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가 죽여야 할 최종 악녀가 저랍니다-3화 (3/25)

3

키엘은 서둘러서 변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벨라의 말 한마디가 변명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안 돼. 인간이랑 동물이랑은 결혼 못 해.”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반마족인 젠킨스는 싸늘하게 바닥을 보고 있었고.

키엘은 조금 어리둥절하게 벨라를 보고 있었다.

‘인간 공주랑 개구리 왕자랑도 결혼한다며. 동물왕국에선 흔한 일 아니었어?’

* * *

키엘의 생일이 지나고, 저택 안에는 쓸쓸한 가을 냄새와 차가운 겨울 냄새가 공존하는 듯했다.

키엘은 벨라의 말을 떠올리며 한참을 생각했다.

그녀가 읽어주는 동화에는, 왕자와 공주는 어쨌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했는데.

정말 인간이랑 동물왕국 사람과는 이어질 수 없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그가 3년간 황궁에 갇혀서 황태자 교육을 받는 동안, 동물왕국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없었다.

‘분명 폐쇄적인 곳일 거야.’

구성원이 다 동물인데, 교류가 있다면 제국에서 모를 리가 없지.

‘에이, 무슨 상관이야. 내가 동물이 될 것도 아니고.’

그는 어차피 황태자가 될 사람. 황궁에 돌아가면 이곳의 인연은 결국 과거의 시간 속에 영원히 살 거였다.

‘…그래, 무슨 상관이야.’

하지만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소파에 누워있었다.

키엘이 조금 울적했다면, 젠킨스는 우울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젠킨스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벨라의 서재에서 일과를 보고 하고 있었다.

그러다 창 너머로 떨어지는 낙엽을 줍고 있는 잔바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 있어?”

벨라는 며칠 전부터 힘이 없는 젠킨스가 걱정됐다. 저택에서 쓸 만한 놈이라곤 쟤가 유일한데.

젠킨스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을 뗐다.

“저번에 도련님 생일 때 말씀하신 거요.”

“아, 생일 축하 노래?”

“아뇨. 결혼 얘기요.”

벨라는 잠깐 허공에 시선을 두고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왜?”

“인간과 마족…. 하아.”

젠킨스가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내쉬자, 벨라는 그제야 그가 반마족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마족들은 인간을 싫어하지만, 벨라는 애초에 빙의된 몸이니 싫어할 리가 없었다.

“저기, 나는 편견 없어. 그때는 푸르가 너무 지나쳐서 그런 거지. 오히려 난 인간이 더 좋은걸.”

아무리 어린애들끼리 하는 놀이라도 차후 황태자가 될 키엘이 곰이랑 결혼 놀이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것도 벨라의 최앤데.

“젠킨스, 진짜야.”

하지만 젠킨스의 기분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흠. 어쩔 수 없나.’

벨라는 곰곰이 생각했다.

“너에게 최대 비밀을 알려줄게.”

“…….”

“키엘은 사실 황태자야.”

그때 젠킨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벨라를 쳐다봤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린지.

“아… 네.”

“정말이야. 결혼 놀이하다가 혹시나 잘못해서 마족이랑 계약이라도 할까 봐 일부러 막은 거라고.”

“…….”

“생각해 봐. 상대는 푸르잖아?”

젠킨스는 벨라의 말이 들을수록 점점 그럴싸하게 들렸다.

후에 알았지만, 푸르는 결혼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명망 높은 대장군 가문이었던 푸르의 일족은 200년 전 전부 몰살당했고, 그녀는 어린 벨라가 발견하기 전까지 마계의 야생에서 살았었다.

그래서 300살인 젠킨스와 얼마 차이 나지 않지만, 그토록 어리게 행동하는 거라고.

이것도 이웨르가 알려준 이야기라, 믿을 만하진 못했지만.

굳이 그런 배경 없이도 푸르가 사고만 치고 다니는 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

“아가씨가 도련님을 아껴서 그런 거란 건 알겠습니다.”

그러나 젠킨스는 키엘이 황태자라는 말은 믿기 힘들었다.

“황태자라니, 그건 아닐 겁니다. 황족이라면 모두 마력을 다루지 않나요? 도련님은 마력에 전혀 소질이 없던데요.”

벨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봐도 또래보다 영민하다며? 황족 아니면 그런 머리를 갖겠어?”

“…그냥 똑똑한 걸 수도 있죠.”

“못 믿겠으면 말던가. 나가 봐.”

그리고 서재에서 나가는 의심 많은 젠킨스의 등 뒤에 대고 조용히 혼잣말하듯 말했다.

“난 반마족이라고 배척 안 해. 제일 신뢰하니까 말해준 거야.”

그는 나가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벨라는 펴놓은 책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한참을 보고 있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뭘 봐? 나가.”

젠킨스는 서재를 나가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까칠하긴.’

그래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선대 마왕과는 다르게, 그를 편견 없이 봐주는 게 고마웠고.

젠킨스는 소파에 누워있는 키엘을 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정말일까. 도련님이 황태자인 게.’

확인이 필요했다.

“도련님, 수업합시다.”

키엘은 소파에 계속 누워있는 채로 젠킨스의 말을 무시했다.

“조금만 있다가 일어날래.”

“밥 먹고 바로 누우면 소 된대요.”

그러자 키엘은 젠킨스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진짜 소가 돼? 동물왕국엔 그런 마법도 있는 거야?”

“그럴 리가요.”

키엘은 조금 실망한 듯한 표정이었다.

“푸르랑 잔바르는 진짜 소 될까 봐 안 눕던데. 동물왕국은 벨라의 말이 법이라며?”

그런 마법이 있다면 젠킨스가 진작에 썼겠지. 젠킨스가 인상을 살짝 찡그리자, 키엘은 새침하게 일어섰다.

“소 되려고 누워 있던 거 아냐.”

“아… 예.”

* * *

그 후로 몇 달이 지났다.

키엘은 시간이 갈수록 동물왕국에 대해 알고 싶었다. 하지만 알아낸 건 하나도 없었다.

그곳의 공주인 벨라에게 물어보면 제일 정확하겠지만.

- “좀 더 크면 알려줄게.”

라며 질문 자체를 차단했었다.

게다가 그 후로 다들 동물왕국에 대해서 말을 아끼는 편 같았고.

순진한 푸르에게 접근해봤지만, 동물왕국의 ‘동’만 나와도 푸르는 ‘몰라요오!’하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황궁에는 좀 더 정보가 있지 않을까.’

제국답게 모든 지식이 있는 곳이니, 숨겨진 지식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려면 이전보다 더 빨리 자리매김을 하긴 해야 해.’

이전처럼 그 방에 갇혀 지낼 수는 없었다.

자유롭게 조사를 하려면, 제 목숨 하나는 당연히 지킬 힘이 필요했다.

‘이제껏 펜던트의 신성력에 의지하긴 했지만.’

그는 제대로 검술을 배워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우연인 건지, 그건 벨라의 생각과 같았다.

‘조금 일찍 무술을 가르쳐야겠어.’

신성력이 없는 그에게 어떤 위험이 닥칠지도 모른다. 황궁에 가서 제대로 검술을 배우고, 설정상 천재 소리를 듣기는 하지만.

지난 생일 때, 술래잡기하는 걸 보고 깨달았다.

‘너무 느려.’

상대가 전부 마족이었다는 건 까먹고 생각했다.

‘그래. 사자는 새끼를 절벽에서 떨어뜨린다잖아.’

벨라는 젠킨스를 불렀다.

“젠, 검을 좀 사야 할 거 같은데. 볼 줄 알아?”

“검이요? 누가 쓰게요?”

“키엘이.”

젠킨스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일단 이런 시골에는 좋은 검을 찾기란 힘들죠. 기왕이면 대도시에서 찾아보는 게 나을 겁니다.”

“그래? 그럼 마차부터 준비해.”

젠킨스는 이런 시골에서 마차는 쉽게 구할 수 없을 거로 생각했었다.

“여관주인이 선뜻 내주더라고요. 언제든지 쓰라면서.”

“응. 그래야지.”

“아가씨가 귀신 나오는 집 팔았다고 삥 뜯었다면서요.”

벨라는 콧방귀를 뀌며 팔짱을 꼈다.

“삥이라니. 항의한 거지. 이 집에 사연 같은 거 있냐고 물었는데 없다고 했다고. 명백히 고지의무 위반인데.”

“그래서 10골드 달라고 하셨다면서요. 안 주면 거기 있던 귀신 풀어버린다고.”

“…….”

“여관 주인 말로는 그때 아가씨가 그 귀신 같았다던데요. 살벌한 게.”

벨라는 젠킨스의 정강이를 발로 차버렸다.

“조용히 하고 떠날 준비나 해.”

잠시 후, 키엘이 저택 입구로 나오자 벨라는 그를 보고 골똘히 생각했다.

‘어차피 키엘이 쓸 검이니까 같이 가면 좋겠지?’

“벨라, 어디 가요?”

“응. 네가 쓸 검을 좀 사러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갈래?”

키엘은 조금 놀란 눈으로 벨라를 봤다. 마침 검을 배우고 싶다고 언제 말하나 고민하던 찰나였는데.

“배우기 싫어?”

그는 고개를 빠르게 젓고는 조용히 마차 안으로 올라갔다.

