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가 죽여야 할 최종 악녀가 저랍니다-5화 (5/25)

5

도시 데이저의 여름 축제.

사람들의 말소리와 악기 소리가 아침을 깨웠다.

벨라는 똘똘한 눈으로 일어나 짐 가방에 있던 옷부터 꺼냈다.

드디어 빙의 되면 하고 싶었던 영애-같은-삶을 누린다 생각했다.

그녀는 전체적으로 푸른색의 원피스를 꺼냈다.

끝단으로 갈수록 넓게 퍼지는 치마는 무릎 위 정도까지 오고, 목 부분과 소매 부분에는 흰색의 레이스가 달려 있었다.

“아가씨, 작년에 산 옷 아니에요?”

“맞아.”

“키가 하나도 안 크셨나 보네요.”

“닥쳐.”

반면 키엘은 작년에 샀던 옷이 꽤 짧아졌는지, 긴 팔이 7부 소매가 되었다. 흰색에 푸른색으로 라인이 있는 마린룩이었다.

“짠! 우리는 커플룩이야.”

벨라는 키엘의 팔짱을 끼며 으스댔다.

“이렇게 보니까 아가씨는 약간 밤바다 같고 도련님은 쨍쨍한 오후의 바다같네용.”

“인간들은 진짜 쓸데없는 걸 신경 쓴다니까.”

“잔바르 님은 신경을 안 써서 그렇게 치장하신 건가용?”

“그러는 너야말로 옷을 입은 거냐….”

이웨르는 마치 사막의 무희처럼 치렁치렁한 장식들로 옷을 대신한 듯했다.

“축제면 이 정도는 해줘야죵! 그리고 미리 경고하는데, 밤에 제가 없어도 찾지 마세용!”

벨라는 손뼉 치며 식구들을 주목시켰다.

“자, 다들 소매치기 조심하고! 가자!”

‘데이저’는 큰 강이 중앙에 있는 도시였다. 강이 큰 편은 아니었지만, 강을 중심으로 임시 천막들이 즐비하게 줄지어 있었다.

거리마다 맛있는 냄새들이 솔솔 풍겨오고, 각종 장신구를 팔고 있었다.

벨라는 전생에서도 축제를 제대로 즐겨본 적이 없어서인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는 닭고기. 키엘은?”

“벨라랑 똑같은 거요.”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길에서 주전부리를 먹으면서 돌아다녔다.

전생에서 경험한 축제는 경찰이 안전상의 문제로 배치되어야 할 만큼 정신없이 시끄러운 축제들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곳은 벨라가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들이 많이 북적거리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사람이 좀 붐비는 곳이 있다 싶어서 보면, 재밌는 오락거리가 있었다.

“엇, 얼굴에 그림 그려준다.”

벨라와 키엘은 잔뜩 부푼 마음으로 차례를 기다려 화가 앞에 섰다.

“고양이 그릴래요.”

“난 별 그려주세요.”

키엘은 볼에 귀여운 까만 고양이를, 벨라는 노란색 별을 그렸다.

지켜보던 이웨르도 하고 싶은지 화가에게 아양을 부렸다.

“전 하트 그려주세용.”

“아이들에게만 그려 드립니다.”

“힝.”

얼굴에 그림을 그린 키엘의 모습은 이리저리 봐도 귀여웠다.

‘하. 핸드폰 있으면 셀카라도 찍을 텐데.’

그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찍…으면 되지 않을까?’

항상 들고 다니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이 핸드폰에 대한 설명도 해야 할 텐데, 너무 들뜬 상태라 그런지 벨라는 앞뒤 가리지 않고 키엘을 데리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어디가용?”

“거기서 기다려!”

벨라는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얼른 핸드폰을 켜서 촬영기능이 있는지 확인해봤다.

“있다!”

“뭐가요?”

“키엘, 지금부터 네가 보는 건 절대로 비밀을 지켜줘야 해. 알았지?”

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거 봐. 거울이야.”

다행히 핸드폰은 네모난 거울처럼 보였다.

“거울이에요?”

“잠깐만. 가만히 있어.”

그리고 찰칵 소리가 몇 번 나자 벨라는 흡족한지 핸드폰을 도로 집어넣었다.

“키엘.”

“네?”

“방금 봤던 거, 이거 절대 말하면 안 돼. 이거 내 비밀 거울이야. 알았지?”

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벨라와 나만의 비밀.’

그는 이 사실이 꽤 마음에 들었다.

키엘과 사진을 찍고 골목에서 나오자마자 이웨르가 벨라의 손을 잡았다.

“아가씨! 우리 춤추러 가요!”

“무슨 춤?”

이웨르가 손을 잡고 이끈 곳에서는 사람들의 환호 소리와 연주 소리가 들렸다.

조금 트인 공간에, 민속 음악이 나오면 다들 어깨를 들썩이다가 손뼉을 쳤다.

이웨르가 젠킨스의 옆구리를 치자, 젠킨스는 한숨을 짧게 내쉬더니 이웨르와 춤을 추며 빈 곳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동그랗게 둘러싸여 있던 사람들이 한두 명씩 나와서 춤을 추곤 했다.

두 명이 추는 춤이 아니라, 강강술래처럼 모두 한 원을 그리고 똑같은 춤을 추었다.

“우리도 춤출까?”

키엘은 처음에 수줍어하더니 벨라의 옆에 서서 곧잘 따라 했다.

벨라의 파트너인 사람이 키엘의 파트너가 되다가 갑자기 음악이 바뀌면 반대로 돌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또 음악이 바뀌며 남녀가 짝을 이루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저 평민들이 가볍게 추는 춤이라 그런지 몇 번 보고도 따라 할 수 있었다.

“쉽네.”

팔짱을 끼고 이리저리 돌다가 손뼉을 치고.

의외로 키엘은 빨리 외워 금방 따라 했다.

“키엘, 나중에 사교계를 휩쓸겠는데?”

“정말요?”

하지만 벨라는 방향을 자꾸 반대로 하는 바람에 키엘과 부딪혔다.

“벨라, 또 틀렸어요.”

그럴 때마다 두 사람은 서로 웃으면서 다시 춤을 맞췄다.

어느새 한 바퀴를 돌았는지, 반대 방향으로 돌기 시작했던 젠킨스와 벨라가 만나자 다행히 음악이 끝났다.

“휴, 다행이네요.”

“에이, 난 우리 아가씨랑 춤추고 싶었는뎅.”

연주가 끝나자 사람들은 환호를 지르며 손뼉을 쳤다. 한숨 돌리려고 하던 찰나에, 사람들이 벨라 쪽으로 다가와 말을 건넸다.

“둘이 남매야? 안 닮았는데 예쁜 건 어쩜 똑같이 예쁠까.”

“동생이 진짜 귀엽네.”

그럴 때마다 벨라는 웃으면서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키엘의 기분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긴. 키엘은 이렇게 활동적인 건 별로 안 좋아하긴 했지.’

키엘은 비교적 얌전하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마을 아이들과도 공놀이 한번 하지 않았었다.

‘그런 거 치곤 대련도 잘하고, 춤도 잘 추네.’

그때였다. 춤을 다 추고 나가려던 마을 사람들끼리 북적거렸는데.

벨라가 키엘의 손을 잡으려고 팔을 뻗는 순간 누군가와 부딪혔다.

“미안!”

부딪혔던 사람의 미안하다는 사과보다, 곱상한 얼굴이 더 눈에 띄었다.

보기 드문 은발이, 벨라와 마주 보고 있으니 천사와 악마처럼 대조되었다.

“괜찮아.”

“어… 그런데 손목에….”

벨라가 고개를 살짝 내렸다.

마을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흘렸던 건지, 손목의 하얀 레이스에 초콜릿아이스크림이 묻어 있었다.

‘오늘 처음 입은 건데.’

