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가 죽여야 할 최종 악녀가 저랍니다-15화 (15/25)

15

벨라의 눈을 가렸던 손이 천천히 내려가며, 키엘은 심장을 툭툭 건드리는 붉은 눈을 마주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저렇게 매혹적으로 보는 건지.

“괜….”

키엘이 벨라에게 말을 걸려고 할 때.

“키엘 전하. 엘리시아의 영광을 뵙습니다.”

경비들이 평생 얼굴 한 번조차 스쳐 지나가다 볼 수도 없는 상대에게 경의를 표했다.

모두 잔뜩 겁을 먹은 채 일제히 무릎을 굽혔다.

상황을 봐서, 분명 이 사람이 소문의 크루엘가의 양녀가 맞는 것 같았다.

그들의 실수를 과연 황태자가 용서할까.

그때 한 용감한 경비가 나서서 상황을 설명했다.

“크루엘가의 마차가 인근에서 전복되었다는 얘기가 있어, 수상한 자라 생각하여 잡아두려고 했습니다.”

키엘은 경비의 말이 조금 거슬렸다.

“수상한 자?”

“크루엘가는 전부 은발…이라….”

“크루엘가에서 새로 들인 양녀 얘기는 저잣거리에도 들리던데. 그대들은 몰랐나?”

그 말에 경비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전하. 오늘 온종일 사칭을 하고 들어오려는 자들이 너무 많아서 침입자로 착각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보기보다 똑똑한 자였다.

말 한마디에도 천 냥 빚을 갚는다고, 과한 애국심이 불러들인 참사라는 걸 강조하면 질책할 수도 없겠지.

하지만 키엘의 생각은 많이 달랐다.

“그대는 곰도 사칭할 수 있나?”

“…그게….”

“차라리 이세계에서 온 소녀가 크루엘가의 양녀로 들어갔다는 걸 몰랐다고 하지, 그래.”

안 그래도 벨라를 둘러싼 이야기 때문에, 구설에 오를 일이 많을 텐데.

시작부터 이렇게 시끄러워서야.

“내가 이럴 거 같아서 리네까지 붙였는데. 리네 프로하도 모른다고 할 건 아니겠지?”

그 말에 리네가 팔짱을 끼고 콧대를 높였다.

“(예비)대마법사 리네 님을 모른다면, 제국 사람이 아니지.”

오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다는 그 천재 마법사.

“지나친 애국심이라고 생각하고 이 일은 넘어가겠어. 리오, 이 사람들 치료해줘.”

리오는 여태 활약한 적 없었지만 치료사였다.

“제가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상처를 좀 보여주세요.”

리오가 그들을 살피는 동안, 키엘은 벨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응?”

벨라가 빤히 쳐다보자 키엘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헛기침했다.

“이런 무례를 겪게 해서 미안합니다. 방까지 모셔다드리죠.”

벨라가 얼떨결에 살포시 손을 올리며 국어책 읽듯 딱딱하게 말했다.

“아. 감사합니다.”

분명 황궁에 가기 전까지는 부딪힐 일 없다고 들었기에 마음 놓고 있었다.

남들 앞에서 서로 초면인 척하려니, 어색한 공기가 둘을 감쌌다.

“크루엘가가 지낼 방은 어디지? 안내해.”

그녀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던 경비가 나서서 허리를 숙였다.

보통은 방이 어딘지 알려주고 문만 열어주었지만.

“아,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황태자가 직접 나서서 데려다준다는데 어찌할 건가.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경비를 따라 키엘과 벨라가 그 뒤를 따랐다.

벨라는 걷는 것조차 어색했다.

‘키엘이 키엘이 아닌 거 같아.’

그가 황태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그 권위를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이제 귀엽다고 놀리면 안 되겠다. 진짜 멋있어졌네.’

벨라는 몰래 웃으려다 금세 표정이 굳어졌다.

‘아…. 사람들이 너무 쳐다보는데.’

이래서 황궁에 도착할 때쯤 다시 볼 거라고 한 거였는데.

꽤 많은 영애가 이 사건을 구경하다 뜻밖에 황태자까지 보며 수군대고 있었다.

동물원의 동물도 아니고, 신기한 듯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물론 벨라가 동물왕국에서 온 거긴 하지만.

그리고 한 발짝 떨어져서 걷는 그들의 일행도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리오, 뒷문으로 간다는 거 아니었어? 저렇게 벨라 님 좋아하는 거 광고하고 다니면 어쩌나 몰라.”

“아까 벨라 님이 위험해 보였나 봐.”

젠킨스가 그 말에 혀를 끌끌 찼다.

“도련님은 아직도 우리 아가씨가 위험해 보인대요?”

“맞아. 경비들이 더 위험해 보이던데.”

리네도 쩝쩝거리며 리오를 쳐다봤다.

“아니, 그냥 내 생각이야. 몰라, 나도. 키엘에게 물어보라고.”

“리오군은 항상 모르네요.”

“아는 것도 모를 듯요.”

리오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비아냥거리는 거로는 제국 제일인 젠킨스와 콧대 높은 거로는 세계관 최강인 리네가 만나자 반박할 힘도 들지 않았다.

“꼭 이럴 때만 죽이 맞지.”

반면 푸르는 관심종자라도 되는지, 시선이 쏠리자 신이 나서 손을 흔들며 걸었다.

“다들 푸르를 좋아하나 봐!”

“푸르 씨는 생각이 없어서 좋겠네요.”

“헤헤! 부럽지!”

벨라가 방에 도착할 때까지도, 영애들은 몇 발자국 떨어져서 따라다니며 구경했다.

“이세계에서 왔다더니, 전하께서도 관심이 있으시나 봐.”

“슈리아 공녀님 대신 설마 저 신기한 사람이 경합에 가는 건가?”

그나마 다행인 건 그들이 하는 말이 정확히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였다.

사실 들릴 만한 거리라도 키엘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을 거다.

벨라가 딱딱한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걸으며 키엘의 손을 꽉 잡고 있었으니까.

키엘이 조심스럽게 벨라에게 말했다.

“에스코트 받을 때는 손 꽉 안 잡아도 돼요.”

“미안, 사람들이 너무 쳐다보니까 긴장해서….”

‘안 본 새 너무 귀여워졌다니까.’

벨라가 손에 힘을 빼자, 키엘은 말 대신 긴 손가락으로 쓱쓱 벨라의 손바닥을 문질렀다.

‘귀엽네요’라고 적으려고 했는데. 벨라가 깜짝 놀라 움찔거렸다.

“하!”

차라리 비명을 지르면 다행이지, 딸꾹질하듯 이상한 소리를 낸 벨라는 귀까지 빨개졌다.

“하… 하하…. 복도가 참 재밌…네요.”

벨라가 횡설수설하며 변명하자, 키엘은 입을 가리며 겨우 웃음을 참았다.

‘이… 이게?’

벨라가 손을 꽉 잡으며 입술을 깨물고 작게 말했다.

“읏지므…(웃지 마)”

“안 웃었어.”

“다 들었거든.”

“그럴 리가. 안 웃었는데.”

벨라는 그를 흘겨보더니, 손가락으로 키엘의 손을 세게 꼬집었다.

“아.”

그도 갑작스러운 공격에 외마디를 질렀다. 경비가 급하게 돌아보자, 키엘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근엄하게 물었다.

“왜 이렇게 멀어? 길을 잃은 건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이쪽만 지나면 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벨라가 웃음을 겨우 참고 있었다.

“픕.”

키엘이 벨라에게만 들릴만하게 원망 어린 투로 말했다.

“치사하게 꼬집는 게 어딨어.”

“네가 먼저 시작했거든.”

“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었는데.”

“그러게 누가 웃으래.”

“복도가 재밌어서 웃었어.”

벨라가 다시 그의 손바닥을 꼬집으려고 하고, 키엘은 그 손을 아예 꽉 잡았다.

“아까는 세게 잡지 말라며.”

“또 꼬집을 거잖아.”

“아니야. 잠깐 놔 봐.”

“안 속아.”

서로 장난치듯 승강이를 벌이는 동안, 구경하던 영애들 사이에서 때아닌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황궁에 가기 전까지 별다른 사건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요즘 제국에서 제일 흥미로운 사람이 등장한 데다가, 황태자까지 등장했으니 굳게 닫힌 입이 절로 열릴 수밖에.

“이세계에서 와서 전하께서 관심을 보이시는 걸까요?”

“동물왕국이라니. 이름이 조금 유치하긴 하네요.”

몇몇 영애들은 벨라의 이름도 제대로 지칭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렸다.

“저분은 예의도 못 배운 거 같은데.”

벨라의 걸음걸이도 어색했고, 드레스도 제대로 잡지 않고 걷는 걸 보니. 귀족가의 양녀로 들어왔으면 조용히 살 것이지.

황태자가 친히 방까지 배웅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몇몇 영애들은 아주 다른 생각이었다.

벨라가 예상했던 대로, 어차피 황태자비 경합을 통해 자기들이 될 거라고 생각은 안 했던 영애들.

모든 가문의 영애가 참석해야 한다고 해서 등 떠밀듯이 올라온 이들은 오히려 흥미롭게 봤다.

