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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는 마왕의 보좌에 앉아서 조용히 이 소설에서의 마지막을 기다렸다.
“크… 성물인가.”
소설 전체에서 몇 나오지 않는 대사였다. 몇 번을 연습했지만, 중2병다운 이 대사들이 아무리 해도 입에 붙지 않았다.
‘크, 하는 감탄사는 빼자. 어색하기만 하네.’
“성물인가.”
목을 가다듬고 연습하던 찰나에, 부상당한 악마가 급하게 마왕의 알현실로 뛰어들어 왔다.
“마왕성 입구에 벌써 도착했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제가 가서 토막을 내오겠습니다!”
그러자 벨라 옆에 있던 대장군들이 앞다퉈 ‘자기가 가겠다’며 성화였다.
“자자, 기다려.”
이 소설에 빙의한 이후로 숱한 실수를 거쳤지만, 지금만큼은 실수해서는 안 되었다.
이게 그녀의 유일한 역할이자 마지막이었기에.
“자, 마왕성 입구 1구역은 잔바르와 탈람이 가고, 2구역은 록산과 벨제브가 가도록 해.”
잠시 후.
3구역에서 마왕의 연회실로 오는 문이 세차게 열리고, 드디어 이 소설의 주인공, 키엘 헤리언 엘리시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마왕의 성에 존재만으로도 빛나고 있었다.
벨라는 잠시 넋이 나간 듯, 이 소설의 주인공의 모습을 아련하게 보고 있었다.
“당신을 찾았어.”
그리고 그사이에 대사를 놓치고 말았다.
‘가소롭구나, 애송아.’를 해야 했는데.
벨라는 서둘러 다음 대사를 읊었다.
“내가 직접 상대해주지.”
그러자 키엘은 원작대로 호박색 눈동자를 이글거리며 벨라를 바라봤다.
“당신의 심장을 가져가겠어.”
간절히 바라던 때가 눈앞에 성큼 다가왔다.
키엘과 로잔느의 사랑 이야기 중에서, 일부분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짧게 스쳐 가는 장면.
벨라가 가장 좋아하는 남자 주인공의 손에서 죽는 장면.
그리고 이 모든 건, 그녀가 처음 빙의한 때로 돌아간다.
* * *
홍연은 죽고 난 후, 환생을 기다리며 생전에 없었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문명이 발달하며 사후세계도 디지털화 되는지 원하는 분위기로 말만 하면 바꿀 수 있는 넓은 원룸에서.
저승사자가 환생을 대기하면서 무료하면 쓰라고 건네준 스마트폰 하나로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리고 홍연이 최근 빠진 건 웹소설이었다.
늦게 배운 덕질이 무섭다더니.
사는 게 바빠 생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입덕부정기를 거쳐서 결국 시간의 8할 이상을 웹소설을 보는 데 시간을 보냈다.
외롭지도 않았다.
[아, 진짜 이 작가님 작품 괜찮은데 왜 인기가 없을까요….]
[죽은 사람들한테만 인기 있나 봐요 ㅠㅠ]
[이러다 연중하면 안 되는데 ㅠㅠ]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이지만, 환생을 대기하는 사람들 중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랜선 친구가 되어 소통도 할 수 있었다.
홍연은 서둘러 엄지손가락으로 톡방에 빠르게 키보드를 두들겼다.
“제가 환생하면 이 작가님 작품은 전부 소장할 거예요.”
이런 작품들도 많았다.
죽은 사람들이라 조회수가 올라가지 않아 랜선친구들 사이에서만 인기 있는 작품들.
[환생은 근데 도대체 언제 하는 걸까요? 이미 읽은 웹소설 수로 계산해보면 10년은 지난 거 같아요.]
“소설에서는 빙의도 많이 하던데, 저희도 빙의나 했으면 좋겠네요.”
하트, 책, 울고 있는 이모티콘까지 보냈다.
[아, 그러고 보니 요즘 소설 빙의 시스템으로 얘기 많던데요.]
그 말에 홍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환생 대신 하는 건가요?]
[그냥 환생 중에 체험처럼 하나 봐요. 시스템이 아직 구축된 게 아니라서 몇몇만 선발해서 테스트 중이라던데.]
“아, 나도 되면 좋겠어요.”
울고 있는 이모티콘을 도배하듯이 보냈다.
[어떤 소설에 빙의하는지 아세요? 공포물이나 좀비물에 빙의하면 어떡해요?ㅋㅋㅋ]
[최근 읽었던 소설에 빙의한다던데요? 저도 최근에 스릴러물만 읽어서 패스.]
“전 전부 로판이었답니다. 저에게 기회를!”
상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홍연 님, 만약에 빙의했는데 악녀면 어떡해요?]
“대세는 원작 비틀기죠.”
[캬. 역시 배우신 분! 누가 빙의해보고 어느 소설 얼마만큼 원작 비틀었는지 들어보는 것도 재밌겠네요ㅋㅋㅋ]
생각만 해도 꿀잼 보장이었다. 입이 턱에 걸릴 정도로 웃고 있을 때였다.
“김홍연 님, 오랜만입니다.”
처음 홍연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저승사자가 오랜만에 모습을 보였다.
“이번에 새로운 시스템을 한번 도입했는데 인기가 좋아서 추천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설마….”
“환생 대기 중에 웹소설 속으로 빙의해서 인생을 살다 오는 시스템입니다.”
홍연의 눈이 반짝였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소설에 빙의하는 일이!
“사실 지금 환생 대기 시간이 거의 800년 정도 예상되고, 오래 기다리신 분들 중에는 거의 반 정도 미쳐가시는 분들도 더러 나오시는 터라 가능하면….”
“할게요!”
고민할 것도 없었다.
“겨울왈츠작가님의 소설 <쿠키 구워서 저 주실 거죠?> 속의 여주로 빙의할게요.”
“아, 그건 안 됩니다. 대신 김홍연 님이 최근에 읽었던 소설로 빙의하게 됩니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역시나 안 되는 거였다.
“그럼 하시는 거죠?”
“네!”
그때 홍연이 들고 있는 핸드폰으로 진동이 울려왔다.
“핸드폰은 꼭 쥐고 계세요. 소설 속에서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기타 궁금증도 그 안에 있고요.”
[소설 <알고 보니 황태자님>에 빙의합니다.]
황태자인 키엘과 백작가 영애 로잔느의 이야기. 서로가 평민인 줄 알았던, 신분을 극복하는 사랑.
특히 홍연의 최애는 좋은 설정은 다 몰아준 듯한 남주인 키엘이었고, 차애는 악녀였던 공녀 슈리아였다.
‘그래도 기왕이면 여주인 로잔느로 빙의해서 키엘이랑 연애해보고 싶다.’
악녀가 되었든 여주가 되었든 심지어 남주로 빙의한다고 해도.
소설에 빙의된다면 최대한 가늘고 길게, 누릴 수 있는 사치는 다 누려보고 싶었다.
어떤 소설이든 홍연은 잘해 낼 자신이 있었다.
* * *
“공주님, 일어나셨어요?”
달콤한 호칭에 입가에 미소부터 지어지며, 흔한 빙의자들이 겪게 되는 풍경을 상상하며 눈을 떴다.
화려한 드레스와 장신구들, 보는 것만으로도 먹기 아까울 정도로 잘 차려진 식사와 디저트, 그리고 고풍스러운 방.
“꺄아아아아악!”
“왜 그러세요, 공주님!”
고…고…!
빙의되고 눈 뜨자마자 만난 게 ‘곰’이었다.
그것도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곰! 그것도 진짜 큰 곰!
설마 곰국의 공주 이런 건 아니겠지.
“꺄아악! 이건 또 뭐야아아!”
취향이 고약한 살인마의 집이라도 된 것 마냥, 그녀가 깨어난 침대부터 살색의 가죽들로 엮어놓아 있었다.
‘토할 거 같아….’
그나마 다행인 건 거울로 본 빙의된 배역이 사람이긴 사람이었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칼에 붉은색 눈. 예쁘게 생겼었다. 하지만 못생겨도 괜찮았다.
‘사람이라면 돼. 사람이면.’
곰일까 봐 놀랐던 가슴을 쓸어내리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에는 소설 <알고 보니 황태자님>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었다.
곧이어 그녀의 머릿속으로 이름 다섯 글자가 떠올랐다.
‘벨라트리체.’
어떤 소설이든 랜덤으로 비중 있는 역할에 빙의한다고 했는데.
서둘러 그녀의 이름 ‘벨라트리체’로 검색하자, 단 0건이 나왔다.
“참 비중 있네….”
그리고 이곳이 어딘지 점점 정보가 흘러들어오자, 떨리는 손으로 소설 속 그녀의 위치를 찾았다.
그녀가 나오는 대목은 이 긴 소설의 딱 한 부분이었다.
이름도 없이 네 번의 언급밖에 없고. 대사는 세 개뿐인 ‘마왕의 딸’.
남주인 키엘이 황제가 되기 위해 죽여야 하는, 악당 중의 최종 악당.
심지어 대사는 세 개.
-“가소롭구나. 애송아.”
-“내가 직접 상대해주지.”
-“크… 성물인가.”
화려하고 아름다운 귀족 영애의 삶은?
남들 다 빙의하면 그런 거로 빙의하는 거 아니었어?
