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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유는 고개를 들었다.
평민처럼 옷은 입고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귀한 대접을 받고 자란 티가 철철 흐르는 예쁜 소년이 자신에게 빵을 던졌다.
‘뭐야, 이 자식은.’
하지만 며칠을 굶어서인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빵을 낚아채 한입에 먹었다.
“콜록.”
그 모습을 본 키엘이 오히려 더 살짝 입술을 삐죽인 채 뒤돌아섰다.
‘빵 줬으니까 됐겠지.’
그리고 얼른 벨라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빵 줬어요.”
벨라는 키엘의 볼을 꼬집고 칭찬했다.
“정말 잘했어! 네 이름은 알려줬어?”
“…네.”
키엘은 순간 양심에 찔렸다. 너무 당연하게 거짓말을 해버렸다.
“저 꼬마 애 이름은 뭐래?”
키엘이 두 손을 내밀면서 침을 꼴깍 삼켰다.
“모… 목이 마른 거 같아서… 우유도 주면 안 될까요?”
“어우. 예뻐라. 잠깐만.”
벨라가 눈짓하자 젠킨스는 여분으로 가지고 온 우유를 건넸다.
“저 꼬마는 얼마나 밥을 못 먹은 거래?”
벨라가 계속 질문하자 키엘은 우유를 냉큼 받아들고 뒤를 돌아서 마이유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우유를 건네며 물었다.
“이거 마시고 싶으면 내가 물어보는 거 대답해.”
마이유는 다시 찾아온 예쁜 소년을 보고 얼굴이 붉어졌다. 고개를 끄덕이고 키엘이 건네준 우유를 마시며 로맨스 소설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혹시 내게도 신데렐라 같은 일이….’
하지만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키엘은 그 상상을 부숴버렸다.
“이름.”
“여기 얼마나 오래 있었어?”
“몇 살이야?”
“형제 있어?”
신데렐라는 개뿔.
‘탐정 조수인가?’
마이유는 취조받는 기분으로 키엘에게 성심껏 대답했다.
* * *
도시에서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잔바르가 마차를 몰고, 안에는 젠킨스와 키엘 그리고 벨라가 앉아 있었다.
어느새 키엘은 벨라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
드디어 이 소설 속에서 중요한 설정 하나를 채웠다는 생각에, 벨라는 벅찬 감동이 샘솟았다.
‘그래, 이렇게 하면 잘될 거야.’
점점 저택과 가까워지면서, 저 멀리 처음 소환되었던 마법사의 탑이 보였다.
분명 저 마법사의 탑 때문에 마을에 여행객들이 많다고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인적이 드물어졌다.
“저 마탑에는 이제 마법사가 없나?”
벨라가 별생각 없이 물었다.
“아. 한 명 있습니다. 굉장히 음침한 녀석이었는데, 은둔형이라 아마 눈에 띄지 않을 거예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음…. 아가씨 만나기 전에 그 마법사를 만났었거든요. 그래서 그때 그 여관에서 묵었었고요.”
젠킨스가 말하는 마법사는, 아무래도 잔바르가 물어뜯은 그 마법사를 말하는 거 같았다.
“언제 만났어? 그 마법사가 이상한 소환하는 마법사 맞아?”
“네, 소환하려던 건 맞는데….”
젠킨스의 보라색 동공이 점점 커지더니 손바닥으로 자신의 무릎을 탁하고 쳤다.
“아아. 그래서!”
“뭐?”
“그 마법사에게 소환진을 제대로 가르쳐준 게 저였습니다.”
그러더니 젠킨스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설마 공주님이 소환될 줄이야. 하하.”
젠킨스는 당시 알려주면서도 ‘벨라‘까지 소환할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당시 그 마법사는 의욕만 앞섰지, 그릇은 충분했으나 마력이 넘치는 자는 아니었으니까.
소환진은 하나의 주소와도 같았다.
마력이 충분하지 않을 땐 아파트로 치면 호수는 빼버리고 ‘동’까지만 표기하는 셈이었기에, 무작위로 저급 몽마 정도나 소환할 줄 알았다.
“딱 대장군인 잔바르 님까지 소환이 가능하거든요. 하긴, 아가씨는 아직 성인이 아니니 소환이 되었겠네요.”
“아, 그래?”
“아가씨 눈앞으로 바로 소환진이 생기던가요?”
“…….”
“설마 인간계로 오시려고 대기하고 그러신 건 아니죠?”
젠킨스는 웃으면서 물어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너무 무섭게 젠킨스를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너 그 소환에 필요한 재료가 뭔지 알고 있었지?”
“그야 하나의 생명….”
그러다 젠킨스가 키엘과 벨라를 번갈아 보더니 무릎 위에 올려뒀던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설마 도련님을 거기서 만난 거예요?”
젠킨스도 생명을 재료로 써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어느 재료를 썼는지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짐작은 했기에.
젠킨스는 자신의 악마 같던 방관을 인간적인 양심으로 정죄했다.
“…죄송합니다.”
“너 새끼는 앞으로 힘들다는 소리하지 마.”
벨라의 심기가 뒤틀렸다.
젠킨스가 그놈에게 알려줘서 그곳에서 소환되었고. 하필이면 키엘을 구해버린 거였으니까.
“그거 때문에 키엘 인생이 얼마나 뒤틀렸는데….”
물론 벨라도 알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을 남에게 책임 전가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자신이 인간계로 오지만 않았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때 그놈을 안 죽였으면 키엘이 신성력을 얻었을까?’
하지만 대신에 키엘은 엄청나게 고생하며 살았겠지.
‘그래, 굳이 불행한 어린 시절을 안 겪어도 될 거야.’
스스로 합리화를 하며 잠들어 있는 키엘을 보려는데. 언제 깼는지, 키엘이 무릎 위에서 벨라를 올려다봤다.
“난 괜찮아요.”
이 아이는 언제나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벨라는 싱긋 웃더니 키엘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네가 괜찮으면 그걸로 됐어.”
“죄송합니다, 공주님.”
“아냐. 이런 것도 다 인연이지, 뭐.”
젠킨스는 침을 꿀꺽 삼키며 웃고 있는 벨라를 봤다.
* * *
키엘은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잠결에 중간부터 들어 명확하진 않았지만.
‘소환이라.’
그 말은 즉 동물왕국이 이세계를 뜻하는 건 확실했다. 천계나 마계 같은.
‘젠킨스는 소환법을 아는 것 같고.’
그때 벨라가 소환을 통해 인간계로 넘어왔다면.
- “그거 때문에 키엘 인생이 얼마나 뒤틀렸는데….”
키엘은 자신의 펜던트를 꽉 쥐었다.
그곳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과거와 명백히 달랐던 두 가지.
바로 벨라의 등장과 펜던트에 신성력이 담기지 않았다는 것.
그가 원했던 걸, 벨라는 기가 막히게도 잘 알아채고 채워줬었다.
평민이 왜 그걸 배우고 싶냐며 의심조차 하지 않고.
‘벨라는 내가 황태자라는 걸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커.’
키엘은 목에 걸려 있는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 * *
저택으로 돌아온 날 저녁.
이웨르는 벨라의 신임을 얻은 기념으로 화려하게 저녁을 준비했다.
“짠! 이건 제가 심장을 도로 가져온 기념으로 만들었답니다.”
식탁이 부러질 정도로 많은 가짓수에 악마들은 신이 났고.
“이거 다 먹을 수 있어?”
벨라도 비아냥거렸지만 기분은 퍽 좋았다.
그러나 키엘이 식당으로 들어오면서 분위기는 180도 바뀌었다.
“…벨라.”
“응? 키엘, 울었어?”
키엘은 벌겋게 충혈된 눈을 손등으로 닦았다.
“엄마 유품을 잃어버렸어요….”
“뭐?”