그때 조금 떨어져 있던 키엘이 벨라에게 다가와서 걱정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괜찮아요?”

벨라는 살짝 미소만 지었다.

‘하필 초코 아이스크림이라니.’

부딪혔던 이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건넸고, 벨라는 굳이 거절하진 않았다.

원단이 부드럽고 자수가 촘촘한 게 꽤 비싼 손수건일 것 같은데.

“손수건은 빨아서 돌려줄게. 축제 마지막 날까지 있을 거니까, 집이 어디야?”

“아… 그럼, 내일 공연 할 건데 보러올래?”

그리고 벨라는 눈앞의 은발 소년을 바라봤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이 소설 속에서 은발이 흔한 건 아니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은발은 딱 하나. 벨라의 차애인 공녀 슈리아.

“그래. 몇 시에 하는데?”

“12시. 저기서 할 거야.”

은발의 소년이 손가락으로 조금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무슨 공연인데?”

“음. 사실 별건 아닌데, 네가 기대했으면 좋겠으니 비밀로 할게.”

‘뭔 개소리야, 이건.’

벨라는 그의 말이 조금 웃겼지만 웃음을 참았다.

혹여나 그가 슈리아 공녀와 관계가 있는 사이라면.

‘잘하면 슈리아를 멀리서라도 구경할 수 있겠네.’

이런 역할에 빙의되어도 최애의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고, 차애까지 보고 왔다며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때 소년이 키엘을 이제야 눈치챘는지, 난감하게 물었다.

“아…. 옆에는 네 동생이야?”

“응.”

“아니.”

벨라는 ‘응’이라고 했는데, 키엘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했다.

“동생이랑 같이 와. 동생에겐 조금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소년이 떠나자, 벨라가 키엘에게 물었다.

“무슨 공연일까?”

“…….”

하지만 키엘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왜?”

그는 조금 볼멘 목소리로 벨라에게 투덜거렸다.

“여기는 우리 마을도 아니니까, 동생 안 할 거예요.”

“그래, 그럼 오빠 해.”

키엘은 벨라의 말이 충격이었는지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벨라는 그런 키엘이 귀여워서 턱을 잡고 흔들었다.

“오빠, 아이스크림 먹을래?”

때마침 외줄 타기 공연이 끝났는지, 어느새 잔바르가 다가와서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하십니까.”

“자, 다들 오늘 키엘이 동생 하기 싫다니까 형, 오빠라고 불러.”

“오빵!”

이웨르가 제일 먼저 신나서 키엘에게 달려들었다.

“너무 신이 나셨네….”

젠킨스는 조용히 혼잣말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후로 한참을 돌아다녔는데도, 도시의 반 정도밖에 구경하지 못했다.

“이틀씩이나 할 만하네.”

“마지막 날인 내일은 불꽃놀이도 한대요.”

벨라의 눈동자에서 초롱초롱 빛이 났다.

‘불꽃놀이!‘

시에서 불꽃놀이를 할 때마다 불꽃은 보지 못하고 인파를 관리했던 기억이 떠오르며 미소를 지었다.

* * *

다음 날에도 똑같은 축제지만 다른 마음으로 참가했다.

벨라는 하얀색의 프릴이 달린 블라우스를 안에 입었다.

치마는 가슴선부터 허리까지 일자로 검은색으로 내려가다 허리 부분에서 쭉 퍼졌다.

“와, 아가씨는 역시 검은색이 제일 잘 어울려요.”

키엘도 비슷했다.

하얀 블라우스에 줄무늬 조끼와 목 부분에는 검은색 리본이 있었고, 리본 안에는 금색의 브로치가 박혀 있었다.

“도련님도 생각보다 잘 어울리시네요.”

화이트 앤 블랙은 언제봐도 진리인 듯.

옷이 날개라더니, 키엘을 이렇게 입혀놓고 보니 꽤 의젓해 보였다.

“키엘, 오늘도 오빠 할래?”

“…아니요.”

키엘이 벨라를 살짝 노려보며 볼을 살짝 부풀렸다. 그래도 귀여운 건 여전하네.

축제는 여전히 볼 게 많았다.

거리 곳곳마다 공연이 있고, 어제는 보지 못한 다양한 게임들을 하기도 했다.

“세상에, 이거 1등 하면 온천이용권 준대요!”

이웨르가 거리에서 나눠주는 전단을 보여주며 눈을 반짝거렸다.

“다 같이 나가 봐요!”

키엘이 먼저 전단을 보더니 벨라의 손을 덥석 잡았다.

“우리 이거 해요. 다음에 온천 가요.”

축제에 와서 처음으로 키엘이 해보자고 한 거라, 벨라도 궁금해서 전단을 받았다.

[사랑의 막대기]

[제일 빨리 달성한 팀에게 온천 상품권을!]

입에서 입으로 새끼손가락 길이만 한 막대를 옮기는 게임이었다.

매우 어른들의 게임.

사랑의 막대기 게임.

“와, 재밌겠어용. 도련님도 온천 가고 싶죵?”

“응. 나 온천 한 번도 안 가봤어.”

벨라는 보자마자 인상을 찡그리며 손잡은 키엘을 끌어당겼다.

“미쳤어? 너네 세 명이나 나가.”

우리 키엘을 어디 저런 게임에 보낸단 말이야.

“젠, 잔바르 님, 나가용!”

“저는 왜요.”

“인간들이 하는 게임은 하나도 재미….”

“아아아아아아아!”

이웨르가 생떼를 부리기 시작하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기 시작했다.

좀 내버려 두면 그칠 줄 알았는데.

마트에서 장난감 안 사준다고 조르는 아이처럼 이제는 바닥에 주저앉아 젠과 잔바르의 옷을 잡아당겼다.

벨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시끄러우니까 빨리 게임하고 와. 우린 여기 앉아 있을게.”

“꺄아!”

신이 난 이웨르가 팔짝 뛰면서 참가를 신청했다.

“전 싫은데요.”

“저도 싫습니다.”

“이웨르가 우리 돈줄이니까 좋게 말할 때 가.”

터벅터벅 이웨르를 따라가는 둘을 보며 벨라가 빙긋 웃었다.

“키엘, 저런 건 어른들만 하는 거야.”

“아… 네.”

키엘이 조금 실망한 듯 보였다.

“이렇게 순수해서 어떡해. 나중에 황궁 가면 아무 나랑 뽀뽀하고 그러면 안 돼. 알았지?”

“아무나랑 안 해요.”

키엘이 얼굴을 붉히고 시선을 돌렸지만, 벨라는 그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어유, 왜 이렇게 귀여워?”

“…나 안 귀여워요.”

키엘이 벨라의 손을 슬쩍 내리면서 뾰로통하게 입술을 삐죽였다.

“난….”

키엘은 스스로 말하면서도 부끄러운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뜸을 들이면서 말했다.

“멋있는 거 할 거예요….”

하지만 그 모습조차 벨라를 미소 짓게 했다.

‘너 그런 얼굴로 귀여운 거 안 한다고 하면 반칙이야.’

이웨르가 참가한 게임은 꽤 많은 참가자가 있어서 그런지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토너먼트처럼 열렸던 게임은, 이제야 끝나려나 싶었더니 자꾸 승승장구하며 다음 게임까지 참가하고 있었다.

괘종시계에서 12시를 알리는 소리가 들리자 벨라는 어제 만났던 소년이 떠올랐다.

“우리 어제 걔가 말했던 공연 보러 갈까?”

“…….”

“내기하자. 무슨 공연인지.”

“그럼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해요.”

“좋아. 키엘이 지루할 수도 있댔으니까, 난… 외발자전거 공연.”

키엘은 뭐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가 생각해도 외발자전거 공연은 지루할 것 같았으니.

“그럼 난… 저글링이요.”

“아. 왠지 네가 이길 거 같은데?”

