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가 죽여야 할 최종 악녀가 저랍니다-16화 (16/25)

16

벨라는 이 황태자비 경합에 대해 누구보다 객관적인 사람이었다.

이 경합에서 이기는 사람은 로잔느라는 걸 빼고 생각하더라도.

모든 가문의 영애에게 기회는 돌아가지만, 전부터 생각한 대로 어차피 될 만한 사람은 정해져 있다.

적당히 자기가 챙길 수 있는 이득만 챙기면 되는 정치적 쇼에 불과한데.

“그게 뭐 어때서라뇨. 아무리 그래도 전하의 비가 될 사람들인데….”

그래서인지 벨라는 저 말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슨 조선시대의 궁녀들이 전부 왕의 여인인 것 같은 소리인지.

어떤 불쌍한 영애를 욕하는 건지 몰라도, 뒷말에 가담할 생각이라면 사절이었다.

“제국의 모든 영애가 황태자 소유라도 되나요?”

세리나는 생각해본 적 없는 벨라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황태자비를 뽑는 자리…인데요.”

“네. 경합이죠. 시험을 치듯이 뽑는 건데, 일면식도 없는 황태자를 사랑하기라도 해야 해요?”

말하면서도 벨라는 조금 찔렸다.

마치 그녀가 황태자와 일면식도 없고, 사랑하지도 않는 것 같이 말한 거 같아서.

“그래도 그건 황실에 대한 모독이지 않나요?”

누군지 몰라도 소문에 휩쓸린 영애가 안타까워서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

“황태자비가 될지도 안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연애 좀 한다고 모독이라뇨.”

“…….”

“원래 마음은 머리로 바꿀 수 없는 거예요. “

젠킨스는 오랜만에 받은 감동이 배가 되었다.

저런 사고를 하는 마왕님이라면.

‘잔바르 님과 내 사이도 응원할 수 있겠구나.’

그런 희망이 보였다.

세리나는 점점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지옥 길인지도 모르고 싸우러 왔다가, 된통 이상한 설교만 받게 되었으니.

“그, 그러면 경합에 나오질 말았어야죠.”

안 그래도 없는 지반이 흔들릴 거라는 생각에 여기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벨라는 눈앞의 세리나에게서 악녀의 씨앗이 보였다.

‘넌 이제 내 옷 훔쳐 간 애 용의자 1이다.’

이 정도의 행동력이면, 충분히 의심할 만하지.

“알아서 경합에서 떨어지겠죠. 각자 처지가 있으니 선택한 최선 아니겠어요?”

벨라는 웃으면서 대화를 마무리하려고 했다.

“그…그래서 이분과 연애 하시는 건가요?”

“……?”

“참 대단하십니다.”

어떤 불쌍한 영애가 그런 소문에 휩쓸리나 했더니.

‘내 얘기였어?’

그것도 이분이라면.

벨라가 젠킨스를 쳐다봤다.

젠킨스도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평소라면 ‘아가씨를 욕하는 건 참아도 나를 욕하는 건 참을 수 없다.’ 였지만.

감동받은 젠킨스는 달랐다.

“지금 저랑 벨라 아가씨가 그런 소문이 났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감히 우리 이렇게 넓은 마음을 가진 마왕님을 욕하다니.

“레이디께선 그런 쪽으로만 생각이 발달하나 봅니다. 전 벨라 아가씨의 보좌인데요.”

세리나는 그제야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었다 확신했다.

“하긴. 보좌 같은 걸 둘만 한 가문이 아니니 모르셨을 수도 있겠네요.”

“아….”

“질서를 중요시하시는 분 같은데, 이분은 크루엘 공작가를 대표하신 분입니다.”

세리나가 얼굴이 새빨개진 채 주변의 눈치를 살짝 봤다.

“감히 가문의 영토도 없이 메르켄 공작령 밑에 하인처럼 지내는 가문이 함부로 입을 놀릴 분이 아닙니다.”

젠킨스의 말 한마디에, 세리나 옆에 있던 영애들이 일제히 시선을 그녀에게로 향했다.

벨라는 그 영애들의 눈빛을 보고 조금 웃겼다.

‘다음 표적 정하는 건가.’

본성이 어디 가랴.

얼굴을 외워뒀다가 이 애들이랑은 이제 말도 섞지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키엘 말대로 하길 잘했네.’

저 투덜거리는 게 참 마음에 안 들었는데, 지금은 마음에 들었다.

‘내 편일 땐 든든한 싸가지야.’

평소에는 스트레스지만.

* * *

그때 이후로, 분위기는 조금 달라졌다.

황태자비 경합을 바로 앞둔 때에.

리오는 매일 같이 올라오는 보고를 차마 무시할 수가 없어 키엘에게 향했다.

“저, 키엘. 영애들 사이에서 이상한 기류가 흐른다고 하던데.”

“뭔데? 설마 벨라를 괴롭혀?”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황태자비가 되기 싫은데 경합에 나온 영애들의 모임.’ 이라는데?”

키엘은 그 말을 듣자 한심하다는 듯 비웃었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오지 말지, 왜 왔대?”

“그… 그러게.”

“혹시 반란이라도 일으키는지 유심히 봐둬.”

그러다 키엘은 문득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태자비가 되기 싫은 거야 제 맘이지만, 무리를 만들고 선동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주동자가 누구야? 내 앞에 데려와.”

“그게….”

리오는 뜸을 들이자 키엘은 책상을 두어 번 치며 그를 재촉했다.

“벨라 님이라는데?”

“……. 데리고 와.”

키엘은 한쪽 입꼬리를 실룩이며 허탈하게 웃었다.

‘이 고양이가 뭔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사건의 경위는 이랬다.

벨라가 일침을 놓은 이후로, 그녀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힘 없는 영애들이 한둘씩 찾아왔다.

“저, 안녕하세요….”

처음에는 벨라도, 젠킨스도 누군가 그녀에게 말 거는 걸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우리 아가씨 이제야 왕따를 탈출하나 보네.’

‘역시 그 세리나 걔가 나서서 주동했나 보네.’

그렇게 수줍은 듯 찾아와서는 두서없이 이 말 저 말을 하는데.

어째 대화의 내용은 조금씩 이상하게 흘러갔다.

“어떻게 하면 알아서 경합에서 떨어질까요?”

“하하….”

벨라는 난감했다.

“처음부터 떨어지면, 집에 가서 못났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너무 걱정이에요.”

왜 그런 얘기를 자기에게 와서 하는지.

“그러면 두 번째 때 떨어지면… 되지 않을까요.”

대충 한 답변 하나.

“제가 좋아하는 분은 평민이거든요…. 그분과 도망치고 싶기도 한데, 잘 모르겠어요.”

“그렇구나….”

벨라는 소설에 빙의하고 연애와 담을 쌓고 살았는데, 뭐 어쩌라는 건지.

“신분을 떠나서 현실적으로 생각해봐요. 도망가서 살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대충한 답변 둘.

이 모호한 답변 하나, 둘이 마치 그들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편안함을 주기라도 한 건지.

‘미치겠네.’

어느새 벨라는 식사를 할 때마다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와 각자의 인생 상담과 연애 상담을 벨라에게 하곤 했다.

“저 보고 사랑한다고 하더니, 다른 사람이랑 잠자리하는 게 말이 되나요?”

그렇다고 입 다물라고 할 수도 없고, 적당히 맞장구만 쳐줬다.

“참 나쁜 놈이네요….”

“그런데도 못 잊는 건 제가 바보인 거겠죠?”

“…시간이 지나면 잊히겠죠.”

정말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었는데.

그녀가 이세계에서 온, 크루엘가의 양녀라는 것 때문인지.

그들은 벨라의 말을 신봉하는 수준까지 갔다.

거기다.

“어머, 확실히 잊으려면 복수해야죵.”

벨라의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는 시녀 이웨르는, 아주 연애에 빠삭한 것처럼 옆에서 조언했다.

“좀 더 잘나가는 모습을 보이면 무조건 그 남자는 후회합니당.”

세리나와 나눴던 잠깐의 대화에서 시작된 오해는, 이웨르의 활약까지 합쳐져서 벨라를 아주 연애에 득도한 사람으로 포장했다.

그리고 경합을 하루 앞둔 날.

벨라는 도란도란 열띤 토론을 하는 영애들 사이에서, 미동도 없이 그냥 가만히 있었다.

이웨르만 신이 나서 상담을 하고 있고.

‘내가 왜…. 이렇게 되었지.’

벨라가 남의 얘기에 관심을 둘 인물이 아니었다.

‘이게 다 이웨르 얘 때문이야….’

오죽하면 푸르도 질려서 놀러 나간 데다가, 젠킨스도 그 모임에는 빠지겠는가.

때때로 이 무리는 벨라 없이 벨라의 모임을 하곤 했는데, 그때도 꼭 이웨르는 벨라의 대리인처럼 껴서 신나게 떠들어댔다.

‘그냥 성격대로 다 꺼지라고 하고 싶다.’

누가 그래도 된다고 얘기해줬으면 좋겠다.

그때, 황태자의 호위인 리오 프로하가 영애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벨라는 리오를 보자마자 살려달라는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저, 벨라트리체 크루엘 님. 잠시만….”

“좋아요!”

무슨 얘기인지 다 들을 필요도 없이 벨라가 일어서서 영애들을 가로질렀다.

“…혹시 저희가 너무 불순한 이야기를 해서 그런 걸까요?”

