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무슨 소립니까. 그냥 하나 더 키우면 되죠. 옜다, 하나 더 가져가요.”
“…….”
조금 전 당당하게 거래하던 모습과 달리, 벨라가 시무룩해 보이자 상인은 괜스레 미안해졌다.
그냥 시들었다고 하지 말 것을.
“원래 소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키우는 거예요.”
벨라는 그 말에 피식하고 웃었다. 무슨 로또 당첨될 때까지 복권 사는 거도 아니고.
‘그래, 선인장이 무슨 신도 아니고.’
* * *
잠깐 불안했던 기분을 뒤로하고, 벨라는 선인장을 키엘에게 어떻게 선물할지나 생각했다.
‘엄청나게 좋아하겠지?’
어릴 때부터 뭘 하든 ‘소원 들어주기’가 내기였는 데다가, ‘이거 하면 소원 이루어진대.’라는 건 빼놓지 않고 하곤 했었다.
밥 먹고 바로 누우면 소 된다니까 누워봤단 거도 어찌나 귀엽던지.
키엘이 좋아하는 얼굴을 상상하며, 방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벨라를 따라다니던 영애 몇몇이 자기들끼리 웃으며 걷고 있었다.
평소라면 무시하거나 조금 돌아서 그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신 난 벨라는 먼저 인사도 걸었다.
“어머, 다들 좋은 일 있나 봐요?”
“아… 앗! 베, 벨라 님.”
그리고 평소와 다른 건 벨라 만이 아니었다.
보통은 벨라가 인사도 걸기 전에 와서 온갖 입에 발린 미사여구를 쏟아붓는데, 어째 다들 긴장한 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1차 경합 문제가 화국에 관한 거래요.”
“아… 그렇군요.”
무슨 동문서답도 이렇게 근본 없이 하는 건지. 벨라는 더 묻지 않고 그들을 지나쳤다.
“뭔가 구린 구석이 있는 거 같지?”
“그러게요. 꼭 나쁜 짓 하다 걸린 사람 같네요.”
“내 욕한 거 아냐?”
그러나 복도의 끝을 돌자, 조금 전 그 영애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세상에. 로잔느 양, 괜찮아요?”
로잔느는 바닥에 앉아 붉게 멍든 다리를 만지며 벨라를 올려다봤다.
“아….”
옷도 머리도 헝클어진 채로 새하얀 뺨 위로 눈물이 흐른 자국이 보였다.
누가 봐도 괴롭힘당한 건데.
“죄, 죄송합니다. 벨라 님.”
뭐가 죄송하다는 걸까.
로잔느는 서둘러서 일어서서 옆으로 비켜서려다, 발목을 접질렸는지 다시 넘어졌다.
‘슈리아가 없으니 피라미 같은 악역들이 얘를 괴롭히나 보구나.’
벨라는 로잔느가 싫었다.
소설을 읽을 때도 답답했었고, 처음 고양이로서 로잔느를 만났을 때도 이유 없이 공격했었고.
왜 이렇게 이 아이를 보면 불편한 마음이 가시질 않을까.
‘키엘이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잘해줘야 하는데.’
벨라는 손에 들고 있던 선인장 하나를 로잔느에게 내밀었다.
“이거 가져.”
“…네?”
로잔느가 얼떨결에 선인장을 받자, 벨라는 그길로 그녀를 지나쳐 걸었다.
‘어차피 내 소원은 이루어지지도 않는데, 뭘.’
그러니 그냥 이 선인장은 두 주인공에게 하나씩 나눠주자.
벨라가 말없이 걷는 동안, 젠킨스가 의외란 듯 놀라며 물었다.
“웬일로 아가씨가 선행을 베풀어요?”
“웬일로라니.”
벨라는 젠킨스를 노려보지도 않고 그저 방문을 쾅 닫는 걸로 답했다.
“하여튼 성질하곤….”
* * *
아무도 모르지만, 황궁에는 쥐새끼 한 마리가 들어와 있었다.
‘이안’이라는 이름으로 로잔느의 호위처럼 지내겠다고 한 후안 크루엘.
최대한 벨라 일행의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며 호시탐탐 벨라를 따로 만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방금처럼 로잔느가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걸 보면. 벨라의 뒤를 밟다가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 아가씨는 또 당한 거예요?”
“이안 님도 제가 많이 답답하죠?”
후안은 잠깐 움찔했다.
답답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로잔느는 백작가의 영애치고는 욕심도 없고 허구한 날 반박도 못 하고 당하기만 하고.
자신의 사촌 동생은 가문을 제가 먹겠다고 오라비를 산속 구덩이에 버리기까지 하는데.
후안은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손에 든 건 뭔가요?”
“벨라트리체 공녀님이 주셨어요.”
로잔느는 강아지처럼 배시시 웃었다.
“공녀님이 절 싫어하시진 않나 봐요.”
밤에 몰래 키엘을 만날 때마다, 키엘은 벨라에 대해 물어봤었다.
- “그럼 벨라랑은 얘기도 안 한 거야?”
- “응.”
- “…어휴. 그래.”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키엘이 한숨을 내쉴 때마다 마음이 저렸었다.
이제 조금 친해지면 키엘에게 전해줄 얘기도 있지 않을까, 로잔느는 그런 생각을 하며 희망의 미소를 지었다.
반면 후안은 석연치가 않았다.
로잔느를 괴롭힌 건 한마디로 벨라 파벌에 속한 사람이었다.
어찌 보면 자신을 괴롭힌 사람이 준 걸 아무 의심도 없이 받고 좋아할 수 있을까.
‘착한 건지, 바보인 건지.’
후안도 물론 이런 로잔느의 순수함, 혹은 멍청함. 그 덕에 황궁에 들어올 수 있긴 했다.
“다행이에요, 벨라 님께 미움받긴 싫었는데.”
“그래요?”
“친해지고 싶어도 좀처럼 기회가 없었거든요.”
로잔느가 후안의 생명의 은인인데. 후안은 이 순진한 아가씨를 조금 돕고 싶은 마음이 들어 넌지시 조언했다.
“친해지려면, 공통의 관심사 같은 걸 얘기해보세요.”
“공통의 관심사요?”
그러다 후안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그 아가씨가 슈리아를 퍽 좋아했단 말이지.’
크루엘가에서 벨라에게 말이라도 좀 걸려고 찾아보면, 슈리아와 대련을 하거나 키엘이 있는 곳에서 수업하고 있었으니.
“혹시 아가씨, 검 쓸 줄 아세요?”
“거, 거, 거, 검요?”
아무리 봐도 로잔느는 슈리아와 영 다른 사람이었다.
이안은 그동안 이 경합을 멀리서 지켜봤었다.
벨라에게 말을 걸고 싶어도 걸 수 없었던 이유.
그 주변에 영애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벨라가 ‘연애 박사’라는 소문도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걸 이용하는 게 좋아 보였다.
“보니까 그 아가씨가 그렇게 상담을 잘해주시는 거 같던데.”
“상담요?”
“예. 연애 상담요.”
그게 모두 이웨르의 조언이라는 건 생각지도 못한 채, 후안이 자신 있게 로잔느에게 그 패를 내밀었다.
* * *
벨라는 오랜만에 키엘을 만날 핑계를 생각했다.
밤에는 로잔느가 만나는 것 같으니까, 낮에 당당하게 황태자의 방에 쳐들어갈 방법이 뭐가 있을까.
‘음…. 없네.’
고양이로 몰래 갈 수도 있지만, 선인장을 들고 가긴 어렵고.
‘푸르한테 갖다주라고 할까.’
애완 곰이니까 좀 여기저기 돌아다녀도 봐주지 않을까.
그때, 같은 방을 쓰는 로잔느가 문을 조심스레 열며 들어왔다.
사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눈앞에 있었다.
로잔느에게 전해주라고 하면 되긴 한데.
‘…그건 왠지 싫어.’
평소처럼 그냥 아무 말 없이 잘 준비를 하려는데.
선인장을 받은 로잔느는 용기를 내서 벨라에게 말을 걸었다.
“선물해주셔서 감사해요.”
“화분 밑에 키우는 방법이 적혀 있어. 꽃이 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니까, 잘 키워봐.”
이대로 대화를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소원…. 공녀님, 사실 고민이 있는데요.”
가능하면 그냥 마주치기 싫었다. 말도 섞기 싫고.
이유 없이 짜증 나는 걸 꾹꾹 참아가며 벨라가 되물었다.
“뭔데요?”
아마 사람들이 괴롭혀서 힘들다는 거겠지. 아까 그 영애들처럼, 벨라 몰래 수를 쓰는 애들도 많을 테고.
그러나 로잔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제,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자꾸 벨라를 화나게 한다.
‘아. 너도 연애 상담이니.’
로잔느는 조심스레 벨라에게 말했다.
“잘될 가능성이 너무 없거든요….”
‘입 좀 다물어.’
벨라는 이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런 사람은 포기하는 게 낫겠죠?”
“로잔느 양은 잘될 거예요.”
귀찮은 듯한 목소리. 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 하는 벨라의 태도가 둘 사이를 더 서먹하게 만들었다.
“난 오늘 조금 피곤해서 내일 얘기해요.”
그날 새벽. 벨라는 또 이상한 꿈을 꾸면서 간밤에 눈을 떴다.
‘미치겠네….’
벨라가 변태도 아닌데.
‘왜 자꾸 이런 꿈을 꾸는 거야.’
최근 들어 계속 키엘과 입 맞추는 꿈을 꾼다.
그것도 항상 똑같은 꿈.
어둠 속에 있는 벨라에게 키엘이 다가오는 꿈.
‘자꾸 이러면 키엘 얼굴도 못 볼 거 같은데.’
꿈을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벨라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
매일 밤 그렇듯, 로잔느의 침대는 비워 있었다.
‘참나. 잘될 가능성이 없다는 건 무슨 말이야.’
밤마다 키엘과 밀애를 즐기러 나가면서.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뭐야.
‘괘씸해, 진짜.’
벨라도 알고 있었다. 이 마음이 얼마나 치졸한지.
‘그만 생각해, 내가 굳이 악역이 될 필요는 없잖아.’
한숨을 내쉬며 벨라는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찾아보려고 베개 밑에 손을 넣었다.
‘로잔느를 싫어하면, 키엘이 싫어할 거야.’
핸드폰이 손에 잡히지 않자, 그냥 그대로 베개에 얼굴만 묻었다.
‘내가 슈리아의 역할까지 할 필욘 없을 거야.’
