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어느덧 시간은 흐르고 흘러, 키엘의 나이 열네 살.
키엘이 떠나기 전까지는 이제 겨우 반년이 남았다.
벨라는 차분히 아침마다 어린 시절의 마지막 설정을 위해 신문을 기다렸다.
봄이 한창인 어느 날. 아침 신문에 수배서가 함께 끼워져 있었다.
“드디어 전단이 도착했네.”
[현상 수배: 칼릭스 / 10골드 / 죄명: 1급 살인 ]
10골드면 거의 평민들의 오두막 한 채 값이었다.
‘꽤 악명이 높았나 봐. 살인청부업잔가?’
그간 소소한 설정부터 큰 설정까지 삐걱거리면서도 얼추 맞춰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만 남았다.
바로 현상 수배범 칼릭스를 잡는 일.
다른 황족들은 당연하게 쓸 수 있던 마법을 키엘은 전혀 사용할 수 없었던 데다가. 그는 황제의 사생아였기에.
수많은 사람이 그의 자질을 의심하곤 했었다.
그러나 키엘의 심복 ‘페터’가 투덜거리며 한 말.
[“참나, 그 악명높은 칼릭스를 잡은 게 누군데. 감히 전하께 저런 소리를 하다니.”]
[“그냥 우연히 잡은 거뿐이야.”]
[“우연히든 뭐든 다 전하의 능력이라고요! 지금도 레밍고에서는 전하의 업적을 술안주 삼아 말한다고요!”]
[그때 키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씁쓸하게 펜던트만 만졌다.]
라고 적혀 있었다.
아마 죽을 고비를 넘기며 잡았던 놈이겠지. 덕분에 키엘을 함부로 할 수 없는 명예도 함께 거머쥔다.
벨라는 수배서를 고이 접어서 주머니에 넣고 숨을 크게 골라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네.’
벨라는 어김없이 키엘과 대련을 마치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진정이 되자 말했다.
“키엘. 우리 레밍고로 갈까?”
평소엔 군말 없이 ‘네’만 대답하던 키엘이, 웬일로 대답 없이 벨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네가 황궁에 가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
벌써 사춘기라도 온 건지. 키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해?”
“운명의 여신들 말이에요.”
벨라는 잠시 침묵했다.
“벨라가 실수해서 운명이 뒤바뀔 뻔했다고 한 거. 혹시, 운명이 바뀌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사실 벨라는 그 핑계를 잊고 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없기에 적당히 둘러댄 건데.
‘기억력도 좋네.’
소설에도 언급되지 않는 큰 설정이지만, 전생에서 유명한 종교, 불교나 기독교같이 널리 퍼져 있는 신화라 빌린 것뿐이었지.
“내가 만약에… 황태자가 안 되면 어떻게 돼요?”
아직 자기가 황태자라는 걸 못 믿는 걸까.
“괜찮아. 황궁에서 널 찾으러 올 거야. 운명이 바뀔 일은 없어.”
“그러니까 만약에….”
아니면 아직 작은 이 두 어깨에 짊어지기엔 너무 큰 짐이라서 부담이 되는 걸까.
“걱정 하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되게 할 테니까.”
“…….”
“내 목숨이 걸린 일인걸.”
벨라는 손으로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대답했다. 보통 종교에서 극락 아니면 지옥이라고들 하니까, 영 틀린 말도 아니었다.
소설이 원작대로 끝나지 않으면, 벨라는 결국 지옥인 마계에서 영원 같은 시간을 보내야 하니까.
‘나의 봄날은 지금으로도 충분해.’
그러니 얼른 이 설정을 채우고, 키엘과 여행이라도 가고 싶었다.
지난번에 푸르도 데리고 산에 갔다 왔으니까, 이번엔 푸르 빼고 꼭 바다로 가야지.
* * *
도시 ‘레밍고’.
‘데이저’와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이 도시는, 크루엘 공작령에 속한 도시 중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저택에서 마차를 타고 거의 3일이 걸려 도착한 곳은, 공기부터 냄새가 달랐다.
“분위기가 완전 다르네용.”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봄꽃 축제가 열린다네요.”
여기저기 피어난 꽃들이 살랑이며 떨어지며 봄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젠킨스는 거리에서 나눠주는 전단을 읽으면서 말했다.
“여자들에게는 붉은 꽃을, 남자들에게는 하얀 꽃을 선물한대요.”
“정말 쓸데없는 일 하는 건 인간이 최고군.”
“네. 잔바르 님이 알 리가 없죠.”
거리에는 꽃을 나눠주는 이들이 벨라 일행에게도 가까이 와서 꽃을 건넸다.
딱 봐도 무서운 덩치의 잔바르나, 점잖아 보이지만 절대 안 살 것 같은 젠킨스에게는 절대 먼저 내밀지 않았다.
“우리 도련님은 크면 여자 꽤 울리겠어용.”
수줍은 꼬마 아가씨들이 이미 여러 송이의 하얀 꽃을 키엘에게 건네자, 이웨르가 초승달 웃음을 하며 히죽 웃었다.
장차 제국의 영애들을 짝사랑에 빠지게 할 인물이었다.
벨라는 제 자랑도 아닌데 그런 것 마냥 기분이 좋아졌다.
“아가씨, 저랑 누가 더 꽃 많이 받나 내기할래용?”
이웨르는 오랜만에 나와서 그런지 신나서 콧소리를 냈다.
‘지금 놀러 왔나.’
그때 벨라가 하려던 말을 키엘이 가로채서 대답했다.
“안 돼.”
키엘은 어째 벨라의 마음을 더 먼저 알아차리고 앞장서는 것 같았다.
‘그럼 그럼. 눈앞에 일거리가 있는데 다른 일을 먼저 할 수가 없지.’
그것도 현상 수배범을 잡는 일인데.
벨라는 챙겨온 전단을 보여주며 오늘의 임무를 전달했다.
“이런 놈 보이면 잡지 말고 일단 나한테 제일 먼저 와서 보고해.”
“네.”
“쓸데없이 같이 다니지 말고 따로 다녀.”
“네.”
“놀지 말고.”
“힝. 이럴 줄 알았으면 푸르랑 같이 집이나 보는 건데!”
“빨리 찾을수록 놀 시간이 늘어날 거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웨르 먼저 뒤를 돌아 달려 나갔다.
“우리도 찾으러 갈까?”
키엘은 조용히 전단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왜 찾아야 하는지는 안 물어보네.’
벨라는 마족들이 간 방향과 반대편을 가리켰다.
“우린 저쪽으로 가볼까?”
키엘은 한참 대답이 없다가 벨라의 손을 살짝 잡았다.
“왜? 범죄자 잡는다니까 무서워?”
어느새 벨라만큼 키가 큰지라, 벨라는 순간 잡은 손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손잡네.’
“저쪽 먼저 가봐요.”
키엘은 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광장 쪽으로 벨라를 끌어당겼다.
‘우리 놀러 온 거 아닌데….’
벨라가 움직이지 않자, 키엘은 조금 쓸쓸하게 그녀를 보고 있었다.
“벨라.”
처음 만났던 때와 마찬가지로 초점 없는 눈을 하고 있었다.
“여기 내가 태어난 곳이에요.”
눈물 없이 울고 있는 듯한 모습에, 벨라는 조금 당황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 그랬어?”
“여기 안내해주고 싶어요.”
벨라는 얼떨떨하게 발을 움직였다.
키엘은 제법 의연하게 하나씩 설명했다.
“여기가 제일 큰 광장이에요. 보통 약속을 잡으면 여기서 잡는대요.”
“사람 진짜 많네.”
“광장 근처 가게들은 다 오래됐어요. 저기 저 양장점은 옷보다는 벨트를 더 잘 만든대요.”
키엘이 손가락으로 양장점을 가리켰다.
“저기 빵집은 바게트가 제일 맛있대요.”
“냄새 좋네.”
“그리고 저기는 밀크티가 맛있대요.”
“그걸 다 기억해?”
키엘은 한참이나 대답을 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키엘?”
“응. 다 기억해요.”
벨라를 보지도 않고, 그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바게트랑 밀크티 먹을까?”
키엘이 고개만 끄덕이고, 벨라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말했다.
“여기 기다리고 있어. 내가 사 올게.”
키엘의 ‘맛있다’가 아닌 ‘맛있대’가 조금 거슬렸지만, 지적하지 않았다.
그저 그에게 잠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보였다.
벨라가 음식을 사러 간 동안, 키엘은 겨우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곳에 온 지는 벌써 10년이 지났는데.’
그리고 여덟 살 이전의 기억은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었다.
가장 사람들이 많이 나다니는 곳.
인파에 밀려 보이지도 않는 골목 구석에는 꾀죄죄한 아이들이 밥그릇 하나를 앞에 두고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도 저 아이들처럼, 낮은 짐승의 눈높이로 이 광장을 바라봤었다.
키엘이 어릴 적 시린 손을 호호 불며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귀가 떨어지지 않은 걸 확인하던 때가 떠올랐다.
‘다시 오면 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어깨가 지난 악몽을 깨우고 있었다.
키엘은 엄마와 삼촌과 함께 살았었다.
