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여왕-213화 (213/226)

<-- 10. 마족의 습격 -->

엘릭의 앞을 막아선 것은 하얀 원피스 차림의 세이시아, 그녀의 바람의 방어막이었던 것이다. 엘릭은 급히 검을 거두었다. 시아는 무사해 보였다. 갑자기 공격이 들어와서 조금 놀랐긴 하지만, 충분히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었다.

엘릭은 멍하니 그녀가 멀쩡함을 확인했다. 그리고 망연히 중얼거렸다. 어째서 그녀가 여기에? 아니, 그녀는 정령이니 저 마족의 제재가 없다면 충분히 이 쪽으로 도망올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런데 왜…….

“왜……, 내 공격을 막은 거지?”

대체 왜 그를 지키는 거지? 너를 납치한 마족인데!!

당황한 엘릭의 외침에 시아는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뭐?”

방금의 싸움에서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엘릭은 다짜고짜 시아의 자그마한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흔들 것도 없었지만, 그는 지금 당장 그녀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설마 다른 수많은 남자들처럼 저 녀석도 유혹한 건가? 그 향기인가 뭔가로? 그리고 ‘먹은’ 거야?! 마족은 싫다고 말하지 않았어? 나도 마족이고……, 저 녀석도 마족인데. 대체 무엇이 달랐던 건가? 그는 충분히 표현할 만큼 표현했고, 언제나 애절한 연심을 품고 있었다. 그가 정말로 사람의 생각에 민감한 식물이라면 내 마음 정도는 알아채야 했어!

어째서 내 마음에 대해선 이렇게나 무시하고, 그는…….

“어째서, 그가 대체 너에게 있어 뭐길래?! 왜 나는 안 되고, 그 녀석은 되는 거지? 세이시아……, 아니, 플로라! 대답해 봐!!”

시아는 그의 시선을 빤히 바라보았다. 놀란 듯한 눈이다. 그의 그런 처절한 눈빛은 처음으로 본다. 어째서? 그는 되고, 엘릭은 안 되냐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 못 하겠어. 하지만 엘릭, 내 이름을 처음으로 불러준 것 같다…….

시아는 엘릭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어……, 미안. 네가 패고 있는 거였어? 난 그냥 걱정돼서 와 봤는데 누군가 어떤 사람을 막 때리길래…….”

우리 편이 지는 줄 알구.

“…….”

“……왜?”

시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

옷에 엉망으로 묻은 먼지를 털어도 유리의 옷은 원래가 검은 색이었기 때문에 희미한 자국이 남았다. 게다가 상의는 세로로 찢어졌잖아. 유리는 왠지 이전보다 개운한 얼굴로 일어서서는, 엘릭에게 손을 내밀었다.

“동생으로 인정할게, 엘릭 칸. 나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다니, 예상 이상으로 합격이야.”

엘릭은 그의 손을 싸늘하게 쳐냈다. 나는 옆에서 그들을 관전하다가, 유리에게 말했다.

“너 제대로 설명은 했냐?”

“아, 까먹었다.”

“…….”

지금부터라도 설명하고 용서를 빌어. 미르랑 유렌에겐 내가 말할 테니까. 유리는 씩 웃으며 엘릭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니 형인데, 아니, 니 아버지에 대해 말하자면, 아니, 그 전에 실험에 대해서…….

엘릭은 유리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다가, 내게 그가 해 버린 말이 신경쓰이는지 나를 자꾸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내가 그의 시선을 느끼고 엘릭과 눈이 마주치자, 엘릭은 벌컥 화를 내듯이 일어나서 밖으로 휙 나가버렸다. 그 뒤를 유리가 졸졸 따라갔다.

“아, 그리고 내 계약자가 진 것 같아. 나는 최종적으로 해줄 것은 다 해 줬고, 계약자는 더 이상 나를 부를 기력이 없는 것 같으니 이번 계약도 여기서 끝이겠네. 다시 이런 일로 만날 일은 없을 거야. 바이바이.”

