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가 죽여야 할 최종 악녀가 저랍니다-13화 (13/25)

13

키엘은 벨라의 어떤 면이든 다 좋았지만, 가끔 속도 없이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건 싫었다.

그를 생각했다면서, 오지도 않고.

와달라고 했는데 웃기나 해버리고.

귀엽다며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도 얄미웠다.

“귀여우면 뽀뽀해 봐.”

“…뭐?”

“귀여워할 거면 사용료 내.”

“키엘….”

“못 하겠으면 귀여워하지 마요.”

벨라가 당황한 듯 키엘을 쳐다보자, 키엘은 벨라의 턱 끝을 잡은 손을 놓았다.

‘이제 안 놀리겠지.’

어릴 때부터 이런 취급이 정말 싫었었다.

남자로 보이고 싶은데, 왜 자꾸 그녀의 품 안에 있는 병아리 취급을 하는 건지.

하지만 벨라가 당황한 건 다른 이유였다.

‘내가 못 할 줄 아나?‘

벨라는 두 손으로 키엘의 가슴을 잡고 까치발을 들었다.

쪽.

하는 소리가 벨라의 방을 지배하고, 모든 서러움이 빛을 본 그림자처럼 도망간다.

이제 모든 생각의 중심은 벨라의 입술이 맞닿은 볼을 중점으로 굴러간다.

심장이 마치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듯 볼이 화끈거렸다.

“자, 이제 뽀뽀했으니까 귀엽다 해도 되지?”

벨라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키엘의 볼을 쿡쿡 찔렀다.

“오늘 하루 동안 귀엽다고 해야지.”

키엘은 벨라가 그를 귀여워하는 게 싫지만 ‘하루 동안’이란 단어는 마음에 들었다.

“그럼 오늘 계속 나랑 있을 거예요?”

“아니. 나 바쁜데.”

키엘이 싸늘하게 벨라를 바라봤다.

“그럼 하루 동안 안 해. 한 번만 해.”

“열 번.”

“한 번.”

“다섯 번.”

“한 번.”

“푸르도 뽀뽀해주면 하루 동안 입 다물고 있는데!”

키엘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면서 벨라의 볼을 꼬집었다.

“지금 푸르랑 나랑 같은 취급하는 거예요?”

벨라가 옹알거리듯이 대답했다.

“아니이. 그엄 세벙.”

“좋아. 세 번.”

벨라가 키엘의 손을 뿌리치면서 투덜거렸다.

“흥. 내 뽀뽀가 얼마나 비싼데.”

“내 볼도 비싸.”

벨라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그래서 삐친 건 풀렸어?”

“…응.”

조금 전까지만 해도 꾹꾹 담긴 서러움이 폭발할 거 같았는데.

그저 벨라와 함께 있으면 그랬다는 것도 가마득히 먼 옛날이 되어버린다.

“점심 먹었어요? 오랜만에 같이 먹을까요?”

* * *

평소 점심은 다들 따로 먹는 편이었다.

크루엘가 사람들은 보통 각자의 방에서 챙겨 먹고. 키엘 역시, 크루엘가에 눈치 주기 싫다며 식사는 따로 하고 있었다.

벨라는 보통 마족들이랑 같이 식사하곤 했다.

“어머, 도련님이 웬일로 식당에 내려오셨댕?”

이웨르는 음흉한 눈빛으로 키엘을 쳐다봤다.

역시 아까 잔소리한 성과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것도 아가씨라앙?”

“이웨르. 너 지금 머리 벗겨진 변태 아저씨 같아.”

“…쳇.”

쌍둥이들까지 내려오자 식당엔 꽤 사람이 북적였다.

모두 자리에 앉았는데도 뭔가 이상했다.

“젠킨스랑 잔바르는 또 없어?”

“밖에 나가서 먹겠대용!”

“걔네 좀 수상해.”

벨라의 말에 전부 놀란 듯이 그녀를 쳐다봤다. 드디어 그 둘의 관계를 알아챈 걸까.

“나가서 인간 사냥하는 거 아냐?”

그리고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두 시시한 듯 고개를 돌렸다.

쌍둥이들도 이제 그 분위기에 적응했는지 고개를 저었다.

“저분은 후안 크루엘이 수작 부려도 모를 거 같다.”

리오는 키엘보고 안심하라는 듯 귓속말했다.

그리고 양반은 못 되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후안 크루엘이 여유로운 웃음으로 나타났다.

“아가씨, 또 만나네요. 하루에 3번을 우연히 만나면 인연이라는데.”

“아… 은갈….”

그는 어느새 옷을 또 갈아입었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10년 전 여름 축제처럼 하얗게 입고 나타났다.

벨라는 ‘은갈치’라고 말하려다 입을 꾹 다물고 그의 말에 대꾸했다.

“오늘 두 번째 보는 건데요.”

“하하. 한 번만 더 만나면 인연인 거죠.”

벨라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도 하루에 몇 번씩 마족들과 마주치는데.

그걸 다 인연이라고 하기 싫었다.

“이 좁은 공간에 여러 번 부딪히는 거야 당연한데….”

후안은 벨라의 말을 들으면서 그녀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거긴 푸르자리인데.

그때 이웨르가 새로 등장한 남자를 보더니 입맛을 다셨다.

“어머, 이 사람은 누구예용?”

“여기는 건드리지 마.”

벨라는 단도직입적으로 이웨르에게 경고했다.

건드릴 사람과 건드리면 안 될 사람이 따로 있으니까.

하지만 후안은 벨라가 자신을 유혹하려던 이웨르를 막아서자, 마치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면서 키엘에게 마치 승리의 미소를 보였는데.

‘…후안 경. 진짜 착각하나 보네.’

이웨르가 몽마라는 걸 얘기할 수도 없으니, 키엘은 그저 무시했다.

“기억하시죠? 10년 전에. 데이저의 여름 축제에서 만난 거.”

“네. 그때랑 똑같은 옷이네요.”

“옷까지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이네요.”

벨라는 후안이 참 신기했다.

어쩜 이리 은갈치 같은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을까.

벨라가 곁눈질로 키엘을 보았다.

키엘도 비슷하게 흰 정장과 금박 장식이 달린 옷을 입고 있었지만 느낌이 달랐다.

햇빛이 가득한 밀밭을 연상시키는 연한 금발에 보석보다 더 반짝거리는 호박색 눈.

컵을 드는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과 물을 한 모금 마실 때 선 분홍빛 입술. 그리고 살짝 내려다보는 길고 긴 속눈썹 위로 빛이 반사되었다.

‘넌 뭘 해도 화보같이 있구나….’

알고는 있었지만, 은갈치와 비교해보니 확실히 깨달았다.

키엘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생겼다.

여전히 소년처럼 예쁘장한데, 그렇다고 여리여리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마차가 뒤집어졌을 때 느꼈던 단단한 가슴이며.

상처를 치료하려고 봤을 때 잡혀 있던 근육이며.

조금 전 귀엽다고 놀렸던 키엘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벨라가 아무 말이 없자 후안이 다시 말을 걸었다.

“그 여름 축제는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음…. 저도요.”

벨라는 그때를 떠올리며 싱긋 웃었다.

‘그때도 키엘 진짜 귀여웠는데. 종일 삐쳐서.’

멋있는 거 할거라더니, 어느새 저렇게 멋있어졌는지.

“그때 아가씨는….”

“세상에, 이게 뭐야.”

멋있는 키엘을 보다 시종들이 맛있는 음식이 눈앞에 놓자 벨라는 포크와 나이프부터 손에 들었다.

“아가씨는….”

후안이 다시 말을 걸려고 할 때, 이웨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아가씨! 저랑 밥 먹고 쇼핑 갈래용?”

“아니. 나 할 일 많아.”

“아가씨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예용!”

“내 얼굴 좀 안 봐도 되잖아. 나 좀 그만 놓아주면 안 되겠니.”

