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가 죽여야 할 최종 악녀가 저랍니다-8화 (8/25)

8

1163년 3월.

벨라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가 다가왔다.

바로 키엘이 여정을 떠나는 때.

“절대 키엘에게 아는 척해서는 안 돼. 그 누구라도.”

벨라는 수없이 신신당부했다. 납치할 계획을 세운 순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볼 때마다 한 말이었다.

“절대 키엘에게 우리의 존재를 들켜서도 안 되고.”

다들 알겠다고 하지만, 벨라는 불안한 마음이 들어 엄포했다.

“누구 하나라도 들키는 날이 온다면 마계 역사상 가장 참신하고 죽고 싶을 만큼의 형벌을 줄 거야.”

“…알겠어요, 다들 알 거예요. 그만 하세요, 아가씨.”

“젠. 내가 너는 믿지만 적어도 잔바르랑 푸르는 못 믿겠어.”

그도 벨라의 말에 공감했기에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 10년을 말해도 제멋대로 행동할 마족들이었다.

“젠, 내가 너를 제일 믿으니까. 너에게 제일 중요한 임무를 맡길게.”

“……제일 힘든 거 맡기시는 거 아닙니까?”

“황궁에서부터 키엘을 멀리서 지켜봐 줘.”

심드렁하게 듣던 젠킨스가 목을 가다듬고 벨라에게 다시 물었다.

“제가요?”

“왜?”

“아, 아뇨. 도련님 일이라서 아가씨가 직접 하실 줄… 알았죠.”

벨라도 키엘이 얼마나 컸는지 지켜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녀는 점점 투명해지는 자신의 손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마계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이었다.

진작에 소환되어야 했겠지만, 벨라는 온 힘을 들여서 그 소환을 막아내고 있었다.

‘어차피 만날 수 없는데, 미련만 생길 거야.’

벨라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토닥이며 마지막으로 점검했던 걸, 또 한 번 더 점검했다.

“자. 이제 실수하면 안 돼.”

“네! 아가씨!”

“푸르. 털 염색 다 빠졌잖아. 다시 해.”

* * *

언제 이 작전이 시작될지 몰랐기에, 다들 노심초사하며 각자의 위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대기한 지 며칠 후.

젠킨스에게서 드디어 전서구가 도착했다.

[출발했습니다.]

벨라는 언제든지 사고가 나면 달려가기 위해 모든 지점의 중점인 숲 한가운데에 작전본부를 세워두고 거기서 대기하고 있었다.

‘제발 끝날 때까지 내가 소환되지만 않기를.’

벨라는 전망 좋은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서 여러 도시를 한눈에 보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좋아. 시작해보자.”

소환진을 만들어 그들만의 가상공간에 마법 도구의 반대편을 소환했다.

벨라는 여러 차례 연습한 무전기-마땅한 별칭이 없어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에 소리를 냈다.

“아. 아. 다들 들리나?”

“꺄앙 너무 신나용!”

“치지지지지지직.”

“들리네요.”

“저도 들려요!”

‘잔바르….’

도대체 몇 번이나 연습했는데 아직도 제대로 할 줄 몰랐다.

“들립니다.”

잔바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벨라가 지시했다.

한 손에는 소설 필사본과 한 손에는 무전기를 들고.

“자, 이제부터 똑바로 정신 차려. 한 놈이라도 멍청한 짓 했다가는 다 같이 골로 가는 거야.”

“네!”

“푸르. 넌 지금부터 말하면 안 돼.”

“네!”

“말하지 마라니까.”

“네!”

벨라는 벌써 복장이 터졌다.

푸르는 옛날 산적들이 있던 터에 곰 인형으로 위장해서 다른 인형들과 섞여 있었다.

산적들 사는 곳에 웬 인형이겠느냐마는, 누군가 하나는 그 안에서 직접 상황을 감시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푸르의 털도 염색을 시키고, 일부러 귀여운 장신구까지 달아서 키엘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말.하.지.말.라.고.”

“스윽.”

‘예’는 한번, ‘아니요’는 두 번 쓱쓱 거리는 걸로 대답을 대신 받았다.

‘잘해야 할 텐데.’

벨라는 각자 위치를 다시 한번 더 확인했다.

“젠. 너 지금 어디야?”

“도련님의 옆쪽에서 계속 따라가고 있습니다.”

“들키면 안 돼.”

“네.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다 벨라는 무전을 꼼지락거리다 목을 가다듬었다.

“젠.”

“네.”

벨라는 몇 번이고 입을 뗐다 다물기를 반복하다가 마른 입술을 촉촉하게 적셨다.

“키엘은 잘 있어?”

무전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잡음이 싹 사라지고 적막이 흘렀다.

벨라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우리가 만날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렸을까.

혹여나 저택 식구들을 그리워 힘들어하진 않았을지.

‘저택에 찾아오거나 그러진 않았겠지?’

이미 4년이란 시간이 흘렀는데도, 과거에 사로잡혀 있을까 봐 걱정이었고.

“내 말 안 들려?”

“키가 많이 크셨네요.”

벨라는 그 말에 그만 울컥했다.

보이지 않지만, 이 소리 너머로 부쩍 컸을 키엘의 모습이 떠올랐다. 더 묻고 싶은데 목이 너무 멨다.

“아가씨보다도 더 크겠어요.”

“…….”

“매우 씩씩하시네요. 기분도 좋아 보이시고.”

벨라는 애써 손으로 얼굴에 부채질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좋아 보여?”

“…네. 웃으시네요.”

“훌쩍.”

그때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벨라는 떨떠름하게 무전을 다시 쳐다봤다.

“힝… 도련님 보고 싶어용.”

“저도 너무 보고 싶어요!”

벨라는 작별 인사라도 했지, 저택 식구들은 난데없이 키엘이 없어진 셈이었다. 그간 정이 많이 들었을 텐데, 아쉬울 만도 하지.

“얘들아, 뚝.”

하지만 지금은 일해야 할 때란다.

그때 젠킨스에게서 다시 무전이 들어왔다.

“아가씨, 곧 데이저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잔바르는 납치 담당이었다.

“좋아. 잔바르, 용병들보고 로잔느를 납치하라고 해.”

“네. 그리고 뭐 할까요?”

“그냥 옆에서 감시만 해.”

잔바르는 괜히 나섰다가 일을 다 망가뜨릴 요인이 가장 큰 인물이었다. 그러나 납치할 용병들의 감시역으로는 제격이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잔바르가 로잔느를 납치했다는 얘기를 전달했다.

“좋아. 그럼 잔바르는 작전 구역 1번으로 가고, 젠킨스는 여관 확인해.”

“네.”

이제 키엘이 여관에 도착하면, 데이저 인근의 산적들 무리가 성물을 훔친 적이 있다는 정보를 흘리면 되었다.

이건 이웨르가 여러 사람을 홀려 말하게 하기로 했다.

‘성물도 제대로 있는지 확인했으니까.’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워낙 악명 높은 놈들이라 무리가 전멸되었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덕분에 벨라가 건드릴 수 없는 성물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렇게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잔바르입니다. 작전 구역 1번에 가둬놨습니다.”

“푸르는 로잔느 확인했어?”

“스윽.”

지금까지는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여관 들어가는 거 확인했습니다.”

“좋아. 이웨르, 출동해. 젠, 어느 여관이야?”

“…….”

“젠. 어느 여관이냐고.”

혹시 문제라도 생긴 걸까. 벨라는 다급하게 젠을 다그쳤다.

“여관 이름 ‘붉은 장미’. 예전에 저희가 여름 축제 갔을 때 묵었던 여관입니다.”

또다시 무전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쓱쓱쓱.”

여름 축제에 함께 가지 못한 푸르만 쓱싹거리며 시끄럽게 할 뿐이었다.

벨라는 멀리 보이는 데이저로 고개를 돌렸다.

‘여름 축제….’

페이스 페인팅도 하고, 옷도 비슷하게 맞춰서 입고 돌아다니고.

사람들이랑 다 같이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풍등도 날렸었다.

“그때 참 재밌었는데.”

그때 해맑게 웃던 키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때 귀여운 거 싫다고 삐치는 거도 진짜 귀여웠는데.’

벨라의 입꼬리가 흐뭇하게 올라갔다. 젠킨스가 보고 있는 키엘은 얼마나 컸을까.

“맞아용. 어떤 두 분은 진하게 입술도 박치기 하시공.”

“흠흠.”

“이웨르 씨, 일하세요.”

이후로는 작전대로 잘 흘러갔다.

이웨르가 사람들을 홀려 정보를 말했고, 키엘 일행은 다음 날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고 했다.

“그나저나 도련님 진짜 크셨네용.”

벨라는 임무가 끝난 이웨르가 혹시라도 키엘에게 접근할까 봐 급하게 소환부터 했다.

이웨르는 정말 그럴 작정이었는지, 아쉬운 얼굴이 가득해 보였다.

“너네… 진짜 키엘에게 접근하기만 해봐.”

“힝, 왜 안 된다는 건지 모르겠넹.”

벨라는 이웨르를 노려보고 다시 집중했다.

‘괜히 원작 망가뜨리지 말고 좀 가만히 있으라고.’

* * *

다음 날 여관에서 나온 키엘 일행은 옛 산적의 터로 향했다.