영애들은 벨라를 걱정했지만, 이웨르는 리오를 보자마자 깨달았다.

‘이제 내가 죽겠구낭….’

벨라는 처음 리오를 따라갈 때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겨우 저 영애들에게서 벗어난다는 생각에.

그러나 발걸음이 키엘의 방으로 향하면서 불현듯 겁이 났다.

“키엘이 날 부른 거야, 지금?”

“…네.”

“나 제대로 사고 쳤나 보네.”

“…아세요?”

황태자비 경합을 위해 모인 영애들이 벨라 앞에서 연애 상담을 하는데, 그게 정상적이라고 생각은 들지 않았었다.

“키엘이 혹시 화났어?”

리오는 벨라가 이렇게 저자세로 난감해하는 건 처음 봤다.

“조금 화난 거 같던데요.”

그는 오전에 키엘에게 보고 올렸던 서류를 벨라에게 건넸다.

“난 좀 억울한데.”

“들어가자마자 보고 싶었다고 해보세요.”

“걔 화나면 얄짤 없어. 얼마나 고집 센데.”

“…아시는구나.”

벨라는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 서류로 리오의 머리를 한 대 쳤다.

“알면서 나한테 시켜?”

“아까 그 영애들한테도 그렇게 해보시지 그래요.”

“그래도 되면 좋겠는데. 괜히 소란 피울까 봐 그러지.”

“이미 소란은….”

벨라가 째려보자, 리오는 그 뒤의 말은 하지 않고 조용히 키엘의 방문에 노크했다.

“키엘 전하. 벨라트리체 크루엘 님이십니다.”

이 격식 있는 말 때문인지, 벨라는 중압감을 느끼며 육중한 문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있는 키엘의 모습에 벨라는 순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인간계에 오고 난 이후로 꽤 그럴싸한 모습이나, 얼떨결에 와서 잠옷 입은 키엘의 모습은 본 적 있지만.

벨라가 황태자의 모습을 제대로 본 건 이번이 사실 처음이었다.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귀하고 순수해 보이는 황태자의 모습은 이 화려한 방과 너무 어울렸다.

‘너무….’

그때 리오가 뒤에서 벨라를 응원하는 말에 벨라는 정신을 차렸다.

“벨라 님, 화이팅.”

잠깐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그래서 문이 닫히자마자.

“키엘, 보고 싶었어!”

여느 때처럼 장난스럽게 키엘에게 달려가 허리를 숙이고 그를 안았다.

“…벨라.”

“그래. 안 통하는구나.”

벨라가 입맛을 다시며 팔을 풀자, 키엘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아냐. 통해.”

그리고 벨라의 등을 자신에게로 당겼다.

얼떨결에 벨라가 키엘의 무릎 위에 앉은 채로 그를 안고 있었다.

“말해봐요.”

“아, 그게….”

벨라가 다시 몸을 뒤로 빼려고 하자, 그는 더 꽉 그녀를 안았다.

“이거 풀면 안 봐줄 거야.”

키엘이 말할 때 내뱉는 숨소리가 벨라의 어깨에 닿았다.

‘푸… 풀어야 할 거 같은데.’

그의 간지러운 숨결이, 벨라가 요즘 꾸는 요망한 꿈을 떠오르게 한다.

낯부끄러운 자세, 꽉 안는 그의 팔이 자꾸 착각의 숲으로 손짓했다.

여인으로서 한 남자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 같은 착각.

‘아니, 얘는 로잔느도 있으면서 나한테 왜 이래?’

이런 일이 반복되면 선을 넘어버릴 것 같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전에, 벨라는 그의 무릎 위에 있는 채로 어깨를 밀어냈다.

우리가 아무리 허물없이 지낸 사이라도 적당히 지킬 건 지켜야지.

며칠 전에 이곳에 옷도 안 입은 채 온 당사자는 제 행동을 절대 돌아보지 않았다.

“응석 부리는 거야, 뭐야. 왜 맨날 다 커서도 안아달래.”

그 말에 키엘은 황당한 듯 벨라를 바라봤다.

“벨라가 먼저 안았잖아.”

“아…. 그렇지.”

그제야 벨라는 자신이 여기에 오게 된 이유가 생각났다.

‘내가 이렇게 변태였던가.’

겨우 이렇게 안았다는 거로 이상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뻔했다.

“그리고 지금 벨라가 잘못한 거 있는 거 알죠?”

“잘못이라니!”

“반역이 의심된다는 보고를 받았는데요.”

벨라는 키엘의 품에 파고들었다.

“억울합니다, 전하.”

벨라는 그간 있었던 일을 차분하게 말했다.

세리나가 건방지게 굴었던 일.

어쩌다 보니 젠킨스와 그런 소문이 났던 일.

그리고 젠킨스가 얼마나 재수 없게 대처해줬는지도.

“젠이 아주 눈에 독을 품고 말하는데. 그동안 가죽이라도 벗기고 싶은 걸 참길 잘했다 싶더라니까.”

키엘은 ‘세리나 도이치’라는 이름을 기억했다.

‘벨라 옷을 훔쳐간 것도 그 사람 짓일 확률이 크네.’

그저 변방에서 메르켄 공작가에 빌붙어 사는 가문이라 신경도 안 썼었다.

그러나 이토록 관심을 받길 원한다면, 조금 다른 방식의 관심을 둬 줄 수는 있었다.

‘알아서 나가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네. 감히 벨라를 건드린 벌은 받아야지.’

키엘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벨라는 이제 그 후의 이야기를 설명했다.

“난 정말 별말 안 했었거든. 그런데 그 후로 자꾸 사람이 한둘씩 모이잖아.”

벨라는 시시콜콜한 대사까지도 다 얘기했다.

“집 나가고 싶다길래, 집 나가면 고생이라고 잘 생각해보라고만 했거든?”

“…….”

“이런 건 누구나 하는 말인데도, 이상하게 막 나를 추종하듯이 따르는 거야.”

정말로 벨라의 조언이 도움 되기도 했겠지만.

벨라의 태도가 갈피 못 잡는 영애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거겠지.

늘 당당하고, 무서울 것 없는 사람이니까.

정체가 마왕이니 당연한 거겠지마는.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키엘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벨라가 연애 상담을 해준다고요?”

“그냥 몇 마디 해줬는데 도움이 됐다나.”

“…하!”

키엘이 허탈하게 웃었다.

“영애들을 너무 나무라지 마.”

그는 벨라를 제일 나무라고 싶었다.

본인의 연애 상담을 해볼 생각은 안 하시는지.

“뭐, 네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제국의 모든 영애가 널 좋아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

“황태자가 뭐 별거라고….”

키엘이 벨라의 볼을 꼬집었다.

“얄미워.”

벨라도 자신의 말이 얄밉다는 걸 인정하는지 순순히 볼을 내주었다.

“나도 반역이 아니면 벌할 생각 없어요.”

“다행이네.”

“어차피 가문끼리 정략결혼이 많으니 각자 선을 넘지 않는 내에서 애인이나 연애는 묵인하는 편이고.”

알고 있었다. 그러니 슈리아도 그런 말을 한 거겠지.

- “자기가 받을 수 있는 사랑만큼만.”

벨라는 키엘을 살짝 내려다봤다.

‘그래, 난 여기서 만족.’

이렇게 황태자를 안아줄 수 있는 이 위치면 만족한다.

“그래도 날 싫어하는 티를 내는 모임은 허용 못 해.”

“널 싫어하는 게 아니라, 널 안 좋아하는 거지.”

“황태자비가 되기 싫은데 경합에 나온 영애들의 모임. 그게 이름이라면서요. 그런 이름은 안 돼.”

“그게 이름도 있어? 난 처음 듣네.”

정말로 처음 들었다.

“그러니 허용 못 해.”

“그런데 네가 허용 안 한다고 그런 무리가 없어지지는 않을 거 같은데….”

키엘은 볼을 꼬집던 손으로 벨라의 턱선을 잡으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방법은 다 있지.”

* * *

황태자비 경합의 문이 열렸다.

앞으로 약 3주 동안 모든 영애가 황태자비로서 갖춰야 할 덕목이라는 이름 아래 황궁 예절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혼자 쓰던 방에 다른 영애가 한 명 같이 쓸 예정이었다. 침대 밑에 있는 이름 모를 영애의 짐을 보자, 벨라는 경합의 시작이 몸으로 느껴졌다.

‘이제 정말 시작이네.’

로잔느와 키엘이 다시 만나는 때.

‘욕심부리지 말고. 최대한 있는 듯 없는 듯 지내자.’

벨라는 굳게 다짐하고 그날 저녁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거쳤다.

경합의 첫날 저녁은 꽤 큰 무도회로 이어진다.

큰 사교의 장이기에, 황태자비 후보로 올라온 많은 영애를 포함해서 올 수 있는 가문은 모두 참석한다.

“아가씨! 애완 곰은 드레스 못 골라줘요?”

푸르가 옷장 앞에서 말똥말똥한 눈으로 쳐다봤다.

마계에서는 푸르가 벨라보다 훨씬 덩치도 컸기에, 옷도 갈아 입혀 주고 했는데.

몸이 작아지자 할 수 없는 게 많아서 그런지, 요즘 따라 애완 곰 역할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 애완 곰은 애초에 하는 일이 없지.

“갈아입는 건 내가 도와줄게용!”

