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벨라는 며칠간 좋은 옷과 좋은 음식, 싱그럽고 푸르른 하늘을 만끽했다.
‘역시… 이걸 못 보면서 오천 년을 살 수는 없지.’
그럴수록 벨라의 ‘원작대로 완결’에 대한 소망은 점점 커져만 갔다.
한때는 이 소설을 포기하고 키엘과 웃으며 그의 노생까지 지켜보고 싶었다.
소설이 시작되기 반년 전, 벨라는 고양이로 변해 황궁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키엘을 기다렸었다.
반년 일찍 황궁에 들어갔기에, 혹여나 반년 일찍 여행이 시작된다면.
결국 모든 것이 뒤틀려버리니까.
그때는 정말 이 소설을 포기하고 키엘에게 달려가고 싶었었다.
‘내가 진짜 미쳤었지.’
벨라가 4년간 겪은 마계는.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지옥이었다.
무질서가 몸에 밴 마족들과 사는 것보다도 더 끔찍한 건.
그녀 자신이었다.
여전히 회복되지 않아 등이 아프고, 밤이 되자 차가워 온몸에 소름이 오돌오돌 돌지만.
그래서 좋았다.
오히려 마력이 없어서, 그 회복력이 없어서.
‘이러니까 사람 같다.’
마족도, 고양이도 아닌 사람. 다치면 아프기도 한 사람.
“이제 슬슬… 확인해볼까.”
* * *
먼저 인근의 마족들부터 잡아 심문하기로 했다.
아직 키엘이 어떻게 마계로 왔는지 정황은 몰랐다.
“이웨르!”
벨라가 이웨르를 찾았을 때는, 이곳을 관리하는 정원사의 앞섬을 풀어헤치고 그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아가씨… 저 지금 바쁜뎅. 아니면 아가씨도 같이 끼실래용?”
“여기 너무 사람들 다니는 데 아니야?”
“그런 재미죵.”
벨라가 미간을 찌푸리며 뒷걸음질 쳤다.
‘어휴. 쟤는 왜 저래, 진짜.’
키엘과 마계까지 함께 넘어왔으니, 더 자세히 알 거로 생각했는데 말도 섞기 싫어졌다.
“젠킨스!”
꿩 대신 닭이라고 벨라는 바로 뒤를 돌아서 태세를 전환했다.
다행히 젠킨스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자기 방에서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안 어울리게 안경까지 쓰고.
“무슨 일이에요? 옷 갈아입으셨네요.”
“너 키엘을 만난 게 언제야?”
안경 너머로 젠킨스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무전으로 ‘용서하겠다’고는 했지만, 마족들은 언제든지 말을 쉽게 바꾸는 족속이라 이날을 두려워하며 기다렸었다.
“1166년 봄입니다.”
“쌍둥이들을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 자세히 얘기해봐.”
젠킨스는 모두와 함께 맞춘 말을 조심스레 해나갔다.
뭐, 8할이 사실이긴 하지만.
“전에 잔바르 님이 납치했던 아가씨 있죠?”
“납치?”
벨라는 눈을 굴리며 기억해보려 했다.
“로잔느라는 아가씬데.”
젠킨스의 말이 이어지자마자 벨라는 굴리던 눈을 멈추고 동공이 커졌다.
“어떤 상인이 로잔느씨에게 이웨르의 묘약을 팔려고 했답니다.”
로잔느가 그런 묘약을 쓴다는 말은 소설 속에 없었다.
‘걘 착해서 그런 걸 안 쓸 텐데….’
“그래서 불법으로 유통되는 약이라고, 쌍둥이들이 저희를 잡으러 왔습니다.”
“뭐? 불법?”
언제부터 그딴 법이 있었다고. 인간계에 오면 이웨르 피 팔아서 편안하게 지내려고 했는데.
“어쨌든 그때 리네를 만나게 되었고, 이웨르씨가 아가씨 보고 싶다고 소환해보자 한 거죠.”
“흐음.”
“그때까지만 해도 도련님이랑 연관되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 로잔느라는 아가씨도 도련님이랑 만난 후에 기억 난 거고요.”
“어쨌든 키엘이….”
“리네가 이상한 일 하고 다니는 줄 알고 감시하다가 저희를 발견한 거죠.”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은 쉽사리 일어나고.
마이유를 찾을 때처럼 필요한 우연은 벨라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 그럼 로잔느랑 키엘은 어때 보였어?”
“로잔느 씨는 딱 한 번 봤습니다. 그 후로는 집으로 돌아갔어요. 자세한 사정은 저도 모릅니다.”
사실이었다. 그 후로 쌍둥이들과 함께 황궁으로 돌아갔으니.
여기까지 얘기하고 나자 젠킨스는 마음의 짐이 덜어지는 듯했다.
벨라는 그의 말을 듣고 더 아리송했다.
‘아무래도 직접 물어봐야 할 거 같은데….’
하지만 어떻게 물어볼 것인가. 특히 연애사라는 게 친구끼리는 공유해도 가족끼리는 잘 공유하지 않는 문제 아닌가.
‘간섭한다 생각하면 안 될 텐데….’
벨라가 고민하는 동안,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 마왕님!”
그것도 꽤나 밝은 목소리로.
키엘의 쌍둥이 호위들이었다.
로잔느와 성물을 모으러 다닐 때 활약하지만.
쌍둥이 동생인 리오가 마계로 갔을 때 죽는 역이었고, 리네는 슬픔에 잠겨 홀연 사라지는 역이었다.
쌍둥이들은 어느새 벨라 앞에 서서 인사했다.
“저… 안녕하세요, 마왕님.”
벨라가 얼떨떨하게 손을 흔들었다.
이들의 원래 운명을 아는지라,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했다.
“날씨가 좋죠?”
“그, 그러네요.”
이미 해가 지고 밤이었지만.
“아유, 지고하신 마왕님이신데 편하게 대하세요.”
“어… 그래.”
벨라는 얼떨떨하게 대답하면서도 의심했다.
‘나한테 뭔가 원하는 거라도 있나?‘
리네는 입에 발린 말은 못 하는 성격이었다.
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듣고, 조금 모자란 리오에 비해 예쁨을 많이 받은 기고만장한 아이.
“저희는 키엘이랑 같이 성물을 모으는 여행을 했었어요.”
불현듯, 벨라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얘들한테 물어보면 되겠네.’
성물을 함께 모으는 동안 로잔느와 키엘에 대해서도 충분히 옆에서 봐왔을 테니.
원작이 얼마만큼 바뀌었는지는, 이를 통해 확인하면 된다.
“나도 많이…는 아니고 조금이지만 얘기 들었어.”
“정말요?”
벨라가 제대로 대답해주자 리오가 눈에 불을 켜고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키엘이 우리보고 뭐라고 하던가요?”
“어… 그냥… 쌍둥이?”
벨라의 담백한 대답에 리오는 크게 실망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성물이면 내 약점인데 그걸 잘도 모았네?”
“저, 저희가 그때는 마왕님이 마왕님인지 몰랐어요.”
쌍둥이들이 잔뜩 긴장한 걸 보자 벨라는 멋쩍었다.
‘농담이라고 한 건데….’
“그럼 키엘이랑 너희 둘만 다닌 거야? 성물 모으러?”
“저희랑 로한이라는 황궁 기사단장이랑….”
로한이란 이름에 벨라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키엘을 데리고 간 깐깐한 놈.
- “어차피 일어날 일입니다. 아가씨가 말씀하셨던 대로, 빨리빨리 해주면 더 좋겠죠.”
재수 없는 놈. 벨라가 기억하는 로한의 마지막은, 그녀가 손가락으로 욕을 하고 어이없어하는 모습이었다.
‘저택에 자객을 보낸 것도 그 녀석일 텐데.’
“로한은 왜 같이 간 거야?”
리오가 어깨를 으쓱였다.
“키엘 말로는 감시역이라던데요.”
그렇다고 그 싹수 노란 자식이 붙다니.
“또 다른 사람은 없어?”
리네는 로잔느에 대해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냥 따라나선 거긴 한데, 괜히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로잔느랑 마이유라고, 같이 여행한 애들이 있어요. 이렇게 6명이어서 여행을 했습니다.”
하지만 리네의 깊은 생각과 다르게 리오는 되는 대로 말해버렸다.
‘마왕님 표정이 안 좋은데….’
벨라의 표정이 안 좋은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역시 페터는 없구나.’
원래 그 여행에 함께해야 할 인물 때문에.
저택에 습격했다가 잔바르의 손에 죽은 자였다.
그리 큰 비중이 있는 역할은 아니었지만, 키엘이 힘들 때마다 말벗이 되어주곤 했는데.
‘키엘은 여행이 많이 힘들었을까?’
소설 속에서는 쌍둥이들과 안면을 얼마 트지 않은 상태에서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가족도 형제도 없던 키엘은 저 남매 사이를 많이 부러워하기도 했고.
‘가족이라면 우리가 채워줬으니까, 조금은 힘이 났었겠지?’
벨라가 말이 없자 쌍둥이들은 헛기침하며 얘기했다.
“궁금하신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물어보세요.”
“음… 그럼 키엘이 활약한 얘기 듣고 싶어.”
점수를 딸 기회를 놓치지 않는 리네가 신이 나서 설명했다.
성물을 빠르게 찾는 희한한 능력을 극찬하면서.
“어쨌든 검술 하나는 대단하긴 하다니까요. 오죽하면 호위도 없이 돌아다니는데 아무도 걱정을 안 하겠어요?”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키엘의 칭찬은, 퍽 기분이 좋았다.
‘이제 대련하면 내가 지겠네. 키엘은 경험이 있고, 난 없으니.’
그렇게 오래전에 혼내줬던 도적 떼들이 복수하러 왔던 이야기, 야영지에서 짐승들에게 둘러싸인 이야기를 리네는 늘어놓았다.
하지만 어째 벨라가 확인해야 하는 이야기는 도무지 나오지가 않았다.
“그럼 키엘이랑 로잔느랑은 어때?”
“네? 어… 어떤 면에서요?”
“아니, 둘 사이 말이야.”
“둘… 사이는….”
리네가 선뜻 대답하기 어려워하자 벨라는 질문을 돌려 물었다.
“용의 계곡에 갔을 때 얘기해봐.”
소설 속에서는 그곳에서 둘의 사이가 급속도로 가까워졌었다.
“요, 용의 계곡….”
“응. 로잔느에게 특별한 일 없었어?”
쌍둥이들은 벨라가 어떻게 용의 계곡을 아는지 궁금했지만, 차마 되물을 수 없었다.
“그때라면 아마… 로잔느가 타고 있던 말이 겁을 먹고 도망갔었어요.”
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고생을 좀 했는데…. 그게 단데요….”
“아니, 그래서 로잔느는 누구랑 말을 탄 거야? 키엘?”
리네는 머리를 굴리며 그때를 떠올리려고 했다. 키엘이 누구와 말을 같이 타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로, 로한 님이랑 같이 탔는데요.”
리오가 수줍게 손을 들자 벨라가 비명을 질렀다.
“뭐라고?”
쌍둥이들은 잠깐 생각했던 ‘어리숙한 벨라’ 와는 굉장히 다른 얼굴에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벨라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휴, 너흰 왜 이렇게 눈치가 없니!”
벨라는 한껏 짜증을 내며 뒤를 돌아섰다.
리네는 한숨을 내쉬며 리오의 옆구리를 찔렀다.
분명 벨라와 제대로 대화하는 건 처음이었는데.
그들이 화만 돋워버린 것 같았다.
“야, 누가 그런 식으로 대답하래?”
“도대체 저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되는 거야?”
“나도 몰라! 이걸로 계약은 물 건너갔잖아!”
벨라는 천천히 방으로 돌아와 자신의 짐을 뒤적였다.
쌍둥이들과 대화하고 난 후 머리만 아파졌다.
‘페터가 없는 게 그렇게 크게 차이가 나나?’
소설은 원작대로 흐르는 힘이 크다면서.
인물 한 명이 없어졌다고 해서, 사랑에 빠질 둘 사이가 소원해질 리는 없는데.
