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ilogue -->
여행용의 두꺼운 외투를 입은 훤칠한 키의 남자들이 여관으로 들어왔다. 하나같이 젊고 눈부시게 잘생긴 남자들이라 여관 안의 사람들은 그들이 뭐 하는 일행인지 매우 궁금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 사이에서 꽤 작은 키의 한 명이 나와서 카운터로 다가갔다. 헐렁한 망토를 뒤집어 쓴데다가 코트의 후드까지 덧쓰고 있어서 처음엔 전혀 몰랐는데, 그는, 아니, 그녀는 목소리가 아주 예쁜 여자였다.
"하루 묵을 방 두개 준비해주세요. 큰방 하나 작은방 하나. 아, 전망 좋은 데로요."
"큰 방 하나로도 충분해."
그녀의 말을 끊고 뒤에 있던 은빛 머리를 한 남자가 후드를 벗으며 말했다.
"괜찮겠어, 세르?"
"그 쪽이 더 낫지 않겠어?"
세르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후드 아래 있을 것이라고 상상치 못한 무척이나 잘생긴 얼굴에 여관 종업원 여럿이 이 쪽을 넋놓고 바라보았다. 여자가 자기 것이라는 듯 그 미청년의 얼굴을 가리자 다들 주인이 있는 남자라 생각했는지 아쉽다는 듯 고개를 돌리는 여자도 있었고, 주인이 있는 꽃도 구경은 할 수 있다며 계속 쳐다보는 여자도, 어떻게 빼앗을 수 없을까 하며 남의 것을 더 탐내는 여자들도 있었다.
그만큼 그 남자의 외모는 보기 드문 최상급이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은빛 눈동자와 부드러운 콧날 선이 마치 조각상같았다. 웃는 얼굴은 아찔할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옆의 여자가 부러울 정도다.
"다섯 명짜리 방 하나 주세요."
그녀는 유렌, 세르, 슈, 미르까지 인원수를 세 보고 종업원에게 말했다. 종업원은 방값과 함께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전망이 좋은 곳 중에서 가장 큰 방은 베드가 있는 4인실이고, 6인 이상 10인 이하의 사람들이 쓸 수 있는 베드 없는 큰 방이 있긴 합니다만 골목으로 창이 나 있습니다."
애매하군…….
4인실이라면 침대가 네 개. 그렇다면? 뒤에서 호리호리한 체격의 한 남자가 나와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녀가 아까의 미청년의 주인이라고 생각한 여자들은 깜짝 놀랐다. 오빠인가? 둘 중 하나는 오빠일 거야, 그럼.
"나랑 침대 같이 쓰면 되겠네! 아저씨, 그 방으로 줘요."
***
나는 후드를 벗으며 미르를 혼냈다. 정말이지, 아까 그 사람들 다 쳐다봤다구! 난 더 이상 귀족이 아니란 말야. 저번처럼 어떤 여귀족에게 넷 중 하나를 빼앗길지도 모른다구? 물론 그 땐 세르가 적당히 마무리 해 줬지만.
"게다가 나한테 남자들이 엄청 달려들걸? 그 때처럼 말야."
남자 넷을 거느리는 미소녀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내노라 하는 총각들이 자기도 애인으로 삼아달라고 달려왔었지. 1대 1법칙을 깨면 여러모로 주변 사람들이 가만두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보고 있지 않으니 자기도 끼어들 여지가 있다고 판단해버린 것이다.
미르는 그 얘길 듣고 입을 비죽 내밀었다.
"알았어. 남들 앞에선 조심할게."
하지만 나는 그에게 벌과 함께 족쇄를 내렸다.
"벌로 미르는 여기서 내 오빠."
"앗, 너무해!"
시아 오빠라고 하면 여자들이 나한테 엄청 달려드는데……. 일단 애인은 아니니까.
나는 모자로 귀를 꾹 눌러 가리는 슈를 보고 손짓했다. 밥 먹으러 내려가자! 인간의 식사는 오랜만이야.
