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여왕-206화 (206/226)

<-- 10. 마족의 습격 -->

“그 녀석이 나를 불렀어. 여왕님이 말한 페트로라는 나랑 계약한 인간 말야. 그리고 주변에 사람이 많았어. 그 사람들이 다 한마디씩 하더라. 시끄러워서 좀 짜증나긴 했지만, 예쁘고 악의가 가득 들어있는 저주받은 반지를 주길래 잘 받았어. 그리고 걔가 어떤 마법사들을 가르쳐 주면서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는 저주를 걸어달라고 했어. 그래서 걸어줬지. 아마 지금은 죽은 것 같네.”

“그 주변 사람들 생각나는 대로 다 말해 봐.”

“인간의 얼굴을 어떻게 기억해?”

“그럼 자주 보던 인간들만이라도.”

“젤타 왕국인가 하는 나라의 왕이 가장 많이 보였어. 글쎄, 왕인지는 모르겠는데 적어도 인간의 왕족 같았어. 그리고 파란 머리에 배불뚝이 남자, 하늘색 머리의 남자, 비쩍 마르고 검은 옷을 입은 대머리 마법사, 아, 그리고 네가 있는 제국의 귀족들도 있었다. 붉은 귀족이라고, 유명한 녀석 같았어. 머리색도 새빨갰지.”

붉은 귀족……?

설마, 적의 대공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긴장한 내 표정을 본 유리가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기분이 언짢으니 그만 말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나 보다. 하지만 나는 급했다. 그의 입을 재촉했다.

“계속 말해봐. 그거 혹시 적의 대공이라는 사람 아냐?”

“아아, 맞네. 그거였어. 여왕님. 그 사람 알아?”

그의 대답에 나는 천둥이 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누가, 마족 소환 현장에 있었다고? 배신자로 찍힌 3황자와, 그, 우리 나라의 기둥 중 하나인 적의 대공이…….

그의 설명과 내 예상은 정확히 일치했다. 아무리 믿을 수 없어 다시 그를 다그쳐 봐도 결론은 동일하다. 적의 대공은, 정말로 배신자였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모르고 같이 마족에 대한 대비나 의논하고 있을 우리 나라의 다른 귀족들이 불쌍해졌다. 나는 어떻게든 가서 그의 정체를 밝혀야 하겠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나는 지금 적에게 납치당해 있는 셈이다. 유희로 따지자면 그렇게까지 해서 도울 이유는 없었다. 내 몸만 무사하면 됐지 뭐.

게다가 그 사람, 엘리아스 씨가 어떻게든 해 줄거다. 유렌과 미르도 지금은 수도에서 몇 주나 걸리는 내 영지에 있으니까 그 일에 말려들 걱정은 없다. 분명히 제국은 무사할 거야.

이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걱정되어 미칠 것 같다. 역시 아직은 내 나라였다. 나는 유리를 다시 바라보았다. 유리는 내가 더 이상 말을 시키지 않자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나…….”

“응?”

“네 녀석이 소환한 마물들 때문에 죽을 뻔 한 적이 있어.”

“그거 유감이네.”

소파에 드러누운 채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 유리의 배를 나는 발로 콱 밟았다. 맨발이라 데미지는 크지 않으나 유리는 놀라서 눈이 튀어나올 뻔 했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책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

“그러니까 좀 맞아.”

유리와 투닥투닥하던 사이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졌다. 창이 커서 안 그래도 희미한 마계의 태양밖에 들어오지 않는데 더 좋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슬슬 밤이라고 유리는 얘기했다. 달도 안 뜬 이 밝기가 밤이라고? 나는 옆에 있던 마법구를 흔들어도 보고 땅에 내리쳐도 보았지만 내가 원하는 만큼의 밝기는 안 나왔다. 왜 이렇게 어두운 거야? 원래 이렇게 어둡게 비추는 건가?

“주변이 너무 밝으면 기를 제대로 못 펴는 녀석들이 내 성에 많으니까. 좀 참아, 여왕님.”

