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가 죽여야 할 최종 악녀가 저랍니다-2화 (2/25)

2

드디어 여관에서 벗어나 저택으로 이사하게 되던 날이었다.

그들에게는 짐이랄 게 없어서, 필요한 가구가 들어섰을 때 몸만 옮기면 이사가 끝이었다.

저택은 1층에 방이 4개, 2층에 방이 4개 있었다.

홀에 있는 커다란 계단을 올라가서 오른쪽과 왼쪽에 방이 나란히 4개가 대칭을 이루듯이 있었고, 1층도 마찬가지였다.

벨라는 2층의 키엘의 방문을 열었다.

“여기가 이제 네 방이야.”

키엘은 황궁에서 지냈던 방을 제외하곤 제 방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꽤 크게 나 있는 창문부터 눈이 돌아갔다.

‘창살은 없네.’

벨라는 침대밖에 없는 방이 휑해 보여서 민망했다.

“옷장이랑 책상 같은 건 조만간 올 거야. 여기가 시골이라 몇 개 없어서 주문해놨거든.”

그녀는 키엘을 침대까지 데리고 가서 그를 천천히 눕혔다.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 알겠지?”

이불을 끌어당겨 그에게 덮어주고, 이불 위를 손으로 토닥토닥 두드렸다.

“건너편 방이 내 방이니까,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지 와. 알았지?”

얼떨떨하게 잠자리에 누운 모습마저도 귀여워 보였다.

‘뭘 그렇게 눈치를 보니.’

벨라는 키엘을 재우고, 곧바로 잔바르와 함께 저택의 지하실로 향했다.

“역시 딱 좋네.”

어둡고 축축하긴 했지만, 마법을 사용하기에는 딱 좋은 공간이었다.

저택은 생각보다 컸다. 방이 8개라 하나는 벨라의 서재로 쓰고 나머지 방을 각자 쓴다고 해도 4개가 남았다.

관리할 인원은 잔바르로 부족했다.

‘일단 관리 자체도 안될 테고.’

적어도 이곳에서 일하는 자들은 인간계에 대해 잘 아는 악마여야 했다.

“소환하시게요?”

“응. 인간계에서 놀고 있는 악마들 좀 불러보게.”

“그런 한심한 놈들을 왜…. 그럴 거면 마계에서 더 많이 데리고 오시지 그러셨습니까.”

인간계에 오래 있다 보면 자연스레 인간형으로 둔갑하는 악마들이 많았다.

‘바퀴벌레랑 오는 거보단 낫잖아.’

벨라가 발을 한번 들었다가 바닥으로 부딪히는 것만으로도 소환진이 완성되었다.

‘오글거리게 주문 같은 건 안 외워서 다행이네.’

이내 벨라가 눈을 감자 인간계 곳곳에 숨어 있는 악마들의 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희미한 악마의 형상이 보이자 벨라는 눈을 떴다.

바닥을 보고 있던 손바닥을 반 바퀴 돌려, 위로 향하게 하자 곧이어 사람의 모습을 한 악마가 소환진 위로 서서히 나타났다.

저택을 살 때 오지랖을 부렸던, 붉은 머리의 남자였다.

“오오. 여관에서 본 아가씨네. 황실 마법사였어?”

남자가 등장하자마자 잔바르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하지만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붉은 머리는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이건 마족 소환 진인데…. 어떻게 나를 소환하지?”

“어떻게긴. 전부 다 내 밑이니까 소환하지.”

“하하. 내가? 내가 아가씨 밑이라고?”

그때 잔바르가 유심히 지켜보다가 한마디를 던졌다.

“젠킨스…. 공주님, 왜 이 자를 불러오신 겁니까?”

“아는 사람이야?”

“아니요.”

벨라는 질문을 고쳤다.

“…아는 악마야?”

“아니요.”

불편한 기색을 감출 생각이 없는 듯 잔바르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공주님께서 태어나시기 200년 전에 마계에서 쫓겨난 반마족입니다. 젠킨스.”

반마족.

악마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나 멸시받는 존재.

가뜩이나 인간계에서 생활하는 악마들을 싫어하는데, 그 인간과의 결합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저 젠킨스라는 남자….’

어째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 보였다. 잔바르가 나타나자마자 입을 꾹 다물었다.

“너 내 밑에서 일할래?”

“네?”

“인간계를 잘 아는 시종이 필요하거든. 여기서 살았으면 도움이 될 거 같은데.”

대답은 젠킨스가 아닌 잔바르가 대신했다.

“안 됩니다. 돌려보내세요. 공주님.”

“너는 내 말에….”

벨라가 한껏 짜증을 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멍청한 소리만 해대던 지금까지와 달리, 대장군다운 모습으로 젠킨스를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젠킨스가 잔바르를 보면서 벨라에게 대답했다.

“하겠습니다.”

“도대체 인간을 왜 데리고 오고, 반마족까지!”

잔바르는 순식간에 표범으로 변하고 털을 곤두세웠다.

“차기 마왕이 이렇게 나약한 놈이라면….”

잔바르는 벨라에게 적의를 감추지 않고 이빨을 드러내 보였다.

‘뭐야, 무섭게.’

순간 벨라가 자신이 윗선이라는 것도 까먹을 정도였다.

“어차피 마왕 승계도 받지 못했는데, 후계야 다시 만들면 되겠….”

벨라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잔바르를 반으로 일단 잘라버렸다.

‘이거 맛들리면 안 될 거 같은데. 써는 맛이 있네.’

선대 마왕은 자신의 마력으로 벨라를 만들고 동면했다.

벨라가 성인이 되고 마왕의 모든 힘을 다 흡수하기 전에, 그가 깨어나서 벨라를 없애고 새로운 후계자를 만드는 건 쉬운 일이었다.

‘솔직히 그러면 나야 좋지만.’

죽게 되면 이 소설이 어떻게 흘러가든지 간에 다음 소설로 넘어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러면 키엘은…. 못 버티겠지?’

그를 지켜주는 유일한 무기가 없으니.

벨라가 난감하게 잔바르를 보는 동안, 그는 어느새 상하의를 붙이고 벨라에게 으르렁거렸다.

굳이 이해하고 싶지는 않지만, 악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인간의 편에 드는 것처럼 보이겠지.

벨라가 키엘을 데리고 키우겠다는 것부터가 이해가 되지 않을 테니. 그것도 소환된 곳에서 우연히 만난 아이를.

“흠. 내 원대한 계획을 알려줄게.”

그러니 그들의 처지에서 이해시키려면 하나밖에 없었다.

“저 아이를 이용해서 인간계를 내 손아귀에 둘 생각이야.”

거짓말을 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 벨라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급조한 거짓말이라 그런지, 젠킨스는 의심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다행히 잔바르의 눈에서 빛이 나며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그는 벨라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은 주군의 뜻대로.”

* * *

명백한 명분을 만들어주자 잔바르는 더는 불평하진 않았다.

“아니, 여기는 피가 아니라 물이라니까. 피로 할 일은 물로 좀 다 하라고!”

청소를 맡겼더니 다 엉망으로 해놓아서 그렇지.

그리고 의외로 젠킨스는 일을 잘했다.

‘역시 인간계 짬바가 있어서 그런가 봐.’

200년간 이곳에 있었다더니,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서 상황 판단을 하고 주방에서 요리부터 척척 내놓았다.

게다가.

“도련님, 일어나셨어요?”

키엘에게까지 깍듯이 대하고. 벨라는 팔짱을 낀 채 잔바르의 다리를 툭 치면서 말했다.

“잔바르, 봐. 저렇게 해야 한다고.”

“…….”

‘삐쳤네, 삐쳤어.’

이걸 또 달래줘야 하나 싶었던 찰나에 벨라의 눈에 수척해진 키엘의 모습이 보였다.

“키엘. 왜 그래? 어제 잠 못 잤어?”

“나약한 인간에, 반쪽짜리까지.”

잔바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갔다.

벨라는 뒤쫓아가서 그의 뒤통수라도 치고 싶었지만, 눈앞의 키엘이 더 신경 쓰였다.

“키엘, 어디 아파?”

분명 소설 속에는 키엘이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신성력으로 살아났다고 했다.

이 약하고 약한 몸이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버릴까 봐 걱정되었다.

하지만 키엘은 한참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밥 먹자. 잘 먹고 잘 커야지.”

키엘은 벨라의 눈치를 보는 것 같더니 조심스럽게 포크를 손에 들었다.

‘저번에 가르쳐준 대로 포크질은 잘하네.’

그때 젠킨스는 키엘의 손에 나이프를 쥐여주며 상냥하게 말했다.

“도련님, 그렇게 큰 건 나이프로 잘라서 드셔야 합니다.”

벨라는 젠킨스의 모습이 가정교사 같아 보였다.

‘쓸만하면 키엘의 교육을 맡겨야겠어.’

그게 사실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키엘이 소설 속에서 떠돌이 평민으로 살며 습득한 지식이나 깨우쳐야 하는 건 벨라가 알려줄 수 없는 부분이었기에.

“포크는 왼손에 집으시고요. 누가 이렇게 가르쳤는지, 원.”

벨라는 속으로 가운뎃손가락을 내밀었다.

* * *

어느 정도 저택의 일이 정리된 것 같자, 벨라는 다음 단계로 착수했다.

