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마족의 습격 -->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지하로 내려가는 곳 입구였다. 걸어가 보니 그 곳은 지하가 아니라 마계의 지상 1층이었다. 마계 성은 난해하게 생겨서 도무지 내가 몇 층에 있었는지 알기 어렵다. 게다가 1층으로 내려갈수록 어두워지다니…….
무언가를 때리는 소리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렸다. 나는 딱히 신경 쓰지 않다가, 점점 둔탁한 소리가 가까워지자 소름이 돋았다. 뭐, ……지? 온갖 상상력이 머리를 자극한다. 결국은 생각하기도 싫어질 정도다. 하지만 호기심이 마침내 두려움을 이기고, 나는 소리가 나는 곳에 머리를 빼꼼 내밀어 보았다.
유리가 있는 걸로 보아 맞게 찾아온 거 같기는 한데.
나는 유리의 손아귀에 잡힌 것이 무엇인지 다시 눈을 비비고 확인했다. 인간의 성으로 치면 홀 같은 곳, 홀이나 로비라기엔 너무 어둡고 출입구가 꽁꽁 닫혀 있었지만 말야. 그런 곳에서 유리는 하급 마족으로 보이는 부하들을 줄줄이 앞에 두고 꼬리가 있는 한 마족의 머리칼을 손에 움켜쥐고 있었다. 머리가 붙은 채로.
하급 마족은 피투성이의 얼굴로 용서를 빌었다. 유리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얼굴에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는 냉랭한 미소였다. 마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입만 움직이는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소름이 오싹 끼쳤다. 나는 저런 걸 밟았단 말인가?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마족의 머리채를 잡고 그대로 바닥에 내리 눌렀다. 윽, 윽 하는 신음을 내면서도 그 마족은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 혀를 꽉 깨물었다. 혀가 반쯤 잘릴 정도다.
유리는 표정 없는 얼굴로 말한다. 마치 투명하면서도 차가운 얼음 같은 목소리다. 인간이 저런 목소리를 낼 수는 없을 것 같다. 딱 마족, 이라는 것이 어울리는 느낌의 소리였다.
“시끄러워.”
그 소리와 함께 그는 마족의 머리채를 그대로 공중에서 놓았다. 퍽, 하며 땅바닥으로 떨어진 그 마족의 머리 부분을 발뒷꿈치로 찍어누른다. 당연히 달걀 깨지듯 두개골이 박살났다. 혀를 죽을 듯 깨문 것은 소리를 내면 죽기 때문이었나 보다.
눈살을 찌푸릴 만한 장면이지만, 내 눈에는 꽃이 짓밟히는 장면보다야 감흥이 덜하다. 그렇지만 잔인한 것은 잔인했다. 이미 죽은 마족의 시체보다 그의 반응이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유리는 익숙한 듯이 피투성이의 발을 툭툭 털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네놈들 중에 다시 한번 더 내 명령을 따르지 못하는 녀석이 나온다면, 기분이 나빠져서 주변에 있는 녀석들까지 다 먼지로 만들어 버릴지도 몰라. 알겠나?”
“네, 넵!!”
잔뜩 쫄아버린 마족들이 군기가 딱 잡혀서 소리쳤다. 그림자 마족이 그 시체를 조각내서 치우는 것이 보였다. 쟤네들은 저택의 하인처럼 잡일을 하는 마족인 것 같다. 그림자니까 빛이 밝은 곳은 거의 다니지 못하겠지. 그래서 저택의 곳곳이 어두운 거였구나. 청소하는 것을 보니 그냥 눈에 보이는 것만 깨끗하면 됐지, 가구의 특성을 알고 관리할 만한 전문적인 마족들은 아닌 것 같았다. 시체를 옮기다가도 부딪치고, 제대로 옮기지 못해 주변에 피를 다 튀겼다. 영양만점의 액체가 바로 피였으나 저건 별로 맛있어 보이지 않는데. 파란 색이잖아. 파워에이드 같은 맛이 난다고 해도 싫다. 마족의 피는 인간의 피와 달라 독성이 진하다고 하는 것도 들었고.