미리 배치해둔 용병이 때맞춰 길이라도 알려주듯 습격했고, 젠킨스는 예의주시하다 대답했다.

“지금 실력으로는 15명 정도도 거뜬할 거 같습니다.”

그리고 로잔느를 납치한 곳에 배치될 인원도 파악했다.

벨라는 필사본을 다시 한번 더 읽으며 이 소설의 첫 장을 기다렸다.

“자. 이제부터 중요해. 정신 똑바로 차려. 특히 푸르.”

“쓱.”

15명의 산적을 물리치고 나면, 키엘이 납치된 사람들을 풀어주며 성물을 찾게 된다.

“용병들 전부 쓰러졌습니다.”

“젠. 넌 거기서 바로 빠져나와. 들키기 전에.”

“네.”

“소환 필요해?”

“제 발로 가겠습니다.”

로잔느가 있는 방은 바로 성물이 있는 방이었다. 필연적으로 들어가 볼 수밖에 없는 방.

예전에 키엘이 그곳에 갇혔던 적이 있어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성물에 손을 댈 수가 없기에 어쩔 수 없었다.

자칫 벨라가 만졌다가, 힘을 잃어 마계로 소환될 수도 있고.

벨라는 어느새 팔까지 투명해졌다.

거부할 수 없는 역할이 매정하게만 보였다.

“푸르, 로잔느가 문 앞에서 기웃거리고 있어?”

“쓱.”

다행인지 원작대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원작에서 로잔느는 누군가 구해주러 온다는 걸 알고 팔과 다리가 묶인 채로 문 앞에서 기웃거린다.

문이 열리면 얼떨결에 키엘에게 안기고 키스하게 되는 이야기.

‘그리고 키스를 책임지라며 여행에 참여하지.’

그 뒤는 우당탕 알아서 할 일이고, 벨라는 그 부분만 확인하면 되었다.

로잔느를 납치했어야 할 산적을 벨라가 다 몰살시켰으니까.

“쓱.”

“문이 열렸어?”

“쓱.”

쿵. 쿵. 심장이 뛰었다. 이 소설의 첫 장면이 제발 원작대로 이루어졌기를.

“로잔느가 안겼어?”

“쓱.”

“…….”

차마 다음 질문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벨라가 물었다.

“키스했어?”

“쓱.”

점점 투명해지는 심장이 더 거세지고 속에서 소용돌이가 요동치는 것 같았다.

벨라는 한 번 더 물었다.

“키스했어?”

“쓱.”

키엘이 ‘붉은 장미’ 여관 문을 열자마자, 그는 후회했다.

미칠 것 같았다. 괜히 이곳으로 왔다는 생각을 수없이 반복했다.

‘보고 싶어.’

얼마나 그리웠던 걸까. 환영까지 보이더니, 이제는 익숙한 향이 코끝을 찔렀다.

언제부터인가 저택에 자주 맡았던 이웨르의 피 냄새가 여관 안을 꽉 채우는 것 같았다.

“일단 밥이라도 먹을래?”

키엘은 주저앉고 싶은 걸 겨우 참아 식탁 위에 앉았다.

‘이러다 미치는 걸까?‘

언젠가 상사병으로 죽은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키엘은 정신을 가다듬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일단 리오는 술집에서 조사해보고, 리네는 용병단에 물어보자. 난….”

그때 여관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키엘의 말을 묻었다.

“그러니까 그놈들이 성물을 다 갖고 있었다니까.”

“그 테벨산 중턱에 본거지 있는 놈들?”

“그래. 내 생각엔 그놈들이 왠지 사제들을 습격한 것 같아.”

운이 좋은 건지, 조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우연히 인근의 산적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좀 이상한데….’

마치 키엘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나오는 대화.

‘함정일까?‘

키엘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쌍둥이들을 쳐다봤다. 그건 쌍둥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내일 확인해 보자.”

최대한 로한을 따돌리려면, 저 정보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키엘 일행은 산적의 본거지로 향했다.

“그런데, 사제들을 털만큼 출중한 실력은 아닌 거 같아 보이는데.”

리네가 마법으로 한 명씩 쓰러뜨리면서 의아해했다.

최근에는 활동을 잘 하지 않는 산적이라고 하지만, 실력이 너무 밑바닥이었다.

벨라가 고용한 용병들이 일부러 져주고 있는 거라는 사실은 예상하지도 못했기에, 오히려 더 긴장했다.

키엘은 오래전 벨라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긴장이 풀렸을 때 뒤에서 치려는 걸지도 몰라. 더 조심해야 해.”

하지만 그들이 산적의 본거지에 도착했을 때, 쌍둥이들이 제일 먼저 허탈하게 웃었다.

“원래… 이 무리가 15명 정도밖에 안 돼?”

“확실히 이상하네.”

키엘은 그들을 가볍게 제압하고, 성물을 찾아다녔다. 모든 일이 너무 순조롭고, 수월했다.

‘이렇게 일이 쉽게 풀린다고?‘

낡은 건물의 문을 열자, 납치된 아이들이 묶여 있는 채 ‘살려주세요’라며 발버둥 치고 있었다.

리오는 제일 먼저 달려가 아이들을 풀어주며 안타깝게 보고 있지만, 키엘은 여전히 이상했다.

‘납치된 애들 같지가 않아.’

그가 경험했기에 그 공포가 어떤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구해주러 온 사람을 발견했을 때의 감정도 잘 알았고.

하지만 이 아이들은 마치 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일단 다른 곳도 확인해보자.’

키엘은 다른 집의 문을 하나씩 열어보며 납치된 아이들이나 성물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때였다.

이상하게 낯이 익은 기분이 들었다.

커다란 나무가 오른쪽에 우뚝 서 있고, 왼쪽으로는 꽤 큰 공터가 있었다. 그리고 그 공터에는 커다란 싱크홀이 검게 자리하고 있었다.

‘아… 여기….’

키엘은 자신의 앞에 있는 건물로 천천히 걸어갔다.

문 옆의 작은 나무통. 바로 저 통 옆에서 벽에 기대어 정신이 점점 들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벨라.’

그때 이 자리에서 그가 봤던 벨라를 떠올리며, 뒤를 돌았다.

흐릿하던 기억 속에서 벨라가 등을 돌린 채 멀리 서 있었다.

“…벨라.”

너무 부르고 싶었던 그 이름을, 그때처럼 불러보지만, 그녀는 그때처럼 달려오지 않았다.

“키엘. 거기도 확인해 봤어?”

멀리서 리네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자 키엘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리고 키엘이 문고리에 손을 잡았다.

그는 몰랐지만, 이 소설이 시작되는 부분이었다.

* * *

푸르는 곰이라는 이유로 모든 임무에 배제되었다. 여행을 갈 때에도 숨어 있는 게 그의 임무였다.

그래서 이 임무가 너무나 소중했다.

약 하루의 시간을 절대 움직이지 않고 있자니 곤혹이었지만, 첫 임무였기 때문에 꾹꾹 참고 있었다.

하지만 기다리는 것보다 더 힘든 게 있었으니.

‘맛있어 보인다.’

푸르의 눈앞에 보이는 ‘로잔느’라는 분홍색 머리의 여자아이가 그에게는 딸기 디저트처럼 아주 맛있어 보였다.

그녀는 굉장히 천진난만해 보였다.

두 팔과 다리가 묶여 있는데도 깡충거리면서 갇힌 방 안에서 탈출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아가씨. 좀 가만히 있으세요. 그러다가 들키면 더 큰일 나요.”

로잔느의 옆에 하녀 마이유가 초조해하며 그녀를 말렸지만, 로잔느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사람 말소리가 들리자, 로잔느가 문 앞으로 콩콩 뛰어가 틈새로 얼굴을 바짝 붙였다.

“와. 누가 왔나 봐.”

“위험해요, 우리 편이 아닐지도 모르잖아요.”

“아냐. 보니까 아이들 풀어주는 거 같아.”

그 말에 마이유는 긴장한 어깨를 축 내렸다.

“휴, 드디어 돌아갈 수 있겠네요.”

로잔느는 자신의 귀를 문에 기대고 구출될 때를 기다렸다.

“있잖아, 여기 빠져나가서 좀 놀다가 돌아가면 어때?”

“무슨 소리예요.”

“매번 저택에만 갇혀 있는 거 싫은걸.”

“아가씨는 연약해서 안 돼요.”

“나 엄청나게 튼튼하다고.”

“그런 분이 어릴 때 고양이한테 지셨어요?”

그때 푸르의 귀로 벨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 푸르, 로잔느가 문 앞에서 기웃거리고 있어?

푸르는 자신의 팔을 살짝 움직여 ‘쓱‘ 소리를 냈다. 이제 저 문이 열린 후에 한 번 더 신호를 보내면 되었다.

‘두근거려요! 제 첫 임무라고요!‘

덜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푸르의 ‘공주님 보좌’ 인생의 시발점을 알렸다.

“쓱.”

“문이 열렸어?”

“쓱.”

그러나.

푸르는 문 너머에 있는 소년을 보자마자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잊을 정도로 놀랐다.

동공이 커지고, 작은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도련님?’

그리고 이 상황을 전혀 모르는 벨라가 푸르에게 물었다.