“아냐! 마왕의 딸이라도 잘살 수 있어!”
소설 속에는 마계가 인간계에 자주 침투해 괴롭힌다고 했으니, 이 일만 막으면 될 터.
‘악마라도 착해지면 되겠지.’
마계를 아기자기하게 만들어서 마치 요정계처럼 만들자!
어떻게든 살아야 할 거 아닌가. 게다가 마왕은 5,000년은 살 수 있다는데.
이전 생이 굵고 짧게 사는 인생이었다면.
이번 생은 가늘고 길게, 재밌게 살 수 있을 거라고 긍정적으로 미래를 바라봤다.
하지만 벨라는 1분 1초, 이곳에 있을수록 원하는 미래는 오지 않는다는 걸 직감했다.
“이걸 먹으라고?”
식사라고 올려진 건 찐득찐득한 내장이었다.
환생 대기조 친구들이 봤더라면 벌써 기절했을 법했다.
“공주님, 그럼 앞으로 음식은 피에 절이지 않고 바로 생 내장을 준비할게요.”
거기다가 조리사라고 옆에서 설명하고 있는 놈은….
“조리사가 사마귀라니.”
곤충의 팔로 여태껏 요리를 해왔다는 사실이 비위 상했다.
벨라가 한숨을 크게 내쉬자 하녀 곰인 푸르가 사마귀의 목덜미를 잡았다.
“그럼 이 녀석은 죽이고 새로운 조리사를 찾아볼게요!”
사마귀는 어느 부분이 눈인지 모를 구멍으로 눈물을 쏟아냈다.
“사마귀는 조리사 하면 안 되나요, 인간 세계에선 쥐도 요리하던데.”
그건 만화 아닌가.
푸르가 커다란 자기 가슴을 쿵쿵 치며 자신 있게 말했다.
“쥐 조리사를 찾아올게요!”
도대체 뇌가 어떻게 굴러가면 쥐 조리사를 찾겠단 말이 나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하나씩 바꿔나가면 되겠지.’
차분하게 동물 조련하듯이,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인간 조리사를 찾아.”
“알겠어요! 그럼 적당한 녀석으로 납치해올게요!”
벨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차분히 흥분을 가라앉혔다.
‘제발 이 미친놈들아….’
* * *
그녀 혼자서 착한 일을 한다고 마계가 요정의 세계로 바뀔 거 같진 않았다.
‘권력을 써서라도 바꿔보자.’
마왕 승계를 위해 동면한 마왕을 제외하면 여기서 최고 권위자는 벨라였다.
그녀는 서둘러 마계의 모든 인원을 모으고 마왕성의 알현실로 걸어갔다.
가는 길 동안 대충 본 마왕성은 예상대로 어둡고, 축축하고, 음침했다.
알현실에는 마왕의 보좌가 있었지만 전부 사람의 해골로 만든 거라 앉고 싶지 않았다.
“일단 이 성을 좀 더 화사하게 만들어야겠어.”
“네!”
“귀족들이 쓰는 물건들을 구해와.”
음산한 성이라도 값진 가구들로 장식하면 고급스럽게 바뀔 거라고 생각했다.
“네! 다 훔쳐 오겠습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마셨다가 내쉬었다.
“아니. 훔쳐오는 게 아니라, 사와야 해.”
“산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화폐를 지불하고 구매해오라고.”
그러자 모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인간들이 화폐 들고 있던데!”
“그럼 화폐를 훔치고 인간을 죽이면 되겠다!”
‘무슨 납치에, 살인에….’
아무리 소설 속 악당이라도 정도가 있어야지.
심지어 그녀는 전생에 경찰이었다. 그것도 근무 중 여자아이를 구하려다 순직한.
벨라는 전생에서 팀장님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이마를 짚었다.
-“야, 김홍연. 날 때부터 범죄자가 어디 있냐?”
여기 있었다.
목이 따갑도록 설명했지만, 이들은 머리가 나쁜지, 1시간 전에 한 말도 기억하지 못하고 또 같은 말을 도돌이표처럼 반복했다.
“아니! 인간은 죽이면 안 된다고!”
“그럼 눈알만 빼올까요?”
“아니! 내장 같은 거 빼지 말라고!”
그리고 이곳이 싫어지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으니.
“안 먹고 가죽만 가지고 오는 건 되나요?”
“넌 말하지 마! 입에서 냄새나니까!”
마계의 마족들은 하나같이 짐승이거나, 벌레이거나, 흉측하게 생겼다는 점.
게다가 냄새까지 더불어 최악이니, 없는 정도 탈탈 털어내고 있었다.
‘왜 내 주변은 이런 놈들이야.’
소설 속에는 주인공 말고 조연들도 다 예쁘고 잘생겼는데.
이번 빙의는 망했다.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다음 소설로 갈 기회가 있다는 거였다.
벨라는 빙의 되기 전 시스템의 직원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원작대로 완결이 나면, 죽기 전까지 계속 그곳에서 사실지 아니면 다른 소설로 빙의하실지 확인차 직원이 갈 겁니다.”
만약 원작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면, 그건 빙의자가 그 삶을 사는 의지로 본다고 했다.
-“김홍연 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원작대로 흘러가는 힘은 크거든요.”
이렇게 된 거 원작대로 최고의 빌런이 되어주고, 장렬하게 죽는다.
“지금이….”
지금, 소설은 남주와 여주가 처음으로 만나는 때, 1163년이었다.
황제의 사생아였던 키엘은 15세에 황궁으로 입궁하지만 현 황제와 똑같이 황족은 누구나 쓸 수 있다는 마력을 다루지 못했다.
결국, 3년 뒤인 그가 18세일 때.
황족의 마력을 되찾기 위해, 성물을 모으러 황궁 밖으로 나오면서 여주인 로잔느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내가 죽는 때가….’
벨라는 뒤돌아서서 핸드폰으로 자신이 죽는 부분을 엄지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찾았다.
소설 속에는 마계로 가서 마왕을 죽이고, 그 심장으로 결국 마력을 되찾게 된다.
‘주인공 키엘이 나를 죽이고 내 심장을 꺼내는 부분.’
키엘의 나이 22세인 1167년. 이때까지만 버티면 되었다.
‘…그것도 4년이네.’
대학 생활 4년에 비교하자니, 꽤 멀게만 느껴지자 벨라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녀에게 삶이란 살수록 힘든 일의 연속이었다.
어릴 적에 돌아가신 부모님. 유산을 노리던 친척들. 부모가 없다고 무시하던 사람들.
그럼에도 힘낼 수 있었던 건 유일한 혈육이었던 친언니 덕분이었다. 서로 의지하며 보듬어줄 수 있었기에.
‘혼자서 버틸 수 있을까.’
그 생각을 하자 언니도 보고 싶었고, 세 살배기 조카도 보고 싶었다.
소설 속에 빙의하면 좋을 줄 알았는데.
그때 눈치도 없이 해맑은 지네 마족 하나가 등 뒤로 발을 숨기고 다가왔다.
“공주님, 기분 별로시면 선물 드릴까요?”
“아니. 주지 마. 주지 마!”
“왜요. 공주님이 제일 좋아하는 손가락 목걸인데….”
지네의 수많은 발로 고이 목걸이를 떠받들고 벨라에게 내밀었다.
“…하하하.”
그녀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이제는 웃음만 났다.
다른 건 백번 양보해서 참아본다 해도, 이 그로테스크함은 버틸 수 없었다.
‘강력반 형사님들도 이런 건 못 보겠다….’
4년을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못 버틴다.
차분하게 생각하는 동안, 벨라에게 스펀지처럼 마왕의 딸에 대한 지식이 스며들었다.
마력을 운용하는 법들이 안개가 거두어지듯이 차차 그녀의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잠깐만…. 난 여기 설정상 완전 쎈 마왕의 딸이잖아?’
아무런 힘이 없었다면, 여기서 절망 속에 빠졌을 거다.
하지만 마계의 모든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그녀에겐 아직 방법이 있었다.
‘그러네. 굳이 4년 동안 기다릴 필요 없잖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벨라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앞으로 뻗었다.
등 뒤로 날개가 솟구치는 감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마치 익숙한 듯 날개를 커다랗게 펼쳤다.
붉은 눈은 점점 더 선명하게 붉어지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공기가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다행히 마법을 쓸 때 오글거리게 주문 같은 걸 외울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쓸 수 있는 모든 마력을 손끝으로 모았고, 커다란 마력진이 마계 전체를 둘러쌌다.
“다음 소설로 간다, 이 우매한 짐승들아!”
그녀는 자신 있게 소리치며 웃어댔다.
* * *
키엘은 자수조차 금으로 이루어진 화려한 커튼을 살며시 옆으로 거뒀다.
저무는 해는 아름다운 빛깔을 하늘에 쏟아내고, 황궁의 수많은 창문에 비쳐 밤하늘의 별을 미리 땅으로 끌어 내린 듯이 아름다웠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그의 발아래에 있었다.
3년 전, 오랜 세월을 떠돌이 평민으로 살다가 자신의 생부가 황제란 걸 알게 되었을 때만 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자신이 이 성의 한 꼭대기 위에 갇혀 있을 줄은.
창살로 다 막아놓은 창문. 서로를 확인한 후, 두 가지 열쇠로 안팎에서 열어야 하는 방은, 방이라기보다는 감옥 같았다.
