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푸르라고 하기에는 많이 큰 곰이었다. 키엘은 조금 놀랐지만, 천천히 허리춤에 있는 단검에 손을 댔다.
그때 그 곰의 뒤로 푸르가 불쑥 하고 나타났다.
“우와! 저 도와주시러 온 거예요?”
“푸르?”
“방금 제 친구가 된 … 이름이….”
그 큰 곰은 양팔로 장작을 가득 안고 있었다.
“이름이….”
계속 고민하는 푸르의 앞에서 키엘이 장작 여러 개를 주워다가 말했다.
“그, 그만 갈래?”
“네! 가자, 친구!“
“그 곰도 같이 가게?”
“네! 제가 새로 사귄 친구 소개해줘야죠!“
키엘은 신나서 곰과 함께 텐트로 향하는 푸르의 뒷모습을 보며 마른 입술을 적셨다.
‘벨라가 싫어할 거 같은데….’
한편 벨라는 잔소리를 전부 뒤로 하고 불안하게 키엘의 빈자리를 응시했다.
‘내가 너무 걱정이 많나?’
젠킨스의 말을 들을수록 벨라는 오히려 자기감정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었다.
‘확실히 브웬 같은 애라면 걱정도 안 했겠지.’
검술 교실에 오지도 않는 그 녀석은 키엘과 싸워도 질 게 뻔한데.
‘키엘이 못미더운 건 아닌데 왜 걱정이 될까.’
때마침 멀리서 푸르가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키엘은?’
키엘의 목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아, 혹여나 오지 못한 걸까 봐 벨라는 서둘러 뒤를 돌았다.
“장작 가지고 왔어요!”
‘아… 다행이긴 한데.’
키엘이 그저 말없이 걸어오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곰과 함께.
벨라는 목구멍까지 쌍욕이 나왔지만, 키엘의 앞이라 차분히 숨을 내쉬었다.
“아까 나보고 극성이라고 한 젠잔 새끼, 입수하고 와.”
“네.”
군말 없이 젠킨스와 잔바르는 호수 속으로 첨벙 하고 들어갔다.
그리고 벨라는 조용히 손짓 하나로 우뚝 서 있는 곰의 머리를 그대로 잘랐다.
푸르는 옆에 머리가 떨어진 곰을 한번 보고 다시 벨라를 쳐다봤다.
“제… 친구였는데.”
“…….”
“같이 놀자고 했는데….”
“여기가 동물원인 줄 알아?”
그리고 곧바로 키엘에게 다가가서 그의 안전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키엘, 혹시 어디 다쳤어?”
“괜찮아요.”
“내가 너를 너무 걱정하는 걸까?”
키엘은 순간 이웨르를 쳐다봤다. 자신의 마음을 유일하게 눈치챈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웨르가 고개를 젓자, 벨라를 꼭 끌어안고 말했다.
“난 걱정해주는 벨라도 좋아요.”
벨라가 키엘을 더 꼭 안았다.
“아유, 귀여워라. 내 새끼.”
“귀엽다는 거는… 싫어요.”
“아유, 예뻐라.”
키엘은 예쁘다는 말은 더더욱 싫었다. 불만을 표하려고 볼에 공기가 빵빵하게 들어갔는데 벨라가 먼저 선수 치듯이 말했다.
“우리 푸르가 잡아 온 곰이나 요리해 먹을까?”
“아가씨, 어떻게 동족을 먹으라고 그래요!”
“그럼 넌 먹지 마.”
모닥불 앞에 옹기종기 모여 따뜻한 불을 쬐며 곰고기를 구워 먹었다.
“역시 이웨르가 진짜 요리 하나는 끝내주게 잘해.”
“제가 누누이 말하죠, 제가 사랑받는 비결은 바로 이 요리라공!”
그런데 푸르는 끝까지 고기를 먹지도 않고 울상을 짓고 있었다.
“푸르, 좀 먹어.”
“어떻게 동족을 먹어요….”
“얘, 네 동족 아니잖아.”
“아! 그렇죠!“
단순한 건지, 멍청한 건지. 푸르는 신나서 곰고기를 열심히 뜯기 시작했다.
‘마계에선 잘만 먹으면서….’
식사를 다 마치자, 어느덧 어둠이 찾아오고 달빛이 호수의 물 위에서 일렁였다.
“불 끄면 별이 더 잘 보이겠다.”
벨라가 손을 들자, 모두가 놀란 토끼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불을 어떻게 켜시려고요?”
“마법으로 불붙여보면 되지!”
“전 반대합니다.”
이 순간에는 모두가 한마음, 한 뜻이었다. 심지어 믿었던 키엘마저 조심스레 벨라의 옷자락을 잡고 말렸다.
하지만 이미 모닥불 위로 모래를 덮어버린 뒤였다.
성격 급한 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칠흑 같은 어둠이 다가왔다가, 이내 달빛에 점점 눈이 밝아졌다.
“…하아.”
젠킨스의 한숨이 들렸지만, 벨라는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뭐, 어때. 대신에 은하수가 보이잖아?”
키엘만이 벨라의 손끝을 따라 우러러봤다.
처음 만났던 날에도 하늘에는 봄의 별자리가 가득했었다.
그때는 황궁에 돌아가기 전까지만 이라도 버티려고 했는데.
언제부터인지 점점 스며들어, 온 하늘이 벨라의 별자리로 가득 메워간다.
“얘들아, 잘 봐. 동물왕국에서는 보기 힘들게 아름다우니까.”
벨라가 닦달하자 풍경에 감상할 감성은 없는지, 잔바르가 제일 먼저 투덜거렸다.
“달은 동물왕국이 훨씬 더 큽니다.”
꼭 크다고 아름답다는 법은 없는데. 잔바르의 말에 다른 마족들도 한 마디씩 덧붙였다.
“친구들 보고 싶네용.”
“저도요! 아가씨, 우리 언제 돌아가요?”
푸르의 말에 벨라는 코끝으로 시린 바람이 느껴졌다.
호수에 비쳐 빛나는 몽환적인 별빛들이, 마치 이제 꿈을 깨라는 듯 산산이 부서진 유리 조각처럼 보였다.
* * *
차일피일 미루던 지난 시간이,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된 거 같은데.”
