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키엘이 마지막 성물을 모았던 밤.
황태자가 되는 길에 한 발자국 가까이 간 키엘은 오랜만에 벨라의 꿈을 꾸었다.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벨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재에 앉아 있다가 키엘을 발견하고 웃는다.
“벨라.”
향기는 추억을 담는지, 키엘은 익숙한 향기에 눈을 살며시 떴다. 그의 앞에는 로잔느가 그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이 냄새.’
키엘은 천천히 로잔느의 뒤통수를 잡고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너. 이거 어디서 났어.”
로잔느는 잠깐이나마 여려 보였던 키엘의 눈동자가 무섭게 변하는 걸 보고 지레 겁을 먹었다.
“마이유가 향수라고….”
키엘은 앞에 있던 로잔느의 얼굴을 옆으로 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까이에서 맡으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분명히 여러 번 맡았던 이웨르의 피 냄새였다.
“마이유!”
키엘이 텐트의 문을 열자, 떡하니 대기하고 있던 마이유가 깜짝 놀라 키엘을 올려봤다.
“어… 어?”
“너 저 향수인가 뭔가, 어디서 났어?”
키엘의 뒤로 얼굴이 빨개진 로잔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로잔느가 마이유 옆에 바짝 붙자, 마이유는 이 묘약이 잘못된 건 아니라는 건 알았다.
기분이 몽롱해지고, 로잔느가 더 아름답게 보였으니까. 한 번도 품어본 적 없는 감정이지만 그 감정이 솟아나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째서 키엘은 멀쩡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야, 넌 좀 씻어야겠다.”
“응? 응….”
민망해진 로잔느는 걸음을 빨리 재촉하며 그들을 떠났다.
“저거 어디서 샀냐고.”
“아까 우리가 갔던 마을에서….”
“그 마을 어디. 누가 팔았어?”
키엘은 마이유의 대답을 듣자마자 눈을 내리깔며 비웃듯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희망은 늘 조각조각 부서졌지만, 그만큼 여러 조각에서 다시금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 * *
조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벨라가 성인이 되어 마계로 돌아간 날.
젠킨스는 사색이 된 채 벨라가 사라진 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머, 잔바르 님도 갔는데. 젠도 그냥 가징?”
이웨르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승자의 미소를 숨겼다.
“어차피 도련님께 접근 못 하는 건, 이웨르씨나 저나 똑같은데. 같이 돌아가시죠.”
“전 아가씨께 부탁받은 게 있어서 안되겠네용.”
“아가씨가 부탁한 거도 아니잖아요!”
이웨르는 눈을 굴리며 이 내기에서 이길 방법을 생각했다.
먼저는 눈앞의 젠킨스부터 치워야 한다.
“젠이 공주님을 소환할 수 있을 만한 마법사 찾아보는 거 어땡?”
“…….”
“젠 말대로 인간계를 침략하려면 소환할 수도 있어야잖아? 이참에 미리 준비해서 공주님께 사랑받는 젠이 되세용.”
하지만 젠킨스는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응?”
“이미 200년 동안 잔바르 님을 소환할 수 있는 마법사를 찾아다녔어요.”
이웨르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라는 척했다. 마치 모르는 척.
“200년?”
“…….”
“몰랐는데 젠… 잔바르 님을 진짜 사랑했구낭?”
200년 내에 태어난 마족이라면 몰라, 그전에 태어난 마족은 한 살짜리도 다 아는 이야기였다.
“젠. 근데 공주님이 소환되면 당연히 잔바르 님은 또 따라오지 않을깡?”
“이제 성인이시니 다른 소환진도 써야 하고, 그보다 훨씬 더 큰 마력이 필요해요. 애초에 소환진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 겁니다.”
“흐음.”
“그러니 마법사를 찾는 건, 아무 소용 없어요.”
이웨르는 천천히 고민했다.
‘역시 우리 도련님이 마계에서 살기는 힘들겠지.’
반마족인 젠킨스마저 오래 살기 힘든 곳이었다.
일단 음식문화가 다르니, 당연한 거지만.
‘도련님이라면 마계에서 살자고 해도 살지 않을까?’
이웨르가 지켜본 키엘이라면 그러고도 충분히 남을 것 같았다.
몽마의 감은 틀리지 않았다. 적어도 마계를 휩쓰는 젠잔스캔들보다는 더한 이야깃거리가 나올 거라는 게 뻔했다.
사랑이야기.
몽마들이 환장하는 건 바로 이 감정 그 자체였다.
하급 몽마면 육체적인 사랑에 더 중점을 두지만.
이웨르 같은 상급일수록 좀 더 격정적이고 치명적인 감정을 느낄 때마다 격렬하고 짜릿한 힘을 얻곤 했었다.
마계에선 별로 일어날 일이 없는 감정이기에 더욱 희귀했고. 그래서 많은 몽마들이 인간의 꿈속에 침투해 염탐하곤 했었다.
‘두 사람을 만나게 하긴 해야는데….’
문제는 키엘과 만나는 방법이었다.
꿈을 통해 들어가려면, 키엘이 직접 눈앞에 있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꿈속은 아무나 걸려드는 낚시와도 같았으니.
‘우리 도련님 같은 정도면, 아무리 마왕님이라도 살살 녹일 수 있을 거 같은데.’
어차피 이웨르의 피가 대장군인 잔바르에게 얼마만큼 통하는지도 봤으니, 키엘의 진심 말고는 딱히 통할 게 없어 보였다.
젠킨스는 고삐 풀린 망나니처럼 히죽히죽 웃는 이웨르가 불안했다.
“그러니 돌아가시죠, 괜히 허튼짓하지 말고.”
“돌아갈 거면 젠이나 돌아가용. 나는 내기에 이길 테니깡.”
젠킨스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홧김에 한 내기에 이렇게 목숨을 걸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도대체 무슨 소원을 빌려고 그렇게 내기에 목숨을 겁니까?”
“목숨 안 걸었어용.”
“하… 진짜, 마족들이란.”
이웨르가 입꼬리를 올리며 젠킨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냥… 몽마라면 환장하는 소원?”
젠킨스는 점점 다가오는 이웨르를 몸을 젖혀 피하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뭐… 설마 제 몸이라도 탐하시는 거예요?”
“풉. 그게 아니라.”
이웨르는 젠킨스의 귀에 바람을 넣고 속삭였다. 젠킨스의 얼굴이 점점 파래지며 이웨르를 밀쳐냈다.
“미친… 진짜 미쳤어요?”
“뭐, 미쳐야 할 수 있겠죵? 마계 최고의 젠잔스캔들을 구경하려면.”
젠킨스는 빨개진 양 볼을 두 손으로 삭히며 화를 냈다.
“어차피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없잖아요!”
이웨르는 같잖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그러니까 아직도 이 모양 이 꼴인 거야.”
* * *
“리오, 리네. 조사할 게 있어.”
키엘은 황궁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이 일의 적임자로 쌍둥이를 불러세웠다.
벨라의 책으로 보면, 마계에서 마왕의 심장까지 가지고 와야 할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더욱 황궁에서 자신의 입지를 세워야 했다.
‘신성력도 없는데….’
정말 마계까지 갔다가는 죽을 수도 있을 테니까.
“마이유가 샀다던 묘약을 역추적해줘. 비슷한 묘약도 전부다.”
역으로 쫓아가다 보면 분명 이웨르가 나올 테지.
그녀는 유일하게 키엘의 마음을 알아채 준 사람이었다.
젠킨스나 잔바르는 둘 사이도 200년간 화해를 안 했다는데,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믿었던 푸르는 2년 전 도망쳤고.
‘이웨르라면 도와줄 거야.’
그때 마이유가 쭈뼛거리더니 손을 들었다.
“저, 나도 도울게.”
“왜?”
“우리는 그게 묘약인지 몰랐었어. 그냥 향수인 줄 알았어….”
로잔느의 얼굴이 붉어졌고 마이유는 난감하게 변명을 했다. 키엘은 인상을 찡그렸지만,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그럼 부탁할게.”
로잔느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건 싫었기에 전부 까맣게 지워버렸지만, 다행히 로잔느는 키엘이 생각하는 그 선을 넘지 않았다.
그녀는 평민인 척하고 다니지만 프실리아 백작가의 영애이니, 굳이 척으로 둘 필요는 없었다.
마이유는 서로 모르는 척하고 있지만, 꽤 오래전 일리노에서 빵을 건네며 인사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 “키엘, 인생에서 친구란 정말 소중한 사람들이야. 저 친구가 나중에 키엘이 살아갈 때 큰 도움을 줄 거야.”
묘약에 대해 단서를 준 것도 도움이지만, 벨라가 말하는 도움이 어떤 건지 확실히 알지 못했기에.
그게 단순히 로잔느와 사랑을 이어주는 데에 대한 도움일 거라고는 가히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그들의 도움을 받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제국은 꽤 넓었기에 오랜 시간이 걸리니까.
* * *
“또 오세용!”
젠킨스는 해맑게 웃으며 나가는 손님에게 손을 흔드는 이웨르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그냥 마계로 돌아가죠? 아가씨한테 보낼 것도 딱히 없잖아요.”
벨라가 성인이 되어 돌아간 후, 둘은 몇 년째 이곳저곳 옮겨 다니다 작년부터 제국의 수도 인근에서 천막 하나만 치고 마법 용품을 팔고 있었다.
“젠이나 돌아가라니깡? 마계로 가는 입구 만들어줄겡.”
젠킨스는 자신이 가고 나면 이웨르가 바로 키엘을 찾아갈 거로 생각했다.
“어차피 이 내기는 도련님이랑 관계없이 아가씨에게 달린 거잖아요.”
“누가 뭐래? 나는 아가씨한테 보내줄 옷 때문에 있는 거라니깡?”
너무 눈에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몇 달 전쯤 대량으로 보내고 벨라가 ‘입을 일도 없는데 그만 보내’라고 한 이후로 보낸 적도 없으면서.
그는 키엘이 황태자라는 걸 이웨르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서로가 패를 하나씩 들고 있으면서 절대 놓지 않고 있었다.
“그냥 젠만 돌아강. 잔바르 님 보고 싶지 않앙?”
저 입을 다물게 하려고 한 내기였는데, 젠킨스는 얼굴이 달아오른 채 입술만 깨물었다.
“도대체 그 소문은 어디까지 난 겁니까?”
“글쎄. 200년 전 마족들이라면 다 알겠죵?”
“…….”
“내가 제일 아쉬운 게 그거라니까. 둘이 열렬하게 사랑을 나누는 걸 그때 봤어야 했는뎅!”
“그만 하세요.”
“그래도 괜찮아, 젠이 루시트님의 아들이란 걸 알았을 때의 잔바르 님의 격정의 감정은 나만 봤으니깡.”
젠킨스가 이웨르의 앞에 놓여있는 마법 용품들을 전부 바닥으로 쓸어버리며 화냈다.
“그만 하세요!”
그때 누군가 천막 안으로 들어오며 둘의 대화는 멈췄다.
“어서 오세용!”
보통 이웨르는 손님이 오면 달려 나가 비비적거려 쓸데없는 마법 약도 사게 했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젠킨스는 이 자리를 피하고 싶어 뒤를 돌아섰다가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었다.
“이웨르. 젠까지 있었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백금발에 태양 같은 호박색의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청년이 누구인지.
천막 안으로 들어온 키엘은 어린 시절의 앳된 얼굴이 조금 남아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분위기가 매우 달랐다.
“…이웨르 씨. 우리 접근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젠킨스의 말에 키엘은 오래전에 푸르가 도망쳤던 걸 떠올렸다.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피하는 거야.’
키엘은 딱딱한 젠킨스 말고, 말랑말랑한 이웨르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녀는 목을 가다듬고 떨어진 약병을 주우며 말했다.
“이웨르 씨?”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뎅!”
벨라가 그토록 싫어하던 마족들의 말장난 같은 변명이 통하는 때였다.
“접근하지 말랬지, 접근하는 걸 막으라는 소린 안 했다고용!”
“수도에서 어떤 파란 머리의 여자가 만든다는 소리를 들었어.”
