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가 죽여야 할 최종 악녀가 저랍니다-11화 (11/25)

11

벨라는 푸르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공주님!”

눈을 뜨자마자 일어서며 날개부터 꺼내 자신의 방 안에 있는 낯선 인간의 목에 손톱을 세웠다가 눈을 깜빡였다.

“…?”

“아, 키엘이었구나.”

“일어났어요?”

키엘은 한 손으로 벨라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설마 지금 나 죽이려고 한 거예요?”

“에이, 설마.”

“맞네.”

벨라는 침착하게 푸르에게 손을 흔들었다.

“푸르, 좋은 아침.”

“저, 공주님. 밖에 좀 나와보셔야 할 거 같은데.”

“왜?”

“달이 없어졌어요.”

“너 아직 잠 안 깼니?”

벨라는 기지개를 켜고 푸르의 말에 별장 밖으로 나섰다.

그녀는 문을 열자마자 고개를 들어 별장 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키엘은 뒤에서 그녀를 따라 같은 하늘을 함께 봤다.

‘아… 정말 동물왕국이긴 하구나.’

마계에는 정말 수많은 유형의 마족들이 있었다.

인간형의 모습인 몽마들이나, 각종 동물 모습인 마족들.

하지만 그 중 개체 수가 제일 많은 건, 지능이 제일 낮고 번식력이 높은 곤충형들이었다.

그 수많은 곤충이 결계에 다닥다닥 붙어서 벨라의 별장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벨라가 나오자마자 사사삭 사라졌다.

마치 불을 켜자, 수많은 바퀴벌레가 어두운 구석을 향해 일제히 도망가는 것처럼.

벨라는 이럴 때 비명도, 외마디 욕도 나오지 않는다.

몇 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은 풍경이었다.

그저 뒷걸음질을 치며 온몸에 돋은 소름을 팔로 긁었다.

무서워서 건드리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정말 피하고 싶고 손 하나 닿기 싫은 유형들.

그 별장의 문턱에서 키엘은 그녀의 소름 돋은 팔을 뒤에서 어루만졌다.

“벨라, 괜찮아요?”

“Xx… 왜 마계엔 해충박멸회사가 없는 거야….”

“황궁에 가면 벌레는 절대 가까이 못 오게 할게요.”

그도 그 광경을 봤기에 다르게 위로할 말이 없었다.

‘벨라는 이런 곳에서 계속 살았구나.’

그녀가 말했던 ‘하루만이라도’가 얼마나 절실했는지 느껴졌다.

“우리 돌아가면 바다 보러 가요.”

바다.

그 말에 벨라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키엘을 떠나보내고 여행할 때도, 생각날까 봐 얼씬도 하지 않았던 곳이었는데.

“그래, 꼭 가자. 우리 가보자고 한 데는 다 가보자.”

“신전은 안 가도 돼요.”

“가자고 해도 안 갈 거야.”

벨라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쉬면서 키엘의 손을 잡았다.

‘진정하자….’

좋은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저 벌레들을 다 잡아 죽이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안 돼.’

조금 전에도 무의식중에 키엘을 죽일 뻔했으니.

인간계로 빨리 가야 하는 가장 큰 이유였는데도, 벨라는 키엘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에 본 키엘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마왕의 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키엘이 앞에 있는 순간만큼은 저택에서 살았을 때처럼 동물왕국의 공주로 있고 싶었다.

* * *

리네의 소환진을 기다리는 며칠 동안, 벨라는 별장 밖으로 최대한 나가지 않았다.

나가봐야 짜증만 날 게 뻔했고.

별장 안에는 그녀의 이성을 붙잡는 키엘이 있었으니까.

“그럼, 이제 짐을 슬슬 꾸려봐야겠네.”

사실 핸드폰만 있으면 되겠지만.

벨라는 바닥에 앉아 마계에서 정들었던 물건이나 옷들을 한군데에 모으기 시작했다.

키엘은 턱을 괴고 그런 벨라를 지긋이 쳐다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렇게 좋아요?”

“당연하지. 얼마나 나가고 싶었는데.”

키엘은 살짝 눈을 내리깔며 벨라의 주머니를 응시하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 이 옷은 몇 번 입지도 못했는데, 벌써 작아졌네.”

벨라는 짐을 꾸릴수록 점점 신이 났다. 오래전에 여름 축제를 기다렸던 것처럼.

키엘은 이때다 싶어 조심스럽게 가장 궁금했던 걸 물어봤다.

지금이라면 지나가듯이 대답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런데 왜 처음엔 안 나가겠다고 한 거예요?”

“여기서 죽는 게 내 운명이라서 그랬지. 아, 이거 피 묻었는데 지워지겠지? 들고 갈까?”

“입고 싶은 옷 다 사줄 테니까 필요한 거만 챙겨요.”

“세상에.”

벨라는 키엘을 돌아보며 감격에 찬 듯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

“키엘. 네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키엘은 순간 저 환한 미소와 말에 넋이 나갈 뻔했다.

잠깐 정적이 흐르고 벨라가 다시 고개를 돌려 짐을 꾸릴 때, 그는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운명대로 안 가면, 벨라가 죽는 거 아니었어요?”

한눈 팔렸을 때 슬쩍 물어보려고 한 거였는데.

그 말에 벨라는 모든 걸 멈춘 채 고개를 다시 올렸다.

천천히 그녀가 키엘을 돌려다 볼 때, 키엘은 그 표정이 뭘 말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거야?”

싸늘하고 공허한 눈빛.

그는 마을 사람들이 가끔 벨라를 보고 무섭다고 했던 게 어떤 건지 이제야 마주하는 것 같았다.

“…방금 여기서 죽는 게 벨라의 운명이라면서요.”

“아….”

“나 벨라가 죽는 줄 알고, 열심히 황제가 되려고 한 건데.”

벨라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가방 가장 깊숙한 곳으로 넣었다.

“그, 그랬어? 하하. 내가 왜 그렇게 말했지.”

그러면서 벨라는 짐을 마저 챙겼다.

“옷은 네가 사준다고 했으니까 다 챙긴 거 같고.”

키엘은 저 웃음 밑에 숨기고 있는 게 있다는 것만큼은 확신했다.

‘그 이야기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그 감정은 마치 절벽의 끝에 서서 한 발을 그 허공에 닿은 느낌이었다.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극도의 불안.

“또 챙겨갈 건 없어요?”

“아, 내 선인장도 챙겨갈까?”

“화국에서 샀다는 거요?”

“응. 인간계 가면 꽃 피겠지?”

벨라는 잔해 속에서 살아남은 선인장 화분을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꽃을 누가 그렇게 가방에 쑤셔 넣어요….’

키엘은 전에 봤을 때 그 선인장이 이미 시들었다는 걸 알았지만 벨라의 희망찬 모습에 차마 그 말을 끼얹을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귀여워졌대.’

조금 전의 무서웠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키엘은 작게 웃으며 벨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곳은 정리 안 해도 돼요?”

“응? 왜?”

“벨라가 없으면 여기는 누가… 관리한다든가….”

“괜찮아. 다들 제멋대로 사는 놈들이라.”

명백한 사실이었다.

질서라는 게 하나라도 적용이 되는 곳이었다면, 진작에 이 마계를 갈아엎고 천년만년 즐겁게 살 수 있었을 테니까.

지금도 그랬다.

‘하… 이 새끼들 또 자기 종족 처먹고 있네.’

어디선가 꺼져가는 생명의 소리부터.

빠르게 썩어가는 시체의 냄새까지.

이들이 원하는 힘을 위해 다른 종족을 잡아먹는 건 예삿일이었기에, 벨라는 그럴 때마다 역겨운 소리와 냄새를 함께 맡았다.

‘참자….’

