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3년 후 -->
“아젤님이?”
나는 환하게 웃으며 편지를 든 채로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갔다. 아젤 님이 드디어 플로렌스 국제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이 쪽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이었다. 달콤한 봄의 햇살이 성 안으로 비춰들어왔다. 내가 처음으로 이 세계에 세이시아의 몸을 타고 왔을 때, 그 때와 지금의 공작성은 다르면서도 같았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너무나 이 생활이 익숙해졌고, 또 즐거우니까.
아젤 님과 다시 만나는 것은 4년만이다! 지금이라면 아젤님은 17살일까? 갓 17살이 되었겠지. 오랜만에 내가 방방 뛰는 모습을 본 세르가 활짝 웃으며 팔을 벌렸다. 귀여운 여동생이 팔 안으로 달려들자 그는 내 허리를 달콤하게 꼬옥 껴안고 귀에 입을 맞췄다.
“그렇게 좋아?”
“응!”
“너무 기뻐하니 오빠는 조금 섭섭한데…….”
무슨 소리야, 세르 아젤님이랑 친했잖아. 그게 남자의 마음이란 건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슈는 정원에서 일광욕을 하다 말고 내 목소리가 들리자 긴 귀를 쫑긋쫑긋쫑긋하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에요?”
나는 세르를 놓고 슈에게도 달려들어 꼭 안겼다. 팔로 그의 어깨를 휘감자 발이 공중에 붕 떴다. 슈는 능숙하게 내 허리와 엉덩이를 받쳐 안았다.
“아젤 님이라면 플로라 님께서 계속 말했던 그 어린 현자 분?”
“응, 정말 귀여워!”
4년쯤 지났으니 그 귀여움이 훨씬 증폭되었을 거야, 분명!!!
내가 행복한 얼굴을 하자 미르가 서고에서 총총 뛰어나와서 소리쳤다.
“그래도 나보다는 안 귀여울 꺼얌!”
글쎄, 과연 어떨까……. 나는 훗 하고 웃었다. 미르는 내 웃음을 보더니 달려와서는 내게 매달렸다. 그 웃음 뭐야? 응? 응? 역시 시아도 내가 훨씬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나보다 귀여운 건 존재하지 않지?? 라면서 애교를 떨었다.
애교라면 절대 지지 않는 슈 역시 나란히 내 곁에 붙어서 응응거렸다.
“저도 귀엽죠? 네? 귀엽다고 해 주시면 귀 만져도 좋아요. 응?”
나는 그 둘과는 다른 아젤님의 매력을 떠올렸다. 부드러운 머리와 뽀얀 살결. 통통한 뺨까지. 정말 너무너무 귀여웠지! 제자인 내가 이런 말은 조금 아닌가. 하지만 귀여운걸!
아젤 님은 황실 서고를 담당하는 옛 스승이었던 현자에게 먼저 인사를 하러 간다고 했다. 그래서 나 역시 황도로 떠날 거라고 그에게 급히 휘갈겨 답장한 후 전령에게 쥐어 보냈다.
유리 사건이 끝나고 3년만에 도착한 황도는 변한 것이 없었다. 무척 오랜만인데도 슈가 미리 조치해 놓고 떠났기 때문인지 무지개 장미는 전보다 팔팔했다. 나는 3년간 개축했던 내 저택을 바라보았다. 문이 전보다 더 크고 튼튼하게 지어져 있었다! 저택 내부도, 전에는 마치 숲 속의 버려진 저택 같았다면 지금은 자연을 사랑하는 어떤 대귀족이 돈을 퍼부어서 지은 유서 깊은 대 저택같았다. 집이 멋있어지니 근처를 지나는 사람들도 한 번씩 바라보고 갔다.
“집 좋다~. 역시 돈 쏟아붓길 잘 했어!”
암, 식물에겐 돈 따위가 아깝지 않지. 정원도 한층 더 화려해졌고.