어느새 둘은 어떤 공연일지 서로 얘기하며 소년이 말했던 곳으로 다다랐다.

그들은 도착하기도 전에, 둘 다 내기에서 졌다는 걸 인정했다.

점심을 먹을 때라 그런지 대다수가 음식을 먹으며 앉아서 공연을 보고 있었다. 아니, 듣고 있었다.

감미롭게 들리는 피아노 소리를.

둘 다 음악 소리를 들은 적이 별로 없었기에, 적당한 곳에 앉아 입을 다물고 감상에 젖어 들었다.

“연주는 정말 오랜만에 듣네.”

배고픈 것도 잊을 정도로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어제 봤던 소년은 흰색 정장을 입고 까만 피아노의 건반을 부드럽게 치고 있었다.

은발에 흰색 정장이라니.

거기다 피아노까지 흰색이라, 벨라는 좀 ‘과하다’고 생각했지만.

멀리서도 보이는 소년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건반을 누를 때마다 감탄하며 넋을 놓았다.

“피아노 치는 거 멋있다. 예전에는 음악 하는 남자가 이상형이었는데.”

실로 그랬었다.

벨라의 전생은 예술과는 거리가 좀 먼 편이었으니까.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는, 그저 하루하루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 문화를 즐길 시간은 없었다.

오죽하면 죽고 난 후에, 환생을 기다리면서 늦깎이로 웹 소설에 빠졌을까.

그때 키엘이 벨라에게 물었다.

“지금도 피아노 치는 사람 좋아요?”

“뭐, 지금도 멋있어 보이네.”

한 곡이 끝나자 온 사방에서 손뼉을 쳤다.

소년은 잠시 일어서서 허리를 숙이더니 다음 곡을 소개했다.

“이번 곡은 다들 따라 불러도 됩니다.”

그리고 잠시 후 들린 곡은, 여름 축제 때 부른다는 축제의 노래였다.

“이거 그 노래다. 키엘, 이거 노래 불러줘.”

“네?”

“어떻게 불렀었지? 음음음음… 봄이 되면….”

“꽃으로 피어날게요.”

벨라와 키엘은 손을 잡고 양옆으로 흔들며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불렀다.

몇 번 따라부르자 후렴 부분은 이제 외워서 불렀다.

“그대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게요, 꿈에서도 만날 수 있게.”

전시 상황일 때, 다시는 만나지 못할 임을 보내는 노래.

벨라는 노래를 멈추고 키엘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이 여름이 끝나면 곧 키엘은 열세 살이 되겠지.

앞으로 2년.

그리고 그 후로 3년을 더 기다리면, 이 소설이 드디어 시작한다. 키엘이 자신의 운명의 짝을 만나는 날이.

‘너를 황궁으로 보낼 때도,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순간 밝게 웃는 키엘을 오래도록 눈에 담고 싶었다.

잠시 후, 공연이 전부 끝나자 어제의 소년이 벨라에게 다가왔다.

“잘 봤어? 지루하진 않았어?”

“응. 잘 봤어. 재밌진 않지만, 감동적이네.”

벨라는 얼른 손수건을 꺼냈다. 하지만 소년은 받아 가지 않고 오히려 다른 질문을 던졌다.

“너흰 어디서 왔어? 집이 이 근처야?”

“아니. 우리는 일리노 근처에서 왔어.”

“아하. 일리노면 프실리아 백작가 근처일 텐데.”

구태여 대화를 이어가는 소년에게 벨라는 두루뭉술 대답했다.

“글쎄, 설명하기가 힘드네.”

“그래? 내가 지리를 좀 아는데. 근처에 유명한 건 없어?”

벨라는 스무고개를 하느니 차라리 빨리 대답해주는 게 낫겠다 생각했다.

“우리 저택 근처에 마법사의 탑이 있어.”

“어딘지 알겠네. 다음에 근처로 가게 되면 놀러 가도 될까?”

“뭐, 할 일 없으면 그러던가.”

벨라는 긍정 같은 거절을 하고 손수건을 다시 들이 내밀었다.

‘왜 안 가져가는 거야.’

그때 아까부터 한마디 말도 없이 예민하게 소년을 쳐다보던 키엘이 한마디를 던졌다.

“안 돼.”

매우 진지하고 엄중한 얼굴로.

“우리 집에 곰 있어.”

곰이 있긴 있지. 하지만 소년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다음 말을 말했다.

“그럼 다음에 우리 집으로 놀러 와. 초대할게.”

“어?”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

소년은 벨라에게 물었지만, 키엘이 대답했다.

“물어보기 전에 본인 소개부터 하는 게 예의 아닌가?”

소년은 조금 짜증 나듯이 키엘을 노려봤다.

“동생이 날 상당히 싫어하나 보네. 내 이름은 후안 크루엘이야.”

그리고 매우 자신 있게 말했다.

벨라는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치고 손가락으로 후안을 가리켰다.

“아아!”

세상에. 크루엘 공작가라니.

‘그래서 이렇게 건방지게 구는구나.’

후안은 슈리아의 사촌이지만, 로잔느를 짝사랑하는 역이었다.

소설 속에서는 위험한 남자처럼 묘사되었는데, 어린 시절이라 그런지 나쁜 남자라기보다는… 온통 흰 정장이 그저 갈치처럼 보였다.

“그래서 네 이름은?”

“난 벨라트리체. 벨라라고 불러.”

“아… 하하. 그래. 손수건을 보여주면, 경비가 들여보내 줄 거야.”

생각해 보면 상대는 이 도시의 공작가인데, 벨라는 그런 예의 따윈 까먹어버렸다.

“언제든지 놀러 와.”

그때 벨라의 속으로 두 가지의 고민이 오고 갔다.

만약 후안을 보러 간다면, 슈리아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슈리아는 내 차앤데.’

슈리아는 황태자비가 되고 싶지 않았지만, 가문의 압박 탓에 자신이 가고 싶었던 기사의 길을 포기한 사람이었다.

인생까지 포기했는데 난데없이 나타난 로잔느 때문에 점점 악녀로 변해가는 캐릭터.

벨라가 오랜 시간 답을 하지 않자, 후안은 키엘을 쳐다보며 말했다.

“귀여운 동생이랑 같이 와도 되고.”

그러면서 손수건을 잡은 벨라의 손을 잡았고, 조심스레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럼, 언젠가 볼 수 있기를.”

그 말을 끝으로 후안이 떠났고, 벨라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계속 고뇌하고 있었다.

“…벨라, 갈 거예요?”

“만나보고 싶긴 한데.”

차애 슈리아를.

하지만 괜히 원작을 틀어버릴까 봐, 그게 걱정이었다.

‘처음에 빙의할 때는 로잔느가 아니면 슈리아로 빙의하고 싶었지.’

만약 그랬다면, 원작 따위는 과감하게 비틀었을 텐데.

“그래도 네가 제일 중요해.”

벨라는 옆에서 화가 나 있는 키엘을 보며 말했다.

후안이 나중에 자신의 연적이 될 기운이라도 느낀 것인지. 소설 속에서도 이유 없이 싫어하더니.

“너무 이유 없이 싫어하지 마. 저기 크루엘 공작가야. 나중에 네가 마주치게 될 사람.”

“이유 있어요.”

“뭔데? 너 귀엽다고 해서?”

“…….”

벨라는 화가 풀릴 것으로 보였던 키엘의 눈에 다시 힘이 들어가자 그의 볼을 꼬집었다.

“아니, 귀여운 걸 귀엽다고 하는데 왜 싫어.”

“나 이제 열두 살이에요. 어린애 아니라고요. 조금 있으면 열세 살인데….”

“풉.”

그 말조차 귀여워 보였던지라, 벨라는 그만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키엘은 잠깐 당황한 듯 두 입을 벌리더니 이내 입술을 깨물었다.

