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마족의 습격 -->
나는 한참을 그를 쳐다보았다. 이상하게 엘릭의 시선이 전과 달라 보였다.
달라진 것은 그가 아니라 나일지도 모른다. 유리 덕분에 마족 공포증을 극복했다. 더 이상 엘릭의 행동이 무서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헤실 웃으며 인사했다.
“아, ……안녕? 잘 지냈……?”
그는 살며시 눈으로 미소지었다. 아주 미미한 표정 변화였지만, 나는 깜짝 놀랐다. 엘릭이 웃었다? 이전이었다면 분명 그 웃음은 내게 있어 위협으로만 보였을 터였다.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중에는 내가 당장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도 있었다.
“얘기 좀 할까.”
“응…….”
나는 엘릭의 손에 팔목이 잡힌 채 파티홀 바깥으로 나갔다. 가슴이 이유 없이 두근두근거렸다. 그는 내 팔을 꼭 잡고 있었다. 이 곳은 나와 엘릭이 처음 만났던, 그리고 처음으로 내가 엘릭의 칼에 죽음의 위기를 맞았던 정원 나무 밑이었다. 그 때와 지금은 뭔가 달라져도 엄청 달라졌지. 한순간 나와 그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돌았다. 그는 근처의 벤치로 나를 데려갔다.
밤의 정원의 고요함 속에서 파티의 음악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나는 나란히 앉은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엘릭은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눈꺼풀 위에 내려앉았다. 그런 모습이 묘하게 야해 보며 유리와 닮았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유리와 얘기는 잘 끝났을까? 안부라도 물어보려던 내가 입을 열기가 무섭게 그는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얘기를 시작했다. 달콤씁쓸한 목소리였다.
“내 감정을 알고 있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몰랐다. 그리고 내가 한참을 그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까지도 그가 나를 연모한다는 것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손등에 무언가 따뜻한 것이 닿는다 했더니 엘릭의 손이었다. 단단한 지문 끝과 부드러운 손바닥. 분명한 검사의 손이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19년의 세월이 손에 담겨 있었다. 나를 위해서 그 19년을 포기했다고 한다면……. 엘릭은 천천히 내 손 위에 그의 손을 얹고 조심해서 쥐었다. 이런 감각, 전에도 느껴본 적 있다. 계곡에서 마물을 만났을 때, 그가 내 뒤에서 이런 식으로 나를 껴안고 있었다. 그래, 이 느낌이었지.
지금도 그의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표현하지도 않은 타인의 감정을 피부로 느낄 수 없는 것은 식물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간이 똑같았다. 비록 나와 그는 다른 종족이지만 모든 것이 다르진 않았다. 두근두근하는 심장 소리가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세이시아…….”
그는 어느샌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네가 아는 세이시아가 아니야.”
“알고 있어. 플로라.”
나에게서 옛 소꿉친구의 잔영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지났다. 이미 예전부터 세이시아는 죽어 있었다. 그는 그런 것 따위 상관없다는 듯 나를 보고 말했다.
“내 편지에 왜 한 장도 답장을 쓰지 않았지? 그 때문에 처음엔 유리가 쓴 편지를, 네가 보낸 암호라고 착각했어.”
“……편지라니?”
그가 언제 내게 편지를 썼단 말인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손수건을 줘서 고맙다는 뜻으로 수를 놓아서 보냈어. 그리고 네 생각이 난다는 의미로 꽃 한 송이를 넣어서 계속 몇 통쯤 보내왔어. 이름은 적지 않았지만, 처음에 손수건을 돌려줬으니 나인 걸 알 거라고 생각했어.”
“…….”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손수건? 그러고 보니 손수건이 동봉되어 왔던 편지가 단 한번 있었다. 시적이고 부드러운 표현과 깔끔한 글씨체 덕에 누가 보낸 건지 엄청나게 기대했었는데, 답장을 할 방도가 없어 계속 답을 하지 못하니 어느샌가 그 쪽에서 내게 보내는 일이 없어졌다.
그렇지만 그 손수건은 분명 화려한 수가 놓여 있는 고급 손수건이었고, 나는 케르타에서 사온 기념품으로 여러 장 갖고 있었던 메이네 천으로 만든 새하얀 손수건을 건네주었는데…….
메이네 천은 그 때까지만 해도 케르타의 특산품으로서, 나는 그 때 심플하고 무늬 없는 흰색의 손수건을 잔뜩 사 왔었는데, 내가 사신으로 다녀온 후 케르타 국가와의 무역으로 인해 제국의 여성용 손수건의 재료로 메이네 천이 인기가 많아지고, 최고급품 손수건에는 대부분 메이네 천을 이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부분이다. 손수건의 재질은.
