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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여왕-217화 (217/226)

<-- 12. 3년 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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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얼은 평소와 달리 말쑥한 정장이 불편한지 조금 어색하게 서 있었지만, 그 모습조차도 모델처럼 너무나 잘 어울렸다! 점원이 제일 인기라며 추천해 준 의상이었다. 나도 평소의 경장과 다르게 어느 정도는 꾸미고 있었다. 벨벳 로드의 의상샵의 점원은 스물 두 살이 된 나를 아직 십대의 처녀라고 착각해 허리가 꽉 조이고 허벅지의 반이 드러날 정도로 파인 얇은 드레스를 추천해 주었지만 나는 당연히 그걸 덥석 받아 입었다.

꽃은 피어있는 이상 평생 소녀인 거다.

다음 날, 아젤님이 오시는 것을 기대하고선 오랜만에 예쁘게 차려입고 기분이 들뜬 나는 아직 오전인데도 이루에게 아무 인사도 하지 않았다는 걸 기억해내고 황궁에 방문했다. 이루는 형이 비워놓고 간 태자궁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해서 찾아내는 데 조금 고생했다.

이루는 전과 달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겉에서 봐도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게, 힘들어보이긴 했지만 정말 보람찬 일을 하고 있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온 걸 알고 잠시 휴식을 선언한 그는 나를 데리고 정원으로 나왔다.

“황궁 정원 너무 좋아, 꺄악~★”

“너 정원 엄청 좋아하네. 전부터 그랬지만.”

“당연하지!”

파릇파릇한 정원을 싫어하는 꽃도 있나? 정원사의 솜씨가 상당히 뛰어난 것 같다. 정원사도 한둘이 아닐 테고. 물론 우리 슈만 못하겠지만 말이다.

이루는 조금 더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저 입으로 이번에는 절대 이쁜이라던가 놀러 가자는 경박한 말은 안 하겠지. 조금 아쉽기도 했다. 이루는 피식 웃으며 내게 제안했다.

“우리 이왕 이렇게 된거 담 넘어서 놀러 가 볼래? 바깥 구경한지도 오래 됐거든.”

……그 성격 어디가겠나? 나는 한심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루는 헛웃음을 지었다.

“농담이야, 농담. 갈거면 혼자 가지, 월담 한번 안 해본 너를 데려가 봐야 들키고 잡혀오기밖에 더 하겠어?”

무슨 무엄한 소리! 내가 월담 한번 안 해봤다니. 나도 한다면 정말 소리없이 하는 꽃이라구! 그 말 취소해! 나는 도망가던 이루를 쫒아가려다가 정원 입구 모퉁이에서 나온 어떤 사람과 하마터면 부딪칠 뻔 했다. 깜짝이야. 사과하려고 고개를 들자,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눈동자가 보였다.

새파란 물빛 눈동자……. 어, 어, 아젤님이랑 꼭 닮았네! 뭐 하는 사람일까?

놀란 표정을 한 그 남자는 선명한 턱선에 반듯한 콧대, 그리고 눈 색과 똑같은 긴 머리를 뒤로 길러 묶은 미청년이었다. 우와아, 이런 사람이 궁에 있었던가? 정말 눈에 확 띄는 외모인데 지금까지 왜 몰랐을까. 3년만에 방문한 황궁이니 새로 들어온 사람이려나?

“어……, 어.”

내가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있자 그는 깜짝 놀란 듯 하다가, 어느샌가 웃고 있었다. 우와, 웃는 모습도 멋있다! 미르만큼은 아니지만 키도 크고 머릿결도 굉장히 곱다. 저런 직모 부러워! 그는 멍하니 서있는 내게 물었다.

“변한 게 없으시군요.”

“???”

응? 마치 꼭 전에 날 알던 사람처럼 말하넹?

정말 전에 만난 적 있는건가? 아니, 이런 맑고 깨끗해 보이는 남자는 절대 만난 기억이 없다. 왜 나를 보고 그렇게 반갑다는 듯이 웃고 있는 거지? 그 말의 의미는 또 뭐고?? 그나저나 잘생겼다아…….

내가 쫓아오지 않자 뒤를 돌아본 이루는 이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오더니 내 앞에 서 있는 남자를 쳐다보다가 인사를 했다.

“오랜만입니다, 칸스티어 님.”