아주 어릴 때는 삼촌이 자신의 아버지인 줄 알았지만, 그럴 때마다 삼촌은 굉장히 화를 내며 어린 키엘의 뺨을 때리곤 했었다.
그때부터도 다분했던 폭력적 기질은 엄마가 죽고 난 이후 숨기지도 않고 드러냈었다.
키엘에게 동냥을 시키고 번 돈으로 술을 마시기 일쑤였고, 그러면서도 키엘에게 따뜻한 밥 한 끼 준 적 없는 삼촌.
그때 멀리서 따뜻한 바게트와 밀크티를 양손에 들고 오는 벨라가 보였다.
- “갈 데 없으면, 나랑 같이 갈래?”
벨라는 그런 삼촌과 달리,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그를 따뜻하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바게트 방금 막 만든 거래. 맛있겠다.”
둘은 광장의 분수대 앞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한입씩 베어먹었다.
“뜨겁지 않아?”
“따뜻해서 좋아요.”
그렇게 키엘에게 상처밖에 없던 레밍고에, 벨라의 추억이 아주 작게 새겨졌다.
“벨라, 우리 집 가볼래요?”
키엘의 집은, 처음 벨라가 가보자고 했던 쪽이었다.
가는 길에는 천천히 꽃이 날리고, 음악 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가지런히 포장되어 있던 도로가 울퉁불퉁해지고, 키엘은 낡고 허름한 집 앞에 딱 서서 벨라를 뒤돌아봤다.
“여기예요.”
아무도 안 살 거로 생각했는데, 집 안에서 불빛이 깜빡이다가 사라지는 게 보였다.
“어… 여기 맞아? 누군가 사는 거 같은데?”
“삼촌일 거예요.”
“어?”
“…아직 삼촌이 살고 있나 봐요.”
벨라는 키엘이 상처받을까 봐 서둘러서 말했다.
“이만 돌아갈까?”
솔직히 벨라는 그 삼촌을 죽일 수 있다면, 죽이고 싶었다.
여덟 살 난 아이가 겨우 다섯 살처럼 보일 정도로 밥도 제대로 주지 않았고.
그것도 모자라 마법사에게 팔기까지 했는데.
“같이 들어가요.”
“그냥 돌아가도 돼.”
그러나 키엘은 이미 옛집의 문을 열었다.
낡은 문소리와 함께, 굴러다니는 술병이 바닥에 즐비했다.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 먼지가 쌓인 식탁.
사람이 사는 곳 같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돈되어 있지 않았다.
“저 사람이… 네 삼촌이야?”
“…네.”
그리고 식탁에 앉아 반쯤 감은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는 이는, 우연히 잡았다는 그 현상 수배범의 얼굴이었다.
[그때 키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씁쓸하게 펜던트만 만졌다]
소설 속 그 한 줄의 의미가, 그 씁쓸하게 펜던트만 만졌다는 의미가, 풀리지 않은 떡밥 하나에 벨라는 말을 잃었다.
키엘의 옛집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삼촌. 오랜만이에요.”
그에게는 10년 만이었다.
칼릭스. 현상 수배범. 그의 삼촌.
어린 몸으로 돌아가기 전에도 키엘은 그 전단을 보고, 이 집으로 찾아왔었다.
그때는 가을이었고, 지금은 봄이라는 것만 빼면 다른 게 단 하나도 없었다.
칼릭스는 그때와 똑같이 코끝까지 빨개진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푸우- 하고 입술로 야유를 보냈다.
“아니, 이게 누구야.”
키엘은 이후 삼촌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운명에 도박을 걸었다.
“용서할게요, 삼촌.”
언젠가 만난다면 꼭 이 말을 하려고 잠들 때마다 연습했다.
시간을 되돌아가 달빛을 등에 업고 그에게 손을 내밀어 준 천사를 만난 이후로.
‘당신이 버려준 덕에 나는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걸 얻었거든요.’
부디 삼촌이 키엘의 진심을 알아주길 빌었다.
그렇게 다가올 운명을 비켜 가기를 바라면서.
“용케 살아 있었나 보네?”
하지만 잔인할 정도로 똑같은 말까지 이어지자 키엘은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
용서를 바라지도 않는 이를 용서하는 상상을 몇 번이나 했는가.
벨라는 멍하게 칼릭스의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분명 전단에 보던 사람과는 다를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황궁으로 들어가기 전 키엘의 삶은, 늘 죽음의 위기에 놓여있었다고 했다.
키엘이 이날을 회상하면서 펜던트를 만졌다는 건. 그때도 죽을 뻔하다가 신성력으로 살아났다는 거겠지.
‘삼촌이 너에게 또 한 번 상처를 줬구나.’
그 후 일이 일어난 건 순식간이었다.
“용케 살아 있었나 보네? 어이!”
칼릭스의 외침에 벽난로 쪽에서 비밀 공간이 열리더니 건장한 사내 세 명이 나오고.
칼릭스의 눈빛이 바뀌고, 손에 쥐고 있던 술병으로 키엘의 머리를 인정사정없이 쳤다.
“예쁘게 컸구나. 역시.”
그리고 깨진 술병을 벨라의 목에 들이 내밀었다.
“이 꼬마 숙녀님도 값을 톡톡히 받겠는데?”
마치 이런 일은 숱하게 일어난 것처럼, 사내들은 상의조차 하지 않고 밧줄을 챙겨 벨라와 키엘에게 다가왔다.
“내가 안 그래도 고상한 취미를 가진 귀족을 하나 알아놨지.”
벨라는 자신의 목을 겨누는 술병을 손으로 가볍게 치우며 물었다.
“삼촌이라면서.”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게 있다면.
“어떻게 자기 조카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팔아넘길 생각을 해?”
벨라의 목소리는 차갑고 어두웠다. 이제껏 화가 난 적도 많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많이 달랐다.
“삼촌? 그 빌어먹을 x이 어디서 낳은지도 모르는 저 애새끼가?”
하지만 칼릭스는 한쪽 눈썹을 추켜뜨며 기가 찬 듯 웃었다.
“어떻게 사람이 그래?”
벨라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그때 한 남자가 밧줄을 벨라에게 묶으려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우리가 아직도 사람으로 보여?”
“그래. 고마워.”
경찰은 범죄자를 잡을 뿐, 심판은 법의 손에 맡겼다.
하지만 마왕의 딸로 빙의한 그녀가 그 법을 지킬 필요가 있을까.
벨라가 팔을 그저 돌리기만 했는데도, 어찌나 힘이 센지 그녀를 잡은 남자가 고꾸라졌다.
“우, 움직이지 마. 앙칼진 아가씨야.”
다른 사내가 얼떨결에 검을 빼 들어 다시 벨라의 목에 겨누었다.
하지만 벨라는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손으로 그 칼을 잡았다.
“어… 어….”
“뭘 그렇게 놀라?”
칼을 잡은 벨라의 손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열여섯 살의 소녀가 하는 대범한 행동에 많이 놀란 듯 말을 못 하고 있었다.
벨라는 칼을 쭉 밀어 남자의 목으로 가져갔다.
생명이 끊어지자, 위기를 느낀 나머지 남자들이 허리춤에서 검을 꺼냈다.
하지만 그들이 검을 제대로 쥐기도 전에, 벨라는 다른 한 손으로 정확하게 그들의 심장에 그들의 칼을 하나씩 꽂아 넣었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을 만큼 짧은 시간 동안.
남은 건 칼릭스뿐.
그는 몇 초 되지도 않는 시간 만에 자신의 동료들이 전부 나뒹구는 걸 보고 뒷걸음을 쳤다.
벨라는 반면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죽음의 냄새가 코끝을 스쳐서일까.
‘너무 빨리 죽잖아.’
이대로는 뭔가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다.
들끓는 분노가 저 밑에서부터 그녀를 에워싸는데, 그저 죽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저 남자의 사지를 하나씩 찢으며 죽일지, 아니면 목숨만 부지할 정도로 상처만 내고 앞으로 장난감으로 삼을지.
‘전에도 이런 기분을 느낀 거 같은데.’
어느새 손에 들고 있던 꽃은 바닥에 떨어져 붉게 물들어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세차게 문을 열고 들어온 게.
“칼릭스다! 체포해!”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그 낡은 집을 삐걱거리며 칼릭스에게 다가가 손목에 쇠고랑을 채웠다.
“저년이 이 애들을 다 죽였어.”
칼릭스는 발악하며 벨라를 노려보았다.
“저년은 악마 새끼가 분명해. 저년도 조사해!”
그 말을 듣는 악마 새끼는 허탈하게 웃음이 나왔다.
* * *
그들은 어느새 조사실에 있었다.
조사실은 벨라가 예상했던 것과 상당히 달랐다.
응접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좋은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고, 조명도 연회장처럼 밝았다.
꽁꽁 묶인 채로 무릎을 꿇은 칼릭스를 보며 벨라는 키엘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키엘, 저 새끼 몰래 죽여줄까?”
하지만 키엘은 붕대로 감겨있는 벨라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10년 전 그를 대신해 받아야 할 상처를 벨라의 손이 받은 것 같이 보였다.
“후회했으면 좋겠어요.”
“저런 놈은 후회 안 해.”
