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이게 무슨 소리지.
“나를 양녀로 들이는 대신에, 슈리아 공녀가 황태자비가 된다는 거야?”
키엘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얘기를 후안이 이렇게 할 거라곤 예상 못 했다.
“티파티는 여기서 끝내지. 다들 나가.”
“전하께서 왜….”
“나가.”
슈리아가 제일 먼저 일어서서 후안을 끌고 가듯이 데리고 나갔고, 쌍둥이들도 착잡한 마음으로 나갔다.
벨라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다시 키엘에게 물었다.
“아니지? 내가 잘못 들은 거지?”
“…맞아요.”
그녀는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래 걸려 찾은 즐거웠던 일상이 추락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겨우 몇 초밖에 되지 않았다.
이 소설은 어떻게 흘러가는 걸까. 저 약속도 이길 만큼의 사랑을 얘기하고자 하는 건가.
“결혼은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해야지.”
키엘은 벨라의 손목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
“슈리아 공녀는 황후가 될 만한 재목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건 벨라도 인정하는 바였지만.
“그래도 네 마음이….”
“벨라. 황태자비는 내 마음과 별개의 문제예요.”
“아….”
“제국을 잘 이끌 수 있는 사람을 뽑는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키엘의 손이 벨라의 볼을 어루만졌다.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요.”
“그래도….”
“어떤 황제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황후로 뽑진 않아요, 그러니까 괜찮아.”
벨라의 붉은 눈이 점점 어둡고 초점을 잃어간다.
소설은 달랐단 말이야. 네 운명은 아무리 엎어져도 로잔느에게 향하게 되어 있었는데.
“나 때문에….”
내가 또 바꾼 거야.
마계로 돌아가기 전에, 소설 따위 어떻게 흘러가든 상관없다고 마음먹기도 했었다.
하지만 막상 마계에서 4년을 지내보니 그 생각은 오만하고 치기 어린 행동이었다.
그때와 같은 경험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데.
‘괜히 내가 욕심부리다가…. 이렇게 된 거야.’
벨라의 손이 점점 떨려왔다.
이 소설이 원작대로 완결 나지 않으면 영겁 같은 세월을 짐승처럼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나 크루엘가 양녀 안 할래. 황태자비 약속한 거 무르면 안 돼?”
그리고 벨라가 손을 떠는 걸 본 키엘은 눈을 감고 속으로 한숨만 내쉬었다.
“벨라가 크루엘가에 이미 들어왔고, 제 발로 지금 나간다고 해도 이미 약속한 거라 무를 수 없어요.”
벨라가 벌떡 일어섰다.
“그건 모르지. 해봐야지! 후안 때문에 나간 걸로 하고 걔한테 덮어씌우자.”
좋은 방법이긴 하나.
키엘이 원하는 바는 쏙 빠진 얘기였다.
“그럼 난 어떻게 만날 거예요?”
“수, 수도에 집을 하나 구할게. 가끔 고양이로 변해서 놀러 가면 되겠네.”
“…가끔?”
그 말에 벨라는 멋쩍은 듯 웃었다.
“그… 그럼 그냥 계속 고양이로 있을게.”
하루 종일 고양이로 지낼 순 없었다.
이미 반년 정도 밤에는 고양이로 지내보며 느꼈다.
가장 본능에 가까운 모습인지라, 마력은 다른 때보다 빨리 차오르지만 그만큼 본성대로 행동한다는 걸.
어디서 생선 냄새가 나면 땅에 떨어진 거도 핥아보질 않나.
움직이는 게 있으면 홀린 듯이 따라가서 뛰질 않나.
‘속여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일단 이렇게라도 얘기해야지.’
나중 되어서 말을 바꾸면 되니까.
벨라가 발을 바닥에 쿵 하고 디뎠다.
소환진을 열려고 했는데.
마력이 없어 소환진이 생기지 않자, 벨라는 쿵쿵거리며 나섰다.
“여기 잠시만 있어!”
* * *
벨라가 이웨르를 데리고 다시 방으로 나타났을 때, 키엘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저럴 줄 알았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이 계획은 선로 위에서 출발했다.
“일단 내가 이 집에서 나갈게. 후안이 날 괴롭혔다고 하면서.”
“음….”
“해봐야 아는 거지. 그러니까.”
그녀는 이웨르를 키엘에게 냅다 집어 던지며 말했다.
“내 심장부터 돌려줘.”
그는 가슴에 손을 올린 채 깊게 심호흡했다.
‘항상 최악의 상황만 골라 가네요.’
차분히. 하나씩.
벨라가 패닉에 빠지지 않고 잘 따라올 수 있는 단계들이 이미 있었는데.
모든 게 뒤죽박죽으로 엉켜버렸다.
“그래요, 그럼.”
“꺄! 그럼 옷 벗어용, 도련님!”
“넌 왜 신났니.”
심각한 표정의 벨라와 달리 이웨르가 키엘과 눈이 마주치자 입꼬리가 올라갔다.
키엘이 단추를 하나씩 푸는 동안, 벨라는 손톱을 깨물면서 방을 왔다 갔다 했다.
낭떠러지를 눈앞에 두고, 벨라는 평소 쓰지 않던 뇌를 전부 작동시키는 기분이었다.
‘그래. 일단 여기서 벗어나고, 후안에게 전부 다 뒤집어씌워 보자.’
평소 그녀를 괴롭혔으니, 굳이 양심에 찔릴 것도 없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내가 없어지면, 분명히 이 약속도 무를 수 있을 거고.’
그리고 저택에 가서 소설 정리본을 다시 찾아서 정리해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음. 아가씨, 못 꺼내겠는데용?”
“……뭐?”
정말 예상치도 못한 말이 들렸다.
“꺼내다가 도련님이 죽을 수도 있겠는데용?”
“무슨 개소….”
벨라는 잔뜩 인상을 쓰고 이웨르를 밀어냈다.
키엘이 풀었던 옷을 한 손으로 움켜잡으며 고개를 돌렸다.
얼핏 본 거지만, 분명 상처 부위가 여전히 붉은 것처럼 보이는데.
“어디 봐.”
벨라가 성큼성큼 다가가서 그의 가슴을 확 열어젖혔다.
“어머, 너무 박력 있당. 우리 아가씨.”
처음 마계에서 붕대로 감쌀 때보다 상처는 더 짓이겨져 있었다.
“이거 혹시 내 심장 때문에 이런 거야?”
“최근에 많이 피곤해서 빨리 안 낫는 거예요.”
벨라는 차분하게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옆에 있는 이웨르의 등을 거세게 후려쳤다.
“그러게! 내가 얘 방해하지 말랬지! 얼마나 괴롭혔으면….”
“아잉….”
벨라는 이제 키엘을 마주 보고, 상처 부위를 살짝 손으로 만졌다.
키엘이 살짝 움찔하자, 벨라는 입술을 내밀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파?”
아프기보단 만질 줄 몰랐던 거긴 한데.
“내 피 좀 줄까? 이거 마시면 애들 회복된다던데.”
“난 소용 없지 않을까요….”
키엘이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매번 귀여운 모습, 아픈 모습 같은, 제일 보이기 싫은 모습을 보면 벨라는 조금이나마 진정한다.
“아가씨, 그럼 저, 주세용.”
“넌 조용히 해.”
벨라는 이웨르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또 고개를 돌려 키엘을 안쓰럽게 쳐다봤다.
“왜 아직도 아프고 그래.”
슈리아가 황태자비가 되는 걸 막는 것만 생각해도 골치가 아픈데.
이렇게 되면 황궁까지 따라가야 할 판국이었다.
“내가 황궁에 가기 전까지는 괜찮아질 거예요. 걱정 마요.”