“잔바르 님도 투덜거리잖아용.”

이웨르는 목을 가다듬고 가슴을 내밀며 잔바르 흉내를 냈다.

“동물왕국 공주님이 공부하는 건 내 평생 살면서 처음 봤다! 라면서.”

그 말에 리네가 재밌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 똑같아. 여기 시종들도 전부 저 말투 알걸요?”

벨라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싱긋 웃었다.

거지 같은 소문을 낸 게 그 새끼였네.

“어머, 잔바르는 집에 오면 꼭 나한테 오라고 해줘.”

표범 형태의 잔바르의 가죽을 벗기고 코트를 만들어볼까.

그때 후안이 벨라를 지그시 쳐다보며 웃었다.

“동물왕국의 공주님이라니. 귀여워서 어울리네요.”

그 귀엽다는 공주님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지 알까.

“동물왕국은 어떤 곳인가요?”

벨라는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마계를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이런 아름다운 공주님이 사시는 곳이면 환상적인 곳이겠네요.”

그리고 후안의 말에 대답한 건 벨라가 아니라 이웨르였다.

“완전 환상적이죵.”

환장할 곳이지.

후안은 계속 이웨르가 끼어들자 질문을 다시 바꿨다.

“아가씨는 황궁에 가보신 적 있으세요?”

“……아뇨.”

“아무래도 전하께서 계신 곳이니까….”

후안이 말을 이어가지만, 벨라는 별 대꾸도 없이 소고기를 잘게 자르고 있었다.

‘밥 먹으러 왔으면 밥이나 먹지….’

그러면서 무의식적으로 저택에서의 습관처럼 키엘의 접시 위에 자른 고기를 올렸다.

후안은 그 모습을 보면서 묘한 분위기를 읽었다.

‘흐음….’

처음 여름 축제 때 만난 이후로, 꼭 다시 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안 넘어온 적은 없었기에 그는 방해물부터 없애야겠다는 생각으로 말을 건넸다.

“그나저나 아가씨는….”

후안은 몰랐다. 키엘이 그간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조금이라도 설레려고 할 때마다, 그들의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도련님 바아~보!”

눈치 없는 거로 세상에서 제일가는 푸르가 짜잔 하고 등장했다.

“나는 옷장 안에 있었는데! 바아~보!”

벨라는 푸르의 말을 곰곰이 듣다 키엘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야?”

“자꾸 놀아달라고 하길래, 숨바꼭질했어요.”

그리고 안 찾았다. 누가 바보라는 건지.

“뭐? 푸르. 너 또 키엘한테 놀아달라고 한 거야? 내가 방해하지 말라고 했잖아.”

하지만 푸르는 벨라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후안을 노려봤다.

“거기 내 자린데!”

잠자코 눈치를 보고 있던 후안은 적잖이 당황했다.

여름 축제 때 키엘이 ‘우리 집에 곰 있어.’ 할 때만 해도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 진… 진짜 곰이네요.”

“비켜! 아가씨 옆은 내 자리야!”

벨라가 푸르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어이. 내가 키엘 방해하지 마라고 했어, 안 했어?”

“이웨르도 맨날 도련님이랑 노는데! 왜 난 안 돼요?”

“뭐야?”

벨라가 훽 돌아보자 이웨르는 의자 위에서 녹아내리는 듯 스르르 미끄러져 바닥으로 앉았다.

“이웨르 퇴장….”

방해될 줄 알았던 잔바르조차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는데 왜 너희 둘이!

마음 같아서는 당장 마계로 가는 소환진을 열고 둘을 집어넣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마력이 돌아오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등의 상처도 회복되지 않았고.

“비키라고! 내 자리야!”

저 눈치 없는 푸르는 벨라가 얼마나 화 났는지도 모른 채 계속 후안에게 으르렁거렸다.

후안은 귀여운 곰 인형이 화내는 걸 보다가 문득 그녀의 목에 둘린 익숙한 손수건이 보였다.

“……. 혹시 저 손수건, 그때 그 손수건입니까?”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던 벨라가 푸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 그거….”

‘이 사람 거였지….’

푸르가 꽤나 집착하던데.

‘돌려줘야 하나?‘

벨라는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 곰한테서 뺏으려면 뺏을 수야 있겠지만 시끄럽게 울 텐데.

“제게는 꽤 소중한 물건이었는데. 곰인형에게 둘러서 간직하고 계셨군요. 역시 귀여우시네요.”

“하하…. 돌려…드려야겠죠?”

그때 후안이 벨라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니면 손수건 대신 아가씨의 시간을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 순간 키엘이 그를 노려보는 걸 알았지만, 후안은 그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벨라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순간 정적이 흘렀다.

후안이 벨라에게 말을 걸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그 관계를 지켜보던 리오가 침을 꿀꺽 삼켰다.

‘키엘 많이 화난 거 같은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표정이지만, 오래 봐온 리오가 보기엔 아니었다.

마족들은 저택에서 지냈던 귀여운 키엘이 더 익숙한 모양이겠지만.

그들에게는 정통성을 운운하는 귀족들을 상대로 살아남은 고귀한 황태자였다.

저 잘난 머리로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의 약점을 모두 잡아 제 발밑으로 굴복시킨 사람.

“후안 경. 손 떼.”

그래도 여태껏 이성을 지키며 발톱을 숨겨왔는데, 살벌한 분위기가 식당 안을 에워쌌다.

“하! 누가 보면 제가 해코지라도 한 줄 알겠습니다.”

후안은 여유 있게 벨라의 손을 놓았다.

“어찌 되었든, 귀여운 아가씨의 시간을 빌릴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괜찮다고 말 안 했다. 벨라가 귀엽지도 않았고.

벨라는 웃으면서 일어섰다.

“그래요? 제가 많이 바빠서 시간 낼 수가 없을 거 같은데.”

그리고 눈앞의 푸르에게 다가가 목에 있는 손수건을 자연스럽게 벗겼다.

“이거 돌려 드릴게요.”

“…아가씨?”

푸르는 후안이 벨라의 옆자리에 모자라 손수건까지 가져가려고 하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거 푸르건데!”

“원래 주인 여기 있어.”

“안 돼요오…. 도련님이 준 건데!”

“그럼 키엘 보고 하나 더 달라고 해.”

“안 돼요오오!”

푸르가 벨라의 팔에 매달리며 울먹였다.

“안 돼애! 안 돼애….”

그때 키엘이 일어서서 푸르의 등을 쓰다듬었다.

“푸르, 내가 준 거라서 안 되는 거야?”

푸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키엘은 가슴에 꽂아두었던 손수건을 꺼내 푸르에게 주었다.

“자, 이건 진짜 내 거니까 푸르 줄게.”

“힝…. 안 되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푸르는 새로운 손수건을 받아 주머니에 넣는 척했다.

맨날 벗고 다니니 주머니는 없으니까 결국 목에 다시 에둘렀다.

“이제 됐지? 우리 곰, 착하다.”

“착한 거 싫은데….”

푸르가 말대꾸를 하다가 갑자기 점점 울먹거리더니 키엘이 준 손수건을 내동댕이쳤다.

“여기엔 없어!”

“야! 이게 무슨 버르장머리야!”

“흑…. 여기엔 없어요….”

“뭐가 없는데.”

푸르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엉엉…. 도련님 냄새랑… 아가씨 냄새가 없어요….”

푸르는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듯 울먹거리면서 말을 이어갔다.

“푸르는 맨날 혼자 있어서….”

“…….”

“손수건 갖고 있으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둘이랑 맨날 같이 있는 거 같았는데.”

그 말에 모두 생각을 멈췄다.

“엉엉…. 이제 푸르는 혼자야…. 엉엉….”

그리움을 나름 그 손수건으로 해결해서 그렇게 집착했던 건지.