갑작스러운 벨라의 괴성에 키엘은 깜짝 놀랐다.
“어, 어디서 잃어버렸어? 언제부터 없었어?”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그 뒤로 모르겠어요.”
벨라가 발을 동동 굴리며 식탁에 앉아 있는 마족들에게 물었다.
“너희 중에 가져간 애 있어? 빨리 자수하고 광명 찾자.”
“인간 물건 따위를 왜 가져갑니까.”
“저택 안에 있을 거야. 다들 키엘의 목걸이를 찾자. 일어나!”
“밥 먹고 찾아보겠습니다.”
“그게 얼마나 중요한 건데! 위 있는 부분만 구멍 내기 전에 찾아, 빨리.”
맛있는 고기 냄새가 그들을 자극했기에, 마족들은 다른 때보다 훨씬 더 집중해서 저택을 이 잡듯이 뒤져보기 시작했다.
젠킨스도 자신의 방을 찾으면서 의아했다.
“애초에 도련님이 여기 올 리가….”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키엘이 젠킨스의 방에 와서 이것저것 물었던 게 떠올랐다.
“아, 잠깐. 혹시….”
젠킨스는 자신의 협탁 뒤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금색의 펜던트가 보이자, 그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손에 든 펜던트를 살짝 내려다봤다.
‘잠깐만. 이건 왠지 낯이 익은데.’
꽤 섬세한 세공에, 이국적인 문양.
오래전에 젠킨스가 본 물건 같았다. 젠킨스는 조심스럽게 펜던트를 열었다.
그의 기억이 맞는다면 황실의 마법사와 접촉하기 위해 황제에게 뇌물로 이 펜던트를 준 적이 있었다.
펜던트 자체는 그리 대단한 물건이 아니었지만, 펜던트에 보호마법을 걸어 놓았었다.
언젠가 목숨이 위험할 때 구해줄 보호 마법.
‘…설마.’
그 안에는 작은 종이가 들어 있었고, 종이를 펼치자 ‘키엘’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것도 황실의 필기체로.
젠킨스가 걸었던 마법이 아직 발동되지 않은 채.
한편 키엘은 벨라의 반응을 보고 확신했다.
‘벨라는 알고 있구나. 내가 황태자라는 거.’
여유롭게 상황을 지켜보는 키엘과 달리, 벨라는 다급한 마음으로 키엘의 몸을 더듬거렸다.
키엘이 황태자라는 걸 증명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잃어버리면 안 되는데…. 그게 있어야…. 어휴, 어쩌지.”
키엘은 목까지 빨개진 채로 조심스레 벨라에게 물었다.
“벨라는 엄마랑 똑같이 말하네요. 엄마도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했어요.”
벨라는 손을 멈추고, 호기심 어린 키엘의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내가 어떤 특별한 피를 가지고 있대요. 벨라는 알고 있어요? 그게 뭔지?”
언젠가는 얘기해 줄 생각이었지만, 키엘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때 키엘은 조금 전 울었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꽤 똘똘하게 말했다.
“얘기해주세요.”
“사실 네 아버지는….”
벨라는 한참 망설이다가 천천히 음을 떼었다.
“이 제국의 황제야.”
키엘은 마치, 처음 들었지만, 짐작은 했던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전한 목에 손을 갖다 댔다.
“지금은 믿기 힘들겠지만, 언젠가 황궁에서 널 데리러 올 거야.”
아마 받아들이기 힘들 거라 생각하고 벨라는 키엘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벨라는 그걸 어떻게 알아요?”
벨라는 꽤 오랫동안 생각했던 변명을 술술 말했다.
“운명의 여신들이 알려줬어.”
제국의 건국 신화에 나오는 운명의 여신들. 그런 게 있겠냐마는 핑계 대기에는 적절했다.
“내가 널 도와야 한다고 했어. 내 실수로 하마터면 네 운명이 뒤바뀔 뻔했거든.”
“그래서 내게 잘해준 거예요?”
벨라는 키엘의 눈빛이, 유품을 잃어버렸다고 할 때보다 더 슬퍼 보였다.
그녀는 웃으면서 키엘의 볼을 한 손으로 잡았다.
“아니? 난 그냥 키엘이 좋아서 잘해주는 건데?”
그때, 젠킨스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내려와서 벨라를 불렀다.
“찾았습니다.”
“어디서 찾았어?”
“아까 제 방에 왔을 때 흘렸나 봐요.”
벨라는 펜던트를 받아 키엘의 목에 살며시 걸었다.
“이제 잃어버리면 안 돼.”
한 뼘 정도 큰 벨라의 얼굴이 키엘의 바로 앞에 있었다.
“고마워요, 벨라.”
그리고 그는 조심스레 발뒤꿈치를 들어, 벨라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1초도 되지 않은 짧은 순간이지만 이걸로도 만족했다.
“이건 감사 뽀뽀예요.”
“도련님, 찾은 건 전데요….”
키엘에게 언젠가 얘기해야 할 걸 하고 나니, 벨라는 한결 걱정을 덜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염려했던 것보다 잘 받아들이는 것 같고.
하지만.
“고마워요, 벨라.”
키엘이 갑작스럽게 입을 맞추자, 벨라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당황스러웠다.
여태껏 볼에 뽀뽀한 적은 많았지만, 입술은 좀 다른 문젠데.
“도련님, 찾은 건 전데요.”
젠킨스의 한마디에 키엘은 젠킨스를 껴안고 얼굴이 닿는 팔꿈치에 대충 입을 맞췄다.
“젠킨스도 고마워.”
그냥 키엘이 애교가 많은 건가.
“아니, 뽀뽀해 달라는 소리는 아니었습니다.”
이 민망한 상황을 피하려고 식당 문을 열자, 푸르가 갑자기 식탁 밑으로 들어가며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푸르, 너 언제부터 있었어.”
“저 안 먹었어요!”
“입에 소스나 닦아.”
그와 동시에 뒤에서 젠킨스가 키엘에게 훈육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그리고 아무에게나 뽀뽀하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벨라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괜히 키엘에게 말했다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이었는데.
그때 푸르가 식탁 밑에서 기어 나와 가슴을 펴고 말했다.
“고기 먹은 게 아니고, 그냥 뽀뽀했어요!”
벨라는 대꾸조차 하기 싫었다.
‘이런 애들이랑 지내니까 키엘이….’
벨라는 입술을 살짝 만지작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만. 키엘은 앞으로 인간들과 어울려 살아갈 텐데, 아무래도 가정환경이….’
고양이, 표범, 곰과 정체 모를 몽마, 그나마 인간 같은 반마족이 가족이라니.
* * *
벨라는 그날 뒤로 걱정이 많아졌다.
‘키엘이 황궁에 가서 사회성이 너무 없으면 어떡하지?’
벨라는 정원에 설치해 둔 해먹 사이에 들어가 편하게 하늘을 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마을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자리가 있으면 좋겠는데.’
그때 젠킨스가 쉬고 있는 벨라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아가씨, 저랑 잠깐 얘기 좀 해요.”
“나 지금 굉장히 바쁜데.”
“지금 쉬고 계시잖아요.”
“쉬느라 바빠. 휴식도 전투야.”
벨라는 해먹에서 젠킨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러자 젠킨스는 움직이는 해먹을 붙잡고 진지하게 물었다.
“도련님이 진짜 엘리시아제국의 황태자시더군요.”
“말했잖아. 여태 안 믿었어?”
벨라는 그제야 젠킨스를 황당하게 쳐다봤다.
‘도대체 나의 신뢰가 어디까지 바닥인 거야?’
진실을 떠먹여 줬는데도 여태 씹지도 않고 있었다니.
“키엘한테도 얘기해뒀어. 황태자라고.”
“네에? … 딸꾹.”