“안 되면 어떻게 해? 나도 회복이 안 되는데….”
키엘이 벨라의 이마를 꾹 밀어내고, 옷을 여미었다.
“그건 그때 생각해요.”
그리고 그 손으로 눈썹과 눈썹 사이를 살며시 만져 찡그린 미간을 문질렀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얽히고설켜, 벨라는 무엇부터 고쳐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때도 안 아물면 공녀를 따라 황궁에 같이 가요. 이게 다 나으면 그때 가져가면 되잖아.”
“그…래도 되긴 한데.”
그때가 되면 너무 늦어버린 건 아닐까. 약속을 무르라고 하기에는.
“미안해요. 빨리 나아질게.”
벨라가 키엘의 머리카락의 끝을 톡톡 건드렸다.
“그걸 네가 미안해할 건 아닌데….”
이제 그만 이 소설 속에서 빠지고 싶은데.
이 호박색의 눈은 마치 그녀를 사로잡은 듯 놓아주질 않는다.
“바람 좀 쐬어야겠다.”
벨라가 나간 후, 이웨르는 확실히 벨라가 나간 건지 확인하고는 참았던 미소를 터트렸다.
“어우, 연기하느라 혼났넹.”
“…….”
“미리 얘기해주기로 했잖아용, 왜 갑자기 아가씨가 심장 꺼내달래용?”
“나도 몰랐어.”
“그래도 잘했죵?”
이웨르는 칭찬해 달라며 푸르처럼 귀엽게 손으로 브이자를 그렸다.
“…응.”
“그럼 이제 그건 안 해도 되용?”
“황궁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계속해줘. 벨라가 또 요구할 수도 있어.”
“오호, 기왕 단추 푼 김에 오늘 밤에 할 거 지금 할까용?”
키엘이 조용히 옷깃을 열었다.
“…그래.”
이웨르는 탐나는 듯 그의 열린 가슴을 보고 입술을 한번 훑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에 그녀의 손이 키엘의 가슴을 찔러 들어갔다.
“안 아파용? 매번 신음 한 번 안 내넹.”
그 손이 상처 주위를 헤집어놓고 빼자, 키엘이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파.”
이웨르가 손에 묻은 키엘의 피를 맛보는 동안, 그는 옷을 바로 입고 노란 꽃다발을 집어 들었다.
“그래도 벨라가 가져가는 거보단 나아.”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우리 도련님도 진짜 정상이 아니야….”
키엘은 꽃의 향기를 맡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애초에 마왕을 좋아하는 것부터 제정신이라곤 못하지.”
그러면서 이웨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정말 아가씨가 황궁에 간다고 할까용?”
“그게 벨라로선 최선일 거야.”
최선일 수밖에 없겠지.
‘이제 남은 건 슈리아 공녀인가.’
* * *
그 시각. 슈리아는 후안과 마주한 채 웃고 있었다.
“오라버니. 그 얘긴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뭐 그리 숨길 일인가? 사용인들도 몇 알던데.”
슈리아가 황태자비로 내정되어 있다는 얘기는 아는 사람이 몇 없었다.
“저택에 오라버니의 사람을 심어놓았나 보네요.”
“내 사람이라니. 넌 내 사람 아니야? 같은 핏줄인데.”
슈리아는 입술을 씰룩이며 미소를 유지했다.
“저에게 먼저 얘기하셨어도 되었을 텐데요.”
설령 이 정보를 이렇게 대책 없이 놀릴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심보가 너무 괘씸해서 말이야.”
“…….”
“황태자비의 가문에 정인을 들여놓은 거 아닌가.”
“순서가 다릅니다. 벨라 님이 먼저고, 그 뒤의 약조인 거죠.”
“공녀는 아무렇지도 않나 봐?”
후안이 팔짱을 끼며 슈리아를 비웃듯 쳐다봤다.
“전하께선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할 줄 압니다.”
“과연 그럴까?”
그 말에 슈리아는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전에는 몰랐지만, 막상 벨라가 눈 앞에 있을 때 키엘의 행동을 유심히 봐왔으니까.
“오라버니. 황태자비라는 자리는 오라버니께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책임감 있는 자리거든요.”
“…….”
“사랑이라는 감정이 들어가면, 오히려 거기에 맞는 일을 못 할 수도 있죠.”
“그래서 자리로 만족한다. 이거네?”
그들은 몰랐지만, 소설 속에서는 후안이 슈리아를 설득하는 말들이었다.
“그런데 그게 안 흔들릴 수 있을까?”
로잔느와 키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했던 말들.
“믿었던 패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면?”
그 뒤로도 키엘에게 계속 물었지만, 그의 생각은 꽤 단호했다.
- “괜찮아요. 황태자비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뽑는 게 아니니까.”
너보다 내가 안 괜찮은 건데.
벨라는 자신이 다 꺾어버려 민둥산이 된 정원의 한가운데 드러누웠다.
“으아아악!”
도망을 치려고 해도, 심장을 꺼낼 수도 없고.
키엘이 아프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그냥 꺼내 볼까 생각도 했지만, 역시 아니었다.
- “벨라는 날 죽일 수 있어요?”
마계에서 키엘의 목을 감싸 잡았을 때 떨리던 손을 아직 기억한다.
‘난 못 해.’
그렇게 잡생각을 정리하며 하늘만 보고 있는데, 은발의 긴 머리가 구름처럼 나타나 벨라를 불렀다.
“여기서 뭐 하세요?”
슈리아는 절대 황태자비를 포기하지 않을 거다. 이 기회를 바보처럼 놓칠 여자가 아니니까.
‘한번 감성적으로 접근해볼까.’
마지막 발악이라 생각하고 벨라가 물었다.
“공녀는 키엘… 전하를 좋아해요?”
“그렇죠? 저랑 대련해주는 사람은 전하가 유일해서요.”
“아….”
“어머, 죄송해요.”
그래. 그런 얘기가 아니었다고.
“벨라 님도 저랑 대련해주시죠. 요즘 들어 참 기쁘답니다.”
“그런 좋아하는 거 말고, 남자로 좋아해요?”
“아뇨? 전혀.”
너무 대답이 빨라서 벨라는 자신이 질문을 안 한 건 줄 알았다.
“왜요?”
“왜요라뇨. 음…. 전하는 좀…. 순하게 생기지 않았어요?”
우리 키엘이 뭐 어때서.
“전 좀 험한 인상이 더 끌리더라고요. 산전수전 다 겪은 그런 인상.”
키엘도 고생은 많이 하고 자랐거든.
‘하긴. 저택에선 즐겁게 지냈으니 산전수전을 겪은 건 아니려나.’
슈리아의 말에 반박하고 싶지만, 벨라는 끓는 속을 참으며 달콤하게 물었다.
“공녀는 그럼…. 사랑 없는 결혼도 괜찮아요?”
“음. 가문에 유리한 대로 하는 게 결혼이죠.”
날 때부터 공작가의 영애라 그런가.
“공녀께선 좋아하는 사람과 연을 맺고 싶진 않나요?”
그러자 슈리아가 빙긋 웃었다.
“벨라 님은 꼭 그러셨으면 좋겠네요.”
“저요?”
“명색이 공작가랍니다. 어느 혼처든 원하시는 곳으로 봐 드릴 수 있어요.”
갑자기 분위기가 어째 벨라에게 쏠리는 것 같은데.
“벨라 님은 어떤 남자랑 결혼하고 싶으세요?”
결혼이라니.
“딱히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가능하면 제가 황궁으로 돌아가기 전에 짝을 만들어 드리고 싶은데.”
“그, 그냥 혼자 있고 싶은데요.”