재질 말고 똑같은 부분이 없잖아! 그 밋밋한 흰색 천이 화려한 꽃 수가 놓여진 딱 봐도 비싸보이는 장인의 손길이 들어간 그 손수건으로 변하다니!!
“수를 놓아서……?”
“그래, 직접.”
그는 가만히 손을 꼼지락거렸다. 나는 길고 남자다운 엘릭의 흰 손을 바라보았다. 직접? 진짜?
나를 바라보는 그의 뽀얀 뺨이 살풋 붉은 기가 도는 것 같다. 진짜인 것 같다. 그럼 나, 나보다 더 솜씨가 좋잖아! 나는 겨우 힘써서 세르의 이름을 손수건에 수놓았는데. 이런 게 어딨어!! 정말이지…….
그 손수건은 너무 예뻐서 쓰기도 아까워 계속 서랍 안에 넣어두고만 있었는데 설마 엘릭이 직접 수놓은 것이었을 줄이야. 나는 손수건에만 집중하느라, 엘릭의 편지 내용에 관해서는 잠시 제쳐두고 있었다. 그 편지, 내용도 범상치 않았던 것 같다. 마치 내가 여자로 착각했을 정도로 섬세하고 조신하고 감수성 풍부한 글씨체와 시적인 내용에 핑크빛 봉투. 그럼 그걸 엘릭이 나한테 보냈다는 말인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엘릭이 보낸줄 전혀 몰랐어. ……이름이라도 써 줬으면 좋았을 텐데.”
“또 편지 쓸 테니까 그 때는 답장해 줄래?”
그는 빤히 내 눈동자를 응시했다. 나는 엘릭의 파아란 왼쪽 눈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만큼 차가워 보이진 않았다. 푸른 불꽃같은 눈 속의 움직임을 쳐다보던 나는 천천히 엘릭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그의 오른쪽 안대를 풀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가 그의 안대를 풀어주길 기다렸다. 후크 매듭을 풀어내자 검은 색 안대가 아래로 떨어져 그의 목에 걸렸다. 그는 마저 안대를 풀어 옷의 윗주머니에 넣고 나랑 두 눈을 마주보았다. 황금빛 눈 속의 빛은 뜨겁게 녹아내리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치 주변의 빛을 반사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망설임없이 그의 뺨을 잡았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랬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그 사이에, 아예 얻은 것이 없지는 않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눈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어.”
“내, 눈을……?”
“응.”
그는 다시 한번 녹아내릴 듯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 워낙 웃지 않아서인지, 엘릭의 미소가 이렇게까지 아름답다는 것을 요 잠깐 새 몇 번이나 느끼고 있다. 나를 향해 몇 번이고 계속 웃어주었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계속.
“…….”
“……나…….”
나에게 한번만 더 웃어주면 안 돼? 그렇게 말할 생각으로 내가 입을 열었을 무렵 갑자기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 유렌인가 보다. 나는 말을 하다 말고 괜히 무안해져서 그의 손 밑에서 내 손을 빼내고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엘릭이 내 손을 다시 덥석 잡고 아래로 당겼다.
“가지 마.”
한순간 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고 생각했다. 말 그대로 순간이었다. 그는 벤치 등받이 아래로 다시 끌려내려온 나를 의자에 밀어붙이고 키스했다. 멀리서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내 귀를 막았다. 약간 놀란 듯한 내 눈을 그는 망설임없이 마주보았다. 황금빛과 차가운 파랑이 섞여 보였다.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살며시 누르며 아랫입술을 벌렸다. 따뜻한 혀가 이를 벌려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과 완전히 맞붙었다. 고개를 조금 틀어 더욱 밀착했다. 나는 눈을 꼭 감았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손 때문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은 둘만의 시간이다.
마치 생전 처음으로 키스하는 것처럼 숨이 막혀 그는 종종 입술을 떼고 숨을 들이쉬었다. 꼭 인공호흡이라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의 혀는 너무 달콤하고 따스했기에 아무 말 없이 그가 하는 대로 기다려 주었다. 엘릭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눈 떠.”
“으응…….”