“전하께서 관심 보일 만해요. 이 세계에서 왔다니까.”

“초대 황제님이 계시던 곳에서 온 건 아니겠죠? 왕국 이름이 귀엽던데.”

“그건 모르죠. 허나 하나는 알겠네요.”

슈리아가 말했던 대로 이 경합 자체를 하나의 기회로 보는 이들은 눈을 반짝였다.

“친하게 지낼 필요는 있다는 거.”

그리고 영애들이 추측하는 것보다, 앞서서 가던 경비는 더 확신에 찼다.

두 사람의 말소리는 들을 수 없었지만 수군대는 게 처음 만난 사이 같지는 않았다.

‘하긴. 일전에 만나본 적이 있는 거겠지? 리네 프로하님을 보낼 정도면.’

그리고 단순히 구면인 사이 같지는 않은 게.

‘… 뭔가 이상한데.’

분명 뒤에서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방입니다.”

경비가 훽 뒤돌아 보자, 벨라와 키엘이 잡았던 손을 황급히 떼었다.

사실 잡고 있는 게 더 당연한 거였는데.

그 장면을 본 경비는 야비한 미소를 겨우 감추며 밝은 미래를 꿈꿨다.

‘이거 잘하면 한 몫 챙기겠는데.’

그리고 키엘의 다음 말은, 경비의 희망찬 미래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벨라 크루엘님, 아무래도 아직 그대의 존재를 사람들이 잘 모르는 거 같으니. 저랑 계속 동행하실래요?”

리오는 그 말을 듣자마자 딸꾹질부터 했다.

‘아니…. 이목을 끌면 안 된다고 한 건 자기면서?‘

리오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벨라는 키엘의 계획이 뭔지 단번에 알아챘다.

‘어차피 비밀리에 따로 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네.’

벨라는 곰곰이 생각하는 척하다 말했다.

“슈리아 공녀가 오늘 밤 중으로 안 오면, 전하와 같이 가는 게 좋겠네요. 매번 입구에서 의심을 받긴 싫으니까.”

그러면서 경비를 쳐다봤다.

“매번 피를 볼 수도 없고. 그렇죠?”

* * *

프실리아 백작가에서는 황태자비 경합에 로잔느를 보내는 게 걱정이었다.

괜히 가문의 흠이 될까 봐.

몇 년 동안 ‘세상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라며 집을 훌쩍 나가더니.

돌아오고 엄중히 처벌하려고 했는데, 그럴 수도 없게 로잔느는 꽤 울적해 있었다.

마이유 말로는 ‘실연의 아픔’이라던데.

하지만 백작의 걱정과 다르게, 긴 여행길에 올라선 로잔느는 꽤 밝은 얼굴이었다.

“로잔느.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야. 이런 기회에 조금 멀리 떨어진 가문과도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거고.”

“예. 알아요, 아버지.”

걱정을 던 백작과 다르게, 늘 로잔느의 옆을 지키는 마이유는 저 밝은 표정이 불안했다.

이제야 겨우 잊고 사나 싶었는데. 하필이면 키엘이 황태자일 줄이야.

게다가 키엘이 보냈다는 서신이 마음에 걸렸다. 마이유가 그 내용을 함부로 볼 수도 없고.

로잔느가 그날 이후로 다시 밝아진 게 분명한데.

‘아가씨가 쓸데없는 희망 같은 거 가지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걱정한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리.

“인근의 용병단 중에 믿을 만한 사람들로 붙였다. 인사해.”

소설은 원작대로 완결하려는 힘이 강했다.

어떻게 뭐가 바뀌든.

두 사람의 해피엔딩을 위해.

“메리라고 합니다. 앞으로 제가 아가씨를 모시겠습니다.”

새벽이 되도록 슈리아가 돌아오지 않자, 벨라는 키엘의 마차와 함께 황궁으로 향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무슨 일을 벌이러 간 건지 알고 있는 키엘은 어깨만 으쓱였다.

“먼저 출발한 걸 알면, 알아서 쫓아올 거예요.”

벨라는 조금 걱정되었었다.

최대한 이목을 끌지 않으려고 따로 가자고 한 게 키엘이었는데.

이미 전날 밤에 주목이란 주목은 다 받아버렸고, 함께 출발하자 낯 뜨거운 시선까지 느껴졌으니.

하지만 그 걱정은 금세 사라졌다.

일단 황태자의 행차부터 상당히 긴 편이라 다른 영애들의 마차와 부딪힐 일이 없었다.

가다 멈추기를 반복했는데, 그럴 일도 없었고.

게다가 어제처럼 말 그대로 ‘입구 컷’당하는 일은 없었다.

‘아주 VIP 프리패스네.’

게다가 제일 좋은 건 식사를 위해 마차들이 모두 멈췄을 때였다.

벨라는 밖으로 나와 키엘과 함께 예기치 못한 소풍을 즐겼다.

“세상에, 너무 좋아.”

“나도 좋아요.”

키엘은 그 짧은 순간이라도 벨라를 봐서 좋았다.

쭉 따로 갈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운명의 여신은 그의 편인 듯싶었다.

“무슨 도시락도 이렇게 다 고기로만 쌌대?”

키엘과 달리 벨라는 도시락 때문에 좋은 거 같지만. 아무렴 어때.

“아가씨, 아무리 양녀라도 공작가에 취직했는데 너무 없이 산 사람처럼 말하지 마세요.”

“그러게 누가 샌드위치 나부랭이 사 오래? 네가 샀지?”

젠킨스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여긴 호위 인원이 많으니까 든든하게 먹어야 해서 그런 거죠. 우린 적당히 먹으면 되잖아요.”

사실은 식사까지 젠킨스가 준비해야 한다는 걸 모르고 급하게 전날 밤에 사 온 거였는데.

“그렇게 따지면 내가 제일 든든하게 먹어야지. 내가 일당백인데.”

젠킨스는 저 말도 안 되는 논리에 할 말을 잃었다. 아주 틀린 말이 아니긴 한데.

“어휴. 아가씨, 인간계로 오고 살 엄청나게 찌신 거 알죠? 식탐이 아주 하늘을 찔러요.”

벨라는 우물거리며 젠킨스를 노려보는 동안, 키엘이 단호하게 그를 나무랐다.

“살 좀 찌면 어때.”

그러면서 키엘은 벨라의 팔을 살짝 잡았다.

“이렇게 야윈 거보다 나아. 더 먹어요.”

벨라는 입에 있던 고기를 삼키고 감동받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세상에…. 잘 키운 키엘 하나, 열 마족 안 부럽다.”

벨라가 그의 팔에 머리를 비비적거리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벨라가 제일 좋아하는 마족인 푸르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열 마족이 더 좋아요!”

“무슨 곰 소리야. 너희 트럭으로 갖다줘도 키엘 발가락만 못 해.”

“힝….”

키엘은 벨라가 어째 점점 머리를 비비는 게 고양이가 머리를 들이 내미는 거 같았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또 먹고 싶은 건 없어요?”

“그럼 나 감자 스튜랑… 파스타랑….”

키엘은 벨라가 내뱉는 작은 숨소리를 들으며 간지러운 목소리로 다짐했다.

“응. 벨라가 원하는 건 다 해줄 거예요.”

“완전 사랑해.”

이 말을 듣기 위해서.

“아가씨, 설마 밥만 주면 다 좋다는 건 아니죠?”

벨라는 대꾸하지 않고 가운뎃손가락을 젠킨스에게 내밀었다.

그렇게 평화롭고 즐겁게 황궁 길로 나선 지 어언 3일째.

황궁의 수도 바로 앞에 있는 별채에 도착했을 때.

슈리아는 말을 타고 쉬지 않고 쭉 달려온 모양이었는지, 이미 별채의 입구에 서서 벨라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키엘은 슈리아를 보자마자 얼굴에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다.

여태 키엘이 벨라의 신분을 확인시켜줬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었다.

키엘이 먼저 내려 슈리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키엘 전하.”

“일은 잘 해결했나?”

“예. 사고가 있어서 좀 늦었습니다. 그런데….”

슈리아는 조금 멀리 떨어진 크루엘가의 마차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벨라 님이랑 같이 올라오시면 어떡해요?”

슈리아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렇게 이목을 끌지 마시라고 했는데.”

“누가 들으면 마차를 같이 타고 온 줄 알겠어. 그냥 내가 가는 길 뒤에 저 마차가 같이 온 것뿐인데.”

뒤에서 리오는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같은 마차를 타고 싶어 하는 걸 겨우 말렸으니까.

“이쪽도 첫날에 사고가 있었어. 공녀가 없으니까 벨라를 무뢰한 취급하더군.”

“…그건 들었습니다.”

슈리아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혹시나 후안이 뒤쫓아올까 봐 일부러 마차를 부수고 말을 빌려 타고 온 건데.

그 일이 경비들을 더 강화시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

“걱정입니다. 혹여나 심보가 뒤틀린 영애들이 벨라 님을 괴롭히기라도 할까 봐.”

리오는 계속 듣고 있다가 손을 들었다.

“벨라 님이 그런 영애들을 죽일까 봐 걱정이라는 거죠?”

슈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들 벨라 님이 무슨 마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악랄한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

“제가 볼 땐 벨라 님은 괴롭힘당해도 참으실 분이라고요. 괜히 전하께 피해라도 될까 봐.”