“어머. 왜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마족에게 무슨 결혼인지.
“난 인간이랑 이어질 수 없어요.”
“왜요? 그 젠킨스라고 하는 사람은, 아버지가 인간이라던데.”
벨라는 계속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실례되는 것 같아-사실 관심이 없어서- 물어본 적은 없었는데.
‘아예 금지는 아니었던 건가?‘
마왕의 힘을 대부분 승계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모르는 게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잠깐만, 내가 누구랑 자면 그자가 내 반려가 되는 거 아냐?‘
일반 마족이라면 몰라도, 마왕인 벨라에게 결혼은 곧 반려를 정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어쨌든 결혼은 안 돼요.”
슈리아가 민망해할 정도로 벨라는 단호하게 잘라서 말했다.
“흐음. 그럼 벨라 님의 이상형도 없나요?”
“일단 키 크고 잘생기고….”
“마치 준비된 대답 같네요.”
이놈의 이상형 질문은 오래전부터 이웨르가 하도 물어봐서 이제 대답이 자동으로 나왔다.
“굳이 결혼이 아니더라도. 애인이라도 찾아드려야겠어요.”
“하하.”
그러다 슈리아가 조금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저희 오라버니는…. 벨라 님의 이상형에 가깝나요?”
“에이, 아니죠. 내 취향은 좀 더….”
그때였다.
“전하. 안녕하셨습니까.”
슈리아가 급히 일어서서 인사하자, 벨라가 뒤를 돌아봤다.
밑에서 올려다봐도 잘생긴 키엘이 서 있었다.
‘내 취향은 이쪽이긴 하지.’
처음부터 지금껏 부동의 최애.
어릴 때는 귀여워서 힐링이 되더니, 지금은 어쩜 저렇게….
“무슨 얘기 중이었어요?”
“벨라 님의 이상형 얘기 중이었답니다.”
“아하. 나도 궁금하네.”
헐벗은 걸 들키기라도 한 듯, 벨라는 귀까지 빨개진 채 다급하게 일어섰다.
“나, 나는 애들 관리하러 가봐야겠다.”
일어서면서 슈리아와 부딪혔지만,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요?”
“애, 애들 밥 주러!”
마족들이 키우는 동물도 아닌데.
벨라는 자신의 말이 이상한 걸 정정하지도 못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왜 내 남자주인공은 저렇게….’
벨라는 걸으면서 두 손으로 자신의 양 볼을 쳤다.
‘왜 내 남자주인공이야? 정신 차려. 그냥 남주라고!‘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키엘이 머쓱해졌는지 헛기침을 했다.
“내가 방해한 거야?”
민망한 건 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딱히 비밀이랄 것도 없는 대화인데, 마치 꼭꼭 숨기듯이 달아나 버리는 건 왜인지.
“하아. 벨라가 무슨 생각 하는지를 모르겠어. 황궁에 같이 가자는 말은 안 하던가?”
슈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혹시 후안 경이 그 얘길 어디서 들었는지는 알아냈어?”
후안의 이름이 나오자, 슈리아는 얼마 전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전하. 그와는 별개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뭔데?”
“전하께서 벨라 님을 연모하는 건 알겠는데, 그게 국정 운영에 지장이 될까 봐 좀 걱정이네요.”
“애국심에 하는 말이야, 아니면 후안 경처럼 날 비웃으려고 하는 말이야?”
“어머. 오라버니가 전하를 비웃는다고요?”
키엘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망언을 한 이후로 끊임없이 후안은 키엘을 도발했다.
- “남매같이 컸는데 남자로 보이겠습니까?”
라며 뜬금없이 한 마디만 던지고 가던가.
- “기껏 찾았는데 뺏기면 얼마나 억울할까.”
이러면서 지나가질 않나.
“한계에 달할 지경이야.”
슈리아는 재밌다는 듯 웃으면서 키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당연히 애국심이죠. 제가 무려 황태자비라잖습니까.”
“… 슈리아 공녀.”
“약속은 지키세요, 전하. 공사는 구분하실 줄 아시겠죠?”
키엘은 팔짱을 끼고 슈리아를 빤히 쳐다봤다.
“하여튼 크루엘 가문은 비아냥거리지 않고는 말을 못 하나 보지?”
“아시죠? 전하도 만만치 않으신 거.”
그 말에 키엘은 며칠 만에 웃음이 나왔다.
계속 벨라가 신경이 쓰였는데, 슈리아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
* * *
생각을 많이 할수록 좋은 방도가 나오는 건 아니었다.
“미치겠네….”
벨라가 소설을 다시 정독하고, 이 사태를 아무리 뜯어 봐도, 답은 가장 원치 않는 걸로 보였다.
“역시 황궁에 따라가서 상황을 바꾸는 게 나을까.”
이 소설에 더는 관여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 피하기만 하다가는 또 이상하게 뒤틀릴지도 몰라.’
키엘이 마계로 그녀를 찾아온 것도, 그가 자신의 신부를 포기하는 것도.
벨라가 여태껏 몰랐던 이야기였으니까.
‘그냥 평범한 역할에 빙의했으면 이런 고민도 안 해도 되었을 텐데.’
그냥 되는 대로 살다가 죽으면 끝이겠건만.
종교도 아니고 완결 나면 천국과 지옥이 정해지는 인생이라니. 아니, 마생.
“우리 푸르, 어디 갔어.”
그 복슬복슬한 털을 좀 만지면서 차분하게 이 결심을 곱씹어보려고 했다.
저택이었다면 푸르는 벨라의 방에서 곰 인형 흉내를 내고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세계에서 온 곰 인형 푸르는 크루엘가에서 꽤 인기 만점이었기에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여기서 뭐 해?”
지나가는 하녀마다 귀엽다고 어화둥둥 해주는 게 좋은지, 푸르는 매일같이 그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그냥 서 있었다.
“앗! 전 아가씨의 뽀뽀가 제일 좋아요!”
푸르는 마치 바람이라도 피다가 걸린 것처런 땀을 흘리고 침을 삼켰다.
“아냐. 그냥 다른 사람 뽀뽀를 더 좋아해도 돼.”
진심이었는데, 밀어내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푸르는 벨라의 허리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아니, 얘가 왜 이래.”
지나가는 하녀들이 힐끔힐끔 그들을 쳐다보자, 벨라는 당황스러웠다.
마치 어린아이를 울린 못된 어른인 것 마냥.
“그만 울어. 뽀뽀해줄게.”
그 말에 음소거라도 한 듯 푸르는 뚝 그쳤다.
‘얘 진짜 얍삽하단 말야…. 순진한 척하면서.’
그러면서 살짝 뒤를 돌아 엉덩이를 내밀었다.
“엉덩이에 해주세요.”
마계에서 복종 서약의 띠를 두를 때 딱 한 번 해준 적 있었는데, 그 이후로 틈만 나면 엉덩이를 내민다.
“싫어. 내가 그때 말했지? 네 곰생에서 딱 한 번만 엉덩이에 뽀뽀해주는 거라고.”
“힝.”
“제발 뽀뽀도 좀 평범하게 받으면 안 돼?”
그러면서 푸르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힘차게 들어 올렸다.
“너 왜 이렇게 가벼워졌어? 밥 굶고 다녀?”
“아니요? 전 하루에 다섯 끼 먹는대요?”
“뭘 그렇게 많이 먹어?”
“공주님도 그렇게 먹잖아요!”
“야. 나는 중간에 간식을 먹는 거지.”
벨라가 푸르의 이마에 가볍게 뽀뽀하자 푸르가 벨라를 꽉 껴안았다.
“공주님이 제일 좋아!”