젠킨스는 놀랐는지 딸꾹질을 시작하고 자신의 가슴을 쿵쿵 쳤다.
“그러니까 키엘의 검술 훈련은 그냥 당분간만 네가 해.”
‘당분간’이라고 하지만 결국 자신이 대련까지 봐줘야 할 걸 예감한 젠킨스는 발을 동동 굴렀다.
“대련은 어떻게 하고요? 키부터 차이가 나는데 제대로 된 대련이 되겠습니까?”
대련이란 말에 벨라는 손가락을 튕기며 ‘딱’ 소리를 냈다.
“그래. 대련! 키엘이랑 비슷한 또래 애들이랑 대련시키면 되겠다.”
“…네?”
“이 저택에서 검술 교실을 개설하는 거야. 마을의 아이들 전부 불러올 수 있게.”
젠킨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그것도 제가?”
벨라는 하기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는 젠킨스를 보며 혀를 찼다.
“아니, 너야 하는 일이 많으니까 잔바르 시켜야지.”
“잔바르 님이… 하신다고요?”
악마들은 애초에 힘이 강하기에 굳이 검을 잡지 않는다.
젠킨스에게는 그 말인즉 결국 자기가 하게 될 거라는 말로 들렸다.
“어차피 구색만 맞추는 건데, 뭘. 대충 휘두르라고 시키면 되지.”
“그러면 사기 아닙니까? 제대로 된 검술 교실도 아닌….”
벨라가 미간을 찌푸리자 젠킨스는 입을 다물었다.
사기라니. 전생에 경찰이었는데.
“정 불안하면 걔들 중에 재능 있는 애들은 네가 따로 더 가르쳐 보던가.”
“전 몸이 한 개입니다.”
“그래, 두 개로 잘려 나가기 전에 그만 토 달아.”
“…….”
“그리고 내가 전에 말했지? 너 새끼는 힘들다고 하지 말라고.”
젠킨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키엘의 교육 시간도 줄여줄게.”
“예….”
“야, 그래 봐야 너 하루에 다섯 시간 일하는 거야.”
물론 휴무일은 없지만. 하루 다섯 시간 노동하면서 뭐가 이리 불만이 많은지.
벨라는 속으로 ‘네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어 봐라.’라고 생각했다.
“키엘이 황태자 될 때까지만 좀 참아.”
“…….”
“어떤 마족도 너보고 반쪽이라고 무시하지 않게 해줄 테니까, 견뎌.”
* * *
검술 교실.
벨라는 기왕 하는 김에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이 ‘귀신 나오는 저택’에서 검술 교실을 연다길래 쉬쉬했지만,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점점 사람이 몰려왔다.
차가운 겨울이 올 때 계획하고 모집했는데 어느덧 봄이 되자 검술 교실은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입소문이 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동네 검술 교실치고 상당히 체계적이었다는 것.
이건 건방진 젠킨스가 보증했다.
“생각보다… 짜임새 있네요.”
애초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벨라가 전생에서 체력을 기르기 위해 하던 운동을 단계에 맞게 정리한 것뿐이니까.
조금 다른 거라면, 전부 어린아이를 위해 맞춰진 운동들이었다.
멀리뛰기, 제자리높이뛰기 같은 운동과 더불어 저택에는 나무로 철봉도 만들어놓았다.
“아가씨는 이런 걸 어디서 다 배우신 겁니까?”
젠킨스는 벨라가 보여준 커리큘럼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평소에 공부도 안 하시고, 직접 하시는 걸 본 적도 없는데.”
“내 능력을 무시하니?”
“보여준 적이 있어야 무시를 하던가 하죠.”
“너 요즘 자꾸 기어오른다? 내가 오냐오냐하니까 함부로 못 할 거 같지?”
젠킨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건 사실이었으니까.
마계에서는 그리 천대받았던 인물이, 이곳에서는 그 마계의 공주에게서 제일 신임을 얻고 있으니 조금 우쭐대기도 했다.
“반마족은 잘리면 회복이 되는지, 죽는지 궁금한데 실험해 볼까?”
“제가 죽으면 도련님 교육은 어쩌고….”
“일단 팔만 잘라보고 안 죽으면 목 잘라서 말만 하게 하면 돼지.”
벨라가 미소를 짓자 젠킨스는 그대로 뒤를 돌아 나갔다.
그렇게 주에 세 번, 점심을 먹고 나른해질 시간쯤이 되면 저택에 아이들로 꽉 차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굉장히 활발했다.
“우와! 잔바르 선생님! 저 이거 다 했어요!”
“야! 내가 먼저 다 했거든?”
자기들끼리 싸우는 일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고.
조용했던 저택이 삽시간에 시끄러워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키엘은 그런 모습이 낯설었는지, 구석에서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꽤 오래 지켜보던 벨라가 조용히 키엘에게 다가가서 말이라도 건넬 찰나였다.
“와! 이 누나 되게 예쁘다!”
“누나는 누구예요?”
갑자기 저택에서 나온 벨라에게 관심이 쏠린 아이들이 전부 우르르 달려가 벨라를 에워쌌다.
‘세상에. 이런 관심은 얼마 만이지.’
예전에 순찰하다가 초등학교 앞에서 여자아이들이 자신을 에워싸고 ‘여자 경찰이다!’하면서 신기하게 봤던 게 떠올랐다.
그때는 영웅이 된 거 같았는데, 지금은 동물원의 고양이가 된 기분이었다.
“안녕, 나는 여기 사는 벨라야.”
키엘의 친구들이 될 테니 상냥하게 얘기했는데.
“엇, 저택의 벨라라면 완전 무서운 사람이라 그랬는데?”
도대체 마을에 소문이 어떻게 난 것인지.
벨라는 멋쩍은 듯 웃었다.
“정말? 내가 무서워 보여?”
그러자 아이들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몇 살이에요? 누나예요?”
“엇, 우리 형아도 열세 살인데!”
“나는 열 살! 이 형은 열두 살이야!”
안 물어봤는데도 아이들은 연달아 줄줄이 말하기 시작했다.
키엘은 멀리서 벨라를 보자마자 연습을 멈추고 그녀에게로 뛰어갔다.
어느 날부터인가 마을 아이들까지 불러들여 검술 교실이니 뭐니를 한 후로는 저택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었는데.
“벨라, 웬일로….”
“얘들아, 여기는 키엘이야.”
키엘은 그제야 꼿꼿하게 서 있는 흑조 옆에 피라미처럼 붙어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이 옆에 달린 건 뭐야.’
그때 벨라가 키엘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이제 같이 대련도 할 거니까 서로 친하게 지내.”
아이들이 입이 간지러운지 앞다퉈 말했다.
“얘, 얘는요. 맨날 혼자 연습해요.”
“맞아요! 혼자 연습하고 또 인사했는데 맨날 도망가요!”
키엘은 불편한 마음을 애써 감췄다.
‘벨라에겐 잘하는 거만 보여주고 싶은데.’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그녀가 이제 그를 내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지만.
“키엘은 저택에서만 살아서 너희가 낯설어서 그래.”
아이들은 서로 머뭇거리더니, 그중 제일 키 큰 애가 나와 키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 우리 이거 끝나고 동굴탐험 갈 건데 같이 갈래?”
“싫….”
“와. 재밌겠다. 키엘, 갔다 와.”
키엘은 싫다고 말하려다 벨라의 말에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벨라의 뒤에 숨고 옷자락을 꽉 잡았다.
“벨라도 갈 거예요?”
안 가겠다고 하면, 키엘도 안 갈 것만 같았다. 벨라는 키엘의 손을 꼭 잡았다.
“할 수 없지, 나도 같이 갈까?”
마을 인근에 있는 동굴은 좁고 천장이 낮은 편이었다. 위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소리가 사방을 부딪치고 메아리쳤다.
