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벨라트리체…. 정상적으로 생각하는 거야. 나는 인간이다, 인간. 나는 인간이다.’
벨라는 무표정으로 침대 끄트머리에 앉은 키엘에게 약을 발라주고 있었다. 속으로는 키엘에게서 흘러나오는 피 냄새를 간신히 참으면서.
간간이 키엘을 힐끔 올려다보면, 그는 열이 나는지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봐. 내가 빨리 치료 안 하면 덧난다고 그랬지?”
속상한 마음이 피의 향기보다 더 강하게 작용한다. 벨라는 키엘의 이마에 손을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진짜 지옥 같아…. 아니, 지옥이 맞긴 하지.”
하지만 키엘에게 이 순간은 천국이었다.
벨라를 보게 된다면, 보고 싶던 마음이 침착해질 줄 알았다.
오랜 시간 원하고 갈망하던 벨라의 모습은 흐려졌었고, 어쩌면 사랑한다는 마음조차 흐려지는 게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렇게 맞닥뜨리자 그는 자기의 마음을 더욱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었다.
손동작 하나, 머리카락 한 올까지 모든 것이 그를 더 큰 늪으로 빠지게 하고 있었다.
‘옆에만 있어도 좋을 거라 생각했는데….’
벨라가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 붕대를 감으려고 가까이 붙자, 그녀가 내쉬는 공기마저 쑥스러운 색을 띠는 것 같았다.
‘난 진짜 구제불능인가 봐.’
키엘은 부끄러워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 “키엘, 벗어.”
악마 같은 눈빛으로 아무 의미 없이 내뱉은 말이었을 텐데, 제국을 바치라고 하면 바칠 수 있을 정도로 고혹적이었다.
“키엘?”
갑자기 그를 부르는 벨라의 목소리에 키엘이 당황해서 대답했다.
“…네?”
“한숨 좀 자고 있어. 약초 중의 하나가 수면제로도 쓰이는 거라, 금방 졸릴 거야.”
벨라가 그의 머리카락을 예전처럼 쓰다듬어주고 뒤를 돌아서자 키엘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어디 가요?”
그것도 너무나 불안한 눈빛으로.
“쉬고 있어. 금방 올게.”
키엘이 그녀의 손목을 더욱 꽉 잡았지만 벨라는 웃으면서 그 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펼쳤다.
약초가 이렇게 금방 효과가 나타나는 건지 키엘은 점점 몸에 힘이 빠지고 눈이 감겼다.
* * *
키엘이 스르르 잠든 사이, 벨라는 별장 밖으로 나와 조금 전 키엘이 잡았던 손목을 유심히 바라봤다.
‘심장까지 가지고 갈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애초에 똑똑한 캐릭터이니 새삼 놀라지도 않았지만, 그 머리를 벨라 자신에게 쓸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먼저 돌아가라고 해도 절대 안 돌아가겠지.’
어차피 인간계로 가서 소설이 얼마나 뒤바뀌었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서약하지 않은 약속을 누가 믿을까.
키엘도 이제 그녀가 마족이라는 걸 알았으니, 아마 못 믿겠지.
벨라는 서둘러 젠킨스와의 무전을 다시 시도했다. 인간계에서 지금이 낮이든 밤이든 그건 알 바가 아니었다.
“젠킨스.”
“아가씨, 마지막 무전으로부터 지금 1시간 18분 지났습니다.”
“너 지금 나한테 욕했냐?”
“…네. 16분 지났네요.”
벨라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기가 찬다는 듯 젠킨스에게 물었다.
“젠. 너도 키엘이랑 이웨르랑 다 한통속이지?”
“아, 어디까지 아세요?”
“어디까지라니. 너희 뭐 단계별로 나 속이는 중이야?”
그러자 젠킨스가 아닌 리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마왕님! 전 대마법사가 될 예정인 리네 프로하라고 합니다!”
벨라는 갑작스레 등장한 리네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무전을 끌 뻔했다.
“음… 반가워요.”
어색한 공기가 소환진 너머서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저한테 뭐든지 물어보세요, 젠 할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졌네요!”
벨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전기를 한번 쳐다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젠킨스라면 몰라도 본 적도 없는 리네가 벨라를 속일 리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뭐, 그럼…. 키엘은 정말 내 심장이 필요 없는 거 맞아?”
“심장요?”
“마왕을 죽이러 온 거 아니야?”
“어휴, 아니에요. 어쩌다 보니 제가 마왕님을 소환하는 의뢰를 받았는데, 의뢰인이 전하와 아는 사이였던 거였죠!”
‘무슨 그딴 인연이 다 있어.’
“마왕님이랑 아는 사이라고 데리고 와야겠다 하더라고요!”
조금이나마 찝찝했던 벨라의 마음이 사라졌다.
“그래서, 소환은 언제 될 거 같아?”
어느덧 달이 저편으로 꺼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젠킨스에게 준 3일 중 하루가 지났다.
“한 일주일은 걸릴 거 같아요, 제가 얼마 전에 좀 큰 마법을 써서 아직 마력이 안 돌아오고 있어요.”
벨라는 꽤 오래전 젠킨스가 해줬던 설명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리네면 장차 대마법사가 되니까 그릇에는 문제가 없겠지.’
소환은 한마디로 그릇에서 그릇으로 물을 옮기는 것과 같았다.
작은 그릇에 많은 양의 물을 옮기면 물이 넘쳐 전부 옮길 수 없는 것처럼, 물의 양보다는 그릇의 크기가 커야 했다.
그러니 벨라가 인간계로 나갈 방법은 두 가지였다.
내보내야 하는 물의 양이 많으니 담을 수 있는 그릇이거나, 아니면 램프의 지니처럼 필요할 때만 나가야 하는 계약을 해야 했다.
여태 리네가 연구해오던 방식은 그 그릇을 크게 넓히는 마법 증폭 도구를 사용하는 일이었다.
“아가씨,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선대의 힘을 다 흡수하기 전에는 마계에서 못 나오는 거 아니에요?”
마계에서 선대 마왕의 힘을 승계받는 동안, 벨라도 마계와 마력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
이곳에 있으면 50년 정도 지나면 선대 마왕은 스스로 소멸하고 벨라가 마왕이 되겠지만, 만약 인간계로 나가게 되면 언제 마계로 돌아오게 될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혹시 승계를 다 받으시는 거면 저희가 처음부터 계산을 다시 해야 하고요…. 증폭도구도 더 갖춰야 하고….”
“처음부터 그렇게 계산했던 거 아니야?”
“봐요! 이 할아버지야! 내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죠?”
무전 너머로 리네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렸고 벨라의 심정은 더 갑갑해졌다.
‘키엘이 먼저 인간계로 넘어간다고 할까?’
우당탕탕 하고 잠시 잠잠하더니 젠킨스가 죽어가는 목소리로 벨라에게 물었다.
“그… 아니면 아가씨 힘을 좀 절감시키는 건 어떨까요?”
“미쳤니?”
무전을 끊었지만 젠킨스의 말이 계속 벨라의 뇌리에 박혔다.
‘힘을 절감시킨 다라….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긴 한데.’
이론상으로는 가능한 방법들이 여럿 있지만, 잘못하면 인간계로 가서 한동안은 마족이 아닌 인간처럼 아무런 힘을 못 쓸 수도 있었다.
최악의 상황은 고양이로 인간계에서 한동안 살아야 할 수도 있었고.
‘일단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할까.’
벨라는 날개를 펴고 마왕성의 북쪽을 바라봤다.
‘…선대 마왕의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겠네.’
* * *
달이 밝아오자 벨라는 조용히 별장의 문을 열었다. 하품을 연신 해대면서 목을 여러 번 돌렸다.
“이것도 못 할 짓이네.”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자신의 침대에서 자는 키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인간계로 먼저 가라고 하면, 안 가겠지?’
그녀는 천천히 다가가 키엘의 옆에 살짝 걸터앉아 입을 살짝 벌리고 자는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나를 죽이라고 예쁘게 키워줬더니.’
벨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네가 나를 살게 하네.’
간밤에 고생한 게 잊힐 정도로 예쁜 얼굴이었다.
‘역시 내 최애야. 이제 보니 아주 곱게 잘 자랐어.’
소설 속의 남자주인공이라 그런가. 좋은 건 다 갖다 넣은 듯한 얼굴에 벨라는 뿌듯하기까지 했다.
“으음….”
그러다 키엘이 움찔거리며 땀을 흘리자, 벨라는 천천히 키엘의 팔에 손을 올리고 들리는 심장 소리의 박자를 맞춰 톡톡 두드렸다.
‘악몽이라도 꾸나?’
어릴 때 품 안에 안고 잘 자라고 등을 토닥여주던 것처럼.
머리카락을 만져주려고 손을 뻗고 몸을 조금 더 앞으로 숙였다.
* * *
키엘은 몽롱한 가운데 잠이 들었었다.
“쉬고 있어. 금방 올게.”
벨라는 상냥하게 말하지만, 자신이 잡은 손가락을 하나씩 떼며 그를 밀어 냈다.
그가 천천히 뒤로 넘어가며, 점점 뒤돌아서 멀어지는 벨라에게 간신히 말을 걸었다.
“가지 마요….”