인간계에서 살기 위해 돈도 벌어야 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원작대로 소설을 완성해야지.’

그러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소설의 내용을 정리하는 게 중요했다.

벨라는 한가한 시간마다 아직 책이 몇 권만 꽂혀있는 서재에 들어가서 핸드폰을 켜고 소설 <알고 보니 황태자님>을 정리하려고 했다.

하지만….

“키엘, 마음 편하게 놀고 있어.”

키엘은 ‘벨라가 알고 있는 애들’에 비해 굉장히 얌전한 편이었지만, 오히려 그게 걱정이었다.

마음이 불편한 것인지, 아니면 놀 줄 모르는 건지.

얌전을 떠나서 아예 인형처럼 가만히 있는 게 키엘의 일상이었다.

그래서인지 몇 줄을 적다가 서재에 가만히 앉아 자신을 쳐다보는 키엘과 마주하면, 집중력이 금세 흐트러졌다.

“책…이라도 읽을래?”

그러면 키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서재에서 아무 책이나 꺼내 들었다. 벨라가 안심한 건 겨우 몇 분이었다.

‘글 읽을 줄 모르는구나.’

책을 거꾸로 들고 있으면서 읽는 척 한 장씩 넘기고 있었으니.

“키엘, 읽을 줄 몰라?”

그러자 키엘은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더니 책을 다시 거꾸로 들었다.

“어….”

많이 민망했는지, 얼굴을 그대로 책에 파묻고 벨라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게….”

벨라는 또 짠한 마음이 들어서 결국 의자에서 일어나 키엘의 옆에 앉았다.

“괜찮아. 누가 가르쳐 준 사람이 없으면 당연히 모르지.”

그리고 종이를 꺼내 키엘에게 글자를 하나씩 알려주었다.

“자 이건 ‘경찰’ 할 때 ‘ㄱ’이고….”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물론 발로 그린 잘 그리진 못했다.

“시옷은….”

벨라는 전생에서도 아이를 가르친 적이 없어서인지 적당한 예시를 찾는 게 어려웠다.

욕 아니면 생각나는 게 수갑밖에 없었다.

“시옷은 좀 있다 하자. 이응은 음식 할 때 ‘ㅇ’이야.”

세상에. 음식으로 예시를 들면 매우 쉬웠다. 거기다 동물왕국이니, 동물로 예시를 들어도 되었고.

“처음부터 다시 할게. ‘ㄱ‘은 김치… 아, 김치 없지. 기린 할 때 ‘ㄱ‘이야.”

설정상 똑똑하다고 하더니, 키엘은 한 번만 보고도 글을 어느 정도 쓸 줄 아는 것 같았다.

“키엘, 진짜 똑똑하네? 이걸 한 번 보고 다 외워?”

칭찬이 어색한지 키엘이 글자를 쓰던 손을 멈췄다. 하지만 벨라는 그럴수록 더 칭찬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완전 천재네! 대단해!”

하지만 벨라는 속으로 자화자찬에 빠져 있었다.

‘나 소질 있나 봐. 선생이 뛰어나니 그런 거 아니겠어?’

키엘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벨라의 옆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다행이다, 동물왕국 사람들은 단순한가 보네.’

키엘은 과거와 많이 다른 자신의 처지에 대해 수많은 생각을 했다.

10년의 시절을 한낱 꿈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의 머리가 너무 커버리고도 남았다.

8년 일생, 책을 읽어본 적도 없는데, 황궁에 들어간 후에 깨우친 글자가 눈에 보이는 걸 보면 당연하지.

황궁에서 자신을 찾기까지는 앞으로 8년이 남아 있었다.

‘또 그 지옥처럼 생활하고 싶지 않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황궁에서 갇혀 지내며 기초를 배웠던 나날을 떠올렸다.

키엘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싶었다.

‘배워둘 수 있는 건 빨리 배워두고 싶은데….’

그나마 책이 있는 공간은 벨라의 서재였기에 키엘은 조심스레 서재의 문을 열었다.

“책…이라도 읽을래?”

하지만 키엘이 원하는 종류의 책은 없었다. 대부분이 소설들이었다.

키엘은 읽는 척이라도 하려고 아무 책이나 꺼내 들고, 벨라를 관찰했다.

아무래도 이 저택의 실권자가 벨라인 것 같으니, 원하는 걸 얻으려면 벨라에게 잘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은 그가 생전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건이었다.

‘저건 뭔데 항상 들고 다니지.’

그저 까만 거 같은데, 뭔가 보이기라도 하는 건지 열심히 받아 적고 있는 모습이 신기해 보였다.

그것도 열 살이라고 하기에는 꽤 성숙한 눈빛으로.

아침 햇살이 그녀의 등 뒤로 내비칠 때면, 보이지 않는 하얀색 날개가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벨라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그에게 물었다.

“키엘, 읽을 줄 몰라?”

키엘은 그가 벨라를 관찰하고 있다는 게 들킬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내가 가르쳐줄게. 잘 봐 이건….”

그녀는 어느새 종이를 들고 옆으로 와 털썩하고 앉았다.

“시옷은 ‘사자’할 때 시옷이야. 사자가… 사자가, 이렇게 생겼지?”

벨라가 그린 사자의 갈기는, 사자보다는 양 같아 보였다.

“양 아니에요?”

“아니야. 양은… 이렇게 생겼어.”

발로 그려도 이보다는 잘 그렸을 듯. 그냥 털 뭉치에 눈코입을 붙여놓은 걸 보고 생각했다.

‘진짜 못 그리네….’

그래도 재밌는 그 그림에, 키엘은 난생처음으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 * *

벨라가 소설을 정리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일주일째. 아직 정리는 1/4도 하지 못했다.

낮 동안 정리를 하려고 해도, 혼자만의 시간이 생겼다 싶을 때면 키엘이 서재의 문을 두드렸으니까.

“… 이거 줄래요.”

들꽃을 꺾어와 수줍게 내미는 걸 보고 ‘두고 가’라고 매몰차게 말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나 주려고 꺾어온 거야?”

벨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키엘은 조용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물었다.

“책… 보고 싶은 거 봐도 돼요?”

“그럼, 그럼.”

하지만 벨라는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 있는 주인공의 일대기를 정리하는 게 어찌나 아이러니한지.

‘이러다가 소설 정리는 못 할 거 같은데….’

게다가 키엘은 호기심이 많은지 벨라에게 조심스레 물어보고 했다.

“그럼 곱하기는 여러 번 더하는 거예요?”

이런 쉬운 질문부터.

“잠 오는 약초랑 잠 깨는 약초랑 섞으면 어떻게 돼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질문까지.

“도대체 무슨 책을 읽으면 그런 질문이 나오는 거야?”

아직 사둔 거라곤 소설책밖에 없는데, 벨라는 의아했다.

그때마다 키엘은 읽던 책을 덮어버리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냥 옛날부터 궁금했었어요….”

대답해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특히 이곳의 역사나 지리에 대한 건, 벨라가 알 턱이 없었다.

“채, 책이라도 사줄까?”

그러자 키엘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계에 대한 지식은 넘치도록 있었지만, 인간계에 대한 건 아니었으니. 애초에 그녀의 역할이 인간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젠킨스에게 교육을 맡길까.’

밥도 맛있게 하고 반마족이라 인간성이 보이지만, 아직 그를 완전히 신뢰하진 않았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고.

‘이거도 정리해야 되는데….’

결국 낮에는 키엘에게 이것저것 가르쳐주며 밤에 소설을 분석하는 데 신경을 썼다.

어김없이 졸음과 싸워가며, 차가운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정신을 깨려고 노력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키엘의 하루가 지나가고 있고, 혹 키엘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을 놓치는 걸 수도 있으니까.

벨라가 자신의 두 볼을 꼬집으며 서재의 불을 끄지 않았던 그때였다. 창가 쪽으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젠킨스였다.

‘어디로 가는 거지?’

제발 여태까지 쌓아왔던 신의가 깨지질 않길 바라며 벨라는 조심스레 그의 뒤를 밟았다.

젠킨스가 향한 곳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정원의 작은 정자였다.

“그렇게 제가 싫으십니까?”

그가 말을 시작하자 벨라는 얼른 건물 모퉁이에 몸을 숨겼다.

“… 도대체 언제까지 여기 있을 생각이지?”

젠킨스가 대화하는 상대는 잔바르였다. 요 며칠 동안 잔바르는 젠킨스를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글쎄요. 공주님께서 내쫓으시기 전까지겠죠.”

“왜 계속 여기에 있는 거지?”

“왤까요?”

“난 네가 내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벨라는 저들의 대화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싫어하면 잔바르는 젠킨스를 쉽게 죽일 수도 있을 텐데.

“그렇다면 계속 여기 있어야겠군요.”

벨라의 눈에서 빛이 반짝였다.

‘내가 뽑기 하나는 잘했네.’

아무래도 젠킨스는 잔바르를 엿먹이기 위해 이곳에 남으려는 모양이었다.

이런 동기라도 있으면, 키엘을 맡겨도 별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다.

벨라는 일부러 인기척을 내면서 둘이 있는 곳으로 걸었다.

“거기서 뭐 하니?”

조금 어색한 인사와 함께.

“여기서 뭐 사랑싸움이라도 해?”

벨라는 말하면서도 스스로 엄청 꼰대 같다고 생각했다.