그때 뒤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키엘 전하. 준비되었습니다.”
하지만 갇히는 것도 오늘까지였다.
키엘은 호위병처럼 변장하고, 그의 호위와 함께 몰래 방을 빠져나왔다.
“정말 이렇게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성물을 모아야 할까요?”
“어쩔 수 없지.”
건국 이래로 유일하게 마력을 사용할 수 없는 저주받은 황태자. 황제의 사생아.
그게 키엘의 꼬리표였다.
그간 수없이 노력했지만, 이 꼬리표는 떨어지지도 않고 오히려 짙어져만 갔었다.
제국에 모여 있는 성물을 모아 천상의 가호를 받아오면 마력을 되찾을 수 있다.
키엘이 황족의 일원이라는 걸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빨리 쌍둥이들과 만나야….”
황궁 밖으로 빠져나와 호위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가던 길이었다.
이 야밤에 도주하듯이 밖을 나가는 건 정말 극친한 사람들만 알던 계획이었다.
황가의 일원들과 절대적으로 충성을 맺은 자 중 몇몇만.
‘설마 암살이 있진 않겠지.’
하지만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고, 키엘이 생각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화살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전하!”
키엘은 재빨리 검을 들어 날아오는 화살을 두 동강을 냈다.
“한 명이야. 일단 빨리 쌍둥이들이랑 합류해야 해.”
키엘은 멀리서 느껴지는 살기를 하나씩 쳐내면서 달려갔다.
‘탁’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어깨로 화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전하!”
그때 다행히 멀리서 달려오던 쌍둥이 호위 중 마법사가 키엘 주변으로 보호막을 급하게 만들어냈다.
“보호막 쳤어요!”
또 한 명의 호위는 화살을 쏜 암살자를 추격했다.
“치료부터 하시죠.”
“빠져나가고 해도 괜찮아.”
3년 만에 맡아보는 바깥 공기였지만, 그는 어디에도 환영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황궁에서도 황궁 밖에서도.
웃어본 적이 언제였는지.
하루하루를 사는 게 점점 지쳐갔지만, 그의 어깨에 눌린 운명의 무게를 말없이 감당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실명할 정도로 밝은 빛이, 그 야밤에 번쩍이며 온 세상을 뒤덮은 게.
* * *
벨라의 주변으로 강한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지만,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냄새나는 마족들은 눈앞에서 벨라를 멀뚱히 보고 있었다.
‘…역시 이건 안 되는 건가?’
벨라는 멋쩍은 듯 뒷목을 잡고 긁적였다. 마법이란 걸 처음 써보았다.
4년 뒤로 시간을 빠르게 달려, 원작 속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다음 소설로 가려고 했는데.
‘마력도 다 끌어 썼는지 딱히 느껴지는 게 없는데….’
처음 빙의했을 때와 다르게 온몸을 휘감는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근데 왜 이렇게….’
벨라는 자신의 눈높이가 낮아진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자, 체구가 많이 작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입고 있는 옷도 변한 게 없었고, 마족들이 그녀를 향해 눈을 반짝이고 있는 것도 부담스럽지만 똑같았다.
‘마력을 많이 쓰면 내가 작아지던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맡은 역할의 지식들이 파도처럼 밀려오지만, 그런 사실은 머릿속에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몰라 눈앞의 마족들에게 물었다.
“지금이 인간계에서 몇 년인지 아는 사람?”
“…….”
그냥 대충 물어봐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대답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는 악마?”
그때 멀리서 한 마리가 대답했다.
“제국력 1153년입니다!”
아, 그런데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벨라는 귀를 의심하고 재차 물었다.
“다시 말해봐, 지금이 몇 년이라고?”
“1153년요!”
“응. 아니야. 다시 말해봐.”
“1153….”
벨라는 옆에 있던 놈에게 윽박질렀다.
“야! 네가 말해봐! 지금 몇 년이라고?”
“1153년요! 확실해요!”
“아니야! 너네 숫자도 못 세는 거 아니야?”
벨라는 전생의 팀장님 잔소리가 귀에 들리는 거 같았다.
-“김홍연! 그러게 왜 일을 키워!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지!”
그녀는 털썩 주저앉고 주먹으로 땅을 쾅쾅 치기 시작했다.
‘팀장님, 제가 그래서 찬란한 20대에 죽기도 했는데요….’
-“하여튼 성질 급해 가지고. 너 말이야, 의욕 넘치고 그런 건 좋은데. 5분 빨리 가려다가 50년 빨리 가는 수 있어.”
욕심부리다가 10년이 되돌아왔어요, 팀장님.
* * *
키엘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힘겹게 눈을 떴다. 캄캄한 어둠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윽….”
머리가 지끈거리고 몽롱했지만, 그는 신음 소리를 꾹 참았다.
떠돌이 생활을 할 때 여러 번 있던 일이라, 이제 이런 일이 생기면 조용히 상황을 살피는 게 먼저였다.
‘분명히 무슨 빛이 있었는데….’
그 밤에 섬광이 온 천지를 누비는 것 같았지만, 그는 보호막에 의해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었다.
‘검은 어딨지?’
그는 바짝 마른 입술을 적시며 손으로 조심스레 바닥을 더듬었다.
그때 찰그랑 하는 소리가 들리고,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그의 손에 만져진 게 무엇인지 눈에 보였다.
‘…웬 사슬?’
그리고 사슬을 눈으로 따라가 보자, 그 끝에 그의 발목이 보였다. 차가운 족쇄가 채워져 있는 그의 발이.
‘납친가.’
그러나 이윽고 뭔가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
그는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발, 두 손을 보며 당황스러워 온몸을 여기저기 만져보았다.
아무리 봐도 아이의 몸이었다.
벨라는 몰랐지만, 10년 전 다시 돌아온 그 자리는 그녀가 처음으로 마계의 공주로서 그들을 모았던 자리였다.
그들은 이 어린 공주가 어떤 말을 할지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망했어, 망했네.”
벨라는 주저앉아 땅을 치며 곡을 하고 있었다.
서로 눈치를 보던 마족들이 벨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말을 걸었다.
“공주님! 저희가 선물 준비한 거 먼저 드릴까요!”
“아니! Xx 그놈의 선물 제발 좀!”
벨라는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욕부터 튀어나오자 당황했는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사실 경찰 생활하면서 간간이 거칠게 말한 적도 많았다.-
‘하… 버틸 방법을 찾아야 해….’
왜 하필 빙의해도 이런 거에 빙의한 건지. 소설에 한 줌 안 나와도 되니까 사람으로 빙의했으면 얼마나 좋았을지.
‘…잠깐만. 사람… 인간… 인간계….’
그녀는 꽤 작아진 자신의 몸을 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성인이 되어 마왕의 힘을 승계받기 시작하면, 마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딱 두 가지였다.
누군가 그녀를 소환하거나 인간과 계약하는 경우.
“내가 성인이 되기 전에는… 인간계로 나갈 수 있잖아?”
그녀의 역할은 그녀가 24세, 키엘이 22세 일 때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전까지는 좀 다른 데 있어도 되는 거잖아.”
현재 벨라의 나이 열 살. 성인이 되는 스무 살까지 10년간 인간계에 숨어 있다가, 딱 4년만 이 냄새나고 축축한 곳을 버티면 되었다.
‘그래… 어차피 시간만 뒤로 당겨진 거지, 별반 다를 거 없으니까.’
벨라는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일어섰다.
“얘들아, 나 인간계 갈래.”
한순간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마왕이 딸을 낳고 동면 한 지 벌써 10년. 어떤 활약을 할지 기대에 차 있었는데, 처음 선 보이는 말이 하등한 종족의 세계로 간다는 말이었으니.
벨라는 한껏 들떴던 분위기가 식어진 걸 느끼고, 목을 가다듬고 큰소리로 말했다.
“인간계를 잘 알아야, 인간계를 잘 괴롭힐 수 있으니까!”
벨라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잘 넘겼나?’하며 잔뜩 긴장했다.
“끼와아아아!”
다행히 악마들은 벨라가 역시 마계를 이끌 미래의 유망주라며 환호했다.
그때, 대장군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그중 한 마리가 말했다.
“모든 마족들이 인간계로 넘어가면 힘을 거의 쓰지 못합니다. 대장군 중 한 명이 보좌하게 해주시죠.”
“제가 가겠습니다.”
입 냄새가 고약한 대장군, 탈람이 나서자 벨라가 괴성을 질렀다.
“꺄아아악!”
“그 정도로 좋습니까?”
커다란 바퀴벌레가 걸어 다니는데 소리 안 지를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니! 인간계에서 당분간 있을 거니까 인간형인 놈이랑 갈 거야.”
“저도 대장군이니 인간형으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바퀴벌레였던 탈람이 여섯 개의 다리를 쫙 펼치자 놀랍게도 꽤 그럴싸한 얼굴의 사람 형태로 점점 바뀌었다.
‘그래도 바퀴벌레는 싫어.’
탈람이 먼저 모습을 바꾸자 옆에 있던 대장군들이 알아서 인간형의 모습으로 변신을 시작했다.
차기 마왕의 인간 견학을 보좌하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질 줄 알고.
“전 공주님을 위해 인간의 가죽을 매일 벗길 수 있습니다!”