순간 이웨르를 통해 마계로 들어온 기억도, 벨라를 만나 꽉 안았던 기억도 점점 흐릿하고 먼 시간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황궁에서 그에게 계속 약을 먹일 때처럼.
그리고 늘 반복되던 서러운 꿈이 다시 찾아온다.
그는 홀로 창문을 열 수도 없는 탑 꼭대기에 갇혀 있었다.
- “동물왕국이라니. 그런 게 있겠습니까?”
- “순진해 빠져선. 저래서 어떻게 황태자가 되겠다는 건지.”
앞에서 그를 불신하던 이들은 뒤에서 ‘정통성’을 운운하며 그의 어머니를 모욕하고.
- “개새낀 줄 알았더니 사자 새끼일 줄이야.”
- “지금이 아니면 싹을 자르기 힘들겠죠.”
키엘이 그들에게 목줄을 채우자 앞에서 굽실거리더니 뒤에서는 암살자를 고용한다.
그리고 야밤에 찾아온 암살자의 얼굴은 어린 시절 꿨던 악몽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 “너도 나와 같구나?”
- “너도 혼자구나.”
귀신의 옆에는 어린 벨라가 서재에서 소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귀신은 깔깔 웃으며 키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 “걔는 네가 필요 없대.”
- “벨라는 떠났어.”
- “도련님! 못 본 척해주세요!”
그리고 또다시 어린 시절 갇혀 있던 곳으로 돌아가, 벨라가 손을 내밀었다.
- “갈 데 없으면, 나랑 같이 갈래?”
그 손을 잡으려고 뻗으면 부서지고, 잡으려고 달리면 점점 멀어졌다.
* * *
온몸에서 열이 나는 듯 식은땀을 흘리면서 키엘은 천천히 눈을 떴다.
‘벨라….’
꿈에서 방금 깬 키엘은 자기가 있는 곳이 마계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가 마계에 왔다는 사실조차 마치 없던 것처럼 느껴졌다. 오래전 기억처럼, 마치 꿈처럼.
“키엘, 깼어?”
메아리치던 환청은 또렷이 들렸다. 키엘은 떨리는 속눈썹 사이로 벨라를 보고 속으로 비웃었다.
‘내가 진짜 미쳤구나….’
늘 흐릿하게 봤던 벨라의 환영이 이번에는 색을 입고 성인이 되어 그의 눈앞에 있었다. 그것도 매우 아름답고 선명하게.
키엘은 벨라의 목 뒷덜미로 손을 뻗었다.
‘당신은 내 상상이잖아.’
사무치도록 외롭고 그녀가 보고 싶어서.
저 입술이 늘 그랬듯 공기처럼 부서지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천천히 그에게로 당겼다.
늘 그랬다. 키엘이 보는 벨라의 환영은 뒤를 돌아 멀어졌고, 겨우 잡아 끌어당기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키엘의 입술 위로 따뜻한 뭔가가 느껴졌다.
‘……?’
다시 키엘이 천천히 눈을 떴을 때, 벨라가 그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누르고 있었다.
“너….”
그녀는 조금 놀란 얼굴로 키엘의 입술을 찰싹, 하고 손가락으로 때렸다.
그가 늘 본 벨라의 환영은 별말이 없이 늘 미소만 짓고 있었는데.
눈앞의 벨라는 이제 키엘의 입술을 두 손가락으로 집어서 오리처럼 삐죽 만들었다.
“잠버릇이 생각보다 나쁘네.”
벨라가 잡은 입술을 흔들며 잔소리를 하자 키엘의 눈이 또렷하게 커졌다.
“너 아무한테나 그러면 안 돼.”
‘아무… 한테나…는 아닌데?’
키엘이 늘 보던 환상이라기에는 선명했고, 그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천천히 잠에서 깨며 정신이 들자 키엘은 그제야 어제 자신이 마계로 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악몽의 끝에 서면 환상은 마치 ‘네가 바라는 건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며 비웃고 있었는데.
눈앞에 그 실재가 만져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키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미안. 내가 너무 세게 잡았나?”
멋쩍은 듯 웃으면서 혀를 살짝 내밀어 무안해하는 벨라를 보며 키엘은 목이 메어왔다.
“그… 그렇게 아팠어?”
두 뺨에 손을 올려 간지럽게 닦아주는 손길도, 난처해하는 얼굴도.
다시 손으로 자신의 입술을 꼬집어보며 ‘이게 그렇게 아픈가?’하며 확인해보는 귀여운 모습도.
너무나 보고 싶었던 벨라였으니까.
지금 당장 안고 싶었다.
미치도록.
하지만 키엘이 손을 뻗기도 전에 벨라는 일어서서 기지개를 켰다.
“키엘, 결계 밖으로는 나가지 말고. 여기서 주는 거 아무것도 먹으면 안 돼. 알겠지?”
“…또 어디 가게요?”
키엘은 벨라의 옷자락을 잡았다.
“같이 가요.”
벨라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이웨르를 소환했다.
“이웨르. 접근 금지하지 말라고 했던 거 풀어줄게.”
자다가 소환되었는지 하품을 하는 이웨르의 목으로 붉은색의 띠가 둘렸다.
“하암… 갑자기요?”
그때 키엘이 옷자락을 더욱 꽉 붙잡았다.
꿈속에서는 몇 번이고 떠나도 좋았다. 하지만 마주한 지금은 어떤 일이 있어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벨라, 설마 심장 떼어낼 생각이라면….”
그의 목소리는 애절하게 떨려왔다. 어떤 심정으로 하는 말인지 모르는 벨라는 난처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 그렇게 신뢰가 없니….”
여태 함께 온 지난 세월이 섭섭하기도 해서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말에 키엘은 잡았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벨라는 백번의 말로 변명하기보다는 이웨르의 이마에 자신의 입을 맞췄다.
“나 벨라트리체는 키엘이 허락하지 않는 한 이웨르에게 내 심장을 꺼내오라고 하지 않는다.”
키엘과 서약했을 때와 다르게 작은 바람이 이웨르와 벨라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벨라는 곧바로 키엘을 바라봤다.
“봤지? 꺼내려고 부른 거 아니야. 그래도 그게 네 몸에 무리가 되면 꺼낼 거야, 알았지?”
그리고 벨라는 조심스레 키엘에게 다가가 이마에 있는 머리카락을 살며시 옆으로 넘겼다.
“마족들이 대충 살면서 약속도 안 지키고 제멋대로이긴 한데, 나는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할 거야.”
그녀의 얼굴을 그에게 가까이 가져가 입술을 짧게 그의 이마에 맞추었다.
“효능은 없겠지만, 이거로 서약했다고 치자?”
벨라는 키엘의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환하게 웃었다.
키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니, 나도 이게 마족들끼리 서약할 때 하는 거라는 건 아는데….’
조금 전까지 ‘아무에게나 그러면 안 돼’라며 속상한 말을 한 그녀는 너무 아무 거리낌 없이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건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누가 키엘에게 접근하는 거 다 막아야 해, 이웨르.”
“넹!”
이웨르는 잠이 확 깨서 얼굴을 붉히고 벨라를 야릇하게 쳐다봤다.
“짜증 나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마.”
“넹!”
* * *
벨라가 나가자 이웨르는 더 흐뭇하게 몸을 비비 꼬았다.
“도련님, 지금 무슨 생각해용?”
“아무… 생각도 안 해.”
그는 이웨르에게 붉어진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얼떨결에 계획대로 되긴 했네용.”
처음부터 그들은 벨라에게서 조금 전의 서약을 받아내는 걸 계획했었다.
인간계에 바로 가기란 힘들 테니, 그동안 벨라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꼬들겨 볼 생각이었다.
이웨르의 손이 붙으면 맛있는 걸 해줄 테니, 서약해 달라고.
그래야 인간계에 돌아가서도 함께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저택으로 돌아가 버린다고 해버리면 안 되니까.
아주 교묘하게 하나씩 미끼를 놓으려고 했는데.
운 좋게도 시작도 전에 벨라는 미끼를 놓지도 않았는데 덫으로 들어와 주었다.
“내가 말했죵? 절대 설득으로 안 될거라공.”
“…하아.”
“최고의 무기는 그 얼굴이랑 눈물이라니깡.”
키엘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게 먹혀드는 걸 눈으로 본 이상 뭐라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우리 도련님은 약속을 지키는 도련님일까?”
키엘은 그 말에 한숨부터 내쉬었다.
이웨르가 큰 공을 세운 만큼, 상을 줘야 했다.
그가 배운 대로라면 황태자인 자신에게 받을 만한 상이라면 영지나, 작위나, 금품이겠지만 마족인 이웨르가 원하는 건 따로 있었다.
상급 몽마인 이웨르가 단순히 재미만을 위해서 키엘에게 힘을 실어준 건 아니었다.
키엘이 이웨르의 이마에 손가락을 갖다 대자, 이웨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 감정 자체가 상급 몽마인 이웨르에게는 힘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웨르의 손이 점점 붙기 시작하자, 그녀는 점점 더 몸을 비비 꼬았다.
“와아. 우리 도련님 아가씨 진짜 좋아하는구낭?”
“말하지 마.”
자신의 감정을 다른 누군가가 똑같이 느낀다는 부끄러움에, 키엘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다.
