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전쟁 -->
***
귀환 명령이 떨어지고 나는 수도의 그리운 우리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곧장 참혹한 현실과 맞닥뜨렸다. 나는 멍하니 박살난 우리 집 대문을 쳐다보았다. 정원 꼴도 말이 아니다.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집안 사람들은 다들 무사한 거야? 갑자기 든 불안감에 나는 예고 없는 한밤중의 귀환에도 불구하고 모든 집안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집사와 시종은 내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고 급히 나머지 식솔들을 전부 깨웠다.
“밖에, 대문……!”
내 짧은 말에서 나의 당혹스러움을 읽어낸 집사는 미묘한 표정과 함께 시종 틈에 서 있는 라르슈를 가리켰다. 라르슈는 언제나처럼 반듯이 내게 인사를 했다.
“어서오십시오, 공작 각하.”
아니, 내가 듣고 싶은 말은 어서오십시오 공작 각하 같은 말이 아니란 말야. 왜 문이 저래? 문이 왜 저런 거야? 우리 집 대문은??
라르슈는 퉁명스러운 평소 표정과 달리 뭔가가 시원하게 풀렸다는 듯 쿨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설명해 주었다.
“공작님께서 부재중이던 때 감히 시렌느 공작가의 저택을 털고자 했던 불온한 무리들의 탓에 저택의 대문과 정원이 손상을 입었습니다. 제가 그들을 붙잡아 응징하고 수리비를 받아 놓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 라르슈 혼자서?? 붙잡아???”
“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멍하니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똑같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라르슈의 귀에 귀걸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달라고 해도 안 줬던 자수정 귀걸이……. 이건, 하고 말을 꺼내는 그를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우당탕 하며 문을 걷어차 여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다.
“시~아~! 나 왔쪄!!”
덥석 나를 안고 구르는 남자는 당연히 미르……, 미르도 왔구나! 젤타 왕국에 갔다가 이제 돌아온 건가? 마탑에서 바로 이동해 올 거라 빨리 도착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늦었네. 가 아니라 이게 뭐야!
나는 내 가슴에 딱 맞물려 압박되는 탱글탱글한 가슴을 느끼고 놀라서 그를 밀어냈다. 미르는 아직도 여자 모습 그대로였다! 왜 아직 원래 모습으로 안 돌아가고 있는 거야?
미르, 아니 포니테일의 긴 머리를 묶고 가늘고 긴 속눈썹을 뽐내는 섹시한 여자 미르는 내게 계속해서 안겨들려고 했다. 나는 낯선 기분이 들어 미르를 발로 걷어차려 했지만 여자의 모습이다 보니 함부로 발길질도 못하겠다. 그는 가슴이 반쯤 드러나는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나보다 훨씬 키가 컸기 때문에 엉덩이도, 가슴도 더 컸다. 비율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지만.
그게 미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집안 사람들과 유렌은 징그럽다는 눈으로 미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유렌은 나를 빼앗아 그에게서 높이 안아들었다. 키가 큰 글래머 미녀 미르는 유렌을 보더니 여자처럼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뭐니! 유렌, 나의 시아를 돌려줘! 나 정말정말 오랜만에 보는 거란 말야!”
“꺼져요, 여장 변태.”
“이거 은근히 재미있단 말야!”
미르의 헛소리에 유렌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미르가 여자라는 사실에 아랑곳않고 발로 걷어찼다. 미르는 억울한지 당당하게 주운 나뭇가지를 주워들고 유렌에게 겨눈 채 외쳤다.
“에잇, 복수닷! 매지컬 러블리 플레임 러스트 미르미르 미르링 변★신!”
“지금 무슨 헛소리……, 윽!?”
나뭇가지에서 핑크빛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유렌을 감쌌다. 그리고 유렌은 속수무책으로 미르의 마법에 걸려버렸다. 턱선이 부드러워지고 콧볼이 좁게, 눈썹은 가늘게 변했다. 구불거리는 백금발은 훨씬 길어져서 허리까지 닿았다. 목소리 또한 허스키한 편이지만 음이 높게 여자의 미성으로 바뀌어 버렸다.