- 로잔느가 안겼어?

* * *

키엘은 여기까지 오게 한 모든 것들이 의심스러웠기에 긴장을 풀지 않고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안에서 뭔가 자신을 향해 튀어나오길래 키엘은 바로 옆으로 피했다.

잔바르와 훈련하면서 반사신경 하나는 월등히 남달랐다.

“꺄아악.”

두 손과 발이 묶여 있던 로잔느가 키엘의 옆으로 쿵 하고 쓰러졌다.

그 쿵 하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미안할 지경이었다.

‘어…. 잡아주기라도 할 걸 그랬나.’

하지만 무슨 상관이람.

키엘은 바로 안으로 들어가 성물을 확인하려 했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그때 푸르의 귀에 벨라가 묻고 있었다.

- 로잔느가 안겼어?

푸르가 ‘쓰윽’하고 대답을 하던 중, 맞은 편의 키엘과 눈이 마주쳤다.

“푸…르?”

키엘은 눈앞에 푸르와 너무 똑같이 생긴 곰 인형을 보고 천천히 푸르에게 다가갔다.

당연히 푸르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니요’라고 하려면 두 번을 쓱싹거려야 하는데.

“푸르야?”

푸르는 속으로 애가 타기 시작했다.

‘드… 들켰나요?‘

그때 넘어졌던 로잔느가 뒤에서 빼액빼액 소리를 질렀다.

“이봐요! 나 좀 풀어줘요!”

키엘은 가만히 푸르를 닮은 곰 인형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진짜 미쳤나 봐.’

데이저에 도착했을 때부터, 그리움에 미쳐가는 게 느껴졌다.

‘이런 곳에 푸르가 있을 리가 없지.’

키엘은 스스로 미칠 것만 같아서 눈을 감고 뒤를 돌아섰다.

푸르는 키엘의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침을 꿀꺽 삼켰다.

‘휴… 다행이다. 넘어갔나 봐.’

때마침 푸르에게 벨라가 물었다.

- 키스했어?

“쓰윽….”

“푸르.”

분명 키엘이 뒤를 돌아보고 있지만, 푸르의 이름을 부르는 걸 듣고 푸르는 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미치겠어요!’

키엘은 뒤를 다시 돌았다. 그저 딱 한 번만 더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털 색깔이… 많이 달라.’

키엘이 조심스럽게 푸르의 털을 쳐다봤다.

“이봐요! 좀 도와달라고요!”

뒤에서 로잔느가 외치지만 하나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로잔느의 외침은 푸르의 귀에도 마찬가지로 들리지 않았다. 벨라의 똑같은 질문만이 푸르의 귀를 파고들었다.

- 키스했어?

푸르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예 움직일 수 없으니 벨라가 비상사태라는 걸 알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키엘은 푸르의 겨드랑이에 살짝 손을 넣었다. 푸르가 벨라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해 작은 무전기를 달아놓은 곳.

그렇게 한 번의 ‘쓰윽’이라는 대답이 벨라에게 전해졌다. 푸르도 돌처럼 굳어 생각도 굳었기에, 그 사실을 몰랐다.

푸르는 오직 벨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누구 하나라도 들키는 날이 온다면 마계 역사상 가장 참신하고 죽고 싶을 만큼의 형벌을 줄 거야.”

푸르는 자신의 약점을 파고드는 키엘의 손을 애써 참고 있었다. 떨리지만 떨리지도 않는 척. 온몸이 긴장되었다.

‘마족 인생 최고의 위기예요!’

그때, 먹음직스러운 로잔느가 키엘에게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저.기.요. 좀 풀어달라고요!”

“푸르. 맞지?”

“저.기.요!”

키엘은 계속해서 뒤에서 들리는 로잔느의 앙칼진 목소리가 너무 싫었다.

그는 한껏 짜증 난 얼굴로 뒤를 돌아 로잔느에게 가까이 갔다.

“내가 왜 풀어줘야 해?”

“…좀 풀어주세요.”

로잔느가 고개를 돌려 키엘을 올려다봤다.

키엘은 그녀의 얼굴을 보자 심장이 멈춘 것만 같았다.

‘세상에…‘

로잔느는 넘어질 때 얼굴로 넘어졌는지, 흐르는 코피로 얼굴이 피가 범벅되어 있었다.

어쩐지 넘어질 때 소리가 폭발음처럼 크더니.

‘귀신인 줄 알았네.’

키엘은 불쌍한 마음에 몸을 숙여 로잔느의 손과 발을 풀었다.

“됐지?”

“고마워요. 기왕이면 저 좀 잡아줬으면 좋았겠지만.”

로잔느는 코피를 팔로 닦으며 키엘을 원망 어린 눈으로 살짝 노려봤다.

키엘은 뻔뻔하게 말하는 이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야. 자기가 넘어져 놓고.’

완전히 문밖으로 나가 로잔느를 풀어주는 키엘을 보고, 푸르는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벨라와의 무전은 어느새 끊겨있었고, 이제는 실수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다행이에요. 전 살았나 봐요.’

긴장되어 숨도 참던 푸르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손으로 쿵쿵거리던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았다.

‘저 잘했죠? 공주님. 안 들켰어요!‘

모든 상황이 그렇게 정리되는 것 같았다.

“저 곰 인형… 움직…였어요.”

“뭐?”

그랬다.

푸르는 키엘만 신경 쓰다가 방 안에 있던 마이유는 생각지도 못하고 움직인 것이었다.

키엘이 뒤를 돌아서 마이유에게 물었다.

“움직였다고?”

“네…에…. 보세요, 저 손.”

키엘이 푸르를 보자 손이 가슴에 있는 게 보였다.

분명히 차렷 자세였는데!

“푸르!”

“저 푸르 아니에요! 푸딩이에요!”

“꺄아악.”

갑작스러운 푸르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로잔느가 또다시 넘어지고, 그 바람에 뒤에 있던 키엘까지 뒤로 넘어졌다.

“뭐야, 비켜.”

키엘은 이 거추장스러운 여자의 코피가 자신의 옷에 묻은 것도 짜증이 났다.

“푸르, 왜 거짓말해?”

키엘이 푸르에게 묻자 푸르는 도망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했는지 네발로 문을 향해 뛰어들었다.

마치 장애물을 뛰어넘듯 그들을 넘어서고, 착지하자마자 발에 불이 날 때까지 뛰었다.

“푸르!”

키엘은 자기 위에 쓰러진 로잔느를 내동댕이치듯이 밀어내고 푸르를 쫓았다.

“왜 도망가?”

“도련님! 못 본 걸로 해주세요!”

한참을 달렸는데도 거리는 좁혀지지 않고 점점 멀어졌다.

당연히 곰의 속도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키엘은 그게 마치 동물왕국의 벨라와 인간인 자신의 관계인 것만 같아서 화가 났다.

“푸르! 왜 도망가는 거야! 왜!”

그때 푸르가 가지고 있던 무전에서 소환진이 생겨나더니, 끊겼던 무전이 다시 연결되었다.

키엘은 젖먹던 힘까지 다해 달려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푸르의 귀로 벨라의 소리가 들렸다.

- 푸르. 소환해 줘?

“네!”

- 근처에 사람 없지?

“네!”

- 너… 뛰고 있어? 왜 이렇게 헐떡여?

그 말을 듣자마자 푸르는 뛰는 걸 멈췄다.

다행히 키엘은 꽤 멀리서 뛰어오고 있었다.

“아, 아가씨께서 소환 안 해주실 줄 알고 뛰어가고 있었어요.”

- 참나. 너 그러다 사냥꾼한테 잡혀.

키엘은 푸르가 벨라와 이야기한다고 눈치챘다.

‘벨라… 벨라야.’

얼굴은 빨갛게 달궈지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조금만 더 뛰면 잡을 수 있었다.

“벨라….”

“아가씨! 사냥꾼이에요! 저 빨리 소환 좀 해주세요!”

“아오, 시끄러워. 기다려.”

푸르의 발밑으로 소환진이 생겨났다. 키엘은 있는 힘껏 손을 뻗었다.

‘분명히… 벨라야.’

하지만 그 거리는 키엘이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거리라는 현실만 상기시킬 뿐이었다.

푸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고, 그 남은 자리 위에 키엘은 거친 숨을 몰아 내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왜 도망가는 거야.’

하지만 덕분에 키엘은 데이저에 오면서부터 느꼈던 그 시선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여관에서 때마침 필요한 정보를 얻은 우연까지.

이상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에 벨라의 흔적이 느껴졌다. 그녀가 도와주고 있다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왜…?‘

왜 못 본 척을 해야 하는 걸까.

빨리 그 저택으로 가고 싶었다. 로한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쪽으로 가야 할 변명거리라도 있다면.

다시 산적들의 본거지로 도착하자 쌍둥이 호위 외에도 로잔느와 마이유까지 키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안 가고 뭐 해?”

“아까 그 곰 인형, 움직인 거 맞죠?”

로잔느가 키엘의 앞에 서서 그의 길을 가로막았다. 리오가 그녀를 치료해줬는지, 이제 코피는 나지 않았다.

“비켜.”

“여행자라면서요?”

키엘은 눈앞에 알짱거리는 로잔느의 어깨를 잡고 밀쳤다.