키엘이 알아두어야 할 지식은 이미 습득했고, 평민과 노는 법도 배웠다.
거기다 황태자로 받을 기초적인 교육도 맛보게 했으니, 꽤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젠킨스는 벨라가 극성이라고 하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객관적으로 키엘에 대해서 평가하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평가하는 것도 극성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처음에 키엘을 데리고 왔을 때는 눈앞이 캄캄했는데.
어느덧 보내야 할 때가 되니, 왠지 시원섭섭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열네 살이 되겠네.’
언제 그렇게 시간이 훌쩍 지난 것인지.
- “아가씨는 너무 극성이에요. 도련님은 혼자 하는 걸 더 좋아한다고요.”
젠킨스의 잔소리는 듣기 싫었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그렇게 보면 나도 똑같았는데.’
전생에서 그녀의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시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났던 친언니가 학업을 포기하고 그녀를 위해 생계를 책임졌었다.
- “홍, 대충 라면 같은 걸로 때우지 말고. 밥 좀 제대로 챙겨 먹어.”
언니는 벨라가 독립을 하고 경찰이 되고 난 후로도, 여전히 열다섯 살 동생으로만 여겼었다.
그건 아마 언니가 할머니가 되어도 마찬가지였을 테지.
벨라는 천천히 눈을 감고 몰래 새어 나오는 웃음을 여유 있게 만끽했다.
‘오랜만에 언니랑 시윤이 보고 싶네.’
다들 잘 지내고 있을지.
‘시윤이가 여기 오면 정말 좋아하겠다.’
세 살배기 조카는 동물을 그렇게 좋아했다.
‘말하는 곰도 있고, 표범도 있으니….’
벨라는 ‘으악’하고 죽는시늉을 하면 쪼르르 달려와 ‘이모 죽지 마’하던 조카.
- “너 크면 이모 섭섭해서 어떡해. 영원히 세 살로 머물러주면 안 돼?”
그때는 작별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죽었지만, 지금은 이 소설 속에 빙의 되어 뜻하지 않게 좋은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나한테는 인사할 시간이 있으니까.’
애초에 마계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어야 할 운명이었는데.
그때 벨라의 서재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벨라, 대련해요.”
실수로 꺼버린 모닥불이 발견한, 은하수가 서 있었다.
“응. 그럴까?”
* * *
어느덧 날이 따뜻해지는가 싶더니, 얼음 없이는 살기 힘든 무더운 여름이었다.
“아가씨의 마법이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네요.”
일전에 벨라가 얼음 만들려다가 응접실을 아이스방으로 만들었는데, 저택 식구들은 틈만 나면 이 응접실로 와서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너무 더워요. 털 다 밀고 싶어요!“
“올해 여름은 너무 더워용….”
“넌 그렇게 옷을 벗고 있으면서도 덥다고 하나. 공주님이 보시면… 됐다.”
잔바르가 이웨르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련님도 아무 말 안 하는데, 잔바르 님이 왜용!”
맞은편에 앉아 있던 키엘은 이웨르를 힐끔 쳐다보더니 가볍게 혀를 차고 다시 책을 읽었다.
“도련님은 그냥 포기한 거 같은데요.”
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동물왕국 사람들의 행패에 면역된 터였다.
때로는 그렇게 잔소리를 하는데도 고쳐지지 않는 동물왕국이 신기하고, 때로는 지칠 법도 한데 볼 때마다 열을 내는 벨라도 신기했다.
“아가씨 오면 옷 입으면 되죵!“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벨라가 문을 벌컥 열었다.
“하, 왜 이렇게 더워.”
모두가 벨라의 잔소리를 예상하며 이웨르를 쳐다봤다. 놀랍게도 마술쇼에 나가도 될 정도로 빠르게 그녀는 옷을 입고 있었다.
“다들 여기서 뭐 해? 일 다 했어?”
이웨르에게로 향할 잔소리가 그들에게 해일처럼 밀려올 걸 직감한 젠킨스는 벨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번에도 여름 축제 가실 거죠? 미리 마차를 빌려놓을까요?”
“아…. 마차. 우리도 그냥 마차를 하나 사버릴까?”
“사는 건 문제 안 되는데, 말은 누가 관리합니까?”
“…네가?”
키엘이 벨라와 대련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 젠킨스에게 여유시간이 꽤 많아졌다. 그는 그 여유를 말을 돌보는 데 쓰고 싶지 않아 서둘러 벨라에게 제안했다.
“이번에 크루엘 공작가에서 데이저에 예산을 많이 쏟아서 더 크게 축제를 한다던데요.”
“오, 그래?”
지난번에 실망했던 불꽃놀이도 더 화려해지겠지.
벨라가 활짝 웃으며 말하려던 찰나에, 키엘이 책을 탁하고 덮으며 말했다.
“거긴 가봤으니까, 다른 데로 가보는 건 어때요?”
“왜? 불꽃놀이도 엄청 크게 할 거 같은데. 작년이랑은 다를 거 같아.”
하지만 벨라는 점점 말할수록 기대에 찬 모양이었다.
키엘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이를 꽉 깨물었다.
지난 1년 동안, 혹시나 크루엘가에 갈까 봐 노심초사였었다.
‘아무래도 벨라한테 관심 있는 거 같은데.’
데이저로 가면 혹시라도 후안 크루엘과 마주치게 될까 봐 걱정이 되었다.
물론 시간이 꽤 지나서 후안이 벨라를 잊었을 수도 있다. 키엘이 기억하는 그는 꽤 많은 여자를 만나고 다녔으니까.
“키엘, 작년에 갔으니까 올해는 더 재밌게 놀 수 있지 않을까?”
어느새 벨라는 키엘의 옆에 앉아 손가락으로 키엘을 쿡쿡 찔렀다.
마치 고양이가 간식이라도 달라는 듯 눈빛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있었다.
이웨르의 헐벗은 몸보다, 이 눈빛이 더 사람을 긴장시키고 홀린 듯이 따라가게 된다.
그의 직감은 후안 크루엘을 만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그….”
결국 키엘이 '그래요'라는 말이 나오기 직전에, 젠킨스가 손가락을 튕기며 그를 구했다.
“아! 아가씨, 검술 교실의 메리가 재밌는 얘기를 하던데요.”