* * *
키엘은 창밖을 보며 작은 움직임에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복수하러 온다며.’
첫날 무도회 이후로 쭉 기다렸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벨라는 오질 않았다.
황궁에 경합을 위해 초대된 영애만 해도 백여 명이다.
만나러 가고 싶은데, 괜히 로한이 알면 일을 그르칠까 봐 갈 수가 없었다.
새벽에 로잔느를 보긴 했지만, 로잔느에게서 벨라의 소식은 거의 들을 수도 없었고.
“키엘 전하.”
그때 반가운 리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리오가 한 보고는, 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최근에 로잔느를 괴롭히는 무리가 있나 봐.”
“…….”
왜 로잔느 얘기부터 꺼내는 건지.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하던데?”
“너한테야 당연히 무서우니까 말 못 하겠지.”
“그래서. 하기 싫대?”
“아니, 그런 말은 없었고….”
“그럼 됐어.”
리오는 오랜만에 성물 여행할 때의 키엘을 보는 것 같았다.
“누가 괴롭혔는지는 안 궁금해?”
“뭐, 그래 봐야 마리안느 메르켄이거나. 이름 모를 애들이거나 그렇겠지.”
“궁금해해야 할 거 같은데.”
리오는 서류를 뒤집어 빼곡한 글씨로 적힌 면을 키엘에게 보였다.
“벨라트리체 크루엘.”
키엘은 눈만 깜빡이며 리오를 쳐다봤다.
우리 고양이가 제멋대로긴 하지만 나쁜 고양이는 아닌데.
‘설마 그 노트대로 슈리아 크루엘을 대신하는 건 아니겠지.’
키엘은 리오가 가지고 있던 서류를 황급히 뺏어 들어 차분히 읽었다.
영애들 사이에서 집단 괴롭힘의 흔적이 보인다는 보고였다.
내용은 키엘이 염려했던 바와 달랐다.
소설 속 슈리아 크루엘도 음모를 꾸며 함정에 빠트리게 했지, 유치하게 발을 걸거나 드레스를 찢는 짓은 하지 않았었다.
“이거 누가 쓴 거야? 직접 확인한 거 맞아?”
“일단 별채 경비한테서 받은 거야. 경비도 꽤 신뢰할 만한 정보통이 있다고 했고.”
“신뢰할 만한 정보통이 누군데?”
“몰라. 나도. 이름이 이안이라던데.”
“신뢰가 전혀 안 되는데.”
그녀가 로잔느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 다짐하며 키엘에게 얘기한 적도 있었다.
‘벨라가 바보도 아니고.’
아직 그가 로잔느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데다가 키엘이 알게 될 게 뻔한데 이런 저급한 일을 할 리가.
“로잔느가 못 견디겠으면 내게 얘기하겠지. 아직은 됐어.”
키엘은 그렇게 말하고 들고 있던 서류를 그냥 바닥에 흘렸다.
리오는 키엘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드는지 다시 한번 말했다.
“그래도 로잔느가 괴롭힘당하는 건 맞잖아.”
“애초에 말했어. 날 도와줄 각오가 되어 있으면 경합에 참여하라고. 그게 아니라면, 경합에서 빠지라고.”
“로잔느는….”
리오는 허리를 굽혀 떨어진 서류를 주우면서 조금 화난 목소리로 대꾸했다.
“힘들어도 참는다고.”
키엘은 그런 리오를 내려다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힘들어도 참아.”
“벨라 님은 아니잖아.”
키엘은 입을 살짝 떼었다가, 이내 굳게 다물었다.
* * *
슈리아 크루엘.
소설 속 벨라의 차애. 시원시원하고 소탕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던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그래서 벨라는 처음에 슈리아가 로잔느를 협력하는 역할인 줄 알았었다.
하지만 그 슈리아가 로잔느를 질투하고, 황태자비의 자리를 욕심낼수록 점점 악녀로 변모한다.
‘분명 슈리아와 나는 다른데.’
일단 소설 속에서 슈리아는 로잔느와 같은 방을 쓰지 않는다.
슈리아가 두 주인공의 밀애를 목격하기도 하지만, 벨라는 단 한 번도 나가지 않았었다.
하나하나 따지면 이미 원작과 많이 바뀌어 있었다.
어차피 두 사람의 해피엔딩이면 되니까, 벨라가 신경 쓰지 않았던 것들.
예를 들면 키엘과 슈리아가 생각보다 친분이 있는 것.
‘그것도 날 양녀로 들이려고 한 거니까….’
황태자비를 약조까지 했고.
슈리아가 황태자비보다 가문을 택한 것도, 원작과는 확실히 다르지.
‘그런데 나한테 왜 이러는 걸까.’
자꾸 상황이 소설 속 슈리아의 역할을 벨라에게 강요하는 기분이었다.
로잔느를 질투하고, 황태자비에 욕심을 내는 역할.
둘 사이를 방해하는 방해꾼으로.
남자주인공이 그토록 믿었던 사람인데, 배신이라도 하라는 듯이.
몇몇 영애들은 로잔느를 괴롭혀 놓고, 벨라에게 은연중에 그녀를 욕하고 있었다.
“어우, 그 계집이 순진한 얼굴로 착한 척한다니까요. 꼭 제가 괴롭힌 것처럼?”
분명 내버려 두라고 했던 거 같은데.
이제껏 소설이 더 엉망이 될까 봐 나서지 않았지만, 벨라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데 굳이 시간을 쏟을 필요가 뭐 있겠어요?”
벨라도 스스로 한 말을 거울처럼 비춰서 달래고 있었다.
로잔느를 볼 때마다 생기는 불편한 마음.
- “천사와 악마 같은데요.”
로잔느가 너무 착해서, 벨라가 너무 나빠서 생기는 마음이라고 되뇌었다.
그렇게라도 합리화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조금 전까지 욕하던 영애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 그게….”
괜히 미안해진 벨라가 억지로 웃으면서 민망해하는 영애들을 달랬다.
“좋아하는 거만 해도 시간이 모자라니, 우리는 좋아하는 걸 하도록 해요.”
“제,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그러니까 지금은 키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지.
그를 황궁으로 보내기 전처럼.
하루하루를 좋아하는 사람 옆에서 있을 이 기회에 감사하며.
‘난 원래대로라면, 이미 죽은 역할이니까.’
* * *
그날은 1차 경합을 앞둔 며칠 전이었다.
지난번에 로잔느를 괴롭히는 영애들을 좋은 말로 꾸짖은 이후로, 틈나는 대로 경고했었다.
“다들 배웠다 하는 사람인데, 그러지 마세요.”
하지만 알게 모르게 그들이 로잔느를 계속 괴롭히는 건 확실했다.
그게 벨라를 따르는 사람인지, 아니면 메르켄가를 따르는 영애들인지는 모르겠으나.
때때로 로잔느가 훌쩍거리는 걸 보고 방에 들어가지 못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같은 방을 쓰게 된 사람이니 들어가 위로라도 해줄 법한데.
벨라는 발을 돌려 정처 없이 걸었다.
‘내가… 너무 나빠서 그래.’
괜히 우는 사람 옆에서 서러움을 가중시키기보다는 그냥 피하는 게 나을 거 같았다.
저녁이 다가오는 시간.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달은 미리 저편에서 준비운동을 하듯 빛나고 있었다.
멀리서 황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퇴근이라도 하는지 삼삼오오 모여 정문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여기도 은근히 체계적이라니까.’
세상 제일 재밌는 게 지나가는 사람 구경이라고, 벨라는 별생각 없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녀 앞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걸 보고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누구더라.’
젠킨스라도 옆에 있었다면, 설명해 줄 텐데.
“언제까지 여기 계실 겁니까?”
그러나 누구의 설명도 필요 없었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벨라는 숨어 있던 분노에 불을 지핀 것 같았다.
“우리가 정말 인연이네요. 다시 만났으니.”
로한이었다.
키엘을 데리고 간 수사관.
황제의 보좌이자 현재 키엘의 보좌관.
흔히들 말하는 황실의 실세.
“결국 도망친 곳이 여깁니까?”
벨라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황궁에 들어오고 난 이후로 벨라는 이제껏 누가 찔러도 그러려니 가만히 있었다.
혹여나 소설이 바뀔까 봐. 혹, 그녀의 행동이 키엘에게 해가 될까 봐.
하지만 이자만큼은 용서할 수 없었다.
“아. 그쪽이 준 선물들은 잘 받았어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저택으로 암살자를 보낸 개새끼.
하필이면 소설 속 등장인물을 보내서, 결국 저택을 떠나게 했던 장본인.
“저택 뒤편에 그냥 뒀는데, 찾아서 잘 묻어줬어요?”
로한은 벨라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벨라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봤다.
“전하의 인생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겠다고 한 적 없는데.”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로한은 벨라의 행동을 비웃듯이 쳐다보며 벨라의 턱을 잡고 가까이 얼굴을 내밀었다.
“여기가 어딘지 알고. 감히.”
벨라의 붉은 눈이 점점 붉어지고, 그녀는 마치 입을 맞추기라도 할 듯 가까운 거리로 로한에게 다가갔다.
“그쪽이야말로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로한은 황제와 황태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보좌.
그리고 제법 많은 세력이 로한을 중심으로 황태자를 지지하고 있다.
이전이었다면, 살벌한 그녀가 무서웠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당신은 황태자비가 될 수 없습니다.”
“…….”
“내가 절대 못 되게 할 겁니다.”
“난 욕심낸 적 없어.”
벨라의 손톱이 점점 길어지지만 로한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의 싸늘한 표정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웠기에.
“난 네 목숨만 욕심이 너무 나네.”
벨라는 긴 손톱으로 로한의 뺨을 위에서부터 천천히 긁었다.
“언젠가는 죽을 거. 오늘 죽을래?”
8년 전 그때처럼, 공포가 로한에게 뼛속 깊이 스며들었다.
“어차피 일어날 일. 빨리빨리 하면 더 좋잖아?”
만약 마왕이 있다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역시 위험한 사람.
로한에게는 다행으로, 벨라는 그의 피를 보자마자 멈췄다.
그리고 그에게서 조금 떨어져, 손톱에 맺힌 피를 그의 옷에 닦았다.
“내가 말했지.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짧고 무서운 경고를 끝으로, 벨라는 다시 방으로 향했다.
걸음은 빨라지고, 숨이 가빠졌다.
벨라는 잠시 망설이다 문을 열었다.
‘아직도 울고 있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심히 문을 닫으며, 벨라는 그 문에 기대 이제껏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쉬었다.