벨라는 떨리는 손을 꽉 쥐고 눈앞의 키엘을 보며 애써 웃었다.

그때 푸르가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공주님! 대장군님들이 왔는데요!”

“응. 가라고 해.”

“이미 들어왔어요!”

벨라는 심호흡을 하고 별장의 문을 열었다.

결계 밖에서 대장군 네 명이 힘차게 결계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공주님!”

“아, xx, 쟤들 못 오게 하는 거 까먹었네.”

그러자 잔바르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이 멈칫했다. 허락받은 줄 알고 당당하게 들어온 거였는데.

그들은 꾀를 내어 인간형으로 변신하고 다시 물었다.

“이제 가도 됩니까?”

“10m 떨어져서 말해.”

“네!”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니었던지라 10m짜리 커다란 나뭇가지로 벨라와 자신들의 간격을 재고 그곳에 서 있었다.

대장군 중 하나가 멀리서 소리 지르며 벨라에게 물었다.

“공주님! 그 인간은 뭡니까?”

“응! 너 알 바 아니야!”

어느새 옆으로 가까이 온 잔바르가 키엘을 잠깐 보더니 벨라에게 말했다.

“공주님. 중요한 얘기입니다. 다들 모일 수 있게 해주시죠.”

“왜, 뭔데?”

벨라가 손짓하자 떨어져 있던 대장군들이 한걸음에 그녀의 앞으로 달려왔다.

“공주님, 설마 인간 놈이랑 사랑 뭐 그딴 거에 빠진 건 아니죠?”

벨라는 어느새 옆에 서 있는 키엘을 보고 손사래를 쳤다.

“오히려 이 애한테는 실례되는 소리라고. 얘한테는 따로 운명의 상대가 있는 걸.”

키엘에겐 로잔느가 있으니까.

하지만 벨라는, 둘이서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간 적이 없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휴… 다행입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대장군들을 보며 벨라는 조금 언짢았다.

“잠깐만.”

“네?”

“아니, 내가 뭘 하든 말든 네가 뭔데 다행이다 아니다야?”

“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

벨라의 분노가 차분하게 쌓여갔다. 주제도 모르고 자기들이 뭔데 함부로 나서는 건지.

그때 잔바르가 자신 있게 벨라에게 물었다.

“그게 싫으시면 반려를 정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자기가 될 거라고 확신에 찬 말이었다. 그건 대장군들도 어렴풋이 예상했던 거라 그런지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반려? 왜?”

“여태 역대 마왕들은 다 대장군 중 하나를 반려로 택했잖습니까. 저희 중 하나를 반려로 택하시죠.”

“미쳤어?”

벨라는 대장군들을 한번 둘러보고 몸서리를 쳤다.

“너희 단체로 약 먹었니? 왜 그런 얘기를 해?”

마족들에게 있어 반려란, 그저 마왕과 총무 정도의 위치였다.

사랑 같은 감정은 절대 없지만, 역대 마왕 중 비슷한 걸 느꼈다는 몽마들끼리 민담이 있는 정도.

누가 되든 상관없지만, 마왕의 힘을 넘겨서 쓸 수 있는 존재다 보니 반드시 한 번은 몸을 섞는 일이 있어야 했다.

‘난 너희 다 싫어.’

상상도 하기 싫은데 무턱대고 반려를 정하라니.

“급할 거 없잖아.”

“급합니다. 안 그래도 공주님께 불만을 품는 놈들이 있어서요.”

“그럼 불만 좀 품어라 그래.”

잔바르가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말했다.

“급해요. 공주님이 인간 꼬마를 반려로 생각한다고 소문이 짝 퍼졌습니다.”

“누가 그런 개소리를 하는 거야?”

벨라가 짜증이 난 채로 눈을 부라리자 잔바르도 주춤했다.

“내가 키엘 있으니까 참는다. 싹 다 꺼져.”

잔바르는 꽤 뒤로 물러섰다. 건드려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알았기에.

하지만 키엘의 존재가 벨라에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나머지 대장군은 굴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파비온 같은 인큐버스랑 반려하실 것도 아니잖아요!”

“저희 중의 한 명을 반려를 정해주시죠.”

상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짜증이 나고 분노가 차곡차곡 쌓였다.

“싫다고 했잖아!”

“왜요!”

“싫은데 이유가 어딨어! Xx! 그냥 싫다고!”

벨라가 소리를 지르자 마계 전체가 흔들거렸지만, 대장군들은 눈치도 없이 쫑알거렸다.

“마계의 질서를 위해서라도….”

딱 3초였다. 벨라가 숨을 한숨 들이마셨다가 내뱉는 순간이.

“이 #$%$%, 니네가 언제부터 질서를 지켰다고!”

여태 그렇게 말할 땐 들어 처먹지도 않더니!

벨라의 이성이 끊어지는 소리였다.

벨라는 이제 웃으면서 이를 갈고 그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좋은 말 할 때 그냥 꺼져. 난 이제 인간계 갈 거야, xx.”

“안 됩니다!”

“불만 있으면 그냥 죽여줄까? 그럼 불만 없을 거 같은데.”

그때 탈람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마치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벨라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 인간계에 빠진 마족 따위는 마왕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모두 놀란 채로 탈람을 바라봤다.

“어이! 지금 반란이라도 일으키겠다는 거야?”

아직 벨라가 마왕의 힘을 전부 흡수한 게 아니었기에, 만약 그녀를 죽인다면 동면한 마왕이 깨어나 다시 후계를 만들겠지.

벨라는 조금 전에 키엘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래… xx, 인간계로 가기 전에 여기를 정리해야지.”

어느새 탈람 부대의 곤충들이 전부 결계로 몰려들었다.

그것도 벨라가 정말 싫어하는 광경이었다.

“애초에 너희가 내가 하라는 대로만 잘했으면 내가 그렇게 아등바등할 일도 없었을 텐데.”

아무리 마왕이라도 대장군은 함부로 죽일 수가 없었기에, 여태 내버려뒀건만.

이렇게 기어오르고 주제넘은 참견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들에게도 거대한 명분이 있었지만, 벨라는 200년 전의 사건을 전혀 알지 못했다.

반마족 하나가 마계에 들어와 모든 걸 뒤집어놓았던 사건을.

“우리는 당신을 마왕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

마른 눈물이 참아왔던 분노 위에 떨어지고 벨라의 눈이 점점 붉게 변해갔다.

이 역할에 빙의 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는 마왕이고 싶지 않았다.

“Xx, 다 죽여버릴 거야.”

쭉 참았던 분노가 화산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벨라의 등 뒤로 커다란 날개가 펼쳐지며 주변에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그 바람에 키엘이 뒤로 넘어지며 얼굴에 상처가 생겼지만 벨라는 눈치채지 못했다.

“도, 도련님. 아무 소리도 내지 마세요.”

별장 앞을 지키고 있던 푸르가 양손으로 키엘의 입과 그의 상처를 막았다.

그리고 어느새 왔는지, 이웨르가 눈치를 보며 작게 푸르에게 물었다.

“아… 공주님 눈 돌아가는 거양?”

푸르는 ‘쉿’하고 저자세를 한 채 별장 안으로 몰래 숨어들었다.

거센 바람이 별장 안까지 들이닥치고 난 후, 밖이 조용한 것 같자, 푸르가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었다.

하늘은 저 멀리 붉게 물들어 있었다.

“휴. 다행이다. 공주님이 눈앞에 있는 놈들만 먼저 죽이러 갔나 봐!”

“아아. 좀 더 보고 싶었는뎅.”

“시간 좀 지나서 살짝 진정될 때 구경하러 갈래? 난 공주님이 학살할 때가 제일 예쁘더라!”

“좋아, 좋앙.”

반면 키엘은 한숨만 크게 내쉬었다.

젠킨스가 그렇게 조심하라고 했는데.