매번 변태처럼 호시탐탐 벨라의 몸을 노리는 이웨르가 대놓고 침을 흘렸다.

“옷 입는 건 내가 혼자 할 거라고 몇 번 말해. 그럼 푸르가 드레스 골라봐.”

푸르는 한참을 보더니, 검은 드레스의 옷걸이를 잡았다.

“이거요!”

“너무 어둡지 않아?”

사실 푸르가 드레스를 고를 때는 고민하는 ‘척’을 하는 거지, 실제로 머리를 쓰진 않는다.

“그럼… 이거!”

이번에는 빨간 드레스. 예쁘긴 한데 너무 튄다.

벨라에게는 어찌 보면 사교계에 첫발을 내딛는 무도회나 다름없었기에, 조금 더 신중하게 고르고 싶었다.

“이거로 결정.”

벨라는 흰색 바탕에 드레스 밑으로 갈수록 점점 연보라빛이 나는 옷을 골랐다.

“저도 그거 고르려고 했어요!”

“역시 우리 푸르는 보는 안목이 있네.”

벨라가 소설 속에 빙의한 이후로 제일 잘하는 게 영혼 없이 푸르 칭찬하기일 것이다.

그때 이웨르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

“아가씨, 너무 무난하지 않아요? 색은 예쁜데 사교계에서는 조금 더 화려한 디자인이 좋을 거 같아용!”

그래서 고른 거였다. 무난해 보여서.

“아무도 이런 연한 색감의 드레스를 안 입을 테니까 특별하지 않겠어?”

동물왕국에서 온 특별함도 줘야 하지만, 굳이 화려하게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제발 그냥 소설대로 잘 흘러가면 좋겠다고. 나는 좀 빠지고.’

그러나 옆에서 지켜보던 젠킨스도 이웨르와 같은 생각이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자칫 비웃음을 살 수도 있고. 크루엘가의 양녀로 들어가서 푸대접받는다고 오해하면 어떻게 해요?”

그러면서 그는 푸르가 두번째로 골랐던 빨간 드레스를 가리켰다.

“이게 아가씨랑 어울리고 돋보일 거 같은….”

“네가 입어, 그럼.”

젠킨스가 벨라를 째려봤다. 나름 벨라를 생각해서 한 조언인데.

“그럼 확실히 이 옷으로 입을 거예용?”

“응.”

“안 바꾸실 거예용?”

벨라는 이웨르가 자꾸 묻는 게 살짝 불안했지만, 아무리 봐도 가장 좋은 선택으로 보였다.

“응. 안 바꿔. 결정했어.”

“그럼 전 아가씨의 라이벌들이 무슨 드레스 입는지 감시할게용!”

“나한테 무슨 라이벌이 있다고….”

놀러가겠단 말을 뭘 저렇게 변명하는지.

그 말을 들은 젠킨스가 이름 하나를 거론했다.

“마리안느 메르켄.”

그게 누군데.

벨라는 ‘어쩌라고’ 하는 눈빛으로 젠킨스를 쳐다봤다.

“슈리아 공녀님이 얘기하신 사람이요.”

그제야 벨라는 눈썹을 살짝 올리고 ‘아’하고 짧은소리를 내었다.

메르켄 공작가.

소설 속에서는 한두 번 거론되는 정도이고, 비중은 전혀 없었다.

다만, 슈리아가 한 말은 조금 달랐다.

- “혹 벨라 님께 나쁜 소리를 한다면, 뒤의 일은 생각지 말고 본보기를 보여주세요.”

크루엘 공작가와는 앙숙에 가까운 사이라고.

- “설령 죽이셔도 제가 수습할 테니까요.”

벨라가 추측하기에, 마리안느가 소설 속에서 안 나오는 이유는.

슈리아가 마리안느를 먼저 기선제압을 한 상태가 아니었을까.

‘하긴. 백작가의 영애가 키엘의 사랑을 듬뿍 받는데 슈리아만 악녀가 되는 것도 말이 안 되긴 하지.’

벨라는 곰곰이 생각하다 피식 웃었다.

‘생각해보니 웃기네.’

모든 공작가들이 자기가 유리하다 생각하고 움직인 거니까.

물론 다들 이 소설의 결말을 모르니 진심으로 덤비는 거겠지만.

오늘 있을 무도회에서 진짜 그들이 조심해야 할 사람이 누군지 모두 알게 될 거다.

로잔느 프실리아.

소설 속에서는 이 무도회에서 키엘이 오랜만에 본 로잔느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춤을 신청한다.

‘그리고 로잔느에게 아주 지옥 같은 질투가 쏟아지지.’

그 외에 이 무도회에 큰 사건은 없다.

‘로잔느… 그때 한번 본 게 다였는데.’

로잔느는 소설 속에서 천사같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착하고 어리숙하고. 이해심도, 포용력도 넓은 사람.

슈리아와 반대되긴 하지만, 로잔느 또한 결국 제국의 황후에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황제의 마력 없는 사생아라는 꼬리표 때문에 힘들 키엘을 너그러이 안아줄 수 있는 사람.

‘얼마나 컸을지 궁금하네.’

그리고 젠킨스의 잔소리는 무도회가 시작되어 이미 옷을 다 입은 순간까지도 이어졌다.

“어휴. 결국 이 드레스랑 모든 장신구가 아가씨의 무기가 될 텐데. 장신구도 다 빼면 어떡합니까.”

“내가 차면 진짜 무기가 돼.”

“아가씨는 맨손이 무기인데요. 그걸 가려야죠.”

“뒤질래, 입 다물래.”

경합을 알리는 첫 무도회라 그런지, 꽤 많은 영애가 공을 들여 치장했다.

조금 눈에 덜 띄게 입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 경합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심지어 벨라를 추종한다는 무리들도 제각각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다.

“아… 벨라 님은 많이….”

그들도 어떻게 칭찬을 해야 할지 난감하게 벨라를 쳐다봤다.

“괜찮아요. 일부러 편한 옷을 입고 나온 거니까.”

애초에 벨라의 계획은 그냥 조용히 구석에 잘 처박혀 있다가 돌아오는 거니까.

이세계에서 왔으니 조금 주목받긴 하겠지만, 경합에서 로잔느만큼 주목받을 일은 없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벨라트리체 크루엘 님, 저랑 한 곡 추실래요?”

눈앞의 영애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색하는 걸 보자마자 벨라는 키엘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 “방법이 있지.”

키엘은 벨라를 보자마자 웃음부터 나왔다.

이웨르에게 들은 바로 의하면, 무난하게 눈에 띄지 않는 드레스를 입었다고 했는데.

‘너무 눈에 띄는데.’

모두 화려하게 입었는데, 혼자만 수수한 것도.

하지만 소박한 드레스라 할지라도 저 멀리서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고혹적이었다.

그리고 키엘이 생각했던 대로, 벨라는 키엘을 보자마자 드레스를 잘못 선택했다고 후회했다.

‘이웨르…. 넌 죽었다.’

보아하니 이웨르가 일부러 언질을 준 게 분명했다.

키엘이 입고 있는 진한 보라색의 정장은 누가 봐도 벨라가 지금 입고 있는 옷과 색감이 어울렸다.

마치 미리 준비한 한 쌍처럼.

“한 곡 추실래요?”

여기서 거절하면, 키엘의 자존심에 금만 가는 일이니 벨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키엘의 손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럴까요?”

와중에도 잘생기고 저 보랏빛 정장마저 잘 어울리는 건 반칙이다.

점점 주위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이건 벨라가 크루엘가의 마차를 습격한 괴한으로 몰릴 때보다, 그녀가 키엘과 함께 별채에 들어갈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시선이었다.

‘미치겠네.’

음악이 나오기 전, 벨라가 드레스의 끝자락을 잡고 허리를 숙였다 들었다.

“너 설마 그 무리 와해시키려고 이런 거야?”

“응.”

“너 정말… 전략적이구나.”

로잔느는 어쩌고 이러는 거야.

‘…자꾸 욕심부리고 싶잖아.’

물론 반역이 로잔느보다 중요하긴 하겠지.

‘아… 모르겠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처럼.

지금은 그저 눈앞에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과 춤추는 거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사람들 다 보는 데서 실수하면 안 되니까.

반면 키엘은 벨라가 화낼 줄 알았는데, 순순히 춤만 열심히 추는 걸 보고 의아했다.

‘웬일로 로잔느를 안 물어보네.’

그가 아는 한 소설 속에서 키엘이 로잔느에게 첫 춤을 신청하는데 말이지.

‘이제 그 노트대로 흘러가기를 포기한 걸까?’

그런 거라면 좋겠는데.

‘아니면 너무 화가 나서 말을 안 하는 건 아니겠지.’

키엘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벨라에게 물었다.

“내가 많이 난감하게 한 거예요?”

그가 갑자기 물어보자 벨라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

바로 그의 발을 밟았지만, 다행히 긴 드레스 덕에 티가 나지 않았다.

“그러게 왜 갑자기 말을 걸어.”

“너무 집중하길래….”

엉거주춤 벨라가 반대로 가려고 하자, 키엘이 그녀를 잡으면서 웃었다.

“그쪽 아니고 이쪽.”

“너 때문에 다 까먹었어. 그다음이 뭐였지?”

벨라는 이게 더 난감한지 눈을 크게 뜨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전에 말했듯이, 힘 빼요.”

키엘은 살짝 웃고 벨라의 허리를 꽉 끌어당겼다.