메리는 검술 교실에 다니는 아이 중에서도 벨라가 특별히 관심 있게 보는 여자아이였다.
제발로 검술을 배워보고 싶다며 찾아온 아이.
-“넌 왜 배우고 싶은데?”
-“모험하고 싶어요. 돈은 어떻게든 구해볼게요, 아빠한테만 얘기하지 마세요.”
대신 자신의 아버지께는 비밀로 해달라며 찾아온 사연이 꽤 기구했었다.
벨라는 후에 키엘에게 갚으라고만 하고, 메리에게서는 수강료를 일절 받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메리는 때때로 벨라에게 와서 조잘거리기도 했는데.
- “그래서 브웬은 어른이 되면 식당을 할 거래요.”
마을 아이들의 각종 소문 같은 것도 얘기해주기도 했고.
- “벨라 님은 어떤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으세요?”
마치 맞선이라도 시켜줄 듯 꼬치꼬치 캐묻기도 했고.
- “키엘은 정말 의젓한 거 같아요.”
벨라는 무엇보다 키엘과 꽤 친하게 지내는 것도 마음에 들었었다.
“일단 메리를 불러서 자세히 물어보고.”
벨라는 메리를 저택으로 초대해 젠킨스가 말했던 게 무엇인지 물었다.
“그래서 올해는 마을에서 소소하게 여름 축제를 할 거래요.”
메리는 아무도 오지 못했던 저택의 응접실에 와서 그런지, 꽤 신이 난 목소리로 설명했다.
“집마다 각자 요리를 해오거나 옷을 만들어서 판매도 하고….”
벨라는 그저 팔짱을 끼고 가만히 듣고 있었다.
“브웬네는 당근 케이크를 판매할 거래요.”
“윽. 이미 당근이라면 너무 물려.”
작년에 브웬이 어마어마하게 가져다준 당근을 생각하며 모두 인상을 찌푸렸다.
“다들 음식만 준비하는 거야?”
“어떤 집은 자수를 만들기도 하고, 세바스찬네는 직접 만든 인형으로 인형극을 한대요.”
“다들 적극적이네.”
“사실 저희 마을이 마탑이 있어서 좀 활발한 편이었는데, 이상한 마법사가 살면서 발길이 좀 끊겼거든요.”
“음….”
“그런데 요즘엔 용병단이나 상인들이 많이 찾아와서 마을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어요.”
이웨르의 묘약 때문이었다.
그 정도의 성능을 단언하는 약은 없었기에.
덕분에 저택에선 때때로 이웨르의 피비린내가 역하게 나긴 했지만.
“그거 다 내 덕 아냐?”
“사실 아가씨 덕이라고 하기엔….”
벨라는 젠킨스의 투덜거림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우리도 재밌는 걸 준비해용!“
썩 내키지가 않았다.
“글쎄. 데이저의 축제는 그냥 몸만 가면 되잖아.”
들어보니 집집이 하나씩 준비하는 거 같은데, 귀찮은 건 딱 질색이었다.
그때 키엘이 벨라에게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다 같이 할 수 있으니까 좋은 거 같아요.”
“하지만 우리 저택은 딱히 할 게 없는걸.”
그러다 벨라는 잔바르를 살짝 쳐다봤다.
“서커스 정도면 괜찮겠다. 내가 아는 표범이랑 곰이 있어서.”
잔바르가 제일 먼저 혀를 내둘렀다.
“싫습니다.”
“그럼 그냥 이웨르가 열심히 요리….”
이웨르도 여태껏 여유만만한 표정을 짓다가, 순식간에 얼굴의 근육이 굳었다.
“저! 해보고 싶은 거 있어용!“
“뭔데?”
이웨르도 사실 해보고 싶은 건 없었지만, 여기서 뭐라도 던지지 않으면 혼자 혼자 바가지 쓸 것만 같았다.
“어… 음… 아가씨가 좋아하실까용….”
이웨르는 그렇게 뜸을 들여가며 머리를 최대한 굴렸다. 저택에 온 이후로 처음으로 생각이란 걸 해보는 기분이었다.
‘자수… 인형극….’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이웨르는 손을 번쩍 들었다.
“연극해용!”
순간 모두가 침묵했다. 다 같은 생각이었다.
‘미쳤어?’
차마 손님인 메리를 두고 이웨르를 잘라버릴 수도, 욕을 할 수도 없었다.
그때 메리가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더니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거 좋겠네요, 연극을 하는 집은 아직 없어요.”
“아하. 왜 없을까.”
다들 하기 싫으니까 없겠지.
“키엘이 얘기했던 동화들 어때요? 전 처음 들어보는 얘기라 재밌던데.”
“그거네용! 그거로 해용!“
이웨르는 키엘의 옆구리를 찌르면서 포섭을 시도했다.
“도련님, 재밌겠죵?”
그러더니 그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도련님이 왕자님하고 아가씨가 공주님 해요.”
“…….”
키엘은 천천히 벨라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꽤 어릴 적에 벨라가 머리맡에서 들려주던 이야기가 그의 기억을 스쳐 지나갔다.
수많은 공주님과 왕자님의 이야기들.
그리고 항상 해피엔딩으로 이어지는 입맞춤.
“그냥 우리 데이저로….”
벨라가 데이저로 가자고 마음을 굳히기 전에, 키엘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여, 연극해요.”
“…어?”
벨라는 얼떨떨하게 키엘을 바라봤다.
‘황태자님이 연극을 하신다고요?’
어디 나서는 거 싫어하고 주목받는 거 싫어하는 애가, 갑자기 사람들 앞에서 연극 해보고 싶다고?
“이런 기회에 해보고 싶어요.”
“그렇죵!”
키엘은 부끄러운지 차분하게 얼굴을 붉히고, 이웨르는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뭔가 꺼림칙한데.’
벨라가 계속 대답을 하지 않자, 키엘이 눈썹을 내리며 실망한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벨라… 싫어요?”
그렇게 슬픈데 예쁜 표정으로 말하면….
“아니, 하자. 재밌겠네.”
자동으로 대답이 나오는데.
다 같이 응접실에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백설공주 이야기는 난쟁이가 일곱 명이나 나오니까 기각.”
“검술 교실의 아이들도 몇몇은 참가하고 싶대요.”