그래도 이참에 벨라가 없는 틈을 타 인간계와 연락할 수는 있었다.

키엘은 마법을 쓸 수 없었기에 리네가 따로 챙겨준 마법도구를 열었다.

‘이게 될까.’

다행히 마법도구는 빛을 만들어내며 작동했다.

“리네. 거기 있어?”

“세상에, 이게 세계도 뚫는구나.”

인간계에서 몇 번 시도했지만, 마계와 인간계를 이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나 그 마왕님께 허락받아서, 이거 내 발명품이라고 해도 될까.”

“리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혹시 젠은 근처에 있어?”

무전 너머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젠킨스가 소리쳤다.

“이봐요! 사람을 발로 깨우는 게 어딨습니까. 제가 무전 와도 깨우지 말랬잖아요!”

“젠 할범, 키엘이 연락 왔어요.”

“도련님이?”

그때 키엘의 뒤에서 뭔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푸르와 이웨르까지 무전에 집중하다 그 소리의 정체에 고개를 돌렸다.

“…왜 여기 있어용?”

잔바르는 그 큰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린 채 무전을 보고 있었다.

“리네, 일단 로잔느를 찾아줘.”

“로잔느? 걔는 왜?”

키엘은 벨라가 그 이야기대로 죽음을 원하는 줄 알았다.

희망을 주고, 행복을 보여주면 다시 살고자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벨라의 행동은 키엘이 알고 있는 얕은 수면과는 달랐다.

황제가 되는 것만이 키엘의 운명이 아니었다.

- “아니지, 로잔느랑 꽁냥할 시간에 날 찾은 거면….”

어릴 때 봤던 그 검은색 물체를 통해 분명 뭔가와 소통하고 있었다.

- “얘한테는 따로 운명의 상대가 있는 걸.”

그리고 계속해서 말하던 그놈의 운명.

벨라가 적었던 필사본.

그건 로잔느를 얘기하는 거겠지.

그가 세웠던 수많은 가설 중 가장 부인하고 싶던 가설이 빈 퍼즐 조각에 가장 닮은꼴처럼 맞춰져 갔다.

키엘은 어리둥절해하는 리네에게 말했다.

“당분간 걔가 필요할 거 같아.”

“어… 알겠어. 리오한테 얘기할게.”

“일단 로잔느에게 내가 누군지 알리고, 협력할 건지 말 건지 고민해보라고 해.”

될 수 있으면 로잔느가 키엘의 편에 서 있는 게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그리고 젠킨스.”

“…예?”

젠킨스는 단호하게 명령하는 키엘이 낯설어 감상에라도 빠졌는지, 어벙하게 대답했다.

“우려한 대로, 벨라가… 조금….”

“우리 공주님이 피의 숙청을 시작했어요!”

차마 ‘미쳤다’고 말하기 힘든 키엘 대신 푸르가 말했다.

“어느 정도로요?”

“그렇게 물으면 모르겠는데.”

키엘이 푸르가 계속 설명해주길 바랐지만, 푸르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공주님이 탈람은 계속 죽이고 싶어하셨으니, 아마 화가 나도 단단히 화가 나신 거 같다.”

그때 뒤에 있던 잔바르가 대답했다.

“…….”

무전으로 젠킨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 이 애매한 분위기에 끼어들지 못하고 있을 때.

관계를 전혀 모르는 리네가 다행히 말꼬리를 이어 잡았다.

“키엘, 솔직하게 말할게. 젠 할배랑 계속 계산해봤는데, 마왕님이 마계에 있을수록 점점 마력이 강해지는 거 같아.”

“… 그래서? 소환이 안 돼?”

키엘은 사실 이곳에 있어도 상관없었다. 벨라만 옆에 있다면.

하지만 며칠간 그가 봐온 벨라는 인간계로 가고 싶어 했었다.

“도련님, 아가씨가 마력을 억제하는 방법을 찾았다고 하는데. 뭔지 아세요?”

“…응.”

“지금이 아마 마력을 제일 많이 방출하는 때일 겁니다. 제가 수도꼭지 설명 해드렸죠?”

“…….”

“평소가 그릇의 물을 조금 기울여서 쓴다고 치면, 지금의 아가씨는 그릇을 그냥 엎어버리는 수준일 거예요.”

키엘은 성검을 손으로 꽉 쥐었다.

“아가씨의 그릇이 전부 비워지는 그때, 억제하고 소환진을 여는 수밖에 없어요.”

“…미안해. 아직 대마법사가 아니라서.”

리네마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거라면, 달리 방법이 없다는 소리였다.

뭐든 해낼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었기에.

“…소환까지 얼마나 시간이 필요해?”

* * *

잠시 후, 조금 떨어진 곳인데도 피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코끝을 찔렀다.

“일단 공주님이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그때 다시 오는 게 어때용?”

작전상 후퇴를 하자는 이웨르와 다르게 키엘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냐. 리네가 다시 소환을 준비하려면 또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지 몰라. 지금이 기회야.”

“도련님, 진짜 가능하겠어용?”

“…해봐야지.”

그러자 눈치 없는 푸르가 해맑게 키엘을 응원했다.

“잘 찔러봐요! 도련님 안 죽게!”

“에이, 설마 아가씨가 도련님을 죽이겠엉?”

“공주님은 죽일 때 잘 기억 못 해.”

“소환진 뜨면 바로 달려갈게용! 그때까지 잘 버텨용!”

키엘은 그들의 응원 같지도 않은 응원을 뒤로하고 천천히 발을 떼었다.

공기 중으로 커다란 마력이 휘말리고, 저 멀리서 벨라가 춤을 추듯 하나씩 생명을 꺼트려 가는 게 보였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한발씩 가까이 갈수록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불협화음을 이루며 그를 긴장시켰다.

키엘의 가슴 한편에 구멍이 뚫린 듯 시려온다. 벨라를 애타게 찾던 날들처럼.

그저 만나기만 해도 좋을 줄 알았던 감정은 더 휘몰아쳐 가고, 욕심은 커져만 갔다.

산을 넘으면 또 하나의 산이 보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산맥을 발견한 그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직 작은 고개조차 넘지 못했는데.’

발아래 놓인 수많은 난제는 단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채 물살이 이끄는 대로 함께 떠밀려 내려갔다.

함께 넘었으면 하는 벨라의 마음조차 사지 못했다.

* * *

마계의 낮을 담당하는 달은 시리도록 푸르렀다.

벨라는 때때로 저 큰 달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고 생각했다.

하늘의 반을 차지하는 달은, 어딜 가도 쫓아와 벨라의 목을 조르고 푸른 달이 붉게 보일 때까지 마족으로서의 본성을 자극했었다.

어느덧 소설 속 마족에게 빙의한 지 14년.

그녀의 불안대로 그녀는 꽤 그 설정에 물들여져 있었다.

평소 그렇게도 죽이고 싶었던 바퀴벌레들의 목숨을 하나씩 끊으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래, 해충은 다 박멸해야지.’

죽어가는 비명조차 이제 들리지 않았다.

일부러 인간형으로 변신한 마족들까지 그녀는 전부 찾아서 심장을 쥐어 비틀었다.

반란조차 아니었다. 그저 반항에 불과할 정도로, 벨라의 일방적인 학살의 보복만이 그들에게 남겨졌다.

끝까지 살아남았던 탈람의 심장까지 비틀고 나자 벨라는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시체로 산을 이루었는데도, 힘을 쓰면 쓸수록 욕망의 바닥이 절실히 드러났다.

“아직 모자라….”

이 욕망은 채워도 채워지지 않았다.

빈 심장처럼, 항상 비어있고 갈급했다.

그때 그녀는 그 사이에서 조용히 생명이 다가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잔인한 유희를 기대했다.