“그냥 자연스럽게 발만 몸이 가는 대로 짚어요.”

“…응.”

조금 신기했다.

춤은 함께 추는 거라고 하지만, 벨라는 이제껏 각자가 따로 연습한 춤에 합을 맞춰보는 거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키엘이 손을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마치 대련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레 몸이 움직였다.

그가 손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허리를 살짝 밀어내면, 벨라는 자연스레 한 바퀴를 돌게 된다.

“어깨에 손 올려요.”

그의 말대로 손을 올리자, 키엘은 그 팔로 자연스럽게 벨라의 등을 받쳤다.

키엘이 살짝 미소를 짓고 끌어당기니, 그를 중심으로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이제껏 함께 춤을 춘 적은 몇 번 되었다.

아주 어린 시절에.

크루엘가에서.

그리고 지금은 많은 사람 앞에서 황태자가 된 키엘과 그 경합에 참가한 영애로 춤을 추고 있었다.

하지만 벨라는 지금 이 순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음악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귀로 새겨지고.

춤사위가, 그의 미소가 눈에 박힌다.

늘 그녀가 키엘에게 얘기해 준 동화 속의 한 장면 같이.

아쉬운 듯 음악이 끝나고 키엘이 천천히 손을 놓았다.

찰나의 동화는 막을 내리고, 시끌벅적한 사람들 소리에 벨라는 천천히 현실로 돌아왔다.

* * *

키엘의 말대로 무리는 순식간에 와해할 수밖에 없었다.

무려 첫 춤이었다.

누구에게 신청하든, 절대 거절하지 않을 영애에게 하는 게 당연하다.

그 말인즉슨 가장 가까운 사이라는 건데.

무리 중 몇몇 영애들은 배신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전하께서 어떻게 벨라 님께 제일 먼저 춤을 신청하나요?”

“설마 우리가 전하를 좋아할까 봐 미리 차단하려고 하시는 건 아니었겠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건 겨우 몇 명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떡상하는 주식에 환호했다.

“잘 어울리시네요. 옷도 비슷한 거 같지 않아요?”

“하긴. 양녀라고 해도 크루엘 공작가인데.”

속으로 ‘줄을 잘 섰다’며 쾌재를 불렀다.

“모임 이름을 바꿔야겠네요.”

“벨라 님을 황태자비로 지지하는 모임이면 괜찮나요?”

그렇게 무리는 와해하고, 벨라도 모르는 새에 몇몇이 더 붙어 새로운 무리를 만들어낸다.

* * *

춤이 끝나자마자 현실로 돌아온 벨라는 다급하게 로잔느부터 물었다.

“그런데 로잔느는?”

왜 안 물어보나 했지. 키엘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벨라의 손을 다른 곳으로 끌었다.

“나중에 소개해줄게요. 이제 리오랑 춤춰요.”

“…뭐?”

어느새 리오가 꽤 멋있게 차려입고 벨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랑도 한 곡 추실까요?”

키엘은 어벙하게 말을 잇지 못하는 벨라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만 지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리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리네 프로하 양도, 함께 춤출까?”

“…….”

리네는 평소와 달리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키엘의 손을 잡았다.

키엘은 이 무도회가 뭘 의미하는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날 이후로 소설 속에서는 로잔느가 여러 영애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키엘도 처음에는 벨라가 원하는 대로 소설대로 따라가려 했다.

그런데 ‘황태자비가 되기 싫은데 경합에 나온 영애들의 모임.’ 이라니.

이것만큼 좋은 핑곗거리가 어딨는가. 틈이 생겼으니, 욕심을 좀 부려봤다.

“키엘, 너 지금 춤추기 싫은 거 너무 티 나.”

그렇다고 소설 속의 로잔느가 받게 될 괴롭힘을 벨라가 받아선 안 되었다.

“다른 영애들이랑은 차라리 춤추면서 말을 해보는 건 어때?”

“그래.”

사랑하는 고양이에게만 간식을 줄 순 없고.

우리 고양이에게는 주고 싶으니까.

싫어도 모두에게 간식을 주는 수밖에.

벌써 몇 명과 춤을 췄는지. 키엘은 속으로 겨우 짜증을 삭혔다.

소설을 통해서, 그리고 그가 원래 알고 있는 정보를 통해서.

공작가와 후작가의 영애들과 춤을 추고 백작가 중 유망 있는 집안의 영애들에게도 춤을 신청했다.

벨라와 춤을 출 때 느껴졌던 질투 어린 시선이 벨라에게 향하지 않도록.

“이제 다 됐지?”

명단까지 작성해서 철두철미하게 계획적으로 춤까지 춰줬는데. 리오가 어딘가 난감하게 키엘을 쳐다봤다.

“또 누구 남았어?”

“저, 명단엔 없는데…. 로잔느가 와 있어.”

프실리아 백작가도 꽤 변방에 속해 있는 가문이었다.

이 소설이 신분의 차이를 넘어선 사랑인 만큼.

둘은 평민인 줄 알았을 때도, 그리고 실제로 다시 마주쳤을 때도 그 벽을 넘어서야 했다.

“걔랑은 안 돼. 걔랑 추면 또 똑같이 춰야 할 애가 얼마나 많은데.”

“그게 아니라….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그 말에 키엘은 리오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봤다.

꽤 구석에서 혼자 멀뚱히 서 있으며 쭈뼛거리는 로잔느.

눈이 마주치자 로잔느는 더 뻣뻣하게 굳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마음보다는, 여전히 답답하게 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벨라라면 저 상황에서 웃었을 거다.

키엘은 곧바로 주위를 살피며 벨라를 찾았다.

그녀도 꽤 구석에 있었는데, 많은 영애가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표정은 리오가 일전에 표현했던 대로 ‘무념무상’이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하며 제 앞에 떠들어대는 영애들을 그냥 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로잔느처럼, 벨라와도 눈이 마주쳤다.

‘아….’

웃어줄 줄 알았던 벨라는 키엘을 보자마자 눈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리오가 조심스레 귀띔했다.

“벨라 님 지금 진짜 화났을걸?”

“…왜?”

“나 이후에도 계속 사람들이 춤추자고 한 데다가.”

리오는 마치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키엘에게 가까이 가서 작게 말했다.

“리네가 알려준 건데, 지금은 영애들의 피드백 감옥에 갇혔다고.”

“…….”

“황태자비 관심 없었던 거 아니냐며 다그치다가 지금은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대.”

“아….”

“벨라 님을 황태자비로 밀어줘야 되니 말아야 되니….”

“너 엄청나게 세세하게 안다?”

“리네가 그 무전마법으로 다 엿들었거든.”

키엘은 잠깐 경멸하듯이 리오를 쳐다봤다.

“내가 그러라고 허락한 거 아닌데….”

“게다가 벨라 님이 은근슬쩍 자리를 피하는데도 계속 따라다니면서 자기들끼리 말싸움 중이래.”

키엘도 나름대로 온 힘을 다하고 있는데, 벨라가 화내는 게 조금 서운했다.

“어쨌든 벨라 님이 오늘 밤에 너한테 복수할 거라고 중얼거렸어.”

리오는 ‘복수’에 중점을 두고 말했지만, 키엘은 그저 웃었다.

‘아아. 오늘 밤에 볼 수 있다는 거네.’

그렇게 화낼 생각이면 환영이지.

그리고 리오는 벨라가 화났다는 데도 웃고 있는 키엘이 이해되지 않았다.

‘내 주군이지만 참….’

그러다 문득 대화가 샛길로 빠진 걸 느끼고 다시 로잔느의 이야기를 꺼냈다.

“로잔느는 어떻게 해?”

키엘은 리오를 데리고 천천히 로잔느에게로 향했다.

꽤 많은 영애와 춤을 추고 난 후라 그런지, 이제 그의 한걸음에 사람들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오랜만이야. 로잔느.”

로잔느는 자기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걸 보자마자 얼굴을 붉히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키, 키엘… 저, 저, 전하.”

키엘은 사실 로잔느에게 별다른 감정이 있지 않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내 마음에는 들지 않은 애’였긴 했지만. 그렇다고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벨라가 자꾸 ‘로잔느’를 들먹거리거나.

그 소설 속에 벨라 대신 ‘로잔느’가 있을 때마다.

짜증이 나곤 했는데.

“여, 여태, 전하인 줄 모르고….”

로잔느가 키엘을 보자마자 울먹거렸다.

“저기, 로잔느. 난 괜찮으니까….”

울먹거리다 못해 로잔느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주변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하아….’

인간계의 예의 따위 지키지 않아도 되는 벨라마저 키엘의 처지를 생각해 첫 춤을 거절하지 않았는데.

여기서 울면 황태자의 입장이 뭐가 되겠는가.

‘네가 자초한 거야.’

키엘은 로잔느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로잔느 프실리아, 저랑 한 곡 추실까요?”

로잔느는 눈물을 닦고 얼떨떨하게 키엘의 손을 받았다.

그때.

모든 사람이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프실리아 백작가의 딸이 황태자와 춤을 추는 걸 눈여겨보았다.

소설과 조금 다르지만, 그 내용대로 흘러가기에 충분할 정도로 많은 시기와 질투의 눈빛으로.

소설에 묘사된 대로, 로잔느는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같이 눈부시고 빛이 났으니까.

리오와 춤을 추고 난 이후에도 꽤 많은 남자가 벨라에게 춤을 신청했었다.