‘아우, 이게 다 계장님 때문이야.’

두 사람은 마치 들키지 말아야 할 걸 들켰다는 듯 얼굴이 새빨개지며 말문을 잃었다.

“무, 무슨 그런 망발을…!”

“흠흠. 어쨌든 젠킨스, 네가 인간계에 오래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키엘의 교육을 좀 담당해줬으면 해.”

“제가요?”

“잘하면 널 인간계 침공할 때 책사로 쓸 거야.”

젠킨스는 의외라는 듯 말문을 잃었다.

“반마족 따위를요?”

대부분은 저렇게 잔바르처럼 배척하기 바빴던 자신을 책사로 쓴다니.

“너보다 똑똑하잖아.”

다행히 키엘은 젠킨스와 공부하는 걸 싫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오히려 좋아하는 눈치였다.

‘은근히 자존심 상하네.’

그렇게 벨라는 시간을 갖고 소설을 제대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식사도 서재에서 하면서 꼼꼼하게 적어놓은 종이를 다시 분류해서 연도별로, 항목별로 정리했다.

원작대로 완결을 위해서.

‘노트 정리하면 나지.’

벨라는 경찰공무원 시험 준비하듯 소설 정리에 매진했다.

처음에는 어린 시절에 대한 설정만 찾으려고 했는데, 소설 속 키엘이 성인이 되고 난 이후로 알고 있는 모든 지식까지 따로 적어두었다.

그리고 젠킨스에게 하나씩 요청했다.

“젠킨스, 약초학도 가르칠 줄 알아?”

“네, 아가씨.”

키엘은 소설 속의 설정만큼, 꽤 똑똑한지 젠킨스는 가르치는 재미가 있을 정도라고 했다.

그런 얘기를 듣자,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지.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텐데… 미리 알아두면 좋으려나?’

“젠킨스, 궁중 예법 같은 거 좀 알아?”

“뭐, 조금은….”

“혹시 귀족들 관계도나 이런 것도 좀 알아?

“…….”

“미안, 나가 봐.”

뭐. 일단 이런 거로 충분하겠지.

그렇게 며칠 동안 게임으로 치면 ‘공략집’이나 다름없었던 정리가 끝났다.

“드디어 다 했다! 핵심 노트!”

마지막 글자를 쓰고 벨라는 하마터면 핸드폰을 집어 던질 뻔했다.

보기보다 철두철미한 벨라는 마법으로 똑같은 사본을 하나 더 만들고, 원본은 금고에 숨겨놓았다.

벨라는 오랜만에 서재를 벗어났다. 저택의 큰 홀은 며칠 사이에 좀 바뀐 거 같았다.

“뭐야. 이 커튼은?”

“주문했던 게 도착해서 달았습니다.”

“언제?”

“어제 말씀드렸는데요.”

벨라는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만지면서 젠킨스를 따라갔다.

‘내가 너무 서재에만 박혀 있었나?’

식당으로 들어가자 고급스러운 긴 테이블이 놓여있는 것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건 언제 온 거야?”

“이건 오늘 아침에요.”

그간 저택의 일에 너무 신경을 못 쓴 것 같아, 벨라는 구석구석을 둘러봤다.

변한 것도 많았고, 무엇보다 놀란 건 쓰레기통 안에 깨진 유리가 가득 있었다.

“…이건 뭐야?”

“아. 접시예요. 최근 자꾸 접시를 많이 깨서….”

보나 마나 잔바르겠지.

벨라는 잔바르가 처음 청소한다고 어디서 지나가는 산짐승을 잡아다가 그 피를 양동이에 받았던 게 떠올렸다.

‘하여튼 할 줄 아는 게 없다니까.’

서둘러 잔바르부터 찾았다. 청소하지 말고 다른 걸 시키든가 해야지.

“잔바르는 어디 있는 거야?”

“글쎄요.”

하지만 찾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쨍그랑, 하고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났기에.

벨라가 서둘러 달려가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서 잔바르가 깨진 화병을 키엘과 함께 치우고 있었다.

“키엘, 손으로 집으면 다쳐.”

벨라는 키엘이 다칠까 봐 그의 팔을 붙잡고 깨진 유리 더미에서 끌어냈다.

젠킨스가 빗자루를 들고 와 깨진 화병을 쓸어 담자 벨라는 혀를 차며 잔바르를 구박했다.

“어휴, 잔바르. 살림 다 박살 낼래? 뭐 할 줄 아는 게 없는 게 없냐.”

“저 꼬마가 깼습니다!”

“뭐래, 치졸하게 키엘에게 덮어씌우냐?”

잔바르가 투덜거리고, 키엘은 입술을 깨물고 벨라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레 사과했다.

“죄, 죄송해요.”

벨라는 서둘러 변명을 둘렀다.

“아냐. 화병이 왜 여기 있었대, 위험하게. 젠킨스!”

벨라는 젠킨스를 노려봤지만, 그는 빗자루를 유리로 쓸어 담으면서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도련님이 아가씨가 좋아할 거 같다고 여기 두자고 하던데요.”

벨라는 재빨리 잔바르 탓으로 돌렸다.

“아니, 얼마나 뭘 깨먹었으면 난 잔바르가 또 깬 줄 알았잖아.”

키엘은 울먹이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거도 저 꼬마가 그랬습니다만.”

벨라는 훌쩍이는 키엘의 양어깨를 잡고 그를 감쌌다.

“접시 이런 거 좀 깨먹어도 돼. 또 사면 되지. 안 그래, 젠킨스?”

“제가 깨도 그렇게 말씀하실 거죠?”

“너도 잔바르처럼 머리 깨지면 다시 붙니?”

“죄송합니다….”

벨라는 키엘과 눈높이를 맞췄다.

마음고생이라도 한 걸까. 처음 저택에 왔을 때보다 더 야윈 것 같아 보였다.

“다쳤어?”

게다가 키엘이 급하게 치우려고 했는지, 손끝에 살짝 피가 나고 있었다.

“호, 해줄게.”

벨라가 그의 손가락에 호, 하고 불어주고, 울먹이는 키엘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온도 차가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키엘은 처음부터 벨라에게 잘 보이려고 했었다. 아무래도 이곳의 실세니까.

그는 때때로 신성력이 없는 자신의 펜던트를 만지며 서재에서 골똘히 제 할 일을 하는 벨라를 몰래 보곤 했다.

‘…신성력 대신 저 사람을 보내준 걸까.’

의도치 않게 그가 원하는 것들을 손에 넣는 것이 이상했다.

소설책으로 가득 찬 서재에 그가 원하는 것들로 채워 넣을 수 있으면 그걸로 족했는데.

꽤 박식한 젠킨스라는 선생까지 붙었으니.

마치 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게다가 그리 노력하지 않아도 벨라가 자신을 예뻐하는 게 이상했다.

어떻게든 붙어있어야겠다는 일념으로 했던 선의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가는데.

어째서 자애로운 얼굴로 가까이 다가와서는.

“다쳤어? 호 해줄게.”

상냥한 숨으로 따뜻하게 데우는 건지.

* * *

벨라는 자신의 노트를 보며 나른하게 하품을 했다.

소설 속의 키엘은 어린 시절을 잘 기억하지 못했었다. 대부분이 오고 가는 대사에서 ‘여기를 와 본 적이 있다’ 정도였었다.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정도.

“애초에 굳이 어린 시절을 구구절절 쓸 필요는 없었겠지.”

로맨스 소설이니까.

단편적이고 중요한 사건들 몇 개만 경험하게 하면 로잔느와의 연애 생활에 지장을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뭐, 다행인 건가?”

키엘이 황궁에 가기 전까지 물 흐르듯 지내면 될 듯했다.

전생에서도 가져보지 못한, 최애와 함께 하는 여유롭고 긴 휴식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며칠 뒤.

벨라는 이상한 점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저택에 어떤 가구를 집어넣어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가시질 않길래, 인테리어를 좀 바꿔보려고 했는데.

“내가 이거 분명히 저기다 둔 거 같은데.”

어째 자꾸 가구 위치가 바뀌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제일 이상한 건 키엘이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갈수록 수척해 보이는 것 같았다.

“젠킨스. 키엘이 공부하는 거 힘들어해?”

“아뇨. 엄청나게 좋아하시는데요.”

문제가 뭘까.

“너희 내가 안 보는 사이에 키엘한테 일 시키고 그래?”

“그럴 리가요.”

벨라는 젠킨스가 식사 준비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의아했다.

다 평범한 재료에 평범한 음식들인데.

“너 혹시 키엘 밥에 따로 독이라도 타니?”

젠킨스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인상을 찡그리며 어처구니없어했다.

“제가 아무리 반은 악마라도 그런 짓은 안 합니다.”

젠킨스를 변호해주는 건지 조롱해주는 건지 잔바르도 덧붙였다.

“반쪽짜리니까 독도 못 타겠지.”

“잔바르 님은 독이 뭔지 구분도 못 하지 않나요?”

“먹어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식사 시간마다 잔바르가 전부 다 먹어보고 키엘을 먹게 해봤었다.

‘이상한데….’

왜 다 똑같이 밥도 먹는데, 키엘만 점점 초췌해져 가는 걸까.

“아가씨, 그렇게 쳐다보면 도련님이 식사를 못 할 거 같은데요.”