“어쨌든 등장인물은 적은 게 좋을 거 같아.”
벨라는 하기 싫은 티를 안 내려고 최대한 핑계를 대며 적당한 걸 찾았다.
“그럼 신데렐라는 어때용?”
계모와 언니들, 신데렐라와 왕자님까지 하면 딱 다섯 명이었다. 신데렐라를 도와주는 요정이나 쥐 같은 건 마을 아이들 시키면 될 거 같고.
“나쁘지 않네.”
그리고 그녀는 종이에 역할을 빠르게 적고 접었다.
“자, 역할 뽑기 하자.”
“…넹?”
“공평하게 뽑기 해야지.”
“아, 아니예용. 나이로 봐도 아가씨가 신데렐라 해야죠.”
“왜, 메리도 한다는데. 메리도 신데렐라 하고 싶지 않을까?”
“메리가 왜 주인공이에요! 저택의 주인이 주인공 하세용!“
다들 하기 싫어했던 것 같았는데, 젠킨스마저 이웨르의 말에 동조했다.
“그럼요, 아가씨가 주인공을 하셔야지.”
‘대사 많은 건 딱 하기 싫은데.’
“신데렐라가 계모에게 구박받는 이야기 맞죠?”
젠킨스가 키엘에게 몰래 물었지만, 모두 조용히 하던 터라 그 소리가 크게 들렸다.
“이참에 날 괴롭혀보겠다?”
“저택에서 준비한 연극인데, 그래도 주인공은 우리 아가씨랑 도련님이 해주셔야지 않을까용.”
벨라는 곰곰이 생각했다.
‘아니, 이웨르가 주인공 해도 되지 않나.’
상상 속의 이웨르는.
‘청소년 관람 불가가 될 수도 있겠는데.’
대사 많은 것도 싫고, 구박받는 역도 싫었다.
‘그냥 푸르를 시킬까.’
곰주님이라고 하면 안 되나. 우리 식구들의 마스코트인데.
그때 벨라의 머리로 좋은 묘책이 지나갔다.
“좋아. 대신에 잠자는 숲속의 공주 하자.”
계속 누워 있으면 되니까.
벨라의 속셈은 아무도 눈치 못 챘는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벨라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님을, 키엘이 그녀를 구하러 오는 왕자님을 맡았다.
젠킨스는 마녀를, 검술 교실의 아이들이 그 마녀의 하수로 등장한다.
이웨르는 여왕이 해보고 싶다고 난리를 부리는 바람에, 공주의 어머니로 시켜줬다. 잔바르는 왕을 하고.
이 시나리오의 대부분이 대련으로 흘러갔기에 벨라는 그저 키엘과 아이들이 싸우는 걸 보면서 감독만 하면 되었다.
“이 이상은 못 간다.”
“젠킨스. 좀 더 마녀처럼 말해야지.”
벨라는 감독이 오히려 더 재밌었다.
“얘들아, 아무리 연습이라도 그렇게 설렁설렁 검을 휘두르면 어떻게 해?”
“저희 열심히 했는데요.”
키엘과 대련할 때 외에는 검을 쥔 적이 없어서 그런가.
검술 교실의 아이들은 벨라의 잔소리가 우스운지 촐랑대며 대답했다.
“뭐가 열심히 해, 춤추는 것 같은데.”
“진짜로 대련하듯이 하면 다칠 수도 있어요!”
“응. 아니야.”
너희가 아무리 용을 써도 안 다칠 거란다. 아니, 너희가 다 덤벼도 키엘이 이길 거 같은데.
“키엘은 원래 따로 대련을 더 많이 해. 연극 때문에 못 하니까 너희가 더 열심히 해줘야지.”
벨라가 심심할 틈새도 없이 대련하자고 졸라대는 키엘을 떠올렸다.
“키엘이 대련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렇지?”
벨라는 키엘이 작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렇게 키엘이 모든 괴물을 무찌르고 나면, 벨라는 조용히 누워있다가 일어나서 몇 개의 대사만 읊으면 끝이었다.
‘완전 껌이네.’
벨라는 누워 있다가 키엘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렇게 마녀의 수하들을 물리친 왕자님은 성 꼭대기에서 공주님을 발견했답니다.”
서로 대사를 하기 싫어해서 대부분의 진행을 이웨르가 해설로 진행했다.
키엘은 한참 망설이다가 입술을 떼었다.
“당신을 구해 드릴게요.”
그의 첫 대사였다. 스스로도 대사가 부끄러운지 얼굴이 새빨개진 채 오는 게 귀여워 보였다.
‘봐, 이런 연극도 체질인 사람이 해야 한다니까.’
금발의 머리칼이 하늘하늘 흩날리며, 벨라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어릴 때는 그저 예쁘장하게만 생겼다 생각했는데.
‘얘도 크면 진짜 여러 여자 울리긴 하겠다.’
소설 속에서도 그런 설정이 있긴 했지만.
누워서 올려다본 키엘은, 보기보다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벨라는 다가오는 키엘의 가슴을 손으로 밀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어머, 아가씨. 아직 도련님이 입도 안 맞췄는데 일어나면 어떻게 해용?”
“그냥 한 척만 하면 되지, 뭘.”
“이런 건 생동감 있게 해야 한다고용!”
“그럼 그때 가서 하면 돼. 지금은 했다고 쳐.”
키엘은 한숨을 내쉬고 다음 대사를 읊었다.
“공주님, 저랑 결혼해주세요.”
연극일 뿐이라는 걸 아는데도, 벨라는 키엘의 말과 손이 낯간지럽게 느껴졌다.
'그래요'라며 침대에 앉아있는 채로 가슴에 기대어야 할 텐데, 벨라는 그저 멍하게 눈만 깜빡였다.
“우리 아가씨가 연기를 너무 못 하넹. 연습을 좀 더….”
“결혼해달라는 대사는 여기서 안 하는 게 좋겠어. 그냥 이웨르가 지문으로 읽어.”
그러자 키엘은 조금 낮은 목소리로 벨라에게 되물었다.
“왜요?”
“공주님 입장에선 왕자님을 처음 본 건데, 어떻게 대뜸 결혼하겠어? 너무 현실성 없잖아.”
키엘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벨라의 손을 꽉 잡았다.