“비켜. 한시가 급해. 리네, 저택에 갔다 와야겠는데 로한을 잡아놓을 수 있을까?”

“여기서 얼마나 걸려?”

“마차 타고 꽤 걸렸던 거 같은데.”

확실하지가 않았다. 너무 어렸을 적 기억이었기에. 키엘이 고민하던 중에, 로잔느가 손을 들었다.

“마차는 제가 준비해 드릴게요!”

“아가씨!”

“저도 동행할래요.”

키엘은 한쪽 눈꼬리를 찡그렸다. 마차가 없어서 못 가는가. 로한을 따돌려야 하니까 고민인 거지.

“왜 내가… 짐을 더 가지고 가야 하지?”

“제발요. 납치된 김에 바깥 구경 좀 더 하고 싶다고요!”

이런 철없는 사람을 봤나. 하지만 그 말에 키엘도 저택으로 빨리 가고 싶어 하는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였다.

그때 키엘의 머릿속으로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야. 그럼 데리고 갈 테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야가 아니라 로잔느랍니다.”

로잔느가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짓고 키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키엘도 그 모습을 보고 빙긋 웃으며 악수를 받아주었다.

‘이 여자면 로한을 속이고 저택으로 갈 수 있겠다.’

그 순간, 로잔느는 키엘이 웃는 모습이 재수 없지만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벨라의 생각대로 소설 속 로잔느와 키엘의 여행은 어떻게든 우당탕 시작되었다. 거스르기 힘든 원작의 힘인 것처럼.

* * *

나무의 꼭대기에서 지시하던 벨라는, 푸르의 대답을 듣자마자 무전을 떨어뜨렸다.

‘아….’

혹여나 떨어지며 큰소리가 날까 봐 소환을 전부 해제하고 무전을 끊었다.

안쪽에 숨어 있던 심장이 바깥으로 나와서 뛰기라도 하는지. 심장이 천천히 뛰는 소리가 숲속의 어떤 다른 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

“꺄악!”

밑에서 먼저 소환했던 이웨르가 떨어지는 무전에 머리를 박으며 비명을 질렀다.

“아가씽! 이거 떨어뜨렸어용!”

벨라는 산적들의 본거지로 고개를 돌렸다. 울창한 나무에 가려져 보이진 않지만, 저곳에서 드디어 이 소설이 시작되었다.

‘드디어 키엘이 로잔느를 만났어.’

마냥 기쁠 줄만 알았는데. 어딘가 허전하고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아가씽!”

이웨르가 어느새 나무 위로 올라와 벨라를 불렀다.

“우리 이제 뭐 해용?”

“어? 우리 이제….”

벨라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떨어뜨린 무전기를 찾았다. 이웨르가 건네주자 한번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밑으로 내려갔다.

“일단 푸르 데리고 와야지.”

벨라는 첫 임무를 잘 완수한 푸르를 불렀다.

어쩌면 키엘을 보고 제일 많이 놀랐을 텐데, 묻지도 않고 일이 끝나자마자 달려오는 것 같아 대견했다.

‘이런 녀석들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소환된 푸르는 꽤 땀에 젖어 멋쩍은 듯 웃고 있었다. 그리고 푸르는 도착하자마자 아까의 수신이 잘못된 거라고 알리려고 했다.

“아가씨! 도련님이….”

‘도련님’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벨라는 또다시 가슴이 뛰었다. 이 불안함은 뭘까.

“뭐야. 너 설마 들켰어?”

“아니요!”

푸르는 이미 헉헉거리며 땀을 흘리고 있어서, 거짓말로 온몸이 긴장된 게 보였지만 이상한 티가 나지 않았다.

‘안 들켰으면 됐지, 뭐. 엄청나게 뛰었나 보네.’

벨라는 자꾸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일부러 밝게 말했다.

“그래. 잘했어. 안 들키고 잘하는 거 보니, 마계 가서 앞으로도 네가 내 보좌하면 되겠다.”

푸르는 그 순간 눈이 반짝였다.

“보좌요?”

“응. 네가 제일 최측근이야. 좋지? 대장군들보다 나한테 더 가까운 자리라고.”

“제일 가까운 자리요!”

그때 벨라 앞에서 이웨르가 눈치도 없이 묻고 싶은 걸 푸르에게 물었다.

“푸르는 도련님 바로 가까이서 봤겠넹?”

“아, 맞다! 도련님이…!”

“그만.”

벨라는 웃으면서 그들의 대화를 멈췄다. 이웨르와 푸르는 싸늘한 기운을 느끼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자꾸 불편한 이 감정이 뭔지 마주하기 싫었다.

‘진짜 못된 시누이 같잖아.’

벨라는 소설을 몇백 번이나 읽었지만, 로잔느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좋아하는 키엘이 앞으로 행복할 일만 남았는데, 그녀의 심기가 뒤틀린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키엘은 우리와 상관없으니까, 얘기하지 마.”

“하… 하지만.”

“이제 마계로 가야 할 시간이야.”

* * *

키엘의 전략은 이랬다.

로잔느가 납치범들에게 끌려갔고, 그걸 구하러 갔다는 이야기.

“로한이 그걸 믿을까?”

“오히려 더 좋아할걸.”

벨라 말고 다른 여자가 끼어들었다고 생각할 테니, 오히려 방심하기 좋을 듯싶었다.

그렇게 서둘러 키엘은 로잔느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갔다.

“저 사람은 좀 성격이 별로인 거 같지?”

로잔느가 구시렁거리자, 마이유는 고개를 갸우뚱이며 키엘의 뒷모습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어디서 본 거 같은데….”

하루가 채 가기 전에 키엘은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택의 외관을 볼 때부터, 마음이 불안했다.

잘 키우지는 못하지만 봄마다 꽃들을 심었고, 힘 좋은 잔바르가 늘 잡초를 뽑아줬는데.

“여기야? 와, 여긴 귀신 나오는 집이라고 해도 믿겠다.”

“여기서 기다려.”

키엘은 로잔느의 말을 무시하고 문을 열었다. 그곳은 키엘이 자랐던 곳과 정말 다른 곳이었다.

듬성듬성 아무렇게나 난 잡초들은, 처음 이 저택을 방문하던 때를 상기시켰고.

모든 것이 저택에 처음 이사했을 때와 똑같았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저택.

분명 그렇다고 들었지만, 부정했던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니야…. 아닐 거야.’

그는 2층부터 먼저 달려가 벨라의 방문부터 열었다. 가구 하나조차 남지 않은 곳에, 벨라는 당연히 없었다.

“벨라… 왜 여기 없어요?”

키엘은 천천히 벨라의 방을 거닐며 침대가 있었던 자리, 책상이 있었던 자리를 허공에서 손짓했다.

그는 문득, 리오가 했던 가설이 떠올랐다.

-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게, 어쩌면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다는 거 아닐까 해서.”

무시하고 넘겼지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저택을 보니 그런 엉터리 가설이 키엘의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서둘러 2층에 있는 그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놀랍게도 그의 방은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아….”

그는 자신의 침대로 힘없이 걸어가 가지런히 정돈된 이불을 어루만졌다.

단 하나도 바뀌지 않은 그의 방을 보며, 아주 어릴 적 꾸었던 악몽이 떠오른다.

- “넌 나처럼 될 거야. 너도 버려질 거야.”

모두의 흔적이 없는 저택에, 홀로 남겨진 키엘의 흔적이.

- “걔는 네가 필요 없대.”

이 시대에 인간계에 남아 있는 키엘과, 있을 수 없는 벨라의 격차를 보여주는 것만 같아서.

“아아아악!”

그는 주저앉아 이불을 꽉 끌어내렸다. 그는 울고 있는데, 아무것도 없는 침대 위에서 벨라는 키엘에게 웃으면서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 “그리고 공주님과 왕자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악몽의 귀신이 키엘에게 속삭인다.

- “너도 혼자구나.”

“아니야… 아니야!”

그 어린 시절처럼 키엘은 울며 고개를 젓는 것 말고는, 대답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 *

키엘은 한참을 실의에 빠지다 입술을 꽉 깨물고 눈물에 젖은 이불을 놓으며 생각했다.

‘그래, 뭔가 사정이 있었을 거야.’

스스로 벨라의 부재를 합리화하지 않으면, 무너져내릴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도망간 푸르도 분명 사정이 있을 거라고. 이 집을 떠난 것도 이유가 있을 거라고.

‘서재… 서재에는 단서가 남아 있지 않을까.’

벨라가 항상 까만색의 거울을 들고 뭔가 써 내려갔던 걸 기억했다.

- “혹시 삼촌이 널 마법사에게 판 적 있어?”

분명 그걸 보고 키엘에게 이것저것 묻기도 했었던 게.

키엘은 서재로 내려가서 기어코 그곳도 비어있는 걸 확인하며 스스로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어린 벨라는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 “자, ‘ㅅ‘’ 사자 할때 ‘ㅅ’이야.”

그리고 키엘이 다가갈수록 점점 흐려지고 사라져간다.

‘있을 리가 없잖아….’

모든 것이 비어 있는 방에, 벽에 붙어있는 금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마치 홀린 듯이 그 금고 앞에 섰다.

숫자 네 개가 있었지만, 끝 번호만 돌렸는지 그 부분만 먼지가 쌓여있지 않았다.

