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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여왕-204화 (204/226)

<-- 10. 마족의 습격 -->

내 두 번째 남편이 된 미르는 집안 인테리어에 흥미가 없던 유렌과 반대로 시골 분위기에 걸맞는 성을 완전히 새 것처럼 개조해버렸다. 이끼 낀 망루를 최신형으로 개축, 허술한 곳이 있는 성벽도 사비를 털어 깔끔하게 수리하고 코팅까지 했다.

“후후후, 나님과 우리 시아님께서 사는 성이 이 정도는 되어야지!”

나는 인테리어를 바꾸고 싶다는 미르에게 전적으로 권리를 맡겼으므로 그냥 곁에서 방관하고 있었지만 미르의 막무가내식 요청에 죽어나는 것은 아랫사람들 뿐이었다. 나나 내 아버지 시절의, 아랫사람의 권한에 간섭하지 않고 위에서 너그럽게 바라보기만 하는 여유로운 일처리 방식에 익숙해졌던 사람들은 사소한 것 하나까지 전부 관여하며 조금이라도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수리를 시키는 새로운 공작님의 남편의 횡포에 바쁘게 돌아다녔다.

“건축의 제일은 기본이다! 나의 날카로운 눈에서 벗어날 생각은 마라!!”

그래도 집이 깔끔해지니 좋구나. 하얗게 새로 칠한 실내는 식물의 푸른 색과도 잘 어울렸다. 정원에서 꾸벅꾸벅 졸던 나는 한가한 시간에 장미를 돌보는 슈의 무릎으로 가 드러누웠다. 슈는 후후 웃으며 내 머리를 쓸어주다가, 내가 잠들자 다시 방으로 옮겨놓은 것 같다.

어째서, 그는 나를 첫 번째 타깃으로 설정했던 것인가.

전에 억지로 꿰매어 보이지 않도록 묶어 둔 불안감이 그 때 다시 터져버렸다. 마무리되지 않은 사건은 언젠가는 다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

공작령의 영주성, 주인의 방은 흐트러진 이불만 남은 채 누구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눈을 뜬 것은 익숙치 못한 답답한 공기를 느끼고서였다. 평소였다면 적당히 차가워서 기분 좋다고 느낄 정도의 서늘한 온도였으나 나는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해 헐떡이며 깨어났다. 호흡할 산소도, 광합성을 할 태양광도 부족했다. 인간계와 공기의 비율이 달랐다.

나는 어딘가 이상한 곳에 내가 놓여져 있다고 생각했다. 내 것보다 딱딱한 침대였다. 그리고 무척 차가웠다. 얇고 색이 바래 갈기갈기 찢어져 있는 캐노피가 침대에 걸려 있었다. 가구는 흔한 것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상당히 오래 된 것 같기도 했다. 먼지는 없었으나 관리는 조금도 하지 않은 것처럼 사람의 흔적이 눈꼽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흐릿한 빛을 내는 작은 마법등이 중간중간 놓여 있는 것 외에는 빛이 들어오는 곳이 전혀 없다. 창문은 나무 창으로 닫혀 있었고 딱 봐도 단단히 잠겨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괴기 영화에나 나올 법 한 끔찍한 방이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 방문을 열었다. 맨발이다. 혹시 뭐가 나오면 바로 도망쳐야겠다 싶어서 조심스레 발 끝으로 서 문을 빼꼼 들여다 보았다. 그 순간 방의 안쪽, 내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기에 조금도 남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일어났나.”

“!!”

솜털이 쭈뼛 서는 듯한 감각이다. 여긴 꿈일까? 꿈이 아니고서야, 어째서 내가 멀쩡한 이 세계의 생물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단 말인가. 마족이나 마물이 아니고서야…….

마족? 마물?

그 생각에 나는 더더욱 소름이 끼쳤다. 잘 돌아가지 않는 목으로 겨우 뒤를 바라보았다. 일 초에도 수없이 보지 말까, 봐버릴까 고민하다가 선택한 행동이다. 나는 익숙한 감각에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저 황금빛 눈동자…….

“엘릭?”

