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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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내게 선물해 준 검이다. 진부하다고 생각할 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에 들었던 검.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는데 같은 검을 몇 개월 후 그녀의 손으로 선물받았을 때의 기분이 어땠는지 아는가.
뭐든 하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내 피에 맹세한 대로 나는 이 검을 사용해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조건 지킬 것이다. 유렌은 그런 생각을 끊임없이 하며 검을 휘둘렀다. 그런 행복한 추억이라도 떠올리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해서는 안 된다. 머리는 세리안. 팔은 유렌이다. 적이 어떻게 나올지 판단하는 것은 유렌이 아닌 세리안이다. 그는 검만 휘두르면 된다.
백의 기사단장은 말했다. 지키겠다고 생각해라. 그것만을 생각해라. 기사로서는 당연한 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검을 휘두를 수 없다. 그는 기사는 아니었지만 그 말이 결코 틀리지 않다는 것을 지금 몸소 느끼고 있었다.
시아의 생각이라도 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는 일찌감치 지쳐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버틸 수 있을까? 이미 이 쪽의 기사들은 반이 부상을 입었다. 원래도 적은 숫자였다. 대신 젤타 왕국 쪽은 인해전술이라고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많은 병사, 그것도 하나하나가 정예병들만 골라 내보내고 있었다. 이미 뮴뮴이 아니라 다른 곳은 뚫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없이 1초가 길게 느껴졌다.
유렌은 한동안 지평선에서 밀려오는 병사들을 넋 놓은 채 바라보았다. 푸른 색 갑옷……. 인다스 왕국의 지원군이다. 젤타 왕국 모래색 갑옷의 숫자도 그만큼 많다. 아마 지원군이 도착한 것 같았다. 게다가 지원군의 숫자를 감안하더라도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많은 인원수였다. 이 때를 기다리고 야금야금 유렌을 지치게 할 인원들만 딱 보내 놨구나. 오늘은 기어코 뚫고 들어올 셈이었다.
그는 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원수는 상관없다. 물러나지 말라고 머리가 판단한 이상 팔은 움직일 뿐. 그러나 그 순간 뮴뮴 성에서 신호탄이 울렸다. 퇴각하라는 신호였다.
“……어째서?”
하지만 생각할 것도 없이 적군이 마저 몰려오기 전에 그는 기진맥진한 기사들을 이끌고 성으로 돌아갔다. 고작 수백 남은 기사들은 엄청난 숫자의 적군을 보고 이미 희망이 없는 눈을 하고 있었다. 퇴각 명령이 내려왔으니 가긴 가겠지만, 뒷일이 걱정되긴 되는 모양이다.
그 순간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화살이 날아와 땅에 박혔다. 피투성이의 화살이다. 날아온 방향을 보니 적군들이 밀려오는 바로 뒤편이었다. 인간 몇의 머리를 관통하고 여기까지 날아왔는지 모른다.
그는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화살을 바라보다가 급히 열린 성문으로 퇴각했다. 그리고 지친 몸에도 아랑곳않고 세리안을 찾아 뮴뮴 성의 꼭대기층으로 급히 뛰어올라갔다.
세리안은 유렌의 표정을 보고 간단히 한 마디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엘프 지원군이다.”
“이렇게 빨리……?”
세리안은 미묘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옆에 놓여진 통신구를 톡톡 치며 그에게 말했다.
“방금 중앙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세이시아 시렌느 공작.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엘프 대표의 편지를 루페닌 숲 엘프 로드에게 전달한 후 지원병과 함께 최대한 빨리 제국으로 돌아와서 적군의 뒤를 칠 것. 수행 완료. 엘프 숫자는 수백이다. 준비 역시 철저해. 저 정도 인간의 군사라면 비록 정예병이라고 해도 간단히 제압 가능할 거야.”
엘프 마을로 가?! 나한테도 알리지 않고?!!! 유렌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세리안은 팔짱을 끼고 그런 그에게 말했다.
“이런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은 나도 몰랐지. 어떻게 보면 제국의 기밀은 정말 철저하게 이동되고 있단 말야. 시아는……. 엘프를 만났겠지?”
“그럼 저 안에 시아가 있다는 겁니까, 지금?”
“아마 제일 뒤쪽에 안전하게 있겠지. 엘프들이 자기 손을 더럽힐지언정 시아한테 싸움을 시킬 리가 있나. 걱정 마.”
유렌은 말하다 말고 급히 아래로 내려가려다가, 다시 후다닥 올라와서 거울을 보았다. 먼지투성이에 피투성이다. 전쟁터에서 제대로 씻지도 못했으니 옷 역시 거지꼴이나 다름없다. 피를 씻을까 말까 소녀답게 갈팡질팡하는 그에게 세리안이 그냥 여기서 기다려도 시아는 금방 올 거라고 말했지만 그는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급히 옷을 갈아입고 말을 탄 채 전장을 가로질렀다. 엘프들의 화살과 온갖 마법이 난무하는 주위를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렸다. 엘프들은 한 남자가 말을 탄 채 이쪽으로 빠르게 달려오자 적군인 줄 알고 활을 겨누었지만 그가 제국의 문양이 달린 상의를 입고 있는 것을 보고는 길을 벌려주었다.