‘1118’

‘1117’

키엘은 조심스럽게 끝 번호를 하나씩 돌리며 금고의 문을 열어봤다.

‘1110’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금고가 열렸다.

금고 안에는 몇 장의 종이만 들어있었다.

키엘은 조심스레 꺼내 한 장씩 넘겼다.

‘이건 토지문선데.’

인장까지 찍혀 있는 토지문서 옆에는 벨라가 메모해놓은 게 보였다.

[ 키엘 15살 생일선물 ♥ ]

어찌나 촘촘하게 하트를 그려 넣었는지.

그리고 다음 장을 넘긴 순간, 키엘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게 뭐지?‘

굉장히 두꺼운 책 한권과 앞에 ‘핵심노트‘라고 적혀 있는 종이 몇 장이었다.

키엘은 빠르게 핵심노트라는 것부터 읽었다.

‘이건….’

[핵심노트]는 마치 그의 일대기를 보고 정리해둔 것 같았다.

그녀가 적어놓은 ‘이상 없음‘은 사건대로 흘러갔고, 그가 모르는 ‘페터‘ 나 ‘로라‘ 라는 이름 옆에는 ‘죽었음. 영향 없음‘ 이라고 적혀 있었다.

‘페터가 죽었어?‘

키엘은 모든 걸 품에 숨기고 바깥으로 향했다.

- “마을 사람들도 저택에는 아무도 안 살았다고 했어요.”

확인해야 했다. 벨라가 떠난 이유를.

저택에서 나오자 로잔느와 마이유가 서로 장난을 치다가 키엘의 눈치를 보며 경직되었다.

“이제 가는 거야?”

“… 여기서 기다려.”

키엘은 말을 타고 마을로 향했다. 이미 해가 져가는 저녁 시간. 대부분이 집에 있을 시간이었다.

‘메리는 그때 용병단에게 갔으니까….’

그나마 진실을 대답해줄 사람은, 꼴 보기도 싫지만 하나밖에 없었다.

키엘은 브웬의 집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안에는 저녁이 한창인지 하하 호호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리다가 문이 열렸다.

“헉! 키엘!”

브웬은 난데없이 나타난 키엘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 그의 이름을 불렀다.

“…벨라는 어딨어?”

브웬의 식구들은 전부 눈을 굴러가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때 검술 교실에 왔었던 브웬의 동생이 대답했다.

“벨라님은 떠났어요.”

“어디로?”

“그건 우리도 몰라요.”

그러자 브웬이 문을 닫으며 키엘을 살짝 밀쳐냈다.

“어떤 사람들이 와서 저택에 대해 물으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라고 했어.”

“하란다고 해?”

“……. 제법 돈을 많이 줬어. 집마다 전부.”

키엘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럼 벨라는?”

“우리도 몰라. 아는 건, 거기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었어.”

“…….”

“시체가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고 하더라고. 그것도 누군가 우연히 본 거 같아서 확실하진 않지만.”

황태자를 알고 있다는 이유로, 습격을 받아 그게 싫어서 이만 떠나버린 걸까.

* * *

“와! 마계로 갈 시간이네요!”

푸르는 오랜만에 돌아가는 마계가 그리운지 펄쩍 뛰며 좋아했다.

벨라는 이제 온몸이 점점 투명해지는 걸 보고 급하게 발을 쾅 하고 바닥에 찍었다.

마계로 가는 소환진이었다.

“자. 들어가자.”

푸르가 제일 먼저 손을 들고 소환진 안으로 점프했다. 그렇게 몇 초 지났을까.

“얘들아, 뭐 하니? 안 가고.”

그러자 이웨르와 젠이 서로의 눈치를 보더니 멋쩍은 듯이 웃었다.

“이웨르 씨, 먼저 가시죠.”

“젠이 먼저 가.”

이건 몇 해 전에 한 그놈의 내기 때문이었다.

‘벨라가 키엘에게 잘해주는 이유’에 대한 내기.

그들은 여전히 내기를 진행하고 있었고, 서로 이날만을 기다려왔다. 벨라가 마계로 돌아가는 날을.

‘이 여자, 안 갈 생각이군.’

‘젠장. 젠도 여기 남을 생각인가 보넹.’

서로 웃으며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아가씨. 제가 아가씨 취향을 잘 아니까 인간계에 남아서 옷이나 가구 같은 거 보내드리는 게 어때용?”

이웨르가 먼저 선수 쳤다.

그리고 벨라는 이웨르의 제안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거 좋네. 무전기는 잃어버리지 말고 가지고 있어.”

그리고 벨라는 젠킨스를 쳐다봤다.

“뭐 해? 안 가고. 나랑 같이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

벨라는 젠킨스가 반마족이라 두려워서 못 가는 줄 알았다. 때마침 둘러댈 핑계가 없던 젠킨스는, 벨라의 말을 변명으로 삼았다.

“…아직 두렵습니다. 저도 이곳에서 아가씨께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좀 더 하고 가고 싶어요.”

“뭐… 그럴 게 있어?”

“인간계를 침략하려면 내부사정도 잘 알고 있어야 하니까요.”

벨라는 잠시 눈을 굴렸다.

‘얘들은 아직도 그걸 믿나?’

애초에 그럴 마음은 없긴 했지만, 키엘이 그녀의 생을 끝내러 와야 한다고 말하면 오히려 키엘을 죽일 것만 같았다.

“뭐… 그래. 너도 무전 챙기고.”

뭔가 석연치 않았다. 이웨르는 이해하겠지만, 젠킨스는 남아야 할 이유가 딱히 없었을 테니까.

‘뭐… 보험 삼아 복종이라도 받아야겠지.’

벨라는 한쪽 눈을 윙크했고 오래전 이웨르와 젠킨스의 목에 새겨두었던 복종 서약의 띠가 붉게 빛났다.

“너희 둘 다 키엘에게 절대 접근하면 안 돼. 알겠지?”

“넹!”

“그럼요.”

띠가 목을 한 바퀴 전부 돌자, 이웨르와 젠킨스는 둘 다 웃으면서도 속으로 애가 타들어 갔다.

‘망할.’

‘제길.’

이런 점에서는 벨라가 꼼꼼하고 철두철미하다는 걸 잊었다.

벨라는 이제 잔바르를 쳐다봤다.

“잔바르. 안 가?”

“네?”

“넌 인간계 싫어하잖아. 제일 먼저 들어갈 줄 알았더니.”

잔바르는 잠시 경직된 채로 있다가 머뭇거렸다.

“…갈 겁니다.”

“그럼, 뭐 해! 빨리 들어가, 다리 아파.”

하지만 그는 좀체 움직이지 않고 그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젠킨스의 낯빛이 어두워졌지만, 벨라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벨라의 몸이 점점 투명해지는 것에만 신경이 쓰였다.

“잔바르, 어쩔 거야? 남을 거야, 말 거야?”

“갈 겁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잔바르가 망설이자, 벨라는 그를 붙잡고 소환진 안으로 쑤셔 넣었다.

“그럼 좀 빨리빨리 가!”

젠킨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고, 이웨르는 그걸 지켜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가씨는… 참….”

그리고 벨라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봤다.

인간계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푸른 하늘이었다.

눈조차 투명해져서 볼 수 없기 전에, 많이 담아두고 싶었다.

‘사실 바다를 보고 싶었는데.’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처럼 이 하늘 끝에서 끝으로 이동하는 구름 말고.

부스러지는 하얀 빛을 머금고 다가왔다가, 이별하듯 멀어져도 다시 찾아오는 파도를 보고 싶었다.

눈앞이 점점 하얘지면서, 그렇게 벨라는 마계로 돌아갔다.

* * *

벨라는 마계에 도착하자마자 낯선 냄새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건 또 무슨 악취야.’

눈을 살짝 떠보자, 옆에는 푸르가 눈을 반짝이며 벨라를 보고 있었다.

“아가씨! 아니, 공주님!”

“꺄악!”

오랜만에 곰 인형 모습이 아닌 곰 모습의 푸르를 보자마자 벨라는 깜짝 놀랐다.

‘와, 진짜. 간 떨어질 뻔했다.’

벨라는 떨어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괜찮으세요?”

“아, 아냐. 조금 놀라서 그래.”

“짠! 공주님을 위해 마계 녀석들이 파티를 준비했어요!”

“파티?”

벨라는 아무 생각 없이 푸르가 손을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봤어야 했는데.

갑자기 코앞에 사람의 머리만 잘라 피라미드처럼 만들어놓은 걸 보고, 벨라는 비명이 끝나자마자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우…욱. 우엑.”

“봐! 내가 공주님은 7층 인탑을 좋아할 거다 그랬지!”

“죄, 죄송합니다! 그래도 마족이라면 숫자 6이라고 생각해서 6층을 만들었는데.”

벨라가 손짓을 하며 치우라고 하자, 지렁이 같은 마족들이 명화라도 모시는 것 마냥 조심스럽게 피라미드를 치웠다.

“하… 진짜 미친…아아아아아아악!”

벨라는 바로 옆에 있는 푸르의 몸에 매달리다시피 안겼다.

“공주님을 기다렸습니다!”