“전 전체 연령가에 어울리지 않는 일을…!”
대장군들은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악마인지 으스댔다. 하지만 벨라는 그런 말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표범. 너 가자.”
선택의 기준은 별거 없었다.
표범이라기에는 좀 이상하게 뿔이 두 개 있고 꼬리가 세 개가 있었지만.
바퀴벌레, 표범, 지네, 그리고 촉수 달린 놈 중에 그나마 무난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대장군 잔바르! 공주님을 위해 매일 어리고 싱싱한 인간들을 잡아 오겠습니다.”
…그나마 무난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 * *
마족이 인간계로 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돌아오는 건 쉬우나 가는 게 쉽지가 않았다.
슬라임 같은 저급 몬스터들은 쉽게 마계의 입구를 나갈 수 있지만, 벨라나 잔바르 같은 상급 악마들은 오로지 ‘소환’을 통해서만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끝내놓고 소환을 기다린 지 벌써 일주일이었다.
‘역시 여긴 일주일은 무슨, 하루도 못 사는 곳이야.’
도저히 마족들과 마주할 수가 없어서 방에 틀어박혀 소환진이 생기기만을 기다렸다.
이들이 준비하는 식사도 먹을 수가 없었다. 남아있는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할까 봐.
그나마 다행인 건 먹지 않아도 죽지는 않는다는 것.
“공주님! 소환진 하나가 열렸대요!”
“다 비켜, 이 거지 같은 것들아!”
벨라는 그놈의 환경 때문인지, 아니면 빙의되고 원래 벨라의 성격을 닮아가는 건지, 점점 난폭해져 가는 자신이 무서워질 정도였다.
잠시 후.
“콜록, 콜록.”
일단 소환이 열리는 대로 잔바르와 함께 넘어왔는데, 퀴퀴한 냄새가 제일 먼저 그녀의 코를 찔렀다.
‘설마 인간계로 못 온 건 아니겠지?’
벨라가 손을 한번 휘두르자 그곳에 있던 연기가 전부 걷혔다. 어두운 공간은 마계 뺨을 칠 정도로 음산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전체적으로 연구실 같아 보이는 그곳에는 벽을 따라 작은 철장이 십여 개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 개나 아이들이 갇혀 있었다.
그때 눈앞의 연기를 손으로 휘휘 젓는 한 남자가 벨라에게 말을 걸었다.
“모… 몽마인가?”
딱 봐도 아이들과 개들을 가둬놓은 장본인이었다.
‘하긴. 악마 소환하는 놈들이 다 사악한 놈들이겠지.’
비인륜적인 행위를 눈앞에서 본 벨라는 남자가 말을 걸 때 과감하게 잔바르에게 명령했다.
“악마여, 나는 너를 부른….”
“잔바르, 죽여.”
경찰일 때와 다르게 악마라서 좋은 점은, 굳이 이런 자를 법의 심판대에 둘 필요 없다는 거였다.
표범 모습의 잔바르는 신이 났는지 남자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을 신이 나게 뜯는 모습을 보고 ‘너무했나?’ 생각했지만 아이들을 보면 1초 만에 그마저도 사라졌다.
“다 어린애들이네.”
“공주님, 먹어도 됩니까?”
“뭘?”
그때 어느새 표범에서 사람의 형태로 변한 잔바르가 남자의 겉옷을 걸쳐 입더니 물었다.
“이 애들이요. 맛있는 식사가….”
“미쳤어? 내가 몇 번을 말해. 노약자는 건드리지 말라고!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저도 누누이 말하지만, 저희는 사람이 아니라 악마입니다.”
“야! 내가 토 달지 말랬지!”
그토록 교육했는데도 사악한 악마를 며칠 만에 갱생시키는 건 어려워 보였다.
벨라가 손짓을 하자, 아이들을 가두었던 철장의 빗장이 전부 옆으로 빠졌다.
“얘들아, 다 집으로 돌아가.”
철장 안에 있던 아이들은 잔뜩 겁을 먹었지만 한 명이 몰래 밖으로 나와 도망치자 잇따라 그 뒤를 따랐다.
‘일단 인간계는 맞는 거 같네.’
벨라는 아이들이 다 나가는 걸 보고 나가려고 했다. 저 애들을 따라가면 마을이 나오겠지.
‘배고프니까 일단 밥부터… 응?’
순간, 벨라의 뒤쪽으로 노란색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거대한 해일을 일으킬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 * *
키엘은 자신이 어린 모습이라는 걸 알았을 때, 이 모든 게 그저 꿈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몇 날 밤을 눈을 감았다가 떠보아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때. 하루 이틀을 헤아려보던 것도 멈추고 그저 절망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곳은 벽을 따라 작은 철장이 십여 개 놓여있었는데 그 안에는 키엘처럼 아이들이나 개가 철창에 갇혀 있었다.
‘정말 다시 이때로 돌아왔구나….’
여덟 살 때, 키엘의 삼촌은 음침한 마법사에게 돈을 받고 키엘을 그에게로 보냈었다.
처음에는 그냥 그가 성가셔서 남에게 떠넘기는 건 줄 알았다. 차라리 그런 거였다면 나았겠지.
이곳에 갇혀 있는 모든 이들은 그저 어떤 마법을 위한 제물이었다.
“왕왕.”
개들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짖자, 키엘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가 ‘쉿’하고 소리를 냈다.
‘저렇게 짖으면 금방 죽을 텐데.’
잠시 후 그 좁은 연구실로 음침한 모습의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다음은 네놈이라고 자기소개하는구나.”
쉰 목소리가 들리자 키엘은 숨을 죽이고 목에 걸린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런 인생을 또 살아야 할까.’
악몽 같이 떠돌아다니다가 자신이 황제의 사생아라는 걸 알았을 때만 해도, 그제야 행복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때도 목숨은 위태로웠고, 그는 갇혀 있었고, 행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돌아왔지.’
과거로 돌아가면 미래를 바꿔야지 하는 생각조차 없었다. 이미 지칠 만큼 치열하게 살아왔었으니까.
이윽고 짐승의 짖던 소리가 깨갱거리더니 순식간에 적막이 찾아왔다.
적막을 깬 건 소리가 아니라 빛이었다.
“서… 성공인가? 설마!”
폭발음과 함께 먼지가 연구실을 메웠다.
“콜록콜록. 뭐야, 여기는.”
“모… 몽마인가?”
마법사의 갈라지는 목소리가 들리고, 연구실을 빼곡하게 쌓았던 연기가 한순간에 걷혔다.
짐승이 있던 곳 위로 검은색 머리의 여자아이와 표범 한 마리가 나란히 서 있었다.
“악마여, 나는 너를 부른….”
“잔바르, 죽여.”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표범이 마법사에게 달려들었다. 표범은 입에 마법사의 피를 뚝뚝 흘리며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는 듯했다.
키엘은 조금 놀란 눈으로 마법사의 마지막을 바라봤다.
‘……?’
자신이 알고 있던 과거와 많이 달랐다.
어린 시절이라 이때의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저 마법사가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았던 것만큼은 생생하게 떠올랐다.
죽는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에 어머니의 유품인 펜던트에 신성력이 깃들여졌으니까.
그리고 숱하게 죽을 뻔한 고비를 펜던트의 신성력이 그를 보호해주었었다.
그런데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마법에 실패해야 할 마법사가, 지금 죽어버렸다.
그 신성력 없이 과연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을까. 황궁에서는 그의 존재를 늦게 알게 되었다고 했었다.
‘일단 내가 어릴 때 갔던 곳들만 피하고….’
키엘은 조용히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미래를 그려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렇게까지 살고 싶은 인생일까.’
그는 이토록 구차하게 목숨을 부여잡는 게 구질구질하게만 느껴졌다.
그때였다.
“얘.”
맑고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 키엘은 서서히 눈을 떴다. 그의 앞에는 붉은 눈의 여자아이가 말똥말똥 자신을 보고 있었다.
“괜찮아?”
표범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걸 보면, 꽤 무서울 것 같았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눈매가 살짝 올라가서 새침해 보일 뿐, 평범한 열 살배기의 여자아이였다.
“너도 집에 가. 못된 마법사는 이제 없으니까.”
키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집이 있어야 가지.
그는 고개를 떨군 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갈 데 없으면, 나랑 같이 갈래?”
처음이었다. 누군가 따뜻한 말을 건네며 손을 내민 게.
어둠처럼 짙은 검은 머리에, 무서운 붉은 눈 뒤로, 하얀 날개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게 키엘이 기억하는 벨라와의 첫만남이었다.
검은색의 천사.
벨라는 인간계에서 살기 위해 몇 가지 전략을 세웠지만, 제일 먼저 여관으로 향했다.
‘일단 밥부터 먹자.’
아무것도 먹지 않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요동을 쳤다.
“배고프시면 이 꼬마를 먹으시는 게 어때요?”
“입 좀 다물어. 조용히 안 할 거면 그냥 돌아가.”
잔바르는 벨라의 행동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배가 저리 고픈데 눈앞에 먹을 걸 두고 왜 안 먹는 건지. 키엘의 새하얀 피부와 호박색 눈은 매우 달달할 것 같았다.
벨라는 그런 잔바르를 한심하게 쳐다보고 키엘의 손을 잡았다.
걱정 하지마렴. 비록 마계에서 온 악마들이지만 내면은 너 같은 시민을 지키는 경찰이었단다.