“얘들아, 여기 위험한 거 아니야? 어른들은 알아? 너희 여기 오는 거?”
한낮인데도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곳에 아이들은 횃불 하나만 들고 탐험이라는 걸 하고 있었다.
“무서우면 가도 돼요. 그래서 여자아이들은 안 와요.”
“위험한 거랑 무서운 거랑은 다르거든?”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벨라가 이를 갈고 꼬마들을 노려보는 게 이 동굴보다 무서웠을 테니까.
키엘은 얌전히 벨라의 옆에 걸으면서 이 시간이 언제 끝날지만 기다렸다.
‘이런 데 올 시간에 책 한 자를 더 보겠다.’
조금 더 걷자, 아이들이 비밀기지라고 만들어놓은 공간이 보였다.
“여기서부터 이제 탐험 시작이야!”
장래 희망이 동굴 탐험가라도 되는 건지.
가장 키가 큰 ‘브웬’이라는 아이가 횃불이 없으면 앞의 사람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한 공간을 가리켰다.
그때 무리 중에서 가장 어린아이가 벨라에게 슬며시 다가와 물었다.
“누나는 안 무서워?”
네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인데, 아무래도 형들이랑 놀고 싶어서 억지로 따라온 것처럼 보였다.
“넌 무서워?”
아이는 형들의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랑 여기 같이 있을래?”
“야! 넌 그럼 거기 있어! 우리는 탐험하고 올게!”
그러나 아이는 형들을 따라가고 싶은지 그들의 뒷모습을 빤히 보고 있었다.
“이유, 귀여워. 그럼 내가 손잡아줄 테니까 같이 갈까?”
벨라가 아이에게 손을 뻗으려던 찰나.
“나…나도 무서워요.”
키엘이 벨라의 손을 낚아채서 자신이 꼭 잡았다.
‘나만 귀여워하는 줄 알았더니.’
이제껏 저택에서 가장 바빴던 이는 젠킨스였지만, 이제는 벨라와 잔바르가 가장 바빴다.
벨라가 개설한 검술 교실은 시간이 지날수록 평판이 올라갔다.
잔바르는 곧잘 툴툴거리곤 했는데, 오히려 그게 아이들은 감히 대들수 없는 선생님처럼 보였다.
뛰어난 검사가 시골에 내려와 가르쳐주는 것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이들의 체격에 따라, 그리고 실력에 따라 각기 다른 연습을 하기도 하고.
모험의 시대나, 전시 상황은 아니지만. 많은 아이들이 검술을 배워 용병이라도 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긴. 이런 시골에서는 보통 농사나 짓는 게 다일 테니까.’
무엇보다 평민들은 어깨너머로 배우는 검술을 배우니,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겠지.
너나 할 거 없이 마을 주민의 문의가 빗발쳤다.
처음에는 주민도 웬 어린 여자아이가 문의를 받길래 의아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여관 주인의 오금을 지리게 했다는 저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입을 다물었고.
“나 그럼 마을 좀 갔다 올게.”
덕분에 벨라는 여느 때나 다름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저택 식구들은 벨라가 없는 시간을 마음껏 즐기며 제멋대로 쉬곤 했었다.
“아가씨가 바쁘니까 너무 좋네용.”
뭘 해도 잔소리로 끝마치기 일쑤였으니.
하지만 좋아하는 그들과 달리.
“벨라는?”
“아가씨 잠시 외출하셨어요.”
키엘은 영 싫었다.
검술 교실의 하나부터 열까지 다.
벨라가 자리를 비우는 것도 싫었지만, 무엇보다 제일 싫었던 건 따로 있었다.
“어머, 쟤 이름 뭐였죵? 보웬? 쟤 또 왔네.”
“브웬이야.”
첫 번째로 싫은 게 이 녀석, 브웬이었다.
키엘은 저택 입구에 서 있는 브웬을 보고 인상을 쓴 채 맞이했다.
“안녕? 벨라 안에 있어?”
“없는데.”
이놈은 검술 교실의 수강생도 아니면서 동생을 데리고 매번 저택으로 찾아왔다.
전에 벨라가 귀엽다고 한 그 아이였다. 나이 차가 많이 나서 걱정된다며.
“아, 그럼 이거 좀 전해줘. 엄마가 갖다 주래.”
브웬이 건넨 건 사과파이였다.
두 번째로 싫은 게 이거였다.
이놈은 검술 교실에 오면, 늘 정원의 벤치에 앉아 벨라와 도란도란 나누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대놓고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벨라는 사과 싫어해.”
“전에 벨라가 구워달라던데?”
세 번째로 싫은 건 벨라는 그 관심을 전혀 거절하지 않는 거고.
그때 이웨르가 멀리서 사과파이를 보자, 이게 웬 떡이냐며 한걸음에 달려나왔다.
“어머, 오늘 간식은 이걸로 해용. 도련님.”
“싫어.”
키엘의 단호한 거절에 브웬은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벨라 동생은 너무 까칠하네.”
네 번째로 싫은 건, 벨라가 이미 키엘을 자신의 동생이라고 동네방네 다 얘기했다는 거였다.
가족이 아니라면 키엘을 도련님, 벨라를 아가씨라고 부르는 게 이상하기도 했으니까.
이해는 하지만 싫은 건 싫은 거였다.
* * *
최근 들어 저택 식구들은 키엘이 어딘가 변했다는 걸 느꼈다.
평소라면 더 하겠다고 고집 피우던 체력 훈련을, 다 하기도 전에 지친 기색을 보였다.
“어이, 꼬마.”
“그냥 쉴래.”
잔바르는 자신의 휴식 시간이 늘어나서 좋긴 했지만, 영 찝찝한 마음을 떨칠 수는 없었다.
체력 훈련만 그런 게 아니었다.
“저… 도련님, 끝이에용?”
“응. 입맛이 없어.”
식사를 거의 반 이상을 남기질 않나.
“도련님! 비켜주세요!”
“아… 응.”
갑자기 달라진 키엘의 모습을 보지 못한 건 벨라뿐.
처음에는 학부모 면담이랍시고 마을에 자주 나가더니.
요즘에는 꽤 유명한 용병단과 친목을 도모하면서 저택에 늦게 들어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키엘의 변화가 그리 커 보이진 않을지 몰라도, 저택 식구들에겐 아니었다.
벨라는 신경 쓰지 않는 듯하면서도, 키엘에게 극성맞은 편이었다.
그들은 서로 마주칠 때마다 키엘에 대해 뒷얘기를 하곤 했다.
“도련님 의욕이 너무 없어졌어요!”
“처음 여기 올 때보다 더 약해빠졌더군.”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이러다가 아프기라도 하면 공주님이 뭐라고 할지 걱정부터 되네용.”
그들은 잠시 침묵했다.
일전에 키엘이 밤마다 귀신에게 시달렸을 때, 곧 폭주라도 할 것 같았던 때를 떠올리며 젠킨스가 말했다.
“아가씨한테 이 얘기를 해야 할 거 같은데….”
서로 눈치를 보며 일을 미루는 중이었다.
“서열 제일 막내인 젠킨스가 가죵.”
“제가 왜 제일 막내죠? 따지고 보면 여기서 아가씨께서 제일 아끼는 사용인은 저예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 없던 그들은 잔바르를 쳐다봤다.
“전 집 청소 다 한다고요!”
“제가 밥 안 하면 아가씨께서 서운해 하실걸용?”
“…내가 대장군인데.”
결국 그들은 공평하게 가위바위보로 정하기로 했다.
“안 돼!”
사실 공평하지 않았다. 혼자 곰인 푸르는 결국 ‘빠’를 내고 졌다.
“안 돼요! 전 조리 있게 말 못 하는 미련 곰탱이라고요!”
“그럼 수고.”