가장 처음 생각난 것은 그 이름이었다. 엘릭과 똑같은 황금빛의 눈동자를 오른 쪽에 가진 그 미청년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얼음장보다도 차갑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흐응, 당첨이군.”

나는 뒤늦게야 그 남자의 다른 쪽 눈에 시선이 갔다. 엘릭이 투명하고 차갑게 타오르는 푸른 불꽃같은 사파이어 빛 눈동자라 하면, 그는 엘릭과 정반대로 불투명하지만 뜨거운, 하지만 오히려 너무 뜨거워서 단단히 얼어붙은 것 같은 견고한 심지를 가진 적마노 빛의 눈동자 색을 하고 있었다.

흩날리는 눈발 같은 금속성 화이트 실버의 직모는 리스피아와도 세르와도 달랐다. 그는 슈보다 더 머리가 길었다. 거의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였으니.

새카만, 너무 검어서 식물에게는 별로 좋지 않은 그런 옷으로 온 몸을 휘감은 그 남자는 마치 해골 같은 긴 팔을 뻗어 내 생기 도는 머리칼을 만졌다. 나는 바로 뒤가 문이었기에 도망갈 수도 없이 머리카락 몇 가닥을 고스란히 내주고 말았다. 그는 떨떠름한 내 표정을 보고, 내 머리칼을 꽉 쥐었다. 빨려나갈 듯한 기분이지만 그와 나는 기운의 원천이 달랐다. 그는 마력으로 내게 어떠한 해도 끼칠 수 없다. 안심이 되었으나 또 불안하기도 하다.

“나는 마공작 유리 칸 레일라. 네가 생각하는 대로 마족이다.”

그 마족은 스스로를 ‘칸’ 이라고 칭했다. 칸이라면 어딘가에서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엘릭의 부친, 그 미친 마족이 말한 이름이다. 누가 뭐래도 일단 그는 소개를 했다. 내가 원하지 않은 소개였지만 말이다. 나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내 소개를 해 주었다.

“나는 정령 여왕 플로라.”

“…….”

“할 말 없으면 난 이만 갈게.”

여긴 아무래도 마계겠지. 두 번 다시 오고 싶지 않은 곳이다. 급히 정령계로의 문을 여는 나를 그를 거칠게 가로막았다. 엘릭과 쓸데없는 곳에서 닮아, 아름다운 초승달처럼 웃는 그 마족, 마공작 유리 칸 레일라는 강제로 내가 연 게이트를 닫아 없앴다. 기분이 오싹하지만 나, 난 식물이지롱! 너 같은 게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말야!!

“남의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정령 여왕님.”

나는 울컥해서는 그에게 톡톡 화를 냈다. 마족이면 마족이지, 되게 건방지네!!

“난 여왕이니까 안 들어도 돼.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면 돼!”

“막무가내로군.”

내가 정령계로 숨어 버리면 그는 나를 어떻게 하지 못하겠지만 이미 내가 마계로 끌려온 상태에서 인간계를 거쳐 정령계까지 가는 것은 무리다. 아까, 어떻게 내 게이트를 닫을 수 있었던 거지? 마공작이라는 건 정령왕이 연 게이트까지 디스펠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마족이란 걸까? 그는 내 협조가 필요한지, 내게 필요 이상으로 무례하게 굴진 않았다. 하지만 여긴 마계다. 식물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곳이었다. 나는 그가 빨리 말을 끝내기를 바라며 초조한 기분으로 기다렸다.

그는 티 테이블을 소환해 나에게 차를 권했으나 나는 먹지 않았다. 여긴 마계다. 꽃이 마계에 있는다는 것은 인간이 물 속에, 물고기가 물 밖에 나와 있는 것과도 의미가 동일하다. 너라면 입에 뭐가 들어가게 생겼냐.

내가 도도하게 그의 앞에서 팔짱을 끼고 있자 마공작 유리 칸 레일라는 무척이나 상냥하게 웃으며 테이블을 치웠다. 그리고 의자에서 다리를 꼬았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마공작. 마계의 2인자다. 자꾸 이런 식으로 비협조적으로 굴면 어떻게 되어도 몰라?”