“아…. 더 죽일 거 없나….”

마치 꿈 같이 정신이 몽롱했다.

햇빛 하나가 기특하게도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걸 보면서 미소를 머금었다.

어느새 온몸이 붉게 물든 그녀는 살짝 눈을 치켜올려 뜬 채로 다가오는 키엘을 초점 없이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키엘의 수만 가지 생각은 정리되지 못하고 뒤섞인 채로 가라앉을 뿐이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네요….’

한번도 벨라가 마왕에 어울린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하지만 바람에 흩날리는 검은 머리와 붉은 눈동자는,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잔인해 보였다.

키엘은 성검을 꽉 쥔 채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뺨에 생긴 상처의 냄새를 맡고 벨라가 손을 들었다.

뺨을 닦으며 묻은 피를 할짝거리더니 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등 뒤로 푸른 달이 그녀의 검은 날개를 비추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그토록 사랑스럽게 그를 쳐다봤는데.

“벨라.”

이 잔인한 모습조차 아름답다고 한다면, 미친 거겠지.

어떤 생각도, 계획도 소용없는 순간이었다. 그는 홀린 듯이 벨라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그녀가 손톱으로 그의 목에 갖다 대려고 할 때.

지금 이대로 그녀의 손에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나를 가져요.”

그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그 미친 마음을 표현했다.

벨라는 맛있는 음식을 입 안에 가득 담고 음미하듯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목을 그으려고 했던 긴 손톱이 점점 작아지고, 키엘의 뺨에 두 손을 올린 채 억눌러왔던 본능을 맛보았다.

차가웠던 입술은 뜨거워지고, 부드러웠던 촉감은 거칠어졌다.

허리로 가늘고 간지러운 손길에 다시 눈이 감기다가, 벨라는 정신을 잃었다.

키엘은 벨라의 심장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가 느끼는 감정 대부분을 그도 느낄 수 있었다.

시체로 산을 이룬 곳.

그 정상에 서 있던 벨라는 한없이 차가운 입술이었지만.

처음 맞추는 그 입은 그곳을 그토록 애달프게 바라왔던 정상으로 인도한다.

오롯이 두 사람만의 시간과 공간으로.

이대로 시간을 멈출 수만 있다면.

조금만 더 늦출 수만 있다면.

하지만 시간은 늘 키엘의 편에 서지 않았다.

* * *

키엘의 뒤로 소환진이 나타나고, 벨라의 초점 없는 붉은 눈 위로 빛이 아른거렸다.

그는 벨라의 손을 잡고 소환진에 대보았다. 더 들어가지 않고, 튕겨버렸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성검에 손을 들었다.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벨라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미안해요.”

힘없이 축 늘어진 벨라의 손을 다시 소환진으로 대보자, 점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소환진을 보고 멀리서 푸르와 이웨르가 헐레벌떡 뛰었다.

“저부터 갈게요!”

“푸르! 잠시만!”

이웨르가 말리지만 푸르는 신이 났는지, 제일 먼저 소환진으로 점프했다.

“왜 이렇게 소환진이 공중에 있어용?”

“벨라가…. 정신을 잃었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멀리서 잔바르가 어슬렁거리다 그들에게 다가왔다.

“설마 지금 인간계로 가는 건가!”

“방해할 거면 꺼져용!”

한편, 인간계에서 소환하던 리네는 드디어 마왕의 얼굴을 본다는 생각에 두근거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벨라의 손바닥은 보이지만, 여전히 투명한 막에 가려져 있을 때.

“젠 할배, 실팬가 봐요.”

“괜찮아요, 도련님이 어떻게든 데리고 나올 겁니다.”

이미 소환은 실패였다.

‘제대로 소환하면 계약하려고 했는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형체가 소환진에서 나왔다.

‘키… 키엘이 찾던 사람이…. 사람이 아닌데?‘

하필 먼저 튀어나온 건 푸르였다.

푸르는 나오자마자 젠킨스에게 달려들었다.

“우와! 젠! 오랜만이야!”

“푸르씨, 아가씨는요?”

“나도 몰라!”

“모르면 어떡합니까?”

리네는 순간 당황해서 소환진이 깨질 뻔했지만, 다시 집중했다.

“고… 곰이 말하네.”

지켜보고 있던 리오는, 꽤 오래전에 로잔느가 ‘곰이 말하는 걸 봤다’고 한 걸 떠올렸다.

“혹시 그… 푸딩?”

“푸딩 아니에요! 푸르입니다! 맛있는 인간!”

리오가 움찔거렸다.

“젠, 나 쟤 먹어도 돼?”

“아가씨 오시면 물어보세요.”

리네가 더 버티기 힘들 때쯤.

리네와 리오는 키엘이 그토록 찾던 사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벨라를 안고.

등에 꽂혀있는 성검을 빼서 그 뒤로 흘러나오는 피를 손으로 막으면서.

키엘은 울고 있었다.

“젠…. 내가 벨라를….”

쌍둥이는 둘 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껏 지쳐 보이는 얼굴, 슬퍼 보이는 얼굴은 많이 봤지만 우는 건 처음 봤다.

“괜찮아요, 아시잖아요. 그런 거로 안 죽는 거.”

“왜 바로 회복이 안 돼? 벨라, 정신 차려봐요.”

“이 피는 설마 다 아가씨가 흘리신 거예요?”

푸르는 리오를 보고 침을 꿀꺽 삼키며 젠킨스의 말에 대답했다.

“아니! 공주님이 탈람부대 다 죽이고 넘어온 거야!”

“탈람부대면… 설마 대장군이요?”

리네가 벨라의 소환을 보고 힘을 탁 풀자, 소환진은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완전 탈진이야….”

그때 키엘의 위로 이웨르와 잔바르가 동시에 소환진에서 나왔고.

키엘은 반사적으로 벨라를 감싸 안으며 옆으로 피했다.

“왜 나까지!”

“아가씨가 잔바르 님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어용!”

물론 벨라는 그런 적 없었다.

하지만 이웨르가 내기에 이겼으니, 보상으로 잔바르와 젠킨스의 성인만이 볼 수 있는 장면을 봐야 했다.

잔바르는 도착하자마자 젠킨스를 아련한 눈빛으로 노려보다가.

“공주님은 도대체!”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무슨 일….”

정신을 잃은 채 눈을 감은 벨라를 보고 잔바르는 말꼬리를 흐렸다.

“인간계로 넘어오기 위해 성검으로 아가씨의 급소를 살짝 찔렀어용.”

잔바르는 서서히 표범으로 변하면서 세 개의 꼬리를 흔들며 이를 드러냈다.

“꼬마 녀석…. 기어코 키워준 은혜를 이렇게 갚다니….”

“아가씨가 원한 거였다고용!”

“웃기지 마! 성물이 얼마나 위험한 건데!”

“시간 지나면 알아서 회복 되실 거예용.”

“성물이라면 말이 다르지, 제물은 어딨나?”

“제… 제물은 이건데요.”

리네가 조심스레 죽은 개미를 보여줬다.

“그딴 걸로 소환이 되나?”

벨라가 그냥 벌레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치라고 한 건데.

리네는 조금 억울했지만 잔바르의 위엄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이 인간들이라도 먹게 하면….”

“아항…. 그건 그렇긴 하네용.”

이웨르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리네를 쳐다봤다.

이 일을 주모한 건 쌍둥이와 젠킨스, 이웨르 이렇게 넷뿐인데.

여기까지 열심히 달려왔는데 결론이 마왕의 식사라니.

“그러고 보니 계속 따라다니던 여자애는용?”

로잔느와 마이유 얘기였다.

“걔들이라도 먹이면….”

이웨르도 로잔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러는 동안 쌍둥이들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 전하.”

“키, 키엘?”