‘아무래도 소설이랑 비교를 해봐야겠어.’
이토록 좋은 햇살을 놔두고, 또 몇 달을 정리해야 한다니.
어느 빙의자가 빙의 되고 소설을 공부하듯이 연구한단 말인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핸드폰을 열었을 때였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비밀번호 10회 이상 실패로 일주일간 잠금 됩니다]
벨라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 푸르….”
마계에서도 이런 적이 있었다. 푸르가 엉덩이로 깔고 뭉개는 바람에 화면이 잠금이 되었던 게.
소설의 사본과 정리한 건 저택에 있지만, 이곳은 수도 근처의 황궁 소유의 별장이고 저택까지는 꽤 멀리 있었다.
누군가에게 시킬 일도 아니었다. 안의 내용을 알게 되면 기겁을 할 테니.
‘거길 뛰어갔다 와야 하나.’
벨라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 나 아직 회복이 안 되었지.’
그 먼 거리를 뛰어도 며칠이 걸릴 것 같은데. 마력이 회복되지 않아, 결국 마차를 타거나 말을 타야 했다.
‘상관없을까? 키엘이랑 로잔느랑 서로 좋아하기만 하면 끝 아니야?’
* * *
다음 날 아침, 벨라는 키엘의 방문 앞에서 노크하려다 멈췄다.
‘너무 시간이 이른가?’
시계라도 보고 올 걸 그랬는지. 마계에서의 습관처럼 그저 해가 뜨면 뜬 줄 알았다.
‘일어났으려나?’
안에 인기척이라도 들릴까 싶어, 벨라는 문 앞에서 바짝 귀를 기울였다.
그때 키엘의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렸다.
“들어와.”
배시시 웃던 어릴 때의 귀여운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는 낯선 만큼 차갑고 황태자 같았다.
벨라가 문을 빼꼼 열고 고개만 안으로 넣었다.
키엘은 그녀를 보지도 않은 채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류들만 보고 있었다.
‘…역시 남주라 그런가.’
하얀색에 금박으로 장식된 정장이 제법 잘 어울렸다.
예전에 후안 크루엘이 비슷하게 입었을 때는 은갈치 같았는데.
‘잘생겼네.’
알고는 있었지만, 마계에서 봤을 때와 달리, 아침 햇살을 등지고 서 있는 키엘은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한참 서류들을 보던 키엘은 벨라가 말이 없자 문쪽으로 시선을 올렸다.
“…무슨….”
눈이 마주쳤는데, 키엘은 마치 그녀가 귀신이라도 된 것처럼 멍하게 보고 있었다.
‘왜 저렇게 보지?‘
벨라가 머쓱하게 키엘에게 말을 걸었다.
“벌써 일어났네?”
“벨라?”
“들어가도 돼?”
벨라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문을 똑똑하고 두드렸다.
“으, 응. 들어와요.”
키엘이 급하게 일어서서 벨라에게 다가왔다.
“놀랐어?”
“아…. 이 시간에 올 줄 몰랐어요.”
“그럼 나중에 다시 올까?”
벨라가 살짝 뒷걸음질 치자, 키엘이 그녀의 손목을 잽싸게 잡았다.
“그냥 놀란 거예요.”
키엘은 아침 일찍 일어났는지 피곤해 보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흠… 장난 좀 쳐볼까.’
벨라가 정색하고 키엘을 마주 봤다.
“내가 아직도 벨라로 보이니?”
화들짝 놀란 키엘이 벨라의 손목을 놓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겁먹은 듯한 얼굴이 귀엽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는데, 키엘은 거의 울먹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 키엘, 농담한 건데.”
“… 진짜 벨라예요?”
“하하하. 진짜 속았어?”
벨라가 재밌다며 웃지만, 키엘은 다시 환하게 웃지 않았다.
‘도가 지나쳤나.’
이런 거에 무서워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미안, 귀신인 줄 알았어?”
키엘은 여전히 얼떨떨한 상태로 벨라를 접대하는 테이블로 안내했다.
“…앉아요.”
괜히 미안해진 벨라는 일부러 더 밝게 아무 말이나 던졌다.
“예전에 그때 귀신 기억해? 저택에 처음 간 날 너 괴롭혔던 귀신.”
“…….”
“그때 마계에 던져놨었거든. 걔 요즘 뭐하는 지 알아?”
“…몰라요.”
“처음에 애들이 어떻게 갖고 노는지 모르길래 내가 공놀이 가르쳐줬어. 뭐… 룰은 여전히 모르는 거 같지만.”
벨라의 실없는 소리에, 키엘이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머리 잘라서 공으로 쓴다고요?”
“응. 그러니까 귀신 봐도 걱정하지 마. 내가 다 혼내줄 테니까.”
“… 꿈에 벨라가 나오면요?”
그녀는 손을 올려 키엘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어느덧 성인인 데다가, 상대는 황태자지만 무의식적으로 손이 먼저 나갔다.
“내가 나오면 길몽이야, 다음 날 복권 사도록 해.”
“그게 뭐예요.”
이제야 그가 얕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볼을 꼬집는 벨라의 손등 위로 손을 감싸 안았다.
“아침부터 웬일이에요?”
벨라는 그제야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했다.
하마터면 깜빡하고 돌아설 뻔했다.
‘잘생겨서 그래.’
원래 예쁜 걸 보면 잠시 넋이 나갈 수도 있으니까.
벨라는 조심스럽게 키엘에게 물었다.
“너 성물 모을 때 여행했다는 애들 소개해준다고 했잖아. 쌍둥이들이랑….”
“조금 있으면 올 거예요. 그때 인사시켜줄게요. 리네는 벨라도 알다시피….”
어째 쌍둥이 얘기들만 할 것 같아서, 벨라가 먼저 그의 말을 자르고 물었다.
“로잔느랑 마이유는 언제 소개해 줄 거야?”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둘 다 소설을 알지만 서로 아는 것을 감춰야 하는 상태.
하나는 원작대로 가기를 원하고, 하나는 아니었다.
키엘이 소설을 몰랐더라면 벨라의 질문에 순순히 답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마계에서 벨라가 불안에 찬 눈으로 손톱을 물어뜯던 걸 기억했다.
- “아니지, 로잔느랑 꽁냥할 시간에 날 찾은 거면….”
초점 없는 눈동자와 떨리는 손은 키엘이 원하던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니 천천히. 빠져나갈 수도 없고 무너질 수도 없는 덫을 하나씩 놓는 수밖에.
그리고 덫도, 미끼도.
이 작은 고양이가 그리로 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 아직은 벨라가 착각하게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찾아보고 있어요.”
그 노트에 적혀 있는 대로.
비록 로잔느에 대한 부분은 검게 칠해 기억도 안 나지만.
- “아니야… 어차피 사랑 얘기니까 그거만 되면 뭐 상관없겠지만….”
그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기에, 그는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었다.
한편 벨라는 키엘의 진지한 얼굴을 보며 골똘히 생각했다.
‘어차피 로잔느는 황태자비 경합 때 다시 만나겠지.’
키엘이 벨라에게 로잔느를 좋아한다고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수년간 읽어온 소설 속의 열띤 로맨스가 남아 있었다.
키엘의 일기 같던 그 소설을 보면서, 당연하게도 그의 마음이 로잔느를 향할 거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를 찾고 있다고 했으니, 다행히 원작대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기분이 왜 이렇게 묘하지.’
로잔느와 어떤 단계까지 와 있는지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페터의 죽음으로 소소한 사건들은 충분히 바뀔 수 있다.
그걸 하나하나 다 대조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고.
‘굳이 확인사살 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묘한 기분도 잠시 스쳐 지나가고, 그녀는 진심으로 키엘의 행복을 바랐다.
‘이제 편하게 인간계에 있을 수 있겠어. 어쨌든 둘이 서로 사랑하면 된거지, 뭐.’
그리고 그녀의 행복도. 이대로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내며 완결 날 때 다음 소설로 가는 일만 남았다.
“키엘, 곧 만나게 될 거야. 걱정하지 마.”
“벨라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밝게 웃었다.
“나는 다 알지. 하지만 안 알려줄 거야.”
“…….”
“대신에 힘들면 언제든지 도와줄게.”
축복을 빌어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벨라는 그 둘을 위해 힘써 돕겠다고 결심했다.
“뭘 도와요?”
“너랑 로잔느 사이….”
그때 키엘의 눈빛이 흔들렸다.
‘너무… 간섭하는 거 같나?’
벨라도 전생에서 언니가 ‘넌 요즘 연애 안 하느냐’고 물어볼 때마다 ‘주책바가지’라고 툴툴댄 적이 있었다.
안 그래도 자기가 못된 시누 짓이라도 할까 봐 걱정이었는데.
이참에 벨라는 모든 패를 다 내보이기로 했다.
“그게 아니라…. 내가 예전에 로잔느를 할퀸 적이 있거든.”
“…왜요?”
“나도 모르겠어. 그게 고양이로 변했을 때라.”
키엘의 눈빛이 매섭게 바뀌었다.
“설마….”
“왜? 왜?”
“어쩐지….”
“왜! 왜!”
궁금증만 유발해놓고 그는 한참을 생각하다 말했다.
“고양이를 극도로 무서워하더라고요. 어릴 때 고양이 마족에게 당했다나.”
“맞아! 그거 나야, 나.”
키엘이 조금 화가 난 듯 보였다.
‘와…. 자기 사람이라고 건드리지 말라는 건가?’
하지만 벨라는 오히려 안심되었다.
마치 제 사람을 감싸듯 ‘건드리지 마라’고 으르렁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걱정하지 마. 해치지 않을 거니까.”
키엘이 로잔느를 떠올리면, 그것도 고양이와 연관되어 떠올리면 화날 법도 했다.
성물을 모으는 여행중.
마을에서 검은 고양이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고양이가 사람을 따르는 걸 별로 본 적이 없었는데, 유독 그 고양이는 키엘의 다리에 머리를 맞대고 냥냥거렸었다.
당시 키엘은 그게 벨라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동물왕국의 공주니까. 어쩌면 동물로 다시 돌아간 건 아닐까.
설령 아니더라도, 그렇게라도 벨라를 기억하고 싶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마이유가 방해했다. 그것도 벨라가 ‘나중에 도움이 될 거’라는 마이유가.
- “안 돼, 로잔느는 고양이 트라우마가 있단 말이야.”
키엘의 여행이었는데, 왜 로잔느를 신경 써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었다.
그리고 그날, 고양이를 보고 겁에 질린 로잔느가 화들짝 놀라 그녀도 모르게 키엘의 품에 안겼었다.
정말 안고 싶은 사람은 이 세상에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 않았는데.
곧바로 밀쳐 내려 했지만.
- “고양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런 트라우마를 앓고 있는 로잔느에게 화를 냈다가는 천하의 몹쓸 놈이라도 될 기세였다.
- “어릴 때 고양이처럼 생긴 마족이 잡아먹으려고 해서 그래. 저 고양이랑 똑같은 검은 고양이.”
그때는 벨라가 마족이란 걸 몰랐기에 속으로 마족 따위와 벨라와 똑 닮은 검은 고양이를 비교하는 게 싫었었다.
그리고 이제 그 사실을 알게 된 키엘은 다른 의미로 화가 났다.
“난 응원하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알았지?”
‘도대체 로잔느는 왜 그런 거예요? 어릴 때부터 엮어주려고?‘
서러움이 목까지 차오르지만 끝내 삼켜야 했다.
키엘은 벨라의 심장이 천천히 느리고 차분하게 뛰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안도와 평안이 벨라에게 찾아오는 듯싶었다.
그는 떨리는 자신의 심장을 감추고 입술을 천천히 떼었다.
“그러면 내 옆에서 도와줄 거죠? 내가 힘들면.”
“당연하지. 이제 걸릴 것도 없겠다, 언제든지 말만 해!”
그의 마음이 향하는 곳은 눈앞의 당신이라고 얘기를 하고 싶은데.