인간과는 달리 그는 태생적으로 미를 타고난 듯 싶었다. 반짝반짝 완벽하게 세공된 다이아몬드 같다. 움직임 하나하나, 차갑지만 유혹적인 목소리, 새하얀 턱, 쇄골이 깊게 파일 정도로 말랐지만 선이 너무나 고운 어깨. 그 모든 것이 타인의 시선을 단번에 잡아끌 정도로 아름다웠다. 마족은 인간을 홀려 잡아먹는 존재. 그렇기에 당연히 아름다움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 아니다. 그는 마족이다. 식물인 내 눈에는 모든 것이 객관적으로 보였다. 너무 예뻐서 짜증난다. 그림 속의 매력으로 보일 뿐이다.

아름답지만 맛있어 보이는 향은 아니었다. 엘릭과 쥬얼, 그리고 그에게 느낀 것은 시각적인 만족감 뿐이다. 게다가 입에 넣어보지 않았으니 맛있는지 어떤지 알 리가 없나.

향이 없는 음식은 사진 속의 케이크처럼 전혀 입맛을 돋우지 못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정령계의 여왕이야. 건방지게 굴었다간 혼날 줄 알아.”

나는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그에게 똑같이 말했다. 겁먹으면 지는 거다. 식물에게 있어 마족은 상극이지만, 그것은 마족에게도 똑같다. 얌전해 보인다고 얕보지 말라구. 유리 칸 레일라는 웃음을 터뜨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잔혹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마치, 나 말곤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듯한 자만심으로 가득 찬 웃음. 그리고 천천히 다리를 반대로 꼬았다. 긴 다리는 새카만 승마 바지 같은 가죽 바지로 감싸여 있다. 마족은 인간과 체형부터 다르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엘릭도 키가 매우 크지는 않지만 조금만 더 크면 거의 9등신. 체격이 거의 모델급이었다.

“좋아. 여왕으로 대우해 주지. 하지만 나는 윗사람을 모셔 본 적이 없어서 말야.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해 주길.”

용서를 구하는 태도부터 글러먹었다. 그게 어디 여왕으로 대하는 태도란 말이냐. 나는 바로 지적하고 싶었지만, 그러나 나 역시 마계에서 마족과 쓸데없는 트러블을 만들어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내가 얌전히 이야기 정돈 들어 주겠다는 태도를 취하자 유리 칸 레일라는 가만히 길다란 손으로 깍지를 낀 채 무릎에 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너를 초대한 것은…….”

초대가 아니라 납치겠지. 아아, 지금쯤 내가 없어진 걸 다들 알았으려나? 연락도 없이 사라지면 걱정할 텐데.

“엘릭 칸. 아니, 그 쪽에서는 엘릭 레이몬드 경이라는 이름이던가. 네가 유희하고 있는 그 제국의 귀족 말야.”

나는 그의 입에서 엘릭의 이름이 나오자 귀를 쫑긋 세웠다. 대체 이 녀석, 엘릭과 무슨 관계야? 눈도 닮았고. 그런데 눈만 닮았어. 그는 마치 인형처럼 등을 곧게 펴고 의자에 앉은 채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움직임으로 기지개를 폈다. 그러니까 무척 지루하다는 것 같았다.

“흐음. 그 녀석을 여기로 불러들이기 위해서야. 이제 알겠지?”

알았……, 을 리가 없잖아! 그거랑 나랑 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 거야!? 나는 그에게 따지려고 했다. 꽃을 걸어둔다고 마족이 유인될 리가 없잖는가!! 장난해?

유리는 나른한 손짓으로 긴 머리를 쓸어넘겼다. 눈을 반쯤 내리뜨고 손가락을 딱 부딪혔다. 얼음장같은 싸늘한 꽃이 테이블 위의 화병에 툭 떨어졌다. 이건 꽃이 아니다. 줄기는 국화 줄기와 닮았다. 작지만 뿌리 형태의 다리도 있다. 꽃잎은 마치 말린 고깃덩이 같은 색이었고 물에 적신 휴지처럼 쭈글쭈글하게 얼어 있다. 꽃같지만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마계의 식물이구나. 아마 보통 꽃처럼 움직이지 못하게 얼려 둔 듯 하지만 실제로는 움직일 수 있는 생물임이 틀림없다. 식물도 움직이긴 하지만, 이것과는 분명 구조가 달랐다.

