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여왕-205화 (205/226)

<-- 10. 마족의 습격 -->

나는 의자에 다시 앉아서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마계의 공기는 답답해. 햇볕이라도 조금 쬐어야겠어.

“우선 창이 가장 큰 방으로 모셔. 그리고 인간계의 물과 흙을 가지고 와. 과일도!”

“네네, 알겠어, 여왕님.”

그는 대답만 해 놓고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왜 보냐는 듯 마주 쳐다보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내가 외쳤다.

“빨리 하란 말야!!”

“나 꽃은 처음 보는 거라 신기해서. 그냥 잠깐 보는 것도 안 되나? 너 성격 급하다.”

“시끄러, 여왕님한텐 말대답 하는 거 아냐! 명령을 했으면 빨리빨리 움직이라구!!”

“그럼 우선 일어서야지.”

먼저 내가 의자에서 일어서서 그를 따라가야 그가 움직이겠다는 듯 말하자 나는 팔짱을 끼고 흥, 하며 말했다.

“내가 왜?”

“창문이 가장 큰 방으로 가고 싶다며?”

나는 유리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그에게 충고했다.

“그런데 내가 왜 일어서야 되는데?”

“…….”

한순간 그는 엘릭 소환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결국 유리는 나를 두 팔로 어색하게 안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가 올라가는 동안 한도 없이 투덜투덜 중얼중얼거렸기 때문에 내가 두어 번 주의를 줬지만 그는 내가 여자를 안다니, 계집애들은 물컹한 감촉이 싫은데, 왜 자기 발로 안 가는 거야? 왕이나 공작이나 어차피 한끗 차이잖아? 등등, 온갖 불평을 지껄였다.

유리가 나를 데려간 곳은 성에서 가장 큰 방이었다. 휑한 느낌이지만 아까 그 방처럼 허름하진 않았다. 여기도 찢어진 커튼이나 벽지가 수리되지 않고 깨끗하지도 않아 귀신의 집 같은 인상을 주었지만 아까 방보다 나았다. 왜 여왕님을 그런 좁아터진 방에 모시냐고 물었더니 거기가 손님 방이란다. 손님이니까 제대로 대접해 줬는데 왜 불만이냐는 유리의 대답을 들은 나는 기가 막혔다.

“마공작이라며? 공작성이 왜 이렇게 허름해? 너 거지야?”

나도 인간계에서 공작이긴 하지만 유리의 성과는 비교도 안 되게 깔끔하다. 미르 덕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청소는 하고 산단 말이지. 이건 뭐 가구들에 먼지 방지 마법만 걸어뒀을 뿐 조금도 손을 대지 않았잖아.

내 말에 유리는 당치도 않다는 듯 주장했다.

“여기 있는 것들이 하나하나 얼마나 값비싼 것들인데! 저건 3년 전에 내가 계약한 인간에게서 받은 어느 나라 왕관이고, 또 저건 200년 전에 전대 마공작이 계약한 인간에게서 받은 보석 박힌 장롱……. 여하튼 다 기억은 못하지만 모두 최고급품이기 때문에 내 성에 들인 거야! 정령 주제에 아는 척 하지 마!!”

"여왕님!!!"

"여, 여왕님 주제에 아는 척……."

"여왕님은 뭐든 알아!! 여왕님, 여, 왕, 님!"

"……네, 여왕님."

그나저나 이 녀석, 귀가 얇아서 최고급품이라는 인간들의 말만 믿고 다 사들인 것 같다. 확실히 마족을 상대로 사기칠 사람은 거의 없어서 대부분이 진짜 최고급품이지만, 아니, 최고급품이‘었’지만 말야.

이런 식으로 관리를 하면 당연히 못 쓰게 되지.

“청소 마법 걸었는데.”

고급 가구란 자고로 매일매일 하녀를 고용해 쓸고 닦고 시켜야만 진정 그 가치를 오래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마법 따위로 보존시키려면 적어도 천이나 그 위에 덮어놓던가.

아무리 마법을 걸어놨어도 수백년간 흠집 입고 벗겨진 도금을 수리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했으니 멀쩡할 리가 있나. 제대로 된 것은 매일 앉는 이 의자 정도뿐인 것 같았다.

“성에서 일하는 마족은?”

“많지! 수백이나 돼. 난 마공작이니까.”

이런 호구를 보았나. 일도 안 시키고 월급만 주고 있는 거야? 일을 했다면 방이 이런 꼴일 수는 없다. 대체 무슨 일을 시키길래? 유리는 히죽거리며 외쳤다. 표정에 소름끼치는 본성격이 일순 드러났다. 수액이 역류하는 것 같다.

“살육! 약탈! 파괴!!!”

“닥쳐!”

나는 귀를 막고 악 소리질렀다. 식물 앞에서 그딴 소리는 하지 말란 말야!! 유리에게 그 죄를 괜히 묻고는 입을 꼭 다물게 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는 거야?

“흙이랑 물 가지고 오라며. 여왕님.”

“부하 없어? 그딴 건 걔네 시켜. 그나마 여기서 제일 직위가 높은 네가 내 옆에서 계속 말상대 하면서 모시는게 매너고 예의지.”