키엘은 황궁에서 쌍둥이들의 소식을 듣자마자 이웨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1166년 여름. 소설의 원작에서는 로잔느와 키엘이 서로 그리워하는 때였지만, 키엘은 7년 만에 그리움을 끝낼 희망의 씨앗을 발견했다.
한달음에 말을 타고 달려가자 일 여 년만에 보는 쌍둥이와 로잔느가 있었다.
“키엘, 오랜만이야.”
로잔느는 얼굴을 붉히며 키엘에게 인사했고 리오가 덧붙여 로잔느의 공을 이야기했다.
“로잔느 덕에 찾았어. 얘가 돈이 많아 보였나 봐.”
“아, 그래? 고마워. 로잔느.”
로잔느는 말을 타고 온 키엘의 모습이 상당히 낯설었다.
함께 여행할 때도 많이 봤지만, 그의 옷차림은 평민이라기엔 귀족, 귀족 중에서도 상당히 명망 높은 가문의 자제 같아 보였다.
“그 파란 머리는 어디에 있다고?”
“무슨 천막 같은 데에서 대량으로 판매하나 봐. 오늘 장이 들어서는 날이니까….”
키엘은 리오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수도 한 편에 자리하고 있는 천막 상점으로 향했었다.
* * *
“접근하지 말랬지, 접근하는 걸 막으라는 소린 안 했다고용!”
얼마 만에 보는 저택 식구들인지. 키엘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온 긴장이 풀렸다.
“풉.”
로잔느는 천막으로 들어오자마자 키엘이 웃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그를 봤다.
여태 이 여행을 따라다녔지만, 그가 저렇게 밝은 표정으로 웃는 건 처음이었다.
“이웨르, 보고 싶었어.”
로잔느의 기억에 키엘이 저런 말을 한 적도 없었다.
“하. 내가 가까이 갈 수는 없지만 막을 수는 없죵.”
이웨르가 두 팔을 벌리자, 키엘이 이웨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여전하네.”
“도련님은 진짜 많이 크셨네용. 잠깐만용.”
이웨르는 옆에 있는 의자에 올라가, 어린 시절 키엘을 안아줬던 것처럼 그를 안았다.
“그나저나 너무 멋있게 컸네용. 이거라면 매우 승산 있겠어용.”
“정말?”
키엘의 행동에 가장 패닉이 온 건 로잔느였다.
웃는 것도 모자라, 누군가와 저렇게 접촉하는 게 충격적이었다. 그것도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푸른색 머리의 여자와.
물론 로잔느 뿐 아니라 쌍둥이들도 놀란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와… 키엘이 누군가에게 안기기도 해.”
“신기하네.”
쌍둥이들이 쑥덕이자 젠킨스는 이웨르의 방식을 그들에게 써먹기로 했다.
“여긴 어떻게 찾아오셨어요?”
“저희는 이 묘약을 만든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이웨르 씨.”
리오가 사랑의 묘약을 건네자 젠킨스는 허탈하게 웃었다.
“나 똑똑하죵?”
“응. 이웨르, 똑똑해.”
로잔느는 차마 그 광경을 볼 수 없었는지 천막을 나갔고, 마이유가 따라나섰다.
* * *
그들은 여관 안의 주점에서 맥주를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저… 근데 로잔느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 지금 여기 있는 거 모를 텐데. 아까 그 천막에서 기다리면 어떡해?”
리오는 걱정스레 물었지만, 키엘은 오히려 미간을 찌푸렸다.
“숙소가 여긴데 없으면 오겠지. 그 정도 바보는 아닐 거야.”
너무 칼같이 자르는 말에 리오는 로잔느라도 된 것 마냥 서운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이웨르와 젠킨스는 오히려 그 모습에 데자뷰를 느꼈다.
“세상에, 우리 도련님한테서 아가씨의 냄새가 나네용.”
“보고 자란 게 저거라….”
리오는 두 가지 갈림길에 서 있었다.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늘 사고를 몰고 다니지만, 심성이 나쁘지 않은 로잔느를 찾아야 할지.
아니면 키엘이 늘 말하던 동물 왕국의 사람들과 대화를 해야 할지.
그리고 리오는 계속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로잔느 데리고 올게.”
리오는 여관 밖을 나가서 로잔느를 찾았다. 그녀는 그 천막 앞에서 마이유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키엘이 했던 ‘그 정도 바보는 아닐 거야.’라는 말이 떠올랐다.
“로잔느, 왜 여깄어?”
“아. 잠깐 자리 비운 줄 알고 다시 왔어.”
로잔느도 그곳에 키엘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왠지 한 번이라도 자신을 찾아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곳에 서 있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오늘도 키엘이 아닌 리오가 다가왔다.
로잔느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고, 그런 그녀에게 리오는 겉옷을 벗어서 건넸다.
“다들 여관에 있어. 돌아가자.”
로잔느는 겉옷을 걸치고 씁쓸하게 웃었다.
“키엘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그동안 함께 여행하면서 그녀는 키엘과 자신의 사이에 뭔가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었다.
그의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설명할 수 없는 감이 ‘이 사람이 내 운명’이라고 자꾸만 알려주고 있었다.
이미 백작가에서는 가출한 딸을 호적에서 파겠다며 눈에 불을 켜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로잔느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계속 키엘의 옆에 있을 수 있는 이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눈치가 없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모르는 척을 하는 거라면, 그럴 이유가 없었다. 싫어하는 듯하면서도 키엘은 결코 그녀를 내치거나 떠나라고 한 적이 없었으니까.
리오는 ‘너한테 관심은 하나도 없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상처받을까 봐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그저 주변을 잘 못 챙기는 것뿐이니까. 너무 서운해하진 마.”
차마 모질게 하지 못한 말이, 로잔느에게 더 희망 고문이 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리오가 멋쩍은 듯 웃었다.
“하지만, 아까 그 사람들은….”
로잔느는 이웨르를 떠올리다 입을 다물었다. 누가 봐도 매혹적으로 보이던 사람이었다.
혼자 있고 싶다던 로잔느를 두고 리오가 여관으로 다시 돌아가자, 여관의 주점에서 그들은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벨라는 동물왕국으로 돌아갔다고?”
“넹. 원래 성인이 되면 가야 했어용.”
키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벨라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마지막처럼 말했던 거구나.’
데리러 간다고 했는데, 너무 늦어버린 걸까.
그때 오래전 젠킨스와 벨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젠, 소환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이…예에?”
“젠. 알려줘.”
젠킨스가 계속 망설이는 동안, 리오는 자신의 맥주를 가지고 그 옆에 앉았다.
“이웨르 씨야 상관없겠지만, 전 아가씨 없으면 그곳에서 살아갈 수 없어요. 괜히 미움받기 싫습니다.”
“그럼 도련님 모르게 소환하면 되죵.”
“응. 나 모르는 척할게.”
쌍둥이들은 태연하게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면서 배시시 웃는 키엘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
지난 몇 년간 여행하면서 쌍둥이들이 분위기 메이커를 도맡았지만, 그때마다 키엘은 잠깐 웃다가 말뿐이었다.
그는 늘 긴장한 채로 곁을 쉽게 내주지 않았다.
몇 년간 같이 여행 한 로잔느와 마이유에게 대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모르는 척한다고 모르겠습니까? 아가씨가?”
“난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잘한다, 잘한다, 도련님!”
하지만 저렇게 쉽게 녹아내리듯이 웃으며 편하게 있는 걸 보니, 리오는 키엘이 왜 그렇게 ‘동물왕국’에 집착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진짜 동물 왕국이란 데가 있어요?”
리오는 키엘과 만난 이후로 동물 왕국에 대해 틈틈이 알아본 터라, 그 사실이 제일 중요했다.
“아무리 찾아도 단서가 없었는데.”
“찾아도…라니. 설마… 그동안 계속 우리를 찾아다녔던 거예요?”
키엘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응.”
짧고 단호한 대답이지만, 그 대답 안에 얼마나 헛되이 시간을 보냈을지 상상하자 젠킨스는 소름이 돋았다.
그럼과 동시에 짠하고 뭉클한 마음이 속을 간지럽혔다.
키엘이 떠난 이후로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마족들과 지내느라 잊고 있었던 감동이 밀려왔다.
벨라가 처음에 건 복종 서약이 ‘키엘에게 마계에서 온 걸 들키지 말 것’이었다.
이웨르의 말을 이용하자면 ‘키엘’에게 들키지 말라고 했지,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말라곤 안 했으니까.
젠킨스는 종이에 소환진을 그렸다. 이 소환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목적지가 어딘지 알 테니까.
“어차피 이걸 안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필요한 마력이 상당할 텐데. 그런 마법사부터 찾아야 합니다.”
“마법사라면 리네가 할 수 있을 거야.”
리네가 어깨를 으쓱이며 흐뭇하게 웃었다.
젠킨스가 그 말에 고개를 홱 돌리고 리네를 뚫어지라 쳐다봤지만, 그녀는 전혀 마법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마법사의 마력에 따라 소환진이 누구 앞에 펼쳐질지가 정해질 겁니다.”
“그 정도는 저도 아는데요.”
“최종 목적지는 아가씨가 되어야 하지만, 이 사람의 힘이 부족하면 아가씨 앞에서 안 펼쳐질 수도 있어요.”
“음.”
“200년간 가능한 마법사가 없었어요.”
그때 리네가 앞에 있던 식탁을 쾅하고 치며 젠킨스에게 쏘아붙였다.
“저기요, 저 500년 만에 나타난 천재 소리 듣고 자랐거든요?”
“글쎄요. 누가 해 준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자존감을 상당히 높여주긴 하나 봅니다.”
젠킨스도 리네의 말에 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다 그린 소환진을 손에 들고 흔들었다.
“어쨌든, 처음 아가씨가 인간계에 넘어오셨을 때처럼 소환진이 생길 때 바로 찾아서 넘어오셔도 될 겁니다.”
벨라가 마계의 공주라는 걸 안다면, 황태자인 키엘이 어떻게든 소환 가능한 마법사를 찾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려면 미리 알려 드려야 할 거고.”
철저히 리네를 배제하고 말하는 젠킨스의 말투에 리네는 기분이 확 나빴다.
“이리 줘봐요!”
리네는 젠킨스의 손에서 종이를 확 낚아채 천천히 봤다. 젠킨스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면서 ‘과연 이 사람이 가능할까?’ 눈여겨봤다.
“리네, 가능할까?”
리네는 그림을 보고 그제야 왜 그들이 ‘동물왕국’을 그토록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는지 알았다.
“동물왕국이 아니었네.”
리오가 옆으로 가까이 가서 소환진을 봤지만 알 수 없었다.
“이걸 보고 어떻게 안단 말이야?”
“척 보면 딱 알아야지.”
“음… 일단 시간이 다른 건 없고, 공간을 소환하는 거니까….”
“넌 제때 졸업도 못 하겠다. 이제 나보고 누나라고 깍듯이 불러.”
리오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여기 천계구나?”
젠킨스가 마시던 맥주를 내뿜었다. 리오는 자신의 옷에 튄 맥주를 닦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키엘이 매번 그랬잖아. 벨라라는 사람, 천사 같았다고.”
이번에는 이웨르가 맥주를 마시다 사레에 걸렸다.
키엘은 얼굴이 살짝 붉어진 채로 고개를 숙였다.
“리오. 그만 말해.”
“도련님, 아가씨가 어딜 봐서 천사입니까?”
젠킨스는 혼잣말이 아니라 키엘에게 물어본 죄로 목에서 피가 나기 시작하더니 속이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헉… 이거 어떻게 합니까.”
“견뎌용. 한 한 달 갈 거예용.”
이웨르는 젠킨스가 괴로워하는 걸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어휴… 바보. 여태 혼잣말도 안 하고 뭐 하고 살았댕?”
그 광경을 본 리네는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레 키엘에게 물었다.
“키엘, 벨라라는 사람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
“이거 마계의 소환진이야.”
키엘의 눈이 커지고, 모두 그의 반응을 살폈다.
‘충격받았겠지?’
그리고 키엘은 그들의 걱정대로, 충격에 휩싸였다.
‘벨라가 그럼, 마계의 공주였어?’
왜 이제껏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맞아…. 벨라는 마족이었었어.’
분명 그도 알고 있었다. 벨라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모습을.