“그러게 왜 그런 말을 해.”
잠깐 맡았던 피 냄새를 잊으려고 애쓰며, 그의 도발에 넘어간 자신을 나무랐다.
“내가 언제 욕심냈다고.”
왜 다들 벨라가 욕심내길 바라는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왜 그녀를 악역처럼 바라보고, 기대하는 건지.
“…너무하잖아.”
욕심의 결과는 늘 눈앞에 직면해 있었다.
억겁 같은 세월을 짐승처럼 마계에서 살아야 하는 결말.
어차피 이 소설의 끝을 알고 있으니까, 욕심 같은 건 내지 않고 여기서 만족하려고 하는데.
‘푸르 어딨어.’
뭐라도 안아야 했다.
이 생각이 커지기 전에, 맞닥뜨리기 전에.
벨라는 주위를 둘러보다 창가에 올려놓은 선인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
키엘에게 주려고 화분에 고양이 그림을 그려 놓았었는데.
아직 전해주지도 못한 선인장은, 벨라의 시든 선인장 옆에서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난 식물 키우는 데는 재능이 없나 보다.’
벨라는 천천히 창가로 다가가 선인장을 한쪽 구석에 밀었다.
그러다 옆에, 벨라가 로잔느에게 선물한 화망장이 눈에 들어왔다.
밖은 어둠이 찾아오지만, 초록빛 선인장에 분홍색의 꽃봉오리는 어둠이 무엇인지 모르는 듯 반짝인다.
해맑고 순수한 로잔느처럼.
네가 참 밉다.
왜 저렇게 빛이 나서.
내 그림자를 더 짙게 만드는 건지.
* * *
키엘은 1차 경합이 끝나기를 학수고대했었다.
1차 경합은 간단한 시험으로 이뤄졌다.
새로 교류하게 된 화국과 어떻게 관계를 유지할지에 대한 질문에 자유롭게 대답하는 거였다.
‘여기서 한 스무 명 정도만 추리면 되겠지.’
황태자비는 후에 황후가 될 사람이니, 최소 국제 정세 정도는 꿰뚫고 거기에 대한 대응책도 있어야 한다는 게 황실의 생각이었다.
물론 그 대응이 정답이진 않겠지만, 다양하게 생각하는지를 확인하는 정도면 되었다.
어쨌든 이 경합 이후에 황태자가 관심을 둘 때는 어느 정도 검증된 핑계가 있는 셈이었다.
‘이제 벨라를 자주 볼 수 있겠네.’
키엘은 벨라의 답을 은근히 기대하며 리오의 보고를 기다렸다.
“…이게 뭔데?”
“네가 그렇게 궁금해하는 거.”
그냥 빈 종이를 보고 키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리오만 바라봤다.
“아무것도 안 적혀 있는데?”
“1차 경합 때 벨라 님이 낸 거야.”
“…뭐?”
키엘은 종이를 보며 ‘벨라트리체 크루엘’이라고 적힌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설마 지금 백지 낸 거야?”
이젠 기가 차서 웃음도 안 나왔다.
1차 경합 시험이 끝났을 때만 해도, 벨라는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아가씨, 기분 좋아 보이네용.”
“응. 나는 이제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내 행복을 찾아 떠날 거야.”
그녀는 두 팔을 벌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아 해탈한 사람처럼, 황궁 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기며 빙글빙글 돌았다.
“뭐라는 거예요…?”
“우리 아가씨도 정상이 아니양….”
“나도 돌래!”
벨라가 선택한 방법은 그냥 ‘회피’였다.
늘 영애들에게 조언했던 대로.
‘그냥 1차에서 떨어지면 되잖아.’
어차피 벨라가 필요한 건 ‘크루엘’이라는 가문.
그냥 키엘 만나러 올 때 황궁에 당당히 들어올 수 있으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뭐 어떡해. 시험에 떨어진 걸로 뭐라 할 거야?’
슈리아도 벨라 보고 가서 영애들과 잘 지내고, 잘 못 지내겠으면 그냥 입 다물고 있으라고 했지.
황태자비 합격 목걸이를 가지고 오라고 하진 않았다.
‘진작 이럴걸. 내가 쓸데없이 번뇌만 쌓았구나.’
로잔느를 마주치기 힘들면, 그냥 벨라가 떠나면 되는 것을.
하지만 그것도 방에 도착할 때까지만 들었던 생각이었다.
“네? 제가 통과되었다고요?”
황궁의 기사단이 벨라에게 축하한다며, 그녀의 짐을 옮기는 걸 도와주러 왔다.
“예. 모르셨습니까?”
벨라가 얼떨떨하게 그들을 보자, 기사단원 중 하나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공작가의 공녀님들은 전부 본궁에서 머무신다면서요.”
“좀 아쉽습니다. 계속 별채에 계실 줄 알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대련을 더 해보는 건데.”
이들이 거짓말할 리도 없고.
벨라는 합격자 명단을 붙여놓았다는 입구로 달려갔다.
‘아니, 쓴 게 없는데 어떻게 합격이야?’
별채의 입구에는 리오가 로잔느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안 님이 도움을 많이 주셨어.”
“다행이네.”
화기애애한 그들의 표정과 다르게 벨라는 심각했다.
“얘들아. 비켜봐.”
벨라가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자마자, 로잔느가 축하의 말을 건넸다.
“벨라 님, 축하해요!”
황궁에 온 이후로, 벨라는 일부러 말을 아낀 적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말문이 막힌 건 처음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분명 백지로 냈는데.
“리오!”
벨라는 옆에 있던 리오의 팔을 붙잡고 구석으로 끌고 갔다.
“어, 어….”
벨라는 리오를 구석으로 끌고 가더니, 한 바퀴 뛰어서 고양이로 변했다.
“아니, 벨라 님!”
혹 누가 변한 걸 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걱정하는 건 리오의 몫이었다.
벨라는 높이 뛰어 리오의 어깨로 올라가고 그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으악!”
“야. 키엘한테 배달해.”
“예?”
리오는 잔뜩 긴장한 채로 옷 속에 들어가 있는 벨라를 난감하게 내려봤다.
‘하… 키엘 방에 가면 나오시겠지?’
리오는 구석에서 나와 로잔느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 로잔느. 나는 가봐야 해.”
“그래? 벨라 님은 어디 가셨어?”
벨라는 리오의 품 안에서도 로잔느의 목소리가 들리자 자기도 모르게 발톱부터 세웠다.
“아악!”
“왜 그래?”
미안하다. 본능에 따라 발톱이 나온 걸 어떻게 해.
“아, 아, 아냐.”
리오는 팔짱을 껴서 벨라를 숨기고 키엘의 방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엉거주춤 이상한 걸음걸이로 걸어가자, 지나가는 경비들도 한 번씩 리오를 힐끔 쳐다봤다.
하지만 이 자세를 풀었다가, 벨라가 미끄러져 좀 더 밑으로 미끄러지는 사태는 더 싫었다.
* * *
리오가 벨라를 품에 안고 가는 한편, 그의 쌍둥이 누나 리네는 황궁의 마법사 협회에 있었다.
“그럼 이제 리네 프로하 양이 연구한 무전 마법에 대해 발표하겠습니다.”
리네는 당당하게 걸어가 벨라가 만들어 낸 이론과 기반에 숟가락만 얹은 무전 마법을 선보였다.
“…세상에.”
“이런 방법을 쓴다고?”
리네는 웅성거리는 마법사들을 바라보며 확신에 차올랐다.
‘이건 역시 마법 혁명이야.’
드디어 꿈에 그리던 대마법사의 대열에 오른다.
일반 마법사와 달리, 대마법사는 증폭도구를 소유할 수 있고, 그릇을 키운다고 알려진 엘릭서도 주어진다.
거기다 황궁에 있는 금지된 마법도 허락하면 열람할 수 있었다.
황제나 황태자의 허가를 받기 힘든 다른 마법사들과는 달리 리네는 키엘의 허가를 얼마든지 받을 수 있었으니.
‘이제 마법계는 내가 점령한다.’
앞으로 역사는 엘리시아 건국의 대마법사 오르디의 다음으로 리네 프로하를 기억할 것이다.
500년 만에 나타난 천재 마법사의 칭호에서 벗어나 1000년 만에 나타난 최연소 대마법사라는 공식적인 칭호까지 거머쥐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예. 매우 흥미롭군요. 수고하셨습니다.”
원로들의 반응은 영 시큰둥했다.
리네는 조금 당황해 하며 원로들을 쳐다봤다.
이 정도의 성과를 내보였는데도, 대마법사에 대해 논의를 하지 않겠다니.
당황해 하는 건 리네 뿐만이 아니었다.
“저 정도면 대마법사 칭호 달아도 되지 않나?”
“그러게. 하여튼 욕심쟁이들. 리네 프로하가 키엘 전하와 친하니까 자기 자리가 위협이라도 될까 봐 저러는 거야.”
“못났다, 못났어.”
장내가 어수선하게 들썩이지만, 원로원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협회를 해산했다.
그들은 이 어린 친구가 자신의 자리를 해할까 두려웠겠지만, 이건 몰랐다.
이 어린 친구가 얼마나 독한 마법사인지.
리네는 모두 떠난 장내에 혼자 서서 비어 있는 원로원의 자리를 노려봤다.
“언제까지 그렇게 기고만장할지, 두고 보겠어.”
리네는 손을 뻗어 벨라처럼 소환진을 공중에 꺼냈다.
“어, 이게 리네야?”
소환진 너머로 꽤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 2차 경합이 있는데, 준비는 잘되어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잘되어간다는 말이었다. 기밀 사항이니.
“내가 좀 화가 나서 말이야. 판을 좀 크게 벌일까 하는데.”
젊은 남자는 잠시 말이 없다가 웃었다.
“너도 직접 나서게?”
“감히 미래의 대마법사님의 발목을 잡는 건 용서 못 하겠거든.”
* * *
똑똑.
리오에겐 해방의 시간이, 벨라에겐 잔소리의 시간이, 키엘에겐 뜻밖의 시간이 다가왔다.
“들어와.”
키엘은 혼자 창가에 앉아 밖을 보고 있었다.
“뭐야, 볼일 있다면서?”
키엘은 입구에 리오가 서 있는 걸 보고 의아하게 여겼다.
“아, 그게….”
리오가 팔짱을 풀자, 벨라가 그 모습 그대로 리오의 몸에서 후다닥 나왔다.
“아! 발톱으로 찍지 마세요.”
“미안.”
키엘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리오를 바라봤다.
