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3년 후 -->
***
"히이잉~, 세르으으으~~."
나는 아젤 님과 어영부영 헤어진 후 바로 집으로 돌아가 울먹이며 세르를 불렀다. 역시 아직 우울할 때 가장 의지가 되는 것은 그였다. 세르는 나를 두 팔로 껴안아주고 토닥거리며 밖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침착하게 내게 물었다.
"응? 무슨 일이야? 누가 뭐라고 했어? 누가 우리 시아를 기분나쁘게 했을까. 자, 자, 괜찮으니까 안겨서 말해 보렴. 오빠가 다 알아서 해 줄테니까."
"세르으으으! 으잉……."
그는 역시 너무 다정했다. 별 일 아닌데 괜히 더 응석부리게 된다.
"그래, 그래. 무슨 일이니?"
나는 괜히 그의 품에 안겨서 말은 하지 않고 우는 소리를 냈다. 조금 우울했다.
"아젤님이, 아젤님이……."
"아젤? 만났어?"
세르의 의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의 무릎에 안긴 내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오찬 전에 만났겠구나. 만나서 무슨 얘기라도 했니?"
"그게, 그게에……!!"
나는 아젤 님이 내게 해 준대로 그에게 말했다. 그치만 세르가 아젤님에게 뭐라고 하는 건 싫은데. 그의 말이 옳다. 그가 무엇을 하든 내가 관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왜 갑자기 그렇게 나에게 쌀쌀맞게 대한 걸까? 전의 그는 그러지 않았는데.
"아젤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다고?"
"응."
"우리에게는 '갑자기'일 수 있겠지만 인간인 그에게는 4년이란 꽤 긴 세월이지."
"응?"
나는 그의 무릎에 뺨을 대고 부볐다. 세르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 때의 아젤님은 열 살이 갓 넘은 미성년자. 지금은 성인. 게다가 4년이나 국제 아카데미에 다녔다. 예전의 아젤 역시 똑똑했지만 역시 어리기에 어른의 입장에서는 조금 얕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보고 듣고 경험한 것도 무척 많을 것이다. 생각이나 생활방식이 달라졌을 확률도 매우 높다.
하지만 제자에 대한 태도가 4년만에 바뀌는 것도, 그와 지금까지 쭉 편지를 주고받아 온 나로는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었다. 아니, 제자가 아니라고 했지…….
"아젤 님은 내가 제자인 게 싫은 건가?"
"……아마 너를 연모하기 때문에 제자로 받아들일 수 없는지도 모르지."
그럴 리가. 나는 절대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세르를 응시했다. 세르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야. 아냐, 아젤 님은 그렇지 않아. 어째서? 왜냐하면 아젤님은 귀엽고 아젤님이니까! 게다가 나보다 한참 어린데……!
나는 그가 루시나와 동갑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루시나도 당분간은 못 먹겠다.
***
아젤 님과 약속한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 그가 약속대로 우리 저택에 방문했다. 돌아왔다, 고 하는 편이 더 맞겠지만 말이다.
아젤 님은 나와 쥬얼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아까 낮에 나에게 한 말은 마치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것처럼.
"세르, 오랜만이군요. 그리고 세이시아 님과는……, 아까 만났죠?"
나는 순간 아젤의 입에서 나와의 만남이 나오자 흠칫했다. 아젤은 웃으며 말했다.
"섭섭했어요. 4년째 못 봤다곤 해도 저를 못 알아보시다니."
내가 입을 딱 벌리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있자, 미르가 내 팔을 쥐고 은근히 뒤에서 포옥 안았다.
"시아, 저 사람 누구야? 응? 말해줄래?"
"어, 아젤님……. 내……, 내……."
스승, 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아까 '스승이 아니다'라고 말한 아젤 님의 대사가 떠올려 그렇게 말할 수도 없었다. 미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댔다.
"애인? 밥? 장난감? 그렇고 그런 사이야? 이거 경계해야 되나?"
"저 분은 현자 아젤 칸스티어, 과거 작위를 받기 전에 시아의 선생님이었던 분입니다, 미르헬. 경망스러운 발언은 삼가세요."
유렌이 미르의 입을 막기 위해 강조하며 끼어들었다. 아젤은 여전히 빙긋 웃고 있었다. 이상한데. 저런 말을 듣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다니, 뭔가 있다! 틀림없이!!
“그럼 저쪽 분은?”
아젤이 눈짓하는 것은 내 바로 옆에 서 있는 정장 차림의 쥬얼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조금 웃음을 띠며 쥬얼을 소개했다. 검은 피부에 까만 머리, 누가 봐도 내 친혈육으로는 안 보일 것이다.