하지만 칼릭스의 결말을 아는 키엘은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
10년 전에는 그의 신성력으로 칼릭스를 죽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죽는 게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거보다 쉬울 테니까.”
그에게 마땅히 줄 수 있는 형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형벌이 무엇인지 모르는 벨라는, 그저 감옥 안에서 따뜻한 밥을 축내는 것도 좋아 보였다.
키엘이 받았을 상처에 비하면 어떤 형벌이든 가볍게만 느껴졌으니까.
아직도 키엘이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채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던 게 생생하게 그려졌다.
버려질까 봐 두려워하고 몇 번이고 물어보던 때가.
내쳐지기 싫어서 시종할 수 있다고 하던 때가.
그러나 가장 마음 아플 사람이, 그녀를 위로해준다.
“벨라는 손 괜찮아요?”
벨라는 회복된 손을 접었다 펴며 말했다. 괴물 같은 회복력에 그녀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비밀인데, 하나도 안 아파.”
“다행이다.”
키엘의 밝은 목소리에, 벨라는 안심이 되었다.
‘씩씩하네.’
돌아갈 곳 없이 우울해 보이던 키엘이, 벨라의 바람대로 건강하고 밝게 성장했다.
“진짜 다 컸네.”
소설대로 우연히 현상 수배범도 잡았다.
이제 할 일은 그저 남은 시간을 잘 보내며, 작별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아프지 않게.
서로의 인생을 잘 걸어갈 수 있게 독립하는 것.
‘일단 바다부터 가야지.’
그때, 수사관이 들어왔다.
그는 오랜 빈집에 사람이 들어갔다는 신고를 받고 바로 달려온 꽤 성실한 수사관이었다.
벨라는 보자마자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수사관님. 이자가 받게 되는 형벌이 뭔가요?”
“아… 수족을 자르고 혀를 자른 후 도시에 버려질 겁니다.”
벨라는 그때 키엘이 자신의 손을 꽉 잡는 걸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너무 형벌이 세서 놀랐나?’
하지만 키엘이 한 말은 조금 달랐다.
“고마워요.”
“응? 뭐가?”
눈물을 글썽이던 호박색 눈동자가, 선명하고 뚜렷하게 벨라를 보고 있었다.
“항상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워요.”
“나도 고마워.”
“…….”
“이렇게 밝게 커 줘서.”
그 상처 많던 아이가, 이제 곧잘 웃는다.
“네 인생은 결국 해피엔딩일 거야.”
“동화책처럼요?”
“응.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칼릭스가 비웃으며 벨라에게 비아냥거렸다.
“흥, 지랄하네.”
벨라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손을 뻗어 위에서 아래로 긁 내렸다.
칼릭스의 입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아니, 어차피 나중에 혀 자른다고 해서. 미리 잘랐어.”
“우웁.”
“고맙지? 어차피 일어날 일인데. 빨리빨리 해주면 더 좋잖아?”
그는 뭐라고 하든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 채 짐승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사관은 조금 움찔거리더니 한 소리를 거들었다.
“마… 마법사십니까?”
“뭐 비슷한 거요.”
“저희가 받아야 할 진술이 있는데, 혀를 자르시면 어떡합니까.”
“수배서에는 사살해도 괜찮다고 되어 있던 거….”
수사관이 자신의 이마를 탁, 치며 한숨을 내쉬자 벨라는 자신의 손톱을 보며 딴청을 부렸다.
“아니었나 보네요.”
어차피 받을 벌, 지금 받으나 나중에 받으나.
형벌만 봐도 그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든지 간에 악독한 놈임은 분명했다.
‘하긴. 현상금이 10골드였으니. 살인이 주 죄목이고… 인신매매?’
신문에서 여태 봤던 현상 수배범 중 많았던 놈이 5골드였다.
‘그냥 사형도 아니고…. 무슨 반역죄라도 저질렀나?’
반역죄. 이거라면 말이 된다.
그때 수사관이 키엘에게 다가갔다.
“제 이름은 로한입니다. 혹시 그 펜던트, 잠깐 볼 수 있을까요?”
벨라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고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삼촌이 칼릭스.
우연히 잡게 된 현상 수배범.
물 밑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커지고 커져 수면을 일깨웠다.
‘로한이라면….’
소설 속에서 황제 편에 서서 키엘을 감시하는 역할이었다.
벨라가 고개를 살짝 돌렸을 때, 로한이 어느새 키엘에게 가까이 가서 펜던트를 손에 쥐고 살피는 게 보였다.
* * *
키엘이 태어나고 며칠 되지 않아, 황후의 시녀였던 여자는 아이를 데리고 도망쳤다.
태어난 아이가 황제와 똑같은 호박색 눈이라는 걸 봤을 때, 모두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게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일한 황태자가 죽고 난 이후, 그들은 오래전 시녀가 빼돌린 황제의 사생아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단서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호박색 눈.
그렇게 몇 년 동안 수많은 황태자 후보가 로한의 손을 거쳐 갔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다.
오직 로한만이 알고 있는, 황제가 시녀에게 하사한 선물.
그 안에는 황태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 * *
“역시 맞았군요. 키엘 헤리언 엘리시아. 당신은 엘리시아 제국의 황태자이십니다.”
침묵이 흐르고 흘렀다.
분명 11월 10일이었다.
소설 속에서 키엘이 황태자라는 걸 알게 된 날이.
다시 태어나는 의미에서 그날을 생일로 지정한 거니까.
“받아들이시기 힘드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아직 봄이었다.
벨라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수배 명단이 내려오자마자 이곳으로 발걸음을 돌린 건 벨라였다.
‘설마 내가 앞당긴 거야?‘
목이 메어왔다.
이렇게, 갑자기 이별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전조라도 있었더라면,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었더라면.
“두 분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벨라는 여전히 놀란 눈으로 멍하게 로한을 바라봤다.
“폐하께서는 전하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전부 없애시라고 하셨습니다.”
“…….”
“후일에 전하의 과거가 득이 될지, 독이 될지 모르는 일이라서요.”
“독 아니야.”
키엘은 로한의 말을 듣고 싸늘하게 대답했다. 로한은 그를 처음 보지만, 키엘은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나올 거라는 걸.
10년 전에도 그랬었다.
그저 눈만 마주쳤던 사이인데도, 황태자가 길 위에서 생활한 걸 알아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쥐도 새도 모르게 목숨이 끊어졌던 거리의 아이들.
‘나 때문에 누군가 자꾸 집을 습격하면 힘들겠지.’
물론 벨라가 당하고 있을 사람은 아니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옆에 그가 없는 동안, 그에 대한 마음이 미움으로 바뀔까 무서웠다.
“벨라.”
“…….”
“괜찮아요.”
벨라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키엘을 보고 있었다.
“나 열심히 할게요. 열심히 해서, 꼭 안 힘들게 데리러 갈게요.”
“키엘….”
키엘은 먼저 일어서서 벨라를 일으켜 세웠다.
황태자가 되지 않으면 벨라는….
- “내 목숨이 걸린 일인걸.”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결국, 가야 하는 운명이라면.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줘요.”
그는 지금 이 순간이 작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못 보는 것일 뿐.
키엘은 벨라에게 천천히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
“나중에 꼭 호강시켜줄게요.”
한동안 못 안을 벨라의 품에만 집중했다.
이 숨결, 향기, 미세한 떨림까지.
‘기다려요. 나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
호강시켜준다는 말에 벨라는 그의 등을 토닥이며 눈을 감았다.
“기특하네.”
그녀도 키엘이 점점 커가는 걸 옆에서 보고 싶었다.
로잔느를 만나 좋아하는 사람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것도 들어주고 싶었고.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어할 줄 알았던 키엘은, 오히려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너도 이 순간을 준비하고 있었구나.’
그 순간이 언제인지 알고 있었던 벨라는 받아들이기가 힘들었고, 몰랐던 키엘은 받아들일 수 있었나 보다.
따뜻한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키엘이 벨라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작게 물었다.
“고양이로 변신하면 안 되겠죠?”
그 말을 듣고 벨라는 새어 나올 것 같은 눈물을 겨우 참고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이렇게 귀여우면 반칙이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나는 마계로… 돌아갈 텐데.’
계속 회피하던 사실이 어느새 코앞에 다가와 그녀의 뺨을 때리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키엘의 얼굴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보는 얼굴.
어느새 노을이 져 붉은 햇살이 창을 뚫고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었다.
키엘의 금발은 노을을 담아 더욱 뚜렷하고 선명하게 보였다. 그의 호박색 눈도 지금은 봄이지만 역시 가을을 닮아 있었다.
해가 지고 아침이 올 때까지 벨라와 키엘은 조사실 옆방에서 함께 밤을 새웠다.
“그러고 보니 바다는 못 가봤네. 푸르를 빼고라도 가려고 했는데.”
“푸르는 수영할 수 있어요?”
“글쎄. 강에서 연어도 잡던데, 못할까?”
마치 배려라도 해주듯 수사관 로한은 쭉 말없이 그들을 지켜보다가 방을 나섰다.
함께 추억을 되새기며, 잠이 들기 전.
벨라는 이대로 시간을 멈추고 싶었지만, 이제는 전생에 갑자기 죽었을 때처럼 받아들여야 할 때라는 걸 알았다.