“…귀여운 거 안 할 거야.”

“미안, 미안. 키엘, 화났어?”

“…웃지 마세요.”

하지만 올라간 벨라의 광대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젠한테 갈래요.”

키엘이 삐쳐서 돌아서자 벨라가 키엘을 뒤쫓아갔다. 여전히 입가에 미소가 가득한 채.

잠시 후 이웨르 일행이 게임을 마치고 돌아왔다.

“짜잔! 저희 3등 했어용!”

“잘했어.”

“그런데 이쪽은 또 왜 분위기가 침울해요?”

이웨르가 벨라와 키엘을 번갈아 가며 보며 물었다.

“키엘이 내가 귀엽다고 해서 삐쳤어.”

벨라가 이웨르에게 말하자, 키엘은 울상이 되어 벨라를 원망스럽게 쳐다봤다.

“도련님, 귀여운 거 싫으면 남자가 되셔야죵. 제가 남자가 되는 법을 좀….”

“이웨르.”

“흠흠….”

이웨르가 장난을 치려다 입을 다물었다.

“키엘, 곧 있으면 불꽃놀이 한대. 그만 화 풀어, 응?”

“…….”

“불꽃놀이 끝나면 풍등 띄우는데 풍등에 소원 적으면 이루어진대. 우리 풍등 사러 갈까?”

소원이라는 단어에 키엘이 고개를 다시 벨라에게로 돌렸다.

벨라에게서 서약까지 했는데도, 키엘은 그 후로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미신은 하나씩 다 해보곤 했었다.

도대체 무슨 소원이길래 그렇게 용을 쓰는 건지.

“풍등 사지마?”

“…사러 가요.”

“아유, ㄱ….”

벨라는 ‘귀여워.’라고 말하려다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또 귀엽다고 말하려고 했죠?”

“아니?”

하여튼 눈치는 빨라서.

“말해요. 귀엽다고 말하려고 했죠?”

“아니이이.”

키엘이 벨라를 노려보자 그녀는 괜히 멀리서 등을 돌리고 있는 젠킨스와 잔바르를 가리켰다.

“쟤들은 왜 저래?”

너무 티가 나게 말을 돌린 거 같지만, 키엘은 넘어가 준다는 눈으로 벨라를 쳐다보고 고개를 홱 돌렸다.

‘휴, 살았다. 삐치니까 장난 아니구나.’

그때 이웨르가 굳이 알 필요 없는 대답을 했다.

“어유, 그러니까요. 마계 축제도 이렇게 축 처지진 않겠어요.”

마계에도 축제가 있었나.

“내가 뭘 했다고 저러는 건지.”

그 말에 다시 젠킨스를 돌아보자, 진짜 둘 사이의 분위기가 이상해 보였다.

쓸데없이 화보라도 찍는 것 마냥 주변의 분위기가 우수에 젖어 드는 것 같았다.

“아까 게임하면서 무슨 일 있었어?”

벨라는 3등 상으로 받았다는 주스를 마시면서 물었다.

“제가 장난이 좀 심했나 봐용.”

“무슨 장난 쳤는데?”

“제가 밀쳐서 둘이 키스했어용.”

“켁.”

벨라는 주스를 마시다가 이웨르의 말을 듣고 사레가 걸렸다.

“왜 그랬어?”

겨우 진정시키고 이웨르에게 물어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방아쇠만 당겨줬죠.”

“방아쇠가 아니라 들이부은 거 같은데?”

“…공주님은 진짜 눈치가 없네요.”

“응?”

“심지어 도련님도 눈치챈 거 같은데.”

“뭘?”

벨라는 정말 하나도 모르는 듯이 물어봤다.

“젠킨스랑 잔바르 님이요.”

“그래서 뭘 눈치채?”

이웨르가 한숨을 내쉬더니 키엘에게만 들릴 소리로 작게 말했다.

“도련님, 힘내용.”

“…응.”

* * *

불꽃놀이는 솔직히 기대 이하였다.

이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저녁도 도시락으로 먹고 다리 위에서 돗자리 깔고 기다렸는데.

‘내가 너무 현대 문명에 있다 와서 그런가 봐.’

1시간짜리 불꽃놀이, 타워나 다리와 협동해서 떨어지는 불꽃을 사진으로나마 봐서 그런지 소리만 조금 요란하게 들리고 잘 보이지도 않는 불꽃이었다.

“실망이야. 저게 무슨 불꽃이야. 차라리 꽃을 불태우는 게 더 낫겠다.”

“그러게용. 밤을 불태울 기운도 안 나게 시시해용.”

마지막 불꽃이 터지는 소리는, 벨라가 이웨르를 때리는 소리보다도 작았다.

“힝. 뭔가 시시하게 끝나는 거 같아서 아쉬워용.”

“짠!”

벨라는 웃으면서 낮에 사두었던 풍등을 꺼냈다.

“여기에다가 소원을 적고 하늘 위로 올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대.”

“인간들은 정말 쓸데없는 믿음이 강하군요.”

“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소원 말해봐. 적어줄 테니까.”

벨라는 무릎에 풍등을 올리고 적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 공주님 옆에 계속 있기용.”

“아부 한번 진짜 잘하네.”

방금 세게 때린 게 미안할 정도로. 벨라는 자신의 소원과 함께 적어 내려갔다.

소원이라는 건, 지금 당장 할 수 없는 걸 적는 거기도 하니까.

[벨라 : 슈리아 만나기]

[이웨르 : 공주님 옆에 계속 있기 ]

“또?”

하지만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소원이라면 환장하는 키엘마저.

“키엘은 소원 없어?”

“…내가 적을래요.”

벨라는 별생각 없이 풍등을 키엘에게 넘겨주었다.

키엘은 풍등을 받고서 한참을 망설이더니 끄적거렸다.

“젠이랑 잔은?”

“잔이 뭡니까… 어차피 이런 거에 적는다고 소원이 이루어지진 않습니다.”

“젠도 없어?”

“저도 제가 적을게요.”

그러자 키엘이 급하게 풍등에 자신이 적은 걸 긋기 시작했다.

‘뭘 적었길래 저렇게 숨길까.’

젠킨스까지 마저 적고 나자 때마침 멀리서 ‘풍등에 불을 켜주세요.’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린 불이 없는데, 어떡하죠?”

벨라는 손을 뻗고 말했다. 이 정도 마법은 할 수 있을 테니까!

“기다려봐. 내가 마법으로….”

“잠깐만요!“

하지만 벨라의 손끝에서 이미 마법이 발동되었다.

“…어?”

손톱만 한 불꽃을 상상했는데, 팔뚝만큼 거대한 불꽃이었다. 불은 곧 벨라의 손에서 풍등을 들고 있는 젠킨스에게로 향했다.

젠킨스는 풍등을 자신의 뒤로 감추었고 눈을 감았다.

“피.”

피해라는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젠킨스의 앞으로 잔바르가 서서 무섭게 불타고 있었다.

“꺅! 사람이 불에 탔다!“

잔바르는 온몸으로 불을 받아내자마자 다리 밑으로 뛰어들었다.

다행히 본 사람은 몇 명 없었는지, 이웨르가 ‘환상쇼’였다며 안심시키자 의문만 남기고 다들 사라졌다.

“잔바르, 괜찮아?”

벨라가 다리 밑으로 고개를 내밀자 잔바르는 어느새 벨라의 뒤에 서서 상반신을 탈의하고 옷을 짜고 있었다.

“진짜 빨리 회복되네.”

“대장군이잖습니까.”

“다음엔 자르지 말고 불에 태워줄까?”

“전 잘리는 걸 더 선호합니다. 단면만 붙으면 되니까요.”

화상 자국이 빠르게 회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확실히 잘렸을 때보다는 더뎌 보였다.

제일 많이 놀랐을 젠킨스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가씨, 마법 연습은 안 하세요?”