“여왕은 참는 거 아냐. 빛을 싫어하는 녀석이 아무리 많아도 내가 빛이 좋다면 여기만큼은 밝아야 해!”

그것만이 진리라고 내가 우기자 그는 어쩔 수 없이 마법구에 손을 댔다. 다행히 전등만큼은 아니지만 방이 마계의 낮 만큼은 밝아졌다. 내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는 푹신한 양털 담요와 베개를 소환해 침대 위에 걸쳤다. 이젠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 주네? 의외로 저 녀석, 아랫사람에 소질있는 거 아냐?

침대는 편하지는 않았지만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냥 저택의 침대랑 비슷한 정도. 잠자리가 달라져서, 게다가 매우 좋지 않게 주변 환경이 달라지는 바람에 잠을 설쳤다. 공기도, 물도, 무기질도 부족했다. 큰 데미지야 없지만 이대로 오래 있는 건 힘들지도 모른다.

멍한 얼굴로 일어났다. 따끈한 아침식사를 하고 싶어. 나는 새롭게 유리에게 보챘다. 언제 돌려보내 줄 거냐고 따졌다. 유리는 꽤 저혈압인지 아침에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고 앉아서 홍차를 마시며 차가운 손으로 나를 밀어냈다.

“엘릭 칸이 오면 돌려보내 준다니까.”

“엘릭이 언제 오는데?! 아니 그보다 왜 엘릭을 유혹하는데 나를 붙잡아두는 거야? 내가 엘릭과 무슨 사이인데?”

내 질문에 그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 엘릭 칸과 무슨 사이야?”

“여왕님!!”

“아아, 그래, 여왕님은 엘릭 칸과 무슨 사이야?”

으음, 좋아. 바뀐 그의 말투에 만족하던 나는 대답하려다가 다시 화를 냈다.

“그러니까 내가 물었잖아!! 내가 엘릭과 무슨 사이냐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마족과 정령 사이밖에 더 되나. 물론 조금은, 정말 조금은 친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로 수련회 때 친해져서 번호까지 주고받은 친구가 그 이후로 문자를 전혀 안 할 때 느끼는 기분과 지금 내 기분은 비슷했다. 엘릭은 나한테 그 이래로 한번도 말을 걸지 않았다. 내 주변에 슈나 미르가 같이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긴 했지만 그래도 말을 거는 친구들은 말을 잘 걸던데 말이다.

유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나는 특별히 둘이 무슨 사이인 걸 알고 너, 아니, 여왕님을 데려온 건 아냐.”

아니 그럼 뭘 어쩔 셈이었는데? 엘릭과 별 상관도 없는 나를 납치해서 엘릭을 끌어오겠다니. 이러니까 엘릭이 안 오지! 게다가 난 왜 여기 있었던 거야? 빨리 돌려보내 줘!!!

유리는 귀찮다는 듯 다시 호록 차를 마시며 말했다. 그의 뒤로 유령 같은 그림자가 나와서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유리는 신경쓰지 말라며 내게 손을 젓고, 다시 얘기를 시작했다.

“나는 유리 칸 레일라. 마공작이며 칸의 아들이야. 그리고 엘릭 칸 역시 나와 같은 칸의 아들이지.”

엘릭은 칸의 아들이 아니고 칸이라는 미친 마족의 실험체가 되었다고 했는데…….

“물론이지. 실험체이자 아들이야. 내 전대 마공작이었던 칸은 자신의 후계를 만들기 위해, 취미 반 필요성 반으로 온갖 생물들에게 그의 씨를 심었지. 그래서 부화한 반마족이 아마 서른은 넘을 거야. 그리고 칸은 죽기 전에 그 가운데서 자신의 ‘아들’로 삼을 성공작들을 골라냈다. 나머지는 죽였고.”

거의 졸다시피 하면서 말하는 유리의 긴 머리를 아까 그 유령 같은 하급 마족이 빗으로 빗기 시작했다. 거의 매일 아침 있는 일인 듯 싶었다.