“쥬얼 아메티스트. 쥬얼은 제가 지금 맡아 기르고 있는 애에요. 올해 열 여덟 살인데 무척 똑똑한 아이랍니다. 정계로 나가지 않으려고 해서 문제지만 말이에요.”
자랑하듯 내가 말하자 아젤은 약간 머쓱해했다. 왜인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쥬얼은 18살. 아젤 님은 17살. 쥬얼이 한 살 많았다. 어……, 애라는 말은 조금 심했나? 쥬얼도 성인이니까. 나는 묘한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빨리 테이블로 아젤 님을 안내했다.
“자, 어서 들어가요.”
“세이시아 님.”
“……아, 네?”
아젤은 나를 향해 물었다.
“곧 스물 둘이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만 지나면 스물 두 살이다. 아젤은 열 일곱…….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건가?
“그 때랑 전혀 변한 게 없으시네요. 오히려 조금 어려진 것 같은…….”
나는 흠칫 놀랐다. 내 표정이 살짝 굳어지자 미르는 짠 하고 내 얼굴을 가렸다. 당연하지. 나는 인간이 아니니까. 늙지 않는다. 나이를 먹지도 않고. 공작 자리에도 얼마나 더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지 모른다. 흑의 대공같은 괴물도 있으니 아마 40대까지는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 문제는 내 오빠인 세리안과 첩 미르였다. 유렌이야 하프엘프라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니 오히려 그 사이에 나이를 먹어 보이는 게 이상하겠지만 나머지는 아니었다. 라르슈만 해도 3년간 조금씩 변해가고 있지 않은가.
나는 아젤에게 정체가 들킬까 조마조마했다. 보통이라면 ‘그렇게 내가 젊어 보여요?’ 하고 기뻐할 만한 대사에 이렇게까지 놀라다니. 뒤늦게 후회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현자인데다가 세르의 정체마저 눈치챈 그는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버릴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젤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는 낌새도 없었다.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귀여우시네요.”
그 대사, 전에도 한 번 들은 적 있는 것 같은데.
낮의 쌀쌀맞은 아젤은 거짓이었다는 듯 그날 저녁은 무척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세르는 무척 좋은 고기를 공수해 왔고, 값나가는 해산물까지도 테이블 중앙에 놓여졌다. 나는 먹지 못했지만. 고기를 써는 동안 쥬얼은 내게 마치 진짜 요즘 좋은 걸 배우고 있다는 듯 이것저것 얘기를 해 주었다. 그는 정작 내 호위기사 쪽으로 진로를 정하고파하는 것 같지만.
아젤 역시 쥬얼에게 몇 가지 배움에 관한 충고를 했다. 루시나는 계속 내 옆에 붙어서 내 시중을 들어주었다. 한모금만 물을 마셔도 곧바로 물잔에 물을 따라준다던지. 남들이 보면 그냥 충실한 시종이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겠지만 아젤은 루시나의 시선이 조금 걸리는 것 같았다.
"그 시종……. 세이시아 님의 직속 시종은 여자 아니었던가요?"
나는 별 생각 없이 말했다. 아젤 님은 시종들에게도 꽤 관심 가져 주시는구나, 하며. 시종이 바뀌었다는 것은 나와 가까이 지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아, 네리아는 저택에 있어요. 이제 중요한 일만 맡아서 하고 나머지는 다른 시종들에게 시키는걸요. 얘는 제 직속 시종인 루시나에요."
"나이가 어려 보이는데……."
"열일곱이에요."
"저랑 나이가 같네요."
그것 말고도 아젤 님과 비슷한 분위기이기도 하지. 나는 아젤 님을 상상해서 이 아이를 사왔다는 얘긴 하지 못하고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나이까지 묻다니, 뭔가 루시나에게 중요한 점이라도 있는 건가?
"남자를 직속 시종으로 두고 쓰시다니 의외인걸요?"
그는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의외란 거지? 내가 여자 시종만 두고 쓸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하지만 나는 남편 둘에 첩 둘까지 있는데, 게다가 반반한 남자 시종이면 그런 용도일 거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젤 님이 순진하지 않다는 건 이미 현자인 시점에서 다 까발려진 사실인데 이제 와서 시종의 용도를 모른 척 하는 이유가 뭘까.
"역시 보필하는 능력이 좋아서 직속 시종으로 삼은 건가요?"
"뭐, 꼼꼼하기도 하고, 말도 잘 듣고, 의외로 머리도 잘 돌아가고……."