그 마음은 기특했다.

하지만 벨라는 이내 인상을 팍 찡그리며 입꼬리를 들썩였다.

“잠깐만. 나랑 키엘이 이걸 쓴 적이 없는데 어떻게 냄새가 남을 수 있어?”

벨라가 빼앗은 손수건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냄새를 맡았다.

이게 무슨 구질구질한 냄새람.

푸르는 눈물을 짧은 손으로 쓱쓱 닦고 말했다.

“옛날에 도련님 아플 때 땀 닦고, 아가씨 잘 때도 땀 닦아서 모았어요.”

그 말에 푸르의 등을 쓰다듬던 키엘이 동작을 멈췄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인데.

“너… 설마 이거 한 번도 안 빨았어?”

“네! 그때부터 모았어요!”

모두 말이 없었다. 후안은 잠자코 듣고 있다가 싱긋 웃었다.

“아가씨는 언제 시간이 괜찮은가요?”

이 더러운 걸 가져가라고 할 수도 없고. 벨라가 난감하게 웃었다.

“저 진짜 바쁜데.”

“이제 한 식구인데, 친해질 기회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정이 끝나시면, 찾아뵙겠습니다.”

후안은 일어서서 벨라를 보더니 능글맞게 한쪽 눈썹을 올렸다.

“전 밤에 더 활기차거든요.”

그리고 유유히 식당 밖을 나갔다.

후안이 나가고, 벨라는 품에서 향수를 꺼내 손수건에 칙 하고 뿌렸다.

“앗!”

“이 더러운 변태 곰 같으니라고.”

“힝….”

푸르가 울려고 하자 벨라는 더 무서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

“김푸르. 입 다물어.”

단호하게 말하는 벨라와 다르게, 키엘은 조심스레 푸르의 등에 손을 올렸다.

“그런데 푸르. 이제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볼 수 있으니까 손수건은 없어도 되지 않을까?”

“푸르는 맨날 혼자 잔단 말이에요….”

“넌 200년을 살았는데 혼자 좀 자면 어때!”

“옛날엔 맨날 같이 잤는데….”

“뭘 맨날 이야, 손에 꼽거든?”

푸르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손으로 슥슥 비볐다.

“푸르는 맨날 혼자야.”

“…하아.”

벨라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한 달에 한 번은 같이 잘게. 그럼 됐지?”

푸르가 벨라를 빤히 보더니 물었다.

“도련님도요?”

“뭐, 키엘이 괜찮다고 하면?”

키엘은 번져나가는 미소를 막을 수가 없었다.

마다할 리가.

“응. 괜찮아요.”

푸르가 방해도 세계 제일이고, 조력도 세계 제일인 듯 보였다.

* * *

모두 식사 시간에 후안이 벨라에게 얼마나 수작을 부렸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 모두 벨라는 절대 모를 거라 단언했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 다르게 벨라는 후안의 설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한테 수작 부리는 거 같단 말이지.’

그렇지 않다면 좋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키엘에게 물어봐야 어차피 ‘벨라가 하고 싶은 대로 해요.’라고 할 게 뻔했고.

그녀도 이제 크루엘가의 일원인 만큼, 이런 문제는 현재 피후견인인 슈리아와 상의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슈리아 공녀님. 물어볼 게 있는데요….”

벨라는 슈리아가 당연히 후안을 싫어할 거라 생각했다.

여자만 밝히는 데다가, 쓸모없는 놈이라고 생각할 줄 알았는데.

“백부께서 일찍이 돌아가셔서 그런지, 솔직히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의외로 슈리아는 후안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소문이 안 좋긴 하지만 제겐 좋은 오라버니랍니다.”

“…그렇군요.”

“여자 많이 만나는 것도 사실이긴 한데, 보기보다 순정파랍니다. 아직도 첫사랑을 잊지 못한 거 같기도 하고.”

소설에는 그렇게 자세히 안 나오니 몰랐다.

“공녀께선 후안 경과 많이 친한가요?”

“형제가 없어서 그런지, 오라버니가 형제 같거든요. 어릴 적에는 같이 거리 공연도 해보곤 했습니다. 오라버니가 피아노를 잘 치셔서요.”

“공녀도 공연했다고요?”

“바이올린을 조금….”

“세상에…. 너무 멋있는 거 아니에요?”

어쩜 이리 알면 알수록 심쿵 포인트가 많은지. 벨라가 눈을 반짝이자 슈리아가 얼굴을 붉혔다.

“그나저나 오라버니는 왜 물으십니까?”

“아, 제가 오해했나 봐요.”

벨라는 헤롯의 방에 있었을 때 만났던 것부터 쭉 슈리아에게 설명했다.

슈리아는 웃으며 이야기를 듣다가, 점점 더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무리 양녀라고 하더라도 가족인데. 제가 예민하게 받아들였나 봐요.”

“하하…. 제가 봐도 오라버니께서 장난이 조금 지나치셨네요.”

“계속 그러면 불편한데.”

벨라는 속으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슈리아가 떠나고 나면, 이곳에 남는 건 병상에 누워있는 헤롯 크루엘과 후안 크루엘뿐이다.

키엘을 자주 만나려면 이 작위가 필요한데.

“흠….”

“또 그러면 적당히 거절하세요. 오라버니가 선을 넘지는 않으실 겁니다.”

* * *

벨라는 후안을 기다렸다.

‘적당히 거절이라….’

다짜고짜 수작 부리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아직 어떻게 잘 이야기 해야 할지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는데, 벨라의 방문이 끼이익 하고 열렸다.

“노크 정도는 하고….”

그리고 벨라의 방문 밖에는 예상외의 것이 서 있었다.

“뭐야. 내가 한 달에 한 번이라고 했잖아. 벌써 오면 어떻게 해?”

“이웨르가 오늘부터 해야 이득이래요!”

푸르는 눈을 초롱초롱 뜨며 벨라의 다리에 매달렸다.

“도련님 방에 가요!”

어째 털도 윤기가 나 보이는데.

“너 지금 꽃단장한 거야?”

“네!”

“뭔 이런 변태 같은 게 다 있어….”

“약속했잖아요! 오늘 푸르랑 자는 거예요!”

벨라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푸르를 따라갔다.

“키엘이 너무 바쁘면 그냥 나랑만 자는 거야, 알았지?”

“왜요?”

“황태자는 인간계에서 마왕 같은 거야. 마계랑 달리 할 일도 어마어마하게 많다고.”

그리고 벨라가 말한 대로였다.

그 시각 키엘은 눈이 퀭한 쌍둥이들과 함께 서류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따금 눈이 감기지만 그럴수록 볼을 거세게 꼬집으며 정확하게 사인을 하고 있었다.

“…콜록.”

“키엘, 오늘은 좀 일찍 쉬지 그래? 그러다 몸 다 상하겠어.”

“차트 정리해 놓은 거 좀 건네줘. 이거 계산이 안 맞는데.”

리오가 투덜거리며 서류를 뒤적였다.

“그나저나 오늘 밤에는 이웨르 씨 안 오네?”

“당분간은 오지 말라고 했어.”

“그래, 너무 무리하는 것도 안 좋지.”

“…콜록.”

그리고 그의 기침에 쌍둥이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쉬자. 너 잠 좀 자야겠어.”

“피곤하면 먼저 들어가.”

그리고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자 키엘은 이마에 손을 짚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곰 인형 씨?”

이웨르가 안 오면 푸르가 오는 마법에라도 걸린 건지.

키엘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푸르의 손을 잡고 고개만 빼꼼히 내밀고 있는 붉은 고양이 눈과 마주쳤다.

“바빠?”

“…….”

“푸르. 여기 바쁜가 봐. 약속했지? 키엘이 바쁘면 나랑만 자기로.”

“힝….”

“그럼 다들 수고해.”