키엘은 주저 없이 자신의 팔을 찔러 흘러나오는 피를 벨라에게 가져갔다.

“…먹어요, 제발.”

하지만 벨라의 입술 사이는 키엘의 피가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그때 푸르가 키엘과 벨라 사이로 자신의 작은 팔을 집어넣었다.

“안 돼요! 공주님은 인간 먹기 싫어했다고요!”

작은 팔로도 다 막지 못하자, 아예 몸을 쑤셔 넣었다.

“푸르, 비켜.”

“푸르는 공주님 지켜야 해요!”

“내가 벨라를….”

푸르의 목으로 붉게 복종서약의 띠가 움직였다.

“푸르는 공주님이 하란 대로 할 뿐이에요!”

그 난리에 침착한 건 젠킨스뿐이었다.

“진정해요, 아가씨가 이런 것도 예상하고 얘기해주셨으니까.”

젠킨스는 주머니에서 약병 하나를 꺼냈다.

“성물이 닿으면 힘을 차단만 한다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힘을 못 쓸 때가 제일 약할 때니 조심해야 하는 거고요.”

젠킨스가 눈짓하자, 푸르는 미간을 찌푸리다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성검으로 찌른 곳을 보여주세요.”

키엘이 벨라를 안은 채 그녀의 등을 보였다.

“봐요, 미세하지만 회복되는 거.”

“…….”

“성검을 사용하기 전에 무슨 일을 하신 거예요?”

키엘은 눈을 감은 채 벨라의 작은 숨소리에 집중했다.

“기절할 때까지 본인의 마력을 다 쓴 거 같네요.”

젠킨스는 약병의 입구를 열고 벨라의 등으로 부었다.

“잘못하면 위험할 뻔했어요. 아가씨가 도련님을 공격하진 않던가요?”

마력을 사용할수록, 본능에 가까워진다고 했었다.

그는 벨라의 머리를 당겨 끌어안았다.

“벨라가… 날 공격할 리가 없잖아.”

* * *

벨라가 정신이 들어 눈을 살짝 떴을 때, 그녀는 다시금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눈부셔.”

그녀의 말 한마디에 차르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감은 눈앞에 어둠이 펼쳐졌다.

익숙한 어둠에 눈을 뜨자 낯선 듯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들어요?”

“…키엘?”

키엘은 초에 불을 켜두었다.

벨라는 멍하게 키엘이 하고 있는 행동을 눈으로 좇아가며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몸은 좀 어때요?”

벨라의 손등 위로 그가 가볍게 손을 올리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여기 어디야?”

손가락이 잠깐 멈추고, 작은 촛불은 키엘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게 흔들렸다.

불빛이 아른거리자 벨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편안하고 푹신한 침대와 살갗에 닿는 부드러운 이불. 처음 보는 커튼.

“혹시 여기 인간계야?”

“…네.”

“어떻게 왔지? 아.”

정신이 들자, 등 쪽이 쓰라리며 아파져 왔다.

“키엘, 혹시 검으로 찔렀어?”

“…네.”

그런데 왜 아직도 아픈 걸까. 벨라는 일어나서 손을 뻗어봤다.

“뭐지?”

“왜 그래요?”

“힘이 안 돌아와.”

키엘이 입술을 깨문 채 벨라의 손을 어루만졌다.

“그럼 회복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가 봐.”

“그럼 좀 쉬어요.”

키엘은 벨라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다시 눕혔다. 힘주면 넘어가지도 않던 사람이, 너무 쉽게 그의 힘에 넘어갔다.

하지만 그가 어깨를 놓자 벨라는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앉았다.

“에이, 이 정도로 뭘. 금방 돌아올 거야.”

하지만 키엘의 안색은 어두운 곳에서도 표가 날 만큼 좋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래?”

그러다가 벨라는 키엘의 팔에 감긴 붕대가 눈에 보였다.

“설마 이거 내가 이렇게 한 거야?”

건드리지도 못하고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손을 접었다가 폈다만을 반복했다.

“세상에. 내가 아직… 힘을 다 승계받은 게 아니라서… 조절이 좀….”

“혹시… 기억 안 나요?”

벨라는 키엘의 황당한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조… 조금?”

드문드문 기억이 나지만, 정확히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몰랐다.

“이게 술을 진탕 먹고 필름 끊기는 거 같은 기분이라….”

벨라는 원망스러운 듯 자신을 보는 키엘을 보자 미안한 마음에 그를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미안해. 내가 좀….”

괴물 같았다.

마력이 바닥이 날 만큼 힘을 쓰다 보면 어느새 시체 비린내 사이에 앉아있던 채로 정신이 들곤 했었다.

그때마다 변해가는 자신이 스스로 경멸스러웠는데.

아무리 정신을 잃어도 인간계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차분하게 생각이 돌아왔던 것처럼.

키엘을 보면 진정이 될 줄 알았었는데.

“아마 그냥 평범한 인간인 줄 알고 그랬나 봐….”

“인간계로 넘어오기 전은… 기억 안 나요?”

벨라는 천천히 누워서 이불을 끝까지 끌어올렸다.

눈빛을 보면 뭔가 큰 실수를 한 거 같았다.

‘설마 내가 욕이라도 했나?’

그때 키엘은 벨라 옆으로 앉아 그녀의 턱을 살짝 잡았다.

“왜 얼굴을 피해요.”

“아니, 피하는 게 아니라….”

그리고 그는 벨라의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했다.

“말해봐요. 어디까지 기억하는지.”

‘얘 왜 이래?’

이곳이 침대 위라서 그럴까. 아니면 어두운 곳에 촛불 하나만 있어서 그럴까.

어린 시절 늘 보던 키엘이 아니라 다른 사람 같았다.

손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되는 묘한 분위기.

“그, 어, 음.”

그는 벨라의 턱 끝을 잡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이거… 기억 안 나?”

저 호박색 눈이 어딘가 애달파 보인다면 과대망상인 걸까.

애정 어린 관심을 요구하는 눈빛에 벨라는 침을 삼켰다.

벨라가 손으로 그의 뺨을 살짝 만지자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가 손을 올린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그의 뺨에 난 작은 상처가 눈에 띄었으니까.

“이거도 내가 한 거야?”

키엘은 다가가는 걸 멈추고 침대보를 꽉 쥐었다.

‘어떻게 그걸 기억을 못 해.’

키엘은 그의 목에 벨라의 날카로운 손톱이 그의 목숨을 노리는 게 아직도 선명했다.

정말 그대로 죽는다 해도 좋았었다.

충동적으로 행동했지만, 벨라가 분명 그의 마음을 알고 받아준 거라 생각했다.

그녀의 욕망이, 곧 그의 욕망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푹 쉬어요.”

그는 조용히 일어섰다.

“저, 키엘.”

혹시나 기억의 끝자락이라도 잡은 걸까 싶어, 키엘은 조용히 대꾸했다.

“네.”

“혹시… 내 짐은….”

반면 벨라가 원작이 바뀔 걸 각오하고 온 이유는 하나였다.

이미 조금 바뀐 것 같기에, 확인해야 했으니까.

‘잃어버리면 큰일 나는데.’

아직 소설 사본이 저택에 있으니, 필요하면 저택으로 가면 되지만.

사본은 검색기능이 없어서 일일이 다 찾아봐야 하는 단점이 있었다.

“푸르가 다 챙겨왔어요.”

그 말에 벨라는 벌떡 일어섰다.

“뭐? 푸르도 왔어?”

이미 젠킨스와 이웨르가 인간계에 남으면서도 바뀐 게 한두 가지가 아닌 거 같은데.

‘떼놓고 올랬더니.’

그래도 짐을 챙겨왔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서둘러서 확인해봐야 한다.

제때 죽지도 못했으니, 원작대로 완결이 나지 않으면 그대로 천 년을 살게 될 테니까.

