
하지만 벨라는 토 달지 않고 드레스를 받았다.
가림막 너머로 옷을 다 갈아입은 벨라가 그의 앞에서 옷자락을 보여줬다.
“…됐어?”
“옷이 좀 큰 거 같은데.”
“난 괜찮은데. 모자도 있는 거야?”
벨라는 모자까지 받아서 머리에 쓰고 한 바퀴를 뺑 돌았다.
“괜찮아?”
“응. 잘 어울리네.”
벨라는 슬쩍 키엘을 바라봤다.
노을빛이 그의 머리카락에 살포시 내리 앉았고.
호박색 눈은 달콤한 꿀을 연상시켰다.
벨라를 보고 살짝 미소 짓는 얼굴을 보며,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내가 이 마음을 접을 수 있을까.’
아침에 했던 로잔느의 말처럼.
-“사람의 마음을 강요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녀 스스로 그녀의 마음을 강요할 수 있는 걸까.
벨라는 키엘을 빨리 내보내고 싶었다. 보면 볼수록, 욕심이 그녀를 에워쌀 것 같았다.
“그럼 내일 이거 입고 가면 되는….”
성급히 모자를 벗었는데.
어째 머리가 살짝 촉촉해진 기분이 들어 모자 안을 바라봤다.
왜 묘약의 빈 병이 여기에 있는 걸까.
“…이거.”
벨라가 멍하게 보고 있는 사이, 키엘이 어느새 벨라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아까 로잔느가 이상한 걸 들고 있길래 압수했는데.”
벨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짐이 많아서 내가 거기 잠깐 둔 걸 깜빡했네.”
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정수리를 만져봤다.
콰당 하는 소리가 들린다. 내 꾀에 내가 넘어지는 소리가.
“안에 있던 게 살짝 흘러나온 거 같은데.”
키엘도 다가와 벨라의 머리에 살짝 손을 댔다.
“미안해요. 혹시 다쳤어요?”
“아, 아니.”
“그래요?”
로잔느에게 줬던 묘약을 그녀가 덮어쓰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묘약의 매혹이 시작되니 이대로 멀리 도망이라도 쳐야 하는데.
“…다행이네.”
그가 걱정하는 눈으로 벨라를 내려다본 그 순간부터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응.”
조금 전, 맑고 투명한 꿀 같은 그의 눈빛이 점점 진득한 꿀처럼 변해간다.
저 호박색의 그물에 사로잡혀 있을 때.
키엘이 입술을 천천히 떼며 그녀의 이름을 야릇하게 불렀다.
“벨라.”
두 눈을 마주하던 그의 시선이, 살짝 내려가 벨라의 입술을 향했다.
“…예뻐요.”
벨라는 이제야 이 소설을 바꾼 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였구나.’
잔잔한 수면 아래로 물 밑의 소용돌이가 일렁이고 있었지만, 이제껏 아무것도 모른 채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해서… 바뀐 거야.’
그것이 부메랑처럼 해일이 되어 돌아오고 있는데도.
- “원작대로 결말이 안 난다면, 빙의자의 의지로 바뀐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의 입술이 그녀에게 홀려 다가오지만 거부할 수가 없었다.
아침에만 해도, 키엘은 속이 썩어들어가는 줄 알았다.
“벨라 님은 너랑 내가 운명이래.”
키엘은 로잔느가 들고 온 선인장 화분 위에 이웨르의 묘약이 보였다.
억지로 저 여자를 받아들이라는 벨라의 마음이 그의 가슴에 구멍을 뚫었다.
숨을 쉴 때마다 시린 바람이 그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로잔느. 난 네가 싫어.”
“난….”
“조금 잘해준다고, 마음을 다 여는 것도 이해가 안 되고.”
“…….”
“내가 그렇게 완곡하게 거절의 의사를 몇 번이고 보냈는데, 왜….”
로잔느가 울먹거리지만, 키엘은 그 모습이 더 싫었다.