‘천사 같은 악마.’
하지만 그에게 벨라는 그 후로 늘 하얀 빛에 둘러싸인 천사였기에, 벨라와 헤어지고 난 이후에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거였다.
그제야 키엘은 여태 익숙해서 지나쳐왔던 것들이 차분히 퍼즐처럼 맞춰졌다.
사람을 홀리는 이웨르의 피.
성검을 손에 들 수 없다고 키엘이 들었던 것도.
이제야 떨어져 있던 톱니바퀴가 한데 맞물려 굴러가는 게 보였다.
그는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손으로 막으며 떨리는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눈가가 붉어지고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쌍둥이들은 처음 보는 키엘의 우는 모습에 안절부절 해하며 그를 위로했다.
“저, 키엘…. 괜찮아?”
키엘은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늘 가지고 다니던 벨라의 노트와 소설을 꺼냈다.
애초에 키엘을 봤을 때부터 자신을 죽이려던 키엘을 먼저 죽였어도 되었을 텐데.
그녀는 그러지 않고 키엘을 거뒀다.
자신이 죽을 걸 알면서도, 그를 황태자로 만들기 위해서.
‘이러니 어떻게 당신이 악마겠어.’
그의 일대기 같던 소설에 그녀의 흔적은 없었는데.
그저 스쳐 지나가며 읽었던, 단 몇 줄 되지 않은 그 장면이, 그의 인생에 다시 쓰인다.
키엘은 늘 불경하다고 생각했던 소설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결코 만날 수 없는 연이라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기다림의 끝에서 발견한 배의 이름은 ‘운명’이었다.
* * *
다시 키엘이 식당으로 가자, 쌍둥이들은 키엘을 걱정하며 물었다.
“너 괜찮아?”
“리네, 그 소환진. 소환할 수 있겠어?”
키엘은 알랑궂은 위로보다는, 앞으로의 계획에 더 집중했다.
“일단 시도는 해봐야 할 거 같아. 내 자랑 같아서 웃기지만, 확실히 대마법사 정도 되어야 소환할 수 있어.”
그 말을 들은 키엘은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했다.
“이게 힘든 마법이라면, 여태 마왕을 소환한 다른 마법사는 얼마나 있었는지 알아볼래?”
“아. 0명이야.”
“어?”
리네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왜 소환하려고 하겠어? 굳이.”
“그래도 뭔가… 이상한 마법사라던가.”
“그런 놈들이 더러 있긴 했지만, 그 정도 능력 있는 마법사라면 그런 길로 안 빠지지.”
“리네, 도와줄 거지?”
키엘은 불안하게 리네를 쳐다봤다. 하기 싫다고 해버리면, 못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나는 왜 하필 신성력도 없어서….’
펜던트에 그 힘이 없는 게 안타까운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이런 꼬마 아가씨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지금부터 도련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마법사를 고용하는 게 빠를 겁니다.”
리네는 웃으면서 일어섰다.
“지금 날 뭐로 보고?”
승부욕이라면 리네를 따라갈 사람을 못 봤다.
“지금 당장 해봐요!”
무슨 일이 있어도 1등을 해내야 하는 사람이니, 제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해낼 사람이었다.
* * *
잠시 후. 그들은 모두 여관의 큰 공터에 서서 벨라의 무전을 기다렸다.
“…진짜 벨라가 연락이 올까?”
“걱정 마용. 화나서 연락 올 테니깡. 우리 사고 친 거만 안 들키면 돼용.”
키엘은 두 손을 모아 긴장되는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만약 벨라가 인간계로 오고 싶지 않다고 하면… 내가 마계로 가자.’
리네는 혹시나 소환하게 될까 봐 미리 제물로 쓸 토끼를 손에 들고 기다리며, 키엘을 보고 생각했다.
‘젠킨스 아저씨는 남매 같은 사이라지만, 역시 아니야.’
잠시 후 이웨르가 들고 있던 무전 밑으로 커다란 소환진이 생겨났다.
이웨르가 공터 가운데에 확성기를 그 앞에 두고 모두가 다 들을 수 있도록 자리 잡았다.
“이웨르.”
키엘의 눈가가 점점 붉게 변했다.
벨라의 목소리였다.
꿈에서도 들리지 않던 목소리.
이 너머로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사람이 있었다.
‘보고 싶어.’
그는 천천히 그 무전에 다가갔다. 조금 더 가까이서 듣고 싶어서.
“꺄! 너무 기다렸어요!”
“너는 무슨 생각으로 저딴 드레스를 보낸 거야?”
“하하. 마음에 안 드세용?”
이웨르는 머쓱하게 웃었다.
당연히 약이 올라서 받자마자 무전으로 연락할 줄 알고, 일부러 사교계에서나 입을 법한 공주님 드레스를 보낸 거였다.
“입을 일도 없잖아. 내가 이런 거는 보내지 말랬지. 내가 이거 입고 뭘 할 거야.”
“아… 저, 아가씨.”
“내가 탈람 이런 새끼들이랑 춤이라도 춰? 어? 아니, 생각하니까 열받네?”
벨라가 점점 단계적으로 분노하며 욕하기 시작했다.
‘아가씨! 도련님이 듣고 있단 말이예용!‘
이웨르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키엘을 봤지만, 그는 오히려 향수에 젖었는지 벨라의 목소리를 들으며 웃고 있었다.
‘내가 생각했을 때 우리 도련님도 정상은 아니양….’
“뭔 생각으로 이런 걸 보낸 거야? 너 이 새끼 마계로 돌아오기만 해봐, 아주 사지를….”
“아가씨 인간계로 오실래용? 소환할 수 있는 마법사 찾았어용!”
“…….”
“아가씨?”
갑자기 밝은 목소리가 공터에 울려 퍼졌다.
“진짜?”
“넹! 그래서 보내드린 거예요!”
“이웨르, 네가 해냈구나! 기특한 것!”
키엘은 그 말을 듣자마자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이 모든 게 순탄하게 보였다.
이웨르가 사인을 주자, 리네는 고개를 끄떡이고 잡고 있던 토끼의 숨을 끊었다.
리네는 자신을 하찮게 보는 저 반마족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어서 평소보다 더 집중해서 마법을 펼쳤다.
‘흥. 마왕 정도야 당연히 소환할 수 있지. 예비 대마법사 리네님이라고.”
공터 주위로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드세게 들리고, 바람이 리네의 주위를 강하게 불었다.
“…이게 된다고?”
젠킨스는 어린 마법사의 눈빛을 보며 전율을 느꼈다.
“아가씨, 소환진 혹시 보여용?”
“응. 내 앞에 보여.”
키엘은 리네의 소환진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두근대며 뛰는 심장이 몸 밖으로 나갈 것만 같았다.
‘곧 볼 수 있어.’
이웨르를 만나고, 이렇게 모든 게 잘 될 줄 생각하지 못했다.
기다렸던 시간이 손 위에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쌓아왔던 그리움의 낙엽이 바람에 흩날리며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꿈은 아니겠지?‘
키엘의 심장이 이젠 뛰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그때 무전으로 반가운 푸르의 목소리도 들렸다.
“앗! 안 돼요!”
“Xx, 건드리지 마. 나갈 거야!”
“오… 옷은 입어야죠!”
키엘이 소환 진에서 잠깐 주춤하듯이 한 발자국 뒤로 갔고, 리네도 순간적으로 집중을 잃었다.
“알몸으로 오셔도 되는뎅.”
되긴 뭐가 돼!
키엘은 붉어진 얼굴로 이웨르를 노려보며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화를 냈다.
“이웨르씨, 미쳤어요?”
“뭐야. 젠킨스도 있었어?”
다행히 젠킨스가 그녀의 입을 제지하자, 리네도 다시 집중해서 소환진을 유지했다.
하지만 집중하기에는 푸르의 낭랑한 목소리가 방해했다.
“난 지금 공주님의 나체를 아주 적나라하게 보고 있지!”
“오호. 그건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당.”
“네가 좋아할 거 같으니까 생생하게 알려줄게! 일단 공주님의 가슴이 봉긋….”
키엘은 아예 귀를 막고 고개를 숙였다.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얼굴에서 열이 올랐다.
“공주님 가슴이 뭐! 더 얘기해줭!”
“하지 마세요!”
하지만 한참 말이 없던 푸르는 더 중개하지 않았다.
“와! 혀는 금방 붙네요!”
리네만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해 눈을 깜빡였지만, 그 말 한마디로 벨라가 뭘 했는지 다들 알 수 있었다.
이제 그녀가 올 차례였다.
“나 들어갈게.”
“옷은 입으셨어요?”
“짜증 나게 하지 마.”
소환진이 쿵쿵거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타나야 할 벨라는 보이지 않았다.
“왜 안 들어가져?”
“아무래도 마력이 더 필요한 거 같은데요.”
젠킨스의 말에 리네는 젖먹던 힘까지 다해서 온몸에 집중했다. 주변에 끌어모을 수 있는 모든 마력을 전부 끌어모았다.
벨라가 부딪힐 때마다 소환진에서 진동이 느껴지지만, 어떤 막이 그녀를 막고 있는 듯 뚫리지 않았다.
“하… 한계야. 여기서 더 못 모아.”
리네는 서 있는 것도 힘들 정도로 다리를 떨고 있었다.
“아가씨. 다른 방법이 필요해요. 이대로는 시전자가 죽을 수도 있고….”
그때 겨우 손 하나가 소환진을 천천히 넘어오는 게 보였다.
“제발… 나가고 싶단 말이야.”
키엘은 무전 너머로 벨라가 얼마나 간절하게 말하는지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소환진으로 걸어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빨리 보고 싶어.’
키엘은 소리죽여 울면서 깍지를 끼고 천천히 손가락을 하나씩 어루만졌다.
꽉 잡으면 부서질 듯이 가느다란 손목과, 떨리는 팔이, 인간계로 나오려고 애쓸 때마다 멍이 들어가고 피부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아가씨, 너무 많이 다쳤어요.”
“상관없어.”
키엘은 잡아끌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젠킨스가 키엘을 보며 고개를 젓자, 키엘은 따가운 목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보고 싶어….’
하지만 그녀를 더 다치게 할 순 없었기에, 벨라의 손을 밀어 넣었다.
손이 없어지자 리네는 기다렸다는 듯이 풀썩 쓰러졌다.
“난 나갈 수 없는 거야…?”
“방법을 찾아볼게요. 아가씨께서 원하신다면.”
“나가고 싶어. 단 하루만이라도 더.”
그녀의 간절함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무전이 끊어진 후에도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키엘은 사라진 소환진을 보며 그녀의 피가 묻어 있는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토록 흐릿하던 사람을 이 손으로 잡았다.
그는 자신의 손을 입술에 가까이 가지고 가 그녀의 남아 있는 온기를 코끝으로 맡았다.
‘내가 구해줄게요.’
그녀가 늘 읽어줬던 동화처럼.
키엘의 열네 살의 봄에서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흘러갔다.
이웨르는 오랜만에 만난 키엘에게 미주알고주알 그간의 일들을 얘기했다.
“진짜 우리 아가씨는 떠다 먹여줘도 모른다니깡.”
“아직도 젠킨스랑 잔바르 사이 몰라?”
“누가 말해줘도 안 믿을 거랍니당. 우리 도련님은 전략적으로 가야 할텐뎅!”
취기가 살짝 올라 얼굴이 붉어진 키엘이 맥주를 홀짝이며 조심스레 이웨르에게 물었다.
“전략적으로… 어떻게?”
그때 리오가 로잔느와 마이유의 등을 떠밀며 요란스럽게 테이블 앞으로 다가왔다.
“자자, 얘들 왔어!”
“어머나, 그러고 보니 우리 이 아가씨들은 누굴까용?”
키엘은 잠시 멈춰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냥 따라다니는 애들이야. 여기는 로잔느. 여기는 마이유.”
“그냥… 따라다니는… 그렇군용.”
“여행하고 싶대.”
어두운 여관의 불빛은 그리 밝지 않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웨르의 눈앞에 앉아 있는 로잔느는 굉장히 순수하고 아름다운 편이었다.
벨라가 악마라면-아니, 진짜 마족이지만.-여기는 천사 같은 분위기.