나는 유리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까 놀다가 말았는데, 뭐 그거야 알아서 하겠지. 갑자기 소환당하는 바람에 좋았던 분위기도 완전 깨졌고. 나도 시도때도 없이 소환되어서 무드 깨는 남잔 질색이니까. 아무리 마족이 의외로 맛이 괜찮았다고 해도 말야.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쭈뼛쭈뼛 내 앞에서 서 있던 쥬얼을 불렀다. 쥬얼까지 이런 곳에 있었네? 왜 이런 소란스러운 곳까지 따라온 거야?

쥬얼은 눈물이 글썽 맺히는 눈으로 내게 달려와 안겼다. 미르가 입술을 툭 내밀었지만 일단 어린 쥬얼이 우선이지. 쥬얼은 괜히 의연한 척 했지만 그래도 겁나고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나 보다. 하긴, 그 유리가 상대였으니……. 설마 유리가 쥬얼에게 무슨 짓을 하진 않았겠지?

“나, 주인님을 지키고 싶었는데……, 그래서 열심히 단련했는데, 역시 무리였나 봐요. 그 마족도 저를 실패작이라고 했고.”

“실패작……? 아니, 그보다 유리가 너한테 무슨 짓 했어?”

쥬얼은 말없이 내게 꼭 안겼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뭔가 물어볼 수 없었다. 미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커 가는 거지. 유렌 역시 쥬얼을 나한테서 떼내고, 충고했다. 단련의 결과는 하루 이틀 정도로 나오는 게 아냐. 그러니 실망하지 말고 시아에게 징징 매달리지도 마.

그리고 유렌은 내게 바로 안겼다. 슈가 그 뒤를 따랐다.

마지막 소환 대가였던 마족의 병사들은 엘리아스 이트리샤 전 대공이 직접 강림해 전부 쓸어버렸다. 마족의 목을 냉정하게 베어넘기는 그 모습은 마치 전투의 신과도 같았다고 기사단 사이에서 전해지지만, 나는 그 자리에 없었으니 봤을 리가 있나.

마지막엔 수명까지 깎아 마족을 성 안에 소환했던 3황자 페트로는 마족과의 연결고리를 마탑에 의해 강제로 끊기고, 평생 유배가 결정되었다. 적의 대공 휘하의 배신했던 귀족들은 작위 박탈과 국외추방, 황자가 나쁜 길로 빠지는 것을 오히려 부추기고, 황자의 수명까지 깎게 해 가며 마족 소환을 시키거나, 제국 기밀을 팔아넘긴 몇몇 고위 귀족들과 적의 대공은 사형이 결정되었다. 반역을 꿈꿨던 무리들은 전부 처리되었다. 그리고, 유렌의 부친인 위스피닌 공작 역시 사실은 그 쪽에 붙어 있었다. 이름 있는 귀족들도 한둘이 아니다. 유렌은 마치 남남이라는 듯 냉랭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최후를 지켜본 뒤 위스피닌을 버리고 '카르테인'이라는 성으로 바꾸고 싶다며 여제에게 요청했다.

평화로워 보이던 국가가 사실은 구멍 투성이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여제는 그것을 감추지 않은 채, 원래 한번은 다시 청소되어야 하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나는 여왕이지만, 인간의 여왕은 아니다. 하지만 조금쯤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부친의 사형을 마주한 플라니아 공녀는 의외로 담담했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부친의 배신을 알자 곧바로 황제에게 털어놓았고 제국의 배신자를 잡아들이는데 협조했기 때문에 오히려 아버지인 적의 대공과 반대로 자작의 위를 얻고 마탑에 소속되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그게 적의 대공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식물의 영양분이 되고 말았다. 인간의 최후란 그런 것이다. 흑의 대공은 가만히 그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그래도 친우의 손자였다. 기분이 괜찮을 리 없었다.

이루는 전보다 핼쓱해진 모습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동생이자 3황자 페트로가 유배를 가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본 그는 귀족들 앞에서 선언했다. 다음 대의 황제가 되겠다고, 그리고 비록 피에 젖어 힘들고 지치고 그만두고 싶더라도 끝까지 부하와, 친우와, 형제의 피를 지고 살아가겠다고.