젠킨스가 마부석으로 올라가자, 이웨르가 껑충껑충 뛰며 마차로 후다닥 올라왔다.

“앗, 젠킨스가 가면 저도 가야죵!”

벨라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앉는 걸 보고, 키엘이 물었다.

“이웨르는 왜 젠킨스가 가면 따라가는 거야?”

“제 심장을 젠킨스에게 넣어두었답니다. 제가 옆에 없으면 젠킨스는 이제 죽어용.”

젠킨스가 이웨르를 노려보더니 마차의 문을 쾅 닫았다.

보통 인간과 계약할 때, 인간의 심장을 악마에게 집어넣는다. 그 상태에서 인간이 죽으면 악마도 죽고, 악마가 인간과 함께 있지 않아도 죽는다.

인간을 위한 일종의 보험인데 그걸 역이용해 이웨르는 젠킨스에게 넣어두었다.

‘생각해보면 이웨르도 똑똑하긴 해.’

몽마라 인간들과 많이 접촉해서 그럴까. 날짐승 같은 잔바르나 푸르와 달리 생각이라는 걸 하는 것 같았다.

‘이런 애들이 좀 더 많으면 마계도 살 만하려나?’

벨라는 딴청 부리는 이웨르를 보면서 팔짱을 꼈다.

그들은 가장 가까운 대도시 ‘데이저’로 향하고 있었다. 마차를 타면 하루 정도가 꼬박 걸리는 곳이었다.

“데이저는 공작령이니까 좋은 물건이 많을 겁니다.”

“그럼 다행이고.”

키엘은 마차를 타고 여행하는 게 재밌는지, 바깥 풍경을 보며 젠킨스에게 하나씩 물었다.

“젠, 저건 뭐야?”

“저건 신전입니다. 신을 모시는 곳이죠.”

“그러면 저기가 남부에 있는 가장 큰 신전 헤리티아 신전이야?”

“맞습니다. 성물이 가장 많은 곳이죠.”

성물은 신성력을 담고 있는 물건들이었다.

인간계는 마계를 불경하게 여기고, 천계를 숭배했기에 성물이 인간계에 많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성물이라….”

“벨라, 다음에 신전에도 가봐요.”

벨라는 갑작스러운 키엘의 제안에 얼떨결에 대답했다.

“어? 그래.”

맞은 편에 있던 젠킨스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벨라에게 ‘어쩌려고요.’라며 입 모양만 냈지만, 벨라는 애써 시선을 회피했다.

“기회가 되면?”

“헤리티아 신전에는 마계에서 가지고 온 전리품도 있대요.”

“와아. 그래?”

영혼 없는 리액션이었지만 키엘은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신전을 보며 말했다.

“네! 무슨 꼬리래요. 신전에 전리품이 있는 건 헤리티아 신전이 유일하대요.”

뭔 꼬리를 전리품이라고 두는 걸까. 벨라는 젠킨스와 눈이 마주치자 서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였다.

마부석에서 갑자기 이웨르의 비명이 들린 게.

“꺄악.”

그리고 갑자기 마차가 덜커덩거리더니 중심을 잃고 벨라가 앉은 쪽으로 쏠렸다.

마차는 전복되었고, 젠킨스가 벨라의 위를 덮쳤다.

이게 젠킨스와 벨라의 러브라인이라면 키스라도 했겠지만, 다행히 두 사람의 관계는 현실이었다.

“미쳤어?”

“아니, 제가 넘어지고 싶어서 넘어졌습니까?”

벨라는 자신의 위로 다가오는 젠킨스를 마치 부모가 아이를 비행기 태우듯이 발로 밀어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 키엘은 품에 꼭 안고서.

“이웨르! 무슨 일이야?”

“재밌는 일이용!”

“넌 이게 재밌니? 젠, 비켜.”

“이 상태에서 어떻게 비킵니까.”

젠킨스는 발 디딜 공간도 없었다. 벨라는 일단 키엘을 먼저 내보내기로 했다.

“키엘, 옆에 이 창문으로 나가볼래?”

“네.”

벨라와 젠킨스가 키엘을 받쳐주자, 작은 몸집의 키엘은 쉽게 창문으로 나갈 수 있었다.

“문 안 열어져?”

“네, 고장 났나 봅니다.”

키엘이 나가고 남은 공간에 벨라가 일어섰다.

“아가씨는 도련님보다 몸집이 많이 크….”

“뭐래.”

벨라는 바로 고양이로 변해 가볍게 창문으로 넘어갔다.

“저는요? 저도 좀 꺼내주세요!”

젠킨스는 마차 안에서 소리 지르고 있지만 벨라는 짜증을 내며 상황부터 파악했다.

“도대체 무슨 일….”

보아하니, 바퀴 하나가 커다란 바위에 부딪혀 부서져 있었다.

“이게 재밌는 거야? 눈은 어디다 달아놓고 운전하는 거야? 이런 건 피했어야지!”

“갑자기 저 위에서 날아왔다고용!”

이웨르가 손짓하는 곳을 보자 소규모의 산사태라도 났는지 나무가 쓰러져 있고 흙이 쏟아져 나온 게 보였다.

“비도 안 왔는데 무슨 산사태야.”

“억울해용!”

벨라는 한숨을 내쉬며 마차를 전체적으로 보고 있었다.

“바퀴가 완전히 부서졌네요.”

“말 안 해도 알아.”

“새로 갈아 끼워야겠는데요?”

하지만 이미 산 중턱까지 왔는데, 이를 어찌해야 한담. 벨라는 일단 전복된 마차를 바로 세웠다.

“아가씨, 너무 멋있어용.”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손쉽게 뒤집어지자 이웨르도 뒤집어질 듯이 온몸을 비비 꼬았다.

“잔바르보고 표범으로 변해서 마차를 끌라고 할까?”

“바퀴가 있어야 굴러가죠.”

벨라는 볼에 공기를 가득 채우고 팔짱을 꼈다.

혼자라면 그냥 마차를 버리고 가면 되는데. 여기엔 키엘도 있고, 하필이면 마족 중 최약체 몽마와 반마족도 있으니.

그때 젠킨스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아가씨가 마을에 내려가서 바퀴를 가지고 오는 게 어떤가요?”

감히 윗선에 일을 미루는 것 같지만, 그게 사실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알겠어. 한 시간 내로 올 테니까, 주전부리나 먹으면서 쉬고 있어.”

벨라도 귀찮았지만, 순순히 그의 의견에 따랐다.

그녀가 마을에 다시 갔다 오는 게, 아마 그들이 뛰어서 마을에 도착하는 것보다는 몇 배나 빠를 테지.

벨라는 부서진 바퀴를 통째로 빼 들고 가볍게 마을로 달렸다.

‘뭐, 별일이야 있겠어.’

마차의 바퀴는 생각보다 쉽게 구할 수 있었다.

크기가 딱 맞는 게 없긴 했지만, 그냥 앞바퀴를 똑같은 걸 두 개 사면 조금 기울어지더라도 굴러는 간다고 했다.

“그런데 이걸 연약한 꼬마 아가씨가 혼자 들고 간다고?”

“우리가 들어줄까?”

험악한 남자들은 선의로 말하는 것 같지만, 웃음조차 흉측하게 들렸다.

‘왠지 기분이 별로인데.’

아니나 다를까.

벨라가 두 개의 바퀴를 솜털처럼 가볍게 들고 가는데도, 그들은 벨라의 뒤를 따라와 추파를 던졌다.

“이야, 꼬마 아가씨가 힘도 좋네.”

“얼굴도 예쁘장하게 생기고 말이야.”

힘이 세 보이면 알아서 꺼져줘야 할 텐데.

그때, 벨라는 뒤에서 심상찮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경찰관 시절일 때도 한 운동 하던 벨라였다.

그때도 재빠르게 움직이긴 했지만, 지금은 다른 이들의 움직임이 전부 느리게 보일 정도로 반응속도가 빨랐다.

벨라가 살짝 피하자, 험악한 남자 둘이 자연스럽게 앞으로 고꾸라져 넘어졌다.

“으… 이게!”

그들이 재빨리 일어나 벨라를 덮치려고 할 때.

벨라는 들고 있던 바퀴 두 개로 사이 좋게 한 대씩 때려주었다.

“한 대 맞고 기절할 놈들이 뭘 덤벼.”

코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놈들을 보며 벨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 불길한데.’

왠지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

그녀는 서둘러서 자기 몸만 한 바퀴 두 개를 가방처럼 등에 다시 메고 산 중턱으로 향했다.

멀리 마차가 보이고, 가까이 갔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얘들아?”

그녀는 애써 웃으면서 ‘장난 그만 쳐’라 했지만, 마차 밑으로 흥건하게 젖어있는 피를 보자마자 심장이 점점 뛰기 시작했다.

벨라는 들고 있던 바퀴를 내려놓고 주위를 계속 둘러보다 눈을 감고 냄새와 소리를 좇았다.

수많은 산짐승의 숨소리가 들리는데, 그들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뒷발꿈치를 들었다가 놓았다.

이웨르나 젠킨스. 둘 중 하나는 마족이기에, 그녀가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젠킨스를 부르고, 저택에 있을 잔바르도 함께 소환했다.

“무슨 일입니까. 갑자….”