하얀 날개가 보이지만 않을 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광채가 나는 얼굴이었다. 주변의 사람들도 로잔느가 들어오자마자 힐끗힐끗 쳐다보는 걸 이웨르도 알고 있었다.
‘흥. 왠지 마음에 안 들어.’
그때 다른 테이블에서 젠킨스와 서로 입씨름을 하던 리네가 키엘을 불렀다.
“키엘! 방법을 찾았어!”
키엘은 벌떡 일어서서 리네에게로 뛰어갔다.
이웨르는 그런 키엘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참 한결같다, 우리 도련님도.’
그때 리오가 이웨르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이웨르씨는 키엘이랑 무슨 관계예요?”
그 틈을 타 이웨르는 얄미운 얼굴로 로잔느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용, 전 우리 도련님에게 사랑이 뭔지 가르쳐 준 이웨르랍니당.”
로잔느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고, 마이유도 뒤따라갔다.
리오는 갑자기 들은 충격적인 사실에 돌이 되었지만 이웨르는 눈앞에 있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흐뭇하게 웃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고용?‘
적어도 정의를 가르쳐 준 건 맞았으니.
* * *
벨라를 데리고 오려는 계획은 순풍에 돛을 단 듯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리네는 벨라를 소환하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일단 필요한 마력 수치부터 얼만지 계산해볼 거야. 학교에 내 실험실이 있어.”
키엘은 그 실험실도 통째로 황궁에 가지고 오라고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리고 누구보다 급한 건 젠킨스였다.
“되도록 좀 빨리해주시죠. 아가씨가 하루에 한 번씩 연락 와서 언제 소환되냐고 물어보시잖아요.”
꽤 오래전, 키엘이 뻐꾸기처럼 ‘벨라는 언제 와’물어봤던 걸 떠올렸다.
“좀 조용히 하세요, 아저씨! 애초에 소환마법이 복잡해서 그런 거라고요.”
소환마법은 공간을 비트는 마법이라 정확한 좌표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마법이었다.
벨라가 성인이 되고 난 이후로 천천히 마왕의 힘을 흡수한다고 했다. 그러니 지금 소환하는 데에 필요한 마력보다, 후에는 더 필요할지도 몰랐다.
“증폭 도구들도 있으니까 맞춰볼게.”
“리네. 소환은 너에게 맡길게. 고마워.”
이웨르는 하녀로, 젠킨스는 키엘의 호위로 황궁으로 입궁했다. 하녀라기에는 일도 안 하고, 호위라기에는 키엘에게 접근조차 하지 못했지만.
둘은 틈만 나면 키엘의 방이 보이는 나무에 앉아 창문 너머로 열심히 일하고 있는 그를 보며 수다를 떨었다.
“세상에, 도련님이 황태자였다니. 아직도 안 믿어진다니까요.”
“어릴 때부터 끼가 있긴 했죠.”
“그나저나 젠은 그걸 다 알면서도 말을 안 했구낭. 우리 몇 년간 개고생할 때도.”
“…….”
“역시 이 내기에는 내가 이긴 거 같으니까 쫄았구낭?”
그럴 때마다 젠킨스는 혀를 내둘렀다.
“괜히 도련님한테 헛바람 넣을까 봐 그런 거죠. 전 도련님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아니, 나도 그렇거든용?”
티격태격하다가도 키엘이 그들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면 따라서 손을 흔들었다.
“그나저나 도련님 하는 거 보면 아가씨 생각나지 않아용?”
“…그렇긴 합니다.”
자기 방에서 밤이 되도록 불을 끄지 않고 일을 하는 키엘에게서, 오래전 서재에서 콕 박혀 뭘 그렇게 열심인지 정리하던 벨라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키엘은 졸린 눈을 겨우 뜨며 그가 해야 할 업무보다 더 많은 업무를 해내고 있었다.
그토록 성물이라도 찾으러 가자고 황궁 밖을 나가고 싶어 할 때는, 아무 말도 없더니.
해가 바뀌고 운명처럼 나가게 되었었다.
원작 소설에는 로잔느를 그리워하며 몰래 황궁을 빠져나가고, 현 황제 라니에트처럼 귀족들에게 휩쓸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소설 속에 나오는 황태자가 아니었다.
‘진짜 벨라를 잡으라고 하면 안 되니까.’
마력 따위 없어도 충분하다는 걸, 황궁에 사는 개미 한 마리도 반박하지 못하게 해야 했다.
“전하, 크루엘가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응. 거기 놔둬.”
할 수 있었다.
벨라가 남겼던 책의 반절 이상은 이미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기에.-로잔느와의 사랑이야기라.-
‘이곳에서 살 수도 있어야 해.’
그리고 그는 이제 벨라의 책을 통해, 자신의 기반을 닦아 나가기로 했다.
하루가 멀다고 그의 방에 초대된 귀족들은 얼굴을 붉힌 채 돌아가거나, 혼이 빠진 채 돌아갔다.
그렇게 키엘은 벨라가 황궁에서 살 수 있도록 차분하게 하나씩 준비했다.
* * *
어느덧 1166년의 마지막 날, 그는 마법 학교에서 좋은 소식을 들고 온 리네와 리오, 이웨르와 젠킨스와 함께 한 해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키엘의 방에서 와인을 한 잔씩 마시면서 새해를 알리는 불꽃놀이를 바라봤다.
“아저씨, 이 정도면 500년이 아니라 10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마법사 아니에요?”
“10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자화자찬이네요. 그리고 저 아저씨 아니에요.”
“아! 미안해요, 할아버지.”
젠킨스는 반마족이었기에 인간으로서 또는 마족으로서 마법을 쓸 수는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만 있는 많은 이론을 리네는 굉장히 쉽게 해내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두 속성을 한 번에 할 수도 있다는 거네요?”
“그렇죠. 다만 머리로 계산하는 게 힘들지.”
“오, 그럼 나 좀 봐줘요.”
그래서인지 툴툴거리지만 의외로 리네와 젠킨스는 죽이 잘 맞았다.
“이번 연도에는 정말 좋은 일만 있었던 거 같아.”
키엘이 와인 잔을 흔들자 와인 표면으로 반사되는 불꽃이 일렁였다.
“그러게용. 곧 있으면 아가씨도 올 테고.”
“그런데 마왕을 소환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는데….”
벨라를 만날 생각에 들떠있는 키엘과 달리 리오와 이웨르는 걱정이 많았다.
리오는 말 그대로 인간계에 마왕을 소환해도 되는 건지를 걱정했고.
이웨르는 사고를 쳐도 제대로 친지라, 자기 목숨이 이제야 걱정되기 시작했다.
“도련님…. 꼭 아가씨 오면 잘 설득해줘야 해용.”
“알겠어.”
“내가 우리 도련님을 믿긴 하지만, 아가씨는 못 믿어용.”
하지만 그건 키엘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 그가 알고 있는 벨라와 많이 달라졌겠지.
이렇게 그녀를 찾아 헤매면서도, 때때로 그녀가 자신을 내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느새 커 버린 손, 키, 달라진 얼굴.
그때는 그리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지금은 차라리 벨라가 예뻐해 주던 키엘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다면 꺼진 불씨가 반짝이며 커질 것 같은 이 불안감이 들지는 않을 텐데.
‘떠나지 마세요.’
하지만 옆에 있다면, 어떻게든 기회가 있을 거라고.
내년의 불꽃놀이는 함께 보게 될 거라고.
그들은 선잠을 자며 1167년의 해가 밝아오는 걸 다 함께 봤다.
“새해 복 많이 받아요.”
리네가 기지개를 켜며 힘차게 말했다.
“마법 증폭 도구랑 파장 몇 번만 더 맞춰보고 소환할게요.”
“여기도 진짜 다른 의미로 괴물이네요.”
“300살 먹은 할아버지가 할 말은 아니에요.”
“노인 공경 좀 하세요.”
“노인인 거 인정?”
키엘은 말장난하는 그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제 정말 곧이었다.
그때 때마침 이웨르의 무전기 밑으로 소환진이 나타났다.
“아가씨다!”
다 함께 들을 수 있고 확성기를 연결하자, 잠깐의 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웨르가 제일 먼저 이 즐거운 소식을 알렸다.
“아가씨! 이제 마법사랑 증폭 도구랑 파장을 맞췄대요! 며칠만 지나면 소환할 수 있을 거예용!”
그러나 벨라의 다음 말은 매우 단호하고 차가웠다.
“이웨르. 나 안 갈래.”
순식간에 모두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입을 다물었다.
한 번도 당황한 적 없었던 이웨르조차 눈을 휘둥그레 뜨고 되물었다.
“네?”
“안 갈래.”
“…왜…용? 아가씨 인간계로 오고 싶어 했잖아용.”
벨라도 잠깐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못 가는 게 내 운명인가 봐.”
“며칠만 기다리면 돼요!”
“아니야.”
벨라가 짧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까지, 모두 크게 들렸다.
“젠킨스 거기 있어?”
“…네.”
“키엘이 황제가 되면.”
그 목소리에는 어떤 힘도 없었다.
“내가 소원 들어주기로 서약했었는데…. 네가 대신 들어줘.”
그토록 찾았고, 이제야 만날 수 있는데.
“별 소원 아닐 거야. 알잖아? 어릴 때부터 빌었던 소원들.”
지독하게 밀어내는 모습에 젠킨스도 질려버렸다.
“…만약 아가씨를 찾는 소원이면요?”
“아…. 그런 소원을 빌까?”
“그렇게 예뻐해 줬잖아요. 갑자기 떠나버렸는데….”
“그럼 그냥 죽었다고 해.”
그 말을 끝으로 벨라는 무전을 꺼버렸다.
갑작스러운 해고 사실에 리네도 황당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들 키엘의 눈치를 제일 많이 살폈다. 누구보다도 간절할 사람이었기에.
“하여간 동물왕국은 다 이래요.”
“원래 기, 기분파긴 하죵.”
“타인의 감정 같은 건 생각도 안 한다니까요. 도련님, 너무 낙담하지 마요. 원래….”
젠킨스는 어쭙잖은 위로를 하려고 했지만, 키엘의 얼굴은 낙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웃고 있었다. 실성이라도 한 듯이.
“하하… 1167년.”
“어?”
“네?”
키엘은 서둘러 뒤를 돌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그의 방에 도착했을 때, 잠가둔 서랍을 열어 벨라가 썼던 소설의 필사본을 손에 들었다.
“내가 마계로 가야 하는 해.”
그는 소설 속에서 ‘마왕의 딸’이라는 글자를 손으로 만졌다. 벨라는 움푹 파인 그 글자 안에서 살고 있었다.
“여기서 기다린 거야…. 내가 당신을 죽여주기를….”
그가 사랑한 사람은 참 지독한 사람이었다.
마계는 키엘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어두웠다.
보름달이 하늘을 반이나 덮고 있지만, 그 빛은 희미하게 마계의 생태를 비추고 있었다.
‘벨라는… 이런 데서 살았구나.’
키엘은 마왕성으로 홀로 걸어갔다. 주변에서 마물들이 그를 보고 놀라는 게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고 향했다.
뭔가 다가오면 가볍게 검을 휘둘렀지만, 전혀 힘들지 않았다.
처음 성물을 찾으러 데이저에 갔던 날처럼.
걸을 때마다 벨라가 느껴졌다.
그를 기다리는 벨라가.
마왕성의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세 갈래로 길이 갈라졌다.
원작에서는 이곳에서 쌍둥이들과 각자 한 길씩 가고 리오가 죽게 되지만, 홀로 온 그는 천천히 소설 속에 나오던 대로 3구역으로 향했다.
놀랍지도 않을 정도로, 아무도 없었다.
사마귀 같은 게 있었지만 달려드는 순간 너무 쉽게 반으로 잘렸다.
이 세상 어느 누가, 마계에 혼자 들어와서 마왕성까지 이렇게 쉽게 갈 수 있다는 건지.
3구역의 끝에 커다란 문은 걸쇠까지 풀려 있었다.
그는 그 문에 손을 가까이 댔다.
이 너머에 너무나 그리워하던 그 사람이 있었다.
자신의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떨리는 마음을 달랬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얼마나 변했을지. 이렇게 온 그를 어떻게 생각할지.