“불이나 빌려 와.”

우여곡절 끝에 다시 풍등을 날리게 되었다.

불을 붙이자, 천천히 풍등이 위로 올라가고.

“우리 풍등이 제일 꼴찌네.”

뒤늦게 출발한 풍등은, 다른 풍등과 함께 밤하늘의 별이 되어가고 있었다.

“예쁘다.”

“…예뻐요.”

벨라는 자신을 보고 있는 키엘에게 고개를 돌렸다가 환하게 웃었다.

“소원 꼭 이루어지면 좋겠다.”

이 소설이 완결 나기 전에 슈리아를 한번 볼 수 있다면, 벨라는 그야말로 소설 속에서 할 수 있는 덕질은 다 한 셈이었다.

* * *

축제가 끝나자 벨라의 평화롭고 소소한 시간이….

“아가씨, 그런데 마법 연습을 너무 안 하시는 거 아닙니까?”

젠킨스의 잔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냥 조절이 안 된 거뿐이야.”

“그 조절을 연습하셔야죠. 무식하게 갖다 때려 박는 게 마법이 아니라고요.”

벨라는 한 귀로 듣고 흘렸다.

‘무식하긴, 뭐가.’

마계는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마력을 폭발시키듯 죽여버리는 게 일상인 동네라, 애초에 인간계의 마법을 연습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인간계 침공할 거라면서요. 그럼 여기서도 마법은 쓸 수 있어야죠. 그게 아가씨 무긴데.”

젠킨스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침공할 계획은 사실 없었지만. 가끔 마족들이 엇나가는 행동을 할 때마다 이 계획을 빌미로 경고했던지라.

‘마법이라… 연습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되나.’

한편, 키엘은 축제에 다녀온 후로 혼자 생각에 빠져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는 식탁에 앉아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답답한 속을 내렸다.

- “옆에는 동생이야?”

- “응.”

벨라의 말이 계속 떠돌았다.

‘아이라서 사랑스럽게 굴기 쉬웠는데. 아이라서 사랑받을 수가 없네.’

게다가 검술 교실에서 친해진 몇 명을 통해, 백방으로 알아봐도 벨라의 이상형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브웬을 막으니까 이젠 별 피라미 같은 게 붙고 난리야.’

하필이면 크루엘 공작가. 황제의 사생아였던 키엘의 정통성을 제일 먼저 인정한 가문이었다.

물론 그들도 필요에 의해서였겠지만, 당시 키엘에게는 꽤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기도 했고.

키엘은 자신의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잔인하게 아름다웠던 밤을 떠올렸다.

‘황제가 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는데.’

그가 어린 몸으로 돌아오기 전만 해도, 까마득히 먼 미래처럼 느껴졌다.

그때 식당으로 식사를 준비하러 이웨르가 들어왔다.

“도련님, 여기서 뭐 해용?”

키엘은 얼굴에 고뇌를 지우고 눈웃음치며 이웨르에게 물었다.

“응. 그냥 생각할 게 있어서.”

이웨르는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치려다가, 축제 때 키엘의 모습이 떠올라 헛기침을 하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축제 때 봤죠? 우리 아가씨는 대놓고 떠먹여 줘도 몰라요.”

키엘은 따뜻한 차를 손으로 감싸며 웃었다.

누가 봐도 잔바르와 젠킨스 사이에 모종의 야릇한 분위기가 오고 가는데도, 몇 년째 지켜본 사람이 그걸 모른다.

“표범이랑 인간이라서 눈치 못 채는 건 아닐까? 예전에 벨라가 동물이랑 짐승은 결혼 못 한다고 했잖아.”

“제가 볼 땐 그냥 아가씨는 그런 쪽으로 관심이 아예 없어용.”

“…….”

“그 브웬이라는 꼬마도 봐용, 그렇게 뭘 가져다주는데도 아가씨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용?”

“뭐라고 했는데?”

“브웬이 나중에 레스토랑을 만들 거라 시범 삼아 주는 거래용.”

“…아아.”

키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진짜로 믿네.’

가끔 검술 교실의 아이들에게 일부러 말을 흘려놨는데, 제대로 먹힌 모양이었다.

키엘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벨라가 그저 눈치가 없는 걸까. 아니면 혹시….

“혹시 벨라에게 따로 약혼자라도 있어?”

“하하! 전 도련님이 이렇게 적극적이라 매우 좋아요.”

“웃지 마. 난 진지하단 말이야.”

“그런 얼굴로 진지하다고 해봐야 귀엽기만 하답니당.”

이웨르는 웃으며 눈을 돌렸다.

약혼자라니. 인간계와 다르게, 마족들은 사랑이나 결혼 같은 개념이 없었다.

각 유형의 종족의 수장되는 이들의 힘에 따라 자연스레 자식이 뿅 하고 생겨나기에, 어떻게든 힘을 키우는 게 우선이었지.

그건 선대 마왕이나 벨라도 마찬가지일 터.

마왕은 단 하나의 종족이기에 스스로 만들어낸 자식에게 자신의 힘을 전부 전달하고 동면했다.

“아가씨는 약혼자 같은 건 없어요.”

“그건 다행이네.”

이웨르는 곱상한 얼굴로 골똘히 고민하는 키엘이 꽤 좋았다. 특히 처음부터 감정을 숨기지 않는 점이. 젠킨스나 잔바르와 다르게.

이웨르가 미소 지었다.

젠킨스와 잔바르의 관계를 구경하려고 인간계에 머물고 싶었는데.

“맞아요, 도련님에게도 가능성은 있답니당!”

그 말에 볼을 붉게 물들이는 키엘의 귀엽고 풋풋한 사랑을 응원하고 싶어졌다.

“제가 도와드릴까용?”

“…네가?”

“도련님, 문제는 약혼자 같은 게 아니예용.”

“응? 그럼 뭔데?”

“제가 볼 때 도련님의 가장 큰 문제는, 너무 어릴 때부터 같이 지냈다는 거예요. 마냥 귀여운 동생으로만 보일걸요?”

키엘은 그 말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그걸 모르나.

그리고 축제 때 만났던 후안 크루엘을 떠올렸다.

벨라보다 나이도 많은 성인인 데다가, 키도 크고 후에 공작가를 이을 후계자 중 한 명이었다.

- “만나보고 싶긴 한데. 그래도 네가 제일 중요해.”

분명 후안 크루엘을 만나러 갈 것 같진 않았지만, 벨라가 풍등에 쓴 소원은 또 달랐다.

[슈리아 만나기]

‘그런데 왜 슈리아 크루엘이 나오지.’

마음이 조마조마할 찰나에, 이웨르가 다른 생각을 하는 키엘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딱 하고 쳤다.

“도련님. 방법이 없지는 않아용.”

“…정말?”

“딱! 한눈에 반할 만한 모습을 보여주면 된답니당.”

“어떻게?”

이웨르가 자신 있게 주먹을 쥐었다.

키엘은 이웨르라면 믿고 기댈 만하지 않을까, 잠깐 생각했다.

“덮칩시다.”

그 말을 듣자마자 키엘은 인상부터 찡그렸다.

“안 들은 거로 할게.”

“그렇게 해도 그 짐승들은 감정을 못 느낀단 말이예용! 이게 최고의 방법이라고용!”

키엘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고개를 저었다.

“젠킨스도 그렇게 잔바르 님을 꼬셨다고용!”

“아… 안 들을 거야.”

키엘이 급하게 일어섰다.

“도련님, 그렇게 수동적인 자세는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고용!”

식당을 나서려는 키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마디만 던졌다.

“아, 아직은 그러면 안 돼.”

“어머, 아.직.은.이용?”

키엘은 쾅 하고 식당 문을 닫는 거로 대답했다.

‘이웨르는 진짜….’

도대체 무슨 동물이길래 저렇게 수위를 넘나드는 건지.