미르만큼은 아니지만 육감적인 가슴과 그을린 피부에 세로 선이 드러난 복근, 윤기 흐르는 허벅지와 늘씬한 팔 다리를 가진 약간 터프해 보이는 미녀였다. 자신의 얼굴은 못 보지만 내 표정을 목격한 유렌은 곧장 스스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의상 역시 가슴과 다리를 겨우 가리는 아이보리색의 야한 드레스 차림이었다. 그는 벌컥 화를 내며 미르의 멱살을 쥐었다. 남자일 때보다 박력은 약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더 강해 보였다.
“당장 내 몸 원래대로 돌려놔, 이 변태자식!”
유렌이 반말을 하는 건 보기 드문데…….
미르는 히죽히죽 웃으며 나뭇가지를 뒤로 감췄다. 유렌은 그 나뭇가지를 부숴 놓고 네놈 목도 동강내 주겠다며 펄펄 뛰었다. 나뭇가지가 죄는 아니잖아…….
대체 무슨 소란이냐며, 저택에 오자 마자 무지개 장미와 빈사상태의 꽃을 보살피던 슈가 저택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미르는 히쭉 웃으며 나뭇가지를 다시 들어올렸다.
“나 구슬로 저 녀석 봤어. 시아의 새 장난감이지?”
“응? 네, 안녕하세요! 전 슐츠라윈이라고 해요. 당신도 플로라 님의 연인이에요?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요! 저는 슈나 슐츠라고 불러주시면……, 우왁?!”
장난감이라는 말에 슈는 기쁜 표정으로 그를 알아봐준 미르에게 자기소개를 했다. 그러나 미르는 사정없이 나무막대를 휘둘렀다. 저놈의 나무막대, 나부터가 먼저 부숴버려야겠다.
핑크빛 빛이 이번에는 슈를 감싸안았다. 황금빛 긴 머리를 가진 늘씬한 엘프 미녀가 그 뒤에 나타났다. 슈는 미르와 유렌, 그리고 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자신의 밋밋한 가슴을 보고 울상을 지었다.
“왜 나만 가슴이 이래요? 엘프 무시하지 말아요! 엘프도 큰 여자는 크단 말예요!!”
유렌은 닥치고 내 몸 돌려놓으라며 미르를 이리저리 휘둘렀다. 미르는 깔깔거리며 슈와 가슴에 대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둘이 초면부터 마음이 잘 맞았나 보다. 그나저나 내 대문 어떡할 거야. 아아, 나 기절할 것 같다…….
침착하게 나에게 설명을 해 준 것은 카딘이었다. 라르슈의 과거와 귀걸이의 봉인에 대해, 그리고 문이 부서진 경위에 대해 설명해 준 카딘은 좀 더 크고 공작가의 권위를 나타낼 수 있는 튼튼한 문으로 바꾸는 게 어떨지 나에게 제안해 왔다.
크고 튼튼한 문이라……. 괜찮을 것 같다. 일단 나는 이번 사건이 끝나면 영지로 돌아갈 생각이었고 문 역시 그 때 저택의 전체적인 보수 개축공사와 함께 새로 지으면 될 것이다.
피로를 풀기 위해 내 방 옆의 목욕탕으로 들어온 나는 옷을 벗고 욕조로 들어갔다. 루페닌 왕국에 두고 온 네리아가 아직 마란 후작과 함께 오는 중이기에 익숙치 않은 시녀들의 시중을 받느니 차라리 엘레스트라와 엔다이론을 불러 목욕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문이 허락도 없이 열리며 여자 모습의 미르가 알몸으로 내 욕조에 침입했다. 뽀얀 피부와 커다란 가슴이 단연 돋보인다. 여자 미르의 키는 원래 미르와 비슷했으나 욕조가 커서 좁지는 않았다. 나는 당황해서는 미르를 쳐다보았다.
“같이 목욕하자, 시아♡”
“여자 흉내내는 게 그렇게 재밌어?”
미르의 뒤로 세르가 문을 닫고 들어왔다. 세르 역시 은발의 어깨까지 오는 머리를 한 지적인 미녀 모습으로 변신해 있었다. 그까지 미르에게 당해버렸나 보다. 그는 드래곤이라 금방 풀 수는 있겠지만 이왕 하는 것 미르가 싫증나서 풀어줄 때까지 그대로 있기로 한 것 같다.