신음소리와 함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엘릭의 목소리가 이렇게까지 상냥할 수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그는 내 눈가를 쓸어주며 옷을 벗었다. 짤그랑 하고 두툼한 그의 기사제복 겉에 달린 장식이 서로 부딪쳐 약한 금속음을 냈다. 재킷의 안감은 실크로 만들어져 부드러웠다. 그는 내 등에 자신의 겉옷을 벗어 깔아주었다. 나는 그의 가슴팍에 손을 대고 꾹 밀어내보았다. 얇은 셔츠 아래로 묘한 열기가 느껴졌다.
이미 유렌은 다른 곳으로 날 찾으러 간 것 같다. 조금 미안했지만, 엘릭은 억지로 유렌이 간 곳에서 내 고개를 돌려 그만을 바라보게 했다.
“나 유부녀…….”
게다가 남편도 둘이다. 어차피 그 이외에도 남자는 많았지만 엘릭에게 그 남자들 중 하나가 되라는 소리는 할 수 없다. 그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순수했다. 그 성격으로 여자랑 잤을 리도 없다. 아마 아까가 그의 첫키스였겠지.
그는 대답 대신에 다시 내게 키스했다. 반복하고, 또 다시 반복해서 키스를 하며 그는 엘릭의 얼굴을 가로막으려는 내 손을 붙잡아 손바닥을 핥았다. 뜨거웠다. 어느 시점부터 흥분했는지 알 수는 없었다.
“얌전하네. 귀여워.”
그의 입에서 귀엽다는 말이 나오다니, 그것도 내가 그 대상이라니! 나는 왠지 너무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졸랐다.
“한번 더 말해줘.”
“귀여워.”
으응 좋아! 한번 더!!
“……귀여워. 플로라.”
내 발갛게 달아오른 표정을 본 그는 내 반응을 승낙으로 알고 나의 상의를 벗기기 시작했다. 허리를 조이고 가슴 위쪽이 드러나는 드레스였기 때문에 그대로 밑으로 끌어내리려다가 허리에 걸리고 말았다. 나는 옷을 잡아당기려는 그의 손을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지금 밖이니까…….”
“응.”
옷 위로 살며시 부풀어오른 가슴을 쓸다가 내가 허락한 듯 하자 그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분위기가 어색하고 차림새도 불편해 내 움직임이 서투르니까 그는 리드하려는 작정인 모양인데, 내가 동정을 상대로 가만히 있으면 재미없잖아.
나는 치마를 손으로 끌어올리고 다리를 그의 어깨에 감았다. 그리고 내 다리 사이로 끌어당겼다.
“여기 해줘.”
“바로?”
애초에 침대도 아닌 야외 벤치 위에서 여잘 덮치려 들었으면서 그런 순서를 따지다니. 특이하네……. 나는 그가 처음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해냈다. 그랬었지. 그는 아까부터 귀 끝이 조금 빨개져 있었다. 모든 것이 다 어색하겠지. 완전히 새빨개지는 타입은 아닌 것 같지만 그게 또 귀여웠다. 원래도 피부가 곱고 여자같아서, 얼굴이 전부 빨개지는 것보다는 하얀 뺨에 부분적으로 붉게 떠오른 모습이 더 예뻐 보였다.
“엘릭 귀여워어…….”
“귀엽다는 말보다는.”
“응, 예뻐.”
다른 말은 없는 건가? 그는 조금 다른 칭찬이 듣고 싶었지만, 나한테 대놓고 해 달라고 뭐라 딱히 말하기도 그래서 입을 다물고 내가 끌어당기는 대로 허벅지에 입술을 댔다. 그 모습이 정말로 귀여웠다. 엘릭에게 귀엽다고 느낄 날이 올 줄이야. 예전의 내가 봤다면 내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을지도.
“아니, 바로 여기.”
나는 허벅지와 무릎을 조심스레 (노블중략) 멍하니 눈을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청혼서를 넣으면 받아 줄 거야?”
나는 엘릭의 말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청혼? 하지만 나는 안 되는데……. 이미 결혼했으니까. 만약 그가 나와 비공식적이라도 혼인관계를 맺고 싶다면 첩으로 들어오는 방법밖에 없다. 그렇지만 세습 가능한 정식 작위가 있는 귀족은 다른 귀족의 첩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가 이전처럼 자작이라면 모를까, 백작 작위를 받은 이상…….
“마족의 법은 달라.”
그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는 의문을 표시하려 했으나 그의 허리 아래 움직임에 취해 다시 정신을 놓고 말았다. 조금 더 격렬하게, 나는 그의 흐트러진 셔츠를 잡고 졸랐다. 엘릭 역시 내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해주겠다며 나를 범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