키엘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 방으로 돌아가려던 때였다.

“키엘, 무슨 일 있어?”

하필 제일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마주쳤다.

“그… 그건 뭐예요?”

벨라는 당근이 가득 담은 큰 바구니를 두 손으로 안고 있었다.

“아, 이거 브웬이 농장에서 당근을 많이 수확했다고 주더라고.”

그놈의 브웬은 왜 아직도 얼쩡거리는 건지. 벨라가 크루엘가에 갈까 봐 걱정인데.

벨라는 품에 안은 당근 하나를 꺼내서 키엘의 얼굴 옆으로 겨냥했다.

“그나저나 얼굴이 당근보다 더 빨간데? 어디 아파?”

“아… 안 빨개요.”

* * *

그 후로 키엘은 잠시도 긴장감을 놓지 않고 벨라의 동태를 눈여겨봤다.

‘확실히 갈 마음은 없는 거 같아.’

벨라는 마법 연습 때문에 바빠서인지, 크루엘가에 놀러 갈 생각은 일절도 없어 보였다.

실제로 벨라는 어딘가 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아가씨, 이렇게 못 하면 어떻게 해요?”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는 젠킨스의 잔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다시 설명해 봐.”

인간계의 마법은, 마계의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마치 같은 스마트폰을 가졌으나 쓰는 어플이 다른 것처럼, 마법의 종류도 달랐고.

분명 같은 말인데 다른 언어로 쓰인 것처럼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언어도 달랐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언어가….

“그러니까 철수가 4km/h 로 달리고 영희가 3km/h로 30분 뒤에 뒤따라 가다가….”

수학이었다.

“아, 몰라. 몰라, 몰라! 철수랑 영희랑 그냥 만나게 해줘!“

“아가씨. 다른 마법도 아니고, 공격 마법은 1, 2초 안에 모든 게 다 끝나요. 그 안에 이 모든 수식을 다 계산해서 적절하게 마력을 보내야 한다고요.”

“하….”

“들어봐요. 상대가 2초 안에 얼마만큼의 크기의 마력을 쏘는지를 보고, 그 속도에 맞춰서 그만큼 알맞은 방어를….”

벨라는 왜 마법사 중에 머리가 돈 사람이 많은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럴 때면 키엘은 달콤한 과자를 들고 와 벨라 옆에 슬쩍 내밀었다.

“…벨라, 힘들어요?”

벨라는 키엘을 보자마자 설움이 복받쳤다.

벌써 키엘의 13번째 생일이 지나고, 어느덧 겨울이 다가오는데.

앞으로 키엘이 황궁에 가기까지는 1년 하고 반이 남았다.

그전까지 최애와 재밌는 시간을 보내도 모자랄 판국에, 듣기 싫은 젠킨스의 잔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공부를 해야 하다니.

“응. 너무 힘들어.”

벨라는 키엘의 팔짱을 끼고 머리를 팔에 기대어 부비적거렸다.

“키엘, 우리 놀러 갈까?”

“…네.”

키엘은 최대한 천천히 대답했다.

“아무래도 휴식이 필요해.”

“뭘 얼마나 열심히 했다고…. 도련님이 공부하시는 거 반의반도 안 되면서.”

식사 시간이 되자, 벨라는 낮에 했던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 갑갑한 곳에서 벗어나 탁 트인… 공간….”

그녀는 나이프로 고기를 썰면서 중얼거렸다.

아무 잔소리도 없고, 광활한 하늘과 드넓게 펼쳐지는 지평선. 아니, 지평선이 아니라 수평선이라면 어떨까.

소설에 빙의 된 후로 한 번도 넓고 광활한 바다는 보지 못했다.

바다가 보고 싶었다. 가서 해산물도 먹고.

“젠킨스, 인근에 바다가 있는 지역은 없어?”

“바다요? 바다는 … 일주일은 가야 할 겁니다.”

일주일이면 길긴 하지만.

“마차를 두 대 정도 사서 나눠서 바다를 보러 갈까?”

그러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다들 싫은가?’

하지만 정반대였다. 지나치게 좋아한 나머지 말을 잃었던 모양이었는지,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웬일로 잔바르가 제일 먼저 찬성했다.

“좋습니다!“

“좋아용!”

“뭐…. 검술 교실은 한 달 정도 쉰다고 얘기해야겠네요.”

제일 반대할 것 같았던 젠킨스마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벨라는 옆에 앉아 있는 키엘의 팔을 툭툭 치고 물었다.

“키엘은? 키엘도 좋아?”

키엘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벨라를 바라봤다.

“바다… 가보고 싶어요.”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갈걸. 벨라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식탁을 탕하고 쳤다.

“자, 그럼 전부다….”

그때였다.

“저도 가요?”

아주 말똥말똥한 눈으로 손을 번쩍 든 건.

푸르였다.

“곰은 못 가.”

벨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푸르를 무시하고 진행하려는데, 분위기가 어째 이상했다.

푸르가 눈을 글썽이더니 울분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엉엉… 왜 맨날 나만 못 가요. 푸르도 놀고 싶다고요! 나도 저택에서 벗어나고 싶다고요!“

“그럴 거면 동물왕국으로 돌아가. 벗어나고 좋네.”

“엉엉… 제가 어떻게 공주님을 떠나요.”

벨라가 주변을 둘러보자 서로 상당히 눈치를 보며 한마디씩 던졌다.

“뭐… 같이 갈 수 있으면 좋겠긴 하겠네요.”

“꼭 바다가 아니어도 괜찮고용.”

조금 전까지 신이 났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일주일이나 마차를 타고 가는 곳인데 곰을 어떻게 데리고 가?”

“곰 인형처럼 가만히 있을게요!”

이제는 아예 떼를 쓰며 드러누웠다.

물론 벨라도 푸르가 신경 쓰이긴 했었다. 항상 어디를 갈 때마다, 빼놓고 다녔으니까.

그때 키엘이 벨라의 옷을 살짝 잡아당겼다.

“저… 벨라.”

“응?”

“푸르도 같이 가면 안 돼요?”

약간 처진 눈으로 시무룩하게 벨라를 보고 있었다. 간식 달라고 쳐다보는 강아지 마냥.

‘그렇게 보면 반칙인데.’

벨라가 말을 잇지 못할 때, 키엘이 단호하게 말했다.

“바다 안 가도 돼요, 다른 데 가도 돼요.”

너희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어.

살짝 질투심도 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뭉클했다.

“아유, 말도 예쁘게 하는 거 봐.”

본의 아니게 벨라의 진심이 튀어나왔다.

악마들은 ‘우리도 그렇게 말했는데….’라며 투덜거렸지만, 벨라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푸르가 곰 인형인 척한다지만, 벨라는 그 말을 절대 신뢰하지 않았다.

괜히 들켰다가 이 소설의 세계관에 무리를 주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자, 그럼 뒷산 가자.”

“…….”

“캠핑 어때? 호수 가서 낚시도 하고, 고기도 구워 먹자!”

그렇게 준비한 캠핑은 벨라의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모험가들에게는 일상이나 다름이 없어서 텐트며 모닥불은 헐값에 살 수 있었다.

‘난 좀 더 초호화 휴양을 원했지만.’

드디어 저택 밖으로 놀러 나간다는 생각에 신이 난 푸르와 그런 푸르에게 잘됐다며 같이 동동거리는 키엘을 보니 욕심을 내려놓았다.

‘키엘이 좋으면 됐지, 뭐.’

키엘은 아이에서 제법 소년의 티가 나기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키가 크더니 어느새 벨라의 눈높이만큼 키가 컸다.

매일 같이 지내다 보니 실감하지 못하지만, 때때로 마주치게 되면 벨라는 ‘언제 저렇게 컸을까’라는 생각이 부쩍 들었다.

‘곧 있으면 이렇게 지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네.’