그나저나 미녀 둘에 둘러싸이니 기분이 왠지 묘하다. 엘프 마을에서 여자 엘프들도 나에게 대놓고 욕정을 내보였다. 남자가 많으니 굳이 신경쓰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여자이지만 그 속은 남자였다. 나는 미르의 시선에 무방비하게 있다가 급히 가슴을 가렸다. 미르는 히죽거리며 내 손을 잡아 치웠다.
“같은 여자끼리 왜 그래~?”
“속은 남자잖아!!”
“원한다면 아래쪽도 남자로 변신할 수도 있지롱!”
미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분명 글래머한 미녀였던 미르의 하반신에 원래 미르처럼 거대한 무기가 나타났다. 그게 더 무서워! 가슴도 크고, 거기도……! 내가 당황한 채 쩔쩔매고 있자 세르가 말했다.
“곧 싫증나겠지. 뭐니뭐니해도 여자 모습은 한계가 많으니까.”
그럼 싫증날 때까지 난 어쩌란 거야! 다행히 욕실 문이 또다시 벌컥 열리고 수건으로 몸을 가린 여자 유렌과 여자 슈가 들어왔다. 슈는 꺄르르 웃으며 내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같이 목욕해요, 네? 플로라 님?”
“아까 때린 건 용서할 테니 아래만이라도 남자로 돌려 놔 주십시오…….”
잠깐만, 네가 때려 놓고서는 네가 용서하는 게 어딨어. 미르에다가 세르, 유렌과 슈까지 욕실 안에 들어오니 거의 가슴에 파묻혀 질식할 것 같다. 슈는 자기 것보다는 내 가슴에 관심이 많은지 아예 얼굴을 파묻고 즐거워했다.
“기, 분, 좋, 아♡ 물도 따끈따끈하고, 플로라님도 보들보들하고.”
“감촉 외에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노블중략:중략된거 몇줄 안돼요 ㅠㅠ 요새 단속이 심해져서;)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누를 집어 들고 나를 문질러 씻겼다. 그리고 한참 후, 저녁때가 되어 여자의 몸이 불편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미르는 여장 놀이를 그만두고 모두를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남자의 육체로 돌아온 유렌은 볼 일 없어지자 미르를 걷어차버렸다.
***
네리아와 멜, 루시나, 쥬얼이 마란 후작과 함께 루페닌 왕국에서 돌아온 후 3개월쯤 지났을까. 리스피아는 로드의 호출이라며 불평불만을 다 내뱉고는 엘프 마을로 돌아갔다. 평민들의 생활도 원래대로 돌아왔으며 치안 역시 이전보다 더 철저해졌다. 쥬얼은 유렌을 졸라 검을 배우겠다고 나섰다. 쥬얼이 나와는 반대되는 성향의 마족이라는 점에 그는 슈보다 경계를 덜 갖고 쥬얼에게 검을 매일 꼬박꼬박 가르쳐 주었다. 루시나는 카딘의 밑에서 시종으로의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제인이 저 정도의 마법사를 시종으로 두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면서 라르슈를 억지로 시종 자리에서 끌어올려 내 전속 마법사로 두었는데, 라르슈는 카딘에게 보란 듯이 자랑하다가 카딘이 다음 대 집사 후계자로 내정되자 입을 다물었다.
라르슈가 무슨 방식으로 수리비를 받아낸 건지는 몰라도 그 문 수리비라는 게 양이 꽤 되어서 이름있는 건축가를 불러 저택의 외벽을 지출 없이 전보다 더 크게 새로 지을 수 있었다. 마법 경보 장치도 깔끔하고 튼튼하게 달아놓았다. 저번 건 너무 옛날에 달아 둔 싸구려라(아마 저택을 처음 지을 당시에 쪼들리던 시렌느 초대 공작이 아무거나 싼 걸로 구해 온 것 같다) 이번에는 꽤 안전하고 튼튼한 걸로 달아놓았다. 지금까지야 돈 되는 거라고는 고작 벽돌이나 다 죽어가는 무지개 장미 정도밖에 없는 허름한 별장이었으나, 앞으로 저택도 증축하고 값나가는 재물도 들여 놓을 거니까 도둑을 대비해 관리자 이외에는 경비를 풀지 못하도록 철저히 설정해 놓았다.