“도련님, 제 친구들 소개해 줄까용? 사실 바깥에서 야영 중이었거든용.”
키엘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이웨르가 감정을 공유하면서 다시금 올라오는 뜨거운 생각을 가라앉히고 싶었다.
바깥으로 나가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돗자리를 펼치고 그 위에서 드러누워 자기들끼리 얽혀있는 몽마들이 보였다.
“자, 잠깐만! 기다려용. 아직 오지 마세용!”
아무리 몽마라도 경우가 있지! 야외에서 뭐 하는 짓거린지.
이웨르는 부리나케 그들에게 달려갔다.
키엘은 이웨르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지기랍시고 졸고 있는 푸르를 깨웠다.
“푸르, 자?”
“네… 아니요! 전 공주님이 쳐놓은 결계 깨지는지 확인 중이에요!”
“그… 그래. 피곤하면 자.”
“안 돼요, 어제 동물왕국 친구들이 도련님 얼굴 한번 볼 거라고 야영하고 그랬단 말이에요.”
“마족이라는 거지?”
“어떻게 알았어요? 그거 비밀일 텐데! 큰일 났다! 이웨르!”
푸르는 서둘러 네발로 앞으로 가더니 결계 밖에 있는 이웨르를 불렀다.
“도련님이 여기가 마계라는 걸 아나 봐!”
이웨르 앞에는 몸단장을 새로 하던 몽마들이 푸르를 보고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저 푸르랑 갔는데도 대단한 걸 얻어왔다는 거지?”
“역시 이웨르, 대단해.”
이웨르는 결계 안에서 섹시한 포즈를 취해서 자신의 입지를 한 번 더 친구들에게 보여줬다.
“저기 인간 꼬마 온다.”
“꼬마는 아닌 거 같은데?”
그때 키엘이 푸르와 함께 이웨르에게로 다가갔다. 이웨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자, 내 이야기의 남자주인공이양.”
“이웨르, 그런 수식어 붙이지 마.”
키엘이 민망한지 이웨르를 질책했다.
몽마들은 결계에 바짝 붙어서 화제의 인간 꼬마를 구경하기 바빴다.
“얼굴이 빨간 거 보니까, 벌써 했네. 난 공주님이 넘어뜨렸다, 에 투자한다.”
“난 그럼 인간이 넘어뜨렸다, 에.”
키엘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멈칫했다.
몽마들은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훑으며 제각각 키엘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잘생겼네.”
“아냐, 잘생긴 거보단 예쁘게 생겼네. 머리도 무슨 그거 같아. 뭐지? 해?”
“몸도 단단하네.”
“손가락도 가늘고 기네. 난 이게 제일 좋더라.”
키엘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몽마들을 노려봤다.
“공주님이 좋아하는 타입이 이런 타입인가?”
“흠. 인큐버스 중에 이런 애들 많지 않아?”
이웨르는 몽마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뭐래, 공주님 취향이 바로 우리 도련님이징!”
하지만 몽마들은 오히려 이웨르를 흘겨보며 자기들끼리 쑥덕였다.
“왜? 공주님 마계에 있는 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엉?”
계속 인간계에 있던 키엘과 이웨르는 서로 마주 보더니, 동시에 몽마들을 향해 의심의 눈빛을 쏘아댔다.
“아니, 뭐. 공주님이 좋아하는 인큐버스 하나가 있긴 한데. 여기랑은 너무 다른데?”
키엘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맞아. 공주님이 파비온을 얼마나 아끼는데. 매일 침실로 부르신다고.”
“정말 부러워! 나도 불러줬으면!”
몽마들이 얼굴을 붉히며 희희덕거리는 동안, 이웨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키엘도 마찬가지였다.
조금만이라도 선을 넘는 얘기를 하면 죽일 듯이 노려보던 벨라였는데.
“푸르, 진짜야? 파비온이라는 인큐버스가…. 매일… 벨라의….”
푸르는 자신 있게 가슴을 내밀며 대답했다.
“파비온이 매일 오긴 해요!”
이웨르는 절대 인정 못 할 것처럼 목에 핏대를 세우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럴 리가 없엉!”
이웨르가 씩씩거리자 몽마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핑크빛 열애가 말이 돼? 우리 아가씨가 얼마나 눈치도 없는 단세포인데! 사치스러운 거만 좋아하는뎅!”
“이… 이웨르.”
“우리 아가씨는 돈만 밝히고 먹는 거만 좋아한단 말이야!”
“하지만 우리들 사이에선 공주님 반려로 파비온이 제일 유력하다고 생각하는걸.”
흥분한 이웨르를 몽마들이 달랜다고 한 말은 더 그녀의 화를 돋웠다.
“다 거짓부렁이양!”
몽마들은 푸르를 증인석에 내세웠다.
“맞잖아, 푸르님?”
“푸르님이 매번 파비온이 갈 때마다 공주님이 신음 낸다고 했잖아요!”
다시 푸르에게로 시선이 모였다. 키엘의 눈동자가 커지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신…뭐?’
그때 눈치도 없이 푸르는 자랑처럼 으스댔다.
“맞아! 나는 그때 공주님의 신음도 듣는다? 부럽지?”
“와아. 부러워! 파비온이 공주님 취향도 잘 안다며?”
“맞아! 취향대로 잘해!”
몽마들은 황홀한 표정으로 푸르를 우러러봤지만 키엘과 이웨르만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뭐…뭘 잘해?’
“세상에… 아가씨가 도련님 순정 다 짓밟넹.”
이웨르는 한층 더 과장하면서 소리를 꽥꽥 질렀다.
“그 새끼 불러와! 얼마나 잘난 새낀지 내 눈으로 직접 보겠엉!”
“내가 불러올게!”
눈치 없는 푸르는 새 할 일이 생기자마자 신이 나게 네발로 결계 밖을 뛰어갔다.
그동안 이웨르는 충격받았을 키엘에게 위로를 건넸다.
“도… 도련님, 너무 상처받지 마용. 아마 도련님을 만났으니까 이제 아가씨의 마음이….”
애초에 벨라에게 남자의 취향이라는 게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런 게 있었다면, 인간계에서 무전을 할 때 팔불출인 푸르가 진작에 떠들고 다녔을 텐데.
키엘도 적잖이 충격이긴 했지만 이해했다.
벨라와 키엘의 관계는 헤어졌던 그 순간에 멈춰있지만.
이미 마음은 다르게 꽃을 피워냈고 키엘도 벨라도 그 시간 동안 다른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은 다르게 뛰었다.
‘그자가 벨라의 취향이라면… 보긴 봐야 하는데.’
이 생각지도 못한 변수는 가슴 한편에 구멍을 뚫으며 시린 바람을 타고 등장했지만.
그는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얘가 파비온이예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이 저 멀리서 다가오는 걸 보고 키엘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베일을 벗은 파비온의 모습은 상상했던 인큐버스의 이미지와는 너무 다른 모습에 조금 놀랐다.
‘벨라 취향이….’
키가 벨라보다 많이 작은 인큐버스였다.
거기다 살집이 꽤 있는 인큐버스.
자신의 가늘고 긴 손가락과 비교될 정도로 작고 통통한 인큐버스의 손이 눈에 띄었다.
‘괜찮아, 나도 살찌우면 돼….’
키엘은 자신의 손을 뒤로 애써 감추며 타들어 가는 속을 간신히 달랬다.
반면 이웨르는 충격에 휩싸였다.
키엘이 벨라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는 걸 눈치를 챘을 때부터, 슬며시 지나가듯 물어봤던바.
벨라의 취향은 확고했다.
잘생겨야 하고, 키가 커야 하고.
그래서 어릴 때부터 키엘보고 키 커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던 거였는데.
“왜 키가 작앙…?”
이웨르의 말에 키엘은 더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살은 찌면 되지만, 키는 못 줄이는데.’
“파비온입니다.”
파비온은 목소리조차 다른 몽마들과 다르게 예의 있어 보였다.
마치 젠킨스를 떠올리는 듯이 딱 부러진… 명문가의 능력 있는 집사 같은 분위기.
‘역시 벨라가 좋아하는 건 시종일까.’
푸르는 마치 파비온이 자기 소유라도 되는 듯 몽마들과 키엘에게 자랑했다.
“얘가 공주님이 세 번째로 아끼는 마족이에요!”
“열심히 할 뿐입니다.”
푸르를 제외한 모두가 그 말을 곡해하며 속으로 다른 생각과 상상을 이어갔다.
키엘도 그 말을 듣자마자 혼란이 속에서 요동쳤다.
‘뭘 열심히 하는 건데….’
난데없이 만난 폭풍우에 정신을 못 차리는 키엘에게 푸르가 발랄하게 물었다.
“도련님, 첫 번째로 아끼는 마족은 누구게요!”
벨라는 연애의 ‘ㅇ’자도, 사랑의 ‘ㅅ’자도 ‘음식’으로 바꿀 사람이었는데.
“물어봐 주세요!”
키엘이 푸르를 얄미운 듯이 쳐다봤다. 보나 마나 뻔한 대답일 텐데.
“…누군데.”
“저요! 부럽죠?”
“아니.”
그 말에 푸르는 세상이 망한 듯한 얼굴로 울먹거렸다.