‘미치겠네.’

춤을 출 때마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누구와 춤을 췄는지도 몰랐다.

벨라는 조용히 구석으로 가서 소파로 향했다.

그렇게 가는 동안에도, 춤을 추자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벨라는 정중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발 아파.’

마력은 점점 돌아오지만, 회복은 여전히 되지 않았다.

크루엘가에서 꽃을 꺾으러 창문에서 뛰어내렸을 때 삐끗했던 발목도 때때로 시큰거리기도 했는데.

오랜만에 신은 구두 때문인지, 발이 점점 붓는 것 같았다.

털썩하고 소파에 앉아 좀 쉬나 싶었더니.

“벨라 님. 이게 무슨 일이에요?”

“벨라 님 설마 전하께 관심 있으신 거였어요?”

어느새 영애들이 벨라의 주변을 둘러쌌다.

키엘이 왜 벨라에게 처음으로 춤을 신청한지를, 벨라에게 설명이라도 해보라는 듯 화난 얼굴로.

‘난들 알았겠어?’

따지고 보면 쉴새 없이 떠드는 너희 때문인데.

그때 굳이 주지도 않은 총대를 멘 영애가 반박했다.

“전하께서도 이세계에서 오신 분이니 관심이 있으실 수도 있는 거죠.”

“벨라 님은 황태자비 하기 싫어하신다고 했잖아요.”

참고로 벨라는 그런 말 한 적이 없었다.

이제껏 참아왔던 건, 슈리아가 편지로 ‘그런 애들을 더 잘 구워삶으라.’ 고 했기 때문이었고.

‘정 힘들면 그냥 아무 말 하지 마세요.’라고 조언했으니까 그렇지.

“벨라 님이 황태자 전하를 어떻게 거절하실 수 있었겠어요.”

“이참에 벨라 님이 오히려 더 유력한 후보가 된 거죠.”

“노리신 거 아니에요?”

벨라는 그냥 귀를 막았다.

쟤들이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겠고, 뭔 말을 하든 상황이 꼬일 것 같았다.

‘아… 피곤해.’

벨라는 영애들의 말을 마치 배경음악처럼 들으며 천천히 무도회장의 분위기를 살폈다.

키엘은 볼 때마다 다른 영애들과 춤을 추고 있었다.

분명히 이 무도회의 주인공은 로잔느여야 하는데.

누구도 아니게 되었다.

오히려 벨라만 더 귀찮아졌지.

영애들이 자꾸 ‘벨라 님’이라고 할 때마다 저 혀를 잘라버리고 싶었다.

“키엘….”

벨라는 혼자 작게 중얼거리면서 예민한 자신을 달랬다.

“오늘 밤에 복수할 거야.”

최고의 복수를 상상하면서.

상상을 하다 보면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서류에 고양이 발바닥을 다 찍어놓을까.’

그러면 다시 정리해야 하니까 너무 잔인하다.

‘입을 옷에 털을 다 날릴까.’

이 방법은 너무 타격이 없을 거 같고.

한참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을 때, 벨라는 키엘과 눈이 마주쳤다.

평소라면 보자마자 웃음부터 났겠지만.

시끌벅적 떠들어대는 영애들 사이로 보이는 키엘은, 얄미웠다.

‘흥. 나중에 괴롭혀줄 거야.’

가끔 푸르가 키엘이 잘 때 발을 올리면 끙끙댔지.

고양이로 키엘이 잘 때 그 위에 무겁게 눌러앉아야겠다. 가위 눌리듯이.

그러다 벨라는 키엘이 점점 어디론가 향하는 걸 주시했다.

그리고 그 발끝이 향한 곳에, 연분홍색 머리의 귀여운 소녀가 있는 걸 발견했고.

‘아…. 로잔느인가?’

소설이 원작대로 흐르는 힘은 크다 했는가.

여자주인공이 나오자, 벨라는 그녀 앞에 시끄럽게 얘기하던 영애들이 일제히 로잔느를 보는 걸 알아챘다.

“저기는 또 누구예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전하께서 춤을 신청하네요?”

키엘이 다른 공작가나 후작가의 영애들과 춤을 출 때는 아무도 그걸로 딴죽을 걸지 않았었는데.

“저 아가씨면, 프실리아 백작가 아니예요? 그 집 나갔다던 아가씨.”

“프실리아 백작가가 어디 붙어 있는 건데요?”

벨라는 어째 소설 속에서 슈리아가 들어야 할 말들을 듣고 있었다.

“벨라 님. 이대로 있으실 거예요?”

그럼 이대로 있지, 뭘 어쩌란 말인 것인지.

‘어쨌든 소설대로 흘러가네.’

영애들의 드레스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벨라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피곤해.’

* * *

무도회의 끝을 알리는 음악이 들리고, 한둘씩 무도회장을 떠났다.

“벨라 님은 언제 가세요?”

한 영애의 말에 벨라는 눈을 떴다.

‘와…. 나 지금 여기서 존 거야?’

하지만 졸지 않은 척. 어색하지만 부채를 착 펼쳐 입을 가렸다.

“머, 먼저들 가세요.”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침 흘리면서 잔 건 아니겠지. 벨라는 영애들이 뒤돌아서자마자 입부터 닦고 눈부터 비볐다.

‘아니, 음악이 너무 자장가같이 지루해서 그래.’

벨라가 일어섰지만, 아직 잠이 덜 깼는지 살짝 휘청거렸다.

정신을 차리고 무도회장을 둘러보자, 사람들이 몇 남아 있지 않았다.

‘역시 키엘도, 로잔느도 없네.’

소설에서는 춤을 추고 난 후 서로 몰래 만나 그리움을 표하는데.

‘복수는 다음에 하든가 해야지.’

벨라는 비어가는 무도회장을 천천히 빠져나왔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큰 복도의 사방을 메아리쳤다.

그리고 몇 걸음 걷다가 창 너머로 벨라는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정원에 있는 게 눈에 보였다.

‘…….’

마치 소설 속의 삽화처럼 두 주인공이 벨라에게 등을 보인 채 앉아 있었다.

늘 빛나는 저 백금발과 사랑스러운 연분홍색은 달밤에도 어울리는 색을 하고 섞여 있다.

달빛마저 오로지 저 두 사람을 위해 존재하듯 빛나고 있었다.

키엘이 몸을 숙이고, 로잔느가 그의 밑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 저 장면.’

벨라는 미소를 띠고 발걸음을 돌렸다.

다행히 소설대로 잘 진행되는 모양이다.

‘그래. 난 이걸로 만족해.’

마계에서 키엘이 보고 싶을 때마다 소설을 읽었었다.

질리도록, 외울 만큼 뇌리에 박혀 있는 소설의 한 줄 한 줄이.

[키엘이 고개를 숙이자, 로잔느는 말없이 입을 맞추었다. ]

벨라가 걷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떠오른다.

[입술이 떨어지자, 키엘이 작게 말했다. “사랑해.”]

이렇게 옆에서 지켜볼 줄 알았다면, 그리 열심히 보지 말걸.

* * *

그 시각, 키엘의 옆에 나란히 앉은 로잔느는 계속 그의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저기, 키엘. 그럼 매일 이 시간에 여기서 만나면 되는 거야?”

“리오나 리네를 통해서 알려줄 거야. 그때만 이 시간에 나오면 돼.”

“응.”

“혹시나 둘을 못 마주치면, 네 방에 노란색 손수건이라도 걸어놓을 테니까. 그걸 신호로 생각하고.”

“응!”

키엘은 해맑게 대답하는 로잔느를 보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고개를 올려 밤하늘의 달을 보며 마계의 달을 떠올렸다.

하늘을 반이나 차지하는 그 달을 등지고, 검은 날개를 활짝 편 벨라는 사무치게 아름다웠는데.

그 날개로 잡을 수도 없게 도망갈까 봐 괜스레 불안했다.

“절대 들키면 안 돼.”

다시 한번 로잔느에게 경고하려던 때였다.

“윽.”

심장이 갑자기 너무 아려온다. 숨을 쉬는 게 힘들 정도로.

가슴에 구멍이라도 난 듯, 시리고 찬 바람이 그의 몸을 관통하고 온 구석을 돌아다니는 듯했다.

“왜 그래? 괜찮아?”

키엘이 고개를 숙이고 숨을 겨우 내뱉자, 로잔느가 고개를 빼꼼히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봤다.

“…하아.”

키엘이 한참 숨을 골라 내쉬고 로잔느의 부축을 받아 일어섰다.

“어쨌든 들키지 않게 잘해. 리오가 데려다줄 거야.”

그 말에 수풀에 몸을 기대있던 리오가 일어섰다.

“내… 내가 데려다줘? 넌 괜찮아? 갑자기 왜 이래?”

키엘은 다가오는 리오에게 손을 뻗고 고개를 저었다.

벨라의 심장을 가지고 있는 동안, 그녀의 감정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벨라는 그 노트대로 흘러가길 원하고, 로잔느와 첫 춤을 추지 않았다.

‘내가 나약해서 그래.’

그러니 손이 떨릴 만큼 이 시린 아픔이 벨라의 감정일 리는 없을 테고.

‘불안해서 그래, 불안해서.’

무의식중에 나오는 그의 감정이겠지.

공들인 사냥감을 놓칠까 봐.

마족들은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벨라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특히 이웨르는 더 긴장했었다.