잔바르는 소환되자마자, 쓰러져 있는 젠킨스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벨라는 젠킨스의 멱살을 잡고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뺨을 때려서 깨우려고 했지만, 이미 얼굴은 많이 맞았는지 멍이 많이 들어있었다.

“젠. 일어나. 무슨 일이야? 이웨르랑 키엘은 어디 갔어?”

꽤 흔들자, 머리가 멍했던 건지 젠킨스가 서서히 눈을 떴다.

“아, 아가씨….”

“이웨르랑 키엘은? 어떻게 된 거야?”

“쿨럭. 하, 함정이었어요. 산사태가 아니라 산적들이 던진 거였습니다.”

“키엘은?”

젠킨스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아가씨. 놈들이 성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심하세요.”

“키엘은?”

“일단 이웨르 씨는 몽마라는 걸 눈치챘는지 피 뽑겠다고 한 걸 들었고요.”

“키엘은!”

“저, 아가씨. 아직 성인이 아니라서 마력을 막 방출시키시면 안 됩니다. 아가씨가 인간계에 있는 걸 천족이 알면….”

벨라가 눈을 부릅뜨고 무섭게 다시 말했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예고편을 하는 이유가 뭘까.

“키엘은.”

“이웨르 씨랑 같이 있을 겁니다. 남자아이가 예쁘장하게 생겼다고….”

벨라는 젠킨스를 밀치고 눈을 감았다. 이웨르가 있는 방향을 확인하자마자, 그곳으로 달렸다.

“잔바르. 보이는 거 다 먹어.”

“젠킨스…는…요….”

하지만 잔바르의 질문은 벨라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이웨르가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갈수록 코끝으로 향기로운 피 냄새와 또 다른 피 냄새가, 한데 어울려 벨라의 코를 자극했다.

곧 그들의 본거지가 한눈에 보였다.

멀지 않은 곳이었다.

벨라는 숨어서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 입구로 뛰어갔다.

“으아아아!”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산적들이 소리를 지르며 우왕좌왕하기 시작하더니, 벨라에게 덤벼들었다.

‘짜증 나. 진짜.’

벨라는 그들의 목을 잡고 내동댕이쳤다. 뒤따라오던 잔바르가 어리둥절하며 잔챙이들을 처리했다.

비탈길의 입구를 벗어나자 꽤 큰 공터가 보이고, 공터 너머로 산적들의 집들이 여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잔바르, 다 먹어.”

벨라는 그렇게 말하고 곧바로 공터를 가로질렀다. 당황한 산적들이 그녀를 쫓으러 가려고 했지만, 잔바르가 그들을 저지했다.

‘이렇게는 다 못 먹는데….’

하지만 그는 대꾸했다간 뼈도 못 추릴 걸 알기에 곧바로 산적들의 목을 하나씩 물어뜯었다.

잔바르가 정리하는 동안 벨라는 진한 피 냄새를 좇아 문을 하나씩 열었다.

벨라를 보고 깜짝 놀란 산적들도 있었고, 납치된 아이들도 눈에 보였다.

하지만 벨라는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집의 문을 열었다. 키엘이 보일 때까지.

‘분명 이곳인데.’

그리고 냄새가 격하게 진동하는 곳의 문을 열자, 벨라는 기가 막혔다.

“아가씨….”

이웨르가 칼에 꽂힌 채로 제단 같은 곳 위에 올려져 있었고, 그 밑으로 이웨르의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안에는 그녀의 피의 냄새에 취해 모두 해롱해롱한 채로 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거의 놓고 있었고.

거기다 구석진 곳에 키엘이 붕대를 감은 채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문 입구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밧줄을 손바닥으로 밀어내고, 벨라는 바로 키엘에게 달려갔다.

밧줄을 잡는 데 좀 따끔거리긴 했는데, 그녀의 손에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건 뭔데 건드리기만 해도 이렇게 피 나?”

벨라는 점점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키엘이 먼저였다.

“키엘, 정신 차려볼래?”

그는 이웨르의 피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정신이 몽롱해 보였다.

‘일단 이 피 냄새부터 어떻게 해야 할 거 같은데.’

벨라는 일단 키엘부터 안전한 곳에 두기 위해 그를 업었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잔바르가 산적들의 1/3의 목을 물어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야, 더 빨리 못 해치워?”

젠킨스는 마력을 방출하지 말라고 했지만, 키엘이 다쳐 있는 걸 본 그녀는 진정이 되지 않았다.

벨라의 발끝에서부터 지진이 잠깐 일어나자 산적들은 주춤거렸고.

“이럴 거면 공주님이 처음부터….”

잔바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산적들이 있는 공간이 싱크홀이 무너져내리듯 무너졌다.

“하시지 그러셨어요.”

“안에 들어가서 이웨르 챙겨.”

잔바르가 안으로 들어가자, 남아 있던 산적 잔챙이들이 벨라에게 덤벼들었다.

벨라는 키엘을 업은 채로 두 발로 다가오는 놈들의 거시기를 한 대씩 차버렸다.

쿵.

그 반동으로 키엘이 벽에 머리를 콩하고 박자 벨라는 사색이 되었다.

“어떡해, 키엘!”

바로 업었던 키엘을 내려놓고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울상을 지었다.

“너희 때문에 키엘이 머리 박았잖아!”

조금 전 남자의 소중한 부위를 맞은 산적들은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으아아아!”

그들이 할 줄 아는 말이라곤 기합밖에 없는지 그냥 달려들었다.

무기가 손에 없는 벨라는 가볍게 옆으로 비켜선 뒤 그 회전을 이용해서 바로 돌려찼다.

제대로 들어갔는지 남자가 칼을 떨어뜨리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오랜만에 하는 거라 안 될 줄 알았는데.’

벨라도 스스로 놀랐다. 아직 열두 살의 몸인데도, 발에 실리는 힘이 성인 남자라고 해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산적이 떨어뜨린 검을 다시 집을 수도 있었지만, 벨라는 그러지 않았다.

빙의 되고 처음으로 악마의 몸이 마음에 들었다. 빠른 스피드, 강한 힘.

얼마 만에 느껴보는 쾌감인 건지.

자신에게 달려들려고 준비 중인 산적들의 얼굴을 합판 삼아 연습이라도 하듯이 발로 차버렸다.

이빨이 나가는 소리가 음악처럼 들렸다.

인근의 모든 생명의 심장 소리가 헐떡이는 게 벨라의 귓가에 들렸다.

턱 끝까지 숨이 차오르지만, 엔도르핀이 도는지 지치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상쾌하고 날아갈 것 같았다.

마지막 산적이 남았을 때는 화려하게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옆에 있던 쓰러져 있던 산적의 검을 빼 들었다.

‘어떻게 죽여야 재밌을까?’

그때 한 소리가 수많은 소리를 비집고 들어와 벨라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벨라.”

키엘의 목소리였다.

벨라가 잠깐 멈춘 사이에 산적이 겁을 먹고 바로 뒤를 돌아 저 멀리 도망치고 있었다.

‘나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벨라는 손에 들고 있는 검을 떨면서 천천히 내렸다.

“왜 살려두신 겁니까?”

어느새 나무 위에서 조용히 감상하고 있는 잔바르가 손뼉을 치다 말고 멈췄다.

“아가씨…?”

벨라는 잔바르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뒤를 돌아 키엘에게 다가갔다.

붕대로 가려 한쪽 눈만 겨우 뜬 키엘이 숨을 토해내며 벨라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괜찮아? 깨어났어?”

키엘이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새끼들이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벨라가 울상이 되어 키엘의 몸 여기저기를 살펴보는 동안 이웨르가 천천히 대답했다.

“괜…찮아용…. 특…상품 같다고… 안 건드렸대용….”

키엘의 옆에 이웨르가 쓰러진 채로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아가…씨…. 저도 살려줘용….”

벨라가 그녀의 등에 꽂힌 검을 잡자마자 손바닥에 타들어 갈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와, 이게 뭐야.”

성물이었다. 아까 문 앞에 달린 밧줄처럼.

말로만 들었지, 벨라는 한 번도 신성력이 있는 물건을 다뤄본 적이 없었다.

‘천족 새끼들 쓸데없는 거만 만들어서.’

검을 빼고 나자, 벨라의 손바닥이 화상이라도 입은 듯이 검게 변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회복이 되겠지만, 성물이라 아마 쉽게 회복되진 않을 터였다.

“이웨르, 괜찮아?”

“저… 한 놈만 먹으면 괜찮을 거 같은데.”

벨라는 저린 손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가.”

다행히 키엘은 이웨르의 피 때문에 몽롱할 뿐,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키엘도 몽마인 줄 알고 찔러본 건가?’

몇 군데 찔린 흔적이 있지만 바로 응급처치를 해놓은 것 같았다.

이 예쁜 얼굴 때문에 원작에서는 입에 담기도 힘든 일들을 어릴 때부터 겪은 적이 있다는 설정이 기억났다.

벨라는 그저 씁쓸하게 한숨만 내쉬었다.

“벨라… 괜찮아요?”

“응?”

키엘이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서웠을 텐데. 의젓하게 걱정해주는 거 봐.’

벨라는 키엘의 눈물을 닦아주려다 자신의 손에 묻은 다른 이의 피를 보고 손을 내렸다.