지금 당장 보고 싶지만,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조심스레 그 무거운 문을 열자, 달빛 아래에 한 남자가 우뚝 서 있었다.
일부러 몸집이 큰 남자인 것처럼 꾸몄지만, 가느다란 그녀의 손목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벨라, 다 티 나요.’
당장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달려가고 싶었지만, 키엘은 그러지 못했다.
지금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키엘은 천천히 검을 들고 벨라에게 다가갔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지만, 그는 소설에 나오던 대로 대사를 읊었다.
“…당신을 찾았어.”
너무나 오랫동안.
“내가 직접 상대해주지.”
“당신의 심장을 가져가겠어.”
벨라의 검은 예고도 없이 키엘에게 달려들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이의 냄새가 바람을 타고 그에게 닿았다.
수없이 부딪쳤던 검이라, 한 번의 내리침에도 그녀가 묻어져 나왔다.
- “키엘. 몇 번을 말해. 목숨을 노리는 이는, 자기 목숨을 아끼며 공격하지 않아.”
- “넌 나를 죽일 듯이 달려들어야지.”
그녀는 늘 그랬듯, 결정적으로 그를 찌를 듯하지만 그 끝에서 멈춰 섰다.
추억을 하나씩 정리하기라도 하는 듯, 검이 부딪히는 선율은 애가가 되고 그들의 몸짓은 이별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온몸으로 그녀가 느껴지는데, 저 가면 안의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보고 싶어.’
늘 그에게만은 웃던 벨라가 보고 싶었다.
못된 마법사는 잔인하게 죽이면서, 잔바르가 먹고 싶다던 아이들을 풀어주며 그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던 그녀가.
저택의 마족들에게는 화를 내도 그에게만은 웃고.
동화책을 읽어주다 스르르 잠이 들 때쯤 머리카락을 만져주던 그녀가.
귀엽다며 볼을 꼬집던 것도.
‘내가 그렇게 극성이냐’며 걱정 어린 얼굴로 늘 그가 어디 다친 데는 없냐고 물어보던 거도.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다가도, 그를 볼 때면 언제나 등 뒤로 비치는 햇살이 천사의 날개처럼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었던 그녀가.
“그때 한 번만 더 얼굴을 볼 걸 그랬어.”
이렇게 오랫동안 못 볼 줄 알았다면.
벨라가 일부러 뒤로 넘어지고, 키엘의 검이 벨라의 목에 닿을 때. 그는 벨라가 눈을 감는 걸 보고 손을 멈췄다.
그녀가 무방비한 지금.
키엘은 검을 내려놓고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천천히 그 가면을 들어 올렸다.
그를 괴롭히던 악몽을 쫓아낼 때도, 산적들을 물리칠 때도.
그녀는 그렇게 소름 끼치도록 무섭다가도.
“…벨라.”
그때처럼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
루비 같은 그 두 눈에 자신이 담겨 등 뒤의 날개가 새하얗게 바뀔 수 있기를, 도박을 걸었다.
그리고 가면 속에는 꿈에 그리던 사람의 붉은 눈이, 흐릿하다가 점점 선명하게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키엘의 손끝에 벨라의 뺨이 닿자, 지금이 꿈이 아니라는 걸 확신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을 정도로.
“보고 싶었어.”
이 말만으로도 이 벅차고 아픈 마음을 표현할 수 없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건 벨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한없이 흔들리다가 눈망울이 맺혀지자 입술을 깨물었다.
“…나를 죽이고 내 심장을 가져가.”
벨라가 자신의 검 끝을 잡고 키엘의 손에 쥐여주며 웃었다.
키엘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만나자마자 하는 말이 저런 거야.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는 지독하게도 이타적이며 이기적인 벨라의 입술이 원망스러웠다.
“나를 죽여줘.”
무려 8년 만에 만났는데.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한다는 말이 자꾸만 죽여달라고 한다.
키엘의 눈에서 처연하게 눈물이 떨어졌다.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어떻게 그런 부탁을 해요?”
“하지만… 네가 날 죽여야….”
그는 검 끝을 잡느라 피가 뚝뚝 떨어지는 벨라의 손을 잡고 자신의 목에 감싸 쥐게 했다.
“그럼 벨라는 날 죽일 수 있어요?”
키엘의 목을 감싸 잡은 벨라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할 수 있어요?”
벨라는 서글프게 눈물을 흘리는 키엘을 보며,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미쳤는지를 마주할 수 있었다.
‘아아.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원작대로 죽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자신도 못 할 일을 눈앞의 이 아이에게 짊어지게 하고 있었다.
“…아니.”
계속 참았던 말이 벨라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녀는 그대로 그 손을 천천히 올려 키엘의 머리카락을 한 올씩 만졌다. 얼마 만에 만져보는 건지, 햇빛 같은 그의 머리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내가 미안해.”
키엘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가 해피엔딩으로 달려가길 누구보다도 바란 사람이었는데.
“마음 아프게 해서 미안해.”
키엘은 눈을 반쯤 감으며 벨라의 손길을 음미하며 녹아내렸다. 부드럽고 그리워하던 손이었다.
“내가 마왕인 건 어떻게 알았대.”
“우리가 대련을 몇 번을 했는데, 그거도 모르면 어떡해요.”
키엘은 설령 벨라가 마왕의 딸이라는 걸 모르고 왔다 하더라도, 진하게 느껴지던 그 대련의 향기에 분명 알아낼 거라고 확신했다.
검을 부딪치는 순간 벨라도 어렴풋이 느꼈던 거였다.
“하하. 그러네.”
그건 서로의 목숨을 앗아가기 위한 자들이 아니라, 검무를 추는 것 같았으니까.
‘이것도 또 나 때문에 바뀐 거구나.’
그녀는 부드럽게 키엘을 내려다봤다. 그는 훌쩍 컸지만, 어릴 때의 얼굴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옛날처럼 무릎을 굽히고 주저앉아 있는 키엘의 눈높이를 맞췄다.
원작대로였다면 키엘이 주저하지도 않고 벨라의 숨이 여기서 끊어졌겠지.
벨라는 키엘을 잠깐 밀어내고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
푹.
그녀는 자신의 심장이 관통하는 소리를 처음으로 들었다.
순식간에 숨이 턱 하고 막히고 정신이 몽롱해져 갔다.
원작대로 그녀의 역할이 끝나야 할 때였다.
벨라는 뛰고 있는 심장을 꺼내어 두 손으로 키엘 앞에 건넸다.
“죽이라는 말은 안 할게. 그러니 이거 가지고 돌아가. 너 이거 필요하잖아.”
“이거 없어도 돼요….”
“괜찮아, 나 안 죽어. 대신 잘 보관해줘야 해. 성물이랑은 멀리 떨어뜨리고.”
키엘은 벨라의 손목을 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벨라. 진짜 이거 없어도 돼요.”
어찌나 단호한지 민망할 정도였다.
“…뭐?”
“벨라 덕에, 황궁에서도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이 많아요.”
“…내 덕분에…라니…?”
뭔가 또 바뀐 걸까.
벨라는 손에 들고 있던 자신의 심장을 꽉 쥐었다. 키엘은 그녀의 손목을 손가락으로 달래며 애써 웃었다.
“어릴 때 배웠던 것들이 많이 도움됐어요. 꼭 이 심장이 없어도, 나를 인정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 말에 벨라의 불안한 마음이 조금씩 사라져간다.
“그러니까 같이 가요, 벨라. 황궁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게 할게요.”
벨라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얼마나 달콤한 말이던가. 그토록 원하던 일이었는가.
빨리 이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욕심을 조금 더 보탠다면, 그녀도 키엘이 훌륭하게 커서 황제가 되는 것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 가도 될까? 너와 로잔느의 사랑을 방해하게 되면 어떡하지?’
벨라는 두 사람이 첫 만남에 키스까지 했으니, 그 사이가 엇갈릴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그런 것보다도 걱정인 건 따로 있었다.
이 인생에 끼어들어서 하마터면 모든 게 무너질 뻔했는데, 또 끼어들어도 원작대로 될 수 있을까.
그녀에겐 고양이 발톱으로 로잔느를 할퀸 전적도 있는데.
이미 여행하는 동안 꽤 많은 등장인물을 죽인 것 같은데.
“너와 같이 있고 싶지만, 네 운명을 또 바꿀까 봐 갈 수가 없어.”
그랬다가는 이 지옥에서 영겁 같은 세월을 보내야 하니까.
키엘은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며 몸부림치던 벨라의 오른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렇게 인간계로 가고 싶어서 떨고 있었는데.
운명. 도대체 그게 뭐라고.
제 목숨도 아끼지 않고, 그녀의 뛰고 있는 심장을 선물로 주려고까지 하다니.
“여기… 좋아요?”
벨라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응. 그러니까 놀러 오고 싶을 때, 놀러 와.”
사실 어려운 이야기였다. 서로의 세계로 돌아가는 건 쉽지만, 넘어가는 건 늘 어려웠다.
젠킨스와 반년이 넘게 시도해봤지만, 벨라는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힘은 이곳에 있을수록 선대 마왕의 힘을 받아 점점 커지고, 그녀를 담을 그릇은 고정되어 있었으니까.
“언제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벨라는 키엘의 건강하게 늠름하게 큰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지금 죽지 못하지만 미쳐버리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조금만 더 버텨볼게. 완결이 날 때까지.’
하지만 키엘은 담담하게 웃고 있는 벨라가 원망스러웠다.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자꾸 멀어지는 이 모습에.
“같이 황궁으로 가요. 키워준 은혜를 갚게 해줘요.”
키엘은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마치 벨라와 키엘을 ‘가족’이란 단어로 묶을 것 같은 말.
이건 마지막으로 하는 설득이었다.
‘이제 많은 거 안 바랄게요, 옆에만 있어줘요.’
하지만 고집스러운 벨라는 무심하게도 웃으면서 또 한 번 키엘을 밀어냈다.
“항상 여기 있을게. 네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할 때까지.”
그래서.
키엘은 눈을 깜빡이면 눈물이 떨어질 듯이 슬프게 벨라를 바라봤다.
“미안해요, 벨라.”
키엘의 주머니에서 기다란 파란색 뱀 한 마리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더니 연기를 내뿜었다.
“벨라가 없는 세상은, 그렇게 될 수 없어요.”
한 번의 깜빡임에 떨어지는 눈물은 오히려 그의 호박색 눈을 날카롭게 빛내고 있었다.
이 어두운 곳의 한 줄기의 빛처럼.
“당신의 심장을 가져가겠어.”
이웨르로 변한 뱀은 벨라가 손에 들고 있던 그녀의 심장을 낚아채 키엘의 가슴으로 넣었다.
이웨르는 복종 서약을 어겼기에 목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벨라가 멍하게 쳐다보는 틈을 타, 무너진 마왕성의 잔해로 폴짝 뛰었다.
벨라는 머리에 ‘물음표’만 떠 있었다. 마계에 있어서 머리가 나빠지기라도 한 건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상황 판단이 전혀 되지 않았다.
“뭐지…?”
심장을 넣은 키엘은, 이웨르가 시범을 보였을 때와는 달리 꽤 많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키엘은 가슴을 후벼 파는 아픔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아서 이를 꽉 깨물고 벨라를 바라봤다.
“이게… 무슨 일이야?”
그녀의 입술 사이로 이가 덜덜 떨리고, 눈에는 초점이 없어져 갔다. 자신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았다.
“아냐… 이럴 리가 없어….”
그녀가 이곳에서 살아가야 할 영겁 같은 세월이 코앞에 다가오자 지레 겁을 먹었다. 이래서는 안 되었다.
“뭐가 또 바뀐 거야…?”
그때 마왕성의 1, 2 구역에서 오래 기다려도 용사가 나타나지 않자 대장군들이 문을 열었다.
“공주님!”
“용사가 저기 있다!”
키엘은 뒤에서 아우성치며 마족들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벨라의 망토를 꽉 잡았다.
8년 전 그날은 아무런 힘도 없었지만, 지금이라면 벨라를 데리고 갈 수 있었다.
“벨라, 같이….”
가슴이 막히고 눈물만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같이… 인간계로 가요….”