아무래도 슈리아가 착각하는 것 같아, 리네도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 벨라 님은 참지 않아요.”

“그런 뜻이 아니라….”

그때 슈리아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벨라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슈리아 공녀! 못 보고 황궁에 들어가는 줄 알았네요.”

“하하…. 그래선 안 되지요. 달려왔습니다.”

“마차가 전복되었다던데, 괜찮아요?”

“조금 사고가 있었는데.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슈리아가 천진난만하게 웃는 벨라의 모습에서, 오래전 애정했던 흑발의 하녀가 겹쳐 보였다.

“들어가시죠. 밤이 쌀쌀합니다.”

슈리아는 부디 이 사람이 사랑에 힘들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길 조심스레 바랐다.

* * *

그날 밤. 차가운 새벽 공기가 짙게 깔릴 때까지 벨라는 잠이 들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옆으로 누워, 핸드폰을 켜서 늘 보던 사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렇게 볼 때면 키엘이 강아지같이 귀여웠던 때가 엊그제 같았다.

‘시간 진짜 빠르네.’

때때로 성인이 된 키엘을 보면, 그때의 풋풋함이 남아 있지만,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장난칠 때는 늘 만나던 키엘 같았는데.

황태자로서 일하는 모습이나, 다른 사람들과 있는 걸 보다 보면.

문득 벨라가 글로만 알고 있던 키엘을 만나게 된 것 같았다.

닳도록 봤던 소설 속의 최애를.

‘이제 황궁으로 가면….’

이 소설은 오랜 기다림의 끝에 주인공끼리 놀라운 재회를 하게 되겠지.

‘둘이 서로 다시 만나면 좋아죽겠지?’

뻔한 클리셰지만 짧은 입맞춤을 하고, 점점 커지는 사랑을 직면하고.

황태자로서 자리매김해가며, 사랑하는 로잔느를 위해 모든 걸 내 던지는 모습에 애정을 쏟았었다.

‘하긴. 나한테도 이렇게 잘해주는데, 사랑하는 사람에겐 얼마나 잘해주겠어.’

벨라는 핸드폰 너머로 탁자 위에 올려둔 선인장을 바라봤다.

화국에서 사 온 화망장.

마계에는 햇빛이 없기에 늘 달빛 아래에 두고, 그늘에 두기를 반복했는데 꽃은 여전히 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벨라는 이불을 꽉 끌어안으며 슈리아가 했던 말을 되새겼다.

- “적당히 자기가 받을 수 있는 사랑을 요구하겠죠.”

마주 보고 있는 창가에는 달빛이 스산하게 방을 밝혀주고 있었다.

어둠조차 아름다운 인간계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벨라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그래. 난 이걸로 만족해.’

* * *

한편, 크루엘 가에서 출발한 세 대의 마차 중 한 대는 산 중턱에 버려져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얼마 지나지 않는 곳, 오래전 산적들이 본거지로 쓰던 곳에 후안이 있었다.

그것도 깊게 파인 구덩이 아래에.

“슈리아!”

그는 떨어질 때 다리를 다쳐 일어서지 못한 채 슈리아의 이름만 불렀다.

하지만 벌써 몇 시간이 지나자, 그는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없나?”

그의 생각대로 이미 슈리아는 떠난 뒤였다. 그를 이 함정에 빠트리고.

슈리아가 그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역시 그 일이 화근이었나 보네.’

크루엘가에서 일했던 검은 머리의 하녀.

이름이 엘렌이었나.

몇 번 잠자리를 가진 기억은 있었다. 어차피 그 하녀가 벨라일 거라 생각은 안 했기에 가볍게 넘어간 일이었는데.

슈리아가 끔찍이 아끼는 사람인 줄 몰랐었다.

- “그 애가 오라버니의 아이를 가진 건 아십니까?”

그런 줄도 전혀 몰랐었고. 알았다면, 돈이라도 쥐여줬을 텐데. 이미 그 하녀는 크루엘가를 떠난 지 오래였었다.

- “누구를 건드리든 눈감아줬습니다. 허나 내 사람은 건드리지 말았어야죠.”

그때 헤롯 크루엘은 슈리아가 겨우 하녀에게 마음을 너무 쓴다며 질책했지만, 후안은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인과응보인가.’

며칠이 지난 건지. 여기서 굶어 죽게 하든 목이 말라 죽게 하든, 제 손에 피를 안 묻히고 보내는 데는 적절한 것 같았다.

후안은 이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대로 죽을 날만 기다릴 수는 없었다.

‘드디어 찾았는데.’

그는 단언컨대, 키엘이 벨라를 찾았던 것보다 훨씬 많이 그녀를 찾아 헤맸다고 할 수 있었다.

황궁에 갇혀 새로운 소식이 오길 발을 동동 굴리는 그와는 달리, 직접 찾아다녔으니까.

슈리아가 황태자비 경합에 나가고, 그가 크루엘가의 가주가 된다면.

급할 것도 없이 천천히 스며들어 제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

벨라의 눈빛이, 그를 원하는 것 같았으니까.

‘내가 전하를 너무 얕잡아 봤네.’

제국 사람들이 이세계에 얼마나 환장하는지 알기에, 쓸데없이 판을 크게 벌였다고 생각했는데.

‘영악한 사자 새끼 같으니라고.’

이 모든 게 이토록 치밀하게 계획된 것일 줄이야.

하지만 그럴수록 빈틈이 없을 수가 없었다.

다들 벨라가 동물왕국이라는 이세계에서 넘어온 사람인 줄 알지만.

그 벨라가 키엘의 어린 시절 함께한 사람이라면,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의심할 수밖에 없겠지.

평민을 옆에 두고자 만들어 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의문.

진실이 무엇이었든, 한 번 의심의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면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다.

‘그리고 패는 내가 쥐고 있지.’

후안은 햇빛이 들어오는 하늘을 보며 결심했다.

어떻게든 나가리라고.

그리고 마치, 운명의 여신이 자신의 편에라도 선 듯.

“아가씨! 여긴 왜 오신 거예요!”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혹시 거기 누구 있습니까?”

후안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마이유! 여기 누가 있나 봐!”

이건 소설의 원작에서는 없던 이야기.

여자주인공 로잔느와 흑막만 있는 서브남주 후안의 첫 만남이었다.

운명의 바람이 대지를 가르고 사납게 그들에게 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운명이 무엇에 향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황궁까지는 겨우 한두 시간만 마차를 타고 가면 되었기에, 벨라는 오랜만에 아침 일찍 일어나 슈리아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이래도 되나요? 사람들이 보면 어떡하지.”

“제가 사람들이 잘 안 오는 곳을 알고 있으니, 그리로 가시죠.”

조금 은밀하게 움직여 도착한 곳은, 꽤 넓은 공터였다.

“황궁의 별채에 이런 데도 있네요. 신기하다.”

지역마다 세워져 있는 별채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특히 현재 벨라가 있는 곳은 황궁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수도에 급히 볼일이 있으나 별가가 수도에 없는 가문들에게는 항상 열려 있었다.

“기사들도 많이 오니까요.”

슈리아는 벨라에게 들고 있던 검을 던졌다.

예고 없이 던진 거지만, 벨라는 별 생각 없이 한 손으로 검집을 받았다.

“젠킨스가 알면 또 영애가 어쩌고저쩌고 할 거 같은데.”

“모르게 하면 되지요.”

“여기 공작가 영애님은 이렇게 말하는 데 말이죠.”

벨라는 웃으면서 검집에서 검을 빼 들었다.

챙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오히려 음악처럼 들리며, 땀 한 방울씩 흘릴 때마다 벨라는 돈독한 우애를 확인했다.

검이 아니었다면, 과연 슈리아와 이렇게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었을까.

“헉….”

둘 다 서로 숨이 가빠졌지만, 얼마 쉬지 않고 또다시 슈리아가 검을 바로 쥐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 있나?‘

꽤 오랜 시간 동안 슈리아는 마치 참아온 걸 터트리기라도 하듯이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솔직히 마족으로서의 신체능력이 아니었다면, 슈리아의 검을 과연 받아낼 수나 있었을까.

‘이럴 땐 마족인 게 좋네.’

그렇게 땀으로 범벅이 되었을 때쯤.

당연히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건만.

어느새 꽤 많은 영애가 많이 떨어진 곳에서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뭐야…. 사람 왜 이렇게 많아.’

그리고 그 시선은, 대련이 끝나고서도 이어졌다.

‘따라오는 거 같은데….’

그저 기우라 생각하고 무시하려고 했는데, 무시할 수가 없었다.

씻고 나왔을 때도 마치 벨라가 방에서 나오길 기다리기라도 한 듯, 복도에는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벨라 주변에서 쭈뼛거리며 왼쪽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가던 영애들이 어느새 벨라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아까 괜히 대련했나.’

가능하면 눈에 띄지 말라는 이유를 알겠다.

슈리아는 마지막으로 황궁에 가는 길에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준비를 마친 채 벨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쳐다봐요….”

그 말에 슈리아는 벨라의 뒤편을 넌지시 보더니 웃었다.