벨라도 푸르를 꽉 안고 그 털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마계에서도 피 냄새가 요동칠 때마다 이 털 냄새를 가까이 맡으며 겨우 안정을 찾았었다.
이 냄새는 많은 걸 떠오르게 했다.
특히 전생에서 조카에게 사준 곰인형.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지만, 친언니가 곰인형을 안은 조카를 무릎 위에 올린 모습을 상상케 했다.
그리고 벨라를 향해 조카의 손을 흔든다.
- 저기 이모 있네. 이모, 안녕 하자.
사람으로 살았던 모든 기억을 벨라의 앞에 나열한다.
“공주님 울어요?”
“… 미쳤니.”
벨라는 코를 살짝 훌쩍이고 푸르를 더 꽉 껴안았다.
‘모든 마족이 너 같으면 그나마 견딜만 할 텐데.’
하지만 견딜 수 없으니, 앞으로 나가는 수 말고는 답이 없었다.
* * *
벨라는 슈리아의 앞에 서서 단호하게 말했다.
“저도 공녀랑 같이 황궁에 가고 싶어요.”
결심이 섰다.
최대한 그녀가 황태자비가 되지 않게 방해 공작을 벌이기로.
‘차애에겐 미안하지만, 어차피 슈리아는 악녀 역할이잖아.’
기왕 이렇게 된 거, 최고의 악녀로 만들어주겠다.
최대한 로잔느의 편에 서서. 로잔느는 싫지만 밀어주겠다.
굳은 결심을 한 벨라.
그리고 슈리아는 그런 벨라를 보며 후안과 키엘이 했던 말을 번갈아 떠올렸다.
‘이런 게 권력 아니겠어요? 내 말 한마디에 모든 게 바뀔 수 있는 거.’
모든 승패가 자신의 손에 달린 이 상황이 아찔하고 재밌다면, 이상한 거겠지.
하지만 슈리아는 그 권력의 맛이 좋았다.
그리고 슈리아는 웃으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어머, 그건 안 됩니다.”
기껏 결심이 섰는데.
벨라는 슈리아가 안 된다고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왜요?”
“어떻게 벨라 님께 제 시중을 들라고 하겠습니까? 제게 검술을 가르쳐주고 계신 스승이나 다름없는데.”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될 거 같은데….”
“차 한잔하시겠어요?”
따뜻한 차 대신, 얼음이 동동 떠 있는 차였다.
“꽤 더운지라 좀 시원하게 내봤답니다. 참고로, 얼음도 구하기 귀한 물건이니 사치 부리는 덴 제격이죠.”
꽤 오래전 방 하나를 아이스링크장처럼 만들었던 적도 있었는데.
‘그럼 그때 그건 돈방석에 앉은 거네.’
시원한 차를 한 모금 마시자, 슈리아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명예란 참 얻기 어려운 거지요. 크루엘 가는 몇 세대 동안 큰 공을 세우기가 힘들었답니다.”
“아…. 네.”
“다들 알고 있지만, 이런 걸로 라도 위안으로 삼고 있었어요. 좋은 옷, 좋은 차, 좋은 가구들. 아직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려고.”
슈리아가 찻잔을 톡톡 두드렸다.
“정당하게 일어서고 싶었어요. 이대로 가다가는 명색이 공작가가 몰락할 것 같았거든요.”
벨라는 어떤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소설 속에서는 악녀로 포장되기에 넘어갔던 슈리아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아버지는 제가 기사로서 활약하는 걸 참 싫어하셨어요. 내가 사내였다면 좋아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 감정은 소설을 보며 머리로 이해했던 것과 사뭇 달랐다.
“전하께서 처음 황궁으로 오셨을 때. 저희는 이걸 기회로 봤답니다.”
슈리아의 떨리는 목소리가 그동안 얼마나 참았는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제게 다른 걸 기대하고 있더군요.”
“…….”
“약속을 받지 못했더라도 경합에는 나가야 했을 거예요.”
그건 소설 속에서도 그랬다.
“그런데 이제는 약속까지 해버렸으니, 피할 방법도 없고.”
“피한다고요?”
“슈리아 크루엘이라는 나 자신으로 살고 싶지, 제국의 황후로서 살고 싶진 않아요.”
슈리아는 웃고 있지만, 어딘가 슬퍼 보였다.
“왠지 팔려 가는 기분이잖아요?”
솔직히 키엘이 벨라 때문에 팔려 가는 거 같단 생각이 더 들었지만….
“게다가 내가 황궁으로 들어가면, 오라버니가 후계자가 될 텐데. 그게 걱정이네요.”
“후안 경과 사이가 좋은 줄 알았는데요.”
“오라버니를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가문을 이끌 사람은 아니라서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던데, 슈리아의 팔은 밖으로 굽나 보다.
“벨라 님은 왜 절 따라 황궁에 가시고 싶으신 대요?”
소설이 제대로 완결되어야 하니까.
그걸 얘기할 순 없으니.
갑자기 시작된 진실의 장이, 벨라의 진심을 건드렸다.
“그냥…. 키엘 옆에 있고 싶어서.”
뜻밖의 말에 슈리아가 잠시 굳은 채 벨라를 바라봤다.
“벨라 님은 전하를 매우 좋아하시나 보네요.”
좋아한다면, 좋아하는 거겠지만.
그저 좋아한다고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기보다는…. 나는 그 애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지금도 일이 산을 이루고,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있는데.
정말 사랑하는 로잔느를 다시 만나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마저 옆에 없다면, 얼마나 안쓰러울지.
‘나 때문에 그 애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행복이 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이 마음이었다.
벨라가 인간계에 오는 바람에, 그의 중요한 설정을 건드렸을 때부터.
‘이 소설의 끝에서는, 키엘이 웃었으면 좋겠어.’
벨라는 수많은 말을 삼키고 슈리아를 마주 봤다.
“그러니까 따라갈게요, 황궁에.”
* * *
황태자비 경합에 대한 소식은 온 가문에 서신으로 전달되었다.
그리고 그건 프실리아 백작가에도 마찬가지였다.
“로잔느 아가씨!”
마이유는 뛰다가 발을 헛디딜 정도로 성급하게 로잔느의 방으로 들어왔다.
늘 철없고 어려 보이던 로잔느는, 창가를 보고 있다가 조용히 마이유를 돌아보았다.
“황궁에서 서신이….”
“알고 있어.”
“아신다고요?”
로잔느는 또 다른 서신을 손에 쥔 채 일어섰다.
“응. 키엘에게서 연락이 왔었어.”
마이유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누구요? 키엘?”
“응.”
마이유는 인상을 잔뜩 쓰며 투덜거렸다.
“그 자식이 왜요?”
로잔느가 백작가로 돌아온 후, 한 번도 그녀를 찾아온 적이 없었다. 키엘은 물론이고 그 쌍둥이들까지.
그렇게 오래 여행을 했는데도 로잔느의 마음조차 알아주지 못하고 제 멋대로인 사람들인데.
“무슨 염치로 아가씨에게 연락한대요?”
“하하. 키엘이 잘못한 건 없잖아. 내가 일방적으로 좋아한 건데, 뭐.”
“아니 그래도…. 잠깐. 설마 아가씨, 아직도 그 녀석 마음에 두고 있는 건 아니죠?”
로잔느는 잠깐 대답을 망설였다.
“아가씨. 황궁에서 서신이 왔어요! 황태자비 경합에 모든 가문의 영애들을 다 초대했다고요.”
“아… 안다니까?”
“그런 녀석은 잊어버리고, 황궁에 가서 황태자나 공략해보자고요!”
로잔느가 난감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마이유. 황태자 전하의 존함 알아?”