오래도록 기다려온 만큼 마음의 준비가 하나도 안 되어 있을 벨라에게 고민을 떠안기듯 고백하고 싶진 않았다.
“그럼… 혹시 후안 크루엘 기억해요?”
“은갈치?”
“네?”
“아, 아냐. 후안 크루엘은 왜?”
그러니 그는 한 마리의 고양이를 천천히 유혹한다.
그녀의 선택이 오로지 하나밖에 안 남을 때까지.
“크루엘 공작가의 양녀로 들어갈래요?”
크루엘 공작가.
벨라가 기억하는 공작가의 결말은 자승자박, 인과응보였다.
키엘이 황궁에 들어오며 어떤 뒷배도 없을 때 크루엘 공작가는 그에게 큰 힘을 실어줬었다.
유일무이하게 그가 의지하는 공작가였기에, 그들은 황태자비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슈리아 크루엘은 후계를 후안 크루엘에게 넘기고 황태자비가 되려고 했다.
워낙 검술이 뛰어난 자라, 황태자비에는 별 관심도 없었는데도.
하지만 키엘의 마음은 이미 로잔느에게 가 있었고, 허울뿐인 황태자비 경합을 증오하며 점점 흑화되는 캐릭터였다.
증오와 질투에 눈이 멀어 마지막에는 키엘에게까지 해를 가하고, 결국 공작가는 멸문한다.
물론 그런 슈리아가 벨라의 차애이긴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야망이 넘치는 여자.
공작가의 후계자로 태어났는데, 큰 뜻을 품어야지.
* * *
“크루엘가의 양녀로 들어갈래요?”
“…양녀?”
“벨라에게 보증할 만한 신분이 없으면 황궁에 들어올 수 없어요.”
새삼 벨라는 이 소설의 가장 큰 주제가 떠올랐다.
신분 차를 넘어선 사랑.
제국은 영토부터 컸고, 정치 관계가 굉장히 복잡했다.
그럼에도 황권 중심일 수 있던 건 황족들의 절대적인 마력과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이었다.
“공작가의 후견을 받으면 나도 벨라를 언제든지 보러 갈 수 있고.”
원작이 완결되는 해가 정확히 어느 해인지는 모른다.
일련의 사건들은 끝나지만, 소설이 끝나는 시점은 몇 년이 훌쩍 지난 먼 미래였다.
기왕 인간계로 온 김에, 벨라도 키엘이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다.
“으음….”
벨라는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내가 정말 양녀로 들어가도 되나? 소설에 지장이 있을 거 같은데….’
키엘은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이 손을 잡고 웃었다.
“벨라가 신경 쓰고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을 거예요.”
“그럴까…?”
“문제 될 건 없잖아요?”
“그…렇긴 하지.”
이 소설의 엔딩은 결국 키엘과 로잔느의 사랑 이야기니까.
키엘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눈에 보였다.
분명 제 딴에는 보답하고 싶은 최고를 보답하려고 하는 걸 텐데.
‘멸문할 가문에 양녀로 들어간 다라….’
과연 옳은 선택일까. 물론 슈리아와 상관없이 키엘이 벨라를 처벌할 거 같진 않았다.
“기왕이면 좋은 가문에 양녀로 들어가면 좋을 거 같은데.”
그저 자연인으로 살아도 좋겠지만,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다는 걸 벨라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이며 좋은 가구들.
저녁에 먹었던 만찬이 아직도 혀끝에 그 맛이 감돌았다.
거기다 이제 이웨르의 묘약을 판매하는 것도 불법이니 돈을 벌 궁리도 해야 하고.
“하긴… 기왕이면….”
하루하루 생활하는 게 힘든 평민보다는, 귀족가의 양녀로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공작가에서 양녀를 들이고 싶대?”
명색이 공작은 황족 다음으로 버금가는 신분인데.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지 않을까? 민폐 끼치는 거 아냐?”
굳이 벨라를 양녀로 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오래전에 크루엘 공작가에서 어린 공녀가 실종된 적이 있어요.”
그런 설정은 처음 들어보는데.
“전부 은발인 가문에 혼자 흑발이었대요. 존재를 숨겼다는데, 아마 벨라를 보면 그 공녀처럼 대해줄 거예요.”
키엘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그녀의 염려를 자장가처럼 재워갔다.
“후안 크루엘이랑 인연도 있어서, 공작가에서 더 잘해줄 거고.”
“푸르 같은 마족들도 있고….”
“그런 건 걱정하지 마요.”
그 말에 벨라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했다.
“세부사항은 신경 안 써도 돼요. 어떻게 할지 생각해뒀으니까.”
그러고 보면 그가 마계로 올 때도, 여러 경우를 대비해서 오기도 했었다.
“벨라는 그냥 그 신분만 가져가면 돼요.”
아주 대단한 거로 신분세탁 하는 건데….
“현재 공작가의 피후견인은 슈리아 크루엘인데, 검술을 좋아해서 벨라랑도 잘 지낼 수 있을 거예요.”
슈리아라는 말에 벨라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양녀로 입양하는 데 어떤 문제도 없어요.”
소설 속에서도 철두철미하고 똑똑한 사람인 만큼, 벨라는 키엘의 말에 점점 현혹되어 갔다.
항상 촉촉하게 젖어있던 호박색 눈동자가 단단한 보석이 되어 빛나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좋은 제안이었다. 소설 속의 내용이 크게 달라지지만 않는다면야.
“결정하기 힘들다면 슈리아 크루엘을 만나보는 건 어때요?”
‘지금 내 최애가 차애를 가지고 딜하는 거야, 뭐야.’
“가족 같은 사이가 아니라 그저 후견인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벨라와 메리 같은 관계.”
검술 교실의 메리. 벨라가 특별히 신경 써서 용병단에 소개까지 하고 용돈도 쥐여줬다.
“누릴 수 있는 건 다 누릴 수 있어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달콤하게만 들려왔다.
“원하는 건 뭐든지 다.”
악마를 유혹하는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벨라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 그러니 옆에 있을 수 있게 해요.”
그녀를 설득하는 키엘의 목소리는 점점 애달프게만 들려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결국 벨라는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문제가 될 행동만 안 하면 돼. 어차피 키엘 옆에 있는 게 오히려 더 원작대로 할 수 있고.’
한 번 방향을 정하자, 앞으로 그녀의 미래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기대되었다.
“알겠어. 양녀로 들어갈게.”
훗날 그녀가 이날을 회상하며 얼마나 지독한 감정과 마주칠지 모른 채.
* * *
모든 인원이 응접실에 모였고, 키엘은 그들만 알아야 하는 과정을 얘기했다.
벨라는 들으면 들을수록, 키엘이 빈틈이라곤 하나도 없이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세계에서 넘어왔다?”
벨라가 동물왕국에서 인간계로 왔고, 그런 그녀가 어릴 때 실종된 공녀와 닮아 입양하는 이야기였다.
따지고 보면 정곡을 찌른 거기도 한데.
젠킨스는 키엘의 이야기를 곰곰이 듣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연. 그 정도면 괜찮다를 넘어서 획기적인데요? 일반적으로 아무 이점이 없는 사람을 그저 닮았다는 이유로 입양하진 않겠죠. 그것도 다 큰 성인을.”
벨라도 젠킨스의 말에는 동의했다.
크루엘 공작가가 이세계에서 온 소녀를 제 편으로 만든다면.
‘확실히 입지가 더 넓어지긴 하겠지.’
하지만 왠지 석연치가 않았다.
차원이동이 그리 쉬운 일인가? 왜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 안 하지?
“이세계에서 왔다니…. 누가 그런 걸 믿을까? 오히려 사기라고 하지 않을까?”
“초대 황제도 이세계 사람이었어요.”
벨라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멋쩍은 듯 목덜미를 만졌다.
“아, 그래?”
소설에서 접하던 세계관보다 실제는 더욱 거대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아가씨, 인간계 역사는 아예 몰라용?”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벨라가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젠킨스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초대 황제 이야기도 모르세요?”
“몰라.”
젠킨스는 키엘의 이야기를 들으며 감탄만 하고 있다가, 벨라가 생각보다 이곳의 역사를 모른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알다가도 모르겠네.’
그는 때때로 벨라가 열 살의 나이답지 않게 성숙하고 아는 게 많다고 생각했었다.
“헛똑똑이였네.”
그리고 그는 자기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아…….”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해지고, 벨라는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젠킨스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너 요즘 살 만하구나?”
젠킨스는 어째 마계로 돌아가기 전보다 훨씬 더 벨라의 웃음이 음산하게 느껴졌다.
벨라는 푸르를 쓰다듬다가 키엘에게 물었다.
“그런데 양녀로 가면 우리 푸르는 어떻게 해?”
안타깝다는 듯 말하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핸드폰이 잠긴 것도 결국 푸르 때문일 텐데, 옆에 있어봐야 도움은커녕 방해거리만 될 테니까.
그때 키엘이 담담하게 말했다.
“푸르도 벨라와 함께 이세계에서 왔다고 하면 될 거예요.”
혹 떼려고 한 건데, 뜻밖에도 키엘은 거기까지도 생각한 모양이었다.
“오히려 증거가 될 거예요.”
모든 대답이 마치 준비된 것만 같았다.
‘진짜 철저하네.’
이 모든 게 하루아침에 될 일은 아닌 듯 보여 미안할 정도였다.
* * *
결정한 지 며칠이 되지 않았는데도 크루엘가와는 이미 이야기가 되었는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벨라는 당분간 크루엘가에 머물기로 했다.
“꽤 멀구나. 마차로 일주일이나 걸리네.”
크루엘가의 본가는 예전에 여름 축제가 열렸던 도시 ‘데이저’에 있었다.
“수도에 별채가 따로 있어서 나중에는 그쪽에서 지낼 거예요. 처음 만나는 거니까 본가로 가서 인사만 나눠요.”
“아가씨가 도착하면 소환해주는 건 어때용?”
안타깝게도 벨라의 힘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진작에 나았어야 할 상처는 회복되고는 있지만, 매우 더뎠다.
크루엘가에 도착했을 때 소환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고.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일주일이나 마차를 타고 간다는 것.
“나만 고생하기 싫으니까 다 같이 가.”
벨라도 마계로 가기 전 꽤 오래 여행을 했고, 키엘도 그러했기에 오랜만에 나선 여행길은 낯설지 않았다.
이웨르와 푸르는 또 마부를 하겠다며 나섰고, 쌍둥이들은 각자 말을 타고 마차를 호위했다.
“좁아터지겠네.”
마차에는 젠킨스와 덩치가 제법 큰 잔바르까지 타게 되었다.
“너도 그냥 말 타지 그랬어?”
“그딴 짐승을 왜 탑니까?”
“어휴….”
벨라가 혀를 차자 키엘은 그 모습도 그리웠는지 미소를 지었다.
“둘이서 마차 타는 거 오랜만이네요.”
“저희 넷입니다, 도련님.”
하지만 벨라도 키엘도, 젠킨스의 말은 무시한 채 대화했다.
“첫 마차 여행은 예전에 산적들한테 마차 습격받았었는데. 그치?”
그 말에 모두 과거로 돌아간 듯 회상했다.
“여름 축제 갈 때는 진짜 더웠어요.”
“이웨르 씨는 왜 맨날 마부 하겠다는지 모르겠네요.”
“걔 말로는 그게 제일 섹시하데.”
추억을 한 장씩 꺼내며 즐거운 대화들을 나누던 중이었다.
꽤 오래전과 비슷하게, 마부석에서 갑자기 이웨르의 익숙한 비명이 들렸다.
“꺄아!”
한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키엘이 앉은 방향이 바닥으로 내리 앉았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는데.
물론 그때는 젠킨스가 벨라의 위를 덮쳤지만.
“다들 괜찮아용?”
순식간에 마차가 뒤집히고 벨라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키엘의 품에 안겨있었다.
“어머…. 지금 두 분… 뽀뽀하는 거예용?”
그리고 그녀가 절대로 원하지 않은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마차가 뒤집히고 벨라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키엘의 품에 안겨 있었다.
하필이면 그의 가슴에 손이 올라가 있었다.