벨라는 키엘이 밥 먹는 걸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젠킨스의 만류에 시선을 돌렸다.

식사가 끝나고 잔바르가 설거지를 하려고 하자, 키엘이 서둘러 싱크대로 달려갔다.

“제, 제가 할래요.”

벨라는 키엘을 말리고 싶었지만 일단 지켜보며 젠킨스에게만 들리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키엘이 어딘가 불편해하는 거 같지?”

“아가씨가 아까처럼 쳐다보지만 않아도 편하게 지내실 거 같은데요.”

“티 많이 났어?”

“질문이라고 하신 거 아니죠?”

벨라는 저택에 가구 들어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소설 정리에만 빠져서, 키엘을 내버려 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아직 이곳 생활이 불안한 걸까. 설거지 같은 거 안 해도 되는데.

그때였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접시가 또 떨어져 와장창 깨진 게.

키엘은 당황했는지 두리번거리며 목소리를 떨었다.

“내… 내가 한 게 아니에요….”

잔바르가 천천히 손뼉을 치며 말했다.

“또 거짓말하네. 아주 파렴치한인 게 마음에 들어.”

잔바르는 비아냥거리는 것 같지만, 실로 흡족한 얼굴이었다.

키엘은 벨라와 눈이 마주치더니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죄, 죄송해요.”

벨라는 그저 조금 놀란 채 앞을 보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데?”

“이상하긴 하죠. 돕겠다고 할 때마다 이렇게 사고를 치시니.”

“아니. 잘 봐. 멍청이들아.”

벨라는 일어서서 키엘에게 다가갔다.

“내가 아까부터 계속 봤는데 키엘은 이렇게 뒤돌아서 있었어. 다 씻어 놓은 접시는 왼쪽에 있고.”

벨라가 간이 의자에 올라가 있는 키엘의 뒤편에 섰다. 그리고 그의 팔을 잡고 뒤로 던지는 시늉을 했다.

“키엘이 접시를 이렇게 뒤로 던지지 않는 한 저 바닥에 떨어질 리가 없지. 계속 앞만 보고 있었는데.”

벨라가 키엘의 허리를 양옆으로 잡고 그를 돌아 세웠다.

“그러니까 키엘이 잘못한 거 아니야.”

놀랬을 그를 달래기 위해 마주했는데. 키엘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있었다.

“…키엘?”

벨라는 얼떨결에 키엘을 안았다. 허리를 잡던 한 손은 그의 등을 토닥이고 다른 한 손으로 그의 뒤통수를 끌어당겼다.

“왜 그래?”

키엘은 벨라의 품에 안겨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저택에 온 첫날부터 그는 이곳에서 내쳐지는 악몽을 꿨었다.

그 후로도 여태 잘해보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주변에서는 사고가 끊이지 않았었다.

억울했지만 현장에는 그밖에 없었기에, 범인으로 몰려도 할 말이 없었는데.

“벨라는… 믿어주는 거예요?”

그 말을 들은 벨라는 분노가 단전에서부터 목 끝까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믿고-믿은 건 아니지만-맡겼더니.

“야! 너희 얼마나 애를 구박한 거야?”

“구박한 적 없습니다.”

“무죄추정의 원칙도 몰라?”

“그게 뭡니까.”

“키엘이 안 그랬다잖아. 혐의를 인정 안 했는데 다짜고짜 증거도 없이 애를 몰아가?”

키엘은 긴 숨을 내쉬며 벨라에게 더 파고들듯이 안겼다.

다정하고 자신의 편에 서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똑똑하기까지 하고.

마치 지난 10년의 인생이 잘못 설계라도 되어서, 다시 돌아와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벨라가 붉은 눈으로 잔바르와 젠킨스를 번갈아 가며 노려보았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애 얼굴이 반쪽이 됐잖아!”

“반쪽이 뭐 어때서….”

“그럼 저 꼬마가 아니면 접시가 어떻게 깨집니까?”

그녀는 조금 더 키엘을 세게 껴안았다.

“내가 봤을 땐….”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접시를 턱으로 가리켰다.

“저거 접시 아냐. 조사해 봐. 발 달렸어, 분명.”

* * *

벨라는 눈물짓는 키엘을 보며 깊은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소설 속에서도 키엘은 그리 속내를 얘기하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삼촌이 자기를 실험체로 팔았는데, 당연히 남들 눈치를 자주 보겠지.’

키엘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죄송하다’며 사과하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제 잘못도 아니면서….’

마음의 상처가 있는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그녀는 전생의 일을 떠올리면서 한참을 고민했다.

‘그래. 놀자. 놀아주자.’

즐겁고 좋은 일을 함께한다면, 이제 눈치 안 보고 편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자! 다들 정원으로 나와봐!”

그녀가 제일 먼저 생각한 건 공놀이였다. 마구 뛰면서 놀다 보면 기분도 좋아지고, 상쾌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자. 이걸 발로 차서 저기에 넣으면 되는 거야.”

하지만 벨라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잔바르. 손으로 잡으면 안 된다니까! 발로!”

잔바르는 룰도 모르면서 공을 양보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바꿔, 바꿔. 던지면 서로 받는 게임이야. 알았지?”

이번에도 잔바르가 문제였다. 공을 받는 젠킨스도 ‘헉’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던졌다.

결국 잔바르를 빼고 서로 공을 던졌는데….

이번에도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툭.

키엘은 공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다 맞고만 있었다.

‘키엘은 활동적인 거 별로 안 좋아하나 보네.’

맞고 공을 바라보기만 하는 키엘을 보며, 벨라는 목을 가다듬고 작전을 바꿨다.

“키엘! 내가 재밌는 거 보여줄까?”

키엘이 보고 있는 공을 다 주워주는 데 지친 젠킨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발 달린 접시라도 보여주시게요?”

“접시로 맞아본 적 있어?”

벨라는 목을 가다듬고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녀가 누군가. 차기 마왕이 될 후계자였다.

‘마법 같은 걸 보여주면 좋아하겠지?’

마계에 있으면서 벨라는 머릿속에 있는 마법들을 떠올렸다.

“아가씨 마법도 쓸 줄 아십니까? 계약하셨어요?”

“좀 조용히 해봐. 집중해야 하니까.”

마족은 인간과 계약을 해야만 마계의 마력을 끌어와 인간계에서 쓸 수 있었다.

마족들을 눈앞에 소환하는 것들은 애초에 마계의 마법이기에 손쉽게 했지만.

‘간단한 마법 정도는 괜찮겠지?’

꽃의 향기를 진하게 하는 마법 정도야 뭐. 제약이 따른다 해도 할 수 있겠지.

“예쁜 거 보여줄게.”

예쁘고 좋은 것들만 보다 보면 마음이 편해질 테니까.

벨라는 수많은 나비가 향기에 이끌려 날아와 아름답게 놀러 다니는 걸 상상하며 눈을 감았다.

손끝으로 공기가 휘감아지며, 주변의 나비들을 불러들이는 듯했는데….

“악! 이게 뭐야!”

나비를 생각했는데, 날아오는 건 웬 벌떼였다.

“꺅! 키엘, 피해! 피해!”

마계의 공주답게 마법의 결과도 어찌 이리 음침한 것인지.

그날 밤, 벨라는 조금 의기소침하게 침대에 옆으로 누워 머리카락을 꼼지락거렸다.

‘난 보육에는 꽝인가 보다.’

또 계장님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김홍연.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지!”

이번에는 신중하게 생각한 건데. 벨라가 ‘인형놀이’를 할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 똑똑

그녀는 일어서서 별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복도의 조명에 금발의 머리가 반짝이는 키엘이 자기 몸만 한 베개를 꼭 안고 서 있었다.

그는 잠옷이 큰지 소매에 가려 보이지 않는 손으로 베개를 꽉 쥐고, 얼굴을 살짝 붉힌 채 고개를 숙였다.

“가… 같이 자도 돼요?”

원작대로 죽이기 전에 심쿵사로 죽일 작전이니.

“그럼 네 방에 갈까?”

키엘은 조금 망설이는 것 같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함께 키엘의 방으로 갔고, 키엘은 문을 열자마자 침대로 올라가 부끄러운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가 소질이 있나 봐.’

오늘 온종일 재밌게 놀아줘서 키엘이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하고 벨라는 뿌듯했다.

“내가 재밌는 얘기 해줄까?”

벨라는 키엘의 옆에 누워 손을 잡고 옛날얘기를 시작했다.

재밌는 이야기가 아니라 지루한 이야기였는지, 끝나지도 않았는데 키엘이 어느새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잘 자네.’

속눈썹 하나하나가 길고 예쁘게 자리 잡은 모습을 보며 벨라도 스르르 잠이 들었다.

밤이 점점 깊어지자 벨라는 차가운 얼음 바닥 위에 있는 것만 같았다.

“으음… 추워.”

그녀는 뒤척이다가 어디선가 불어오는 찬바람에 잠투정을 해댔다.

벨라는 옆에 있는 키엘을 따뜻하게 해주려고 손으로 더듬더듬 키엘을 찾았다.

‘…키엘?’

어째 기분이 묘해서 벨라는 실눈을 떴을 때.

벨라는 키엘을 보고 심장이 두 번째로 멎는 줄 알았다.

벨라는 키엘을 보자마자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는 눈을 꼭 감은 채로 움츠려서 떨고 있었다. 그리고 검은색의 움직이는 뭔가가 키엘의 목을 감싸고 있었다.