마이유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대답했다.
“그야 키엘 헤리언… 엘리시아….”
하지만 어째 모를 불안함에 말끝을 흐렸다.
“설마 아가씨…. 그 키엘이….”
사생아인 황태자의 존재가 제국에 널리 알려지는 건, 성물 여행이 끝난 후였었다.
꽤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어린 시절 납치당했던 황태자가 제국의 모든 성물을 다 모아 귀환했다는 이야기로 둔갑했으니까.
순진했던 로잔느는, 그때 모았던 게 ‘성물’이란 것도 잘 알지 못했었다.
그냥 보물 모아 하루하루를 사는 모험가인 줄 알았지.
“하하…. 나도 안 믿어지는데, 그렇다네?”
* * *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났다.
크루엘가에서 황궁으로 가는 마차는 평소 그들이 쓰는 것과 달리 화려한 장식들이 난무했다.
“이거 누가 봐도 ‘높으신 귀족이 타시네.’ 인데요.”
젠킨스가 혀를 차며 감평했다.
“아주 대놓고 산적들에게 ‘여기 보물 있습니다.’ 광고하는 거 아니에요?”
젠킨스의 비아냥에 벨라가 그의 뒤통수를 한 대 때렸다.
“너 오랜만에 보는 거 같다? 요즘 뭐 하고 지내니?”
“아… 아가씨. 리네양이랑 무전마법을 좀….”
“그거 일주일 전에 최종 실험도 다 했다던데. 그럼 최근 일주일 동안 뭐했니?”
젠킨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잔바르랑 쌍으로 돌아다니던데, 화해해서 살맛 나나 봐.”
“아….”
“마족들은 뽀뽀하면 다 화해하나 봐. 그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이더니.”
“화나셨어요?”
벨라가 젠킨스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어. 너 나름 내 보좌 아니야? 어떻게 필요할 때마다 항상 없냐?”
“제가 아가씨 보좌였어요?”
이제 벨라는 젠킨스의 귀를 잡고 늘어뜨렸다.
“네가 내 보좌 정돈돼야 마족들이 널 무시 안 하지.”
“…….”
“그러니까 똑바로 하라고. 얘들 중 머리 쓰는 애는 너밖에 없으니까.”
그 말에 잔바르의 머리 위에 목마를 타고 있던 이웨르가 손을 들었다.
“아가씨! 저도 머리 쓰는데용!”
벨라도, 젠킨스도 매우 짜게 식은 표정으로 이웨르를 올려다봤다.
“내가 아직 고민 중이야. 너희도 소환할지 말지.”
“푸르는 따라가지롱!”
벨라가 싱긋 웃으며 푸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그럼.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마족이니까 갖고 가야지.”
물건 취급하듯 말했지만, 푸르는 그 마저도 좋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돌아온 마력이 다시 사라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잔바르가 오랜만에 질문다운 질문을 하자, 벨라는 잠시 당황한 채 그를 쳐다봤다.
“너…. 인간계 오더니 정말 똑똑해졌구나.”
잔바르의 얼굴이 빨개졌다.
“사라지진 않을 거야. 마력이 점점 돌아오고 있는 중인 건 확실해.”
어느 순간부터 마력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지만, 회복은 전혀 되지 않았다.
일전에 창문에서 뛰어내려서 삐끗한 발목도 이따금 시렸고.
“성검의 위력이 그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키엘에겐 말하지 마. 미안해할 거니까.”
“무슨 기승전 키엘인지.”
“어쨌든 황궁 근처는 전부 결계가 처져 있으니까, 들어가서 소환할 거야. 다들 제발 사고 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신신당부하고 마차에 올라섰다.
크루엘가에서 출발하는 마차는 총 세 대였다.
가장 앞에는 키엘의 마차. 중간에는 벨라, 마지막은 슈리아의 마차였다.
세 대의 마차 모두 어찌나 화려한지.
게다가 크루엘가의 문양이 떡하니 있었고, 마차 외에도 꽤 많은 호위가 말을 타고 옆을 동행했다.
키엘은 창밖을 보며 덜그럭거리는 마차의 진동에 맞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키엘, 너 지금 벨라 님이랑 같이 안 탔다고 시위하는 거 아니지?”
“… 맞아.”
“공식적으로 우리는 비브르 후작 영토에서 가고 있는 건 알고 있지?”
“중간에서 갈아타도 됐잖아.”
“보는 눈이 얼마나 많은데. 창문도 닫아. 우린 호위 마차라고.”
리오가 창문을 닫자, 키엘이 다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상황이 짜증 나는 건 비단 키엘뿐만이 아니었다.
슈리아가 타고 있는 마차 안에서, 후안은 버럭 화를 내며 항의하고 있었다.
“왜 저 아가씨를 황궁에 데리고 가겠다는 건지 모르겠네.”
그는 슈리아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전하가 저 아가씨에게 얼마나 집착하는지 알면, 절대 그냥 넘어가진 않을 텐데.”
슈리아가 고개를 젓더니 단호하게 눈을 부라렸다.
“오라버니. 그거 아십니까? 제가 오라버니에게 기회를 많이 드린 거.”
기회라는 말에, 후안은 입을 꾹 다문 채 한숨만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저 철없던 방황이었다.
어린 시절 딱 한 번 스쳐본 첫사랑을 잊어보려 무던히도 많은 여자를 만나고 헤어지길 반복했었다.
많은 여자가 크루엘 공작가에 혹해 그의 하룻밤 연인이라도 되어보려고 줄을 섰고.
가문의 수치라 여겨 쫓겨난 게 벌써 몇 해 전이었다.
“돌아오지 말라고 한 거도, 기억하고 계시지요.”
“그건….”
황태자가 검은 머리의 소녀를 크루엘가에 양녀로 들이라고 했다는 소식에 차마 오지 않을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후안은 번뜩이는 슈리아의 눈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미 기회를 줄 만큼 줬다고 생각합니다. 전.”
후안은 슈리아가 얼마나 무서운 여자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그는 굳게 닫힌 창문을 급하게 열었다.
일반적인 길이 아니었다. 산세가 험악한 지형.
데이저 인근에 있는, 중앙에는 커다란 싱크홀이 자리한, 꽤 오래전 산적들의 본거지였다.
“하하. 슈리아,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 내가 곧 가문을 이끌….”
후안은 말 끝을 흐리다 슈리아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하… 하하. 설마, 이렇게 판을 짜놓은 거야?”
한편 벨라는 마차의 벽에 기대어 자고 있는 푸르의 털을 만지작거렸다.
‘잘한 선택이겠지….’
그리고 슈리아의 말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 “벨라 님.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저 대신 황태자비 경합에 나가주세요.”
몇 주 전.
슈리아는 길고 긴 인내의 끝, 키엘이 말했던 대로 ‘벨라가 가장 말랑말랑해질 때’를 기다렸다.
- “벨라가 공녀를 좋아하니, 어떤 부탁을 해도 들어주겠지만. 안되는 건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될 거야.”
그건 이미 결혼에 대해 얘기할 때 느꼈었다.
- “어쨌든 결혼은 안 돼요.”
평소 벨라가 딱 잘라 말한 적은 많지만, 그건 느낌이 달랐었다.
‘절대적’이라는 기준이 존재하는 것처럼.
하지만 벨라가 슈리아에게 부탁했을 때는.
“그러니까 따라갈게요, 황궁에.”
키엘이 말하던 그 ‘말랑함’이 이때라고 생각했었다.
“벨라 님.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어떤 거요?”
“저 대신 황태자비 경합에 나가주세요.”
슈리아가 벨라의 두 손을 꽉 잡았다.
