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여왕-198화 (198/226)

<-- 9. 전쟁 -->

***

마탑을 통해 엘프 숫자만큼의 말을 구하는 것은 의외로 쉬웠다. 이대로 최전선이라는 뮴뮴까지 달리면 된다. 나를 자신의 말 앞에 태운 슈는 내가 에라렌에 대한 얘기를 꺼냈을 때, 생각보다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어쩌면 세이지보다 더욱 더. 그리고 내게 반지를 받아서는 중지에 끼웠다. 너무 작아서 들어갈까 걱정스러웠던 반지가 손에 끼우니 마치 고무반지처럼 늘어났다. 신기해하는 내게 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이래봬도 로드가 되기 위한 시험을 통과했으니까요. 한 세대에 한둘 정도 태어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저일 뿐이에요. 그 엘프라면 반지를 낄 수 있게 되어 있어요.”

엘프 중에 몇 퍼센트의 천재라는데, 너무 겸손한 거 아냐? 슈는 가만히 반지를 손에 넣어 쥐며 말했다.

“저는 로드의 자격이 없어요.”

너무 극단적인 비하였다. 내가 보기에는 그는 로드로서의 자질이 충분했다. 식물을 모시는 능력과 정령과의 친화도, 타인과의 관계도 뛰어났다. 그런데 어째서?

“엘프로 태어났다면 응당 집단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가져야만 하는데 저는 아무리 반지가 절 로드로 선택했다고 해도, 플로라 님과 함께 있지 못하게 된다면 로드의 자리조차도 버리고 플로라 님을 따라갈 거에요. 아버지도, 지금까지 자라 왔던 마을도 버리고서. ……책임감이라고는 하나도 없죠?”

나는 멍하니 슈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 리스피아 때도 느꼈지만, 엘프는 너무 투명해서 오히려 더 알기 힘들다. 나는 자괴감과 슬픔, 혼란, 그리고 기쁨과 애정이 뒤섞인 그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 말 뿐이다.

“같이 있어 줄게.”

“……정말?”

“네가 로드로 마을에 붙잡혀 있는 동안 나도 따라가서 네 옆에 있어 줄게.”

정령이다. 게다가 식물의 정령왕이다. 대체 뭐가 어렵겠는가? 계약을 하게 되면 평생을 함께 할 수도 있는 것을.

슈는 덥석 나에게 안겨왔다. 그렇게 큰 몸으로 안겨들면 당연히 내가 붙잡힌 꼴이 되어 버린다. 그는 몽롱한 눈으로 내게 말했다. 낮고 달콤하지만 의외로 작고 귀여운 목소리다.

“저……, 지금이라면 귀 만져져도 될 것 같아요.”

“그래, 그래.”

만져달라는 의미지? 버섯이나 다른 곳은 얼마든지 직접적으로 얘기하면서 왜 귀를 만져달라는 얘기는 아직 못 하는지 모르겠네. 나는 널찍한 그의 등을 살살 쓰다듬으며 귀를 살짝 손으로 문질렀다. 으응~, 하며 그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그나저나 지금 말 위인데? 떨어지면 어떡해.

귀를 만지면 스위치가 들어가버려 곤란하다. 하지만 설마 달리는 말 위에서 그런 것을 하려고 할 것이라곤 생각을 못 했다. 부럽다는 듯 손가락 빨며 이 쪽을 넘겨보는 다른 엘프들에게 보란 듯이 슈는 애원해왔다.

“(삐-) 해요, 응? 말 위에서도 할 수 있어요. 저 쪽으로 가서? 네?”

그는 이미 거길 딱딱하게 세우고 있었다. 귀에 손 조금 댔더니……. 갈수록 귀 쪽의 감도가 올라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그는 굉장히 급한 모양이다. 나는 가만히 그의 다리 사이를 만지작거리다가 승낙했다. 엘프는 균형감각이 좋은데다가 타고난 명기수였기에 말 위에서 쉽게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낙마할 걱정은 없었지만…….

“대신 무조건 맨 뒤에서.”

