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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여왕-219화 (219/226)

<-- 12. 3년 후 -->

“……?”

쥬스를 나눠마시다가 우리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관심을 두었다. 갑자기 앞쪽이 떠들썩해졌다. 여제가 나오나 보다. 나는 크게 개의치 않고 계속 뒤에서 엘릭과 서 있었다. 그 때 미르가 당황한 표정으로 내게 앵겨들어 쩔쩔맸다.

“왜 그래? 미르.”

“오늘 무슨 축하파티인지 알아냈어!”

“……무슨 파티인데?”

분명 사신이 우리 나라에 방문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라지 않았나? 그래서 루페닌 왕국, 아크샤 왕국, 라콘 왕국, 케르타 왕국 귀족들도 여기 많이 있잖아. 넌 얼마나 초대장에 관심이 없었으면 이제야 알아냈답시고…….

“케르타 왕국 국왕이 우리 나라를 방문한 기념이래!”

“……뭐?”

국왕이면 너잖아. 아니, 국왕 물려주고 왔다니 아마 미르의 아들 중 하나겠네. 그런데 국왕일 때 얼굴 그대로 여기로 와버렸으니, 우리 제국에서 케르타 국왕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나랑, 나와 같이 갔던 몇몇 귀족들 뿐이라 안심했는데 케르타 쪽에서 직접 와버리면 이건 뭐 방법이 없어진다. 이미 미르의 얼굴을 보고 케르타 출신 귀족들 몇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난 몰라. 정리를 제대로 안한 미르 탓이야.

나는 여제의 앞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마치 제국의 문화를 미리 배운 것처럼 여제에게 제국식으로 허리를 숙여 정중히 인사하는 한 케르타 복식의 남성이 보였다. 화려하고 이국적인 의상이었으나 제국 남자처럼 반듯하게 예법을 구사하는 모습이 제국의 여자들 사이에서 꽤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 같다. 아냐아냐, 속지마 니네. 케르타 인들은 여자가 어쩌니 저쩌니 재수없기가 진짜 새끼 밴 여름 파리같은 놈들이거든. 나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미르의 선명한 빨강에 검정을 섞은 듯 아주 진하고 어두운 붉은 머리와 살짝 어두운 톤의 피부색. 그리고 적록색의 눈동자, 미르처럼 예쁜 얼굴과 남부인 특유의 살짝 거친 듯한 선이 섞인 미남. 어디서 많이 본 조합인데.

“…….”

“쟨 내 기억에 따르면 라이만 키시이렐의 첫째 아들이었어. 이름은 레오 어쩌구였던 것 같은데.”

미르의 말에 내가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꼭 남의 일처럼 말하네.”

“남의 일이다 뭐.”

능청스럽긴. 하긴 미르는 지금 케르타 왕이 아니고, 케르타 왕이었던 남자 또한 아니다. 남의 일일 수밖에. 그는 결혼은 내가 처음이며 당연히 아들도 없는 순결남이었다. 그나저나 내게 쟤를 본 적 있다는 건 모르지? 너네 나라에서 말야. 우연히 만나서 싸가지 없게 말하길래 몇 번 틱틱대줬는데 그건 지금도 기억할려나 모르겠네.

“왕의 자리를 잠시 비워 두고 왔습니다. 카덴 최고의 자리에 올라계신 황제 폐하를 한번이라도 꼭 뵙고 싶어서요. 그리고 저희 쪽에서도 그 계약의 연장을 원하고 있습니다.”

케르타의 새 국왕, 대략 레오는 신사적으로 웃으며 황제에게 성심성의껏 예를 다했다. 자기가 황제니 어쩌니 건방지게 굴던 전 미르와는 차원이 다르네. 그런데 4년 전의 그는 틀림없는 미르 판박이 싸가지였다. 어째서 저렇게 바뀐 걸까? 왕이 되고 철이 들었나? 우와, 신기하네.

여제는 빙긋 웃으며 그를 환대해주었다. 하긴 이런 호화로운 파티까지 열었으니 말 다했지. 본국의 풍취를 느끼라고 열대과일로 잔뜩 장식하고,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 케르타의 풍습에 따라 시원한 물과 과일주스까지 챙겨놓고. 나야 덤으로 행복하지만.

여제는 후후 웃으며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굳이 우리 제국의 귀족들에게 꼭 참석해 달라고 부탁한 이유는 무엇이오? 그것도 4년 전 케르타 왕국에 사신으로 갔던 인원들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전부 꼭 불러달라니.”

나는 순간 귀가 흠칫했다. 누구, 누구라고? 설마 내가 부대장이었던 그 외교사절단? 그러고 보니 모두 와 있네. 리더였던 후작은 은퇴했지만 일부러 불러냈고. 살짝 엘릭의 뒤에 숨어 어깨 넘어로 그들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레오는 여유롭게 여제를 앞에 두고 하하 웃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숨길 수도 없으니 딱 잘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때 저희 나라에 오신 귀족분들 중 하나를 제가 탐내고 있습니다.”