나는 테이블에 앉아 메뉴판을 한참 바라보다 손을 위로 쳐들고 종업원을 불렀다.
"여기 콘 크림스프랑 샐러드! 그리고 미르는 토마토스프, 슈는 버섯스프……."
미르는 깜짝 놀라서 외쳤다.
"아앗, 나 토마토 엄청 싫어하는 거 알면서! 토마토 스프는 절대 안 돼!"
"양송이 많이 넣어서 주세요. 무화과 파이랑."
슈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세르와 유렌도 적당한 메뉴와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나는 문득 옆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손님이 들어오고 있었다. 키가 굉장히 큰데……. 우리처럼 후드를 깊게 뒤집어 쓰고 있네? 얼굴의 반은 보였다. 꽤 반듯하고 남자다운 턱선이다. 유렌이 피부가 하얗게 된 버전이라고 보면 될까.
나는 뺨을 감싸고 얌전히 그를 바라보았다. 주문했던 식사가 나왔다. 옥수수 스프를 뜨면서도 그 남자가 다른 일행과 함께 자리가 없어 쩔쩔매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우리는 다섯 명이라, 의자가 이 쪽과 맞은 편 각각 세 개씩, 여섯 명짜리 테이블을 거의 전부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접시를 들고 착착 걸어가 미르의 무릎 위에 앉았다. 이게 웬 횡재냐, 하고 미르는 나를 바로 끌어안았다. 나는 손을 들어 그들을 불렀다. 괜찮으면 이 쪽에 합석하지 않겠냐고.
그 남자는 호의에 감사하다며 빙그레 웃으며 내 자리로 다가왔다. 보통이면 거절할 텐데 꽤 사정이 급했나 보다. 하긴, 요즘은 축제 기간이라 방을 구하기도 테이블을 찾기도 쉽지 않을 테니까.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모레부터 축제가 시작한다. 어제 남아 있었던 남은 방도 다 찼겠지.
“라콘 왕국의 스피아 축제, 유명하죠? 그거 보러 오신 거에요?”
그 남자의 동행이 식사를 주문하며 우리에게 물었다. 세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저희도 축제 보러 왔어요! 어때요? 뭐가 가장 기대되나요? 어디서부터 오셨어요?”
갑자기 많은 것을 묻는 그를 세르가 이상하게 쳐다보자, 옆의 남자는 그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나는 아까부터 그 남자에게 계속 시선이 갔다. 저 후드 안은 어떨까? 무지 맛있어 보이는 향이 난다. 혹시 유렌처럼 엘프 혼혈인가? 하지만 혼혈보다는 쿼터, 아니, 쿼터보다 더 연했다. 단지 엘프의 향만 묻혀 온 것처럼.
엘프에 물 50L정도를 탄 것 같은 맛이랄까. 그런 밍밍한 향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수해 보이진 않았다. 나머지도 충분히 독특한 냄새였으니까.
식사를 끝내고 우리는 축제 준비 중인 마을을 거닐었다. 미르가 종종 한 곳에 집중해서 우리를 잃을 뻔 하긴 했지만 귀신같이 잘 찾아오기 때문에 이젠 신경쓰지 않았다. 나는 문득 아까 본 것과 똑같은 모습의 사람이 눈에 띄자 세르에게 잠시 얘기하고 무심결에 그를 졸졸 따라갔다.
골목까지 들어간 그는 후드를 벗어내렸다. 나는 입을 하아 하고 벌렸다. 짙은 청푸른빛 머리카락이 어깨를 살짝 덮을 듯 흘러내리며 근육질의 목과 반듯한 이목구비를 감쌌다. 강한 눈매 사이에는 연한 호수빛의 맑은 눈동자가 있었다. 우와, 정말 예쁘다! 내가 침을 흘리며 바라보고 있는 것을 그 남자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옆의 동행과 얘기했다.
‘왕자님……, 축제……, 시찰…….’