벨라가 나갈 때까지 키엘은 멍하게 문만 보고 있었다.

평소 똑똑하고 영악한 키엘은 어디 간 건지.

리네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다시 문을 열었다.

“벨라 님! 전하 좀 재워줘요!”

벨라가 복도에서 뒤를 돌았다.

“재워달라니?”

“저희도 잠 좀 자게요! 전하가 며칠째…. 읍!”

어느새 키엘은 뒤에서 리네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 하하…. 리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너무 부려 먹는 거 같잖아.”

부려먹는 거 맞았다. 물론 그만큼 키엘이 더 일하긴 해서 입도 뻥끗 못 한 거지만.

“안 그래도 방금 다 끝났어요. 이제 다들 자러 갈 거예요. 그렇지, 리오?”

“아, 네네. 우리… 리네가 원래 엄살이 좀 심해.”

“읍읍읍!”

푸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눈을 반짝이며 뛰어들어 갔다.

“비켜!”

푸르는 리네와 문 사이를 거칠게 밀어내면서, 침대 위에 있던 베개를 전부 집어 던지고 떡하니 자리를 잡았다.

“여기 내 자리!”

어느새 쌍둥이들은 오랜만의 휴식에 쾌재를 부르며 부리나케 나갔고, 잠옷으로 갈아입는 키엘은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심장이 쿵쿵거렸다.

‘어떡하지….’

조금 전 벨라를 봤을 때, 그가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보는 줄만 알았었다.

얼떨결에 푸르의 제안에 승낙도 했고,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되긴 했는데.

“이제 잘까?”

벨라는 하얀색의 부드러운 실크 잠옷을 입고 길게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옆으로 누워 턱을 괴고 있었다.

‘왜 저렇게 누워 있는 거야….’

키엘은 어릴 적 이웨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덮칩시당.”

하얀 잠옷이 그의 흑심을 건드리고, 검은 머리카락이 그의 양심을 툭툭 친다.

‘너무 위험한데….’

그사이에 선명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와 입술이 그를 유혹한다.

“키엘, 그거 탐나네.”

“…네?”

“그 잠옷. 금실로 꼼꼼하게 자수를 놓았네.”

“…….”

긴장해서 피곤함 마저 달아난 키엘과 달리, 벨라는 경계가 하나도 없었다.

키엘은 슬며시 옆으로 가서 앉았다.

벨라의 머리카락을 살짝 만지면서, 조금이라도 경계해보라며 다정하게 물었다.

“다른 건… 갖고 싶은 거 없어요?”

“헤헤. 나 사실 색깔별로 잠옷 갖고 싶어.”

“…….”

“요일마다 바꿔서 입고 싶어.”

이 상황에서 잠옷 타령이나 하다니.

“…알았어요. 리네가 마을 갈 때 사 오라고 할게요.”

“응. 곧 여름이니까 좀 시원한 소재로 사 오라고 해. 지금 입고 있는 건 너무 더워.”

분명 침대 위인데도, 대화의 수준은 합숙훈련소에라도 온 기분이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그렇지?”

“…응.”

“어릴 땐 동화도 많이 얘기해줬는데. 오늘도 해줄까?”

경계가 없다 못해 아직도 어린 취급이라니.

도대체 언제쯤 한 사람의 남자로서 봐줄 셈인지.

키엘은 부드럽게 턱을 괴고 있는 벨라의 어깨와 팔 사이에 손을 밀었다.

“…팔베개해줄까요?”

벨라의 귀 뒤로 손가락이 닿았을 때.

“안 돼! 오늘은 푸르가 곰 베개야!”

푸르의 얼굴이 벨라와 키엘 사이에 불쑥 나타났다.

“아… 그래.”

참, 얘가 있었지.

“나도 많이 똑똑해졌어요!”

아주 비장한 눈빛으로 두 팔을 벌렸다.

“이렇게 하면 내가 둘 다 안고 잘 수 있어요!”

벨라의 표정은 썩어들어가지만, 군말 않고 푸르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잘 때 곰 인형을 안고 자는 건 있어도, 곰 인형이 안고 자는 건 뭐람.

“푸르는 마계에서 공주님이 제일 좋고 인간계에선 도련님이 제일 좋아요.”

푸르가 두 사람을 꽉 안았다.

“너 이제부터 한 달 동안은 혼자 자는 거야. 알았지?”

“네!”

낯익은 푸르의 냄새가, 투덜거리는 벨라의 목소리가.

마법처럼 이 순간을 저택으로 착각하게 한다.

편안하고, 따뜻했던 때로.

며칠을 밤새웠던 키엘은 그 평온함에 금방 녹아내리듯 잠이 들었다.

잔뜩 긴장했다 잠들어버린 키엘과 달리, 벨라는 시간이 갈수록 잠이 오지 않았다.

벨라는 푸르가 쌕쌕거리는 소리를 듣고 천천히 일어나 차분히 방을 둘러보았다.

처음 오는 방. 짬이 나면 오고 싶었지만, 올 수가 없었다.

지나가는 시종마다 키엘이 얼마나 바쁜지에 대해 입을 댔기에.

- “전하께선 진짜 바쁘신가 봐요. 밖으로 나오는 걸 못 봤어요.”

벨라에게 한 말은 아니지만, 그녀도 짐작하고 있었다.

가끔 마주치면 안색이 안 좋아 보였으니까.

그리고 키엘의 방은 그 흔적들이 역력했다.

쌓여 있는 서류들.

수식을 계산하는 건지, 숫자들이 난무한 종이들.

그리고 한쪽에는 푸르의 장난감. 이웨르의 팔찌가 놓여 있었다.

“…….”

낮에 키엘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 “자꾸 놀아달라고 하길래, 숨바꼭질했어요.”

벨라는 푸르와 이웨르의 물건을 집어 채서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이 개자식들이 여길 완전 놀이터처럼 썼네?”

그때였다.

“…콜록.”

기침 소리에 벨라는 잠들어 있는 키엘을 바라봤다.

식은땀을 흘리며 얕은 기침을 여러 번 하더니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감긴가?’

벨라는 차가운 손으로 키엘의 이마를 짚었다.

리네가 한 말을 생각해보면 잠도 잘 못 자는 거 같던데.

“음….”

이 예쁜 남자주인공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벨라는 다시 몸을 돌려 서류가 쌓인 책상 앞에 섰다.

서류는 잘 정리되어 쌓여 있었다.

비브르 후작 영토의 민원들이나 회계장부들. 각종 계획서와 예산안들이 있었다.

현대였다면 컴퓨터로 빠르게 정리할 수 있는 걸 수작업으로 하고 있다니.

벨라는 조심스레 키엘의 자리에 앉았다.

다른 건 상황을 잘 모르니 넘어가기로 하고.

아직 손도 안 댄 것으로 보이는 민원서류부터 훑어봤다.

‘이런 건 다 볼 필요 없지.’

꽤 많은 서류였기에, 꼼꼼히 읽기보다는 시험 준비할 때처럼 핵심만 찾았다.

구구절절 적혀 있는 민원들을 석 줄로 요약해서 종이에 따로 적어두고.

비슷한 민원들은 한데 묶어 놓고 서류 위에 숫자로 표기했다.

특별히 눈여겨봐야 할 것들은 중요 표시를 해두고.

반 정도 정리해놓을 때쯤 눈이 감기고 벨라는 하품을 했다.

어느새 푸르는 키엘의 머리 위에 발을 올리고 자고 있었다.

‘하여튼 쟤 잠버릇 진짜 고약해.’

벨라는 조용히 침대에 앉아 푸르의 발을 치웠다.

보물을 찾기라도 한 듯, 푸르 발 밑에 있는 키엘은 자는 모습도 예쁘고 잘생겼다.

천사처럼 곤히 자는 이 얼굴의 어깨에 얼마나 많은 무게가 짊어지고 있는 건지.