“으아! 도련님 미워!”
키엘이야말로 푸르가 미웠다.
그때 파비온이 키엘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혹시 인간 도련님이라면 그 키엘 님이세요?”
키엘은 대답하지 않고 그를 거만하게 내려다봤다.
“네놈이 우리 도련님을 어떻게 알앙!”
“아, 공주님이 잠드시기 전에 이름을 많이 부르셔서….”
“…….”
“공주님이 항상 들고 다니시는 까만 거울…을 안고….”
키엘은 팔짱을 끼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충격이 해일처럼 밀려오고, 아직 가시지도 않는데 또 한 번의 해일이 다가왔다.
그는 허리춤에 비어있는 검집을 보고, 파비온의 목을 베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파비온은 살벌한 분위기에 말끝을 흐리다가 뒷걸음질 쳤다.
“저, 전 공주님이 가지고 오라고 하신 게 있어서… 이만….”
키엘은 파비온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이웨르, 쟤 조사 좀 해줄 수 있어?”
“당연하죵!”
* * *
전날 밤부터 벨라는 키엘이 자는 동안 마계의 끝으로 날아갔었다.
그저 어둠만이 존재하고 있는지라, 어떤 마물도 가까이 가지 않는 곳이었다.
이 마계의 끝 지점에는 여섯 개의 기둥이 각 육각형을 그리며 마계를 둘러싸고 자리하고 있었다.
마계의 모든 마력이 이 기둥에서부터 흘러나온다.
‘이걸 잠시 막으면 마력을 내보내고 인간계로 갈 수 있겠는데….’
소환은 벨라라는 그릇에 가득 찬 물을, 인간계의 리네란 그릇에 모두 옮기는 것.
벨라가 마족들을 쉽게 소환할 수 있는 건 벨라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마력보다 많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잘못하면 그릇이 깨지거나 벨라가 다칠 수도 있는 문제였기에, 인간계에서는 그토록 신중하게 준비를 해왔었다.
그릇에 물을 비우고 새로 채워지는 물을 막기만 한다면.
“기둥을 없앨 수는 없는데….”
벨라는 그렇게 기둥에 자신의 힘을 어느 정도 봉인해놓으려고 밤을 새웠다. 하지만 미미할 정도로만 힘이 담겼다.
“그럼… 역시 그 방법밖에 없나?”
벨라는 한숨을 내쉬고 허리춤에서 마계에 굴러다니던 성물 중 하나를 손에 집어 들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손이 저릿해 왔다.
신성력과 마력은 동전의 양면 같아서 동시에 있을 수 없는 힘이었다.
질서를 바탕으로 세워진 힘과 무질서 속에서 생성된 힘이 부딪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인상을 찡그린 채 마력을 내보내자 기둥에서부터 마력이 벨라에게 가까이 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성물 때문에 그 흐름이 막혀 있는 걸 확인했다.
‘역시 이건가?’
하지만 신성력이 약한지라 성물은 깨져버렸다.
그저 성물을 잡기만 해서 될 건 아니었다.
벨라는 자기의 팔을 다른 성물로 길게 찢고 빠르게 회복되는 모습을 지켜봤다.
“피 자체를 차단할 수도 있지 않았나?”
그녀의 예상대로, 성물이 깨지기 전까지 마력도 몸도 회복되질 않았다.
그렇게 다시 현재.
벨라가 이웨르에게 접근 금지 서약을 해제한 후에, 그녀는 마왕성의 한가운데로 향했다.
신성력이 깃든 물건답게 마왕성 한가운데에 널브러져 있는 검 주변으로 마족들은 가까이 가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고… 공주님. 이걸 아무도 못 대서….”
“하여튼 약해빠져서는.”
그녀는 터벅터벅 걸어가 키엘이 떨어뜨린 성검 쪽으로 살짝 숙였다.
가까이 갈수록 낯익은 신성력이 강하게 느껴졌다.
벨라가 손을 뻗어 손잡이를 잡자 강렬하게 검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뭐야.”
벨라가 알고 있는 한, 이 정도의 신성력을 지닌 물건은 인간계에 없었다.
“설마… 키엘이 소유주라 그런가?”
간혹 성물이 소유주의 정신력으로 강해진다는 설이 있었는데.
어쩌면 소설 속에서 펜던트에 깃들어졌다는 신성력도, 키엘의 정신력만큼 점점 강해진 걸 수도 있었다.
“공주님, 이거 때문에 마왕성을 못 고치고 있어요!”
벨라는 숨을 크게 내쉬고 다시 성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아.”
잡자마자 그녀는 무릎을 굽히고 주저앉았다.
손끝에서부터 신성력과 자신의 마력이 부딪히며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그 신성력을 밀어내는 데 온 마력을 다 쏟듯이.
“이거면 되긴 하겠다….”
벨라가 겨우 손을 놓자, 성검이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다시 널브러졌다.
“그나저나 키엘밖에 못 쓰겠는데?”
* * *
벨라가 다시 별장으로 돌아갔을 때는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다.
“어… 키엘, 무슨 일 있어?”
“아뇨. 일은 무슨 일은요.”
벨라는 별장 안을 둘러보다가 물었다. 푸르는 있는데, 이웨르가 없었다.
“이웨르는?”
“친구들 만나고 오겠대요.”
“아니, 너 지키라고 했더니 그런 쓸데없는 새끼들을 만나고 다녀?”
“괜찮아요. 오랜만에 보는 걸 텐데요, 뭘.”
키엘은 이웨르에게 부탁한 게 있어서 벨라를 말렸지만, 벨라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복종 서약까지 풀어주면서 지켜주라고 한 건데.
벨라가 서둘러 소환진을 펼쳐 이웨르를 불러냈다.
“이웨르!”
하지만 이웨르는….
“뭐야, 너 파비온이랑 아는 사이야?”
파비온의 목을 조르고 있는 채 벨라의 앞에 소환되었다.
이웨르는 거의 울듯이 벨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가씽!”
그러더니 이웨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벨라에게 토로했다.
“실망이예용!”
키엘은 이웨르가 혹여나 말실수라도 할까 봐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렸다.
그가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알아서 대신 화를 내주는 걸까.
“이웨르, 진정해.”
“도련님은 좀 놔봐요!”
이웨르는 자신의 팔을 잡은 키엘을 뿌리치며 두터운 파비온의 목을 다시 꽉 잡았다.
“선택하세용!”
“뭘?”
“이 파비온 새끼예요, 아니면….”
키엘의 눈동자가 커지며 그녀의 입을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나예용?”
늦었지만, 이웨르의 말은 이상했다.
‘거기서 네가 왜 나와…?‘
키엘은 이웨르가 저렇게 무너져내리듯이 우는 걸 처음 봤다.
“내 부대찌개가 제일 좋다고 했잖아용….”
이웨르가 인간계에서부터 지금까지 벨라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몽마의 피, 하나는 이웨르의 요리.
8할 정도 확신에 찬 키엘이 조심스레 뒤에 있는 푸르에게 물었다.
“푸르, 파비온이 하는 일이 뭐야?”
“식사 담당이에요!”
“혹시 벨라의 취향 얘기 하던 거… 혹시 음식 얘기였어?”
“네! 그럼 뭐겠어요?”
키엘은 이웨르가 요리만 갖다 바치면 ‘네가 최고야’ 를 연달아 말하던 벨라가 떠올랐다.
‘그럼 그렇지….’
다른 이도 아니고 푸르가 하는 말인데 그걸 곧이곧대로 믿었던 게 잘못이었다.
‘그럼 벨라의 취향은 도대체 뭐야….’
그때 그녀는 주머니에서 뭔가 주섬주섬 꺼내더니 벨라 앞으로 집어 던졌다.
“이딴 게 아가씨 취향일 리가 없잖아용!”
어디서 주워왔는지 모를 풀들이었다.
“이딴 걸 좋아할 리 없어!”
“공주님은 채식주의잡니다.”
“넌 입 닥쳐! 아가씨가 고기 좋아해서 내가 도축까지 배웠는뎅! 난 회도 뜰 줄 안다공!”
이웨르는 키엘벨라 주식이 떡락하는 줄 알았더니, 자기 주식이 곤두박질치는 걸 보고 가슴이 문드러지는 모양이었다.
그녀도 마족이었다.
집착하는 한 가지가 흔들리니까 어린아이처럼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며 파비온의 목을 다시 졸랐다.
“나예용, 이놈이예용!”
막무가내로 꽥꽥 소리를 지르는 이웨르의 목소리가 마계 전체에 메아리쳐 울리자 벨라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웨르. 너야, 너. 됐지?”
그제야 이웨르는 씩씩거리던 숨을 가지런히 정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키엘은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파비온과 벨라가 아무 관계도 아니란 것에 안도를 해야 할지.
벨라의 취향조차 모르는 이 늪에 다시 빠진 걸 절망해야 할지 몰랐다.
‘살은 쪄야 하는 거야, 말아야 하는 거야.’
한편, 부서진 마왕성의 대회의실에는 200년 만에 네 명의 대장군이 한데 모여 있었다.
사실 대회의실이 아니라 회의실이 있던 장소였다.
이미 다 박살이 나버려서 은밀하게 회의는커녕, 개미형 마족들이 왔다 갔다 열심히 일하는 중이었다.