“벨라 님. 저 사람들을 다 벨라 님 편으로 만들어요.”

“…네?”

“전에도 말씀드렸죠. 제일 다루기 쉬운 게 연정이라고. 선망도 어찌 보면 연정이죠.”

“저게 좋아서 쳐다보는 거예요?”

“뭐, 아닌 예도 있겠지만. 벨라 님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안달 난 영애도 몇몇 보이는데요.”

“그런가.”

“황궁에 들어가시면, 기사들과 대련을 한 번씩 해보세요. 다른 영애들은 하지 못하는 일일 테니, 벨라 님이 돋보일 겁니다.”

벨라는 목덜미를 만지며 웃었다.

“난 그냥 무난하게 있고 싶은데….”

그 말에 슈리아가 피식했다.

“당신이 앞으로 크루엘가의 이름으로 살아가려면, 그리 무난하게 살지는 않을 겁니다.”

“음….”

“나 슈리아 크루엘을 대신해서 경합에 참여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제가 여기서 얻어야 할 것들을 벨라 님이 대신 얻어주셔야지요.”

벨라는 손으로 턱을 쓱쓱 만지며 생각했다.

‘하긴. 그런가?’

소설을 제외하고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렇다.

어찌 되었든 벨라가 슈리아 대신 온 거고. 크루엘가의 영애로서 참여한 거니.

“음. 그럴게요.”

“종종 편지하겠습니다. 항상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세요. 부족하지만 지혜는 나눌수록 빛나니까요.”

벨라는 웃고 있는 슈리아를 보며 미소 지었다.

최애도 늘 그녀의 중심이 되는데, 어쩜 차애까지 이렇게 많은 도움을 주는지.

‘마왕으로 빙의했어도, 이 정도면 진짜 복받은 거지.’

그리고 그 마음을 담아 슈리아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든든하네요.”

* * *

드디어 황궁에 도착했다.

벨라는 그 외관을 보며 꽤 예전에 고양이로 잠시 그 앞에서 서성거렸던 날이 생각났다.

‘키엘이 신성력 결계를 없애놓겠다고 했었는데….’

벨라가 살며시 벽을 만지자, 예전과 달리 거친 벽의 촉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다시 결계가 생길 테니, 슈리아와 작별인사도 짧게 하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도련님이 이럴 때 보면 참 철두철미해요.”

젠킨스와 푸르는 표정부터 밝았다.

“그런데 이럴 거면 잔바르 님도 데리고 오지, 왜 두고 오신 거예요?”

“걔 둘은 통제가 안 돼서 그래. 여기서 좀 지내다가 소환할 거야.”

벨라가 대답하다 잠시 멈칫거렸다.

“그런데 왜 그렇게 잔바르를 찾아? 너희 둘이 진짜 뭐 있어?”

“…….”

“진짜 싸웠다가 뽀뽀해서 화해한 거야?”

“푸르는…!”

푸르가 입이 간지러웠는지 말하려고 하자, 젠킨스가 바로 그녀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다음에 얘기해드릴게요. 일단 아가씨 황궁에서 적응부터 하셔야죠.”

“적응할 게 뭐 있나…. 이미 내 집같이 아주 친근해. 말해봐.”

“푸르 씨도 말 못 해요. 선대 마왕이 전부 서약을 걸어놔서.”

젠킨스는 푸르에게서 손을 떼고 두 손을 들었다.

“그런 얘기는 처음 듣는데?”

“…아가씨가 언젠가 승계를 다 받으면 자연스레 아시게 되겠죠.”

벨라는 딴청을 피우며 속으로 생각했다.

‘안 받을 건데. 여기서 소설 끝날 때까지 꿀 빨다가 다음 소설로 갈 건데.’

구구절절 사정을 설명할 수도 없고, 벨라는 그저 ‘알았다’고만 얘기했다.

궁금하긴 한데, 겨우 궁금하다고 승계받기 위해 마계에 갈 만큼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1차 경합이 끝나기 전에는 다른 영애들과 같은 방을 쓰신대요.”

젠킨스는 나름 벨라의 보좌답게 사전에 조사한 것들을 얘기했다.

“그래?”

“그리고 경합 시작 전에도 마찬가지라네요.”

“공작가도 다 그래?”

“그래서 조금 자존심 있는 귀족들은 수도에 있는 자신들의 별가에 있다가, 경합이 시작될 때 황궁으로 들어오나 봐요.”

어차피 키엘 때문에 황궁에 있어야 했다. 아직 심장을 돌려받지 못했으니까.

바로 옆은 아니더라도,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하니까.

“그럼 짐 풀고….”

“뭐 하시게요?”

그들 모두 몰랐지만, 벨라는 꽤 모범생인 편이었다.

“기사들 만나러 가야겠다.”

슈리아가 말한 대로, 이곳의 기사들과 친해져서 대련을 해봐야지.

“음. 왜요? 전 추천 안 하는데.”

“누가 너보고 추천해 달래?”

그렇게 벨라는 젠킨스의 만류에도, 기사단이 있는 곳으로 제일 먼저 발을 돌렸다.

* * *

황궁에 먼저 올라와 머물고 있던 영애들은, 젠킨스가 말한대로 자존심이 센 귀족들은 아니었다.

명확하게 말하자면 수도에 별가가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크루엘 공작가의 이름을 달고 들어온 벨라를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

‘슈리아 공녀님이 대신 보낸 애구나.’

그리고 반응은, 지금껏 봐왔듯이 두 가지였다.

다만 그들 중 그 누구도 벨라가 황태자와 친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못 했었다.

그러니 조금 더 자유롭게 자신들의 마음을 서로 표현했다.

“크루엘가가 황태자비를 포기할 줄 몰랐네요.”

“그러게요. 이세계에서 왔다는 이상한 이야기까지 덧붙여서 양녀로 들여 이런 데로 내쫓을 줄이야.”

제국은 넓었고, 가문은 많았다. 당연히 크루엘가를 적대하는 가문도 있었고.

“자신 없었나 봐요.”

“솔직히 이름만 공작이지, 딱히 걸맞은 공은 없었잖아요? 황태자비까지 안 되면 그 후안이 크루엘가를 이어갈 텐데. 그저 망하는 지름길이죠.”

그렇게 벨라를 불쌍하게 보는 영애들.

그들은 동정심에라도 잘해줘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며칠 뒤 벨라가 기사단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본 순간.

그들의 여론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불쌍한 줄 알고 조금 친해지려고 했더니.”

말만 그랬지, 실제로 인사도 건네지 않았으면서.

“황궁에서 여우 같은 게 꼬리를 치네요.”

여우도 아니고 고양이인데. 제멋대로 벨라의 행동을 해석하며 뒷담 하기 바빴다.

그들 대부분이 어중간한 백작가와 자작가의 영애들이었다.

조금 생각이 있는 영애들은, 이 황태자비 경합을 정치적으로 바라봤지만.

그들에게는 일생일대의 기회였기에 진심이었다.

“저런 사람과 같이 경합하게 된다니. 괜히 전하께도 꼬리 칠까 봐 걱정되네요.”

“그러게요. 황궁에 들어온 지 이틀 만에 기사단의 남자들을 다 꼬셨다나 봐요.”

그들의 말도 반 정도는 사실이었다.

몇 번의 대련 후에, 꽤 많은 기사단의 기사들이 벨라에게 찾아와 그녀의 기술에 대해 물었다.

특히 황태자와 비슷한 몸놀림을 칭찬하면서.

대련하는 건 보지 못하고, 얘기하는 거만 본 영애들이 오해할 법하긴 했다.

그리고 벨라를 아니꼽게 보는 무리를 불편해하는 영애들도 있었다.

“무엇을 시기 질투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러게요. 전하께서 이세계에서 오셨다고 특별히 관심을 보이시던 거 같은데. 언질을 드려야 할까요?”

“관심을 보이셨다고요?”

그렇게 벨라가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황궁에 미리 들어온 이들끼리 파가 나뉘게 되었다.

하나는 벨라를 좋게 보는 파. 하나는 아닌 파.

누구도 지지하진 않았다. 그녀가 어떤 정치적 열쇠를 쥐는지는 몰랐으니.

젠킨스는 영애들 사이에서 이상한 기류를 느끼고 벨라에게 보고했지만, 벨라는 한 귀로 듣고 흘렸다.

“내가 뭘 신경 써야 하는 거야?”

“아가씨도 여기서 파벌에 들어가야죠.”

“난 벨라 파벌이야.”

“그 파벌에 아무도 없는데요.”

“너 있고 푸르 있으면 됐지. 키엘도 끼워주면 내 파벌은 아주 든든해.”

젠킨스는 그런 벨라가 답답한지 가슴을 쿵쿵 쳤다.

“그 도련님이 저보고 영애들 잘 살펴보라고 이런 거도 주셨다고요.”

꽤 두꺼운 노트를 내밀더니 안의 내용을 빠르게 넘기며 보여줬다.

중요한 가문과 조심해야 할 가문들. 각 가문과의 이해관계가 잘 정리되어 있었다.

“젠킨스. 아무래도 네가 이렇게 초조해하는 걸 보니까….”

“네. 이제 좀 영애들과 친해….”

“더 하기 싫다.”