벨라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앞으로 이런 일상이 반복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빙의 된 역할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따뜻하고 행복한 하루들.

“난 이걸로 만족해.”

벨라는 손가락으로 키엘의 볼을 살짝 찔러보고 그저 웃었다.

* * *

아침이 되어 키엘이 눈을 떴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설마 또….’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거였을까. 벨라를 다시 만난 이후로, 그녀의 환영은 보이지 않았는데.

키엘이 침대보를 꽉 쥐고 천천히 일어섰다.

“아니, 바보야. 색별로 표시해놨잖아.”

어디선가 벨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키엘이 놀라서 뒤를 돌았을 때, 벨라는 쌍둥이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옆에 있던 리오가 벨라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이렇게 정리하면 되나요?”

“응. 이렇게 하면 비슷한 민원이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는지 한눈에 보기 쉽잖아.”

벨라는 여분의 종이를 리오에게 건넸다.

“그리고 중요한 민원 같은 건 이 종이에 적어놓고 살짝 눈에 띄게 표시해놓으면, 찾기 쉽지.”

스티커 같은 게 없는 곳이다 보니 대처할만한 걸 고안했다.

“진짜 현명하시네요. 생각도 못 했는데.”

“네가 멍청한 거야. 보좌가 똑똑해야 키엘이 덜 고생하지.”

벨라의 말에 리네가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조용히 해. 키엘 깨겠다.”

벨라의 말에 쌍둥이들은 일제히 키엘을 쳐다봤다.

“키엘. 일어났어?”

“…….”

“전하!”

“…응?”

벨라가 천천히 키엘에게 걸어갔다.

“어제 보니까 잘 때 기침하던데.”

그리고 옆에 앉아 미리 꿀을 타 둔 컵을 그에게 건넸다.

“목감기에 좋을 거야. 마셔.”

하지만 키엘은 꼼짝없이 벨라만 멀뚱히 보고 있었다.

“설마 벨라 님이 주신 건데 독이라도 들었겠어?”

보다 못한 리오가 농담하자, 키엘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독 있을까 봐 안 먹는 거야?”

“아, 아니….”

“흐음. 내가 너한테 왜 독을 타겠어.”

벨라가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짓자, 키엘은 서둘러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그냥…. 벨라가 아닐까 봐….”

“그럼 뭐야. 귀신이겠어?”

생각해보면 하얀 잠옷에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렸으니, 그럴만해 보이기도 하자 리오가 리네에게만 살짝 말했다.

“좀 그래 보이긴 하다, 그치?”

“리오, 다 들려.”

키엘은 천천히 벨라가 건넨 컵에 입을 갖다 댔다.

‘…달콤해.’

늘 꿈꾸던 달콤함이 입안 가득 그를 감싸 안았다.

* * *

쌍둥이들은 그날 아침 이후로 벨라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제 키엘의 방은 만남의 광장이 아니었다.

“꺄아, 오늘도 미모가 물오른 이웨르 등…“

“응. 이웨르. 머리 박아.”

처벌의 광장이지.

마족들의 물건을 발견한 벨라가 가만히 넘어갈 리가 없었다.

“도련님! 나랑 놀….”

“응. 푸르는 물구나무.”

아침 먹으러 나간 푸르는 오늘 종일 안 오겠다고 했는데도 왔다.

벨라는 마치 잠복이라도 하듯이 키엘의 방에 앉아 있었다.

“이봐, 어디 고기 잘하는 집 없….”

“잔바르. 너도 오니?”

의외로 잔바르까지 오자 벨라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 전 뭐 하나만 물어보고 가려고 왔습니다.”

“뭐 물어볼 건데?”

“도시에 고기 잘하는 집 없는지 물어보러 왔습니다.”

“그건 알아서 뭐 하게?”

그 말에 잔바르는 아무 말 없이 구석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젠킨스까지 찾아왔다.

“혹시 잔바르 님 여기에 오지….”

“어쭈. 이것들이 지금 장난쳐? 30분 동안 네 마리가 쳐들어와?”

벨라는 목을 좌우로 흔들며 몸을 풀고, 험악한 표정으로 마족들을 노려봤다.

“네놈들 손발을 잘라놔야 안 오겠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느낀 젠킨스가 손을 들었다.

“저, 전 리네랑 연구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이웨르는 동공이 커지면서 젠킨스를 보고 이를 갈았다.

“아가씽! 젠도 맨날 와서 노는데용!”

다시 벨라가 젠킨스를 죽일 듯이 노려보자, 잔바르가 그를 변호했다.

“제… 젠킨스는 연구 때문에 계속 리네양을 찾아온 거 맞습니다.”

“와, 잔바르 님. 이러기예용?”

사실 이제껏 리네를 찾아 온 적은 없었지만, 앞으로 리네가 무전마법을 연구하는 데에 젠킨스의 도움이 절실했다.

“저, 맞아요. 연구하는 거 있어요.”

“그래? 아쉽네. 반마족도 이 기회에 잘라보나 했는데.”

* * *

벨라가 마족들을 처벌한 이후에 그들은 다시는 키엘의 방에 찾아가지 않았다.

아니, 찾아갈 수도 없었다.

벨라가 그날 이후로 계속 키엘의 방에서 교육을 들었기에.

처음에는 벨라를 가르치던 교사들이 부담을 가졌었다.

“토 달지 마세요. 난 동물왕국 짐승들이 키엘 방에 들락날락거리는 꼴 못 보겠으니까.”

“하, 하지만 어떻게 전하께서 계신 곳에서 가르칠 수가 있겠어요.”

“그럼 교사를 바꾸면 되겠네요.”

불평을 내놓았지만, 벨라는 키엘의 일에 있어서만큼은 단호했다.

“드디어 일에 진전이 생기네.”

리네가 무전 마법을 실험해보러 가는 바람에, 리오와 키엘 둘이서만 일하게 생겼는데.

벨라 덕에 한층 조용해지자 방해물 없이 처리할 수 있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벨라도 가끔 서류를 같이 봐주었고, 키엘도 틈틈이 벨라가 쉴 때 함께 쉬었다.

걱정되었던 후안은 애초에 키엘의 방에 오지도 못했고.

다만 딱 하나만 빼고.

“키엘. 일 안 할 거야?”

“…….”

평소 마족들이 떠들어대도 무시하고 집중하던 키엘이, 틈만 나면 벨라를 보면서 넋이 나가 있는 게 한두 번이어야지.

“전하!”

“… 아, 미안.”

리오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좋아?”

그 말에 키엘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좋으냐고.’

늘 벨라와 함께 있는 기억은 저택에서의 기억뿐이었는데.

어느새 그녀는 그의 새로운 일상에 점점 스며든다.

그리고, 드디어 황궁에서 서신이 도착했다.

“요즘 계속 전하의 방에서 교육을 들으신다면서요?”

대련을 마친 슈리아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물었다.

“제 밑의 짐승들은 하도 말을 안 들어서요. 손발을 잘라버리려고 했는데,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할 것 같더라고요.”

사실 이미 한 번 잘랐고, 키엘의 방을 청소하던 시종들이 기겁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하하. 오라버니는 그 후로 잘 거절하셨습니까?”

벨라는 곰곰이 후안과 마주친 일들을 하나씩 기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애매하단 말이지.’

후안이 가겠다고 선전포고한 다음 날, 벨라는 방에 들어섰을 때 그가 나타났었다.

- “어제 안 오셨더라고요.”

기회는 날아갔으니 오지 말라고 하려고 했는데.

- “혹시 기다리셨습니까?”

벨라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늦은 시간에 가겠습니까, 안 그래요?”

예의를 지키는 듯하면서도.

- “뭐, 전 좋지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얼마 전에는 이랬다.

- “은색과 흑발이 섞이면 무슨 색일지 궁금하네요.”

- “은회색?”