마계에서 붕대를 감겨줄 때도 볼 수 있었지만. 그때는 상처에 집중하느라고 눈치채지 못했었다.
‘생각보다 단단하네.’
또래보다 어려 보이던 키엘은 이제 없었다.
“다들 괜찮아용?”
“너는 무슨 운전을….”
이웨르의 말에 벨라는 사태를 파악하려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어머…. 지금 두 분… 뽀뽀하는 거예용?”
이웨르의 말에 화들짝 놀란 잔바르가 자신을 덮치듯 올라서 있는 젠킨스를 밀어냈다.
“무슨 소리!”
보통이었으면 이웨르에게 ‘눈을 어디다 달고 운전을 이따위로 하느냐’고 화냈겠지만, 벨라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충격이었다.
소설에 빙의하고 14년.
전생에서도 드라마나 영화는 바빠서 못 봤는데.
눈앞에서 남녀, 아니 남자와 남자가 입을 맞추는 걸 목격하다니.
그것도 다른 이도 아니고 잔바르와 젠킨스라니.
‘소름 돋네.’
벨라는 몸을 떨며 키엘에게로 더 바짝 붙었다. 따지고 보면 그들에게서 아주 조금이라도 간격을 더 벌리고 싶었던 거였지만.
그리고 키엘은 자신에게 더 다가오는 벨라를 멍하게 바라봤다.
옆에서 보는 붉은 눈만큼 그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다시 만난 이후로, 이렇게 안고 가까이에서 내려다볼 기회는 좀처럼 없었기에.
지난번처럼 누군가 마차를 습격한 건 아니었다.
가는 길에 한쪽이 웅덩이처럼 파여 있었는데, 대수롭지 않게 지나친 마부의 잘못이었다.
항상 밝은 푸르마저 입을 다물고 무릎부터 꿇었다.
언제 혼낼지 몰라 조마조마하게 폭풍을 기다리고 있는데, 벨라는 아무 말 없이 혼자 생각에 빠져 있었다.
‘둘이 원수 아니었어?’
분명 벨라가 봤을 때 그저 단순한 우연이긴 했는데.
‘보통 그런 일 생기면 바로 떨어지지 않나?’
한참이나 입을 포개고 있는 모습이 영 꺼림칙했다.
‘설마 둘이 좋아하는 사인가?’
그리고 생각보다 벨라의 촉은 예리했다.
‘아니겠지, 마족 따위가 사랑 같은 걸 할 리가 없잖아.’
하지만 그 촉은 한 표의 지지도 받지 못하고 밀려났다.
생각하면 역겨웠으니까.
수백 번을 말해도 고쳐지지 않는 그 살육을 즐기고 힘을 갈망하는 본능은 타인을 사랑하기에 가식적이었다.
“벨라.”
그리고 키엘이 여러 번 부르는 소리에 팔짱을 낀 채 골똘히 생각하던 벨라가 고개를 들었다.
“응?”
“괜찮아요?”
그제야 벨라는 모두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왜?”
그때 리오가 마차를 살펴보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어쩌지, 바퀴가 안 굴러가는데.”
한쪽으로 갑자기 중심이 쏠리면서, 바퀴 통과 바퀴 살이 꽉 끼어 움직여지지 않았다.
“미끄러운 기름 같은 걸 부으면 될 거 같은데.”
그들이 떠나온 지도 반나절이 지났고, 가까운 마을은 마차를 타고 두 시간은 걸리는 곳이었다.
벨라는 아무 말 없이 가까이 다가가서 리오가 낑낑대는 걸 보고 있었다.
리오가 안간힘을 다했지만, 얼굴만 시뻘게질 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비켜봐.”
“네?”
리오가 당황해 하는 사이, 벨라가 통과 살을 한 손씩 잡았다.
“아… 참, 나 아직 회복 안 됐지.”
아직 등의 상처도 아물지 않았던 걸 또 깜빡했다.
“잔….”
이럴 때 잔바르를 시키면 되는데. 좀 전의 그 장면을 봐서인지, 말을 걸기가 민망했다.
벨라는 그냥 있는 힘껏 밀어보기로 했다. 아직 회복은 덜 되었지만, 신체 능력은 마력과 큰 상관이 없는 걸 테니.
빠각.
예상대로 신체 능력은 상관이 없긴 했는데.
‘아… 너무 힘줬다.’
아예 바큇살이 부서져 버렸다.
부서지는 그 소리를 기점으로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차마 저걸 맨손으로 부술지 누가 알았겠는가.
‘요즘 잘 먹고 잘 잤더니….’
부쩍 기력도 좋아진 모양이었다. 살도 올랐는데.
“어… 저… 이게… 왜….”
그리고 제일 놀란 건 리오였다. 어째 그가 생각하는 ‘로잔느와 닮은’ 이미지와는 너무 달랐었다.
“뭘 봐? 부서진 거 처음 봐?”
이런 거까지도.
벨라는 괜히 멋쩍어서 리오에게 툴툴대고 일어섰다.
“음. 내가 인근의 마을 갔다 올게. 그… 금방이면 될 거야.”
그러자 젠킨스가 그녀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길은 아세요?”
“몰라. 그냥 길 따라 뛰어가면 되잖아.”
“길 잃으면 어쩌려고요? 초행이잖아요.”
“여태 초행인 길 잘도 갔잖아.”
“그래서 화국으로 간 거 기억 안 나세요?”
키엘이 황궁으로 들어가고 그들끼리 여행할 때 이야기였다.
잔바르가 실수로 자꾸 사람을 죽여버리는 바람에,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갔을 뿐인데.
“원래 화국 가려고 했다고 몇 번 말해!”
“그때…. 도착하자마자 한 말 기억 안 나세요?”
“내가 뭐라고 했는데?”
이웨르는 무릎을 꿇고 알아서 손을 들고 있다가 대답했다.
“어라, 화국이네?라고 했어용.”
그리고 마족들이 그때를 회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때문에 가는 건데 아가씨가 길을 잃으면 어떻게 해요? 마력도 안 돌아와서 무전도 안 될 텐데.”
벨라가 옳은 말 하는 젠킨스를 얄밉게 노려보려다 고개를 홱 돌렸다. 자꾸 잔바르랑 엮여서 생각나길래.
그때 잠자코 보던 키엘이 상황을 정리했다.
“가까운 마을에 갔다 와도, 해가 져서 내일 아침에나 올 수 있을 거예요.”
벨라가 일어서자 그는 곧바로 리오를 쳐다봤다.
“리오. 너희가 가서 수리공을 데리고 올래? 우린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러자 쌍둥이 호위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키엘, 아무리 여기 있는 사람들이 믿음직하다고 해도 우리가 네 옆을 비울 순 없어.”
“게다가 야영할 도구도 없는데?”
리네도 덩달아 만류했다.
“성물을 모을 때도 아무것도 없이 이런 숲속에서 밤을 보내진 않았잖아. 얼마나 위험한데.”
“그럼 다른 대안 있어?”
“우리랑 같이 가. 내일 아침에 수리공이랑 오면 되니까.”
벨라도 동의했다. 그녀 때문에 괜히 키엘이 이런 곳에서 추위에 떨게 하고 싶진 않았다.
“갔다 와. 우린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싫어요.”
그리고 벨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키엘이 대답했다.
“난 벨라랑 있을 거예요.”
그것도 볼멘소리로.
“아냐. 아무리 그래도 네가 황태잔데 이런 데서 자게 할 수는 없잖아.”
“그럼 벨라는 괜찮고요?”
“우, 우린 노숙을 많이 했어.”
“나도 많이 했어.”
“네 호위가 안 된다잖아.”
키엘은 그녀는 시선을 회피하면서 고집 있게 다시 한번 더 말했다.
“같이 있을 거라고 했어요.”
벨라는 그의 반응에 당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겨우 이런 걸로 이렇게 고집을 부릴 줄은 몰랐다.
“그러지 말고….”
“싫어. 위험하잖아.”
당황스러운 건 쌍둥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맨손으로 바퀴를 부순 벨라에게 위험하다니.
하지만 키엘에게도 이유는 명확했다.
인간계로 다시 오고 난 이후로, 그는 밀린 업무 때문에 벨라와 제대로 같이 있던 시간이 많이 없었다.
이미 그럴 줄 알았기에, 마계에서 오래 있고 싶었건만.
그렇기에 반나절, 아니 단 1시간이라도 벨라와 있을 수 있는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이웨르는 들고 있던 팔을 슬쩍 내리면서 말했다.
“그럼 네 분이어서 갔다와용. 저희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용.”
오히려 이웨르와 푸르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지금은 벨라가 딴죽을 걸지 않지만, 이곳에서 노숙하다 조금만 불편하면 이 일의 원흉인 그들을 닦달할 게 뻔했다.
게다가 벨라가 없어야만, 젠잔 커플이 뭐라도 할 거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양심이 있지. 내가 바퀴를 부쉈는데.”
“양심 있는 게 더 이상한데용?”
그 말에 벨라는 깨달은 듯 눈을 반짝였다.
잠깐 인간계에 있더니 정말로 인간이 되어버린 듯 착각했다.
“그러네. 나 마족이었지?”
굳이 양심을 챙길 필요가 없는 마족.
* * *
쌍둥이들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하지 못했지만, 그야말로 충격의 도가니였다.
몇 년간 키엘을 봐 왔지만, 그가 감정을 내비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웃는 것도 겨우 몇 초에 불과했던 그가 처음 젠킨스와 이웨르를 만났을 때 환한 미소를 보이던 것도 충격이었는데.
여태껏 ‘싫다’고 말한 적도 많았건만 아까의 말투는 그냥 떼쓰는 것처럼만 보였다.
그리고.
“나 근데 말 타 본 적 없는데, 괜찮겠지?”
분명 저 질문은 로잔느도 했었는데.
“그럼 나랑 같이 타요.”
대답은 극과 극이었다.
그때 분명 ‘낙마한다고 죽기야 하겠어?’라고 대답했었다. 자기 몸에 손대는 거 극도로 싫어하면서.
게다가 벨라가 그의 손을 살짝 빼면서 괜찮다고 하는데도.
“아냐, 그냥 혼자 타 보면 되지.”
“그러다 떨어지면 어떡해요?”
“설마 죽기야 하겠어?”
애달프게 걱정하는 눈빛으로 다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쌍둥이들은 서로 눈이 마주치자, 그들이 똑같은 생각을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로잔느에겐 그렇게 박하더니….”
원래 성격이 어딘가 날카로운 줄로만 알았는데, 알면 알수록 더 미궁에 빠지는 것 같았다.
미궁에 빠지는 건 벨라도 마찬가지였다.
‘아, 괜히 말해서….’
전생에서 승마란 그리 쉽게 접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처음 타 보는 거니 별 의미 없이 한 말인데, 그걸 걱정하며 같이 타자고 하다니.
‘로잔느도 못 태웠을 텐데….’
하지만 저 초롱초롱한 호박색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으면 마치 커다란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잘생긴 건 진짜 반칙이야.’
어릴 때는 귀여워서 반칙이었는데.
결국 그의 손에 이끌려 말 위로 올라섰다.
‘뒤에 타면 연인 같으니까….’
벨라는 2인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연상하며 앞쪽으로 몸을 움직였고, 키엘이 이윽고 올라섰다.
“벨라, 안장이 없으니까 끈 잡아요.”
“응응.”
그렇게 말이 몇 걸음 앞으로 나가고, 벨라는 조금 전의 그 결정을 후회했다.
‘이… 이게 더 이상한데?‘
벨라가 고삐의 가운데를 잡고, 늘어진 고삐를 키엘이 마저 잡아 말을 조종했다.
그가 뒤에서 안고 있는 이 자세가, 상당히 낯설고 부끄러웠다. 그러고 보면 여태 어린아이 안아주듯 앞에서 안아줬지, 뒤에서 그가 안아보긴 처음이었다.
그녀의 몸 옆으로 꽤 굵어진 팔이, 그녀의 등 뒤에 딱 붙어 숨 쉬는 그 숨이.