“벨라가 왜 거기서 나와.”
일부러 벨라를 품 안에 넣고 온 것도 아닌데 키엘이 너무 죽일 듯이 쳐다보자, 리오는 침부터 삼켰다.
“그게….”
그의 변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벨라는 키엘과 리오 사이를 가로막으면서 사람으로 변했다.
“키엘!”
벨라의 목소리는 화나 있었다.
“왜….”
말도 없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따지려고 했는데!
“벨라. 마침 잘 왔어요.”
키엘의 단호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벨라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째 되려 키엘이 화가 난 것으로 보였다.
키엘은 천천히 책상으로 걸어가더니, 벨라가 제출했던 백지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어….”
그러니까 백지를 냈는데 왜 합격이냐고 따져야 하는데….
“이렇게 내면 크루엘가의 입장이 뭐가 돼요?”
왜 벨라가 혼나고 있는 건지.
“아니….”
“슈리아 크루엘만큼은 아니더라도, 남들 무시하지 않을 정도는 써야지. 백지가 뭐야.”
“그게….”
“이거 나를 기만하는 거로 생각할 만하지 않아요?”
무슨 기만까지야.
어차피 탈락할 마음이었는데 팔 아프게 쓸 필요가 있었나 싶어 그대로 낸 건데.
“그… 그런데 나 합격했대.”
“당연하지.”
키엘은 빼곡하게 글이 적힌 종이 한 장을 벨라에게 보였다.
“내가 대신 적었어요. 외워요. 누가 뭐라고 답 적었는지 물어보면, 이거대로 말하면 돼.”
벨라는 입술을 꽉 깨물고 키엘을 노려봤다.
“뭐예요, 그 눈은. 설마 일부러 떨어지려고 한 건 아니었겠지.”
맞는데. 이대로 있다가는 로잔느를 해치는 악역이 될 거 같아서!
그러나 키엘의 다음 말에 벨라는 영원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직 내가 벨라의 심장 가지고 있는 거 알죠?”
솔직히 말하면 알고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백지를 낼 때는 잊고 있었고.
“하긴. 설마 아직 상처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한테 상의도 없이 떨어지려고 했겠어.”
“그… 그럼. 그냥 잘 몰라서 백지 낸 거야.”
벨라가 시선을 살짝 다른 데로 돌렸다.
누가 봐도 거짓말하는 게 뻔해 보여서, 키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진짜 일부러 그런 거야?’
몇 주 만에 보는 얼굴인데.
복수하러 올 거라고 해서 기다렸더니, 오지도 않고.
그는 이 사람을 사랑하는 만큼 미웠다.
저 멀리서부터 달려와 안기면서도, 함께 가자고 하면 어느새 도망갈 궁리만 하는 게.
벨라는 키엘의 눈치를 보더니 한 발 물러서서 목을 가다듬고 키엘이 건넨 종이를 집었다.
“이거 외우면 되지?”
그리고 뒤를 돌아 고양이로 변하고 재빨리 이 자리를 뜨려고 했다.
“리오. 돌아가자.”
하지만 키엘은 그런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벨라를 감싸 잡고 들어 올리자 벨라의 네 발이 공중으로 붕 떠 있었다.
“…저기?”
“도망가지 마.”
근데 왜 배를 만지는 거야. 키엘이 만지기엔 배겠지만, 벨라에겐 민감한 부위건만.
벨라는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는데, 키엘은 오히려 벨라의 몸을 반 바퀴 돌렸다.
“뭐 하는….”
하지만 그녀는 힘을 뺄 수밖에 없었다.
“다 외울 때까지 못 나가.”
키엘의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너… 엄청나게 화났구나.”
“응.”
화를 덜 내는 거였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그녀를 지금 당장 이 공간에 영원히 가둬두고 싶었다.
“하아… 이걸 어떻게 다 외워. 다 외우려면 밤새야 해.”
“그럼 자고 가요.”
그리고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던 리오가 손으로 턱을 긁적였다.
이제껏 벨라를 어깨너머 봐왔지만.
처음 봤을 때의 그 엉뚱한 이미지보다는 무섭고 다가가기 힘든 이미지가 더 크게 자리 잡혀 있었는데.
‘저런 걸 냥무룩이라고 하나….’
무서운 고양이 눈매는 온데간데없고, 키엘의 손에 축 처져서 묘생을 다 산 듯한 눈빛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벨라는 키엘이 평소 앉는 소파 위에 드러누워 그가 적어놓은 답을 보고 있었다.
‘아주 모범 답안이네.’
누가 황태자 아니랄까 봐 글자 크기 8로 종이 한 장을 빼곡하게 채운 걸 보며 한숨만 푹푹 쉬었다.
‘그냥 백지만 내지 말걸.’
특히 한 문장에 들어 있는 지명이나 사건들은 배경지식 없이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화국의 마법 폭발 사건에 관한 연구에 협조한다고?”
마법 폭발 사건이 뭔지도 모르는데.
‘그냥 우리 모두 친하게 지내요.’ 이렇게라도 적어낼걸.
키엘은 물어볼 줄 알았다는 듯이 소파 앞의 테이블을 가리켰다.
“해당 사건에 관련된 서류는 벨라 오른쪽에 있어요.”
별 관심도 없는데 어쩔 수 없이 확인했다.
그러나 볼수록 보고서는 꽤 흥미로웠다.
화국 마법사들의 마력이 불안정해서 생기는 폭발 사고.
마법사들의 나이, 경력 등 모든 걸 무시하고 사건이 일어났다.
마치 룰렛이라도 돌려 당첨된 사람이 폭발하듯이. 게다가 마력이 불안정하다는 것 외에는 원인을 명확히 규명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첫 사건 이후로 200년 동안 꾸준히 사고가 있었던 거야?”
그러나 명확하게 문제로 대두한 건 약 14년 전부터였다. 그때부터 잦아졌다고.
리오가 자신이 준비한 자료라며 당당하게 설명했다.
마법사의 그릇보다 더 많은 마력이 한 번에 방출되어 생긴 각각의 피해사례들을 쭉 설명했다.
“…그래서 화국에서는 이 문제가 제일 심각하다고 보면 돼요.”
“그런데 말이야….”
벨라는 리오의 말을 들으면서 보고서의 앞뒤를 쓱쓱 넘기다 소파 옆의 테이블에 올렸다.
“화국에서는 흠이 될지도 모르는 걸, 제국의 손을 빌리고 싶어 할까?”
벨라가 본 화국 사람들은 꽤 자존심이 센 사람들이었다.
마법사는 귀중한 군사자원이었다.
‘연구’라는 목적으로 자국의 마법사를 파헤치는 걸 좋아할 리는 없는데.
그 말에 키엘은 드러누워 있는 벨라를 바라봤다.
‘대충 외우는 줄 알았더니. 예리하네.’
엘리시아 제국은 마법 강국이지만, 절대적인 마력을 가진 황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력이 없는 키엘에게 과연 화국이 자존심을 버리고 손을 내밀까.
벨라가 조금 걱정하는 듯 키엘을 보자, 그는 오히려 웃었다.
“괜찮아요. 우리에겐 리네가 있잖아요?”
“걔 요즘 1000년 만에 나타난 천재마법사로 바꿔 달래.”
“500년 아니고?”
벨라는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잠깐만.’
키엘이 마계로 온 순간부터. 아주 조금씩 소설과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다.
있어야 했던 인물. 키엘은 알 리 없는 페터, 로라 같은 호위들이 없으면서 그 자리를 로한이 꿰찼었다.
슈리아 크루엘 같은 악녀도 없지. 물론 그 역할을 다른 영애들이 알아서 하고 있는 거 같았지만.
반면에 없어야 하는 인물도 있었다.
‘…리오와 리네는 없어야 하는 인물이지.’
원작에서는 리오가 마계에서 죽게 되고, 그 후로 리네는 키엘의 곁을 떠난다.
사랑하는 사람은 볼 수 없고, 친우를 잃은 키엘이 많이 힘들어하는 장면도 있고.
평민으로 오해하고 여행했던 시절을 추억하는 이들을 함께 그리워하는 장면도 있었다.
게다가.
‘리오야 원래 존재감이 없다 치더라도.’
리네가 대마법사가 되는 건, 외전에서나 나오는 얘기였다.
그것도 꽤 한참 후에.
대마법사가 되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키엘과 로잔느 앞에 나타나는 이야기로.
‘뭐… 어쩔 거야. 둘 다 지금 죽여버릴 수도 없는 거고. 큰… 문제는 없겠지.’
사실 소설 속 배경과 매우 동떨어진 화국이 자꾸 등장하는 것도 어딘가 불편했지만, 벨라는 애써 머리를 비워냈다.
‘괜찮아. 어차피 이건 두 주인공이 행복하면 끝인 거야.’
* * *
벨라가 키엘의 방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로잔느는 마이유의 잔소리에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아니, 아가씨. 정말로 황태자비라도 될 생각이에요?”
“하하….”
“키엘 그 녀석… 아니.”
마이유는 자신의 입술을 찰싹 때리면서 말을 고쳤다.
“키엘 전하께서는 아가씨한테 마음이 하나도 없다니까요!”
“하하….”
마이유는 속없이 웃고만 있는 로잔느가 답답했다.
그리고 그들을 호위하겠다는 명목으로 황궁에 들어왔지만, 내내 보이지 않던 후안 크루엘이 웬일로 그녀들 사이에 껴서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나저나 문제가 꽤 어려웠을 텐데, 통과하셨네요.”
로잔느는 화제를 돌릴 기회라 생각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 밤마다 공부했거든요!”
“그렇습니까?”
마이유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밤마다 로잔느가 나가는 게 안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 꼭두새벽에 마이유를 깨워, 혹 벨라가 일어나면 꼭 알려 달라고는 몰래 어딘가로 향했었다.
그리고 그 후로 나갈 때마다 까만 상자 같은 걸 품 안에 넣고 뭔가 꺼지기라도 할까 봐 후다닥 달려 나가는 모양이 눈에 거슬렸었다.
‘공부는 무슨….’
몇 번 그 뒤를 밟은 적이 있었다.
로잔느가 그 까만 물건을 키엘에게 건네면, 키엘은 나무 위로 올라가 혼자 뭔가를 하고 있고.
그 뒤로 로잔느는 그냥 리오와 이야기나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황태자의 지시를 받아 뭔가 중요한 일이라도 하는가 싶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키엘은 보이지 않고, 리오만 멋쩍은 듯 뒤통수만 긁적이는 걸 봤었다.