벨라를 연애의 달인으로 만든 모임의 핵심은 이웨르. 반성의 의미로 미리 드레스 코드를 고자질하긴 했는데.

이쯤이면 벨라가 질책할 법도 한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더 무서웠다.

‘도련님이 알아오라 한 건뎅. 억울행.’

‘딱히 무도회에서 별일 없었던 거 같은데.’

‘푸르는 입 다물기 놀이하는 중이야!‘

심지어 눈치 없이 끼어드는 푸르마저 입을 다물 정도로, 벨라의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았다.

화가 난 건 아닌데. 화가 난 것 같은.

서로 옆구리를 찌르며 먼저 말을 걸라고 미루고 있을 때였다.

벨라는 방 입구에서 멈춰 서서 뜻밖의 인물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헉! 벨라 님!”

“…메리?”

저택에 있을 때 운영했던 검술 교실.

거기서 유일하게 검술을 진지하게 생각했던 메리였다.

잔바르와 젠킨스가 연극을 엉망으로 하는 바람에 검술 교실이 없어지면서, 벨라가 후에 메리를 용병단에 소개했었다.

“세상에! 제가 벨라 님을 여기서 뵙게 될 줄이야!”

메리는 단번에 벨라를 알아봤다. 짙은 흑발에 선명한 붉은 눈. 거기다 뒤에 젠킨스와 이웨르까지 보이자, 벨라가 아닐 수가 없었다.

“네가 여긴 어떻게….”

메리는 두 손을 모으며 눈을 반짝였다.

“황태자비 경합 때문에 호위로 고용되었어요.”

저택 식구들도 메리를 싫어하진 않았기에 아주 조금 반가웠다.

“와. 정말 오랜만이네.”

“그러게용.”

생각해보면 세월이 꽤 많이 흘렀다.

“저 두 분은 어쩜 하나도 안 변하셨어요? 세월이 비켜 가는 거 같아요.”

메리의 말에 젠킨스와 이웨르가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

젠킨스는 인간계에 있으면서 늙지 않은 자신의 모습 때문에 늘 곤욕을 치렀기에 더더욱 긴장했다.

가능하면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는데.

“그래도 아가씨 기분이 좀 좋아 보여서 다행이네용.”

“그러게요.”

메리 덕에 벨라의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럴 만도 한 게.

“용병 단장이라고?”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출가하고 싶다던 메리가 어느새 이렇게 성장해서 용병단 하나를 이끌고 있을 줄이야.

“혼자 생활하니까 좀 악착같이 일했는데 어느새 이렇게 되었네요.”

“잘했어, 잘했어.”

메리는 수줍게 웃으며 한참 동안 근황을 얘기했다.

“벨라 님이 그 소문의 크루엘가의 양녀라니, 너무 신기하네요.”

“뭐라고 소문이 났는데?”

“그냥 이세계에서 온 사람이 크루엘가에 양녀로 들어갔단 거만 알았어요.”

이야기가 점점 길어질 것 같자, 벨라는 메리의 고용주에게 양해를 구하고 싶었다.

“여긴 그럼 누구 호위로 온 거야?”

“아. 때마침 저기 오시네요.”

잠시 메리와 시간을 가져도 되느냐고 물어볼 참이었는데.

벨라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리오와 함께 오는 로잔느와 마주쳤다.

소설 속의 여자주인공.

키엘의 연인.

너만은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로잔느는 걸어오면서 젠킨스와 이웨르를 보고 제일 먼저 놀랐다.

‘아…. 키엘이 좋아하던….’

이웨르.

분명 키엘에게 사랑을 가르쳐줬다고 했었는데.

‘황궁까지 따라올 정도였구나.’

그리고 눈앞에 벨라를 보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벨라의 매서운 인상이 무서웠다.

“아, 안녕하세요.”

이 사람이 아마 키엘이 신신당부했던 벨라 크루엘일 거다.

“로잔느 프실리아입니다.”

“반가워요. 벨라트리체 크루엘입니다.”

벨라의 말에는 어떤 반가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벨라도, 키엘 옆에 있는 이상 로잔느를 마주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네가 메리의 고용주구나.’

어째 그녀가 애지중지하는 것들을 로잔느에게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로잔느는 발밑에 오래전 봤던 움직이는 곰 인형, 푸르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이 곰 인형 덕에 키엘과 여행할 수 있었으니까.

“앗…. 푸딩….”

“푸딩 아니야! 푸르야!”

푸르는 눈을 반짝였다. 그때도 맛있어 보이는 딸기 디저트 같은 분홍색 머리를 먹고 싶었었는데.

푸르가 입맛을 다시다 로잔느의 팔에 안겨 마치 뽀뽀하듯이 혀를 내밀었다.

“…푸르, 뭐 하니.”

“맛봐요.”

어차피 못 먹을 거, 침만 발라봤다.

로잔느는 순진하게도 웃으면서 푸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귀엽네요.”

그 귀엽다는 애가 지금 네 목숨을 노리고 있단다.

벨라는 인상을 찡그리며 푸르의 뒷덜미를 잡고 떼어냈다.

씁쓸한 이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까.

벨라는 최대한 예의 있게 로잔느와의 만남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밤이 늦었으니 다음에 길게 얘기를 나눌 시간이 있으면 좋겠네요.”

“네. 그럼 아침에 봬요, 벨라 님.”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로잔느를 보며 벨라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 같은 방이야?”

“벨라 님이 로잔느에게 관심 있어 하시는 거 같아서, 제가 힘 좀 썼습니다.”

벨라는 칭찬받으려고 자랑하는 리오를 허탈한 듯 노려봤다.

“키엘도 괜찮을 거 같다고 하던데.”

“…….”

얘들은 좀만 불리하다 싶으면 키엘을 걸더라.

‘어쩌겠어.’

벨라가 로잔느에 대해 물어본 적도 많았고, 관심 있어 보이는 것처럼 보인대도 할 말이 없었다.

‘내 발로 내 무덤을 파놨던 거네.’

* * *

키엘은 그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를 기다리고 있는 한 남자를 바라봤다.

“…전하.”

어쩌면 그가 느끼는 이 불안한 아픔이 이걸 예견한 건 아니었을까.

“로한.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왜겠습니까?”

황제의 보좌이자, 현재 키엘의 보좌로 일하고 있는 로한.

황실의 실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키엘을 지지하는 이들의 반 이상은 로한의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그 아가씨, 맞으시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딱 한 번 본 거지만, 그 무서운 빨간 눈은 제국 어디를 가도 찾기 힘들 겁니다.”

키엘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전혀 모르는 척 시선을 회피했다.

“아주 치밀하게 짜셨더군요.”

“…….”

“이세계에서 온 소녀가 크루엘가에 양녀로 들어갔다고 할 때까지만 해도, 전하랑 관련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그는 천천히 옷장으로 걸어가 잠옷을 꺼냈다. 로한이 대충 떠들고 나면 나가라고 해야지.

“황태자비는 안 됩니다.”

“그래서 그대가 준비한 사람은 누군데?”

“마리안느 메르켄. 그 정도면 될 겁니다.”

“그전에는 슈리아 크루엘이지 않았어?”

로한이 코웃음을 쳤다. 처음에야 그랬지.

하지만 슈리아 크루엘이 로한보다 키엘의 편에 서면, 더는 그의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같은 배를 타고 가지만 각자의 사정은 달랐으니까.

키엘은 그저 단추를 하나씩 풀면서 대답했다.

“피곤하니까 나가.”

“전하. 명심하세요. 전 황실에 득이 되는 대로 움직입니다.”

키엘은 로한이 나갈 때까지 숨조차 쉬지 않았다.

“그 소녀는 절대 안 돼요.”

저 보좌는 오만방자하지만. 황족에 대한 충성심도 의심할 바는 없고. 일 처리 하나는 잘한다.

그럼에도 그 실세를 계속 이어가려는 게 조금 문제지.

‘대체할 사람이 없어.’

리오가 빨리 실무를 배우면 좋겠지만, 리오는 자신이 보좌가 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키엘은 조용히 침대에 누워 복수하러 온다는 벨라를 기다렸다.

‘진정해. 계획대로 천천히 되고 있으니까.’

그의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가시밭길이 펼쳐져 있다.

하나씩 제거해가는 동안 뒤에 따라오는 고양이가 없어지지만 않기를.

아까부터 시린 가슴은 이따금 너무 쓰려 오고, 밤새 기다렸지만 벨라는 오지 않았다.

* * *

1차 경합이 끝나기 전까지는 모든 영애가 방을 함께 쓰게 되어 있었다.

자존심 높은 공작가와 후작가들은 대부분 시녀처럼 부릴 가문과 함께 방을 쓰곤 했는데.

그 때문인지, 날이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미 파벌로 묶일 영애들은 묶여 있었다.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누가 황태자비가 되는 게 좋을지 서로 토론하곤 했다.

“아무래도 메르켄 공작가와 바바리안 공작가가 제일 우세한 거 같지?”

“모르지. 크루엘 공작가에서 들인 양녀가 황궁으로 올라 올 때 전하께서 배웅해주셨단 말이 있던데.”

여기서 줄을 잘 서야 할 텐데.

공작가의 영애들을 후보에 세워놓고 무엇이 정치적 발판으로 삼기에 좋은지 논의하다가도.

“그런데 전하와 춤춘 그 뜨내기 백작가 영애는 뭐야?”