“용사를 죽여라!”
어깨너머로 눈치 없는 마족들이 외치며 땅이 진동할 정도로 쿵쿵 다가오고 있었다.
벨라는 눈앞의 키엘을 보며 입술을 질끈 물고 나오려는 눈물을 겨우 삼켰다.
도대체 왜 이랬냐며, 키엘을 탓하기에는.
그의 마음을 너무 이해해서.
어릴 때 이별한 생모 찾는 기분이 뭔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그게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어느새 자신의 수하들이 상황도 모른 채 키엘에게로 달려들었다.
벨라가 천천히 일어서고, 키엘이 잡고 있던 망토가 그녀의 어깨에서 흘러내렸다.
키엘은 그녀를 간절하게 올려다봤다. 망토에 가려져 몰랐던 그녀의 몸은 많이 야위어있었다.
벨라가 두 팔을 살짝 양옆으로 벌리자 그녀의 몸보다 세 배는 되어 보이는 검은 날개가 등에서 펼쳐졌다.
그 모습을 본 마족들은 그녀를 구하러 가려다가 모두 멈췄다. 아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도망가!”
잔바르는 자신의 부대에게 경고했지만, 이미 부대원들은 눈에서 피가 흐르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젠장, 저 용사가….”
잔바르는 표범으로 변해 압도적인 마력을 겨우 버티며 벨라를 막으려고 한 발자국씩 힘겹게 걸었다.
하지만 벨라의 발아래에 그녀의 망토를 잡고 있는 키엘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도련님?”
“잔바르 님! 제 손 좀 잘라주세용! 빨리!”
“이웨르?”
잔바르는 얼떨결에 이웨르의 두 손목을 잘랐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아앙. 매우 짜릿한 장면을 제 눈으로 목격했죵.”
이웨르는 만족스러웠는지 얼굴을 붉히며 몸을 비비 꼬았다.
“우리 도련님 진짜 똑똑하다니까용.”
잔바르는 키엘이 벨라를 잡으러 와서,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벨라는 마계로 오고 처음으로 편한 마음으로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그녀와 키엘이 있는 작은 공간을 제외한 마왕성 전체가 흔들거렸다.
마왕성의 천장부터 무너지기 시작하고 커다란 샹들리에가 마왕의 보좌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보좌 바로 앞에 두 사람이 있던 공간은 밑에서부터 점점 솟아올랐다.
무너지는 잔해에 깔린 마족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키엘의 등 뒤에서 들렸다.
어느새 마왕성의 천장이 전부 바닥으로 떨어지고 어두운 하늘에 커다란 달빛이 벨라의 뒤에서 비쳤다.
많이 야윈 그녀의 속살이 달빛에 비쳐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높은 공간에 둘만 남자 벨라는 만족스러운 듯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제야 조용하네.”
벨라의 휘날리던 머리카락이 차분하게 내려왔다.
그녀는 눈을 살짝 감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여기 진짜 예쁘지?”
“…예뻐요.”
어두운 하늘보다 더 검은 날개인데도, 키엘의 눈에는 마냥 그 모습이 사무치도록 아름다웠다.
“화가 나서 이 성을 몇 번 부쉈는데, 그때마다 달빛이 예쁘더라고.”
“…….”
“또 예쁜 걸 보여주고 싶은데, 마계에는 저거 말곤 볼 게 없네.”
벨라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자신의 날개를 접었다.
“누가 이렇게 무모한 짓 하래. 아프잖아.”
원래는 인간의 심장을 마족에게 넣어두는 악마의 술식이었다.
심장을 가지고 있는 자는, 심장이 없는 자와 오랫동안 떨어지면 죽게 된다.
그저 마족이 약속을 어기지 않게 하기 위한 보험에 불과한 건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키엘은 찢어진 가슴보다 더 저린 마음으로 애절하게 중얼거렸다.
“벨라가 나랑 같이 있기 싫어하잖아요….”
“내가 언제 같이 있기 싫댔어.”
상처 난 부위에 손이라도 댔다가 따끔거릴까 봐 벨라는 손을 폈다 접기를 반복했다.
키엘은 벨라의 오른손을 잡고 천천히 깍지를 꼈다. 벨라가 나오고 싶어 했던 때 잡았던 것처럼, 손가락을 하나씩 어루만졌다.
“벨라가 원하는 대로 다 할게요, 그러니까 같이 있어 줘요.”
이렇게 아픈 걸 감수하면서도 그녀와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이 닿길 바라면서.
가느다란 손가락이 벨라의 손 마디를 스치며, 그녀의 깊은 본심을 톡톡 건드리고 있었다.
‘나도… 사람답게 살고 싶어.’
키엘의 등 뒤로 잔해에 깔려 꿈틀거리는 지네형 마족들. 벨라도 저런 놈들과 이제는 살고 싶지 않았다.
남들은 소설에 빙의해도 공작가, 백작가 이런 데에 빙의하면서. 왜 자신은 이 지옥 같은 곳에 살아야 하는지.
그러니 정말 가야 했다. 인간계로.
‘뭐가 달라졌는지…. 확인해 봐야 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던 날은, 또다시 시작하는 날이었다.
벨라는 조용히 손으로 키엘의 뺨을 만지며 대답했다.
“…갈게. 그러니까 이제 울지 마.”
“정말요?”
“응. 같이 인간계로 돌아가자.”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키엘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서약해주세요.”
방금까지 눈물짓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또렷또렷하게 키엘은 벨라를 올려다봤다.
그 모습에 기가 차기도 하지만, 조금 귀엽다고 생각한 그녀는 헛웃음을 지으며 키엘의 두 볼을 양손으로 잡고 늘어뜨렸다.
“내가 그때 한 서약은 피로한 거라 다른 서약을 할 수가 없어.”
“…그럼 이 심장 안 돌려줄래요. 말 바꿀 거잖아.”
벨라는 볼을 잡던 손으로 새끼손가락을 키엘에게 내밀었다.
“약속할게.”
하지만 키엘은 제 목숨을 가지고 건 이 도박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홱 돌렸다.
“심장은 안 돼, 위험할지도 모른단 말이야.”
벨라도 모르는 부분이었다.
젠킨스야 반은 마족이었기에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인간의 몸에 마족의 심장을 넣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었다. 대부분 그 반대로 가져오니까.
벨라는 곧바로 소환진을 꺼내 이웨르를 불렀다.
“이웨르, 심장 돌려줘. 인간계로 갈 테니까….”
이웨르의 잘린 손이 보이자 벨라는 말끝을 흐렸다.
“못 해용.”
“미친….”
집어 놓은 사람이 꺼내야 하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저도 마음에 드는 남자들한테 넣어봤어용.”
“…왜?”
“내가 옆에 없으면 죽을 테니까 열심히 따라오더라고용.”
“너도 참 또라이다….”
벨라가 인상을 쓰고 혀를 찼다.
“그럼 붕대라도 가져와. 키엘 치료 좀 하게.”
“붕대라면 제일 가까이 있네용.”
이웨르는 잘린 손으로 벨라의 가슴을 가리켰다.
남자처럼 보이려고 상의만 탈의한 채 대충 둘러댄 붕대를.
“…….”
“…….”
잠시 적막이 흐르고 사각대는 소리와 함께 이웨르는 잘려 나간 혀를 찾으러 나섰다.
키엘은 벨라의 한쪽 팔을 잡고 자신에게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냥 지금은 안고 싶었다. 아무 말 않고서.
“응?”
하지만 벨라가 놀라서 힘을 주자 더 끌어당기지도 못했다.
누가 마왕 아니랄까 봐 저 얇은 팔에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키엘은 끌어안는 것도 제 맘대로 안 되자 가슴이 답답했다.
‘진짜….’
키엘은 벨라를 올려다봤다.
“안아주세요.”
“너….”
벨라는 눈을 부릅뜨고 안아달라고 하는 걸 보고 적잖이 당황했다.
어린아이처럼 떼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순간 벨라에게 키엘이 그 어린 시절의 아이처럼만 보이진 않았다.
‘너… 이제 아이 아니잖아.’
어릴 때야 자주 안아줬지만, 이제 다 큰 어른인데.
“…안아주세요.”
하지만 집요하게 어리광부리는 그를 보고, 벨라는 얼떨결에 팔을 벌렸다.
이 예쁜 얼굴이 상처받으며 울고 있는 걸 보면서 자꾸 마음이 짠해지고 약해졌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유독 왜소했던 어릴 때와 다르게, 그를 안는다기보다는 안기는 꼴이 되었다.
하지만 낯선 것도 잠시. 익숙한 키엘의 향에 절로 눈을 천천히 감겼다.
이 따뜻한 품이 얼마 만에 얻는 평화인지, 숨결인지, 따뜻함인지.
벨라는 천천히 눈을 감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 때문에 뭐가 바뀌었는지 확인부터 하고.’
인간계로 가서 어떻게든 원작대로 완결 낼 거라고.
수없이 질리도록 본 소설에서, 이미 키엘과 로잔느는 세기의 사랑을 하고 있었으니. 서로를 향한 감정이 뒤틀리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 로잔느랑 해피엔딩만 되면 되니까.’
키엘의 중요한 설정을 건드렸을 때보다는, 나을 거라 생각하며.
반면 키엘은 그녀를 으스러지듯이 꽉 안고 싶었다.
하지만 벨라의 몸이 너무 마 른데다가 이제는 자신보다 너무 작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이 온기를 흩어지지 않게 소중히 껴안았다.
- “도련님은 전략적으로 움직여야 해용!”
이웨르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키엘은 품 안에 안겨있는 벨라를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 “뭐가 또 바뀐 거야…?”
‘벨라, 미안해요.’
벨라의 숨소리가 그의 가슴을 간지럽힌다.
‘그 빌어먹을 얘기대로 가진 않을 거예요.’
소설을 아는 두 사람은 다른 꿈을 꾸지만, 지금은 오래도록 꿈에 그리던 서로의 온기에 위로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벨라는 안겨있는 자세가 점점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많이 안아줬지만, 손끝에서부터 간지럼이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음…. 이제 좀 떨어져야 할 거 같은데.’
게다가 그녀의 살갗에 키엘의 부드러운 팔이 닿는 것도 기분이 묘해졌다.
“어… 저, 키엘. 이제 그만….”
“싫어요. 이제 다시는 보내지 않을 거예요.”
그 말에 키엘은 오히려 숨이 막힐 정도로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진짜… 얼마나 안았다고 벌써 그만이래.’
벨라는 한참을 안겨 있다가 키엘의 가슴에서 흐르는 피 냄새에 스스로 코를 막았다.
“저, 키엘. 일단 우리….”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일단 키엘을 떨어뜨리고 젠킨스에게 무전부터 시도했다.
“젠킨스.”
“예.”
“소환은 언제 가능해?”
“…안 올 거라면서요.”
“언제 가능하냐고.”
무전 너머로 젠킨스의 한숨이 크게 들렸다.
“문제가 생겨서… 한 일주일 걸릴 거 같은데요.”
“3일.”
“…….”
벨라는 자신이 처음 마계에서 인간계로 갔을 때를 떠올렸다. 단 3일도 미칠 것 같은 이곳에, 일주일씩이나 키엘을 두고 싶지 않았다.
“최선을 다할 테니, 제발 한 시간에 한 번씩 물어보지 말고 하루에 한 번씩만 물어보세요.”
“알았어. 하는 일도 없으면서 바쁜 척하기는.”
“제가 하는 일이 왜 없….”
벨라는 무전을 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단 키엘 치료부터 해야 할 거 같은데.’
마왕성이 전부 무너져 있고, 그 밑으로 징그러운 마족들이 낑낑거리는 게 눈에 보였다. 곧바로 표범 형태인 잔바르를 소환했다.
“잔바르.”
소환된 잔바르는 키엘을 보자마자 인상을 찡그렸다.
“대체 꼬마도련님은 여기 왜 왔습니까? 공주님 죽이러? 인간 주제에 가당치도 않아서.”
키엘은 툴툴대는 잔바르도 오랜만이어서인지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어릴 때처럼 잔바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표범인 잔바르는 여전히 멋있네.”
“……뭐, 뭐…!”