‘그나저나 얘도 참 강심장인가 보네.’
확실히 시종으로 두기에 나쁘지 않아 보였다. 잔바르의 목이 잘려가는 걸 보고도 놀라지 않았고, 자기를 먹는다는 데도 표정 하나 바뀌는 게 없었다.
“너 내 시종할래?”
그러자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갈 곳도 없어 보이는 데 잘 부려먹어야지.’
이곳에 와서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
첫 단추를 잘 꿰매야 한다고, 처음 만난 이 꼬마와 잘 지내면 인간계에서도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 * *
마법사의 탑에서 나와 마을로 갈 때까지, 벨라는 키엘에게 내밀었던 손을 잡고 단 한 번도 놓지 않았다.
“너, 내 시종할래?”
다시 한번 묻자, 키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여전히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미래들이 기다리고 있는 건 알고 있었다.
이전에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지만, 그에게 의지 되었던 인연들조차 모두 땅에 묻히거나 재로 사라졌었다.
엄밀히 따지면 신성력으로 인해 혼자만 살아남은 거지만.
신성력조차 없는 지금, 혼자 다니는 것 보다는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다. 누군지 보증은 되지 않지만.
‘일단 어른인 보호자…도 있고.’
문제는 그 보호자가 표범인 것 같았지만.
‘공주님이라고 부르는 거 보면, 괜찮지 않을까.’
그가 기억하는 한, 이런 과거는 없었다.
어쩌면 이게 사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되돌아가서 또다시 지옥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어쩌면 새로 얻은 기회일지도.
‘일단 자립이 가능한 나이까지만이라도 여기 붙어 있어야 해.’
* * *
드디어 기다리던 여관이 보였다.
[ 알로하에서 제일 큰 여관! 샤워실 구비! ]
벨라가 여관 입구의 문을 열자마자 북적이던 여관 안이 한순간에 조용해지더니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식사하실 건가요?”
종업원이 잔바르에게 물었지만, 어린 벨라가 대답했다.
“식사는 제일 비싼 거 3인분으로 주시고, 방도 두 개, 숙박할게요.”
분위기만 봐도 ‘어린 귀족 아가씨와 보호자’라는 걸 눈치챈 종업원은 더 묻지 않고 가장 좋은 방과 식사를 준비했다.
동그란 식탁에 앉아 기다리자, 곧이어 따끈따끈한 고기와 수프가 함께 나왔다.
‘세상에… 이거 만화에서나 보던 고기들이잖아.’
흔히 말하는 ‘만화 고기’였다.
벨라는 양손으로 뼈를 잡아 뜯어 먹고 싶었지만, 뜨거워서 칼로 살을 열심히 발라냈다.
“인간들은 왜 이렇게 음식을 번거롭게 먹는지 모르겠네요.”
“짜증 나니까 말 걸지 마.”
벨라는 잔바르를 노려본 후에, 먹는 데 집중했다. 냄새부터 혀에서 사르르 녹는 고기의 식감까지.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수프에 찍어 먹는 게 진리네.”
어찌나 맛있고 야무지게 먹는지, 잔바르도 벨라를 보면서 군침이 돌았다.
“여기에 찍어 먹는다고요?”
잔바르는 벨라를 따라 고기를 입에 갖다 대자 동공이 커졌다.
“오… 오…!”
“맛있지?”
“그냥 그러네요.”
“사람 안 잡아먹어도 이거면 되지 않겠어?”
잔바르는 인정하기 싫은지 대답하지 않았지만, 고기를 먹는 손이 점점 빨라졌다.
‘그나저나 얘는 왜 안 먹지?’
키엘은 아까부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도 한 입도 대지 않고 보고만 있었다.
벨라는 포크로 고기 한 점을 찍어 키엘의 입에 가까이 대었다.
“저 아저씨도 맛있대. 너도 먹어봐.”
키엘은 벨라를 빤히 보면서 작은 입을 벌렸다.
“잘하네. 꼭꼭 씹어먹어.”
“…….”
“혹시 포크 쓸 줄 몰라?”
벨라의 말에 키엘은 당황한 듯 보였다. 다그치듯이 물어본 건 아닌데, 그렇게 받아들인 듯했다.
그녀는 키엘의 오른손을 잡아 포크를 손에 쥐여주었다.
“자, 포크는 말이야.”
벨라가 키엘의 오른손을 잡은 채로 고기를 한 점 꾹 찍고 입으로 가까이 대었다.
“이렇게 쓰면 돼.”
그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입을 벌려 고기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잘하네. 역시 내 시종 감이야.”
벨라가 키엘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어주자, 그 모습이 못마땅한지 잔바르가 툴툴댔다.
“시종이 포크 짓도 못 하면 뭐에 씁니까?”
“보니까 고아인 거 같은데, 가르쳐준 사람이 없었나 봐.”
“시종은 저 하나로도 충분할 거 같은데, 그 애는 제가 맛있게….”
벨라가 이를 꽉 깨물고 잔바르를 노려봤다.
“살면서 배워나가는 거지.”
“저희는 태어나자마자 다 알고 태어났는데요.”
“내 말에 토 좀 달지 마!”
* * *
간판에 적혀 있는 대로 과연 마을에서 가장 큰 여관이었다.
남녀가 분리되어 있지 않은 공용 샤워실이긴 하지만 씻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게 어딘가.
행복해하는 벨라와 다르게 잔바르는 난생처음 보는 시설에 인상을 찌푸렸다.
“여긴 도대체 뭐하는 데예요?”
“샤워하는 곳.”
“씻는다고요? 피는 어디 있습니까?”“
피라.
‘너네는 여태 피로 씻었니?’
악마들한테서 나는 악취의 근원을 알 것 같았다.
벨라는 샤워실에 들어가 이리저리 보더니 손잡이를 돌렸다. 그러자 기다란 호스에서 따뜻한 물이 흘러나왔다.
“피 대신 물로 씻는 거야. 넌 얘 데리고 같이 씻어.”
“이 꼬마의 피로 씻어도…”
“얘한테 무슨 일 생기면 네 심장부터 터트릴 거니까 그런 줄 알아.”
단단히 엄포하자 잔바르는 투덜거리며 꼬마를 데리고 방을 나갔다.
벨라는 한숨을 내쉬고, 조용히 따뜻한 물을 즐겼다.
‘진짜 살 거 같아.’
마계에 하루만 더 있었으면 아마 미쳐버렸으리라.
맛있는 음식에 향기로운 냄새에 따뜻한 샤워까지.
원했던 귀족 영애의 삶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계에서는 어떻게든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성인이 되면 4년은 거기서 또 버텨야 하네.’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지만, 지금부터 준비해야 했다.
‘일단 성인이 된 후에도 인간계로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부터 찾아보자.’
계속 인간계에서 숨어 살다가 원작대로 죽을 때가 되었을 때 마계로 돌아가면 금상첨화인데.
샤워가 끝나고 여관에 미리 부탁했던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고맙게 느껴질 줄이야.”
새 옷 냄새에 마음의 안정이 찾아올 때, 잔바르와 꼬질꼬질한 티를 벗은 꼬마도 샤워실에서 나왔다.
“제대로 씻은 거 맞아? 왜 계속 악취가 나?”
“벨라트리체 님. 저는 피 아니면 못 씻겠습니다.”
잠깐이나마 평화를 찾았던 벨라는 단번에 짜증이 났다.
‘인간을 먹겠다, 피로 씻겠다’는 말을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뜩이나 불편한데.
“야. 내 말 안 들을 거면 돌아가.”
“…….”
“여기 왔으면 사람답게 행동해야 할 거 아냐.”
“저는 사람이…”
“그럴 거면 가라고.”
“…씻고 오겠습니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 다시 잔바르가 돌아가고, 벨라는 앞에서 의기소침해있는 꼬마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너한테 화낸 거 아냐. 너 근데 몇 살이니? 다섯 살?”
꼬마는 말 대신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양손의 엄지손가락을 접었다.
여덟 개의 손가락을 보며 벨라가 다시 물었다.
“여덟 살?”
꼬마가 고개를 끄덕인다.
여덟 살이라기에는 체구가 너무 작았다.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고, 말도 못 하는 걸 보니 여태 어떻게 살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제부터 맛있는 거 잔뜩 먹자. 그나저나 너 이름은 있어?”
없다면 전생의 조카 이름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꼬마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자, 아쉬운 마음으로 다시 한번 물었다.
“이름이 뭐야?”
키엘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벨라의 손바닥에 자신의 이름을 써내려 갔다.
“키….”
벨라의 얼굴에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애써 웃으면서 다시 재차 물었다.
“네 이름이 키엘이야?”
* * *
여관방으로 들어온 벨라가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며 손톱을 깨물었다.
‘자… 1163년에 키엘이 18세이고, 지금이 1153년이니까….’
계산할 게 뭐 있나. 딱 여덟 살이었다.
벨라는 침대에 앉아 한쪽 다리를 꼬고 손가락을 피아노 치듯이 까딱거렸다.
불길한 직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동명이인이 남자 주인공과 똑같은 백금발에 호박색 눈을 가지고 여덟 살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
‘도대체 냥줍도 아니고 어떻게 이렇게 우연히 남주줍을 할 수가 있는 거야?’