“잔바르, 공주님이 별장으로 데리고 간 인간은 어떤 자지?”
지네형인 록산이 신발을 발에 하나씩 신으면서 물었다.
“흥. 미개한 녀석. 그러니 공주님이 널 싫어하는 거다.”
발이 많은 걸 싫어하는 벨라를 떠올리며 발이 단 하나도 없는 벨제브가 비아냥거렸다.
물론 그렇다고 벨라가 발 없는 외계인 같은 벨제브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대장군의 부대와 권력은 비슷했지만, 지금은 정말 달랐다.
벨라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잔바르가 마치 그들의 우두머리라도 되는 것 마냥 의자에 앉아있고 나머지 세명은 바닥에 앉아있었다.
굳이 벨라의 총애 순위를 고른다면 잔바르가 넘사벽이었고, 그다음이 도찐개찐이나 벨제브, 록산, 탈람 순이 되겠다.
가장 많은 부대원을 보유하고 있는 탈람은 아무리 벨라에게 잘 보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바퀴벌레라서….
“공주님이 인간계에 있을 때 연이 닿은 인간 꼬마다. 웬만하면 건들지 마.”
잔바르가 세게 경고했다.
키엘을 건드렸다가 벨라가 어떻게 할지는 안 봐도 뻔한 거지만.
사실 인정하고 있진 않지만, 잔바르도 키엘이 다치는 걸 원하지는 않았다.
“몽마들이 헛소리를 하던데, 정말 공주님이 그 인간을 반려로 두려는 건가?”
잔바르가 인상을 찡그렸다.
“공주님을 모욕하지 마라.”
“하긴… 그런 불경스러운 일이 또 일어나려고.”
불경스러운 일. 그들이 마지막으로 이 회의실에 모였던 일이었다.
존경받는 대장군이었던 루시트가 인간과 연정을 품고 낳은 아들이 마계로 들어왔던 일.
그들은 그 사건의 중심지였던 잔바르의 눈치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공주님의 반려는 우리 넷 중 하나가 될 테니까.”
“무슨 소리야. 당연히 나지.”
잔바르가 단호하게 그들의 말을 막아섰다.
대대로 마왕들은 대장군 중 하나를 반려로 삼아왔으니, 넷 중 하나라면 가장 총애를 받는 잔바르가 가장 유력했다.
200년 전 그 사건만 아니었으면.
“넌 이미 반마족과 내통한 적이 있지 않나?”
“그 불경스러운 일의 중심에 있는 네가?”
잔바르는 팔짱을 끼며 분노에 찬 눈으로 대장군들을 바라봤다. 변명할 말조차 없었다.
그때 개미형의 마족들이 지나가며 자기들끼리 하는 이야기가 대장군들의 귀로 들어왔다.
“설마 공주님이 루시트 님처럼 되는 건가?”
“아무래도 분위기가 좀 그렇지?”
“몽마들은 좋아하겠구먼.”
탈람이 눈을 반짝이고 개미족 하나의 어깨, 아니 가슴을 잡았다.
“이봐. 지금 그게 무슨 얘기야? 분위기라니?”
그들은 눈치도 보지 않고 떠벌렸다.
“공주님이 인간을 안 죽이고 하룻밤을 별장에서 보냈어요!”
잔바르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동화책 읽어준다고 가서 깜빡 잠이 들어 같이 자는 걸 한두 번 봤어야지.
“뭐, 그런 걸 가지고….”
하지만 선대 마왕부터 그런 걸 눈으로 목격조차 하지 못했던 나머지 대장군들의 반응은 달랐다.
“말도 안 돼. 인간 따위랑….”
“안 그래도 성인이 되셨으니, 차라리 이참에 반려를 정하자고 하지.”
“좋아.”
잔바르는 그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벨라는 시끄러운 이웨르를 겨우 진정시키고 말했다.
“가서 짐이나 싸. 인간계로 언제 갈지 모르니까.”
“저도 갈래요!”
옆에 있던 푸르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푸르를 안 데리고 간다고 하면, 이웨르보다 더 심하게 시끄럽고 서럽게 울 게 뻔했다.
“그래, 우리 곰아지. 짐 싸렴.”
일단 다 데리고 간다고 말하고, 푸르는 빼놓고 가든가 해야지.
‘그나저나 이웨르도 푸르랑 똑같네.’
아무리 자신이 차기 마왕이라지만, 마왕의 총애만이 생에 전부인 마족들이라니.
‘인간계로 가면 심장 돌려받고 쟤도 마계로 보내야지.’
이웨르도 두고 가고 싶었지만, 계속 키엘의 가슴에 벨라의 심장을 넣고 다닐 수도 없었고.
모두 내보내자, 겨우 별장이 조용해졌다.
“진짜 시끄러워 죽겠네.”
푸르는 유일하게 남은 곰족이었다.
200년 전 모종의 사건으로 선대 마왕이 곰족을 전부 멸족시켰고, 그 중 유일하게 남은 게 푸르였다.
“푸르가 이웨르 오랜만에 봐서 너무 신났나 봐.”
그리고 그런 푸르의 유일한 친구가 이웨르였고.
“그러고 보니 우리도 오랜만이네.”
벨라는 뒤를 돌아 키엘을 돌아봤다.
“세상에. 앉은키도 커졌어. 옛날에는 엄청 작았는데.”
그 말을 하는 벨라의 표정은, 마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내가 키가 작았으면 좋겠어요?”
그러자 벨라는 키엘의 옆에 앉아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뭐래. 우리 키엘은 키 커야지. 너무 잘 커 줘서 고마워.”
그 말을 시작으로 둘은 그간 하지 못했던 서로의 이야기를 천천히 시작했다.
“그럼 리오는 마계로 같이 안 온 거야?”
“네. 혼자 왔어요.”
“그럼 이웨르는?”
“아, 이웨르랑 같이.”
리오는 마계에서 죽는 역이었지만, 벨라는 아무렴 어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내 역은 키엘의 기반을 닦는 역이니까 난 할 일 다 한 거지, 뭐.’
벨라는 물을수록 키엘의 황궁 생활이 궁금했다. 어떻게 자신의 심장 없이도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까.
“황제는 어떤 사람이었어? 잘해줘?”
“딱히 믿을 만한 사람은 아니에요.”
“네 아버진데도 굉장히 객관적으로 말하는구나.”
“제가 자기 자식인 데도 가끔은 못 미더워하던 걸요.”
“왜?”
“글쎄요. 마력이 없어서 그런가?”
“현 황제도 마력은 쓸 수 없지 않아?”
“그게 조금 웃겨요. 자기도 못 쓰면서 내가 황족인 걸 의심하는 게.”
그녀는 키엘의 무릎 위로 머리를 뉘어 아래에서 키엘의 턱을 콕콕 찔렀다.
“너를 반대하는 사람은 많이 없어?”
“왜….”
왜 이렇게 자연스럽게 무릎 위에 눕는 건지 키엘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싫지 않아서, 키엘은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벨라의 머리카락을 한 올씩 만지며 쿵쿵대는 심장을 달랬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생각보다 황족에 대한 멸시는 없었어요. 아마 현 황제가….”
키엘은 진정이 되지 않아 괜히 시선을 돌리며 황궁 생활을 차분히 얘기해주었다.
“…그래서 저를 반대하던 사람들의 입이 다물어졌더라고요.”
“그건 다행이네. 똑똑하게 잘 컸어.”
벨라는 그의 무릎 위에서 퀭한 눈을 무겁게 감았다가 뜨며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전날 밤을 새워 힘을 봉인하고, 성검을 들면서 힘을 많이 썼는지 피곤이 밀려오는 듯했다.
“처음에는 암살이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없어요. 꽤 충성을 맹세하는 가문도 많고, 특히 공작가들이….”
키엘은 점점 혼자만 말하는 것 같아 살짝 아래를 내려다봤다. 벨라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설마, 자요?”
작게 쌕쌕거리는 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간지럽혔다.
가족처럼 생각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키엘은 얼굴에 홍조를 띠고 엄지로 자는 벨라의 입술을 스윽 하고 조심스럽게 만졌다.
‘이건… 너무 무방비하잖아요.’
부드럽고 빨간 입술.
하지만 벨라는 무방비하지 않았다.
자신을 만지는 손길에 두 눈을 갑자기 번뜩하고 뜨더니, 재빨리 일어섰다.
“아! 성검 가지러 가야 되는데!”
키엘은 재빨리 자신의 손을 등 뒤로 보냈다.
‘하… 미치겠네.’
* * *
벨라는 혹여나 멍청한 마족들이 키엘에게 덤벼들까 봐 불안해서 키엘의 손을 놓지 않고 마왕성이 부서진 곳으로 향했다.
어릴 때는 항상 키엘이 손을 올려서 잡았는데, 옆을 돌아보면 어색하게도 그를 올려다봐야 했다.
“인간계로 바로 가는 방법을 찾았어.”
“정말요?”
벨라가 아까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성검을 가리키자 키엘이 천천히 가서 성검을 주웠다.
“벨라는 이거 못 만져요?”
“응. 그 성검 상당히 좋은 검이던데? 어디서 난 거야?”
