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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여왕-220화 (220/226)

<-- 12. 3년 후 -->

중얼거리는 내 뒤로 미르가 나를 감싸안았다. 나를 지키려고 본인의 얼굴을 희생한 행동이었지만 굳이 그럴 것까지야 있나. 당연하겠지만 미르의 얼굴을 본 레오는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한동안 왜 이것이 여기에 있는지 스스로 생각하고 답을 낸 후,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꼭 닮은 인간을 쳐다보았다.

“아버지?”

“…….”

미르는 못 들은 척 했다. 야, 그게 정답이 될 리가 없잖아. 그런데 그건 그렇다쳐도 레오티드인가 하는 소년은 미르를 보고도 놀란 척만 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네? 왜 저 놈이 여기에 있는 건지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가 보지?

“아무래도 상관없지요. 원하는 여자였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손에 넣는 것이 당연하고, 나 역시 그렇게 배워왔습니다. 아마 신분을 숨기고 그 여자와 결혼해서 케르타와 먼 제국에서 함께 살 결정을 하고 행방불명된 거겠죠.”

행방불명!? 왕위를 물려주고 왔다면서, 행방불명이라고? 미르는 급히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그치만 난 다 들었어. 너 나중에 이거 불어야 할 거야. 제대로 마무리도 짓지 않고 유희 하나를 끝내는 건 매너가 아니잖아!

“그, 그치만 녀석들이 안 놔주더라구! 시아를 빨리 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어! 게다가 나름 조치도 취해 놨다구.”

미르는 입을 쭉 내밀며 그렇게 외쳤다. 나랑 미르가 얘기하던 사이를 그가 다시 끼어들었다.

“하지만 저도 저 여자를 원해요.”

야, 공작님이라고 부르랬잖아! 루페닌 왕국 국왕은 공작님, 공작님하며 나한테 굽실굽실이던데 넌 뭐야?

“제 얘기 듣고는 있는 겁니까?”

“아, 미안. 뭐랬지?”

“원한다고요, 당신을.”

나는 멀뚱히 그를 쳐다보았다. 도전적인 홍록빛 눈동자가 나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나는 그 눈동자를 피하며 중얼거렸다. 맛있게 익긴 했지만…….

“나를 안 원하는 남자는 없는걸.”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여유롭게 하하 웃었다. 그 뒤로 흰 머리, 하지만 젊은 얼굴을 한 또 다름 20대의 남자가 다가왔다. 저 녀석은 안다. 날더러 재수없다 재수없다 되뇌던 하민 마이아르. 케르타의 재상 아닌가. 또 하나 늙은 재상이 있었지만 그 사람은 나이도 나이고, 아마 여기 오진 않았겠지.

“좋습니다. 제가 이 쪽에 있을 동안 최선을 다해 당신의 눈에 들어 보겠습니다. 그걸 위한 시간 정도는 내 줄 수 있죠?”

나는 마침 심심했고,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것 같으면 먹어줘도 되겠지. 요즘 특별한 일도 없었고 간식도 거의 안 먹었으니까.

미르는 나에게 한참 추궁당했고, 왜인지 그걸 본 아젤 님은 한동안 기분이 가라앉은 듯 했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저 남자……, 마음에 듭니까?”

“마음에 든다기보단……. 저 잘생긴 남자라면 다 좋아하는걸요.”

“…….”

아, 아젤님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제 아젤님도 17살이고, 명색이 성인이니까 거리낌없이 대해도 되겠지, 라며 헤실 웃었다.

“거기가 작은 건 싫지만.”

***

그 후로 정말로 레오는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자신의 매력을 어필했다. 나는 꽤 즐기며 그의 행동을 받아주었고. 하지만 그걸 탐탁치 않게 여기는 것은 엘릭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은 사 주고 싶은 옷이 있다며 레오가 내게 데이트 신청을 하자 내 저택의 별채, 즉 원래 아젤님의 거처였던 곳에 머무르고 있던 아젤님은 나에게 왜인지 질투하는 듯 하다.

“데이트라니, 좋겠네요.”

“어라? 아젤 님도 다른 영애들한테 의외로 인기 많았는걸요?”