“난 괜찮아. 말했지? 동물왕국 공주님은 완전 강하거든.”

그때 잔바르가 문을 쾅 하고 열었다.

“아가씨, 어느 정도 정리된 거 같은데 제가 젠킨스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우리 그쪽으로 갈 거야. 원래 목적대로 무기도 사야….”

그러다 벨라는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아니지. 여기를 그냥 털자. 귀찮은데.”

“그럼 젠킨스는….”

“여기 있는 무기들 다 들고 젠킨스 있는 곳으로 가…”

벨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잔바르는 근처에 있는 무기를 손으로 집기 시작했다.

“으악!”

성검이 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잔바르가 당황한 표범 눈으로 벨라를 쳐다봤다.

“야, 그건 잡으면 안 돼. 그냥 죽어 있는 산적 중에 검 한 서너 자루만 챙겨.”

“네!”

“그리고 옆방에 금품들 있더라. 그거도 챙겨.”

“네!”

어느 정도 사태가 정리된 거 같자, 문이 다시 끼익 열리더니 얼굴에 피로 칠갑을 한 이웨르가 요염한 포즈를 취하며 들어왔다.

“짠! 이웨르 다시 등장입니다용.”

“넌… 괜찮나 보구나.”

“아가씨도 힘들면 나가서 좀 먹고 오세용.”

벨라는 한숨을 내쉬며 피 묻은 손을 옷에 닦았다.

“아, 됐어.”

벨라가 잔뜩 인상을 찡그린 채 이웨르를 질책했다.

“흐음. 이럴 때 보면 진짜 동물왕국 공주님 안 같다니깡.”

“조용히 해.”

벨라도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천족과 마족은 세간에는 빛과 그림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선하고 악하다는 것의 기준 자체가 천족이 세운 기준이니까.

천족은 질서를 바탕으로 힘을 얻고, 마족은 순수하게 힘을 바탕으로 질서가 뒤따른다.

‘그놈의 질서도 없긴 하지만.’

그리고 그 힘은 대체로 타인의 생명에서부터 흘러나왔다. 마족은 타인의 생명을 자신이 취하는 게 익숙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니 지친 벨라에게 가장 필요한 건.

숨이 넘어가는 인간의 피와 살이었다.

‘내가 전생에 경찰이었는데… 아무리 소설이라도 식인마가 될 순 없잖아.’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시금 인간계에 남아 있는 마력이 차곡차곡 쌓이고 회복될 거였다.

벨라는 천천히 성검으로 다가가 다시 집어보았다. 여전히 손바닥은 타들어 갈 듯이 아파졌다.

빛이 비치면 어둠은 사라지고, 빛에 어둠이 물들면 빛은 빛을 잃어간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데다가 인간계이긴 하지만, 벨라의 마력을 블랙홀처럼 흡수하고 있었다.

‘어떤 미친 천족인지는 몰라도, 자기 생명을 갈아 넣어서 만들었나 보네.’

근처에 신전이 있었으니, 거기에서 나온 거겠지.

‘이런 게 산적한테 쉽게 털리는 것도 웃기는데?’

금품을 가득 챙기고 마차로 돌아온 그들은 꽤 많이 지쳐있었다.

“데이저로 안 가도 되겠네요. 어째 골라온 검들이 상태가 좋아 보입니다.”

“너도 엄청 맞은 거 같더니, 반쪽이라고 금방 회복되나 보네.”

짐을 따로 둘 공간이 없어서 마부석에 무기와 금품들을 두고, 이웨르가 마차를 몰았다.

“다사다난하네, 정말.”

벨라는 한숨을 길게 쉬며 키엘의 왼편에 둔 성검을 가리켰다.

“키엘. 저거 잡아볼래?”

검이 성물이라 그런지, 키엘이 잡자 뒤에서 후광이라도 비치는 거 같았다.

“음… 키엘. 그거 올해 생일 선물로 미리 줄게.”

소설은 원작대로 흘러가려는 힘이 크다.

신성력을 잃어버린 펜던트 대신, 어쩌면 키엘이 앞으로 황태자로서 살아갈 때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벨라의 말에 잔바르가 얼빠진 표정으로 있다가 말했다.

“아가씨. 오다 주운 거를 선물로 주는 겁니까?”

“오다 주웠다니. 내가 발견한 거지.”

“그게 도대체 무슨 억집니까. 저도 길 가다 주운 건 선물로 안 줍니다.”

젠킨스는 그런 잔바르를 보며 중얼거렸다.

“거짓말….”

벨라는 젠킨스가 하는 말이 그녀에게 하는 건 줄 알고 팔짱을 낀 채 그를 노려봤다.

“젠킨스. 뭐라고 했어?”

“도련님이 다루기에는 좀 커 보인다고요.”

“득템했는데 굳이 버릴 필요 없잖아?”

“완전 쓰레기템인데요….”

“얘들아, 나 오늘 엄청 짜증 나거든. 입 좀 다물자.”

* * *

산적에게 습격을 당한 건 창피했지만, 얻은 것도 꽤 많았다.

일단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금품을 팔자 꽤 재정이 넉넉해졌다.

게다가 벨라는 지속적인 수입을 얻기 위해 한가지 묘책을 꺼냈다.

사실 돈이 떨어지면 푸르가 곰이니 쓸개(웅담)이라도 팔아야지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 좋은 게 눈앞에 있었다.

“이웨르, 네 피로 사랑의 묘약 같은 거 만들 수 있지?”

상급 몽마는 적은 피로도 대량으로 만들 수 있었다.

예전에 이 저택에 붙어 있던 귀신도 사랑의 묘약을 열심히 만들었던 걸 보면, 시중에도 분명히 판매되고 있으니 불법도 아닐 테고.

그렇게 소소하게 마을의 마법 상점에 팔기 시작하자, 돈 걱정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키엘의 검술 연습.

벨라는 키엘이 검을 연습 할 수 있도록 정원에 허수아비부터 세웠다.

“실력 있는 스승을 구해볼까요?”

젠킨스가 한마디 곁들자, 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건 걱정하지 마. 일단 기본적인 것만 가르쳐줘. 젠킨스, 그 정도는 할 줄 알지?”

벨라는 젠킨스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물었다.

“저번에 너무 속수무책으로 당해서 믿을 수가 있어야지.”

“아가씨. 그때 저희를 덮쳤던 무리가 30명이에요, 30명.”

“일단 기초적인 거만 가르쳐줘. 검 잡는 법이랑. 잔바르랑 상의해서 체력훈련도 같이 봐주고.”

“…잔바르 님이랑요?”

젠킨스가 주춤하자, 벨라는 팔짱을 끼고 혀를 찼다.

“왜, 싫어? 좀 사이좋게 지내.”

그리고 키엘의 일과는 점점 더 바빠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훈련부터 시작하고, 점심을 먹고 나면 어김없이 젠킨스와 교육하고.

거기에 검술 연습까지.

‘정말 뜻하지 않게 원하는 대로 굴러가는 게 신기하단 말이야.’

키엘은 정원에서 꽃들에 물 주고 있는 벨라를 멍하게 쳐다봤다.

‘처음에 올 때만 해도….’

내쳐지지 않기 위해, 이 저택의 실세의 예쁨을 듬뿍 받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리 대단한 노력을 기울인 것 같진 않은데.

어느새 그는 벨라가 가장 아끼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제 굳이 애교부리며 환심을 사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키엘은 벨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벨라.”

“응? 무슨 일 있어?”

“이거, 이웨르가 먹으라고 준 건데….”

키엘은 손에 들고 있던 과자를 쪼개서 벨라에게 보여줬다.

“같이 먹어요.”

그는 과자 조각을 손가락으로 잡아 벨라의 입 가까이 가져갔다.

“아~해요, 아.”

벨라는 웃으며 입을 벌리고 과자를 받아먹었다.

분명 이렇게 애쓰지 않아도 될 텐데, 키엘은 이상하게도 멈출 수가 없었다.

* * *

그렇게 소소하고 간지러운 일상들이 빠르게 흘러가 어느덧 뒷산의 꼭대기에 눈이 소복하게 쌓이기 시작했다.

벨라는 미리 정리해 둔 핵심 노트를 유심히 보면서 생각했다.

“우리 감초를 만나게 해줄 때가 되긴 했는데.”

소설 속 키엘이 이 나이쯤에 반드시 만나야 하는 사람이었다.

바로 로잔느와 키엘의 사이를 돈독하게 해주는 여자 사람 친구, 마이유.

대략 키엘의 나이 열한 살인가 열두살 때쯤, 추운 겨울에 빵 한 쪽을 나눠준 걸로 시작되는 인연이었다.

키엘은 기억 못 하지만 마이유는 그 곱상한 얼굴을 똑똑하게 기억했었다.

그래서 마이유는 키엘을 평민이라고 생각했고, 당연히 여주인 로잔느도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에는 둘의 신분을 오해하게 하지만, 소설이 진행될수록 그들의 사랑을 누구보다도 지지하는 사람.

그러니 다른 설정들은 무시해도 ‘마이유’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이 마이유는 어디에 있다는 걸까.”

곧 만나야 할 겨울이 왔는데, 아무리 핸드폰으로 검색을 해봐도 만나는 장소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때, 전생에서 팀장님이 하던 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 “야. 안 되면 발로 뛰어야지.”