벨라는 해맑게 물어봤다.
하지만 키엘의 표정이 천천히 굳는 걸 보고 점점 얼음이 되었다.
“이거 벨라가 선물로 준 거잖아요.”
“아….”
키엘은 그 모습을 보자 짧게 ‘하’ 하고 기가 찬 숨을 내보냈다.
“설마 잊은 거예요?”
그는 서운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 아니…. 잠깐 기억이 안 난 거였어.”
“역시 잔바르 말대로 오다 주운 거였나 봐요.”
그때 이 성검을 줄 때 잔바르가 ‘오다 주운 거’ 선물로 준다며 타박하던 게 떠올랐다.
“아니야. 절대 생일선물 이거로 때운 거 아니야.”
키엘은 어이가 없어서 다가오는 벨라를 흘겨보며 뒷걸음질 쳤다.
“때운 거였네.”
“아니야!”
“그런 건 줄도 모르고 항상 들고 다녔네요.”
그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벨라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 내가 왜 그렇게 말했지? 그게 아니라….”
벨라가 키엘이 들고 있는 성검을 스스로 잡으려고 하자 키엘이 재빨리 검을 반대편으로 옮겼다.
“뭐 하게요. 그냥 벨라에게 별 의미도 없는 물건인데.”
키엘의 속으로 잔잔한 서러움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옆에만 있어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저 이성일 뿐이었다.
그놈의 전략적으로 간다는 게 뭔지. 벨라가 흥분하지 않게 잘 구슬려야 한다는 게 뭔지.
“나는….”
키엘은 말문이 점점 막혔다.
이제는 눈물조차 속으로 비수가 되어 꽂혀내렷다.
벨라는 손사래를 치며 키엘에게 가까이 와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아냐, 정말. 그때 그 검이랑 같다고 생각 못 했던 거야.”
그녀가 성검을 잡아보려고 손을 뻗지만 키엘은 요리조리 잘도 손을 바꿨다.
“내가 증명해줄게.”
“뭘 증명해요?”
“내가 그걸 만지면 알 거 아냐.”
“…….”
“전에 줬을 때와는 다르게 너무 신성력이 강해져서 몰랐어.”
그 말이 서러움의 표면을 ‘후’하고 아주 조금 불었다. 키엘은 검을 등 뒤로 보냈다.
“됐어요. 이거 벨라 약점인 거 알아요.”
그러자 이번에는 벨라가 더 가까이 그에게 다가가 그의 허리에 팔을 감싸며 등 뒤로 팔을 뻗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만지고 다가올 때마다 몇천 걸음을 물러선 본능이 불쑥, 하고 튀어나왔다.
‘이… 이렇게 갑자기 안지 마요.’
키엘이 아예 검을 높이 들어 아예 뺏지 못하게 하자, 벨라는 성검을 잡기 위해 그의 어깨를 잡고 까치발을 들었다.
“줘봐. 나 완전 억울해.”
또.
벨라의 얼굴이 가까워져 키엘을 장미처럼 붉은 눈으로 또렷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잔인할 정도로 그녀는 키엘의 모든 설움을 다 뒤로 보내버리고 그에게 한가지의 생각만을 선물했다.
이대로 얼굴을 내리고 저 입에 닿고 싶다는 생각만.
키엘이 모든 감정을 뒤로하고 딱 한 가지의 생각을 겨우 누를 때 다행히 이성이 찾아와 그의 머리를 삭혔다.
‘안 돼… 좀 더 전략적으로….’
아직 그에게는 넘어야 할 산이 산맥처럼 있었기에.
하지만 벨라는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키엘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너 지금 나보다 키 크다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황궁에 들어가고 난 이후로 악수할 때 말고는 누구도 키엘의 몸에 손을 댈 수가 없었었다.
‘제발….’
이 간지러운 손길을 그토록 그리워했지만, 막상 마주하니 키엘은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분명 마왕은 몽마랑은 다르다고 했는데.
어쩜 이리도 몽마보다 더 자신을 유혹하고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하는지.
‘안 돼. 아직은 아니야…. 정신 차려.’
거리를 유지하려는 그와는 달리, 그녀는 구구절절 변명을 해대며 키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키엘, 정말로 신성력이 강해져서 내가 몰라봤던 거라니까.”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증명하지 마요.”
벨라의 귀에는 마치 ‘믿어줄게’하며 그저 넘어가는 것처럼 들렸다.
“성물의 신성력이 점점 강해진다는 얘기는 가설인 줄 알았어.”
“그래요?”
“뭔가 강한 집념이 있으면 된다고 하긴 했는데, 사례를 본 적 없으니까.”
이건 소설 속에서도 적혀 있지 않은 설정이었다. 벨라가 마왕의 힘을 승계받으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아.”
벨라는 마치 뭔가 깨달은 듯이 손가락을 튕기며 키엘의 펜던트를 가리켰다.
‘펜던트가 성물의 역할을 할 뿐이었지, 결국 어떤 신성력이든 키엘이 키워가는 거였구나.’
지금의 키엘에겐 성검이 아마 소설 속의 펜던트와 같은 의미였을 것이다.
팬던트의 신성력이 어릴 때부터 살고자 하는 집념으로 강해진 거라면, 성검은 뭘까.
키엘은 혼자 생각하며 멈춰 있는 벨라를 보고 점점 불안해졌다.
‘또 뭘 하려고….’
그는 그녀가 제발 다가오지 않기만을 바랐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저 숨소리가 가까이 올 때마다 꾹꾹 눌러두었던 그리움이 터질 것만 같아서.
그때 벨라가 천천히 입을 뗐다.
“어쨌든 그거라면 인간계로 지금 바로 갈 수 있겠네.”
키엘은 벨라의 의식의 흐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뜬금없이 인간계 이야기는 왜 나오는 건지.
“어떻게요?”
“소환은 그릇에서 그릇으로 넘어가는 거라고 보면 되거든?”
“그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마계에서는 내가 아무리 힘을 써도 이 그릇의 마력이 빨리 채워져.”
벨라는 보이지 않는 그릇을 손바닥으로 표현하며 요리조리 손을 움직였다.
마치 어릴 적 동화를 얘기해줄 때처럼 역동적으로.
“그릇을 아무리 비워도 위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물이 콸콸 나와서 계속 그릇에 물이 차는 거랑 같은 거지.”
“…그래서요?”
벨라는 자신의 팔을 손톱으로 긋고 빠르게 회복되는 걸 키엘에게 보여주었다.
키엘이 인상을 찡그리며 그걸 보는 동안 벨라는 천천히 설명했다.
“수도꼭지의 물을 잠글 수는 없어. 이미 밤새워서 알아봤는데 불가능하더라고. 그러면 방법은 하나지.”
벨라는 천천히 성검을 잡은 키엘의 손등을 감싸며 잡았다.
키엘이 이를 꽉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벨라는 천천히 그 검의 끝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향했다.
“이걸로 찌르면….”
벨라가 자신의 손바닥을 그대로 찔러넣었다.
조금 전 상처를 냈던 팔과는 다르게 손바닥의 상처는 아물기는커녕 벨라의 힘을 완벽히 막고 있었다.
“뭐 하는 거예요?”
키엘이 다급하게 벨라에게서 성검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벨라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소를 보이면서 엄지를 척, 하고 올렸다.
“성검이 마력을 채우는 걸 늦춰줄 거야.”
키엘은 성검을 재빨리 검집에 넣고 벨라를 흘겨봤다.
“인간계로 가기 전에 네가 날 성검으로 찌르면 돼.”
어느 마왕이 자기 약점까지 얘기하며 찔러 달라고 하는지.
그것도 저렇게 해맑게 웃으면서.
“참 쉽죠?”
키엘도 벨라의 미소에 웃음으로 답했다.
“응. 잔인해. 안 할 거야.”
이 성검이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데.
동물왕국에 대해 샅샅이 뒤져도 나오지 않을 때마다, 그는 어쩌면 그때 모든 일이 꿈은 아니었을까 생각할 때도 있었다.
너무 힘든 시절을 보내서 지어낸 망상은 아니었을까 하고.
툭하면 그녀의 환영이 그의 앞에서 춤을 추기도 하고 미소를 짓는 통에.
하지만 그때마다 이 성검의 존재가 그 시절은 허구가 아니었다고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그 집착이 키운 신성력으로, 상처를 내라니.
그게 저렇게 웃으면서 할 수 있는 가볍고 쉬운 부탁이었나.
“키엘, 어디가?”
키엘은 이미 뒤를 돌아서서 그 별장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화났어?”
키엘은 대꾸하다가 크게 화를 낼 것만 같아서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벨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갸우뚱이며 생각했다.
‘그렇게 잔인한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여태껏 지내오면서 키엘이 화를 낸 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귀엽다’고 했다가 완전히 삐친 적은 있지만.
어릴 때는 벨라의 말을 잘 따라와 줬고 고분고분한 편이라 이런 상황이 난감하기만 했다.
“이거 봐. 신성력 때문에 더디긴 해도 금방 회복돼.”
키엘은 퉁명스럽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아프게 하기 싫어요.”
“내가 잔바르를 자를 때마다 걔가 아프다고 한 적 없잖아? 나도 하나도 안 아파.”
물론 통증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감내할 수 있는 고통.