거기다 말의 보폭에 맞춰 위아래로 흔들리며, 점점 그의 몸과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고.
그가 끈을 잡아당기자, 말은 천천히 걷다가 뛰기 시작했다.
“벨라.”
저 낮고 그리웠던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다치겠어요.”
이미 심장에 해로웠다.
“조금만 숙여볼래요?”
얼마나 달렸을까. 말을 타고 빠르게 이동해서인지, 마차보다 훨씬 빨리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이러면 해지기 전에 수리공을 보낼 수 있겠는데?”
“내가 찾아볼게.”
쌍둥이들은 서로 이야기하고 키엘의 허락을 기다렸다.
하지만 키엘은 눈에서 꿀이라도 떨어질 듯 벨라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키엘을 보고 있는 쌍둥이들의 표정은 썩어갔다.
“와…. 이건 적응 안 된다.”
“수리공이나 찾아. 난 여관이나 찾을 테니까.”
* * *
“조금만 숙여볼래요?”
괜히 배려한답시고 앞에 탄 게 더 연인 같은 느낌일 거라 곤 생각도 못 했다.
‘로잔느도 못 해본걸….’
그 묘한 두근거림이 아주 싫은 건 아니지만, 괜스레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마차로 두 시간 걸릴 거리가 거의 배나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그 시간은 벨라에게 억겁처럼 느껴졌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어찌나 긴장해서 경직되었는지 어깨가 딱딱해졌다.
마을 어귀에 도착하자마자 키엘이 낯간지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또 불렀다.
“…벨라?”
“아냐. 내리자, 내려. 덥네, 더워.”
아직 쌀쌀한 봄이었고, 말을 달리며 찬 바람을 잔뜩 맞았는데도 어째 더웠다.
어느새 키엘은 말에서 내려 벨라를 올려다보고 그녀의 허리에 손을 짚었다.
“…!!!”
“왜 그래요?”
벨라가 화들짝 놀라 움찔거렸지만, 애써 아닌 척했다.
“뭐… 하는 거야?”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 벨라의 손을 잡았다.
“안 내릴 거예요?”
벨라가 한쪽 다리를 반대편으로 겨우 돌리자, 그는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벨라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끌어내리듯이.
하지만 부드럽게.
그녀의 심장이 얼마나 뛰고 있었는지는 키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벨라를 품 안에 가둔 채 짓궂게 웃으며 물었다.
“긴장했나 봐요?”
“응. 말 탄 건 처음이라.”
“아하.”
벨라는 덥다며 손으로 부채질하며 쌍둥이를 찾았다.
“쌍둥이들! 우리 어디서 묵을 거야? 밥 먹자!”
* * *
한편 마족들은 부서진 마차 근처에서 나름의 유희를 보내고 있었다.
“아가씨 보낸 건 잘했어요.”
젠킨스가 웬일로 이웨르를 칭찬했다. 이웨르는 그런 그를 보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이참에 잔바르 님이랑….”
“내가 알아서 합니다.”
퉁명스럽게 말을 자르고 뒤돌아서는 젠킨스.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웨르는 그를 흉내 냈다.
“눼가 알아서 홥뉘돠.”
“이웨르! 그런데 이웨르는 젠잔 커플 찬성이야?”
푸르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이웨르에게 물었다.
“뭐, 나야 몽마니까 어떤 사랑 얘기든 다 좋은뎅.”
“몽마들이 그러던데. 곰족이 다 죽은 건 젠킨스 때문이라고!”
그 말에 이웨르는 장난처럼 누워있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 그게.”
젠킨스의 어머니였던 루시트는 푸르와 같은 곰족이었다.
대장군 중에서도 가장 신임을 받던 자였고, 잔바르가 존경하는 동료이자 친구.
그리고 마왕의 반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갑자기, 마계에는 없는 개념인 ‘아들’이란 놈이 나타났는데, 하필이면 그게 인간과 결합해서 생긴 반마족이었다.
애초에 ‘사랑놀음’도 몽마들이나 하는 저급한 놀이라며 비웃는데, 그들로서는 하찮은 인간과 엮였다는 게 자존심도 상했었다.
“그, 그래도 곰족이 다 죽어서 푸르가 아가씨 옆에 있을 수 있는 거잖아?”
종족을 다 멸살시켜놓고, 선대 마왕은 일말의 양심이 있었는지 마지막 남은 곰족, 푸르만은 살려두었다.
그리고 그가 동면할 때.
어디에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말도 못 배운 푸르를 찾아와 그녀를 후계의 하녀로 임명했다.
아무도 선대 마왕의 의도는 모른다.
추후에 벨라가 마왕의 힘을 전부 승계받으면, 그녀만이 알겠지.
“그러면 젠킨스를 좋아 해야는 거구나!”
다행히 푸르는 단순해서 이상한 논리도 잘 이해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나도 응원해야지!”
“그래, 그랭.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이웨르는 푸르가 늘 이렇게 해맑고 조금 모자란 친구인 게 좋았다.
처음에야 차기 마왕에게 신임을 얻으려고 이용한 거긴 하지만.
“그럼 푸르, 우리 내기할랭?”
“응응!”
“난 둘이 잔다에 내기!”
“나도!”
“둘 다 똑같은 거에 걸면 어떡행!”
* * *
키엘은 리오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이곳은 비브르 후작의 전 영토였기에, 현재는 키엘이 관리해야 하는 영토 중 하나였다.
“수리공은 내일 새벽에 동이 트는 대로 나랑 같이 갈 거야.”
리오는 키엘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한 일부터 도맡았다.
키엘은 챙겨둔 서류를 보면서 쭉 마을을 둘러봤다.
“생각보다 아주 작은데?”
영주가 잠시 머무를 만한 별채도 없는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회관도 없이 여관에서 주로 모인다고 들었는데.
“세금을 왜 이렇게 받는대?”
키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리오, 황궁에 연락해서 조사단을 편성하라고 해줘.”
눈으로 확인한 마을조차, 규모에 맞지 않게 세금을 과하게 징수하고 있었다.
“아. 기왕 하는 김에 비밀리에 제국 전체 토지를 전부 조사해봐야겠어.”
“…….”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중간에 관리자를 세워서 영주들에게 내는 세금과 황궁에 보고하는 게 일치하는지도 확인해보고….”
키엘은 중얼거리다 리오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반짝이는 눈망울로 보고 있는 게, 당황스러웠다.
“왜?”
리오는 진심으로 걱정이었었다.
처음에 벨라를 봤을 때만 해도, 그녀가 키엘의 말대로 ‘천사 같은 사람’인 줄 알았다.
특히 정원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걸 얼핏 봤을 때나.
포크를 입에 물고 더 먹고 싶다는 눈빛을 음식에게 쏘아댈 때는 엉뚱한 게 로잔느랑 닮았다는 생각까지 했는데.
- “너 요즘 살 만하구나?”
하지만 웃음에 살기가 있고.
- “뭘 봐? 부서진 거 처음 봐?”
오히려 깡패 같았다. 젠킨스의 말대로.
어째 자신의 주군이 위험한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건 아닌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 키엘은 벨라라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듯이 바라보았으니까.
“난 네가 벨라 님에게 빠져서 일은 정말 뒷전인 줄 알았거든.”
그러자 키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서는 다 때려치우고 벨라 옆에만 있고 싶었다.
그가 자신의 업무를 다하지 않으면, 결국 사람들의 비난은 벨라에게로 향할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크루엘가로 가는 길에도 업무가 밀릴까 봐, 며칠을 밤새운 건 안중에도 없는 건지.
“그런데 말이야, 벨라 님 어디가 좋은 거야? 로잔느랑은 확실히 다르던데….”
“로잔느랑 다르면 좋아할 만한 게 없다는 말이야?”
“아, 아니. 그런 게 아니고.”
날카로운 질문에 리오는 횡설수설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 수, 술이나 한잔 마셔야겠다.”
“지금 술 마실 때야? 여관에 들어가면 황궁에 서신부터 보내.”
“예, 전하.”
키엘은 몰고 있던 말의 머리를 돌렸다.
‘어디가 좋으냐니….’
보고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는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좋아할 구석이 없는데.
그는 말 위에서 그의 두 팔 안에 들어와 있던 벨라를 떠올렸다.
두근거리고 간지럽게 부딪히는 작은 몸.
꽤 긴장했는지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던 것도.
붉게 물들인 뺨은 귀엽고 사랑스러웠었다.
꽤 오래전 이웨르가 했던 말이 사실일까.
- “그렇게 해도 그 짐승들은 감정을 못 느낀단 말이예용! 이게 최고의 방법이라고용!”
확실히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들로 감동을 주는 것보다 이런 손짓 하나로 두근거림을 주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키엘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함부로 대했다가 깨져버리기라도 할까 봐. 이 사랑은 단 한 번의 실패도 용납되어선 안 되었다.
그에게 벨라는 너무 소중했기에. 섣부르고 철없는 욕심이 모든 일을 그르치게 하고 싶진 않았다.
여관에 다시 도착했을 때, 리오가 문을 활짝 열었다.
“리오, 올라가서 황궁에 보고….”
그리고 눈앞에는 예기치 못하게 벨라가 있었다.
“벨…라?”
그녀는 자신의 눈 만큼이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왜 이제 왔어.”
여전히 빠르게 뛰는 심장이, 그녀의 것인지 그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기다렸잖아.”
그리고 녹아내릴 것처럼 그의 품에 기대었다.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네?”
그녀의 향기는 아주 취해 있었다.
* * *
키엘과 리오가 잠시 정찰을 나간 동안, 벨라는 리네와 같은 방에 도착하자마자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조금 전의 그런 손짓, 눈빛. 이런 것들은 정말이지. 연인 같은 기분이 묘하게 불쑥 들었었다.
‘로잔느는 나 싫어하겠지?’
자기도 못 해 본 걸 경험하질 않나, 키엘의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질 않나.
어째 키엘이 무찔러야 할 악의 축에서, 로잔느가 상대해야 할 악녀가 된 기분이었다.
‘걔 성격에 싫어하진 않을 거 같긴 한데.’
소설 속의 로잔느는 성녀 뺨칠 정도로 순하고 착한 아이였으니까.
심지어 자기를 독살하려던 슈리아 크루엘 마저 용서하자고 고구마처럼 군 적도 있었고.
그때 리네도 지쳤는지 침대 위에 풀썩 쓰러지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으아…. 술 한잔하고 싶다….”
술이라. 생각해보면 벨라가 소설에 빙의 된 이후로는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었다.
마계로 돌아간 때가 성인이었을 때였기에.
“우리 그럼 한잔할까?”
“네? 어유, 안 돼요.”
“왜?”
“키엘은 여행 도중에 술 마시는 거 싫어하거든요.”
벨라에게는 생소한 이야기였다.
술도 마실 수 있는 나이의 키엘이라니. 알면서도 왜 상상이 안 가는 걸까.
‘술 얘기하니까 먹고 싶은데.’
벨라도 전생에서 꽤 즐겨 마셨었다.
경찰이 되고 난 이후로 고된 일을 하거나 힘들 때마다 퇴근길에 편의점에서 맥주 몇 캔씩 사고.
집에 돌아가서 노트북으로 영화 한 편씩 보며 오징어를 씹다 잠이 들기도 했고.
생각할수록 군침이 돌자, 벨라가 제안했다.
“안 들키면 되지 않을까?”
뭐 들킨다고 해서 키엘이 혼낼 거 같지도 않고.
다만 이때까지도 벨라가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들이 있었다.
그 몸으로 술을 마시는 건 처음이라는 것.
그리고, 습관이 무섭다는 것.
벨라는 전생에서 주량이 꽤 쎈 편이었다.
경찰이 되고 난 이후로 고된 일을 하거나 힘들 때마다 동료들과 마셔둔 게 경험치처럼 쌓였었다.
“원 샷!”
그리고 그 경험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술잔이 비었음을 알리려고 거꾸로 들고 탈탈 터는 것까지.
게다가 리네 역시 꽤 술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짠! 저도 다 마셨어요!”