‘…설마.’

천장에서 들려오는 낯선 소리에 벨라는 눈을 돌려 소리의 근원을 보았다.

“어차피 버려질 거야….”

그곳에는 눈이 검게 파인 여자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려 키엘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뭔… 로맨스 소설에 귀신이 튀어나와?’

어쩐지 집값이 싸더라니. 귀신 나오는 집일 줄이야.

키엘은 식은땀을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난생처음 보는 거라 잠시 당황했지만, 벨라는 금방 이성이 돌아왔다.

‘이것들이 잠을 못 자게 한 거구나.’

이성이 돌아온 건 딱 이 생각까지였다.

그 후로는 오히려 끊어졌다.

“야!”

벨라는 키엘을 감싸고 있던 귀신의 머리채를 잡아서 끌어당겼다.

그녀의 외마디가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가고 저택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쿨럭.”

키엘의 목을 죄던 머리카락이 풀리자, 그는 살며시 눈을 뜨고 힘겹게 벨라를 밀어냈다.

“도… 도망가요.”

벨라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요 며칠간 밤을 새워서 고생한 것도, 결국 원작대로 완결 내기 위한 노력이었는데.

감히 귀신 같은 게 들어와서 남주를 못살게 괴롭혔다니.

그것도 악마들이 사는 집에!

눈치도 없이!

벨라가 귀신의 머리채를 그대로 투포환 던지듯이 던져버리자, 창문을 뚫고 정원까지 데굴데굴 굴러갔다.

‘죽여버릴 거야.’

이미 귀신은 죽은 존재였지만 벨라는 그런 오류를 생각하지 못했다.

2층의 키엘의 방에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을 뛰어넘어 정원에 발을 닿았다.

벨라는 진득한 피를 흘리며 기어가는 귀신의 발목을 눌렀다.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와?”

“나… 나는 원래 여기 있었다!”

귀신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변명해댔다.

“그럼 나가야지!”

온 땅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뒤져서 뵈는 게 없냐? 귀신 주제에 악마가 사는 곳에 와서….”

악마라니. 며칠간, 이 여자애는 숱 많은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채 서재에서 밤을 새우곤 했었다. 어느 악마가 그렇게 인간처럼 군단 말인지.

하지만 그녀의 질식할 것 같은 분노에, 안 그래도 핏기없는 귀신의 얼굴이 점점 더 창백해졌다.

“감히 우리 키엘을 건드려? 네까짓 게?”

“여… 여긴 내 집이었다고!”

벨라의 손톱이 점점 길어지고, 그녀의 두 눈은 점점 더 짙게 붉은빛으로 변했다.

귀신도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는 듯,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벨라와 자신을 동그랗게 감쌌다.

“쥐새끼처럼 숨어서는….”

하지만 벨라는 귀신의 행보가 그리 무섭지는 않았다.

전생에서도 귀신보다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 생각했기에.

“안 낸 월세만큼 처맞을 줄 알아!”

* * *

한편, 창문이 깨지는 소리를 듣고 젠킨스와 잔바르가 2층의 방문을 열었다.

“도련님, 도대체….”

키엘은 깨진 창문 앞에 서서 정원을 초조하게 보고 있었다.

“저… 저게 뭐예요?”

젠킨스는 키엘에게 다가가 그가 바라보는 정원을 봤다.

“어쩐지 터가 안 좋을 거 같더니. 귀신 사는 집이었나 보네요.”

“귀신이 뭐야…. 혹시 벨라가 죽으면 어떡해요…?”

“네? 아가씨가요?”

젠킨스는 조금 기가 찼다. 차기 마왕답게 온 살기가 집 안 곳곳을 누비고 있는데. 게다가 벨라가 귀신을 밟고 있는데.

‘저걸 보고도 아가씨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다니.’

젠킨스는 키엘을 안아 들고 정원으로 사뿐히 뛰었다.

* * *

키엘의 악몽은 저택으로 처음 이사 온 날부터 시작되었었다.

한밤에 온몸을 짓누르던 힘과 살을 베는 것 같은 추위에 눈을 뜨자, 무서운 여자가 키엘을 보고 있었다.

“어린데도 어떻게 이런 냄새가 나지?”

여자는 창가에 서 있더니 점점 키엘에게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외로운 냄새가 나. 버려진 삶의 냄새.”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다가오는 여자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너도 혼자구나.”

키엘은 귀신을 본 적이 없어서, 그저 악몽인 줄 알았다.

“내 말 들리니? 넌 또 버려질 거야.”

꿈은 현실을 반영한다고 했던가. 그는 왜 그런 꿈을 꾸는지 잘 알고 있었다.

혹시나 버려질까 봐 두려운 현실이 반영된 게 분명했다.

오래전부터 힘들 때마다 악몽을 자주 꾼 터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채 아침을 맞이했었다.

‘여기에서 입지를 넓혀야 해.’

저택에서의 생활은 키엘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벨라가 그에게 글을 가르쳐주다가, 후에는 젠킨스가 제대로 가르쳐주기 시작했으니까.

그럼에도 악몽은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마음이 약해서 그래.’

귀신은 불안한 키엘의 약한 곳을 점점 더 파고 들어갔다.

키엘의 숨을 조이면서, 실눈을 뜬 그에게 찐득한 붉은색으로 가득 찬 방을 보여주고.

그가 길거리에서 생활할 때 만났던 친구들의 얼굴로 변해서 웃었다.

“남의 생명을 먹으며 살아왔었구나.”

그놈의 신성력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길 때마다 늘 함께하던 친구들은 다 죽고 그만 살아남았었다.

“또 너 혼자만 살아남았네?”

친구들의 시신 사이에서 울며 겨우 도망을 쳤지만, 그 때문에 어떤 누구도 키엘과 함께하려고 하지 않았었다.

키엘은 고개를 저으며 눈을 꼭 감고 이겨내려고 했다.

‘내가 약해서 이런 꿈을 꾸는 거야….’

또다시 아침이 되고 밤새 그를 괴롭히던 목소리가 사라지면 그는 불안한 마음으로 일손을 도왔다.

하지만 유독 키엘이 혼자 있을 때마다, 뭔가가 깨지고 부서지는 일들이 잦았다.

“도련님, 그냥 아무것도 안 건드리시면 안 될까요.”

“내… 내가 깬 거 아니야.”

“예예.”

키엘은 혼자 살아남을 때마다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혹시 네가 걔들을 다 죽인 거 아냐? 이상하잖아! 너만 살아남는 게!”

그때도 지금도.

억울하지만 오해를 풀 방법이 딱히 없었다.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지 와. 알았지?”

‘얘기해도 될까…. 그 이상한 꿈….’

벨라는 어느 순간부터 서재에 박혀 얼굴을 내비친 적도 없었다.

‘믿어줄까…?’

고민 끝에 결국 키엘은 그저 고개만 저었다.

‘이건 내가 안고 가야 할 문제야.’

그 후로도 키엘은 밤마다 그 무서운 환영과 속삭임에 시달려야 했다.

“너도 나처럼 환영받지 못한 존잰데?”

“아니야….”

“나랑 가자. 어차피 넌 버려질 거야.”

이러다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버틸 수 있는 만큼.

딱 하루만 더. 딱 하루씩만 더 살고 싶었다.

어쩌면 내일은 행복할지도 모르니까.

* * *

정원으로 내려간 키엘이 벨라에게로 뛰어갔다.

그저 악몽인 줄로만 알았다.

마음이 나약해서 그런 꿈을 꾸는 거라고.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에게 일어난 일을 보여줬기에.

벨라와 함께 잠들면, 스스로 마음이 편해지면, 이제는 악몽은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귀신이라니. 그게 뭔지 몰라도, 그에게만 보이는 건 아니었다.

‘설마… 저게 벨라에게 내 얘기를 하진 않겠지?’

혹여나 벨라가 그 얘기를 듣고 삼촌처럼 불길하다고 키엘을 내쳐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는 벨라가 위험한 와중에도, 자신이 쫓겨날 걸 걱정하는 자신이 간사하게만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본 잔바르는 더 불길한 미래가 예상되었다.

‘저러다 저 꼬마가 죽을 텐데.’

이해되진 않지만 벨라가 꽤 공을 들이는 꼬마였다. 잔바르는 불안한 마음으로 내려가 키엘을 잡으려 했다.

그때 그런 잔바르를 막아선 건 젠킨스였다.

“잠시만요. 잔바르 님.”

“너….”

잔바르는 그대로 멈춰 젠킨스를 바라봤다. 젠킨스는 인상을 찡그렸지만, 믿는 구석이 있는 것만 같았다.

키엘은 귀신이 머리카락으로 만들어놓은 동그란 구체를 손으로 뜯어내기 시작했다.

“안 돼….”

겨우 틈을 벌리고 귀신과 벨라 사이로 키엘의 팔이 들어갔다.

동그란 움집처럼 머리카락으로 감싼 귀신의 보금자리는, 귀신에게는 최후의 발악이었지만 벨라에게는 사각지대였었다.

벨라는 정신없이 귀신을 패다가 키엘의 작은 팔을 보고 겨우 이성이 돌아왔다.

벨라가 가차 없이 귀신이 만들어놓은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리자, 그 밖에서 키엘이 울고 있는 게 보였다.