마치 모기에 물린 곳을 손톱으로 십자 모양을 낼 때 같은 따끔함처럼, 회복이 빠르므로 견딜 수 있는 고통이었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
벨라는 키엘을 앞서 걸어가며 그를 설득했다.
“잘 생각해봐.”
그러자 키엘은 손가락 다섯 개를 하나씩 꼽으며 5초를 세고 말했다.
“그래도 싫어.”
벨라는 그의 행동이 너무 예상 밖이라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얼음이 되었다.
별장에 도착하자 푸르가 그들을 반겼다.
“도련님! 공주님! 우리 언제 가요?”
두 팔과 다리를 벌리고 등에는 짐을 한가득 메고 있었다.
“푸르… 비켜.”
하지만 푸르는 덩치가 커서, 문을 전부 막은 채로 신이 났는지 춤을 췄다.
“도련님은 눈썰매 탄 적 없죠! 아가씨, 우리 이번에도 눈썰매 타러 가요!”
키엘이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에 서서 화를 참고 있는 동안, 벨라는 팔짱을 끼고 비아냥거리며 그를 도발했다.
“키엘이 겁쟁이라서 못 가. 푸르, 짐 다시 내려놔.”
그 말에 키엘은 뒤를 돌아 벨라를 향해 쏘아붙였다.
“겁쟁이라니? 내가 어떻게 벨라를 찔러요?”
“안 죽는다니까. 고양이 목숨 아홉 개라고 했잖아.”
“고양이 아닌 거 알거든요.”
“안 통하네….”
벨라가 살짝 흘겨보자, 키엘도 똑같이 그녀를 째려봤다.
그녀는 자신의 등을 보이며 다시금 설명했다.
“깊게 안 찔러도 돼. 날개 사이가 마력이 드나드는 입구니까 살짝만 찔러도….”
그때 입구에 있던 푸르가 벨라의 등을 보자마자 달려들었다.
“제가 할까요! 도련님이 하기 싫으면!”
푸르의 발바닥이 벨라의 등에 툭 하고 닿고, 잠시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벨라는 푸르의 팔을 잡고 키엘에게 들이 내밀었다.
“그래, 그러자. 푸르가 성검 집다가 소멸될 거 같긴 한데, 우리 푸르라면 날 위해 그렇게 하겠지.”
“지금 푸르 가지고 협박하는 거예요?”
“너도 내 심장 가지고 협박했으면서?”
“그거랑 어떻게 같아요, 소환은 리네가 준비하는 거 기다리면 되는데.”
키엘은 허리춤에 넣은 성검을 만지작거리며 벨라를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그리고 이게 그렇게 위험한 거였어요? 잡으면 소멸된다고?”
그리고 2년간 그놈의 성물을 모았던 게 떠오르자 소름이 돋았다.
‘그럼 그간 모았던 게 전부 벨라의 약점이란 거야?‘
“아니야. 푸르는 최하급이라 그런거고. 상급 마족부터는 급소에 찔리면 힘만 차단할 거야.”
그러면서 벨라는 자신의 등을 다시 가리켰다.
“여기가 내 급소이고!”
“그렇게 당당하게 약점 얘기하지 말죠?”
푸르는 두 사람의 화가 점점 고조되는 모습을 보더니 눈치도 없이 손을 흔들었다.
“공주님이랑 도련님이랑 싸우는 거예요?”
“…….”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조금 있으면 이웨르 올 건데 그때 내기할래요!”
“야!”
“푸르.”
키엘과 벨라가 동시에 그녀를 부르자, 푸르는 그대로 얼음이 되어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키엘은 천천히 화를 내지만, 속상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려는 게 더 화가 나. 아무리 마족이라 그래도.”
벨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제는 죽여 달라 그러고, 오늘은 찔러 달라 그래요?”
“…….”
“내일은 찢어 달라고 하고, 모레는 베어 달라고 하겠네.”
어느새 푸르는 그들 옆에 다가와서 구경하고 있었다.
“공주님이 푸르는 베어(Bear)랬는데!”
시답잖은 농담이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해맑은 푸르를 보자 둘 다 고개를 저었다.
‘얘는 왜 자꾸 눈치도 없이….’
그때 또 한 번 문이 활짝 열리며 이번에는 이웨르가 화려하게 등장했다.
“짠! 이웨르 등장!”
“이웨르! 공주님이랑 도련님 싸워! 나랑 내기하자!”
이웨르는 몇 초만 있어도 느껴지는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웃으면서 뒷걸음질 쳤다.
“호홍… 이웨르 퇴장!”
“난 공주님한테 내기 걸래! 이웨르는?”
“푸르. 너 진짜 한마디만 더 하면 혀를 다섯 조각으로 내버릴 거야.”
“힝….”
푸르가 울먹거리자 이웨르가 푸르를 힘겹게 껴안으며 문을 열었다.
“두 분 편하게 말씀하세용, 푸르는 제가 데리고 나갈게용.”
쾅 하는 소리가 들리자 벨라는 키엘의 양손을 잡고 차분히 설명했다.
“빨리 가야 하는 이유가 있어.”
벨라는 자신만만하게 턱으로 키엘의 가슴을 살짝 가리켰다.
“네 상처 치료해야 하는데, 이 약초가 기억을 계속 희미하게 하고 졸리게 할 거야.”
“괜찮아요. 애초에 응급처치할 것도 들고 왔어요.”
굳이 벨라가 해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어서 안 한 것뿐.
벨라의 눈이 커졌다. 생각지도 못한 사실이었다.
‘하긴…. 차후 황제가 될 사람이 이런 상황 하나 준비 안 하고 오진 않았겠지.’
벨라는 잠시 말문이 막혔고, 키엘은 자신 있게 입꼬리를 올리며 되물었다.
“빨리 돌아갈 필요 없죠?”
키엘은 인간계로 가게 되면 바쁠 텐데 적어도 마계에서만큼은 여유 있게 도란도란 이야기도 하고 싶었다.
벨라는 눈을 굴러가며 다음 이유를 얘기했다.
“두 번째는 네가 황태자니까 빨리 가야 하는 거고.”
키엘은 웃으면서 속삭였다.
“미리 할 일 다 처리하고 왔어요.”
그가 없는 동안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대신 일을 맡기고 인수인계까지 끝냈다. 후에 올 후폭풍까지 계산해서.
“걱정 안 해도 돼요. 이제 없죠?”
벨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게 아닌데….’
“세 번째가….”
그때 벨라의 배에서 ‘꼬르륵’소리가 울렸다.
“세 번째가 여긴 네가 먹을 게 없어.”
키엘은 웃으면서 벨라의 양손을 잡은 채로 살짝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 이유는 지금 생각한 거 같은데?”
벨라는 한마디도 지지 않고 토를 다는 키엘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못 본 사이 말빨만 늘어가지곤.
“진…짜야. 여기 음식이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게 없어.”
벨라는 가까이 오는 키엘의 얼굴을 시선을 돌리며 외면하면서 모깃소리처럼 말했다.
“이웨르가 인간계에서 요리할 만한 것들을 챙겨왔어요.”
이웨르의 요리라는 말에 벨라의 배에서 한 번 더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배고파요?”
“밥 얘기 하지 마. 집중 흐트러지니까.”
벨라는 차분하게 숨을 내쉬었다.
“네 번째 이유는….”
하지만 한번 공복을 느끼자 이미 벨라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다시 배에서 요동을 치자 그녀는 떨떠름하게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다.
“네 번째 이유는 밥 먹고 얘기할게.”
“이유 더 없죠?”
“…….”
“없네.”
벨라는 숨을 짧게 내쉬고 대답했다.
“알겠어. 리네가 준비될 때 가면 되잖아.”
인간계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급해진 건 사실이었다.
키엘을 위해서 빨리 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벨라도 제일 원한 거였으니까.
그럼에도 만족하지 않은지 키엘의 얼굴은 멀어질 줄을 몰랐다.
그녀는 잡았던 손을 놓고 그의 얼굴을 슬며시 밀어냈다.
‘잘생겼으니까 봐준다.’
못생겼으면 가까이 오기도 전에 혀부터 잘랐을 텐데.
“그래도 만에 하나 리네의 소환진으로도 내가 못 넘어가면, 그때는 내가 말한 대로 하는 거야.”
“리네는 잘할 거예요.”
“그러니까 만약에.”
벨라는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고 키엘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진짜 별로 안 아픈데.”
키엘은 살짝 눈을 내려 벨라를 마주한 채 그녀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조금만 소중하게 생각하면 안 돼요?”
“응?”
“벨라가 조금만 더 자기를 아꼈으면 좋겠어요.”
“…….”
“공주님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야 하니까.”
얼마 만에 들어보는 따뜻한 말인지.
벨라는 키엘을 올려다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사 같은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무슨 말을 그렇게 예쁘게 해.”
어린 시절 자주 안아줬던 키엘과는 확연하게 다른 느낌.
어느새 남자가 된 그의 심장 소리가 벨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녀의 등을 쓰다듬는 간지러운 손길이 벨라의 가슴까지 닿고 있었다.
“우리 키엘 너무 예쁘게 잘 큰 거 아냐?”
“…예… 뭐요?”