“키엘. 있잖아.”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빙의 됐으면 원작 따위 개나 줘도 되었는데.
“네 인생은 해피엔딩일 거야. 조금 힘들어도 결국 황제가 될 거야.”
“벨라….”
키엘은 황궁에 들어간 후, 성물을 찾으러 나오기까지 나올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소설이 시작되는 그 시점엔, 그녀는 마계에 있겠지.
그러니 꼭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했다.
“네가 있어서 너무 행복했었어.”
“왜 그렇게 마지막처럼 말해요?”
“혹시 모르잖아.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벨라는 키엘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옆으로 기대고 말했다.
“그때 그렇게 말할걸, 하고 후회하는 거보다는 지금 다 말하는 게 좋지.”
그때 키엘이 조심스럽게 벨라의 손을 들었다.
“벨라, 붉은 실…. 묶을래요?”
그 말에 벨라는 하염없이 웃으며 키엘의 손을 뿌리쳤다.
“하하. 키엘, 그건 나중에 네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때 그 사람이랑 묶는 거야.”
키엘의 실망스러운 표정이 눈에 보이자, 벨라는 서둘러서 변명했다.
“그, 나도 물론 우리 키엘 너무 좋아하고 사랑하지. 그런데 그런 거랑은 다른 사랑.”
“…….”
“좀 더 뭐랄까, 어른 같은… 그런….”
뭐라 설명을 해야 할 텐데 말할수록 벨라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기분이었다.
“미안. 동물왕국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는 일이 없어서 나도 잘 몰라.”
벨라는 스스로 말하면서도 쓸쓸하게 느껴졌다.
키엘은 언제 준비했는지, 주머니에서 붉은 실을 꺼내 조용히 벨라의 새끼손가락에 묶었다.
“…저기, 키엘.”
자기 손가락에 묶고 벨라의 손을 그저 꼭 잡았다.
“다시 만날 땐 웃으면서 만나요.”
“…그래.”
마지막 밤이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널 처음 봤을 때도 이렇게 밤을 새웠었는데.’
그때는 새벽이 밝고 동이 틀 때 희망으로 가득 찼었다.
‘혹시… 내가 마계로 가서 다시 인간계로 올 수 있다면.’
벨라는 혹시 모를 그 운명에 도박을 걸고 싶었다.
‘많은 건 안 바랄 테니까.’
지금 잡은 손을 다시 한번만 더 잡고, 키엘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싶었다.
그리고 날이 밝아 키엘이 황궁으로 떠나는 순간까지, 벨라는 눈을 떼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햇살이 부스러져 그의 눈동자에 담겨 있었다.
“안녕, 나의 키엘.”
키엘이 점점 멀어지고, 계속 남아 있던 로한이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작별 인사는 다 하셨습니까.”
“그쪽은 안 가세요?”
“아직 할 일이 남아서요.”
그때 로한이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억울하신가요?”
불현듯 벨라는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기분 탓인가.’
소설에 빙의 되기 훨씬 전에, 그녀가 죽었을 당시 저승사자가 그녀에게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 “억울하신가요?”
그때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 “억울할 게 뭐가 있나요. 내가 한 선택의 결과일 뿐인데.”
벨라는 로한의 말에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지금은 저택 식구들에게 키엘이 떠난 걸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가 문제였으니까.
그때 로한은 품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벨라에게 건넸다.
“…뭔가요?”
“전하를 그동안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머니 안에는 꽤 많은 금화가 들어있었다.
“가능하면 지금 있는 거처를 옮겨주시면 좋겠군요.”
“…네?”
“제 오래된 감으로는, 아가씨의 존재가 전하의 독이 되실 거 같네요.”
“입을 함부로 놀리면 안 되겠다는 감은 안 드나 봐요?”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아가씨의 목숨을 위협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거였다면 이렇게 따로 말씀을 드리지 않고 바로 처리했겠죠.”
누가 누구의 목숨을 위협할까.
로한은 품에서 약병 하나를 벨라에게 건넸다.
“기억을 희석하는 약입니다. 아주 오래된 기억처럼 흐릿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
“이걸 드시면, 앞으로 전하의 인생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여기겠습니다.”
벨라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벨라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실감 나진 않지만, 마지막이었다고 생각하고 인사까지 한 건데.
그래도 마계로 돌아가기 전, 키엘이 황궁에서 잘 지내는지 정도는 알 수 있을 거로 생각했었다.
“어차피 일어날 일입니다. 아가씨가 말씀하셨던 대로, 빨리빨리 해주면 더 좋겠죠.”
벨라가 칼릭스에게 했던 말은 부메랑이 되어 그녀에게 돌아왔다.
“정말 인연이라면, 언젠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벨라는 조용히 가운뎃손가락을 내밀어 대답했다.
* * *
저택으로 돌아온 벨라는 서재에서 마법사들에 관련된 책을 살펴보고 있었다.
‘어떻게든 인간계로 나올 수만 있다면.’
키엘이 늙어 죽을 때까지 수호신처럼 옆에서 지켜줄 수 있을 텐데.
로한이 했던 말도 건방지게만 들렸다.
‘인연 같은 소리 하고 앉아있네.’
며칠을 그렇게 찾아봤지만, 마왕을 소환했다는 마법사의 예시가 없었다.
‘하아. 왜 아무도 마왕을 소환 안 하는 거야. 완전 편리하고 좋은데.’
그때, 벨라는 자신의 뒤편에서 싸늘한 기척을 느끼고 돌아봤다.
복면을 쓴 사람이 돌아볼 줄 몰랐는지 몇 초 당황하더니, 벨라를 향해 날카로운 무기를 들이 내밀었다.
벨라의 위에서 ‘쾅’ 하고 소리가 들리고, 젠킨스가 서재의 문을 덜컥 열었다.
“아가씨!”
벨라는 암살자의 시체를 발로 차고 물었다.
“무슨 일이야?”
“모르겠어요.”
벨라는 로한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 “빨리 거처를 옮기시는 게 나을 겁니다.”
그녀는 서둘러 마계로 가는 소환진부터 꺼냈다.
“마계로 돌아가시게요?”
“아니. 비싼 물건은 일단 안전한 곳에 피신시키게.”
기껏 열심히 모아온 가구들을 버릴 수는 없잖은가.
벨라가 서재 밖을 나가자 피 냄새가 진동했다.
“얘들아, 이게 뭐니….”
“습격한 놈도 살려둬야 합니까! 이게 공주님이 말한 정당방위입니다!”
제일 신이 나서 흥분한 잔바르가 벨라의 잔소리가 시작될까 봐 변명부터 했다.
“아니, 하나는 살려둬. 그래야 물어보지.”
도대체 몇 명을 보낸 건지, 뒤죽박죽 섞여 있는 시체들 사이로 벨라는 숨이 붙은 심장 소리를 찾아 헤맸다.
“얘, 너희 어디서 보낸 거야?”
다 죽어가는 남자가 쿨럭거리며 대답했다.
“마… 마녀….”
“이웨르, 환각 좀 써봐.”
그러자 푸르 뒤에 숨어 있던 이웨르가 나타나 콧대를 높이며 도도하게 걸어왔다.
“엣헴. 몽마는 이럴 때 필요한 거라고용. 알겠어요? 잔바르 님?”
전투에 도움이 안 된다고 구박이라도 받았는지.
이웨르가 죽어가는 남자의 입에 입술을 맞추자, 남자는 눈을 한번 뒤집고 이웨르만 쳐다봤다.
“어디서 보낸 사람들이야?”
“황…궁에서.”
“어머, 제국에서 어떻게 알지? 아가씨가 전에 응접실 너무 얼려서 천족들이 안 걸까용?”
벨라는 입술을 깨물고 다시 물었다.
“여기 있는 애들 소속과 이름 다 말해.”
“그런 건 왜 물어봐용….”
혹시 이 일에 연류된 사람 중에, 소설 속에 중요한 인물이라도 있을까 싶어서.
“…로라, 페터, 한스….”
그리고 암살자가 내뱉은 열다섯 명의 사람 중, 세 명이 소설 속에 나오는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전부 키엘의 수족이 될 사람들.
둘의 연애에는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소소한 갈등을 만들어내는 인물들이었다.
벨라는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자의 숨을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반년이나 앞당겼는데….’
등장인물까지 얼떨결에 죽여버린 상황이었다.
그날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아가씨 괜찮을깡.”
“그러게! 밥도 안 드시고!”
이웨르가 서재 앞에 숟가락 하나도 안 댄 부대찌개를 보면서 걱정했다.
“이거 아가씨가 제일 좋아하는 건뎅….”
저택의 식구들은 그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이제껏 짜증을 내는 모습도, 화가 난 모습도 많이 봤는데 그때의 모습은 아직도 아무도 표현하지 못했다.
넋이 나간 듯한데, 화가 난 듯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중요한 건 그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도련님이 없어서 그런 걸까?”
“그딴 꼬마 녀석 없으니 속이 시원하네.”
“잔바르 님, 울지 말고 얘기하세용.”
“이건 눈물이 아니라 땀이다.”
“그나저나 도련님은 어디에 계실까용.”