“그래. 발로 뛰자.”

벨라는 수사라도 하는 듯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옷장에서 털이 푹신하게 달린 코트를 꺼내 걸쳐 입었다.

‘자리를 좀 비워도 괜찮겠지?’

불안하긴 하지만 직접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젠킨스 믿고 좀 비워보지, 뭐.’

그렇게 벨라가 자리를 비울 때만 해도, 저택의 마족들은 오랜만에 벨라가 없는 자유를 누릴 줄만 알았다.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뚝뚝 떨어지는 겨울.

벨라는 가장 가까운 도시부터 마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확률적으로 여기 있을 확률이 제일 높지.’

사람 찾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닐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쉽게 신분 조회가 가능한 현대사회가 아닌지라, 가가호호를 돌며 물어보고 다녔다.

“열 살짜리 갈색 머리 여자애? 우리 딸?”

“이름이 뭐예요?”

“로라.”

하지만 이 짓도 하루 이틀이면 할 만하지.

벌써 보름째였다.

가는 곳마다 허탕을 치던 벨라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골목으로 들어가 벽에 머리를 콩콩 박았다.

“이 넓은 곳에서 어떻게 찾냐고. 등장 인물별로 다 정리할 수도 없고.”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벨라가 아니었다.

핸드폰을 꺼내 ‘마이유’를 검색하고 다른 단서가 있을지 찾아보았다.

“눈 빠지겠네.”

왜 하필 흔하디흔한 갈색 머리인가. 이웨르처럼 특이하게 파란색 머리면 좀 좋을까.

하루에도 한 번씩 꼼꼼하게 다시 단서를 찾아보지만, 갈색 머리에 열 살이라는 것 이외에는 찾을 수가 없었다.

‘역시 소설 속 배역을 줍는 우연 같은 건 두 번 일어나지 않는구나.’

벨라는 눈을 비비고 피곤한 몸을 이끌었다.

로잔느의 하녀로 들어간다는 건, 로잔느가 하녀를 구할 때 직업소개소에 마이유가 등록되어 있다는 뜻일 텐데.

“이 도시가 아닌가?”

또 다른 도시로 가서 여태까지 한 것처럼 조사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냥 포기할까 생각도 했지만, 혹여나 원작대로 완결이 안 날 걸 생각하면 소름이 돋았다.

‘역시 그딴 곳에서 오천 년을 살 수는 없지.’

체력이 바닥이라도 그 생각만 하면 힘이 불끈 솟는 것 같았다.

“잠깐…. 로잔느가 하녀를 구할 때, 어디에 구인공고를 하는지 알면 되지 않을까.”

역시 당근보다는 채찍인 건지, 마계에서 오천 년간 살 수 없다는 절박한 생각이 이제껏 하지 못한 발상을 내놓았다.

“유레카!”

* * *

벨라가 고생하는 동안, 그녀의 행적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저택은 외줄 타기를 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흘러갔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3일째쯤 되자 이웨르가 식탁 한가운데 누워 있기 시작했다.

물을 한 모금 마시려던 키엘은, 아침부터 계속 저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이웨르가 궁금해졌다.

“이웨르, 뭐 해?”

“생각하고 있어용.”

“거기 누워 있으면 생각을 할 수 있어?”

“날 먹어용 놀이예요. 제일 생각을 많이 할 수 있는 자세죵.”

이웨르는 벨라가 없으니 수위 높은 농담도 거리낌 없이 하고 있었다.

키엘은 열한 살답게 모르는 척, 이웨르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물이나 마셨다.

“그렇구나. 그래서 무슨 생각해?”

“아가씨는 왜 안 돌아올까, 생각하고 있었어용.”

물을 마시던 키엘은 그만 사레가 걸려 캑캑거렸다.

그저 잠깐 자리를 비운 건 줄 알았는데.

“벨라가… 안 와?”

이웨르는 순간 정신이 들었는지 누워있다가 자세를 고치고 식탁 위에 앉았다.

“아, 아니용. 아가씨는 오시죠!”

“언제 오는데?”

때마침 식당으로 푸르가 들어오며 이웨르에게 잔소리했다.

“이웨르! 식탁 위에 앉아있지 말라니까요!”

“도련님, 푸르에게 물어보세용.”

이웨르는 그 말을 남기고는 식탁에서 내려와, 식당에서 정원으로 나가는 문을 통해 사라졌다.

“뭘 물어봐요?”

“푸르, 벨라는 언제 와?”

“푸르는 아기곰이라 몰라요!”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하는 거야?”

키엘은 이제 화가 날 지경이었다. 어디에 가는지는 비밀이라도, 언제 오는지는 대강이라도 알 수 있는 거 아닌가.

“잔바르 님에게 물어보세요!”

키엘은 서둘러 잔바르에게 달려갔다.

키엘은 지붕 밑에서 발을 동동 굴리며 잔바르를 애타게 불렀다.

“잔바르! 일어나! 잔바르!”

한참을 부르자 잔바르가 하품을 하며 정원으로 가볍게 내려왔다.

“뭐야, 꼬마. 벌써 연습 시간이야?”

“잔바르. 벨라는 어디 간 거야? 언제 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잔바르는 동물 왕국 대장군이라면서. 그런데 벨라가 어디 갔는지 몰라?”

왜 아무도 모르는 건지. 너희 공주님이잖아.

그때부터 잔바르도 조금씩 벨라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애초에 벨라는 잔바르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 터라, 늘 그를 쫓아내고 싶어 하는 것도 눈에 보였고.

잔바르는 자신도 모르게 속내를 읊조렸다.

“설마 우릴 버리고 가신 건가?”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키엘은 마치 트라우마에 갇힌 것처럼 심장이 쿵하고 내리 떨어졌다.

키엘의 눈동자가 커지고 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잔바르는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꼬마 네가 그, 그렇게 우니까 도망가지. 약해빠져선.”

그렇게도 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키엘이 입술을 꾹 다물고 겨우 참고 잔바르를 원망하듯이 쳐다봤다.

“제, 젠킨스는 알겠지. 걘 원래 아는 게 많으니까.”

그 뒤로 저택은 마계보다 더 지옥 같은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젠킨스, 벨라는 언제 돌아와?”

“글쎄요. 저도 아가씨께서 왜 잠시 출가하셨는지 몰라서요.”

처음엔 매일 아침과 밤마다 물어봤는데.

“이웨르, 벨라는 언제 올까?”

“오… 오겠죵. 뭐 아직 며칠 안 되었는데요, 뭘.”

3일, 4일. 일주일.

하지만 저택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키엘은 점점 초조해졌고, 일주일이 넘어가자 정각마다 울리는 뻐꾸기시계처럼 물어보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알람이라도 맞춰놓은 것처럼.

“푸르, 벨라는….”

“으아아아아아아!”

이제 푸르는 키엘이 ‘벨’자만 꺼내도 귀를 틀어막고 ‘으아아아’ 소리를 내며 도망쳤다.

젠킨스가 키엘을 가르쳐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수크리나’ 약초는 소량만 씁니다.”

“젠킨스.”

“네.”

“벨라는 언제 와?”

젠킨스도 이 질문에 이제 진절머리가 날 것 같았다.

어디를 왜 가서 언제 돌아올 거라고 미리 말해줬다면, 이 답답한 상황을 키엘에게 이해시키기라도 할 텐데.

‘하여튼, 마족들이란.’

무한히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마족들은 인간의 시간을 생각하지 않는다.

벨라에게는 그저 보름이 하루 같이 느껴질지라도, 이 어린아이에게는 1년 같은 세월일 수도 있음을.

“도련님. 아가씨를 너무 믿지 마세요.”

키엘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나중에 상처받으실까 봐 걱정됩니다.”

그건 진심이었다.

300년간 늙지 않은 채 살아오며 인간들에게도 많은 의심을 받았지만, 그래도 그들은 도리라는 게 있었다.

한순간에 젠킨스를 내치던 마족과는 달리.

하지만 키엘의 귀에 그런 젠킨스의 진심 어린 충고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젠킨스.”

“네, 아가씨 언제 올지 몰라요.”

* * *

벨라는 서둘러서 프실리아 백작가로 향했다. 보름 동안 나다니던 도시와 크게 멀지 않은 곳에 저택이 있었다.

염탐하기 좋게 고양이로 변신해서 백작가 안을 들어갔다.

‘여기네.’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백작가의 저택은 벨라가 사는 저택과 달리 굉장히 고급스럽고 잘 꾸며져 있었다.

나름 벨라는 자신의 저택을 잘 꾸며왔다고 생각했는데, 구역별로 꽃들을 모아놓은 정원을 보니 확연히 차이가 느껴졌다.

‘우리 집은 정원이 아니라 운동장이었구나.’

몰래 창문을 열고 들어간 내부도 마찬가지로 벨라의 자존심을 꺾었다.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가구들을 집어넣은 벨라의 저택과 달리, 인터넷에서 ‘집 좀 꾸몄다.’ 하는 사람들이 공개한 사진을 실물로 보는 것 같았다.

‘이건 좀 질투 난다.’

벨라는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의 방을 찾아 사람들을 피해 그림자 속을 숨어다녔다.

다행히 까만 고양이라 들키지 않을 수 있었지만, 자꾸 비싼 접시나 화병을 위에서 떨어뜨리고 싶은 본능이 올라와서 힘들었다.