‘여태 그런 지적은 한 번도 한 적 없었으면서.’
그도 최대한 왕자역이 적게 등장하는 걸 하고 싶었는데.
‘연습은 실전처럼 하라면서.’
대련은 죽어라 연습시키더니. 입 맞추는 타이밍에 교묘하게 빠지더니.
키엘은 실망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자신을 달랬다.
‘어차피 당일에는 못 피하겠지.’
축제가 점점 코앞으로 다가오는데, 키엘은 연습하고 싶은 부분은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아이들과 대련만 연습해야 했다.
하필이면 합을 맞추는 거라, 아이들은 쉽게 틀리곤 했고 그럴 때마다 잔바르는 다시 하라며 봐주지 않았다.
‘하아…. 벨라랑 대련하는 거보다 더 힘들 줄이야.’
무더운 더위에, 쉬지도 않고 여러 아이와 연습을 하니 키엘은 점점 지쳐갔다.
“이러다 도련님 쓰러지겠어요. 제가 왕자님역 할 테니, 저랑 연습합시다.”
“이 정도로 쓰러지는 약한 놈이 어딨나.”
“지금 이 애들은 돌아가면서 대련하지만, 도련님은 다 상대하고 있잖아요.”
“네가 그러니까….”
키엘을 구해 주려다 젠킨스와 잔바르의 말싸움이 시작되었다. 이렇게라도 잠시 휴식을 얻은 셈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모두 견디기 힘든 더위라 벨라가 이참에 응접실을 시도 때도 없이 마법으로 방을 얼린다는 거였다.
특히 푸르와 잔바르는 털 달린 동물이라 그런지, 더위를 심하게 탔기에 더할 나위 없이 환호했다.
‘여긴 너무 추워.’
하지만 그곳도 조금만 지나면 한겨울처럼 으슬으슬 추워졌다.
“콜록.”
키엘이 젠킨스와 수업을 하며 얕게 기침을 하자, 젠킨스가 걱정 어린 눈으로 물었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응?”
“감기 걸리신 거 아니에요?”
“그래 보여?”
“수크리나 약초를 좀 다려 드릴까요?”
소량으로 쓰면 기력이 회복된다는 약초였다.
축제는 이틀이 남았다. 피곤해도 피곤할 수 없었다.
“그럼 부탁할게.”
하지만 약초를 먹어도 몸이 조금씩 무거워지는 기운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돌아오기 전에도 이 여름에 아팠던 거 같은데.’
하지만 지금과 상황이 달랐다. 예전에는 떠돌이처럼 집 없이 지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상한 음식을 먹거나 차가운 바닥에서 잠을 청한 적이 많았던 거였고.
축제 전날, 키엘은 기침을 숨기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아침이 되자 키엘은 온몸이 불구덩이처럼 느껴졌다.
오늘이 바로 축제의 날이고. 연극을 선보이기로 한 날인데.
‘하… 최대한 티를 내지 말자.’
몸이 천근만근이었지만, 키엘은 오히려 가벼운 듯이 연기하며 걸었다.
“도련님, 준비 다 했어요?”
“응. 가자.”
다행히 예리한 젠킨스도 모르는 것 같았다.
다들 현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벨라는 옷 갈아입기 귀찮다며 저택에서부터 미리 공주님처럼 꾸민 채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 벨라는 바지를 즐겨 입는 편이었다. 치마를 입어도 무릎 정도 오는 길이나 원피스를 입었고.
벨라 입장에서는 ‘심플, 모던’한 옷차림이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저택에 사는 사람 치고 없어 보인다’며 뒤에서 흉을 보곤 했었는데.
레이스가 화려하게 달린 긴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반 묶음으로 땋아 꽃장식의 핀까지 꽂으니.
“옷이 날개네요.”
“옷이 어떻게 날개야? 하늘을 나나?”
“아가씨! 공주님 같아요!”
벨라는 갑자기 쏠리는 이 관심이 당황스러웠다.
‘저기, 나 원래 너희 공주잖아.’
게다가 마계에서도 이런 옷은 안 입는데.
그래도 벨라는 싫지 않은지 그 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어때? 괜찮아? 고급스럽지?”
“그 말만 빼면 괜찮네요.”
“키엘, 나 공주님 같아?”
벨라는 함박웃음을 하고 키엘에게 물었다.
케일은 멍하게 대답도 하지 않고 붉은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키엘, 어디 아파?”
벨라가 키엘에게 다가가자 그는 한 걸음씩 물러서며 대답했다.
“아뇨. 괜찮아요.”
“도련님이 아가씨한테 반한 거 아닐까용?”
이웨르가 말을 덧붙이자, 젠킨스가 이웨르의 옆구리를 꼬집으며 이를 꽉 깨물었다.
“내기는 공평하게 하기로 했잖아요.”
“쳇.”
“어서 가시죠. 우리 차례는 점심쯤이라고 했으니까. 미리 가서 준비해요.”
벨라는 천천히 키엘에게 다가가서 그의 두 볼을 손으로 잡았다.
“키엘, 얼굴이 왜 이렇게 뜨거워?”
“아, 안 뜨거워요.”
그녀는 키엘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여전히 뜨거운데.
“벨라 손이 차가워서 그렇게 느껴지는 거예요.”
“아하, 그래?”
벨라는 천천히 자신의 이마를 그대로 키엘의 이마에 마주 댔다.
“뜨거운데?”
“아….”
갑자기 다가온 터라 키엘은 경직된 채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감기 맞네.”
맞붙은 이마가 떨어지자, 이번에는 벨라의 차가운 손이 키엘의 목 주변을 만지작거렸다.
“이거 봐, 식은땀 흘리잖아.”
“그….”
키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오랄 때는 오지도 않더니, 왜 항상 예고도 없이 가까이 오는 건 이렇게 잘하는 건지.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면서요.”
“그럼 우리 연극은 어떻게 해용?”
저택 식구들은 키엘이 아프다는 사실보다도 오늘 있을 잔치를 더 걱정했다.
벨라는 인간미도 없는 마족들의 인성, 아니 마성에 질린 듯이 째려봤다.
“뭘 어떻게 해, 키엘은 못 해.”
“그럼 왕자님은 누가 해용?”