잔바르와 젠킨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리를 떠났고, 좌절하는 푸르의 옆에 이웨르가 장난치듯이 웃었다.
“푸르는 할 수 있엉.”
“아가씨가 날 잘라버릴 거야.”
“말하고 오면 내가 맛있는 토끼 잡아올겡.”
“토… 토끼?”
푸르가 이웨르의 팔을 잡고 매섭게 말했다.
“진짜지?”
“응.”
“그럼 서약해줘.”
“뭘 그런 거로 서약까지야…”
“빨리! 안 그래도 무섭단 말이야.”
그때였다.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키엘이 둘 사이에 서서 물었다.
“서약이 뭐야?”
* * *
벨라는 모든 게 순조롭고 뜻대로 되는 것 같아, 어느 때보다도 행복했다.
벨라가 인간계로 오고 난 이후로, 비어버린 마탑 때문에 마법사들의 방문이 점점 잦아졌었는데.
용병단이 관심을 보이면서, 꽤 큰 대상단과도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잘하면 이웨르의 묘약도 대량으로 팔 수 있겠어.’
어느덧 밤이 되었지만, 벨라는 기분 좋게 저택으로 들어왔다.
‘역시 하루의 마무리는 우리 최애지.’
벨라가 키엘의 방문을 살짝 열자, 키엘은 창가에 앉아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키엘, 뭐 해?”
“별 보고 있었어요.”
벨라가 키엘의 옆으로 가서 같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창문 때문에 전체가 다 보이진 않았지만, 하늘에는 수없이 많은 별이 콕콕 박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밤하늘을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인 거 같네.’
전생에선 올려다봐도 별이 보이지 않았으니.
“예쁘다, 그치.”
“…네.”
벨라는 고개를 돌려 키엘을 마주 보았다. 언제부터 자기를 보고 있었던 건지, 그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돌렸다.
“별 보는 거 재밌어?”
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은 매일 자리를 바꾸거든요. 그래서 달력이 없어도 오늘이 며칠인지 알 수 있어요.”
키엘은 조용히 고개를 들고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길 위에서 생활할 때, 땅 밑에서 가질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없었지만, 고개를 들면 넓은 하늘은 다 가진 기분이었었다.
하지만 늘 제 것이라는 착각만 줄 뿐. 하늘은 모두의 것이었다.
마치 지금처럼.
그때였다.
“엇, 별똥별이다.”
벨라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빛을 보자마자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대.”
키엘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별똥별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소원….”
조금 실망한 듯한 키엘의 얼굴을 보고, 벨라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소원은 내가 들어줄게.”
밤인데도 키엘은 낮의 태양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벨라를 마주했다.
“어떤 소원이든 들어줄 수 있어요?”
“응. 동물왕국의 공주님은 뭐든 다 할 수 있어.”
“그럼, 소원 얘기하기 전에….”
키엘은 벨라의 손을 잡고 천천히 자신의 이마에 갖다 댔다.
“서약해주세요.”
“서약?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푸르랑 이웨르가 하는 거 봤어요. 꼭 지켜야 한다는 약속을 할 때는 동물 왕국에서 서약한댔어요.”
일종의 계약서였다. 마족들은 일부러 거짓말하진 않지만, 굳이 약속을 지키지도 않는 편이었다.
물론 푸르와 이웨르가 했다는 서약은 별 쓸데없는 일일 거라고 확신했다.
‘끽해봐야 청소해줄 테니까 떡볶이 해달라는 거겠지.’
지키지 않아도 별 타격이 없는 하급 서약들도 많았으니까.
“서약은 곤란한데. 어려운 소원이 아닌 이상.”
하지만 벨라와의 서약은 마왕과의 계약이나 다름없기에, 쉽게 할 수 없었다.
“어려운 소원요?”
이루어서는 안 될 것도 강제적으로 하게 하는 거였으니까.
“예를 들면,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거라던가. 다른 사람의 사랑을 얻는 거라던가…. 그리고 그런 건 생명을 대가로 받아야 하고.”
벨라는 잠시 멈추고 키엘을 바라봤다. 살짝 실망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언제든 이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하나라도 더 있다면 해주고 싶었다.
“그러면 이렇게 하자. 네가 황제가 되면 어떤 소원이든 다 들어줄게.”
“…좋아요.”
지금 키엘의 소원이 뭐든, 황궁에 들어가서 소설이 시작되면 마력이 제일 갖고 싶어질 테니까.
‘뭐, 그때는 난 이미 이 세상에 없겠지만.’
기왕이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주고 싶었다. 키엘의 남은 모든 인생이 행복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내 마지막 유산으로 생각하면 되겠지.’
그리고 벨라는 앉아있는 키엘을 일으켜 세우고 방 한가운데로 함께 걸었다.
“이거 공주님과 서약하는 거니까, 네가 본 서약이랑 달라도 당황해 하지 마.”
마주 본 상태에서 벨라는 키엘의 이마에 천천히 손을 올렸다.
키엘의 두 눈에는 달빛이 서려 있었다.
“조금 따끔할 거야.”
그리고 벨라는 두 손으로 키엘의 이마에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갖다 대 조심스럽게 손톱자국을 냈다.
“맹세의 시작은 키엘 헤리언 엘리시아의 피로.”
그 말과 동시에 바람이 둘을 에워싸며 불기 시작했다.
키엘의 이마에서 서서히 피가 흘러내렸고, 벨라는 가볍게 손으로 그 이마를 닦아주었다.
“서약한다.”
머리카락이 차차 흩날리며, 벨라의 루비처럼 붉고 빛나는 눈동자 속에서 마법진이 그려졌다.
“나 벨라트리체는 키엘 헤리언 엘리시아가 황제가 되는 때, 그의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기로.”
어두운 밤하늘에 붉은 달을 보듯, 소름 끼치는 아름다움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키엘은 홀리기라도 한 듯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 소원이 어떤 것이든, 내가 없더라도 승계된다.”
키엘의 눈동자 속에는 점점 다가오는 벨라의 모습이 비쳤다.
포개질 줄 알았던 입술은 바로 그 앞에서 애타게도 멈추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벨라의 숨결이 시리도록 차갑게 키엘에게 전해지며.
벨라의 눈 속에 있던 마법진이 키엘의 눈으로 어느새 반짝하고 생겼다가 사라졌다.
사무치게 그리울 거리였다.
키엘과 벨라가 서약을 한 이후로, 저택 식구들은 걱정을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키엘은 예전처럼 밝은 얼굴로 잘 지냈다.
“휴… 다행이다. 아가씨한테 말 안 해도 되겠어!”
“에이, 토끼 잡아왔는뎅.”
벨라가 개설한 검술 교실은 여러 방면에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키엘은 처음엔 낯을 가리더니, 제법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다.
특히 벨라가 관심을 두는 애들만 골라서 친구를 하는 건지.
‘역시, 키엘도 보는 눈이 있어.’
그 친구들이 ‘브웬을 좋아하느냐’, ‘어떤 남자랑 결혼하고 싶으냐’ 같은 질문을 할 때는 싫었지만.
대부분의 아이가 열의가 있거나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는 아이들이라 더 마음이 가곤 했었다.
키엘도 그걸 아는 건지, 그가 벨라에게 받았던 사랑을 베푸는 것 같아 뿌듯한 미소를 가득 짓곤 했다.
‘네가 다스릴 제국은 행복하겠다.’
벨라는 키엘이 따뜻한 사람으로 성장해줘서 고마웠다.
또 이 교실은 저택의 재정을 한층 더 부유하게 해주는 행운의 다리 역할을 하기도 했다.
검술 교실이 마을 내에서 유명해지고, 인근의 도시에도 소문이 나자 관심을 보이던 용병단이 있었는데.
벨라는 그 용병단을 통해서 어렵게 도시의 대상단의 주주와 만남을 시도했다.