나는 다시 찾아온 한겨울의 창문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슈는 이런 북쪽 지대는 처음이라 추울지도 모르는데 매일같이 정원에 한두 시간은 꼭 나가 있었다. 다 죽어가던 무지개 장미를 살린 것 뿐만 아니라 정원사가 은퇴한 후 거의 정글과도 같았던-하지만 자연력은 풍부했기에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꽃은 자라고 싶은 대로 놔두는 게 좋으니까- 정원을 왕실 정원 못지 않게 아름답게 가꾼 슈는 그 일로 집사에게 신뢰감을 얻게 된 후 첩 치고는 은근히 높은 대우를 받았다. 처음에는 내 새로운 애인인데다가 이종족인 엘프라는 사실에 남들이 상당히 거리감을 느끼는 듯 했지만 곧 특유의 친절하고 싹싹한 성격으로 지금은 거의 모든 저택 사람들과 친해진 상태였다.
유렌과의 관계는 조금 두고 봐야 알겠지만 유렌도 그다지 그를 싫어하지는 않는 눈치였고, 가끔 그가 불안해하고 내가 달래주는 것만 제외하면 무난한 관계를 유지 중이다.
미르와 슈는 너무 죽이 잘 맞아서 종종 내가 둘에게 역으로 당하기도 하는데, 그 후에 억울해진 내가 따로 슈를 불러서 귀를 마구 만져줘버렸다. 그런데 왜 그렇게 좋아한 거야?
종전을 축하하는 황실 파티가 열렸다. 명목상으로는 다들 즐거워 보였지만 정작 황실 측에서 참석한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황녀 셀리아나와 예의상 얼굴을 비친 1황자 뿐이었다. 이루는 보이지 않았다. 파티라 하면 무조건 처음부터 끝까지 놀자판인 녀석이었는데 그 역시 동생의 배신에 상심이 큰 모양이다. 게다가 마물은 여전히 카덴 곳곳에서 꾸준히 출몰하고 있다. 마탑은 금지된 법령을 어긴 젤타 왕국의 마법사를 구속해서 심문 중이었으나 마법사들은 다들 진실을 입으로 꺼내기 전에 머리가 펑 터져 죽어버렸다고 한다. 아마 마족이 따로 각인을 새긴 모양이라고 그들은 시체의 흔적을 보고 추정했다. 살인멸구용 저주. 기밀을 말하기 전에 해당 자의 머리(정보)를 터뜨려 단숨에 죽이는, 그런 저주는 금지된 흑마법 중 하나였는데, 마법에 대한 정보가 카덴에서는 소실된 지 오래였기에 아마 인간이 건 것이 아니라 소환된 마족이 걸어둔 것이라고 추측만 할 뿐이었다.
젤타 왕국은 이번 패배로 꽤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승리한 제국에 있어서도 결코 이번의 전쟁은 득이 되는 일은 아니었다. 여제는 일부러 아들의 배신을 생각하지 않으려 했는지 평소보다 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나와 전쟁의 공로자들에게 밝은 표정으로 치하의 말을 했다.
나와 유렌에게는 금은보화, 레이몬드에게는 약속된 백작위 다른 공을 세운 장군들과 귀족들에게도 작위나 상을 수여했다. 도움을 준 엘프들에게는 감사장과, 원한다면 제국 내에서 당분간 지낼 수 있게 인간의 금화를 내려주었다. 진짜로 머무르려는 엘프들은 거의 없겠지만.
마지막으로 젤타 왕국에 잠입해서 마물의 정체를 캐고 전쟁의 승리에 큰 도움을 준 레이니안 이트리샤 대공과 미르헬 리온 후작. 둘에게 상금을 내리고 그녀는 대공에게는 휴가권, 외국의 귀족인 미르헬에게 제국 영주권과 제국의 귀족 권한을 수여했다. 그녀가 미르헬에게 또 다른 소원 한 가지를 말해 보라고 했을 때, 미르헬이 나와 결혼하고 싶다는 충격 선언을 한 것만 제외하면 평화롭게 축하말을 하며 끝날 파티였다.
나는 미르헬이 그런 얘기를 했다는 것에 놀라야 할 지, 그 때 통신구슬을 통해 봤던 그 미소녀가 사실은 흑의 대공이라는 사실에 놀라야 할 지 갈팡질팡했다. 부득이하게 여장을 했다고는 하지만……. 현실과의 갭이 너무 컸다. 대체 무슨 마법, 아니 무슨 기적을 일으킨 거지?