나는 엘프들의 뒤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급로를 끊고 이 쪽의 주둔지는 전부 습격해 쓸어버렸기에 눈 앞의 적군만 처리하면 여긴 안전하다. 엘릭은 먼저 뮴뮴 성에 가 봐야겠다며 급히 뛰어갔다. 나는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 그를 배웅하다가 엘프들의 모습을 보고 안절부절 못했다. 하나라도 다치거나 죽으면 안 되는데……. 인간의 죽음과 달리 엘프 하나의 죽음은 자연계에서 큰 손실이다. 불안해하는 내 표정에 슈는 나를 껴안고서는 안심하라는 듯 키스해주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요. 지원한 엘프들은 다들 정령이 붙어있어요. 특별히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고위 실력자가 아닌 이상 단순한 검이나 화살에 죽지 않아요. 그리고 나도 도울 테니까.”
슈는 말에서 멀리 떨어진 후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긴 막대기를 꺼냈다. 구불거리는 목재로 만든 굵고 거대한 막대였는데, 그 물건이 대체 뭔지 한참을 쳐다보던 나는 슈가 질긴 끈을 꺼내 그 끝에 단단히 묶기 시작하자 그게 바로 엘프의 강력한 무기라는 대궁(大弓)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건 위험하니까 멀리 서 계세요.”
그는 끈을 몇 번 손에 휘감은 후 다른 쪽 활의 끝에 걸고 팔에 힘껏 힘을 가해 잡아당겼다. 아무리 탄력 있는 소재로 만들어진 활이라지만 저렇게 굵고 긴데 과연 아무런 기계 없이 구부릴 수 있을까 의아해했던 나는 슈의 넓은 어깨 뼈대와 단단하고 긴 팔뚝을 보고서 입을 다물었다. 단순히 팔 힘만으로 그는 자기 키만 한 대궁의 시위를 맸다. 평소에는 별로 드러나지 않던 팔의 근육이 단단하게 부풀어오르며 힘줄이 솟아올랐다. 입을 손으로 가리고 꺄아 하고 구경하고 있던 나는 그가 다른 화살보다 훨씬 긴 화살을 꺼내는 것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쏠 생각인가 보다.
“이렇게 멀리 있는데?”
바닥에 고정용 막대를 깊숙이 꽂은 슈는 대궁을 가로로 눕힌 채 시위를 잡아당겼다. 잡아당기는 것도 보통 힘이 필요한 게 아닐 텐데. 나는 엘프들이 왜 다들 팔이 가느다란 듯 싶다가도 길고 단단한 건지 대충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엘프가 사냥에 이용하는 활은 작고 가늘었지만 지금 전투용으로 사용하는 활은 다들 엄청나게 컸다. 다른 엘프의 화살도 인간의 화살보다 훨씬 멀리 나갔으니 슈의 정말 커다란 활은 얼마나 멀리까지 닿을지 짐작되지도 않았다.
피잉, 하는 작고 날카로운 소리가 아니라 마치 화약이 터지는 것 같은 거대한 소리가 났다. 조준 역시 정확해서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빗나가 같은 편을 죽일 것 같은 거대한 화살은 적군 수십의 투구를 완벽히 줄줄이 관통하고 바닥에 박혔다. 힘과 정확도, 어디 하나 모자란 데가 없었다.
“슈 멋지다…….”
그는 수줍은 듯이 나를 바라보면서 내 칭찬에 얼굴을 붉혔다. 그런 주제에 과감히 나에게 대가를 요구해 왔다.
“그럼 이 전투가 끝나고, ……저랑 (삐--), (삐---) 해주시면 안 돼요?”
아, 안 될 건 없지만 주변 엘프 다 듣겠다. 엘프는 귀가 엄청 좋은 것 같은데. 역시 소리가 들렸는지 히죽 웃으며 다른 엘프가 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입 모양을 보니 ‘슐츠, 적극적이네,’ 어쩌니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슈는 자랑스럽게 플로라 님 내꺼, 라며 그 엘프에게 대꾸했다. 먼 거리에서도 일상 대화가 가능하다니, 신기하다.
갑자기 엘프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여기로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눈을 비비며 자세히 보았지만 아직은 점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슈는 활을 쏘다 말고 시위를 거두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저거 제국의 문양 맞죠? 은발……? 아니, 약간 밝은 백금발에 진한 살색. 우와, 여름에 일광욕 좀 했겠는데요? 엄청 화끈해 보인다. 플로라 님도 저런 피부색이 섹시하다고 생각해요?”
슈의 부러움 담긴 감탄에 나는 생각했다. 태닝한 피부빛깔이 무조건 섹시한 건 아니지. 누가 뭐래도 내가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제일 섹시한 피부색이라면 역시 유렌……, 잠깐만. 누구라고?
슈는 내 표정을 보더니 다시 그 멀리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는 사람이에요?”
내 눈에는 잘 안 보인단 말야. 대신 눈이 되어 줄 다른 식물도 이 근처에는 없고. 나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가늘게 뜬 눈 사이로 점점 그 모습이 커졌다. 그의 얼굴을 알아챈 순간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뭐라 말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치 가슴이 턱 막힌 것 같다. 너무 보고 싶은 것을 봤을 때 차마 말하지 못하는 그런 기분과도 비슷했다.
유렌이 내 바로 곁까지 달려와서 나를 낚듯이 채어 안았을 때에도.
========== 작품 후기 ==========
솔직히 자꾸 등에 화살 꼽고 튀고 화살 꼽고 튀고 하는 전법이 자잘하게 짜증나서 궁수는 개인적으로 싫어했습니다... 활 쏠때마다 소모품인 화살을 써야 한다는 것도 별로 맘에 안들었구요.
근데 이렇게 보니 활 쏘는 남자도 매력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지는 이번 신청기간 끝나면 더 이상 신청 안받을 확률이 매우 높구요, 이번 4권이 완결이구요
이유는 블로그에 있습니다 흐규흐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