“네가 사랑할 사람은 진짜 복 받았네.”
얼마 만의 따뜻한 말인지, 편안함인지.
벨라는 구름 위에 누운 것처럼 모든 순간이 천국처럼 느껴졌었다.
하지만 나른한 그 분위기를 깬 건 벨라의 배였다.
또 꼬르륵 소리가 들리자 벨라는 민망하게 그의 품에서 떨어졌다.
“배고파요?”
“나 인간계 가기 전까지 밥 안 먹는다고 하면 지금 인간계 갈래?”
“…안 통해요.”
* * *
파비온은 한 손에 쟁반을 든 채 소환되었다.
“이쯤 되면 부르실 줄 알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벨라가 천천히 그 쟁반의 뚜껑을 열 때, 키엘은 긴장한 채로 그 안을 봤다.
‘분명 마족들이 먹는 게….’
마족들이 어떤 식사를 하는지는 젠킨스에게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대체로 익히지 않은 동족의 살점이나 내장을 먹는다고.
‘벨라는 마계의 공주니까, 당연한 거야.’
그는 여러 번 상상했던 가장 끔찍한 모습을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인간 도련님이랑 같이 드실 거 같아서 특별히 독성이 없는 거로만 골랐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똑똑하니까 내가 좋아하는 거야.”
쟁반 안에는 이웨르가 집어던졌던 잡초 같은 것들만 예쁘게 정렬되어 있었다.
키엘은 조금 놀란 눈으로 벨라의 뒤에 가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 신경 안 쓰고 먹고 싶은 거 먹어도 돼요.”
“그것도 생각하고 공주님이 평소에 드시는 것도 여기 따로 챙겨왔습니다.”
다시 키엘이 긴장했다.
- “저도 처음에 갔을 때 마족들이 먹는 거 보고 조금 놀랐습니다. 무슨 형벌을 받는 건 줄 알았다니까요.”
분명 젠킨스가 잔뜩 겁을 줬었는데.
“이게… 평소에 벨라가 먹는 거예요?”
키엘은 벨라의 어깨를 조금 더 세게 잡았다.
오랜만에 만났을 때부터 신경이 쓰였었다. 왜 이렇게 말랐는지.
파비온이 위에 있던 접시를 치우자 아래에는 화려하고 예쁜 색감의 채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걱정 안 해도 돼. 이게 같이 먹으면 괜찮아.”
벨라는 키엘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웨르의 말대로, 벨라는 고기라면 사족을 못 썼는데.
“이제 웬만한 풀들은 성분을 알아서 괜찮아. 파비온이랑 나랑 한 1년 고생했지?”
키엘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영양가라곤 하나도 없어 보이는 예쁜 샐러드만 먹고 사는 줄 알고 걱정했는데, 웬 동문서답을 하는 건지.
파비온은 키엘이 영문을 모른 채 대화를 듣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설명을 덧붙였다.
“대부분 마계의 풀들은 독성이나 효능이 강한 편입니다. 공주님이 제일 많이 드시는 걸로 예를 들면, 마계의 유일한 강황작물은 내장을 녹이거든요.”
“뭘 녹여요?”
키엘은 미소를 더 유지할 수가 없었다. 벨라가 손사래를 치며 놀랐을 그를 달래려고 했지만.
“어휴, 파비온. 그렇게 말하면 우리 애기 놀라겠다. 괜찮아, 같이 먹으면 완화돼서….”
그는 뒤에서 한 손으로는 벨라의 어깨를,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잡고 안았다.
“…이거도 먹으면 아파요?”
키엘은 푸르가 말한 신음이 뭔지 예상할 수 있었다.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한숨을 작게 내쉬자, 벨라는 한 손을 들어 뒤에서 끌어안은 그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봐. 우리 키엘 놀랐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 몸을 소중히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이런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충격일까.
물론 처음에 약초의 성분을 모를 때는 아무거나 먹어가며 탈이 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웬만한 약초에 대해 잘 알게 된 지금은 적당한 양을 알 수 있기에 괜찮았다.
“괜찮아. 완화하는 거랑 같이 먹으면 약간의 부작용만 있고….”
키엘은 벨라를 더 세게 안았다.
“무슨 부작용요.”
벨라는 가까이에서 키엘의 향기를 맡으며 차분히 미소 지었다.
“그냥 매운 거 먹고 속 쓰린 정도야.”
“정말이에요?”
“응. 이렇게 걱정해주는 게 너무 민망할 정돈데?”
“…그래요.”
키엘은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벨라는 그의 안도하는 숨소리를 들으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동물왕국의 공주님은 그렇게 약하지 않다고.”
따뜻한 말과 손길이, 부드러운 그 마음이 벨라의 온몸을 간지럽게 덮었다.
“난 정말 괜찮아.”
마계에서 마력의 변화가 크게 일어날 때마다, 마계가 곧 마왕이었기에 벨라는 그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녀의 귀에는 개미형 마족들이 마왕성을 수리하다가 서로 죽이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특히 허기가 질 때는 더욱 생생하게.
그렇게 한시도 쉬지 않고 그녀의 신경을 거스르는 일이 가득한 마계인데도.
“네가 있어서 더 괜찮아.”
소설에 빙의 된 후로 행복하다고 생각해본 건 전부 이 착하고 예쁜 남자주인공 옆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로잔느가 정말로 부러웠다.
이토록 착하게 성장한 남자주인공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다는 게.
그녀는 손끝으로 키엘의 부드러운 볼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파비온이 들고 있는 접시를 응시했다.
“그게 인간계 가기 전에 마지막 먹이가 되겠네.”
그때 키엘은 악마보다 더 달콤한 말로 벨라를 유혹했다.
“벨라, 이웨르가 부대찌개 할 재료 들고 왔는데…. 먹을래요?”
이웨르의 요리는 애초에 벨라의 심장을 키엘의 허락 없이 꺼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으려고 준비한 것이었다.
운이 좋게 벨라의 서약을 받았기에, 따로 협상카드로 숨겨두었었지만.
키엘은 모든 카드를 다 내려놓고 벨라에게 조건 없이 주고 싶었다.
그리고 ‘부대찌개’의 등장에 벨라의 눈이 반짝이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세상에….”
이게 무슨 지나가다 주운 복권이 당첨되는 소리인지.
“키엘, 완전 사랑해.”
벨라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키엘의 눈꺼풀에 입술을 맞췄다.
별장 안으로 ‘쪽’소리만 울리고, 키엘은 얼음이 된 채로 딱딱하게 굳어 눈만 깜빡였다.
그건 맞은 편에 있던 파비온도 마찬가지였다.
“……?”
벨라는 흥분한 채로 그의 품에서 재빨리 떨어져 이웨르를 큰소리로 불렀다.
“이웨르! 부대찌개!”
* * *
인간계에서 올 때부터 준비했던 거라 그런지 이웨르는 부대찌개를 뚝딱 만들어서 벨라에게 바쳤다.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나자, 파비온이 제일 신기하게 요리를 보며 극찬했다.
“이게 공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던 거군요.”
“맞아. 네놈이 얼마나 식사를 잘 준비하든 이웨르표 부대찌개에 비할 건 없징!”
“와! 진짜 오랜만이야!”
벨라는 기도하듯이 두 손을 모으더니 뚜껑이 열리자 흥분한 가슴을 천천히 달랬다.
4년 만에 식사다운 식사였다.
한 숟갈 뜨자마자 벨라는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듯이 이웨르에게 기대었다.
“…아가씨?”
“못 먹고 죽는 줄 알았는데….”
그게 그리 감격이었는지, 벨라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렇게 마계의 두 번째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다들 오랜만에 먹는 이웨르의 요리를 즐기고, 이야기를 나누다 지쳐 잠들었다.
키엘만이 깨어 온기로 남아 있는 뜻밖의 보상을 어루만졌다.
그는 자신의 몸속에 있는 벨라의 심장이 뛰는 소리에 차분히 귀를 기울였다.
젠킨스가 키엘에게만 알려준 이야기.
타인의 심장을 가지고 있을 때, 타인의 감정이 짙어지면 느낄 수 있었다고 했었다.
- “키엘, 완전 사랑해.”
그 작은 행동 하나에도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지만.
두근거림은 한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은 키엘의 심장뿐이었으니까.
키엘은 벨라의 자는 얼굴을 꿀 떨어질 듯 쳐다봤다.
물론 선을 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긴 했지만, 괜스레 욕심을 냈다가 도망가버리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예뻐요.”
흐트러진 검은 머리도, 햇빛을 많이 못 봐서 그런지 창백한 얼굴도, 붉은 입술도.
조금 말랐고, 눈 밑은 피곤한지 퀭해 보였지만 그래도 예뻤다.
벨라의 취향이 키엘이 아니면 어떤가.
키엘은 웃으며 벨라의 입술을 만지던 엄지손가락을 자신의 입술에 갖다 댔다.
‘지금은 이걸로 만족할게요.’
8년의 긴 시간을 기다렸는데, 얼마든지 더 기다릴 수 있으니까.
‘괜찮아. 천천히… 도망가지 못하게.’
수많은 계획과 미래가 눈앞에서 생겨났다가 사라져가고. 그의 눈은 절대 도망칠 수 없는 촘촘한 덫을 찾아 헤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