루시나는 색노로 사온 것 치고는 꽤 실력있는 시종이었다. 루시나 하나만으로 내 자잘한 일이 무리없이 해결될 정도로. 그러니 다른 보조 없이 그냥 루시나만 직속 시종으로 삼아 데리고 다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금 꺼낼 이야기도 아니고, 따로 스승이 관심을 가질 내용도 아닌 것 같다. 식사시간에 시종이나 시녀에게 신경쓰지 않는 것도 식사예법 중 한 가지였다. 워낙에 아젤 님이 아랫사람들에게도 동등하게 대우해 주는 성격 탓에 사소한 신상정보정도는 간단히 소개해주는 것도 당연한 일이 되었지만 조금 이상하다시피 캐묻기 시작하자 나는 약간 의아해졌다. 주제에서 벗어나도 너무 벗어난 것 같았다. 나랑 대화하는 게 싫은 걸까? 그렇게 생각될 정도다.
……설마.
나는 루시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설마 아젤 님, 루시나에게 그렇고 그런……?
아냐아냐,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럴 리 없잖아! 아젤 님이 남색가라니!!
그 날 저녁식사도 뭔가 찝찝하게 끝났다. 그 뒤로 화제는 다시 우리 쪽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아젤이 루시나를 자꾸 신경쓰는 듯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곤란하다. 루시나를 아예 먹은 후라면 몰라, 먹지 않고 애써서 키워온 녀석인데. 그냥 키워놓기만 했다면 스승님께 선물할 수도 있겠지만, 단지 키운 것만이 아니라 먹는 것 외에 온갖 짓은 다 했던 아이였다. 게다가 직접 그렇고 그런 걸 보여주기까지…….
선물하기에는 너무 포장이 너덜너덜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애로 사서 선물 줄까? 하지만 그러려면 또 외국까지 나와야 해서 까다로운데…….
세르에게 상담해 봤지만 웃기만 하고. 정말이지 세르는 속을 모르겠다니까. 징징거리는 나를 안고 뒹굴거릴 뿐 별다른 조언은 해 주지 않았다. 그냥 즐겁게 지켜만 보라면서.
***
황실의 축하 파티에 억지로 끌려 나온 나는 졸린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대체 무슨 연유로 나한테는 꼭 참석하라는 전갈까지 내어 가며 나를 데려온 건지 모르겠다. 일단 참석은 했지만, 나는 엘릭과 단둘이서 벽에 기대 앉아 쥬스를 나눠 마시고 있었다.
“괜찮아?”
“응…….”
엘릭이 내게 물으며 쥬스에 빨대를 꽂아 주었다. 요즘 밤의 사교계에 참석하지 않은지 몇 년 째 되어 가니까 이 시간까지 멀쩡히 활동하려니 힘들다. 시골의 내 영지는 빨리 어두워지므로 이때쯤이면 다른 남편들과 함께 침대에서…….
게다가 어제 늦게까지 놀았더니 졸리단 말야. 하지만 이번 기회에 계속 시골에만 있던 쥬얼을 18살에 늦게서야 데뷔시킬 수 있게 되었다. 쥬얼에게 몇몇 사람들을 소개시켜주고, 부루퉁해 있는 쥬얼을 미혼 여자들 사이에 둔 채 나와버렸다.
“내가 후견인이라고 하니 나와 네 아들인줄 사람들이 착각하더라. 그럼 네살에 내가 낳은 아들이란 거야?”
내가 웃으며 말하자 엘릭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리고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피곤하면 기대도 돼.”
“응!”
나는 기댈 정도까진 아니었으나, 그래도 엘릭의 어깨에 기대서보고 싶어서 그의 가슴에 뺨을 댔다. 엘릭은 내가 서 있기 편하게 살짝 몸을 틀어 내 허리를 안아주었다. 아직 수줍어하는 면이 강했지만, 그래도 3년쯤 되니 어느 정도의 스킨십은 평소에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조금 덜 부끄러워하면 좋을 텐데……. 그래도 같이 할 때라던지 내가 유혹할 때라던지 둘만 있을 때는 마음껏 만져도 화내지 않았다.
남들 보는 앞에서 했다가는 부끄러워 도망쳐버리고. 반대로 슈는 남들 보는 앞에서 어떤 애정행각도 서슴치 않았고, 특히 입에만 올려도 부끄러워 죽는 그 귀 부분을 만질 때면 오히려 타인의 눈 앞에서 더욱 흥분했다. 그렇지만 남의 손을 타는 건 슈는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파티는 정말로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굳이 참석한다 하면 나와 슈 단둘이서만 참가해서 내가 계속 슈를 돌봐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니고서야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