뭐가 다가오는지도 모르고, 벨라는 속도 없이 웃었다.

엘리시아 제국은 1000년의 역사를 가진, 세계의 중심이 되는 곳이었다.

당연히 소유하는 토지도 많을뿐더러.

관리하는 귀족 가문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 중 도이치 가문은 꽤 오래전에 공을 세워 황제로부터 백작가의 칭호만 받았던 가문이었다.

다만 칭호만 받았기에 흔히 말하는 ‘이름만 귀족.’

그리고 그 공마저 이미 3대를 넘어서면서부터는 희미해져 갔다.

수도에 올라올 일이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메르켄 공작령 밑에 속해, 큰 공작령 밑에 남부 지역을 관리하고는 있지만, 그 땅이 그들의 소유는 아니었다.

그리고 세리나 도이치는 어릴 때부터 관리하는 영지 내에서만 발생하는 권력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세리나 님은 정말 현명하시네요.”

“이 정도로 그리 칭찬해주시다니, 너무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메르켄 공작의 영애가 없는 지금, 대부분의 영애가 도이치 가문에 대해 잘 모르자 여우가 왕 행세를 하고 있었다.

세리나가 선택한 전략은 하나였다.

‘공공의 적’을 만드는 것.

시기와 질투는 추악하지만, 때로는 단합력이 좋은 법이니까.

그리고 그녀의 눈에 때마침 적당한 먹잇감이 보였다.

벨라 크루엘.

메르켄 공작과 크루엘 공작은 꽤 앙숙에 가까운 사이였기에, 설령 메르켄가에서 세리나의 행보를 안다고 해서 들쑤시며 문책하진 않으리라.

게다가 벨라는 본의 아니게 이미 큰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아마 동물왕국이란 건, 거짓말이 아닐까 싶어요.”

“그렇죠? 일단 왕국의 이름부터 너무 유치해요. 동물원도 아니고.”

세리나는 그 묘한 분위기를 잘 이용했다.

“어디선가 평민이라는 소문이 돌더라고요.”

실제로 그런 소문은 돌지 않지만, 지금부터 퍼트리면 소문이 되기 마련이다.

“어머, 정말요?”

“후안 크루엘경이 한 번 만났던 여자라는 소문도 있고.”

그리고 질투의 힘을 먹고 사는 이들은, 확인되지 않은 말에도 쉽게 낚이곤 했다.

“설마 저잣거리의 창녀는 아니겠죠?”

책임 없는 말은 하나였는데,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나 버렸다.

“기사단의 기사들과 희희낙락거리던데…. 설마요.”

세리나는 조금 더 결속력을 단단하게 해 줄 말을 던졌다.

“아무래도 저희가 그분께 영애로서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는 법을 가르쳐야겠어요.”

* * *

반면 벨라는 젠킨스의 걱정 어린 충고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가씨! 좋은 아침이에요!”

푸르가 마계에서처럼 하녀 구실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거 앞치마야?”

“이거 팬들이 만들어줬어요!”

푸르가 말하는 팬이란, 크루엘가의 사용인들이었다. 어찌나 예뻐하던지.

‘아…. 그 사람들 없으니까 이제 나한테 더 달라붙겠네.’

아니나 다를까.

“아가씨! 옷 갈아입으세요!”

“내 옷으로 청소하는 거야?”

시키지도 않았는데 푸르가 짐가방에서 옷을 꺼내 질질 끌고 왔다.

“너 마계에 있을 때보다 훨씬 작아졌으니까 이런 건 생각을 좀 하고….”

벨라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냥 하나하나 다 하면 안 되는 걸 얘기해주는 게 빨라서.

“앞으로 옷은 내가 갈아입을 거야.”

“그럼 푸르는 뭐 해요?”

“푸르는…. 입 다물기 하자.”

하지만 푸르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벨라가 다른 영애들과 조금 친해져 보려고 하면, 푸르가 난데없이 튀어나와 자꾸 애교를 부렸다.

“황궁에서 제공해주는 차는 차 맛이 깊이 느껴지네요.”

슈리아가 가르쳐준 대로 벨라를 따라다니던 영애와 얘기를 시작했는데.

“푸르도 과자 좋아하는데!”

그러면서 테이블 위에 올려진 과자를 쓸어담듯이 팔로 쓸어 자기 입에 다 넣었다.

“…푸르. 다른 사람들이랑 있을 때는 함부로 과자 먹는 거 아니야.”

“하하…. 곰이 귀엽습니다.”

“그, 그렇죠?”

하지만 푸르의 예의 없는 행동에 영애들은 벨라에 대해 좋게 평가하고 싶었던 감정이 점점 사그라졌다.

어차피 이 경합에서 자신들이 황태자비가 될 거라고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치판에 유리한 사람들과 인맥을 이어가야 하는데.

“푸르 또 먹을래요!”

“…가만히 좀….”

그들은 속으로 ‘조금 천박하다.’고 생각했다.

“아가씨! 뽀뽀해주세요!”

“하하. 저희 곰이 참 귀엽죠?”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해도.

“아가씨, 우리 도련님이랑은 언제 같이 잘 거예요?”

말 그대로 시한폭탄이었다.

벨라는 영애들의 표정을 보고 깨달았다.

‘하…. 이 곰 새끼 진짜 죽여버릴까.’

이러니 젠킨스의 충고를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푸르부터 해결해야 하니까.

* * *

종일 푸르에게 이래라저래라 교육하고 나면, 벨라는 가슴이 답답했다.

‘여기 진짜 갑갑한 곳이야.’

황궁 생활의 1할만 경험했는데도, 진절머리가 났다. 키엘만 아니었으면 이런 곳은 진작에 도망쳤을 텐데.

그나마 탈출구가 있었으니, 기사단의 기사들과 대련하는 때였다.

대부분이 일정이 있었기에 벨라는 그들과 꽤 늦은 밤에 몰래 대련을 하곤 했다.

게다가 제2 기사단장이라는 데릭이란 사람은, 슈리아 크루엘과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라고 하니.

벨라가 그들과 대련하는 걸 선뜻 허락하고 샤워실까지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날 밤도, 벨라는 기사들과 대련을 마치고 아무도 없는 샤워실로 향했다.

가는 길에 낯익은 영애들의 얼굴을 본 거 같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여기서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힌다니까.’

젠킨스는 얌전히 지내라고 하고.

슈리아는 가능하면 그녀의 편을 만들라고 하고.

‘키엘은 분명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겠지.’

정말 하고 싶은 건. 이곳을 벗어나서 그냥 밥 시간 되면 밥 먹고, 잘 시간 되면 자는 그런 인생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아주 무난하게. 지나가는 엑스트라 1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거지.’

애초에 그녀의 역할 자체가 어찌 보면 엑스트라 아닌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나가려던 참이었다.

‘……?’

벨라는 순간 자신이 했던 모든 고민이 부질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 옷 어디 갔어?‘

그녀는 작은 수건으로 몸을 겨우 가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분명 샤워실에 들어가기 전에 옷을 이 앞에 벗어두었는데.

그리고 작은 창문 사이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갔어요?”

“아마 그럴걸요.”

벨라가 황급히 문을 향해 달려갔다.

문은 잠겨 있었다.

사실 그 문이 열려도 난감한 상황이긴 했다. 옷이 없으니까.

“이 자식들이….”

벨라는 참지 않는다. 방법이 없을 줄 알았나 본데, 그녀는 가볍게 뛰어 고양이로 변한 채 작은 창문으로 뛰어들었다.

‘너무 오랜만인가.’

점프가 잘되지 않아 힘들었지만, 겨우 창으로 빠져나와, 그 영애들을 찾아봤다.

이미 사라진 후였다.

그렇다면 방으로 돌아가서 속속 잡아내면 된다. 그런 마음에 황궁에 있는 별채로 들어가려는데.

별채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하. 이것들이.’

게다가 창문들까지 걸쇠를 걸어 모두 잠겨 있었고.

여기서 열어달라고 하면 되지만, 그러려면 사람으로 변해야 하는데.

‘아… 나 지금 옷….’

고양이로 변하기 전에 나체였으니, 여기서 사람으로 변하면 다시 나체로 돌아갈 텐데.

‘미치겠네. 어떻게 해야 되지?’

한참을 돌고 돌며 고민하던 찰나였다.

멀리서 걸음걸이부터 어리벙벙한 리오의 모습이 보였다.

벨라는 리오에게 달려가 그의 발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머리를 부비댔다.

‘아… 자존심 상해.’

리오는 감히 벨라인 줄도 모르고 인상을 찡그렸다.

“황궁에 웬 고양이가….”

고양이, 특히 검은 고양이는 키엘 때문에라도 더 싫어했다.

로잔느가 트라우마가 있다는 데도 키우고 싶다고 고집 피우던 것 때문에.

벨라는 이대로 리오가 가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녀는 발톱으로 리오를 할퀴고, 땅바닥에 발로 글씨를 써 내려갔다.

리오는 처음에 많이 불길하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고양이의 행동을 보고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벨…라….”

벨라는 리오가 눈치가 없다고 하지만, 그가 멍청이까지는 아니었다.

“혹시 벨라 님이에요?”

리오도 고양이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게 부끄러운지 벨라를 들고 작게 물었다.