“그리고 칸은 최종적으로 남은 자신의 두 아들에게 그의 눈을 하나씩 심었어. 반마족이던 그 두 실험체에게 그의 마력을 반씩 나눠줌으로 인해 진짜 마족, 그의 아들로 만들어 준 거지. 그의 뒤를 이을 수 있도록.”

그 뒤는 알 것 같았다.

"그게 나랑 엘릭 칸이야."

엘릭 칸. 엘릭의 본명은 엘릭 레이몬드다. 아마 칸이라는 것은 아버지에게 받은 성인 것 같다. 마족식으로는 엘릭 칸일 테지. 나는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 질문했다.

"왜 너는 마공작이 되어 있고 엘릭은 아직 한참 인간인 거야?"

"당연하지. 그는 마족으로서의 운명을 거부했고, 나는 받아들였으니까."

거부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갑자기 웬 미친 아저씨가 와서 '너는 내 실험체다'라고 말한다면 말이야. 유리는 과거에 대해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듯 했지만 머리를 다 빗긴 그 유령 같은 하인이 사라지자 나에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칸이 인간에게 심은 씨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칸이 또 다른 하급 마족에게서 심은 씨에서 태어났어. 거절할 이유도 없지."

그렇구나…….

그런데 그거랑 나로 엘릭을 불러들이려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마족은 본래가 그 어떤 존재보다 자존심이 높……, 아니, 여왕님 다음으로 해 둘게. 여왕님 다음으로 자존심이 높기 때문에 인간 출신의 반마족 따위가 나와 형제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 그렇지만 내 부친인 칸이 선택한 개중에서 가장 뛰어난 실험체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불러들여서, 과연 내 동생이 될 수 있을 지 없을지 테스트를 해 보려는 거야. 내 테스트에 합격하면 동생으로 인정해 주고 불합격이면…….”

나는 엘릭이 강하기는 해도 소드 마스터급은 되지 않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았다. 마공작쯤 되면 소드 마스터 몇은 간단히 구워먹겠지? 나는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켰다.

“합격 못하면 어쩔 건데?”

“당연히 죽여야지. 그런 약해빠진 인간이 칸의 눈동자를 갖고 있는다니, 말이 돼?”

어떻게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유리는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 나는 그에 대해 뭐라고 한 마디 할까 하다가 그만뒀다. 엘릭과 유리만의 문제였다. 하지만, 그의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엘릭을 죽인다니,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죽이지 마.”

나도 모르게 말한 걸 그가 듣고서는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뭐?”

“죽일 거면 협조 안 해 줄 거야. 오히려 너보다 엘릭을 도울지도 모르지.”

아무리 그래도 엘릭을 죽게 놔둘 것 같으냐. 엘릭은 조금 무서운 녀석이긴 하지만 내 목숨을 구해 주었고 나를 위해 배려도 많이 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알 수 있다. 유리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족의 시선에서는 느낄 수 있는 것도 느끼고 싶은 것도 없다. 아마 엘릭에게도 마찬가지였겠지. 감정조차 읽을 수 없는 존재일진데 어떻게 눈을 보고 무언가를 알 수 있겠는가. 유리는 그걸 아는지, 입으로 내어 말했다. 이미 잠은 완전히 깬 듯 하다.

“며칠동안이나 여왕님을 위해서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봉사한 나보다, 엘릭 칸을 택하겠다는 거야, 지금?”

며칠은 뭐가 며칠이야, 고작 어제 하루, 그것도 제대로 하지도 못했으면서! 그러나 내 생각과 유리의 생각은 달랐다. 그의 머릿속에 어제 단 하루 내 명령에 몇 번 따른 행동들은, 그야말로 바닥을 기며 여왕님에게 혹사당하고 죽으라는 명령까지도 받들었던 기억으로 승화되어 있었다. 그는 벌컥 화를 냈다.

“바닥 핥으래서 핥았잖아!”

“아냐! 내가 언제 그런 거 시켰어!!”

머릿속에 소설 쓰는 프로그램이라도 들어 있냐?! 왜 없었던 일을 날조해! 그러나 유리는 계속 주장해댔다.