잔바르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지만, 어딘가 골골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동안 벨라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팔짱을 끼고 심각하게 말했다.
“성은 얼마나 고쳤어?”
“여기 있는 놈들 반 정도가 이미 죽었습니다.”
“뭐 어쩌라고. 나머지 반은 뭐 해? 놀아?”
“…지금 바로 착수하라고 하겠습니다.”
잔바르는 엉덩이를 살짝 들고 머리를 숙였다.
“아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아직도 안 고치고 있어?”
“한 10분 지났습니다.”
“너네 뭐하니. 내가 부수면 재깍 고쳐야지.”
평소였다면 ‘내가 시간 물어봤느냐’며 온갖 비속어를 섞어 말할 텐데, 지금 벨라의 말이 잔바르에게는 인간계에 있을 때처럼 착하게 들렸다.
‘역시 이놈이 늘 문제야.’
잔바르가 키엘을 노려보자, 벨라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잔바르의 몸통을 발로 차버렸다.
“저 자식이 어딜 째려봐?”
누군가에겐 너무한 처사였지만, 잔바르는 떨어지면서 다시 패악질 부리는 벨라를 보고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아니군. 여전히 마왕다워.’
* * *
무너진 잔해들 사이에서 이웨르는 자신의 몽마 친구들을 찾고 있었다. 마왕성이 무너진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는지, 그들은 잔해 사이에 깔려서도 애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요! 다들 잘 지냈엉?”
“이웨르! 인간계에서 돌아온 거야?”
“아니. 아마 또다시 가게 될 거양.”
“에? 또?”
“응. 공주님이 또 나가실 거 같앙.”
몽마들은 벨라의 총애를 받고 있는 이웨르가 대단해 보였다.
“잔바르랑 반쪽 얘기는 언제 해줄 거야?”
한데 엉켜 누워있는 몽마들에게 이웨르는 거만하게 굴었다.
“음… 발전이 없긴 한데, 내기에서 이겼으니까 곧 아주 찐한 장면 정도는 볼 수 있을 거양.”
“대단하다, 처음에 푸르 따라간다고 했을 때 쓸데없다고 생각했는데.”
“하. 더 대단한 게 있징.”
이웨르는 자신의 꼬리를 내놓고 살랑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이 이야기의 예고편을 하는 것부터 심장이 간질거렸다.
여태 인간계의 공주나 왕자를 마왕이 납치한 적은 있지만, 그들이 마왕을 납치한 적이 있었던가.
<내가 뱀이 되어야 했던 이유>
애초에 동물로 변신할 수 없는 인간형인 몽마가, 인간 마법사가 만든 마법 약까지 먹어야 했던 사연!
이 짜릿하고 애절한 집착을 이루기 위한 이웨르의 활약!
모두의 갈채를 받을 걸 예상하고 자신의 잘린 손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몽마들의 반응은 매우 시큰둥했다.
뱀이 되어봐야 그들이 환장하는 사랑 얘기와는 동떨어진 얘기처럼 들렸다.
“별로 재미없을 거 같은데.”
이웨르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비웃었다.
“주인공이 공주님이양.”
관심 없는 듯 자기들끼리 즐겁게 놀던 몽마들이 급조히 일어서서 이웨르 앞으로 달려갔다.
“뭔데, 뭔데!”
“당연히 지금은 비.밀.”
그때 뒤에서 이웨르를 따라온 잔바르가 혀를 찼다.
“이상한 소문 만들지 마라, 이웨르.”
“앗! 잔바르 님!”
“공주님이랑 인간 꼬마랑은 그런 사이 아니니까.”
“아… 뭐야, 아직 남자주인공 얘기 안 했는뎅.”
이웨르는 김이 새서 자리를 떠났지만, 남아있는 몽마들은 특유의 상상회로를 머릿속으로 가동했다.
“인간 꼬마? 설마…?”
“그 마왕성 쳐들어왔다는 용사? 사실이면 진짜 대박인데?”
“이거 마계 최고 스캔들, 젠장스캔들을 뛰어넘겠는데?”
잔바르는 잔해 하나를 집어서 몽마들에게 던졌다.
“젠잔 스캔들이라니!”
“젠장인데요. 잔바르 님 아니에요.”
“내가 그런 거에 속을 줄 아나?”
잔바르가 씩씩거리며 뒤를 돌아서자, 몽마들은 뻘쭘하게 몸을 긁적이며 말했다.
“인간계 갔다 오시더니 똑똑해지셨단 말이 사실인가 보네.”
하지만 그 뻘쭘함도 잠시, 몽마들은 잠시 멈췄던 회로를 다시 돌렸다.
“그럼 공주님 죽이러 온 용사랑 눈 맞은 거야?”
“세상에… 잘생겼나?”
“구경 갈 몽마!”
“내기할 몽마!”
“저요, 저요!”
* * *
벨라는 자신의 방이 있던 위치도 무너진 걸 보고 멋쩍은 듯 웃었다.
“여기가 내 방이었는데….”
그녀는 때때로 스스로 감당이 되지 않아, 자신의 방만큼은 결계를 쳐두었다.
정신을 놓아 전부 부숴버릴 때도 인간계에서 가지고 온 가구들만큼은 안전할 수 있게.
‘그렇게 힘을 쓴 것도 아닌 거 같은데.’
그녀는 잔해를 하나씩 거둬내며 망가진 가구들을 보자 마음이 착잡했다.
“아… 이거 화국에서 사 온 건데.”
아직 꽃이 피지 않은 ‘화망장’이란 선인장을 들었다.
잔해들 사이에 비켜 갔는지 다행히 화분이 깨지지 않고 멀쩡했다.
“그게 뭐예요?”
“선인장인데….”
뒤에서 키엘이 부르는 소리에 벨라는 화망장을 그에게 보여주려고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벨라가 늘 키엘을 봤던 위치에는 키엘의 허벅지가 있었다.
“…벨라, 어디 봐요?”
벨라는 선인장을 살짝 위로 올려 얼굴이 붉어진 키엘에게 보여줬다.
계속 키엘이 앉아있을 때는 그저 얼굴만 조금 변한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제법 키가 큰 게 현실적으로 와 닿았다.
“이거 너 좋아할 거 같았는데.”
“화국에서 사 온 선인장요?”
키엘은 선인장을 받아들었다.
“그게 꽃이 피면 간절히 바라는 게 이루어진대.”
“아….”
“키엘, 소원 엄청 좋아했잖아.”
벨라는 웃으면서 방 위에 있던 잔해들을 하나씩 치워나갔다.
“생일 때마다 소원 빌었던 거 기억나?”
“…네.”
장정 셋이 들어도 힘들 것 같은 잔해를 아무렇지도 않게 치우는 걸 보면, 잔해들이 솜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다.
“왕자님 되고 싶다고 했었잖아.”
“…….”
“그때 얼마나 웃겼는지. 황태자님이 왕자님 되고 싶다고 그래서.”
벨라는 손에 들고 있던 잔해들을 멀리 던져버리면서 소중한 가구들이 잘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고 보면 내가 네 소원은 거의 다 이뤄줬어. 그치?”
“…그러네요.”
키엘이 간절히 바라던 소원은 다 이루어졌다.
그리워하던 사람이 눈앞에 있었으니. 그리고 그녀의 심장이 키엘의 몸 안에서 뛰고 있다. 다시는 떨어지지 않게.
‘벨라의 소원은….’
그때 벨라가 잔해 하나를 들자, 갈색의 털이 움찔거렸다.
“힝… 공주님. 여기까지 무너졌어요!”
“이것도 못 빠져나와?”
“네! 전 사마귀보다 약해서 용사도 못 잡으니까요!”
“너, 울었니?”
벨라는 울먹거리는 푸르의 목소리를 듣자 황당했다. 나름 저 생각해줘서 돌아가 있으라고 한 건데.
“네! 전 그냥 여기서 콱 죽어버릴게요! 나약한 미련 곰탱이니까요!”
“그럼, 여기 용사 있으니까 네가 잡아.”
“정말요?”
그 소리를 듣자마자 푸르의 몸이 점점 커지더니 위에 깔렸던 잔해들을 전부 털어내었다.
“크와아앙!”
“아니, 그렇게까지 오바할 건….”
벨라가 말리기도 전에 푸르는 곧장 키엘에게로 뛰어갔다.
그 커다란 곰 발바닥을 높이 쳐들고 키엘을 치려는 순간.
낯선 용사에게서 익숙한 어린이 냄새를 맡았다.
“어…?”
키엘은 자신의 세 배 정도나 커진 푸르를 보자마자 푸르의 배꼽으로 자신의 얼굴을 파묻었다.
“푸르. 오랜만이야.”
“도련님!”
천천히 다시 작아진 푸르가 눈물을 글썽였다. 작아져도 키엘보다는 훨씬 컸다.
“도, 도련님은 여전히 작네요.”
“푸르가 커진 거야.”
어릴 때도 키엘 만큼 큰 곰 인형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곰이었다.
“전에는 잘도 도망쳤지?”
“그거 비밀이에요!”
그때 벨라가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오면서 입술을 씰룩였다.
“무슨 비밀인데.”
키엘이 푸르를 살짝 올려다보자, 푸르의 고개가 진동이 오듯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원작의 내용을 알고 있었기에 벨라가 그때 자신을 위한답시고 뭘 했는지 짐작이 갔다.
그는 푸르의 털에 얼굴을 묻으며 벨라를 보고 웃었다.
“옛날에 푸르가 과자 먹고 도망갔어요.”
“뭐… 그런 게 비밀이라고?”
“벨라가 아끼던 거라 그랬나 봐요.”
벨라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둘을 흘겨봤지만, 더 캐묻지 않고 비아냥거렸다.
“푸르, 덩칫값 좀 해. 그 정도는 나도 너그러이 용서한다고.”
그러면서 벨라는 쓰러진 가구들의 망가진 서랍을 손으로 잡아떼 그 안에 있는 붕대를 꺼냈다.
그동안 푸르는 울상을 지으면서 벨라에게 울부짖었다.
덩칫값 하라니. 용서한다니.
벨라에게 절대 없던 것들 아닌가.
“고, 공주님! 너무해!”
“저게 뭘 잘못 처먹었나….”
“옛날에 저 케이크 먹었다고 저 4등분 낸 적 있잖아요!”
“그건 키엘 생일 케이크였잖아! 비교할 걸 비교해!”
벨라가 커다란 돌을 아무리 건져내도 붕대 말고 키엘의 상처를 치료할 만한 약 같은 건 보이지가 않았다.
“아… 상처 덧날 텐데.”
벨라의 머리가 다시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이 방만이라도 성했다면 여기서 쉬면 되는데. 지금 당장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저, 키엘. 어쩌지. 네가 딱히 지낼 곳도 없고…. 애들이 빨리 안 고쳐서.”
벨라는 본인이 부쉈다는 얘기는 빼놓고 문제를 얘기했다.
“푸르. 일단 동산 위에 있는 별장 가서 깨끗하게 좀 해놔.”
“별장요?”
“응. 여기 가구들 좀 건져서 갖다 놓고. 당분간 키엘이랑 거기 있어야겠어. 키엘, 괜찮지?”
“설마 도련님 잡아먹으시게요?”
키엘과 벨라의 두 얼굴이 빨개졌다.
물론 둘 다 다른 의미의 상상을 하고 있었다.
키엘은 푸르의 말이 조금 화끈하게 느껴졌고.
벨라는 그녀가 가끔씩 정신을 놓을 때마다, 그곳에 인간들을 가둬놓고 장난쳤던 때를 떠올렸다.
그러다 죽은 인간들을 다른 마족들이 맛있게 처리하곤 했다.
“뭔 개소리야, 진짜! 빨리 가서 청소나 해!”
“전 곰이니까 곰소리예요!”
“야이…ㅆ….”
벨라는 평소와 같이 욕하려다가 키엘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가서 청소해. 지금 당장.”
손으로 별장을 가리키자 푸르가 신나서 네 발로 뛰어갔다.
여전히 얼굴이 빨개진 키엘이 용기를 내서 벨라에게 말했다.
마음을 먼저 얻지 못한다면….
“저… 잡아먹어도 돼요.”
“키엘, 나 맹세코 사람 잡아먹은 적 없어.”