- “미안, 오늘도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 “괜찮아. 원래 황태자라는 게 그런 거지, 뭐.”
누구는 매일 밤 나가는데, 불러 놓고 오지도 않는 황태자라니.
마이유는 정말 점점 키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황태자면 다인가.’
오히려 로잔느의 짝으로 어울리는 사람은, 지금 바로 옆에 있는 후안 크루엘이라고 생각했다.
로잔느가 자신이 어떤 답을 적었는지 얘기해주는 걸 귀를 기울이며 들어주는 게 꽤 신사적이라고 생각했다.
“아가씨도 참 생각이 깊으시네요.”
“그, 그런 칭찬은 처음 들어봐요.”
“다들 아가씨의 진가를 몰라보는 거겠죠.”
* * *
벨라는 어른이 된 키엘이 생각보다 지독하고 집요하다 생각했다.
정말 다 외울 때까지 보내주질 않다니.
벨라가 터벅터벅 걷고 있을 때, 그녀를 오래 찾았는지 젠킨스가 벨라를 보자마자 황급히 뛰어왔다.
“아가씨! 어디 갔어요, 온종일!”
“왜?”
왜냐니. 보좌니까 당연히 찾는 건데, 왜냐니.
젠킨스는 할 말을 잃은 채 툭툭 쏘아대는 벨라를 멀뚱히 바라봤다.
“2차 경합부터는 방을 옮기셨는데, 어딘지도 모르잖아요.”
“…그래. 안내해.”
“내일은 1차 경합 때 냈던 답을 토대로 영애들끼리 토론을 한대요. 미리 연습이라도 하세요.”
벨라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구겼다.
‘지금껏 외웠거든….’
그리고 새로 배정받은 방은, 로잔느와 같이 지내던 곳과 차원이 달랐다.
“아… 이래서 다들 본궁에 있고 싶어 했던 거구나.”
값비싼 가구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사용인들의 방이 따로 연결된 방.
“여기도 따지고 보면 별채예요.”
“아가씨! 오늘은 저랑 잘 거죠!”
“나도 같이 잘랭!”
크루엘 공작가에서 벨라가 머물렀던 방만큼은 아니지만, 귀빈들이 쉴 수 있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벨라는 쉴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일단 노트 정리한 걸 다시 봐야겠는데.’
이제와 핸드폰을 켜고 소설을 또 정리하는 일을 할 수는 없었다.
잔바르를 저택으로 보낸 지도 벌써 한 달이 조금 넘었으니.
이미 충분히 도착했으리라 생각한 벨라는 소환진부터 꺼내 그에게 무전을 시도했다.
“잔바르.”
하지만 아무 대답이 없자, 벨라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젠킨스를 노려봤다.
“야, 얘 보내기 전에 무전하는 거 다시 가르쳐 줬어?”
“네. 어제도 저랑 무전했는데요.”
벨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젠킨스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뭐야, 매일 연락하는 사이야?’
그녀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말을 않자, 젠킨스가 먼저 대답했다.
“저택으로 가는데 길을 좀 잃으신 거 같던데요.”
벨라는 한숨이 나왔다.
“그래서 제가 따라가겠다고 했잖아요.”
“어디쯤이라는데? 언제 도착한대?”
젠킨스는 벨라의 눈치를 보더니, 어디선가 지도를 꺼내와 주섬주섬 그녀의 앞에 펼쳤다.
커다란 제국 지도의 중심을 가리키며.
“여기가 수도고요.”
그리고 제국 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가 저희 저택인데요.”
“응.”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잔바르 님은….”
벨라는 수도와 저택 사이를 보고 있었다. 젠킨스가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더니, 수도에서 저택으로 가는 반대 방향의 끝을 가리켰다.
“여기이신 거 같은데요.”
“…뭐?”
“이 여름에 눈이 온다는데. 여기 아니겠습니까.”
“미친 거 아냐? 아니 도대체 어떻게 하면 아예 반대로 가?”
그 말에 젠킨스가 목을 가다듬었다.
“제가 나침반을 드렸는데… 빨간색이 더워 보이니 남쪽이라고 생각하고 갔답니다.”
벨라가 지도가 펼쳐진 탁자를 뒤집어엎었다.
“하여튼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젠킨스의 등을 때리는 걸로 겨우 달랬다.
“왜 절 때리세요.”
“나도 때려주세요!”
이웨르가 어디서 구했는지, 채찍을 가지고 와서는 벨라에게 들이 내밀었다.
“저두용!”
벨라가 채찍을 받아 들고 화를 내려고 하는데.
“…왜 그렇게 얼굴을 붉혀.”
때릴 수도 없게 이웨르는 음흉한 눈으로 벨라를 보고 엉덩이를 내밀고 있었다.
“내 이놈 자식을 그냥…!”
벨라가 발뒤꿈치를 바닥에 닿자, 천천히 잔바르의 형체가 드러났다.
그런데.
“아… 공주님….”
“와! 잔바르 님! 치사해용! 혼자만 먹고!”
잔바르가 잘린 사람의 팔을 먹고 있는 채로 소환되었다.
몇 초 만에 퍼지는 피 냄새에 벨라는 손으로 코와 입부터 가렸다.
“야! 미쳤어?”
무전에서 아무 말이 없던 이유가 여기 있었네.
“이걸 어떻게 처리해!”
새로 배정받은 방은 잔바르가 가지고 온 팔 한쪽에서 흘러내린 피로 물들었다.
“마계로 보내는 건 어떤가요?”
“에이, 마계가 무슨 쓰레기장이에용?”
벨라는 젠킨스의 말을 적극 수용하고, 마계로 바로 가는 마법진을 눈앞에 펼쳤다.
잔바르가 눈치껏 들고 있던 팔을 던졌다.
“우리 잔바르 쓰레기도 마계로 돌아갈까?”
“…죄송합니다.”
젠킨스와 잔바르를 저택으로 함께 보내도 되었지만, 벨라는 그러지 않았다.
금고에 정리한 것과 소설을 본다면, 누구든 충격을 받을 게 뻔했다.
소설에 한 줌조차 나오지 않는 마족이라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엔 마왕의 후계자인 벨라가 죽는 내용이 있으니까.
‘마계에서 떵떵거리며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는데, 내가 죽고 내뺄 생각이었다는 걸 알면….’
젠킨스처럼 예민하고 재수 없는 애는 이런 사실을 알면 삐뚤어질지도 모른다.
‘역시 경합에서 빨리 떨어지고 내가 직접 확인해야겠어.’
* * *
다음 날.
벨라는 왜 키엘이 외울 때까지 못 나간다고 한지 알았다.
총 20명 정도가 통과한 이 토론회에는, 영애들뿐만 아니라 꽤 많은 관직이 참여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한눈에 봐도 누군지 알 수 있는 인물이 중앙에 앉아 있었다.
황제 라리에트 엘리시아.
짙은 금발이 누가 봐도 키엘의 아버지였다.
다만, 분위기는 확연히 달랐다.
‘엄청 아파 보이는데.’
죽음의 냄새가 난다면 실례일까.
그리고 그 옆에서 벨라를 노려보며 살기를 내뿜는 인물도 있었다.
‘저 로한 새끼도 있네.’
황제 옆에 딱 달라붙어서는. 누가 봐도 자기가 실세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황태자인 키엘이 들어와 황제의 왼편에 앉았다.
‘저기 앉으니까 정말 멀게 느껴지네.’
전날 만났던 거리가 마치 헛것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그는 위엄 있게 앉아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환하게 웃었다.
벨라도 입꼬리가 올라가려고 했는데.
벨라의 오른편에 앉아 있던 로잔느가 그를 향해 살짝 손을 흔들었다.
‘아, 나보고 웃은 거 아니네.’
감정의 바다에서 떠밀려 내려온 파도의 거품이 찰박찰박 벨라의 발끝을 건드린다.
벨라는 시선을 내려 끼고 있던 장갑의 끝을 정리했다.
토론회는 벨라의 생각보다 훨씬 지루했다.
‘그냥 발표회네.’
영애들끼리 토론하라고 하지만, 다들 몸 사리기 바빴다.
게다가 그리 혁신적인 내용이 없었다.
교류할 수 있는 품목 등에 대해 발표하지만, 실정에 관해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벨라는 하품이 나오는 걸 겨우 참으며 눈에 맺힌 눈물을 살짝씩 닦았다.
‘소설에 안 나오는 이유가 있었네. 여기 오고 제일 재미없는 시간이다.’
드디어 마지막 차례인 벨라가 일어섰다.
앞의 발표자들이 너무 알맹이가 없어서, 벨라는 외웠던 답안의 반만 발표했다.
“…라고 생각합니다.”
여태 그 누구도 반박하거나 질문을 하는 이가 없었다. 벨라의 차례에도 그럴 거라 생각하고 내려가려 했다.
“대단하십니다. 벨라 님은 이세계에서 오신 분치고는 많이 아시네요.”
벨라는 목소리를 낸 영애를 한참 쳐다봤다.
‘누구지. 저거 비꼬는 거야, 칭찬하는 거야?’
하지만 이런 토론회에서 느닷없이 칭찬할 리는 없고.
“그런데 이곳의 실정은 잘 모르시나 봅니다.”
벨라는 그제야 저 사람이 누군지 생각났다.
마리안느 메르켄. 벨라가 푸르로 협박한 그 영애.
그녀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벨라를 흘겨보고 있었다.
‘너 벼르고 있었구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날 밟아주려고.
“발표하신 내용이 전부 현실성이 없어 보이네요. 특히 마법 연구에 관한 거요.”
벨라는 키엘을 은근슬쩍 쳐다봤다.
‘이거 전부 키엘이 쓴 답인데.’
라고 대답할 수도 없고.
벨라는 키엘을 대신해서 마리안느에게 설명하듯이 답했다.
“현재 마법 폭발사고가 꽤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고 있습니다.”
“…….”
“그러니 화국에서 요청하면 얼마든지 연구에 협조하겠다는 의사만 밝혀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내려가려는데.
“제 말은 제국이 왜 화국의 연구를 도와야 하냐는 겁니다, 벨라트리체 님.”
마리안느는 벨라를 놓아주지 않았다.
벨라는 순간적으로 짜증을 내며 대답했다.
“싫으면 말고.”
그 짧고 굵은 대답에 키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저게 우리 고양이의 매력이라며.
분위기가 한순간에 싸해져서 벨라를 보자, 그녀는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어차피 교류 품목은 이제부터 정할 건데, 서로의 선택권이 많은 게 좋죠. 그저….”