“물 떠오라고 하고! 엉덩이 때리고, 걷어차고! 억지로 신발 핥게 시키고!”

신발 없는 채로 납치해 와 놓고 뭘 핥았다고?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는 어울리지 않게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외쳤다.

“아아, 몰라! 어쨌든 나는 할 만큼 했어! 여왕님이 이렇게 열심히 봉사한 나보다 엘릭 칸을 선택하면 안 되는 거야!!”

“누가 뭐래? 엘릭을 죽이지만 않으면 협조하겠어.”

아까까지 마치 사귀던 애인에게 버림받은 것 같은 반응을 보이던 그는 다시 전부 식은 홍차를 마저 들이킨 후 찻잔을 치웠다. 그리고 옆에 있던 코트를 걸쳤다. 기분 전환이 꽤 빠르다. 단순히 싫은 걸 오래 생각하지 않는 성격일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됐으니 부하들에게 좀 다녀와야겠어, 여왕님. 그리고 그 건은 생각해 볼게.”

그는 재빨리 방을 나갔다. 그림자 몇이 황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

다녀온다던 그가 한참이 지나도록 오질 않자, 나는 심심해서 읽지도 못하는 마계의 글자가 적힌 책으로 탑을 쌓다가 가구들을 구경했다. 정말 하나하나 비싼 것 같은 가구와 장식품들이었다. 자랑스럽게 얘기하던 그의 얼굴이 기억났다. 자랑할 만도 하다. 물론 이 가구들이 전부 멀쩡한 상태였다면 말이다.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망가져버린 고급 장식장의 경첩이 내가 문을 열자 툭 떨어졌다.

“…….”

난 모르는 일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장식장 앞에 떨어진 문을 자연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도 한참 기다렸다…….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고 있던 나는 딱히 마계에서는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아직도 유리가 돌아오지 않자, 여왕님을 왜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냐고 따질 셈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바닥이 지저분하지는 않지만 매끈한 대리석 바닥이 맨발로 다니기 꺼려졌다. 옷장을 뒤져 유리의 부츠로 보이는 신발을 신고 밖으로 갔다. 내 발사이즈에는 헐렁한 신발인데다가 굽이 두껍고 딱딱한 징이 박혀 있었기 때문에 발을 내딛을 때마다 딱, 딱, 딱, 딱 하고 소리가 크게 울렸다.

음침하고 우울한 마왕성의 복도에 발소리가 딱, 딱, 딱……. 발소리 한 번 듣고 창문이 다 틀어막힌 복도 한번 보고, 발소리 한번 듣고 희미한 마법구의 빛도 닿지 않는 먼 복도 끝을 한번 보고, 내 발소리에 내가 소름이 끼칠 정도다. 역시 꽃에게 마계는 걸맞지 않다. 창문을 왜 다 막아놨냐고 하니까 이제 곧 유해풍이 불어오는 계절이란다. 유해풍의 계절은 몇 년에 한번씩 돌아오는데, 그 모래먼지가 섞인 바람을 맞으면 목재 가구들이 다 녹는다고 했다. 역시 마계는 최악이야.

내 발걸음을 따라 주인 없는 어두운 그림자도 따라왔다.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아마 유리의 부하 중 하나일 것이다. 나를 가로막지 않는 것을 보면 내가 못 갈 데로 가고 있지는 않은 듯 했다.

귀를 기울여 보았다. 마계도 건조하긴 했으나 바람과 흙 정도는 있다. 가장 큰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갔다. 무슨 소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귀가 반응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8월 26일~8월 29일 낮 12시 사이에 입금하신 분 중에서 입금확인되신 분께 확인메일 보내드렸습니다!

분명히 8월 29일 오전 이전에 입금했는데 확인메일이 안 오셨다 하신 분께서는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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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모두 적으셔서 제 쪽에 메일이나 쪽지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주문하실 때 적으셨던 입금자명과 실제 입금자명이 다른 경우가 많아요;

8월 29일 오후에 입금하신 분은 3일후 3차 확인때 메일 보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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