처음에는 벨라를 따라 하며 그녀의 기분을 맞춰주려고 했는데, 리네도 신이 나서 함께 어울렸다.
“리네, 마음에 드는데?”
“벨라 님. 마음에 들면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안 되나요?”
“뭔 부탁?”
리네는 벨라의 두 손을 꽉 잡고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며 말했다.
“벨라 님이 만드신 무전 마법, 제가 좀 발명했다고 하면 안 될까요?”
“…뭐?”
마시던 술이 뿜어져 나올 뻔했다.
이렇게 당당하게 대놓고 ‘네 아이디어를 뺏어도 되겠냐’고 하는 인간이 어딨나.
소설에서는 마계에서 리오가 죽고 난 이후로 외전으로만 나오던 인물인지라, 벨라도 리네에 대해서는 그리 인상이 깊지 않았었다.
“저 대마법사 칭호 좀 달고 싶어요. 학계를 뒤흔들만한 연구를 좀 해보고, 마법도구도 몇 개 좀 챙기고….”
“음….”
“제가 나중에 대마법사가 되면, 벨라님 언제든지 마계에서 인간계로 올 수 있게 할게요.”
벨라에겐 딱히 득이 될 것도, 해가 될 것도 없는 제안이긴 했다.
그녀에게 마법사에 대한 명예가 필요한 거도 아니고.
“뭐, 그럼 그러던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리네는 감격에 겨운 듯 일어서서 아예 벨라에게 절을 하려고 했다.
“됐고, 술이나 마셔.”
“당연하죠. 주는 술은 전부 다 마실 거예요!”
그렇게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벨라는 리네의 호탕한 성격이 점점 마음에 들었다.
“이야, 너 잘 마시네.”
“제가 못하는 건 단 하나도 없어요!”
“보기 좋아, 참 좋아.”
그렇게 또 한 잔을 마시고.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어가고 있을 때였다.
리네도 원하는 바를 이루었겠다, 새삼 이렇게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것도 신기한지 평소 생각하던 걸 그대로 말했다.
“와, 벨라 님 아니었으면 술도 못 마셨을 텐데. 정말 좋아요.”
“왜 못 마셔?”
“키엘은 여행 도중에 술 마시는 거 싫어하거든요.”
벨라에게는 생소한 이야기였다.
생각해보면 떨어져 있던 시간이 8년이나 되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만큼, 많이 달라졌겠지.
“어찌나 경멸하게 보는지. 벨라 님이랑 마셨다고 하면 아마 아무 말도 안 할 걸요?”
“그렇구나. 난 어릴 때만 봐서….”
“우리 전하는 어릴 때 어땠어요?”
어땠느냐니. 벨라가 기억하는 키엘은.
“음…. 귀여움의 결정체?”
“네? 누가 귀여워요?”
리네는 입에 있던 술이 그대로 흘러내렸다.
술안주에는 과거 이야기가 최고인지. 벨라는 한 잔씩 마실 때마다 귀여웠던 키엘을 떠올렸다.
“푸르가 맨날 귀찮게 따라다녔는데, 언제 친해진 건지 푸르 베고 낮잠 잘 때는 얼마나 또 귀여웠다고.”
매일 꽃을 꺾어서 말없이 주던 것도 귀여웠다.
“귀엽다고 말하면 온종일 삐쳐있었는데, 그것도 너무 귀엽지 않아?”
“그게 뭐가 귀여워요?”
리네는 죽을상을 하며 벨라의 얘기를 들었다.
“너도 남동생 있으니까- 동생 귀여울 때 있자나아.”
“으윽. 리오가 그러면 우에엑이예요.”
어느새 둘 다 거의 만취 상태가 되어 테이블에 얼굴을 박고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우리 키엘이 베개 이러~케 안고 와서어 ‘악몽 꿨어요’하고 오면 그날 잠은 다 잤다구우.”
“우리 전하는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다고요오.”
키엘이 귀여우냐 안 귀여우냐로.
그걸 지켜보던 바텐더는 고개를 저으며 그들의 어깨를 흔들었다.
“이봐, 아가씨들. 인제 그만 마시고 계산하지.”
“리네에. 사장님이 계산하래.”
“우리 돈줄은 키엘인데요오오오.”
결국 바텐더는 그녀들과 함께 왔던 일행을 찾으러 여관주인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때 여관 1층 술집의 한구석에서는 하이에나 같은 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남자들은 벨라가 내려올 때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원시원하게 술을 마시는 것도 꽤 노려볼만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눈엣가시였던 바텐더가 자리를 뜨자, 그들은 이때다 싶었던지 벨라에게 다가갔다.
“어이, 아가씨.”
그들은 작업 멘트라고 날렸지만, 벨라의 눈에는 시비를 거는 것처럼 보였다.
“돈 없으면 우리가 사줄까?”
“한 잔 더 할래?”
벨라는 테이블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만 슬쩍 돌렸다. 건장한 남자 넷. 여기는 가냘픈 여자 둘.
해롱해롱하지만, 그 순간 벨라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봐요, 우리 돈 많아요오.”
리네가 적극 거절의 의사를 표했지만, 그들은 어느새 벨라와 리네를 둘러싸고 앉았다.
조금 만만해 보이는 금발 리네의 어깨에 먼저 손을 올리고.
깐깐해 보이지만 술 잘 마시는 벨라의 팔뚝을 툭툭 쳤다.
“계산해 줄 테니까, 우리랑 좀 더 놀까?”
벨라는 경찰이었기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많이 봐 온 장면이었다.
“누굴 거지새끼로 아나….”
“어허, 아가씨 입이 좀 험하네. 내가 그 입을 좀 달달하게 해줄까?”
이런 이상한 성희롱에.
벨라의 허벅지에 슬쩍 손을 올리는 성추행까지.
“어쭈, 이 손 안 놔?”
취할 대로 취한 벨라는 앞뒤 생각 없이 허벅지에 올려진 손을 잡고 비틀었다.
“으악!”
그리고 그의 허리를 무릎으로 찍어 눌렀다.
우당탕탕 큰소리와 함께 남자는 엎드렸고 벨라는 자연스레 자신의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수갑이….”
하지만 당연히 허리에 수갑은 없었다.
“아, 나 근무 중 아니지.”
그리고 그때 남자들이 친구를 도우려고 벨라에게 달려들자, 그녀는 가볍게 일어서서 한 명씩 명치를 때렸다.
“와! 잘한다!”
리네가 헤롱헤롱 취해서는 손뼉 치며 환호하고 있었다.
“너희 너무 쉽게 쓰러지는 거 아니냐?”
물론 저쪽도 술이 좀 취한 상태고. 벨라도 일어서자 휘청거렸다.
벨라는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일단 신고부터….’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는데, 벨라가 남자를 눌러도 너무 눌렀는지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크…으…으….”
“어머, 기절했네?”
그때 때마침 바텐더가 여관주인과 함께 현장에 도착했고.
“아… 아니…. 저 아가씨들이…. 이게 대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술집은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넘어진 테이블과 의자들. 그리고 남자들이 쓰러지면서 깨진 술병들.
“아니! 이건 18년산 포도준데! 이걸 지금 깬 거유?”
“얼만데 그래요! 우리 벨라 님이 위험할 뻔했는데!”
“됐고! 깨진 거 보상해주세요! 지금까지 드신 술도 돈 내고! 안 그러면 여기 담당 치안대에 넘길 거니까.”
보상이란 말에 리네와 벨라는 서로 마주 보며 머쓱하게 딴청을 부렸다.
화가 난 바텐더를, 여관 주인이 살살 달랬다.
“그래, 형씨. 여기 다른 일행들 있는 거 봤어. 조금만 기다려봐.”
그리고 말발굽 소리가 들리자, 벨라가 키엘이라는 걸 느끼고 나가려고 했다.
“이봐, 아가씨. 지금 도망가는 건 아니지?”
“아니거등.”
괜히 오해라도 살까 봐 입구에 서서 그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문이 열리자, 구원처럼 빛과 함께 키엘이 보였다.
“왜 이제 왔어. 기다렸잖아.”
벨라는 먼저 키엘을 두 팔로 안고 사탕발림 말로 유혹했다.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네?”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술 마셨어요?”
마치 놀리기라도 하듯이 리오가 뒤에서 중얼거렸다.
“와. 아까 나한테 뭐라고 그랬더라.”
바텐더는 이를 갈고 있었는지, 키엘이 오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
“이봐요! 이 아가씨들이 마신 술이랑, 지금 영업장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든 거. 다 보상해야 할 줄 아쇼!”
“시비는 쟤들이… 먼저 걸었는데쇼.”
벨라는 억울한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바텐더의 말투를 따라 했다.
키엘은 그런 벨라의 볼을 손으로 살짝 잡고 늘려봤다.
도대체 얼마나 마신 것인지. 얼굴이 아주 붉다 못해 타들어 갈 듯이 뜨거웠다.
‘귀여워.’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머리를 비비적거리는 고양이처럼. 귀엽다는 거 말고는 도무지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리오, 해결해.”
키엘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리오에게 모든 짐을 떠안기고, 벨라를 부축했다.
“그만 마시고 올라갈까요?”
“에이, 무슨 소리야. 난 아직 쌩쌩한데.”
쌩쌩하긴. 한 발자국도 제대로 못 걷고 휘청거렸다.
“그럼 올라가서 더 마셔요, 어때요?”
“좋아! 콜!”
콜은 또 뭔지. 키엘은 술에 취해 흐트러진 벨라도 좋았다.
엉망진창이 된 술집 바닥에 웬 남자들이 누워있는 건 거슬리긴 했지만.
“한 잔 더 마셔….”
“응. 알겠어요.”
벨라를 침대에 눕히자, 그녀는 더 마시자는 말은 했지만, 그대로 쌔근거리며 눈을 감았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취할 때까지 마시지 마요.”
키엘은 벨라의 머리카락을 넘기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취해도 이렇게 귀엽지 말고.”
술 취해서 건장한 남자 넷 중 하나는 기절까지 시켰지만.
리네가 오기 전까지, 그는 그대로 쭉 벨라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렇게 경계 없이 자는 모습은 정말 그리워하던 얼굴이었다.
동화를 읽어주다 하품을 하곤 빨리 자라며 토닥거리다가 제풀에 먼저 잠이 들던 벨라.
그리고 그때였다.
순간, 그녀를 그저 귀엽게만 바라보던 키엘의 눈빛이 매섭게 바뀌었다.
잠결에 벨라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핸드폰을 꺼냈기에.
‘저건….’
벨라는 자연스럽게 핸드폰 화면 위에 손을 올렸다.
천천히 어둠 속에서 키엘의 밝은 눈동자가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으… 속이야….”
그녀는 익숙한 듯이 손가락으로 휙휙 하더니 배시시 웃고는 핸드폰을 끌어안았다.
마계에서 인간계로 넘어올 때, 키엘이 확인해보려고 했지만, 그때는 어떤 정보도 알 수 없었다.
‘일치하지 않는 지문입니다.’라며 갑자기 ‘일주일간 잠금 됩니다.’라는 글자만 떴던 마법도구.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저걸 열려면 벨라의 손가락이 필요한 거였네.’
키엘은 조심스레 벨라의 품에 있는 핸드폰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때 시끌벅적한 소리가 문 너머로 들리더니.
“아오, 야! 똑바로 걸어라. 좀!”
리오가 짜증을 내며 문을 벌컥 열자, 키엘은 서둘러 손을 빼버렸다.
가장 들켜서는 안 될 거라 생각하고 한 처사였는데.
“전하, 여기 리네도 잘 건데 여기서 이러는 건….”
어째 다른 의미로 오해하는 것 같았다.
“그, 그런 거 아니야.”
“……. 나오세요. 이 짐승.”
조금 억울한데. 술에 취한 사람을 상대로 파렴치한 짓을 할 리 없잖은가.
“넌 도대체 날 뭘로 보는 거야?”
“예. 거기 누워 있는 사람한테 환장한 사람요.”
소설 속에 들어오고 처음 마시는 술의 숙취는 생각보다 지독했다.
“으…. 아직도 울렁거려.”