카딘은 성을 관리하는 집사가 되었다. 안 그래도 미남이었지만 절도 있고 예의바른 행동 덕분에 더 멋있고 성숙해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달까. 라르슈는 안 그래도 드문 마법사에 깔끔하고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탐내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둘 다 일이 있으니까 내가 이번 황도행에 동행시킨 건 루시나와 쥬얼, 그리고 남편 둘과 오빠와 첩인 슈와 엘릭이었다. 엘릭은 다소곳하고 얌전하지만 다른 남자들과 어울리는 타입은 아니라 여직 가족이라긴 서먹서먹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또 결코 소극적으로 당하고 있는 스타일 역시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엘릭은 엘릭 방식대로 나를 유혹하거나 부탁해서 하룻밤을 온전히 그의 것으로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샤워 준비 좀 해줘, 루시나."
"네, 주인님."
루시나는 올해 열 일곱. 그러고 보니 아젤 님과 동갑이구나. 연록빛의 머리를 가볍게 묶은 그는 굉장한 미남이 되어 있었다. 날씬한 몸매에 아름다운 얼굴의 미청년이라는 점은 라르슈와 비슷하기도 했지만 조금 더 연하고 부드러운 타입일까나. 버들가지처럼 나긋나긋하지만 충분히 힘 있어 보이는 균형잡힌 허리도 맘에 들고.
네리아는 이제 집사 급 시녀장이 되어 아랫사람들을 부리는 일이 많아졌고 내 잡일은 네리아보다는 루시나가 주로 맡게 되었다. 루시나의 충성도를 보고 네리아도 안심하고 몇 가지 일을 물려주었으나 그래도 아직까지는 네리아가 중요한 일을 맡고 있긴 하지.
그 때의 어린 시종들인 루시나와 루이는 가끔 나를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긴 하지만 아직 좀 더 익힐 생각이었다. 멜이나 카딘과 함께 놀 때 지켜보게 하기도 했지만 직접 만지는 걸 허락하진 않았다. 루시나와 루이는 열일곱 살과 열아홉 살. 아직 좀 설익은 느낌에다가 좀더 푹 익혀먹는 게 감칠맛이 있으니까.
따뜻한 목욕물이 받아지자 루시나는 타월과 비누를 챙겼다. 목욕 시중을 들기를 원하는 거구나. 하지만 목욕 시중이 필요한 것 같으면 아무래도 유렌이나 미르가 루시나를 제치고 하겠다고 달려들 테고, 오늘은 혼자 느긋하게 즐기고 싶으니까 됐어.
나중에, 알지? 나는 한번 눈짓을 해 주고 그를 내보냈다. 루시나가 타월과 가운, 목욕도구를 두고 나가자 나는 욕조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여유롭다…….
요즘은 수분이나 영양분,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어 있다 보니 특별히 목욕을 하며 수분을 보충해야겠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엘레스트라를 부르는 일도 적어지고 또 규칙적으로 변했다. 하얀 김이 욕실 전체에 서렸다. 4년만에 만나는 아젤님은 어떤 느낌일까? 나와 유렌이 결혼하기 전에 떠났었지. 학교는 잘 다녔을까? 당연히 1등이었겠지?
졸업했으니 이제 어디서 일할까?
세리안이 섭외해 와 우리 공작가 도서관 사서로 삼았지만, 아젤은 최현소 현자다.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설사 그가 만족한다고 해도 그래서는 안 된다. 마탑, 정보회사, 수많은 길드, 카덴의 모든 나라에서 그를 스카웃하려들 것이다.
그럼 이제 못 만나려나?
괜히 우울해졌다. 개인적인 친분으로 계속 여기에 남아달라고 부탁할 수는 있겠지만 그는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내 이기심만으로 저택에 남아달라고 할 수는 없다.
나는 물기가 맺힌 욕실의 천정을 바라보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쥬얼을 불렀다.
“쥬얼, 앞에 있어?”
“……네.”
그는 문 앞에서 내게 말했다. 쥬얼은 내 개인 호위 기사였다. 엘릭이 쥬얼에게 약해 빠졌다느니 사냥하겠다느니 으름장을 놓아댔지만 그는 의외로 그 이후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 이제는 엘릭이 검을 휘둘러도 한 칼에 죽기는커녕 받아칠 수 있을 만큼 실력이 늘었다.