“그렇게 울어서 날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마. 역겨우니까.”
로잔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렇게 말하면 너무 상처잖아.”
“…….”
“나 너 정말 오래 좋아했어.”
그걸 아니까 키엘도 이제껏 참았던 거였다.
“넌 내게는 나쁜 사람이야.”
“알아.”
“언젠가…. 너도 똑같이 돌려받길 바라.”
키엘은 싸늘한 표정으로 로잔느를 노려봤다.
‘이미 그러고 있어.’
처음 벨라가 잘해줬을 때 마음을 열었던 탓에.
울면서 그녀를 여기까지 끌어왔고. 그녀의 완곡한 거절을 인정하지 못한다.
어쩌면 거울과도 같아서 싫었던 게 아닐까 하며.
로잔느가 들고 있는 화분에서 이웨르의 묘약을 꺼냈다.
묘약 병을 모자에 숨긴 건, 조금 짓궂긴 했었다.
너무하다는 걸 알지만, 덫 안에 든 고양이가 자꾸 그를 거부하고 털을 세우니까.
이 작은 함정에 빠지면 아주 짧게라도 입을 맞출 수 있겠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찢어지다 못해 갈기갈기 조각난 마음을 달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예뻐요.”
그는 천천히 이 시간이 영원하길 바라며 가까이 다가가고.
하나, 둘, 셋. 속으로 수를 헤아리며 그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어릴 때부터 해왔던 뽀뽀니까, 욕망을 숨긴 속임수는 여기까지라고.
스스로 선을 긋고 벨라를 마주 봤을 때.
그녀의 붉은 눈에 하얀빛이 일렁거렸다.
키엘은 벨라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왜 울어요?”
혹시 울 정도로 싫은 걸까.
습관처럼 최악의 답변을 먼저 떠올린 그는 그녀의 뺨 위로 천천히 손을 올렸다.
* * *
벨라는 입술이 가볍게 포개어지는 순간부터 흐르기 시작한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그가 천천히 떨어지고, 따뜻한 손이 차가운 눈물을 보듬어준다.
욕심은 한도 끝도 없다고들 한다.
슈리아가 했던 말대로.
제 주제에 맞게 받을 수 있는 사랑을 받으면 멈춰야 할 텐데.
“…벨라.”
속삭이듯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그녀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리는 종소리처럼 들렸다.
“어떡하지….”
한 번 발끝에 닿은 파도의 거품을 확인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해안가인 줄 알았던 곳은 끝이 보이지 않은 망망대해였다.
감정의 바다 위에서 표류하던 배가 산산이 조각나 부서지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이 마음에 잠긴다.
그 밑이 어딘지 알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바다의 의미를.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하나 봐….”
손에 들고 있던 모자를 땅에 떨어뜨렸다.
툭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에 맞춰, 벨라는 까치발을 들어 한 발자국 더 욕심을 부려본다.
다시 맞닿는 입술은 짧지 않았다.
깊은 바닷속으로 잠식해 숨이 막히기 전, 그의 숨만이 그녀의 유일한 호흡이 된다.
“하….”
한 번의 숨소리가 둘 사이를 에워싸고 나면, 서로의 입술은 아주 조금씩 더 깊숙이 서로 향한다.
벨라에게는 꿈에서만 꾸던 순간이, 키엘에게는 오래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입 안 가득 서로의 체취에 취해 있었다.
그의 혀는 부드럽게 그녀의 입 안에서 춤을 추었다.
힘이 점점 빠져나가고. 키엘은 그런 벨라의 목 뒤를 바쳐주며 이 춤을 이어나갔다.
황궁 무도회 때 춤을 추던 것처럼, 그녀를 동화 속으로 이끌어준다.
그리고 입맞춤에 마치 저주라도 풀리듯, 이따금 아팠던 등에서 커다랗고 검은 날개가 펼쳐졌다.