“나도 사실은 그런 삶을 살기 싫어요.”
“하지만….”
“벨라 님이 저 대신 나간다면, 굳이 황태자비가 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음…….”
“나는 이 크루엘가를 오라버니에게 맡기고 싶지도 않고, 내 손으로 이룩하고 싶어.”
슈리아는 이제껏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내 꿈이 다 여기에 있는데.”
서럽고 억울했던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가 벨라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전하의 옆에 있고 싶다면, 차라리 그렇게 가세요. 황태자비를 약속받은 건 슈리아 크루엘이지, 벨라 크루엘이 아니니까.”
벨라는 한참을 생각했다.
지금 여기서 벨라의 결심으로, 슈리아의 인생이 바뀌게 될 텐데.
‘얘도 내 차앤데….’
벨라도 가능하면 슈리아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염원도 있었다.
‘어차피 이 상황에선, 슈리아가 황궁에 안 가는 게 최선이겠지.’
그리고 각 가문은 반드시 모든 영애를 내보내야 할 테고.
‘결국 이 방법밖에 없겠네.’
그리고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 좋아요. 내가 대신 갈게요.”
슈리아의 역할을 대신하는 수밖에.
* * *
슈리아는 승전보를 전하는 기사처럼 당당하게 키엘에게 찾아갔다.
“전하.”
“웃는 걸 보니 성공한 모양이네.”
슈리아는 주먹을 쥐고 키엘의 앞에 슬쩍 내밀었다.
키엘은 자신도 모르게 똑같이 주먹을 쥐고 슈리아의 주먹과 맞닿았다.
“역시 아시네요. 이거 벨라 님께 배운 겁니다.”
키엘은 코웃음을 치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웨르 안 불러도 되겠네.’
“참 오래도 걸렸네요.”
벨라가 마족이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가 썼던 소설을 토대로 슈리아의 환심을 샀고, 슈리아가 원하는 걸 손에 쥐여줬다.
“오라버니 때문에 하마터면 일을 그르칠 뻔했는데,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러게. 자네가 황태자비가 될 거란 건 어디서 들은 거래?”
“누구겠습니까.”
“헤롯 경?”
슈리아는 말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전 전하가 참 좋습니다.”
키엘은 실소를 자아내며 소파에 털썩하고 편히 앉았다.
“다음에 황궁에서 만날 땐 공작이 되어 있겠군.”
당연히 좋겠지.
슈리아 크루엘은 사촌오빠를 견제하고 크루엘가의 공작이 될 테니까.
슈리아에게는 일거양득의 기회였다.
크루엘가 내에서 황태자비가 나올 건 당연한 거고.
“전하. 공과 사는 구분하겠다는 말, 기억하시죠?”
“아직 후안이 필요하다는 거지?”
“네. 그러니까 해할 생각 하지 마세요. 처리해도 제가 처리합니다.”
솔직히 없애고 싶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던지라, 키엘은 소파에 몸을 기대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지.”
키엘은 긴장이 풀렸는지, 실없이 웃음만 나왔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일까.
고양이는 안전하게 포획틀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외척 세력으로서 조금 더 교육량을 늘려도 될까요.”
* * *
다시 현재로 돌아와 벨라는 밖을 보며 한숨을 연신 내쉬었다.
어느덧 크루엘가에서 황궁으로 향하던 세 대의 마차 중 하나가 대열을 이탈했지만, 그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정말 잘한 선택이겠지….’
최근 들어 자주 꾸는 꿈이 떠올랐다.
지난 몇 주간, 슈리아를 대신해서 황태자비 경합을 위한 준비를 거쳤었다.
단순히 귀족 영애들의 가계도나 관계도를 외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놈의 사교였는데.
차라는 차는 질리도록 마시고, 춤이란 춤은 토하도록 연습했다.
이제 우아한 척 하며 ‘호호’ 웃는 건 할 수 있는데.
그놈의 춤은 아무리 해도 영 늘지 않았다.
길고 장식이 많이 달린 드레스를 입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고.
“아닙니다, 아가씨. 오른쪽 왼쪽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왼….”
“…….”
망할 놈의 스텝은 어찌나 어려운지.
“좀 더 쉽게….”
“이게 제일 쉬운 춤입니다.”
그렇게 자존심을 구겨가며 연습하던 중이었었다.
똑똑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춤에서 구제해줄 줄 알았는데.
“벨라, 혹시 시간 괜찮… 춤 연습해요?”
벨라는 머쓱하게 손을 들고 있다 황급히 내렸다.
“잘 되어가요?”
벨라가 시선을 회피하고 대답했다.
“응. 뭐…. 그냥 어느 정도는?”
키엘은 그녀가 몸치인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데이저에서 열렸던 여름축제 때 그 밑천을 다 보여줬으니.
벨라 혼자 반대편으로 가고, 다른 사람의 엉덩이를 손으로 친 적도 있고.
“그럼 나랑 한 곡 추실래요, 레이디?”
그걸 알고 있기에, 벨라는 키엘의 말이 더 얄밉게 들렸다.
마치 도전을 받아들이듯이 키엘의 손을 잡자,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음….’
후안이 할 때는 기분이 매우 나빴었는데.
키엘이라 그런지, 어떤 거부감도 들지 않았다.
거부감이 들지 않는 걸 넘어서서.
맞닿은 손등이 간지러웠다.
분위기를 보고 교사가 바로 음악을 켜자 키엘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이건 기본 곡인데.”
“내가 아직 기본도 못 떼서 하는 건 아니야.”
“과연.”
키엘은 입 맞춘 손을 자연스레 돌려 잡고, 벨라의 허리에 손을 짚었다.
‘아….’
간지럼이 손등을 타고 그녀의 허리에 머물렀다.
쿵. 쿵.
심장 소리만큼 빠른 템포의 음악이 들리고, 키엘은 벨라의 허리를 자신에게 당기며 확 끌어안았다.
그리고 시작과 동시에 벨라는 왼발을 앞으로 내밀며 키엘의 발을 밟았다.
“아가씨… 오른….”
교사는 말을 하려다 키엘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벨라는 발을 밟았다는 사실조차 인지할 수 없었다.
함께 말을 타며 뒤에서 그녀를 안았을 때나.
춤을 춘다고 그녀를 안을 때나.
어릴 때 늘 안아주던 것과 다른 묘한 긴장감이 분명 있었다.
“긴장 풀어요.”
“기… 김장 안 했는데.”
김장이 아니라 긴장이다. 이미 말에서부터 긴장했다고 티를 냈다.
“그럼 어느 발을 써야 하는지 말하면서 움직여봐요. 그럼 금방 익혀질 거야.”
“…응.”
하나도 기억 안 나지만, 벨라는 입으로 소리 내며 키엘을 조심스레 올려봤다.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이 많았었다.
그때마다 잘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왜 조금 다른 기분이 드는 것인지.
“…오른발. 왼발….”
이게 다 슈리아의 질문 때문이다.
이상형이 뭔지 물어보는 바람에.
“왼발….”
아니, 전에 마차 바퀴 부러졌을 때 말을 같이 타서 그런 거야.
“외른발….”
“외른발이 뭐야.”
아니다.
이 모든 건 키엘이 이렇게 예쁘게 웃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이 미소가 마법을 거는 게 분명했다.
“왜 그래요?”
“그, 그… 나 또 틀린 거 같은데.”
그래, 자꾸 틀리니까 부끄러워서 그런 거야.
“벨라, 힘 빼고 그냥 내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와요.”
그리고 그는 그녀의 허리를 더 세게 잡고 뱅글뱅글 돌았다.
내내 불편하게만 느껴졌던 드레스는 그제야 제구실을 하듯 춤사위를 더 아름답게 만들었다.