“죽은 걸까!”
모든 진실은 이 서재 너머에 있지만, 감히 문을 열어볼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한 달이 흘렀지만, 저택의 식구들에게도 키엘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는데, 그의 일이라면 앞뒤도 재지 않던 벨라는 오죽할까.
“다들 여기서 뭐 하세요?”
이 저택에서 차분한 건 젠킨스뿐이었다.
“네놈은 반쪽이라더니 인간미도 없냐!”
그는 며칠간 쌓인 신문에서 ‘다시 돌아온 황태자’라는 기사를 읽었기에 키엘이 어디에 있는지는 잘 알았다.
“아가씨의 계획을 다들 잊었습니까? 도련님을 훌륭하게 키워서….”
“잡아먹는 거?”
젠킨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인간계를 침략하기로 했잖아요. 이웨르씨, 내기는 제가 이겼네요.”
“무슨 소리예용!”
“이웨르씨의 주장대로라면, 애초에 도련님을 안 내보냈겠죠.”
이웨르는 고개를 저었다. 이웨르가 보기에는 벨라가 키엘을 단순히 이용하려고 정을 주는 게 아닌 거라고 확신했다.
물론 그게 사랑이라고 하기엔 어려웠지만.
“아직 안 끝났거든용?”
이웨르는 벨라에게 직접 물어봐야겠다 생각했는지, 문을 벌컥 열었다.
“아가씨!”
한 달 만에 모습을 드러낸 벨라를 보고 다들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 아가씨, 괜찮으세요?”
“어? 어….”
벨라는 서재에서 온갖 책을 꺼내놓고 눈이 퀭한 채 그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아… 아가씨.”
“왜?”
“주무시긴 한 거예요?”
벨라가 그제야 창문 밖을 바라봤다.
“아, 벌써 아침이야?”
벨라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점심 조금 전에 먹은 거 같은데.”
“아가씨 지금 일주일째 아무것도 안 드셨는데요.”
일주일이라니.
벨라는 그 말을 듣고 일어섰다가 다리에 쥐가 나는 바람에 다시 고꾸라졌다.
“아가씨!”
“야! 들어오지 마! 밟지 마!”
벨라는 푸르의 곰 발바닥이 미끄러지며 정리해놓은 모든 걸 흐트러뜨릴까 봐 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더니 자신의 몸을 킁킁대며 맡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목욕물이나 좀 받아놔.”
“아가씨…. 괜찮으세용?”
“뭐가?”
벨라는 시체처럼 삐걱거리며 서재의 입구로 다가왔다.
“비켜. 밥 먹고 씻게.”
“잡아 드리겠습니다.”
걷다가 쓰러질까 봐 잔바르가 부축하려고 그녀의 팔을 잡았다.
“뭐야. 비키라니까.”
하지만 벨라는 앙상해진 팔로 뿌리치며 인상을 구겼다.
“아가씨 무서워요!”
“그러게요….”
그들이 저택에 오고 난 이후로 벨라가 무서워 보이었을 때는 많았지만, 지금은 정말 건드리면 폭발할 것처럼 보였다.
식당에 앉아 이웨르가 따뜻하게 데워준 부대찌개를 눈앞에 두고 벨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우연히 등장인물을 죽인 이후로 다시 소설을 살펴봤었다.
혹시나 자신의 존재가 이 소설에 무엇을 바꿔놓았을지 몰라서.
하다 보니 빠뜨린 게 많은 것 같아 지리책이며 역사책도 뒤져보기 시작했다.
벨라는 이 이상의 실수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녀가 이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이미 소설 속에 수많은 설정이 바뀌었다는 걸 실감한 이후로.
‘그게 마지막이 아니길 바랐는데.’
벨라가 한 숟갈을 뜨자, 이웨르는 조심스레 물었다.
“아가씨, 도련님은 어디 가신 거예용?”
숟가락이 멈췄다. ‘도련님’이라는 소리에 벨라는 비어있는 옆자리를 차분히 바라봤다.
전생에서 항상 같이 있던 친언니가 결혼하고 텅 빈 집을 봤을 때의 쓸쓸함이 떠올랐다.
지금도 그때와 같았다.
서로 아끼지만, 각자의 삶이 있다는 것.
다만 그때와 지금이 다른 건, 결혼한 언니는 볼 수 있을 때 볼 수 있었고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거지만.
벨라는 수저를 다시 들어 이웨르가 만든 음식을 한 입 먹었다.
‘키엘은 이거 너무 맵다고 했었는데.’
그러면서 이 음식을 좋아하는 벨라가 신기하다고 했었다.
“이거 너무 맵잖아.”
너무 매워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죄, 죄송해용. 다시 해올까요?”
“됐어.”
그러면서도 다시 한 입 먹고 휴지로 눈물을 닦았다.
‘그래.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어.’
죽었던 적도 있던 벨라였다.
그러니 이런 성숙한 이별은.
‘시간이 약이 되겠지.’
소설은 벨라가 역할을 수행할 때가 다가올수록, 그곳으로 몰아세우고 있었다.
* * *
한편 황궁으로 들어간 키엘에게 배정된 곳은 10년 전과 똑같았다.
입구에서부터 한참 계단을 걸어 올라가, 문을 두드리면 키엘이 철창으로 누구인지 확인하고 열쇠로 문을 연다.
그러면 방문자도 가지고 있던 열쇠로 문을 열었다.
“당분간은 암살의 위험이 있어서, 여기서 지내셔야 합니다.”
창살로 다 막아놓은 창문. 갑갑한 그 공간에서 키엘은 어떤 군소리도 하지 않았다.
“내가 배워야 할 것들, 다 가지고 와.”
그는 더 빠르게 적응해야 했다.
“과거에는 이제 연연해하시면 안 됩니다.”
키엘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로한이 가져다주는 책들을 빠르게 읽어내려갔다.
“다음.”
“이거 다 익히신 거 맞습니까?”
“그럼 문제라도 내보던가.”
로한은 비상한 키엘의 머리에 점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몇 달쯤 지나자, 키엘에게 다른 사람을 만나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키엘은 제일 먼저 후안 크루엘을 찾았다.
크루엘가는 돌아온 황태자의 편에 설 생각으로 한참 간을 보고 있던 터라 두 손 두 발을 들고 키엘을 방문했다.
영향력이 있는 슈리아 크루엘이 아닌, 망나니 같은 후안 크루엘을 부른 건 의아했지만.
후안은 처음 초대받은 황태자의 방에서 어리둥절하게 키엘을 보고 있었다.
분명 황태자인데, 감옥 같은 방이 웬 말인가 싶었는데.
“아… 그 동생.”
“우리, 구면이지?”
후안은 키엘의 정체를 알자마자 약아빠진 두뇌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꽤 숨어 사셨나 보군요. 그때 이후로 일리노 근처의 마탑은 다 찾아봤는데.”
키엘도 이 사람이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불안하지만, 벨라의 눈치를 믿어보기로 했다.
비록 연애 감정에는 일절 관심도 없지만, 다른 일에 라면 촉을 세우니까.
“벨라가 있는 곳을 알려줄게.”
“이렇게 순순히?”
키엘은 밀봉된 편지를 건넸다.
내용은 별거 없었다.
잘 지내고 있다는 내용, 간간이 연락하겠다는 거.
“위치가 노출되면, 그 사람이 위험한 거 아닌가?”
‘솔직히 벨라가 위험할 거 같진 않지만….’
로한의 감시를 피해서 벨라를 확인하려면 적어도 벨라에게 우호적인 사람이어야 하고.
벨라가 얼굴을 아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 성격에 황궁에서 왔다고 하면 의심부터 할 수도 있었다.
‘후안 크루엘이라고 믿어줄진 모르겠지만.’
그 후로 몇 날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후안 크루엘이 죽지 않고 돌아오길 기다리는 건 처음이었다.
‘제발….’
하지만 후안이 돌아왔을 때, 밀봉되어있던 편지는 그대로였다.
“왜 그대로 들고 온 거지.”
키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를 신뢰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답장이라도 받아올 줄 알았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뒤통수를 칠 거라 곤 생각도 못 했다.
“그 말을 믿으란 건가?”
아직 키엘은 그의 방 밖으로도 나갈 수가 없었다.
“정말입니다. 마을에 수소문했는데, 그곳에는 처음부터 아무도 안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키엘은 기가 찼다.
‘내가 거기 살았는데, 무슨 헛소리야.’
그가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황제의 감시 아래 있는 사람들이었다.
‘날 계속 속이는 걸지도 몰라.’
그러고도 남을 인간들이었다.
그렇게 키엘이 벨라에 대해 찾으려고 한 흔적이 보이면.
“자꾸 과거에 미련을 두시면 안 됩니다.”
황궁에서는 귀신같이 알아내 처단하곤 했다.
“이걸 드시면 좀 나아지실 겁니다.”
기억을 희미하게 한다는 약이었다.
키엘은 고개를 저었지만, 이미 수많은 완력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입을 벌릴 뿐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과거 이야기를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갇혀 지낸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키엘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아직 그가 만나본 적이 없는 쌍둥이 호위들.