벨라의 마력이 빠르게 그녀의 몸을 회복하는 걸 느꼈다.
몽마도 아닌데, 그의 정기를 먹고 회복이라도 되는 듯이.
“아….”
날갯짓 한 번에 온 바람이 서로를 감싸 안자, 그제야 둘은 단비 같았던 입맞춤을 그치고 서로의 입술만 바라봤다.
키엘은 벨라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렸다.
“벨라.”
그리고 그는 벨라의 손을 살짝 떼고,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시선을 올려다보니, 눈가가 조금 붉어진 호박색 눈이 벨라를 삼킬 듯 사로잡고.
그의 숨결이 손 안에서 돌아다니며 그녀의 온몸을 간지럽힌다.
“내 비가 되어줘요.”
- “평생 매혹에 시달릴 거예용.”
저 말도 결국 매혹되어 하는 말일 텐데.
‘내가 널 이렇게 유혹해도 될까.’
양심에 가책이 조금 느껴지지만.
돌이키기에는 늦어버린 그녀의 욕심이 모든 걸 지배하고 입술을 움직인다.
“…응.”
그리고 그때.
쾅. 하고 문을 열어젖힌 건 젠킨스였다.
“아가씨! 이게 무슨 마력이에요!”
문에 바짝 붙어서 귀를 대고 있던 이웨르와 푸르가 땅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예고 좀 하고 열라구용.”
“아이고오!”
뒤에서 젠킨스를 따라 들어온 잔바르가 그들을 넘어서며 혀를 끌끌 찼다.
“와, 잔바르 님이 무시하니까 기분 진짜 더럽당.”
“나도!”
벨라는 얼굴이 상기된 채 살짝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지금 뭐 하세요?”
조금 놀란 젠킨스와 많이 놀란 잔바르.
그리고 미간을 찌푸리며 무슨 상황인지 유추하려는 이웨르를 보자마자 두근거리던 심장이 차분하게 뛰기 시작했다.
“아….”
“설마 지금 도련님 먹으시려는 건 아니죠?”
젠킨스는 정말 걱정이 되어 천천히 걸어왔다.
회복이 안 되어 꺼낼 수 없었다던 날개까지 펼쳐졌으니.
그때 벨라는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손을 뻗어 다가오는 젠킨스를 막았다.
“저기, 다들 다가오지 마. 지금 내가 이웨르 묘약을 덮어쓰는 바람에….”
다가가던 젠킨스도, 잔바르도 멈추고 뒷걸음질을 쳤다.
“아니, 아가씨. 그런 걸로 지금 도련님 꾀는 거예요?”
“저렇게 잡아먹는 건 줄 몰랐는데.”
“아아, 아가씽. 도련님 유혹하려고 묘약 만들어 달라는 거였어용?”
벨라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아… 아니…. 이건 사고….”
물론 그 사고도 결국 벨라의 의지가 바꾼 거라 생각했다.
“아가씨, 이제껏 그렇게 안 봤는데 파렴치한이네.”
“난 마음에 든다. 훌륭하시다!”
이래 봬도 마계의 수장인데, 그런 양심은 조금 버려도 되지 않을까.
그때 바닥에 누워있던 이웨르가 고개를 빼꼼히 들었다.
“그런데 이거 제 묘약 아닌데용?”
“…어?”
“제 피 냄새를 제가 모르겠어용? 아무 냄새도 안 나는뎅.”
벨라는 고개를 돌려 다시 키엘을 올려다봤다.
확실히 매혹된 사람의 눈빛이라기에는 조금 초롱초롱했다.
“왜요?”
그러고 보니 매혹된 사람들은 말도 조금 천천히 하던데.
“아… 아까 그 병….”
“이상한 게 들어있길래 조사하라고 다른 데 옮겨놨는데. 묘약이었어?”
벨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너… 지금 제정신이야?”
“그거 무슨 말이야.”