‘난 진짜 고양이도 아닌데….’

집사의 관리실에 도착하자 여러 서류가 보였다. 벨라는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인간으로 변해서 서류를 하나씩 살펴보았다.

역시 백작가라 그런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세상에. 매달 세금으로 들어오는 돈 좀 봐.’

회계장부를 보니 거액의 돈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게 보였다.

벨라가 사는 저택의 생활과는 굉장히 거리가 멀었다.

‘와. 가정교사를 이렇게 많이 두는구나.’

젠킨스 하나를 혹독하게 무임금으로 돌리고 있지만, 이곳은 과목별로 교사들을 고용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소도시 일리노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본래의 목적을 잊을 정도로 묘하게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니야. 욕심이야말로 모든 악의 근원이지.’

그러면서도 불편한 이 마음은 뭘까.

생각해보니 인간계에서는 벨라를 악의 기준으로 삼을 텐데.

-딸각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벨라는 급하게 고양이로 다시 변했다. 어두운 그림자로 숨으려고 하는데.

“엇, 유모! 고양이야!”

옆에서 엄청나게 밝은 목소리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누군가가 벨라의 꼬리를 세게 잡았다.

깜짝 놀라 하마터면 사람으로 다시 변할 뻔했다.

“로잔느 아가씨, 조심하세요!”

벨라는 온몸의 털이 쭈뼛쭈뼛 서는 게 느껴졌다.

로잔느 프실리아.

이 소설 속 여자주인공.

연분홍색으로 양 갈래머리를 한 귀여운 여자아이는 벨라의 꼬리를 잡고 당겼다.

“아가씨, 동물은 그렇게 만지면 안 됩니다.”

“헉. 미안해, 고양아. 많이 아팠어?”

목소리마저 천사같이 고왔다.

로잔느는 벨라를 들어 자기 품에 안고 벨라의 등을 길게 쓰다듬었다.

“미안해, 고양아. 대신 맛있는 거는 줄게.”

‘내 자존심….’

명색이 여주답게 귀엽고 예쁜 외모에,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이 애가 키엘의 운명의 짝이지.’

키엘이 평민이라 생각하고, 가문마저 버리려고 했던 로잔느.

키엘은 변두리에 있는 백작가의 로잔느를 황태자비로 세우기 위해, 황태자로서의 입지를 더 다지려고 마계로 향하게 된다.

사실 프실리아 백작가로 오면서도 마주칠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이 갑작스러운 만남이 불편하게만 다가왔다.

애초에 최애는 키엘이고, 차애는 악녀였던 슈리아라 그런가.

분명 착하고 천사 같은 아이인데.

이 소설 속에서는 로잔느가 키엘의 정의가 될 텐데.

“꺄악.”

벨라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발톱을 세워 로잔느의 얼굴을 할퀴었다.

이유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생리현상을 참지 못한 것처럼 할퀴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가 없었다.

“꺄악, 아가씨!”

옆에 있던 유모의 비명이 들리자 벨라는 서둘러 로잔느의 품에서 나와 저택 입구로 달려갔다.

“아, 아가씨…! 얼굴이!”

벨라는 그 말에 불안하게 고개를 돌려 로잔느의 얼굴을 봤다. 자신이 할퀸 자국이 선명하고 그 밑으로 시뻘건 피가 흘러나왔다.

‘아… 내가 여자주인공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벨라가 뒤를 돌아본 사이에, 입구 앞에 있던 문이 닫혀버렸다. 벨라가 구석으로 도망치려고 할 때, 긴 뜰채가 벨라의 위로 그녀를 덮었다.

‘에라, 모르겠다.’

점프라도 하려는 찰나, 뒤에서 흥분한 집사의 목소리가 들리며 벨라의 온몸을 양손으로 잡았다.

“감히 아가씨를 할퀴다니, 저런 불경한 고양이 같으니라고!”

집사가 한번 잡고 나자 다른 고용인들도 붙더니 벨라의 몸을 하나씩 맡아서 잡았다.

‘아니, 이 새끼들이 어딜 만지는 거야!‘

분명 고양이 구조할 때는 천 같은 걸 감싸서 막던데, 누가 이렇게 무식하게 잡는단 말이야?

“당장 죽여버려야겠습니다.”

“아니야, 고양이를 놔줘! 내가 갑자기 안아서 그런 거야.”

“잠깐만요! 이 고양이 눈이 빨갛습니다. 이거… 마물입니다!”

벨라는 순간 당황해서 움직임을 멈췄다.

‘눈이 빨간 고양이는 없어?’

그녀가 마계에서 온 걸 들켰다면, 어쩔 수 없지.

벨라는 고양이인 채로 털을 쭈뼛 세우고 네 발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몇 년간 인간계의 마법을 여러 번 연습했지만, 대부분의 결과가 그다지 좋지 않았었다.

나비를 부르려니 벌이 나왔고, 꽃을 피우려니 시들었다.

그리고 비를 부르는 마법은 피를 불렀지.

프실리아 백작가의 온 벽에서 진득한 피가 흘러내렸다.

‘아… 나 진짜 악녀 같다.’

사람들이 그걸 보자마자 비명을 질렀고, 벨라는 여유롭게 그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안 돼! 저 마물을 잡아!”

어림도 없지. 이번에는 벌을 부르는 마법을 시전했다.

‘아… 벌 나오라니까 이번엔 파리가 나오네.’

하지만 벌보다는 파리가 덜 위험하니 괜찮겠지.

벨라는 열린 창문으로 밖을 나와 후다닥 뛰어다니며 겨우 백작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벨라는 백작가와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한숨을 돌리며 걷고 있었다.

그것도 네발로.

고양이의 모습으로.

‘왜 아직도 이 모습이야?’

스스로도 황당했는지 가볍게 점프하고 다시 벨라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아름다운 석양이 지평선 너머로 지고 있었다.

“하아… 그나저나 내가 진짜 왜 그랬지?”

벨라는 고단했는지 비틀거리며 길가에 털썩 주저앉았다.

새하얀 눈이 덮인 도랑을 보다 자신의 두 손을 보았다.

어찌나 깊게 할퀸 건지 손톱 사이로 로잔느의 붉은 피가 보였다.

‘내가 로잔느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긴 했는데.’

하마터면 소설 속의 여자주인공을 크게 다치게 할 뻔했다.

‘얼굴에 흉터는 안 남겠지?’

만약 얼굴이 아니라 조금 더 밑으로, 목을 할퀴었다면.

괜스레 불길한 생각이 불쑥 들었다가, 벨라는 고개를 저었다.

‘고양이로 너무 오래 변해 있어서 고양이처럼 생각했던 게 분명해.’

원래 고양이가 변덕이 많은 동물이기도 하고. 안기는 걸 싫어서 무는 고양이도 많으니까.

말도 안 되는 자기 합리화라는 걸 알았다. 벨라는 예전에 자신도 모르게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 ‘어떻게 죽여야 재밌을까?’

소설 속에 빙의하고 점점 이 역할에 물들어가는 걸까.

벨라는 그녀는 이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마이유부터 찾자.’

* * *

도시 일리노는 다른 도시들보다도 조금 더 큰, 백작령의 도시였다.

뛰어갈 기운도 없어 차분히 밤새 걸어서 도착했다.

백작가에서 가깝긴 했지만, 벨라의 저택과는 꽤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집에 가는 것도 일이겠구나.’

여기서 또 며칠을 찾아다녀야 할지 생각해보면, 벌써 한숨만 나왔다.

벨라는 간단하게 아침을 먹으면서 줄어든 잔고를 보고 두 번째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온 김에 일하자, 일.’

인근의 직업소개소를 다 돌아다니며 ‘마이유‘에 대한 단서를 찾았다.

마지막 직업소개소를 들어갈 때, 벨라는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녀를 찾는 일이 벨라가 전생에서 했던 경찰의 일과 비슷해서 향수를 느꼈다는 것 정도.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저희 저택에서 하녀를 좀 구하려고 하는데.”

“네!”

“열 살 정도 갈색 머리의 여자아이가 있을까요?”

“하하. 굉장히 구체적이시네요. 저희가 아는 아이는 한 명 정도 있는데.”

벨라는 그제야 진흙 속에서 진주를 발견한 것 마냥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이름은 오린이고, 청소를 꽤 잘하고….”

“하아.”

역시. 쉬운 일은 아니지. 벨라가 한숨을 내쉬자, 직업소개소의 똑똑한 직원이 되물었다.

“혹시 특별하게 찾는 아이라도 있나요?”

“아니요….”

이름을 진작 말하면 좋았겠지만, 말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수사할 때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고.’

혹여나 ‘마이유’를 찾는다고 하면 그 마이유가 숨어버릴지도 몰랐으니까.

“괜찮아요, 그런 아이들 찾는 사람 많으니까.”

그런 아이들이라니?

벨라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지만, 직원은 손으로 입 옆을 가리며 조용히 말했다.

“요 인근에 집 없이 돌아다니는 애들도 있어요.”

“집 없이…?”

“갑자기 사라져도 아무도 모르죠.”

그러더니 직원은 벨라에게 윙크를 했다. 하지만 그 윙크는 벨라의 기분을 더 상하게만 하였다.