“…….”
그때 잔바르가 다급하게 벨라를 찾았다.
“공주님, 흉물스러운 게 있어서 다들 못 치우고 있습니다.”
그러더니 잔바르는 키엘을 보고 큰 키에 조금 놀란 듯이 주춤했다. 아까는 앉아있던 모습을 봐서 여전히 꼬마인 줄 알았더니.
“흉물스러운 게 뭔데?”
“도련님이 들고 왔습니까? 성검 같은 거?”
마왕을 잡으러 온 용사에 오히려 더 어울리는 키엘의 모습에 잔바르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너 지금 키엘에게 협박하는 거야?”
“지금 저놈이 공주님을…!”
“그럼 마계 쳐들어오는 데 성검 정도는 들고 와야지.”
잔바르가 얼빠진 표정으로 벨라를 보았다.
그러다 벨라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잠깐만, 뭔가 이상한데?”
정말 마계에 있다 보니 머리가 돌이 되어버린 걸까. 벨라는 원작과 다른 이 상황이 어디서부터 틀어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왕인 자신을 죽이러 왔다가 벨라란걸 안 게 아닌가?
“키엘, 이웨르는 도대체 어디서 만난 거야?”
“몇 달 전에 만났어요. 리네라는 마법사가 있는데, 마왕을 소환한다고 해서 말리러 갔다가 이웨르를 봤어요.”
벨라는 침을 꿀꺽 삼키고 머리를 굴렸다.
“그럼 넌 올 때부터 내가 마계에 있는 걸 알았단 거야?”
“…네.”
키엘이 조심스레 벨라의 눈치를 보면서 대답했다.
* * *
마계로 들어가기 전.
키엘의 전략을 들은 젠킨스는 발 벗고 나서서 만류했다.
“그런 짓을 했다가 아가씨가 미쳐버리면 어떡합니까?”
“아앙. 나도 미쳐버리는 거 보고 싶당. 선대 마왕님이 눈 돌아간 때가 엊그제 같은뎅.”
“푸르씨에게 들은 바로 생각해보면, 아가씨가 정신을 놓으면 도련님이라고 무사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키엘은 골똘히 생각했다. 마계에 있을수록 생각은 단순해지고, 한 가지에 얽매이게 된다고 했다.
- “혹시, 운명이 바뀌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 “내 목숨이 걸린 일인걸.”
키엘은 소설의 필사본이 담겨있는 서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방법밖에 없어.”
키엘의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죽고 싶으면, 그냥 다 같이 죽자는 거나 다름없으니.
‘제발….’
벨라가 늘 그렇듯, 그냥 져주길 원했다.
젠킨스도 그 말에는 동의하는지 키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도련님, 그러면 어떻게든 아가씨가 흥분하지 않게 하세요.”
“젠킨스….”
젠킨스는 또 복종 서약을 어긴 대가로 목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멍청이.”
그는 아파하면서도 끝까지 벨라 욕을 이어나갔다.
“아가씨 성격이 아주 되바라진 거 같으니… 조심하세요.”
얼마나 시달렸는지 알기에 키엘은 무시하고 리네에게 물었다.
“혹시 모르니까, 벨라가 쓰는 그 무전마법 같은 걸 우리도 쓸 수 있을까?”
“일단 원리만 알면?”
리네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 * *
키엘은 벨라의 눈치를 보며 그녀의 기분을 살폈다.
벨라는 중얼거리면서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아니야… 어차피 사랑 얘기니까 그거만 되면 뭐 상관없겠지만….”
지난 4년을 이곳에 틀어박혀 있었는데도 바뀔 정도면, 얼마나 바뀌었을지 짐작하려니 점점 불안해졌다.
벨라는 혼잣말을 하며 잔해 사이를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아니지, 로잔느랑 꽁냥할 시간에 날 찾은 거면….”
이제 손톱이 아니라 손가락 전체를 이로 씹기 시작했다. 불안함에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았다.
‘리네라면… 쌍둥이 호위일 텐데. 몇 달 전이면 로잔느랑 헤어지고 그리워할 때인가?’
확인해야 하는데 소설의 필사본은 본인이 태워버렸고. 벨라는 눈치를 보며 뒤를 돌아 핸드폰을 빠르게 확인했다.
‘분명 둘이 헤어진 화가 50화 정도였는데… 그 뒤로….’
소설은 그저 서로 그리워하는 내용밖에 없었다.
“문제없는 거 맞겠지…?”
불안함에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조차 벌벌 떨고 있었다.
그때 키엘이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벨라는 하마터면 핸드폰을 놓칠 뻔했다.
“벨라, 인간계에서 친구도 많이 생겼어요. 다음에 소개해줄게요.”
“어?”
“벨라가 나 어릴 때 친구 하라고 등 떠민 애 기억나요? 이름이 마이유였는데.”
“응. 기억나지.”
“우연히 같이 여행하게 되었는데, 그 애도 소개해줄게요.”
“그… 다른 애는 없어?”
그러자 키엘이 점점 다가왔다. 벨라는 한층 커진 키엘을 올려다보며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슬그머니 넣었다.
키엘은 벨라가 물어뜯던 손을 어루만지며 예쁘게 미소 지었다.
“리오도 있고… 로잔느란 애도 있어요.”
벨라는 키엘의 얼굴이 붉어지고, 그의 심장 소리가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다행이다. 딱히 변한 건 없나 보네.’
키엘은 벨라의 손을 자신의 입에 갖다 대 짧게 입맞춤했다.
“그러니 불안해하지 마요.”
“…그, 그래.”
어쩐지 키엘의 페이스에 말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벨라는 다른 한 손으로 까치발을 들어 키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특하네.”
벨라는 다정하게 말을 건네지만, 목소리와 그를 쓰다듬는 손만큼은 여전히 떨고 있었다.
“성검은 안 치워주실 겁니까?”
“일단… 키엘 치료부터 하고.”
상상만 해도 끔찍한 미래는 절대 오지 않을 거라고.
벨라는 키엘이 잡은 손을 꽉 쥐고 억지로 웃었다.
키엘도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그 웃음에 화답하고 있었다.
‘…그 책대로 연애도 하길 바랐던 거구나.’
그 빌어먹을 책대로.
- “도련님은 전략적으로 가야 해용!”
이웨르의 말은 어린 동생으로만 보는 그를 남자로 볼 수 있는 전략이었지만.
키엘은 정말 이 사랑에 전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 * *
마계로 오기 전 지식으로만 알았던 키엘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점점 실감할 수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딱 하나만은 명확했다.
어떤 시인의 시에서 풀꽃은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데, 이놈의 마족들은 자세히 볼수록 벨라의 화만 돋운다는 걸.
한 시간, 아니 10분에 한 번씩 벨라는 마족들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야. 내가 발 많은 새끼는 내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랬지.”
“하지만 다들 죽어서 치울 애들이….”
지네들이 와서 벨라의 방 근처를 수리하고 있자, 벨라는 지네의 두 발만 빼고 전부 잘라버렸다.
“내 근처에 올 거면 발 두 개만 달고 와.”
키엘은 조금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족들의 반응은 전혀 아니었다.
“세상에… 공주님이 우릴 안 죽이고 다리만 잘라주셨어!”
그 후로도 하나부터 열까지 마족들은 벨라의 성질을 건드렸다.
“야… 내 가구에 진액 묻히지 말랬지.”
“힘써서 안 흘리도록 하겠습니다!”
“힘주면 더 나오잖아!”
별장으로 가구를 옮기고 있는 마족들부터.
“공주님, 이 인간 죽으면 저희가 먹어도 돼요?”
“내가 양치하고 입 벌리랬지?”
걸어가는 동안 키엘을 보며 수군거리는 마족들도.
“어머, 이 미친 새끼들이 또 피로 청소했네?”
“감사합니다!”
“…….”
“우리보고 미친 새끼래!”
별장을 청소했다는 마족들까지.
벨라는 그때마다 소환진을 꺼내 무전을 젠킨스에게 연결했다.
“젠킨스….”
“1시간 간격으로 물어보지 마세요, 제발.”
그제야 키엘은 왜 그렇게 벨라가 젠킨스를, 젠킨스가 리네를 독촉했는지 알 수 있었다.
벨라가 얼마나 참고 참는지 키엘의 눈에 훤히 보였다.
키엘은 벨라가 잡은 손을 달래듯이 만져주며 젠킨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 “도련님, 어쨌든 아가씨가 흥분하지 않게 하세요.”
그러면 벨라는 키엘을 쳐다보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키엘. 미안해, 여기가 좀 살기가 힘들어서…. 당분간 여기서 지내도 괜찮지?”
“응. 걱정 마요. 재밌어요.”
“재밌긴…. 하루만 더 지내봐. 진짜 여긴 지옥이야. 아, 지옥 맞지.”
우여곡절 끝에 정리된 별장 안.
마계라고 해서 흉물스러운 것만 있을 줄 알았는데, 저택의 벨라의 방과 비슷해 보였다.
“아, 이제 한시름 놨네. 키엘, 당분간 여기서 지내도 괜찮지?”
“네.”
“하아. 할 일이 태산이네.”
“미안해요.”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벨라는 키엘을 침대 끄트머리에 앉혀놓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푸르가 소파 들고 올 때까지만 여기 앉아서 쉬어.”
그리고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하더니 별장의 문고리를 잡았다.
“여기 결계 좀 치고 올게.”
그동안 키엘은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전체적인 별장의 분위기를 둘러봤다.
대부분이 검은색에 붉은색으로 포인트들이 있는 가구들이었다.
‘역시 이게 벨라 취향이구나.’
게다가 인간계에서 꽤 비싼 돈을 주고 온 가구들이 눈에 돋보였다.
‘황궁으로 돌아가면 예산을 좀 더 받아야겠어.’
그는 쓸데없는 장신구까지도 눈여겨보고 있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벨라가 더 지친 기색으로 들어왔다.
“하… xxxx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벨라의 손으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죽여도 죽여도 또 나타나는 바퀴벌레 새끼들….”
붉은 카펫 위로 떨어지는 피가 표나지도 않았다.
키엘은 벨라의 취향이 붉은색이 아니라, 붉은색으로 치장할 수밖에 없는 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별장의 문을 누군가 두 번 두드리더니 그 문틈 사이로 촉수 같은 손이 바구니를 하나 내밀었다.
대장군 중 하나인 벨제브였다.
이 녀석은 벨라의 말로 빌리자면 외계인이었는데 몸은 인간이나 얼굴은 문어였고 온몸에 촉수 같은 게 하나씩 달린 놈이었다.
“그래, 네 새끼는 말 하나는 잘 들어서 좋네.”
꼴 보기 싫다고 해서 벨라 앞에서는 항상 이렇게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게 장점이었다.
벨라는 그가 넘겨준 바구니를 보고 약초를 뒤적거렸다.
“너 아무거나 뜯어왔어?”
“제가 채소랑은 안 친해서….”
“Xx 이럴 거면 왜 내가 너를 시켜?”
“죄송합니다.”
약초 뜯어오랬더니, 마계에 있는 풀이란 풀은 다 뜯어온 모양이었다. 벨라는 그중 몇 개를 추리면서 한탄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놈의 마계 구석엔 머리 쓰는 놈이 한 마리도 없어, 한 마리도.”
절구에 넣어서 하나씩 다 으깨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지, 점점 약초를 찧는 소리가 거세게 들렸다.
“내가 여기 1인잔데!”
“벨라…?”
“쓸모없는 새끼들, 다 죽여버리든가 해야지.”
키엘은 젠킨스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입을 다물었다.
- “아가씨 패악질이 날로 갈수록 심한 거 모르죠?”
다 빻은 약초를 한데 모으자 벨라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고 일어섰다.
가뜩이나 예민해져 있는 벨라는 키엘을 향해 상당히 고압적으로 말했다.
“키엘, 벗어.”
그때 키엘의 심장이 철컹하고 내려앉았다.
늘 환하게 웃어주는 벨라가 좋았는데.
- “나도 미쳐버리는 거 보고 싶당.”
무서울 정도로 화가 나 있는 모습마저 그를 미치게 한다.
지금 당장 엎드려서 그녀의 발등에 입이라도 맞추고 싶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