데이트 하려면 지금이라도 할 수 있지 않으려나. 그 말대로 아젤님은 4년만에 굉장히 멋있어지고 키가 컸기 때문인지 저번 축하파티 때에도 여자들이 껌벅 죽었다. 얼굴이 나이 들어 보이진 않는데 특유의 침착하고 진지한 분위기 덕분에 세르처럼 얼굴에 비해 어른스러운 타입이랄까. 나랑 춤추고 나서는 거의 다른 여자들에게 파묻히다시피 했었지.

아젤은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세이시아 님, 저와 데이트 해 주시지 않겠어요?”

“네! 물론 좋죠. 내일 바로라도 가능해요!”

아젤님은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지긋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아니, 제가 원하는 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

잘 이해할 수 없었다.

***

사건은, 그날 밤에 일어났다.

레오가 사 주고 키스를 요구했지만 내가 발로 걷어찼던 그 예쁜 드레스를 입고 빙그르르 거울 앞에서 돌며 보람찬 웃음을 지었다. 의외로 보는 눈은 있는데? 레오는 아버지가 없어지고 왕좌를 물려받은 것과는 별개로 나를 보고 한눈에 반해, 그때부터 제국의 역사와 예법을 하민에게서 열심히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슬슬 됐다 싶은 시기에 제국으로 와서 나를 유혹하기 위해서.

나를 데려갈 거냐고 하니 그건 모르겠다고 했다. 그 때 나한테 혼나고 제국에 대해서도 확실히 학습한 모양이었다. 내가 못 가는 거야 당연하지. 나도 나름대로 공작이고 일이 있는걸. 아무리 꽃의 유희라고는 해도 말이지.

그는 내 일을 존중해 주었지만 또한 자신의 직업도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왕좌를 버리고 내 밑으로 들어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합의점을 찾기 위해 나를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고민되는데. 그건 레오의 생각일 뿐이고. 내가 걔를 맛있게 먹었다가는 인간인 레오가 꽃의 향에 잔뜩 취해서는 왕이고 뭐고 버리겠다고 달려올 게 뻔했다. 그게 바로 꽃의 여왕이니까. 그는 의외로 무척 신사적인 타입이었고, 레오의 뒤를 이을 만한 왕은 아직 없다. 생각 없이 먹었다가는 멀쩡한 케르타에 이상한 왕이 즉위해서, 특히 미르의 뒤를 잇는 미친 왕이 즉위한다면 아직 기울어졌지만 많이 무너지지는 않은 케르타는 군사를 추슬러 또다른 반역을 꾀할지도 몰랐다. 애초에 그런 상향밖에 모르는 망나니들을 한 국가로 묶은 미르가 잘못한 거다. 그런 애들은 자기들끼리 싸우게 놔둬야 하는데 괜히 통합해서는 남의 나라나 넘보게 하고 말야. 미르 나빠. 그러니까 오늘 밤은 미르를 괴롭혀야지.

아직 케르타에는 레오가 필요했다. 나는 아직 그를 조금 애태우다가, 한 20년쯤 더 지나서 익고 익어 물러버릴 때까지 익으면 그것도 색다른 맛이 아닐까 생각했다. 미중년? 게다가 십대부터 계속 한 꽃만을 바라봐 온 중년 수컷이라. 과연 맛이 어떨까……. 지금 열심히 하는 레오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가 너무 매력적인 걸 어쩌겠어.

츄릅 하고 입맛을 다시며 잠옷으로 도로 갈아입은 후 나는 자기 전에 수분 보충을 하기 위해 물컵을 집어들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잔을 내려놓고 미르의 방으로 향하려던 나는 멈칫했다. 그리고 다시 물을 한 모금 더 마셔보았다.

“……?”

왜 다른 맛이 나지? 맛은 문제가 없다. 중요한 건 물 안의 내용물이었다. 나는 물잔을 들고 미르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에게 권해 보았다.

“응? 뭐야? 물? 마시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르는 ‘시아가 날 위해서 물을 떠오다니, 감동이야! 평생 시아의 수족이 되어서 살래!’ 하며 쓸데없이 감격하곤 물을 한 입에 삼켰다.