“나 옷 좀 갖다줘.”

하지만 리오의 귀에는 그저 ‘냥냥’거리는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리오는 하는 수 없이 벨라를 안고 키엘의 방으로 향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제일 나은 선택이었기에.

“어디 가는 거야, 옷이나 좀 갖다 달라니까.”

냐앙 냥냥. 앙칼진 고양이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어느새 키엘의 방에 도착한 벨라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아니, 여기 오면 어쩌자는 거야. 옷이나 좀…. 어휴.”

키엘은 자려고 했던 건지, 잠옷을 입고 침대 옆의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이 시간에 왜?”

“이게 나도 좀 이상한데, 이 고양이가 벨라 님 같아서….”

키엘은 책을 덮고 리오를 걱정스레 쳐다봤다.

“너 요즘 일이 많아?”

스트레스 때문에 미쳤냐는 말을 돌려 말했다.

“아니, 이 고양이가 땅에 글씨를 썼다니까? 벨라라고?”

“벨라는 고양이로 있는 거 싫어해.”

키엘은 그 말을 하고 침대 위로 올라가 앉았다.

“그만 나가 봐. 잘 거야.”

리오가 하는 수 없이 뒤를 돌아서자, 벨라는 리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아! 고양아!”

벨라도 이러고 싶지는 않았는데.

제일 믿을 만한 사람들이니까 믿는다.

일단 키엘의 침대로 뛰어들었다.

여기서 사람으로 변하면 어떻게 될지 아니까, 이불 밑으로 쏙 하고 들어가 가볍게 한번 뛰었다.

“…….”

푹 꺼져 있던 이불은 사람의 형체만큼 솟아올랐다.

“이게 무슨….”

벨라는 슬금슬금 이불 밖으로 기어가 얼굴만 내밀고 말했다.

“…옷 좀… 가져다 달라고….”

“벨라?”

“옷부터 먼저 갖다줘!”

벨라의 짜증 섞인 말에, 리오는 무슨 옷을 왜 갖다줘야 하는지도 모른 채 일단 움직였다.

“무슨 일이에요?”

“그게… 내가 씻고 나왔는데 옷이 없어진 거야.”

키엘은 그 말을 듣고 잠시 경직되었다.

“벨라 설마….”

이게 말이 되는 걸까.

“지금….”

갑자기 이 야밤에 벨라가 찾아오는 게.

그의 방, 그의 침대 위, 정확히 그가 지금 앉아 있는 바로 이 옆에.

그것도.

“…아무것도 안 입은 거예요?”

나체로?

벨라는 이불을 끌어안으며 모깃소리처럼 작게 말했다.

“이… 이불 입었어.”

벨라가 움직이면서 어깨가 보이자, 키엘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서서 뒤를 돌았다.

“여, 여길 그러고 오면 어떡해요.”

“아니…. 나는 리오한테 옷 갖다 달라고 했는데.”

너무 오랜만에 변한 거라, 사람 말하는 고양이로 변하는 걸 까먹은 거지.

“리오가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야.”

“아, 아무리 그래도 늦은 시간이고….”

키엘은 새빨개진 얼굴을 진정시키느라 죽을 거 같았다.

인내해야 한다고 언질이라도 주던가.

예고도 없이 나타나서 느닷없이 그에게 참으라고 하는 게 말이 되는 건지.

“여긴 함…부로 오면 안 돼요.”

하지만 키엘의 시끄러운 속을 모르는 벨라는 이불로 대충 몸을 가리고 일어섰다.

“알겠어. 나갈게.”

“어, 어딜 나가요! 그러고!”

키엘이 급하게 뒤를 돌아 벨라를 붙잡았다. 위험하게 그런 차림으로 어딜 간다는 건지.

몸을 가렸던 이불이 스르르 그녀의 쇄골 아래까지 내려가자, 키엘은 또 고개만 돌렸다.

“그….”

“아….”

벨라도 다시 이불을 꽉 쥐고 대충 몸을 가렸다.

하긴. 아무리 편해도 전라로 찾아오는 건 좀.

‘말하는 고양이로 변하는 거야. 말하는 고양이!’

머릿속으로 만화에나 나올 법한 고양이를 떠올리며 다시 고양이로 변했다.

“이 모습으로 있을 게. (냐아아앙.)”

벨라도 알았다. 그녀가 말하는 게 모두 고양이의 울음소리로 들린다는 게.

마법은 꽤 많은 연습이 필요한데, 벨라는 이제껏 마법만큼은 게으름을 부렸다.

애초에 그놈의 적당히, 가 안 되는데 어떡해.

검도 마법도 다 능하면 너무 사기라며, 안일하게 굴었던 지난날을 반성했다.

벨라가 침대 위로 다시 올라가 사람으로 변했을 때.

키엘은 이제 시선을 돌리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아…. 너무 위험해.’

감싼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벨라의 무릎이나 팔이, 늘 보던 신체 일부인데도 그를 자극한다.

‘상상하지 마. 난 짐승이 아니다. 상상하지 마.’

그리고 키엘을 위해 배려라도 하듯이, 벨라는 다시 한번 더 뛰었다.

‘상상하는 거야. 말도 하는 고양이. 고양이 형태의 마족인 거야. 고양이 형태의 마족.’

푹신한 네 발이 땅에 닿자마자 벨라는 소리부터 질렀다.

“됐나?”

다행히 성공이었다.

“키엘, 나 이 모습으로 있을게. 그럼 되겠지?”

벨라가 키엘을 봤을 때, 그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아. 그래요, 그럼.”

이제 제대로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자, 벨라는 수다 많은 고양이로 변해 쫑알거렸다.

“전에 고양이로 변했을 때는 사람 말 하는 걸 아예 잊고 있었거든!”

키엘은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심장을 겨우 달래며 다시 일어섰다.

“어쩐지 리오한테 계속 옷이나 갖다 달라는 데도 자꾸 이상하게 내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더라.”

침대 위의 고양이는 어느새 식빵 굽는 자세로 쉴 새 없이 말하고 있었다.

“얘 또 옷도 하녀들이 입는 옷 갖다주는 거 아냐? 별채로 들어가야 하는데.”

“…….”

“키엘, 너도 지금 내가 야옹 하는 거로 들려?”

키엘은 침을 꿀꺽 삼키고, 벨라의 옆에 앉았다.

“잘 들려요.”

일단 눈앞에 나체의 벨라가 없으니 겨우 이성을 붙들어 놓을 수 있었다.

진정되자, 오랜만에 보는 벨라의 고양이 모습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고양이…. 오랜만이야.”

“그러게. 나도 한 4년만인가?”

벨라는 식빵을 굽던 자세에서 몸을 일으켜 키엘의 허벅지 위로 올라갔다.

“…….”

키엘은 벨라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겨우 진정했는데, 왜 이리로 올라오는 건지.

“그래도 고양이인 채로 있으면.”

벨라는 허벅지 위에서 뱅글뱅글 돌며 가장 좋은 자세를 찾아 몸을 둥글게 말았다.

“편하긴 해.”

아무리 고양이라도, 허벅지 위에는 있지 말자.

키엘은 벨라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쭉 들어 올렸다.

‘아…. 이건 또 너무 귀엽잖아.’

공중에 떠 있는 벨라를 살살 양옆으로 흔들자, 길어진 벨라의 몸이 시계추 흔들리듯이 흔들렸다.

“내가 너니까 그냥 가만히 있는 거야. 딴 놈들이 나한테 이랬으면 가만 안 둬.”

누군가 섹시하고 귀여운 건 같이 있을 수 없다던데.

키엘은 좀 전의 일을 다 잊어버릴 만큼, 지금 고양이가 된 벨라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귀여워.”

“너도 사용료 내.”

키엘은 지체하지 않고 벨라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난 겨우 뽀뽀하는 거로 사용료 안 받을 건데.”

겨우 뽀뽀라니. 키엘은 더 한 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럼 뭐로 내면 돼요?”

벨라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었다.

“만져.”

털이 반짝반짝 윤기가 날 때까지 키엘은 벨라의 턱밑을 쓰다듬었다.

벨라는 기분이 좋은지 팔을 쭉 뻗어 대충 키엘의 몸 아무 데나 한발씩 꾹꾹 눌러댔다.

“…좋아요?”

“뭐, 그냥 조금?”

엄청나게 큰 소리로 골골거리는데.

키엘은 새침하게 턱을 들고 있는 벨라에게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진짜 벨라였으면 가히 할 수도 없었겠지만.

지금은 더 크게 골골 소리를 낸다.

“그나저나 옷이 왜 없어진 거예요? 어디서 없어진 거예요?”

“누가 그랬는지는 몰라. 누가 내 옷가지고 가고, 샤워실 문도 잠갔다니까.”

키엘은 턱을 쓰다듬던 손을 멈췄다.

“…문을 잠갔다고요?”

옷만 없어진 건, 이해했다. 하녀가 잘못 가지고 갔을 수도 있겠지.

“어디서?”

“요즘에 밤에 기사들이랑 대련도 하거든. 거기서 끝나고 씻고 있는데, 갑자기 옷이 없어진 거야.”

하지만 벨라의 얘기를 듣자, 키엘은 본인이 처음 생각한 것보다 훨씬 심각한 사태라는 걸 느꼈다.