* * *

산에는 눈이 덮여 있고 상당히 추웠다.

“키엘, 많이 추워?”

추운지 이를 덜덜 떨면서도 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푸르. 네 가죽 좀 벗기면 언제 회복돼?”

“아가씨, 너무 하세요!”

“키엘이 춥잖아.”

“그럼 도련님, 제 등에 타실래요? 엄청나게 따뜻할 텐데.”

푸르가 네발로 기어가며 물었다.

키엘은 다시 고개를 젓더니 벨라의 옆으로 다가가 그녀의 옷을 잡아당겼다.

“벨라….”

“응? 다시 돌아갈까? 좀 더 따뜻한 옷을 챙겨올까?”

키엘은 두 팔을 벌리면서 벨라에게 말했다.

“안아주세요.”

이 애가 정말 사람을 미치게 하는구나.

벨라는 키엘을 꼭 안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너무 귀여워서 미칠 것 같아.’

하지만 귀엽다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지난여름 축제 이후로 키엘이 삐치는 제1순위의 단어가 ‘귀엽다’였으니까.

대신 있는 힘껏 키엘을 끌어안았다.

잔바르가 그 둘을 보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렇게 걸어갈 겁니까?”

“잔바르, 네가 저택 가서 키엘 옷 좀 가지고 와.”

“왜 제가….”

“그럼 내가 가랴?”

잔바르는 한숨을 내쉬면서 표범으로 변했다.

“지난번의 악몽이 떠오르는군.”

“괜찮을 겁니다. 그때는 마차가 부서진 거고….”

젠킨스가 잔바르의 말에 대꾸하자, 잔바르가 그를 노려보았다.

“네 의견은 듣고 싶지 않아.”

그렇게 툴툴대고, 그는 서둘러 저택으로 발돋움했다.

잔바르가 돌아올 때까지 잠시 그곳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키엘. 잔바르가 옷 가지고 올 거야. 조금만 기다리자.”

“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키엘은 잔바르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평소에도 벨라가 잘 안아주는 편이었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 안아주는 건 처음이었다.

‘따뜻해.’

지난여름 축제 이후, 벨라의 말이 계속 그의 머리에 떠돌았었다.

- “옆에는 동생이야?”

- “응.”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응’이라고 대답했던 벨라.

속은 이미 어른인데. 그조차 모르고 어린애 취급하는 게 싫었다.

귀여운 것도 싫고, 보호만 받는 것도 싫었다.

‘동생 같은 존재는 싫은데.’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자신을 안아줄 때나 손을 잡아줄 때면 그냥 이 순간에서 더 크고 싶지 않았다.

‘영원히 그냥 이대로 있고 싶다.’

뒤로는 찬바람이 불지만, 코끝으로 불어오는 따뜻한 향에 취할 것 같았다.

키엘이 조심스레 고개를 올려 벨라를 바라보았다.

어릴 때는 꽤 키가 차이가 크게 났는데, 지금은 머리끝이 그녀의 눈에 닿는 듯했다.

“…왜?”

가끔 마을 친구들이 ‘그건 그냥 엄마 좋아하는 거야.’라고 하지만 키엘은 딱 잘라 부정했다.

이 마음은 착각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푸르나 젠킨스도 좋아하지만, 그건 벨라를 좋아하는 거랑은 너무 달랐다.

“많이 추워?”

키엘은 조금 더 벨라를 꽉 안으며 파고들었다.

“…좋아서.”

키엘이 추울까 봐 코트를 가지러 간 잔바르를 기다리는 동안. 이웨르는 옆에 앉아 있는 젠킨스에게 물었다.

“두 분은 언제 화해하실 건가용?”

“화해라뇨.”

“아니, 일전에 키스까지 하셨는데 영 진도가 안 나가네용.”

“…….”

“어쩌겠어용, 남는 게 시간인 마족인지라 1년이 하루 같겠죵.”

그러면서 서로 안고 있는 벨라와 키엘을 보며 묘한 웃음을 지어냈다.

“저기가 더 먼저 결판이 나겠넹.”

젠킨스는 이웨르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고개를 향했다.

‘언젠가 도련님을 이용해서 인간계를 침공할 건데….’

그러나 가끔 벨라의 행동은, 그저 이용하기에는 너무 많이 정을 주는 것처럼 보였다.

“참… 이럴 때 보면 마계 공주답긴 하군.”

결국 저 정 때문에, 키엘이 황태자가 되고서 벨라에게 이 세상을 다 바칠지도 모른다는 예감.

“그런 가용? 전 저럴 때 보면 공주님은 상당히 인간 같아 보이는뎅. 굉장히 상냥한 인간.”

그는 헛웃음을 내보이며 이웨르의 단순한 생각을 비판했다.

“무슨 소리. 도련님을 이용해서 이 세계를 침공할 계획이에요. 철저히 계획대로 잘해주는 거예요.”

그러면서 젠킨스는 손으로 자신의 입을 툭 쳤다.

평소에는 입이 무겁다고 생각했는데, 때때로 이런 실수를 하는 스스로가 너무 싫었다.

‘이런 점도 결국 반은 내가 마족이라는 거네.’

도발하면 쉽게 걸려드니, 여태 수많은 용사가 마족을 상대할 수 있었던 거다.

반면 인간의 마음을 이용하는 몽마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아닌데용?”

“뭐가요?”

“아가씨는 도련님한테 진심으로 잘해주는 건뎅.”

다만 그게 남녀 간의 사랑이라기엔 조금 달라보였지만.

둘은 투덜대며 논쟁을 펼치기 시작했다.

“마계에서 제일 힘 있는 자입니다. 당신도 마족이니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공주님은 인간 같다고용.”

“진심일 리 있겠어요?”

“저걸 보고도 진심이 아니면, 젠은  인간계에서 헛살았넹.”

“…….”

이건 자존심을 긁는 문제였다.

여태 반쪽이라는 혐오를 받아왔다.

하지만, 반은 인간이기에 그가 경험한 것을 몽마인 이웨르가 아무것도 아닌 것 마냥 치부해버리는 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기하실래요?”

“좋아용.”

둘 다 질 생각은 없었다.

벨라는 키엘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두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왜? 많이 추워?”

호박색의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벨라는 마음의 평화가 찾아올 것 같았다.

“…좋아서.”

그 말에 벨라는 코웃음 치며 키엘의 볼을 꼬집었다.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운지.

“으이구, 어리광쟁이.”

볼을 꼬집히면서 할 말은 아니지만, 키엘은 억울한 목소리로 울상을 지었다.

“어리광이 아니라 정말로 좋아해요.”

벨라도 키엘이 점점 커가는 건 알고 있었다.

“으이구, 그래그래.”

“…….”

백세의 노인에게도 자식은 항상 어리다더니.

벨라의 눈에도 키엘은 언제까지고 어릴 것만 같았다.

소설 원작과는 다르게.

전생에서 친언니에게 ‘나 이제 애 아니야’라며 애정 어린 잔소리도 듣기 싫다고 했던 걸 떠올렸다.

어느새 잔바르가 겨울 코트를 가지고 돌아오고, 다시 산행을 계속해 산의 중간쯤에 있는 호수에 다다랐다.

“산이라 그런지 해가 빨리 떨어지는 거 같네용.”

“얼른 텐트부터 치자. 자, 젠! 잔! 텐트 쳐! 푸르는 장작 모아와! 이웨르는 물 떠와서 밥해!“

일거리를 나눠 준 벨라는 제일 먼저 모닥불에 불을 붙였다.

“자. 우리는 여기 앉아서 몸 좀 녹이자.”

그 모습을 본 저택 식구들은 한숨을 내쉬며 뚝딱뚝딱 맡은 일을 하러 가기 시작했다.

“벨라, 나도 푸르랑 같이 장작 주워올게요.”