그리고 급히 허리를 꺾더니 쿨럭거리며 물이 아니라 빨간 액체를 토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걸 쳐다보았다.

“???”

“우욱! 켈룩……! 시, 시아, 너무해에……!!”

“그 물 뭐야?”

“웁, 모르고, 마시게 한……, 콜록, 콜록!”

방 안의 소동에 시종인 루시나가 달려와 물잔과 그 옆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괴로운 표정의 미르를 보더니 소리를 질렀다.

“미, 미, 미르헬 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콜록! 침, 착해……! 그냥 내장이 약간 손상된 것 뿐이니까. 흐우……. 목 아파라.”

미르는 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피는 어느새 멎어 있었다. 목이 많이 상한 것 같다. 괜찮으려나? 내가 괜히 먹여보았나? 그냥 조금 이상한 것 같아서 미르에게 물어보려고 했을 뿐인데 나보다 미르가 더 과민 반응을 하네.

미르는 다 마신 물잔을 어느새 손에 들고 침착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잔의 안쪽을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입에서 흐르는 피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바로 멀쩡해지네. 역시 드래곤이구나.

“……독약이야. 오히려 네가 안 마셔서 다행이군.”

“독약?”

그나저나 나 마셨는데. 나 이제 독초가 되는 거야? 정령왕이니까 멀쩡했던 거겠지만, 적어도 내가 바로 알지 못했던 만큼 식물 성분의 독약은 아니다.

“종류는 모르겠지만 먹자마자 바로 효과가 나타나는 걸 보면 단숨에 죽일 용도로 이용한 약이겠군. 암살자라던가……. 요새 수상한 자들이 오가거나 한 건 없었고? 이 물은 네가 관리하는 건가?”

루시나는 당황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기분에 거짓은 없었다. 루시나가 물을 가져다 놓긴 했지만 그가 독을 넣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루시나가 물을 가져다 놓는 시각은 거의 정해져 있고, 대부분 이른 편이었다. 아마 저택에 누군가 잠입해서 그 시간에 독을 넣었을지도 모른다. 물잔을 가져다 놓고 그 사이에 독을 넣을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으니까. 범인은 내가 자리를 비운 오늘 루시나를 쭉 관찰하다가 틈을 봐 내가 먹을 물에 독을 넣었거나…….

그 때 천정이 쿵, 하고 울렸다. 뭐지? 미르는 그 쪽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말했다. 그리고 나를 단단히 껴안고는 곧이어 떨어지는 파편에게서 나를 가로막아 주었다. 위에서 싸우면서 검을 하도 쑤셔댔는지 천정이 산산조각나며 그 위에서 두 사람이 떨어졌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야, 저거. 정말 까만 옷에 까만 복면이잖아?

어떻게 빈틈 하나 없이 검정색일 수 있는 거지. 신기할 정도다. 암살자들은 흰자가 빛에 반사되지 않도록 검은 렌즈를 끼는 것은 물론이고 까만 색으로 눈꺼풀을 칠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만큼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조심스럽게 잠입한다는 얘기겠지만, 그 잠입 대상이 우리 집이 되면 또 곤란하지.

그 암살자는 한동안 격투를 벌인 듯 복면 한 쪽이 찢어져 있었다. 얼마나 더 얼굴을 감싼 건지 복면 아래에 있는 것도 얼굴이 아니라 가짜 얼굴 가죽같았다. 베인 부분에 피가 나는 게 아니라 살이 덜렁거리는 걸 보면.

그 암살자에게 검을 겨누는 것은 쥬얼이었다. 서로 실력이 막상막하인듯 하지만 정작 더 많이 다친 것은 쥬얼이다. 본래 숨어서 공격하는 스타일이라 기사와 암살자가 맞붙으면 당연히 기사가 이긴다. 그러나 쥬얼이 저렇게 고전할 정도면 암살자의 본래 실력도 만만치 않은 듯 하다. 천정이 부서질 정도의 굉음이 들리자 세르와 유렌 역시 이 쪽으로 달려왔다. 그 때는 미르가 이미 결계를 친 뒤였다.