이루가 아는 사람?? 칸스티어라면 현자들에게만 붙는 성 아냐? 아젤 님의 선배 중 하나인가? 이 사람도 꽤 젊은 나이에 현자가 된 것 같다. 그 남자는 이루에게도 빙긋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잘 웃는 걸 보니 붙임성 좋은 사람같았다. 아니, 단순히 예의바른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네, 잘 지내신 것 같네요. 얘기는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제 선배님들께 착실히 수업을 받고 계시다면서요?”

이루는 하하 웃으며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둘 사이에 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기다리고만 있었다. 하지만 몇 마디 이루와 상투적인 인사말을 나눈 그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처음부터 내가 목적이었다는 것처럼.

“약속시간보다는 조금 이르지만, 아무 말도 해 주시지 않는 겁니까?”

“어, 그, 으음, 그러니까, 유리?”

“유리는 또 누군가요?”

그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나에게 물었다. 하지만, 조금 화난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의도일까? 유리가 누구긴, 가끔 나타나서 귀찮게 하는 내 개……. 아니, 유리가 변장했다고 치기엔 너무 예의발랐다. 유리는 예의같은 걸 차리는 애가 아니었으니까. 존댓말도 못 하고.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따지듯 나에게 물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모르겠다.

“설마 저를 못 알아보시는 건가요, 세이시아 님?”

“아, 아니……, 그게, 저어…….”

이루는 왜 그러냐는 듯 이상하게 날 바라보았다.

“너 왜 그래? 네가 그렇게 귀엽다, 귀엽다거리던 아젤 칸스티어님이잖아.”

……아.

뭐라고? 아젤 님이라고!!?

"아젤 님?"

나는 눈을 커다랗게 깜박이며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잠깐, 아젤님은 분명 내 눈높이 아래……. 게다가 저렇게 번듯한 미남도 아니었고, 정확히는 미소년, 그리고 엄청 귀여웠는데? 특히 짧게 자른 동글동글한 머리가 귀여웠는데?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다는 내 표정을 본 아젤님은 싱긋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젤님의 모습이 남아있는 것 같다. 특히 저 웃음이나, 친절한 표정이라던가, 겉은 착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게까지 상냥하지 않다는 점이라던가.

하지만 긴 머리에 넓은 어깨, 큰 키라니. 아젤님의 똘망똘망한 큰 눈동자와 천연의 귀여움이 사라졌어!!!

"오랜만이에요, 세이시아 님."

"에, 그……! 저……."

그는 당황한 내 앞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후후 웃었다. 4년 전에는 그가 나를 올려다보고, 내가 여유롭게 웃고 있었는데 뭔가 상황이 역전된 느낌이다.

"초대받은 오찬까지는 약간 시간이 있으니 그 동안 얘기라도 할까요?"

그는 이루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루는 나와 오랜만에 만난 것이기도 했지만, 날짜로 따지자면 3년만인 이루보다 4년만인 아젤이 더 오랜만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날 양보했다.

한동안 그와 나는 인적 없는 태자궁 앞뜰을 거닐었다. 전에도 이렇게 산책한 적이 있었다. 대부분 그와 내가 만난 것은 실내의 도서실이나 티 타임 시간 정도였지만, 유렌을 첩으로 들여온 후에는 정원에서도 종종 만났었다.

정작 아젤 님이라고 생각을 하니 정말로 4년 전의 아젤 님 그대로였다. 내가 요즘 무슨 공부를 하는지도 물었고, 그동안 있었던 일에 관해서도 질문했다. 편지로도 얘기를 나눴지만 궁금한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엘릭 레이몬드 자작께서 세이시아 님의 첩으로 들어왔다구요? 엘프 얘기는 편지로도 들었지만.”

엘릭 얘긴 놀랄 것 같아서 굳이 말하지 않은 건데. 예전의 앳된 얼굴의 아젤이라면 그런 말 하기 껄끄러웠겠지만 지금의 아젤님은 어른 모습이었다. 전혀 거리낌없이 그런 말을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나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릭은 그래보여도 은근히 로맨틱한 면이 있어요. 가끔 보면 귀엽기도 하고.”

“저는?”

“……네?”

아젤은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예전에는 수줍은 웃음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위를 올려다보는 것이 나다 보니까 수줍기보다는 의미심장한 유혹이라고 생각되었다. 나, 나도 참,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아젤 님은 내 스승인데.

“세이시아 님은 제게 종종 귀엽다고 말씀해 주셨죠?”

“으, 응…….”