“그럼 일단 내 짐부터….”

벨라가 침대에서 일어서자, 키엘이 그녀를 붙잡았다.

“벨라, 회복도 안 된다면서요.”

하지만 성질 급한 벨라는 키엘이 그녀를 위해 기껏 쳐둔 커튼부터 열어젖혔다.

“아….”

강렬한 빛 때문에 다시 눈을 감고 주춤 이자, 키엘은 뒤에서 그녀를 잡으며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냥 쉬면 안 될까?”

벨라는 여전히 눈이 부시긴 했지만, 천천히 빛에 익숙해져 갔다.

“…벨라?”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진짜 여기… 인간계구나.”

큰 창 밖으로 파란 하늘이 보이고, 초록빛의 잔디 위에 꽃들이 만개했다.

“아….”

앞뒤 잴 것도 없이, 벨라는 홀리기라도 한 듯 맨발로 정원을 나가 풀밭에 발을 내디뎠다.

“세상에….”

잔디를 어루만지며 엎드리고, 몸을 돌려 하늘을 바라봤다.

얼마 만에 보는 건지.

“맙소사….”

교도소에서도 1시간씩 밖을 나와 자연을 보곤 한다는데, 벨라는 4년 동안 이 아름다운 광경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늘 비명이 아니면 이상한 웃음소리로 가득 찼던 마계와 다르게, 여러 새가 지저귀는 소리는 음악이 되어 귀를 가득 채웠다.

“인간계야…. 여기 인간계라고….”

벨라는 감동에 찬 채 하늘을 바라보다, 어느덧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키엘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벨라의 눈 주변을 살짝 가리며 물었다.

“눈부시다면서요.”

벨라는 천천히 키엘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렇게 하기 싫어했는데도, 성검으로 그녀를 찌르고 이곳까지 넘어왔다.

방금까지만 해도 원작에만 온통 신경이 쓰였는데.

침울하고 어두웠던 지난 시간과는 이제 영원히 작별이었다.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고 아름다운 나의 구원자.

“…고마워.”

* * *

벨라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마족들은 벨라부터 찾았다.

당연히 방에 있을 줄 알았는데.

젠킨스는 벨라를 발견하자마자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푸르씨… 설마 저게 아가씨가 정신 나갔다는 상태는 아니죠?”

벨라는 정원에 드러누워 말 그대로 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늘을 가리는 잔바르의 얼굴을 보자 벨라는 어리둥절하게 몸을 일으켰다.

“넌 왜 왔니?”

그러자 이웨르가 헐레벌떡 뛰어오면서 대답했다.

“아, 아가씨가 잔바르 님도 있으면 좋겠다고 했잖아용!”

벨라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의아하게 이웨르를 바라봤다.

‘내… 내가?’

딱히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게다가 여기는 젠킨스도 있잖아용!”

“젠 있으면 더 오기 싫은 거 아냐?”

“…….”

잠깐 싸늘하게 정적이 흘러갈 때쯤.

“공주님!”

멀리서 푸르가 네 발로 뛰어와 벨라에게 푹 안겼다.

당연히 꺼지라고 화낼 줄 알았지만, 벨라는 푸르를 보자마자 그녀를 쓰다듬어주었다.

“인간계에선 공주님 아니고 아가씨라고 하랬잖아.”

오랜만에 보는 곰 인형 모습의 푸르였다.

‘하나도 안 컸네.’

물론 마계에서는 벨라보다 훨씬 큰 모습이었지만, 지난번에 인간계에 있을 때와 별 변한 게 없었다.

그녀가 마족끼리 서로 잡아먹는 걸 싫어해서, 푸르는 마계에서도 전혀 힘을 키우지 못한 터였다.

이럴 땐 푸르가 참 좋았다.

눈치 없이 끼어드는 거만 빼면, 벨라가 하라는 대로 하는 제일 착한 곰이었다.

“너 이렇게 막 돌아다녀도 돼? 말하는 곰인데?”

“공주님 피 먹으면 저도 사람 될 수 있을 거 같은데!”

“응. 그런 음흉한 계획은 속으로만 생각하렴.”

“도련님이 괜찮다고 했어요!”

그때 오랜만에 보는 젠킨스도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아가씨.”

“오랜만이네.”

하지만 젠킨스에게 벨라의 목소리는 질리도록 들은지라 오랜만 같지 않았다.

“아가씨, 이제 인간계로 넘어오셨으니 어쩔 계획이에요?”

이미 이웨르와 한 내기는, 이웨르가 거의 이긴 것 같았다.

이웨르가 키엘과 함께 마계로 가기 전, 잔바르를 데리고 올 테니 약속을 이행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남기고 갔는데.

하지만 젠킨스는 마족들의 그 무관심함을 믿어보기로 했다.

200년간 잔바르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인간계로 도망치신 겁니까?”

그리고 그 잔바르는 벨라를 향해 불만을 표하고 있었다.

어찌나 위엄있게 말하는지. 벨라는 코 밑을 쓱싹거리며 심드렁하게 듣고 있었다.

“마계를 그 사단으로 만들어놓고, 수습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깨어난 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짜증 나게.

“그렇게 걱정되면 네가 가서 수습해.”

나보고 하라고 하지 말고 네가 하란 말이야.

“공주님은… 안 돌아가십니까?”

지금도 벨라가 고개를 올리면, 마계와 다른 푸른 하늘과 차가운 겨울과 싱그러운 봄 사이, 희망의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물론 급하게 오느라 힘을 모두 승계받은 게 아니기에, 다시 돌아가야 하겠지만.

벨라가 아는 한, 적어도 소설이 완결되기 전에는 돌아갈 일은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계속 여기 있으실 거예요?”

어쩌긴, 뭘 어째. 현재 상황을 잘 확인하고 원작대로 흘러갈 수 있게 도와야지.

하지만 이런 말을 마족들에게 할 수도 없고.

‘그러고 보니….’

그녀는 오래전 기억 속에 그들에게 했던 말을 꺼냈다.

“다 계획대로야. 인간계 침략할 거면 넘어와야 했잖아?”

“…!”

잔바르의 두 눈이 커지고, 그는 전대후무한 마왕의 통찰력에 감명받은 듯 무릎을 굽혔다.

그걸 보고 있던 젠킨스의 입도 벌어졌다.

분명 인간계로 갑자기 안 오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얼마 전이었다.

‘아무리 변덕이 심하다지만….’

하지만 다행히 이걸로 그들이 벌인 일을 더는 추궁하지는 않을 듯 보였다.

“이제 알아들었으면 다들 가봐. 난 오랜만에 이 공기를 만끽하고 싶으니까.”

어느 정도 일단락이 된 것 같자, 벨라는 시큰둥하게 가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모두 딱히 할 일은 없지만, 뒤를 돌아서서 각자의 길로 걸었다.

젠킨스는 옆에서 얼이 빠진 이웨르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내기는 아무래도, 안 끝난 거 같네요.”

“…쳇.”

한편 쌍둥이들은 벨라에 대해 꽤 많은 궁금증이 있었다. 특히 리오는 동물왕국에 대해 몇 년간 찾아다녔기에 더욱더.

분명 생김새는 뒷골목의 정점에 서서 내려다볼 미모였다.

리네에게는 종아리까지 오는 원피스를 벨라가 입으니 무릎에 닿을 정도로 키도 크고.

칠흑 같은 머리에, 고양이처럼 눈꼬리가 올라간 붉은 눈은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사나워 보였다.

그럼에도 묘하게 매력적인 얼굴.

리네는 벨라를 보면서 높은 구두를 신고 엎드린 남자들을 발판 삼아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내가 상상한 마왕과는 너무 다른데.’

물론 아직 마왕의 힘을 다 받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마왕이라 함은 마계의 최고 권위자일 텐데.