벨라는 한참을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래, 아닐 거야. 확인해보면 되지.’
소설 속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빠르게 검색했다.
검색 결과가 많이 나왔지만, 눈이 빠져라 찾았고, 손이 빠지게 ‘다음’ 버튼을 눌렀다.
벨라는 침대에 앉은 채 옆을 ‘팡팡’하고 두드렸다.
“음… 키엘, 이리와 봐.”
방문 앞에 서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키엘이 슬며시 다가와서 앉았다.
벨라는 크게 심호흡하며 찾았던 검색 결과를 하나씩 물어봤다.
“키엘. 어릴 때 물에 빠진 적 있어?”
“어릴 때 강아지한테 물린 적 있어?”
키엘은 벨라가 가진 물체를 은글슬쩍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볼수록 벨라는 속이 타들어 가는 거 같았다.
‘아냐. 누구든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으니까….’
좀 더 일반적인 질문이 아니라 소설 속 남주에게만 있을 수 있는 질문들을 던져야 했다.
“엄마가 돌아가실 때 유품 같은 거….”
그때 벨라의 눈으로 키엘의 펜던트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펜던트를 가리키며 목을 가다듬고 다시 물었다.
“이거 어머니 유품이야?”
키엘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고, 벨라는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혹시… 삼촌이 너를 못된 마법사한테 보낸 적 있어?”
그리고 놀란 키엘을 보자, 애써 부정해오던 불길한 예감이 벨라를 집어삼켰다.
이 키엘이 그 키엘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고아, 여덟 살, 엄마가 유품으로 준 펜던트.
소설 속에 짧게 등장하는 어린 시절의 학대, 마법사에게 팔려 가는 것까지.
심지어 이름마저 똑같은 데 우연의 일치일 리가 없었다.
벨라는 키엘의 머리를 살짝 당겨 자신의 무릎 위에 눕게 했다.
‘그래. 오늘 밤만은 편하게 있게 해주자.’
벌써 잠들어버린 듯한 키엘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만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망한 건가, 아니면 성덕인 건가.’
만나보고 싶은 최애였지만, 막상 그 실체를 맞닥뜨리니 벨라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앞으로 고생길이 훤할 텐데.’
키엘은 황태자가 되기 전까지 꽤 암울한 인생을 보냈었다. 예쁜 얼굴 때문에 납치도 더러 당하고, 몹쓸 짓도 당할 뻔하고.
‘그래도 원작대로 가려면 버리고 가야겠지?’
벨라는 곤히 자는 키엘을 빤히 쳐다봤다.
안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쌕쌕거리며 이따금 움찔대는 걸 보며,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줬다.
황궁에서 키엘을 찾기 전까지는 그는 그저 떠돌이로 살았다고 나와 있었다.
어린 나이에 몇 번의 죽을 고비가 있었지만, 우연히 얻게 된 신성력이 그를 지켜줬다.
‘원작대로 소설이 잘 흘러가려면, 내일 너를 어딘가에 버려야 하는구나.’
불편한 마음으로 무릎을 베고 자는 키엘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알고 보니 황태자님>을 정독했다.
버리면 어디에다가 언제 버리고 가야 할지 유념하면서.
‘너는 지금 어디쯤 와 있니.’
황제의 사생아였던 키엘은 15세까지 떠돌이 인생을 살다가 황궁으로 들어가고, 마력을 얻기 위해 성물을 모으러 18세에 황궁을 나선다.
소설은 키엘이 18세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정확히 로잔느와 만나는 시점부터.
성물을 모으는 과정에서 백작가의 영애, 로잔느를 만나고 호기심 많은 그녀와 얽히면서 생기는 사랑 이야기.
밤이 깊어 오는 만큼 소설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럴수록, 벨라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드디어 마지막 페이지를 읽은 벨라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망했다.’
가린 손가락 사이로 여전히 무릎 위에서 자는 키엘과 펜던트가 보였다.
유품인 이 펜던트에는 신성력이 있었다. 황태자가 되기 전까지, 이 신성력으로 구사일생한 에피소드도 많았고.
특히 몇몇 장면에서 한 줄 정도로 설명되지만 어린 키엘이 떠돌이 생활을 할 때 지켜준 것도 이 신성력이었다.
벨라는 북마크 해두었던 소설 속의 장면을 다시 한번 읽었다.
[(중략)…. “삼촌이 여덟 살 때 나를 어떤 마법사에게로 팔았어. 그때 무슨 실험을 받다가 죽을 뻔하고 천사를 만났는데.” 키엘은 목에 걸린 펜던트를 보여줬다. “그 후로 위험한 순간마다 어떤 힘이 나를 도와주긴 했어.”…(중략)]
여덟 살. 마법사. 실험.
“그러니까 아까 죽인 놈이 그 마법사였던 거네.”
벨라는 침을 꿀꺽 삼키고 그 펜던트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만져진다.’
마계에서 온 벨라가 펜던트를 만질 수 있는 걸 보아 신성력은 담겨있지 않았다.
“하… 하…”
그러니까 그 망할 놈의 신성력으로 어린 시절을 버틸 수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 실험을 행하던 마법사를 죽이고 키엘을 이곳에 데리고 온 것이었다.
벨라는 허탈하게 웃었다.
빙의된 지 3일 만에 원작을 다 깨부쉈다.
빌런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린 시절 히어로가 힘을 얻기 직전에 차단해버린 셈이었다.
아주 빌런답게.
* * *
밤을 새웠다.
어둠을 밝히는 새벽의 빛처럼, 심란했던 벨라의 마음을 그나마 덜어주는 게 있었다.
바로 ‘고객센터’ 버튼.
소설을 전부 읽고 나자 생겨난 카테고리였다.
고객센터로 들어가니 ‘1:1문의’와 ‘자주 하는 질문’란이 있었다.
벨라는 망설이지 않고 1:1문의 버튼을 눌러 자판을 켰다.
[1:1 문의는 답변을 받은 후에 핸드폰이 꺼지니 긴급상황일 때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뒤로 가기 버튼을 눌렀다.
‘그래, 나 같은 사람들이 질문을 이미 했을 거야.’
[자주 하는 질문들]
벨라는 떨리는 손으로 쭉쭉 아래를 내려보았다.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 있을지.
[Q. 혹시 설정을 바꾸게 되어도 원작대로 흘러갈 수 있나요? ]
있었다. 벨라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
[A. 작가님도 퇴고하시다가 설정을 바꾸는 일도 있고, 쓰시다가 설정이 오류가 나는 부분도 있어서 큰 지장이 없는 설정은 바뀌어도 괜찮습니다]
자잘한 설정은 바뀌어도 큰 문제는 없다.
그런데 하필이면 남주의 중요한 설정을 건드려버렸네?
“하하하…”
너무 기가 차서 그런지 벨라는 웃음만 나왔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살짝 열렸다.
잔바르였다.
“저 다 씻었습니다.”
“뭐?”
“물로 씻었어요.”
“여태까지 씻은 거야?”
잔바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벨라는 인상을 찡그렸다.
날이 새도록 소설을 읽으며 고뇌에 빠졌는데, 이 녀석은 밤새도록 느긋하게 목욕이나 하고 있고.
그런데도 악취가 여전한 이유는 뭘까.
“비누칠 안 했지?”
“그게 뭡니까?”
“…….”
“그나저나 공주님의 깊은 뜻을 여태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저 꼬마를 먹겠다고 한 것 같네요.”
벨라는 대꾸조차 하기 귀찮았다.
“공주님이 그 꼬마를 먹으려고 하시는 거죠?”
“나가.”
악마들은 그저 몇 번의 대화만으로도 벨라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었다.
‘역시 저런 놈 수만 마리와 오천 년을 사는 건 미친 짓이야.’
말이 오 천년이지, 단군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다고 생각해보라.
벨라는 눈에 불을 켜고 자신과 비슷한 사례를 계속 훑어보았다.
어떻게든 방법이 없을까. 원작대로 완결 낼 방법이.
이대로 가면 원작대로 엔딩은커녕, 시작도 못 하고 키엘이 죽을지도 모른다. 신성력이 없으니까.
“리셋 같은 거는 없나.”
다행히 소설에 빙의하는 시스템은 체계적인 것 같았다.
[Q. 중요한 설정을 건드려버려서 원상복구가 안 될 거 같으면 어떻게 하나요?]
“이… 이거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게시글을 누르자, 친절한 답변이 눈에 들어왔다.
[A. 네. 그런 경우를 대비해서 소설 속에서 딱 한 번, 시간을 되돌릴 수 있습니다. 시간을 조절한다고 생각하면 가능합니다. 넉넉하게 10년 되돌릴 수 있습니다.]
벨라는 바로 뒤로가기 버튼을 눌렀다. 그냥 못 본 척하고 싶었다.
‘그럼 내가 시간을 되돌린 건, 마왕으로서의 마력이 아니라 그냥 이 빙의시스템이 돌린 거네.’
처음에 빙의 되었을 때, 차분하게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김홍연! 여기 사용설명서 다 있잖아. 좀 읽어보고 해라!”
빨리빨리가 대명사인 민족답게. 벨라는 성격이 급한 소생으로 태어난 것을 반성했다.
전생에서도 잘 알아보지 않고 일을 벌리는 바람에 그렇게 혼이 많이 났는데.