키엘이 미간을 찌푸리자, 벨라가 작은 발로 그의 미간을 꾹 눌렀다.

“괜찮아.”

“뭐가 괜찮아요.”

“두 사람이야. 목소리 기억하거든. 내가 내일 아침에 가서 찾아낸 다음 사지를 자르고 하나는….”

“벨라. 죽이면 안 돼.”

“자른다고 했지, 죽인다고는 안 했는데.”

“목소리가 비슷한 사람을 잘못 자르면 어쩌려고요.”

벨라는 숨조차 쉬지 않고 멈췄다.

‘그, 그러네.’

사실 그 목소리도 확실하진 않았다.

기사단에 갈 때 마주친 영애들이 있지만,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럼 어떻게 하지?”

키엘은 벨라의 발을 잡고 만지작거렸다.

온통 검은 털인데 여기만 분홍빛이 도는, 폭신폭신한 젤리 발.

“상황을 더 지켜보면서 누군지 벨라가 유추하던가.”

아직 영애들이 다 도착하지 않았으니, 최대한 몸을 사리며 아군을 만들어야 하는 게 나은데.

“아니면 공개적으로 수사해도 되죠.”

키엘은 감히 벨라에게 해코지한 영애를 가만두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전생에 경찰이었던 벨라는 ‘공개 수사’가 굉장히 꺼려졌다.

그렇게 하면 범인이야 비교적 빨리 잡을 수 있긴 한데.

‘그냥 무난하게 자르고 끝내려고 했는데.’

괜한 소동을 만들고, 그 소동의 중심에 있는 건 싫었다.

“알겠어. 한번 잘 유추해볼게.”

키엘은 벨라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이웨르를 빨리 소환해요.”

“이웨르는 왜?”

“누군가 벨라를 무시하면, 벨라가 직접 화를 낼 게 아니라 벨라 주변의 시녀들이 화를 내게 해요. 이웨르는 그런 거 잘하니까.”

‘이웨르가 그런 걸 잘하나?’ 싶었지만 벨라는 머리를 키엘의 팔에 비비적거리는 걸로 대답했다.

“그래.”

“젠킨스도 계속 옆에 두고.”

“아우, 걔 잔소리하는 거 듣기 싫어.”

“그러니까 그 재수 없는 말이 벨라를 무시하는 영애들한테 향하게 해요.”

벨라는 비비적거리다 멈췄다.

“세상에…. 그런 방법이 있네.”

벨라의 동공이 점점 커지고, 동그란 눈으로 방울처럼 반짝거리며 키엘을 쳐다봤다.

“누가 이렇게 똑똑하래.”

사냥하기 전에 가장 호기심 왕성한 표정으로.

‘세상에…. 너무 귀여워.’

키엘이 손가락으로 벨라를 툭툭 건드리자, 그녀는 그의 손가락을 장난감 삼아 아프지 않게 물었다.

“아파.”

키엘은 손가락을 빼며 눈썹을 내렸다.

“헉! 아파? 그냥 살살 물었는데.”

벨라가 놀라서 그를 보며 핥아주자, 키엘은 입가에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뭐야, 엄살 부리긴.”

손으로 벨라의 여기저기를 쓱쓱 찌르자, 그녀가 작은 발로 손가락을 잡는 대로 물었다.

부디 눈앞의 이 고양이가 사람의 모습으로 이대로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커지다 못해 폭발하지 않기를.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 리오가 벨라의 말대로 옷을 가지고 들어왔다.

아무 옷이나 가져가면 또 욕먹을 게 뻔해서, 리네에게 묻고 물어 겨우 드레스 한 벌을 가지고 왔는데.

골골대는 소리가 방 안에 가득한 채 키엘과 벨라가 이미 잠에 빠져 있었다.

리오는 옷을 옆에 두고, 슬쩍 키엘이 잠들어 있는 걸 봤다.

‘요새는 악몽도 안 꾸나 봐.’

성물을 찾아다니느라 여행할 때만 해도, 키엘은 늘 앓는 소리를 겨우 참으며 자곤 했었다.

한 여인에게 빠져 파국으로 갈까 걱정이었지만.

몇 해 전 그 모습을 기억하는 리오는 오히려 안심되었다.

어딘가 위태롭고, 한순간에 사라져 버릴 것 같았던 황태자는 몇 달 만에 곧잘 미소 짓는 사람이 되었다.

‘벨라 님도 매번 저 얼굴만 보니까 키엘 보고 착하다고 하는 거겠지.’

* * *

아침이 되자 벨라는 옷도 갈아입고, 내친김에 마족들을 전부 소환했다.

키엘이 간밤에 조언해 준 대로, 이들에게 명확한 역할을 내려주기로.

잔바르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을 맡겼다.

‘황궁으로 오면 여유 있게 다시 필사하려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옷도 없어지는 판국인데, 벨라가 괜히 소설을 다시 필사했다가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래서 이미 정리된 소설을 가지고 오는 게 더 나을 거로 생각했다.

“잔바르는 저택으로 가서, 물건을 하나 가지고 와야겠어.”

“무슨 물건이요?”

“내 서재에 있는 금고를 그냥 통째로 뜯어 와.”

잔바르가 고개를 끄덕였고, 젠킨스가 손을 들었다.

“그럼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어차피 길도 모르실 테니까요.”

“아. 넌 안 돼. 머리 쓰는 놈이라 금고 안을 볼 수도 있어.”

“…그건 잔바르 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벨라가 팔짱을 끼며 어이없다는 듯 젠킨스를 봤다.

“야. 너 잔바르 무시하냐? 얘가 얼마나 무식한데. 얘 글도 읽을 줄 몰라.”

그래서 맡기는 거다. 얼마나 든든한가.

누가 누구를 무시하는 건지.

“매우 중요한 거라, 아무도 그 안의 내용을 읽어선 안 돼. 그러니 잔바르에게 맡기는 거야.”

“맞습니다! 전 글 읽을 줄 모릅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그걸 자랑처럼 잔바르가 말하자, 젠킨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금고, 비밀번호가 있는 거 아닙니까? 어차피 제가 못 열 텐데. 동행하겠습니다.”

“비밀번호를 풀면 어떡해.”

“안 풀겠습니다.”

“안 돼, 안 돼.”

다른 건 몰라도, 벨라는 소설에 대한 것만큼은 단호하고 철두철미했다.

“무슨 비번이 0000, 1111 이런 거도 아닐 거잖아요.”

“에이, 당연히 아니지. 아니긴 한데….”

1111이나 1110이나.

어째 생각해보니 비슷하긴 했다.

“도련님 생일이고 이런 거 아녜용?”

“누가 금고 비밀번호를 그렇게 알기 쉬운 거로 합니까.”

여기. 너희 앞에 있다.

“어쨌든 잔바르가 가서 뜯어와. 무전 하면 내가 바로 소환해줄 테니까. 무전 하는 법 기억하지?”

“…….”

“봐, 내가 이래서 얘를 보내는 거라니까.”

젠킨스가 못내 아쉬워하는 표정이었지만 그건 이웨르와 푸르만 느꼈다.

“자. 이제 너희가 할 일을 하나씩 주겠어. 이웨르는 앞으로 시녀 같은 하녀가 되는 거야.”

소환 직전에 무슨 일을 하고 온 건지, 이웨르는 속옷만 입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녀 재미없는데.”

“누가 재미로 하니.”

이웨르는 벨라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귀에 작게 말했다.

“밤에 드는 시중이라면 자신 있는뎅.”

길게 말한 것도 없이, 벨라는 오랜만에 이웨르의 혀를 잘랐다.

“그리고 젠….”

“푸르는요! 하녀는 푸르인데요!”

푸르가 울상을 하고 벨라의 다리에 매달려 울먹였다.

제일 골치 아픈 푸르는, 키엘과 고민하다 적당한 자리를 찾았지.

“푸르는 이제부터 내 애완 곰이야. 알았지?”

“애완 곰은 뭐 하는 거예요?”

“응. 내 사랑을 듬뿍 받으면 돼.”

푸르의 얼굴이 환해졌다.

“와아!”

“이제부터 푸르는 동물왕국에서 내가 제일 아끼는 곰이었던 거야. 알겠지?”

“네에!”

벨라는 살짝 몸을 내려 푸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크루엘가에 있을 때처럼 막 행동하면 안 돼. 푸르는 벨라의 얼굴이니까.”

“내가 공주님의 얼굴!”

“푸르가 너무 예의 없게 굴어서 내 명성에 먹칠하면 너무 슬플 거 같아.”

“알겠어요!”

젠킨스는 그 모습을 보며, 벨라가 키엘 같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저거 도련님이 한 말이야….’

젠킨스의 예상대로 벨라는 키엘이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다가, 제 성격대로 푸르의 볼을 꼬집었다.

“그러니까 평소에 입 좀 다물고 있어. 알았어?”

젠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아가씨가 한 말이고….’

잠자코 지켜보고만 있던 그는, 어느새 벨라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생각을 들키기라도 한 듯 깜짝 놀랐다.

“젠킨스는 계속 내 보좌처럼 일해.”

처음부터 그놈의 보좌를 하라고 한 건 알겠는데.