암살자는 낭패의 표정이 강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망칠 곳을 찾는 모양이지만 미르가 결계를 친 이상 결계에 들어오는 건 마음대로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아, 아가씨……?”

그래, 아가씨라고 부르는 건 마음대로겠지만……. 잠깐, 뭐라고?

아가씨라니. 혹시 나 말하는 거야? 공작이 된 후로는 한 번도 그런 소리 들어본 적 없다. 괜히 반가워서 암살자에 대한 호감이 조금 생겼다. 하지만 내 물잔에 독을 넣은 건 용서할 수 없어. 얌전히 죽어서 식물의 비료가 되어랏!

그나저나 나한테 아가씨라고 불렀던 남자가 한 명 있었지. 그 사람도 이 사람과 아주 비슷한……. 잠깐, 아주 비슷하다고?

나는 암살자의 어디를 먼저 잘라낼까 고민 중인 미르와 유렌을 밀어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 암살자의 복면과 가짜 얼굴을 벗겨냈다.

“…….”

“…….”

놀란 표정의 케이가 있었다. 3년이 지나긴 했지만 거의 달라진 곳은 없었다. 그 남자의 얼굴을 아는지, 유렌도 아, 하고 소리를 냈다.

“전에 내게 50토크에 몸을 판 녀석이로군요.”

“……50토크?”

“시아랑도 아는 사이입니까?”

“나 10토크에 이 남자를 산 적 있어.”

“10토크라니요?”

싸구려네.

그러게요. 싸구려 몸이네요.

나와 유렌이 경멸스러운 눈으로 중얼거리자 그 남자, 케이는 당황해서 소리쳤다.

“아가씨가 왜 여기에!? 아니, 그보다 이번 암살 임무의 대상이 당신이었어요!?”

“그럼 몰랐어?”

케이는 살려달라는 듯 내 발목을 붙잡고 울었다.

“시렌느 공작이라고만 알았지, 설마 아가씨였다고는…….”

케이는 알고 보니 본명은 케이즈. 검은 달 길드의 암살자라고 한다. 나였다는 걸 알았다면 당연히 이 일을 맡지 않았을 거라나. 그 때는 연달아 좋지 않은 일을 당해 징계를 받느라 시골 술집에서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고. 정신 가다듬으라고 몸 파는 술집에 보내다니, 그 길드 마스터도 센스가 장난이 아닌데.

유렌과 그 전에 만났기 때문에 유렌에게 한참 붙들려 이리저리 끌려다녔고 그걸 들켰기 때문에 마스터에게 징계를 받았다나 뭐라나. 복귀한 지는 꽤 되었고, 이번 임무를 실패하면 그는 끝장이라고 한다.

“그치만 어쩌라구. 나는 죽어줄 수 없는데.”

“압니다. 어쩔 수 없지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 순정을 바친 분이신데 어떻게 죽이겠습니까.”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대신 내게 부탁했다.

“저를 거둬 주세요.”

“응?”

돌아가면 죽는단 말입니다!! 나는 내 다리에 다시 달라붙는 케이즈를 유렌이 발로 차는 것을 바라보았다. 너무 때리진 마. 그래도 불쌍하잖아.

“이놈, 근성이 없군요. 사나이라면 죽을 각오로 죽음과 맞서야 하거늘.”

“그건 결국 죽으라는 말이잖아! 나는 아가씨를 두고 아직 죽기 싫단 말야, 적어도, 그 날 밤 같은 황홀함을 한 번만이라도!”

“그냥 죽으십시오.”

유렌이 다시 그를 걷어찼다. 그치만 실력은 꽤 있는 것 같은데. 죽게 버리긴 아깝지 않아? 그날 밤도 꽤 괜찮았고……. 10토크짜리라는 게 아까울 정도로.

나는 케이를 다굴하려는 남자들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진지하게 케이에게 물었다. 가벼워 보이지만 그는 의외로 진심이다. 뒷골목 남자들이란 진심과 장난을 섞어 말하는 경향이 있어서.

“하루종일 막 부려먹고 골방에서 재워도? 월급 하나도 안 줘도?”