그때 벨라의 눈에 원초적인 질문이 보였다.
[Q. 원작대로 완결한다는 기준이 뭔가요?]
* * *
키엘이 선택한 전략은 ‘침묵’이었다.
‘내가 18세이었다고 해봐야 어차피 못 믿겠지.’
어딘가 정신이 불안한 아이라고 생각하면, 내쳐질 수도 있었다. 최대한 눈치를 보다가 있는 듯 없는 듯 비위를 맞춰주면 될 터.
처음에는 그저 안전한 울타리만 생각했는데, 잠깐 훑어봐도 튼튼한 울타리라는 걸 느꼈다.
‘공주’라고 불리워서 그런지, 돈도 좀 많아 보이고.
여관에서 자는 것도 그에게는 사치였는데 방도 제일 좋은 방으로 얻은 걸 보니.
‘…고기도 이렇게 많이 사네.’
황궁에 있으면서 좋은 음식들을 먹어왔지만, 그전에는 단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던 음식이었다.
‘보통 여덟 살짜리는 고기를 어떻게 먹지?’
그가 고민하는 동안, 벨라는 친히 입에까지 넣어다 주었다.
“포크 쓸 줄 몰라?”
그는 포크 쓰는 법을 꽤 크고 난 이후에 배웠었다.
‘여, 여덟 살이 포크도 쓰나?’
그가 당황한 사이에, 벨라는 상냥하게 그의 손을 잡고 포크질을 가르쳐 주고,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혹시 내가 꿈을 꾸는 걸까?’
뭔가 모종의 거래가 오고 간 것도 아닌데, 이렇게 친절을 베푼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 나이 차이가 많이 나 보이지도 않는데, 어린 모습과 다르게 성숙한 사고를 가진 것 같았고.
게다가 나중에는 키엘의 이름을 물어보더니 네모난 뭔가를 가지고 와서 그에게 하나씩 캐물었다.
‘저건 뭐지?’
벨라가 꽤 똑똑해 보이니, 괜스레 거짓말을 했다가 미움을 사는 것보다는 솔직한 게 나을 거 같았다.
“이거 어머니 유품이야?”
거기다 삼촌이 자신을 마법사에게 팔아넘긴 것까지 물어보자 키엘은 놀란 눈으로 벨라를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걸 아는 거지?’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는 펜던트에 신성력이 깃들이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천사를 만났는데….’
그리고 벨라는 키엘에게 자신의 무릎을 내주며, 그의 머리를 간지럽게 만져주었다.
‘혹시 나 죽고 천국에 온 걸까?’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스르르 잠이 들었었다.
“하아… 너를 버리고 가야 하나.”
잠결에 들었던 상냥한 목소리가 잘못 들은 거기를 바라며.
그리고 눈을 슬며시 떴을 때. 벨라는 눈을 감았던 순간 그대로 그를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안녕, 키엘.”
그녀의 등 뒤로 아침햇살이 감싸고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 * *
아침이 다가오고, 벨라의 마음속에도 동이 트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황태자님>은 모험물이 아니었다.
‘로맨스 판타지잖아.’
원작대로 완결이란 건 결국 여주와 남주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거였다.
그녀는 느긋하게 키엘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키엘의 속눈썹 위로 햇빛이 사뿐히 내려앉자, 그의 눈꺼풀이 흔들거렸다.
‘소설이 시작되는 시점까지 잘 데리고 있다가 황궁으로 보내면 되지.’
키엘이 눈을 천천히 뜨고 벨라는 여유 있게 웃으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안녕, 키엘.”
그때 벨라의 방으로 노크 소리가 들리고, 잔바르가 고개를 내밀었다.
“공주님…. 비누칠이라는 것도 물어서 다시 했습니다.”
확실히 고약한 냄새가 줄어들었다.
벨라가 들어오라고 하자 잔바르가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웃으며 들어왔다.
‘어떻게 웃는 것조차 악랄하게 생겼을까.’
벨라는 결코 원작을 바꾸지 않겠다는 원대한 결심으로, 키엘에게 소개했다.
“키엘. 나는 동물왕국의 공주, 벨라트리체야.”
나중에 마계로 와서 벨라를 죽여야 했기에 마족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녀의 뜬금없는 자기소개에 잔바르의 미소가 싹 가셨다.
“너도 어제 봤지? 얘는 표범 잔바르야.”
“표범 따위를 저에게…”
“표범 잔바르야.”
벨라는 잔바르의 항의를 가차 없이 잘라버렸다.
그리고 벨라가 제자리에서 뛰자, 연기가 나며 붉은 눈을 가진 검은색 고양이로 변했다.
“공주님이 왜…!”
또다시 잔바르가 항의하기 전에 고양이로 변신한 벨라가 공중제비를 돌더니 인간으로 변했다.
“봤지? 우리는 동물왕국에서 왔어.”
잔바르가 기분나쁘게 웃으며 말했다.
“고양이라니…공주님이 고양이면 제 밑입니다.”
벨라는 살짝 기분 나빴다.
그냥 파출소 앞에 종종 나타나는 검은 고양이가 생각나서 고양이로 변한 건데. 어디서 또 토를 다는 건지.
“표범은 고양이과니까 내가 기준점이야.”
분명 어려운 말이 아닌데도 잔바르는 이해가 되지 않는지 눈을 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벨라는 말을 이어가려고 했다.
“어제 내 시종이 되라고 한 건 취소할게. 넌 이제부터….”
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키엘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렸다.
“왜, 왜 울어?”
벨라는 키엘과 만난 후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눈에서 눈물은 떨어지는데, 희한하게도 목소리는 울지 않았다.
“잡아먹어도 돼요. 마, 맛있게 클게요.”
“어제 내 시종이 되라고 한 건 취소할게.”
지난밤, 키엘은 잠결에 들었던 상냥한 목소리를 떠올렸다.
- “하아… 너를 버리고 가야 하나.”
그 말을 듣자마자 간밤의 꿈이 생각나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부터 흘러나왔다.
구원의 손길이 있기 전으로 돌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길 바라듯이 반복되는 인생으로 돌아가는 꿈이었다.
“잡아먹어도 돼요.”
그렇다고 지금 잡아먹으면 안 되는데.
키엘은 불안함과 절망 사이에서 벨라가 자신을 데리고 있어야 할 이유를 내뱉었다.
“마, 맛있게 클게요.”
어린아이처럼 말한다고 한 게, 더 이상한 분위기를 몰아가는 것 같았다.
‘하… 내가 왜 이렇게 말했지….’
너무 다급해서일까. 논리라곤 하나도 없는 이 억지가 통할 리가 없을 텐데.
하지만 벨라는 잠깐 멈춰있더니 그가 귀엽다는 듯 입꼬리를 울리며 웃었다.
‘…이게 통해?’
* * *
벨라는 처음에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너 말할 줄 알았어?’
그녀의 앞에서 처음으로 말한 것에 신기해해야 할지.
아니면 키엘이 왜 눈물을 흘리는지 물어봐야 할지.
잡아먹어도 된다고 한 건 뭔 소린지. 맛있게 큰다는 건 또 무슨….
벨라가 망설이는 동안 반응한 건 잔바르였다.
“그럼, 잘먹겠….”
“잔바르.”
“아, 공주님이 드실 거였죠.”
“한마디만 더 하면 진짜 죽는다.”
가끔 엄마를 놓쳐 미아가 된 아이들이 스스로 지구대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 똘똘한 아이들도 지레 겁을 먹어 아무렇게나 말하는 경우를 떠올리며 키엘을 달랬다.
벨라는 무릎을 굽혀 쪼그려 앉아 키엘과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두 손으로 잡아먹는 시늉을 했다.
“냠냠. 이렇게 잡아먹을까? 그럼 너 ‘아야’ 하는데?”
“…….”
“그리고 고양이는 사람을 못 먹어.”
잔바르가 피식하고 웃는 소리가 거슬렸다.
“야.”
“저 말 안 했어요.”
“지금 했네.”
벨라가 잔바르를 향해 손을 공중에 긋자 그의 몸이 두 동강이 났다.
그의 상체가 하체로 기어가는 동안은 조용하겠지.
“나중에 잡아먹어도 되니까….”
키엘의 눈은 슬퍼 보이면서도, 목소리는 울지 않고 말했다. 벨라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지금은 데리고 가주세요….”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이 벨라는 얼음이 되었다.
눈물이 나지도 않으면서 목이 멨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삼촌에게 맡겨졌지만, 학대를 당했고, 끝내 삼촌은 돈을 받고 이상한 실험을 하는 마법사에게 키엘을 팔았다.
‘내게는 그저 한두 문장의 설정이었는데.’
이 아이에게는 현실이었다.
잠시나마 ‘원작대로 버려야 하나?’ 고민했던 자신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지.
‘난 진짜 경찰 배지 반납해야겠다.’
지금은 없는 배지를 상상 속에서 반납하는 거로 반성했다.
“데리고 갈게. 잡아먹지도 않고.”
벨라는 볼 밑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키엘의 얼굴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시종 잘할 수 있어요.”
벨라가 가볍게 웃었다. 황태자가 될 건데 시종이라니.
“아냐, 시종 안 해도 돼.”
“빨래랑 청소할 수 있어요.”
“왕자님 어때, 왕자님 시켜줄게.”