이 때다 하고 냉큼 1황자, 옛 황태자는 태자의 자리를 동생에게 넘겨주고 예전부터 쭉 하고 싶었던 세계일주를 떠났다. 틀림없이 차기 황제의 재목은 1황자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는 단순히 책임감 때문에 황태자의 직위를 받아들였을 뿐, 사실은 머릿속에 검 뿐인 남자였다. 그가 황제가 된다면 아마 제국은 강한 무력을 가진 국가가 되겠지만, 결코 국민들이 부흥하지는 못할 것이다. 정작 지금의 현제, 여제와 생각이 가장 닮은 아들은 2황자인 이루, 그였던 것이다.

나는 파티에 참석한 이루에게 다가가 중얼거렸다.

“설마 네가 황제가 되겠다고 나설 줄은 몰랐어. 복잡하고 귀찮은 일과는 조금도 관련 없다는 듯 굴어놓고는.”

그는 나를 바라보더니 예전처럼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전과 조금 달랐다.

“난 페트로가 가진 고민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그가 사실은 무척이나 괴로웠다는 것도 몰랐어.”

“심지어는 페트로가 마법적 재능이 있다는 사실도, 그것도 재능만으로 마족을 소환할 수 있을 정도였단 것도 몰랐지?”

뒤늦게 내가 3황자가 그 정도로 강한 소환마법사였는지에 대해 황족들에게 물었지만, 이루는 물론 황태자, 아니, 지금은 전 황태자인 케이드린조차 그에 대해서는 조금도 몰랐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리고 약한 동생’. 그것이 페트로에 대해 그들이 알고 있는 전부였다.

이루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주 찾아가서 놀고, 대화도 나누었지. 즐거웠어. 즐겁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결국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야. 나보다 형은 더 괴로워했어. 형이 책임감 때문에, 단지 그것 때문에 황제가 되려고 자신의 검을 버릴 생각으로 황태자 수업을 받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 다만 내가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형이니까, 떠맡겼을 뿐이야. ……지금이라도 형의 짐을 내가 덜어주고 싶어. 비록 페트로에게는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한 못난 형이지만……. 케이 형에게는…….”

“꼭 그렇지만은 않아.”

나는 멍하니 서 있는 이루의 등을 두드렸다.

“너는 성황이 될 거야. 틀림없이.”

마란 후작은 루크 프쉘드리만 후작을 옆에 끼고 내게 인사했다. 다음에 루크와 같이 셋이서 즐기는 게 어떻겠냐고, 그는 쭉 나를 유혹해오고 있었다. 정말이지 특이한 취향이야. 하지만 나중에……, 괜찮겠지?

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누군가가 또 들어오나 보다. 배신자의 가족은 침울해 있었다. 사형된 귀족과 친구였거나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였던 사람들 역시 표정은 즐겁지 않았다. 나 역시 연좌제가 제국에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하지만 제국 입장에선 진정한 국가의 승리다. 아직 많은 일이 남아있겠지만, 일단락된 후에는 작은 파티라도 좋으니 축하주를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진짜 파티를 즐기는 귀족, 의무만으로 참가한 귀족, 검은 옷을 입고 있는 귀족들이 일부 보였지만 나는 미르의 팔짱을 끼고 아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러 돌아다녔다. 먼저 나를 보고 얘기를 건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역시 이럴 때는 같이 싸운 전우들과 함께 노는 게 최고지.

입구의 웅성거림이 심해졌다. 갑자기 미르가 발을 멈추었다. 옆의 사람이 크게 소리쳤다.

“순백의 음유시인이다! 아아, 황제 폐하께서 초대하신 것 같은데.”

이미 음유시인은 많이 옆에서 하프를 연주하고 있었다. 왕실 음악가들보다 더 신선한 음악을 연주한다고 가끔 즐거운 파티 때 황제가 음유시인을 초대하는 경우가 있다. 순백의 음유시인이 초대받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 같다. 어린 아이들은 신기해하는 걸 보니 요즘엔 없었나 보지만. 그런데 순백의 음유시인이라니, 뭔가 업그레이드한 버전이야? 노래 더 잘 해?

“음유시인……?”