“지금은 안 귀여워졌습니까?”

생긋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화사한 아젤의 얼굴에 나는 멍해졌다. 지금? 지금은……, 솔직히 귀엽다고 말하기엔 조금 그렇지. 잘생기고 예쁘다면 모를까. 그나저나 굉장한 미인이 되었구나. 어릴 때부터 싹이 보였어.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때 어린 노예들을 좀더 사 둘걸!

나는 아젤님과 비슷한 루시나를 떠올렸다. 아젤 님과 동갑에 분위기도 비슷했지. 특히 그 머리카락이……. 하긴, 그 루시나가 그 정도로 컸다면 아젤 님도 당연히 못 알아볼 만큼 쑥 컸을 텐데, 나는 왜 그 생각은 못하고 아젤님이 요정처럼 영원히 어린아이 모습이라고만 생각했나 몰라!

루시나……, 먹어버릴까?

역시 루시나를 집에 가서 뜯어야겠다. 아젤 님에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없잖아! 한입 먹고 나면 그래도 잠잠해질거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계세요?”

아젤님은 어느새 그늘지게 햇빛을 가로막고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휘저었다.

“아, 아니……, 별로. 그, 그렇지! 학교는 즐거웠어요?”

그는 내 급조한 듯한 질문을 웃어넘기고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세 과목의 이론을 수료하고 수석 졸업했습니다. 꽃은 하나밖에 못 받았지만요. 즐거웠다기보다는 충실한 생활이었죠. 졸업 후에 현자탑의 릭켄 님께서 그 아래에서 일하지 않겠냐고 제안하셨고 황실 서기이신 선배님께서도 제게 다시 돌아오지 않겠냐는 권유를 하셨어요.”

“그럼 이제 어디로 가실 거에요?”

가까운 데였음 좋겠다! 그렇게 기대하며 그에게 묻는데, 아젤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저는 당연히 공작가로 돌아가야죠.”

엥? 공작가? 최연소 현자고, 플로렌스 국제 아카데미에서 수석 졸업까지 했는데 공작가로 돌아간다고?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당연히 그가 계속 우리 공작가에서 사서 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젤 님은 가만히 나무 사이로 날아드는 새를 바라보다가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내 말을 짐작하고 얘기를 꺼냈다.

“편지로도 말씀하셨죠. 제게 더 좋은 직업이 어울릴 것 같다고.”

그, 그건 그랬지. 직접 말한 게 아니라 돌려서 넌지시 말했지만 그는 당연히 알아들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싹했다. 원래 차가운 사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비록 나이는 어릴지라도 모든 사람에게 따뜻하고 상냥한 껍데기를 쓰고 대응해 왔기 때문이다. 당연히 나한테도 계속 그렇게 대해 줄 줄 알았다. 그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조금 냉정한 듯하긴 하지만, 많은 것을 알고 있는 현자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소양이다.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가 내게 상냥함을 지운 태도로 대꾸하기 전까지는.

"세이시아 님, 처음 세리안이 저에게 당신의 스승이 되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을 때, 제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하세요?"

그 때라면 꽤 오래 전이었다. 내가 갓 이세계로 넘어와 어영부영 세르를 내 것으로 만들었을 때.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

"어……. 스승이 되지 않겠다고 거절했었죠. 어쩌다 보니 스승님이 되어 주시긴 했지만."

초반의 그는 아직 스스로 많이 부족하여 남을 가르칠 정도는 되지 않는다며 정식 스승의 지위를 거절했다. 나는 스승으로 모시고 있긴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아젤은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내게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거리는 맞춰 주고 있었다. 그는 살풋 웃으며 냉정하게 말했다.

"그 말대로입니다. 저는 당신의 스승이 아닙니다. 공작가의 사서를 그만두게 되면 완전히 남남이지요."

그런데도 네가 나를 그만두게 할 수 있을까? 일종의 협박이었다. 나는 그가 나에게 협박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그는 그랬다, 어릴 때부터 귀엽고 순수해 보였으나 그것은 외모 뿐, 그의 내면은 의외로 어른스러웠고 무척 복잡했다. 최연소 현자 직위를 날로 얻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식으로 굴지 않았는데. 게다가 아젤 님은 순하고 누구에게나 상냥했기 때문에 타인에게도 협박 비슷한 것을 할 일이 없었다.

4년만에 만난 현자님은 조금 달라진 것 같아, 왠지 조금 많이 섭섭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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