내가 바로 문앞까지 왔는데도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그의 기척을 읽을 수 없는 것처럼 그 역시 나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 같다.
“유리!”
“유리라고 부르지 말랬잖아! ……여왕님.”
유리가 벌컥 화를 내며 내게 소리쳤다. 아까 눌러 죽인 마족의 피 덕분인지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화내지 마.”
“알았어. 왜 왔어?”
왜 왔긴, 네가 하도 안 오니까 찾으러 왔지.
유리는 조금 마음을 가라앉히더니, 다시 심호흡을 한 후 나를 바라보았다.
“부하들 관리는 끝났으니 돌아가자, 여왕님.”
그는 어느샌가 익숙하게 나를 안았다. 그리고 윗층으로 올라갔다. 뒤에서는 여전히 마족의 시체를 그림자들이 치우고 있었다.
***
“그러니까, 네 말은 엘릭이 나를 좋아하니까 내가 너한테 납치되면 당장 날 구하러 와줄 거라는 거지?”
내 어이없다는 듯한 질문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살육을 저지르고 온 녀석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만큼 지루하다는 듯한 표정.
“맞아, 여왕님.”
이 녀석 머릿속에 정말로 소설 쓰는 프로그램이라도 들어있나 보다. 그것도 아주 성능 좋은. 내가 진짜 한심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너 드라마 작가 하면 잘 할 것 같다?”
“응? 왜?”
“아냐, 아무것도…….”
나는 한탄성 짙은 한숨을 바닥이 꺼져라 내쉬었다. 엘릭, 진짜 오긴 해? 그냥 가 버릴까? 유리는 나와 정반대로 가만히 다른 고민을 하고 있었다. 유리 녀석의 고민이라 해 봤자 오늘 홍차는 다즐링으로 할까 얼 그레이로 할까 정도겠지만.
하지만 재미없는 마계에서 할 일이라고는 유리를 괴롭히는 것 정도 뿐이었기 때문에 나는 유리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 해? 라고.
“식물의 피는 맛있을까 하는 생각.”
나는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식물의 수액? 그걸 왜 먹어? 제정신이야?
키스할 때의 수액이나 더울 때 흘리는 약간의 수액은 모르겠지만 지금 네 말은 체내의 수액을 빨아먹는다, 그 의미 아냐? 내가 경멸스럽다는 표정을 짓자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설명했다.
“왜, 인간끼리도 가끔 하잖아. 이런 거.”
“무슨 헛소리야!”
나는 떽떽거리며 화를 냈다. 너 가끔 보면 아주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방금까지의 반응을 확 바꿔 갑자기 나에게 달려들었다. 왜 이래! 너 여자 싫다지 않았어? 물컹거려서 싫다며! 이 게이야!!
“나 게이 아냐. 그리고 여왕님 인간 애인이 있는 거 알거든? 자, 나한테도 맛보여줘. 한번쯤 먹어 보고 싶었거든.”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유리는 소파에 앉은 내 위로 올라타 목덜미를 깨물었다. 따끔하고 살갗이 이에 뚫렸다. 악!! 아파!!! 나는 그를 떼내기 위해 버둥거렸으나 이미 한 발 늦었다. 빠르기는 엄청 빠르다. 나는 당황한 채 상처에서 수액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까지 남자에게 아프게 당해 본 적은 없다. 미르가 살짝 깨무는 것도 싫어서 발로 걷어찼는데!
“음, 쪼옷…….”
하지 말랬잖아, 이 자식아!!
예고 없이 당한 봉변에 나는 악 하고 비명만 지를 뿐이다. 순식간에 내 목에 이로 생채기를 낸 그는 내 수액을 있는 힘껏 빨아들였다. 그는 상처를 빨며 혀로 핥았다. 수액이 마구 빠져나갔다. 실제로는 적은 양이겠지만, 느낌은 헌혈하는 것보다 더 했다. 으윽, 하고 목에서 신음소리가 나왔다. 눈물이 핑 돈다.
"그, 그만해, 안……, 돼, ……거긴……."
“……으응, 벌써 막혔네.”