“맞아요. 이래서 키엘이 싫어했어요.”
벨라는 리네와 둘이서 침대에 드러누운 채 하루를 보냈다.
“하루 쉬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마족들이 지키고 있는 마차가 오후쯤에서야 도착했고, 크루엘가로 가는 여정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갈 수 있었다.
“그러게요. 벨라 님, 어제 기억 다 하시죠?”
벨라는 겨우 고개를 돌려 맞은편 침대에 있는 리네의 얼굴을 쳐다봤다.
“기억 다 하지.”
감히 우리 키엘이 안 귀엽다고 바득바득 반박하던걸. 리네는 벨라가 그 생각으로 노려보는 것도 모른 채 신나게 말했다.
“무전마법을 저한테 넘겼잖아요?”
써도 된다고는 했지만, 아예 넘기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저렇게 욕심 많은 친구인 줄은 몰랐는데.
마족들이 도착하자마자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한 듯이 푸르가 벨라에게 제일 먼저 달려들었다.
“공…가씨! 저예요! 공주님이 제일 좋아하는 푸르!”
다만 푸르 빼고는 어째 분위기가 묘하게 긴장된 듯 보였다.
“무슨 일 있었어?”
“없습니다!”
그냥 물어본 건데 잔바르가 얼굴을 붉힌 채 큰소리로 대답했다.
“하루 노숙 좀 했다고 유난은.”
벨라는 혀를 찼지만, 그녀를 제외하고는 심지어 쌍둥이마저 대강 눈치를 챘다.
“저기가 혹시 그….”
“그런가 봐. 마차 안에서 뽀뽀했다더니.”
그렇게 다시 시작된 여행길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마차가 좁다고 하는 바람에, 심지어 잔바르는 표범으로 그들을 호위하며 걸었고.
서로 번갈아가며 말을 타고 마부를 하며 며칠 여행하는 동안 무탈하게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여기부터 크루엘가예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문이 열렸다.
* * *
문이 도대체 몇 개인지. 아주 큰 정문을 지나자 작은 건물이 보였다.
“저건가?”
하지만 건물이 작은 게 아니라, 멀기에 작게만 보이는 거였을 뿐.
“여기는 거의 사냥터로 쓴대요.”
정원이라고 하기에는 아주 거대한 숲길이었다.
그리고 그 숲길을 지나자, 또 하나의 문이 열렸다.
“여기서부터는 정원이래요.”
“뭐가 이렇게 커? 황궁도 이 정도로 크진 않았는데.”
“황궁에 가 본 적 있어요?”
“응. 너… 아아아. 아니, 아니. 책에서 봤어.”
하마터면 술술 얘기할 뻔했다. 벨라는 다른 말로 돌리며 키엘에게 되물었다.
“이런 것까지 제약을 두진 않아요. 보통은 알아서 몸을 사리던데.”
“그, 그래?”
“제가 황궁에 들어가자마자 제일 먼저 만난 게 크루엘가라. 이 정도는 해도 된다고 생각했나 보죠.”
엄밀히 따지자면, 키엘이 먼저 부른 거긴 했다. 벨라를 찾기 위해 후안 크루엘을 부르면서.
“그리고 현재 피후견인인 슈리아 크루엘은… 저기 오네요.”
아직 도착도 안 했는데, 말을 타고 저 멀리서 그들을 향해 정원을 가로질러 오는 그림자.
벨라는 고개를 빼꼼 내밀어 그녀의 차애를 확인했다.
“와… 생각한 대로네.”
멀리서부터 포스가 뿜어져 나오는 은발의 기사. 이목구비가 그림처럼 예뻐야만 예쁜 게 아니었다.
그저 말 위에 앉아 씨익 웃을 뿐인데도 자신감 넘치는 저 태도는, 그녀가 가진 모든 게 아름답게 보이도록 했다.
“내가 슈리아를 만날 줄이야….”
벨라가 타고 있던 마차가 멈추고, 그녀는 기대에 차서 마차에서 내렸다.
“오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키엘 전하. 그리고… 벨라트리체 님.”
“만나서 반가워요.”
거기 있던 모든 사람이 느꼈다.
벨라가 누군가에게 존경의 눈빛을 보이며 예의를 지킨 게 슈리아 크루엘이 처음이라는 걸.
“얘기는 전하를 통해 많이 들었습니다. 저희 가문을 선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택이란 단어가 살짝 거슬렸지만, 벨라는 딴죽을 걸지 않았다. 대신.
“슈리아 크루엘 님 같은 유망한 분이 있는 가문에 있게 된 게 영광이죠.”
몇 년을 같이 해 온 마족들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벨라는 그녀를 다르게 대했다.
슈리아는 동경심으로 좋아한 캐릭터였다.
힘 있고, 능력 있고, 도덕적으로 문제없고. 당당하고, 만인에게 인기가 많은 사람. 그게 다만 이성에게 얻는 인기가 아닐 뿐이지.
벨라는 그녀를 울렸던 슈리아의 대사를 기억했다.
- “사람이 태어났으면 큰 꿈을 품어야지. 감정이 전부인 네 그 하찮은 인생을 위해 내가 이룩한 모든 걸 양보해달라고?”
기사로서, 공작가를 이끌 유망주로서.
모든 걸 내버리고 본인이 될 확률이 가장 높은 황태자비에 도전하고 차후의 황후를 꿈꾸던 사람.
슈리아는 천천히 자신의 가문을 소개했다.
큰 영토를 자랑하며 제국에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를.
비록 본가는 수도에 떨어져 있으나 수도 내에 크루엘 별채가 다른 어떤 가문보다 크다는 것도 과시했다.
하지만 벨라는 그런 것보다도 슈리아를 만나면 꼭 묻고 싶은 것들부터 물었다.
“기사단에는 슈리아 님 같은 여성 기사도 많나요?”
“네, 생각보다 많답니다. 다들 투구를 쓰고 있어 못 알아볼 뿐이죠.”
벨라는 오래전에 검술 교실에 오던 메리를 얘기했다.
“그런 아이가 있어서 후원했었는데, 기사단 시험을 보라고 할 걸 그랬네요. 용병이 제일 되기 쉬워 보여서 용병 단에 소개했는데.”
“검술 교실을 후원했다고요? 대단한데요?”
슈리아는 벨라가 마족이라는 걸 몰랐다.
그래서일까, 벨라는 오랜만에 정상적인 사람과 대화를 하는 기분이었다.
“대단한 거까지 있나요. 그냥 작은 마을에서 소소하게 열었는데.”
“안 그래도 키엘 전하께 들었습니다. 꽤 검술에 능하시다던데, 저랑 시간 되시면 대련해보실래요?”
사람이 처음 만나서 친해지는 데는 별다른 특별한 계기가 있을 필요가 없었다.
마음 맞는 관심사가 있으면.
“그거 좋죠.”
“저와 대련할 때는 규칙이 있습니다.”
“규칙?”
“시작은 말하지 않는다. 대련하기로 했으면 언제든지 갑자기 급소를 노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혹시 키엘….”
벨라는 키엘에 대해 말하려다가 잠깐 멈칫하고 뒤에서 걸어오는 그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행복한 미소로 벨라를 보고 있었다.
“…키엘 전하랑도 대련해봤어요?”
그녀에겐 언제나 그저 키엘이지만, 슈리아에겐 아니었기에. 조금 어색한 존대를 붙여보았다.
“네. 아직 무승부입니다. 5대 5예요. 이따가 기회 봐서 한 번 쳐볼 생각입니다.”
“하하하.”
과연 황태자비를 욕심내기에는 너무 아까운 기사단의 인재였다.
사람들은 이런 슈리아를 보고 ‘악녀’라고 칭하지만, 벨라가 보기에는 오히려 황후라는 자리가 슈리아에게 작은 그릇처럼 보였다.
그때 슈리아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한 자루 벨라에게 던졌다.
“그러니 언제든지 신청하시면 됩니다.”
“아아.”
벨라는 싱긋 웃고 바로 검집에서 검을 빼 들었다.
언제든지라면.
곧바로 슈리아의 목을 향해 겨눴다.
칼날이 목에 들어오며 햇빛이 반사되는 순간.
숨어있던 슈리아의 호위들이 전부 어디선가 모습을 드러냈다.
슈리아도 당황하는 눈빛이었으나 이내 검 끝을 살짝 내려다봤다.
검을 빼는 것조차 몰랐는데. 그 빠른 속도로 침을 꿀꺽 삼키면 그 목에 칼이 닿을 거리에 멈춰 선 게 신기했다.
“좋은 수죠? 절대 공격하지 않을 것 같을 때 공격하는 거.”
슈리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처음 키엘과 대련할 때, 키엘이 했던 말을 벨라가 그대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벨라를 말린 건 키엘도 아닌 젠킨스였다.
“죄송합니다, 저희 아가씨가 인간계 예절을 좀 몰라서….”
그러면서 벨라의 손목을 잡고 작은 소리로 잔소리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여기가 어딘데. 지금 아가씨 여기 양녀로 들어왔잖아요.”
“아, 왜 그래. 다 약속된 대련이었단 말이야.”
“이게 무슨 대련입니까. 기습이지!”
“그러면 기습대련.”
슈리아는 여태껏 예의 차리던 모습과 다른 벨라의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매력적인 사람이야.’
슈리아는 목에 들어온 검을 밀어내며 웃었다.
그리고 키엘이 그들을 지나치면서 한마디 던졌다.
“슈리아 공녀는 저런 거 좋아해.”
슈리아는 처음 보는 빨간 머리의 남자에게 안심하라며 대답했다.
“예. 약속된 거니 괜찮습니다. 전하 말대로, 전 이런 거 좋아합니다.”
벨라는 슈리아의 저 시원시원한 말도 좋았다.
* * *
크루엘가에서의 생활은 보기보다 편안했다.
제일 먼저 벨라는 크루엘가에 걸맞게 역사와 예의, 기본적인 인맥 관계 등을 배워야 했다.
“아가씨가 이런 걸 할 수 있을까요.”
젠킨스는 아주 대놓고 벨라의 신경을 거슬렀다.
“너 지금 나 무시하니?”
“마왕이 무슨 공부입니까.”
거기다 잔바르까지 합세해서 이 상황에 불만을 표했다.
“너희 뭐, 저번에 뽀뽀 좀 했다고 좀 친해졌다? 한 편 먹고 공격하게? 아주 나중에는 서로 사랑한다하겠다?”
그 말에 둘 다 입을 다물었다.
“꺼져, 둘 다.”
벨라에게 이 정도는 기본이었다.
물론 오랜만에 펜을 손에 잡아보긴 하지만, 경찰공무원 시험 준비하던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런 건 ‘태종태세 문단세’처럼 노래로 만들어서 외우면 되지.’
게다가 이미 소설을 수십 번 읽었기에 기초가 탄탄했었고.
젠킨스의 염려와는 정반대로 벨라는 그 모든 걸 빠르게 암기하고 현재 공작가를 이끌고 있는 헤롯 크루엘 공작에게서 인정받았다.
몇 해 전부터 몸이 쇠약하여 병상에만 누워있지만, 여전히 독수리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
“…들은 것과 달리 꽤… 쿨럭… 빨리하시는군요.”
헤롯 크루엘은 기침을 하면서 벨라를 보고 안도했다.
그들로선 생각보다 큰 수완이었다. 그저 황태자가 요구해서 신분을 맞춰주기 위해 그 제안을 받아들인 거지만.
‘그냥 어디서 시골 뜨내기 같은 젖먹이일 줄 알았더니.’
보기보다 흠잡을 곳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더욱 중요한 건.
“뭐라고 들었길래 여기도 들은 건 달리라고 말하는지는 모르겠네요. 헤롯 크루엘… 양아버지?”
“하하. 그냥 노파심이었습니다.”
황태자의 뒷배가 없더라도 수양딸이라고 함부로 대하기에는 벨라가 조금 무서웠다.
특히 은발이 특징인 가문에 홀로 악의 꽃처럼 피어나있는 짙은 흑발과 붉은 눈이.