그들은 황가와 아무런 연관이 없기에, 오히려 감시망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마법학교에서 최연소로 졸업한 리네가 그 공로를 인정받아 황궁에 초대받는 날이었다.
키엘은 조용히 리오가 오길 기다렸다. 10년 전의 그날처럼. 그때는 그저 무시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때마침 사람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자, 키엘은 문을 두드렸다.
“헉! 여기에 사람이 갇혀 있어!”
“…안녕.”
“너 무슨 범죄자니?”
“아니.”
키엘이 들었던 리오는 꽤 의리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성물을 모을 때도 쌍둥이들을 호위로 삼고 싶었던 거고.
그는 목에 걸린 목걸이를 철창 사이로 리오에게 건넸다.
“나랑 친구 할래?”
친구라는 말에 리오가 눈을 반짝였다. 키엘은 리오에게도 똑같은 주소와 편지를 보냈다.
적어도 리오라면, 살아 돌아오지 못할지언정 거짓말을 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기다리고 기다렸다. 10년 전 그때와 달리, 키엘은 황궁에서 원하는 성과 그 이상을 보여주며 그 감옥 같은 방을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기다려서 들은 답은 키엘이 원하는 게 아니었다.
“거긴 아무도 없었어. 하지만 혹시 몰라서 편지는 두고 왔어.”
“…고마워.”
더 캐보는 건 무리였다. 들킬 때마다, 황궁에서는 기억 희석 약을 들고 와 키엘에게 먹였기에.
기억 희석 약은 보통 누군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혹은 이별의 아픔이 큰 사람들이 찾는 약이었다.
잊게 해주는 게 아니었다.
마치 전날 저녁에 뭘 먹었는지 흐릿했던 것처럼, 시간이 지나서 가물가물하듯이 만들어주는 것일 뿐.
벨라가 생각한 대로 ‘시간이 약’인 셈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움만 쌓여가는 그에게는 독이 되고 있었다.
창밖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창살 사이로, 저 멀리 바다가 보였다.
‘벨라도 바다 보고 싶어 했는데.’
황궁에서 일하는 이들은 키엘이 내놓는 성과에는 집중했지만, 아무도 그 어린아이가 어떻게 견뎌내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벨라….”
밀물처럼 들이닥치는 아픔에 침대로 올라가 베개를 끌어안고 새어 나오는 소리를 겨우 참았다.
“우리는 꼭 다시 만날 거예요.”
누군가에게는 약이 된, 누군가에게는 독이 된 시간은 흐르고 흘렀다.
키엘이 감옥 같은 성의 꼭대기에서 지낸 지 3년.
키엘은 저택에서 그동안 공부했던 것들과 겹치는 내용이 많았기에, 비교적 빨리 실무를 따라갈 수 있었다.
“전하. 오늘 검토하실 서류들입니다.”
탁.
키엘은 조금 지친 눈으로 쌓인 서류들을 보았다.
이렇게 성과를 내보이고 있는데도, 그는 황궁 밖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성물을 모으면 마력을 되찾을 수 있다던데.”
황족들은 누구나가 다 마법을 쓸 수 있었다.
키엘 빼고. 그렇기에 분명 성물을 모으러 황궁 밖을 나가다가 시간이 되돌아갔었는데. 어째서인지 그런 말이 들리지가 않았다.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계십니다. 괜히 위험하게 나갈 이유는 없죠.”
황궁은 키엘이 오고 난 이후로 더 경비가 철통이었다. 10년 전보다 훨씬 더.
‘그때 괜히 탈출을 시도했나 봐.’
그가 실패할 때마다, 그는 다시 그 철창 속에서 한 달을 갇힌 채 보내야 했었다.
‘저택으로 가서 내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은데.’
하지만 그 마음은 숨기고, 키엘은 마치 과거를 잊은 듯 말했다.
“그래도 마력이 있으면 좋지 않겠어?”
“글쎄요. 전하께서 워낙 검술이 출중하셔서 굳이….”
로한은 제국에서 잘나가는 기사 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보기에도 키엘의 검술은 꽤 대단했었다.
“답답하시면 대련이라도 하실래요?”
키엘은 서류들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싫어도 로한이 대련을 제안할 때는 좋았다.
다른 이들은 감히 황태자 전하와 어떻게 겨루느냐고 하지만, 그는 온 힘을 다해 키엘을 상대했으니까.
기사들이 연습하는 곳에서 키엘은 검을 빼 들었다.
- “키엘, 우리 대련할까?”
검과 검이 부딪히는 순간만큼은,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간혹.
“전하께선 기본기도 탄탄하신데, 응용력이 대단하십니다.”
기사들이 칭찬할 때면 그 기분이 유리창처럼 깨지는 기분이었다.
“스승님이 도대체 누구셨는지….”
아마 로한이 스승이라 생각하고 더 추켜세우려는 모양이었는데.
키엘은 들고 있던 검을 내던지며 차갑게 대답했다.
“그만 할래.”
키엘은 1년 반 전부터는 황궁을 돌아다니는 게 허락되었는데, 그때부터 도서관에 가서 ‘동물왕국’에 대한 흔적을 열심히 찾았었다.
- “아, 동물왕국이면 거기 말씀하시는 거예요?”
- “어디?”
- “수도 옆에 있는 큰 동물원요.”
하지만 나오는 게 하나도 없었다. 아는 사람도 없었다.
마치 상상 속에 나오는 뜬구름 잡는 얘기들뿐이었고.
그나마 리오가 조사를 도와주고 있지만, 영 진전이 없었다.
- “아무리 조사해도 안 나와. 역시 동물왕국이 아니라, 정말로 동 왕국의 사람 아닐까? 과거에서부터 이 시간으로 넘어온 사람들.”
- “시간을 거스르는 게 말이 돼?”
- “물론 말이 안 되지만.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게, 어쩌면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다는 거 아닐까 해서.”
동 왕국은 이미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왕국이었다. 무려 100년 전에.
기억 희석 약 때문인지, 점점 기억은 흐릿해져 갔다.
‘그때 모든 일이 꿈같아.’
마을 사람들도 그들에 대해 기억하는 바가 없다고 하던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너무 힘든 시절을 보내서 혹시나 그가 지어낸 망상이었을까.
하루하루 버티다 오늘처럼 벨라를 생각하게 하는 단서 하나라도 발견하는 날이면.
유일하게 그 시절이 허구가 아니라고 알려주는 성검을 껴안고 이른 잠에 빠졌다.
* * *
키엘이 없는 악마들의 저택은 마계를 떠올리기에 충분했었다.
“아쉽지만 인간이었던 도련님이 없으니 제가 특별히 별미로 준비해봤어요!”
“오. 역시 푸르.”
“저희 뒷산에서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원숭이 뇌랍니다!”
“뭘 좀 아는군. 자연 방목한 짐승이 맛이 제일 좋지.”
젠킨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벨라의 눈치를 살폈고.
“자연 방목이 아니라 그냥 야생짐승 잡아 온 거 아닌가요?”
벨라는 보자마자 헛구역질부터 나왔었다.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품질관리 잘된 뇌로 가지고 구해볼게요!”
“이웨르는 밥 안 하고 어디 간 거야?”
“짠! 저 왔어용! 저도 도련님 없으니까 아쉽긴 한데 오랜만에 피로 목욕하니 너무 좋네용.”
하지만 그들도 몰랐다. 키엘이 없어서 벨라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야, 이 ㄱ#$%ㅅ&#ㅆ*# !!”
악마들이 본능적으로 굴수록 벨라의 원작대로 완결에 대한 소망은 점점 커져만 갔었다.
‘절대로, 원작이 바뀌게 두진 않을 거야.’
헤어진 건 슬프지만, 앞으로 나가야 할 일이었다.
이 소설은 어차피 로판이고, 키엘과 로잔느가 만나서 꽁냥만 하면 제대로 완결이 될 터였다.
그렇기에 처음 습격이 있었던 후로 두 차례 정도 암살자가 저택에 찾아왔을 때, 벨라는 이사를 더 미룰 수 없었다.
“얘들아, 여행 가자.”
그들은 멀쩡한 집을 놔두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여행을 시작했다.
하지만 존재만으로도 작은 실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우연히 등장인물을 한 명 더 죽여버렸을 때.
“얘들아, 그냥 멀리 가자.”
제국에서 점점 멀어지던 여행은 어느덧 대륙의 끝에 있는 사막 왕국 ‘화국’까지 도착했다.
지난 3년간 그들은 그곳에서 꽤 호화롭게 보낼 수 있었다.
처음엔 무슨 인간계를 여행하느냐고 툴툴거렸던 잔바르가 사막의 고귀한 복장으로 갖춰 입고 전통 음료를 마시며 감탄했다.
“약 1100년 전에 이 근방에서 대단히 큰 전투가 일어났었대요. 아직 그 흔적이 남아 있다는데, 그거 보러 가실래요?”
젠킨스도 여행을 달가워하진 않았지만, 새로운 곳에 갈 때마다 여행 책자를 펼쳐서 설명해 주곤 했다.
“1100년 전 전투라면 ‘모래의 전쟁’이겠군.”
“잔바르 님께 말한 거 아닌데요.”
“나도 네게 답한 거 아니다.”