유리는 입술을 떼고 입을 닦았다. 손목에 묻은 빨간 수액이 흘러내리는 것을 다시 혀로 싹 핥았다. 이상하게도 아프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인지 곧 상처가 아물었다. 역시 정령체 쪽이 유리하다. 정령이 되고 난 후 다쳐 본 적은 처음이라 잘 몰랐지만 상처도 빨리 낫고. 그나저나 누가 수액 먹으래!!
수액만큼은 아직 어떤 남자에게도 허락한 적이 없었다. 수액을 마신다니, 그 무슨 변태적인 플레이란 말인가! 보통의 남자가 요구하는 것은 꿀이나 꽃잎의 애무 정도였다. 가끔 생채기가 나면 나오는 빨간 수액을 유렌이 핥아준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처 치료를 위해서였다.
수액이 너무 많이 빠져나가 순간 핑 도는듯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어디부터 때릴까 생각했다. 유리는 다시 한번 입맛을 다시더니 중얼거렸다.
“복숭아 주스 같아. 달긴 한데 너무 단 맛 뿐이고 고기 맛은 나지 않아서…….”
“식물은 고기가 아니니까! 식물의 가치도 모르는 마족 주제에 내 수액 평가하지 마!!”
인간 수컷이었다면 향에 취해 흥분해서 발기했겠지, 엘프였다면 아예 수액 향만 맡아도 이성을 잃고 덮쳐버렸을 것이다. 나는 그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그는 울먹이는 나를 보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건지 전혀 알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어, 왜 그래? 뭐가 화 난 거야 여왕님?”
“……너.”
나는 말없이 그의 배를 걷어찼다. 그리고 바닥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화풀이에는 때리는 것보다 이게 더 나을 것 같다. 이 편이 그가 더 화날 테니까.
“나 정말 화났어. 용서받고 싶으면 무릎 꿇고 내 발 핥으면서 ‘죄송합니다, 여왕님’ 이라고 빌어.”
그는 차가운 내 표정을 보더니, 잠시 내 맨발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가 사실은 하지 않을 줄 알았다.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유리는 얌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천천히 허리를 숙이더니 소파에 앉은 내 발톱에 입술을 댔다. 미간은 찌푸리고 있었지만 행동은 순종적이다.
내 발등을 핥기 시작하는 그의 사락거리며 떨어지는 은발을 바라보던 나는 그의 혀가 보통 인간의 체온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진짜 인간이 핥는 것 같다. 아름다운 인간의 수컷이.
나는 처음으로 마족을 앞에 두고 다른 의미로 오싹오싹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반쯤 감고 소파 팔걸이에 팔을 놓듯이 얹었다. 남자의 혀는 오랜만이다. 그가 남자로 느껴질 줄은 지금까지 생각도 못 했는데. 살짝 발을 들자 그가 내 발바닥까지 혀를 부드럽게 가져다 댔다.
히야아……. 완전 녹고 있네. 마족의 혀는 인간보다 긴 것 같다. 혀를 휘감아서 발뒷꿈치를 핥느라 목이 살짝 옆으로 꺾였다. 그의 길다란 속눈썹이 눈꺼풀을 덮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이렇게 아름답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마족에게,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건가? 나는 꽃인데??
아픈 짓을 허락도 없이 함부로 당하고 화가 나서 그에게 시킨 짓이지만, 어느샌가 나는 핥는 것이 끝나고 깨끗해진 발을 그의 어깨에 얹고 다른 발을 내밀고 있었다.
“이 쪽도 핥아.”
이미 말하기 전부터 그는 내 발바닥을 핥고 있었다. 분명 처음에는 ‘핥아’ 라는 내 명령에 걸맞게 마치 더러운 것을 제거하듯 혓바닥을 이용해 넓게 혓바닥을 이용해서 핥았다. 하지만 지금은 빨고 할짝인다는 표현이 더 맞을 정도다. 좁은 발뒷꿈치를 쪽쪽 빨아 혀로 다시 감아올렸다. 그의 눈이 살짝 촉촉해진 것 같다고 느꼈다.
========== 작품 후기 ==========
힘쎄고 강한 아침! 만일 내게 물어보면 나는 흰설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