- “동물왕국의 공주님은 예술에도 소질이 있으신가 봅니다. 저도 좀 배워야겠네요.”

귀족들은 미술을 안 배우나 생각하고 돌아섰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흑발’이라고 했었다.

‘와, 진짜 교묘하게 찔러보네?‘

게다가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설정이 뭐 잘못된 거 아냐?‘

소설 속 후안은 서브남이지만, 팬들도 없을 만큼 음침하고 어두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보기보다 능글맞고 밝아 보였다.

그리고 바람둥이 설정이지만, 한 사람에게 목메는 사람.

‘솔직히 로잔느를 좋아하는 이유도 모르겠단 말이지.’

그가 로잔느를 알기 전, 그의 스쳐 지나가는 1인이 되고 싶지 않은데.

정중하게 거절하고 선을 그으려고 해도, 벨라만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뭐, 그냥 그래요. 잘 모르겠네요.”

“벨라 님. 세상에서 제일 다루기 쉬운 게 뭔지 압니까?”

“뭔데요?”

슈리아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연정을 품은 사람의 마음이랍니다.”

슈리아도 후안의 행동을 그간 쭉 지켜봤었다.

혹 그의 행동이 가문의 수치로 이어질까 봐.

이제껏 오는 여자 막지 않고, 가는 여자 잡지 않는 사람이었다.

잘생긴 외모 덕에 싫다는 사람 억지로 붙잡지도 않았고.

그리고 슈리아가 지켜본 바.

후안이 어느 정도는 진심이라는 것만큼은 포착했다.

“구태여 그 마음을 받아줄 필요는 없지만, 굳이 배척할 필요도 없어요.”

벨라가 코 밑을 쓱쓱 거리며 ‘그런가….’ 하고 곱씹어 생각했다.

“나를 좋아해서 어떤 일도 해줄 수 있는 자를 곁에 두고 잘 활용해보는 것도, 능력이랍니다.”

“하긴…. 그렇겠네요.”

“황궁에 가면…. 아니, 앞으로 생활하다 보면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실 거예요.”

벨라가 귀를 점점 열었다.

이제껏 마족들과 얼굴을 맞대며 살아왔으니, 정상적인 인간관계가 없었는데.

“누구도 벨라 님께 큰 사랑을 달라고 떼쓰진 않을 거예요. 적당히 자기가 받을 수 있는 사랑을 요구하겠죠.”

“자기가 받을 수 있는 사랑….”

“예를 들어 어떤 시종이 벨라 님을 정말로 흠모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벨라는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사람이 벨라 님과 결혼을, 혹은 연인 관계라도 꿈꿀 수 있을까요? 신분의 차이가 있는데.”

‘둘이 서로 좋아하면 신분이 문젠가?’

“그러니 시종은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죠. 자신의 한계를 알거든요.”

“아하….”

“그러면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그가 받을 수 있는 사랑은 다 받은 거예요. 그럼 벨라 님은 그에게서 필요한 것들을 가져올 수 있죠.”

“예를 들면요?”

슈리아의 눈빛이 살짝 바뀌었다.

마치 그랬던 적이 있었던 것처럼.

“나 대신 누군가를 죽여달라거나…. 그런 부탁도 할 수 있겠죠?”

“그냥 내가 죽이면 되지 않아요?”

슈리아는 벨라를 빤히 쳐다봤다.

“안 되죠, 벨라 님. 살인은 범죄인데. 크루엘가의 이름을 달고 그러시면 더더욱 안 됩니다.”

순간 벨라의 입이 벌어졌다.

마족들은 사람 같지도 않아서, 마계에서는 일상이었었다.

‘와…. 나 진짜 쓰레기네. 전생에 경찰이었으면서?‘

밑바닥까지 다 드러난 양심을 마주하자, 벨라가 얼굴을 붉혔다.

“그… 그렇죠.”

그때 슈리아가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빼 들고 휘둘렀다.

“벨라 님. 제게 이 검을 한 수 가르쳐주셨으니….”

“…….”

“제게서 보이지 않는 전투를 배워보시겠어요?”

* * *

보이지 않는 전투.

굉장히 거창한 거로 생각했는데, 슈리아의 입에서 나온 건 보기보다 귀여웠다.

- “간단하게 티파티를 가져볼까요?”

비록 간단한 다과이긴 하지만, 벨라는 슈리아의 선견지명에 동의했다.

- “앞으로 이런 일들이 잦으실 텐데, 연습 삼아 벨라 님이 준비해보시는 건 어떠세요?”

벨라는 배운 대로 차와 다과를 준비하고, 시종들을 시켜 테이블도 예쁘게 꾸몄다.

“자리는 어떻게 할까요?”

“아… 그런 거도 내가 정하는 거구나.”

벨라는 초대한 사람들의 이름을 정성껏 적어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벨라 님, 꽃은 어떻게 놓을까요?”

“……. 꽃도 신경 써야 해?”

“찻잔은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음….”

확실히 준비만큼은 전투적이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전생에서도 단순히 카페에 가서 커피나 한잔 마셨지.

집에 누군가를 초대해도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신경 쓸 게 많긴 하지만 재밌네.’

무슨 복이라도 받은 건지.

생각해보면, 처음 소설에 빙의할 때 원했던 대로 귀족 영애의 꿀 빠는 삶을 살게 되었다.

절대 올 수 없을 거로 생각했던 기회들이 눈앞에 펼쳐지자, 벨라는 새삼 키엘이 고맙게 느껴졌다.

이 모든 걸 준비한 사람이니.

“선물도 준비하나요?”

“선물?”

“아, 꼭 준비해야 하는 건 아닌데 혹시나 싶어서요.”

그러고 보면 인간계에 오고 난 이후로 키엘에게 늘 받기만 했다.

‘음… 뭔가 주고 싶긴 한데.’

딱히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현재 수중에 벨라가 가지고 있는 것도 없고.

‘보석 같은 걸 선물로 줘봐야, 어차피 돈도 많을 테고….’

일단 보석도 없다.

벨라가 방 주위를 둘러보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때라 그런지 정원은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찻잔은 가운데 있는 찻잔 세트로 준비해주고, 꽃은 가능하면 붉은색으로 해줘. 그리고 꽃다발을 만들 종이를 준비해놔.”

“네. 알겠습니다, 벨라…니…임?”

벨라는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금방 갔다 올 테니까 다 준비해 놔!”

2층이라 그리 높지는 않아서 가볍게 내려갔는데.

쿵 하고 바닥에 닿자마자 충격이 발목으로 전달되었다.

‘아…. 맞다. 나 아직 회복이 안 되는데.’

몇 걸음 걷자 발목이 삔 것처럼 시큰거리긴 했지만, 벨라는 개의치 않고 정원으로 걸었다.

‘좀 꺾어도 되겠지? 안 된다고 하면 몰랐다고 하면 되겠지, 뭐.’

이리저리 눈치를 보다가 눈에 띄는 노란색의 꽃을 꺾었다.

개나리같이 익숙한 꽃도 있었고, 노란 안개꽃 같은 꽃다지도 있었다.

“어. 이건 유채꽃이네.”

정원에 꽃들은 많지만, 색깔별로 꾸며놓은 것 같았다.

이런 꽃은 이렇게 조금씩 말고 아예 이 정원을 뒤덮으면 예쁠 텐데.

몇 송이 없던지라, 꽃밭이 민둥산이 되자 아주 조금 양심에 찔렸다.

‘뭐, 나 알 바 아니지.’

어떤 걸 줘도-줄 수도 없다. 벨라가 가진 게 뭐가 있나.-이 마음을 표현하는 데는 이만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키엘도 종종 꽃을 꺾어다 줬는데.’

그때는 그저 예쁜 짓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가진 게 없을 때 해줄 수 있는 걸 찾았던 걸까.

이제야 그 마음이 어떤 건지 조금 이해되었다.