그리고 벨라가 보기에 젠킨스와 잔바르의 사이는 여전히 좋아 보이지 않았다.
물론 벨라만 그렇게 볼 뿐, 푸르는 ‘드디어 화해할 기미가 보이네요!’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많아 입이 근질거렸지만, 푸르는 끝까지 자신의 곰 인형 임무를 완수했다.
이웨르는 키엘이 없으니 더 고삐 풀린 망나니처럼 밤마다 구릿빛의 근육 남들을 만나러 다녔다.
“아가씨! 보고 싶었어용!”
“보고 싶긴 개뿔.”
벨라는 자신에게 들러붙는 이웨르의 얼굴을 손으로 치우며 인상을 찡그렸다.
“힝. 아가씨, 여기서도 살 거 있어용?”
“일단 옷은 좀 샀고. 여기 이 해먹은 몇 개 더 사야겠다.”
‘화국’의 수도인 ‘호푸’의 시장은 갖가지 물건들이 넘쳐났다. 각종 장신구부터 시작해서 음식, 심지어는 살아있는 동물들까지 팔고 있었다.
벨라는 시장을 돌아다니다가, 작고 귀여운 선인장을 모아놓은 가게 앞에서 기웃거렸다.
“오, 이거 귀엽다.”
“어서 오세요. 딱 봐도 제국 사람인 거 같은데?”
꽃집의 주인이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이국의 손님이 반가운지 신발도 구겨 신고 맞이했다.
다들 화국의 옷을 입고 있는데 그런 건 어떻게 알았는지.
벨라는 조금 신기하게 꽃집의 주인을 바라봤다.
“이건 저희 호푸의 명물입니다!”
“지나가는 가게마다 다 명물이래.”
“아니에요, 아가씨가 보고 있는 ‘화망장’은 집마다 필수품으로 가지고 있는 선인장입니다.”
주인은 똑같은 모양으로 전시된 선인장과 꽃이 핀 선인장을 하나씩 벨라에게 보여줬다.
“이게 키우기가 정말 힘든데, 꽃이 피면 키우면서 간절히 바라던 게 이루어진답니다.”
벨라가 피식하고 웃었다.
“키엘, 소원 들어준대.”
무슨 소원이 그리 많은지, 소원 들어준다고 하면 제일 먼저 나서서 하겠다고 했는데.
‘아….’
벨라의 입가에 점점 미소가 사라졌다.
여행하면서도 가끔 키엘이 떠올랐다.
‘진짜 나도 극성이긴 하네.’
벨라는 서둘러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생각에 빠지기 전에, 몸부터 움직여야 했다.
“이거 살게요.”
“물은 일주일에 한 번, 그리고 하루는 그늘에 두고 하루는 햇빛에 번갈아 두어야 해요. 그래야 꽃이 피더라고요.”
벌써 3년이나 지났는데.
습관처럼 옆에 있듯이 대하는 게, 아직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벨라는 잠시 하늘을 보며 손가락으로 하나씩 세어보기 시작했다.
“오늘이 몇 월 며칠이야?”
“6월… 3일요.”
“아. 몇 년도야?”
“1162년이네요.”
곧 있으면 이 소설이 시작되는 1163년이었다.
“아. 이제 때가 됐네.”
“어느 때요?”
벨라가 마계로 돌아가게 되는 때.
소설 대로 키엘이 황태자로서 인정받기 위해 성물을 모으러 황궁을 나오는 때.
그리고 벨라가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운명에 대항해 보는 때였다.
벨라는 화망장을 젠킨스의 가슴에 올려놓고 웃었다.
“제국으로 돌아가자.”
* * *
벨라는 어느새 제국으로 돌아와 황궁이 보이는 큰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뭔 신성력으로 다 결계를 쳐놨대.’
고양이로 변하는 건 싫었지만, 아무도 경계하지 않아서 좋았다. 물론 고양이로도 황궁으로 들어가는 건 무리였다.
소설은 원작대로 흐르는 힘이 강하다고 했었다.
키엘은 반년을 일찍 황궁에 들어갔으니, 어쩌면 성물을 찾는 것도 반년 일찍 시작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원작이 아예 다 틀어져 버리지.’
계절에 따라 로잔느와의 연애 서사의 속도가 달라질 테니까.
지난 3년간 최대한 원작대로 흘러갈 수 있게 빠져줬다.
이럼에도 만약 뒤틀린다면, 그때는 정말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다 생각했다.
하지만 원작대로 키엘이 1163년 봄에 성물을 찾으러 나온다면.
‘그때는 깔끔하게 미련도 버리는 걸로.’
밤에는 고양이로 변해서 혹 키엘이 나오는지 확인하다가, 낮이 되면 아무에게도 영향을 끼치지 않게 사람으로 돌아와 쉬곤 했었다.
벨라는 마지막으로 소설을 한 번 더 정독하며 키엘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와…. 또 집중 안 되네.”
특히 로잔느와 키엘이 서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들이 나오면 하차하고 싶었다.
“로잔느는 왜 이렇게 착한 거야?”
키엘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슈리아는 여전히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런 슈리아를 철벽 치는 키엘을 볼수록 흐뭇했고.
‘아이고, 잘한다. 내 새끼.’
하지만 너무 순진해서 악의도 선의로 받아들이고 함정에 빠지는 로잔느는 착하다 못해 멍청해 보였다.
물론 그런 선한 마음에 키엘이 반하기는 하지만.
자꾸 속이 뒤틀리는 게, 로잔느에게 키엘을 맡기고 싶지가 않았다.
“에휴. 내가 왜 이럴까.”
말은 그렇게 하지만, 벨라는 이 기분이 뭔지 잘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도 느낀 적이 있었으니까. 형부한테.
‘나 너무 못된 시누이 같다.’
그게 아니면 이 감정이 설명되지 않았다.
그렇게 무려 3년간 질리도록 봤던 소설.
<알고 보니 황태자님>의 시작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슬슬 납치할 때가 됐네.”
반년 먼저 황궁에 들어갔어도, 키엘은 나오지 않았다.
벨라는 1162년의 해가 넘어가기 전까지 꼬박 밤을 새우고, 마음을 굳게 잡았다.
“납치해야겠네.”
소설 속, 원작의 로잔느는 어떤 산적들에게 납치를 당하고 키엘이 그걸 구해준다.
그리고 그 산적들이 가지고 있던 물품 중 하나가 신성력이 있던 물건이라, 키엘은 그걸 전리품처럼 황궁에 갖다 바치게 된다.
벨라는 여러 번 읽고, 다시 데이저로 가서 확인해보다가 한 사실을 알게 되었었다.
그 산적이 몇 해 전 벨라의 마차를 습격했던 무리라는 걸.
이미 한 명 빼곤 다 죽여버린 그 산적 무리.
이제는 활동을 안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 이게 키엘의 운명이니까. 내가 저지른 실수는 내가 수습해야지.’
그렇기에 소설 속 여주인공을 납치할 계획을 세웠다.
납치는 하되, 키엘과 로잔느가 만나는 순간 아이들을 다 풀어주고 그들은 자취를 감춰야 했다.
벨라는 몇 번이나 검토하고, 완벽한 계획을 세웠다.
첫째로 산적들의 얼굴마담이 될 사람이 필요했다. 어렵진 않았다. 소설과 절대적으로 상관없는 화국 용병들을 고용했다.
“자, 얘들아. 연장 확인해.”
둘째로 소통할 만한 게 필요했다.
무전기가 이 세계에 있을 리가 없고, 벨라는 그간 공부하면서 알아냈던 지식을 총동원해 비슷한 마법 도구 하나를 만들어냈다.
실로 연결한 종이컵 전화기의 원리와 비슷했다.
인간계의 마법은 벨라가 조절하기 힘드니, 마계의 마법을 이용하기로 했다.
몽마가 인간의 꿈에 들어가는 원리를 적용해 가상의 꿈 공간을 만들어내고, 마법 도구를 이용해 도구만 소환하면 현실에 있는 도구가 꿈 공간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세기의 발명이 될 수 있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어내는 걸 보고 놀라는 건 젠킨스 뿐이었다.
“아가씨는… 가끔 보면 진짜 대단하시네요.”
하지만 벨라는 자신의 머리로 무전기를 만들지 못하는 걸 더 안타깝게 생각했다.
‘영화에서는 고철로 슈트도 만들던데….’
간편한 무전기와는 다르게 번거롭게 늘 소환진을 유지해야만 하는 마법 도구였다.
반면 잔바르는 거추장스럽게 들고 다녀야 하는 게 피곤한지 인상을 찡그렸다.
“이런 게 왜 필요합니까? 그냥 납치하면 되지.”
“그러니까 무식한 마족이란 소릴 듣지.”
벨라의 일침에 이웨르가 쿡쿡 웃으며 푸르의 등을 쳤다.
“그러게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니까용.”
제일 처음 로잔느의 설정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다른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
경찰이 납치라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하지만 오히려 경찰이었기에 누구보다도 계획을 제대로 세울 수 있었다.
범인을 잡는 처지니, 절대 잡히지 않을 방법을 생각하며.
도덕심이 하락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 * *
10년 전과 다르게, 키엘을 반대하는 무리는 별로 없었다.