“저 사람이 키엘이 그렇게 찾던 사람이라고?”

정원에서 곰 인형과 뒹굴면서 깔깔거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아이 같았다.

리네는 지나가는 젠킨스를 붙잡고 창밖을 가리켰다.

“젠 할배, 마왕님이 원래 저렇게 착해요?”

“그럴 리가요. 욕하는 거 간접적으로 다 들었잖아요.”

상상과 일치가 되지 않는 리네와 달리, 리오는 오히려 어깨를 으쓱였다.

“키엘이 엄청 착하다고 많이 얘기했는데.”

“무려 마왕이잖아, 멍청아.”

* * *

벨라가 맨발로 정원을 푸르와 함께 뛰어다니는 동안, 키엘은 매우 분주했다.

“식사 준비는 다 됐나?”

“30분 이내 준비하겠습니다.”

“주문한 옷은 언제 도착해?”

지금이야 키엘이 황태자로서 입지가 돈독하지만, 시간을 되돌리기 전에 뼈저리게 느껴왔던바.

황궁은 화려한 겉보기와 다르게 치열한 곳이었다.

그러니 키엘은 벨라가 욕심을 부리길 원했다. 그래야 그곳에 있고 싶은 욕망은 더욱 커질 테니까.

그게 권력이든, 탐욕이든, 사치든. 뭐든 상관없었다. 이 모든 것들을 그가 채워줄 수 있으니.

‘저렇게 좋아하는 걸 봐선….’

그냥 저택에서 살련다 하고 떠나버릴 수도 있었기에.

그렇게 식사 시간이 다가오자, 벨라는 두 눈을 반짝거렸다.

“세상에….”

키엘은 황궁 요리사를 시켜 제국의 지역별 특산물을 화려하게 저녁 만찬으로 준비했다.

- “이딴 게 아가씨 취향일 리가 없잖아용!”

벨라가 진짜 채식주의자로 바뀐 것인지 걱정했는데.

“키엘, 네가 최고야.”

벨라는 홀린 듯이 자리에 앉아 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마계에서 배 아파하며 독초나 먹고 있었는데.

한 입씩 먹을 때마다 벨라는 숨을 길게 내쉬며 아직 살아있는 미각에 감사했다.

“맛있어요?”

“너무 좋아….”

오랜만에 고기를 썰다 보니, 계속 음식이 접시 밖으로 날아가지만 벨라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여기가 천국이 아닐까…?”

“무슨 마계 공주가 천국을 찾는지….”

맞은 편에 있던 젠킨스는 입가에 다 흘리며 먹는 벨라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좋아해서 다행이네요.”

벨라는 이 모든 게 좋았다.

안타깝게도 이 수많은 음식을 다 먹지 못한다는 거만 빼면.

“…위가 너무 줄었나 봐.”

“그럼 제가 먹을래요!”

벨라가 아쉬운 듯 남은 음식들을 보며 포크를 입에 물었고, 키엘은 흐뭇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매번 이렇게 먹을 수 있으니까 걱정 마요.”

키엘이 웃으면서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닦아주자.

“키엘, 완전 사랑해.”

그 순간.

키엘은 사랑에 빠져 망한 조상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나도 닦아요!”

그 모습을 본 맞은편의 푸르가 예전에 후안이 벨라에게 줬던 손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닦았다.

키엘은 푸르가 끼어들 때마다 싫었지만, 지금만큼은 고마웠다.

안 그랬으면 지금 당장 무릎을 꿇고 저 사랑한다는 스쳐 지나가는 말을 듣기 위해, 제국도 바치겠다고 할 거였으니까.

식사를 마치고, 벨라는 소설 속 내용과 얼마나 다른지 알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해서 그런지.

식곤증이 몰려왔다.

“아… 나른하고 너무 좋다.”

별장의 복도에 예쁘게 자리하고 있는 소파가 보이자 자신도 모르게 슬쩍 누웠다.

소파에 눕자 깨어나고 계속 돌아다녔던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래…. 어차피 오늘 알든 내일 알든 상황이 바뀌진 않으니까.’

지금은 그저 꿈에서도 보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싶었다.

‘오늘 하루는 그냥 맘 편히 쉬자.’

“푸르도 누울래요!”

“넌 옆에 소파 가서 누워. 여긴 내 거야.”

“네!”

벨라는 멀리 노을이 지고 있는 것만 봐도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은은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때 불쑥 그림자가 지고, 고개를 올려보자 해를 등진 키엘이 서 있었다.

“여기 있었네요?”

그가 옆으로 누워있는 벨라에게 눈높이를 맞추려고 바닥에 앉으면서 말했다.

“밥 먹고 바로 누우면 소 된다면서요.”

그 말에 반응을 한 건, 벨라가 아닌 옆에 누워 있던 푸르였다.

“난 소 아니에요! 자랑스러운 곰이라고요!”

“푸르, 내 방 가서 먼지 털어.”

일거리를 주지 않으면 계속 벨라 옆에 붙어 있는 게 푸르의 일과라, 벨라는 뜬금없이 끼어드는 곰을 치워버렸다.

“네! 이 몸으로 청소하는 건 오랜만이에요!”

푸르가 주먹을 꽉 쥐고 뒤를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본 키엘은 순간 마치 예전 저택의 일상을 보는 것 같아 살며시 미소 지었다.

“식사는 어땠어요?”

“최고였어. 이웨르보다 훨씬 더.”

그러더니 벨라가 눈만 굴리며 덧붙였다.

“이웨르 여기 없지?”

그에게 벨라는 진지할 때 제일 귀여웠다. 그토록 찾아다녔는데 여기 누워 있을 줄이야.

“예전에 진짜 누우면 소 되는 줄 알았는데.”

동물이 되고 싶진 않았지만, 동물왕국의 일원이 되고 싶었었다.

황태자라는 것도 다 버리고.

“아니더라고요?”

“그걸 믿었어? 그냥 게으름 피우지 말라는 거였는데.”

“벨라 몰래 식사 후에 누워보고 그랬어요.”

키엘은 소파에 두 팔을 올려 그 위에 얼굴을 기댔다.

마계에서는 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는데, 밝은 곳에서 벨라를 보니 더 좋았다.

“인간계 오기 전에 무슨 일 있었는지 애들이 얘기해줬어.”

“…….”

“고생 많이 했다면서?”

벨라가 손을 뻗어 키엘의 볼을 살짝 잡았다.

“고마워. 그렇게 하기 싫어했는데.”

키엘은 그저 미소만 지었다.

‘진짜 기억 못 하나 보네.’

그래도 이 얼굴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어디랴.

앞으로 넘어가야 할 산은 첩첩산중인지라.

“괜찮아요.”

“맨날 괜찮대.”

그저 이대로 그녀를 보며 잠이 들고 싶었다.

“이렇게 있으니까 나른하네요.”

“그렇지? 근데 나는 왜 찾은 거야?”

“여기서 지내면서 당분간 입을 옷을 좀 준비했는데….”

그 말에 나태함의 끝을 보이던 벨라가 벌떡 일어섰다.

“옷?”

벨라는 그제야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봤다.

“나 오늘 온종일 이러고 돌아다닌 거야?”

흰옷인데, 정원에서 뒹굴거리느라 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이런 거적때기 같은 옷을?”

키엘이 벨라를 데리고 간 곳은, 그녀가 있던 침실 바로 옆이었다.

“세상에….”

벨라는 문이 열리자마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저택에 있을 때 입던 옷들이랑 비슷한 거로 사뒀는데, 아마 옷이 좀 클 거예요.”

편한 바지부터, 벨라가 저택에서 즐겨 입던 원피스나 조금 퍼진 치마들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벨라가 입었던 것과는 다르게 만질 때마다 부드러운 고급스러운 원단과.