“왜 그 선택권에 우리 마법사의 인력을 써야 하는 거죠?”
벨라는 그녀의 말에 토 다는 걸 싫어한다. 중간에 말을 자르는 건 더더욱 싫어하고.
토 달려고 말을 자른다면?
아주 극혐이지.
“왜 이렇게 생각이 짧으세요?”
그녀는 마리안느를 업신여기듯 위에서 내려다봤다.
“제국으로 유학 오는 화국의 마법사들은 많지만…. 제국에서 유학 가는 경우는 거의 없죠.”
화국의 마법사들은 제국의 마법 실정에 대해 알지만, 제국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국에서 화국의 마법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인 건데, 그걸 1차원적으로만 생각하면 안 되죠.”
어찌 보면 야비한 수였다.
선처를 베풀며 도와주는 척하지만 약점부터 파헤치는 건데.
“이렇게 얘기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건 아니겠죠, 마리안느 영애?”
“무… 무슨….”
“모르나 보네.”
보통의 귀족 영애들은 이쯤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물러났겠지만, 벨라는 아니었다.
“메르켄 공작가의 수준을 알 만하네요.”
그리고 벨라는 앞에 앉아 놀라는 사람들을 보고 생각했다.
누구든 지금의 벨라를 보고 ‘까칠하다’ 생각하겠지.
그때 벨라의 머리로 참 좋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 이렇게 탈락하면 되겠네?’
1차 경합은 낙하산으로 통과했지만, 다음번엔 확실히 탈락할 수 있다.
“마, 말씀이 너무…!”
“머리에 그렇게 든 게 없어서 무슨 황태자비를 한다는 거예요.”
깽판을 부리면 된다.
이런 막무가내로 막말하는 황태자비를 원하는 이는 없겠지.
그 광경을 쭉 지켜보던 황제 라리에트가 조용히 로한에게 물었다.
“저 영애는 처음 보는데, 누구라고?”
“벨라트리체 크루엘입니다. 그 이세계에서 와서 크루엘가에 양녀로 들어갔다던.”
황제이나 실권을 로한이 쥐고 있는 거나 다름이 없었기에. 벨라의 생각과 달리 라리에트는 오히려 살짝 미소를 지었다.
‘… 괜찮군.’
* * *
토론회가 끝나고 벨라가 마족들과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아가씨, 아까처럼 전투적으로 말하면 적만 늘어나요.”
그게 바라던 바였지. 젠킨스는 보좌답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앞으로 보는 눈이 더 많을 텐데, 몸 좀 사리세요. 그리고 이웨르 씨도.”
“나는 왱?”
“이제 밤마다 남자 부르는 것 좀 그만하시고.”
“어머, 부르는 게 아니라 내가 가는 건뎅.”
잔바르가 이웨르를 보며 혀를 찼다.
“하여튼 몽마들이란. 저급하게 인간 정기나 빨아먹는 게 좋은 건지.”
“뭐래용, 잔바르 쓰레기님.”
벨라는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그녀를 보지 않는 걸 확인한 후 잔바르와 이웨르의 머리를 한 대씩 때렸다.
“조용히 해. 너희 다 재활용도 안 돼.”
“아우, 아가씨. 그렇게 행동하지 마시라니까요.”
젠킨스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2차 경합은 수도의 국민을 모아서 여론을 조사할 거예요. 지금부터라도 좀 자애로운 모습을 보여야….”
“뭐라고?”
벨라는 순간 그녀의 귀를 의심했다.
소설 속의 주 무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키엘이 성물을 여행하는 동안 로잔느와 사랑을 키우던 제국의 곳곳.
하나는 로잔느가 황태자비가 되기 위한 무대인 황궁.
소설 속에서 황태자비 경합은 총 3차로 이루어진다.
온갖 가문의 영애를 불러들였기에, 1차 경합은 시험으로 치고.
2차 경합은 황태자가 선별하고.
3차 경합은 제국의 국민을 초대하고 그 앞에서 황태자비로서의 비전을 보여준다.
그리고, 슈리아의 악행은 3차 경합에서 절실히 드러나고.
그런 슈리아를 용서하는 로잔느의 모습을 보며 ‘희대의 성녀’라며 로잔느를 황태자비로 들여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진다.
그때였다.
“여기서 뭐 해요?”
벨라의 뒤에서 키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벨라, 잘했어요. 마리안느….”
“키엘. 2차 경합에서 국민을 초대해?”
그의 말을 끊고 미간을 찌푸린 채 다짜고짜 질문부터 했다.
“3차 경합에서 초대 안 하고?”
“엇, 벨라 님. 어떻게 알았어요? 원래는 3차 때 국민을 모으기로 했는데 바꿨어요.”
옆에 있던 리오가 개방정 맞게 대답했다. 그는 정말 벨라가 그 엎어진 계획을 어떻게 아는지 신기했다.
키엘은 천천히 벨라를 내려다봤다.
소설의 내용이 조금씩 바뀌는 걸 이제야 인지한 건지.
“2차 경합에서 통과된 사람 중에서 내가 고를 거예요.”
“…왜?”
“내 비가 될 사람이니, 마지막 선택권은 내가 갖고 싶은데.”
그 말도 맞는 말이긴 한데. 왜 이렇게 원작과 조금씩 비켜 가는 걸까.
소설이 흘러가는 그 배경에 따라 둘의 감정선이나 사건들이 분명히 다르게 흘러갈 텐데.
‘둘… 사이는 좋은 거 맞겠지?’
그때 키엘이 벨라의 손을 살짝 잡았다.
“무슨 문제 있어요?”
아까 로잔느가 손을 흔들던 걸 보면, 그렇겠지.
‘굳이 확인해 볼 필요까진 없겠지, 그래.’
어쩌면 슈리아 같은 악녀가 없어서.
3차 경합 때 빛과 그림자같이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줄 비교 대상이 없어서, 소설이 바뀌는 걸지도 모른다.
원작대로 흘러가려고 하는 힘이 크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토론이 끝나고 갈 곳을 잃은 로잔느가 키엘의 일행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엇! 솜사탕이다!”
푸르가 침을 흘리며 로잔느를 쳐다봤다.
리오가 손을 흔들며 오라고 손짓하자, 로잔느가 천천히 걸어왔다.
키엘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벨라를 손을 잡았다.
“참. 그러고 보니 소개해 준다고 했는데, 못 했네요. 벨라가 그동안 안 와서.”
“…….”
“이미 알죠? 같은 방 쓰고 있으니….”
로잔느가 멀리서부터 키엘과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수줍게 붉혔다.
‘아아….’
로잔느가 다가오며, 파도가 벨라의 발밑을 적신다.
조금씩 소설이 바뀌어 있는 걸 알면서도 ‘잘되겠지.’하고 생각을 놓고 있었다.
키엘이 로잔느와 잘 지내는 것 같으니,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다고 했던가.
그냥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거였다.
그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쭉.
옆의 이 사람은 너무나 사랑하고 소중한 사람이라.
그 감정이 어떤 색을 띠며 그 마음에 차지하고 있는지 알면서도 애써 무시했을 뿐이었다.
‘너희 둘이 같이 있는 거 보기 싫어.’
로잔느가 어느새 가까이 오자 키엘이 다정하게 벨라에게 말했다.
“벨라, 인사해요. 여기는….”
“알아, 나도.”
네 목소리로 로잔느의 이름을 말하는 게 듣기 싫어.
그녀는 감정의 바다 한가운데서 배를 타고 표류한다. 이 배는 너무 작고 보잘것없어서 언제 부서질지 모르기에.
그저 하늘을 보며 착각하고 있었다.
수없이 바다의 짠 내를 코끝으로 맡아오면서도 아닐 거라고 암시해왔다.
여기가 육지라고.
높이 치솟는 질투의 파고를 보면서도 그저 산이길 바랐다.
여기는 바다가 아니라고.
너를 사랑하는 마음이 이만큼 차오르진 않았을 거라고.
* * *
“벨라, 인사해요. 여기는….”
“알아, 나도.”
벨라는 싸늘하게 대답했다.
뭐가 ‘로잔느가 천족 같아서 싫은 거야.’인지.
그냥 그녀가 키엘이 사랑하는 사람이라 싫었던 거였지.
슈리아 크루엘이 그 자리에 욕심이 나서 로잔느를 미워했다면, 벨라는 옆의 이 사람이 욕심이 나서 미운 거였다.
그녀가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키엘은 조금 멍하게 벨라를 쳐다봤다.
그걸 뭐라 정의해야 할지 몰랐다.
누군가 하나는 죽여야 끝날 것 같은 분노가 벨라를 감싸고 있었다.
벨라의 단답형에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젠킨스가 비아냥거렸다.
“하여튼 아가씨 성질은. 로잔느 양도 아가씨랑 같은 방 쓰신다고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그 말에 로잔느는 두 손을 저으며 얼굴을 붉혔다.
“아, 아니에요! 벨라 님이 제게 얼마나 잘해주셨는데요.”
로잔느만 빼고 모두가 다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벨라는 손을 꼼지락거리는 로잔느를 내려다보며 냉소를 머금었다.
“…내가?”
“벨라 님이 나한테 선인장도 선물해주셨는걸요.”
“…….”
“벌써 꽃봉오리가 폈어요. 곧 꽃도 필 거 같아요!”
그 말에 벨라는 ‘풉’하고 웃었다.
“키우기 어렵다던데. 잘했네요.”
“그냥… 벨라 님이 알려주신 대로 했었어요.”
벨라는 그저 화분 밑에 키우는 방법이 나와 있다고 얘기했을 뿐이었다.
‘넌 뭘 해도 될 사람이라는 거구나.’
그 자리에 계속 있고 싶지 않았다. 벨라는 웃으면서 로잔느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그래요, 앞으로 응원할게요. 그럼 난 이만.”
“아…! 네!”
로잔느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벨라….”
키엘이 벨라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게 말했다.
“너무 덥다, 난 좀 씻으러 가야겠어.”
“앗! 그럼 저도 같이 가요!”
“싫어. 다 따라오지 마.”
마족들은 벨라의 싸늘한 말에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했다.
“아무래도 어제 일 때문에 계속 신경질 내는 거 같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당.”
키엘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들이 옆에 있는 로잔느를 보고 말을 아끼자, 리오가 눈치껏 로잔느를 데려갔다.
“로잔느, 나랑 2차 경합 연습이라도 할래?”
“앗. 좋아.”
로잔느가 멀리 떨어지자마자 마족들은 키엘에게 서둘러 고자질했다.