‘또 뭐 없을까….’

* * *

벨라가 분주한 동안, 키엘은 슈리아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의 방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웬 티파티야?”

“앞으로 이런 일이 비일비재할 텐데, 예행 연습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그렇지. 공녀를 보면 마음이 놓여.”

“참. 황궁에서 서신이 왔더군요. 오늘 그 얘기도 함께할까 하는데요.”

키엘이 깊은숨을 마셨다 내쉬었다.

황태자비 경합에 대한 서신이었다. 그 말은 즉 키엘이 황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었고.

“…예상보다 늦긴 했네.”

“전하께서도 통보받으신 겁니까?”

“내가 부재중이라. 그런데도 로한이 제 맘대로 다 하는군.”

“전하. 상대할 수 있겠어요? 생각보다 로한이 심어놓은 사람은 많습니다.”

마력을 쓸 수 없는 황제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들은 키엘도 그렇게 크기를 원했고.

“차라리 전에 말씀드린 대로 하시면 어떻습니까.”

“전에?”

“마계에 가서 마왕의 심장이라도 가져오는 거요.”

“음….”

벨라가 썼던 소설 속에서도, 그 심장을 가지고 갔지만, 여전히 황태자비 경합은 치러진다.

‘그게 로잔느랑 다시 만나는 길이었으니까.’

그 소설에 적혀 있는 것 중 큰 사건들은 절대 변하지 않았었다.

예를 들면 빨리 황궁에서 나가고 싶어 했던 것과 달리, 정확히 키엘이 시간을 되돌아 가던 날에 황궁을 나섰던 거.

빠른 시간 내에 성물을 다 모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황궁에 돌아간 것도 맞아떨어졌고.

로잔느와 마이유를 돌려보내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이상하게 잘되지 않았었다.

“소문에 의하면, 마왕이 동면하고 새로운 마왕이 생겼다던데. 아직 힘이 약할 때라 들었습니다.”

“아…. 그렇대?”

“원하시면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린 이미 한배를 탔으니까요.”

“그래도 좀 무리지 않을까?”

벨라의 방문 앞에서 슈리아는 노크를 두 번 하고 자신 있게 말했다.

“제 실력만으로는 상대하기 힘들겠지만, 벨라 님께도 부탁해보세요. 들어주실 거 같은데.”

그 마왕이 이 문 너머에 있는데.

“어서 와요.”

그것도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벨라는 파티에서나 입을 법한 드레스를 입고 서 있었다.

“짠. 어울려?”

흰색에 황금색의 장식과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네요.”

“다행이네요, 어색했는데.”

슈리아의 칭찬에 벨라는 얼굴을 붉히다가, 들고 있던 꽃다발을 키엘에게 건넸다.

“참, 이건 키엘 전하에게 주는 선물.”

키엘은 말없이 벨라를 보고 있었다.

이제껏 많은 영애를 봐왔지만, 이토록 그의 눈을 멀게 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예뻐요.”

옷이 날개라더니, 아니었다. 옷은 그저 상상력을 자극할 뿐이었다.

저 아름다움은 벨라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고, 황궁에 그와 함께 있는 걸 상상하게 한다.

그의 신부가 되어 저런 꽃을 들고 있을 상상.

“제일 먼저 보여주고 싶었는데. 다행히 제일 먼저 도착했네.”

키엘은 꽃을 받으며 넋이 나간 듯 말했다.

“…나만 보고 싶은데.”

“내부도 잘 꾸미셨네요. 사치스러워 보이지만, 이런 작은 것까지도 공작가의 위엄을 나타낼 수 있는 거랍니다.”

슈리아는 잽싸게 벨라에게 말을 걸었다.

“다행이다. 준비할 게 너무 많더라고요.”

“드레스가 조금 커 보이는데, 괜찮아요?”

벨라가 그 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자 부드러운 드레스가 춤을 추며 살포시 날았다가 내려앉았다.

“조금 크긴 해요. 이런 거 처음 입어보는데.”

가슴 부분이 살짝 내려가려고 하자, 벨라는 서둘러 옷자락을 잡았다.

“아….”

그러다가 드레스의 밑단을 밟아 균형을 잠깐 놓쳤는데.

“엄마야!”

아까 발목을 접질려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신는 높은 구두 때문인지.

속수무책으로 미끄러지며 앞으로 넘어졌다.

“괜찮아요?”

다행히 키엘이 두 팔로 벨라의 팔과 허리를 감싸 안고 바쳐주고 있었다.

“아, 드, 드레스가 왜 이렇게 불편하지! 그냥 옷 갈아입어야겠다.”

벨라는 국어책 읽듯이 딱딱하게 굳은 채 말했다.

“도와드릴까요?”

“혼자 할 수 있어요!”

벨라는 뻣뻣하게 양팔을 휘두르며 옆 방으로 슬금슬금 걸어갔다.

쾅 하고 닫히는 소리도 어찌나 큰지.

키엘은 벨라가 준 노란 꽃다발로 입을 가렸다.

‘왜 뭘 해도 다 귀엽지?’

저렇게까지 부끄러워할 일은 아닌데.

슈리아는 그 모습을 보며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늘 그 속에 감정을 숨기던 사람이라 저런 넋 나갔다가 웃는 얼굴이 꽤 낯설게만 보였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혼자 보시게 되었네요.”

“…들었나?”

“주의 좀 부탁드립니다. 사정이야 다 알지만 보고 있기 불편합니다.”

“주의하지.”

* * *

쌍둥이들은 이런 사교 파티가 익숙하지 않았다.

둘 다 마법 학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데다가 졸업하고 난 이후부터는 키엘의 옆에만 있었다.

게다가 황궁에 들어올 때쯤에 이미 제 나이 또래의 귀족들은 파벌이 정해져 있었다.

거침없는 성격의 리네와 가끔 모자란 듯 보이는 리오가 끼어들기에는 난감했었다.

‘안 갈 수도 없고….’

무려 마왕님이 협박하듯이 초대한 터라 오긴 했는데.

슈리아 크루엘과 후안 크루엘까지 있을 줄은 몰랐다.

‘망할…. 그냥 마법 실험이나 할걸.’

‘그냥 서류나 보고 있을걸.’

이사부터 사장, 부사장이 있는 자리에 신입사원 둘이 낀 이 불편한 자리를 어찌할꼬.

그리고 그들은 생에 처음으로 기이한 파티를 목격하게 되었다.

“이 차는 화국의 국왕이 극찬했다고 하는 우롱차랍니다.”

잔뜩 긴장한 게 눈에 보일 정도로, 벨라는 어깨에 힘을 주며 얼굴 근육이 굳어진 듯 웃고 있었다.

“과일 향이 많이 나서 이 찻잔으로 준비했어요.”

찻잔을 가리키는 손동작조차 어색한 것이 이 세상의 몸놀림이 아니었다.

“이국적인 디자인으로 꽃 그림이 인상적이죠? 블랑가슈 오리….”

벨라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블링슈 오리말루인데… 제국력 1200년대에 황실에 특별히 선보였던 컬렉션이랍니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내려 종이를 보자 ‘블랑하슈 오리만줄’이라고 적혀 있었다.

1200년도 아니고 1020년이고. 1200년은 아직 오지도 않았다.

“블링하슈… 오리만두….”

“…….”

“브랑….”

“벨라, 그렇게까지 설명 안 해도 괜찮아요.”

벨라의 옆에 앉은 키엘이 안쓰럽듯 만류하자, 벨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껏 협박하고, 윽박지르는 일은 많이 해봤지만, 사교라는 걸 해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책에는 준비한 차와 다과와 찻잔과 꽃까지 다 설명하라는데?”

“그 책 갖다버려요.”

그리고 그 누구도 저렇게 딱딱하게 외우면서 설명하진 않는다.

그때 후안이 느끼한 얼굴로 벨라를 쳐다봤다.