왕자님? 저 사람 왕자야? 라콘 왕국의? 아니면 타국의? 나는 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안 돼 실프까지 불러냈다. 그 순간 동행이었던 남자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를 발견한 그 남자는 정확히 내 목에 칼을 겨누었다.
칼질을 해도 수액 조금 흘리고 금방 원상복귀되지만 보통 이럴 때 함부로 행동하면 쓸데없이 일이 커지게 되기 때문에 나는 양 손을 들고 적이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하지만 훔쳐듣던 건 어떻게 변명하지? 아니다, 그 거리에서 들키지도 않고 계속 훔쳐 들을 수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겠지. 나는 후드를 벗고 글썽글썽한 눈동자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특히 왕자라는 그 짙은 푸른 머리의 잘생긴 남자 쪽을 더더욱.
“아까……, 같이 합석했던 분이 보이시길래 반가워서 그만 따라와 본 거에요.”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 남자는 내 순진해 보이는 눈망울에 걸려들었는지 금세 검을 거두고 내 몸을 살폈다.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였다. 검을 겨눠졌을 뿐이니 다치진 않았다. 대신 다른 소녀들이라면 놀랐겠지. 나도 놀란 척 그의 가슴에 살짝 몸을 기대보았다. 우와와! 그, 근육이 정말 죽인다! 유렌보다 더 탄탄할지도? 사실 유렌은 탄력 있고 부드러운 편이고 정작 강철 근육인 건 미르 쪽이었으니까.
나는 볼을 발그레하게 붉히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남자 역시 아까부터 피워대는 내 향에 참지 못하겠는지 살짝 내게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표정은 그대로지만…….
“어린 여자 분이신데 혼자 이런 곳까지 와 계시다니……. 일행 분들은 다 어디에 계십니까? 제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나는 정령사다. 그럴 필요는 없다. 나는 이럴 때는 괜히 약한 척 하며 데려다 달라고 징징대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대로 실행해 보았다. 역시 먹혀들었나.
“알겠습니다. 일단 아까 그 숙박업소까지 데려다 드리면 될까요?”
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금 안쓰럽다는 듯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검을 겨누었으니 꽤 놀랐겠지. 그리고 앞으로는 너무 함부로 검집에서 검을 꺼내 위협하는 것도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나 작고 여린 소녀에게……. 나는 그가 잘못된 생각을 하게 만든 것에 대한 죄책감도 없이 약하고 여리여리한 척 했다. 보통 남자라면 바로 달려들 텐데 그는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명백하면서도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런 남자……, 마음에 든다. 빨리 타오르지 않는 만큼 빠르게 식지도 않는다. 분명 최고일 거야. 어떤 면에서든지!
그는 나를 데려다주면서 자신에 대한 얘기도 조금씩 해 주었다. 이름은 지오. 축제를 즐기고 나서, 그 다음에는 여기서 좀 더 남동쪽으로 내려가 로티라는 도시에서 일주일 걸리는 크루즈에 탑승할 거라고. 나는 크루즈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래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와 함께 간다면.
나를 여관까지 데려다 주고 작별한 그가 살풋 아쉽다는 듯한 눈빛을 남기자 나는 확신했다. 그래, 크루즈에 간다고 했지? 미르를 시켜서 바로 표를 얻어야지! 그리고 따라가는 거야.
분명 엄청 즐거울 거야! 그 남자를 갖고 노는 것도, 그리고 그 뒤에 찾아오는 달콤한 과실도.
그 왕자와의 얘기도, 그리고 앞으로의 유희도 정말로 진짜 잔뜩 기대되는 일이다. 유렌이나 슈, 그리고 미르, 세르, 엘릭과 쭉 함께 즐길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
일단은 그 남자의 맛……, 어떨까나?
========== 작품 후기 ==========
지금까지 꽃의 여왕을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기는 다음 번쯤에? 차기작은 다음주쯤에. 개인지는 블로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