내 호위무사라니, 처음에는 그런 위험한 일을 시키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가 워낙 하고 싶다고 주장해대는데다가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녔기 때문에 임시직으로 맡기긴 했지만.
그냥 그대로 교육받아 내 양자가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후견인으로서 글 읽는 것 이상의 교육도 시켜줄 수 있고 원한다면 내가 은퇴한 후 작위도 물려줄 수 있다. 비록 유리는 쥬얼에게 실패작이니 뭐니 말해댔지만 쥬얼은 그 정도 자격은 가지고 있다. 똑똑하고 재능도 있고. 여타 어린애들과는 달랐다. 비록 마족이지만 보는 눈 정돈 있었다.
그가 어설프게 내 문 앞에 밤새 서 있었던 게 거의 3년 전이었지. 지금은 무척이나 능숙해서, 전에는 내 방에 침입한 암살자까지 잡아준 적이 있다. 유렌보다 한발 앞섰지. 어차피 나야 정령이니, 암살자의 칼에 베여도 상하는 것은 형상화된 육체 뿐이고 마나만 부어 주면 아무리 조각나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니까 그대로 놔둬도 상관은 없지만, 아프긴 해.
“쥬얼.”
“네, 말씀하세요 주인님.”
“아젤 님이 오면 너를 소개시켜 주고 싶어. 난 네 후견인이니까.”
“……네.”
그는 가만히 승낙의 말을 했다. 내가 무언가 말했을 때 쥬얼은 호위 무사 일 빼고는 거의 내가 하란 대로 했었지. 자잘한 일에 안 된다느니 위험하다느니 하며 잔소리를 하는 루시나와 달리 말은 참 잘 듣는다니까. 하지만 나와 떨어져라, 그 단 한 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어떻게 명령을 하고 회유를 해 봐도 듣지 않았다.
“꼬까옷 맞춰 입어야 하니까 이 근처의 샵에 같이 가서 예쁜 옷 주문하자.”
“네.”
“아젤 님이 누군지는 들어서 알지? 그런 새파란 색은 드무니까 못 알아볼 리는 없을 거야.”
“네,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마저 씻고 가운을 걸친 채 욕실 밖으로 나갔다. 3년 전과 비해 훌쩍 큰 쥬얼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또래 아이들보다 더 덩치가 작아서, 자기보다 한 살 어린 루시나보다도 훨씬 어리게만 보였는데 어느샌가 정말로 못 알아볼 만큼 쑥 커버렸다. 보랏빛 눈동자는 자랑하고 다니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고, 어두운 색의 피부는 목 부근과 팔의 자잘한 근육과 어우러져 관능미까지도 느껴졌다. 마족인 만큼 인간과 월등히 다른 비율에다가 긴 다리, 고운 살결은 주변 여자들에게 무척이나 인기가 많은 요인 중 하나였다. 길거리에 데리고 나가면 다들 한번씩 쳐다볼 정도니 말 다했지 뭐.
내 밤 장난감도, 하인도, 남편도, 첩도 아니니 쥬얼에게 눈독 들이는 여자가 의외로 많았다. 게다가 인간의 후계자를 가질 수 없는 내가 그를 양자로 삼아 공작위를 물려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문이 벌컥 열리고 유렌이 들어왔다. 내가 목욕을 끝낸 것을 알고 내 방으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쥬얼은 옆으로 물러섰다. 누가 뭐래도 쥬얼은 유렌의 제자였으니까 스승과 함부로 마주볼 수 없다.
유렌은 내 가운을 벗기고 다정하게 빙긋 웃어주며 속옷을 꺼냈다. 나는 유렌에게 몸을 맡긴 채 가만히 그의 손을 탔다.
“전령에게 일정 전달받으셨습니까? 현자께서는 내일 수도에 도착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내일? 와아, 딱 맞춰 왔네.”
“네, 오찬은 궁에서 스승 되시는 분과 함께 받고 오신다고 하셨으니 저녁 식사를 준비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응, 좋아. 집사에게 말해줘.”
그 전에 쥬얼을 예쁘게 입히고 소개해야 하니 이 쪽의 벨벳 로드부터 가 볼까나. 나는 오랜만에 온 수도에 잔뜩 들떴다. 새로운 가게가 생겼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