그녀가 저택의 응접실에 손님을 모시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야, 참 좋은 일 하시네요.”
“좋은 일….”
처음에 상단주가 불량배 같은 대사를 치르길래 건달인 줄 알았다.
“아이들의 부모들이 저희 상단에서 무기로 쓸 만한 것들을 많이 사갔답니다.”
“오호, 그래요?”
“덕분에 이 마을은 미래에 치안 걱정은 안 해도 되겠습니다.”
벨라가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단주는 눈앞의 작은 소녀의 강단에 조금 놀랐는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물었다.
“귀족 가문은 아닌 거 같은데, 어떻게 이런 저택에서 사시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귀신사는 집이라고 싸게 나왔길래 샀어요.”
상단주는 예상치도 못한 대답에 차를 마시다가 멈췄다.
“귀신은 퇴치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하… 하하. 그런 게 무서울 리가요.”
상단주는 꽤 장사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눈에도 이 저택에 필요한 가구들이 많아 보였는지 응접실을 둘러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음…. 아가씨께서는 많이 검소하시네요.”
잘하면 멋 모르는 벼락부자에게 많은 물건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벨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전 검소한 게 싫답니다. 이런 시골에서는 살 수 있는 게 너무 없더라고요.”
“아하, 아무래도 그렇죠.”
“팔 기회도 없고.”
벨라는 이웨르가 만든 묘약을 꺼내 상단주에게 보여줬다.
“인생사, 사랑이 없으면 너무 척박하고 슬프지 않겠어요?”
“…이게 뭡니까?”
“제가 마법약을 좀 잘 만드는데, 혹 사랑의 묘약을 비싸게 팔아보실래요?”
“사… 사랑의 묘약이요?”
벨라는 당황하는 상단주와 다르게 침착하게 미소로 답했다.
* * *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푸르는 어느새 가사의 달인이 되었다.
“아가씨, 옷이 또 찢어졌어요.”
하지만 그놈의 활동성이 어찌나 대단한지, 일주일에 한 번꼴로 옷을 찢어먹는 것만 빼면.
그럴 때마다 벨라는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지만 차분하게 새 옷을 사줬다.
‘그래. 곰인데 사람 찢는 거보단 낫지.’
게다가 곰이지만 곰 인형에 가까운 모습이라, 키엘이 푸르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 같았다.
때때로 키엘이 푸르의 푹신한 털 위에서 자는 걸 보면 부러울 정도였으니까.
이웨르는 젠킨스 다음으로 벨라의 마음에 들었다.
몽마라 걱정했는데, 딱 그 아슬아슬한 선을 더 넘어가지 않았다.
게다가 이웨르의 요리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이걸로 사람을 홀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국의 음식들을 내오기도 했다.
“이웨르, 넌 이런 음식은 어디서 배운 거야?”
“그야 각국의 모든 남자와 음주 가무를…”
“응. 알겠어.”
그 와중에는 벨라가 전생에서 먹었던 것과 비슷한 맛들도 있었다. 커리나 불고기 같은 종류들.
그리고 이웨르는 때때로 매콤한 음식을 먹고 싶었던 벨라가 설명을 하면, 비슷하게 만들곤 했다.
“짠! 오늘은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대로 부대찌개라는 걸 한번 만들어봤어용!”
“와…. 진짜 똑같아.”
입에 뭔가 들어갈 때마다 이웨르는 젠킨스를 제치고 벨라의 넘버원이 되어갔다.
“요리는 또 하나의 유혹이죠. 사랑받는 몽마라면 요리는 기본이에요.”
이런 구시대적인 발언만 빼면.
“하지만 역시, 제일 맛있는 건 저…”
“입 다물어.”
가끔 너무 앞서나간 발언도 좀 빼고.
젠킨스는 늘 그렇듯 벨라의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었다.
“역시 핏줄은 못 속이나 봅니다.”
“왜?”
“도련님이 정말 영민하세요. 예전에는 책 한 권을 떼는 데 한 달이 걸렸다면, 지금은 보름, 아니 일주일 만에 다 떼세요.”
“그래?”
그리고 그 젠킨스의 교육에 잘 따라가는 키엘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일과를 보고받고 있지만, 그럴 때마다 칭찬 일색이었다.
벨라의 4순위 잔바르도 꽤 열심히 해서 3.5순위로 바뀌었다. 의외로 마을 아이들과 궁합이 잘 맞았다.
‘솔직히 먹방 보듯이 대리만족하는 거 같지만.’
본인의 일과가 끝나고 지붕 위에서 휴식을 취할 때면, 벨라도 가끔 잔바르의 고충을 들어주곤 했다.
“정말 먹고 싶습니다. 저 맛있는 녀석들.”
“그래, 마계로 돌아갈 때 실컷 먹어.”
“다른 놈들은 어떻게 참는지 모르겠네요.”
“흠….”
“역시 핏줄은 못 속이나 봅니다.”
벨라는 갑자기 진지하게 말하는 잔바르가 낯설기도 했다.
“연어나 먹는 곰이나, 정기 빨아먹는 몽마나, 애초에 반쪽짜리랑은 다르죠.”
“그런가? 그러고 보니 젠킨스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렇게 말하던데. 핏줄은 못 속이나 봅니다. 라고.”
“…….”
“둘이 못 잡아먹어 안달이더니, 이런 면에선 좀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그러자 잔바르는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강렬하게 부정했다.
“비… 비슷하다니, 저런 반마족이랑!”
잔바르는 젠킨스 얘기가 나올 때 가끔 유난을 떠는데, 그때마다 벨라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벨라가 말실수라도 한 것 마냥.
“아니, 그냥 한 말인데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
“왜 그렇겠어용?”
그때 이웨르가 지붕 위로 낑낑거리며 올라오더니 벨라의 옆으로 누웠다.
“왜 그런데?”
“공주님은 이런 쪽으로 눈치가 영 없네용.”
“이런 쪽?”
“잔바르 님이랑 젠킨스랑은 옛날에… 켁.”
이웨르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잔바르는 표범으로 변해 이웨르의 목을 발로 눌렀다.
“옛날에 뭐? 잔바르, 발 좀 치워봐.”
벨라가 잔바르의 발을 들려고 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놔주세용…. 어차피 저 말 못 하잖아용.”
“네, 녀석은 돌려서라도 말할 녀석이다.”
지붕 위에서 세 명이 한데 엉켜 승강이를 벌이는 게 꽤 소란스러웠는지 밑에서 검술 연습을 하던 젠킨스와 키엘이 올려다봤다.
“저러다 떨어지면 어떡해?”
“도련님보다 강하니까 그런 건 걱정하지 마시죠.”
키엘이 다시 집중해서 젠킨스와 몇 번의 합을 맞추는 중에 ‘쿵’하고 큰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옆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지붕에서 떨어진 채로 꽤 재밌게 놀고 있었다.
“이웨르 널 죽여버려야겠다.”
“꺅! 살려줘요, 아가씨!”
“왜, 뭔데? 죽더라도 말하고 죽어!”
잔바르가 이웨르를 잡으면 벨라가 잔바르를 잡고, 그 틈에 이웨르가 또 도망 다니면 잔바르가 잡으러 가고.
정원은 삽시간에 세 사람이 날고 뛰어다니는 통에 엉망진창이 되었다.
“하여튼 괴물들….”
“동물 왕국은 다 저렇게 강해?”
젠킨스는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 동물 왕국이라는 게 정말 존재하긴 하는 건가. 너무 사칭해서 미안할 지경이었다.
“뭐, 그렇죠.”
“나는 동물이 아닌데, 나도 저만큼 강해질 수 있어?”
“저만큼은 아니지만, 저들을 이길 수는 있죠. 전략이 필요하겠지만.”
젠킨스는 다시 검을 제대로 들고 키엘의 검을 툭툭 쳤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거든요.”