마공작쯤 되면 부하를 효율적으로 다룰 줄 알아야지. 내 말에 그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하급 마족은 계약 없이 인간계로 못 나가, 여왕님. 나쯤 되어야 갈 수 있어. 그리고 나 요즘 인간계 제국의 황자라는 인간하고 계약한 상태라 계속 못 붙어 있는다구. 빨리 엘릭 칸이 와야 하는데 왜 아직 안 오지……?”

마지막 말은 거의 중얼거리며 혼잣말을 한 유리는 간단히 손짓으로 게이트를 열고 나갔다. 나는 게이트 안으로 쏙 사라진 그의 은발머리 꽁지를 보다가 생각했다. 그나저나, 누구랑 계약했다고……? 인간계에서 제국은 우리 하르아이나 뿐이다. 그리고 우리 나라 황자라면 검밖에 모르는 황태자 폐하, 날라리 이루, 그리고 배신 혐의로 유폐 중인 제 3황자인 페트로 하르아이나 크라이덴…….

나는 찻잔에 물과 흙을 담아온 그를 보고 버럭 소리쳤다. 너 누구랑 계약했다구!?

랄까 그보다 왜 고작 찻잔에 담아온 거야? 흙은 적어도 커다란 화분 흙 정도는, 물은 그 화분이 흥건히 젖을 만큼은 구해 와야지! 일단 지금 중요한 것은 계약 문제다. 유리는 흙 묻은 손을 깨끗한 물수건을 소환해 꼼꼼히 닦으며 손톱 밑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내가 누구랑 계약했냐구? 그건 왜? ……아, 알았다구. 대답하면 되잖아. 인간 중에서 그 갈색 머리의 황자라는 녀석이랑 계약했는데 이름은 기억 안 나. 기억따윌 할 리가 없잖아. 마족과 계약한 인간은 보통 몇 개월에서 몇 년 정도면 죽는걸. 그것만 기다리고 가끔 심부름 해 주면 그 때마다 좋은 게 생기는걸.”

갈색 머리면 틀림없다. 페트로 3황자……! 귀족들이 그렇게 머리 싸매고 찾아헤매던 마족의 계약자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나는 유리에게 따지듯 물었다. 지금 인간계에서 난리가 나고 있는 마물의 출몰이 전부 네가 한 짓이냐고.

“응. 맞는데, 왜?”

“……!”

“그것 뿐 아니고 탈출을 돕거나 사람을 저주하거나 정보를 빼내거나, 정신계 조종도 꽤 했어. 이번 애들은 계약자만이 아니라 주변에서 이것저것 떠들어대서 할 일이 다른 때보다 많았거든. 소환될 때마다 값나가는 걸 받기 땜에 나는 좋지만.”

나는 손톱을 줄로 손질하는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왜? 하는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유리는 소파에 기대 앉아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아니다. 유리한테 화내봤자 소용없다. 애초에 그는 그냥 대가를 받고 그가 원하는 것을 해 준 것 뿐이니까. 하지만 열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는 유리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뭐야, 왜 이래!”

짜증스럽게 화를 내려는 유리가 내가 정령여왕이라는 사실에 참고 또 참다가 기어이 벌컥 터뜨리려고 했을 때 나는 손을 놓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걸로 우리 제국에서 고생한 병사들의 몫은 끝났다. 나쁜 자식. 제국의 적!

“뭐야, 뭐! 무슨 짓이야, 갑자기!!”

“시끄러워! 여왕님이 때리면 그냥 맞는 거야!”

“그렇게까지 해 줘야 돼?”

“당연하지! 난 여왕님이니까.”

유리는 표정이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지만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어찌할 줄 몰라 옆에 있던 흑마술서 책을 거칠게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그는 마족이다. 그 책은 아마 유치원 때 배운 기본 교본쯤 되겠지. 하지만 의미없이 반복해 글자를 읽어가기 시작하는 그를 옆에 두고 나는 생각에 빠졌다.

“야.”

“…….”

내 부름에도 건방지게 유리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도 이젠 마족따위 두렵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그를 톡톡 건드려가며 화를 돋궜다.

“유리야.”

“왜! 그리고 그렇게 부르지 마! 칸 레일라라고 불러!”

나는 화를 내는 유리에게 말했다.

“화내지 마. 명령이야.”

“……!!!”

그는 무심코 내 명령대로 화를 내지 않으려다가 깜짝 놀라 더 화를 냈다. 뭐야 그게! 라면서. 아무래도 내 고집스런 명령을 반복해서 듣다가 그게 버릇이 된 것 같았다.

“용건 말해.”

“나한테 명령조로 말하지 마.”

“……용건 말해요, 여왕님.”

아직 한참 부족하지만 그런대로 된 것 같다고 느낀 나는 유리에게 그간 한 짓을 일일이 캐물었다. 원래 계약 내용은 함부로 말하면 안 되지만, 나는 마계의 법칙과 동떨어진 존재기에 나에게 말하는 것은 상관없다고 한다.

========== 작품 후기 ==========

책갈피 관련 블로그에 따로 설명해놓았어요 ㅠㅠ 참고 부탁드립니다.

그나저나 치타의 소유자?? 그게 뭐죠??

근데 유리랑 엘릭은 형젴ㅋㅋㅋㅋ

부자덮밥이 아니구 형제덮밥 ㅋㅋ

엘릭은 덮밥포지션 없습니다 ㅜㅜ 따로따로 담아야함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