“안 돼. 손 시려.”

벨라가 키엘의 두 손을 포개듯이 잡으며 호호 불었다.

“감기 걸리면 어떡해?”

그때 텐트를 치던 잔바르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장작 하나도 못 줍는 약한 놈으로 뭘 하시겠다고.”

“야. 애 감기 걸리면 네가 책임질 거야?”

“아가씨, 도련님은 그렇게 연약하지 않아요.”

그러자 키엘이 서둘러 손을 빼고 일어섰다.

“나, 장작 가지고 올래요.”

“그냥 앉아 있어도 돼.”

“아니에요. 푸르가 가지고 오기도 힘들 거예요. 푸르는 곰이니까….”

“그럼 같이….”

벨라가 따라 일어서자, 멀리 있던 이웨르가 소리쳤다.

“아가씨! 이거 얼음 좀 깨주세용!“

그녀가 머뭇거릴 때, 키엘은 벨라의 등을 살짝 밀어 이웨르에게로 보냈다.

“괜찮아요.”

“어어….”

벨라는 불안한 마음이 계속 들었다.

“키엘, 멀리 가면 안 돼!“

저 발걸음으로 멀리 가면 얼마나 멀리 갈까. 길을 잃는다고 해도 이곳엔 곰도 있고 표범도 있어서 키엘을 찾는 건 쉬웠다.

‘그래도 왜 이렇게 불안하지.’

벨라는 꽁꽁 언 호수 위를 살짝 발로 건드렸다. 살짝만 건드렸을 뿐인데도, 살얼음이 와장창 깨지며 밑의 물이 차고 올라왔다.

“꺄, 역시 공주님이라니깡.”

“음. 키엘을 따라가 봐야겠어.”

벨라가 뒤를 돌아서자, 젠킨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도 진짜 극성이라니까요.”

“뭐?”

난데없이 뼈를 때리는 말에 멈춰 섰다.

극성이라니.

“도련님도 열세 살인데, 아가씨가 없어도 혼자 잘 다니세요.”

“아니, 길 잃으면 어떻게 해. 여기 너무 춥잖아.”

“가끔 아가씨는 과보호가 너무 심해요.”

“내가?”

과보호라니.

벨라는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이웨르와 잔바르를 번갈아 봤다.

“내가?”

묵묵한 침묵은 동의의 대답으로 들렸다.

“생각해보세요. 만약 브웬 같은 애가 장작 주우러 갔다 온다고 하면 어떻게 하셨을지.”

벨라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너무 적나라한 예시에 기분이 더러웠다.

“브웬이랑 키엘이랑 어떻게 같아?”

브웬이 처음에 먹을 걸 갖다줄 때는 그저 고맙다고만 생각했는데, 요즘 따라 점점 성가실 지경이었다.

그런 녀석과 감히 내 최애를 같은 선상에 놓고 얘기하다니.

“아가씨의 지나친 관심이 오히려 도련님에게는 독이라고요.”

“도련님은 관심을 더 좋아하는 거 같은뎅….”

벨라는 짜증 난 채로 팔짱을 끼고 묵묵히 젠킨스를 쳐다봤다.

‘이놈이 한두 번 오냐오냐 해줬더니, 아주 잔소리하는 게 취미구나.’

마족들이 반쪽이라서 싫어하는 게 아니라, 젠킨스라서 싫어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니까 도련님은 혼자서 해내는 걸 좋아하신다고요.”

하지만 벨라의 예상과는 다르게, 잔바르까지 합세했다.

“그건 맞습니다. 보기보다 알맹이가 있는 꼬마죠.”

“큰 인물로 만드시겠다면서, 너무 오냐 오냐 키우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웨르, 너도 그렇게 생각해?”

“글쎄용. 저는 사실 과보호가 아니라 좀 더 다른 느낌인 거 같은뎅….”

이웨르가 입이 간지러운지 몇 마디 더 붙이려고 할 때, 젠킨스가 그녀에게 옆에 있던 돌멩이를 집어 던졌다.

“이웨르씨. 우리 공평하게 게임하기로 한 거 아닙니까?”

“쳇.”

젠킨스와 이웨르의 게임이라. 무슨 내용인지 벨라는 잠깐 궁금했지만 이내 다시 걱정이 차고 올랐다.

‘정말로 내가 극성맞은 학부모 같은 걸까.’

가끔씩 다 큰 성인이 되도록 밥 한 끼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엄마’를 부르는 마마보이 같은 놈들을 본 적이 있었다.

물론 경찰서에서.

벨라의 과도한 보호가 혹여, 키엘을 그렇게 만들게 되는 걸까 봐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왠지 불길한 촉이라는 게 왔단 말이야.”

소설 속 주인공이다 보니 더욱 신경은 쓰는 건 맞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극성은 아닌데.

“뭐 이런 산에 맹수라도 살고 있을까 봐요?”

* * *

한편 텐트에서 점점 멀어진 키엘은 장작을 주우러 간 푸르를 찾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혼자 숲을 걷고 있었다. 시간이 되돌아오기 전에는, 쫓기고 쫓겨나 이런 산속에서 정처 없이 걷곤 했었는데.

그때와 달리, 지금은 따뜻한 집과 음식들이 기다리고.

어떤 말을 해도 웃어주는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으며, 온몸을 감싸 안았던 따뜻한 냄새를 되새겨보았다.

‘정말 좋아하는데.’

벨라가 그를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는 건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차라리 시간을 멈출 수만 있으면 좋겠다.’

그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황궁으로 돌아간 후에도, 벨라가 여전히 그대로 있어줄까.’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어쩔지 고민이었다.

때때로 황태자라는 신분을 버리고 벨라와 쭉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과 그래도 숙명을 지고 가야 하는 마음이 늘 싸워왔다.

키엘은 오래전 벨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 “지금은 믿기 힘들겠지만, 언젠가 황궁에서 널 데리러 올 거야.”

- “운명의 여신들이 알려줬어.”

제국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운명의 여신들.

사람들은 그저 구전으로만 내려오는 신화로만 생각하지만, 키엘에게는 달랐다.

여신들 중 하나인 대마법사 오르디의 핏줄이 바로 황족이었으니까.

- “내가 널 도와야 한다고 했어. 내 실수로 하마터면 네 운명이 뒤바뀔 뻔했거든.”

키엘은 신성력이 담겨있지 않은 자신의 펜던트를 손으로 만졌다.

‘뒤바뀐 운명이라면 역시.’

키엘은 다시 시간이 되돌아왔을 때를 생각했다.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그 어린 시절을 또다시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 무력해졌을 때.

‘그때 나는…. 정말 죽을까, 생각했었으니까.’

키엘은 벨라의 말대로 정말로 운명의 여신들이 관여한 거라고 생각했다. 벨라가 아니었으면, 진작에 놓아버렸을 목숨이었으니까.

그러니 지금은 앞으로 나가야만 했다.

언젠가 그가 황태자가 되고, 황제로 갈 길이 뚜렷해진다면.

그렇게 이 세계의 모든 게 자기 발아래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때는 내가 벨라를 데리고 올 수 있겠지?’

공주님은 왕자님과 결혼하니까. 벨라가 들려주던 동화처럼.

‘최대한 빨리 바로 서야 해.’

오래도록 생각했던 일이었다.

다시 황궁에 간다면, 지난 그때와 같이 갇혀 있지만은 않을 거라고.

감히 마력이 없어 황족으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게.

벨라의 앞에서 어리고 보호받아야 할 동생이 아니라, 모든 걸 다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니까.

그때 키엘의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키엘의 등 뒤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는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푸르야?”

갈색빛의 털이 키엘의 눈에 제일 먼저 보였다.

푸르라고 하기에는, 조금 많이 큰 곰이었다.

키엘은 조금 놀랐지만, 천천히 허리춤에 있는 단검에 손을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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