“어제 잔바르 님을 소환했거든용.”
안 그래도 키엘은 저택으로 보냈다던 잔바르가 있길래 좀 의아했었다.
‘설마 금고가 비어 있는 걸 확인하고 그러나?’
일부러 나침반 쓰는 법도 다르게 알려줘서, 벌써 저택에 도착하진 않았을 텐데.
‘아니면 소설이랑 다르게 경합 순서가 바뀌어서?’
그러나 마족들의 말은 좀 더 당황스러웠다.
“잔바르 님이 시체를 가지고 왔어요. 그때부터 아가씨가 좀 신경질을….”
“…뭘 가지고 왔다고?”
이 황궁에. 뭘?
“사람 팔이용, 괜찮아용. 잘 처리했어용.”
“도련님! 내가 제일 열심히 치웠어요!”
* * *
한편, 로잔느는 마족들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벨라 님, 어제 무슨 일 있었던 걸까?”
뭔지 몰라도 순진한 로잔느가 듣기에는 마족들의 일상이 비범하여, 리오는 대놓고 말을 돌렸다.
“선인장에 꽃이 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던데.”
로잔느는 얼굴을 점점 붉혔다.
“응. 소원 이루어지면 좋겠다.”
리오는 고개를 작게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안 봐도 너무 뻔했다. 보나 마나 키엘과 잘되길 빌겠지.
“넌 아직 키엘 좋아해?”
“어?”
로잔느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는지 안 그래도 붉어진 얼굴이 더 붉어졌다.
“그… 그렇게 티가 나?”
리오는 그녀를 보며 ‘참 알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저렇게 감정이 티가 난다. 어린아이처럼 숨기지 않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참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함께 여행하면서, 키엘이 그렇게 철벽을 치는 데도 그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키엘이 그런 로잔느를 이용하고 있는데, 여전히 좋아할 수 있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고.
“이안 님도 아시던데.”
“네가 구해줬다던 사람 맞지?”
“에이, 구해주다니. 그렇게 말하면 내가 대단한 거 같잖아.”
로잔느가 두 손을 뻗어 저었다.
그 이안이 누군지 몰라도, 경비들이 그를 통해 황태자비 경합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정체를 알아내려고 해봤지만, 로잔느가 얘기해 주는 걸로는 흔한 정보밖에 없었고.
경비들도 그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무는 편이었다.
리오는 순진한 로잔느가 안타까웠다.
‘네 주변에는 다 널 이용하려는 사람들밖에 없네.’
키엘도, 그 이안이라는 사람도. 벨라 마저 그녀를 안 좋아하는 거 같은데.
리오는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그깟 마음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다들 그렇게 목숨을 매달리는 걸까.
조금만 방향을 틀면 될 텐데.
* * *
소설을 보면서 벨라는 항상 로잔느와 슈리아가 빛과 그림자같이 대비된다고 느꼈었다.
그래서 마족인 벨라가 빛과 같은 로잔느를 싫어하는 거라 고집 피웠었다.
‘그래. 내가 키엘을 좋아하는 거야.’
하지만 그 모든 게 무슨 소용이고,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벨라가 아닌데.
처음 마주하게 된 마음은 고민할 것도 없이 갈 길이 무엇인지 보여줬다.
그녀가 키엘의 옆에서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어릴 때의 은인이자, 마족들과 같이 말썽만 피우는 감초 같은 역할이겠지.
‘그래도 좋아하는 건 괜찮잖아.’
욕심부리지 않으면, 아플 일도 없었다.
‘그래, 이 마음은 부대찌개 같은 거야. 너무나 먹고 싶고, 또 먹고 싶고, 너무 좋아하는데. 부대찌개가 나한테 잘해 주는 걸 바라지 않는…. 뭐라는 거야.’
부대찌개랑 사람이랑 어떻게 같을 수 있겠나.
벨라에겐 똑같이 먹을 건 맞긴 한데.
‘하아… 모르겠다, 그냥 접어! 접으라고!’
어쩌면 포기해야 할 걸 알기에 여태 무의식적으로 덮어 놓은 게 아니었을까.
벨라는 그 뒤로 키엘과 로잔느를 최대한 피해왔었다. 이 마음이 접힐 때까지.
다행히 2차 경합까지 영애들이 한데 모이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벨라를 추종하던 무리들은 대부분이 1차 경합에서 떨어져서, 그녀를 귀찮게 하는 영애들도 없었고.
물론 간혹 연애 상담을 하는 영애들이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벨라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냥 헤어지세요.”
“세상에 좋은 사람 많아요.”
“하나에만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거울처럼 되돌아 받는 말을 내뱉으면서, 씁쓸하게 마음을 죽이고 죽였다.
그런데.
“아무래도 벨라 님이 제일 유력한 후보 아니겠어요?”
어째 또 칼 같은 연애 상담 끝에 추종자만 더 늘어나게 되었다.
“저도 전에 벨라 님이 토론회 때 하시는 거 보고 반했어요.”
“하하….”
그들의 목적은 명확했다.
“혹시 벨라 님께서 황태자비가 되시면 시녀는 어떤 아이로 뽑으실 건가요?”
누구든 황태자비가 되면, 후에 시녀를 뽑을 텐데 거기에 들 생각이 다분해 보였다.
‘얘들아, 줄 잘못 선 거 같은데….’
특히 줄을 잘 못 선 사람이 있었으니.
“저… 제가 떨어지면, 벨라 님의 시녀로 일해도 될까요?”
연분홍색 머리의 수줍은 로잔느였다.
언제 그 무리에 있었던 건지, 뒤편에 있던 로잔느가 제일 먼저 앞으로 달려와 벨라에게 물었다.
“… 로잔느 양이 왜요?”
오랜만에 로잔느를 보지만, 벨라는 전처럼 화가 나진 않았다.
“저… 전 아마 2차 경합에서 떨어질 거 같아서요.”
“아….”
오히려 위기감을 느꼈지.
‘그러고 보니… 경합 순서가 바뀌었었지.’
순서가 바뀌면, 로잔느가 통과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 * *
벨라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달밤이 뜬 날, 키엘의 방으로 몰래 달려갔다.
‘하…. 내가 지금 둘의 사랑도 이어줘야 하는 거야?’
그녀의 마음과 달리 이 소설은 원작대로 잘 흘러가야 하니까.
고양이로 변해 창문을 두드리자, 키엘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지 눈망울을 글썽이며 문을 열었다.
“…벨라.”
“키엘, 바쁜 건 아니지?”
키엘이 고개를 저었다.
“벨라라면 언제든 환영이에요.”
어쩜 우리 주인공은 마음씨도 이렇게 예쁠까.
“무슨 일이에요? 나 보고 싶어서 온 거야?”
그 말에 벨라는 한참 키엘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런 이유면 나도 좋겠는데….’
경합까지는 일주일 정도가 남아 있었다.
벨라는 그 사이에 저택에 가서 소설을 정리한 걸 찾아볼 생각이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것뿐이었다.
“나 어디 갔다 올 데가 있어서, 심장을 돌려줬으면 좋겠어.”
“아….”
벨라가 안으로 들어가 사람으로 변했다.
“상처는 좀 괜찮아? 꽤 오래됐는데.”
“글쎄요. 모르겠는데.”
“왜 몰라, 네 몸인데.”
키엘은 창틀에 천천히 앉아 고개를 돌렸다.
“이거 이웨르만 꺼낼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억지로 꺼내는 거면, 벨라도 할 수 있긴 한데.
“상처만 확인해 보고 이웨르 소환할게.”
“…….”
“벗어봐.”
장난스럽게 말하자, 그는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싫어.”
달빛을 등진 키엘의 모습은, 어딘가 조금 쓸쓸해 보였다.
하지만 벨라는 그저 그의 윗단추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떻게든 확인해야 해.’
어떤 표정의 미동도 없이 벨라는 그에게 다가가 첫 번째 단추를 잡았다.
‘가능하면 빨리 저택에….’
딱 하는 소리가 나고, 단추가 풀렸다.
잠겨 있던 옷깃이 열리고 키엘의 하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벨라.”
그가 부르는 소리에 벨라는 잠깐 눈을 올려 키엘의 눈을 마주했다.
잠시 모든 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
어릴 때처럼 그녀를 올려다보는 이 눈빛은, 여린듯하면서도 늘 그녀를 사로잡는다.
어느새 그녀의 허리를 지탱하는 그의 가는 손이 소름 돋도록 간지러웠다.
지금 이 자세가, 이 거리가. 잊으려 했던 꿈을 상기시켰다.
- “사랑해.”
벨라는 마른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마음이 어떻게 죽겠는가.
두 사람을 이어주겠다고 한 건, 너무 철없는 생각이었다.
이 단추 하나가 둘이 되고, 셋이 되면.
그때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욕심이 커져가겠지.
어릴 때부터 당연하게 했던 모든 스킨십이, 이제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쓰일 테고.
언젠가는 질투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쌓아온 우리의 관계를 모두 망가뜨리겠지.
키엘은 이 사람을 사랑하는 만큼, 이 순간은 미웠다.
황궁에 들어오고 난 이후로. 쭉 벨라를 보지 못했다.
물론 뜬금없이 그의 일상에 찾아오긴 했지만.
첫 무도회 때 복수하겠다던 고양이는 밤새 기다려도 오질 않다가.
1차 경합 때 그에게 말도 없이 백지를 낸 것도 서운했는데.
그 후로도 여전히 벨라는 그를 찾아오지 않았었다.
본궁에서 자주 볼 거로 생각했는데, 의도적으로 그를 피하는 것도 알았고.
그래도 쭉 참아왔다.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덫은 완벽해야 하고, 놓쳐서는 안 되는 사냥감이기에.
그렇게 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가며 기다렸는데.
드디어 그를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심장을 돌려줬으면 좋겠어.”
그리도 도망치고 싶고, 이 심장을 가지고 가고 싶은가.
“상처만 확인해 보고 이웨르 소환할게.”
유일한 그의 안전장치라. 이것조차 없다면, 이 불안함을 감당할 수가 없는데.
“벗어봐.”
그는 벨라의 허리를 잡고 고개를 올렸다.
“싫어.”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벨라는, 그 어린 시절과도 같지만 이제 그도 벨라도 어리지 않았다.
벨라는 표정에 어떤 미동도 없이 단추를 하나 풀었다.
“벨라.”
벨라와 눈이 마주치고. 마력이 없는 키엘은 그 순간, 간절히 주문을 걸었다.