“여긴 무슨 인신매매가 기본 옵션이야?”

마족의 탈을 쓴 벨라는 사람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데, 인간의 탈을 쓴 이 사람들은 어째서 악랄한 짓을 서슴없이 말하는지.

벨라는 작은 키지만, 직원의 목을 잡아 천장에 매달었다.

“크… 크억….”

하지만 죽일 수는 없었다. 직원이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벨라는 손을 놓으며 경고했다.

“내가 지켜볼 거야.”

그리고 곧장 직원이 말했던 공터로 향했다.

도시 어귀에 무료 급식을 배분하는 곳 근처였다.

벨라는 그곳에서 어렵지 않게 아이들이 있는 무리를 발견했다.

유독 체구가 작은 갈색 머리의 여자애가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 구걸하고 있었다.

가지고 있던 돈을 여자애에게 주며 물었다.

“너 이름이 뭐야?”

“…마이유요.”

찾았다.

드디어 찾았는데.

마이유를 찾으면 승진이라도 한 것처럼 기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빵 한 쪽을 나눠주며 시작된 인연이랬지.’

소설에는 그저 ‘어릴 때 잠깐 스쳐 간 정도’로만 묘사되어 있었다.

벨라는 마이유에게서 뒤돌아서며 눈물이 핑 돌았다.

소설대로라면 키엘은 집 없이 돌아다니는 이 애들과 똑같이 전전긍긍하며 살았겠지.

이렇게 위험이 도사리는 곳에서. 홀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면서.

‘키엘 보고 싶다.’

마이유가 어디 있는지도 찾았겠다, 저택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탈진이라도 할 것 같았지만 벨라는 발걸음을 돌렸다.

* * *

추운 겨울이라 발이 차갑게 시렸건만 달리고 달렸다.

해가 점점 저물고 하늘에 붉은빛이 모두 사라지고 어둠이 금세 찾아왔지만 달렸다.

프실리아 백작가가 멀리 보이자 마음은 더 불편했다.

‘로잔느는 괜찮겠지?’

전날의 일을 생각하다가도 벨라는 애써 그 이상한 기분을 지우려고 더욱 빠르게 박차를 가했다.

어느덧 달이 길을 밝혀줄 때쯤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벨라는 저택의 대문을 들어서서 정원으로 들어가면서 달밤에 하얗게 빛나는 꽃들이 노래를 불러주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현관을 열자, 청소를 마무리하던 푸르가 깜짝 놀라서 달려왔다.

“아가씨!”

마지막 한걸음이 어찌나 무거웠던지.

벨라는 그대로 무릎을 굽히고 털썩 주저앉았다.

* * *

벨라가 저택에 도착했을 때, 푸르의 큰 목소리에 전부 현관으로 달려왔다.

그녀가 쓰러지는 걸 본 그들은 다 같은 마음이었다.

‘드디어 해방이다.’

그간 가끔 키엘이 밤에 깨서 벨라가 온 것 같다고 찾아봐 달라질 않나, 악몽을 꿨으니 벨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냐고 보채질 않나.

그놈의 ‘동물왕국’ 컨셉 때문에 마계의 공주는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고 말도 하질 못했다.

“벨라가….”

“네, 드디어 아가씨가 돌아오셨네요.”

“다행이네용.”

“이제 푹 잘 수 있겠군.”

체력을 다해 고양이로 변했지만, 푸르는 걱정보다 오히려 간편하다고 생각했다.

“아가씨는 제가 침대에 옮길게요!”

유일하게 근심하는 건 키엘뿐이었다.

“벨라가 고양이로 변했어.”

“네네, 힘을 많이 썼나 봐요!”

“아픈 거야?”

“아가씨 돌아왔으니까 전 자러 갈게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젠킨스는 숨어 있던 인간미가 돌아왔는지 키엘을 안심시켰다.

“도련님, 아가씨는 금방 회복하실 거예요.”

“하지만….”

키엘은 불안한지 발을 동동 굴리며 벨라의 침대를 보고 있었다.

“도련님, 걱정되면 아가씨랑 같이 자용.”

이웨르는 키엘을 데리고 벨라가 누워 있는 옆 공간을 탁탁 쳤다.

“그래도 돼?”

“설마 도련님보고 뭐라고 하겠어용? 그러니 얼른 자고 내일 봐용.”

키엘만 남겨둔 채 전부 벨라의 방을 쏜살같이 나가며 서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전 내일 깨우지 마세용.”

“저도 내일 늦게까지 잘 겁니다.”

***

벨라가 잠깐 눈을 떴을 때는 키엘이 옆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응?’

어째 키엘이 엄청나게 커 보였다. 벨라가 키엘의 얼굴에 손을 갖다 대자, 자신의 고양이 발이 제일 먼저 보였다.

‘와…. 나 진짜 온 힘을 다 써서 달려왔구나.’

벨라의 폭신폭신한 발 때문인지, 키엘이 눈을 슬며시 떴다.

아침 햇살에 눈이 부신 금발과 반짝이는 호박색 눈이 벨라를 보고 있었다.

이 얼굴에 벨라의 모든 게 다 녹아내렸다.

지난 보름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마이유를 찾느라 지쳤고.

프실리아 백작가에서 고생 아닌 고생을 하고.

마이유를 찾고 이곳까지 달려오느라 힘들었던 모든 것이.

키엘은 벨라를 꼭 안았다.

“아파요?”

그리고 그녀의 등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따뜻한 키엘의 손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이상하게 눈물이 고였다.

그때 기특하게도 키엘은 벨라의 이마에 천천히 입술을 갖다 댔다.

“호, 해줄게요.”

벨라는 키엘의 간지러운 숨결에 포근히 안겨, 조용히 잠에 빠져들었다.

소설이 어떻게 흘러가든 상관없이, 이대로 그냥 있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쌔근쌔근 고양이가 자는 소리만 방 안에 가득할 때, 키엘은 조용히 벨라를 꼭 안았다.

꽤 오래지도 않은 시간이었지만, 바보같이 없으니까 깨달았다.

이 시간이 너무나 행복하고 소중하다는 걸.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붙잡아 저택에서 영원토록 지내고 싶었다.

나쁜 말을 하지만 칭찬해주면 금세 우쭐대는 잔바르도.

가끔 등에 태우고 정원을 몇 바퀴씩 돌아주는 곰 푸르도,

가끔 알 수 없는 말을 하지만 자주 장난치는 이웨르도.

엄격한 듯 보이지만 친절하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쳐주는 젠킨스도 좋았다.

특히 벨라는….

키엘은 감히 그녀를 더 만져보지는 못하고 털끝에 자신의 손을 슬쩍 닿았다가 눈을 감았다.

* * *

벨라가 푹 자고 일어나자 어느덧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여전히 피곤은 가시질 않았지만, 눈 뜨자마자 키엘이 보이니 벨라가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아. 마이유 만나게 해야지.’

벨라는 서둘러 침대에서 뛰어내리면서 사람으로 변했다.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다.’

며칠 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한 데다가, 전날 밤에 뛰어왔더니 온몸이 찌뿌둥했다.

벨라는 하품을 한번 하고 옷장에서 갈아입을 옷을 꺼내 욕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자 그제야 피로가 날아가는 것 같았다.

“역시 집이 최고야.”

잠이 또다시 솔솔 찾아오려고 하자, 벨라는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렸다.

‘안 돼. 괜히 늦장 부리다가 또 실수할라.’

얼른 옷을 챙겨입고 방으로 다시 돌아갔다. 조금 전까지 자고 있던 키엘은 침대 위에 없었다.

벨라가 기지개를 한번 켜고 방을 나섰는데, 현관 쪽이 꽤 시끌벅적 이었다.

키엘이 푸르의 팔을 잡고 흔들고 있었다.

“아니에요! 어딘가 계실 거예요!”

“일단 서재에는 안 계시는데요.”

벨라는 자신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면서 천천히 현관으로 내려갔다.

“저기 얘들아….”

하지만 벨라의 말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키엘이 다시 마족들을 재촉했다.

“혹시 어제 온 건 진짜 검은 고양이였던 거 아냐?”

그 말에 푸르는 없어진 다크서클이 다시 생겨났다.

“아니에요! 아가씨가 들어오는 거 다 봤잖아요! 봤죠? 잔바르 님!”

“암. 봤지.”

“아니면 다시 나가신 거 아닐까용?”

이웨르의 마지막 말에 키엘이 눈물을 글썽였다.

“벨라 아팠는데… 또 나가?”

“아, 아니. 젠! 아가씨 좀 찾아봐용!”

“어디서 찾아요. 저택 안에 없다는데.”

야단법석인 가운데 벨라는 얼떨떨하게 그들을 불렀다.

“저… 얘들아, 너희 여기서 뭐 하니?”

벨라의 말이 이제 들렸는지 모두 내려오는 벨라에게 고개를 돌렸다.

키엘은 울면서 쪼르르 달려가 벨라에게 안겼다. 벨라는 멈칫하다가, 울고 있는 키엘의 등을 토닥였다.

‘이것들이 나 없는 동안….’

“야. 나 없는 동안 키엘 괴롭혔어?”

바로 악마들을 노려보면서 벨라가 이를 갈며 물었다.

“저희 안 괴롭혔어용!”

“잔바르 님은 좀 괴롭힌 거 같아요!”