"꼭……, 그 소원이 아니면 안 되겠소?"
여제는 미르헬의 말에 난감하다는 듯 대답했다. 헐, 소원이 그런 거임 그냥 그딴거 안 들어줄거야! 하면 끝날 일이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미르가 아마도 소원을 빌미로 흑의 대공을 돕기로 약속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소원을 막 들어주기는 어려웠다. 뭐니뭐니해도 제국에서 중혼은 중범죄였다.
나는 저번에 귀족들 앞에서 대놓고 유렌에게 청혼받은 후, 현자를 주례로 세워 많은 하객들 앞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 명백한 유부녀였던 것이다. 제국 법적으로 일처다부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황제는 황제, 예외를 만들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여제는 미르가 세운 공이 매우 크다는 것을 감안해 그의 소원을 위해 제국법 중에 단 한 가지의 예외를 만들었다.
'시렌느 공작에게 한해 남편 둘을 허용하겠다. 다만 이미 혼인중에 있는 시렌느 공작과 위스피닌 백작 둘에게 전부 허락을 받을 경우에 한해.'
미르는 허락받을 줄 알았다는 듯 기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내 뒤에 서 있던 유렌은 나를 껴안으며 빙그레 웃었다.
"내가 거절하면 못 한다는 말이군요?"
"……!!"
충격받은 미르의 표정을 본 유렌은 싱긋 미르를 비웃는 듯 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거부해 봤자 소용없을 테고……. 남편으로서 일을 반반씩 나눠 시키는 것도 괜찮겠죠. 저는 허락할게요."
나는 그제서야 세상을 얻은 것 같은 표정을 짓는 미르에게 다시 냉수를 끼얹었다. 미르에게 도도하게 선언했다.
"진지하게 청혼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을 테다."
"사……."
"입으로만 하는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 많이 들어서 지겨워. 특히 미르에게선."
자신있게 사랑한다고 외치려 했지만 그는 내가 선수를 치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시도때도 없이 말을 안 들으며 나를 열심히 괴롭힌 벌이닷! 미르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코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어려운데."
울상을 지으며 고민하는 미르를 붙잡고 연단에서 내려온 흑의 대공은 미르에게 중요한 충고를 해 주었다.
"멋진 기사란 사랑하는 여성을 위한 청혼 계획을 짜는 데 10년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대는 아직 시간도 많으니 천천히, 그리고 철저하게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이 흔들릴 만한 멋진 계획을 세워 보십시오."
아니, 그거 미르한텐 무리야. 저 녀석은 어떤 의미에선 철저하게 계획적이지만, 막상 정말 좋아하는 일이라면 오히려 계획을 못 세우고 바로 실행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니까.
그나저나 언제 미르가 기사가 된 거지? 미르는 대공의 충고에 고맙다는 눈빛을 전하며 내게로 불쑥 다가왔다.
그는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내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왼손을 내밀었다.
한쪽 무릎도 아니고 둘 다 벌 받는 것처럼 꿇어앉다니, 무슨 생각이지? 설마 빌 생각? 의아한 내가 한 손을 내밀자 그는 내 손바닥에 살며시 키스를 했다. 단순히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정도의, 존경을 표시하는 인사법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내 손에 하는 키스라는 사실만으로도 그것은 특별했다. 그렇게 느꼈다. 미르는 키스가 끝난 내 손바닥을 바라보며 오른손 검지로 글씨를 썼다.
『사랑해』
그리고 내 발목을 붙잡았다. 마치 강아지가 주인님께 뭔가를 해 달라고 애원하는 듯한 시선이었지만 사실은 허락 안 해주면 놓치 않을 기세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결혼해 줄거야?'하고 묻는 그의 시선을 나는 피하지 못했다…….