그건 그동안 그가 꽤 성과를 내보였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황궁 밖으로 나갈 기회를 잃어서 포기하던 찰나였데, 로한은 1163년이 되자마자 ‘성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게 아무래도 좋은 방법 같습니다. 이대로는 책봉식이 계속 미뤄질 것 같아요.”
마치 10년 전처럼. 황궁을 나가야 하는 게 운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분위기는 파도에 휩쓸려갔다.
키엘은 최대한 관심이 없는 척하며, 로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직도 벨라를 찾아다닌다는 걸 안다면, 감시역만 더 붙을 테고.
‘또 그 약을 먹이겠지.’
이제껏 수차례 먹어왔었다. 꿈에서도 벨라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져 가기에, 더는 기억 속으로 사라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틈을 보고 저택으로 가야 해.’
그렇게 키엘이 처음으로 황궁으로 나가던 날이었다.
‘혹시 또다시 시간을 거슬러 돌아가게 될까.’
그런 거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때 받았던 기습도 없었고, 섬광도 볼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쌍둥이 호위 리네와 리오, 그리고 로한만이 이 여행길에 나서게 되었다.
‘10년 전이랑 구성이 다르네.’
그때는 로한 말고 페터가 있었다. 이상하게도 페터는 그가 황궁에 있을 때부터 보이지 않았지만.
다소 호위가 적다고 생각했지만, 로한은 쌍둥이들의 실력을 믿었다.
리네는 엘리시아 마법학교에서 최우수 성적을 거두며 졸업한 우등생이었고, 리오 또한 그에 못지않은 치료사였다.
게다가 그는 누구보다 키엘을 믿었다.
황제는 누군가 황태자를 해칠까 봐 그를 우리 안에 넣어두었지만, 로한이 보기에 키엘은 그 우리가 전혀 필요 없을 만큼 강했다.
엘리시아 제국은 건국부터 화려한 역사를 가졌다.
초대 황제이자 사후 전쟁의 신으로 추앙된 케이지 엘리시아. 대마법사이자 사후 파멸의 여신으로 추앙된 오르디와 함께 제국을 건국한다.
건국부터 신화로 시작된 이 제국은 1000년이 넘도록 숱한 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혔고,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웠다.
대부분의 황족들은 마치 ‘우수한 유전자’를 타고난 듯 모든 분야에서 뛰어났다.
그건 남, 여를 구분하지 않고 두드러진 점이라 타국과는 달리 황녀가 황제가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항간에는 초대 황제도 여자였다는 소문도 있고.
어쨌든 그래서 그들은 걸핏하면 ‘신’으로 추앙받기 일쑤였는데.
그래서인지 훌륭한 자질을 가진 황제임에도 역사상 황족들의 평가는 ‘매우 뛰어난 천재 아니면 이용당하기 쉬운 바보’로 평가된다.
그리고 키엘은 마력만 없을 뿐, 충분히 황족의 피를 스스로 증명하고 있었다.
“다 모였네.”
로한은 키엘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허름한 옷을 입어도 귀티가 나네.’
그간 평민으로 살았을 텐데, 준비해둔 옷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성물이 있을 만한 곳은 있어?”
“아, 네. 몇 군데 알아봐 뒀습니다.”
로한이 목을 가다듬고 책상 위에 지도를 펼쳤다. 핀으로 여섯 군데 정도를 찍으며 한군데씩 설명하기 시작했다.
키엘은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며 듣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조사가 필요한 사건입니다.”
로한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마저 얘기했다.
“10년 전쯤에 헤리티아 신전에서 이국으로 선교하러 가던 중에 사제들이 실종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헤리티아 신전.
키엘은 그 명칭을 듣자마자 가슴이 턱 하고 막혔다.
오래전에 마차 안에서 그 웅장한 신전의 모습을 멀리서 보고, 벨라와 약속했던 게 떠올랐다.
‘벨라랑 가보고 싶었는데.’
키엘은 자신의 손이 떨리는 게 느껴져 주먹을 꽉 쥐고 팔짱을 꼈다.
“인근의 산적에게 당한 게 아니냐는 소문이 있지만, 확인해봐야 합니다. 몇 년 전부터 산적이 활동한 적도 없었고요.”
“단서가 너무 없네.”
“그래서 차라리 용의 계곡을 먼저 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신전 인근의 도시….”
로한이 지도에 손가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데이저로 가서 단서를 좀 더 찾아보겠습니다.”
도시 데이저.
그때 여름 축제를 하였던 곳이었다.
헤리티아 신전과 데이저.
단지 이 두 명칭만 들었을 뿐인데도, 키엘은 마치 그 여름 축제의 해로 시간이 돌아간 것 같이 먹먹함이 느껴졌다.
‘…보고 싶어.’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이 폭발할까 봐 키엘은 입술을 깨물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전하?”
“데이저는 내가 갈게.”
키엘이 대답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역시 저택부터 먼저 가야겠어.’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벨라를 봐야 했다. 데이저로 간다고 하고 저택부터 가려고 했다.
그때 로한이 말했다.
“그럼, 저는 하루만 여기 머물러서 정리하고 바로 데이저로 가겠습니다.”
키엘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넌 그냥 용의 계곡으로 가란 말이야.’
* * *
키엘은 데이저에 도착할 때까지 이상한 기분이 계속 들었다. 살기는 아닌데 누군가 자꾸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
“리네. 근처에 암살자라도 있어?”
“음, 글쎄.”
말을 타고 가다가 리네가 멈춰 섰다.
“딱히 우리를 보는 기척은 없는데?”
“그래?”
오랜만에 느껴보는 바깥 공기 때문인지, 키엘은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그냥 내가 예민한 건가.’
다시 말을 타고 나란히 걷다가, 키엘은 궁금한 게 생겼다.
“리네, 키가 많이 컸네?”
“그러는 키엘도 1년 새 엄청 컸네. 한 10cm는 큰 거 같은데?”
“키 같은 게 뭐가 중요해.”
1년 전에 비해 하나도 크지 않은 리오가 발끈해서 투덜거렸다.
“이제 여기서 리오, 네가 제일 키가 작네.”
“아니거든?”
그러면서 리오가 리네의 말의 엉덩이를 치자, 리네의 말이 깜짝 놀라 앞으로 달려갔다.
“야! 리오 프로하! 너 뒤진다, 진짜!”
키엘은 이 쌍둥이 남매가 좋았다.
처음 그들에 대해 알았을 때는 그저 실력이 좋은 아이들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황궁에 들어오고, 리오와 친하게 지내고 난 이후로 키엘이 황궁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자들이었다.
이들을 보고 있으면, 오래전 시끌벅적했던 저택의 사람들이 떠올랐다.
“키엘, 그나저나 기분 좋아 보이네.”
“응. 너무 오랜만에 밖에 나온 거라.”
“좋아. 기왕 얻게 된 외출이니까, 성물도 찾고 신나게 놀자.”
키엘이 웃음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 그 저택에 가보고 싶은데.”
“데이저랑 가까우니까 괜찮겠네, 하지만 로한을 따돌릴 수 있겠어?”
“하… 그걸 좀 생각해봐야겠어.”
로한은 분명 하루 정도 있다가 데이저로 출발한다고 했다. 서두르다 보면, 그가 도착하기 전에 저택으로 갔다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 * *
키엘은 데이저에 도착하고 난 이후부터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바닥과 집들, 나무들마저 몇 년 전 방문했던 그때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일단 여관에 말부터 둬야 할 거 같은데.”
“여관이야 아무 데나 가면 되지.”
쌍둥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여관으로 가려는데, 키엘이 붙잡았다.
“아냐…. 저기.”
키엘이 손으로 가리킨 여관은, 꽤 비싸 보이는 고급 여관이었다.
“우리 신분 숨기고 다니는데, 저런 데 가도 돼?”
“저기 갈 거야.”
키엘은 말에서 내려 곧장 여관 ‘붉은 장미’로 걸었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추억이 하나씩 발밑에서 꽃을 피우며, 그의 다리를 붙잡고 장미처럼 덩굴을 만들며 올라왔다.
‘아. 여기서 풍등을 날렸는데.’
강을 건너는 다리 위에서 키엘은 파란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때 소원을 고쳐 쓰지 말 걸 그랬나 봐.’
젠킨스가 직접 쓰겠다고 해서, 원래의 소원을 지우고 ‘황태자가 되는 것’이라고 적었었다.
몰래 적었던 ‘벨라와 영원히 함께 있게 해주세요.’란 소원은 빌어서도 안 되는 것이었을까.
문득,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그곳엔 벨라가 있었다.
열두 살의 키엘과 함께 춤을 추던 열네 살의 벨라가.
춤을 추는 게 어색했던 두 사람은 어느새 무리에 동화되어 밝게 웃으면서 따라 하고 있었다.
- “키엘, 나중에 사교계를 휩쓸겠는데?”
- “정말요?”
벨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휩쓸기보다는 휩쓸리고 있어요. 황태자란 웃을 일이 별로 없는 일인가 봐요.’
키엘은 천천히 그 환영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쩌면 그곳에 아직 벨라가 숨을 쉬었던 공기 한 줌이라도 남아 있을까 봐, 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