프실리아 백작가 영애의 이야기만 나오면 모두 시샘의 눈빛으로 바뀌었다.

시끌벅적 이는 영애들과 다르게, 벨라는 하루 대부분을 밖에 나가서 쓸데없이 어슬렁거리곤 했다.

로잔느와 마주치기 싫어서.

벨라가 쉬지 않으니, 마족들도 덩달아 개인 시간이 줄어들었다. 특히 이 사태에 대해 젠킨스는 불만이 가득했다.

‘어느 가문의 영애가 산책을 세 시간씩 하는 거야.’

다른 영애들과 친목이라도 가지면 모를까.

벨라가 주로 하는 건 푸르를 데리고 산책하는 일이었다.

“푸르. 넌 착하고 똑똑한 곰이니까 목줄 같은 거 안 해도 되겠지?”

“전 하고 싶은데요!”

“저두용!”

벨라는 변태처럼 눈을 반짝이는 푸르와 이웨르를 보고, 들고 있던 목줄을 반으로 쪼갰다.

“아가씨. 이제 방으로 들어가시죠. 딱히 할 거도 없어 보이는데.”

“전 싫어용!”

“이웨르가 싫대.”

언제 이웨르의 말을 귀담아들었다고. 젠킨스는 한숨만 내쉬었다.

“전 그 아가씨랑 같은 방 쓰는 애 완전 싫어용.”

“난 좋은데! 걔 먹으면 안 돼요?”

분홍색 머리가 솜사탕이라도 되는 건지. 달곰할 것 같다며 푸르는 로잔느를 볼 때마다 진짜 침을 흘렸다.

“알면서 묻지 마.”

“걔 천족 쓰레기처럼 생겨서 싫어용.”

“천족 쓰레기라니… 착하게 생겼단 말을 그렇게 합니까?”

확실히 로잔느를 낮에 보니, 사람이 더 밝아 보였었다.

정말 천족의 후예라도 되는 듯이 성녀 같았다.

‘그래서 불편한가?’

절대적으로 로잔느가 착한 역할이라서.

인정하기 싫어도 벨라의 피에는 마족의 힘이 흐르니까.

“어쨌든 걔 싫어용! 우리 도련님한테 관심 있다니깡!”

“그렇게 싫어할 게 뭐가 있어요, 도련님은….”

젠킨스는 말을 하려다 벨라의 눈치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키엘은 뭐?”

그때였다.

아직 점심도 되지 않았는데, 마치 저녁 만찬이라도 가는 듯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한 영애가 그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천천히 벨라에게 왔다.

“안녕하세요, 벨라트리체 님.”

젠킨스가 화제를 돌리려고 재빨리 옆에서 귀띔해주었다.

“마리안느 메르켄이에요.”

‘아, 나 이런 애들이랑 실랑이하기도 싫은데.’

벨라는 목을 가다듬고 마리안느와 인사를 나눴다.

“동물왕국의 공주님이시라더니, 황궁이 많이 갑갑하신가 봅니다.”

“아, 예. 좀.”

“산책을 3시간 하시는 건 처음 봤습니다. 많이 건강하시네요.”

“아….”

벨라는 다른 영애들처럼 대충 대답하려다 갸우뚱거렸다.

어째 비꼬는 거 같이 들리는 건 그냥 예민해서일까.

“저를 세 시간 동안 지켜보셨나 봐요.”

“호호…. 그, 그건 아니고….”

마리안느는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옆에 있는 푸르를 가리켰다.

“그나저나 애완 곰이라던데, 황궁에는 애완동물 반입금지랍니다.”

“아, 그래요?”

“여기는 놀이터가 아니라 황궁입니다. 황태자비 경합에 나오셨으면 법도를 지켜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마리안느는 웃으면서도 당당하게 말했다. 마치 자신이 황태자비이고, 이곳의 법도를 가르치려는 것처럼.

벨라가 입술을 씰룩였다. 마리안느의 목적이 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견제하려고.

‘웃기네.’

저 말 하려고 세 시간 동안 벨라를 틈틈이 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황태자 전하께 허락받았답니다. 황궁의 법은 황제와 황태자 아닙니까?”

“…아, 아무리 그래도 황태자비를 뽑는 자리에 특별한 예외를 두는 건 아니지 않을까요.”

“약속을 잘 지키면 얼마든지 있어도 된댔어요.”

벨라는 자랑스럽게 눈을 반짝이는 푸르를 들어 안았다.

“우리 푸르, 대신 나랑 약속한 거 잊지 않았지? 잘 지켜야 해.”

푸르의 눈빛이 흔들렸다.

“무슨 약속요?”

“또 까먹었어? 인간은 사냥하면 안 돼. 알았지?”

“그럼요! 푸르는 공주님 말 잘 들어요!”

벨라는 푸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착하다. 언젠가 상으로 한 명 정도는 줄 테니까 그때까지 참아야 해.”

“그럼 저 그 분홍색 머리 여자애 먹어도 돼요?”

‘아니. 그건 아니지.’

벨라는 마리안느를 살짝 쳐다보면서 말했다.

푸르가 인간을 잡아먹는다는 얘기를 하자, 꽤 놀란 게 얼굴에 역력히 드러났다.

“분홍색 말고 빨간색은 어때? 매콤한 맛 날 거 같은데.”

“저 매운 거 잘 먹어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마리안느는 서서히 뒷걸음질 치며 벨라에게 작별을 고했다.

“역시 우리 아가씨, 마계의 수장 다워용! 멋있엉!”

“그렇게 협박을 하면 어떻게 합니까?”

예의와 법도는 하나도 안 지키는 이웨르와, 인간계에서 좀 머물렀다는 젠킨스의 반응은 매우 달랐다.

“어휴, 같은 방 쓰는 로잔느 씨가 불쌍하네요. 순한 사람 같던데. 하필 피도 눈물도 없는 마왕님이랑….”

벨라는 푸르의 얼굴을 젠킨스에게 돌렸다.

“빨간 머리 여기도 있네.”

“우엑. 젠은 늙은 맛 나서 싫어요!”

젠킨스가 양팔로 자신의 어깨를 감싸며 푸르를 경멸하듯 노려봤다.

“설마 저도 맛봤어요?”

“당연하지! 젠이 제일 맛 없어!”

벨라가 시선을 아래로 내려 물었다.

“제일? 그럼 제일 맛있는 건 누군데.”

“제일 맛있는 건 아가씨고, 그다음이 도련님이고….”

젠킨스의 표정이 점점 험악해지고, 벨라도 질색하며 안고 있던 푸르를 놓았다.

“아이코!”

“푸르, 난 몇 번째양?”

벨라가 마리안느에게 따끔하게 한 소리 한 이후.

벨라의 하루는 점점 더 피곤해졌다.

소설 속의 슈리아 크루엘처럼 인기가 많아지는 건 왤까.

경합이 일어나기 전부터 벨라를 추종하듯 따라다니는 영애들.

슈리아가 뭔 짓을 했는지 크루엘가에 잘 보이려는 영애들.

며칠간 메르켄가의 눈치를 봤던 건지, 벨라가 곰으로 협박하고 나자 물 만난 고기처럼 벨라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처음에는 푸르를 데리고 산책을 할 때, ‘유치하다’는 말소리도 들었고, 아니꼬운 시선을 많이 받았는데.

지금은 산책도 못 할 정도로 푸르를 둘러싸고 귀엽다며 칭찬을 자아냈다.

“저도 집에 기르는 애완견이 있는데,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공녀님은 정말 복 받으셨네요.”

벨라는 이런 관심이 싫었다.

소설 속에 빙의한 이후로 마족이든 인간이든 그녀를 과하게 따를 때마다 불쾌한 기분만 들었으니까.

다행인 건 마계처럼 생각 없이 들러붙진 않는다는 거였다.

불행인 건 마계처럼 함부로 ‘꺼지라’고 할 수 없다는 거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괜찮았었다.

“그나저나 그 프실리아랑 같은 방을 쓰다니. 너무한 처사예요.”

“맞아요. 공녀님을 좋아하는 영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나 은연중에 벨라 앞에서 로잔느를 욕을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순하게 생겨서 그런지 답답하더라고요. 보고만 있는데도 짜증이 나지 않아요?”

그냥 아무 말 없이 듣자니 불편해서 벨라가 한마디라도 하려고 했지만.

“아… 음….”

“그러니까요. 저렇게 얌전하게 생겨서 뒤로는 실속 다 챙길 것 같아요.”

평소 벨라가 말을 하지 않아서인지, 이번에도 그녀가 말할 거로 생각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벨라 님, 혹시 밤에 로잔느양이 밖에 나가신 거 본 적 있어요?”

“아….”

최근 들어 황태자가 밤마다 어떤 영애를 만나는 것 같다는 소문이 있었다.

물론 뜬구름 잡는 소문이라며, 다들 믿지는 않았지만 벨라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소설 속에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키엘과 로잔느의 밀애겠지.

“로잔느양 맞을 거예요. 제가 얼핏 분홍색 머리가 복도를 지나가는 걸 봤어요.”

“이래도 가만히 있으실 거예요, 벨라 님?”

“그….”

“가만히 있으면 안 되죠!”

아니, 저기. 아직 말도 안 꺼냈잖아.

벨라가 단호하게 조금 큰 목소리로 영애들에게 한 마디 꺼냈다.

“그냥 내버려 두세요.”

영애들은 그다음 말을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이 말이 단데.’