10년 만에 보는 바퀴벌레 대장군 탈람이 가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고 그 뒤로 바퀴벌레 군단이 좌우로 움직이며 벨라를 환영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주님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자!”

마치 생일 케이크랍시고 정성스럽게 뼈로 이은 그릇 위에 끈적거리고, 고약한 덩어리가 있었다.

“하… 하하.”

“공주님이 웃으셨다!”

“전부다… 닥치고 꺼져!”

10년 만에 본 마계는 여전히 지옥이었다.

* * *

벨라는 희망이라는 걸 믿었다.

지난 10년 동안, 잔바르와 푸르가 조금씩 바뀐 것만 보아도.

어쩌면 이 마계를 갱생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다.

처음에는 모두에게 지시했다.

피로 씻지 말 것.

사람을 죽이지 말 것.

이것만 지키더라도, 바퀴벌레 같은 놈도 참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도통 지켜지지 않았다.

전부 몰래 피로 씻으며 악취를 풍겼고, 어디서든 사람을 죽이며 놀고 있었다.

그리고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벨라는 인간계에서 가져온 가구들로 마왕성을 최대한 바꿔놓았다.

하지만….

“하… 누가 내 의자에 앉으래…?”

“앗! 죄송합니다.”

“야. 진물 떨어진 거 다 닦으면서 다녀.”

소소하게 아침부터 벨라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고. 밥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야! 내가 밥상에 바퀴벌레 새끼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지!”

“새끼 아니라 성체입니다.”

“탈람 개새끼야 나가.”

“개 아닌데…. 새끼도 아니고….”

“Xx, 나가라고!”

그나마 푸르에게 잘 얘기해 먹을 만한 채식으로만 먹고 있지만, 시중드는 애들을 보면 그 풀떼기 마저 먹을 입맛도 돌지 않았다.

그들은 좋게 말로 해도 듣질 않았다.

“야. 지네 새끼. 내가 그 사람 손가락으로 엮은 목걸이하고 내 눈에 띄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이건 발가락입니다.”

“진짜 미치겠다, 진짜!”

벨라는 가차 없이 그냥 그들을 전부 잘라버렸다.

“공주님… 치사하게 발만 다 자르시고….”

“Xx. 촉감 거지 같아, xx!”

거기다 하루가 멀다고 벨라는 제대로 잠도 잘 수가 없었다.

“너희는 xx, 새대가리냐? 내가 분명히 정원에서 시체 태우지 말랬지?”

이제는 성 밖에서 풍겨오는 악몽 같은 냄새까지 벨라의 잠을 방해했다.

“캠프파이어 중이었어요!”

“…….”

“그리고 저희 새대가리 맞아요!”

얼굴이 새인 마족들이 마치 칭찬이라도 받은 듯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 어느 미친놈이 xx, 캠프파이어 장작으로 사람 시체를 넣어?”

“저흰 미쳤습니다! 공주님께 미쳤습니다!”

“나 제발…. 1분 만이라도 욕 좀 안 하게 해줄 수 없겠니?”

벨라는 인내심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이건…. 공주님께서 좋아하실 것 같아 준비했습니다.”

뒤에서 뭔가 사부작거리며 준비하지만 벨라는 보지 않아도 짜증부터 났다.

“Xx, 안 좋아한다고! 몇.번.을.말.해!”

결국 그 자리에 있는 마족들을 전부 다 베고, 그들이 다시 붙으려고 움직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베었다.

‘나… 이대로는 못 살아.’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지금 죽을까?’

벨라는 단 한 번도 죽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이미 한번은 죽었기에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생을 포기하는 건 싫었다.

벨라는 이 마왕성에서 유일한 안식처인 방으로 들어가 오랜만에 핸드폰을 꺼냈다.

“분명…. 나 같은 애가 또 있었을 거야.”

딱 한 번 밖에 쓸 수 없다는 [1:1 문의]보다, [자주 하는 질문]을 다시 살펴봤다.

“이번 생이 너무 힘들어서 빨리 끝내고 싶은 사람 없어?”

인간계로 나갈 수도 없었다.

이제 곧 있으면 마왕이 될 텐데, 벨라를 소환하려면 대마법사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이었다.

‘어느 미친놈이 대마법사나 되어서 쓸데없이 마왕을 소환하겠어?‘

그 정도 규모의 일이라면 소설에 한 줄이라도 적혀 있었을 것.

그러니 그런 일은 희망 사항에 없었다.

벨라는 빠르게 스크롤을 내리며 눈으로 훑었다.

‘와… 근데 핸드폰 진짜 너무 오랜만에 한다.’

환생을 기다리면서 편하게 누워서 웹소설을 보던 때가 좋았다.

‘우리 대기조들은 잘들 살고 있을까.’

돌아가면 이런 고통은 다 잊고 ‘나는 이런 삶에 빙의했다’라며 온종일 빈둥거리며 담소나 나누고 싶었다.

“찾았다.”

벨라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해당 부분을 눌렀다.

[Q.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나요? 되나요?]

[A. 환생이나 빙의는 모두 여러분께 인생을 경험하게 하는 일입니다. 삶은 소중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쉽게 여러분의 삶을 놓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저기, 지금 나 지옥에 보내 놓고 이런 답변 봐도 위로가 안 되는데.”

그리고 밑으로 추가적인 설명을 읽었다.

[소설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역에는 빙의되지 않습니다. 남에게 위탁하여 목숨을 끊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죽여달라는 것도 안 된다는 거였다.

‘난 원래 키엘이 무찌르는 역이니 상관없겠지.’

[또한, 함부로 남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자살을 시도하셔도 생명에 지장이 없게 설정되어있습니다. 시도 시에는 페널티가 부과되며, 소설이 끝난 후 책임을 묻습니다]

그녀는 마지막 한 줄이 가장 가혹하다 생각했다.

[어떤 역으로 빙의 되어도 원하시는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행복은 개뿔.”

지금 당장에라도 [1:1 문의]라도 하고 싶었지만, 핸드폰이 꺼졌다가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 모를 일이었다.

벨라는 침대에 누워 오랜만에 집어든 핸드폰을 괜히 껐다가 켜며 한숨을 내쉬었다.

“답이 없다, 답이 없어.”

그러다 손가락을 잘못 눌러 사진이 있는 갤러리를 누르게 되었다.

“아.”

짧은 외마디와 함께, 그녀의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갤러리에는 딱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

청량한 여름날, 흰색과 푸른색으로 마치 그리스를 연상시키는 어린 그녀와 키엘이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키엘과 헤어진 이후로 몇 년의 시간이 지났을까.

마계로 돌아온 후에 시간을 세는 것도 까먹었었다.

벨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한 번도 마주하지 않았던 자신의 감정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보고 싶다.”

큰일이라도 날까 봐 꾹꾹 눌러 담았던 말은 내뱉고 나니 별거 아니었다.

“키엘…. 보고 싶어.”

이제 이렇게 말한다고, 감정에 못 이겨 키엘에게 달려갈 일은 없을 테니까.

그래서 그녀는 한 번 더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핸드폰을 키엘처럼 여기고 품 안에 꼭 안았다.

“그래. 원래는 여기서 계속 살다가 죽을 운명이었잖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키엘이 황궁에 가기 전까지 함께 살았던 추억만으로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일 최선은 그냥 여기서 누가 벨라를 죽여줬으면 하는 거지만.

“죽더라도 키엘에게 도움이라도 돼야지.”

벨라는 오랜만에 편하게 베개에 머리를 뉘었다.

그리고 여름 축제 때 함께 불렀던 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나나나 잠이 들게요, 꿈에서도 만날 수 있게.”

그렇게 슬며시 잠이 들었다. 꿈에서 만나길 기다리며.

하지만 그녀는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지금 잠도 편하게 잘 수 없다는 것을.

긍정적인 생각은 순식간에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워우! 워우! 왕왕!”

밖에서 어떤 미친놈들이 자기들끼리 춤을 추며 왈왈거리고 있었다.

“하아… 내가 진짜.”

벨라는 울상을 지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늑대 인간 같은 놈들이 동그랗게 모여 가운데에는 한 놈의 가죽을 벗기며 놀고 있었다.

역겹게도 저게 그들에겐 놀이었다.

“왈왈!”

벨라는 머리가 아프다 못해 저렸다.

그녀는 바깥을 향해 머리가 터질 듯, 목이 터지라고 외쳤다.

“야아아! 개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해라! 이 개새끼들아!”

벨라의 큰소리에 그제야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터질 것 같은 심장 위로 손을 올렸다.

“저희 늑댄데요!”

“으아아아아악!”

벨라는 저 뻔뻔스럽고 맥락을 이해 못 하는 변명들이 질리도록 싫었다.

“다 뒤져! 진짜!”

벨라는 창문에서 뛰어나가 늑대인간들에게 달려갔다. 그들이 깜짝 놀라 도망도 치기 전에, 벨라는 늑대들의 심장을 하나씩 손으로 다 뜯어내고 쥐어짰다.

여태껏 잔바르를 베어왔던 것도, 마계에 도착해서 이 녀석들을 베어왔던 것도.

벨라에게는 마지막 배려였다.

마지막 이성의 끈이었다.

그녀의 손에 늑대인간들의 심장이 터지고 피가 흐르자, 그제야 그 밤이 고요해졌다.

벨라는 짧게 미소를 지었다.