젠킨스는 조금 불편했다.

잔바르가 과연 저택까지 길을 잃지 않고 갈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다.

글을 읽을 줄 모른다면, 당연히 이정표도 모르겠지.

“그냥 저는 잔바르 님을 따라….”

“안 된다고 했지?”

젠킨스는 서운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툭 말을 내뱉었다.

“아가씨가 여기서 하는 일이 뭐가 있다고 제가 보좌까지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 말에 평소 눈치 없는 마족들도 슬쩍 젠킨스를 보더니, 벨라의 눈치를 봤다.

‘말이 너무 심하넹….’

‘젠킨스.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젠은 나보다 더 바보!’

하지만 벨라는 젠킨스의 비아냥에 손뼉을 쳤다.

“그렇지. 그렇게 재수 없고 죽이고 싶게끔 말하는 거야.”

“…칭찬이에요?”

* * *

세리나 도이치는 전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주동자였으니까.

몇몇 영애들은 벨라가 어디 있는지 은근히 찾아보면서, 얼마나 낙담해 있는지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벨라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굉장히 여유로운 얼굴로 차나 마시고 있었다.

그것도 옆에 빨간 머리의 꽤 젊은 총각을 끼고서.

“정신 못 차렸나 보네요.”

벨라는 그녀를 보고 수군거리는 무리를 눈으로 가리키며 젠킨스에게 물었다.

“쟤들은?”

“저기도 한 무리예요. 저 중간에 있는 갈색 머리 여자가 세리나 도이치라고 하는데. 그냥 직위만 받은 가문이더라고요.”

“으흠. 키엘이 그런 것까지 다 정리해준 거지?”

“…네.”

“하긴. 네가 그걸 다 알아낼 리는 없지.”

“그건 아가씨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벨라는 업신여기듯 젠킨스를 쳐다봤다.

“난 충분히 알 수 있지.”

다른 건 몰라도 소설을 그간 정리하면서 주요 가문은 다 정리했다.

그녀가 도이치 가문을 모른다면 애초에 듣도 보도 못한 잡종이니까.

“쟤들은 내 주변에 계속 맴도는 거 같던데.”

“그걸 눈치챘어요?”

키엘이 한 말만 아니었으면 당장 젠킨스의 목을 잘라버리는 건데.

“네가 볼 땐 어때? 쟤들도 너처럼 날 아니꼽게 보냐?”

“제가 언제 아가씨를 아니꼽게 봐요.”

지금 계속. 그러고 있으면서.

“너 혹시, 내가 잔바르 혼자 보내서 지금 투쟁하는 거 아냐?”

벨라가 젠킨스를 살짝 노려보고 핵심을 찌르자, 젠킨스는 잠시 말을 잃었다.

“무… 무슨…. 전 그냥 아가씨가….”

“내가 뭐.”

“우리 아가씨가 어디 가서 무시당할까 봐 그러죠.”

벨라는 손가락으로 젠킨스를 가리키며 웃었다.

“너. 그 말 기억해. 누가 나 욕하는 데 가만히 있기만 해봐.”

분명 웃고 있는데 눈빛이 너무 살벌했다.

그리고 세리나는 잠자코 벨라를 보다가 콧방귀를 꼈다.

분명 저 빨간 머리는 며칠 동안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서 시종을 자처하는 걸 보니.

“저분은 어디서 온 사람일까요.”

딱 한마디를 던졌는데, 상상력이 영애들을 자극했다.

“어제는 없고…. 오늘은 있다면….”

다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머릿속으로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나 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은 은연중에 영애들 사이에 새로운 소문으로 떠돌기 시작했다.

어쩌다 지나가는 벨라를 보기라도 하면, 빨간 머리와의 밀애에 관한 이야기를 수군대기 시작했다.

조금 그렇게 오해할 법도 한 게.

“엄청나게 친해 보이죠?”

“대화를 자세히 들은 적은 없는데, 거의 쉴 새 없이 말하더라고요.”

쉴 새 없이 서로 비아냥거리는 건 모를 테니까.

* * *

근거 없는 소문은, 발도 없이 그들 사이를 떠돌며 실체를 가졌다.

이제 몇몇 영애들은 화를 내기 시작했다.

“물론 저희가 다 황태자비가 될 거라고 감히 꿈꾸지 않는 것도 있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경합에 와서 남자를 꾀는 건 아니지 않나요?”

“그러게요. 이건 황실에 대한 모독이에요. 이세계에서 왔다더니, 이런 개념도 없나 봐요.”

누구 하나라도 ‘전하께서 저분과 같이 황궁에 올라왔대요.’라고 얘기할 법도 한데.

그러나 그들 중 몇몇은 슈리아와 대련하는 벨라를 본 적 있었다.

황태자의 마차 행렬에 같이 올라온 것도 알고 있었고.

‘너무 심한 비약인 거 같은데.’

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미 그들 사이에 거짓된 여론이 장악하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경합 전에 황궁에 먼저 들어온 영애들은, 대다수가 이렇다 할만한 권력이 없는 영애들.

각자 부모의 만류로 떠밀려서 왔기에, 괜히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았다.

소문이 거짓이라도 벨라가 과연 얼마만 한 권력을 가질지 가늠이 되질 않았고.

소문이 사실이라면 괜히 옹호했다가 목이 날아갈 수도 있으니까.

“가서 한마디 해야겠어요.”

조금 무식하나 용감하고, 남들에게서 선망의 시선을 받고 싶은 영애 하나가 행동력에 옮기려 했다.

부도덕함을 밝히며 영웅이 되고 싶은 모양이었다.

세리나는 그 꼴이 보기 싫어, 자신이 나섰다.

“저희가 저분에게 오해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한 번 이야기를 해보는 게 어떨까요?”

겉은 그럴싸하게 옹호하는 척하면서.

그렇게 몇몇 모인 영애들이, 차나 마시면서 책이나 보고 있는 벨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영애들이 말하는 ‘쉴 새 없는 대화’는 그들의 착각과는 굉장히 거리가 멀었다.

“아가씨. 왠지 왕따 당하시는 거 같은데요.”

“누가? 내가?”

“매번 혼자 다니시잖아요.”

벨라는 오히려 어깨를 으쓱였다.

“다들 나 쳐다보잖아. 이건 슈리아가 말한 선망일지도 몰라.”

“원망일 수도 있죠.”

“너 요즘 왜 이렇게 삐뚤어졌어?”

젠킨스는 솔직히 벨라에게 조금 화가 난 상태이긴 했다.

작은 불만이 한둘씩 쌓여 있기도 했고.

예를 들면 젠킨스와 잔바르의 관계만 해도 그렇다.

그녀가 스스로 알아차려야 하는데.

늘 눈치를 챌 듯 말 듯 묘한 경계선 사이에서 관심을 꺼버린다.

“그냥 아가씨가 너무 다른 사람 마음을 몰라주는 거 같아서 좀 화가 났습니다.”

이렇게 오묘하게 대답하며, 작게 쌓아왔던 불만을 터트렸다.

“제가 금고는 왜 열어봅니까? 그렇게 못미더우면서 무슨 보좌를 하래요.”

“굳이 네가 잔바르랑 같이 갈 이유도 없잖아.”

“아가씨가 그 금고를 필요로 하는 거 같으니까. 확실하게 챙겨 드리려고 한 거죠!”

벨라는 심드렁하게 그를 쳐다봤다.

그때도 딱히 그렇게 들리진 않았는데.

“잔바르 님이 길을 잃으면, 금고를 늦게 받을 테니까요.”

“늦어져도 그 안의 내용은 절대 세상 밖으로 나가면 안 되어서 그래.”

“저를 못 믿겠단 소리로밖에 안 들리는데요.”

벨라는 팔짱을 끼고 그를 천천히 노려봤다.

“너 내가 왜 너를 옆에 두는지 알아?”

“…몰라요.”

“반마족이니까 마족과 인간을 제일 잘 알 거라 생각하고 옆에 두는 거야.”

그 말에 젠킨스는 비아냥거리던 태도를 조금 수그러뜨렸다.

이전부터 느껴왔지만, 마왕이면서도 반마족인 그를 배척하지 않는 게 늘 신기하긴 했는데.

서운한 걸 표현할 때까지만 해도, 그가 감동받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리고 젠킨스의 감동이 충만할 때.

세리나가 영웅이 되고자 몇몇 영애들을 끌고 다가왔다.

가볍게 인사를 하길래, 벨라도 젠킨스도 조금 놀랐다.

이제껏 멀리서 구경만 하더니.

날씨 얘기를 하면서 평범한 대화를 이어가길래, 벨라는 그녀에게 혹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가 싶었다.

“그나저나 두 분의 사이가 참 보기 좋으시네요.”

이게 보기 좋아 보이나. 벨라의 귀에는 어째 어감이 비꼬는 것처럼 들렸다.

“요즘 안 좋은 소문이 돌던데, 조심하셔야겠어요.”

“안 좋은 소문이요?”

“네. 황태자비 경합을 앞둔 영애가 황궁에서 연애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더라고요.”

벨라는 그녀의 말이 어떤 오해를 가져올지 모른 채 되물었다.

“그게 뭐 어때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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