처음 듣는데. 중얼거리던 내게 미르가 작게 말했다. 순백의 음유시인. 머리부터 발끝까지 백색의 차림을 하고 돌아다니는 음유시인. 제국의 초창기 역사부터 종종 역사서에 등장했다는 그 음유시인은 영웅과 함께 하는 신의 사자라는 소문도 있고, 단순히 흰 옷만 입고 다니는 평범한 음유시인이라는 소리도 있다. 머리를 희게 염색하고 흰 옷을 입고 다니는 그런 음유시인 단체가 있고 순백의 음유시인은 단지 그 중에 한 사람일 뿐이라는 뜬소문도 있다고 미르는 내게 말했다.

하지만 그 진짜 정체는…….

“오호라, 이거 빨간 멍청이 미르헬 군 아니신가?"

낯선 목소리였다. 미르의 본명을 대놓고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런데 잘나신 미르헬 님께서 왜 내 제국에? 구걸이라도 하러 온 거면 그만 돌아가 달라고 말하고 싶은데.”

나는 미르 앞에서 그런 소리를 입으로 낸 자살 예정인을 쳐다보았다. 우, 우와아, 정말 하얗다! 긴 백발머리가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미르 저리가라 할 정도로 진주 빛의 투명하고 뽀얀 피부에 은방울 같은 눈동자.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 하며 훤칠한 키. 백색의 망토와 손에 들린 흰색과 은색의 하프.

심지어 장갑, 신발, 늘 매고 다니는 듯한 주머니조차도 희게 염색한 듯한 순백색이었다. 눈이 부실 정도다. 사방의 모든 빛은 전부 반사해버리는 듯한 이 하얀 사람이 바로……, 순백의 음유시인?

“자기 제국이 위험에 빠졌는데 어디서 탱자탱자 도마뱀 멱 따는 소리로 노래만 하다가 정리되고 나니까 이제야 돌아온 거야? 까만 변태 드래곤?”

미르는 한도를 넘어서 이죽거렸다. 그가 가능한 비꼼의 한도를 넘어 오히려 덜 비꼬는 것처럼 느껴지는 반동 현상이다. 솔직히 내가 봐도 미르는 말을 참 못하는 것 같다. 내가 귀엽다고 처음에 말을 더듬기까지 했었지. 고백은 마치 어린아이가 조르는 것처럼 자기 느낌을 짧게 외쳐댔을 뿐이었고. 머리가 좋으면 뭘해, 언어 능력이 충분치 못한걸. 그러니까 바보 드래곤이라고 불리는 거구나.

그런데 까만 변태 드래곤? 왜? 저 사람은 흰색인걸.

미르는 내 귀에다 대고 속닥거렸다. 물론 그 순백의 음유시인의 귀에 다 들어가도록 소리를 조절해서.

“있지, 시앙. 저 녀석 말야, 실은 블랙드래곤이다? 근데 태어날 때부터 흰색을 워낙 좋아해서 머리까지 염색하고 흰 옷만 입고 다니고, 눈도 허여멀건한 색으로 바꾸고, 변태도 그런 색깔변태가 따로 없어.”

“야, 시끄러워. 어디서 이런 예쁜 아가씨한테 헛소문을 퍼뜨리는 거야?”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미르에게 말했다. 나는 순백의 음유시인,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부드럽지만 남자다운 외모다. 세르와 닮은 것 같기도.

“블랙……, 드래곤이라고?”

“그럼요, 아름다운 엘프 아가씨. 제가 이 제국의 수호룡인 하르아이나입니다.”

하르아이나……, 가, 바로 이 드래곤이야!? 우리 제국의 이름이? 우리 제국의 수호룡이?!