황제 앞에서 그런 말을 대놓고 하다니, 제정신이야? 나는 미친 놈 보듯 그를 쳐다보았으나 여제는 별로 개의치 않는지 호쾌하게 하하 웃었다.

“그렇소? 허나 인재는 양보할 수 없겠소. 그 쪽에서 능력껏 빼가는 것이야 어찌할 수 없으나 짐은 짐 나름대로 그를 붙잡아두려고 노력할 테니 말이오. 시렌느 공작 같은 드문 인재라면 더더욱이나.”

……나 말야?

레오는 빙긋 웃었다. 나는 급히 허리를 숙이고 미르와 함께 나가려고 하다가 아젤 님에게 가로막혔다. 어, 아젤 님도 오늘이 사교계의 첫 데뷔였지. 최연소 현자인데다 각국의 모든 귀족들이 한데 모인 자리니 어필하기엔 좋을 것이다. 그는 꽤 반가운 얼굴로 나를 불러세웠다.

“아, 세이시아 님. 여기 계셨군요. 잠시 저와 대화를 조금 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어……, 네.”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

아젤은 다행히 남의 시선이 별로 닿지 않는 구석에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길 원했다. 나는 멍하니 그가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아젤 님은 훗 웃으며 내 장갑 낀 손을 잡고 자신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문득 그를 바라보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전 타인이 제 몸에 손대는 건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알고 있다. 귀여워서 만지려고 했다가 혼났으니까. 그런데 왜……? 하지만 아젤은 입으로야 그렇게 말하고 있으면서도, 내 팔을 함부로 쥐고 이번엔 자신의 뺨에 올려놓았다.

“절 만지고 싶습니까?”

“이, 이미 만지고 있는데…….”

나는 엉겁결에 그렇게 대답했다. 이미 내 손을 잡고 뺨을 만지게 하고 있으면서 만지고 싶냐고 물어봐야 내가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아젤은 그렇구나, 하고 웃으면서도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가요? 하지만 춤출 때는 어쩔 수 없잖아요.”

“그, 그렇네요.”

나는 절대적으로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열심히 끄덕끄덕끄덕거렸다.

“그런 의미로, 첫 댄스, 세이시아 님께 신청해도 되겠습니까?”

그런 의미가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상큼하게 사교계 데뷔의 첫 번째 댄스를 나에게 부탁했다. 당연히 거절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그렇게 귀여워하던 스승님의 첫 댄스 상대라니!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손을 쥐고 나섰다. 분명 먼저 손을 잡은 것은 난데, 어느샌가 보폭과 키가 큰 아젤이 나를 리드하고 있었다. 어어, 내가 리드해야 하는데. 비록 내가 춤은 아젤님께 배웠다고야 하지만 먼저 데뷔해서 춤춰 본 경험도 훨씬 많은 내가 리드해야 하잖아? 얼결에 그에게 리드당해서 괜히 분해졌는지 춤추는 동안은 무조건 내가 리드할테야! 하고 마음먹은 후 크게 왼발을 뻗었다. 아젤은 위에서 후후 웃으며 내 허리를 감싸안고 나를 붙잡은 채 다른 쪽으로 스텝을 밟았다.

‘어어……?’

잠깐, 이게 아닌데? 이래선 안 되는데……. 나는 난감해져서 어느새 스스로의 스텝을 잊고 아젤 님의 움직임에 따르기만 할 뿐이었다.

“세이시아 님.”

“어?”

“이 쪽으로.”

그는 내 몸을 휘어감고 플로어의 가장자리로 갔다. 당연히 그 동안은 보폭이 짧은 내가 그에게 끌리다시피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춤추는 내내 아젤 님의 허를 찌르는 공격에 쩔쩔매며 그의 몸에 매달려 다녔다. 으으으! 뭐야, 정말로!!

한 곡이 끝나고 지쳐서 벽을 붙들고 쉬는 내게 아젤님이 쿡쿡 웃으며 말했다.

“괜찮으세요?”

요새 춤을 안 춘지도 꽤 되어서 체력이……. 그는 나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손을 가져다 댔다. 그 때,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었군요, 제가 누군지는 아시겠죠?”

멍하게 그 쪽을 바라보았다. 다크 레드의 머리카락을 하고 흩날리는 케르타의 복식을 입은 어두운 피부색의 남자였다. 나한테 대체 무슨 볼일이지? 나는 고개를 든 채 딱 굳어버렸다. 춤이 끝난 것을 보고 나를 쫓아온 미르 역시 움찔하며 그 자리에 섰다.

누, 누군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괜히 딱 잡아떼고 싶었다.

깔끔한 외모가 돋보이는 청년이 된 그 때의 그 소년, 남자는 빙그레 미소짓더니 내게 제국식 그대로 허리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레오티드 키시이렐. 오랜만이군요, 나의 꽃.”

나는 입을 딱 벌렸다. 나의 꽃이라니. 그런 점은 어째 너네 아빠랑 판박이냐.

========== 작품 후기 ==========

새끼 밴 여름 파리 : 파리채로 잡으면 구더기가 배에서 우글우글 새어나와서,, -ㅅ-;;

레오 21세 하민 25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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