“…시종은 필요하지만, 왕자님은 필요 없잖아요.”
종일 말이 없길래 말을 못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말문이 트이기 시작하니 꽤 똑똑하게 말한다.
“너, 말 잘하네?”
“싫으면 말도 안 할게요.”
키엘은 자신의 작은 손으로 입을 막았다.
벨라의 심장 한구석이 아려왔다.
얼마나 구박받으며 살았는지, 굳이 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언행이 자꾸만 벨라의 마음을 툭툭 건드렸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너무 힘들게 안 살았으면 좋겠다.’
그저 데리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에서 조금 더 책임감이 더해졌다.
‘꼭 힘든 과거가 없어도 되잖아. 어차피 로맨스 소설인데.’
그녀는 짠한 마음에 두 손을 벌려 키엘을 꼭 안았다.
그때 상체와 하체를 다시 합친 잔바르가 눈치 없이 말했다.
“공주님, 울어요?”
“…….”
“이 꼬마 먹을 생각에 감격에 기뻐서 우는 거예요?”
* * *
벨라는 인간계에 오면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을 순서대로 해치웠다.
그 첫 번째가 집 구하기였다.
이곳에서 10년을 지낼 건데 자본 한 푼도 없이 거리에서 나앉을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다행인 건 악마 녀석들이 화폐의 가치를 전혀 몰라 마계 구석구석을 뒤지니 어마어마한 돈들이 나왔었다.
‘반짝이길래 일단 모아는 놨는데 쓸 일이 없으니 귀한 건 줄도 몰랐겠지.’
방을 나서서 여관의 식당으로 내려가자 여관주인이 쪼르르 달려 나와 손을 비비댔다.
“아가씨, 역시 우리 집만 한 여관은 없지요? 하루 더 묵으시겠습니까?”
“혹시 인근에 부동산은 없나요?”
“부동산이요?”
그는 꽤 놀란 표정이었다.
“왜요?”
“흠흠.”
그때 벨라의 뒤에서 누군가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꼬마 아가씨, 여기서 살게?”
벨라가 뒤를 돌아보자 붉은 머리의 남자가 한쪽 눈썹을 올리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여기 근처에 마탑도 있고 마물도 많이 출몰하는 편이라 여행자들은 많지만 거주하는 사람들은 몇 없거든.”
오지랖도 넓어라. 벨라는 그를 무시하고 다시 여관주인에게 물었다.
“부동산은 어디에 있어요?”
“저 사내의 말대로, 딱히 부동산이랄 게 없어서….”
여관주인이 벽에 걸려 있는 허가증을 손으로 가리켰다.
“자작님께서 저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럼 매물 좀 보여주세요.”
여관 주인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지금 나와 있는 매물은 하나밖에 없어요.”
‘다른 도시로 가서 찾아봐야 하나?’
그때 눈치 빠른 종업원이 서류를 한 뭉치 들고 오더니,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이건 돌아가신 자작님의 별채인데요.”
그림으로만 봐도 넓은 정원이 있는 2층짜리 저택이었다. 옆에 나와 있는 설명에는 방이 8개, 욕실도 2개 있었다.
“30골드입니다.”
벨라는 그 금액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잠시 생각에 빠졌다.
‘내가 챙겨온 게 70골드긴 한데….’
그때 오지랖이 넓은 남자가 덧붙였다.
“이야, 무슨 하자 있는 거 아니에요? 왜 그렇게 싸요?”
30골드면 싼 거구나.
“보통 이런 저택이면 100골드는 기본이지 않나? 아무리 시골이라도?”
이렇게 큰 집까지는 필요 없지만, 저렴한 가격에 빨리 정착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이 소설이 사랑 얘기가 주를 이루긴 하지만, 후에 암살의 위험도 있고 모험도 하게 되니 넓은 정원이 있으면 키엘이 기초적인 훈련도 할 수 있을 테고.
“일단 보러 가요.”
그때였다. 아까부터 입을 대는 붉은 남자가 벨라를 보고 비아냥거렸다.
“보기는 뭘 봐. 이 아가씨, 세상 물정 모르네. 딱 봐도 문제 있는 집인데.”
“이봐. 자네가 살 거 아니면 좀 빠지지?”
벨라의 머리로 심한 욕이 왔다 갔다했지만, 다행히 여관주인이 그녀를 대신해서 화를 내주었다.
* * *
싼 이유는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저택은 사람들이 꺼릴 만큼 음침해 보였다. 녹이 슨 입구는 여는 소리조차 섬뜩할 정도였다.
벨라는 키엘이 무서워할까 봐 그의 손을 꽉 잡고 밝게 말했다.
“괜찮아.”
그리고 아무렇게나 자라난 잡초들을 가로질러 저택의 현관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어두운 공간에 빛이 들어가며 먼지, 거미줄이 음산한 분위기를 한층 돋우었다.
“콜록.”
벨라는 먼지를 손으로 휘저으며 여관주인에게 물었다.
“얼마나 비어 있었던 거죠?”
“꽤 오래….”
현관을 열자마자 커다란 홀이 나왔고, 양옆으로 나 있는 복도에 방이 여러 개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큰데?’
분위기가 을씨년스러운 것만 빼면,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마계에 비하면 아주 쾌적한 수준이었다.
‘별문제만 없으면 그냥 여기서 머물고 싶은데.’
다만 이런 집이 30골드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자작의 별채인 데다가 크기만 봐서는 좀 더 비싸 보이는데 싼 이유가 뭘까.
“이 집에 무슨 사연 같은 게 있어요?”
“아뇨,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자작님 별채인 데다가 오랫동안 발길이 안 닿아서 다들 쉬쉬하는 정도입니다.”
벨라는 손을 잡고 있는 키엘을 내려다봤다. 그는 벨라를 보고 있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눈치를 보며 눈을 돌렸다.
“여기 무서워?”
키엘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럼, 이 집으로 계약할게요.”
여관 주인은 정말 팔릴 거라고 생각도 못 했는지 굉장히 놀랐다.
“대신 전부 수리해 주세요. 추가금을 드릴 테니.”
‘역시 귀한 집 아가씨였구나’ 생각하며 여관 주인은 한편으로 불편한 마음을 떨치지 못했다.
“이제부터 여기가 우리 집이야.”
키엘은 여전히 자신을 데리고 가겠다고 한 말을 믿지 않는 모양인지 얼떨떨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벨라는 쪼그려 앉아 키엘과 눈높이를 맞추고,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도 이제부터 여기서 사는 거야.”
앞으로 이곳에서 10년을 살아야 한다.
키엘은 앞으로 7년 반. 15세에 황궁으로 갈 테니까.
“잔바르, 이제부터 키엘을 도련님이라고 불러야 해. 나는 아가씨라고 부르고.”
“어떻게 공주님을 먹는 거로 부를 수 있습니까.”
“내가 내 말에 토 달지 말랬지.”
“네, 아가씨.”
잔바르는 음흉하게 웃으면서 벨라를 불렀다.
“그렇게 저녁 찬거리 쳐다보듯이 보면서 부르지 마.”
* * *
저택은 오랫동안 빈집이었기에, 사람들을 불러 깨끗이 청소하는 데에도 꽤 시간이 걸렸다.
그간 여관에서 지내면서 앞으로 살아가며 필요한 것들을 채워나가기로 했다.
“공주님, 저는…”
“아가씨.”
“… 아가씨, 저는 뭐 할까요?”
잔바르는 겉보기에는 보호자 같아서 데리고 다니기에 좋지만, 같이 있을수록 벨라의 속만 긁었다.
“특별한 임무를 줄게.”
“좋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올 때까지 기다려. 한 발자국도 움직이면 안 돼. 엄청나게 중요한 임무야.”
“중요한 임무!”
키엘은 ‘중요한‘에 의의를 두고 꼼짝없이 여관방에 앉아 행복해하는 잔바르를 보고, 벨라를 뒤쫓았다.
‘잔바르는 바본가….’
역시 실권자는 벨라인 모양이었다.
“우리는 옷이나 사러 가자, 키엘.”
며칠째 단벌 신사로 살고 있었기에, 벨라는 마을의 허름한 양장점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정말 한 두벌만 사려고 했는데.
“세상에… 너 어쩜 이렇게 예쁘니.”
각 잡힌 블라우스에 귀여운 재킷을 입히니 누가 봐도 귀족 자제처럼 귀티가 철철 흘렀다.
‘누가 이 소설 주인공 아니랄까 봐.’
게다가 옅은 금발과 슬퍼 보이듯이 쳐진 듯한 호박색 눈은 없던 보호본능도 생겨나게 할 법했다.
“이거도 입어 볼래?”
키엘은 얼떨결에 벨라가 전해주는 옷들을 받아들고 탈의실로 향했다.
거울 앞에 선 그는, 자신이 얼마나 어려졌는지 더 크게 실감했다. 그는 벨라가 들리지 않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종도 필요 없다고 하면, 도대체 나를 왜 데리고 있겠다는 거지?’
비싼 옷들을 사주는 걸 보면, 아무래도 오래 지낼 생각으로 자신을 데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하필 이렇게 값진 옷들일까.
- “마, 맛있게 클게요.”
그는 마른 입술을 살짝 깨물며 벽에 자신의 이마를 갖다 댔다.
‘설마… 그 말 듣고 나를 노리개로 키우려는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