그때였다.
“이야, 화제의 인물이 당신이었다니.”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벨라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10년 동안 널 찾았는데. 여기서 만날 줄이야.”
은발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남자. 후안 크루엘이었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벨라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그녀의 눈을 쳐다봤다.
어릴 때 은갈치 갔던 모습과 다르게, 그도 꽤 남자의 향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신분이 필요한 거였으면, 내 신부가 되었어도 좋았을 텐데.”
벨라는 그의 말이 꽤 마음에 들었다.
‘신분… 신부…. 이거 라임 좀 괜찮은데?‘
이게 다 공부를 랩처럼 한 후유증이었다.
“네 녀석,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오는 게냐.”
“숙부님. 쭉 이 시간에 오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러가라. 네놈과 상종하고 싶지 않다.”
헤롯은 후안을 후계자로 두고 슈리아를 황태자비로 밀어붙일 만큼의 박력 있는 사람이었다.
볼일도 다 봤겠다, 벨라는 굳이 이 껄끄러운 자리의 중간에 끼고 싶지는 않아서 일어섰다.
“슈리아 공녀님과 약속한 게 있어서,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벨라가 나가려고 하자, 후안이 그녀의 손목을 다시 붙잡았다.
“레이디, 전 당신을 보러 왔는데요.”
“…저요?”
그때 헤롯이 벨라에게 말했다.
“슈리아와 약속이 있다지 않았습니까. 그 애는 기다리는 걸 싫어합니다.”
“아, 그렇죠.”
벨라가 나가려고 하자 후안이 그녀의 손등에 또 한 번 입을 맞췄다.
“조금 있다 찾아뵙죠.”
순간 벨라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급하게 그의 손을 빼고서 방을 나섰다.
‘미친놈 아냐?‘
벨라가 나가자 헤롯 크루엘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저기는 네가 건드릴 게 아니야.”
황태자의 후원을 받고 들어온 수양딸을 건드리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몇 세대 만에 겨우 공작가의 권력을 제대로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이 망나니가 그르칠까 봐 노심초사였다.
* * *
벨라는 슈리아와 대련을 하면서도 후안 크루엘을 떠올렸다.
슈리아가 황태자비가 되기 위해 후계를 후안에게 넘기면, 공작가의 주인은 후안 크루엘이 된다.
‘내가 친하게 지내야 하나?’
벨라가 크루엘이라는 성을 계속 쓴다면, 결국 후안이 그녀의 후견인이나 마찬가지인데.
‘별로 친해지고 싶진 않은데….’
특히 그 여자 밝히는 설정이 부담스러웠다. 조금 전의 행동만 해도 불편했고.
‘설마 나한테 이상한 흑심 품나?‘
그때였다.
함께 대련하던 슈리아가 조금 엄한 목소리로 벨라를 질책했다.
“…벨라 님, 저와 대련하는 데 다른 생각을 하십니까?”
“…네?”
슈리아는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자신의 검을 전부 받아치는 걸 보며 벨라와 그녀의 차이를 몸소 느꼈다.
처음에 기습대련은 재미로 했지만, 백이면 백. 전부 완패였다. 그리고 이길 수 있는 희망조차 없었고.
그래서 오히려 하루에 짧게는 30분, 길게는 한 시간씩 대련을 부탁했었다.
“저와 대련할 때는 저만 생각해주셔야죠.”
그 말에 벨라는 순간 코피를 흘릴 뻔했다.
‘와 이런 게 걸크러쉰가.’
슈리아가 로잔느를 대적할 때, 왜 그렇게 슈리아 편에 든 사람이 많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사람이 황후가 되면 제국의 기반이 튼튼해지긴 하겠지.
벨라가 그렇게 넋이 나가 있는 동안, 이웨르는 2층에서 창문 너머로 콧방귀를 끼며 그런 벨라를 보고 있었다.
“세상에. 우리 아가씨, 저 아가씨한테 완전히 반하는 거 아냥?”
“…….”
“도련님. 설마 우리 아가씨, 여자 좋아하는 거 아니예용?”
하지만 키엘은 기침만 몇 번 하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웨르씨는 왜 여기 있어요? 저희 바쁜데….”
황궁에서는 키엘이 크루엘가에 머무르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공식 상으로 그는 여전히 비브르 후작의 영토를 별채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서류는 당연히 한 발씩 늦게 도착했고, 그들이 처리해야 하는 시간은 촉박했다.
“…콜록.”
“키엘, 괜찮아? 너 좀 쉬어야겠는데.”
“이거까지만 다 보고.”
하지만 그런 인간의 사정을 알 리 없는 철없는 이웨르는 이곳에 와서 가만히 앉아만 있는 키엘이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도련님, 뭐라도 좀 해봐요. 아가씨가 진짜 여자 좋아하는 거면 도련님 라이벌만 몇 명인 줄 알아용?”
“…….”
“나! 푸르! 저 여자! 이렇게 세 명이라고용!”
대꾸할 가치도 없었다.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 뺏기면 어쩔꺼양!”
“이웨르씨. 너무 시끄러워요. 도련님 아니고 이제 전하라고 좀 해주고요.”
“너나 해! 지도 안 하면서!”
이웨르가 씩씩대며 밖으로 나가자 그제야 정적이 찾아왔다.
“…하아. 리네, 혹시 그 벨라의 무전마법으로 서류만 가져오는 건 안 될까?”
“와, 꽤 좋은 생각인데? 그거도 그럼 내가 발명….”
“네가 성공하면 네 공이니까 네가 다 가져가. 콜록.”
또 기침이 시작되자 끊기지 않고 그는 콜록거렸다.
크루엘가로 들어온 지도 벌써 2주째. 밤잠도 자지 않고 눈이 빠지라고 일만 하고 있었다.
리오가 걱정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그냥 다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러다 우리 다 죽겠는데.”
그러려면 벨라의 심장을 돌려줘야 한다.
“이웨르씨 갔으니 이제 곰인형씨 올 차례잖아.”
마족들은 하루가 멀다고 키엘의 방에 와서 노닥거렸다.
왔으면 싶은 벨라는 한 번도 온 적이 없는데.
“리네, 당장 나가서 젠킨스랑 그 마법을 연구해.”
“알았어.”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 키엘의 방에 또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리오는 방문객을 보고 놀랐는지 말을 잇지 못하자, 키엘은 고개를 빠르게 올렸다.
‘벨라?‘
하지만 그곳에는 정말 뜻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후안 크루엘 경.”
벨라는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고. 어쩜 이리 달갑지 않은 이들만 찾아오는 건지.
“아, 안녕하셨겠네요. 기어코 찾아내셨으니 말입니다.”
키엘은 후안이 꽤 불편했다.
“애써 도망간 사람을 크루엘 가에 양녀로 들이실 줄이야.”
“…….”
그가 얼마나 벨라를 찾아다녔는지 아는 사람이기에. 마치 그걸 약점처럼 쥐고 입을 함부로 놀리곤 했다.
벨라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모든 짐을 다 빼고 사라진 건 사실이었으니까.
여태껏 그걸 도망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후안 크루엘. 용건이 뭔가?”
“감사 인사 겸 왔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제가 애타게 찾던 게 집에 숨어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대가 벨라를 찾을 이유는 없을 텐데.”
“제 마음 아니겠습니까?”
후안은 조금 전, 자신의 ‘신부 농담’에 웃던 벨라를 떠올렸다.
거기다 그가 손등에 입을 맞출 때는 수줍은 듯 도망가던 것까지.
“그나저나 그 아가씨가 저에게 조금 관심을 보이는 거 같던데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분명 자기를 보고 반한 것 같았다.
그 말에 키엘은 서류에 사인하던 펜을 멈추고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경을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혼자 착각하다가 나중에 망신만 당할 거야.”
후안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인사를 하고 뒤를 돌아섰다.
그가 나가자마자, 키엘은 참았던 기침을 다시 했다.
“…콜록.”
“후안 경이 지금 벨라 님한테 관심 두는 거야?”
관심이야 옛적부터 있는 건 알고 있었다.
“좀… 위험한 거 아냐?”
“…딱히.”
키엘의 연적은 후안 크루엘이 아니었다.
벨라 본인이지.
“어차피 벨라는 눈치도 못 챌걸.”
“큭. 우리 전하의 고구마 연애가 시작되는구나.”
하지만 고구마 연애보다 더 힘든 게 따로 있었으니. 바로 고구마 일 처리였다.
여기가 무슨 만남의 광장이라도 되는 건지.
후안이 나간 이후로 푸르와 이웨르가 와서 신나게 술래잡기를 하고, 잔바르가 와서 젠킨스를 찾기까지 했다.
“…죽겠네.”
리네까지 없으니 일 처리는 더욱 늦어졌다.
키엘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일어서자 리오가 깜짝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어디 가게?”
“벨라한테.”
“……이, 이건 다 어쩌고?”
리오가 진전이 하나도 없는 서류들을 가리켰지만, 이미 키엘은 성큼성큼 나간 지 오래였다.
그리 멀지도 않은 곳에 벨라의 방이 있었다.
후안의 말대로 애써 도망간 사람을 찾은 것도 맞고.
마계에서 죽겠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살려 이곳까지 오게 했고.
저택에서 예전처럼 지내도 될 사람을 크루엘가의 양녀까지 오게 한 것도 키엘이었다.
물론 그녀가 이곳에 온 이후로 바쁜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보채지 않으려고 했는데.’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곰이나 표범이나 다 몰려드는데 어떻게 벨라만 오지 않을 수가 있는 건지.
“…콜록.”
키엘은 벨라의 방문 앞에 서서 기침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노크를 했다.
* * *
슈리아와 대련을 마친 벨라는 늘 정해진 대로 방에서 역사책부터 읽었다.
‘내가 이런 판타지 세계의 역사 공부까지 할 줄이야….’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소설에 처음 빙의했을 때 바라던 대로 꿀 빠는 귀족 영애의 삶을 살고 있으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새로 얻게 된 기회를 더 단단하게 붙잡고 싶었다.
‘그래야 키엘 옆에 있을 수 있다고도 하니까.’
어차피 로잔느와 키엘의 사랑 이야기니까 더 문제 될 것도 없어 보였고.
그녀만 잘하면 소설이 끝날 때까지 키엘의 행복을 지켜볼 수 있다.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설마 그 은갈치 놈인가?‘
없는 척하려고 했는데.
“벨라, 안에 있어요?”
키엘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키엘!”
한걸음에 달려가 문을 벌컥 열었다.
“와, 나 방금 네 생각….”
그런데 어째 키엘의 안색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했는데….”
어디 아픈가 싶어 벨라가 손을 뻗었지만, 키엘은 그런 벨라를 살짝 밀고서 문을 닫았다.
“그럼 왜 안 와요?”
“어? 어딜?”
키엘이 입술을 깨물더니, 눈을 살짝 감았다가 떴다.
“…나한테.”
벨라는 잠깐 말문을 잃었다.
“너무해. 어떻게 한 번도 안 올 수 있어?”
“음….”
벨라가 뒷목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아니, 난 네 생각해서 안 간 건데…. 딱히 일도 없었고.”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와요?”
“다들 너 바쁘다길래…. 괜히 방해할 순 없잖아.”
그 바쁘다고 하던 ‘다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놀이터처럼 키엘의 방을 들락날락 이는데.
벨라가 키엘의 얼굴을 슬쩍 보고 물었다.
“지금 화내는 거야?”
“응.”
그러면서 키엘이 벨라의 손목을 잡고 검지로 살살 어루만졌다.
“방해 아니니까…. 나… 보러 와요.”
어릴 때는 강아지 같았는데, 지금은 간식 달라는 대형견 같이 귀여우면 어쩌자는 건지.
“풉.”
“……. 지금 웃어요?”
“넌 다 컸는데도 왜 이렇게 귀여워?”
차갑게 식은 그의 표정마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 나 안 귀여워.”
“완전 귀여운데.”
키엘은 기가 찬 듯 그녀의 턱 끝을 잡았다.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화가 나고 속상한 건데.
“귀여우면 뽀뽀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