“내가 언제!”

벨라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자, 젠킨스가 나서서 해명을 시작했다.

“도련님은 아가씨가 없어져서 걱정하느라 그런 거예요.”

벨라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을 하다가, 키엘에게 물었다.

“키엘, 정말이야?”

그러자 키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벨라를 쳐다봤다.

“벨라가 없어진 줄 알고….”

엄마를 찾는 아기새가 삐악삐악 우는 모습에 벨라는 괜스레 마음이 찡해졌다.

“걱정했어?”

키엘은 울먹거리면서 벨라의 품에 안겼다.

전생에서 가끔 언니가 ‘애 키우는 거 힘든데, 그래도 얼굴 보면 힘이 난다’고 했던 말이 이제야 새삼 공감이 되다니.

* * *

조금 쉬고 난 이후, 키엘과 도시 ‘일리노’로 가기 위해 마차를 준비했다.

“도대체 그때 어떻게 겁박했길래, 저희가 마차 한번 부숴 먹었는데도 선뜻 빌려주는지 신기합니다.”

젠킨스는 여관주인에게서 공수해 온 마차를 가지고 오면서 엄지를 척 올렸다.

“일부러 죽이려고 불량 마차 준 거 아니냐고 뭐라 했거든.”

“네?”

“한 번은 봐준다고 했어.”

벨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키엘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누가 마부 할래?”

“저요!”

적극적인 푸르가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곰은 빼고.”

잔바르와 젠킨스가 동시에 손을 들자, 이번에도 이웨르가 따라붙었다.

“우리 둘은 한 몸이니깡!”

“제발 좀 붙지 마세요. 찰싹 달라붙을 필요까진 없잖아요.”

젠킨스는 이럴 때마다 너무 괴로운 얼굴로 이웨르의 얼굴을 밀어냈다.

‘안 그래도 젠킨스가 제일 일 많이 하는데… 상을 좀 줄까.’

벨라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이웨르에게 말했다.

“심장 도로 가져가. 안 내쫓을 테니까.”

그러자 이웨르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고, 젠킨스는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말입니까?”

“정말용?”

“응. 어차피 네 피로 약도 만들고 있으니, 이미 쓸모는 증명된 거잖아?”

이웨르는 신이 나서 곧바로 젠킨스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그의 가슴으로 손을 푹 하고 집어넣어 자신의 심장을 꺼냈다.

“예고는 하고 꺼내야지!”

벨라는 기겁을 하며 서둘러 옆에 앉은 키엘의 눈부터 가렸다.

‘와… 이 미친.’

보기 힘들 정도로 기괴한 장면이라 벨라도 바닥을 보며 초를 세었다.

‘진짜…. 나니까 버티는 거야.’

저런 악마들의 서슴지 않은 행동을 볼 때마다 속이 거북했다.

‘역시 꼭 원작대로 완결을 내야 해.’

이런 애들이랑 오천 년은 절대 못 살지.

“잔바르, 가자. 이웨르, 넌 그냥 집에서 약이나 만들고 있어.”

이렇게 말하는 벨라도 어째 마피아 같아서 기분이 그다지 유쾌하진 않았다.

* * *

도시 일리노.

늦게 도착한 그들은 하룻밤을 여관에서 묵고 아침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밥부터 챙겨 먹었다.

마이유를 만나야 했기에 키엘을 조금 평범하게 옷 입힌 것 말고는 늘 똑같은 시작이었다.

“여관에서 밥 먹는 건 오랜만이네.”

처음 키엘을 봤을 때도 이런 여관에서 식사했었는데.

벌써 3년이 지났다.

포크질도 못 하고, 말도 제대로 못 했던 키엘이 이젠 제법 열한 살답게 행동하는 것 같아 뿌듯했다.

물론 가끔은 너무 조숙하다는 생각도 했지만.

‘아무래도 너무 저택에만 있었나 봐. 자주 도시로 놀러 오고 그래야지.’

그때 벨라의 눈에 여관에 붙어 있는 포스터가 도드라지게 보였다.

여자와 남자가 서로 대립하는 구조로 검을 들고 있는 포스터였다.

[천하제일 가을 무술대회]

[상금 1등: 20골드 / 2등: 10골드 / 3등: 5골드]

‘20골드면 꽤 상금이 크네.’

그 옆에도 다른 포스터들이 있었다.

[일리노 여름 축제]

[봄꽃 맞이 맥주 무제한]

뭔 놈의 포스터들이 계절별로 붙어있는 건지.

“저 포스터들은 도대체 언제 거야?”

젠킨스는 벨라가 가리킨 곳을 슬쩍 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귀찮은 거겠죠. 어차피 해마다 하는 건데.”

“내년에 여름 축제 하면 같이 올까?”

“뭐, 수도의 여름 축제만큼 크진 않겠지만 나름 재밌긴 할 거예요.”

그리고 젠킨스는 무술대회 포스터를 보며 넌지시 벨라에게 물었다.

“도시에 온 김에 검술을 제.대.로 가르쳐줄 선생을 구해보는 건 어떨까요?”

“왜?”

“왜라뇨. 도련님을 주먹구구식으로 가르칠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 휘두르기만 시킬 거예요?”

“음….”

“곧 대련도 해야 할 텐데, 훌륭한 선생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글쎄. 근데 구해질까.”

회의적인 벨라의 말에 젠킨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벨라는 냉정하게 판단했다.

“생각해 봐. 우리가 공식적인 직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보기엔 그저 평민인데, 누가 가르치려 들겠어?”

벨라는 팔짱을 끼고 아침을 먹고 있는 키엘을 봤다.

‘얼굴만 봐도 황태자 티가 철철 흐르는데.’

아무리 평범하게 입어도 말이다.

“혹시 모르니까 구해보겠습니다.”

“뭐, 그래 보던가.”

젠킨스는 여유롭게 물 마시는 벨라가 야속하게만 보였다.

‘설마 이대로 나한테 계속 맡길 건 아니겠지.’

잠시 후 벨라는 여관에서 구매한 빵을 가지고 나가 마이유가 있던 곳으로 걸어갔다.

“아가씨, 방금 밥 먹었는데 또 드시게요?”

“뭐래, 내가 먹을 거 아냐.”

벨라는 큰 바게트를 키엘에게 건넸다.

“도련님도 아침은 많이 드신 거 같은데.”

“젠킨스, 내가 오랜만에 이 말 하는 거 같은데.”

“네.”

“난 내 일에 토다는 게 제일 싫어.”

“…….”

벨라는 키엘의 손을 잡고 전에 봤던 마이유를 찾았다.

마이유는 그날과 똑같은 자리에 앉아 똑같이 구걸하고 있었다.

드디어 이 소설의 기반을 닦는 순간이었다.

“키엘, 저기 저 앉아있는 갈색 머리 여자애 보이지?”

“네.”

“쟤한테 이거 나눠주고 올래?”

키엘은 난데없는 요청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애초에 이곳에 온 것부터 조금 이상했었다. 이곳은 그가 오래전에 구걸하던 도시였으니까.

“갑자기 왜요?”

“음…. 친구 하라고.”

그때 젠킨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벨라의 말에 동의했다.

“하긴. 도련님도 인간이니까, 인간들과 어울리는 법도 좀 배워야죠.”

“자, 이거 저 친구한테 갖다주고 와.”

하지만 키엘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머뭇거렸다.

굳이 인간들과 어울리는 법을 알 필요는 없었다. 떠돌이 생활을 할 때도, 혼자 지냈었는데.

“저… 저기 가기 싫어요.”

게다가 벨라가 가리킨 곳은 그가 무료로 배급하는 급식을 기다리던 곳이었다.

벨라가 키엘을 마주하고 상냥하게 말했다.

“저 친구가 나중에 키엘이 살아갈 때 큰 도움을 줄 거야.”

“그걸 벨라가 어떻게 알아요?”

“동물왕국 공주님은 아는 게 많아요.”

“…거짓말.”

그녀는 웃음을 지우지 않고 조심스레 키엘의 머리를 ‘콩‘하고 아프지 않게 툭 때렸다.

“저 친구랑 인사하기 전에는 집에 안 돌아갈 거야.”

소설의 완성을 위한 벨라의 마음은 단호했다.

키엘은 벨라의 등쌀에 못 이겨 마이유에게로 천천히 걸었지만 불편한 마음을 얼굴에서 감출 수가 없었다.

한 걸음씩 내딛는 시간은 마치 지옥으로 끌려가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키엘은 슬쩍 멀리 서 있는 벨라를 돌아봤다.

‘장차 도움이 된다고?’

오늘 벨라의 행동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때때로 의문스러웠다.

키엘의 생일도, 그가 후에 배워야 할 것들을 지금 배우는 것도.

이 모든 게 그저 우연의 일치라는 게 말이 될까?

뒤에서 자신의 마음은 알지도 못한 채 해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다시 뒤돌아서서 갈색 머리의 소녀에게 다가갔다.

마이유도 키엘이 다가오자 마치 자기 자리를 뺏기기라도 한 듯 으르렁거리는 얼굴로 쳐다봤다.

키엘은 하는 수 없이 손에 들고 있던 빵을 마이유에게 던졌다.

벨라가 원하니까.

“먹던가.”

하지만 벨라가 상냥하게 얘기하라곤 안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