키엘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벨라의 손길을 느끼는 것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내, 내가 할 수 있어요. 나 정말 괜찮아요.”
벨라는 눈을 가늘게 떠서 키엘을 봤다. 키엘이 웃고는 있지만, 그녀가 잡고 있는 몸은 불구덩이처럼 뜨거웠다.
“이웨르가 하겠습니당! 여자는 왜 왕자님 못 하나용! 편견입니당!”
“젠킨스가 해. 어차피 네가 대련하는 걸 봐줬으니, 네가 잘 알겠지.”
키엘은 애써 웃으면서 말했다.
“나 할 수 있어요.”
“무슨 소리야. 이렇게 열이 나는데.”
“하지만….”
그때 이웨르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런데 젠이 왕자 하면, 마녀는 누가 해용?”
“음… 잔바르가…?”
“하지만 마녀는 대사가 많아서 잔바르 님이 못 하실 거 같은뎅.”
잔바르는 어이가 없다며 이웨르를 쏘아붙였다.
“그 정도는 나도 외울 수 있다.”
하지만 잔바르를 빼고 다른 이들은 못 외울 거라고 확신했다.
그때 키엘이 벨라를 붙잡고 말했다.
“그, 그럼 벨라가 마녀 하면 안 돼요?”
“응?”
“공주님 역은 대사가 몇 개 없잖아요.”
키엘이 연극을 못 한다면, 벨라가 공주님역을 하는 일도 있어선 안 되었다.
“하긴. 아가씨가 마녀 하면 잘 어울리겠네요. 애초에 공주님보다는 그쪽이 더 어울리니.”
“젠킨스 죽고 싶니.”
키엘은 마지막 발악인 마냥 벨라를 붙잡았다.
“그럼 내가 공주님 할래요…. 누워 있으면 되잖아요.”
하지만 다짐과는 다르게 키엘은 한 발자국 움직이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리듯 기대어 쓰러졌다.
“잔바르, 일단 키엘 좀 방에 눕혀.”
큰 키의 잔바르가 키엘을 번쩍 들어 방으로 다시 옮기는 동안.
키엘은 울먹거리며 겨우 손을 뻗었다.
벨라는 냉기가 감도는 응접실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심하라고 일렀어야 했는데.’
현대인들의 병인 냉방병에 대해 알려주는 걸 잊고 있었다.
차가운 응접실을 들락날락하다, 급격한 온도변화에 쉽게 감기에 걸릴 수 있었고.
“이게 다 잔바르 님 때문이에요.”
“잔바르가 왜?”
젠킨스는 잔바르가 없는 틈을 타 평소 쌓였던 울분을 토해냈다.
“제 말을 듣지도 않더니. 도련님 쓰러지실 줄 알았다니까요.”
이웨르는 굉장히 실망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그런 거 같아서 오늘 아침에 약초를 좀 넣어서 밥 만들었는뎅.”
그러자 젠킨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약초요?”
“수크리나.”
“아… 그런 걸 왜 말 안 하고 넣습니까?”
“왜용, 조금만 넣으면 아무 문제 없다고용! 지금 다들 괜찮잖아용?”
확실히 벨라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물론 설령 아프다고 해도 금방 나았겠지만.
“그래, 소량은 괜찮아.”
저 약초는 소량으로 쓸 때, 기력을 회복시키고 혈액을 빨리 돌게 한다. 하지만 대량으로 쓰면 몸에서 열이 나는 정도.
“저도 계속 드리고 있었단 말이에요.”
알게 모르게 야금야금 키엘을 아플 때까지 몰고 간 것들이었다.
* * *
꼼짝없이 침대에 누운 채, 키엘은 뜨거운 숨에 질식하듯 눈을 감았다.
왜 하필 이런 때에 감기에 걸린 건지.
모두 저택 밖을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푸르가 문 앞에서 알짱대며 손수건에 물을 묻혀 키엘의 이마에 올려다 뒀다.
그 손수건마저 후안 크루엘의 손수건이었다.
마치 거대한 운명의 벽이라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서러운 눈물이 땀과 함께 흘러내렸다.
키엘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자신의 숨조차도 뜨겁게 느껴졌다.
그토록 기다렸던 일이었는데.
그의 몸 위로 따뜻하고 푹신한 게 움직이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푸르, 무거워.”
“아가씨가 도련님 계속 따뜻하게 하라고 했어요!”
“…….”
“도련님 깨어났으니까 수건 가지고 올게요!”
푸르가 나가자, 키엘은 누워서 천장을 보며 신음을 내뱉었다.
‘설마 젠킨스가 벨라에게 정말로 키스하는 건 아니겠지? 젠킨스는….’
키엘은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뭘 그리 큰 걸 바랐다고.’
그저 연극이니까, 조금만 욕심을 부려도 괜찮을 거로 생각했는데. 마치 하늘이 그 흑심을 보고 비웃듯이 병을 준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많이 아파?”
난데없이 벨라가 옆에서 불쑥 나타나더니 졸린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벨라?”
옆에 앉아 잠이라도 들었던 건지, 벨라는 하품을 손으로 막으며 키엘에게 물컵을 건넸다.
“…연극은요?”
키엘이 물을 마시는 동안 벨라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응. 잔바르가 공주님 하기로 했어.”
“…쿨럭.”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거라, 키엘은 물을 마시다 사레가 걸렸다.
벨라는 천천히 등을 두드려주면서 키엘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벨라는 안 가도 돼요?”
“네가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가.”
벨라는 키엘을 눕히고, 침대에 걸터앉아 차가운 손으로 키엘의 볼을 식혔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야지.”
“미안해요….”
“네 몸이 국보인 거 몰라?”
잔소리가 이만큼 쌓여있는데, 닿으면 연기라도 날 듯이 뜨겁자 벨라는 많은 말을 뒤로하고 가장 하고 싶은 말 한마디만 했다.
“그러니 제일 소중하게 여겨야 해, 알았지?”
키엘은 벨라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화를 내지만, 누가 들어도 따뜻한 애정이 담겨있는 저 말투와 눈빛까지.
그저 열 때문일까. 아니면 서러워서였을까.
“손… 잡아줘요.”
그가 잡으려고 하면 멀어지는 것 같아 키엘은 손을 뻗어 벨라에게 향했다.