“와…. 이제야 조용하네.”

그녀의 눈빛은 오뉴월에 서리도 내리게 할 만큼 섬뜩했다.

“그러네. 내가 못 죽으면… 니들을 다 죽이면 되구나?”

후에 마계는 그 짧은 시대를 침묵의 시대라고 일컬었다.

* * *

좁은 틈으로 달빛이 쏟아져 내리는 동굴 안.

어느덧 스무 살이 된 키엘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동굴 한 편에 놓여있는 궤짝을 열었다.

궤짝 안에는 달빛에 반짝이는 각종 금은보화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녹이 슨 성배가 아무렇게나 그 안에 섞여 있었다.

‘…역시.’

키엘이 성배를 꺼내 달빛에 비추자, 녹이 슬었던 부분이 점점 새하얗게 원래의 색을 찾아갔다.

“성배 찾은 거야?”

멀리서 연분홍색 머리의 로잔느가 키엘에게 물었다.

“이게 마지막 성물이야. 이제 제국에 잃어버린 성물은 없어.”

“그럼… 이제 여행은 끝이야?”

키엘은 대답하지 않고 로잔느의 옆을 지나쳤다.

“키엘! 같이 가!”

키엘이 한참을 걸어가자, 숲속에서 일행들이 쳐놓은 텐트가 보였다.

“왔어? 어? 손에 든 거 뭐야?”

리오의 질문에 키엘은 손에 들고 있던 성배를 던지고 텐트 안으로 무심하게 들어갔다.

리오가 아슬아슬하게 성배를 받으며 이리저리 살폈다.

“설마 그 시간에 성배 찾아온 거야?”

“성격도 급해라.”

리네는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이럴 줄 알았으면 텐트 안 치는 건데.”

“와. 이렇게 끝이 허무하게 끝난다고?”

“그나저나 쟨 어떻게 저렇게 귀신같이 잘 아나 몰라. 찾는데 며칠은 걸릴 줄 알았더니.”

텐트 안으로 들어간 키엘은 겉옷을 바닥에 던져놓고 구석 자리로 걸어가 주저앉았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자신의 가방 안에서 오래된 노트를 꺼냈다.

‘역시 이 내용대로 흘러가는구나.’

이미 수백 번도 넘게 봐서 내용을 외웠지만, 벨라의 글씨만큼은 볼수록 질리지가 않았다.

‘핵심노트’ 덕분에 성물까지 빠른  시간에 찾을 수 있었지만, 소설로 적힌 책 부분은 읽을 때부터 거부감이 많이 들었었다.

몇 장을 읽다가, 키엘은 반복해서 나오는 ‘로잔느’ 부분을 까만색 펜으로 지우면서 읽었었다.

‘이 여자는 왜 자꾸 나타나? 왜 여기 있는 키엘이랑 자꾸….’

어느덧 소설의 반절 이상이 까맣게 색칠되어 있었다.

소설의 정체에 대해 갖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어느 것 하나 명료한 해답을 주진 않았다.

혹시 운명의 여신들이 준 책인 건지.

벨라가 미래에서 온 건지.

다만 어떤 길이든 하나만은 명확했다.

이 소설에 벨라는 없었다.

아무리 읽어봐도 등장하지 않았다.

마치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게 정해진 운명이라도 된 것 마냥.

‘절대 인정 못 해.’

점점 흐릿해지는 벨라의 모습을 눈을 감은 채 그렸다.

그리고 오래전 함께 불렀던 축제의 노래를 떠올리며 선잠이 들었다.

‘자장가를 불러주세요, 그대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게요. 꿈에서도 만날 수 있게.’

자장가를 부르면.

꿈에서라도 만날 수 있기를.

‘떠나지 마요….’

* * *

로잔느는 키엘을 뒤따라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키엘….’

처음에는 그저 여행을 떠나고 싶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키엘에 대한 마음이 점점 커지는 걸 느꼈다.

비록 쌀쌀맞고, 가끔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았지만.

때때로 우연히 그의 품에 안기게 되거나, 그가 친절을 베풀 때면 모든 부정적인 생각이 날아가고 마치 중력처럼 마음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하지만 오늘이 마지막이겠지.’

여태 여러 번 그녀의 마음을 은연중에 표했지만, 그는 절대로 응답하지 않았다.

그때 마이유가 로잔느에게 다가와 옆에 앉았다.

“아가씨.”

“응?”

마이유는 품에서 묘약 하나를 로잔느에게 건넸다. 마지막 성물을 찾으러 오기 전 들렀던 마을에서 샀던 거였다. 그 유명하다는 사랑의 묘약.

“혹시 이거 뭔지 아세요?”

로잔느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마이유가 준 걸 자세히 살펴봤다. 작은 향수병 안에 찰랑거리는 붉은빛의 액체가 들어있었다.

“이게 뭐야?”

마이유는 그런 로잔느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가씨. 이걸 몸에 뿌리고 키엘에게 고백하세요.”

“뭐?”

“용기를 심어주는 약이래요.”

로잔느는 마이유에게 묘약을 돌려주며 고개를 저었다.

“싫어. 그런 건.”

“마지막이에요. 언제까지 그렇게 끙끙 앓을 거예요? 오늘이 지나면 못 볼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로잔느가 움직이지 않자, 마이유는 그녀의 손을 잡고 키엘이 있는 텐트로 향했다.

그 후 비싼 돈을 주고 산 묘약을 로잔느의 머리카락에 뿌리고 그녀를 텐트 안으로 넣었다.

“아아! 마이유!”

“못 나와요!”

마이유는 텐트 입구에 떡 하니 버티고 서 있었고, 로잔느는 어쩔 수 없이 키엘의 눈치를 보며 다가갔다.

그는 기둥에 기대어 앉아 악몽이라도 꾸는지 움찔거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저, 키엘.”

“……라.”

로잔느가 키엘을 흔들자, 키엘의 촉촉하게 젖은 속눈썹이 천천히 올라갔다.

로잔느에게 키엘은 늘 강한 사람이었다.

검술도 능숙했고, 머리도 비상했다.

하지만 지금의 키엘의 눈빛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로잔느의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키엘….”

“벨라…?”

키엘이 로잔느의 뒤통수를 잡고 천천히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다시 어느 때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 마계의 시간.

마계를 뜯어고쳐 보려던 벨라의 시도는 작심삼일…아니, 작심 삼분이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참아보려고 삼 분을 기다리면, 전자레인지에서 땡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서 삼 분간 달궈진 분노가 마족들의 심장을 향해 달려갔다.

“공주님. 너무 많이 죽이면 안 됩니다.”

그럴 때면 웬일로 잔바르가 보좌진답게 벨라를 말렸다.

“많이 죽을수록 위기를 느끼고 종족끼리 빨리 새끼 치거든요. 전 탈람 녀석 부대가 커지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럼 박멸시킬까?”

벨라가 웃으며 두 손을 모았다.

그녀는 이제 하나하나 설명하려 들지도 않았고, 화를 내며 경고하지도 않았다.

“아. 너흰 또 뭐야?”

“지… 지나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래?”

“고… 공주님?”

지나가던 연체류 형의 마족들이 빨판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벨라에게 빌었지만, 그녀는 가차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심장부터 꺼냈고, 최근 들어서는 그들의 피로 바닥에 그림도 그리기 시작했다.

마족들은 벨라의 눈치를 보며 싸늘한 동료의 시신도 함부로 치우지 못했다. 치우러 가다 들키면 그들도 개죽음을 당하니까.

“잔바르, 피 냄새가 너무 진동한다. 애들보고 물청소하라고 해. 벌레 새끼들은 부르지 말고.”

“그래도 일은 걔들이 제일 잘하던데요?”

“걔들 다 죽으면 너희가 제일 잘하는 거니까 좋지?”

잔바르는 마왕답게 성장하는 벨라를 매우 뿌듯한 눈빛으로 보며 속으로 충성을 다짐했다.

그녀가 인간계에 있을 때, 공주답지 않은 행동을 할 때마다 들었던 걱정은 멀리 사라진 지 오래였다.

벨라는 전생의 그녀가 ‘정의가 매우 투철한 경찰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열심히 하는 경찰이었고, 평범하게 선량했다.

그래서일까?

애매하게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아서.

그 잔인한 곳에 있을수록, 무엇이 양심인지 도덕심인지 점점 경계가 흐릿해져 갔다.

벌레형 마족들을 죽이는 데는 아무런 죄책감이 없었다.

하지만 점점 죽이고 죽이다 보면, 어느새 인간형의 몽마들도 죽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놈의 인간 피 냄새가 빵집에서 솔솔 풍기는 맛있는 냄새처럼 벨라를 자극했다.

마치 엘리베이터에서 치킨 냄새를 맡았을 때, 집에 가자마자 치킨을 시켜 먹듯이.

달콤한 피 냄새가 어디선가 나기 시작하면 벨라는 아낌없이 손톱으로, 검으로 하나씩 베었다.

이제 마족들이 ‘공주님이 좋아하시는 것‘중 하나로 인간계에서 잡아 온 인간들을 선사하면, 벨라는 잔바르처럼 기뻐하며 인간들에게 검을 쥐여주었다.

“자, 나 죽일 기회 줄게. 덤벼봐.”