“더 붙어요.”
키엘의 옷에 붙은 장신구가 살짝 파인 살갗에 닿자 벨라는 그를 급히 밀쳐냈다.
“아.”
그는 오묘한 미소로 벨라를 바라봤다.
“왜요?”
“추, 춤출 때 너무 이렇게 붙으면 안 돼.”
“왜?”
“사람들이 괜히 오해할 수도 있는 거고.”
붙지 말라는데도, 키엘은 은근슬쩍 두 손으로 벨라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무슨 오해?”
벨라는 3초 정도 말하지 못하고 숨만 들이마셨다.
“음…. 너도 어른이니까. 남녀 사이에 그런 오해가 생길 수도 있고. 하여튼 너무 붙으면….”
그때 키엘은 물러서지 않고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작게 속삭였다.
“설레요?”
“아…니? 아니!”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벨라는 큰소리로 반박했다.
“당연히 나야 오해 같은 거 안 하지! 난 괜찮아!”
어찌나 우렁찬지. 교사가 틀었던 음악보다 컸다.
“그래요.”
“나… 나는 어릴 때 많이 안아줬으니 괜찮지. 혹시나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춤출 때 이렇게 붙을까 봐.”
“…알았어요.”
“노파심에 하는 말이라고.”
“알겠어.”
“앞으로 영애들 많이 만날 텐데 다들 오해하면 어떡해.”
키엘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벨라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알았다고.”
벨라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넌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막 만져대고 그래….”
“…….”
이제껏 아무렇지 않게 키엘을 만지작거렸던 건 정말 단 하나도 기억하지 않았다.
* * *
다시 현재로 돌아와 황궁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벨라는 자신의 쇄골을 쓱쓱 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잘한 선택이겠지? 내가 대신 경합에 나가는 거….’
그렇게 춤을 췄던 그날 이후로 마력이 조금씩 돌아왔다.
마치 그날이 어떤 방아쇠를 당긴 것 마냥.
이상한 꿈도 꾸면서.
‘왜 그런 꿈을 자꾸 꿔서는….’
제 손조차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키엘이 빛으로 둘러싼 채 천천히 나타나 벨라에게 입을 맞추는 꿈이었다.
벨라는 자신의 입술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꿈이지만 그 입술이 느끼는 바는 너무 생생했다.
- “나를 가져요.”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러웠고.
그가 내쉬는 숨에 그리웠던 햇살의 향기가 가득했었다.
얼마나 가지고 싶었는지.
꿈에서 벨라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햇빛이 없기에 이미 죽어버린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선인장에, 꽃이 피었나 보다.
꿈에서 두 입술이 떨어지는 짧은 순간마다 벨라는 숨을 뱉으며 말했었다.
- “사랑해.”
그때 키엘은 울고 있었다.
목이 메는 지 말을 하려다가, 다시금 그의 숨을 그녀의 입술에 거칠게 밀어 넣었었다.
아무리 표현해도, 부족할 정도로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뛰었는데.
“아가씨.”
“…어?”
갑자기 맞은 편에 있던 젠킨스가 부르자 벨라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내가 진짜 쓰레기다, 쓰레기. 그 애를 두고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지금!’
꿈은 현실을 반영한다던데.
이 달콤한 독 같은 마음이 기어이 숨은 욕정을 자극이라도 하는 건지.
“무슨 생각 하셨어요?”
“왜, 왜? 뭐? 뭐!”
“방금 이웨르씨보다 더 변태 같았어요.”
벨라가 젠킨스의 무릎을 발로 꽝 하고 걷어찼다.
“아니거든! 아니라고! 아니라니까!”
벨라가 젠킨스의 무릎을 걷어차고, 응징하는 동안.
키엘은 사소한 동선까지도 전부 신경 써서 중간에서 황궁의 마차로 갈아탔다.
비브르 후작의 영토에서 이미 출발한 거로 보고를 올렸었다.
“진짜 고생도 사서 한다.”
리네는 키엘이 타고 있던 마차를 쭉 타고 벨라의 마차와 함께 갈 예정이었고, 리오는 키엘과 함께 동행했다.
“그런데 마차 하나는 어디로 간 거래? 슈리아 공녀님은?”
“알려고 하지 마. 그러려니 해.”
리오는 아침부터 까칠하게 구는 키엘이 영 마음에 안 들었다.
그가 계획한 대로 잘되고 있는 거 같은데 왜 저렇게 예민한 건지.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었다.
황궁에 들어가게 되면, 키엘과 벨라가 만날 일은 지금보다 더 부족할 게 뻔했다.
조금 더 자주 있고 싶었는데.
‘요즘 따라 은근슬쩍 피하는 거 같단 말이야.’
게다가 벨라의 심장이 주는 감정은 천둥처럼 강렬했다가 조금만 지나면 사라지곤 했다.
지금처럼.
‘벨라…. 무슨 생각 하고 있어?’
혼자 야릇하게 설렜다가, 또 한없이 슬프다가.
지금 마주 보고 있는 게 리오가 아니라 벨라였다면.
조금 더 벨라의 마음 앞에 거울을 갖다 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리오는 한참 키엘을 보다가, 그나마 희망적인 얘기를 건넸다.
“그래도 별채에 가면 만날 수 있잖아.”
“하아…. 거기에 온 영애들이 다 모이는 데 내가 거길 어떻게 가?”
그랬다.
이번 황태자비 경합은 모든 가문의 영애들을 황궁으로 불러들이는 것.
그러다 보니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것부터 문제였었다.
보통 귀족들이 여행할 때에는 인근 귀족의 저택에 방문해서 묵어가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그 많은 영애를 각 가문이 매일같이 수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기에 황궁에서 소유한 모든 부동산이 영애들을 위해 그 문을 열어 그들을 맞이했다.
“하긴…. 네가 가긴 힘들겠지.”
“별채로 가는 것부터 소란스럽겠지. 마차에 내려서 뒷문으로 걸어 들어갈 거야.”
키엘은 걸을 때마다 사람들이 쳐다볼 걸 상상하면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 벨라는 키엘이 소름 돋을 상상을 구현하고 있었다.
“아가씨. 신분을 명확히 밝히셔야 합니다.”
“제가… 벨라 크루엘 맞다니까요….”
이세계에서 와서 크루엘가의 양녀로 들어갔다는 그 소녀.
“크루엘가는 전부 은발입니다. 어디서 감히!”
가 아니라 철통같은 경비를 뚫으려는 무뢰한으로 몰리고 있었다.
“… 리네, 어떻게 해야 해?”
게다가 황태자비에는 슈리아 크루엘 대신 벨라 크루엘이 간다고 아직 보고 올리지 않았다.
혹여나 후안이 중간에 어떤 방해를 할지 몰라서.
“이봐요. 나 몰라요? 예비 대마법사 리네 프로하!”
리네는 ‘예비’란 단어는 조금 작게 붙여 말했다.
“키엘 전하의 호위가 어떻게 크루엘가에 붙어 있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것도 어찌 보면 맞는 말이긴 한데.
“크루엘가의 마차가 습격당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네놈들이…!”
크루엘가의 마차가 이탈해서 데이저 인근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이미 경비들에게 일파만파로 퍼졌었다.
“아니, 우리 푸르를 보고도 못 믿는단 말이야? 내가 그 동물왕국에서 왔다는 벨라 크루엘이라니까.”
“어디서 인형 탈을 쓰고 와서 행패야!”
유명하다면서. 그런데 못 믿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난 진짜 인형인데!”
“너 곰이야.”
도저히 들여보내 줄 생각을 않자, 벨라는 일단 후퇴하기로 했다.