“너는 꽃이 있으면 기운이 나겠지? 그러니까 엘릭 칸이 올 때까지 그걸 보면서 즐기고 있어. 용건이 끝나면 돌려보내 줄 테니까. 나도 정령계와 척을 지긴 싫거든.”

이건 꽃이 아니잖아!!! 이딴 걸로 뭐 어쩌란 거야? 이 멍청아!!

나는 화병째로 유리에게 던지려고 했으나, 역시 화병까지는 던지기 아까워서 얼린 꽃만 그에게 던졌다. 유리는 내가 던진 것을 가볍게 가느다란 팔뚝을 휘저어 정확히 손으로 받아들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뭐가 불만인 거야? 조금만 참아 달라고 내가 부탁까지 했잖아.”

정령여왕을 자극하지 않으려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려고 애쓴 것 같긴 하지만, 그게 어딜 봐서 부탁이냐! 나는 내 스스로 되뇌이며 당당히 어깨를 폈다. 겁먹으면 안 된다. 나는 여왕이다. 마족 앞에서도 그건 변하지 않는다. 팔짱을 끼고 턱을 든 채 유리 앞에서 일어나서 소리쳤다.

“어차피 널 보니 네 목적을 이룰 때까지는 돌려보내주지 않을 것 같은데, 그것까지야 내가 참아 주겠어. 잠깐 마계에 있는다고 죽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 여왕님을 모시려면 그에 합당한 준비부터 해 놓고 기다리는 게 예의 아냐?”

유리 역시 내가 정령왕이라 함부로 대하지는 못하겠는지 미간은 찌푸렸지만 대들진 않았다. 대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아, 알았어. 정말이지 계집애들은 까다롭다니까.”

“말투부터 고쳐, 여왕님이겠지!! 내 앞에서 불평하지 마.”

그러고 보니 정말로 유리는 윗사람을 대하는 법을 모른다는 주장대로 서툴긴 하지만, 분명히 내게 신경써주고 있었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다. 그는 고작해야 마계의 마족이다. 나는 플로라, 정령 여왕. 아직 어리긴 하나 자그마치 한 정령계를 다스리는 존재였다. 아직 정령력 다루는 법도 서툴러서 지금은 방법을 모르지만 내가 백 년만 더 살아서 정령계에 익숙해졌다면 그가 막든 말든 그냥 무시하고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가 나를 잡아두려면 최대한 비위를 맞춰줄 수밖에 없다. 마족은 원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뭐든 하는 존재라고 했었다. 정말로 다들 그렇진 않겠지만, 대체로 그런 성향을 갖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나는 방금까지 미지의 존재, 마족에 대해 겁먹던 것을 그만두었다. 그래, 이번 기회가 마족 공포증을 극복할 계기일지도 몰라. 사실 마족은 그냥 마족이고, 나와 다른 세계에 살기 때문에 내 감각에서 벗어나 있을 뿐인데 그렇게까지 겁을 먹을 것까진 없잖아?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게다가 내가 마족에게 흥미가 없는 것처럼 마족도 식물에겐 흥미가 없다. 뒤늦게 깨닫긴 했지만, 내가 인간의 육체를 버린 뒤로는 마물이 나를 공격한 적이 없다. 단지 내가 아니라 내 옆의 인간들을 공격했을 뿐, 내게 직접 적의를 보인 적은 없었다. 설마 마물은 풀을 안 먹는 거 아냐? 만약 그렇다면, 이해 충돌로 싸우지만 않으면 마계의 존재는 정령인 내게 대놓고 해를 끼치려 들진 않을 것이다.

========== 작품 후기 ==========

유리 존나 처음에 뭔가 있어보였는데 그냥 개.

그나저나 요새 연참했더니 덧글이 부족해요 ㅠㅠ

개인지 배송전에 완결낼려고 했더니 자꾸 이러면 비축분 천천히 풀어서 완결 늦게 내는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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