“귀족들의 예의라는 게, 허례허식이 많죠. 편하게 대해요, 아가씨.”

저 얼굴이 제일 불편했다.

“동물왕국은 티파티를 어떻게 합니까?”

“티파티 같은 건 없고 피파티는 있는데….”

쌍둥이들이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아, 젠장.’

마족인 걸 숨겨야 하는데. 너무 티가 나는 말이었다.

벨라가 난감해하는 걸 본 키엘이 먼저 입을 뗐다.

“화국에서 온 차라 그런지, 독특하네요.”

벨라는 오래전 화국에 갔던 걸 떠올렸다.

“화국에서 마신 거랑은 좀 많이 다른 거 같아.”

“벨라 님, 화국에 가보신 적 있으세요?”

그제야 얘깃거리를 잡을 수 있었다.

“네. 꽤 인상 깊은 곳이었어요. 사막왕국이라고 해서 모래만 허허벌판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고.”

“여기보다 꽤 덥죠?”

벨라가 그때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더웠어요. 이웨르는 거의 뭐 벗고 다녔고. 푸르도 털 때문에 덥다고 맨날 징징거리고.”

후안이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물었다.

“귀여운 동물왕국 식구들이랑 다 같이 간 겁니까?”

반대편에 앉아서 자리도 먼데 왜 자꾸 질문하는 거며. 어째 질문을 해도 하나씩 마음에 안 들까.

“걔들이 귀엽진 않은데.”

“하하. 그렇습니까. 제 눈엔 귀엽던데. 다들 아가씨를 매우 따르던데요.”

벨라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따르기보단 집착하는 거죠. 진절머리 나도록.”

그 말에 후안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아하. 아가씨는 집착하는 걸 싫어하시는구나?”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집착하는 남자도 싫어하겠네요.”

“네. 너무 싫어요. 그러….”

그러니까 자꾸 나에게만 질문하지 말라고!

“그렇다네요, 전하.”

하지만 후안은 또 여우처럼 벨라의 말을 비켜 갔다.

‘이 자식 내가 오늘은 기어이 뭉개버리든가 해야지.’

벨라가 이를 가는 동안, 키엘은 마시던 차가 더 씁쓸하게 느껴졌다.

마계에서 봤듯이, 마족들은 벨라를 지나치게 좋아한다. 본능에 따라 그녀에게 충성하는 거겠지만.

그리고 벨라가 그걸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그동안 애타게 찾았다는 걸 알면.

‘웃을까. 아니면 경멸할까.’

그의 온 마음을 삼키려고 준비되어 있던 우울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키엘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 도발에 넘어가지 말자.’

묘한 분위기를 읽은 슈리아는 세 사람을 번갈아 가며 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슈리아가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벨라에게 우아하게 물었다.

“혹시 저 화분도 혹시 화국에서 사오신 건가요?”

벨라가 후안을 노려보다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저 선인장. 수도인 ‘호푸’의 명물이래요.”

“어머, 선인장이었나요?”

“네. 키우기 힘든 식물이에요. 하루는 그늘에, 하루는 햇빛에 둬야 하거든요.”

“까다롭네요.”

“대신 꽃이 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나 뭐라나.”

키엘은 조용히 차를 마시며 벨라를 슬쩍 훔쳐봤다.

‘저렇게 아끼는 건 줄 몰랐는데….’

얼핏 봐도 이미 생명이 꺼진 선인장인데도, 벨라는 매일 선인장을 돌보고 있었다.

“그래서 아가씨의 소원은 뭔가요?”

그 말에 벨라는 잠깐 멈칫했다.

후안이 알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만, 어째서인지 벨라의 신경을 거스르는 질문만 하는 것 같았다.

“비밀이에요.”

“뭐길래요?”

비밀이라잖아. 왜 또 물어봐.

벨라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후안은 여유롭게 말을 이어갔다.

“이제 우리도 가족이니, 아가씨 소원 정도는 들어드리고 싶은데. 대신….”

“후안 크루엘 씨.”

벨라는 이때라고 생각했다.

슈리아가 말한 대로 적당히 정중하게 거절하는 것.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에요.”

이 순간을 계속 기다리고 준비한 말을 내뱉었다.

“내 가…족같이 대할지 말지.”

말장난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 라임을 넣어봤다.

쌍둥이들은 표정에 미동이 없었지만, 속으로는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저거…. 욕이지?‘

‘가‘와 ‘족‘사이를 애매하게 뜸을 들여 말한 게, 아무리 들어도 욕 같았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후안은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봤는지,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기대됩니다.”

게다가 후안은 벨라의 태도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양녀로 들어왔으면서, 마치 안 주인인 것 마냥 권력의 위에 서 있는 모습이.

“어떤 가족이 될지.”

벨라는 저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제대로 이해한 거 맞는지.

후안은 잠시의 정적조차 허락하지 않고 또 한 번 벨라에게 말을 걸었다.

“안 그래도 아가씨가 크루엘가에 적응하려고 꽤 열심히 하신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또 무슨 얘기를 하려고 밑밥을 까는지. 벨라는 딱 잘라 대답했다.

“크루엘가에 적응하려고 열심히 하는 거 아니에요.”

“아….”

“내가 못 하면 키엘이 욕먹을까 봐 그냥 열심히 하는 것뿐이에요.”

그러다 벨라는 자신의 말을 다시 정정했다.

“그… 키엘 전하가.”

그때 리오가 조금 놀란 눈으로 말문을 열었다.

“젠 할아버지가 무시해서 그런 거 아니었어요?”

“뭐, 그런 거도 있지만….”

새로 얻게 된 기회를 더 단단하게 붙잡고 싶었다.

“내가 잘해야 옆에 있을 수 있지, 안 그래?”

그래야 소설이 끝날 때까지 그의 행복을 지켜볼 수 있으니까.

벨라가 키엘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감동에 벅차올랐다.

‘…몰랐어.’

지금 둘만 있다면, 말없이 꽉 안을 수 있을 텐데.

그리고 후안은 그 묘한 기류가 싫었는지 대뜸 키엘에게 물었다.

“참, 그런데 전하께선 황궁으로 언제 돌아가십니까?”

“…….”

“설마 이 아가씨 때문에 계신 건 아니죠?”

때때로 푸르도 중간에 끼어들지만 키엘은 후안의 건방진 행동을 참을 수 없었다.

“후….”

“지금 우리 키엘 눈치 주는 거예요?”

키엘이 입을 떼려는 동시에 벨라가 업신여기듯 후안을 쳐다봤다.

벨라가 찻잔을 세게 쥐며 이를 갈았다.

“내가 다른 건 다 참아도 키엘 괴롭히는 건 못 참아.”

벨라는 다른 것도 참지 않는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이 깨졌다.

후안이 입술을 실룩였다.

“하하. 눈치라뇨. 그럴 리가요. 아가씨에겐 친남매 같은 분이신데, 얼마든지 계셔도 되죠.”

“흥.”

“황궁에서 서신이 와서 여쭤본 겁니다. 황태자비 경합이 있다는데, 전하께서 여기 계시니 말입니다.”

벨라는 아무 말이 없었다.

‘벌써 그때가 되었구나.’

이제 정말 벨라 크루엘로서 키엘의 행복을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

‘심장도 돌려달라고 해야겠네.’

그때 후안은 비웃듯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았다.

“하긴. 경합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 말에 키엘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슈리아와 눈을 마주쳤다.

슈리아도 놀란 눈치였다.

“오라버….”

“잠깐만.”

“어차피 황태자비는 슈리아로 정해져 있는데.”

키엘은 후안이 정말 싫었다.

“아가씨를 양녀로 들이는 대신, 황태자비를 약속받으셨다면서요.”

차라리 비꼬는 게 나았다. 이렇게 그의 계획을 망치는 것보다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