게다가 나를 엘프로 오인했어! 나는 눈을 깜박이며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블랙 드래곤……. 흰색을 너무 좋아하는 블랙 드래곤. 되게 취향 이상하네. 미르는 사실 그다지 붉은 색을 좋아하진 않는다. 실제로 그가 좋아하는 색은 핑크색이라고 한다. 아마 내 영향이 큰 것 같지만. 나와 만나기 전에 미르기 좋아하던 색은 보라색과 자주색의 중간쯤 되는 색깔과 갈색이었다. 그래서 왕이었던 미르의 방은 자주색 일색이었지. 그러나 그는 레드 드래곤이다. 좋아하는 색과 무관하게, 머리색과 눈동자 색은 선명한 빨간 빛이다. 여장했을 때 역시 붉은 머리와 눈의 색은 변하지 않았다. 머리 색은 속성이 바로 드러나게 된다. 속성을 감추는 것만큼 까다로운 일도 없다.

머리색까지 바꿀 정도로 흰 색을 좋아하다니……. 되게 특이한 드래곤이네. 그렇게 흰 색이 좋은가? 흰색 변태라고 불려도 할 말 없을 것 같다.

미르는 베에 하고 혀를 내밀며 악수를 청하는 하르아이나의 손을 때찌했다.

“시아는 내 꺼거든요! 나랑 사귀거든요?”

그는 무척이나 놀란 듯 되물었다.

“뭐? 아니, 대체 왜 너 같은 놈이랑?! 너 무슨 최면 같은 거 걸었지? 그게 아니고서야 말도 제대로 못하는 너 같은 바보 드래곤이랑 이런 예쁜 여자가 사귀어 줄 리가 없는데…….”

“뭐야, 너 말 다 했어!!?”

하르아이나는 사실 반쯤 거짓으로 미르를 놀리는 것 뿐인데, 미르는 진심으로 화를 내며 그의 멱살을 잡았다. 쯧쯧, 저러니 놀리는 맛이 나지.

“하르, 왔나?”

빙그레 웃고 있는 금발의 미청년이 하르아이나를 불렀다. 미르를 놀리던 하르아이나는 반가운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단단히 엘리아스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엘? 정말 오랜만이다! 잘 지냈는가? 레인은?”

“아직 인사 받아주는 중.”

“넌 웬일로 말 거는 사람이 없다?”

“글쎄……. 나야 이제 은퇴했으니까. 이번엔 레인도 활약을 많이 했고 나는 도울 뿐이었거든.”

어른스럽게 빙긋 웃는 청년 모습의 엘리아스는 얼굴이야 앳되어 보였지만 사실은 백 살이 넘는 나이. 그것을 아는 사람들이 함부로 말을 걸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흑의 대공 역시 60살이지만 그래도 60살짜리 귀족들 여기 가끔 보이잖아? 백살짜리 귀족 봤냐?

서로 아는 듯 얘기하던 두 나이 많은 인물의 모습을 옆에서 보던 사람들은 감히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르아이나는 나를 힐끔 보며, 아름다운 엘프 아가씨에게 음악을 바치겠다며 엘프의 노래를 연주하려고 하프를 조절했다. 그 때 슈가 내 어깨에 폭삭 안겼다. 그제서야 나와 진짜 엘프를 나란히 두고 바라본 하르아이나는 내가 엘프와 미묘하게 냄새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 어. 내가 요새 엘프를 하도 안 봤더니. 북쪽엔 엘프가 없잖아? 그지? 그래서 순간 착각했어. 엘프는 남녀가 기운이 다르다는 걸.”

이 멍청아, 시아는 정령이야! 미르가 뻐기듯이 하르아이나의 앞에서 외쳤다. 얘기하기 전에 조용한 마법으로 충분한 조치를 취했기에 남들에게는 그들의 대화가 들리지 않겠지만,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후후 웃었다.

“저, 정령은 처음이닷!”

하르아이나는 다시 내게 악수를 청하는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번엔 정령을 위한 노래를……, 부르려 하다가 질투 투성이 미르에게 가로막혔다. 저런 드래곤이 수호룡이라……. 제국, 괜찮을까? 내가 있는 동안 망하진 않겠지?

나는 유렌과 엘릭을 힐끔 바라보았다. 저 쪽으로 가 볼까? 미르는 하르아이나와 싸우느라 정신없는 것 같고. 중간쯤 걸어가던 내 손을 갑자기 누군가가 잡아당겼다. 내가 놀라서 뒤돌아보니, …….

거기에는, 뾰루퉁한 표정의 엘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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