키엘은 젠킨스를 마주했다.
“다시 한번 더 갈까요?”
“응.”
이럴 때면 젠킨스는 키엘의 호박색의 눈에서 어린 군주의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 * *
그리고 봄에 시작한 그녀의 사업은, 겨울이 될 때쯤에는 대박을 터트렸다.
“값을 좀 더 받아도 되겠어요.”
처음에는 200실버 정도 벌었던 것이, 10배나 뛰어 한 병에 2골드씩 팔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불티나게.
“도대체 이렇게 가격을 매겨도 사는 사람이 있단 거야?”
“많죠. 저희 같은 평민이야 상관없지만, 돈 쓰길 아끼지 않는 귀족들은 없어서 못 산답니다.”
덕분에 저택의 소소했던 가구들이 하나씩 바뀌기 시작했다.
벨라는 프실리아 저택을 갔을 때를 떠올리며 이따금 묘한 미소를 보이기도 했다.
“푸르, 난 말이야.”
“네?”
“인생을 살다 보면 갑자기 잘 풀릴 때가 있거든? 그리 큰일이 아닌데 좋은 일의 연속일 때가 있어. 난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해.”
“아가씨가 몇 년이나 사셨다고….”
그리고 벨라는 가끔 마계로 소환진을 꺼내, 정말 마음에 드는 물건을 마계로 보내곤 했다.
당장 쓸 순 없더라도 언젠가 마계에 돌아가게 되면 지금 같은 생활을 유지하고 싶었다.
“조만간 도시 나가서 민트색 의자를 찾아봐야겠어.”
전생에서는 생각보다 짠순이였는데, 이곳에서는 꽤 쇼핑광이 되어가고 있었다.
눈 깜빡할 새의 시간이지만, 돈맛을 알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 * *
키엘에게 검을 쥐여준 지 벌써 2년째.
그는 검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체구로도 검을 능수능란하게 다뤘다.
벨라는 정원에서 젠킨스와 대련을 하는 키엘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검술에 능하다는 설정이 이렇게 미친 설정일 줄이야.’
늘 젠킨스가 ‘도련님이 그렇게 여린 편이 아닌데요.’라고 말할 때도 한 귀로 듣고 흘렸었다.
아직 또래와 비교해 작아 보이는 체구 때문에 마냥 어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키엘은 넘어져도 금세 일어나 다시 젠킨스에게 도전했다.
‘역시 끈기가 있어.’
그래서인지 결국 검술 선생은 안 구해준다며 투덜거리면서도 젠킨스는 키엘과 대련하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이제 슬슬 나설 때가 됐나.’
벨라는 조용히 지켜보다가 젠킨스에게 말했다.
“젠킨스. 그렇게 칼 장난하듯이 하니까 실력이 안 늘지.”
벨라는 챙 소리를 내며 한창 대련 중인 그들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네? 칼… 장난요?”
젠킨스는 난데없는 벨라의 난입에 불편을 표했다.
“아가씨. 강한 건 알지만, 검술은 하나의….”
“덤벼.”
벨라는 잔소리를 시작하려는 젠킨스의 말을 끊고, 키엘의 검을 집어 들었다.
“아가씨가 검을 쓰실 줄은 몰랐네요.”
벨라가 코웃음을 젠킨스에게 다가갔다.
‘나를 뭐로 보고…. 이래 봬도 유단자야.’
태권도와 검도만 10년을 했다.
어릴 때부터 경찰이 되고 싶어서 여자아이들이 발레며 피아노 배울 때, 벨라를 놀리던 남자아이들 머리 치는 재미가 쏠쏠했었다.
“시작해.”
젠킨스가 바로 위에서 벨라를 내려치려고 했다.
체격 차이가 있으니 바로 한 번에 머리를 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벨라는 가볍게 오른발을 오른쪽으로 옮겨서 빠진 후 젠킨스의 왼쪽 머리에 검을 갖다 댔다.
“너무 뻔한 공격이잖아.”
벨라가 검을 떼며 말하기가 무섭게 젠킨스는 다음 공격을 가했다.
부딪히는 소리만으로도 굉장한 힘이 느껴질 정도였다.
벨라는 자신의 머리 위쪽에 검이 오는 걸 확인하고 가로로 막아 젠킨스의 검날을 타고 내려갔다.
그녀의 검이 젠킨스의 심장에 닿았다.
“아가씨는 도대체….”
벨라는 검을 다시 키엘에게 돌려주고, 젠킨스의 검을 뺏었다.
“뭐 하시려고요?”
“키엘, 나랑 대련할래?”
“갑자기요?”
갑자기는 아니었다. 애초에 키엘이 어느 정도 크면 하려고 했던 일이었으니.
‘오히려 늦은 걸지도 모르겠네.’
키엘은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벨라가 주었던 검을 꽉 잡았다.
“네.”
“안 봐줄 거야.”
“저도요.”
키엘의 열두 살 생일 이후로, 이제 그는 앉아서 젠킨스가 알려주는 걸 배우는 시간보다 벨라와 대련하는 시간이 훨씬 늘었다.
“저러다 지칠 텐데용.”
이웨르의 걱정과는 다르게, 키엘은 오히려 그 시간이 더 좋았다.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벨라와 보내고 싶었으니까.
“키엘, 좀 더 달려들어. 이래서는 못 이겨.”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벨라도 키엘이 무서울 정도로 성장하는 건 알고 있었다.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이 불쑥 들었다.
‘언젠가 네가 날 죽여야 하는 날이 오겠지.’
너무 큰 짐을 넘겨주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네 인생은 해피엔딩일 거야. 네가 바로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이니까.’
부딪히는 검에 그들의 추억이 새겨지는 것 같았다.
* * *
꽃이 지고 온 사방이 푸른 잎으로 찬란하게 바뀌었다.
1158년 여름.
벌써 인간계에 온 지 4년이 되던 해였다.
키엘의 나이 열두 살, 벨라의 나이 열네 살이었다.
이 여름이 끝나면 키엘의 생일이 다가오고, 15세 생일까지는 2년이 남은 때였다.
벨라는 아침마다 저택 입구에 서서 배달되는 신문을 제일 먼저 펼쳐보는 걸로 일과를 시작했다.
“이봐요, 왜 자꾸 일주일 전 신문을 주는 거예요?”
“네?”
“일주일 전 신문은 일주일 전에 줘야 할 거 아냐!”
“하… 이런 시골에 신문이 오는 거만으로도 감사하세요.”
벨라는 불편한 마음을 가득 안고 신문을 짝 펼쳐서 원하는 정보를 빠르게 탐색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열어본 벨라는 바로 신문을 내던지고 저택으로 쫓아 들어갔다.
“얘들아, 드디어!”
드디어 기다리던 여름 축제였다.
작년에도 가려고 했지만 갈 수가 없었다. 날짜를 몰라서.
검술 교실에 오는 마을 어린이들이 갔다 온 이야기를 실컷 떠들어대는 통에 축제가 이미 끝났다는 걸 알았다.
그 이후로 조사를 해보니 여름 축제는 도시마다 열리지만, 인근에서 제일 큰 게 ‘데이저’의 여름 축제였다.
기왕 가기로 한 거, 제일 화려한 곳으로 가야지.
“여름 축제 가자!”
“꺄! 드디어 가네용!”
“바로 내일부터 시작이니까, 지금 출발하면 오늘 밤에 도착할 거야.”
일주일 전의 신문이라 그런지 소식통이 영 느렸다.
그래서 정확히 언제 올지도 모르는 축제를 위해 여름 초입부터 빌려 놓은 마차를 꺼냈다.
“아가씨께서 달려가면 2~3시간 안에 도착할 텐데.”
벨라는 손가락을 탁 튕기며, 방금 그 말을 했던 잔바르를 가리켰다.