그들이 발악하고 한 번에 여럿 덤벼도, 벨라는 가볍게 피하고 그들을 살육하는 놀이를 즐겼다.

일곱 구의 시체를 차곡차곡 쌓아 올려 감상하고 있을 때, 푸르가 밝은 목소리로 벨라를 불렀다.

“공주님! 이웨르가 옷 보냈어요!”

이웨르. 옷. 인간계.

“…아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벨라의 붉은 눈은 동공이 커지며, 자신이 생명을 거둔 인간의 눈과 마주쳤다.

“내가 또….”

벨라는 인간계에 있을 때와 똑같이 꾸며놓은 자신의 방을 오랜만에 찾았다.

“…푸르. 목욕물 좀 받아놔.”

“네!”

벨라는 이웨르가 보낸 옷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귀족 영애들이 사교계에 데뷔할 때나 입을 것 같은 화려하고 예쁜 드레스였다.

지금의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벨라는 따뜻한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조금 전 사람의 심장을 만졌던 손을 박박 문지르며 팔을 떨었다.

힘을 쓰면 쓸수록, 그 힘에 취해져 간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럴수록 마족들은 단순해지고, 본능적으로만 움직인다는 걸.

인간계에 있을 때도 한두 번, 이성이 끊어질 것 같은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다. 특히 그놈의 피 냄새를 맡을 때.

그때마다 끊어지기 직전에 이성을 찾았는데.

‘나는 괴물이 되어가는 걸까.’

이제 그녀의 정신이 하나씩 무너져내린다.

처음에는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오천 년을 사는 게 무서웠지만, 이제는 그녀가 그 세월 동안 사람이 아니게 될까 봐 무서웠다.

‘벗어나고 싶다.’

벨라는 욕조에서 소환진을 펼쳐 오랜만에 이웨르와 무전을 시도했다.

“이웨르.”

“꺄! 너무 기다렸어용!”

“무슨 생각으로 저딴 드레스를 보낸 거야?”

“하하. 마음에 안 드세용?”

“입을 일도 없잖아.”

입을 일이 있다 하더라도, 이제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복식이었다. 귀하신 영애님들이나 입으시겠지.

“아가씨 인간계로 오실래용? 소환할 수 있는 마법사 찾았어용!”

벨라는 급하게 욕조에서 일어섰다. 정말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그게 가능하다면,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진짜? 이웨르, 네가 해냈구나! 기특한 것!”

“역시 아가씨도 인간계로 오고 싶어 할 줄 알았죵! 지금 소환해보라고 할게용!”

어떻게든 벗어나서 키엘이 올 때 돌아오면 될 거로 생각했다.

벨라의 눈앞에서 소환진이 그려지는 게 보였다.

“가면 안 돼요, 공주님!”

“꺄아. 푸르! 오랜만이양!”

푸르는 벨라의 무전에서 작게 들리는 이웨르의 목소리를 듣더니 환한 표정으로 벨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웨르! 내 말 들려?”

“응응. 잘 들령. 잘 지내고 있어?”

“잘 지내지. 공주님도 잘 지내고, 잔바르 님도 잘 지내고 있어!”

그때 원형의 소환진이 공중에 모두 그려졌고, 벨라가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앗! 안 돼요!”

푸르가 벨라의 손을 꽉 잡고 막아섰다.

“Xx. 건드리지 마. 나갈 거야!”

왜 나서서 방해하는 건지, 벨라는 울분에 토해서 푸르를 밀어냈다.

“오… 옷은 입어야죠!”

벨라는 그제야 자신이 나체로 있다는 걸 깨닫고 옷장으로 달려갔다. 소환진이 없어지기 전에.

“알몸으로 오셔도 되는뎅.”

그때 무전 너머로 우당 탕탕하는 소리가 들리며, 젠킨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웨르 씨, 미쳤어요?”

벨라가 서둘러 옷을 입는 동안 푸르는 음흉하게 중얼거렸다.

“난 지금 공주님의 나체를 아주 적나라하게 보고 있지!”

“오호. 그건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당.”

“네가 좋아할 거 같으니까 생생하게 알려줄게! 일단 공주님의 가슴이 봉긋….”

하지만 푸르는 더 말을 할 수 없었다. 벨라가 이미 푸르의 혀만 잘랐기에.

무전 너머는 푸르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이웨르가 안달이 나 있었다.

“공주님 가슴이 뭐! 더 얘기해줭!”

“하지 마세요!”

푸르는 잘린 혀를 주워다 붙이고 말했다.

“와! 혀는 금방 붙네요!”

벨라는 옷을 걸쳐 입고 소환진으로 향했다. 하지만 소환진에 닿자마자 곧바로 튕겼다.

“왜 안 들어가져?”

“아무래도 마력이 더 필요한 거 같은데요.”

벨라는 고양이로 변해 소환진으로 뛰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몇 번이고 부딪혀도 여전히 튕겼고.

“아아아악!”

애를 쓰고 부딪혔지만 그럴수록 살갗이 타들어 가는 고통만 느꼈다.

점점 희미해져 가는 소환진으로 겨우 손 하나만 들어갔다.

“제발… 제발!”

소환진 너머의 인간계에서 젠킨스가 벨라의 손을 잡아줬다.

인간계로 들어간 손이 칼날에 베이듯이 상처가 생겨 쓰라렸고, 무전 너머로 젠킨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너무 많이 다쳤어요.”

“상관없어.”

젠킨스는 벨라의 손을 오히려 밀어냈다.

그녀는 살갗이 다 벗겨졌는지 붉게 물든 손을 보고, 사라진 소환진이 있던 곳을 멍하니 응시했다.

“난 나갈 수 없는 거야…?”

그때 무전 너머로 젠킨스가 말했다.

“…방법을 찾아볼게요. 아가씨가 원하신다면.”

그 후로 벨라는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단 하루만이라도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아직 멀었어?”

“엘리시아 마법 학교에 마력 증폭도구를 요청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그렇게 또 한 달. 두 달.

벨라는 미치지 않기 위해 방 안에 틀어박혀 숨만 쉰 채로 기다렸다.

그렇게 시간은 속도 없이 빠른 속도로 흘러갔다.

벨라는 쓸쓸하게 달력을 바라보며 1166년의 마지막 하루를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녀는 퀭한 눈으로 무전을 연결했다.

“아가씨! 이제 마법사랑 증폭 도구랑 파장을 맞췄대요! 며칠만 지나면 소환할 수 있을 거예용!”

“이웨르. 나 안 갈래.”

무전 너머로 긴 침묵이 이어졌다가 이웨르가 되물었다.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용?”

“안 갈래.”

“…왜…용?”

1167년 1월 1일.

키엘이 마계로 찾아와 자신을 죽여야 하는 해였다.

그가 언제 올지도 몰랐기에, 이제는 나갈 수가 없었다.

“아가씨 인간계로 오고 싶어 했잖아용.”

“못 가는 게 내 운명인가 봐.”

“며칠만 기다리면 된다니까용?”

벨라는 짧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젠킨스 거기 있어?”

“…네.”

벨라는 숙연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조금만 더 참으면, 이 소설 속 자신의 역할이 끝이 난다.

이제는 그저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었다.

“키엘이 황제가 되면, 내가 소원 들어주기로 서약했었는데. 네가 대신 들어줘.”

그 말을 끝으로 무전을 전부 꺼버렸다.

‘빨리 와줘, 키엘.’

그때부터 그녀는 소설 속 자신이 나오는 곳을 몇 번이고 읽으며 그날만을 기다렸다.

‘빨리 와서 나를 죽여줘.’

정말로 미쳐버리기 전에.

* * *

“고, 공주님! 용사가 마계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벨라는 마왕의 보좌에 앉아서 조용히 이 소설에서의 마지막을 기다렸다. 그녀는 필사해두었던 소설을 전부 불에 태우고 일어섰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옷도 특별히 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모아 철 가면 안으로 넣고 얼굴에 썼다.

헐렁한 바지를 입고, 상의를 탈의하고 가슴에는 붕대를 둘렀다.

좀 더 덩치가 있는 남자로 보이고 싶어서 깃털이 있는 망토를 둘렀다.

“나 마왕같이 생겼어?”

“…네!”

빠르게 뛰는 심장은, 그 시간과 끝이 다가오는 걸 알람처럼 알리고 있었다.

바라고 원하던 대로 키엘이 그녀를 죽이는 시간.

‘나는 네가 정말 좋았어.’

원작대로 그녀의 역할이 끝나야 할 때였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이 어두운 마왕성에 한 줄기 빛처럼 그가 나타났다.

이 소설 속 벨라가 맡은 역할의 끝이었다.

‘이다음에 또 이 소설에 빙의 돼서 원하는 배역에 빙의 될 수 있다면, 그때는 로잔느로 빙의해볼게.’

그녀가 겪어보지 못한 키엘의 시절도 함께할 수 있게.

푹.

벨라는 자신의 심장이 관통하는 소리를 처음으로 들었다.

순식간에 숨이 막혔지만, 다시 눈을 떠 키엘의 얼굴을 응시했다.

‘네가 있을 때, 가장 사람처럼 살 수 있었어.’

마지막으로 볼 그의 모습이, 예전처럼 울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안녕, 나의 키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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