“미쳤다, 이 원단 봐.”

아예 검은색의 원단부터 살짝 회색빛이 감돌거나, 남색 빛이 감도는 원단들까지.

“이걸 언제 다 준비한 거야?”

진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냥 급하게 준비한 거예요.”

“어쩌면 다 내 스타일이니.”

“마음에 들어요?”

벨라는 두 손을 모으고 키엘을 똘망똘망 쳐다봤다.

“네가 최고야.”

그리고 키엘을 부둥켜안고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제일 사랑해.”

그리고 그를 올려다보며 두 눈을 반짝이자, 키엘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자꾸만 마계에서의 그 마지막이 떠올라서.

키엘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는 순간.

“뭐부터 입어보지?”

벨라는 그의 가슴에서 떨어지며 신이 나서 이 옷 저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이거 어때?”

“…뭐든 다….”

“아냐, 이거 입어야지.”

질문이 아니었다.

이미 벨라는 평소 갖고 싶었던 드레스룸 안에서 거울에 대고 옷을 대보며 혼자만의 세계에 빠졌다.

“세상에.”

잠시 후, 벨라는 패션쇼라도 하듯 짠 하고 나타났다.

“완전 마음에 들어!”

그가 늘 꿈꿨던 벨라의 모습이었다.

‘저 옷을 입고 있을 줄이야….’

키엘은 차마 벨라가 보고 싶을 때마다 하나씩 사뒀던 옷들이라고는 못했다.

어떨 때면 홀리기라도 한 듯, 그 옷들이 벨라라도 되는 것처럼 멍하게 바라보곤 했다.

벨라가 한 번도 입어본 적 없는 옷들인데도.

키엘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단추를 채웠다.

‘너무 말랐어….’

너무 야윈 몸이라 옷이 큰 게 마음에 걸렸지만, 벨라는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고마워. 우리 키엘, 이렇게 효도하네.”

“…효도 아니에요.”

키엘은 벨라가 흑심 가득한 유혹을 이렇게 표현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래, 그래.”

하지만 벨라는 키엘을 스치듯이 안아주고는 밖으로 나섰다.

“이제 뭐 하고 놀지?”

* * *

쌍둥이들은 키엘의 방에서 그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하아.”

리네가 한숨을 쉬자, 리오는 던지고 있던 공을 탁 잡고 물었다.

“좀 기다려. 벨라 님 찾고 바로 온댔어.”

“그게 아니라….”

벨라를 같이 찾는다고 지나가다가 우연히 들었던 소리 때문이었다.

- “나 오늘 종일 이러고 돌아다닌 거야? 이런 거적때기 같은 옷을?”

그 옷은 리네의 옷이었다. 왠지 벨라가 리네를 안 좋아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리오, 나 마왕님이랑 계약할 수 있을까?”

“소환 실패할 때부터 포기한 거 아니었어?”

“고맙다는 소리 들어보려고 내 옷도 빌려준 건데.”

“솔직히 그냥 하녀들 옷이 더 낫다고 했잖아.”

리네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래도 내 옷 중에는 제일 깔끔한 거라고.”

“정말 깔끔하긴 하지.”

그저 흰 천에 목과 팔이 나오는 구멍만 뚫어놓은 원피스 같았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키엘이 들어오자 그들은 누워있다가 헐레벌떡 일어섰다.

“오늘 검토한 거만 전달하면 되지?”

키엘은 인사도 하지 않고 책상에 앉아 산더미 같은 서류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 키엘. 이것도 확인해줘야겠어.”

“…하아. 비브르 후작은 무슨 일을 하나도 안 하는 거야.”

키엘은 휴가를 나온 게 아니었다.

이곳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비브르 후작의 영토였다.

그는 벨라의 책에서 키엘을 가장 많이 반대했고, 마왕이라도 잡아 오라며 밀어붙였던 사람이었다.

“그러게 네가 너무 성급했어.”

벨라의 정체를 알기 전에는 키엘이 마계까지 갈 수 없었다.

그에게는 원래 있어야 했던 신성력이 없었기에.

그렇기에 그는 소설 속에서 꽤 후에 밝혀질 비브르 후작의 비리를 미리 캐내 그의 작위를 모두 내렸다.

“일단 토지 정리는 다 됐고, 그간 민원만 먼저 해결하면 될 거야.”

현재는 후작의 모든 영토가 제국 소유로 넘어왔고, 공식적으로 황실의 적자인 키엘이 관리하고 있었다.

“그건 그냥 옆에 둬.”

“지금 안 보고?”

“어제부터 종일 토지 정리했잖아. 오늘 검토한 거만마저 정리하고 벨라랑….”

“로한이 민원보고서도 모레까지 황궁으로 제출해 달래.”

키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거부터 먼저 주지 그랬어?”

이걸 핑계로 황궁의 별장에 왔으니, 키엘도 일을 미룰 수는 없었다.

쌍둥이들이 할 일은 민원을 분류별로 정리하고 요약하는 일이었다. 그 많은 서류를 전부 키엘이 다 확인할 수는 없으니.

대외적인 이유는 이런 거였고, 리네는 다른 흑심 때문에 돕고 있었다.

“저… 키엘. 혹시 마왕님이랑 친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해?”

다른 거로 말을 걸 때는 대꾸도 안 하더니, 벨라 얘기에 키엘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벨라는 너 좋아할걸?”

그것도 뜻밖의 대답으로.

키엘이 볼 때, 리네는 벨라가 예전에 특별히 아꼈던 메리와 닮은 구석이 많았었다.

일단 둘 다 여자고, 의욕이 넘치고, 눈치 빠르고.

“그럼 계약하고 싶다고 하면 받아줄까?”

엄밀히 말하면 소환에 실패했지만, 잔바르의 말에 의하면 제물의 문제라고 했었다.

‘그러니 제물만 제대로 썼으면 문제없이 소환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키엘의 생각은 달랐다. 소환까지 도와줬으니 리네의 말을 당연히 들어주겠지.

“계약은 왜? 부탁할 거 있으면 얘기해.”

“무전 마법에 대해 내가 마법 학계에 논문으로 제출하고 싶어서.”

키엘이 그 말을 듣자마자 쿨럭거리며 기침했다.

“벨라의 발명을 훔친다고?”

“훔친다니. 빌린다고 해줘.”

“……. 글쎄.”

키엘이 곰곰이 상상해봤다.

만약 그가 해달라고 한다면 흔쾌히 ‘그래, 그럼.’ 하겠지만.

생전 처음 보는 리네라면 다를 텐데.

그때 리네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마왕님이 생각보다 착한 거 같은데, 괜찮다고 하지 않을까?”

그 말에 키엘은 뒤를 돌아 리네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눈을 향했다.

벨라는 종일 정원에 누워서 하늘만 보고 있거나, 꽃만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는 벨라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잠시 감상에 젖었다.

“왜 저렇게 귀여워졌지?”

“귀엽…다고?”

리오는 키엘이 검토한 서류를 정리하다 말고 창밖을 힐끔 봤다.

“너 로잔느 같은 성격은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여기서 걔 얘기가 왜 나와?”

“걔도 좀 귀여운 편이잖아.”

“리오 프로하. 비교할 걸 비교해.”

리오가 보기엔 로잔느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특히 지금 이 순간, 벨라가 나무를 안고서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아니, 저 마왕님이 좀 엉뚱한 게 비슷한 거 같아서.”

꽤 큰 소리로 ‘나무야, 반가워’라며 혼잣말도 하는 거 같은데.

차마 약간 정신이 이상한 거 같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엉뚱하다고 표현했다.

그러자 키엘은 리오를 째려보며 한마디 던졌다.

“뭐든 벨라면 다 좋은 거야.”

“예, 전하. 제가 실언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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