“아프니까 어리광쟁이 다 됐네.”
키엘은 벨라의 손을 깍지 끼고, 엄지손가락으로 벨라의 검지를 살살 어루만졌다.
“벨라.”
“응?”
벨라가 시선을 내려 간지러운 손끝을 보려고 할 때.
키엘은 조금이라도 진심이 닿길 기대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벨라가 좋아요.”
벨라는 간지러운 손을 꽉 잡고 자신의 볼에 가져가며 대답했다.
“나도 우리 키엘이 제일 좋아.”
길 위의 고양이가 얼굴을 다리에 문지르듯, 벨라는 키엘의 손등을 볼로 문질렀다.
“그러니까 아프지 말고.”
키엘은 반쯤 졸린 눈으로 벨라를 응시했다.
그렇게 푸르에게 말하듯이 대답하는 건 너무 한 거 아닌가.
“정말 좋….”
“나도!”
어느새 수건을 가지고 온 푸르가 난데없이 끼어들었다.
“나는 아가씨도 좋고, 도련님도 좋아요!”
“네가 싫어하는 거도 있니?”
“당근요. 당근은 이제 싫어요.”
벨라가 수건을 받아 그의 얼굴을 닦는 동안, 푸르는 아까처럼 키엘의 배 위에 올라가 엎드렸다.
“푸르 뭐 하니?”
“아까 아가씨가 따뜻하게 해주라고 했잖아요!”
“이불 잘 덮고 있는지 확인하라고 한 거지, 이 곰탱아.”
벨라가 푸르를 밀어내고 이불을 키엘의 어깨까지 끌어당겼다.
“…이제 가려고요?”
꼭 잘 자라고 하고, 방을 나갈 것 같아서 키엘은 벨라의 손을 다시 꽉 잡아봤다.
하지만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 미끄러지듯이 손이 빠지고, 외마디의 한숨만 내쉬었다.
“음, 그럼 다 같이 낮잠 잘까? 푸르에게 베개 역을 선사하노라.”
그러자 푸르는 키엘이 베고 있던 베개를 치우고 자신의 따뜻한 배를 위로한 채 누웠다.
“자, 이건 곰베개야. 세상에 돌침대, 옥침대 별별 게 다 있지만 곰베개는 없을걸.”
벨라는 장난치면서 키엘의 옆에 누워 푸르의 배에 머리를 기댔다.
“자, 착한 어린이는 푹 자고 빨리 나으세요.”
이불을 키엘의 목까지 덮어주고, 벨라는 손으로 토닥거리며 그를 간호했다.
벨라는 어느새 잠이 든 키엘과 푸르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몰래 키엘의 침대에서 일어나서, 키엘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다행히 열은 많이 떨어진 것 같았다.
키엘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좋진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연극을 안 해서 다행이기도 했다.
비록 연기라는 걸 아는데, 연습할 때 키엘이 하는 대사가 너무 진지하고 성숙하게만 들렸다.
때때로 어른스럽게 굴기도 하는데,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실제 황궁에 있었다면 황태자비도 있을 나인데.’
황태자라는 걸 알려줬는데도, 아직 실감이 안 나는 건지.
벨라는 자는 키엘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눈물이 맺힌 것인지, 작게 떨리는 속눈썹 위가 반짝거렸다.
벨라는 오래전 젠킨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 “설마 황태자를 납치라도 한 겁니까?”
키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있을 때면, 정말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소설 같은 건 개나 줘버리고 싶은 마음.
벨라는 소설에 빙의 되기 전 저승사자가 했던 말을 곱씹어 생각했다.
- “김홍연 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소설은 원작대로 흘러가려고 하는 힘이 큽니다.”
그 흘러가려는 힘이 얼마나 큰 건지는 몰라도.
- “그렇기에 원작대로 결말이 안 난다면, 빙의자의 의지로 바뀐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성인이 되면 벨라는 자연스레 마왕 앞으로 소환된다. 바로 이 소설이 시작되는 시점에.
‘난 어차피 마계로 돌아가게 되어있고. 키엘이 마계에서 살기엔 힘드니까.’
이곳에 키엘이 사랑할 사람도, 미래도 전부 다 있다.
황궁에 들어가고, 그로부터 몇 년 후면 그의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봄날을 맞이할 텐데.
‘이제 1년 남았네.’
* * *
벨라가 보지 않았던 그들의 연극은 완전히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검술 교실에 더 아이들이 오지 않는 걸 보니.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잔바르 님이 공주님이라, 학부모들이 기겁을 했나 봐용.”
이웨르가 팔에 붕대를 감은 채 신 나게 옆에서 대답했다.
“그러게 잔바르를 좀 더 공주님처럼 예쁘게 꾸몄어야지.”
벨라는 조금 의외라는 듯이 대답했다.
편견이나 차별은 신분이 다 해먹고 있는 사회라, 남자끼리 결혼하는 걸 보고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다.
‘하긴. 생각해보면 메리도 여자라고 검술을 못 배우게 한댔으니까.’
어쩌면 제국의 수도와는 꽤 멀리 있는 곳이라 더 보수적인 걸 수도 있고.
벨라는 이웨르의 붕대가 눈에 띄자, 형식적으로 걱정하듯 물어봤다.
“넌 다쳤어?”
“새로운 패션이예용!”
“그래.”
딱히 다쳤다고 해도 별 관심은 없었지만.
“쟤들은 왜 또 저렇게 냉전이래?”
벨라는 또 형식적으로 젠킨스와 잔바르를 보며 물었다. 두 사람은 마주치면 평소처럼 화를 내지도 않고, 고개를 돌려 피하고 있었다.
“하하… 그렇게 보이세용?”
벨라의 눈에는, 억지로 공주님을 한 잔바르가 창피해서 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여튼 얘들한텐 일을 맡기면 안 돼.’
그때 청소를 마친 푸르가 당당하게 칭찬해달라며 가슴을 쭉 내밀었다.
“저 청소 다 했어요!”
“역시 우리 푸르가 최고야, 그치?”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최고라는 말이었다.
“네! 아가씨가 제일 좋아하는 건 저예요! 그쵸!”
“응응.”
푸르는 신이 나서 벨라에게 안기며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떴다.