네가 내 몸에 손을 대면,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라고.
쌓아온 모든 성이 모래처럼 부서진다고 해도, 지금 너를 독점하겠다고.
차가운 달빛이 그들에게 내리쬐고, 벨라는 두 번째 단추를 열지 않았다.
슈리아가 했던 말이 돌고 돌아 벨라의 이성을 붙잡았다.
- “자기가 받을 수 있는 사랑을 요구하겠죠.”
벨라가 천천히 손을 내리자, 숨조차 멈추었던 시간이 다시 흘러갔다.
“오랜만에 본 건데, 심장부터 가져가게요?”
“저택에 다녀와야 해서 그래.”
“거긴 왜요?”
어떻게 소설을 정리해놓은 걸 확인해 보러 간다고 하겠는가.
“그냥 나의 직감이 거기에 갔다가 오래.”
“…….”
벨라는 키엘의 눈빛이 마치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니, 조금 걱정이 되어서 말이야.”
“무슨 걱정요?”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제껏 회피해 온 결과가 이거였다. 경합의 순서가 바뀌고, 로잔느가 탈락될 수도 있다는 거.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게 보기 싫어서, 두 사람의 입에서 서로의 이름이 나오는 게 듣기 싫어서 피하는 건 이제 충분했다.
속으로 시린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지만, 벨라는 덤덤하게 말했다.
“로잔느는 2차 경합을 통과하기 어려울 거 같은데….”
네가 힘 좀 써서 사람을 매수해보라고 하려고 했는데.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키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외였다.
“…어?”
벨라는 괜히 민망해졌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객관적으로 판단을 내릴 수가 있구나.
“그런데 벨라가 그걸 걱정하는 이유는 뭐예요?”
키엘은 살짝 눈을 흘겨보며 벨라에게 물었다.
“뭐, 뭐겠어. 그냥 뭐….”
로잔느가 황태자비가 안 될까 봐. 하지만 이다음의 말은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난 벨라가 로잔느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 아냐! 내가 언제.”
“…….”
“나 로잔느 엄청 좋아하는데?”
벨라는 자기가 봐도 딱딱한 말투에 등골이 서늘했다.
“가, 가봐야겠다.”
“벌써 가게요?”
키엘이 벨라의 손을 잡으려던 순간, 그녀는 이미 고양이로 변해 열린 창문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키엘은 창틀에 앉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도망가는 고양이를 보며 한숨만 내쉬었다.
‘두고 봐….’
* * *
한편, 로잔느의 호위로 잠깐 고용되었던 메리는 손에 들고 있는 소개장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 “내가 소개장을 써줄 테니, 슈리아 크루엘을 만나 봐.”
크루엘가의 저택에 오기는 했는데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다.
몇 해 전. 몇 년 만에 돌아간 고향에서 메리를 보고 ‘너도 그 마녀를 찾으러 왔냐’며 혀를 찼었다.
메리는 그제야 그들이 저택에서 떠났다는 소식을 겨우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후안 크루엘이 벨라를 찾으려고 몇 번이나 그 마을을 방문해서 들쑤시고 다녔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시골의 저택에 있을 때도 권위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는데 결국 크루엘가의 양녀로 들어가게 되다니.
‘게다가 후안 크루엘 님은 ‘이안’이란 이름으로 옆에 계신 거 같고.’
벨라에게는 잘된 일인 것 같지만, 어딘가 마음이 석연치 않은 건 브웬이 했던 부탁 때문이었다.
‘벨라 님을 찾았다고 알려줘야 하는데.’
그는 매번 농작물을 갖다주며 은연중에 벨라의 마음에 들려고 용쓰던 친구였다.
나름 벨라가 토끼 같다며-그 누구도 동의하지 않았지만-당근을 주곤 했었다.
저택에서는 당근의 ‘당’자만 나와도 인상을 찡그릴 정도로 싫어하는 것도 모른 채.
- “혹시 벨라의 소식을 알게 되면, 나에게도 얘기해주지 않을래?”
브웬은 메리가 용병이라 그런 부탁을 했었다.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었다. 찾아서 뭐 어쩌려고.
하지만 브웬의 옆에 예쁜 아내와 토끼 같은 아이들을 보자, 비단 그의 사심으로 하는 부탁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 “키엘이 벨라를 찾는 것 같았어.”
브웬은 ‘누이’ 같은 사람이 없어져서 찾는 모양이라고 말했지만, 메리는 알고 있었다.
키엘이 검술 교실의 다른 아이들과 썩 잘 지낸 게 아닌데도, 그녀가 키엘과 친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벨라 때문이었으니까.
- “만약 벨라 소식을 알게 되면 내게 편지를 보내라고 했었어.”
메리는 그 주소를 몰랐다.
그때는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고.
‘벨라 님께 키엘이 찾는다고 알려줘야 했는데.’
메리는 걱정을 가득 안고, 벨라의 소개장을 크루엘가의 문지기에게 건넸다.
* * *
불안한 마음을 가득 안고 2차 경합이 시작되었다.
경합은 간단하면서도 복잡했다.
많은 사람을 황궁에 초대하고, 각 영애가 서로의 비전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 자리에 모인 국민의 여론을 조사해서 다음 경합에 갈 영애를 뽑는 거였다.
소설 속에서는 3차 경합에서 슈리아의 악행이 드러나고, 로잔느의 선행이 두드러지니 말할 것도 없이 로잔느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경합은 꽤 큰 정원에서 이뤄졌다. 20명의 영애가 한 줄로 앉아 있고, 그 앞에 많은 국민이 영애의 말을 듣고 있다.
‘과연 영애들의 말이 다 들리기나 할까.’
어차피 이들 중 초대된 사람들의 대다수가 이미 고정적으로 지지하는 가문이 있을 거다.
그리고 영애들의 맞은편에는 토론회처럼 황제와 그의 심복 로한, 그리고 키엘이 앉아 있었다.
벨라는 그저 키엘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래, 머리가 좋으니 수를 써놨었겠지.
그 잘난 머리를 어디다 쓰겠어. 제 사람을 갖는 데 쓰겠지.
다행인 건, 질문이 평범했다.
앞으로 황태자비가 되면 어떻게 국정을 다스릴 건지와 황태자를 어떻게 도울 건지.
살짝씩 바꿔 물어보지만, 결국 그 말이 그 말이었다.
그리고 로잔느의 답변을 들을 차례였다.
‘하… 로잔느가 잘 말할 수 있을까.’
부디 여기서 평범하게라도 대답해야 할 텐데.
“저… 저는….”
왜 멍청하게 말을 더듬는 건지. 벨라는 속으로 한숨만 나왔다.
“모든 사람이 자유로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걸 위해 노력할 겁니다.”
“로잔느 프실리아 님은 황태자 전하를 위해 어떤 마음으로 보좌하실 생각인가요?”
“저….”
벨라는 로잔느의 얼굴이 달아오를 듯 붉어지는 걸 보며 고개를 돌렸다.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로잔느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깎이고 체념이 된다.
그리고 드디어 벨라가 답할 차례가 다가왔다.
“황태자비가 되면 앞으로 황후가 되시는 건데, 제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벨라의 질문은, 비슷하지만 살짝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건 아마 이세계에서 왔기에 하는 질문이겠지.
그녀는 떨어지기 위한 몸부림을 쳤다.
“별로인 거 같아요.”
이제껏 긍정적으로 대답해 온 영애들과 다르게, 부정적인 의사를 표하자 질문관은 다시 질문했다.
“어떤 점이 마음에 안 드시나요?”
“음….”
사실 딱히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제국이 그리 불편하다고 느낀 적도 없었고.
벨라는 곰곰이 생각하다, 소설에 빙의 된 순간부터 쭉 마음에 안 들던 게 떠올랐다.
“여기는 아동을 너무 내버려 두고 학대해.”
맞은 편 멀리 앉아 있는 키엘부터. 검술 교실의 메리, 로잔느의 하녀인 마이유.
그들의 어린 시절을 만나 오면서 늘 느꼈던 바였다.
“특히 부모가 없는 고아들은 그냥 거리에 나앉더라고요.”
“아….”
“여기는 보육원이 없나?”
벨라의 말에 모여있던 국민은 서로의 눈치를 서로 보기 시작했다.
‘음. 다들 껄끄러워하네. 잘했어, 벨라트리체.’
그리고 한 번 더 거세게 밉보일 기회가 찾아왔다.
여태 한두 번 질문하던 황제 라리에트가 손을 살짝 들고, 벨라에게 물었다.
“제국에 보육원은 있다만, 모두 각 가문이 관리하고 있어 지역마다 편차는 있을 수 있네.”
황제와 대화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게 제국이 무능력하다는 거죠. 관리가 안 되니까 그냥 방관하고 있는 거잖아요.”
키엘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대드는 건 미안하지만, 확실하게 탈락하려면 좀 재수 없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영애라면 어떻게 하겠나?”
물론 여러 가지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키엘에게 따로 말해주기로 하고.
“제대로 못 하면 그 가문의 목을 칠래요.”
지금은 이 구역의 악녀로 간다.
“공포정치를 하겠단 건가?”
“목 치는 게 무슨 공포정치예요, 16등분 정도는 해줘야 공포정치지.”
“이, 이 질문은 이쯤으로 하겠습니다.”
질문자는 황제의 눈치를 보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럼 벨라트리체 크루엘 님은 황태자 전하를 위해 무엇을 하실 수 있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거….”
벨라는 입을 잠깐 열었다가 살짝 다물었다.
중앙에 앉아 있는 키엘을 보니, 그는 그녀의 답변도 재밌게 들었는지 웃고 있었다.
황궁에 와서 답답하고 불편한 일들만 있어서, 소설과 자꾸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은 불안감에 잊고 있었지만.
그녀의 운명은 마계에서 그의 손에 죽는 거였다.
그러나 눈앞에 저리 밝게 웃는 저 사람 덕에 다시 인간계로 올 수 있었고, 제국에서 황제 다음이라는 공작가의 양녀로도 들어갈 수 있었다.
아무리 못되게 말을 한다고 해도, 저 질문에는 빈말로라도 키엘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달빛이 선명하게 빛나는 저택에서.
그의 입술에 약속의 숨을 불어넣은 걸 아직 기억한다.
“소원을… 들어주려고요.”
그리고 그때였다.
거대한 마력의 진동으로 온 하늘이 흔들리고, 땅이 흔들리던 게.
키엘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늘 이 사랑을 쟁취하려면, 이렇게 목숨을 걸어야 했다.
‘이게 내 소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