“어… 키엘?”

그는 벨라에게 달려와 그녀에게 안겼다. 예전처럼 또 자기만 살아남는 악몽이 현실로 나타날 것만 같았다.

“하루만 더 있고 싶었어요…. 모르는 척하고 싶었어.”

“…….”

“미안해요….”

벨라는 사실 무슨 소린지 도통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아직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너무 애처롭게 느껴졌다.

“저 귀신이 너 계속 괴롭혔어?”

키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 있으면 얘기하라니까.”

“그러다가 벨라가….”

그는 말을 다 하지 못한 채 눈물을 삼켰다. 자신을 버릴까 봐 말하지 못했다는 말이 너무 비참하게 느껴졌다.

“나 다칠까 봐 걱정하는 거야?”

“…….”

“내가 저 귀신보다 훨씬 센데? 동물왕국의 공주님은 엄청나게 세다고.”

벨라는 손으로 키엘의 뒤를 가리켰다.

“저거 봐. 쟤 겁먹어서 도망가잖아.”

키엘은 천천히 뒤를 돌아 귀신을 쳐다봤다. 그를 괴롭히던 악몽의 실체는, 꼴사납게 도망치고 있었다.

“무서웠겠네.”

벨라는 자신의 품에 있는 키엘의 등을 천천히 토닥이며 달래주었다.

“잔바르, 뭐 하니. 저 새끼 도망간다.”

멍하게 벨라를 보던 잔바르가 귀신을 잡으러 뒤쫓아갔다.

따뜻한 손길이, 상냥한 목소리가 길고 긴 악몽을 끝내며 키엘은 녹아들듯이 눈을 감고 단잠에 빠져들었다.

“아가씨, 제가 데리고 갈게요.”

눈치 빠른 젠킨스가 벨라의 옆에 와서 키엘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저… 아가씨, 도련님 방에 갈까요?”

“그럼 어디가?”

“도련님 방에 창문이 깨졌는데….”

벨라는 정원에서 창문이 깨진 키엘의 방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귀신 놈이 깬 거야?”

“글쎄요.”

“당분간 내 방에서 같이 자야겠네.”

젠킨스가 키엘을 벨라의 침대에 눕히자, 벨라가 이불을 목 끝까지 올려주었다.

그리고 들리지 않았을 테지만 벨라는 키엘에게 ‘잘자’라며 예쁜 미소를 지었다.

젠킨스는 아무리 봐도 이 둘 사이가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마계의 공주.

처음에 이곳에 소환당하고 그녀가 공주라는 걸 알았을 때는 어떤 마족들보다도 더 악랄할 거라고 예상했었다.

몇백 년간 눈칫밥으로 살아온 인생이기에 벨라가 키엘을 끔찍이 아낀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다.

‘도대체 이 아이는 뭘까?’

잔바르에게 들은 말로 추리하면, 그저 소환되었을 때 만났던 아이라던데.

그때, 벨라의 방으로 잔바르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잡아 왔습니다.”

잔바르의 손에 들려 있는 귀신이 애달프게 울었다.

“사… 살려주세요.”

벨라가 빙긋 웃었다.

감히 우리 키엘을 괴롭힌 벌은 받아야지.

“너 이미 죽었어.”

귀신이 피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벨라는 싸늘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죽고 싶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고통스럽게 해주고 싶었다.

“제가 저택에 땅문서를 숨겨뒀어요!”

그 소리에 벨라는 동작을 멈췄다.

안 그래도 소설의 정리가 끝나는 대로 금전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했었다.

아끼며 살 수도 있었지만, 키엘 옷 사입히는 재미에 이미 들려버렸기에.

벨라는 귀신의 목만 잘라놓고 물었다.

“어디에?”

“그… 꼬마의 방에 비밀공간으로 내려가는 장치가 있어요.”

“그래? 안내해 봐.”

뜸 들이지 않고 조심스레 귀신이 알려준 비밀공간으로 향했다.

촛불을 켜자 그저 많이 낡은 책상 하나가 있는 곳이었다. 별 쓸데없어 보이는 약병들이 그 위에 가득했다.

“이게 설마 땅문서야?”

“아뇨, 이것들은 사랑의 묘약….”

벨라가 코웃음을 쳤다. 딱 봐도 효능은 하나도 없어 보이는 빈 병들이었다.

“몽마의 피 한 방울이 더 효력 있겠다.”

주위를 둘러보자 책상 위에 금고처럼 보이는 게 있었다.

“살려주시면 비밀번호를 알려 드릴게요.”

“뭐래.”

벨라는 스트레스 풀듯이 금고의 손잡이를 잡고 가볍게 뜯어냈다. 비밀번호로 목숨을 연명하려던 귀신이 없는 목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금고 안에는 서류 봉투가 몇 개 있었다. 먼지를 털어내고 내용을 천천히 확인했다.

인장도 확실하게 찍혀 있는 걸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사… 살려주시나요?”

“나 그런 약속한 적 없는데.”

“…….”

“잔바르, 얘 마계에 던져놔. 애들보고 공놀이나 하라 그래.”

잔바르는 벨라가 쓸데없이 정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젠킨스는 참 악독하다고 느꼈다.

* * *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고, 저택에서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잔바르는 키엘에게 이제는 건방지게 굴지 않았다.

- “앞으로 키엘 기죽이는 말 할 때마다 네 손톱을 하나씩 빼버릴 거야.”

벨라의 경고 때문만은 아니었다.

키엘의 순진무구한 질문 때문이었다.

“잔바르는 어떻게 그렇게 강해?”

잔바르는 정말 오랜만에 ‘칭찬’이란걸 들었다.

마계에 있을 때 대장군들은 서로 견제하기 바빴고, 인간계로 넘어와서도 늘 벨라에게 혼나기만 했었는데.

“왜, 꼬마. 너도 강해지고 싶다 이런 소리 하려고?”

그는 애써 기분 좋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비아냥거렸다.

“응. 잔바르처럼 되고 싶어.”

“하!”

처음에는 제풀에 지칠 거로 생각해서 키엘에게 이것저것 훈련을 시켰다.

키엘의 체력이 그만큼 따라가지는 않았지만, 꽤나 열심히 하는 모습에 잔바르도 사뭇 진지해졌다.

그러다 한 번씩 벨라가 ‘잔바르 데리고 오길 잘했네.’라는 소리를 하면, 없던 열정을 끌어모으며 훈련에 열중했다.

덕분에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올 때쯤 키엘의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젠킨스도 꽤 열심히 키엘의 교육에 신경 썼다.

벨라가 소설 속에서 발췌한 ‘기본상식’을 바탕으로 나름의 커리큘럼까지 짜면서.

“세상에, 이걸 키엘이 벌써 다 배웠다는 거야?”

“생각보다 영민하네요.”

“대충대충 하는 거 아냐?”

“질문하면 다 대답하시더라고요.”

벨라는 젠킨스의 눈치를 보며 서재에서 가지고 온 두꺼운 책을 내밀었다.

전쟁에서 이기는 전술에 관해 기록해놓은 책이었다.

“그럼 그다음은 이걸로….”

“아가씨.”

“응?”

“정말 너무 하시는 거 아닙니까? 전 만능이 아니라고요.”

벨라는 살짝 다른 곳을 쳐다봤다. 사실 젠킨스가 요 몇 달간 고생하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잔바르 님만 아니었으면….”

“잔바르?”

“그게 아니라 제가 밥도 하고, 청소도 하고, 도련님도 가르치는데 몸이 하나라서 더는 무리예요. 저택도 넓은데.”

울상이 된 젠킨스 앞에서 벨라는 해맑게 웃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 새로 하녀를 불렀거든!”

“네?”

“안 그래도 젠이 힘들어하는 거 같길래 내가 마계에 연통을 넣어놨었지!”

젠킨스는 살짝 주춤거렸다.

“왜 저를 젠이라고….”

“자, 그러니 이건 미리 읽어놓도록 해.”

새로운 하녀는 가장 큰 변화였다.

“자, 소개할게. 동물왕국에서 나를 위해 열심히 달려온 푸르라고 해.”

인간계에서 생성된 소환진을 통해 넘어온 푸르는 밤낮 쉬지 않고 숲속을 달려 저택으로 겨우 도착했다.

“사실 오다가 죽을 줄 알았는데, 떡 하고 왔지 뭐야?”

그나마 다행인 건 푸르가 마계에 있을 때처럼 무서운 곰의 모습은 아니었다.

걸어 다니는 테디베어 같은 모습에 키엘이 신기한지 푸르의 털을 만져봤다.

“근데 그 옆에는 뭐야? 난 푸르만 오라고 한 거 같은데.”

그러자 푸르가 자신 있게 자신의 가슴을 쿵쿵 쳤다.

“제 친구예요! 인간계에 대해선 자기가 제일 잘 안다고 해서 데리고 왔어요!”

“안녕하세용! 상급 몽마 이웨르예용!”

벨라는 허름한 로브를 벗으며 인사하는 이웨르를 보자마자 키엘의 눈을 가렸다.

“…로브 다시 입어.”

파란색 머리의 이웨르는 헐벗은 거나 다름없는 속옷을 입고 있었다.

“넌 돌아가.”

“아잉, 공주님. 하녀 필요하지 않으세요? 우리 곰 발바닥보다는 내가 좀 더 잘하는데.”