“제가 어디서든 못 자겠습니까.”

“좋아, 그럼 키워줄게.”

유렌이 당황해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를 살살 쓰다듬어 달래주고서 한 마디 덧붙였다.

“대신 조건이 있어.”

“뭔데요?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까!”

나는 쥬얼을 가리켰다.

“첫 번째로 쥬얼이랑 같이 지낼 것. 물론 쥬얼이 자라는 곳에서 자고 주는 것만 먹고. 나는 전혀 손대지 않을 테니까. 알겠지?”

“어……. 저쪽……, 도련님과?”

케이는 이제 자신의 생활을 맡아 줄 남자가 방금까지 미친 듯 싸우던 그 남자임을 확인하자 안색이 나빠졌다. 쥬얼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름을 말했다.

“……쥬얼 아메티스트.”

“케이즈입니다. 성은 없고. 그나저나 정말?”

나는 케이의 말을 무시하고 나머지 얘기를 했다.

“두 번째로 쥬얼을 가르칠 것. 네가 알고 있는 것 모두 말야. 그렇게만 해 주면 살려 주겠어. 길드로 돌려보내지도 않고 길드에게서 너를 지켜주겠다고.”

쥬얼은 내가 그의 호위무사행을 격려하며 선생까지 붙여 주자 방금까지 싸우던 상대라는 것도 잊고 기뻐했다. 케이는 중얼거렸다. 꼭 죽이러 오진 않을지도……. 마스터는 역시 방임주의니까.

나는 손뼉을 짝 쳤다.

“이제 됐지? 안그래도 쥬얼에게 제대로 된 선생님이 필요했는데 우리 주변에는 그런 기술을 가진 사람이 없어서 말야. 초빙하기도 쉽지 않고.”

“정말……, 고마워요! 주인님!”

쥬얼은 내게 다가와 덥석 안겼다. 내가 거의 끌어안긴 꼴이 되긴 했지만, 나는 쥬얼이 귀여워서 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그래. 무슨 일이 있어도 하고 싶다는데 어쩌겠어.

미르는 괜히 자기만 피를 토하고 훈훈하게 끝나자 욕구를 풀지 못해 불만이 쌓인 듯 했다. 역시 오늘은 미르와 놀아줘야겠다. 유렌은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아마 내가 하지 말라고 해도 당분간은 케이를 졸졸 따라다니며 감시하겠지.

누가 뭐래도 역시 케이는 나를 못 잊었는지 쥬얼을 가르치는 시간이 아니면 계속 내 곁에 붙어 있었고, 가끔 신기한 걸 물어다주기도 했다. 유렌은 한동안 수상한 케이즈를 관찰하다가 별달리 알아낸 것이 없자 포기하고 요새는 다시 한가로운 생활을 즐기는 중이었다. 아젤은 유렌의 티 타임에 초대받아 그가 권하는 장미차를 한 모금 머금어 보았다.

“달달하네요. 이런 맛 좋아하셨어요?”

유렌은 훗 웃으며 말했다.

“처음 마셨을 때는 이상한 맛이라고 생각했었죠. 지금은 즐기고 있어요. 시아가 좋아하는 차이기도 하고.”

유렌은 시아와의 첫 만남. 장미 차를 대접받았을 때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그 때와 지금, 많이 변한 것도 있고 전혀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많이 변한 것은 세월. 변하지 않은 것은……, 마음 속.

“지금은 정말 아주 좋아해요.”

매우 즐겁다는 듯 웃는 유렌을 아젤 역시 미소지으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넌지시 얘기를 꺼냈다.

“제가 유렌 님과 세이시아 님의 결혼식 직전에 굳이 아카데미로 떠난 이유는 알고 있으시죠?”

유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당연하겠지만 알고 있었다. 시아 역시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아는 유난히 아젤에게는 둔하게 굴더라고. 내 마음이고 다른 남자 마음이고 다 알고 있었던 주제에. 요즘은 케르타의 왕이라는 녀석 마음을 갖고 핥고 있지. 유일하게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 마족인 엘릭이었는데, 마족도 아닌 아젤은 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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