“도련님보다도 제가 더 좋죠!”
어디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벨라는 빈말이라도 아닌 말은 하기 싫었다.
“아니? 푸르 백 마리 갖다줘도 키엘이 더 좋아.”
“도련님이 없으면 제가 제일 좋은 건가요!”
푸르는 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 자식 이거….’
벨라가 푸르의 목을 두 손으로 잡고 말했다.
“키엘 건드리면 네가 아무리 곰족 마지막이라고 해도 죽여버릴 거야.”
“힝….”
이 삐뚤어진 충성을 어찌해야 할까. 푸르도 키엘을 그리 좋아하면서도, 본성은 버리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역시 마족들은 갱생이 안 돼.’
그리고 벨라는 푸르의 목에 걸린 익숙한 물건이 보였다.
“…이거 뭐야, 왜 네가 목에 두르고 있어?”
작년에 얼떨결에 얻게 된 후안 크루엘의 손수건이었다.
“도련님이 저 보고 어울린다고 했어요!”
“키엘이 이렇게 좋아해 주는데도, 죽일 생각을 하다니.”
벨라는 소름이 돋았다.
‘하긴, 동족들도 잡아먹는 애들인데.’
다시 한번 그 마계의 풍경을 떠올리자 몸서리쳤다.
이웨르는 옆에서 벨라의 관심이 점점 지난 연극에서 멀어지는 것 같자, 한숨을 돌렸다.
벨라는 잔바르탓으로 돌렸지만, 진실은 조금 달랐다.
이웨르는 자신의 팔을 살짝 만지며 속으로 끓어오르는 웃음을 겨우 참고 있었다.
죽기 직전까지 피를 짜내 잔바르에게 먹였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마계에 가면 할 얘기가 또 늘었구낭.’
젠킨스와 잔바르의 너무 열정적인 키스신에 학부모들이 혀를 내두르고 보내지 않는 거니까.
‘그나저나 이 정도로 피를 짜냈는데 잔바르 님이 그 정도라면….’
이웨르는 음흉한 눈빛으로 벨라를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홱 돌렸다.
‘우리 공주님은 씨알도 안 먹히겠네.’
더이상 아이들이 오지 않자, 벨라는 유일하게 검술 교실에 진지했던 메리부터 챙겼었다.
‘넌 그냥 예쁘게 커서 돈 많은 집에 시집이나 가라’고 한 집안이었다.
그래서 메리가 오래전부터 독립을 원했기에 용병단에 소개했다.
하지만 메리가 마을을 떠난 이후로, 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저희 저택 보고 불경하대요.”
안 그래도 귀신 나오는 집에 귀신보다 더 무서운 여자애가 산다는 소문이 돌았었는데.
“아무래도 메리가 그냥 사라져서 그런가 보네.”
젠킨스는 지난 연극도 한몫한다고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뭐 어때. 조용하고 좋네. 푸르도 이제 정원에서 잘 뛰어다니고.”
“참 긍정적이시네요.”
벨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애초에 이곳에서 오래 살 것도 아니었고.
메리 말고 다른 아이들의 실력이 키엘에 비해 너무 못 미쳤기에, 오히려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점점 들었었다.
어차피 키엘이 죽여야 할 가장 큰 빌런은 벨라 본인이니까.
“키엘이랑 대련이나 해야지.”
* * *
꽤 오랜 시간 정원에서 대련하다 보면 부쩍 그런 생각이 들었다. 키엘은 벨라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걸.
절대적인 천재.
벨라는 젠킨스가 투덜거리면서도 여태 군말 없이 따라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아네.’
키엘은 마치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편이었다. 직접 검을 부딪치다 보면 키엘은 젠킨스에게 배웠던 것들을 응용해서 물었다.
“그럼 이렇게도 할 수 있겠네요?”
벨라가 검을 내리꽂자, 키엘은 가볍게 검을 누르면서 자신의 검을 올렸다.
‘진짜 잘하네.’
역시 소설 속의 주인공이라 그런지, 좋은 능력치는 전부 갖다 놓은 기분이었다.
‘이 정도면 신성력이 없어도 안 죽고 잘하겠지?’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키엘. 몇 번을 말해. 목숨을 노리는 이는, 자기 목숨을 아끼며 공격하지 않아.”
앞으로 키엘을 없애려고 그의 침대에 들 암살자들은 그런 존재들이었다.
키엘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황태자가 나타나 자신들 위에 올라서며 권력을 모두 빼앗긴 자들.
뒤로 갈 곳이 없는 자들.
“그러니까 빈틈이 생겼을 때 가차 없이 찔러야지.”
벨라가 검을 제대로 잡고 키엘에게 향했다.
“넌 나를 죽일 듯이 달려들어야지.”
벨라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달려들지만, 키엘은 그러지 못했다.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라니까.”
“…하아….”
키엘은 숨을 몰아쉬며 손으로 흐르는 땀을 닦았다.
“내가 어떻게 벨라를 베요?”
“고양이 목숨은 아홉 개니까 그냥 베도 된다니까.”
그러자 키엘이 깎아놓은 잔디 위에 털썩하고 앉더니, 뒤로 누웠다.
“……벨라, 하늘 진짜 예뻐요.”
“너 말 돌리는 거 봐.”
벨라는 키엘의 옆에 똑같이 누워 하늘 위를 천천히 유랑하는 구름을 눈으로 따라갔다.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간이 저 구름처럼 조금만 더 천천히 유랑했으면.
붉은 노을이 천천히 저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 아름답게 물들어간다.
벨라는 몸을 틀어 키엘을 보고 누웠다.
노을빛에 반사되는 그의 금색의 머리칼은 황금 들판의 흩날리는 벼처럼 흔들거렸다.
그때 키엘은 벨라의 시선을 눈치채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땀에 젖어 헝클어진 검은 머리도, 루비를 박아놓은 듯 반짝거리는 붉은 눈이 키엘의 눈동자에 비쳤다.
“…예뻐요.”
환하게 웃는 키엘을 보며 벨라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이제 그놈만 잡으면 끝이겠네.’
잔잔한 수면 아래로 물 밑의 소용돌이가 일렁이고 있었지만, 벨라는 아무것도 모른 채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그것이 부메랑처럼 해일이 되어 돌아오고 있는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