벨라는 인상을 찡그렸다.

“응. 돌아가.”

“흠…. 그럼.”

이웨르는 맞은편에 있던 젠킨스에게 다가가더니 매우 빠른 손놀림으로 젠킨스의 가슴을 손으로 푹 찔렀다.

“뭐 하는 거야?”

“제 심장을 집어 넣었어용.”

젠킨스도 적잖이 놀란 모습이었다.

“이제 제가 곁에 없으면 이자는 죽을 거예용.”

벨라는 기가 차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금 너 내 앞에서 협박하니?”

“협박이라뇽. 저한테도 기회를 달라는거죵. 어차피 이 심장은 5년만 있으면 다시 제게 돌아오잖아용? 그전까지 공주님 마음에 안 들면 군말 않고 돌아갈게용.”

이웨르가 한 술식은 악마의 약속을 반대로 한 거였다.

보통은 인간의 심장을 악마가 가지고, 악마가 죽지 않기 위해 인간을 따라다닌다.

‘그걸 교묘하게 저렇게 쓰다니.’

인간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굴리는 몽마답게 제법 똑똑하게 굴었다.

“여기에 네가 좋아할 만한 거 하나도 없는데 왜 있고 싶다는 거야? 지금 돌아가는 게 더 내 마음에 들 거 같은데.”

그러자 이웨르는 씩 웃으면서 젠킨스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어머나, 공주님. 몽마들이 환장하는 게 여기 있는걸용.”

벨라는 키엘을 더 꼭 안으면서 생각했다.

지금 이 공간에서 제일 도움이 되는 게 반마족인 젠킨스였다.

‘그래.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원작을 따라가는 거니까.’

젠킨스마저 없다면, 이 공간에 곰과 표범이랑 같이 키엘을 잘 키워낼 자신이 없었다.

벨라는 그들 모두에게서 ‘절대로 키엘에게 마족이라는 걸 들켜서는 안 된다’는 복종의 서약을 받아냈다.

다행히 이웨르와 푸르는 마치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특히 키엘은 곰 인형 같은 푸르와 잘 지내는 것 같았다. 잘 어울렸지만 그렇다고 일을 잘하는 건 아니었다.

“푸르. 뭐 하니?”

푸르는 바닥에 물을 뿌리고 제 몸을 굴리고 있었다.

“내가 밀대 사줬잖아.”

“똑같은 털인데요!”

청소를 누가 그렇게 해.

“야! 그 더러운 꼴로 키엘 껴안지 마!”

“힝….”

이웨르는 젠킨스를 대신해서 식사 담당을 도맡았다.

“짠! 오늘은 화국에서만 먹는다는 케밥이랍니당!”

“세상에…. 젠킨스, 보고 배워.”

벨라는 젠킨스의 음식에 별다른 불만은 없었었다. 마계에서 먹으라고 내놓은 거에 비하면 사람이 먹을 만한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웨르의 요리는 그냥 맛집 그 자체였다.

이렇게 일을 잘하긴 하지만.

“물론 화국 남자들이 더 맛있긴 해용.”

때때로 어린이 두 명이 사는 집에 어울리진 않았다.

“일단 그을린 구릿빛 피부에 몸이 정말….”

“야. 그만해.”

겉으로 보기에는 새로운 하녀들이 가장 큰 변화였지만, 속으로 가장 큰 변화는 키엘에게 있었다.

그는 생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안락함을 누렸다.

귀신이 사라져서 악몽도 없고.

실컷 배우고 싶은 것들을 배울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날 이후로 벨라는 가끔 키엘의 방을 두드리며 찾아와서는 동화를 들려주곤 했다.

벨라가 목소리를 바꿔가며 연기하는 걸 보다 보면 키엘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으윽. 하고 사과를 먹고 쓰러졌어요.”

정말 독이 든 사과라도 먹은 듯한 표정에.

“빵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무섭게 호랑이를 흉내 낼 때는 역동적으로 잡아먹을 듯이 가까이 다가와서 키엘을 간지럽혔다.

“안 줘? 잡아먹어야겠다, 어흥!”

키엘은 벨라가 이렇게 장난을 치는 것도 좋았다.

“그래서 나중에 어떻게 돼요?”

“음… 그게.”

벨라는 눈을 살짝 올렸다.

“빵을 너무 많이 먹은 호랑이는… 호빵이 되었어….”

어설프게 마무리하는 것도 키엘의 눈에는 재밌어 보였다.

“또 다른 얘기 해주세요.”

“음… 그럼 저주에 걸린 개구리 왕자를 구해주는 공주님 얘기해줄까?”

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좋아하는 척했지만, 저 공주님과 왕자님 시리즈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항상 시련은 공주님이 다 겪고 왕자님은 마지막에 나타나서 숟가락만 올린다는 게 싫었고.

그 왕자님이랑 결혼해서 행복해지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너무 비현실적이야.’

보통 왕위계승자는 어릴 때부터 정략결혼이 정해져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차후 왕비가 될 사람을 신중하게 선별하고.

황태자가 될 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벨라가 사는 곳은 다른 건가?’

벨라는 손가락으로 개구리 모양을 하더니 입술을 오므려서 ‘쪽’하고 공중에 소리를 냈다.

“공주님은 개구리에게 뽀뽀했어요. 그러자 펑! 하고 연기가 나왔어요.”

“…….”

“저주가 풀리고 공주님은 개구리 왕자님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특히 이 대목들이 싫었다.

아무리 그래도, 단 한 번의 키스에서 이어지는 결혼이라니.

‘잠깐만. 그렇다면….’

키엘은 눈을 말똥말똥 뜨고 벨라의 옷자락을 잡았다.

단 한 번의 키스로 결혼이 이어지는 거라면.

‘난 지금 아이잖아.’

벨라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맑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왜?”

“궁금한 거 있어요.”

“응, 뭔데?”

“…뽀뽀가 뭐예요?”

벨라의 동공이 흔들렸다.

“어?”

“어떻게 하는 거예요?”

벨라는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짠한 마음이 들었다. 전생에 세 살배기 조카였던 시윤이도 ‘이모 뽀뽀!’하는데, 이걸 모른다고?

‘아니 살면서 엄마가 뽀뽀도 안 해줬나?’

벨라는 고민할 것도 없이 키엘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볼에 ‘쪽’ 하는 소리가 적막 가운데에서 민망할 정도로 크게 들렸다.

“이런 거야.”

여태 얼마나 힘들게 살았으면 이런 것도 몰랐을까.

“뽀뽀는… 공주님만 할 수 있어요?”

“뭐?”

“왕자님이랑 공주님만 할 수 있어요?”

그간 벨라가 읽어준 동화책의 내용은 대부분이 공주님과 왕자님 이야기이긴 했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미녀와 야수….

게다가 대부분 끝이 왕자님의 키스로 저주가 풀리거나 그런 내용이 주를 이뤘고.

“아니.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어.”

그때였다.

키엘은 벨라에게 가까이 가서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

벨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지고 사고가 멈춘 듯 딱딱하게 키엘을 보고 있었다.

그때 키엘이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

“…….”

“한테 하는 거라고 해서….”

이게 진짜 심쿵사구나.

이 맛에 소설에 빙의하는 거였어.

* * *

봄에 인간계에 왔는데 여름이 되자 정원에 심었던 꽃들이 만개하고, 가을이 되니 멀리 보이는 산이 단풍으로 물들고, 겨울에는 새하얀 눈으로 덮어 쌓였다.

어느덧 사계를 경험하고 소소한 일상들이 흘러가, 또 한 번의 가을이 되어 먼 산이 붉은색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메이드 복을 갖춰 입은 이웨르가 자신 있게 말했다.

“짠! 오랜만에 솜씨를 발휘해봤어요!”

식당에는 진수성찬이 펼쳐져 있었다. 모두 앉으면서 전에 없이 많아진 가짓수에 놀라 두리번거렸다.

잔바르는 갖가지 음식들 앞에서 투덜거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흥. 왜 꼭 이렇게 번거롭게 먹는 건지, 원.”

“오늘 무슨 날인가요?”

“오늘 도련님 생일이래용!”

키엘은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양, 도련님도 몰랐어?”

소설 속에서 키엘은 자신의 생일이 언젠지 몰랐다. 가을에 태어났다는 것만 아는 그는 그저 여름이 지나면 한 살씩 나이를 더했었다.

하지만 자신이 황태자라는 걸 알게 된 날.

다시 태어나는 의미에서 그날을 생일로 지정했었다.

11월 10일.

어차피 이날을 생일로 지정할 텐데, 미리 챙겨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했다.

“자, 오늘이 바로 키엘의 열 번째 생일이야.”

벨라가 손가락으로 지시하자 푸르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고깔모자를 모두에게 나눠줬다.

“어머, 이런 거 좋아!”

악마 사형제 중 고깔모자가 제일 잘 어울리는 건 곰 인형 같은 푸르였다.

벨라는 종이로 만든 왕관을 직접 키엘의 머리에 씌워줬다.

“우리 키엘은 생일의 주인공이니까 왕관 씌워줄게!”

그리고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따라 부르지 않고 쳐다보고 있었다.

벨라는 노래를 멈추고 목을 가다듬었다.

“얘들아, 노래 안 부르니?”