“잔바르, 네가 가서 미리 여관방 좀 잡아놔. 나는 느긋하게 마차 타고 갈 테니까.”
“…….”
“내가 지금 얼마나 이 축제를 벼르고 별렀는데, 시작 전부터 힘을 빼서야 되겠어?”
이 더운 여름에, 저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세 시간을 달려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 그냥 마차 타고 갑시다.”
“아니. 너 먼저 뛰어가. 지금 당장.”
그리고 그 끔찍한 생각을 ‘아이디어’라고 내놓은 잔바르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잔바르는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표범으로 변했다.
“자, 얘들아. 얼른 짐 가지고 나와.”
벨라는 서둘러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미리 싸둔 짐가방만 들고 다시 현관으로 내려오는데, 어찌나 빠른지.
이 짐도 마차를 준비할 때부터 미리 싸둔 짐들이었다.
“아가씨 진짜 신났네용.”
“겨울부터 기다리시던데요.”
그리고 혹여나 뒤처질까 봐 이웨르와 젠킨스도 미리 짐을 싸두었다.
“잔바르 님 짐은 제가 챙겼습니다.”
“저도 다 챙겼어요.”
키엘까지 현관으로 도착하자 벨라는 신나게 현관문을 열었다.
“자! 가자!”
“잠시만요! 저도 다 챙겼어요!”
그때 뒤에서 푸르가 솜털 같은 손으로 짐가방을 들고 내려왔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조금 침체되었다.
“푸르.”
“네!”
“곰은 축제에 못 가.”
“왜… 왜요! 왜 맨날 저만 못 가요!”
“그럼 네가 인간형으로 변할 수 있던가.”
그러자 푸르의 새까만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그… 그럼 아가씨 피 좀 먹으면 언젠가 저도 변할 수 있지 않을까요?”
“미쳤니?”
“왜… 왜 맨날 나만….”
벨라는 푸르의 투정을 듣지도 않고 밖으로 향했다.
“반쪽짜리도 가는데 왜 나만….”
“그러게 왜 무식하게 곰으로 태어나셨어요?”
듣고 있던 반쪽짜리 젠킨스의 일침을 끝으로 저택의 문이 냉정하게 닫혔다.
* * *
아침에 출발했는데, 데이저에 도착하니 밤이었다. 종일 마차 안에 있었더니 다들 녹초가 되었는데.
“내가 제일 좋은 방 잡으라고 했잖아.”
“큰 게 좋은 거 아닙니까.”
잔바르는 여관에서 큰 방 하나만 잡아놓았다.
“어휴. 네놈들이랑 같이 방을 써야 한다니.”
큰 방이라면서도, 침대는 네 개밖에 없었다.
“키엘이랑 나랑 같이 자야겠네.”
“어머, 저랑 같이 자도 되는뎅.”
이웨르는 음흉한 눈빛으로 벨라를 쳐다봤다.
‘쟤 왜 저래….’
모두 잘 준비를 마치고 나자, 밖에는 늦은 시간까지 여름 축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기대된다. 재밌겠지?”
“축제가 다 거기서 거기죠. 특히 이런 변두리에서는….”
벨라는 흥을 깨는 젠킨스의 말을 무시하고 키엘에게 물었다.
“키엘은 여름 축제 가본 적 있어?”
“간 적은 없는데 노래는 많이 들었어요.”
“노래?”
그러자 키엘은 잠시 눈을 여기저기 굴리더니 조용히 생각나는 노래들을 한 소절씩 불렀다.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어린 키엘의 목소리는 마치 천사의 목소리같이 들렸다.
듣는 것만으로도 지친 하루를 달래주는 듯.
벨라는 팔베개를 하고 키엘의 옆에 조용히 누워 눈을 감았다.
그때 이웨르가 노래에 가사를 붙였다.
“여름의 끝자락에 붉은 실을 걸어요.”
그러자 젠킨스도 옆에서 따라 불렀다.
“봄이 되면 꽃으로 피어날게요.”
“그게 무슨 노래야?”
“전시 상황일 때 유행했던 노래예요.”
키엘은 벨라를 보고 있다가 고개만 돌려 이웨르에게 물었다.
“붉은 실이 뭐야?”
“도련님도 몰라요? 사랑하는 사람끼리 붉은 실을 묶고 축제 마지막 날에 밤을 같이 보내면, 전쟁 중에 죽어도 그 사람의 정원의 꽃으로 피어난다. 뭐 그런 거예용.”
소설에도 없던 내용이었던 지라, 벨라는 흥미롭게 이웨르에게 물었다.
“전쟁이 언제 일어난 건데?”
“음. 엄청나게 큰 전쟁이었는데. 그게 아마 한…. 200년 전쯤일 걸용? 우리 반쪽 오빠가 쫓겨났을 때쯤이겠네용.”
“어디랑 어디가 싸운 건데?”
“우리 반쪽 오빠가 잘 알겠죵. 그때 누구 덕에 마족들은 인간계로 아예 못 갔으니깡?”
젠킨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왜 제 탓… 에휴.”
“난 반쪽 탓이라고 한 적 없는뎅. 누구라고 했는뎅.”
벨라는 둘의 대화를 듣다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어디랑 어디가 싸운 거냐고.”
“용인 전쟁이에요. 인간 편에 섰던 용이 빙룡이라, 가을쯤 출발해서 빙룡이 가장 강해지는 겨울에 다른 용들과 전쟁을 치렀어요.”
젠킨스는 이웨르와의 대화를 끊으려고 잽싸게 설명했다.
“그래서 도시마다 다 여름 축제가 있는 거고요. 여름 축제를 끝으로 가을이 시작되니까.”
전쟁으로 끌려가기 전에 축제라니.
“작별하기 전, 슬픔에 빠져 있기보다는 그 시간도 소중히 여기자. 뭐 그런 의미였어요.”
벨라는 씁쓸하게 키엘과 눈을 마주쳤다.
‘하긴. 우리도 언젠가 헤어지는 날이 올 테니까.’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 한편에는 이 시간이 계속 영원할 거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살아 돌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아하! 그래서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이웨르는 아무 생각 없이 말하다가 자신의 수위를 생각하고 스스로 말을 고쳤다.
“마지막 밤이니까 붉은 실을 묶고 잠들었구나, 그런 거죠.”
벨라는 이웨르를 살짝 노려봤다가 다시 누웠다.
“내일은….”
그때 키엘이 벨라의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붉어진 얼굴로 물었다.
“벨라, 내일 그럼 나랑 실 묶고 같이 잘래요?”
“어?”
순간 벨라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웨르는 재밌는지 쿡쿡거리더니 이불을 발로 여러 번 차며 깔깔거렸다.
“하하하! 그런 밤이 아닌데!”
그 말에 키엘은 자신이 얼마나 순진했는지 깨달았다.
‘…젠장.’
다행히 불빛 때문에, 그가 얼마나 새빨간 홍당무가 되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우리 도련님 너무 순진한 거 아니에용? 내가 한 수 가르쳐줘야겠는데?”
이웨르는 웃느라 꺽꺽 넘어가며 손사래를 쳤다.
“이웨르. 혀 자르기 전에 입 다물어.”
벨라가 민망해서 엄포를 놓으려고 일어섰다가 잔바르와 눈이 마주쳤다.
잔바르는 아주 똥 씹은 표정으로 벨라를 보고 있었다.
“뭐, 임마. 자!”
벨라는 다시 누워 이불을 끝까지 올리고 눈을 감았다.
“도련님, 그 밤을 다 보낼 때까지 붉은 실이 끊어지면 안 되는 거랍니당. 어떤 몸부림일지….”
벨라는 다시 이불을 젖히고 이를 갈며 엄포했다.
“지금부터 누구든 한마디만 더하면 진짜 죽여버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