조금 더 튕기고 괴롭혀서 프로포즈 한번 더 받아볼까 생각했는데 역시 안될 것 같다. 너무 귀엽잖아!! 나중에 더 괴롭혀 주면 줬지 여기서는 곤란하다. 나는 그의 프로포즈를 바로 승낙했다. 그나저나 공개적인 장소에서 청혼하는 건 그만둬 줬으면 하는데…….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꽤 따가웠다. 저잣거리의 한량들처럼 휘파람을 부는 녀석도 있고, 자기네들끼리 속닥거리는 일부 젊은이들도 있었다. 두 번째 남편……, 유례 없는 두 번째 남편이다. 심지어 남자 쪽에서 황제에게 졸라 얻어낸 예외법이다. 이제 제국 3대 미녀였던 시렌느 여공작에게 세기의 바람둥이라는 타이틀이 붙는 것도 시간 문제겠군. 남자 둘이나 제대로 눈멀게 한 마성의 여자라며 말이다.
그보다 나는 언제 한번 써 볼까 고민 중이던 내 방 서랍 속의 큰 개목걸이를 떠올렸다. 그리고 방금 미르의 강아지 같은 애절한 눈빛과 겹쳐졌다. 나는 유렌에게 눈짓을 했다. 미르는 뭣도 모르고 오늘 나도, 나도! 라며 내게 속삭였다.
분명 내가 산 개목걸이는 두 개였지?
시렌느 영지로 돌아간 후 청첩장을 날리기로 했다. 결혼식은 두 번째다 보니 조촐하게 진행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이번엔 둘만의 결혼식이 어떨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기에 소망인 것 같다. '그' 미르였다. 조촐 같은 건 미르 사전에 없다. 미르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를 위해 힘써 볼 생각같은 건 전혀 없어 보인다. 나는 어느새 받은 상금을 탈탈 털어 결혼식 준비를 한 미르에게 뭐라 할 말을 잃었다.
미르의 주머니에서 금화가 끝없이 나오는 걸 보아 그의 재산은 실로 엄청난 수준인 것 같지만, 세상에 두 번째 결혼식인데 이런 사치도 사치가 없다. 유렌과의 결혼식 역시 공작가의 위명에 걸맞게 충분히 호화로웠으나 시간이 짧게 끝났기에 그렇게 낭비는 아니었던 것이다.
"6박 7일 결혼식 코스?"
뭔 국가행사도 아니고 일주일 연속이야! 유렌이랑 결혼할 땐 신혼여행 일주일도 사치라고 생각해 왔는데!!
나는 미르를 조르고 협박해 3일로 줄였다. 처음 1,2일은 축하파티, 3일째 결혼식이다. 신혼여행은 장기 계획으로 미루고 미뤄 이번 유희가 끝나면 몇 개월 코스로 가자고 했다.
"이런 결혼식 코스를 소화해 낼 수 있겠어?"
"걱정 마! 나는 철갑드래곤이니깐!!"
그러나 결혼식은 미르 혼자 하는 게 아니었다. 내 드레스를 맞추는 데만 며칠이 넘게 걸렸다. 집 증축 계획으로 바쁜데 다시 내 시렌느 영지로 돌아갈 준비도 해야 한다. 더 최악인 것은, 제인이 이번 일을 끝으로 내 친부가 있는 시골로 내려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덕분에 출장을 끝내고 좀 한가하기 시작하려고 했던 나와 세르는 더욱 바빠졌다. 슈는 정든 정원과 작별하고 내가 보여준다는 나만의 정원에 기대감을 품었다. 당분간은 몇 년 간격으로 수도와 영지를 오간다고 하자 아주 이별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슈는 미소지었다.
제인에게 그간 정말 수고했다며 퇴직금을 두둑하게 챙겨주고 그를 배웅한 후 나는 공작가의 회계를 도울 사람을 모집해보려고 했으나, 요 몇년 새 엄청난 거부가 된 공작가의 회계를 아무나 고용할 수는 없었다. 인력난이란 진정 이럴 때 쓰는 말인 것 같다.
카딘이 생각보다 뛰어난 능력으로 집사를 도와 일을 해 나갔고, 머리가 좋은 라르슈도 이제 정말 공작가 일원이 되어 일을 돕겠다고 했기에 다행히 차질 없이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도착한 내 영지를 둘러보았다. 시골의 영지는 내가 없는 동안 거의 바뀌지 않은 것 같았다. 당분간은 여기서 한가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슈도 더 기운이 나는 것 같고.
========== 작품 후기 ==========
다음 편 새 챕터라 용량조절 G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