“기다렸다가 슈리아 공녀 오면 같이 들어오던가….”
“안 돼요, 벨라 님. 지금 여기서 물러났다 다시 오면 얼마나 쪽팔리는데.”
리네는 뒷걸음질 치려는 벨라를 붙잡고, 목을 가다듬었다.
“다들 이렇게 무례하게 행동하다 뒷감당은 되는 모양이지?”
“…….”
“경고하는데. 지금 문 열면 이 소란에 대해서 죄는 묻지 않겠다. 문 열어.”
키엘의 호위 짬밥이 얼만데. 재수 없고 권위 있게 흉내 내는 건 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리네도 몰랐던 것이 있는데.
“오늘 너같이 말한 거지들이 몇 명이나 되는 줄 아느냐?”
이 큰 행렬에 한몫 두둑이 챙기려는 자들이나, 평소 귀족에게 앙심을 품은 자들이 오전부터 줄을 이어 잡혔었다는 것.
그리고 꽤 많은 창과 검의 끝이 벨라 일행을 둘러쌌다.
“아니면 벨라 님, 우리 조금만 버텨볼까요. 곧 있으면 키엘이 도착할 거 같은데.”
“…….”
벨라가 싸늘하게 리네를 노려봤다.
그러게 조금 전에 그녀 말대로 기다리지, 괜히 화만 돋워서 이제 경비들은 그들을 보내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체포해.”
경비들이 한 발짝 다가오자, 벨라가 경고했다.
“김푸르. 이거 잡아먹는 거….”
하지만 벨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창 하나가 벨라의 목 가까이 들어왔고, 푸르가 그 앞을 뛰었다.
“…아니야.”
오래전에 여행 다닐 때마다 혹 벨라를 해치는 놈들이 있으면 제일 먼저 신나서 잡아먹고는 ‘공주님을 지켰다.’고 했는데.
“공주님은 내가 지켰다! 내가 왕자님이야!”
벨라가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쟤 또 오바하는 거 봐…. 쪽팔려 진짜.”
어차피 이들이 정말로 해치려고 하는 게 아닌 걸 아는데.
한 명씩 가까이 올수록 푸르는 더 신이 나서 으르렁거리며 경비의 목을 물었다.
“푸르! 가만히 안 있어? 왜 자꾸 사태를 크게 만들어.”
하지만 이미 사태는 커졌다.
경비 중 하나가 그들을 제압하려다 젠킨스의 팔을 찔렀고.
얼떨결에 리네가 마법을 쓰는 바람에 경비의 다리에 불이 붙었다.
푸르는 이게 마치 ‘시작’ 신호라도 된 듯 주위의 경비의 목이나 다리를 물어뜯었다.
“으아악!”
“전부 동작 그만!”
그 말에 마족과 리네는 멈췄지만, 경비들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무기는 어느새 땅바닥에 버려져 있었고, 허공을 볼품없이 가르다가 휘청휘청 쓰러졌다.
“푸르. 내가 오냐오냐해주니까 내 말도 끝까지 안 듣고 자꾸 독단 행동할래?”
벨라는 입 주위의 털이 빨갛게 물든 푸르의 목덜미를 잡고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봐요들. 여기 인형 아니고 진짜 곰이야. 곰.”
사태를 원만하게 수습하려고 벨라가 주위를 둘러봤다.
“슈리아 크루엘 공녀든, 키엘 황태자 전하든. 내 신분을 증명해 줄….”
벨라는 말을 하다 천천히 침을 꿀꺽 삼켰다.
‘아….’
꽤 많은 사람이 다쳐서 쓰러져 있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참기 힘든 향기가 벨라의 코끝을 찔렀다.
회복이 느리더라도, 생활하는 데 지장이 없어 별 신경을 쓰진 않았다.
그래도 그 몸은 회복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게 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아… 이 냄새.’
바로 인간의 피.
마계에서 인간들을 잡아놓고 장난은 쳤지만, 먹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정말 사람의 탈만 쓴 짐승이 될 것 같아서.
정신이 혼미한 순간에도, 벨라는 푸르에게 복종 서약까지 만들어서 그녀를 말리게 했었다.
경비들은 색색의 옷들을 입고 다 같이 붉은 피를 흘렸다.
어떤 이는 옷을 벗고 바로 지혈을 하고 있었다.
살갗에 흐르는 피는, 흰 쌀밥에 김치처럼 보였다.
꽤 오래전 이웨르가 성검에 찔렸을 때, 인간을 먹고 금방 회복되었던 게 떠올랐다.
말은 않았지만, 등 뒤의 상처가 아물 생각을 안 했으니.
‘…먹을까.’
실로 이상한 경험이었다.
마족들이 단 하나에 빠지는 게 무엇인지, 공감할 정도로.
벨라의 눈에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피 흘리는 사람만 보였다.
그 공간에 오직 그들과 벨라. 단 두 존재만 있는 듯이.
‘먹으라고 차려준 건 먹어야지.’
그 무렵, 키엘은 마차에서 내려 뒷문 쪽으로 걸어가려고 하다 걸음을 멈춰 섰다.
“…벨란가?”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일행이었다.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그녀와 그 외 두 명과 곰.
“곰 보니 벨라 님 일행이네.”
그리고 별채 안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밖을 보고 있는 게, 동물왕국에서 왔다는 벨라를 구경하기 위한 게 분명했다.
“키엘, 지금 가서 더 이목을 끌면 어쩌려고.”
“나도 알아.”
그래서 벨라가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만 이라도 지켜보려고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흐뭇하게 바라봤다.
언젠가 저 사람과 손을 잡고 당당히 어디든 갈 수 있는 날을 상상하며.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키엘은 벌떡 일어서서 정문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푸르가 경비를 공격한 순간부터, 후에 뭘 하든 사태가 수습될 거 같지 않았다.
‘무슨 일이래?‘
그가 정문에 도착하자, 경비들은 황태자를 알아보고 횡설수설하며 변명했다.
“치, 침입자로 판단되어 제압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보고가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벨라.”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만, 어떤 미동도 하지 않고 시선은 단 한 군데로 고정했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듯하지만, 조금 멍한 눈빛.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마음이 전해져온다.
그리고 경비가 잡고 있는 푸르의 목에서 복종 서약의 띠가 반짝이는 걸 보았다.
“……!”
벨라가 인간을 먹고 싶어 할 때마다 말려야 하는 그 서약의 띠.
그녀가 아주 미세하게 입맛을 다시는 걸 본 순간, 키엘은 달려가 손으로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
“키엘 전하!”
경비들은 키엘의 행동에 놀라 어쩔 줄 몰랐다.
“다 물러서.”
그는 벨라의 어깨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린 채로 귀에 속삭였다.
벨라의 눈앞이 캄캄해지고, 익숙한 향이 요동치는 피 냄새를 덮었다.
너무 사랑하는 사람의 그 향기가.
“벨라.”
알람을 듣고 잠에서 깨는 것처럼.
그녀의 불타오르듯 새빨갛게 빛나던 눈이 점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저 그녀의 이름인데. 어째서 이토록 애절하게 들리는 건지.
벨라는 천천히 손을 들어 눈 앞을 가리는 이의 손목을 잡았다.
천천히.
그의 손을 내릴수록, 한밤을 밀어내는 여명처럼 세상이 밝아온다.
반짝거리는 호박색의 눈동자. 저물어가는 해를 등지고 붉은 조명을 받은 머리카락이.
맨눈으로 보았다가 실명이라도 할 듯 눈부시게 빛이 난다.
“괜찮아요?”
어째서 이 소설의 남자주인공은 그저 가만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항상 중심을 잡아 주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