맨 앞에는 엘릭이 있다. 같은 엘프면 모를까 엘릭에게 들키면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랐다. 슈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치마 밑으로 손을 가져갔다.

***

렌과 헬라는 담을 넘는데 온갖 방법을 다 시도해 보고서야 무사히 젤타 왕궁 안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젤타 왕궁 지도를 알지 못하니 이제부터가 진짜 고생 시작이다. 렌은 헬라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특별히 수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은 없습니까?”

“글쎄……. 없는 것 같은데. 라기보다 너도 못 느끼는 걸 내가 느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뭔가 마법이라도 써 봐.”

왕궁이라면 기본적으로 마법 방지 조치가 취해져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정도만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하면 간단히 침입당하거나 암살당해 버리니까 당연하다. 그래서 렌은 따로 백마법이 걸린 아티팩트를 구해 왔다. 백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는 흔치 않다. 그래서 구하기가 힘들었지만 마족의 기척을 찾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누가 마족과 계약했는지보다는 우선 카덴 곳곳에서 일어나는 마물 소환 사건이 젤타 왕국에서 주도되었다는 증거가 필요합니다. 하고 싶다고 해서 혼자서 덥석 벌일 수 있을 만큼 마족의 소환은 간단하지 않으니까요. 국가적으로 흑마법을 장려하고 흑마법사를 키워 온 금지된 실험실도 있을 겁니다. 아마 젤타 혼자서 전부 했을 리는 없겠지만, 오히려 타국의 도움을 받았을 확률이 높지만. 중요한 증거는 이 곳에 있을 겁니다. 오래 전부터 준비해 온 일인 만큼 그 증거를 완전히 없애기도 쉽지 않을 테니까요. 누가 관여되었든간에 증거만 찾아내면 깔끔하게 뒤집어 씌울 수 있습니다.”

그건 깔끔한 게 아니잖아. 뒤집어 씌운다니…….

“이미 우리 제국의 황자 하나와 일부 귀족도 배신한 상태입니다. 제국의 정보나 재정 상태, 군사력에 대해 틈날 때마다 야금야금 빼내 갔겠죠. 그리고 지금을 전쟁 시기로 잡은 겁니다. 우리로서는 제일 나쁜 타이밍이에요. 레이나(여제)가 자기 가족이라고 해서 국가 기밀을 누군가에게 막 흘리기라도 했었더라면 지금쯤 이보다 더 큰일이 나도 났을 겁니다. 황제는 가족조차 믿어서는 안 되니까.

그들은 배신자들과 꽤 오랫동안 접촉하며 나라를 배신하면 더한 것을 주겠다며 회유해 왔을 겁니다. 아크샤 왕국도 젤타 왕국과 뒤에서 손을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든 발을 뺄 수 있도록 자기 쪽에는 증거를 거의 남기지 않았을 겁니다. 제국이 젤타 왕국에서 증거를 찾아낸다면 언제든 손을 끊고 제국 편으로 붙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속았을 뿐이다’고 지껄이면서요. 그게 정치입니다. 애초에 이 이상 얻을 게 없다면 손을 떼는 게 당연하지요.”

“비겁하다…….”

인간의 정치란 이리도 비겁한가. 헬라는 자기는 더한 짓을 했다는 사실을 머리 안에서 지워버리기라도 한 듯 무척이나 더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렌은 의아하다는 듯 그에게 물었다.

“그대도 예전에 왕이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

급히 헬라는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젤타와 아크샤 왕국은 비겁한 짓이긴 하지만 결국 단지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정치하는 것 뿐이고, 그가 한 짓은 이해득실 따위를 넘어서서 그보다 더한 일이었다는 것을 헬라 역시 알고는 있었다.

“그, 그보다 저기 봐! 누가 온다!”

렌은 그가 말을 돌리는 것을 귀신같이 알고 뭐라 말하려 했지만 곧 미르가 임기응변으로 가리킨 인물의 행동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지?”

“쉿.”