키엘이 벨라를 얄밉게 노려보다가, 그녀의 손바닥에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제정신이에요.”
벨라의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고, 말문을 잃었다.
“태자비.”
조금 전엔 야릇했던 그의 미소가, 지금은 조금 즐거워 보인다.
그리고 이 상황을 재밌게 즐기는 이웨르와 푸르가 입맛을 다셨다.
“했네, 했어. 내가 이겼엉.”
“아니야! 안 했을 거야!”
“빨리 얘기해줘용, 키스했어용?”
벨라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그 자리에서 점프해 고양이로 변했다.
“이… 입 다물어!”
그리고 열린 문으로 후다닥 도망쳤다.
밖에서 사람들이 늦은 밤에 검은 고양이를 보고 많이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 * *
고양이로 변한 벨라는 밤새도록 근심에 둘러싸였다.
이 소설이 원작대로 갈 수 없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그 비극보다 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있었으니.
-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하나 봐….”
뭔 소리를 지껄인 거야.
그게 묘약 때문에 매혹된 게 아니었다니.
조금 전의 일이 계속 머릿속을 메우고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아우, 미쳤나 봐!”
변태도 아니고 왜 자꾸 키스한 걸 떠올리는지. 벨라는 솜방망이로 자신의 입을 툭툭 쳐냈다.
- “내 비가 되어줘요.”
하지만 입을 치면, 이제 그 눈빛이 또 떠오른다.
“으아아악!”
그날 밤. 벨라는 고양이로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우다다 돌아다니며 생각을 떨쳐내 보려 했다.
“그만 생각해, 제발 좀!”
진짜 이제 키엘의 얼굴을 어떻게 보지?
* * *
그 시각.
‘이안’이라는 이름으로 황궁에 몰래 숨어 들은 후안 크루엘은 속으로 화를 참고 있었다.
‘언제 한 번 볼 수 있을까.’
경비들의 환심을 사고 정보를 교환하며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내는 데만 해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를 아는 얼굴이 많으니 여기저기 피하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피곤했다.
1차 경합이 끝나고 대부분 영애가 떨어지고 나면, 벨라를 만날 기회가 생길 줄 알았는데.
‘…사자 새끼가 참 철두철미하단 말이지.’
본궁으로 쏙 들어가 만나기는 더 어려워졌었다.
게다가 그 마법 폭발 사건 때문에, 벨라가 황태자비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고.
‘분명 황태자비가 될 마음은 없어 보였는데.’
후안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벨라가 황태자비가 되고 싶지 않다고 해서, 후안을 연모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크루엘가에서 그렇게 넌지시 유혹했지만, 그녀는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그의 마음을 전해본 적도 없었으니.
그는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결국 본궁에 신분을 밝히고 가야 하나.’
그랬다가는 슈리아 크루엘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무엇을 생각하든 진퇴양난이었다.
‘일단 그 아가씨가 황태자비가 못 되게 해야 해.’
그리고 그는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마이유에게 손짓했다.
“이안 님. 웬일로 이 시간에 여기까지 오세요?”
“로잔느 양은 혹시 아직도 울고 있나?”
“어휴, 말도 마세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밥도 안 먹고….”
마이유는 속이 타는지 가슴을 손으로 쿵쿵 쳤다.
“무슨 일 있던가요?”
“모르겠어요. 아침에 벨라 님이 잠깐 다녀가셨는데.”
후안의 눈빛이 살짝 반짝였다.
“그러고 키엘…. 저, 전하를 만나러 가셨다는데 만난 건지, 아닌지.”
“키엘 전하요?”
마이유는 살짝 눈치를 보더니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 뒤로 그냥 저렇게 울고만 계세요.”
후안은 온종일 이불 안에서 울고 있는 로잔느를 창 너머로 바라봤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벨라가 키엘을 만나는 데 로잔느를 데리고 갔다면.
‘흠…. 아직 이용할 만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