악마 사형제가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네가 말해’라며 서로에게 대답을 미루는 중이었다.

결국 반마족인 젠킨스가 짧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라서요.”

다음 해 생일은 노래 먼저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고, 옆에 앉아있는 키엘에게 케이크를 내밀었다.

“자, 키엘. 소원 있어? 다 들어줄게.”

밝게 웃고 있는 벨라와 달리, 키엘은 여태 평화로웠던 그의 일상에 금이 가는 것만 같았다.

‘…벨라가 어떻게 내 생일을 알지?’

하지만 이 질문은 곧 키엘이 10년이란 시간을 되돌아왔다는 설명이 먼저였다.

그가 알고 보니 열여덟 살이었었다는 걸 벨라가 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젠장….’

지난번에 순수한 척하며 뽀뽀가 뭔지 물어봤던 게 제일 마음에 걸렸다.

키엘이 망설이는 사이에 푸르가 제일 먼저 말했다.

“전 오랜만에 사냥하고 싶어요!”

푸르를 시작으로 이웨르도 덩달아 손을 들었다.

“전 도시에 가서 남자들의 정기를….”

“그럼 그 녀석을 내가 먹어도 되나?”

“정기 빠진 인간들은 맛없을 텐데 괜찮아용?”

벨라는 키엘의 귀를 두 손으로 막고 악마들을 노려봤다. 그러자 젠킨스가 흥분한 악마들을 진정시켰다.

“소원은 생일 주인공이 비는 거예요.”

“나도 주인공 할래요! 그런데 생일이 뭐예요?”

날짜 감각이 없는 악마들은 생일 같은 걸 챙기지 않았었다.

벨라는 소리 지르고 싶은 걸 최대한 참으며 대답했다.

“응.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거야.”

“인간들은 별의별 걸 다 기념하는군요.”

벨라는 화내는 대신 잔바르의 상체를 반으로 잘랐다.

“잔바르 님은 재생이 빨라서 재밌네용. 저나 푸르는 잘리면 3일은 걸릴 텐데.”

“그러게 왜 자꾸 아가씨를 건드십니까, 잔바르 님.”

젠킨스가 잔바르의 상체를 잡자 잔바르가 성을 냈다.

“네 도움은 필요 없다.”

“어머나, 젠. 당신 도움은 필요 없대용. 어쩜 저렇게 잔인하게 말하는지.”

“그만 좀 엉겨 붙으세요.”

벨라는 악마들의 수다를 더 듣지 않고 키엘에게 다시 물었다.

“키엘, 오늘은 생일이니까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말해봐.”

“오늘이 왜… 내 생일이예요?”

벨라는 미리 준비한 대답을 키엘에게 귓속말했다.

“이건 비밀인데, 사실 밤에 천사님이 와서 가르쳐 줬어.”

악마가 가르쳐줬다는 거보다는 천사가 더 낫지 않은가.

다행히 악마들은 듣지 못했는지 자기들끼리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키엘은 왠지 불안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키엘, 하고 싶은 거 없어? 갖고 싶은 거는?”

키엘은 우물쭈물하며 벨라의 옷자락을 꽉 잡았다.

“응? 옷 사줄까?”

키엘은 한참 우물쭈물하다가 대답했다.

“와… 왕자님 하고 싶어요.”

벨라는 키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웃었다. 세상에. 넌 태초부터 왕자님이었단다.

“그래. 오늘은 키엘이 왕자님이야.”

그리고 식탁을 쾅 하고 치고는 서로 쓸데없는 말로 티격태격하는 악마들에게 말했다.

“자, 오늘은 키엘이 왕자님이니까 다들 키엘을 왕자님이라고 불러야 해! 알았지?”

“저렇게 약한 왕자님이 어디 있습니까.”

잔바르가 비아냥거리자 벨라는 입술을 씰룩였다.

‘네 토막으로 나고 싶어 환장했나.’

오늘 하루 왕자님이 된 키엘은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왕자님이니까 고, 공주님이랑 겨….”

그러나 그때 푸르가 손을 번쩍 들면서 말했다.

“저 그럼 왕자님이랑 해보고 싶은 거 있어요!”

“뭔데?”

“술래잡기요!”

벨라는 입가에 미소를 계속 띠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생일 노래부터 지금까지 벨라의 마음에 드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뭔 술래잡기를 왕자님이랑 해? 뭐 이상한 거 아냐?’

푸르는 서랍에서 뒤적거리더니 안대를 여러 개 꺼내 식탁 위에 올렸다.

“이걸로 눈을 가리면 술래가 잡는 거예요. 술래가 잡은 사람을 먹으면 돼요!”

“뭘 먹어? 미쳤어?”

“분명히 이웨르가 왕자님들을 잡아서 먹는 거라고 했는데….”

모두의 시선이 이웨르에게로 향하자, 이웨르는 자신의 꼬리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어머 어머. 그런 얘기가 아닌데.”

“미친….”

벨라의 표정이 빠르게 식어갔다.

그녀의 안색을 살피던 젠킨스가 서둘러서 상황을 중재했다.

“그, 그럼 동물 왕국에서 하던 술래잡기 말고 인간계에서 하는 술래잡기를 해보는 건 어떤가요?”

“와아!”

키엘과 벨라는 둘 다 싫었지만, 이미 신이 나서 통제가 되지 않는 그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이웨르가 말한 이상한 술래잡기가 아닌, 평범한 술래잡기.

정원으로 나간 악마들은 키엘이 잘 잡을 수 있게 두 발을 족쇄로 묶어놓았다.

“이거 너무 한 거 아닙니까?”

“보폭을 봐. 인간이랑 술래잡기하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가위바위보를 해서 제일 먼저 술래가 된 건 푸르였다.

“그럼 갑니다!”

벨라는 이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아차’ 싶었다.

푸르는 네 발로 뛰어가며 젠킨스를 제일 먼저 잡았다. 그것도 몇 초 되지 않아서.

“이건 반칙입니다.”

“그래, 무조건 두 발로 뛰어!”

그러자 잔바르가 ‘쳇’ 하더니 연기를 내뿜으며 다시 사람으로 변했다.

‘너도 표범으로 술래잡기하려고 했던 거니.’

다시 젠킨스가 술래가 되었다. 그는 생각보다 꽤 날렵하게 뛰었다. 바로 앞에 있던 이웨르를 잡으려던 순간.

“나는 거는 반칙 아닙니까?”

“반칙 인정. 날지 마.”

“힝….”

생각보다 더 악마들과의 술래잡기는 상식을 벗어난 듯했다.

작은 걸음으로 도망치는 키엘에게 야수처럼 달려들지 않나.

“야! 키엘 넘어졌잖아!”

얼떨결에 키엘이 술래가 되자,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그들은 멀리 도망쳤다.

‘저것들이….’

벨라가 잔바르를 반으로 자르자 키엘은 겨우 잘린 잔바르를 잡을 수 있었다.

“이거도 반칙 아닙니까?”

“아니야.”

그러자 푸르가 울분을 토해내며 징징거렸다.

“아가씨 너무해요!”

“뭐가.”

“왜 맨날 도련님만 좋아해요?”

벨라는 키엘에게 다가가서 그를 감싸고 다른 마족들을 노려보았다.

‘뭐가 이렇게 진지해. 얘들은?’

평소에 일할 때나 좀 진지하지.

“키엘은 아이잖아.”

“나도 아기곰이에요!”

“너 태어난 지 200년은 됐다면서.”

벨라가 푸르를 노려봤지만, 잔바르가 푸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곰 나이 200이면 아직 아기긴 하지.”

“맞아요! 곰생은 500살부터라고요! 푸르도 좋아해 주세요!”

“알겠어. 푸르도 좋아. 됐지?”

“와아아! 신난다! 내일은 내 생일 할래요!”

푸르가 벨라에게 달려와서 안기자, 벨라는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

단순하기는.

벨라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녀로 지정되었다고 하는데, 하녀보다는 오히려 벨라가 챙겨줘야 하는 짐짝 같았다.

‘뭐, 그래도 인형 같으니까 그냥 봐준다.’

그리고 벨라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키엘과 마주했다.

“어디 다친 덴 없어?”

“괜찮아요.”

“술래잡기는 그만할까?”

키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키엘, 오늘 네가 왕자님이니까 또 하고 싶은 거 없어?”

“그, 그럼 왕자님이니까…”

키엘은 조금 쑥스럽지만 그는 얼굴을 붉히고 한 단어씩 말했다.

이 나이 때만 말할 수 있는 소원. 그는 벨라의 옷자락을 꽉 잡았다.

“공주님이랑 결….”

뜸을 들인 것도 아니었는데. 푸르가 낚아채서는 또 말했다.

“내일은 제가 왕자님 해도 돼요?”

“아, 그럼 내일은 네가 해.”

벨라가 귀찮다는 듯이 푸르를 겨우 떼어냈다.

키엘은 답답했다. 겨우 소원 하나 말하는 데 무슨 방해가 이리 많은지.

그는 또 방해를 받을까 봐 서둘러서 벨라에게 소원을 말했다.

“결혼할래요, 공….”

그때 푸르가 또 한 번 손을 들었다.

“앗! 그럼 내일은 푸르가 결혼할래요!”

“그럼 도련님이랑 푸르랑 결혼하면 되겠당.”

“와아아!”

키엘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가 제일 예쁨 받아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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