자기가 말해 놓고는 오히려 누구냐고 반문하는 헬라의 입을 렌이 막았다. 둘은 숨을 죽이고 그 자의 행동을 관찰했다.

옷차림을 보니 배회 중인 경비병이 아닌 틀림없는 귀족이다. 게다가 처음엔 혼자서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는 줄 알았는데, 그가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뒤로 손짓을 했다.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은 붉은 마법사 로브를 입은 자들이었다.

젤타의 왕정 마법사는 붉은 색의 로브에 왕실의 문양이 그려진 금속 장식이 달려 있다. 그 마법사는 아마 왕정 마법사로 변장하고는 있지만…….

렌은 중얼거렸다. 흑마법사다.

레이니안도 미르도 카덴에서 흔히 보기 힘든 고위 마법을 구사할 수 있다. 미르는 드래곤이니 당연히 인간의 범위를 넘어선 마법을 쓸 수 있겠고, 현재 생존중인 카덴 최강의 마검사라는 레이니안 역시 스스로는 그다지 마법적 재능이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섬세한 조정이 필요한 장거리 워프나 정신계 마법, 진을 사용하는 마법에 무척 서투를 뿐 마나 자체는 8클래스에 육박하고 있다. 카덴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라는 마탑의 수장, 세일런보다 마법 실력이 겨우 두어 단계 낮을 뿐이고 마나량은 오히려 약간 더 많을지도 모른다.

아크샤 왕국의 7클래스짜리 궁정 마법사만 주의한다면 아마 마법 때문에 둘이 밀릴 일은 없을 것이다. 설마 아크샤 왕국도 자기 나라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를 이런 위험부담 높은 일에 보내진 않았겠지. 그 마법사는 텔레포트 게이트에 붙들려서 매일 텔레포트 마법만 써 주고 있을 테니까.

그 정체불명의 귀족은 역시 흑마법사를 데리고 그 뒤의 일꾼들을 줄줄이 데려왔다. 아랫사람들에게도 숨기기 위해 일부러 경비가 없는 시간과 장소를 고른 탓이다. 일꾼들은 수상한 상자를 질질 끌고 있었다. 그 뒤로 천이 덮인 수레가 끌려왔다. 사람의 손발이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시체, 혹은 진짜로 살아있는 사람이다. 헬라는 먼저 전음 마법을 이용해 렌에게 말했다.

〈마나의 흐름을 보니 살아있어.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기절시켰거나 재웠겠지. 아마 대량으로 유통되는 인간 노예일걸. 그 정도의 마물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산제물이 한둘 필요한 게 아니니까.〉

〈그렇군요. 일단 모습을 숨기고 따라가 봅시다.〉

둘 다 어느 정도는 금지된 마법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흑마법 모두가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고위의 흑마법 대부분은 마탑 자체에서 위험하다고 판단되어 사용하는 사람을 엄격히 처벌하고 있었다. 자연을 상대로 한 정령마법, 고도의 학문적 탐구가 가능한 원소마법이나 생명을 살릴 수도 있는 백마법과는 달리 흑마법은 이용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용자의 수명을 깎아먹고 또한 산 제물을 고문하고 죽여서 얻어내는 마이너스적 에너지를 이용하는 마법도 많기 때문이다. 위험하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미풍양속에 저해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마 마물 소환을 위한 산 제물이겠지. 동물을 이용해도 되지만 동물보다 산 사람이 훨씬 효과도 좋고 구하기도 쉽다. 적어도 노예 거래가 가능한 아크샤 왕국과 젤타 왕국에서는 말이다.

그들은 노예가 대량으로 들어와도 별 관심 없고 행방을 뒤늦게 찾지도 않으니까 말야.

살그머니 그들을 쫓아서 아마 궁정 마법사의 상주탑으로 추정되는 어떤 건물 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위층이 아니라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좁고 긴 외길이고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렌은 약간 망설였지만 스릴돋는 표정의 헬라는 빨리 가 보자며 렌을 질질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 행운의 신이 그들을 도운 건지,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던 증거가 그 아래에 널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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