어째 소설 속 슈리아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 같았다.

‘설마 내가 로잔느를 괴롭히는 악역도 해야 되는 건 아니겠지.’

* * *

1차 경합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였다.

“세상에, 저거 화국 복장 아니에요?”

젠킨스가 화국의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머, 그러네용!”

평소 제국은 타국과 교류를 활발히 하는 편이었지만, 꽤 멀리 있는 사막왕국인 화국과는 교류가 거의 없는 편이었다.

‘화국이 여기서 왜 나오지?’

벨라는 의아하게 사절단을 응시했다. 소설 속에서도 화국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데.

“아, 화국의 그 구릿빛 피부 청년들이 그리워용.”

벨라도 꽤 오래전 갔던 그곳의 경치를 떠올렸다.

“하긴. 화국 사람들이 대체로 잘생기긴 했어.”

“…뭐라고용?”

“응? 화국 사람들이 잘생긴 편이라고.”

이제껏 단 한 번도 관심을 보인 적 없더니. 이웨르가 놀란 눈으로 벨라의 어깨를 붙잡았다.

“설마, 아가씨. 화국 남자들이 이상형은 아니죵?”

“얘 또 시작이다.”

이웨르가 어깨를 붙잡으며 오열하는 동안, 젠킨스는 화국의 행차를 자세히 뜯어보고 있었다.

“다들 구경하네요. 어쩐지 오늘따라 영애들이 아가씨한테 안 오더라.”

젠킨스의 말대로였다. 많은 영애가 화국에서 온 신기한 사절단을 어슬렁거리며 구경하고 있었다.

“보니까 물건 팔러 온 거 같기도 한데요.”

“황궁에 조공하는 게 아니고?”

“그건 별도죠. 그거치곤 짐이 많잖아요?”

“팔 수가 있어?”

“보통 저런 건 암거래로 하죠. 아가씨도 구경하실래요?”

벨라는 이웨르의 팔을 뿌리치고, 빙긋 웃었다.

“저기다가 묘약 팔아볼까? 제국에선 불법이지만 화국은 아니잖아.”

“…아가씨도 참 대단하네요.”

다들 화국에서 온 신기한 물건들을 살 생각일 텐데, 되려 팔 생각을 하다니.

“돈 벌어서 키엘한테 뭔가 선물이라도 줘야지.”

“그러고 보니 요즘에 도련님은 거의 못 보네요.”

어쩌다 보니 키엘과 마지막으로 얘기한 게 경합 첫날의 무도회 때였다.

낮에는 보는 눈이 많아 찾아갈 수가 없었고.

벨라가 가끔 고양이로 변해서 키엘의 방에 찾아가려고 눈을 뜨면, 그 밤중에 로잔느가 없었다.

키엘과 밀애를 즐기고 있을 테니 괜히 방해될까 봐 피해줬었다.

‘…아. 또.’

심장이 비어 있는데도, 바늘로 찌른 듯 아팠다.

“…또 아파요?”

“티나?”

벨라가 기침을 몇 번 하며 숨을 골랐다.

“혹시 로잔느 양이랑 같은 방 써서 그런 거 아니에요?”

젠킨스의 말에 벨라는 입술을 잠깐 깨물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천족의 기운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죠.”

“갑자기 천족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걔가 천족도 아닌데.”

“아가씨랑 로잔느 양 보면 진짜 천사와 악마 같은데.”

벨라는 젠킨스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 그게 악마 앞에서 할 소리냐. 뒤지고 싶어?”

“와…. 이 모습을 다른 영애들이 봐야 되는데. 거기서는 정말 얌전한 척하더니.”

벨라가 있는 힘껏 젠킨스의 정강이를 발로 찼다.

“너 솔직히 말해. 살기 싫지?”

“제가 뭔 말을 했다고요. 사실대로 말한 건데.”

젠킨스가 벨라를 계속 도발하는 데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어휴, 이 새끼 그냥 잔바르 보낼 때 같이 보낼걸.”

조금만 더 하면 진짜 보낼 거 같아서.

* * *

한편, 키엘은 화국에서 온 사절단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키엘은 열다섯 살, 아니 열네 살에 황궁에 들어오기 전까지 그의 기반이 없던 사람이었다.

물론 벨라의 노트를 바탕으로 더 기반을 닦아 나갈 수는 있지만, 수십 년간 자기 세력을 불려 온 로한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택한 방법은 외교였다.

“…언제 이런 걸 준비하셨는지 모르겠네요.”

인사와 간단한 회의가 끝나고, 로한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얼빠진 표정으로 화국의 사절단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여자에 빠져 제대로 일을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교류가 없는 화국과 이렇게 내통하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 정도는 기본이지.”

크루엘가에 있을 때, 리네가 무전마법으로 서류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그 방법으로 화국에 있는 리네가 친한 마법사와 공유해서 로한 몰래 여기까지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화국입니까?”

“제국이 교류하지 않은 나라니까.”

“그런 거치고는 너무 멀지 않습니까. 가까운 헬라왕국도 교류 안 하는데.”

“뭐, 거기도 조만간 생각해볼게.”

키엘은 어깨를 으쓱이며 창가에 올려놓은 선인장을 힐끔 봤다.

‘언제 바꿔놓지?’

몰래 바꿔놓아야 할 텐데.

저 선인장에 꽃이 필 때, 벨라가 얼마나 좋아할지 상상하며 키엘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벨라는 젠킨스가 예상한 대로, 저녁이 되자 화국의 상인이 몰래 영애들에게 화국의 물건을 파는 걸 볼 수 있었다.

“오호라. 이거 불법이지?”

“네.”

“쟤들 이름 다 적어놔.”

젠킨스는 뒤에서 벨라를 아니꼽게 쳐다봤다.

“아가씨도 물건 살 거 아니에요?”

“응. 그런데?”

“이런 건 서로 비밀을 지켜준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고요.”

“아하. 그렇구나. 적어놔.”

“지독하다, 지독해.”

젠킨스가 혀를 차지만, 벨라는 영애들이 사라지자마자 그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화국의 상인에게 뛰어갔다.

벨라의 목적은 묘약 판매였다.

수중에 돈이라곤 크루엘가에서 보내주는 것밖에 없는데, 미안해서 함부로 쓸 수가 없었다. 이웨르의 피를 빼내는 건 미안하지 않았다.

벨라는 고르는 척하면서 상인에게 말을 걸었다.

“흠…. 이게 다 뭔가요?”

“화국에서 파는 특산품입니다. 화국에서도 보기 힘들어요.”

보기 힘들긴. 집마다 필수품으로 가진다는 화국 국민 선인장, ‘화망장’도 여기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선인장 하나에 10골드라니. 너무했다. 이거 10실버에 파는 거잖아요.”

그 말에 상인은 누가 들을세라 벨라의 입부터 막았다.

“무, 무슨 소립니까. 화국에서도 갖기 어려운 귀한 명물입니다.”

‘웃기네.’

그 말에 벨라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푸르에게 선인장을 가지고 오라고 시켜 놓았다.

“이 정도는 돼야 진짜 명물 아니겠어요?”

벨라는 품에서 사랑의 묘약을 꺼내 상인에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한때 제국에서 뜨겁게 팔렸던 사랑의 묘약이에요. 아시죠?”

상인의 눈이 반짝였다.

안 그래도 작년부터 제국에서 불법이라고 단속을 하는 바람에, 구하기 어려웠던 물건인데.

“흠흠. 그게 그 묘약인지 어떻게 압니까?”

벨라가 입꼬리를 올렸다. 일단 미끼는 물었네.

“써 봐요, 한번. 관심 있으면 벨라트리체 크루엘을 찾아오고.”

“…진짜입니까?”

상인은 난데없는 횡재에 입이 귀에까지 걸렸다가 이내 평정심을 찾았다.

“효, 효력이 없으면….”

“그러니까 그냥 써보라고.”

벨라는 자신 있었다. 이 묘약이 얼마나 효잔데.

때마침 푸르가 벨라의 선인장을 들고 오자 자랑스럽게 상인에게 보여줬다.

“그리고 이거 내가 10 실버에 샀거든요.”

완승한 듯, 뿌듯한 미소를 보이고 상인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선인장 20 실버에 살게요. 어때요?”

상인은 묘약을 보더니 고민하는 듯했다. 물 같은 거 넣어 놓고 괜히 물건 싸게 살려고 하는 건 아닌지.

“아가씨, 이 선인장 이름 뭔지 알아요?”

“화망장. 맞죠? 소원 들어주는 거.”

“…아시네. 아가씨도 그냥 가져가요.”

“정말?”

벨라가 기쁘게 화망장을 들었다.

“잘됐다, 이건 키엘 갖다줘야지.”

그러자 상인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걸었다.

“아가씨 거 아니고요?”

“응. 선물 주려고요. 내 건 있으니까.”

“그 선인장은 시든 거 같은데요.”

“…….”

“이거 봐요, 색부터가 다른…데….”

상인은 오지랖을 부리다 벨라의 분위기가 심각하길래 말끝을 흐렸다.

벨라도 선인장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인간계로 오고 좋은 일들만 있어서 꽃도 필 수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긍정회로를 돌리고 있었는데.

벨라는 시든 선인장을 품에 안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시들면 소원이 안 이루어져요?”

그렇게 애지중지 키웠는데.

이게 뭐라고, 애정을 줘서.

마치 불안한 앞길의 복선처럼 느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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